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뜻

손무성 목사의 인간과 성도의 관계 이해에 대한 재고(이준)2006.11.4

아빠와 함께 2013. 1. 28. 11:02

'혹자'의 인간과 성도의 관계 이해에 대한 재고 
이준   2006-11-04 21:22:04, 조회 : 181, 추천 : 0

관련 주제를 담은 글의 논지를 살펴보면, 우선 인간(비중생인 : 글쓴이의 표현대로 하자면 "아담 안에 있는 자")과 성도(중생인 : 글쓴이의 표현대로 하자면 "예수 안으로 이사한 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를 규정하는 몇 가지 표현들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성도 역시 죄만 짓는다는 말은 맞지 않는 말이다. "
"불신자인 인간 속에서는 죄만 나온다. 그러나 천사도 깜짝 놀라고, 세상도 깜짝 놀라고, 마귀마저도 시기하여 넘어뜨리고 싶은 존재, 하나님마저도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존재를 만들어 놓았으니 이것이 바로 성도이다."

그러면서, 그 글에는 이 새로운 존재인 '성도'를 탄생시킨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임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새로 지으심을 받게 된 것이...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이 강조점이다."

이상과 같은 논지를 정리해 보면, 아담 안의 인간은 죄만 짓는 존재이지만, 그리스도 안의 인간은 죄만 짓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존재요, "성령 안에서 성령의 열매와 부르심의 목적에 따라 주의 이름을 높이며 살아가게 하시는" 존재가 되었는데,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이다 라는 요점들로 압축된다.

그런데, 내가 짚어보고자 하는 바는, 인간을 성도로 변화시킨 것이 십자가라는 점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과 성도를 대비시키는 관점이다.

다른 많은 성경 구절들이 동원될 수도 있었겠지만, 시종일관 눈에 띈 것은 스바냐 3:17과 이 구절 일부의 반복이었다("스가랴 3장 17절"이라는 글쓴이의 표현은 오타임).

이 구절에서 "...하나님 여호와"께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실 정도로 사랑하시는 "너"가 누구인지 이 구절이 속한 문맥에서 찾아보면 "예루살렘...시온..."(습 3:16)임을 알 수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왜"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예루살렘, 곧 시온)"을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는 지를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글에는 그 ‘연유’를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부분이 이 점을 드러내 준다.

"...(생략)...그런데 혹자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성도도 육을 가진 인간이다. 고로 모든 인간의 범주 안에 성도까지 넣어 인간은 죄만 짓는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성도를 보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나오게 된다.
성도를 생각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스가랴 3장17절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여호와 하나님은 왜 성도를 바라보시는 시각이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가?’ 만약 혹자가 말하듯이 ‘성도는 인간이다. 고로 인간은 죄만 짓는다’라는 논리로만 본다면 성도는 여전히 아담 안에 있기만 할 뿐이다. 성도가 십자가 사건 이후에도 아담 안에 있는 상태라면 하나님께서는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실 정도로 좋아하실 리가 없다."

위와 같이, 본 구절은 어디까지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시온)을 왜 사랑하시는지에 대한 연유가 명확히 언급되지 않은 채,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시온 - 글쓴이는 이 용어들이 성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을 대하시는 태도가 기뻐하심이라는 점을 “못박아 두기 위한 용도로” 동원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스바냐서 본문의 문맥을 깨뜨리지 않는 한도 내에서 우리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예루살렘(시온) - 수없이 범죄하고 하나님의 심판 대상이 된 도성 - 을 왜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지부터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은 큰 임금의 성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마 5:35). "큰 임금"이란 당시 통치자였던 헤롯이 아니라 '예수님'이심을 '성도라면' 모두들(?) 아는 사실일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가리켜 자기 몸과 연관지으셨고, 성도(聖都, 예루살렘(시온))을 가리켜 자신이 왕으로 계신 나라와 연관지으셨다.

이를 거꾸로 생각해 보면, 성전이 성전으로서 의미를 갖게 되는 연유는 성전을 둘러싸고 구약시대로부터 시행되어 왔던 제사들과 온갖 종교 행위들 그 자체가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모형으로서의 그 제사들이 가리키는 실체이신 분 때문에 그 가치성을 '선취'해왔기 때문이요, 성도(聖都)가 성도(聖都)로서의 의미와 가치를 갖게 되는 연유는 큰 임금께서 그 곳에서 자신의 왕되심을 드러내심과 더불어 구속 사역을 성취하실 곳이기 때문인 것이다.

쉽게 말해, 예수님(의 십자가)과 결부되지 않은 성전, 예루살렘(시온)은 ‘그 즉시로’ 무의미하게 되며 그 가치성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전이나 예루살렘과 같은 물리적 공간뿐만 아니라 - 장소를 가리키는 말들이 의인화된 보편적인 사례들을 충분히 인정하더라도, 최소한 스바냐서 전체에 언급된 예루살렘과 시온이라는 고유명사는 일차적으로 물리적 공간을 의미함(습 1;4,12,3:14). 습 3:16의 경우 장소를 명확히 의인화하여 표현함 - '성도'라는 인간은 어떠할까?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알미니안주의자들처럼 "성도 구원의 견인"을 거부하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만, 성도의 성도됨의 가치나 의미가 예수님(의 십자가)과 결부되어 있다는 점을 재천명하고 강조하기 위함이다.

나아가, 이상과 같은 이해를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해서 성경 구절을 한 가지 더 살펴보려 한다.

(고후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최소한...성도라는 인간에게 죄성이 남아있다는 점을 수용한다면, 위와 같은 구절을 대할 때마다 어느 때고 질그릇 본연의 자질을 망각하기 십상이다라는 점까지도 아울러 수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께서는 빛으로 오셨다(요 1:4,5,9)고 하셨는데, 이런 말씀을 대할 때마다 사람들 - 성도들 - 은 빛이 비췬 자신들은 부족하기는 해도 자신의 본질은 더이상 어둠은 분명히 아니라고 착각을 한다는 점이다(개인적으로 차이가 있겠지만). 성경 어디가 이런 착각을 뒷받침하던가? 혹시 다음과 같은 구절이던가?

(엡 5: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위와 같은 구절을 보면서도 성도라는 인간들은 착각하기를 자신이 비록 작더라도 빛 조각 내지는 빛의 파편 정도는 된 것처럼 오해한다는 것이다.

빛에 속했다, 빛 가운데 거한다...는 등의 표현이 마치 자신이 빛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인양 오해한다는 것이다. 주 안에서 빛이라는 말씀은 고후 4:7에 비추어 보면, 어디까지나 보배의 광채로 인해 질그릇이 환해졌다는 의미이다.

앞서 언급한 고후 4:7로 되돌아 가 보자. 이 구절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보배가 담겼다고 해서 질그릇이 보배의 일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질그릇 자신이든, 질그릇을 바라보는 주변인이든 간에 아무리 질그릇이 예전 질그릇과는 달라졌다고 항변해도 질그릇이 보배의 일부가 아니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보배(금 또는 다이아몬드 따위)가 스스로 발하는 영롱한 광채로 인해 질그릇 자신과 주변인들은 질그릇까지도 가치로운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지만, 오해는 어디까지나 오해일 뿐이요, 착각은 어디까지나 착각일 뿐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성전이 성전으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것, 성도(聖都)가 성도(聖都)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것, 성도(聖徒)가 성도(聖徒)인 것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십자가)과 결부되어 있음과 관련된 것이다.
이미 앞의 두 가지, 즉 성전과 성도(聖都)로서의 의미와 기능을 상실한 과거의 역사를 우리는 익히 들어 알고 있다.
그렇다면, 성도는 예외인가? 우리는 촛대까지도 옮겨버리시겠다고 엄중하게 외치신 주님의 말씀(계 2:5) 앞에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라는 말씀, 그리고 그와 유사한 말씀들의 의미를 다시금 엄숙히, 신중히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보배(십자가)"를 강조한다고 해서 "(보배 담긴) 질그릇의 가치"에 대한 미련이 슬쩍 희석되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천명해 두는 바이다. 쉽게 말해, 인간이 성도 되게 하는 공로가 십자가에 있음을 역설한다고 해서 십자가 공로가 배어 있는 성도까지 무시해선 안 된다는 식의 입장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님을 밝혀둔다.

아울러 보배 담긴 질그릇의 처지가 원래 어떤 것인지 경종을 울리는 다음 구절들을 '늘' 상기할 필요가 있음도 아울러 천명해 두는 바이다.

(고전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계 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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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혹자'의 인간과 성도의 관계 이해에 대한 재고 
김영길   2006-11-04 23:28:20, 조회 : 188, 추천 : 3

외람되지만, 제가 읽어보아도 "손무성"씨께서 쓴 글의 내용은 이준 형제가 제대로 파악한 것 같습니다.

오직 십자가를 말하지만

이근호 목사님께서 지금까지 설파하신 십자가의 핵심과는 괴리가 있네요

아마 이근호 목사님께서 이글을 읽으시면

어처구니 없는 발상이라고 노하실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항상 가까이서 수종드는 분의 글 솜씨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은 십자가인데 내용은 글세요/

아니올시다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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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혹자'의 인간과 성도의 관계 이해에 대한 재고 
정영균   2006-11-05 07:37:43, 조회 : 143, 추천 : 2

가만히 구경만 하다가 울화통이 터져서 기어코 로그인을 하게 되네요.

우리가 십자가 마을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좀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지

어느 한 사람의 이론에 심취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만약 십자가 마을에 들어와서

한 사람의 이론에 심취하게 되고

결국 그 사람의 이론을 복음의 기준으로 삼게 된다면

그것은 복음에 실패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을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근호 목사님이 그 누구에게서도 들어볼 수 없는

참된 복음만을 전파하신다면 그것은 주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십자가로 이끌어 가시기 위해

그분을 쓰신 것 뿐이지 그분이 대단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물론 남보다 많이 알고 계실 수도 있고

공부하는 열정도 뛰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분 역시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한낱 멸망의 자식으로 끝날 뿐입니다.

십자가 마을의 기준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이지

이근호 목사님의 십자가는 아닙니다.

이근호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시는 것은

그분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내 놓는 것이고

손무성 목사님이 글을 쓰신 것도

그분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내 놓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근호 목사님의 십자가와 괴리가 있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괴리가 있느냐가 문제일 뿐이지요.

하지만 그것을 누가 판단하겠습니까?

결국 이런 토론들을 읽는 자 스스로 판단할 문제지요.

이근호 목사님이 노하신다고요.

이근호 목사님이 노하시는 것이 두려움입니까?

이근호 목사님이 노한다고 해서 지옥갑니까?

왜 그런 어처구니 없는 말을 합니까?

귀하께서 자기 속에 있는 십자가를 내어 놓을 요량이 아니면

그냥 가만히 계시면서

서로의 토론을 지켜보시고 참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도움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손무성 목사님을 이근호 목사님 가까이서 수종드는 분으로 말씀하시는데

누가 누구를 수종든다는 말입니까?

이근호 목사님이 십자가 마을의 교주입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안에서는 모두가 지체입니다.

누가 누구를 수종들 관계가 아닌 것입니다.

다만 복음을 위해서 이근호 목사님을 도우는 것일 뿐이지요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을 보니

아마 손목사님의 글을 이 목사님에 대해 반기를 드는 것으로 여기는 모양이지요.

하지만 손목사님이 이 목사님께 반기를 들고자 글을 쓰겠습니까?

앞서 말한대로 손 목사님 자기 속에 있는 십자가를 내어 놓는 것이지요.

결국 귀하의 답글은 진정 아니올시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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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혹자'의 인간과 성도의 관계 이해에 대한 재고 
김영길   2006-11-05 08:22:37, 조회 : 141, 추천 : 2

이미 손무성 목사님의 "인간과 성도"의 글에 대한 이근호 목사님의 평가가

밑에 있는 3415 번 글에 이미 나타나 있지 않습니까?

이근호 목사님께서도 헷갈리는 십자가에 관한 글이라면 분명 문제가 있는 내용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분은 똑 같은 십자가를 말하지만

두분이 주장하는 십자가는 다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십자가는 각자 판단대로 밑긴 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말씀하시는 십자가에 대해서도

말을 삼가해야 할 것입니다.

이근호 목사님의 확실한 지적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 보시면 좋을 성 싶네요

그리고 3415 번의 이근호 목사님의 한마디의 지적은 분노가 포함된것이 아닌가요?

아니 내가 잘못 판단한 것일까요?

이근호 목사님께 물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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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혹자'의 인간과 성도의 관계 이해에 대한 재고 
정영균   2006-11-05 09:18:17, 조회 : 120, 추천 : 1


여전히 이근호 목사님에게 매어있네요.

이근호 목사님의 평가가 십자가 마을의 기준입니까?

이근호 목사님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입니까?

이근호 목사님의 평가는 예수님을 대신 한 것이 아닙니다.

이근호 목사님 역시 자기 속에 있는 십자가로 평가한 것이기 때문에

그저 개인적인 평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내가 채택할 것인가 말것인가는 개인 의사에 달린 것입니다.

이근호 목사님이 헷갈리는 십자가라면 문제가 있다고요?

그런 망발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면 이근호 목사님이 인정하면 모두가 다 복음이고

진리라는 말입니까?

그런 사상이 곧 이단사상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이곳에 들어 오셔서 뭘 배우시고 무엇을 보였습니까?

이근호 목사님을 배우고 이근호 목사님을 보셨습니까?

다른 사람이 말하는 십자가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내 속에 있는 십자가를 기준으로 의견을 내어 놓을 수 있습니다.

다만 나의 십자가가 진리니까 나와 맞지 않으면 틀린 것이라는 판단이 잘못된 거라는 것입니다.

이근호 목사님의 지적에 분노가 포함되어 있든 말든

그것은 목사님 개인적인 일일 뿐입니다.

이근호 목사님이 분노한다고 해서

마치 주님이 분노하는 것처럼 여긴다면

귀하는 이근호 목사님을 믿고 천국가도록 해보시지요.

이근호 목사님 마음에 꼭 들어서 기쁨이 되도록 해 보시지요.

그것이 귀하의 십자가라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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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정영균씨께서 다 해주셨습니다. 
이근호   2006-11-05 09:24:08, 조회 : 169, 추천 : 0

심판주는 따로 계십니다.

십자가 지신 분만이 심판주이십니다.

저는 십자가 진 적이 없고, 도리어 매일같이 십자가 지기를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내 몸뚱아리가 편하게 움직이는대로 살고 싶어하는 사람입니다.

내 몸 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피를  잊지를 못하겠습니다.

이것만을 증거하고 싶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가 피로 모아진다고......

귀하는 안 그러신가요?

귀하께서는 무엇을 증거하고 싶어하십니까?

설마 "안 가르쳐주지롱" 하지는 않겠지요.

설마 "나도 신자야"라는 그 자체를 증거하지는 않겠지요.

인간은 무엇이든지 외부로, 열매로서  증거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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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정영균씨께서 다 해주셨습니다. 
김영길   2006-11-05 16:22:17, 조회 : 157, 추천 : 5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손무성님의 글에 대한 이근호 목사님의 짤막한 언급에 대하여

좀더 자세하게 비평을 해주셔야 오해를 사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근호 목사님은 인간은 죄밖에 나올것이 없기 때문에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해야 한다고,

그래서 인간의 행위에 대한 어떠한 것도 용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이근호 목사님의 철학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근호 목사님을 수종드시는 가장 가까운 분께서

인간과 성도는 다르다

성도는 성령께서 내주하기 때문에 목적이 다른 삶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취지로

말씀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분명 다른 삶을 보여주어야하는 행함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근호 목사님께서 본 글 말미에

열매로 나타난다고 했는데 이는 인간의 행함의 결과 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손무성 목사님의 글에 대하여 오해가 없도록

이근호 목사님께서 정리를 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분들이 성도는 육체의 소욕을 좇지 말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면, 그것은 결국 행위로 나타는 것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면 된다는 내용은 틀린 것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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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정영균씨께서 다 해주셨습니다. 
이근호   2006-11-05 19:51:10, 조회 : 176, 추천 : 1

'목사님을 수종드는 가장 가까운 분께서'  라는 표현이 가슴에 와닿네요. 

지금까지 저를 수종드는 목사님은 안계셨습니다. 이용하는 분들만 있다는 것이 저는 즐겁습니다.

만약에 저를 수종드는 그런 목사님이 계시면 저는 가차없이 이단으로 간주합니다.

주님(보이지 않다고 안 계신 것이 아닙니다)을  수종드는 목사가 아니라면 혹시 저를 수종들 수가 있을런지는 모르지만....

이근호를 수종든다고 여기다가 제가 전혀 거기에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배반의 장미가 될 것이 뻔합니다.

예수 이름 하에 어떤 집단화를 꾀하는 것, 참으로 무섭고 무서운 예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보이지는 않지만 살아계십니다.) 그런 식으로 자신의 일하라고 시키신 적이 없습니다.

즉 주님은 자신의 일을 누구에게 하청주신 적이 없이 직접 각 심령에 활동하십니다. 

"누구를 중심으로 뭉치자!"- 이것이 바로 한국 교회를 총체적으로  이단화 시킨 악마의 정치적 행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까.

권력을 양성해서 자파 세력 형성하겠다는 것은 차라리 단체로 지옥 만들자는 시도입니다.  


손 목사님은 세 가지 점에서 저에게 불만이 있습니다.

1. 성도는 더이상 죄인이 아닌데 왜 자꾸 죄를 짓는다고 이야기 하느냐?

2. 성도는 이미 주님 안에서 살았는데 왜 여전히 죽어야 한다고 이야기 하느냐?

3. 성도는 주님안에서 살아있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기 위해 말씀 지키기에 매진해야 할 일이 남아 있는데 왜 여전히 죄를 끄집어내는데 계속 주력하느냐? 입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은 죄를 새삼스럽게 끄집어내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방종하지 말고 그 말씀대로 지켜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질 수 있다. 라는 겁니다.

이로서 제가 보기에 손목사님은 다음 두가지를 증거하시는 분입니다.

1. 나는 예수님 덕분에 이미 구원받았다.

2. 나는 성령의 도움으로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 지키려고 하고 있다, 그 결과 나는 말씀 지킨 효과로 인해 이러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고 있는 사람이다. 나의 이름을 죽이고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성도에게 어떻게 작용하느냐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인 본인들이 어떤 식으로 점차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성도로 빛나게 살고 있느냐에 주력하라는 겁니다. 성도가 보여주는 하나님의 형상이 많이 빛나면 날수록 그 때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비로소 감을 잡게 하는  중인다운 증인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일단 인간을 성도로 바꿔놓으신 이후에는 지켜야 될 목표로서 말씀만 던져주시면 되지 더이상 그 성도가 하는 일에  관여할 수 없다는 겁니다.

비록 성령을 보내셔도 성령도 주님의 입장과 똑같은 입장에서, 옆에서 "힘내라, 네가 먼저 말씀을,  지키겠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겠다고 나서라 그런 마음만 먹으면 내가 말씀 지키는데 도와줄께"라는 보조적 위치에만 머물게 됩니다.

그러니까

일체 주님과 성령님은 성도가 하는 일에 일체 주도적으로 관여못하고 단지 스스로 자율적으로 하도록 지켜만보다가, 성도가 기도나 간구를 통해서  "도와주세요"라고 부탁을 요청하면 그 때사 보조적인 분으로서 나서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이미 고유의 자율성이 있기에 그 자율성에 대해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도 개입을 하면 안된다는 겁니다. 만약이 개입이 된다는 말은, 이것은 곧 이미 새사람으로 만드신 약속이 거짓말이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성도가 만약 "아이구 나는 못합니다. 전적으로 주님이나 성령께서 처음부터 알아서 다 해주세요"라고 나선다면 그 때는 주님께서 아예 호통을 치겠지요. 왜냐하면

"이 놈아 내가 너를 이미 자율적으로 말씀을 지키고 하나님이 형상을 지키도록 모든 능력을 주었거늘 네가 믿지 못하고 못한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네가 알아서 해봐 너는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을 수 있어. 네가 할 수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을 통해서 명령이나 권면을 한거야. 못한다면 무엇 때문에 명령이나 권면을 했겠어? 네 힘으로 말씀을 다 지킬 수 있기 때문에 그 말씀 지키라고 한 거야"라고 끝까지 성도 주도적으로 말씀을 지키도록 해주시는 주님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도 안에는 성도 자아만 달랑 있습니다.

주님이고 성령님이고 하늘나라에 대기해 있다가 성도가 호출 한때만 쪼르르 달려 올 판입니다.

만약 성도 안에 주님이 계시고 성령님이 계시더라도 아뭇 소리 하지 말고 입다물고 조용히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이 계시더라도 마치 없는 것처럼, 있는둥 없는둥 있어야 합니다. 성도 혼자서 말씀 지키는데 괜히 방해해서는 안되니까" )도와주게 되면 사실 반칙입니다. 도와주지도 말아야 합니다. 한번 도와주면 걸핏하면 도와달라고 할 것이고, 그래되면 새사람된 값어치를 못하는 고장된 새사람인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자신은 못하고 주님이나 성령님이 다 한다면, 성경 말씀은 성도에게는 그림의 떡과 같은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새사람 구실을 못하는 자는 새사람이라고 할 수 없지요-

따라서 새사람 되었기에 이제부터 충분히 말씀 정도는 지킬 수 있다고 간주되는 자가 바로 성도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손 목사님이 주장하는 '성도론'입니다.


이 '성도론'에 의하면

성도는 복음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은 성도 되기 전 여전히 '인간'으로 있는 '인간들'에게만 적용되는 사항이기에  일단 인간에서 성도로 변한 자에게는 복음이니 '피'라는 말은 생각하지 말고 오로지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기 위한 명령지키기에 진력을 다해야 한다는 겁니다.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낮추고 그렇게해서 스스로 하나님의 이름만을 드러내어야 한다는 겁니다.


과연 이러한 주장이 참으로 거듭난 분, 그리고 마귀까지도 사도라고 인정해주신 분(행 19:15) 인 사도 바울이 이런 식으로 살아온 분일까요? 

그리고 스데반 집사님이 이렇게 살아왔나요?

사도 바울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씀이 과연 예수님 믿기 전까지만 해당되고 이미 예수믿는 사도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말씀일까요?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후 1: 5)

왜 그리스도의 고난이 성도인 사도에게 여전히 넘쳐들어옵니까? 사도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 맞잖아요. 그런데 왜 여전히 그리스도의 고난이 쳐들어오고 있느냐 말입니다. 고난이 오더라도 '그리스도의 고난' 아니라 자기가 말씀 지키기에 실수해서 야기된 '성도 자기로 인한 고난'이 와야지 왜 그리스도의 고난이 성도에게 밀려 오느냐 말입니다.

또 이미 구원받은 것으로, 새사람된 것으로 위로받으면 됐지 새삼스럽게 또 '그리스도로 인한 위로'가 왜 필요할까요?

성도가 위로받는 것은, "야, 세상에 내가 이런 말씀을 온전히 지킬 수 있다니!"라고 자기 자신의 새사람된 능력에 감탄하면서 위로받아야지 왜 그리스도로 인한 위로에 위로받아야 하느냐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이미 성도 되었으면 더이상 자신의 구원 안됨에서 오는 슬픔이나  구원 됨에서는 오는 기쁨 같은 것은 없어져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손무성 목사님의 주장입니다.

손무성 목사님의 주장대로라면 성도의 기쁨이란, 말씀이라도 하나 더 본인이 지켜내었다는 성취감에서 오는 기쁨이어야 하고, 혹시 성도에게 말씀 제대로 못지켜 걱정이라면  반성하면서 재시도하면 될 일이지 더이상 그리스도 십자가를 쳐다보면서 위로받는 짓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만약에 또다시 십자가 쳐다보게 되면, "데키놈, 이미 너를 새사람 만들어주었건만 또다시 자신의 죄를 생각해? 이 믿음 없는 놈아. 내가 너에게 뭐하고 이야기하던? 너는 이미 살았고, 이미 죄와 상관없고 율법에도 죽은 인간이라고 하지 않아서 그런데도 죄를 느껴? 날 쳐다보니 말고 어서 말씀 지키기에 열중해. 어서-)

즉 이미 성도가 되고 새사람되었으면, 예수님이 주는 구원은 잊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아서 어서 빨리 '하나님의 형상 본받는데' 주력해야 한다는 겁니다.


손무성 목사님에 의하면 십자가의 능력은 일단 성도되는 그 순간까지 들어오고 그 이후에는 십자가 고난이 성도에게는 오지 않아야 된다는 겁니다. 혹시 말씀 못지켜 고난이 오더라도 설사 그 위로에 대해서는 성도 자신이 말씀 지키는 것에서 찾아야지 십자가 복음에 찾아서는 아니된다는 논리입니다. 

만약에 십자가의 능력을 계속 곁눈질하게 되면 그것은  이근호씨가 주장하는 '이근호 식의 엉터리 신학'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즉 이근호 씨의 주장처럼 날마다 자기 죄로 인하여 십자가만 붙들면 된다는 식이 되어 버리면 이것은 는 백발백중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계속 '떳떳한 방종'으로 자기를 치장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어떻게하든지, 십자가가 이미 성도된 자에게는 더이상 밀려오지 않도록 차단시켜 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빌립보서 3:10-12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오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평생, 십자가의 고난 밖으로 벗어난 적이 없고 평생 부활의 권능에서 눈 돌린 적도 없습니다.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라는 말씀은 결정적입니다. 

악마도 진짜 사도라도 인정하는 진짜 성도인 사도 바울의 성도 생활은 이러합니다. 평생 예수님이 십자가의 피의 복음과 그 능력을 증거의 그릇으로서의 삶입니다.

사도는 성도의 이런 모습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고 '새사람의 삶'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날마다 자신을 죽이는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하지 절대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자율성을 주장하지를 않았습니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4:11) 

이것이 바로 진짜 성도 안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일로 인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증거되는 겁니다.

손무성 목사님의 문제점은, 십자가 안에는 전 율법이 다 들어있음을 알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즉 저주하는 기준으로서 십자가인 줄을 알지 못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너무 안일하게 쉽게 대한 것입니다. 

그냥 달랑 구원해주는 알약같은 것으로 오해한데서 이런 잘못된 걸음이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십자가 앞에 선다는 것은 주님의 현존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죄도 없으신 분의 흘리신 그 피는,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 자체가 평생을 걸쳐 죄를 뒤집어쓰고 계속 유발하게 되는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는 피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벌거벗기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여전히 우리에게 주도권을 쥐고 계시기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성도에게는 말씀을 지킨 그 어떤 주도권도 없습니다.

그저 말씀의 엄중함을 보이는 그릇일 뿐입니다.  성도에게는  자율권이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능력으로 역사됩니다.

주님이 다 이루신 말씀이 들어옴으로 우리는 우리 식으로 말씀을 지키겠다는 것과 얼마나 큰 격차가 진다는 사실을 알게 하십니다.

즉 그 죄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것은 비로소 이미 주님의 의 안에 들어있는 구원받은 신분인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래야지만 자신의 의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의 의만이 자랑하고 증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p.s 참으로 손목사님에게 궁금한 점은,

손목사님께서는 단 한 번이라는 말씀을 지키신 적이 있느냐 하는겁니다. 성령이 도움이었던지 주님의 도움이었던지 관계없이 과연 성경의 그 어떤 말씀이라도 한 귀절이라도 지키신 적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 지켰다고 자부하시는 그 간증이 듣고싶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 세상 그 어떤 성도라도 하나님의 말씀 중 단 하나라도 지킨 적이 없다고 믿는 사람이거든요.

사도바울조차 주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고 하니, 주님이 지키신 말씀은 있지만 성도 개인이 자율성을 발휘해서 지켜진 예가 있느냐 말입니다.

없다면, 손목사님의 주장은 다 거짓입니다.

만약 주님의 은혜로 지켰다면, 성도의 자율권과 내부적으로 어떤 주도권 싸움이 벌어졌는가 하는 겁니다. 만약 성도의 자율적이 주님의 은혜의 주도권에 꺾여다면 이것은 '이근호 신학'입니다.

이근호 신학은, 성도의 자율권으로 말씀 성취해보겠다고 나서는 것 자체가 선악과에서 유발된 죄와 정욕의 모습이라고 봅니다. 

이 정욕은 성령님에 의해 늘 십자가에 못박힘과 연관을 시켜야 합니다.(갈 5:24-25)

그래서 성도는 십자가 밖으로 나와서는 아니되는 겁니다.(갈 6:14)


성령께서 주도권을 쥐지 못하고  그냥 배후에서 도와주는 형식이라면, '그리스도로 말마암아'라는 말은 온전히 성립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은혜'란 '행위'를 부정하기 때문이지요(롬 11:6)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라"(벧전 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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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정영균씨께서 다 해주셨습니다. 
김영길   2006-11-05 23:02:33, 조회 : 121, 추천 : 1

이근호 목사님께서 장시간 할애해서

손무성 목사님의 글을 평가해주시니 많은 오해가 풀렸으리라 봅니다.

혹시 손무성 목사님과의 껄끄러운 관계가 되지나 않을까하는

염려를 감수하면서 까지도 이근호 목사님의 십자가 신학을

표현해주심에 대하여 찬사를 보냅니다

단지 아쉬운 부분은 그동안 주위에서 이근호 목사님을 어떻게든 도와주고

같이 협력하고자 했던 분들까지

이근호 목사님을 이용할려고 했던 자들이라고

평가하신 것은 좀 과하신 것이 아닌가 십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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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정영균씨께서 다 해주셨습니다. 
이근호   2006-11-06 06:30:28, 조회 : 97, 추천 : 0

'즐겁다'는 표현에 유념해야 합니다.

참으로 즐겁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7:23에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따라서 주위 사람들이나 목사님들이  스스로들 주님과의 관계가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시는 것이 저에게 즐겁습니다.

봉사하는 자는 봉사하는 것 자체를 즐거워해야지 그 대가를 기대하면 그 때부터 문제가 발생합니다.

성도 안에서 한시적으로나마 사랑해주시는 것은 고마움이지 결코 노력에 대한 대가로 간주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복음 14:12-14에 보면, "누구를 대접하거든 차라리 갚을 능력이 없는 자를 위하여 대접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섬김 자체가 자신이 행사하는 상급이라고 했습니다.

저도 늘 남들을 이용하려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사랑이 임하게 되면 이런 생각이 저에게 회개거리로 작용하게 됩니다.

"저희로 회개함을 주사....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쫓게 하실까 함이라"(딤후 2: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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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정영균씨께서 다 해주셨습니다. 
이근호   2006-11-05 09:24:08, 조회 : 170, 추천 : 0

[re] [re] 맞습니다. 
정영균   2006-11-05 09:37:45, 조회 : 172, 추천 : 1

맞습니다.

저에게도 나같은 자를 불러주신

주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주를 말하면서도 또 다른 것을 끊임없이 갈구하는

이런 나도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붙드시는 주님의 은혜가 너무나 고마워서 눈물이 납니다.

붙드시는 은혜에 주님의 피가 담겨 있음을 알게 되니

내 입에서 증거될 것은 피의 은혜 밖에 없음을 수시로 다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 몸은 돌아볼 가치도 없고

다만 나를 붙들고 계시는 주님의 손이

말할 수 없는 고마움으로 내 마음을 흔들어 놓을 뿐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능력으로 내 속에 자리하기에

세상 무엇도 두려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또 다시 두려워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주님이 나를 붙드시기를 원할 뿐이죠.

저는 김영길 님에게 분노를 쏟아 놓았습니다.

그렇다고 제 분노를 주님의 분노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내 속에 있는 십자가가

그분의 글에 분노하였기 때문이죠.

저는 제가 아는 십자가를 이렇게 내어 놓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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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아멘, 할렐루야(!냉무) 
이근호   2006-11-05 10:29:31, 조회 : 72, 추천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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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혹자'의 인간과 성도의 관계 이해에 대한 재고 
정영균   2006-11-05 09:18:17, 조회 : 120, 추천 : 1

[re] [re] '혹자'의 인간과 성도의 관계 이해에 대한 재고 
김영길   2006-11-05 09:29:05, 조회 : 131, 추천 : 3

사실 이근호 목사님의 십자가 철학이 십자가 마을의 전부가 아닙니까?

그것을 부정하시나요?

이 십자가 마을은 이근호 목사님의 십자가 철학을 떠나서는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어떠한 사람이 주장하는 십자가의 내용은 다 가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근호 목사님이 주장하는 십자가 철학만이 예수의 피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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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혹시 
정영균   2006-11-05 09:42:22, 조회 : 143, 추천 : 2

혹시 십자가 마을을 비판하기 위해 우회적 논리를 펼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귀하는 아주 비겁한 사람입니다.

만약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귀하는 정신나간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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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의 인간과 성도의 관계 이해에 대한 재고 
이준   2006-11-04 21:22:04, 조회 : 182, 추천 : 0

[re] '혹자'의 인간과 성도의 관계 이해에 대한 재고 
손무성  (Homepage)  2006-11-05 00:07:11, 조회 : 196, 추천 : 1

이준 님께서 쓰신 글
"보배(십자가)"를 강조한다고 해서 "(보배 담긴) 질그릇의 가치"에 대한 미련이 슬쩍 희석되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천명해 두는 바이다. 쉽게 말해, 인간이 성도 되게 하는 공로가 십자가에 있음을 역설한다고 해서 십자가 공로가 배어 있는 성도까지 무시해선 안 된다는 식의 입장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님을 밝혀둔다.

위 내용은 예수님을 무시해도 보통 무시하지 않는 망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구약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여호와 전쟁'을 통해 '진멸'하시고 철저히 무시하는 분으로 계십니다.

그러나 성도마저 무시하는 분은 아니십니다. 성도를 무시하지 않으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회개하여 돌아온 성도를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된다고 하심을 잊지 마십시오.

누가복음 15:10 "내가(예수님)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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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손목사님께... 
이준   2006-11-05 18:53:02, 조회 : 161, 추천 : 0

"...위 내용은 예수님을 무시해도 보통 무시하지 않는 망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손목사님의 글에 담긴 논지 대하여 이러쿵 저러쿵하는 것이
예수님께 대한 무시로 들린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망말(막말? 망발?)은 아니지만, 분명히 엄청난 비약이 아닌가 싶습니다.

차라리 제가 쓴 글의 논지에 대하여 형식을 갖춰서 비판하셨거나
조목조목 반박하셨더라면...이라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럼...다른 글을 준비하여 이곳에서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도'인 제 뜻과 욕망을 얼마든지 '무시'하셔도 감사히 끌려다니고 싶은 이준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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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피'를 잊자? '피'를 증거해서는 안된다? '피'가 후시딘 연고인가? 
이근호   2006-11-05 07:56:30, 조회 : 148, 추천 : 2

십자가 피가 피부치료제인 연고와 다른 점은, 한 번 바르고 버리는 것이 아니다.

마치 네온사인의 유리관처럼 한 번 '피'가 들어오면 내부적으로 외부적으로 피의 붉은 색채를 발산하게 된다.

먹든지 마시든지 '피'의 붉은 색깔만 터져나오게 된다.

이런 자가 성도이다. 

그것은 십자가 피는, 그 분만의 이루어낸 성과이기 때문이다.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십자가 피를 증거한다는 것은, 독보적이고 독과적인 분이 이루어신 그 분의, 독보성을 증거하는 것이다.

피없이 감사없고, 피없이 늘 회개없고, 피없이 영광없고,  피없이 기쁨없다.

따라서

영광을 돌려도 피 앞에서 서야하고, 감사해도 피 앞에서 감사가 되고, 하나님의 영광도 피 앞에서 자신의 죄를 다시금 발견될 때 영광이 된다. 자기에게로 독자적으로 관심돌린 통렬한 죄가 드러나고 용서의 능력의 달리 없음을 또다시 확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십자가 피'를 증거하면서 다른 것이 증거되는 것이 용납 될 수 없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른 복음 전하면 저주받는다'라고 말한 것이다.

모든 것이 십자가 피만의 증거로 이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십자가 피' 말고 다른 것을 증거하게 되면, 감사나 기쁨이나  영광이나 회개가 나올 수 없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이 '피'에서 쏟아내어지는 말씀들입니다.

사도 바울의 모든 말씀도 '십자가 피'가 토해져 쏟아낸 '피의  피'들이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도 '피'를 두고 말한다. 그 안에 예수님의 독보적 사역이 기능적으로 작용한다. 

'죄'라는 것도, '피'에서 떠나 독자적인 생각을 갖는 것을 말한다.

'의'라는 것도. '피' 안의 관계를 뜻한다.

'산다'는 개념도, '십자가 피' 안에 함께 놓여있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죽어도 살아있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개념도, '십자가 피'에서 무가치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피'를 계속 토해 낼 수 없는 자는 살아도 죽은 자이다.

만약에 이 '피'가 들어있지 않는 자가 성경을 보면 어떻게 보일까?

이런 사람도 나름대로 감사하고, 영광돌리고, 기뻐하고, 반성한다.

단지 피 안에서가 아니라 바리새인처럼 '완전'에 도전할 자격을 얻은 자아의 가치 위에서 나름대로 감사하고, 영광돌리고, 기뻐하고, 감사한다. 

이런 사람은 생각하기를 예수의 피는, 자신에게는  일회용 알약 같은 것이 된다.

한 번 먹은 이상 잊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피' 말고 다른 것을 증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피' 되돌아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피' 이야기는 더이상 자기에게 지나간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제는 독자적인 나에 대해서 생각할 때라는 것이다. 

인간이 선악과 따먹을 때의 심보가 이러했다.

  완전이 눈 앞에 보이는데 질주를 왜 포기하느냐고 반문한다. 

피와의 결별!

복음을 이야기해봤자 다른 복음이고, 예수를 이야기해봤자 다른 예수이다.

악마의 일꾼이 되었기에 나올 수 밖에 없는 고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