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4. 8. 22) 6-2
지난 시간에 그림자와 모형이라는 뜻에서 문둥병이 낫고 난 후 새 두 마리로 율법에 따라 행한 일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럼 새는 두 마리인데 예수님은 왜 한 분입니까? 그것은 새 두 마리가 보여주는 관계와 기능을 예수님은 한 몸으로 다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죽은 것도 보여주시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신 것도 보여 주심으로 레위기 14장에 나오는 율법이 어떻게 자기로 인하여 완성되는가를 보여주신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 속에서 세상 모든 것은 의미와 목적을 할당받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6장 8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한 말이 있어요.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게 과연 믿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까?
사람은 죽으면 그만이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믿는 것이 비정상이잖아요. 만약 지금 이순신 장군이 살아나서 [명량] 영화를 보면서 “감독, 이리 와! 나는 저런 말 한 적이 없어.” 이렇게 나온다면 영화감독이 얼마나 놀라겠어요? 사도 바울은 절대로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한 말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억지로 믿으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안 믿어지면 믿지 말라’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났거든요. 안 믿어집니까? 그럼 믿지 마세요.” 이런 식입니다. 억지로 못 믿는 사람을 믿게 하려는 그런 마음은 없습니다. 왜냐? 자신이 믿게 된 것도 본인이 원해서 믿은 것이 아니라 주께서 믿게 하셔서 믿었기에 다른 사람도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집안 식구들이 믿으려고 할 때는 살살 약을 올리세요. “너는 믿는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믿는 것이 아니야.” 이렇게 약을 올려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오게 되면 믿지 말라고 해도 믿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우리가 책임감을 느끼고 죄책감 느낄 필요 없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일(율법 완성)은 주님 홀로 하시기에 우리가 개입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손 떼야 합니다. 우리는 죽은 자고 예수님만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기에 그분만 아버지의 뜻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공연히 부활하신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말씀대로 되도록 모든 것을 주관하기 위해서 살아나셨습니다.
사도행전 26장 8절에서 예수님은 죽었다가 살아나셨다고 언급했지요. 이제 마가복음 2장으로 돌아와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가셔서 중풍병자를 낫게 하는데 이 때 예수님은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제가 참 어려운 질문을 했어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제가 아까 새 두 마리 이야기를 했는데, 한 마리의 새는 이미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죽은 새의 피가 다른 새의 날개에 뿌려졌지요. 그러면 죽은 자가 죽은 채로 살아있는 새와 동반해서 지금 창공을 날고 있지요. 그러면 죽은 새는 과연 죽었습니까, 살았습니까?
새가 두 마리인데 한 마리는 분명히 죽었고, 다른 한 마리는 분명히 살았는데 이 새 두 마리의 기능이 예수님 한 몸에 합체되었다고 했지요. 그러면 주님 안에 죽음도 들어있고 생명도 들어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말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부터 죽었다가 살아나심의 기능이 뿜어져 나옵니다.
문둥병자를 낫게 했지요. 문둥병자가 아픈 거예요, 고쳐주신 예수님이 아픈 거예요? 예수님이 아픈 거예요. 왜냐하면 문둥병자의 아픔을 예수님이 담당해야 하는 운명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의사는 환자의 병을 고쳐주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의사가 아니고 병자의 병을 자신이 취함으로 병을 고쳐주십니다. 이게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병자의 죄를 예수님이 대신 가져감으로 병이 낫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치료 받은 사람은 미안해 해야 합니다. ‘주님은 참 능력이 대단하신 분이다.’ 이게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 죄를 가져가신 분이에요. 천국 간다고 좋아하지 마세요. 그분은 우리 죄 때문에 죄의 무게를 느낀 분이고, 우리는 주님 때문에 가벼움을 느끼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주님 앞에서 힘들다고 짜증낼 수 없습니다. 그냥 미안할 뿐입니다. 내가 짜증을 내면 그 짜증도 주님이 가져가셔야 하니까요. 그 가져가신 죄를 우리는 평생을 통해서 반복해서 재연하고 있는 중입니다. “주여, 이 죄도 가져가셨지요? 요런 죄도 가져가셨지요?”
성경에서 문둥병자를 주님이 낫게 해 주신 것을 보고는, “내 남편이 병에 걸렸는데 교회 가서 예수님께 기도하면 우리 남편도 낫겠지?”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이용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렇게 되면 병 낫고 지옥 갑니다. 문둥병자 열 명이 있었는데 그 중 아홉 명은 병 낫고 지옥 가고 한 명만 구원 받았어요. 병 낫고 지옥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2장 5절에 중풍병자가 병 낫기 위해 예수님께 왔을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했지요. 중풍 병 낫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주님은 그것이 목적이 아니고 죄를 사했지요. 병 낫겠다는 것은 출발점이고 죄 사하는 것은 완성입니다. 중풍병만 낫고 지옥 가면 안 되잖아요.
주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병 고치려고 오셨습니까? 아니지요.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것은 중풍 병만이 아니고 근원적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자입니다. 자신의 궁극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인간은 몰라요. 그런데 주님이 알려 주시면 알게 됩니다. 나는 십일조 하고, 선교하고, 구제하고 뭘 해도 이것이 죄라는 사실을.
마가복음 2장 5절에서 중풍병자에게 예수님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지요. 그러면 이 중풍병자 자리에 괄호를 치고 다른 것을 집어넣어 봅시다. ‘공부를 잘 해야 된다.’ “내 자식이 공부를 못해요. 전교에서 꼴등입니다. 공부 잘 하게 해주세요.”라고 주님께 요청했다면 주님은 뭐라고 답하실까요? “네 자식이 수석을 하리라.”가 아니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십니다.
중풍병자는 이제 죄 사함을 받았다고 주님이 선언을 했어요. 보통 인간의 재판은 원고와 피고, 그리고 변호사가 있어서 죄를 거론하고 판사는 판결을 하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판결은 인간이 어떤 말을 해도 안 듣고 일방적으로 선언하십니다. “네 죄를 사했노라”고. 예수님은 죄를 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어요. 이걸 믿는 사람만 천국 가는 거예요.
지옥은 어떤 사람이 가는가? ‘그는 바르게 살려고 교회에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입원을 했고, 그 후 퇴원을 해서 집에 왔는데 연탄가스로 죽었고 결국은 교회에 못 갔습니다.’ 이 사람은 지옥 갑니다. 왜냐? 그 사람이 애쓰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고 주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안 받았기 때문입니다.
천국이냐, 지옥이냐는 재판장 되시는 예수님 권한입니다. 이것이 권세입니다.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하노라(막2:10).”고 하셨지요.
2장 7절을 보겠습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나올 줄 알았어요. “당신 참 건방지네. 죄를 사하는 것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데 당신이 감히 죄를 사하다니”라고 달려들었지요. 요한복음 5장 21-22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라고 했어요.
하나님 믿으면 구원 받습니까? 못 받아요. 왜냐? 하나님이 모든 것을 예수님께 일임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 받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모든 권한이 예수님께 이관된 것을 믿을 때 비로소 그 사람은 구원 받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될 것은 중풍병자와 죄 사함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따져야 합니다. 5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에서 믿음의 반대말이 불신앙이 아니고 행함이라고 했습니다.
행함의 주인공은 행한 본인이에요. 그런데 믿음의 주인공은 성령(주님의 영)입니다. 예수님이 믿음의 주인공이 되는 거예요. 에베소서에 보면 믿음은 선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에서 믿음의 반대는 행함이라고 했는데, 그동안 행함은 누가 해 왔습니까?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면서 자신의 행함을 보여 왔습니다.
유대인들이 행할 때 누구를 의식하며 행했겠어요? 하나님을 의식했지요.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했어요. 왜냐? 믿기 때문에 주의 율법을 지키려고 애를 썼잖아요.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지킨다.’ 이 틀이 우리가 갖고 있는 틀과 아주 흡사하지요?
‘저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말씀 지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습니다.’라는 생각이 우리에게서 나오지요? 이것이 바로 유대인들이 했던 짓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전체를 ‘행함’이라고 했어요. 그러면 인간에게는 믿음이 없는가? 인간에게는 믿음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믿는 자가 없는가? 믿는 자는 있어요. 누가 믿는 자인가? 아브라함이 믿는 자입니다. 아브라함이 믿는 자 되기 위해서는 자기 아내가 임신할 수 없었고, 그래서 자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행함은 끝이 났어요.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아내가 임신 못하는 여자인 것을 분명히 압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것은 믿음입니다.
자기 주체와 자신이 구원 받는 것이 연결점이 끊어져 있어요. 오늘 본문에 중풍병자가 믿었다는 말은, 중풍 병은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히 하고 예수님께 온 거예요. 그게 믿음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의 답이 뭡니까? “네 믿음이 좋구나. 중풍 병이 나았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했지요.
그렇다면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중풍병자가 중풍 병에 걸리면서 ‘나는 죄인이기에 이런 병에 걸려도 마땅합니다.’라고 인정한 것으로 우리는 소급해서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죄인이기에 주님의 처분만 기다립니다.’ 이런 자에게 주님은 “제 죄를 내가 사하노라.”고 하십니다.
다른 사람은 알아듣지 못해도 중풍병자는 알아듣겠지요. 그 둘 사이의 관계가 바로 믿음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인간이 주님의 생각을 공유하는 관계입니다. 정탐을 보냈습니다. 가보니까 그쪽 사람은 장대하고 우리는 메뚜기 같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런데 갈렙과 여호수아는 왜 들어가자고 했습니까? 들어갈 수 없는 환경 자체가 주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인 되어야 할 이유는 주님이 용서해야 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관계가 바로 믿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를 믿기 때문에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다.”라는 말을 아주 평안한 마음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배우 김진아씨가 젊은 나이에 암으로 죽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50정도의 나이에 간암으로 죽는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그런데 신앙인이 50대에 죽게 된다면 어떤 고백을 할까요? “진작 죽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주여, 어서 저를 데려가 주시옵소서.” 이런 고백을 하겠지요. 이것이 바로 믿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내 안목이 아니고 주님의 안목을 공유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믿음의 관계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존재의 이유가 있지요.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가 살아있는 겁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잖아요.
중풍병자는 이것을 알았고, 이제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을 생각해 봅시다. 서기관들이 하는 말이 “하나님 한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는 것이지요. 이 말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 아닌 이유는, 예수님의 관점을 공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말이 나오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 잘 믿고 있는데 당신은 하나님 아니잖아! 하나님도 아니면서 하나님의 일을 당신이 왜 하는가?’
예수님 뜻은 이것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 믿지 말고 날 믿어라! 너희들이 말하는 그 하나님이 나를 이 땅에 보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추상적인 하나님이 아니고 지금 사람과 같이 동행하는 하나님으로 새 전기를 마련하게 된 겁니다. 새로운 시대가 온 거예요.
그런데 그런 소리하는 자체가 그들로 하여금 믿음이 생기게 만듭니까, 더욱 화나게 만듭니까? 더욱 화나게 하지요. 왜 화가 나는가 하면, 그들이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하나님이 사람이 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은 왜 못 믿는가?’라는 말 자체가 일반인들이 들으면 터무니없는 말이지요.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믿음 없는 사람에게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그런데 신자는 터무니없는 예수님 이야기를 의심 없이 믿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주변 사람이 보기에는 터무니없는 인생을 사는 것이 됩니다. 터무니없는 인생을 사시는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죽은 지 나흘 만에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질문합니다.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서 신이 났습니까, 고달팠습니까? 고달팠어요. 왜냐?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기에 인간들이 모두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의 주인공이 된 것 때문에 고달팠어요. “너는 죽었잖아. 그런데 어떻게 해서 다시 살아난 거야?” 이 질문 공세에 시달렸겠지요. 나사로는 몰라요. 그냥 예수님이 살려 놨기에 살아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나사로가 아무리 말해도 믿지 못했을 겁니다. “네가 잠시 기절했다 깨어났지?” 이런 식으로 되물었겠지요. 신앙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건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고 이해되는 것이고, 진짜 신앙은 터무니없는 것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15장 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이 말씀을 하기 위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모든 계획을 좌절시켰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너 이래도 믿을래?” 나중에는 하다하다 안 되니까 어떻게 합니까? “네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고 하셨어요.
모리아 산에서 제단을 만들어 놓고 자기 사랑하는 독자를 죽이려 할 때 아브라함은 어떤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짓이잖아요. 터무니없는 짓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아들을 죽이려는 순간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오기를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는 지시가 떨어집니다. 그 때 하늘에서 음성이 없었으면 아들을 죽였을 거예요.
이 말은, 아브라함의 모든 행동은 주님이 주관하고 계신다는 것만이 해답입니다. 아브라함은 모형이고 아브라함과 동행하시는 주님이 실체입니다. 성도는 내가 무엇을 해도 주님이 동행하고 계심이 믿어지는 자입니다. 즉 내가 살아온 모든 과정은 주님이 만들어놓은 장치임이 믿어지는 것이지요.
이제 9절을 봅시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이야기를 중풍병자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서기관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없는 서기관들을 향하여 믿음 없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하시면서 그 속에 복음을 담아 말씀을 하십니다. “제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지금 예수님이 서기관들에게 객관식 문제를 내신 거예요. 둘 중 어느 것이 쉽겠느냐고. 여기에 대해 서기관이 답변을 합니까? 안 합니다. 왜냐? 예수님 질문은 서기관의 질문에 상응하는 말이 아니기에 답변을 할 수가 없어요. 예수님의 질문은 이미 주어진 답변을 거꾸로 맞춰보라고 주신 질문입니다.
“주여, 제가 어떻게 하면 구원 받습니까?” 라고 물으면, 주님의 답변은 “너는 이미 구원 받았어. 구원 받았으니까 그런 소리 하지!”라고 이미 답변을 주고, 그 다음에 “예수 믿어야 돼!”라고 이야기할 때, 듣는 자가 알아서 연결시켜야 합니다. 아, 내가 구원 받고자 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구나. 구원 받고 싶습니다. 이런 말조차도 구원 받은 자의 입에서 나오게 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구원 받고자 하는 시도와 상관없이 주님이 일방적으로 선언해 버리면 그 자체가 이미 구원된 상태구나. 라고 느끼도록 주님께서 그렇게 해 주십니다.
‘000 이번에 성적 잘 나왔어?’ 이런 질문을 하고 싶어도 ‘아이고 잘 커 줬구나.’라는 것이 더 고마워지면 앞에서 한 질문은 취소.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게 엄마의 마음입니다. 이렇게 잘 커준 것도 모르고 또 공부 때문에 닦달했구나. 주님의 관점에서 보면 현재 있음 자체가 기적입니다. 내가 살아있다는 자체가 기적이라는 겁니다.
지금 네가 하는 질문은 의미 없는 질문이다. 일어나 걸어가는 것을 봐라. 이미 죄 사함 받았기에 그런 결과가 왔잖아. 지금 여기 복숭아가 있는데 제가 복숭아를 먹었습니다. 그런데 ‘너 복숭아 먹지 마.’ 이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구원 받았습니까? 라는 질문의 답변은 “주께서 이미 십자가 지셨습니다.” 그래, 십자가 지신 것은 아는데 십자가의 용서가 어떻게 너에게 전달되었느냐고? 이 물음에는 이미 구원 받았다는 말 자체가 답입니다.
“그럼 나는 너와 같은 고백을 왜 못하지?” “당신은 성령을 안 받았기에 못한다.” 본인이 안 믿어지니까 자꾸 물어요. ‘너는 어떻게 구원 받았느냐’고. 이런 사람과는 소통이 안 됩니다. 제가 수요일 설교에서 이런 말 했어요. 소통하지 말라고. 세상 사람들은 소통하기 위해 살지만 주님은 소통을 끊어버려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싸우고, 자식이 부모와 싸우고 소통을 다 끊어요. 내가 온 것을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고 검을 주러 왔다면서 소통을 차단합니다.
10-11절 봅시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결국 중풍병자는 상을 들고 가면서 ‘나는 건강 얻었다.’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보여주시지요. 즉 주님의 자기 일을 증거하는 용도로 중풍병자를 이용하신 겁니다. 1장에서는 문둥병자가, 2장에서는 중풍병자가 말려들었어요. 오늘날 우리도 말려들었어요.
14절을 봅시다.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렇게 되어 있지요. 옛날 유대인들은 세리를 굉장히 싫어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헬라 문화권에 살면서 나름대로의 전통을 지켰습니다. 헬라 사상의 특징이 뭔가 하면, 신을 인정하되 나의 행복을 위한 신이에요.
헬라의 땅을 나중에 로마가 정복했는데, 정복하면서 그 사상은 그대로 용인합니다. 그래서 온 세상이 다 헬라 사상으로 물들었습니다. 헬라 사상은, 나만 행복하면 돼요. 사람이 사는 목적이 자기 행복입니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지요? 돈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나만 행복하면 된다는 헬라 사상과 극단적인 대조를 보이면서 ‘우리 유대교’라는 구원을 외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는 겁니다.
‘그래, 너희들은 잘 먹고 잘 살아라. 하지만 우리는 돈을 초월해서 오직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며 산다. 앞으로 메시아가 오시면 속물 같은 너희들을 지옥으로 갈 것이고 우리들은 주님 계시는 천국에 갈 것이다.’ 이것이 바로 헬라 사상과 대조되는 전통적 유대사상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생명처럼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불교의 진짜 중들은 돈만 좋아하는 세상 사람들과는 정 반대의 삶을 삽니다. 청빈의 삶을 실천하는 천주교의 수녀나 신부들도 그렇고.
세상이 더러우면 더러울수록 돈에 초연한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신앙은 빛이 나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 중에 세리가 있었어요. 돈만 밝히고 서민들 등쳐먹기로 소문난 세리가 제자가 된 것이지요. 만약 광주 모임에 철도 비리를 저지른 국회의원이 앉아있다면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욕을 하겠습니까?
돈만 밝히는 못된 병원 원장이 어떤 교회 장로가 되었다면 옆에 있는 교회에서 굉장히 욕을 할 겁니다. 이처럼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를 부르신 예수님을 향해 사람들은 욕을 했겠지요. 유대인들 보기에 세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예수님 인품에 치명적 상처가 됩니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막2:14).”고 했습니다.
15절에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왔지요. 여기에서 ‘죄인’은 예수님의 입장에서의 죄인이 아니고 그 당시 서기관, 바리새인의 관점에서 본 죄인입니다. 당시 바리새인은 계급을 7단계로 나눴습니다. 최고 단계는 사두개인. 그 밑이 바리새인.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을 합쳐서 산헤드린 공회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체포해 잡아 죽일 때 누구에게 끌려갔습니까? 공회원에게 끌려갔습니다. 요즘 식으로 하면 국회의원에게 끌려간 거예요. 상원, 하원이 있는데 상원은 사두개인, 하원은 바리새인, 서기관들. 이들이 법률을 제정하고, 재판도 하고 치안도 담당했습니다. 공회원 중에는 제사장도 있고, 율법학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계급이 상위 계층이고 제일 밑에는 세리, 창녀, 백정, 이방인 이런 사람들입니다. 율법과 접촉을 많이 하는 자들은 계급이 높고, 율법과 거리가 먼 자들은 하층 계급입니다. 창녀들이 왜 밑바닥 계층에 있을까요? 창녀들은 이방인, 유대인 가리지 않고 돈만 벌면 됩니다. 이처럼 돈만 밝히는 사람들은 최하 등급으로 취급합니다.
이런 식으로 7단계로 나눠서 각 단계별로 성전의 어느 지점까지 들어갈 수 있는가 하는 것도 나눴습니다. 이방인의 뜰이 있어요. 여자의 뜰도 있는데, 여자가 여기를 넘어서면 법에 걸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했습니까? 세리와 창기가 바리새인보다 먼저 천국에 간다고 하셨어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실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 하면 제일 낮은 자리입니다. 그곳에 예수님은 자신의 자리를 펼치십니다. 저주 받아 병든 문둥병자, 소경들, 예수님이 성장하신 곳도 갈릴리 지역입니다. 갈릴리는 어둠의 땅입니다. 왜냐하면 혼혈인이 많이 살던 땅이었기에.
예수님은 결국 예루살렘을 노리되 현재 예루살렘을 장악하고 있는 세력과 정반대의 개념으로 말씀을 주십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이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고 여겼는데, 바리새인들이 성전 중심으로 의롭다고 여기는 그 체계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동의했습니까, 아닙니까? 동의했어요.
동의했다는 말은, 나도 언젠가는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자리에 합류하겠다는 마음을 보통 사람들이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교회가 바리새인 시스템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겁니다. 목사는 늘 하는 소리가 자신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목사는 할 일이 없으니까 기도하고 성경 읽고 예배에 꼬박꼬박 참석하지만 교인들은 직장생활 해야 하기에 목사처럼 생활 못합니다.
수요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던 목사가 목사 그만두면 그래도 수요예배에 꼬박꼬박 참석할까요? 우리교회 수요 예배를 인터넷으로 중계하는데 처음에는 많이 접속했어요. 요즘은 별로 안 들어옵니다. 왜? 그동안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제가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의를 많이 쌓으세요. 그리고 그것이 다 버릴 죄인 것을 믿으세요. 쌓으세요. 믿으세요. 많이 의를 쌓으세요. 헌금 많이 했다고 자랑하고, 목사한테 충성하고, 십자가 알고 교회 봉사했다고 자랑하세요.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진짜 죄 덩어리인 것을 믿으세요. 그렇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가족이 아프거든 기도하세요. 혹시 기도 응답되어 건강하게 될지 모르잖아요. 그것도 죄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혼자 다 이루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세리가 되었든 창기가 되었든 주님의 주 되심을 드러내기 위한 엑스트라입니다. 영화에는 엑스트라가 필요하잖아요. 주연은 예수님이고 우리는 엑스트라입니다. 우리가 엑스트라인줄 알게 되면 그 사람은 구원 받은 사람이고, 자신이 주님의 엑스트라인 것을 모르면 구원 못 받은 사람입니다.
주님이 지나가면서 계란을 채로 건지듯이 자기 백성을 건지십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시면서 우리들이 알고 있는 죄와 의를 거꾸로 뒤집어서 알려주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예수님이 가신 길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주님 만날 생각하지 말고, 지금 우리 자신이 만들어진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주께서 조성하신 환경인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4. 9. 5. 08:30 녹취 마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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