주일설교

고린도전서21강-세상지혜(고전3;18-20)14122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1. 16. 17:53

2014-12-28 12:55:59 조회 : 736         
   세상 지혜 141228 이름 : 이근호   

세상 지혜(고린도전서 3: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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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12-28 13:37 
세상 지혜

2014년 12월 28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3:18-20

(3:18)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3:19)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3:20)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성경에 나와 있는 지혜가 단순히 지식이 아닙니다. 우주의 운명과 관련되어 있는 지혜입니다. 예를 들면,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지혜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다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단순히 노아 개인에 관한 사항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 세상에서의 지혜란, 추가하면 추가할수록 더욱더 ‘지혜롭다’고 평을 받는 그런 지혜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보면, 차라리 ‘미련하라’고 하십니다. 이 ‘미련하라’는 것은 세상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가 상호 교류 가능한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대치되는 성질이 있다는 겁니다. 추가하거나 섞일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내치게 되는 속성을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구원받고자 하는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이러한 지시 앞에 난감하기 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혜를 모르면 멸망당하게 되고, 지혜를 알면, “너 왜 미련하지 못해? 내가 미련하라고 했잖아!”라는 식으로 질타당할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해결책은 이러합니다. 우리 자신이 추구하는 지혜가 우리 자신을 살려내려는 의도로 움직이는 것이 문제거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즉 ‘세상 지혜’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면 됩니다. 그것은 바로 소위 ‘기도 응답’이라는 식으로 통용됩니다. 사람이 기도하기 전에 먼저 “이 정도가 되어야 응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라고 본인이 단정 짓고 기도에 임하게 됩니다. 그러니 아무리 기도를 열심히 해도, 자신이 노리는 그 응답 상황만을 기대하면서 하는 기도일 뿐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세상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이런 세상 지혜로 인하여 거부당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신 후에, 어느 무덤에 안장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십자가 달리신 장소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장소가 다르는 사실의 중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 사건일 경우, 누구나 그 사형집행 당하고 있는 그 현실을 이해 못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죽을 사형수가 실제로 그들 눈 앞에 보이고 있고 그 일을 곧 ‘사형집행’에 관한 일인지를 다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활은 당사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냥 ‘빈 무덤’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잘 있는지 보고 싶어 했던 3명의 여인들은, 빈 무덤을 보고 무척 실망했고, 심지어 울기까지 했습니다.(요한복음 20:13) 이 모습을 생각하면서 요즈음 성도들은 무라고 평하겠습니까? “어지간히 믿음이 없기는 없다. 예수님이 그토록 ‘내가 죽은 지 사흘만에 살아나리라’고 연급을 했건만 왜 그 사실을 잊느냐”고 질타하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부활에 대한 지식이 전부라면 그 당시 제자들이나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도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는, 십자가 지신 분과 무덤에 안장된 분의 연속성을 고집하기에 부활하셔서 자기 곁에 앉아계신 분을 예수님으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전에 알던 그분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곧 인간의 지혜를 가지고서는 현실 활동하시는 예수님 당사자를 붙잡아둘 수 없다는 말입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빈 무덤’으로 활동하십니다. 곧 ‘없음’입니다. 요한일서 4:12에, “아무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라고 단정지어놓으셨습니다. 사람들의 지혜란 눈에 보이는 식으로 어떻게 만들어 붙잡아 두기 위해 소위 ‘기도의 응답’이라는 것에다 신앙의 승부를 겁니다.

‘기도의 응답’ 만들어내기 위해서 온갖 성경 구절을 가지고 짜깁기 하게 됩니다. 이는 곧 인간이 자신을 의로운 자로 만들어내기 위해 자기를 둘러친 세계관을 언어로 짜깁기 하는 바가 됩니다. 안드레센 동화에 ‘백조 왕자’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11명의 왕자와 1명의 공주가 있었는데 새 엄마가 왕비로 들어서고부터 전처 자식들이 미워 모두 마법을 걸어놓았습니다.
 
왕자들은 낮에서 백조가 되고 밤에만 사람이 됩니다. 공주는 거지가 되어 숲속에서 살게 됩니다. 어느 날 바닷가로 나온 공주는 백조가 된 오빠들을 만나게 그물로 태워져 어느 섬으로 들어갑니다. 거기서 요정을 만나, 마법에서 벗어날 비책을 얻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공주가 오빠를 위하 쇄기풀로 옷을 짜서 백조에게 던지면 되는 겁니다.

그 대신 공주는 일체 말을 해서는 아니됩니다. 공주가 다시 왕궁에 들어왔으나 말을 하지 않은 고로 주교로부터 악마 들린 여자로 취급받아 화형장에 가서 불태워지게 됩니다. 하지만 공주는 자기 변명하지 않고 계속 손을 부지런하게 놀려서 오빠의 옷을 짭니다. 마지막 화형대에 불은 짚어지고 불이 타올라오는데 드디어 공주는 11벌의 옷을 다 지어서 마치 찾아온 11마리의 백조에 던지니 백조는 왕자들이 되어 진실을 다 밝혀졌습니다.

이 동화에서 공주가 쇄기풀로 옷을 직조한다는 것은, 자신과 오빠들을 둘러치는 새로운 세계관이, 마법으로 둘러친 저주의 세계관을 해소하게 됩니다. 이처럼 인간들은 자신이 몰두하고 전문분야에서 자기들끼리만 통용되는 언어로 자신의 생계가 보장되는 세계관을 직조(織造)하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 지혜란 곧 인간들이 생존보장되는 현실구조를 두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런 인간 세계 안에서는, 꼭 죄가 더 있는 자가 공동체의 번영과 안녕을 위해 희생물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지혜의 세계에서는 죄인을 잡는 것이 아닙니다. 아사야 53:5-6에서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 살겠다고 현실을 직조하는 인간들에게 있어 하나님께서는 죄없으신 분을 죄 있는 세상 속에서 희생시킨 사실을 누가 알아먹을 수 있겠습니까! 성도의 남은 삶이란 바로 이 희생을 증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지혜로서 날마다 자신도 산 제물로 되도록 만들어진 운명을 산다고 사실을 현실 속에서 고백하는 겁니다.

자신이 자기 인생을 위해 지키거나 복수할 것이 아니라 주님이 생각해놓은 그 성도다움을 위해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면서 고정된 주체상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미련함에서 오는 자유함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4-12-29 20:46 
21강-고전 3장 18-20(세상 지혜)14122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3장 18-20절입니다. 신약성경 266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3:18-20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성경의 지혜라는 것은 안 지키면, 이걸 모르게 되면 현실적으로 재앙이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보통 세상의 지식이라는 것은 좀 알면 “유식하네.”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똑똑하네, 많이 배웠네, 그걸로 끝나지만 성경에서 노아의 방주의 의미를 모른다? 이것은 개개인의 아이큐 문제가 아니고 학교를 어디까지 나왔나 하는 문제가 아니라 세상이 뒤집어집니다. 세상이 뒤집어져요. 이 지혜라는 것이 사적으로 얼마나 똑똑하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 지혜에요. 세상의 현실과 관련되어 있는 지혜가 되는 겁니다.



현대는 전공분야가 다르면 각자의 지식이 달라요. 그래서 젊을 때는 세상 모든 것을 하고 싶어 하지만 막상 직장을 가지게 되고 전문직에 빠져버리면 동시에 자기 전문분야 아닌 것에는 무식한 사람이 되고 말아요. 고3때는 수능점수 잘 나올 정도로 뭐든지 잘 알았는데 한 3, 40대넘어가면 자기 분야 외에는 바보가 되어버립니다. 은행퇴직하고 나면 바보가 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할 것이 없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그것에 몰입하다 보니까 자기가 아는 지혜가 자기와 관련되어 있지 세상 전체의 변화와는 상관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지혜라는 이것은 개인이 그만큼 똑똑하다는 경쟁적인 원리가 아니고 세상 자체를 운영하는 운영체계, 전체를 움직이는 운영체제에서 소외되면 너는 망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서 오해하기를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라는 식으로 질문을 하는데 그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질문이에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아는가?’ 하게 되면 그 지식은 내 소유가 되고 사적인 것이 됩니다.



같이 성경공부를 하다 보면 제가 삼위일체에 대해서 좋지 않게 생각하니까 “세상에, 삼위일체를 이렇게 부정적으로 보시는 목사님은 처음 봤습니다.” 하는 거예요. 천하 이단이라도 이단 안 되려면 삼위일체만 쥐고 있으면 정통되거든요. 그런데 삼위일체를 공격하다니, 하고 의아해 하시는데 성경 내용은 삼위일체의 지식을 확보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나름대로 삼위일체에 관한 공부도 하고 책도 냈습니다. <기독교와 복음의 차이>라는 책에 보면 삼위일체에 대한 내용이 나와 있어요.



그런데 왜 삼위일체가 잘못된 이론이냐 하면,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가 아니고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가지고 자기 지혜를 만들어 가느냐.’ 하는 것이 성경의 지혜입니다. 우리가 알아 챙기는 것이 지혜가 아니고, 이것을 알아 챙기면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자기 일에, 자기 지혜 만드는데 우리를 강제로 집어넣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아느냐 하는 겁니다. 지혜를 내 것으로 소유하지 마시고. 지혜는 소유하면 안돼요.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 가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 보면 보는 사람들은 다 의아해 할 거예요. ‘어렵다. 성경이 너무 어렵다.’ 탈무드 같은데 보면 “하나님의 지식을 배워라.” “예, 알겠습니다.” 하면 간단한 문제를 가지고 본문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네가 지혜로우려면 차라리 미련한 자가 되어라.” 반대로 이야기를 해 버려요. “지혜를 추구하라. 지혜를 늘여라. 풍성하게 해라. 성경공부를 더 많이 해라. 그래서 아는 것이 더 많으면 하나님께서 상급을 주실 것이고 하늘나라 편안하게 갈 것이다.” 이렇게 하면 좋겠는데 도리어 우리가 추구하는 것과 반대되도록 “미련한자가 되어라.” 하니까 정말 어려워요. 성경 누가 쉽다고 했습니까? 이런 대목이 나오는데요.



왜 미련하라는 말이 어렵냐 하면, 미련한 것을 공부하면 그게 미련한 것이 아니고 미련한 것도 아는 지혜가 되니까 그게 어렵다니까요. 나도 지금 무슨 이야기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미련하게 되라고 하니 미련한 그것마저 지혜로 알아버리면 미련한 것까지 알아 챙기는 지혜로운 자가 되니 주님께서 미련하라고 한 그 요구에 부합되지 않는 겁니다. 일이 틀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보고 도대체 어쩌라는 말입니까? 세상은 지혜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그 만들어진 지혜를 알고자 한다. 네가 미련한 자가 되어라.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러면 세상 지혜로 만든 것은 몰라도 된다. ‘그러면 모르면 되지.’ 하게 되면 지혜를 모른다고 또 닦달을 내고. 지혜를 안다고 하면 또 미련한자가 되라고 닦달을 내고. 우리보고 뭘 어쩌란 말입니까?



왜 성경이 이렇게 어려우냐 하면, 인간은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상 만드신 원리에 접근금지가 되어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갈 생각을 아무리 해도 바늘구멍 속에 들어가는 방법은 없어요. 제자들이 얼마나 걱정되겠습니까? 제자들은 요즘같이 각자 자기 일을 가지고 가끔 교회 나오는 이런 식이 아니에요. 제자들은 올인 했습니다. 카지노 같으면 칩이고 뭐고 심지어 자기 마누라까지 다 걸었어요. 나는 예수 외에는 없다고 했는데, 내 쪽에서 그 정도로 헌신했으면 주께서 받아주시면 좋겠는데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바쳐도 안 된다는 거예요. 지금 이 시점에 와서 어쩌라는 말입니까?



처음 부를 때부터 “조심해라. 어지간하면 나를 따라오지 마라.” 이렇게 했으면 안 따라왔는데 모든 것을 올인 한 이 판국에 이제 와서 “너 그래도 안 되거든!” 그러면 우리보고 어쩌라고요? 낙타가 바늘구멍 못 들어가는 거예요. 제자들이 걱정이 되어서 “그러면 어떻게 하면 할 수가 있습니까?” 하고 정말 진지하게, 농담이 아니고 진지하게 물었어요. 자기 인생이 걸린 문제니까 정말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너희들은 못해도 하나님은 하신다.”는 겁니다. 순간이동 했어요? 낙타는 그대로 있고 바늘구멍도 그대로 있는데 어떻게 했는데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해서 있다는 말이지요.



놀라운 사실은 낙타는 그래도 낙타라는 사실입니다. 낙타가 이만한 낙타가 된 것이 아니고 큼직한 낙타, 남들 보기에 도저히 아무도 바늘구멍 통과하지 못했다는 것이 확정된 낙타로 살아줘야 비로소 그 사람을 통해서 “아하, 네가 한 것이 아니구나. 다른 분이 너를 구원했구나.” 하고 주님의 능력을 증거 할 수 있는 증인이 되는 겁니다. 낙타 이야기가 오늘 왜 또 나오느냐 하면, 미련한자가 되라는 이 바늘구멍을 어떻게 통과할 것인가의 그 문제가 다시 나왔어요. 피해갈 수가 없습니다. 이것 빼고 쉬운 것 한다고, 핵심문제 빼놓고 다른 것 가지고 실천에 옮기자는 헛소리를 할 필요가 없거든요. 중요한 문제에요.



그러면 힌트가 있어요. 세상 지혜와 차이가 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 현실을 만드는 운영체계는 세상지혜와 차이가 나요. 세상 지혜라는 것이 하나의 포인트가 되는 거예요. 세상 지혜가 아닌 것이 지혜고 세상 지혜에 머물러 있으면 이것은 지혜를 모르는 것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세상 지혜가 뭐냐? 세상 지혜를 복잡하게 이야기할 것 없이 간단하게 하면 ‘기도응답’입니다. 이것이 세상 지혜에요. 여러분이 명절에 집안끼리 모이면 각자 다른 교회 많이 다니잖아요. 보통은 1박 2일, 할 일 없는 백수들이 2박 3일 지내지요. 보통 1박 하고, 당일에 가서 친정 간다고 빠지는 사람은 무박이 되겠지요. 절하고 빨리 빠져야 되니까.



어쨌든 집안끼리 모였을 때 각자 자기 교회 이야기 합니다. 그 이야기가 세상 지혜에요. 그 이야기의 주된 내용이 뭐냐 하면, 우리교회 누가, 또는 자기가 기도했는데 응답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세상 지혜에요. 기도응답이라는 것이 교회에서 얼마나 존경받는 현상입니까? 그걸 못 받아서 환장했잖아요. 왜 기도응답이 세상 지혜가 되느냐 하면, 내가 기도한 것과 응답을 연결시킬 때 진짜 기도응답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를 판정내리는 그 출발점이 내가 기대하고 익히 아는 내용과 맞춰봐서 응답이라고 단정을 짓는 겁니다.



묘사하는 게 더 어려워요. 기도할 때 이 정도는 돼야 응답이라고 미리 짐작을 하면서 시작을 하거든요. 그게 아다리가 딱 될 때 응답받았다고 결정내리는 겁니다. 그러면 그 원천이 어디인가? 내가 은근히 노리고 있는 것에서 나왔는데 내가 뭘 평소에 노리고 있느냐 하는 것은 평소에 자기가 자기 위주로 ‘나는 이 세상에서 내가 잘돼야 돼.’라는 데서 뽑혀 나온 것들을 기도하게 되고 그것에 맞췄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하게 되면 그것이 기도응답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기도응답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사실은 주님의 뜻도 아니고 ‘나 좀 편하고 나 좀 잘되자.’ 그것, 자기 욕망의 방출이고 표현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지혜는 뭐냐? 하나님의 지혜는 “나는 나다.”입니다. 내가 곧 진리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지혜가 되는 겁니다. ‘너 말고 나다.’ 그 말이지요. 세상은 너의 기도의 응답대로 되어가는 것이 아니고 나 예수님의 기도의 응답대로 되어가는 이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목사님, 도치나 개치나 그게 같은 것 아닙니까?” 그게 같을 것 같으면 오늘 본문에서 미련하다는 말이 필요가 없다니까요. “네가 기도응답을 은근히 노리지? 미련한자가 되어라.” 이렇게 이야기한다고요. “네가 하나님을 찾고, 신을 찾고, 교회를 찾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위함이지? 그렇다면 너는 그 점에 대해서 무지하고 미련해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지혜는 느끼지를 못한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어제 뉴스에 이런 게 나왔어요. 충남 서산의 감리교에서 청소년 모아놓고 실제 제사를 벌였어요. 10초정도의 동영상이 나오는데 허연 제사장 복장을 하고 염소를 끌고 와서 청소년들이 보는 앞에서 난도질을 친 거예요. 청소년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외면하고 도망치려고 하고 있고, 교사들은 “봐라” 하고 있고, 어떤 아줌마는 “주여, 내 죄가 이제 사라지는군요.” 하고 감사하고 울고 있고. 이런 해프닝이 벌어졌거든요. 아주 경악스러워하고 있어요. 그걸 보면서 ‘야, 저 목사가 성경을 몰라도 보통 모르는 게 아니구나.’ 물론 경악하고 있는 청소년들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지만.



왜냐하면 현장에서 염소 잡았다고, 피가 터졌다고 그것 가지고 경악스럽다고요? 지금 주님이 우리를 제사 제물로 삼고 있습니다. 제사하는 것을 실제로 연출하지 말고 목사가 자기 아들 좀 바쳤으면 좋겠어요. 왜 중요한 핵심부분은 안 잡고 죄 없는 염소는 잡느냐는 말이지요. 염소는 좀 싸고 자기 아들은 좀 비싸서 그런가요? 로마서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잡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혀 경악하지 않고 비명소리까지도 내지 않아요. 힘들다고는 하지만. 누가 나를 이렇게 잡는지, 나라는 인생을 놓고 이렇게 난도질을 치는지 몰라. 모르니까 우리는 비명도 안 지르는 모양이라.



주께서 우리를 산 제물로 잡습니다, 지금. 잡고 있어요. 그게 지혜에요. 그런데 그 목사나 교인들은 뭔가 대상화하는 거예요. 뭔가 앞에 있는 것을 대상화해서 내가 저것을 인정하게 되면 나는 그것으로 구원받는다. 내가 판단할 수 있도록, 내가 선택할 수 있도록 종교화 하고 대상화시킬 수 있기만을 원하는 거예요. 내가 주인공이고 내가 뭘 뽑을 것인가는 나한테 맡기라는 식인 거예요. 그러니까 그 사람은 성경을 천 독을 하고 만 독을 해도 모르지요. 세상에서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예요. 내가 제물인 것은 모르고 누가 내 대신 피 흘린 제물이 있으면 그걸 내가 믿으면 구원받고 안 믿으면 구원 못 받는다는 나의 선택을 거기에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니까 젊어서는 바빠서 교회 못나가지만 늙어서는 할 일 없어서 교회 가겠다고 하거든요. 연세 많아서 교회 나와 보세요. 몸이 아프다, 피곤하다, 몸이 안 따라준다, 돋보기로 성경 보니 피곤하다, 이러지요. 젊을 때 성경 안 보고 이제 보니 피곤하기 마련이지요. 하나님께서 지혜라고 할 때 방금 이야기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바치는 것, 그게 지혜거든요. 아브라함이 아들 바쳤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하나의 대상화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를 아브라함처럼, 또는 아브라함의 아들처럼 거기에 집어넣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이 하나님의 지혜 자체인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세상이 지혜라면 우리가 지킬 것이 없어요. 오히려 지혜가 지금도 지혜답게 우리를 만들어내고 있는 중에 있습니다. 새삼스럽게 할 것이 없다니까요? 오죽했으면 막 살라고 하겠어요. 할 것이 없다니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가 미련하다고 하는 이 이야기가 고린도전서 3장 사도바울의 편지에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도바울의 편지를 볼 때는 그냥 보지 말고 예수님의 공생애를 거쳐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을 거쳐서 봐야 된다고 언질을 해줘요.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린 장소와 예수님의 시체를 묻은 장소가 달라요.



그거야 당연히 다르지요. 십자가는 처형당한 갈보리 언덕이고 예수님 묻은 곳은 그 근처에 있는 빈 무덤이잖아요. 장소가 다르지요. 장소가 다른데 장소가 다르다는 말을 의미 있게 끄집어낸 이유는 요한복음 19장을 비롯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기록한 내용을 보게 되면, 야고보 어머니와 막달라 마리아하고 또 다른 여자 분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요. 찾아갈 때 무덤에, 빈 무덤이죠, 예수님의 시체가 없다는 것을 알고 실망합니다. 여러분, 이게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시체가 없다는 것을 감사하고 기뻐해야 된다는 것이 우리가 아는 정답이잖아요. ‘예수님 부활한 것이 맞구나.’ 그게 정답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 부활한 현장에 있지 않고 성경의 옛날이야기를 대상화해서 ‘이런 것이 있을 것이다. 내가 뭘 알면 되지?’ 이러면 편한데 막상 현장에 있던 사람으로서 예수님 시신이 없어졌을 때 ‘아, 예수님이 말씀대로 부활하신 것이 맞구나.’ 이렇게 한 사람이 단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그 사람들의 아이큐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무지해야 되고 미련해야 될 우리가 성경의 그런 내용을 안다고 해서 지혜로운 것처럼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성경 백독하고 성경이 다 믿어지니까 나는 이제 성경대로 산다고 스스로 착각하고 오해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십자가 옆에서도 버티고 있었던 그 여자들을 우리가 욕할 수 있습니까? 그 사람들은 현실 그 자체에서 예수님 없이는 못살겠다고 한 사람들이에요. 그렇게 한 사람들인데 예수님 무덤에 예수님 시신이 없는 것을 보고 큰 실망을 했습니다.



실망 정도가 아니고 요한복음 20장 15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그들이 울기까지 했습니다. 주님 시체가 없다고 울기까지 했어요. 옆에 예수님이 등장했는데 예수님인지 모르고 동산지기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부활하신 그 얼굴이 평소 자기가 알던, 자기 머리의 해마라는 기억장치속의 그 예수님이 아니에요. 우리가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요, 이것이 맞는 말인 동시에 자기를 속이는 말일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십자가는 본적도 없기 때문에. 십자가가 어떻게 생겼는지, 무슨 페인트칠을 해놓았는지 우리는 몰라요.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를 언급해 줄 때 실제로는, 남들이나 우리가 보기에 나타나는 현상은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누가 예수님이 없다고 한다면 거기에 대해서 반박이 안 된다는 현실, 이 현실이 빈 무덤이에요. 주님께서는 빈 무덤을 확장시켜서 믿는 자를 찾아내시는 겁니다. 눈에 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에요. 신앙생활이 어려운 정도가 아니고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할 정도로 기적적입니다. 요한일서 4장에 1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하나님 자신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들은 미련하게도 보고 믿고자 하기에. 미련하게 보고 믿고자 하는 그 미련함을 유지하면서 나의 눈에 포착되는 식으로 나의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나님이 조치해 달라고 요구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요구사항을 주께서는 떨쳐버리는 겁니다. “보지 않고 믿어라. 이 인간들아.” 이렇게 되는 거예요. 보지 않고 믿으라고 하니까 인간들의 그 다음에 나오는 작전이 뭐냐 하면 기도의 응답입니다.



손위 쥘 만한 실적이나 업적, 열심히 금식했더니 봤다는 어떤 효과, 영향력, 나의 기도의 영향력, 이런 것을 챙기면서 그런 식으로도 얼추 믿음 있는 사람이고 싶어 하고 있습니다. 어떤 몸부림, 구원받고 싶어 하는 어떤 심한 몸부림 같은 겁니다. 그게 온 교회 마다 도배가 되어 있어요. 명절날 친척이 모여서 이야기하다 보면 그 비진리가 도배가 되어 있다니까요. 그걸 듣게 되면 이런 현상이 생깁니다. “우리 집에 냉장고에서 얼음 나온다.” 혹은 “정수기 얼음 나온다.” 하면 ‘우리 집은? 나는 그렇게 오래도록 신앙생활 했는데 왜 그렇게 실적이 없지? 나는 불신자인가?’ 오히려 신자가 불신자로 변경될 수밖에 없어요.



‘우리한테 지혜를 좀 주지.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손에 잡히는 그런 지혜는 주께서는 주시지 않습니다. 왜 안주시는가? 그 이유를 제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제가 어릴 때 동화를 좀 봤습니다만 제일 재미있는 동화가 뭐냐 하면, 백조왕자 이야기가 제일 재미있었어요. 안데르센 동화집에 있는 것인데. 어릴 때는 그저 재미로 봤지요. 열 한명의 왕자와 엘리제라는 한 공주가 살고 있었는데 질 나쁜 왕비가 와서 마법을 걸어서 오빠들이 낮에 해가 뜨면 다 백조로 변하고 해가 져야 도로 사람이 되는 저주에 걸리게 하고 공주는 거지꼴로 만들어서 왕궁에서 추방시켜 버렸어요.



자기 아버지도 공주가 거지인줄 알았지 자기 딸인 줄도 몰랐어요. 숲에서 어느 요정을 만났는데 그 요정이 해결책을 알려줍니다. 쐐기풀을 엮어서 오빠들의 옷을 지으면 마법이 풀린다고 했습니다. 단 그 동안에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 있습니다. 어릴 때 그거 보면 참 조마조마했어요. 공주가 다시 왕궁에 왔을 때 주교가 하는 말이 말을 못하는 것 보니 마귀 들렸다고 해서 공주를 화형식에 처하게 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공주는 계속해서 쐐기풀을 가지고 오빠의 옷을 짭니다. 한 벌, 두 벌, 계속 열 한 벌의 옷을 짜가지요.



마지막 불에 태우기 직전에 열 한 벌의 옷을 공중으로 던지니까 백조가 되었던 오빠들이 전부 다 마법이 풀려서 사람이 되었어요. 어릴 때는 아슬아슬 하면서 그게 너무 재미있었거든요. 그런데 이 본문을 보면서 그게 생각났어요. 쐐기풀로 옷을 짠다는 것이 뭐냐 하면, 인간은 자기의 언어로 자기를 위한 새로운 세계관을 뜨개질 하는 거예요. 인간의 모든 언어는 자기를 위한 자기 세계를 만들어놓고 그 안에서 잘난 체를 하고 의로운 체를 하는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요. 어떤 직장에 가든지 전문분야에 들어가면 다른 것에는 바보가 되어도 자기 전문분야에서는 도사가 된다고요.



그 가운데서 자기 직장 일에 충실하게 되면 거기서 자기만의 세계가 형성되는 거예요. 예를 들어 어떤 회사에 계약직으로 들어가서 미생이란 소리를 들어가면서 일하면 거기서 무역 업무에 필요한 용어들에 익숙하게 되면 그것이 연륜이 쌓이면 오 차장처럼 되고 김 상무처럼 되면 그 방면에는 완전히 전문가가 되지요. 전문가가 되었다는 말은 밥 먹고 살 수 있고 그 안에서 버틸 수 있는 하나의 옷, 하나의 자기 세계가 되는 거예요. 그것을 언어로 뜨개질 하는 거예요. 그동안 알고 있던 언어. 의사 같으면 의사의 전문용어를 가지고 뜨개질을 해야 명의가 되지요. 아주 유명한 의사가 됩니다. 성경 용어는 하나도 모르면서. 자기분야의 용어만 알고.



언어로 직조한다. 옷을 짜는 것, 이게 인간들이 했던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를 직조한 거예요. 그 말씀은 인간이 짤 수 있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이 숨겨 놓은 독생자가 있어요. 그 독생자 위주로 움직이는 말씀이 따로 있는 겁니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된 거지요. 어쨌든 짠다는 것은 마찬가지에요. 인간이나 하나님이나 뭔가 새로운 자기 세계를 엮는다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엮을 때 어떤 질적인 차이가 있을 것이 아닌가? 세상이 자기 생존에 필요한 전문용어를 만드는 것, 그것과 진짜 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과의 질적인 어떤 차이가 분명히 있을 거란 말이지요. 어떤 차이인가? 예를 들어 이런 차이가 납니다. 이것도 동화인데요.



동물의 왕국이 있는데 그 나라에 갑자기 벼락이 치고 가뭄이 드니까 그 왕국의 사자가 하는 말이, 분명히 신이 노해서 그러니까 신을 달래야 하는데 제물이 필요하고 그 제물은 제일 질이 나쁘고 죄 많은 동물이 제물이 되어야 한다고 했어요. 왜 그런가,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고 우리가 만든 이 공동체도 거룩한데 이 거룩을 훼손한다는 것은 분명히 그 속에 이 거룩을 훼손하는 죄악된 것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 죄악 된 동물을 찾아서 희생 제물로 드리면 다시 우리는 원상복구 된다고 회의를 합니다.



그런 동화가 있어요. 보세요. 세상 지혜가 뭐냐 하면, 가장 죄 많은 것을 희생시키는 것이 세상 지혜입니다. “누가 내 생존을 훼방하고 누가 내 생존을 힘들게 해? 너는 나가 죽어라.” 그렇게 되거든요. 어떤 집안에 아들 둘이 있는데 막내아들은 착실한데 큰 아들이 맨 날 빈둥빈둥 놀면서 사고나 치고 백수로 있을 때 머리가 허옇게 센 늙은 아비가 “큰 놈 나와! 너는 나가 죽어.” 이렇게 하지요. 착한 놈은 남고 큰 놈은 나가 죽으라는 거예요. 당연한 거잖아요. 그게 세상 지혜입니다. 그게 기도의 응답이에요. 너무나 당연하고 합당한 조치라고 생각되지요.



그런데 이사야 53장을 보세요. “그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라고 되어 있어요. “그의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신이시여, 나쁜 놈이 있어서 내가 힘듭니다.” 할 때 “그렇게 이야기하는 네가 나쁜 놈이야.” “주여, 교회 와서 인생을 새롭게 뒤 엎어서 옛날처럼 멋진 행복을 다시 누리고 싶습니다.” 하면 “네가 나빠, 네가!” 네가 지금 쐐기풀로 너 자신만을 위한, 너를 위대하게 만들 언어의 직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언어를 가지고, 지혜를 가지고, 네가 아는 성경구절을 뽑아가지고 그러고 있는 겁니다.



신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수첩에 보면 이런 것이 있어요. 성경책 뒤에 부록으로 나와 있는데 건강이 필요할 때 본문, 사업이 잘 되기 위한 본문, 군에 갈 때 필요한 본문, 대학 이틀 앞두고 있을 때 본문, 병들었을 때 본문, 부적 비슷하게 그런 게 있어요. 그래서 부교역자가 되어서 심방할 때는 매뉴얼이 있어요. 그거 보고 찾아서 하면 돼요. 그게 바로 세상 지혜입니다. 액운 떨어져야 되지요. 그거 하기 위해서 송구영신 예배도 드리고. 듣기만 해도 겁나요. 돈 받고 성경구절 나눠주는 것. 뽑는 구절이 뭐냐 하면,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욥 8:7) 이런 것 뽑히지요. 이런 짓이나 하는 거요, 돈 먹고 성경구절 뽑아주는 거요. 장사하기도 참 쉬워요. 자기 성경도 아닌 거 가지고 뽑아주고 돈만 받아 챙기는 짓을.



“차라리 네 생존, 생계, 네 삶의 행복을 위해서 성경을 본다면 차리라 미련한 자가 되어라.” “주여, 이런 것 없어도 감사합니다.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더라도 주께서 주신 것만 해도 감사합니다.” 이렇게 돼야 돼요. 여러분이 늘 먹는 김밥을 보면서도 교훈을 받아야 됩니다. 김을 보세요. 김의 교훈, 김은 그냥 누워있지요. 거기다가 시금치를 놓든 당근을 놓든 오양맛살을 집어넣든 누가 와도 다 받잖아요. 물론 옆구리 터지는 것도 있지만 그냥 돌돌 말면 김밥 되잖아요. 누군가 나를 맛있게 먹는다는 그것으로 족하다는 말이지요.





주님은 우리를 김으로 사용해서 거기다 뭘 넣든지 간에, 식초에 설탕을 좀 넣어서 초밥을 만들든지 다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게 사도바울이 받았던 성령의 역사에요. 스데반집사가 성령 받고 난 뒤에 얼굴이 천사같이 되었지만 남들 보기에는 돌에 얻어맞지요. 자기 얼굴은 천사지만. 아까 그 동화에서 죄 있는 동물을 끌어내서 그 죄인을 척결하게 되면 다시 공동체는 원활하게 돌아간다는 이 의식은 성경이 말하는 지혜하고는 다릅니다. 그 이야기를 계속해 봅시다.



사자가 아무도 안 하니까 자기가 자진해서 “나는 자진해서 먼저 자백합니다. 나는 사자로서 양들을 많이 죽였습니다.”라고 하니까 꼭 간신들이 있어서 여우가 나와서 하는 말이, “임금님, 그게 무슨 죄입니까? 멍청한 양은 잡혀먹어도 쌉니다.” 한 거예요. “임금님이 양 잡아먹은 그것에 심적 부담을 느끼니까 제가 적당한 죄인을 찾아냈습니다.” “누군가?” 하니까 “당나귀 이놈이 양이 먹을 풀을 먹었으니 당나귀가 나쁜 놈입니다.” 하니까 왕국의 모든 동물이 임금한테 잘 보이기 위해서 “당나귀를 죽여라! 당나귀를 죽여라!” 그래서 당나귀를 죽였어요. 완전히 여론으로 몰아서.



지혜가 아니고 권력이에요. 힘 센 사람은 이러나저러나 빠져나가는 세계, 그 세계에 누가 죽었는가? 예수님이 죽었습니다. 십자가 달렸다는 것,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께서 그 현장에서 짠, 하고 살아나지 않고 빈 무덤에까지 들어가셔서 사흘이라는 기간을 통해서 시신이 없어지고 그리고 다시 나타난 주님이 전에 예수님을 따르던 수행원, 제자들이 알던 그 얼굴이 아니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우리가 예수 믿으면 천국 가는 것을 알고 예수님을 하나의 대상화 하면서 “예수님이 어떻게 생겼는지 내가 알아. 내가 그 분 만나기만 하면 믿을 거야.” 이런 것을 거부해 버리는 겁니다.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라.” 쐐기풀은 네가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내가 짰고 내가 짠 그 쐐기풀 안에는 낙타가 그냥 이유도 없이 바늘구멍 통과해버리는 기적만이 일어나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 믿는 사람은 이 땅에서 쪼다 되는 겁니다. 인간들이 사는 이 세계에서는 아무에게도 먹혀들지 않는 이야기에요. 아무도 납득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네가 거기서 구원 받았어? 나도 몰라.” 빈 무덤이라는 말을 제가 빈 무덤이라고 했지만 그 말을 한 번 따져보세요. 빈 무덤이라는 것은 시신이 없는 무덤이에요. 시신이 없으면 어차피 약간 세월 지나면 그것은 무덤도 아니에요. 시신도 없는 것은 그냥 평지처럼 되어 버립니다. 시신도 없는 판에 이장할 필요도 없거든요.



없는 거예요. 빈 무덤 자체가 없다는 거예요. 무덤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달려서 죽었던 과거의 그런 경력이 있기에 무덤이라는 이름을 붙이지만 세월 지나면 뭐, 없어요. 그냥 맨 땅이에요. 무덤도 아니고 그냥 아무것도 없는 곳이에요.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말한 지혜라고 하는 것은 고린도전서 2장 2절의 말씀처럼,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이것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사실, 그 사실은 우리가 납득할 수 있는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왜 제외되느냐 하면, 우리는 십자가를 믿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합니다.



왜냐하면 따로 내 세계가 있기 때문에. 따로 내가 경험과 기억으로 짠 내 세계가 있어요. 그 세계는 내가 주인공이고 천국도 내가 가야 되고 지옥을 안가도 내가 알아서 안가는 그 세계입니다. 반면에 주님의 십자가는 뭐냐 하면, 십자가의 사랑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선택하기 이 전에, 뭔가 기대하고 고대하기 이전에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구원해 버린 상태, 우리의 기대나 선택을 능가해서, 이런 것을 일체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우리를 쳐들어와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드러내는, 증거 하는 증인으로 사용하는 겁니다.



그 십자가의 증거가 뭐냐? 빈 무덤을 고수하는 거지요. “내가 나의 구원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를 고수하고 고집하는 겁니다. 이게 미련하게 보이는 참된 주님의 지혜입니다. 보고 믿는 것이 아니에요. 끝으로 지금 여러분이 묻고 싶은 것을 제가 대신 물어주는 거예요. “그렇다면 목사님, 우린 앞으로 어떻게 하면 됩니까?”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묻지 말고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고 질문해야 돼요.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까?”



아까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바쳤다는 것은 참혹한 짓이지요. 아브라함이 아들 바친 그 일이 아브라함한테는 분명한 현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차트 걸어놓고 “얘야, 어떤 아저씨가 있었는데 자기 아들을 바쳤대. 믿나?” “믿습니다.” “그래, 구원 받았구나.” 이렇게 하지 않고 실제로 아브라함의 현실, 아브라함의 일대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 지혜를 만들어냈거든요. 그렇다면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성경 말씀 보세요. 보게 되면 분명히 오해합니다. 성경말씀 중에서 자기가 유리한 것만 뽑아서 써먹으려고 할 거예요.



그렇게 하세요. 그렇게 하는 자체가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과정 속에 이미 재료로서 포함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으면 되는 거예요. 내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아시는 분이 주님이고, 내가 사랑하는 것보다 더 많이 사랑하시는 분이 주님이고, 내가 소망하는 것보다 더 많은 소망을 갖고 계신 분이 주님이고. 그런 주님이기에 우리는 앞으로 살아가면서 기존의 사랑과 믿음과 소망이 깨지면서 내가 미처 몰랐던 새로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새록새록 우리에게 다가올 때 우리는 주님이 만드는 구원이란 용광로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면 돼요. 어떤 분이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어떤 유명한 배우가 너무 연기를 잘해요. 광대연기도 잘하고, 웃는 연기도 잘하고, 우는 연기도 잘하고. 그 배우를 보고 “당신은 세상에 못하는 역할이 없네요. 당신이 제일 못하는 역할이 뭡니까?” 하고 물으니까 그 배우가 하는 말이, 그런 배우가 있는 것이 아니고 제가 지어낸 것이지만, 그 배우가 하는 말이, “나는 내 역할을 제일 못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미생이기 때문에. 나는 미완이기 때문에. 나는 죽을 때까지 여전히 바꿔지고 구원해가기 때문에. 고정된 나는 없기 때문에. 주께서 만드는 대로 만들어지는 대상이기 때문에. 내가 대상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주를 믿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나를 만들었기 때문에.”



지혜가 뭐냐? 내가 지혜고 진리가 뭐냐? 내가 진리에요. 이 맨 날 흔들리는 나, 맨날 욕심꾸러기 나, 이런 구원 되지도 못할, 선택을 해도 늘 나 유리한 대로, 내 행복만을 추구하면서 주께 기도하는, 거짓된 응답을 기도응답이라고 우기는 그 자체가 주님한테는 훌륭한 꽃꽂이의 부케가 되는 겁니다. 너 같은 인간도 구원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내가 기대하는 더 큰 소망을 우리에게 품어주셨어요. “하늘에서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보고 기뻐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어설프기 짝이 없는 우리를 보고 그렇게 예뻐하시고 주께서 주의 기쁨에 합당하다고 하는 겁니다. 무슨 짓을 해도 합당해요.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소급해서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알아채게 될 때 우리는 부끄럽지만 감사할 뿐입니다. 지난 낯 설교에서 그런 말을 했지요. 우리가 죄를 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가? 예수님 제자 중에 가룟유다가 있지요. 이 사람이 자기 운명에 대해서 복수를 했어요. 주님이 죽이기 전에 내가 알아서 죽겠다고. 그 가룟유다를 생각하면서 “야, 참 독하네.”라고 했거든요. 그리고는 가만 생각해 보니까 연말연시 되니까 그 독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사주팔자 보고 궁합 보고 토정비결 보고, 이게 뭡니까? 내 운명은 내가 알아서 관리하겠다는 그 말 아닙니까?



이것은 뭐냐? 신이 나한테 손대지 말라는 것, 내 인생은 내가 손댈 테니까 당신은 손 안대도 된다는 거지요. 내 운명은 내 것이라는 겁니다. 인간의 욕심은 점점 증가해서 세상에서 누구든지 미래까지 내다보는 그 지혜를 알고자 하는 거예요. 연말연초 되면 미래까지 눈치 채면 앞으로 내가 제대로 된 대응과 반응을 할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때의 그 지혜는 사실은 내가 의도적으로 가장된 주체, 다시 말해서 내가 뭔가 잘된다 할 때 그 주인공이 바로 이런 나일 것이라고 헛된 나를 만들어내고 조작해 낸 거예요. 이것은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현실적이 아니에요.



우리는 현실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너무나 현실과 괴리된 채로 살아갑니다. 예를 들면 우리 장로님은 오늘로서 백수입니다. 제 가슴이 미어져요. 그런데 만약에 제가 장로님 입장이라면 ‘자, 내년부터 뭐하지?’ 물론 아직 농사도 있고 여유도 있습니다만 그것도 없다 치고 ‘뭐하지?’ 하고 예상되는 내 자아를 따로 생각하지요. ‘내가 일단 노스페이스 입고 산이란 산은 다 돌아다녀 보자. 못다 한 성경공부도 다 돌아다녀야겠다.’ 하지만 그것도 힘들어서 안돼요. 허리도 아프고.



인간은 날마다 가짜를 만들어내고 주님은 그 가짜를 헐어버리고 그리고 소급해서 허물어주시는 주님의, 진짜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내 대신 진짜 주체이고 나는 그 앞의 산 제물로서 주님의 향기로운 제물 되기 위해서 주의 손으로 만들어간다는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그것이 바로 성령 받은, 지혜안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속의 남들과 비교하다 보니까 주님은 쏙 빠지고, 주님의 십자가는 옛날 에피소드에 불과하고, 당장 시급한 일은 내가 얼마나 잘날 수 있는가의 꺼리를 만드는 것, 그것 외에는 24시간 아무것도 생각할 줄 모르는 저희들, 이 시간 지혜가 있어야 산다는 그 원리가 내가 조작한 원리인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주님 안에서 차라리 미련한 자로서 사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