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의존교회140801a (미신)―이 근호 목사
디모데전서 4장1절부터 5절까지 하겠습니다. 딤전 4: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딤전 4:2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딤전 4:3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딤전 4:4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딤전 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본문을 이렇게 보게 되면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서 귀신의 가르침을 쫓는다는 거예요. 말만 들어도 섬뜩하잖아요. 귀신의 가르침을 쫓는 다는 말은, 사람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이해되지요. 사람은 우리 눈에 보이니까 그런데 귀신은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눈에 보이는 것 같으면 귀신이라고 하지 않지요. 여러분, 귀신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이름이 없다는 거예요. 이름이 없다는 것은 존재가 붙잡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어제 그 모습, 내일 그 모습이 동일한 인물이 될 때 이름이라는 것이 의미가 있어요.
어이, 누구! 호명을 할 때 어이 10년 전에 우리 동창생! 호명을 할 때 이름이 있으면 그 이름이라는 동일성 때문에 비록 얼굴이 망가지고 늙어도 머리가 허해져도 맨 그 사람이 그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귀신은 어떻습니까? 귀신에는 이름이 없다 했죠. 이름이 없다는 말은 귀신이 형체적으로 동일성을 유지 할 수 있습니까? 없죠. 왜 그러느냐 하면 귀신은 천상의 일종입니다. 성경에 볼 때 천사들이 나타날 때 일관된 인물 가지고 나타나던가요? 어떤 때는 이런 인물, 저런 때는 저런 인물이죠.
천사가 고정된 인물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영적 존재는 고정된 인물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그 인물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의 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고 난 뒤에 엠마오로 내려간 제자에게 예수님은 똑같은 인물이었습니까? 아니었죠. 예수님을 알고 있으면서도 막상 예수님을 보니까 혼돈스러운 거예요. 뿐만 아니고 예수님께서 무덤에 있고 세 명의 마리아,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이모,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마리아의 삼종세트죠. 그 삼종 세트가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갔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알겠어요? 모르겠어요? 자기 아들인데 알지요? 자기가 키웠으니까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의 얼굴을 알아 봤습니까? 못 알아 봤습니까? 못 알아봤죠. 동산지기인지 줄 알았어요. 공동묘지 관리하는 관리인인줄 알았어요. 예수님이 앉아있는 거예요. 누구를 찾느냐? 주님을 찾습니다. 여기 있잖아! 못 알아 봤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날 때 제자들이 알아봤습니까? 못 알아 봤습니다. 도마가 알아봤습니까? 못 알아봤죠. 이것은 이름이라는 것은 인간이 아담 안에 있을 때만 이름이 유효하다는 겁니다. 뭔가 인간이 육체로 있을 때 그것은 세월이 달라서 변화될 때라도 변하지 않는 지속성이 따로 있는 거예요.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당신의 본색, 본질은 세월이 가도 한결같이 유지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한결같이 유지되는데서 무엇을 느끼느냐 하면 이 세상에 안정성을 많이 느낍니다. 이 세상에 안정성을 많이 느낀다는 것은 이 세상보다 더 든든한 살만한 곳은 없다는 생각을 사람들은 갖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산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나 바다에서 조난당할 때 누가 제일보고 싶어요? 고라니? 멧돼지? 토끼? 누가 가장 보고 싶어요? 사람이죠. 만약에 만난 사람이 빚갚으라는 사채업자라도 어떻습니까? 반갑죠. 평소에도 만나면 도망가서 숨어야될 그런 사람이지만 자기가 산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는 못난이고 잘난이고 사람같으면 다 반가워요. 북한의 북한군 아바이 동무가 와도 반가워요. 사람같으면 다 반가워요. 아휴 살았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인간은 그 만큼 인간들의 이름으로 인간들의 존재로 구성된 이 세상에 안정감을 얻고 있다는 겁니다. 안정감을 얻고 있다는 것은 이 세상을 구태여 벗어나고 탈출할 마음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그런 마음은 아예 마음에 없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나와 같이 천국가자 할 때 죽어서 갈게요. 그것은 되지만 살아서 간다는 것은 그들에게 없습니다. 왜? 이 세상이 너무나 마음에 들기 때문에 아니 마음에 안 들어도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은 이 세상 외에는 없습니다. 따라서 신을 찾는 것 이제 하나님과 결부 시키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이 세상을 떠나게 해 달라고 찾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을 살기는 살되 넉넉하고 풍족하게 살 수 있는 전지전능한 행운을 저에게 안겨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 때문에 사는 겁니다.
애굽같은 이 세상을 주께서 떠나라할 때 우리가 떠나고 싶어요? 떠나고 싶지 않아요?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외가 있습니다. 뭐냐 하면 이 세상에서 실망스러운 일을 당할 때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살 입장이 되지 못할 때 그 때는 이 세상을 하직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거예요. 교회에 교단을 만들었는데 자기 추종자가 15만 명인데 추종자가 십일조를 바쳐 자기 재산이 4천억 되는데 그래서 사업을 무리하게 해서 배를 샀는데 뒤집어졌는데 애 300명 죽었는데 그래서 도망 다니는데 그 다음에 뭐하고 싶어요? 그만 이 세상과 어떻게 해서든 안 보이는 곳으로 떠나고 싶죠. 매실밭에 갔는데 마침 날씨도 따뜻한데 모자도 썼겠다 눈을 감았는데 굶어 죽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럴 때는 떠나고 싶죠.
그런데 멀쩡하게 이 세상에 안정되어 있고 달리 이 세상을 떠날 마음이 없는데 주께서 오셔서 손잡고 강제로 나가자! 이사 가자! 떠나자! 하면 나갈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죠. 따라서 우리가 이 세상 안정된 속에서는 무엇이 성립이 안 되느냐 하면 신앙생활은 전부 다 거짓말이 돼요. 떠나지 않겠다는 무슨 신앙생활이 뭐가 필요합니까? 떠나지 않겠다는데요. 죽치고 여기 눌러 앉아서 호위호식 하겠다는데 그게 무슨 신앙과 관계있습니까?
그래서 여기 본문은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라는 말을 사도 바울이 이 자리에서 우리한테 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솔직하게 답변해야 돼요. 사도님! 이제부터 신앙생활 안할 작정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끝내는 거예요. 안하면 되는 거예요. 문제가 의외로 간단한 문제입니다. 성경에서 이러쿵저러쿵 잔소리 해 놓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하면 돼요. 안하겠다는데 왜 자꾸 잔소리 하는데? 신앙생활 안하겠다는데 자꾸 잔소리해서 뭘 주의하라! 나 주위 안 할 거. 뭘 조심해라! 나 조심 안할 거예요.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뭐 귀신을 따르지 않고 귀신도 짜증나고 귀신 조심하라는 사도의 잔소리도 귀찮고 나는 내 편한 데로 살꺼에요. 안녕히 계세요! 사도 바울님! 이게 우리의 평소의 솔직한 심정이에요. 제가 이러면 목사님, 그러면 구원 안 되잖아요. 본인이 구원받고 싶은 마음도 없는데 뭘 구원을 언급합니까? 그러면 천국 가는 사람은 어떻게 갔지요? 정답은 간단해요. 본인이 가고 싶어간 것이 아니고 강제로 진리로 끌고 간거예요. 신앙생활이 하기 싫은데도 강제로 하게 하신겁니다. 에이 그럴 리 있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좋은 것, 좋은 것이라는 말은 이 세상의 있는 어떤 것 보다 좋은 것, 그런 것이 어디 있습니까? 하늘에 있겠죠. 하늘나라에 대해서 어떤 희망같은게 있어요. 있기 때문에 이 세상 것도 가질 뿐만 아니라 거기다가 남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천국가는 티켓, 천국 가는 어떤 천국의 보장된 나의 영원한 위치, 자리 마련 그것도 우리는 노릴만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노리고 시도했던 사람들이 다 실패로 끝났어요. 그게 무슨 시대이냐 하면 그게 구약시대입니다. 신약성경은 사람들이 겁 없이 직접 드리데는데요 반드시 신약성경은 구약을 근거로 해서 신약을 봐야 돼요. 반드시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신약성경에서 구원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와야 언약을 완성하게 되면 그 안에 있는 자들도 함께 완성된 형태로 천국에 가게 되거든요. 그런데 그 언약이라는 것이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구약에 보면 어떤 나라가 독점해 있습니다. 그 언약을 독점한 나라가 어떤 나라죠? 이스라엘이잖아요. 그렇다면 모든 성경에 나와 있는 용어들, 귀신, 성령, 다 어디서 나온 용들입니까? 언약을 독점해 있던 이스라엘에게서 나왔던 개념들이에요.
지금부터 한 50년 전에 피자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어요. 인기 있었겠어요? 없었겠어요? 인기 하나도 없었어요. 맛이 이상해요. 요쿠르트말고 요플레처럼 나올 때 인기 있었어요? 없었어요? 인기 없었어요. 맛이 군내 나는 것 같아요. 청국장 같은 느낌 들었어요. 요플레가 우유 썩은 냄새 안 납니까? 요구르트 말고 달콤한 것 말고 요플레, 피자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은 아주 맛이 이상해서 인기 없었습니다. 지금은 환장하죠. 그러면 피자가 어디서 온 겁니까? 한국에서 온 겁니까? 삼국시대에 김유신이 피자 만들었어요? 이게 이탈리아의 음식이잖아요. 수입한 거죠. 그렇다면 천국이라는 개념이 어디서 나온 개념입니까?
이스라엘에서 언약에서 나온 거예요. 그러면 우리한테 천국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있었죠. 뭐? 극락, 그냥 극락이라는 것, 그리고 염라대왕이 기다리고 있는 심판하는 지옥불, 그게 우리민족에게 있었죠. 그 지옥하고 언약을 통해서 이야기하는 지옥하고 같은 지옥이에요? 다른 지옥이에요? 이게 같을까요? 다를 까요? 다릅니다. 이방인들은 뭐가 없어요? 이방인들에게는 언약이 없어요. 언약이 없어서 자기가 지어내는 대로 그냥 상상하는 거예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게 될까요? 안될까요? 자기가 지어낸 대로 될까요? 안될까요? 이스라엘은 자기가 상상하고 싶어도 그것이 하나님앞에서 용납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이스라엘은 누구관리 체제하에 있느냐 하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관리 체제하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관리체제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십계명에 나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제발 좀 상상하지 말라! 그런 뜻이에요. 제발 망상하지 말라! 진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으로 나타날 뿐이지 너희들이 그냥 상상하는 신은 그것은 신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벌써 이런 이야기부터 구약부터 출발하자는 이야기를 그런 취지에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구약부터 취지를 하게 되면 그러면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으니까 그들만큼은 속속 그 마음 밭에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수용했겠습니까? 어떻습니까? 했겠어요? 안 했겠어요? 제가 묻는 취지를 아신다면 했겠어요? 안 했겠어요? 했다? 안했다? 안 한게 아니고 못하지요. 왜 못했느냐 하면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또 상상했거든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간단한 거예요. 이스라엘인들이 상상한 하나님에 대해서 상상한 그것과 진짜 그들과 함께 동행하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속 내용과 둘이 충돌과 마찰을 일으킨 역사가 곧 이스라엘의 역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매서운 심판은 어느 나라의 멸망과 함께 확연히 드러났습니까? 이스라엘의 멸망과 함께 확연히 드러놨죠.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난뒤에 그 다음에 하나님의 작업은 멈췄습니까? 지속되었습니까? 지속되었죠. 그 지속된 절차에 동원된 나라가 모압, 압몬, 블레셋, 바벨론, 앗수르, 아람, 이런 나라입니다. 그게 에스겔 예레미야에 호세아 아모스에 다 예언되었어요. 이스라엘을 건드렸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도 그 제국도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하여 멸망당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벨론 멸망당했죠. 그 다음에 바벨론 뒤에 나오는 페르시아가 멸망당했죠. 페르시아 뒤에 나오는게 헬라 제국이 멸망 당했죠. 헬라 제국 뒤에 나오는 게 마지막 제국이 뭡니까? 로마제국이죠. 로마제국이 이미 멸망 당했죠.
지금에 지속되는 나라라는 것은 로마제국의 파편들이죠. 로마제국이 바싹 깨지고 난뒤에 그 조각들이 220개의 나라가 된 겁니다. 왜냐 하면 그것은 로마에 와서 국가라 하는 것은 법적인 체제에 의해서 국가가 유지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모든 국가는 법치주의 국가가 되지요. 법으로 다스리는 국가입니다. 법으로 다스린다는 말은 거기에 뭐가 정의 되지 않는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최우선적으로 권위 있게 작용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미 어거스틴은 그것을 밝혔어요. 어거스틴은 로마제국의 사람이지만 로마나라는 절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해서 쓴 책이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책을 어거스틴이 쓴거예요. 하늘나라는 이런 식의 나라가 하늘나라가 아닙니다. 그것을 분명히 했죠.
그러면 하늘나라는 어디 있느냐? 안 보이는 겁니다. 안보인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뜻이에요. 인류의 모든 역사는 이름과 이름의 만남이거든요. 이름이 있다는 것은 제가 아까 언급한 것처럼 이름이 있다는 것은 눈에 띄는 어떤 물컹물컹한 육체가 있어요. 있어야 된다고 했죠. 그러면 인간의 역사는 결국 뭡니까? 사람 대 사람의 역사입니다. 학교 다니는 학생들이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귀신한테 스트레스를 받습니까? 성령 때문에 스트레스 받습니까? 누구한테 받았어요? 인간이잖아요. 교사든 친구든 교장 선생님이든 인간이죠.
이 역사는 뭐냐 하면 역사라 하는 것은 신앙생활 없어요. 역사라 하는 것은 인간 대 인간의 충돌과 결합에 의해서 역사가 이루어지고 문명이 만들어 지는 겁니다. 낮에 누구를 만납니까? 낮에 직장 다닐 때 누구를 만납니까? 사람을 만나잖아요. 어서오서요! 누구를 만납니까? 주인이 손님을 만나는 겁니다. 이거 한번 써보세요. 누구를 만납니까? 새로 나온 바지인데 한번 입어보세요. 귀신한테 바지를 입힙니까? 이 세상은 눈에 띄는 사람, 그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서 역사가 이루어 지는 겁니다.
신앙생활, 성령이 왜 끼어들어요. 귀신이 왜 끼어들어요? 우리는 그렇게 해서 지금 까지 애들 밥 먹여가면서 그렇게 가정생활하고 있는데 사람 대 사람의 만남, 이것으로 족한 거 아니에요? 이게 전부다 잖아요.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가 그거예요. 주님이 다른 이방민족과 상관하고 관계해야 될 문제를 이스라엘 민족 본인이 이 주위에 있는 포진되어 있는 이방나라와 상관하다가 그래서 멸망한 겁니다.
여러분 솔로몬 때에 나라가 이스라엘 나라가 둘로 나뉘어졌다는 것은 교회를 좀 다닌 사람은 다 알지요? 솔로몬 전까지 나라 아는 이스라엘 한 나라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 이후에 르호보암과 여로보암이라는 이름이 비슷한 두 왕이 등장해서 북쪽은 여로보암, 남쪽은 르호보암 남으로 나라가 둘로 쪼개졌지요. 그게 왜 쪼개졌습니까? 솔로몬 때에 자기 부인들을 정책상 결혼했죠. 왜 정책상 이방나라와 결혼을 해야 했을까요? 이미 이스라엘을 안정권에 들기 위해서 주변으로부터 일종의 인질을 들여오는 거예요. 사둔관계를 맺어서 만약에 저 나라가 우리나라 쳐들어오면 우리나라 시집보낸 네 딸부터 죽을 줄 알아라 이렇게 일종의 인질을 잡아 놓는 거예요. 물론 이쪽의 아들도 저쪽에 가서 그렇죠.
그러니까 서로가 뭔가 싸움하기에는 둘다 손해 보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 뭔가 안정을 취하겠다는 겁니다. 제가 강의 처음에 뭐라 했습니까? 인간은 안정을 원한다고 했죠. 그 안정은 눈에 보이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적당히 하게 되면 얼마든지 이 세상을 안정되게 한다는 거죠. 문제는 그게 하늘나라 이냐 하는 겁니다. 하늘나라는 사람 대 사람의 관계가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사람을 배제합니다. 인간의 배후에 장악하고 있는 귀신, 악마와 그리고 보이지 않는 주님과의 싸움에서 하늘나라가 되는 거거든요. 귀신도 안보여 주의 이름도 안보여 어쨌거나 저때거나 안보여 그러니까 신앙생활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이름으로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고 신앙생활하는 자들은 신앙생활 애초에 이게 해 본적이 없는 겁니다.
지금 까지 한 것을 정리하면 신앙생활은 없다! 아주 간단합니다. 제가 신이 났습니다. 신앙생활, 우리 안한 겁니다. 신앙생활 해 본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이 나부터 출발해서 그래요. 사사기 봅시다. 사사기에 사사들이 자기가 사사되고 싶어 환장했습니까? 어떻습니까? 사사에게 누가 먼저 찾아왔죠? 하나님의 신이 찾아왔죠. 그러면 이 일의 시작을 누가 했습니까? 하나님의 신이 일을 시작했죠. 그러면 하나님의 신으로부터 사사가 붙잡혀와서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정말 사사가 승리한 게 뭐냐? 사사가 승리했던 그 승리의 대상이 뭐냐 이 말입니다. 같은 인간이었을까요? 같은 인간이었다면 그 인간은 두 번 다시 이스라엘을 넘보지 말아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분명히 이스라엘이 아람을 이기고 이스라엘은 분명히 블레셋을 이겼는데 그들이 전멸되었습니까? 아니면 또 살아났습니까? 또 살아났죠. 이것은 제초제 뿌려도 소용없어요. 또 비 한번 오면 또 살아나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이 온전하게 적들을 색별할 수 있는 그러한 신앙생활을 해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점점 강의가 미궁에 빠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쉬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어떤 애와 부딪혔습니다. 그러면 해결책 1. 기도 한다. 2. 자처해서 아프가니스탄에 선교사로 나간다. 3. 나무에 올라가서 자살한다. 4. 아이를 일으켜주고 후시딘 연고를 발라 주면서 혹시 아프면 연락하라고 명함을 주고 보낸다. 몇 번입니까? 4번이죠. 그러면 그렇게 하면 일이 해결됐습니까? 해결 됐다고 여겼던 것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아시겠어요? 그들은 신앙생활 했다고 보는 겁니다. 왜? 요령껏 난처한 상황에서 잘 구슬리고 해결 봐서 걔도 좋고 아버지 조심할게요. 그래 뛰면 안 돼지, 쌍방 합의가 이루어 진거예요. 뛰어 오고 안보고 자전거를 탔고 경미한 사고니까 신고할 것도 아니고 후시딘 연고 바르면 덧나지도 않고 아주 좋거든요.
그게 이스라엘이에요. 그런데 묻습니다. 그게 신앙생활입니까? 자기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원상회복되면 그것을 신앙생활 했다고 자부하는 것이 그들의 치명적 실수였던 겁니다. 그들은 뭐까지 따져야 했느냐 하면 왜 내가 하필 그 시간에 자전거를 타야만 했고 왜 하필 그 아이는 자전거 타는 내 앞에 앞도 안보고 달려들어야 했고 왜 하필이면 딴때는 전방 주시 하다가 하필 그때 간판하나 본 사이에 아이를 못봤는가?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이 모든 것을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했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다시 묻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내가 평소에 전방 주시를 하지 않아서 이번 일에 대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기 때문에 반성한다. 2번 선교사로 간다. 몇 번입니까? 아, 내가 조심하라 이랬구나! 앞으로는 다시는 이러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신앙생활 제대로 했다고 여기는 것이 바로 멸망당한 이스라엘의 생각입니다. 그러면 우리보고 어쩌라고?
선지자가 이야기하는 것은 이거예요. 평소에도 너는 자전거를 타기만 하면 너는 애 다치는 게 후시딘연고 바를정도가 아니고 애를 4주, 작살을 내는 그런 일들이 자전거 타고 갈 때 마다 일어나도 너는 감수해야만 하는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너는 놓쳐버렸다는 겁니다. 제가 지금 신앙생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신앙생활은 뭐냐 하면 아이고 혼났네! 우리가 원상 복귀되면 신앙생활 제대로 해서 복 받은 것으로 여기는데 사실은 신앙생활이 원상복귀된 그 자리에 머물면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요령이죠. 삶의요령이에요. 다시금 안정감을 얻었다는 요령이고 신앙생활은 그것을 계기로 해서 내가 미처 체험하지 못한 다른 자리 원래 내리 자리로 내려가는 계기가 되어야 된다 말이죠.
한번 물어 보죠. 어떤 사람이 두 시간 일했어요. 두 시간 일하고 2만원 받았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4시간 일하고 4만원 받았습니다. 이게 옳습니다. 그릅니까? 이게 맞아요? 틀렸어요? 이게 맞으면 신앙생활 아니고 이스라엘 멸망때 멸망당해야 될 사람입니다. 이게 안 맞아야 돼요. 두 시간 일해서 2만원이면 4시간 일해도 10시간, 100시간 일 해도 2만원만 가져야 돼요. 이게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천국의 계산법입니다. 아침 10시에 와서 일한 사람이나 12시에 일한 사람이나 오후 5시에 일한 사람이나 품삯이 같아요. 그런데 우리는 어디에 익숙하냐 하면 애굽에 익숙하거든요. 일한 만큼 노동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타고 났어요.
이것은 못 고쳐요. 우리가 성장한 이 세상 자체가 그것을 진리라고 이미 가르쳐 왔기 때문에 그것을 합리적으로 보고 만약에 한 시간 일하나 10시간 일하나 같이 받으면 그것을 불합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느 쪽에서 오느냐 하면 주님은 이 세상 쪽에서 오는 게 아니고 천국에서 옵니다. 천국에서 오는 주님이 되레 우리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너희들이 노동을 했다고 품삯을 더 받는가? 세상에 그런 일이 다있어? 오히려 우리한테 묻는 식이라니까요. 주님이 옆에 있는 천사한테 어이 천사!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네! 웃기지? 웃깁니다. 낯설어도 너무 낯설어요.
왜 태어나면서부터 일 많이 해도 동일하게 받는다는 생각을 왜 못했는가요? 우리는 자신의 노동 자체에 가치를 두면서 시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은 천국이 아닙니다. 왜? 천국의 법칙을 도통 못 알아먹는 그런 세상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 한다 해도 우리는 그 신앙생활을 결과를 따지면서 신앙생활 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원상회복되면 신앙생활이라 하는데 성경에서 주님께서 알려주신 신앙생활은 앉아 있기만 해도 벌써 2번 3번 갈비대가 부러져 나가도 이렇게 해도 우리가 할 말이 없고 애를 실컷 키워놨는데 수학여행 한다고 배타고 가다 죽어도 그것도 쌍둥이 아들이 2학년이 가다 다 죽어도 우리로서는 당연합니다. 이렇게 나와 줘야 신앙생활이에요.
평소에 딸이 곱게 집에 들어오면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곱게 들어올 아이가 아니에요. 그런데 곱게 들어왔으니까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새벽에 버스 타다가 집에 들어왔다 이게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새벽에 버스타고 가다 집에 못 들어오고 미친놈한테 묻지마 살인으로 울산에서 사람이 13명이 죽었어요. 딸이 새벽에 들어오거든 주여, 할렐루야!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너 몇 등이야? 묻지도 마세요. 지금 살아 돌아왔는데 몇 등이 문제입니까? 수학 점수 묻지 마세요. 네가 이래서 4년제 들어가겠느냐? 그것도 묻지 마세요. 살아 온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얼마나 우리가 인생 어떤 목표 달성하는 것은 오직 사람하기 나름이다. 아닙니다. 사람하기 나름이 아니에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망한 거예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신약성경은 뭘 경유 하라? 구약을 경유해야 합니다. 왜? 예수님은 구약에 예언된 그 언약에 의해서 오신 분입니다. 이방인 좋다고 우리 원한다고 우리 식대로 메시야가 덜렁 오신분이 아닙니다. 구약의 노선을 따라서 구약의 철로 노선을 따라서 이스라엘을 따라서 들어오신 거예요.
따라서 오늘 본문은 간단합니다. 신앙생활을 인간은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있어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는데 신앙생활을 했다고 우기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3절에 나옵니다.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사람의 주장이 3절에 나옵니다.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라고 가르쳤던겁니다.
묻습니다. 이 사람들이 왜 남들이 다하는 하니까 안한 사람도 있으니까 그저 대부분이 다 하는 그냥 편하게 하면 다 할 수 있는 혼인을 이 사람은 하지 말라고 했는가요? 그것은 이 땅에서 이 땅을 초월할 수 있는 요소를 그들이 상상해서 조작해서 만들어 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뭔가 특이하고 고상하고 경건해 보이고 거룩해 보이는 요소를 따로 뽑아내서 만든 거예요. 그러니까 신앙생활이 안 되니까 유사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사람들이 조립해 낸겁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제시하는 혼인을 금하고 음식을 폐하는 이것은 마음먹기에 따라서 달성할 수 있을까? 없을까요? 있지요. 그러니까 이게 가짜에요. 제가 방금 이것을 가짜라고 했죠. 이것을 가짜라고 했는데 사도 바울은 뭐라 했느냐 하면 그게 바로 양심에 먼 것을 화인 맞아서 그 영과 악마와 귀신한테 배워서 그런 아이디어를 끄집어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금방 간단하게 뭐라 했습니까? 그게 가짜입니다. 라고 이야기했고 가짜 경건이고 거룩이다. 성경대로 하면 마귀가 시킨 대로 그들은 가짜 하나님의 초우를 지금 만들어 낸 겁니다.
그게 뭐냐, 인간이 하면 해 낼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수입의 십 분의 1의 십일조, 그 십일조가 하나님의 법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100% 마귀한테 나온 소리입니다. 왜냐 하면 10% 내는 것은 마음먹으면 할 수 있거든요. 마음 먹으면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초등학생도 할 수 있습니다. 세배돈 5만원 받으면 5천원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고등학생 되면 머리 크다고 세배돈 10만원 받으면 만원할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간격이 9만원 밖에 차이가 안나기 때문에요. 나중에 사업하다가 90억 벌면 9억 못합니다. 차이가 너무 커서 못합니다. 하여간 간격이 많이 나지 않을 때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은 마귀의 꿰임에 빠진 겁니다.
어떤 성경 말씀도 우리는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 하면 사람들이 그것을 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순간 그 사람은 자신의 하나님의 취지의 본래의 자리를 이미 훌쩍 떠나 버린 겁니다. 지금 마귀가 준비해 준 방석에 앉아 있어요. 본인의 자리가 아닌 전혀 다른 자리에 앉아 있어요. 우쭐대고 우열하고 나도 십일조 했다고 자랑질하고 싶어하는 인간이 상상하는 그 자리에 자기가 앉아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을 출발할 수 없게 하는 자리입니다. 성립되지 않는 자리입니다. 주님이 요구하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는 그 자리 아닙니다. 십일조 영원토록 자랑질 할 수 있는 그 자리입니다. 멸망의 자리입니다.
혼인을 금하고 음식을 피하라는 말은 아예 먹지 마라는 뜻이 아니겠죠. 가려 먹어라 이런 뜻이죠. 이런 것은 먹으면 안 되고 건강을 관리함으로 말미암아 이엠, 해독주스, 깐마늘, 감식초, 건강 매니저가 권하는 것, 현미밥, 거꾸로 식단, 반찬부터 먹고 나중에 밥먹는 방법, 탄수화물 줄이고 단백질 많이 십취 하는 것, 등 푸른 고기 많이 먹는 것, 하여튼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하면 사람들은 마음만 먹으면 살 빼려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이 아니죠. 그러니까 그 자체가 인간의 역사죠. 인간은 자신의 과거 역사를 절대로 포기 하지 않습니다.
지금 까지 강의 한 것을 두 문장으로는 하면, 지금 제가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신앙생활 못한다는 건데 왜 그러느냐 하면 인간이 제시하는 문제는 인간적인 해결책을 이미 거기에 수립해 있습니다. 인간이 제시하는 문제에는 신이시여! 나에게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라고 넌지시 제시할 때는 그 속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이런 이런 식으로 해결해 주시면 참 고맙겠습니다. 가 이미 깔려 있어요. 그렇다면 인간의 문제를 하나님이 해결한다는 것은 안되죠. 왜냐? 해결책을 줘도 인간은 거부하니까요 그렇다면 이것은 신앙생활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기 역사를 자기가 자기 힘으로 꾸려나가는 겁니다. 자기 인간을 자기가 꾸려 나가는 겁니다.
그러면 신앙이 뭐냐, 하나님이 제시한 문제를 하나님이 해결책을 같이 마련해서 같이 문제와 더불어서 해결책도 동반해서 세트로 제공할 때 이게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차이점이 뭡니까? 인간이 제시하는 문제, 내가 제시하는 문제인 반면에 하나님은 하나님이 제시하는 문제이죠. 그러면 인간의 제시하는 문제에서 하나님이 제시하는 문제로 갈아탈 수 있습니까? 못 갈아탑니다. 사람은 자기를 사수하고 자기를 지키는 것부터 해서 문제를 찾아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어제 보다 수입이 좀 적은데 왜 이러지? 내가 어제보다 몸이 찌뿌둥한데 왜 이러지? 오십 견인가? 비가 오려나? 왜 이러죠? 벌써 자기와 자기가 알고 있던 자아와 변화된 자아와의 틈 사이에서 문제를 새롭게 만들어 내죠.
우리 막내아들이 중학교 2학년 올라가더니 좀 이상하게 틱틱 거리고 알았어요! 엄마 하고 자기 방에 들어가 문 잠가 버리고 사춘긴가? 그런 거야? 주여, 우리 애들이 변했어요. 보세요. 내 애는 이래야 된다는데 문을 콕 잠그고 컴퓨터 하는지 숙제하는지 그 차이에서 무엇을 끄집어내죠? 인간은 문제를 끄집어내죠. 결국 문제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기대하는 것과 현실의 격차에서 문제를 끄집어 내는 거죠. 그게 우리의 일상이잖아요. 그거 말고 없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일상에 푹 잠겨 있는 우리가 하나님이 제시한 문제, 하나님이 인간 세상을 보면서 아이고 이것은 안 돼! 이것은 고쳐야 돼! 하는 문제로 갈아탈 수 있느냐 하면 문제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안 되죠. 안 되면 된 사람이 있을 것 아닙니까? 안되는데 되게 하시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 중에 한 사람이 나아만 장군이라는 사람인데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에 걸렸는데 그러면 그 사람은 문둥병이 걸렸는데 ‘그래 나 같은 죄인은 걸려도 싸’ 하고 가만히 있었습니까? 어떻게 했어요? ‘아이 난 박박 긁어가면서 죽을 거야!’ 이랬습니까? 자기 비참한 현실을 참아 볼 수가 없죠. 그런데 마침 이스라엘의 포로로 잡힌 소녀 하나가 가는 말로 ‘우리 동네에서는 낫는데’ 자기 동네에는 내가 있어서 문둔병이 낫는다는 거예요. 얼마나 놀랍겠어요? 벌써 문제가 자기 문제잖아요. 자기 문제이니까 그 이스라엘의 소녀가 슬쩍 말한 것에 감 잡고 가자 이렇게 된 겁니다. 얼마나 급했으면 아예 이스라엘 왕을 찾아 갔어요.
이스라엘 왕을 찾아가니까 왕이 당황스러웠어요. 큰 나라가 왔는데 큰 나라가 무리한 요구를 하는 거예요. 군대 장관이 내 병을 낫게 해 달라는데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것은 대책이 안서거든요. 이것을 구실로 해서 공격하는 줄 알고 벌벌 떨고 있는데 그런데 그 소리를 듣고 엘리사가 나한테 오라 했죠. 엘리사에게 갔습니다. 갈 때 까지 나아만 장군은 뭐만 생각합니까? 주님의 문제입니까? 자기의 문제입니까? 계속 자기의 문제를 쥐고 가는 거죠. 자기 문제를 쥐고 가는데 그 문제에는 뭐도 마련되어 있다? 나름대로 해결책도 있죠. 그런데 그 해결책을 누가 아십니까? 주님이 이미 아시고 엘리사로 하여금 나를 만나지 말고 요단강 물에 들어가라고 했죠. 요단강 물이 깨끗했습니까? 아니면 더러웠습니까? 더러웠죠.
더러운 물이 하나님의 해결책입니다. 인간은 자기의 해결책을 따로 갖고 있어요. 그것을 언어로 표현할 런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어떤 짐작 가는 것이 있어요. 내가 수용할 용의가 있습니다. 하는 것이 있어요. 그것을 누가 익히 아십니까? 하나님이 익히 아셔서 내가 은근히 기대하는 해결책과 도저히 따를 수 없는 해결책을 제시해 버립니다. 이게 바로 신앙생활의 시작입니다.
만약에 주님이 제시한 해결책, 더러운 요단강 물에 들어가라는 그것을 만약에 수용한다면 수용하는 그 순간, 그 사람은 자기의 해결책이 정면으로 부딪쳤죠. 자기의 해결책이 부딪쳤다는 말은 뭐도 부딪친 겁니까? 해결책에서 충돌이 일어나면 그 충돌이 어디 까지 이어집니까? 나는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하는 문제가 과연 하나님 앞에서 문제꺼리가 될 만한 것인가 돌아보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삐졌죠. 가자 집에 가자! 가면서 뭐라 합니까? 우리나라 물이 이 요단강 물보다 훨씬 깨끗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나아만 장군의 처음에 생각했던 문제 제기는 드디어 들통났습니다.
깨끗한 내 몸이 문둥병이 되었으니까 내 몸의 해결책은 깨끗한 것에 내가 속하게 되면 그 깨끗함이 나한테 전파가 돼서 나는 원래 문둥병 이전에 깨끗한 육체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처음에 제기했던 나아만 장군의 생각이었다는 것이 여기서 밝혀지는 겁니다.
그리고 그 나아만장군의 사고방식은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앙과 더불어서 오늘날 우리들의 불신앙을 다 포괄하고 있는 사고방식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자신에게 문제없으면 기도 할 생각도 안하고 신앙생활할 마음도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어서 신앙생활하겠다고 나온다면 그것은 신앙생활도 아니고 그냥 하나님이 유발 시킨 사태에 불과한 겁니다. 뭔가 부딪칠 때 부딪쳐야 됩니다. 십자가에 부딪쳐야 됩니다.
우리 아들이 자전거 타고 가다가 어떤 소년 만나서 후시딘 연고 발라 줬다, 아이고 앞으로 조심해라! 이것으로 원상회복된다면 그는 신앙생활 아닙니다. 그런데 자전거 몰고 가다가 애가 다쳐서 후시딘 연고를 발라주고 집에 돌아왔을 때 주여, 평소에 자전거 바퀴 돌아간 것도 주님께서 지켜 주셨습니다. 하는 것을 알 때 그것은 자기 문제 제기할 자격이 나한테는 애초부터 없었다는 겁니다. 왜냐 하면 나라는 인간 자체가 주님이 자기 구원의 일을 하기 위해서 우리를 참여 시킨 그 몸둥아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독자적인 내 인생, 내 역사, 그것을 몽땅 주님이 일으키는 구원 자리에다가 거기다가 던져버리세요.
던져버리고 내 인생의 책임자를 나로 설정하지 마시고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뭐가 되던 우리의 주님께서 말 그대로 주님께서 우리 구원의 책임자가 되셔서 매일같이 우리로 하여금 역사 만드는 일을 하지 않고 신앙생활하게 하는 일을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모든 게 하나님이 지켜 주시고 돌 봐주시는 은혜입니다를 늘 고백하게 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나아만 장군은 집에 돌아가려했습니다. 부하가 이왕 왔는데 한번 들어가 봅시다. 물에 들어가 봤습니다. 에이 물에 들어가도 별 효험이 없어요. 아이고, 한번 남았는데 한번 더 마저 들어가세요. 마저 들어가고 나오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깨끗하게 되었죠. 깨끗하게 된게 1. 물속에 있는 박테리아 때문이다. 2. 거기 물속에 암모니아 무기물질이 작용 때문이다. 3. 엘리사의 능력이다. 4. 원래 깨끗해야만 했다. 몇 번입니까? 원래 깨끗해야만 했습니다. 다만 무엇을 경유하면? 내가 문둥병 되고 문둥병 낫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것을 더 속으로 들어가면 내가 문둥병 들린 것도 누구의 뜻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알아차릴 때 나아만 장군은 새로운 노선에 드디어 들어서게 된 겁니다. 천국 가는 열차에 들어서게 되는 겁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10분 쉬고 하겠습니다.
서울 의존교회140801b (미신)―이 근호 목사
여기 3절에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면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게 정신적으로 사상적으로 보통인들이 해 낼 수 없는 것을 우리는 해 냈다가 되잖아요. 너희들은 결혼하고 싶어 환장했지? 우리는 자진해서 안해! 얼마나 대단해 보입니까? 범잡할 수 없는 대단한 능력자인것처럼 행세하죠.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게 바로 악한 영, 미혹케 하는 영이 악한 영이 악마가 너희들 보고 시켰다는 거예요. 여기서부터 어렵습니다.
혼인을 금하고 음식물을 가려 먹는 것을 악마가 시킨 거라면 그러면 성령이 시킨 일은 혼인하고 마구 다 먹고 것이 성령의 일입니까? 그렇게 되는 거예요?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그 대상이 항상 이것 아니면 저거에요. 모아니면 도에요. 그리고 제가 말을 잘못했는데 모 아니면 도고 모도아니면 개걸윳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극단적인 시작 끝 중간 기껏 그것밖에 못해요.
그러면 성령께서는 뭐라고 하느냐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성령께서는 구약을 통해서 신약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구약은 성신이고 신약은 예수님이 오셔서 성령이거든요.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요한이 세례를 줄 때 예수님이 성령을 받습니다. 받고 난 뒤에 성령이 목표로 잡은 것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나중에 성령께서 우리일로 뒤집어 씌워요. 그러면 예수님의 완성이 우리의 완성이 되어 우리가 천국가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가운데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자신의 흔적이 지워져 버려요. 성령이 있다는 말은 성령 앞에서 우리 자신의 흔적이 지워집니다. 내가 사라져 버리는 거예요.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죽음 속에서 이미 우리는 사라진 것으로 그렇게 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나로 통해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 아이고 더워라! 이게 내가 유발한 사태가 아니고 주께서 아이고 더워라 외치게 만드는 사건을 유발하시는 겁니다.
항상 나는 종이고 주님은 주가 되시는 방식으로 같이 동행해서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나면 그 일의 성과는 주님이 주체가 되어서 일어난 일로 드러나는 것이 성령의 일관된 일이거든요. 그런데 혼인을 금하고 음식을 폐하게 되면 이것은 마음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거든요. 마음을 독하게 먹으면 할 수 있는 겁니다. 할 수 있는 거라면 결국 그 남는 게 뭡니까? 자기 흔적이 지워지는게 아니고 해 냈다가 나오죠. 나는 해 냈다. 이렇게 되죠.
그렇게 되어 버리면 성령님께서 다루었던 예수님과 같은 생각일 수 없는 겁니다. 심지어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자살도 할 수 있습니다. 가룟유다가 죽을 때 어떻게 죽었습니까? 자살 했죠. 마음먹으면 자살도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자살해서 양심도 자살을 했는데 천국갔습니까? 보나마나 지옥갔습니다. 사단이 들었으니까 지옥갔잖아요. 그러면 다른 사람보기에 가룟유다가 스승을 팔았다고 양심에 가책이 있어 대단한 일을 했다 이렇게 보이지만 그것을 모델로 삼을 수 없다 이 말입니다. 제가 하는 말은 뭐냐 하면 뭐를 하지 말고 뭐를 하세요 라는 이것을 우리가 마음을 먹으면 해 낼 수도 있고 안할 수 있다고 하는 행할 수 있는 그런 법적인 모델로 삼게 되어 버리면 이것은 성령의 하시는 일과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마태복음 산상설교에서 나오죠. 우리보고 뭐라 했습니까? 맹세하라 했습니까? 하지 마라 했습니까? 맹세하지 말라고 했죠. 산상설교를 늘 들으면 늘 기죽잖아요. 마음 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죄라고 걸리니까 기죽는데 뭐 속 시원한 게 하나 있어요. 뭐냐, 맹세하지 마라! 아이고 그 소리 들으면 속이 시원해요. 주께서 맹세하지 말라! 했으니까 나, 맹세 안할게! 맹세하지 않겠다는 말은 내 쪽에서 스스로 자기를 지킬 만한 규칙과 법칙을, 징크스를 내 쪽에서 만들지 않겠다는 뜻이거든요.
유대인들은 뭐라 했습니까? 반드시 하나님께 맹세할 때는 뭔가 제물을 드려서 맹세하고 그리고 맹세를 했거든 힘들더라도 그것을 지켜 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아예 맹세하지 말라고 한 거예요. 주님이 맹세하지 말라 한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가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이 어려운 상황을 우리가 모면하거나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수동적이며 당하기만 하는 처지에 놓여 있으면서 평생을 살아간다는 겁니다.
더우면 더울 수밖에 없고 추우면 추울 수밖에 없어요. 당할 수 밖에 없어요. 태풍이 올라오면 비 맞을 수밖에 없고 가뭄이 들면 황패해 질 수 밖에 없는 모든 것이 수동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처지가 우리 인간의 처지입니다. 이 당연한 처지를 자연 세계에만 적용시키는 것이 아니고 지금 신약에 와서 성령을 통해서 개인 영혼에 적용시키는 법칙을 오늘 본문에 언급하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성령이 개인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령이 누구와 관련되어 있습니까? 처음에 예수님과 관련되어 있고 결국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개인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예수님이 찾아오시면서 드디어 개시가 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감 잡을 수 있어요.
아하, 성령이라는 것은 전체로 뒤집어 오는 것이 아니고 개인 개인에게 찾아갈 수도 있구나! 하는 겁니다. 개인 개인에게 성령이 찾아갈 수 있으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성령 받은 사람과 바로 옆에 같이 잠자고 있는 부부라 하더라도 성령 받은 사람과 안 받은 사람의 인생관이 완전히 배척관계에 있다는 것을 감안하라 말입니다. 두 사람이 잠을 자다가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하고 두 사람이 쟁기잡고 일을 하다가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하고 한 사람은 하늘로 올라가지요. 어떤 쟁기 제품이 달라서 그렇습니까? 하나는 중국산이라 그런 겁니까?
손에 무엇을 쥐고 있느냐가 관계없죠. 그 사람이 인물이 못나서 버려두고 인물이 잘나서 뽑아 올라가는 겁니까? 그게 아니죠. 육의 어떤 조건도 성령의 일을 막거나 방해될 요소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을 더 간단히 이야기하면 인간이 어떤 후회하는 짓을 하더라도 구원받는 일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실수를 하고 어떤 잘못을 해도 그것은 구원과 전혀 무관한 일입니다. 그것은 구원과 전혀 무관한 일입니다. 그것은 성령이 개인적으로 찾아올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옛날 구약에 성신은 이스라엘 집단적으로 다루었어요. 누구한테 사사한테 성신이 와도 개인 용도가 아니고 사사한테 성신이 오게 되면 사사가 활동해서 그 혜택은 누구한테 돌아간다? 이스라엘 전체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법칙으로 성신을 준 거예요. 심지어 사울 왕에게도 성신이 왔잖아요. 사울 왕이 자기만 잘 살려고 성신이 왔습니까? 아닙니다. 사울왕이 처음에 암나귀를 찾으러 갔을 때 성신이 임해서 선지자들과 예선했잖아요. 그럴 때 사울왕을 왕되기 위해 조치가 되는 겁니다. 사무엘이 받았던 성신이 사무엘 자기만 구사일생 사는 것이 아니고 성신을 받아서 그 이스라엘 전체가 블레셋한테 해방하고 승리하는 용도로 썼지요.
그래서 이스라엘의 성신이라 하는 것은 개인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집단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혜택을 제공하기 위해서 한 겁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 성령이 왔잖아요. 예수님이 혼자 달랑 구원받기 위해서 성령 왔습니까? 아닙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성령이 그에게 임하면 그가 사람들에게 직접 성령세례를 주실 분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세례요한은 무엇까지 알았느냐 하면 요단강에서 예수님이 성령세례를 받으니까 아, 받았구나! 좋겠구나! 이게 아니라 성령 세례 받았던 그 기능이 결국은 나중에 구원받을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성령세례가 온다는 그 내용이 포함된 상태로 주님은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보는 거예요.
해태 종합선물을 받은 거예요. 누가? 예수님이요. 예수님이 개인구원 받은 것으로 끝나라고 성령 받은 게 아니고 받았던 성령 안에는 종합선물, 택한 백성은 다 건지는 선물보따리로서 받은 거예요. 만약에 우리가 그것을 믿는다면 우리 구원에 대해서 내가 관리에 나설 이유가 없어요. 주님께서 받은 것이 그냥 흠이 되고 날아가 버린 게 아니거든요. 반드시 자기 백성을 찾아와서 반드시 자기 백성에게 기어이 구원을 해 내는 그 작업을 이미 요단강에서부터 지시를 받은 거예요.
걱정한다는 그 자체가 이상해요. 하나의 예를 들면 정신병원에서 이런 일이 있었어요. 자기를 자꾸 옥수수로 여기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래서 의사가 치료를 오랫동안 해서 옥수수 아닙니다. 사람입니다. 해서 자기가 납득이 되었어요. “아저씨, 옥수수에요?” “아닙니다. 나는 아저씨입니다.” “아, 이제 고쳤구나!” 그래도 걱정이 돼서 다시 “의사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 “네, 건강하게 잘 사세요! 그런데 아저씨, 옥수수에요?” “아니죠. 어디 사람보고 옥수수라고 해요?” “그렇지요?” 그렇게 인사하고 나았다고 생각하고 보냈는데 가자마자 얼마 안 있다가 후닥닥 병원으로 다시 뛰어 들어왔어요. “아저씨 왜 뛰어 들어옵니까?” 저기 보니까 닭이 있다는 거예요. “닭이 있는데 왜 뛰어 들어옵니까? 더 이상 옥수수가 아닌데요.” 나는 내가 옥수수가 아닌 것을 아는데 닭이 내가 옥수수가 아닌 것을 닭은 알 리가 없지 않느냐? 나를 쪼아 먹으면 어떻게 하느냐? 이 말입니다.
나는 예정되어서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것을 아는데 예수님이 내가 믿는 것을 주님이 안 알아주면 나는 어떻게 하냐? 이게 정신병이에요. 나는 내가 구원받은 것을 아는데 막상 심판주 되시는 주님이 내 마음을 안 알아주면 나는 쪼아 먹히는 옥수수가 되잖아요. 그럴 때면 나는 어쩌면 좋죠? 의외로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소위 신학자들, 목사, 교수들 가운데 말은 안하지만 이런 정신상태가 거의 대부분입니다. 교인들도 이런 정신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주의 뜻을 모르니까 기껏 해 데는 것이 나는 옥수수가 아니고 사람이다. 주여, 믿습니다. 믿습니다! 만날 믿습니다만 반복하는 거예요. 믿습니까? 그거 천 번하고 백번하면 옥수수가 사람됩니까? 안되죠. 바로 성령을 받지 못하게 되면 그런 딜레마, 한계에 부딪치게 됩니다. 그러면 성령받은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성령 받은 사람은 그런 생각이 없느냐? 성령 받은 사람도 그런 생각이 있어요. 있는데 그 한계에 부딪치면서 내 생각이 부질없는 생각이라는 것을 소급적인 믿음으로 결과적인 믿음이라는 형식으로 온몸으로 확 자일리톨 껌처럼, 바카향 껌처럼 밀려오죠. 내가 정신병 같은 사고방식을 부질없는 생각을, 걱정을 내가 여태껏 하고 왔구나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나는 나의 존재만 생각했지 나 보다 더 확실하게 계시는 주님의 부활하심, 살아계심을 나의 존재에 밀려서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햇빛을 누가 주시는가? 하나님, 그 정도로 알았죠. 햇빛 누가 주셨지? 하나님, 공기 누가 주셨지? 하나님, 그러면 하나님의 주 특기이니까 잘 하시겠지! 이렇게 되어 버리면 나를 살리기 위해서 햇빛, 공기 준 것이 돼요. 그러면 여전히 주인공이 내가 되어 버려요. 내가 옥수수냐? 내가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짧은 말, 햇빛은 누가 주지? 하나님. 오, 하나님이 햇빛 주셨구나! 그러면 내가 해를 만들었어요? 안 만들었죠. 내가 먹구름 안 만들었죠. 내가 태풍 안 만들었죠. 그러면 이 세상은 누구 중심입니까? 결국 내 중심도 아닌데 나는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내 중심도 아닌 세상을 향하여 나는 내 중심이라고 우기는 이 시추에이션은 어떤 시츄에이션입니까? 이런 황당무계한 불신앙이 다 있어요?
세상이 내가 만든 세상이 아닌데 왜 내가 부질없이 걱정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사는 겁니까? 걱정 안할 수 없고 스트레스 안 받을 수 없지만 그것이 성경을 보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 타고난 육적인 죄성이 발휘되는 순간인데 그 죄성이 발휘되라고 주께서는 믿음을 주셨다는 겁니다. 완벽하라고 믿음 주신 게 아니고 너 주제파악을 늘 하고 살라고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거예요.
성령 주셨고 십자가 왔고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피 흘림의 희생을 보고 죽어 마땅함을 알 때 우리는 주인공이 나에서 주인으로 바꾸는 겁니다. 더 이상 강냉이, 옥수수 아닙니다. 닭이 쪼아도 마귀가 짖어도 상관없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게 있어요. 집으로 가는데 골목길에 큰 개가 왕하고 달려들어서 내 허벅지를 물어가지고 광견병 걸렸는가 싶어서 병원 가서 조심스럽게 진료해서 한 이틀동안 약 먹고 아픈것도 나았다. 그러면 그 골목길 갈 때 마다 뭐가 생각납니까? 골목길 갈 때 마다 개가 없어도 개가 행여나 나타날까봐 걱정되죠. 그것을 상처, 트라우마라 하죠. 트라우마가 없으면 우리는 행복하겠죠.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방식이 아닙니다. 온천지에 트라우마가 없는 곳이 없게 만들어 놓고 우리로 하여금 주만 쳐다보게 하시는 방식이 주님이 채택하신 구원의 방식입니다.
나는 이길 수 있어! 라고 했는데 욱- 어우 무서워라 할 때 우리는 다시 어디로 가느냐! 사사기로 돌아가는 거예요. 주여, 주께서 인생책임 져 주세요. 항상 주님만 쳐다보게 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연속입니다. 주님만 크게 보이고 나는 쪼다 바보 멍청이 나는 겁쟁이로 만날 벌벌 떨면서 사람들에게 고개숙이고 돈 앞에 고개 숙이고 만날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초라한 그러한 인생에 불과함을 늘 작게 여겨지고 그것이 더욱더 부각되면서 주님만 바라보게 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야말로 자진해서 소자되는 거죠. 잘난 게 없는 거예요. 제자들이 성령 받고 난 뒤에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좀 힘들다고 주여, 힘듭니다. 이랬습니까? 성령 받고 난 뒤에 제자들이 모여서 하나님이여, 제가 하늘나라에서 높습니까? 성령받기 이전에 그런 것을 했는데 성령 받고 난 뒤에는 그런 생각을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안 하죠. 왜냐 하면 모두 쪼다인 것을 스스로 다들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그게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쪼다 된다고 굶어죽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자랑할 것은 주님밖에 없음을 고백하죠. 그때부터 어떻게 되느냐 하면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주님밖에 없기 때문에 이런 인간은 괜찮죠! 라고 하게 되면 거꾸로 그야말로 애들 출산할 때 엉덩이 때려서 숨통이 터지게 하는 것처럼 주께서 우리의 발목을 쥐고 거꾸로 들고 우리를 흔들게 되면 탈탈 다 털리게 되어 있죠. 그렇게 되면 아하 이런 것까지 라도 나를 지켜 주는 동전이라 여겼구나! 땡그랑! 땡그랑! 그동안 나를 지켜 주는 부적들, 징크스, 이런 미신꺼리 십일조 하니까 복 받을 거라는 것, 부모 공경하니까 아마 복이 올 거야! 사법고시 합격할거야! 뭔가 내가 하는 행동으로 인하여 내가 기대하는 그 기대치가 금방 금방 이루어 진다는 그 모든 미신적 요소, 이렇게 더운데도 허겁지겁 교회에 나왔으니까 이번주에 계약건 있는데 아마 성사 잘 될거야! 라고 하는 그 미신들, 기도 많이 하니까 장사 잘 되던가요?
주님은 우리의 행동에 대해서 아예 책임추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내 행동여하에 따라서 내가 이 땅에서 복 받는다는 미신을 꽉 쥐고 싶은 거예요. 쥐고 있으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여에 말려든 겁니다. 그래, 저 정도, 결혼 안 할 정도가 돼서 주님을 섬겨야 복을 받지, 음식도 고기라고 허겁지겁 먹을게 아니고 절제해서 주님 본 받아서 거친 음식을 먹어가면서 희생적인 모습을 보여야 복받지! 라고 하는 식으로 말려 들어가는 거예요.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인간을 쥐고 주께서 털면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죄를 짓고 있었다는 것이 들통 납니다. 죄 아닌 것이 없습니다. 죄 아닌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구원파처럼 안되는 거예요. 구원파의 교리는 뭐냐? 주님께서 죄를 다 사했기 때문에 더 이상 죄책감을 갖지 말라는 것이 구원파의 교리입니다. 얼마나 획기적이에요.
그런데 사도 바울의 이야기는 그게 아니잖아요. 사도 바울은 말씀을 줘 놓고 그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소위 죄 아니라 하는 것도 뭐가 된다? 죄로 드러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고만장 하는 것과 전혀 거리가 멀고 늘 자숙할 수밖에 없는 입장입니다. 늘 나를 낮추어서 살 수 밖에 없어요. 그리고 모든 일에 과분하게 느끼고 감사하고 남편이 술먹고 와서 달려들면 맞아도 그래 나 같은 인간은 맞아도 싸! 왜냐 하면 나는 술도 안 먹고 나는 남편 말 고분고분 잘 듣고 나는 교만할까봐 주께서 이단 옆차기 들어오는구나 하고 이렇게 받아 들여야 돼요. 받아 드리는 것은 이론이고 실제로는 119에 신고하겠지만요.
우리가 마음을 억지로 낮추게 되는 것은 마귀, 악령의 일이고 이게 안 낮추고 싶은데 낮추는 순간순간을 허용하시는 것은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왜냐 하면 성령의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구원이 내 일이 아니에요. 내 구원에서 손을 떼세요. 손을 떼시고 우리의 영혼을 주님 앞에 두세요. 주님 앞에 두시고 우리는 손을 떼세요. 왜 남의 일에 우리가 관여합니까? 구원은 주님의 일인데요. 우리는 죄인인 것을 들춰내면 그 들추어진 그 자체만 감사하면 돼요. ‘엄마, 또 수학 100점 맞았어! 나 이러다가 지옥 갈 것 같아!’ 이런 기쁨을 가지라 말입니다. 엄마, 나 요새 왜 이렇게 공부가 재미있나 몰라! 이러다가 서울대학 가서 주님 모른다고 할까봐 겁나! 공부 잘해도 항상 마음을 낮추고 공부 못하는 것은 원래 공부 못하는 것이니 낮출 필요도 없고요.
사람이 공부를 좀 해 보면 공부를 잘한다는 수준이 어느 수준인지 끝이 없어요. 어느 정도 해야 공부 잘하는 것인지, 반에서 1등? 아이고 그 다음에 전교 1등! 나중에 우리나라에서 몇 등 이렇게 되면 한도 끝도 없어요.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죄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죄를 버려도 새롭게 만들어 지고 또 만들어 지고 합니다. 왜? 우리의 욕망이 계속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계속 만들어 져요.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만해 하기 위해서 계속 내가 법을 만드는데 그 만드는 법이 뭐냐? 그렇다, 나는 결혼 안 할 거야! 그렇다, 나는 맛있는 음식은 안 먹고 맛 없는 음식만 먹어야지! 나는 청국장만 먹을거야! 이게 뭐냐 하면 이게 마귀에요.
일곱 마귀 들어온 거예요. 제발 그냥 사세요. 구원은 주님께서 맡기시고 그냥 사세요. 내가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안 먹으면 구원이냐 내가 묻는 타입이 아닌데 하면서 이런 식으로 묻지 마시고 그냥 살면 돼요. 바로 구원파는 우리가 구원을 알았다는 것이 잘난 짓이 되고 말았어요. 복음을 아는 것이 잘난 짓입니까? 구원은 주님의 십자가 능력으로 구원하지 십자가를 믿는다고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를 믿어야 되면 십자가를 믿는 자기가 잘난 존재가 되어 버려요. 그냥 손을 떼시면서 주께서 만들어 가시는 그 구원의 길을 만끽 하세요. 항상 우리로 하여금 낮추고 또 낮추어서 지금 까지 살아온 것이 주님의 은혜인 것을 매일같이 그것을 느끼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뭐가 없는가, 그러면 원칙이나 법에서 없어지고 원칙과 법이 없다는 말은 뭐도 없느냐 하면 그것을 지킬 내가 사라진 것을 말합니다. 주님이 다루는 나만 있지 내가 다루어야 될 나는 없는 거예요. 지금의 나는 주께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내가 나에게 손질할 필요가 없어요.
사람이 손질을 하려면 내가 지킬 만한 법을 내가 또 지어내야 되거든요. 그런 경우가 우리가 아무리 살아도 계속 나와요. 나는 꼭 식당을 가면 저 집은 안가 옆집에 갈거야! 나는 주유소에 저 집에서 절대 주유 안 해! 꼭 이런 인간 있어요. 나는 누구 탈렌트 나오면 절대로 안봐! 꼭 있어요. 그게 뭐냐, 징크스거든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내가 부모를 공경하니까 만사가 잘 되더라! 그래서 구원받는 겁니까? 부모를 공경해요? 나아만 장군이 자기가 문둥병이 걸림으로서 자기 사리를 판단한 것처럼 우리는 부모를 공경한다고 자부하면서 이게 공경이 아님을 아는 순간순간들을 맞이합니다.
헌금을 하면서 이게 도대체 헌금일 수 없어! 이것은 돈이란 집착이 여전히 살아있어! 그것을 헌금하면서 느끼도록 되어 있어요. 항상 우리는 무엇을 하든 간에 성령 받은 사람은 우리가 지킬 법은 따로 정해 져 있지 않았다는 겁니다. 결혼하시고 결혼 잘 안되거든 이혼 하세요. 갑자기 기쁜 소식을 전하게 되었네요. 경제적 여건이 안 되거든 자식 살리기 위해서 이혼 하시고 믿음으로 때운다고 말에 현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현찰이 중요하지 믿음은 자식 키우는데 전혀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하시는데 주님이 안하게 하실 때는 하지 마세요. 결국 제 말은 주께서 시키는 대로 하세요. 어떻게? 현재 있는 상황이 주께서 시킨 상황인 것을 받으세요. 주께 맡기시고 주께서 주신 상황을 도로 받으세요. 이게 성령에 취해서 온 사람입니다.
이게 사도 바울이에요.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기뻐하라! 그것이 주안에서 하나님의 뜻이다. 그리고 난 뒤에 뭐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은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며 버릴 것이 없는 거예요. 개고기가 되던 곱창이 되던 순대가 되던 이 세 가지 못 먹습니다. 개고기, 순대, 돼지국밥 못 먹어요. 확실하게 못먹습니다. 그런데 이 못 먹는게 죄가 돼요. 왜? 주께서 먹으라 하는데 먹어야 되지요. 주여, 이거 못 먹습니다. 하는 자체가 순간 내가 나타나요. 나는 그것을 절대로 안 먹는 ‘나’가 또 등장하는 거예요. 그게 안 먹는 게 나에게 법이 되어 버리죠. 그러면 그것은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겁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히 받으라는 말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고 그렇게 하도록 내가 조치할 테니까 니가 그 순간 나는 이렇게 내 힘으로 되지 못한 죄에 대해서 참여하면 그만이에요. 주여, 내 힘으로서는 범사에 감사하지 못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감사케 하시니 이것은 성령께서 내 인생을 관리하고 있다는 증거로 믿겠습니다. 이렇게 하세요. 주님이 제일 좋아 하시는 것은 바로 상한 심령이에요. 시편 510편에 상한 심령을 제일 좋아 하십니다. 주님이 좋아하는 것도 모르고 자기 좋아 하는 것을 하면 안 되잖아요.
아까 했죠. 내가 문제 제시하면서 해결책도 덩달아서 같이 병행해서 갖고 있다고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방법은 뭡니까? 주님이 문제 제시하시고 그 해결책도 누가 해결한다? 문제는 주님이 제시하고 해결책은 우리보고 하라는 것입니까? 아니죠. 문제를 제시하면서 해결법도 문제 제시할 때 이미 뒤에 뭐가 따라옵니까? 해답도 있는 거예요. 수학 참고서 사 보세요. 뒤에 뭐가 달려있습니까? 이미 해답이 달려 있어요. 해답이 없는 문제집은 문제집이 아닙니다. 해답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안심 푹 놓고 하죠. 이미 해답을 알고 우리는 우리가 문제 있다는 것을 또 다시 소급해서 아는 겁니다.
3절에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이 말이 어려운 것이 뭐냐 하면 그러면 마귀가 선합니까? 가룟유다가 선합니까? 지옥 가는 사람이 선합니까? 선한 사람이 다 지옥갔네. 지옥갔는데 선한 사람만 모였네. 그런 겁니까? 지옥을 만든 하나님은 선합니까? 선하지 않습니까? 선하죠. 그러면 지옥 안에 들어있는 악마와 그 추종자들은 선합니까? 선하지 않습니까? 이제는 무슨 말을 못하겠죠? 제가 뒤집을까봐 걱정돼서요. 조심하지 마세요. 조심한다고 의인되는 것 아니니까요.
지옥 갈 사람은 악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악인은 악인의 부활로 나온다고 했죠. 그런데 그 악이 무엇에 봉사한다? 악마는 천사거든요. 악마는 주님을 위해서 봉사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모든 것이 주 안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룬 겁니다. 그래서 반대가 일치되는 것을 제가 뭐라 했습니까? 아멘이라 했죠. 제가 지난 주일에 했죠. 아멘은 뭐냐, 반대의 일치를 아멘이라 합니다. 분명히 우리 눈에는 모순되는데 주 안에서는 모든 것이 ‘예’가 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하는 일이 주안에서 아니오가 없고 전부 다 예가 되고 아멘 되느니라 라고 나와 있어요. 보세요. 사도 바울이 성령 받고 난 뒤에 얼마나 자유롭습니까? 그야말로 진리로 자유케하는 교회아닙니까?
그 다음에 봅시다. ‘딤전 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이 5절 말씀을 1절에 배치하지 않고 5절에 배치했어요. 그러면 1절부터 3절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말씀에 해당됩니까? 안됩니까? 말씀에 해당 안 되죠. 거룩함에 해당됩니까? 안됩니까? 거룩함에 해당 안 되죠. 따라서 기도를 제대로 할 내용입니까? 아닙니까? 기도 할 내용이 아니죠. 그러면 5절에 도달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지려면 필히 어느 터널을 통과해야 됩니까? 1절에서 3절을 통과해야 되겠죠. 그러면 1절과 3절의 내용은 불신자의 말입니까? 오늘날 우리보고 하는 이야기입니까? 오늘날 우리 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만날 법칙을 내가 스스로 내 잘남을 위하여 만들어 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정당함을 만들어 내요. 나름대로의 규칙과 명색을 만들어 내거든요. 교인들 앞에서 저 목사로서 지금 까지 이것 하나는 지켜 왔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았어요? 그래서 구원받는 겁니까? 이것을 신앙적 영웅주의라고 합니다. 이 놈의 영웅주의가 교회 내에 살아 있어요. 영어로 하면 엘리트주의, 뭔가 나는 너하고는 노는 물이 달라! 어딜 넘봐! 하는 엘리트, 또는 고수, 또는 자칭 스승, 이런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스승과 고수와 이런 영웅주의를 숭배하는 것은 그 사람을 좋아서 숭배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 사람 속에서 자신의 미래를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언제가 너처럼 되고 말겠다는 어떤 라이벌 의식을 고취시키는 하나의 견본이 되기 때문에 그 사람한테 아부하는 척을 하고 있는 겁니다. 회사직원이 사장한테 고개를 숙이는 것은 나도 너만큼 돈이 있으면 너한테 고개 안 숙여 라는 그런 나약한 심정을 그나마도 보상해야 마음이 편하고 싶은 자기 자체적인 회복, 메카니즘이 작동해서 그렇게 허세와 허풍을 떱니다. 그러면 말합니다. 사장님이 방금 이대리가 뭐라 했나? 아닙니다. 저 혼자한 말입니다. 뭐 불만 있나? 아니, 불만 없습니다. 이게 사회거든요. 이게 레잇비, 세상은 될 때로 될 수 밖에 없어요. 세상은 그렇게 짜여 질 수밖에 없어요.
힘 있는 사람을 질투하고 미워하는 것은 본인이 거룩해서가 아니라 같이 치사하고 같이 속물이기 때문에 부러워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부자를 부러워했습니까? 그야말로 노는 동네가 다르죠. 한 쪽, 사도 바울은 성령 받았고 이쪽은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기껏 자랑할 것이 남들이 원하는 것을 자랑할 수밖에 없는 자랑꺼리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자랑하느냐, 예수님을 자랑했다 이 말입니다.
성경의 모든 포인트가 구약에서부터 나오죠. 그러면 현실이 뭐가 현실입니까? 구약이 있음이 현실이고 이스라엘이 있음이 현실이잖아요. 그런데 우리들의 일상은 신월동에 사는 우리 일상들은 이스라엘을 느낍니까? 안 느낍니까? 이스라엘을 안 느끼죠. 우리 민족은 한 민족이고 우리 민족은 배달의 민족이잖아요. 말 타고 자장면 배달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민족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난데없이 자꾸 뭐라 합니까? 이스라엘은 어떻고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고 성령이 어떻고 마귀가 어떻고 자꾸 딴 소리를 늘어 놓는 거예요.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늘 이 말을 강조하고 싶은데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 없다? 벗어날 수 없다는 겁니다. 결국 갇혀있는 거예요. 우리는 갇혀있는 상태에서 기껏 그나마나 최선을 다하고 싶어 하는 우리의 속물 근성이다 이 말입니다.
갇혀있지만 그나마도 편하고 갇혀있고 오래살고 건강하게 갇혀있는 그것, 그런데 하나님은 그게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아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창녀라도 괜찮고 강도라도 상관없어 근본해결책만 제공된다면 창녀이던 강도이던 관계없어요. 그게 뭐냐? 이스라엘의 계통을 따라서 나온 메시야가 너희를 방문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분이 방문을 했다면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느냐? 그것은 우리가 세상적 관점에서 보는 윤리적 도덕적 관점의 죄인이 아니고 하나님의 십자가 앞에서 뭘 해도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미 완료된 상황에서 우리가 수동적으로 수긍하도록 되어 있어요. 저는 뭘해도 죄인입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말씀을 주신 것은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죄악된 것을 취득하기 위해서 말씀을 주신 거예요. 있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 돈을 사랑하지 말라! 하고 싶은데요. 그러니까 너는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죄악된 사고방식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뭔가 맹세하고 싶고 맹세가 과연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반드시 이루어 져서 과연 살아 계시다는 것을 내 눈으로 시험해 보고 싶은 충동도 생기고 괜히 어떤 목표를 정해 놓고 이것까지 해결해 주면 하나님이 살아있지롱! 이런 식으로 하나님과 흥정합니다.
주님 십자가 앞에서는 너무나 거룩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분 앞에서 우리가 근본적으로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것 자체가 더 이상 필요치 않는 그것 자체가 완전한 우리의 성도됨의 증거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증거를 뭐로 보느냐 하면 어떤 목표를 해 놓고 이거 내가 영어를 100점 맞으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안 맞으면 하나님이 안 살아 계신다고 스스로 목표를 정해 버리면 내가 죄인이라는 성령의 기준점은 날아 가버리고 그 자리에 그것을 뭐로 대체가 되느냐 하면 나 잘난 나로 대체가 되어 버리는 거예요.
예를 들면 하나님이여, 내가 이번에 40일 금식 들어가는데 과연 40일 금식해서 굶어죽지 않고 살아나면 하나님 살아계심을 믿겠습니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그 사람은 40일 금식한 것이 십자가를 대체하는 대체물이 되어 버린 거예요. 바로 악마가 어떤 식으로든 십자가를 가려버리면 악마는 성공한 거거든요. 이 악마가 그 짓을 한 거예요. 본인이 어떤 법을 만들어 놓고 그 법을 성실히 지킴으로 말미암아 십자가를 배척하고 자기 자신이 살아계신 증명이 되고자 하는 이 속성, 본성이 죄인 줄 알아야 돼요.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뭐를 금하고 뭐를 먹지 말고 뭐를 하지 말라는 그 말씀은 오늘날 우리가 평소에 하고 있는 그것을 그대로 반복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5절에 나와 있는 말씀은 뭡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기도 제대로 하신분이 누구죠? 예수님입니다. 말씀성취하신분이 누구죠?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 안에서 뭘 발견해야 됩니까? 기도 제대로 하신 분, 그분의 기도는 취소가 없고 완성이 된다는 것과 그리고 주의 말씀은 이미 완성하고 거룩 된다는 겁니다. 그 사실을 우리가 믿으면 우리가 뭐가 됩니까? 의인됩니다.
그러면 목사님, 믿기만 하고 행동으로 안 옮기면 안 되잖아요? 우리가 만들어 낸 믿음은 믿고 난 뒤에 행동을 또 추가해야 돼요. 그런데 주님이 주신 믿음은 그 믿음 자체가 행동을 유발시키기 때문에 그런 추가적인 비용이 들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추가적인 돈을 요구하거든 이단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말고 다른 것을 요구하면 이단입니다.
구원파? 그거 예수 아닙니다. 구원파, 유병언을 좋아하지 않아요. 자기들이 내 놓은 돈을 키워주니까 그게 좋은 거죠. 그래서 구원파 마지막에 내린 결론은 ‘우리의 재산은 우리가 지킨다!’ 입니다. 결국은 돈 문제잖아요. 그럴 줄 알았어요. 교회가 깨진다. 그런데 복음을 들어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교회 비품 누가 가져가나? 마이크 누가 가져가나? 돈 문제에요. 목사가 교회를 떠나면서 퇴직금 얼마면 되겠어? 돈 문제에요.
우리가 생각했던 그런 고상한 것 이 세상에 없습니다. 고상한 것을 찾겠다는 자체가 일종의 우리가 기대한 맹세일수 있으니 주의 하세요. 내가 고상하지 않는다면 남도 고상하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 눈에 고상하게 보이거든 주께서 감사하라고 감사꺼리 하나 더 추가 한 거예요. 멀리보이는 파랑새가 파랗게 예뻐 보이죠. 그때가 좋아요. 가까이 집에서 파랑새 키우면 냄새나고 벌레생깁니다. 파랑새 키우면 안됩니다. 파랑새는 전문적으로 키워야지 집에서 키울 수가 없어요. 멀리서보면 그야말로 아름답지만 가까이서 보면 다 추한 것들입니다.
이것은 남들이 그렇다는 말이고 내가 남에게 다가서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는 어떤 노림수 없이 행동한 적이 없는 존재입니다. 힘듭니까? 힘든 만큼 댓가를 얻어서 그 힘든 것을 보상 받으려는 심리를 떠나본적이 없어요. 왜? 땅의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의 어떤 행동도 우리의 원하는 그러한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준비해 놓은 해결책으로 우리에게 찾아옴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문둥병 걸려도 마땅한 그런 존재인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영생을 허용하시는 겁니다. 왜냐 하면 이 못난 점을 통해야 주님만 잘난 분이 등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주님 생각 외에는 아무 다른 생각이 없어요. 주님만 잘되면 우리를 어떻게 다루든지 주님께서 아무 손해가 없습니다. 원래 주님은 손해 안보는 분이거든요. 따라서 우리가 그 마음을 가집시다. 주여, 어떻게 다루던 내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 되기를 바랍니다. 빌립보서 1장 20절에 나온 말씀입니다.
빌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죽든지 살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 되시면 그게 원래부터 주님이 생각하셨던 원래 계획 맞잖아요. 전 눈치 챘습니다. 이게 사도 바울이 성령 받고 난 뒤에 고백입니다. 우리가 눈치 챕시다. 주님의 계획은 이미 확정됐다는 것을 눈치 채시고 우리가 움직이는 모든 것은 주님의 관리 하에 주님께 영광 돌리는 쪽으로 관리하에 움직이니까 그 모든 것이 주님이 드린 기도와 그리고 말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 말씀과 기도가 우리한테 퍼지게 되어 있습니다. 퍼지게 되면 우리는 그 말씀과 기도로 우리가 죄인 됨을 알 때 우리 몸에서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형제의 우애가 나오면서 우리는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 지고 있다는 상황을 외부에 증거할 수가 있는 겁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뭔가 경유해야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 지는 것을 아는데 우리는 내 힘으로 말씀 배우고 내 힘으로 기도 함으로서 마치 우리 힘으로 거룩해 진 존재인 것처럼 그동안 착각했습니다. 이제는 성령으로 인하여 그것 자체가 죄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