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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강의-출애굽과 중생140905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9. 26. 18:15

2014-09-05 23:51:55 조회 : 156         
출애굽과 중생 140905 이름 : 이근호 (IP:119.18.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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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 (IP:119.♡.174.28) 14-09-12 16:16 
20140905a 울산강의-출애굽기 32장 : 출애굽과 중생
(강의:이근호 목사)


출애굽기 32장 19절부터 보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대목이, 오랜만에 모세가 하나님과 헤어지고 하나님이 주신 돌 판을 가지고 40일 만에 산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내려왔는데 산 밑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어요. 송아지를 만들어놓고 이것이 애굽에서 우리를 인도해낸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노래하고 춤추면서 파티를 연 거지요. 그것을 19절에 보면, 모세가 대노해서 들고 있던 돌 판을 산 아래로 깨버렸다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여기 우리가 생각하기에 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이 나와요. 그들이 하나님을 몰랐잖아요. 몰랐기 때문에 모르는 데서 나오는 행동을 했을 뿐입니다. 모세 같은 경우에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잘 가르치면 되잖아요. 스승이 뭡니까? 무지한 제자들을 잘 가르치고 달래서 위로와 격려하면서 이것이 하나님이라고 알려주면 그들이, 하나님을 직접 보셨기 때문에 우리는 당신에게 무조건 순종하겠나이다. 이러면 모세와 백성 사이가 틀어질 일도, 화낼 일도 없단 말이죠.

하나님을 안 봤으니까 몰라서 하는 행세를 했을 뿐이지 모세는 하나님을 직접 봤으니까 저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그럼 아는 쪽에서 마음에 넓은 아량을 가지고 모르는 사람들을 어여삐 여겨서 가르치면 되잖아요. 그런데 가르치기는커녕 무슨 이런 불같은 성질이 있습니까. 그 귀한 돌 판을 땅으로 던져서 부서지게 만들고. 부서졌다는 말은, 그동안 40일 동안 하나님 만난 모든 성과가 성질 급해서 일거에 다 날아가 버린 셈이 되잖아요. 건져온 것도 깨버렸으니까.

그리고 20절에 보니까 모세가 그들이 만든 송아지를 부셔서 가루로 만들어 물에 뿌려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시게 한 겁니다. 이게 무슨 해독주스입니까? 말씀을 갈아마셨으니까 효험이 있어서 그렇게 한 거예요? 이런 행동도 과격한 행동. 그러니까 모세가 하는 행동들이 전부 납득을 시키는 행동이 아니고 본인이 성질을 못 이겨서 나오는, 본인이 참지 못해서 나오는 격앙된 행동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21절에 보면,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 백성이 네게 어떻게 하였기에 네가 그들로 중죄에 빠지게 하였느뇨” 백성들이 형님(아론)을 꼬였기에 이런 중죄를 짓게 했습니까? 22절에 형 아론이 하는 말이, “내 주여 노하지 마소서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나이다”

여기서 또 우리가 이해가 안 되는 것은, 금송아지 섬기는 것이 악한 짓입니까? 성추행이라든지, 도둑질, 그런 게 악하지 애굽에서 건너온 신을 나름대로 묘사해서 송아지 모습으로 해서 신은 보이지 않으니까 보이는 형식을 매개로 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게 그렇게 중죄고 악한 짓이 되느냐 이 말입니다.

교도소에 가보세요. 하나님 안 섬긴다고 잡힌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현대인들에겐 그게 죄도 아니죠. 하나에 취미생활이지 취향이지. 이슬람 나라에서는 모르겠습니다만 한국 땅에서, 종교의 자유가 땅에서. 종교의 자유 운운하기 이전에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신을 표현할 자유가 있는데 그것이 모세가 본 방식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일방적으로 모세를 기준해서 중죄다, 악하다고 타인의 자유로운 종교생활을 함부로 폄하하고 우습게 봐도 되느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본문 내용은 전혀 오늘날 우리에게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될 이야기는 없어요. 그래서 설명해줘 봤자 소용없는 거예요. 가장 기본부터 들어가면서부터 그게 우선 죄인데? 우상이라고 했지만 모세가 봤을 때 우상이지 본인들은 그냥 우상이 아니고 살아있는 여호와라고 생각해서 섬겼단 말이죠. 물론 방식이 좀 어설프고 유치하지만 그 방식이야 모세가 와서 가르치고 바꾸면 되잖아요. 좀더 친절하게 다독거려주면 얼마나 좋아요. 이건 뭐 성질부터 버럭 내면 일이 되느냐 이 말입니다.

더구나 우리로 하여금 황당하게 느껴지는 것은, 27절에 보면, 모세가 내 편에 설 사람은 이리로 모이라고 한 거예요. 하니까 모세가 가까운 같은 집안인 레위지판가 모이고 다른 지파는 뻘줌하게 있더란 말이죠. 모세가 모인 사람들에게 칼을 빼서 이웃을 죽여라. 율법에는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고 돼있지요. 이웃을 죽이려면 내  몸 같이 사랑하라고 했으니까 자기 몸 죽이고 난 뒤에 이웃을 죽이든지 해야 되는데. 물론 자기 몸 죽이면 남 죽일 힘도 없겠지만 그 정도로 사랑하라는데 그 이웃을 칼로 찔러서 그날에 삼천 명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일가친척, 이웃, 친형제도 있지만 가까운 사이 봐주지 않고 삼천 명 죽였습니다.

모세가 산에서 도대체 뭘 봤기에 막상 당했던 사람, 세월호참사로 몇 달째 그러고 있는데 삼천 명이나 가차 없이 인정사정 볼 것도 없이 칼을 휘둘려서 그동안 정도 있는데 죽이신 하나님이 자비로운 하나님이시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까? 이런 하나님의 입에서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는 말이 과연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느냐 하는 말입니다.

만약에 여기 있는 내용이 우리가 납득이 안 되서 수용 못하고 한쪽으로 밀어놓는다면 오늘 읽었던 내용을 밀어내고 그 내용이 들어오지 않은 상태에서 구성된 하나님은 백 프로 가짜입니다.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직접 하나님을 보고 온 모세가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설쳐대는데 그 설침이 오버액션처럼 느껴지고 과격하게 보이고 뭔가 수긍이 안 된다는 것은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에 이런 하나님의 행동을 여기에 같이 엮고 결합시킬 여지가 우리한테는 안 된다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엉터리 하나님, 있지도 않는 가짜 하나님일 공산이 굉장히 큽니다.

벌써 삼천 명이 죽는 사건이잖아요. 뭔가 사건이 일어났으면 그 사건에 대해서 우리가 박수를 치고, 동조내지는 환호성과 더불어 동의가 돼야 돼요. 그런데 모세가 미친 사람처럼 칼 들고 설쳐서 삼천 명 죽이고 대대로 원수 만들었을 때 동의가 안 된다면 모세가 알고 있는 하나님과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별개의 하나님이에요. 둘 중에 하나는 가짜인데 보나마나 우리가 가짜지요.

그래서 우리가 “이쯤하면 하나님 잘 알겠지.”라고 이렇게 안심할 입장이 못 됩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로 인생을 살게 했을까요? 항상 인생을 살게 하면서 우리가 납득이 되는 것만 편집해서 이것이 하나님 뜻이라는 걸 부수기 위해서 그것을 해체시키기 위해서 계속 살아봐야 되는 거예요. 인생을 계속 살게 되면 정말 거부하고 싶은 일들이 자꾸 일어나게 돼요. 그것마저 하나님의 자비요, 은총이고 사랑이고 은혜라고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의 마음의 폭이 그만큼 넓어졌느냐를 계속해서 되묻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뭔가 안정이 되게 되면 지레 겁을 먹고, “하나님이여, 여기가 좋사오니 큰 일 터지지 않게 하옵소서. 저는 소박하게 이 정도 인생으로 감사하겠습니다.” 우리는 자꾸 이러고 싶어요. 벌벌 떨면서. 지금 편안한데 아무 일 없는데 혹시 남편이 차나 박아오지 않나, 아프지는 않나. 하여튼 생각만 해도 아찔한 게 있단 말이죠.

차사고 난다, 아프다 하는 그 문제는 그냥 현재 우리가 유지하고 있는 성질로 해결하면 그만이지만 성경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고 네 마음 자체에 문제 있다는 거예요. 이 마음으로 멋지게 해결하는 게 아니라 네가 해결할 것은 바깥의 사건이 아니고 네가 지금 정당하다고 여기는 네 마음 자체를 네가 스스로 해결할 입장에 놓여있다는 겁니다. 반복해서 계속해서 주어지는 낯선 사건, 사태들을 통해서. 내가 정리한 이 정리가 제대로 정리가 안 된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수습해버린 거예요. “이 정도면 복음 아는 겁니다.” 하고 일방적으로 서둘러서 이것으로 천국 가려고 버틸 수 있는 자기 무기가 되거든요.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그들이 바알 신이나 애굽 신을 섬긴 게 아니에요. 그들은 지금 여호와를 섬긴 거예요. 여호와를 섬겼는데 섬기는 방식이 잘못됐다고 삼천 명이 날아간 겁니다. 그럼 이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 길게 이야기해봐야 계속 골치 아픈 이야기고 간단하게 먼저 해답을 제시해드리겠습니다.

‘하나님 믿기’에서 ‘예수 믿기’로 바꿔야 된다 말이죠. 하나님 믿으면 안 돼요. 예수를 믿어야 된다고. 이게 안 되는 거예요. 복음증거, 성경공부 왜 합니까? 하나님 믿었는데 이 하나님이 가짜였더라. 그리고 진짜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 믿으라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진짜 하나님이 요구한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생각 안 하고 걸핏하면 어디를 믿느냐 하면, “하나님 믿습니다.” 하고 자꾸 하나님에게 다가가는 겁니다. 하나님을 찾아요. 그만큼 하나님이 좋은 거예요.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보다 덜 좋아요. 너무 끔찍한 일을 저질렀어.

자식이 둘 있는데 하나는 어릴 때부터 몸이 성하지 않고 골골대고 아프고 걸핏하면 엎어져서 다쳐오고. 하나는 부모가 잔소리 안 해도 알아서 공부하고. 공부가 제일 쉬워요, 공부가 너무 재미있다고 자기 방에서 공부만 하고. 오늘도 1등 했다고 성적표 내놓으면서 부모를 즐겁게 하고 아프지도 않고 공부 잘하고 지 할 일 다 하고 애 먹이지도 않고. 여러분, 둘 중에 누가 잘 됐으면 좋겠습니까? 아무 일도 없고 입 뗄 것도 없는 큰 아들이 잘 되는 것이 부모입장에서는 정상적이지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아무 일이 없어요. 고요하게 계신 분을 나도 고요하게 믿는 것, 이 사이가 고요한 사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우당탕탕이라. 이 땅에 와서 얻어맞고 고난당하고. 예수 이야기만 하면 짜증나. 그냥 빨리 십자가나 지고 다시 고요함으로 모든 걸 정상으로 되돌려놨으면 좋겠어. 예수님을 왔다고 훅 가는 그것만 하면 좋겠어. 예수님은 무시하고 싶고 하나님은 큰 어르신이니까 여전한 것 같아요.

우리가 만약에 예수님을 믿게 된다면 예수님과 같이 그 노선에 들어서는 셈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에 준비가 안 돼있거든요. 지금 이 땅에 사는 것도 우당탕탕인데 거기다 예수까지 믿으면 더 요란스런 소리가 날 텐데 어떻게 할 거냐 이 말이죠.

이번 중국 문등에서 강의하면서 마지막 시간이 이런 이야기했거든요. 레위기 보세요. 버틸 수 없이 무거운 율법이잖아요. 허리가 휘어진다는 표현을 써도 적절치 않아요. 너무 무거워요. 레위기부터. 너무 무거우니까 차라리 레위기가 안 보이는 쪽으로 객석의 방향을 바꿨으면 좋겠어. 레위기가 쫓아올까봐 레위기 안 쫓아오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에요.

마태, 마가는 아주 정겨워요. 그런데 레위기, 민수기, 느헤미야, 에스라 하면 골치 아파. 요옐, 에스겔, 이사야. 예레미야 보면 맨날 울고 질질 짜고. 짜증나. 안 그래도 세상 일로 바쁘고 짜증나는데 성경까지 그러면 짜증나는 거예요. 차라리 어떤 사람 말처럼 아가서가 좋아. 나는 널 사랑한다. 얼마나 로맨틱합니까. 전도서도 괜찮아요. 헛되고 헛되니 니 마음대로 살아라. 이게 얼마나 복음처럼 들려옵니까. 그런데 레위기는 맨날 잡아라. 사방으로 피가 막 튀는 것 같아. 난타도 아니고. 도마로 온 천지에 피 칠을 해요. 그걸 누가 봅니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그런 내용을 배제하고 내 마음에 드는 것으로 하나님을 다시 규정할 때 백 퍼센트 엉터리입니다. 이들이 하나님 믿어서 문제됐어요. 하나님 믿지 말고 예수를 믿어야 돼요. 너희들이 상상한 하나님과 너희들이 들고 들이는 하나님과 실제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은 길이 안 맞게 돼있어요. 점잖으신 하나님과 대노, 크게 노하시는 하나님과 안 맞게 돼있단 말이죠. 그래서 신약에서는 어떻게 하느냐? 다시 태어나라.

한국에는 일년에 큰 명절 두 개 있잖아요. 설과 추석. 설과 추석 지나면 다시 태어나 집니까, 중생됩니까, 거듭납니까? 아니지요. 주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은 이렇게 합니다. 네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다시 태어나야 되는가? 내가 생각한 하나님 잘 믿는 이상, 모델케이스를 생각해서 자학하고 굶고 착한 일 하고 머리 홀라당 깎고 모든 재산을 교회에 바치고 길에서 노숙하면서 고난 길을 가면서 40일 금식까지 하면서 그런 자아의 모습으로 스스로 다시 태어나야 되는지. 어떤 것이 다시 태어났다고 했을 때 태어났다, 않았다는 것이 어떤 모습인지 미리 알아야 그걸 목표 삼아서 시도하고 노력할 수 있는데 그걸 사람들은 궁금해 하거든요.

그런데 성경은 그런 목표점이 없어요. 왜냐하면 다시 태어날 때 홀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게 아니고 뭔가 버무린단 말이죠. 오른쪽으로 비비고, 왼쪽으로 비비듯이. 새우 튀길 때 새우에 계란 풀어서 튀김가루로 옷을 입히지요. 생채나 샐러드 할 때 버무리잖아요. 우리를 거듭나게 할 때 거듭나게 하는 버무림이 따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져야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주신 떡과 더불어 버무려져서 다시 태어나야 돼요. 새우가 지가 알아서 계란도 없이 그냥 뜨거운 기름에 풍덩 빠져봐야 새카맣게 탄 새우 안 먹습니다. 계란에 옷 입혀서 다시 나와야지요.

신약에서는 다시 태어난다고 이야기했지요. 출애굽기에서는 탈출하라는 겁니다. 이번에 수련회에서 했지만 탈출하라고 명령하지만 우리는 탈출할 명분도 이유도 모릅니다. 탈출해야 될 뚜렷한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아예 탈출을 생각 안 하고 있어요. 그냥 남 뒤 꽁무니 따라가면서 남이 사는 식으로 그렇게 살아가는 게 사는 것이라고 이미 결정 내렸어요. 남들처럼 살면 곧 그것이 사는 것이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다시 태어나야 된다, 구약에서는 탈출하라. 어디서 어디로 탈출합니까? 눈에 보이는 이게 다인데 어디서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바로 모세가 화를 낸 것은 다른 게 아니고 탈출의 의미를 그들의 애굽적인 사고방식으로 무효화시켰단 말이죠. 탈출의 의미가 그 집단, 그룹 속에서 찾아낼 길이 없어요. 신약으로 이야기하면, 예수님으로 버무려서 두 번 태어나야 된다는 취지가 완전히 없어져버렸어요.

그렇게 되면 모세가 보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에서 죽었던 애굽 군사들과 같이 진즉에 홍해 물에 빠져 죽었어야 될 똑같은 인간이 되는 겁니다. 출애굽기 14장 30절, “그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의 애굽 사람의 시체를 보았더라”

애굽 사람들의 시체가 보였지요. 그러면 홍해가 뭡니까? 홍해는 죽이는 거지요. 홍해사건은 주님이 일으킨 사건입니다.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 사건이 아니고 장차 예수님과 관련돼있는 사건이 홍해사건인데 결국 예수님과 관련된 사건이라 함은, 사람을 살리는 사건이 아니고 죽이는 사건이에요. 어린양의 피를 바르라는 사건도 결국은 애굽의 장자를 죽이는 사건이고, 그전에 열 가지 재앙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히브리인들은 자체적으로 살 가치가 없어요.

땅콩으로 버무린 튀김과자거든요. 계란으로 버무린 새우튀김이란 말이죠. 자체적으로 이미 진즉에 애굽 군사들의 시체가 널브러진 홍해 바닷가에 그들도 같이 죽었어야 돼요. 그리고 어린양의 피 안 발랐던 옆집에 착한 애굽 아줌마의 통곡소리가 사실은 히브리인들의 통곡소리라고 해도 마땅합니다. 그들은 전혀 구원받는다든지 구원될 자격과 이유를 전혀 모릅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은 그들을 구원하려 하심이 아니고 너희들이 누구와 버무려져있는가? 그분을 예수님을 그들을 통해서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선 임의로 히브리인들을 임시적으로, 비정규직으로 채용한 겁니다.

사장이 노동자를 위해서 회사 만들지 않습니다. 사장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 공장을 내는 거예요. 그럼 직원들은 비정규직, 임시직이지요. 채용한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만든 공장에서 하는 일이 뭐냐? 진즉에 죽어야 되는데 하나님이 보내신 장차오실 메시아 때문에 너희들은 지금 숨쉬고 산다는 겁니다. 누구 덕분에? “장차오실 메시아 덕분이에요.” 그 소리하라고 그들을 함께 하는 상태를 구원이라고 하는 거거든요.

노동자들의 자체적인 아이디어는 필요 없어요. 그런 것을 내세우는 것은 용서가 안 되는 겁니다. 모세가 화내는 것은 그거에요. 왜 출애굽의 의의를 너희들이 상실했느냐 하는 겁니다. 상실했으면 어떻게 합니까? 다독거려서 잘 가르치면 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다시 원래대로 가야 돼요. 그걸 바닥을 친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모든 사건은 우리의 몸으로 인하여 가려졌던 것을 우리의 몸을 잠시 벗겨놓고 우리가 딛고 있는 그 자리를 다시 파는 겁니다. 뿌리를 보는 겁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인지, 반석 위에 지은 집인지 다시 파고 들어가는 거예요.

우리 인생이 사는 이유는, 살면 살수록 바닥이 어떤 바닥으로 돼있는지 그 바닥을 늘 점검하는 차원에서 우리로 하여금 인생을 계속 살게 하는 겁니다. “너희 집에 이런 일이 있으니까 날 욕하지?” “아닙니다.” “기초가 단단하구나.” “그 정도로 욕 봤으면 슬슬 날 버릴 때가 됐는데?” “아닙니다.” “오호. 아직도 바닥은 탄탄하구먼.”

이게 거지 나사로 같은 경우에 재산도 없는 거지에다가 자기 몸은 온통 안 아픈 곳이 없는 그야말로 병자의 모습이라면 보통 억지로 믿는 사람 같으면, “이만큼 참았으면 하나님도 양심 있으면 이제는 내가 배반해도 이해해주겠지.” 이렇게 되잖아요. 그런데 거지 나사로나 사도 바울이나 참 신앙인의 경우에는 어떻습니까? 내가 약한 데서 도리어 강함이라고 나와요.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내가 스스로 강해서는 안 된다는 그 이야기입니다. 내가 스스로 자립하고 스스로 힘으로 잘 할 수 있다면 그때부터 내 기초를 내가 닦아버려요. 나의 자랑 거리로 채워버린단 말이죠.

그러면 그건 생새우가 돼요. 뭔가 덧입는 게 없어요. 땅콩으로 버무린 튀김과자가 아니고 땅콩 없는 그냥 튀김과자에요. 뭔가 버무린 요소가 없어요. 그래서 출애굽기 32장 본문을 보면서 이 대목을 그렇게 많은 사람이 봤지만 도대체 모세가 왜 화를 내는지 이해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 것 같아. 주석을 봐도 그래요. 모세, 참 성질하고는. 잘 가르치면 될 걸 가지고.

가르칠 문제가 아니고, 예를 들어서 추석이라고 송편을 만들었는데 철없는 갓난아기가 회를 쳐버린 거예요. 백 개 만든 송편이 못 먹게 됐어요. 그럴 때 어떻게 해야 됩니까? 잘했다고 해야 됩니까? “내일 쓸 송편을 망쳐서 어떻게 해. 다시 만들어야 되겠네.” 다시 만든다는 게 얼마나 아픕니까? 모세는 그 아픔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송편, 땅에 던져서 다 깨버렸어요. 짜증나서 추석 안 한다.

우리가 어릴 때 들었던 기억에 의하면, 어떤 큰 며느리가 혼자서 전 부치고 반찬 다 해놨는데 동서들은 늦게 오고. 시어머니는 동서들이 봉투 좀 준다고 편드니까 큰 동서가 상 걷어찼어요. 추석 안 한다고.

결국 이게 모세가 돌 판을 던지고 삼천 명 죽이는 것은 이스라엘은 너희들의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내 것 또는 함께 있는 하나님의 것이지 이스라엘의 것은 아니에요. 삼천 명을 죽이든 끽 소리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홍해 가에 널브러진 시체 주워 모아서 지금 시내산까지 끌고 왔기 때문에. 그래서 대노라고 하는 겁니다. 이 시점에서 이 처참한 시점을 홍해 건널 때만큼 원상복귀하려면 지금보다 아프고 아픈 희생이 하나님 쪽에서 또 제시될 것이 뻔하다는 것을 모세가 알고 있습니다.

큰 동서가 성질나서 상 엎어버리자 그제야 시어머니가, “내가 잘못했다.” 동서들이, “형님, 형님 아픔을 몰랐습니다.” 하고 사과는 할 수 있을지언정 밤 열두 시 지나서 다시 만들려고 하면 다시 음식 준비해야 되는 아픔이 있잖아요. 이게 바로 언약이라는 겁니다.

제가 좀 어렵게 이야기했는데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언약은 갈수록 바닥 밑의 바닥. 갈수록, 갈수록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바닥 밑의 바닥을 들춰내는 식으로 진행됩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바닥이 뭐냐? 어떤 피가 있는데 어린양의 피도 아니고, 염소의 피도 아니고, 그동안 많이 죽어 나갔던 소의 피도 아니고, 사람의 피인데 그 사람의 피가 무수한 사람의 피가 아니고 오직 한 분, 하나님 품속에 있던 독생자의 피,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생명이 없다. 생명은 바로 거기에 숨어있었던 거예요.

그 숨어있던 생명을 누가 찾아내겠습니까? 결국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하사 그들로 하여금 죄 짓도록 하셔서 죄 짓고 화내시면서 양파 껍질 하나 벗겨내시고, 또 죄 짓고 또 화내고 벗겨내시면서 마지막 십자가의 죽음까지 인도해내시는 방식을 하나님이 사용하신 거예요.

여러분들이 노아가 방주 안에서 비 안 맞고 살은 걸 아시죠. 방주 들어가서 여덟 명이 살았잖아요. 그게 영생일까요, 아닐까요? 영생 아니죠. 영생 같으면 안 죽어야 되는데 노아 죽고, 아들들 다 늙어 죽었잖아요. 영생은 아닌데 뭔가 죽었다가 거듭남의 표현은 나름대로 했지요. 그럼 거듭남을 나름대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사람이 스스로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 벌어져야 되지요. 그게 대홍수잖아요. 그냥 소나기 오게 되면 방안의 물 퍼내면 그만 이에요. 이건 인간이 감당할 수 있어요. 인간이 감당하면 거듭남이 안 돼요.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톰과 제리]라는 만화영화 보신 기억나십니까? 톰이 빨리 지나가면 제리가 놀리고 또는 뽀빠이에서 브루투스가 잡아갈 때 올리브가 살려달라고 하면 뽀빠이가 시금치 먹고 주먹이 커져서 휘두르니까 다 떨어지잖아요. 이 뽀빠이는 거듭남이 아니고 자기 에너지를 사용하는 거죠. 이런 영웅주의, 자기 힘으로 살겠다는 대표적인 게 스파이더맨, 배트맨, 이 사람들은 자체적인 능력으로 악당들을 물리치는 영웅입니다. 이건 절대로 거듭남이 아닙니다. 누구나 영웅질 하고 싶어요. 나한테 주어진 일은 내가 함으로써 자신이 대단한 존재인 것을 확인하는 즐거움으로 인생을 살아간단 말이죠. 그러나 그건 거듭남은 아니에요.

그런데 이 사람이 실패한다면 죽지요. 죽어버리면 나중에 눈 떠보니까 성공적인 일에 와 있잖아요. 이게 거듭남의 팩트야. 자기는 실패했는데 다른 데서 와서 그 결과에 대해서 본인은 실패자로 등장될 때 이게 바로 거듭남입니다. 노아가 홍수 날 때 바가지로 물 퍼냈습니까? 아니지요. 노아는 그냥 하나님이 만들어준 방주 안에 있을 때 비가 오고 안 오고, 물이 넘치고, 안 넘치고 간에 이미 자기 선을 넘어버렸어요.

그래서 여러분이 성도이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이 성도라면 항상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실은 내가 감당 못할 일이라는 것을 믿어줘야 됩니다. 얘를 가르친다든지, 설거지를 한다든지, 내가 길을 건넌다든지. 이건 내가 튼튼한 두 다리로 걷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다리를 튼튼하게 하셔서 걷게 하시기 때문에 만약에 통풍이 있다면 마음은 굴뚝같지만 도저히 걸을 수 없는 신분에 놓여있다고 믿을 때 이 사람이 거듭남입니다.

그리고 이쪽(거듭남) 노선에는 혼자 있는 게 아니에요.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에게 항상 가게 하시는 우리 인생을 인도하시는 목자 되시는 주님이 항상 우리와 동행하고 있음을 압니다. 동행하고 있기 때문에 공로를 자기한테 안 돌리고 주님 덕분이라고 돌릴 때 이게 거듭남의 노선입니다.

세상에서 대부분은 이렇잖아요. 일종의 작은 영웅들 아닙니까. 그들이 맨날 하는 소리가 꿈은 이뤄진다. 하지만 이쪽은 이미 꿈은 깨졌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동행하시는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제 뜻은 무시하셔도 저는 수용하겠습니다. 제 뜻을 짓밟아도 저는 감수하겠습니다.” 이게 거듭남이에요.

노아 때도 그런 게 보이지만 신약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거듭남의 그러한 성질이 점점 더 뚜렷하게 드러나요. 그 대표적인 것이 요나에요.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 안 듣고 다시스로 갈 때 하나님이 다시스로 가는 걸 알았기 때문에 가게 하셨거든요. 요나서에 보면, 요나가 주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다시스로 갈 때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한글성경에 콜택시 부른 것처럼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앞에 정박돼있었던 거예요. 우리 같으면, “하나님께서 동의하시는 모양이라. 이렇게 일이 잘 풀릴 수가 있나.” 마침 하나님께서 특별 배려를 해주셨으니 자기는 거기에 안 가도 되는 입장이라고 하나님의 재가를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배 밑에서 푹 잤지요.

풍랑이 일어도 모를 정도로 잤습니다. 풍랑이 일어서 갑판에서 회의해도 몰랐어요. 정말 편히 잤습니다. 나중에 난리 났어요. 그래서 한 사람씩 추궁했습니다. “혹시 이 중에서 자기가 믿는 하나님에게 벌 받은 사람은 손들어보세요.” 선장의 질문 자체도 희한해요. 요즘 같으면, 혹시 당신들이 섬기는 하나님에게 불충성한 사람 손들어보세요. 요나가, “저요.” “당신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요나가 이야기합니다. “날 죽이세요. 날 물에 빠뜨리세요. 나 하나 죽고 당신은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내가 일 저질렀으니까 내가 죽어야지요.”

이게 뭐냐? 요나는 죽을 때도 장렬하게 영웅적으로 죽어요. 그게 요나 1장이거든요. 그런데 요나 2장에 보니까 안 죽었네. 요나가 죽은 줄 알고 영화 끝났구나 하고 나가려고 했는데 요나가 등장해서 영화가 계속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하면서. 세상에 물에 빠지고 물고기가 삼키는 장면을 슬로비디오를 찍어서 2장을 장식합니다. 여기서 아는 것은 뭐냐 하면, 요나는 내 인생은 내가 함부로 굴릴 수 있는 자격이 나한테는 없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내 인생이란 자체가 없어요. 내 생의 봄날은 간다고 하지만 내 생이란 자체가 없어요. 이게 거듭난 노선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도망치는 것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 할 수 있는 것의 끝은 자살이에요. 거듭났습니까? 자살하지 마세요. 자살한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했을 때 자살해요. 그러나 주님과 동행한다면, 살아있는 자체가 이미 자살이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자살하지 마세요. 주께서는 매일 우리를 죽이고 늘 살리기 때문에 내가 시도한 자살이 아니라 주께서 죽여주시는 그 죽음을 우리는 늘 겪는 겁니다. 주에 의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것이 요나에 나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습니다. 요나가 엎드려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고기 안에 요나지요. 고기 밖은 바닷물이지요. 이걸 요나는 죽음의 세계, 음부의 세계, 곧 죽음의 세계입니다. 요나가 경험한 것이 죽음을 산 채로 경험한 거예요. 우리는 이것에 버무려야 비로소 거듭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주님 밖에 나가면 죽음이에요. 이걸 거듭난 사람만 알아요. 주님을 안 받은 사람은, 세상에 자기 혼자 살다가 죽으면 주님 만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울산바닥이 죽음의 세계고, 죽음의 세계에서 내가 살아있는 것은 그 죽음을 이기는 예수님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그냥 사는 것이 아니고 주 안에서 살고 있는 거예요. 주 안에서 살아야 우리가 의인되고 영생 얻는 겁니다. 그냥 살면 안 돼요. 그냥 살면 추석이나 지내고 설이나 지내고. 추석 연휴가 5일인지, 6일인지 그것만 계산해요. 추석 연휴 지나면 또 일한다고 죽었어요. 일반직장들은 금요일까지 죽으라고 일하고 토요일 잠시 힘쓰고 일요일 놀다가 또 월요일부터 죽으라고 일하잖아요.

그러나 성도는 이미 죽음 안에서 살아있어요. 살아있기 때문에 세상을 향하고 이 세상은 죽은 세상이라고 목청껏 외칠 수 있는 안목이 우리한테 있습니다. 이게 거듭났기 때문에. 이것은 남을 욕하는 게 아니고 남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바로 홍해 바닷가에 너희들과 똑같이 널브러져야 될 애굽의 군인들 중 하나가 우리에요. 우리 은총이 참 사지에서 살아왔습니다. 질식사할 위험과 얻어맞아 죽을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제대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군대만 그런 게 아니고 이 세상 자체가 죽음이라면 우리는 우리 힘으로 이 세상을 출애굽, 탈출할 수 없습니다. 없어서 내가 언약으로 해줄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 되시는 하나님이, “내가 해줄게.”하고 나서서 생긴 사건이 출애굽 사건입니다. 이제는 출애굽이 뭐냐? 출애굽 이후에 출애굽하시는 하나님과 더불어 살면서 진정 출애굽의 취지와 의미는 새롭게 깊이를 더할 것입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 (IP:119.♡.174.28) 14-09-12 16:18 

20140905b 울산강의-출애굽기 32장 : 출애굽과 중생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해봅시다.

거듭나야 된다. 참 무리한 요구지요. 출애굽, 애굽에서 나오라. 이거는 애굽 사람한테는 이야기 안 해요. 너희들에게만 알려주는데 탈출해. 탈출 안 하면 죽어. 왜요? 네가 살던 곳이 죽음의 세계니까. 그게 어떻게 죽음의 세계냐고 물으신다면, 이제부터 나와 함께 하면서 그걸 보여줄 거야.

지금 모세가 우상을 부셔서 가루로 만들고 레위인들을 통해서 칼로 삼천 명 죽인 타당성이 어디 있느냐 하면, 모세는 지금 하나님 편에 있지요. 하나님 편에 있다는 말은, 하나님이 출애굽을 유발시킨 장본인이지요. 그리고 출애굽을 당했던 사람은 히브리인이잖아요. 그런데 모세는 출애굽을 당했던 사람 입장이 아니고 출애굽을 시킨 하나님 입장에 서서 히브리인들로 제2, 제3의 반복된 출애굽을 시도하고 있는 겁니다. 출애굽이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동행하면서 내내 매일같이 출애굽의 취지를 모세가 하나님 입장이 되어서 계속 보여줄 거예요.

보여주면서 방금 제가 처음에는 탈출하라고 돼 있잖아요. 생뚱 맞는 이야기에요. 현대에서 탈출하라 하면, 기껏해야 이것밖에 안 돼요. 가출, 이것과 동의어로 생각하는데 가출하는 게 아니고 탈출을 해야 하거든요. 탈출하라는 말은, 하나님 편에 서서 싸우자. 어떻게? 나랑 같이 싸우자. 너희들은 전리품인데 나의 군대가 되었다. 출애굽기 12장에 나옵니다.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의 군대가 됐잖아요. 이제는 네가 전쟁의 혜택을 입는 자에 머물지 말고 모세가 레위인을 동원해서 자기 동족 삼천 명을 죽이듯이 이제는 출애굽, 탈출함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 내 편에 서서 나랑 같이 싸우자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그 다음에 나오는 질문은 뻔해요. 누구랑 싸웁니까?

32장 30절에 보면,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무엇과 싸우느냐 하면, 바로 죄와 싸워야 된다는 거예요. 전에는 애굽과 싸웠잖아요. 그런데 애굽 군대는 홍해에서 시체로 널브러져있고. 적이 없는데 출애굽이란 것이 나타날 수가 없고. 출애굽이 계속 유발되려면 적이 만들어져야 되는데 그 적은 바로 애굽이 아니고 애굽 의식을 갖고 있는 자체, 죄가 되는 겁니다.

여기서 죄가 뭐냐고 묻고 싶지요. 죄가 뭐냐 하면, 출애굽 의식이 삭제된 것, 출애굽 의식이 없는 것. 하나님이 뭐냐? 하나님은 천지를 만드신 분? 아니에요. 하나님이 뭐냐? 출애굽의 유발자, 출애굽 사건을 일으키신 분. 이렇게 돼야지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천지를 만드신 분이라 하면 안 돼요. 이 시대에 하나님은 누구냐? 십자가 지신 그분. 구체적 사건을 유발하신 분.

죄가 뭐냐? 예수님을 모르는 게 죄에요. 그래서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지어다. 불교인인데 착하게 살고, 어떤 사람은 교회도 안 나가는데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헌납하고 시도 때도 없이 돈 벌어서 이웃을 구제하고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처럼 몰래 헌신하고 봉사하고 스스로 피 뽑아서 헌혈하고 이렇게 살아도 주를 모르면 저주받습니다. 이게 이 시대에요.

언약을 모르면 저주받는다. 같은 말입니다. 또는 언약이 완성됐다는 사실을 그 소식을 못 들어서 못 믿게 되면 저주받고. 하나님은 약속대로 지금은 완성되었고 옛날에는 약속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출애굽 사건을 유발시켰고 그 출애굽 사건 속에 약속의 흔적을 집어넣었는데 그게 어린양의 피를 바르면 죽이려 왔던 사자도 그냥 훌쩍 건너뛰더라는 사실을 약간의 흔적으로 거기에 보여줬어요.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은혜로다.

그래서 세상을 볼 때 어떻게 봐야 되느냐 하면, 이걸 아신다 치고 어떻게 해석해야 되느냐?
징후. 징후란 말을 잘 안 쓰잖아요. 병원에서는 유사한 말로 증상이죠. 갑자기 열이? 증상이죠. 콧물? 감기의 증상이잖아요. 세상 전체가 어떤 증상에 의해서 늘 출렁이고 있어요. 요동치고 있어요. 주를 사랑하지 않는 미워하는 증상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리고 그런 증상도 있지만 뭔가 잘 살고 똑똑한데 어느 날 하는 소리가, “나는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었어. 재산이나 권력이 중요한 게 아니야.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자랑해.”라는 사람이 등장한다면 그 사람도 하나에 징후요 증상이 되는 겁니다.

오직 예수의 피로만, “나는 그동안 교회 다니면서 열심히 봉사하고 목사 시키는 대로 헌금하고 전도하면 사랑받고 구원받는 줄 알았더니만 그게 아니야. 십자가 피만, 십자가 능력으로 죄인을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면서 살려내었어.”라고 외친다면 그것은 기이한 증상이고 기이한 징후가 되는 겁니다.

그 징후를 해독하는 거예요. 독을 제한다는 말이 아니고 해석하는 거예요. 징후해석이에요. 징후를 해석할 때 해석하고자 하는 우리도 징후와 증상 속에 포함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 전체는 바로 텍스트가 되는 거예요. 신의 계시가 돼버려요. 그 텍스트는 나타난 텍스트와 나타난 텍스트 뒤에 감춰져 있는 다른 텍스트, 두 개의 자료, 계시 자료가 존재하는 겁니다.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 자체가 둘로서 표현된다.

보이는 것인데 그게 안 보이는 것이고, 안 보이는 것은 보이는 것으로 안 보이는 것을 나타내고 보이는 것은 안 보임을 통해 그게 가짜임을 드러내고. 무슨 소리인지 알아서 들으세요. 보고 있어도 보고 싶고, 그런 거란 말이죠. 보고 있어도 안 보이는 거예요. 예수님은 보고 있어도 안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어디 있느냐? 바로 보고 있는 그분이 예수님인데 보고 있기 때문에 안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을 안 보인다 하니까 비로소 예수님이 여기 계신다고 느껴지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나란 몸 자체가 하나의 증상이고 징후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감기가 아니고 내가 만약에 열이 난다면 나는 감기가 아니고 감기로 인하여 증상으로 열이 나는 거죠. 감기는 따로 있고 나는 감기 보여주는 증상으로서 내가 콧물 나게 돼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 자체가 매개체, 매개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자체로는 의미 없는데 이쪽과 저쪽을 이어주는 가교로서만 어떤 역할을 담당한다는 점에서 존재의 가치가 있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와 연결시키는 자리에 성도는 징후와 증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 같은 경우가 그거거든요.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예수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사도 바울은 사도되기 전에 하나님 믿었잖아요. 제가 아까 하나님에서 뭐로 바뀐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에서 예수로 바뀌는데 이게 인력으로 되는 게 아니고 증상으로 된다니까요. 주님께서 밀어내서 하는 거예요.

스포츠에 그런 게임 있지요. 뒤에서 밀어내는 식으로. 쇼트트랙 릴레이 할 때 뒤에서 엉덩이 밀면 앞으로 가잖아요. 누가 떠미는 거예요. 하나님 잘 믿는 사울이란 사람이 예수님이 떠미니까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이 아니고 그 하나님은 가짜였고 진짜 하나님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한테 오히려 억울하게 오해를 뒤집어쓰고 이 땅에서 죽어버린 거예요. 죽었다는 자체가 징후고 증상인 겁니다. 그런데 징후와 증상이 팩트, 진실과 사실과 연결돼있는 증상과 징후가 되는 겁니다.

이렇게 보면 이 세상에 살면서 나만 잘 되면 된다는 것은 잘못된 세상 방법이죠. 나만 잘 되는 것이 아니고 나란 것이 왜 세상에 존재해야 되는지 비로소 이유가 정립이 돼요. 주님이 콧물 흘렸다면 우리도 콧물 흘려야 되고, 주님이 눈물 흘렸다면 우리도 눈물 흘려야 되고, 주님이 십자가 지셨다면 우리는 십자가 지는 증상과 징후를 보여야 될 역할을 우리가 담당하고 있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그게 우리의 존재의 이유에요. 내가 잘 되기 위함이 아니고 가교역할, 보이지 않는 세계를 유일하게 보여주는 역할을 성령 받은 성도가 그 일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나오는 질문이, “목사님, 어떻게 하면 우리가 징후와 증상이 됩니까?” 거기에 대한 정답을 제가 주일날 늘 해요. 이렇게 하면 돼요. 죄 지으면 돼요. 그 죄가 뭐냐 하면, 출애굽의 사건의 취지가 사라지는 게 죄가 되는 겁니다. 출애굽의 취지가 사라지게 되면 나는 영웅이 되지요. 그러면 내가 영웅으로 살아가는 게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매사에 내가 알아서 해결할 수 있다고 자부하면서 살아가는 것, 이게 바로 죄에요. 이게 우상숭배고 자기를 위해서 세상이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

그렇게 보면 세상 사람들은 죄를 보여주는 징후로 더불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전부 자기 편한대로 자기 잘남만 생각하며 살아가는 그런 처지입니다. 거기에 우리도 같이 합류해요. 그러니까 성도나 성도 아닌 사람이나 구분이 안 돼요. 똑같이 자기를 위해 살아가니까. 그런데 마음속으로는 성도는 달라요. 속이 다르고 중심이 달라요. 살아가기는 똑같이 살아가요. 돈밖에 모르고 지만 잘나면 되고. 속은 달라요. “주께서 이런 죄를 지으라고 했지요. 주께서 역할하기 위해서 이런 죄를 지어야 되지요.”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순간 주님과 교제가 되고 교류하는 사람이에요.

cf에 보면 명동에 건물이 있고 길에 수많은 사람이 다닐 때 그 많은 사람 중에 유독 어떤 아저씨 위에 물음표가 나타나고 소리도 나는 게 있어요. 다른 사람에게는 머리에 물음표 없어요. 유독 이 사람에게만 있다니까요. 이게 성도에요. 별난 옷 입고 별난 머리 모양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똑같이 밥 먹고 하는데

주님과 출애굽의 증상을 보여주기 때문에 내가 왜 저들과 똑같이 살아가고 있지? 왜 주께서는 나를 이런 식으로 몰아넣고 있지? 왜 주께서는 나를 이런 식으로 몰아넣지? 나도 착하게 살 수 있고 하나님 말씀 잘 지킬 수 있는데 주께서는 저들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게 하지? 그렇게 묻는 자체가 다름이에요. 그 자체가 인위적인 다름이 아니고 성령께서 주셨기 때문에 그런 물음이 나타난 겁니다.

제가 주일 낮에 우리교회 집사님 실명을 거론하면서 이야기했잖아요. 그 집사님은 술 먹으면서 기도한다고. 실제로 저한테 이야기했거든요. “목사님, 저는 술 먹으면서 기도합니다.” 저는, “술 먹는 가운데서 기도 시키지요.” 네가 술 먹으면서 기도 되는지 보자. 해서 술 먹여가면서 주께서 기도하게 하시죠. 함부로 흉내 낼 문제가 아닌데. 그분이 정답이에요. 고요한 가운데 분주한 가운데서 우리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뭐지? 왜 나는 성경말씀에서 이야기하는 교훈적이고 도덕적인 것과 달리 살게 만드신 이유가 뭐냐고 주님을 향하여 물을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집사님이 하는 말이, “목사님, 평소에 제가 성경 보면서 무시로 기도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지금은 알겠습니다.” 하는 거예요. 쉬지 않고 늘 기도하게 돼있어요. 주님께서 늘 기도를 시키니까.

만약에 우리가 성경에 나온 대로 말씀을 지켰다고 봅시다. 지킨 적은 없어요. 어느 누구도 못 지켜요. 스스로 착각하기를 지켰다고 보게 되면 그 다음부터 그걸 위반하게 되거나 안 그러면 그것을 무색할 정도로 더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도록 그렇게 조치해버려요. 그래서 할 말이 없게 만든다니까요. 작은 건 지켰는데 엄청난 것을 위반했다는 사실이 나중에 들통 나버려요. 들통 나나 안 나나 관계없어요.

32장 30절 봅시다.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의 죄를 속할까 하노라” 병 주고 약 준다는 말이 딱 이 말입니다. 죄를 짓게 하시고 죄를 알게 하시고 그 다음에 죄를 짓는 쪽은 네 쪽이 아니고 너에게 죄를 짓게 하신 그쪽에서 죄를 이미 용서했다는 것을 통보해주는 절차가 남아 있어요.

참 복음이 희한하지요. 우리에게 뭘 하라는 게 아니에요. 네가 예쁨 받으면 용서해줄 게가 아니라 달음박질해도 용서 안 돼요. 노력한다고 용서해주고 용서받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주님의 절차에 말려들어간 거예요. 톱니바퀴에 얘들 손이 들어가면 큰 일 나잖아요. 주님의 톱니바퀴에 손목아지고 발목아지고 다 말려들었어요. 완전히 납작하게 쥐포 될 입장이라. 그저 우리는 죄만 끄집어내야 그 다음에 용서, 속함이 더불어 의미 있게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는데 죄 짓는 것과 용서 다 같이 우리 통해서 증상이고 징후가 되는 겁니다.

징후, 증상은 정신분석학에서 의사가 환자에게 첫 번째 접근하는 방식입니다. 정신분석학에서 말하기를 환자의 병은 다른 게 아니에요. 자기의 마음을 표현할 적당한 말을 못 찾아서 병든 거예요. 이게 정신병이에요. “아이씨. 남자한테 참 좋은데. 할 말이 없네.” 그러나 그 사람은 정신병 안 걸렸어요. 산수유. 간단히 되잖아요. 이 사람은 정신병 걸렸어요? 산수유라고 말함으로 자기의 답답함을 이미 해소했잖아요. 그런데 그 산수유란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럼 미치는 거예요.

사람이 사는 이유가, 자기 몸이 살았기 때문에 사는 게 아니고 그때마다 표현했기 때문에 계속 꾸역꾸역 살아가는 거예요. 만약에 표현이 되지 아니하면 자살합니다. 내가 누군지 내가 표현 못한다면 자살해요. 살아도 살면 살수록 표현 못하는 괴로움이 점점 더 두꺼운 층으로 형성되니까 이걸 자기가 감당이 안 되니 견딜 수가 없어요.

그래서 자기의 심정을 표현 못할 때는 사람들은 표현하기 위해서 물질을 동원시키는데 이게 바로 술, 술을 먹어요. 그래서 맨날 표현 못하는 사람은 맨날 술이야. 술 먹고 와서 자는 아이들 깨우고 마누라 때리잖아요. 이 폭력이 그동안 자기가 표현하고 싶었던 표현의 지략이고 폭력이 담겨있습니다. 때리면 아내가 아파 울지요. 멍들지요. 그걸 보면서 남편이 이야기합니다. “아프지, 멍들었지, 괴롭지. 그게 바로 내 마음이야.” 그래서 패는 겁니다.

세상은 자기만 생각하는 세상, 인간 본인만 답답해서. 인간은 왜 그렇게 답답해하는가? 신약성경에서는 악마에 의해서 답답해한다. 악마는 인간에게 궁극적으로 표현할 말을 앗아가 버렸어요. 인간의 말을 악마는 이것까지 허용해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만 허용되는 말만 울산 바닥에 대구 바닥에 유포시켜놓고 죽고 난 뒤에 태어나기 전의 말에 대해서는 악마는 일체 인간에게 이야기해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인간의 마지막 탈출은 자살입니다. 죽으면 어떻게 되겠지. 죽으면 천당 가겠지.

천당과 지옥이란 것은 인간이 살아있으면서 자기가 괴로우면 지옥 가고, 편하면 천당 간다고 인간이 만들어낸 거예요. 성경의 천국과 지옥은 언약을 경유한 거예요. 예수님을 경유해서 한 거예요. 세상에서는 나는 여기 있고 하나님은 저기 있으면 하나님 계신 곳이 천국이에요.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나라가 천국이에요. 오늘 몇 번 했는지 모르겠다.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님이에요. 우리는 자꾸 하나님 쪽에 머물려고 해요. 주님께서 사건을 일으켰는데 그 사건을  출애굽도 무시하고 십자가도 무시하고 그냥 내가 있는 하나님을 믿고 싶은 거예요. 그리고 그 나라에 합류하고 싶고. 왜? 나는 살아있으니까. 하지만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우리가 살려는 세상 자체가 죽은 세상이에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요나는 지금 죽음의 세상에 있는데 유일하게 요나가 사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준 고기 뱃속에서만 비로소 살아있는 거예요. 온 천지가 물바다 돼도 노아는 하나님이 보내준 방주 안에 있을 때만 노아 식구는 멀쩡하게 숨쉬고 살아있는 겁니다. 그게 노아만 그런 게 아니고 요나만 그런 게 아니고 지금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세상은 원래 그랬었어요.

원래 그런데 아무도 세상이 그런 이중구조란 사실을 알려준 사람은 없었고, 알려줘 봤자 믿지도 않고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바닥을 들춰내면서 우리의 바닥은 죽음에서 큰 저주가 원형이 되어서 키워온 나무줄기가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죽어 마땅한. 결국 우리가 죽잖아요. 주께서는 우리를 표백처리해요.

표백이란 말이 말라기 3장에 보면 나옵니다. 나중에 표백하는 영이 와요. 이사야 3장에서는 정결케 하는 영이라. 정결케 하는 영이나 표백하는 영이나 어떤 뉘앙스가 있느냐 하면, 우리가 걸치고 있는 먼지 나는 옷을 말끔하게 뜯어내는 뉘앙스가 강하지요. 살았습니까? 뜯어내버리면 진즉에 죽어있는 건데 그동안 살려준 것은 주님의 징후와 증상을 예수님 보여주기 위해서 살아온 거예요. 어릴 때 산수 잘해서 상 받은 것도 주님에 의해서 주어졌는데 우리는 내가 공부 잘해서 얻은 걸로 착각한 겁니다.

여러분 신약을 이야기하면 다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더 어려워요. 구약을 경유해야 되니까. 그래야 신약에서 오해가 없어야 되거든요. 어쨌든 간에 이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발가벗게 만들고 표백해서, 왜 그렇게 하느냐? 우리가 어떤 기능을 하게 하는 거예요. 그 기능이 뭐냐? 마땅히 죄는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합니다. 말끔하게 죄로 드러나게 하시고 거기다 튀김가루,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속죄로 버무려버립니다.

그 다음에 질문이, 어떻게 예수님의 속죄로 우리의 죄가 없어지느냐? 그 문제를 다뤄야 됩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가 죄가 씻어진다면 그 다음 질문은, 예수님의 피가 어떤 과정/경로를 거쳐서 죄가 사해지는지 우리가 알아야 되겠지요. 그냥 “믿습니다.” 할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믿는다고 넘어가면 안 돼요.

경찰이, “네가 돈 훔쳤지?” “예. 제가 훔쳤습니다.” 그걸로 끝납니까? 왜 훔쳤느냐, 가정형편이 어떠냐, 전과가 있느냐, 이것만 훔쳤느냐, 다른 건 없느냐? 하고 다 묻잖아요. 그러면 도둑놈이, “귀찮아 죽겠네. 내가 훔쳤다고 하잖아.” 이건 진심이 아니고 빨리 이 사태만 모면하고 싶은 그런 마음이지요. 주께서는 철저하게 수사하십니다. 너는 이렇게 해서 죄를 지었는데 어떻게 용서가 되었느냐? 죄 지은 것도 닦달내고 동반해서 들춰진 죄가 어떤 식으로 용서됐는지 다 이야기하지요.

그럼 어떻게 되느냐 하면, 속죄란 것은 그전에 죄와 마주하면서 속죄가 됩니다. 그러니까 속죄 속에 죄를 용서하는 징후가 만들어져야 되겠지요. 그러면 죄란 징후가 속죄의 징후가 같을까요? 다르지요. 어떻게 다른가? 속죄는 희생의 모습을 띱니다. 희생이니까 억울해요. 억울하다는 말은 안 당해도 될 사람이 당했다는 거지요. 우리가 예수는 믿는다는 말은 나 때문에 억울함을 당했던 그분과 매일같이 동행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나란 존재 때문에 억울하게 수모 당하신 분이 이제 따로 떨어져 사는 게 아니고 늘 함께 동행하면서 나를 증거하는 게 아니고 그분의 희생을 증거하는 용도로 우리는 이 땅에서 계속 인생을 천국 갈 때까지 살게 되는 거예요.

희생, 억울함까지 나왔지요. 그렇다면 이분은 누구한테 희생을 당했고, 억울함을 당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사람에게 억울함과 희생을 당했다고 하잖아요. 신약성경은 더 나갑니다. 사람이 아니고 사람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지배하는 어떤 존재가 있었어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원수, 즉 악마가 있었어요. 창세기 3장에서는 그게 뱀이라 하지요. 마귀가 있었어요.

그러면 인간은 뭐냐? 하나에 들러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최종 책임을 인간에게 물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지옥은 원래 사람이 아니고 악마를 집어넣기 위해서 만들었는데 악마가 사람을 인질로 잡아서 하늘전쟁에서 패배해서 에덴동산으로 뛰어 들어온 겁니다. 하나님께선 그걸 막는 게 아니고 오히려 에덴동산을 이용하도록 함정을 파놓았습니다. 악마가 인간을 유혹하도록 그래서 악마의 정체가 드러나도록 적절한 요소를 심어놨는데 그게 선악과나무고.

그러니까 세상 돌아가는 것이 인간이 주인공이 아니에요. 알아서 하시는 어르신네가 따로 계셔요. 우리는 죄인으로 사는 역할을 맡았을 뿐이고. 하나에 징후로써. 또 예수님은 분명히 죄 맞기는 맞는데 그 죄를 씻어주시는 징후로 살아가는 갑니다.

그럼 여기서 속죄에 대해서 좀 더 해보겠습니다. 속죄를 해야 그 다음에 사건들이 이해되니까. 속죄가 죄를 씻는다고 했지요. 제가 묻습니다. 죄를 안 씻어주는 속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성경에 용서가 안 되는 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어요. 성령을 훼방하는 자 또는 예수를 안 믿는 자는 저주받지요.

그러면 용서되는 죄를 죄1이라 하고, 용서 되지 않는 죄를 죄2라 합시다. 그러면 예수님이 속죄자로 왔을 때에 죄2는 죄로 그대로 노출시키고, 지옥이거든요. 죄1은 이걸 속죄와 더불어 천국을 만들어요. 죄인인데 용서받았기에 영원토록 주님만 찬양하세. 이게 천국 아닙니까. 제가 왜 이렇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어느 인간도 천국에서 살 권리가 없는 거예요. 죄2, 악마가 인간 자체적으로 의와 죄, 선과 악을 따로 구분하는 하나에 기계처럼 인간을 악마가 그렇게 사용해서 여기서 엉터리 기독교, 종교가 나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 사람들이 애굽에서 나왔잖아요. 애굽에서 나오면서 그들이 보여줄 죄가 뭐냐 하면, 그들이 악마에 사로잡힌 채 나올 수 있는 출애굽의 의미가 진짜 출애굽의 의미와 어떻게 마찰과 대결과, 충돌을 유발시키느냐 하는 겁니다. 유발되게 되면 누가 희생당하느냐 하면 모세가 이 틈바구니에서 장차오실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희생과 억울함을 많이 당합니다.

광야에서 원망했을 때 민수기에 보면, 모세가 놋으로 만든 뱀을 듭니다. 이 말은 너희들이 이 뱀에 물려 죽게 하신 그분이 속죄도 그분 쪽에서 마련했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네가 정말 진정 구원된 자냐?” “예.” “그렇다면 네 죄를 알렸다?” “압니다.” 그러면 구원되는 거예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은 간단해요. 모든 천지를 죄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래야 죄1에 머무는 사람도 있지만 천국 가는 사람이지만, 죄1에서 벗어나서 죄2의 입장에서 죄1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죄인으로 만드는 것은 인간의 의로움과 선함과 품위를 모독하는 짓이라고 나선 자들이 있어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그들의 애비는 마귀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꼭 이렇게 죄로 이야기합니다. 그 죄에 대해서 반발하는 게 있어요. “모든 게 죄가 되면 안 되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었기 때문에 선한 것도 있잖아. 헌금을 할 때 억지로 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성령에 의해서 헌금하면 헌금 자체는 의로운 거야.”라고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자들이 있어요. 왜냐하면 성령에 의해서 자발적 헌금을 내가 하고 싶은 거예요. 왜 자기가 하고 싶어 할까요? 그걸 내가 함으로써 나는 전적으로 죄인이 아니고 약간이나마 의의 요소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거예요.

그렇게 했는데 그 다음날 몸이 아프면, “하나님이여, 이렇게 착한데 왜 아프게 하십니까?” 그게 바로 속죄 자체를 모독하는 겁니다. 속죄는 인간의 죄를 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씻을 수 있다는 말은 죄를 둘로 구분 짓기 위함이지요. 구분 짓는 방법이 뭐냐? 그걸 희생이라 했는데 신약에서 피가 되는 거예요.

이렇게 놓고 묻습니다. 왜 예수님께선 속죄하는데 피가 필요했을까요? 피는 두 죄를 구분 짓기 위해서 한 거죠. 그 피는 악마의 앞잡이가 예수님을 죽였던 피잖아요. 그 피가 있음으로서 그 피를 유발시킨 원인을 추적하고 그 본부를 찾아갈 수 있는, 저쪽에서 다가와서 피 흘렸기 때문에 그 피를 증거물로 대서 이 피를 유발한 최후의 본거지를 찾아내는 유일한 증거물이 바로 예수님의 피입니다. 그 피를 앞장세움으로 말미암아 진짜 지옥과 천국이 구분 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예수님의 피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바로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를 용서받는다. 로마서 5장의 말씀처럼.

그 피라 하는 것은 인간의 피를 말하는 게 아니죠. 예수님의 피죠. 따라서 인간과 인간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과 마귀와의 문제, 예수와 하나님과의 문제지 그 결정은 우리가, 제삼자 끼어들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해달라고 건의한다든지 내 의견을 개진할 게 일체 없습니다.

이렇게 보시고 32장 그 다음부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방법을 보세요. 죄를 더욱 더 죄 되게 하는 방법이 이제 시작이 되는 겁니다. 죄를 더욱 더 죄 되게 하는 방법은 율법을 마구 집어던지는 거예요. 예를 들면 신명기에 나오는데 아들이 말을 안 듣거든 네가 아들을 혼내지 말고 마을 장로한테 가서 장로가 돌로 네 아들을 쳐 죽이게 하라.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만 살아있다는 걸 보여주게 하라. 이 말은 뭐냐 하면 내 아들은 내가 죽이는 것도 아까운데 남이 죽이는 게 돼요.

아브라함이 누굴 잡습니까? 아들을 죽이죠. 아들을 죽이는 취지가 계속 유지되고 있지요. 그게 율법화 될 줄이야. 그게 고정화되어서 우리를 치고 들어올 줄이야 상상도 못했지요. 옛날에 아브라함이 이삭 죽일 때는 그걸로 끝인 줄 알았지요. 그것이 율법으로 포장이 되어서 추석 때 황금선물처럼 택배로 막 보내주는 거예요. 누구든지 천하 자식이나 남편이나 아들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늘나라에 못 간다. 지옥 간다. 이게 율법화 되어서 들어오게 되면 그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위인은 없지요. 없으니까 우리의 죄는 점점 더 발굴이 돼요. 죄가 더욱 더 많이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지요.

그런데 그 죄 속에 뭐가 있느냐 하면, 바로 그렇게 구원받는 것은, “내가 내 구원에 전혀 보탬도 기여함도 없이 일방적으로 구원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라고 나서는 그런 무리도 율법과 더불어 같이 튀어나옵니다. 그게 나올 때 주께서 일부러 그렇게 하시기 때문에 이단들이 설칠 때 너무 섭섭하게 여기진 맙시다. 반드시 복음 전하면 양쪽의 견해가, 확연히 다른 두 종류의 인간이 자동적으로 홍해 갈라지듯이 갈라지게 돼있어요. 맞는다는 사람과 불합리하다는 사람으로.

그래서 이번 주일 설교제목이 [미련한 복음]이거든요. 복음 자리에 사랑을 집어넣어보세요. [미련한 사랑]이지요. 뭔 뜻이냐 하면 사랑은 미련하면 할수록 더욱 더 사랑의 진수가 거기 있다는 거예요. 사랑은 똑똑해서는 안 되고 사랑 앞에서는 그야말로 철딱서니 되도 괜찮다는 겁니다. 왜? 그럴수록 그것까지 덮어주는 사랑이 빛이 나니까.

아가서의 주제가 뭐냐 하면, 인간이 제일 무서워하는 게 죽음이지요. 인간의 모든 행동은 죽음이 무서워서 죽음에서 떨어지고 싶어서 나타나는 행동이에요. 될 수 있는 대로 안 죽으려는 쪽으로. 돈을 왜 버느냐? 돈이 있을 때는 오래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고, 은행에 잔고 떨어지면 죽는 날이 가까이 왔구나. 죽는 게 무서워서 사람들은 죽음에서 멀리 가는 거예요. 못 사는 동네에 가면 죽기 쉬워요. 잘 사는 동네는 사방에 cctv가 있어서 치안이 편해. 술 먹는 인간도 별로 안 보이고. 못 사는 동네는 옥상에서 보면 전부 술 먹고 있어. 엉망진창이거든요. 그래서 빨리 돈 벌어서 잘 사는 동네로 이사를 와야 안심이 되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그렇게 무서워하는 죽음보다 사랑이 더 세다. 네가 죽음이라는 잉크병 속에 들어갔느냐? 내가 내 손으로 지옥 속의 너를, 죽음 소의 너를 끄집어낼 때에야 비로소 아가서의 말씀대로 사랑은 죽음보다 더 세다. 죽음처럼, 죽음과 견줄만한, 견준다는 말은 죽음을 이겼다는 말이에요. 죽음을 초월해야 진정한 사랑이에요. 그게 십자가 부활의 사랑이에요. 죽음과 부활로 모든 사랑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제 32장 끝부분을 봅시다. 죄를 지었거든요. 그러니까 모세가 죄를 용서해달라고 했어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모세가 시내산에서 뭘 봤어요. 뭘 봤을까요? 죄를 지어도 이미 용서가 되는 장치를 모세는 홀로 봤어요. 그래서 모세는 변화산에서 엘리야와 합세해서 “예수님 언제 돌아가십니까?” 하지요. 그러니까 돌아가셔야 용서가 된다는 것, 하나님이 죽으면 어떤 죄도 용서가 된다는 사실을 모세는 이미 봤어요.

더불어 뭘 봤느냐 하면, 그게 아무나 볼 수 있는 게 아니고, 32절에 보면, 주께서 기록하신 책이 나오지요. 지금 모세가 두 가지 봤어요. 하나는 책 봤고, 그 책에 기록된 사람은 죄인 맞는데 용서받아야 될 자들의 명단을 그 책에서 본 겁니다. 끝. 끝났어요. 모세가 본 걸 우리가 같이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뭡니까? 나는 천국을 보고 싶습니다. 볼 것 없어요. 이게 뜻이에요. 우리는 죄인으로 살면 되고, 믿는 자는 뭐가 있다? 어떤 죄도 용서할 수 있다는 장치가 하늘나라에 이미 마련돼 있음을 믿는 자는 이미 용서된 자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게 바로 생명책에 창세전부터 기록된 사람만이 그걸 알게 돼있습니다.

기록된 그것은 모세는 내 백성 또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은 오직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향해서만 오게 돼있어요. 다른 사람은 성령이 안 오게 돼있습니다. 성령이 안 왔거든 내 백성 아니라고 보시면 돼요. 정말 성령이 왔거든 내가 비록 죄인의 괴수라도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식으로 예수님의 피가, 그냥 희생이 아닙니다. 그냥 희생이 돼버리면 희생케 하신 자가 드러나지 않잖아요. 그러나 예수님의 피는 희생하는 것+누가 예수를 죽였느냐가 다 등장해요. 누가 죽입니까? 죄2. 아까 이야기한 악마 쪽에 속한 자들이 예수를 죽인 거예요.

그래서 피를 증거한다는 말은 용서받아서 끝나는 게 아니고 “너, 날 안 믿지? 그러니까 지옥 가도 마땅해.” 그런 양면을 같이 보여주기 위해서 피라는 이야기를 해야 된다니까요. 우리가 보통 피라 하면 듣기 싫어하지만. 황 전도사님 둘째 아들은, “제가 보기에 피과.” 좀  긍정적인 제목을 해야지. 피과라고 하면 누가 사 먹겠습니까.

그런데 마지막 인간이 임종 때에 다른 것 다 떠나보내고 주의 피로 제가 의인 되었습니다. 제가 예수 피를 믿어서 의인된 게 아니고 그 피로 말미암아 피를 증거하는 징후와 증상으로써 평생 동안 살아왔습니다. 나는 내 힘으로 이만큼 살아왔다고 자부했는데 내가 때로는 콧물도 나고 열도 나고 이미 감기 들리듯이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아야 될 명단에 있는 자이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예수의 피를 보여주는 증상으로 우리가 평생 동안 살아오게 된 겁니다. 성령은 그걸 소급해서 우리에게 통보해주지요. 이게 출생의 비밀이다. 우린 출생의 비밀이 다 있어요. 바로 천국을 위하여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해서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걸 신약적으로 제가 설명해드린 겁니다. 구약적 모세 당시에는 바로 너희들이 범죄 했지만 주께서 용서하기 위해서 범죄 한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고 범죄 한 너희와 함께 동행해주셔서 약속대로 약속의 땅에 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게 모세가 한 기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계획 알았습니다. 죄인 만들어서 속죄해주셔서 그 만남 속에서 주님의 피 흘리심만 증거되게 하도록 저희들을 오늘도 이 땅에 살려두시니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떠나지 말고 늘 역사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