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강-고전 3장 21-23(자랑거리)15010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3장 21-23절입니다. 신약성경 266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3:21-23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오늘 본문에서 ‘장래 것이 우리의 것이 된다.’는 이 대목이 상당히 난해한 대목입니다. 우리는 지금껏 과거에 애썼던 것만 나의 것이 되지 우리가 애쓰지도 않았는데도 나의 것이 된다는 것이 상당히 우리한테 납득하기가 힘들지요. 내가 계획하고, 내가 입안하고, 내가 추진하고, 내가 공들였을 경우에는 이것이 나의 것이라고 나에게 등록이 되는 식으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잖아요. “저 집은 네 것이다. 왜? 네가 노력했기에. 하지만 이 집은 내 것이다. 왜? 내가 노력했기 때문에.” 그런 시도들이 모여서 그것을 세상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런데 장래 것이 우리 것이 된다고 할 때는 ‘음, 장래 것까지 우리 것이 되는구나. 기분 좋다.’ 이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고 뭔가 ‘내가 세상이라고 여긴 이 규정이 잘못된 규정이다.’라는 생각을 하셔야 돼요. ‘내가 노력한 것, 내가 애쓰는 것이 내 것이다. 천국? 천국은 내가 들어가기 위해서 이만큼 애를 썼기 때문에 천국은 내 나라인 동시에 주님의 나라다.’ 그렇게 생각 했는데 그러한 사고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야 됩니다. 내가 노력하지도 않는데 천국이 만약 나의 것이 된다면 이것은 천국 가는 것은 내 노력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외부의 다른 분에 의해서 넣어준다는 생각을 해 보세요.
이것은 천국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천국이 내 노력 없이 들어간다면 내가 세상이라고 여긴 이것도 내 노력 없이 외부에서 그냥 주어졌다는 그 인식의 발상을 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뭔가 이 땅에서 같은 인간들끼리 산다는 것이 잘못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될 수가 있는 거예요. 인식 자체가 너무들 비슷하니까. 그런 인식 속에는 ‘장래 것이 내 것이 된다.’는 요소는 빠져 있어요. ‘어떻게 내가 시도하지도 않았는데 그게 내 것이 돼?’ 그러면 우리 자신에 문제점이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저는 설교자로서 연 초에 목표가 있다면 이런 것을 원하고 싶어요. 성도 여러분들이 저한테 이걸 요구하기를 원합니다. “목사님이 설교 하시되 이 성경에 나오는 사도바울의 복음, 이것이 내 마음에 장착되기를 원하는데 목사님은 이 말씀만이 내 속에 장착되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마음으로 이 설교를 들어주시면 좋겠어요. 그 말은 달리 이야기해서, 예를 들어 지난 주 같은 경우 본문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라고 18절에 나오거든요. 이렇게 나온다면 “목사님, 이 18절 말씀, ‘세상에서 지혜로운 것이 미련한 것이니까 세상에서 차라리 미련한 자가 돼라.’는 이 말씀이 제게 장착되기를 원하는데 목사님의 설교가 방해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이런 거요.
그리고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목사님, 나는 주님만 자랑하기를 원하는데 당신이 설교를 반대로 잘못해서 세상 자랑거리가 내 자랑거리가 되게 하시면 나는 목사님이 싫어요.” 이런 마음을 좀 가졌으면 좋겠어요. 말씀이 그대로 장착되기를. 세상 자랑거리가 어떤 거냐 하면, ‘허니버터칩’ 같은 거요. 저는 그게 먹고 싶은데도 그게 없어요. 마트에 보면 있기는 있는데 그냥 낱개로 파는 것이 아니고 초콜릿 과자하고 둘둘 말아서 끼워 팔아요. 그래서 못 사고 맛도 못 봤어요. 해태제과 허니 버터 칩이 품귀현상이 있어가지고 그걸 사서 인증 샷을 찍으면서 자랑 질을 한다는 거예요.
내가 세상에서 미련하다는 것을 인증 샷을 하는 것이 아니고 유행하는 과자 하나가 자랑거리가 되는 세상. 세상의 그런 것들, 전자매장에 가면 휘어진 TV가 있어요. 백화점 가보니 그게 5백만 원이 넘어요. 그게 누구 집에 있다면 자랑하려고 친구들 부를 것 아닙니까? “목사님, 올해는 그걸 좀 바꿔서 예수님 자랑하는데 당신 설교가 방해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런 마음을 여러분이 좀 가졌으면 좋겠어요. 따라서 그런 마음이 있다고 치고, 물론 없어도 할 수는 없는데 있다고 치고 이제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도와드리는데 어떻게 도와 드리는가 하면, 세상의 자랑거리라 하는 것은 사실은 자기자랑이에요. 이 성경에 나오는 새로운 자랑거리라는 것, 특히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하는데 세상은 사람을 자랑하는 것으로 채워지는 것이 그들 나름대로 규정된 현실이고 세상입니다. 이것을 뭐로 바꾸는가? 성경말씀의 자랑거리로 바꾸려면 말씀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 바꾸면 돼요. 자랑거리의 교체가 되는 겁니다. 버터 칩을 먹어도 괜찮아요. 말씀이 나에게 먹게 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바꾸는가? 이렇게 바꾸시면 돼요.
하나의 예를 들면, <벌의 비행>이라는 유명한 곡도 있지만 벌이 날아가는 것을 우리가 따라간다고 봅시다. 벌을 말씀으로 보는 거예요. 한 마리의 벌이 날듯이 말씀이 날아가게 되면 우리는 그 시선, 안목, 아까 장로님도 그런 기도를 했습니다만, 그 안목 따라서 세상 윤곽과 굴곡진 것을 다 따라 가는 거예요. 다 따라가면 세상 어느 구석도 말씀대로 안 되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모든 것이 말씀에 관여되어 있어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거지요. 말씀의 주인공이 누구냐 하면, 23절에 나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라고 되어 있거든요.
그리스도가 말씀에 부합되라고 오늘날 우리를 만들어놓은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그리스도만 자랑거리가 되는 거예요. 버터 칩이 자랑거리가 아니고 그리스도가 자랑거리가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이 어렵다는 것이 뭐냐?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여기서 스톱을 하면 안돼요. “야, 우리 것이래. 장래 것인 천국도 우리거래.” 이렇게 스톱을 하면 안돼요. 거기서 스톱을 하지 말고 23절로 넘어가야 됩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너희의 것인데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겁니다.
사람이 한 번 잡으면 내놓을 생각을 안 하거든요. 그런데 세상 모든 것이 우리 것이라고 해서 한껏 우리를 기분 좋게 업 해놓고는 다 내놓으라는 거지요. “모든 것이 몽땅 너희의 것이야.”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가졌느냐?” “가졌습니다.” “그거, 내거야.” 그러면 “싫어!” 하고 나오겠지요. 사람은 모든 것이 내 것이라고 할 때 기분 좋아합니다. 내가 내 것이라는 것이 기분이 좋다면 무엇이 힘들어지는가 하면, 이 내 것이 주의 것으로, 나 말고 다른 분의 것으로 바꾸는데 우리가 저항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모든 것이 내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신을 찾을 때 이렇게 찾거든요. “하나님, 신은 전지전능하니 내가 해도 되지 않는 그것을 신이 해 주옵소서.”라는 식으로 신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중요하니까.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네가 기대하지도 않은 것을 주님께서 기대한다.”고. “네가 기대하지 않은 것, 네가 신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리 좋게 이야기해도 네가 은근히 노리는 것이 있잖아. 네가 이렇게 신을 찾는 데는 다 목적이 있지. 글쎄, 네 기대와 목적이 다 있다니까?” 그 기대를 주께서는 호응해 주지를 않아요. 우리의 호응과 기대 자체가 바뀌어야 하는데 턱 하니 내가 걸쳐 있고 그 다음에 하나님을 찾으니까 하나님은 여기 있는 나 좋으라고 모든 것을 주는 분에 한해서 내가 하나님을 믿겠다고 나서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22절로 끝나버려요. 어떤 교회, 대구의 아주 역사가 오래된 유명한 교회인데 입이 근질근질 한데 그 이름은 말 못하겠어요. ‘서’ 무슨 교회인데 말은 못하겠어요. 그 교회목사가 은퇴를 해서 새로운 목사를 뽑는데 장로들의 기준이 있어요. 좀 착한 목사가 왔으면 좋겠다는 것이 기준입니다. 헐! 착한 목사 없습니다. 착한 목사가 없어요. 그 장로님들이 말씀이 장착되어 있다면, “이번에는 교회마저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여기는 목사가 왔으면 좋겠다.”고 한다면 본인들 자체가 “우리는 내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셈이 되는데 이제는 착한 목사가 와야 되겠다고 하는 말은 뭐냐 하면, 이 ‘서…’ 교회는 절대로 우리의 것이고 그 옛날 잘나갔던 그 영광, 큰 건물 짓는 것, 지금 힌트 막 준다, 큰 석조건물, 그 건물이 대대로 이어져온 3대, 4대 장로의 것이라는 그 자기 것 의식이란 22절에서 23절로 못 넘어간 거예요. 거기서 스톱해 버린 겁니다.
22절에서 23절로 넘어간다는 말은, 네가 아무리 자랑거리가 많더라도 정작 자랑할 것은 너의 많은 그 자랑거리를 포기하고 23절로 넘어가면서 자랑거리가 22절에서 23절로 완전히 이전하는, 완전히 이동하는, 그렇게 되려면 벌의 비행을 계속 뒤따라가야 돼요. 도대체 이 벌이, 이 말씀이 어디까지 가는가 한 번 보자. 그리스도로 넘어가면서 드디어 벌의 비행은 끝납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리스도와 합류한다는 것은 내가 살아 있는 채로는 그리스도와 합류할 수가 없어요. 이에 어려워요. 이게 정말 어려워요.
그리스도를 따라가면 따라가면서 우리가 관찰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것이 되어버리면 이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관찰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어떻게 해보려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우리를 만들어가는 처지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만들어가요. 어떻게? 우리를 죽여 버리고 다시 만들게 되지요. 전에는 어땠는데? 나를 위해서 그리스도가 있었다면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순간 주님의 기대와 주님의 목표를 위해서 우리의 기대와 목표가 죽어버리고 부정당해 버리는 관계를 가지고 그리스도를 가지고 아버지께로 데려가는 겁니다.
그 과정이 상당히 어렵지요. 어렵지만 쉽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주님의 것으로 보는 세상……, 주님 쪽에 누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 아버지가 계십니다. 23절 끝에 보면,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라.” 그리스도와 하나님 쪽에서 세상은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가, 그걸 제가 잠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혼돈에서 창조, 창조에서 십자가부활, 그러고 난 뒤에 재림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아시지요? 교회 한 두해 다닌 것이 아니니까 아시잖아요.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혼돈에서 창조, 창조에서 십자가와 부활, 그 다음에 재림입니다.
그렇다면 혼돈은 무엇인가? 혼돈은 그야말로 혼돈이고 창조는 무엇인가? 창조 때문에 우리가 존재한다, 여기 있다는 겁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죄사함과 관련되어 있어요. 그리고 재림은 뭐냐? 파멸입니다. 이 네 가지 과정을 축약하면 이렇습니다. 없는데 있게 한 이유가 십자가 죽음을 심어서 이 죽음과 죄를 만나게 해서 그 마지막 재림은 없는데서 만들어진 모든 것을 제거해버리고 예수님의 주되심만 떠오르게 하는 방식이 아버지와 아들만 아는 새로운 현실이에요. 숨겨진 현실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부터 출발하는가? 우리는 혼돈이 없어요. 존재부터 시작해요. 존재부터 시작해서 내가 영광 받는, 내가 잘되는 쪽으로 가서 내가 죽어서도 구원받는 그것까지가 우리들 세계에요. “내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것은 감사한데 사는 것이 너무 고생스러우니 좀 편하고 행복하게 살게 해주세요. 그리고 죽어서도 행복한 나라에 들어가게 해주세요. 그것 때문에 교회 나왔습니다.” 이것이 우리 쪽에서 아는 세계에요. 뭐가 빠졌느냐 하면, 혼돈이 빠져버리고 뭐가 빠졌는가? 그렇게 되어버리면 예수님이 재림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흔히 생각하는 교회라는 것이 문제가 커요. 이것은 조작된 것이고 인간들이 자기들의 욕구에 의해서 대충 끼워 맞춘 엉터리에요. 하나님의 현실이 아니고 그것은 가짜라는 거예요. 가짜. 재림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죽이는 거예요. “전에는 너희들이 하나님을 죽였다. 십자가에서. 내가 그것을 잊지 않고 있다. 이제는 너희가 내 손에 죽을 차례다.” 그것이 재림입니다. 혼돈에서 창조했을 때는 그냥 창조한 것이 아니에요. 혼돈에서 창조할 때 그 원리가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혼돈을 생각 안하고 있었기 때문에 뭐도 날라 가버렸느냐 하면, 혼돈에서 창조했던 그 원리가 같이 날라 가버렸어요.
그 원리가 23절에 나옵니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그 원리, 예수님 것이라는 그 원리가 날라 가버렸어요. 그리스도의 것이 날라 가버렸으니까 우리는 내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하나님, 나 잘되기 위해서 교회 나옵니다. 나 잘되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기도 응답해 주옵소서.” 이렇게 나오니까 그 자체가 지금 다른 원리가지고 지금 열심히 기도하면서 우기는 셈이 되어버려요. 그러면 기독교하고 다른 종교하고 뭐가 다를 것이 없이 똑같잖아요. 하나님의 창조원리 없이 기도하는 것을 저는 이렇게 봅니다. 인형목조르기라고 봐요. 인형목조르기. 주님 목을 컥, 컥, 숨 막히게 만드는 거예요. “이래도 기도응답 안 해줄 거야?”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대하지 않는 것을 기대하는데 우리는 내가 못하는 것을 마저 채우려고 윽박지르는 상태에 있습니다. 물론 기도도 윽박지르는 것이지만 너무 과도한 헌금을 함으로서 ‘이 정도로 베푸는데 하나님이 가만있을 분이 아니지.’ 물론 그런 분은 우리 교회에 없어서 천만 다행입니다만 과도한 헌금을 함으로서 심리적인 압박을 하나님께 가하는 겁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우리 교회는 전혀 걱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 원리에서 또 뭘 놓치는가 하면 십자가라는 것까지도 날라 가버려요. “에이, 십자가 알지요. 죄 사함이지요.” 이렇게 하는데 십자가에서 말한 그 죄가 우리가 보는 죄가 아니에요. 우리가 아는 죄는 자기 정화, 자기가 깨끗해지는 것, 자기 흠집 제거하는 것, 일종의 성형수술이지요. 잡티 제거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믿는다고 생각하는데 주님 안목에서 십자가는 뭐냐 하면, 인간이 내 원수라는 이야기입니다. 적이에요. 로마서 5장에 나온 것처럼. 십자가는 뭐냐 하면, 원수 된 자를 의롭게 하기 위해서는 네가 왜 원수일 수밖에 없는가가 드러나야 돼요.
이런 이야기를 빨리 진행하면 어렵다든지 중구난방이라는 소리를 듣는데 천천히 하게 되면 이렇습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 말씀을 지켜서 전과 달리 바르게 사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이것은 누구나 동의하는 순수한 진리인데 자꾸 뒤틀지 말라고 나오는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예수 믿고 새 사람 되어서 성경에 나오는 말씀대로 살아서, 착하게 살아서 하나님께 복도 받고 나중에 죽어서는 천국 간다. 이것이 너무나 간단한 상식적이고 부담 없고 거부감 없는 진리가 분명한데 이걸 왜 자꾸 뒤트느냐고 할 때 그 사람이 뭘 놓쳤느냐 하면, 십자가사건에서 예수님한테 원수가 있고 적이 있다는 사실을 놓쳐버린 거예요.
예수님의 적이 그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에게 묻고 싶어요. 그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과 그 당시 대중들이 어떤 발상으로 예수님을 대했는지? 그 발상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돌아가게 한 그 발상을 알고 가시렵니까, 아니면 그냥 그걸 비켜 가시렵니까?” 하고 묻고 싶어요. 그러면 사람들은 “에이, 옛날이야기를 왜 끄집어 내, 옛날이야기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그 사람들 나빠. 왜 착한 메시아를 왜 죽였어? 우리 같으면 절대로 안 죽였을 거야.” 그렇게 주장하거든요.
열 두 제자도 부인했는데요? 우리가 비켜갈게 따로 있지 그걸 비켜 가놓고 무슨 십자가를 알아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십자가를 안다는 것이 “주여, 나는 이런 죄가 있습니다. 십자가 피로 용서해주소서.” 그 다음에 “고맙습니다. 이젠 부활의 새 생명과 재림을 기다려야지.” 이렇게 나가는 것이 전혀 거부감 없고 자연스런 진짜 복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뭔가 비켜지나간 거예요. 십자가가 말한 그 죄라는 것, 세리와 창기와 극악무도한 인간들이 예수님을 죽였으면 그 당시 점잖은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커다랗게 만들어서 “미안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돌봤어야 하는데 저 무식한 인간들이 메시아를 못 알아보고 죽였으니까 점잖고 착하고 많이 배운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을 기념하겠습니다.” 하고 스토리가 전개되었다면 우리는 비켜지나가도 돼요.
하지만 반대에요, 반대. 세리와 창기와 강도가 도리어 구원받고 그 당시 하나님,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거든요, 여호와 하나님을 너무나 잘 믿었던 그들 손에 의해서 진짜 메시아 하나님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도 우리가 그 현장을 비켜 지나갑니까? 가서 얻을게 뭔데요? 그걸 비켜가서 뭘 얻고자 하는 겁니까? 정면으로 통과해야 돼요. 정면으로 통과하게 되면 거기에 뭐가 있느냐? 하나님 말씀 지켜서 더욱 더 착한 사람 되어서, 안 그래도 착하지만 더욱 더 착한 사람 되어서 천국 가겠다는 이것은 바로 마귀가 깔아놓은 마귀의 올무, 그 덫에 사로잡힌 자의 행세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온 교회가 다 십자가의 원수가 된 겁니다. 십자가를 주장하는 온 천지 2천년 역사의 교회가 바로 바리새인이고 그 배후에 악마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교회에서 그냥 노닥거리고 친목단체나 하시고 노세요. 자기 잘난 맛에 살면서. 바리새인, 사두개인, 이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고 말씀이 있으니까 그 말씀을 지키면 우리는 천국 간다는 그겁니다. 바리새인이나 그 당시 민중들이 다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전혀 심적인 부담을 느끼지 않습니다. 편안하게 교회 오고 편안하게 신앙생활 할 수 있게 그들이 그렇게 만든 거예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인기가 좋지요.
예수님은 인기 없었습니다. 열 두 제자한테 다 배반당했어요. 예수님한테는 인기 없고 그들에게는 인기 있는 거예요. 그들 마음 상태나 현재의 우리 마음 상태나 똑 같아요. 뭘 비켜가요? 비켜가서 우리가 얻을 것이 뭐가 있는데요? 비켜가지 마세요. 똑 같아요. 죄가 무엇인가? 이것은 계속 감춰져 있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죄란 무엇이냐? 죄란 혼돈에서 창조로 나간 그 원리가 빠져버린 채, 빠진 이유는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이죠, 빠져버린 채 현재 내가 여기 있으니까 있는 내가 나중에 잘되기를 바라는 것, 그게 바로 혼돈에서 창조로 나간 그 원리, 그리스의 것이라는 그 원리가 빠져버린 거예요.
그리스도의 원리가 빠졌으면 집어넣으면 될 것 아닌가? 빠졌으니까 집어넣으면 되겠지. “모든 것은 그리스도가 만들었습니다.”라고 넣으면 되겠다고 하는데 그 집어넣는 원리가 우리의 지식이 아니고 실제로 이 땅을 방문했다니까요? 그 원리가 이 땅을 방문해서 사람 손에 죽어버린 거예요. 죽어버린 거예요. 그냥 숟가락만 하나 놓으면 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의 지금 삶 속에서 그 분은 계속 십자가로 작용하고 있어요. 우리는 상식에 입각해서 그냥 심적으로 부담 없는 편한 상태에서, “하나님 잘 믿으면 되지. 교회 잘 되면 되지.” 이걸로 그냥 죽치고 가는 거예요.
하지만 평소에 우리가 언제 파멸의 순간을 생각해 봅니까? 민주당에서 차기대권주자로 거론했던 반기문총장이 있잖아요. 반기문 총장의 끝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렇게 UN사무총장을 해도 죽으면요, 끝! 뭐 없어! 끝이라니까요? 류현진이 죽을 때 어떻게 죽겠어요? 늙어 죽겠지요. 뭐 없어! 양준혁이? 뭐 없어! 박찬호, 박지성, 이영애, 배용준이, 이 모든 우리가 자랑거리로 삼는 버터 칩, 먹어봐야 뭐 없어! 물론 제가 안 먹어 봤지만. 세상의 끝을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사람들이 십자가를 왜 싫어하느냐 하면, 끝을 보여주기 때문에 싫어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어떤 말을 했잖아요. 말을 했는데 그걸 세리와 창기, 이런 사람들만 알아듣고 제자들도 못 알아들었어요. 알아듣지를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무엇으로 취급했는지 알아요? 유령으로 취급했어요. 마태복음 14장 26절에 나옵니다.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유령이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낯선 존재에요. 낯선 존재라는 말은 뭐냐 하면, 주님 보시기에 “네가 낯설다.” 네가 낯설어요. 그러나 우리 보기에는 주님이 낯설어. 서로 반대차원에 속했기 때문에 맞지를 않아요.
제자들이 예수님을 유령이라고 한 것은 이런 겁니다. 허름한 시골집에 가면 누렇게 빛바랜 증조할아버지 사진이 있어요.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 사진이 이렇게 죽 있죠. 자식들이 제사차 또 생활비도 줄 겸 봉투 들고 오잖아요. 그 집에 사는 자식은 집도 허름하고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지만 어떤 카리스마 하나는 쥐고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제사의 중심은 여기라는 말입니다.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 계속 대대로 내려오는 이 뼈대 있는 집안에 계속 묶이게 만들고 그 중심인물은 자신이 된다는 거지요.
제사도 끝나고 다 가고 난 뒤에 그 시골집에 걸려 있는 사진의 할아버지가 만약에 걸어 나온다고 생각해 보세요. 뭐라고 합니까? “유령이다.”하지요. 유령이라고 했으니까 평소에 그 증조할아버지는 사실은 같이 안산 것이 되고 이용만 했을 뿐이지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냐 하면 오늘날 우리에게 증조할아버지 사진 찍어놓은 거예요. 교회 와서 제사 드리고 나면 그만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없어요. 유령이기 때문에.
그런데 예수님 입장에서는 반대로 보는 거예요. “네가 사진속의 인물이다.” 우리가 어떤 인물이냐 하면 쥐포처럼 납작하게 만드는 거예요. 납작하게 만드는 기계가 있잖아요. 그 기계 속에 집어넣어서 우리가 납작하게 되어버리면 우리의 존재는 깊이가 없어요. 납작하게 얼룩무늬가 되어버려요. 모양새는 있는데 존재의 깊이는 없어요. 주님은 우리를 그런 식으로 봐요. 제가 강의 중에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만 어떤 이미지가 사람인양 하다가 나중에 그 이미지가 뒤부터 점점이 뜯겨 나가면서 날라 가요. 앞에는 코도 있고 입도 있고 그래서 사람 같은데 등 쪽부터 물안개처럼 다 날라 가버리면서 나중에는 몽땅 날라 가버리는 것처럼.
반총장이고 류현진이고 박지성이고 간에 죽으면 없어! 하나의 이미지조각으로 다 날라 가버리고 없어요. 우리는 물안개에요. 없어요. 해 뜨면 연못에 물안개가 없어요. 없어도 괜찮아요. 왜? 주님이 주님 되기 위해서 잠시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했다는 것에 우리는 만족합시다. 찬동합시다. 동의합시다. 지금 사도바울이 그 말씀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걸 약간 복잡하게 하면 이렇습니다. 구약 때는 백성들이 자기 위치를 강제로 배정받았어요. 너는 유다지파, 너는 베냐민 지파, 이런 식으로.
이번 겨울수련회 첫 강의를 어떤 내용으로 할 것인지 잠정 정리했는데 멘델의 유전법칙을 언급할 겁니다. 표현형과 유전형을 이야기합니다. 뭔가 표현으로 나타난 것이 있는데 뒤에는 감추어진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왜 그 강의를 해야 하느냐 하면, 이스라엘 자체가 자리를 배정할 때는 정실부인, 즉 야곱이 사랑했던 그 부인이냐 아니면 덤으로 붙은 1+1, 마트에서 상품에 하나 붙여서 주는 것 있잖아요, 정실이냐 아니면 덤으로 붙어온 언니냐, 그 틀에 따라서 그 자손들이 질이 다릅니다.
그 다음에 원래 처인가 아니면 거기에 딸린 하녀들인가, 거기에서 두 가지의 조합이 있어요. 그 조합을 설명하는데 멘델의 법칙이 적절한 거예요. 키 큰 완두콩과 주름진 완두콩이 어떻게 표현형과 유전형으로 되는지, 그렇게 민수기의 모든 위치배정과 진행의 순서가 달라진다는 말이지요. 이스라엘의 자리 자체가 “내가 이스라엘입니다.”가 아니고 “너는 빠져. 네 자리가 중요해.” 해서 이스라엘이라는 그 50만 명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50만 명의 자리, 구조가 장차 혼돈에서 창조로 나가는 그 원리, 구조와 부합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신약성경에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신약성경이 되면 일체 그 자리는 없습니다. 모두 다 동일한 자리, 누가 되었든 다 죽음의 자리가 되어서 동일하게 돼요. 그것은 왜 그런가, 출애굽기 33장 20절에 나옵니다.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모세야! 내 얼굴을 보고 싶나?” “예, 보고 싶습니다.” “안 보여줘.” “왜 안보여주십니까?” “보면 죽어.”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죽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구약에는 하나님의 얼굴을 봐서는 안 되는 이유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죽음이 있다는 것인데, 그 죽음이 이스라엘에서는 시내 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고 지상까지 내려와요.
그러면 자리가 내려와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네가 네 자리를 안 지키면 죽어.”라는 말로 되는 겁니다. 그걸 이야기하는 것이 정실부인과 다른 부인, 처와 첩의 틀로 설명하는데 그 설명은 다음에 자세히 할 것이고요 문제는 신약입니다. 신약에는 하나님을 만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 만나면 죽는다는 것이 아니라 몰라봐요. 하나님이 자기 얼굴을 보여줬잖아요. 보여줬는데 못 알아봐요. 그게 새로운 의미의 죽음이 되는 겁니다. 구약은 하나님의 얼굴은 못 보지만 음성은 들으니까 음성을 들을 정도로 살아 있다고 착각을 한 겁니다. 직접 못 보고 보면 죽지만 음성은 들린다는 말은 들려주시는 그 분은 저쪽에 계시고 음성을 듣는 우리는 이 쪽에 있으니까,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때 온 백성이 다 들었거든요, 그러니 ‘주님은 저쪽에 있고 우리는 여기 있으니까 우리는 누가 뭐래도 하나님의 백성이 맞다.’라고 자부했는데 그게 착각이었습니다.
신약에 와서 얼굴 보여주고 음성 들려줬는데 못 알아봐요. 알아보지를 못합니다. 유령입니다. 유령! 그게 새로운 차원의 ‘이미 죽음’이에요. 죽었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구원에 실패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에 실패한 그 자리, 그게 구약에 배정된 그 자리고 구원의 실패의 자리가 곧 구원에 성공한 자리가 되는 겁니다. “내 구원, 나는 여기 살아 있다, 나는 창조되었어, 죄 용서 받으면 구원 받아.” 아니요, 아니요, 그거 아닙니다. 여기 있다. 다시 혼돈으로 가야 돼요. 혼돈으로 가서 다시 와야 돼요.
왜? 그리스도의 원리를 품에 안고 다시 죄사함이 등장해야 되니까. 방향이. 나는 여호와를 믿고 여호와의 말씀대로 산다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많은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그렇게 살았는데 막상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모두 다 배반했습니다. 죽은 겁니다. 그들의 모든 착함과 말씀 지킴, 의미 없습니다. 의미 없어요. 소용없는 짓이었어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주께서는 십자가에 죽을 때, 십자가로 돌아가실 때 예수님도 같이 죽었어요. 하나님도 하나님에 의해서 같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 다음에 부활이 주어질 때 죽은 예수님을 살려냄으로 말미암아 창조를 새로 시작합니다.
바로 예수님부터 죽음을 이긴 분으로 해서 거기에 창조의 원리를 대입을 시켜 버리면 원래 구원 받기로 작정된 자만 그 새 창조에 참여하는 법칙을 적용시켜 버리지요. 그래서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잠잠케 하시고 성령을 보여주셔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볼 때 “우리가 만든 현실, 내 노력으로 만든 현실은 현실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은 말씀대로 되고 그 말씀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지요. 그리고 재림이 되게 되면 재림은 심판입니다. 모든 것이 파멸되는 거지요. 파멸될 때 심판 때 까지 간직하고 부지해야 되는 것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뭐냐 하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이 파멸의 순간에 십자가 속에서 용서받은 것, 주 앞에 용서 받은 이것 쥐고 가는 거예요. 재림이라 하는 것은 십자가에 담긴 내용을 구체화해서 온천지에 다 파급을 시켜놓고 십자가 없는, 요한계시록 말씀대로 하면 어린양의 피 발림이 없는 사람은 천국에 못 간다는 것을 십자가의 확대, 넓은 월남치마 같이, 화산에서 올라온 마그마같이 확대되면 그것이 재림이 되는 겁니다. 직접 십자가지신 분이 그 영광 성을 드러내서 “내가 이런 거야.” 하는 겁니다.
따라서 재림 이전에 비로소 사람들이 죽는 것이 아니고 이미 십자가를 못 알아본다는 것, 십자가 그 사건의 뜻을 모른다는 것은 재림 때도 죽을 사람이고 사실은 이미 죽은 사람들이에요. 여전히 자기 존재를 쥐고 있으니까. 비로소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장래 것, 재림이죠, “다 너희의 것이요.” 네가 주님의 죽음 안에 동참이 되게 되면 비로소 앞에 쫙 펼쳐 보이는 것이 뭐냐, 파노라마가 뭐냐 하면, 혼돈에서 창조, 창조에서 십자가, 부활, 그리고 재림, 이 전체가 통하는 그 현실 속에 우리가 같이 놓여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렇다면 나라는 것은 내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창세전부터 주의 것으로 잠시 이 땅에 출생한 거예요. 일천구백육십 몇 년도에, 일천구백 칠십 몇 년도에 잠시 태어난 겁니다. 태어나서 때가되매 주께서 성령 주셔서 “나는 내 것이 아닙니다.” 하는 고백을 쏟아놓게 만드는 거예요. 그러면 재림이 오든 뭐가 오든 우리는 신나는 겁니다. 주님, 파이팅! 파이팅! 신나는 거예요. 내가 버터칩을 구입하게 된 것도 주의 은혜에요. 아직 구입을 못했습니다만 그것도 주의 은혜에요. 추신수가 홈런 치는 것도 주의 은혜에요.
신보라라는 개그우먼이 최우수상을 받고 난 뒤에 하는 말, “저는 오직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했지요. 그래서 교회 마다 돌아다니면서 간증집회 해서 돈 좀 벌었을 거예요. 오직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했어요. “나는 이 상을 자랑하지 않고 오직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그게 진심인지 뭔지는 모르겠어요. 하나의 관행인지, 나중에 상 받거든 그 멘트를 하라고 목사가 시킨 대로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게 만약 진심이라고 한다면 대단한 사람이에요. 상을 받을 만한 짓을 한 것이 아니고 상 받게끔 그런 짓을 하도록 조치를 했다는 거예요. 자기는 수동적이에요. 피동적이고. 살아온 모든 것이.
나의 것에서 주의 것으로 가려면 우리가 내 것 가지고는 못 들어갑니다. 내 것 가지고 못 들어가고 이 모든 것, 석조 건물로 지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서, 무슨 교회’ 이것이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교회가 자랑할 것은 “오직 그리스도만 자랑합니다.” 이렇게 돼야 돼요. 그래서 만약 그 교회에 그리스도만 자랑하는 목회자가 온다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소리가 그거예요. “여러분, 교회를 버리세요. 여러분, 이 교회 역사와 전통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여러분의 자존심, 삼사 대에 걸친 이 자존심을 포기하세요.” 이렇게 나왔을 거예요. 제가 그 교회 선보로 간다면 그렇게 할 거예요.
“여러분, 안녕하세요? 여러분은 바리새인 맞지요?”라고 시작할 거예요. “바리새인이라도 구원받을 길은 있습니다. 삼사 대에 걸쳐서 이 교회 교인이라도 여러분이 지옥 안 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만 자랑하는 겁니다. 이게 사도바울의 뜻입니다. 그 말씀이,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그 말씀이 여러분 속에 장착되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면 땡, 탈락! 차비만 받으면 되지요, 뭐.
장래 것이 너희 것이라고 하는 것은 내 것 하라고 장래를 주는 것이 아니고 장래 것에 우리가 소유 당했다는 사실, 장래를 위해서 우리가 여기 존재한다는 사실, 장래를 말하기 위해서, 재림이 있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주께서 나를 다루고 있다는 겁니다. 세상에 잘난 사람 그렇게 많고 똑똑한 사람이 그렇게 많아요. 성공한 사람도 그렇게도 많은지. 물론 실패한 사람도 있지만 묻히고 성공한 사람만 눈에 들어온다는 말은 내가 은근히 ‘나도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나만의 독자적인 자랑거리에 환장한 채 우리가 살아가면서 교회 나와서 기도하는 제목도 ‘내가 못하는 것 신이 전능하니 채워 달라.’고 연 초에 기도할 가능성이 있어요.
하지만 우리 기대보다 주님의 기대에 우리가 따라가도록 우리를 강제로 교체하는 작업입니다. 그 교체하는 작업은 도대체 주님의 적이 누구냐? 우리가 바로 바리새인이고 우리가 바로 주님의 적으로 사는데 주께서는 그것을 깨닫게 하시니까 다시 말해서 구원에 실패한 자라는 것을 아는 자니까 이미 구원에 성공한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도바울의 말씀이 장착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말씀 지키는 이유로 은근히 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말씀대로 살면 원하는 대로 내 것 줄줄 알고 그렇게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실수마저도 주께서 의도한 실수라는 것을 이제는 오히려 감사로 받아들이면서 이러나저러나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임이 최고의 자랑거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