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4. 9. 19) 7-1
마가복음 2장 15절을 봅시다.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저희가 많이 있어서 예수를 좇음이러라.”
세상에서는 죄인이 바깥으로 자유롭게 돌아다니지 못하고 교도소에 집결해 있지요. 자유롭게 길에 다니는 사람을 죄인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안 맞는 이야기지요. 그런데 본문에서는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라고 했는데, ‘도대체 죄인들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죄인인가’ 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 관점에서는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 당시에 죄인이라고 규정한 것 같으면 드러내놓고 함부로 돌아다닐 수 없을 것인데 예수님과 같이 있다는 것은 이상하지요? 그 죄인이라는 표현을 본인 스스로 한 것인지, 아니면 누가 그 사람을 죄인이라고 하는지,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도 그들을 죄인으로 보고 있는지 이것을 일단 알아야겠지요.
아는 방법이 있어요. 뭐냐 하면, 죄인이 세리와 함께 있다고 했지요. 그러면 이 사람들은 스스로 어떤 죄를 지은 것이 아니고 그 사회의 계급처럼 사람들에게 그런 평판을 받는 무리라고 보면 됩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에게 ‘죄인’이라고 말한 사람이 누구냐가 중요합니다. 그들이 바로 16절에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다시 설명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의 참된 취지가 뭔가?’ 물었을 때, 그 사회 사람들은 놔두고 예수님만 딱 뽑아서 “예수님, 우리에게 말씀하옵소서.” 이렇게 한다고 해서 해석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그 당시 만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셨지요.
그러면 예수님 말씀을 해석한다는 것은 무엇을 전재로 하고 무엇을 염두에 둬야 된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이 살던 그 시대에 예수님 오시기 전부터 ‘이 사회는 이러해야 돼.’ 라고 했던 주장들이 있을 거예요. 그 주장들이 뭐냐 하면, 방금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죄인과 세리를 자신과는 다른 계급으로 간주했던 그런 분위기 속에 예수님이 들어오신 거예요.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 예수님과 나의 1대1 관계를 생각하잖아요. 예수님이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 했으면,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되는가? ‘주의 말씀을 믿으면 된다.’고 하니까,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 믿으면 나는 오늘 밤 죽어도 천국에 간다.’ 얼마나 간단합니까?
그런데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그 당시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는 거죠. 그것을 오늘날 우리에게 이야기하신 것으로 간주하게 되면 해석을 잘못 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해가 아닌 오해를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활동을 하실 때 뭘 의식하고 활동하십니다. 그 의식한 것이 뭐냐 하면, 지금 우리를 의식한 것이 아니고 그 당시 사람들을 의식했거든요. 그 당시 사람들이 이렇게 해야 옳다고 하면서 잡아놓은 체계가 있는데 그 체계가 뭔가? 세리같은 종류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성경에 전문가고 서기관들은 성경을 기록하고 전하는 사람으로 하나님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많이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 시대에 하나님 전문가가 평가하기를, 세리와 같은 사람들은 자신들보다 수준이 낮은 죄인이라고 규정을 했습니다. 이런 규정을 전제로 해서 예수님은 말씀을 하신 거예요.
이런 예수님을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가 “당신이 말씀하신 것을 내가 믿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니까 이것은 엉뚱한 생각을 갖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은 그런 이야기를 안 했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이용해서 구원 받는데 급급하다보니 예수님이 말씀하신 방향과 전혀 달라요.
다르다는 말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믿을 수 없으니까 남에게 예수 믿는 척을 해야 하니까, 자기가 생각한 것을 예수님께 일방적으로 덮어씌우고 그것을 자기가 믿는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골 할머니가 떡을 한 접시 놓고 “예수님, 떡 잘 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때, 성경을 보잔 말이지요.
예수님이 떡이 잘 되게 해주시는 분인지 성경을 찾아보면 유대 사회는 떡도 없어요. 그런데 왜 시골 할머니는 짐승들이 새끼 낳을 때나 차를 새로 구입하거나 할 때, “사고 나지 않게 하시고 --” 이런 기도를 한단 말이지요. 예수님이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사고를 막아주는 자다.’라고 했습니까? 그 당시에는 차도 없었어요.
지금 우리 자신이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은 나의 염려와 걱정인데, 그것을 일방적으로 예수님께 뒤집어씌워 “주께서 해결해 주실 줄 믿습니다.”라고 하면 이것은 예수님을 바보로 만드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절대로 기대나 짐작이나 예상을 하면 안 됩니다. 기대나 예상을 하면 고민과 스트레스만 나옵니다. 아무리 예수님께 간절히 기도를 해도 자기가 기대한 것이 있고 예상한 것이 있다면 돌아오는 것은 초조와 불안뿐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 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대할 때 마치 세상의 권세 있는 사람에게 부탁하듯 하는 사람이 있어요. ‘주님은 능력이 있잖아요. 그리고 돈도 많잖아요. 그러니까 저의 작은 부탁 하나 들어주시면 앞으로는 더욱 예수님 잘 믿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다루면 그 사람은 자기 기대와 자기가 예상한 패쇄적 공간에서 조금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계속 자신이 잘 되는지, 안 되는지 살펴보면서 초조하게 살아가지요. 기도는 이미 했는데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아직 응답이 없고, 그러면 ‘혹시 내가 기도를 잘 못 했나, 아니면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기에 응답하지 않으시는가? 그러면 내가 지금 죽으면 지옥으로 간다는 말인가?’ 이런 염려와 걱정에 휩싸이지요.
이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예수님은 그 당시 사람들(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등)에게 이야기한 것에 우리가 끼어들지 마세요.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를 대표해서 그 시대에 등장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공통점은 최종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모든 사고방식의 궁극적 목적, 그리고 모든 진리체계는 어디로부터 주어졌다고 믿었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다고 믿었어요. 따라서 그들이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사실은 모든 인간이 다 품고 있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들의 사고방식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있습니다. 인간의 사는 목적은 하나님을 위함인데,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순종하게 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확고한 신앙체계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체계에 대해 본인이 스스로 수납해서 이것은 완전한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인간의 목적이다.’ 이러한 체계에 대해서 그들은 추호도 잘못됨이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옳습니까?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은 하나님을 믿고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것이 틀렸다고 지적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19세기 서양 학계에 ‘인상주의’라는 것이 있습니다. 프랑스의 화가 마네가 그 중 한 사람인데, 그가 그린 그림 [풀밭 위의 점심식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이 대중들에게 분노를 유발했어요. 점잖은 신사들이 창기와 함께 식사를 즐기는데, 한 창기는 옷을 벗고 있어요. 이 작품이 대중들의 정서에 맞지 않고 너무 외설적으로 보였기에 흥분한 일부 관람객은 우산으로 작품을 훼손하려 했기에, 이 작품을 전시할 때 사람들이 손이 닿지 않는 높이에 걸어놓았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왜 하는가 하면, 예수님이 찾아왔던 그 당시 유대 사회는 완벽한 그림처럼 하나님의 율법과 사람의 관계가 완벽한 체계를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산을 들고 그 체계를 찢는다면 어떻겠어요? 아무리 착하고 점잖은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그냥 두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노렸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날 잡아 죽이라는 겁니다. 나는 죽임당하기 위해서 너희들이 완벽하다고 믿는 그 체계를 찢겠다는 겁니다. 마가복음 2장 14-15절을 보면, 예수님이 언제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를 하는가 하면 고난주간 때입니다. 전 국민이 식사를 금하고 회개하는 기간입니다. 회개하는 이유는, 예레미야에 보면 정기적으로 회개하는 절기가 있어요.
왜 회개해야 하는가 하면, 약속의 땅을 이스라엘이 차지하고 있으면 회개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 언약에 맞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데 이들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땅을 벗어났을 때는 회개하면 하나님이 돌아오게 하겠다는 약속을 했어요. ‘네가 죄를 지어 추방되었기에 회개하면 다시 그 땅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율법으로 있다면 유대 지도자들은 대중들에게 이것을 가르쳐야겠지요.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우리가 지금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은 아직 회개할 죄가 남아있기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회개해서 하나님께 응답 받으면 로마제국은 사라지고 우리가 온전히 이 땅을 차지하고 거룩한 제사장 나라가 이뤄집니다.’ 이런 논리 하에 고난주간을 정하고 온 백성이 금식하며 기도했어요. 여기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의를 했어요.
이런 분위기에서 예수님은 우산대로 구멍을 내는 일을 하셨어요. 남들은 금식하고 있는 기간에 예수님은 세리,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면서 즐겁게 술도 마시고 했어요. 그러면 바리새인, 서기관 입장에서 금식 기간에 누구보다 많이 회개해야 할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세리, 죄인들이지요.
예수님이 세리,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는 것은 바리새인들이 보기에는 단순히 금식일을 어겼다는 정도가 아니고, 이들의 잘못 때문에 지금 로마의 압제 하에서 온 민족이 고통 받고 있는데, 회개를 해도 시원찮을 판에 예수라는 이상한 사람이 등장해서 죄인의 무리들과 함께 보란 듯이 마음껏 먹고 마셨으니 얼마나 미웠겠습니까?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 구절을 보면서, 도대체 죄인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지금 금식하고 회개하면서 나라 되찾겠다고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고 있는 그들 눈에 비친 죄인은 자신들이 하는 일에 동조하지 않은 자들입니다. 왜? 그들이 하는 일은 의롭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성경에서도 그들의 평가 그대로 ‘세리와 죄인’이라고 평가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기존의 서기관, 바리새인의 체계가 도리어 나라를 망하게 한 죄라고 규정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율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도리고 만약 율법을 못 지키면 회개해서 긍휼을 바라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도리다.’라고 하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 보시기에 죄가 됩니다.
이 역전(뒤바뀜)을 우리가 무슨 수로 이해하고 납득하겠습니까? 우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을 서기관, 바리새인이 이해 못하는 이유를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인간도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까지 왔는가 하면, 여기(내 가까이)까지 왔는데 여기에서 멈췄어요. 그러면 요만큼 간격이 생기죠.
말씀이 여기까지 왔는데 인간이 이쯤 있다면 이 간격을 메워야 합니다. 유치원 운동회 할 때 과자 따먹기를 합니다. 그 과자는 아이들 입보다 조금 더 높이 있지요. 그래서 그것을 따먹으려면 폴짝 뛰어 따먹어야 합니다. 아이들 키와 과자의 간격이 있는 것처럼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내부까지 들어오지 못하고 앞에 까지 온 거예요.
이것은 마치 침례교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렸는데, 그 피를 믿는 자는 구원을, 안 믿는 자는 지옥 간다는 교리와 같은 거예요. 하나님이 하신 것은 피 흘리는 것까지고, 그것을 믿고 말고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알아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치원 아이들이 과자 따먹듯이. 이런 방식을 인간이 원하고 있어요.
이것은 예레미야 31장 33절에 나오는 말씀에 어긋나요. 이 말씀이 히브리서 10장에 그대로 인용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마지막 때에 내가 언약을 세우는데 그 언약은 네 코앞에만 온 것이 아니고(코앞에 온 것은 십계명입니다) 우리 안에 침투해서 우리가 다니는 곳마다 말씀이 출렁이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가 바로 예레미야에 나오는 ‘새언약’의 시대입니다.
그리고 에스겔 36장에 보면, 성신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게 되면, ‘내가 믿었습니다.’라는 것은 전혀 말이 안 되고, 아예 우리 속을 점령하고 장악하는 그런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이런 식으로 가르쳤습니다. 인간이 비록 범죄했지만 완전한 죄인이 된 것은 아니고 우리가 힘쓰면 말씀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양심이고 거룩한 것이고 선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말씀이 왔을 때 우리 양심을 개발하고 잠재력을 일깨워서 지키면 지킬 수 있다는 겁니다.
마치 식당에서 돼지수육이 나왔는데 내가 젓가락 들고 고기를 집어 입에 넣지 아니하면 맛을 모르고 먹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음식이 맛있고 영양가 있는 것이 나와도 내가 약간은 노력하고 힘써야 그것이 내 입에 들어가서 내 몸에 영양분을 공급한다는 것이죠.
바리새인, 사두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집어서 나의 것으로 만드는 시범 조교가 본인들이라고 여겼어요. ‘나처럼 하면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라며 시범 조교가 되어 행동했고, 그런 자신의 행동을 의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자신을 의인으로 생각했기에 자신을 따르지 않는, 자신과 다른 사람을 죄인으로 규정했습니다.
내가 의인이 되려면 나와 다른 사람은 반드시 죄인이 되어야 합니다.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의인이라는 것이 그 시대의 대세였습니다. 이것이 그 사회를 지배하는 체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리새인에게 찾아가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의인 될 수 있습니까?”라고 물을 때, “줄을 서시오.”라고 했고, 줄을 서니까 일곱 단계가 형성이 된 것입니다.
고분고분 순종하는 여자는 4단계, 매일 술을 마시는 자는 7단계, 이방인은 단계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저주 받은 자. 이런 식으로 서열을 정했어요.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어떤 심리가 생기는가 하면, 현재의 자기 위치에서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제자훈련을 할 때 최고의 단계를 목표로 훈련을 시키지요. 십일조와 주일성수를 하지 않으면 장로 후보에도 오르지 못합니다.
목사는 당연히 십일조, 주일성수를 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나처럼 하면 구원 받는다는 식입니다. 권위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정통적 권위, 카리스마 권위, 합법적 권위가 있는데, 목사는 카리스마 권위를 내세우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사회학자 베버가 주장한 것인데, 정통적 권위는 가부장 제도이고---
한 사회가 유지되는 것은 권위가 필수적입니다. 그래야 안정된 질서가 유지됩니다. 그 권위는 그냥 말로만 해서는 안 되고 모델이 있어야 되는데, 그 모델은 권위를 외치는 본인이 모델로 등장하기 마련이고 다른 사람은 그 모델을 본받겠다는 생각이 들어야 안정된 사회가 유지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다리처럼 계급을 만들고, 각 단계에 이를 때마다 거기에 필요한 율법(규칙)을 줬어요. 그 규칙을 감당한 사람은 한 단계 더 올라갈 수 있고, 규칙을 감당 못한 사람은 진급할 수 없습니다. 세리, 죄인들은 최하 단계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 시대 자체가 이미 그런 식으로 계급을 인정했기에 어느 누구도 거부하지 못했어요.
죄인으로 분류되어 차별과 가난의 삶을 살아도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지’ 하고 묵묵히 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최하 등급에 있는 자들과 어울렸어요. 사람들이 말렸지요. “금식하는 고난주간에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하고 이러시면 안 됩니다.”라고. 이 때 예수님의 답변은 “신랑이 왔다.” 결혼식에서 울고 금식하는 법은 없다는 거예요.
결혼식의 주인공은 신랑과 신부입니다. 결혼식에 하객들이 많이 온다고 신부가 하객들과 결혼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부는 신랑이 오면 됩니다. 신랑이 당당하게 자기 신부를 찾는데 신부가 움츠리고 겁먹는다면 신랑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요. “혼인 잔치에 신랑이 왔는데 금식하고 울고 왜 이러지? 정말 너희들이 나를 신랑으로 인정한다면 나를 잃어버릴 때에 진정 나를 신랑으로 인정했는지 아닌지 들통 날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 말씀입니다.
나를 잃어버렸는데도 “누가 왔다 갔나?” 이렇게 무관심하면 그것은 신부가 아니고, 나를 잃어버린 날에 “주여, 보고 싶습니다.” 하면 그는 신랑에 합당한 신부입니다. 지금 이 말을 예수님이 하신 거예요. 이런 예수님의 이야기는 무엇을 전제로 하는가? 예수님의 이야기와 그 당시 상황이 통째로 굴러 들어와야 해석이 됩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가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순종하므로 구원 받는데, 순종하는 방법은 하나님은 우리 코앞까지 말씀을 주시고, 약간의 간격은 우리가 믿음으로 메우고 말씀을 잡아 내 것으로 만들 때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이 납득이 된다는 그 체계.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체계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왜? 내가 아무것도 안 할 때 주님도 아무것도 안 하시면 정말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안 했지만 주님이 일하심으로 말미암아 뭔가가 됩니다. 이것은 나의 공로가 아니고 주님 공로라는 것을 알 때 이것이 결과적으로 믿음 관계가 되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의 대표적인 장면이 고린도전서 13장인데, 이것은 10월에 있을 결혼식 주례사로 할 계획입니다. 9-1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 했어요. 여기에서 온전한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지요? 그것은 바로 믿음도 아니고 소망도 아닌 사랑입니다. 믿음, 사랑, 소망은 같은데서 오지만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기에, 사랑에서 나온 믿음, 사랑에서 나온 소망일 때만 그것은 온전한 믿음, 소망이라는 겁니다.
그럼 사랑이 뭔가? 대신 죽으심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아무것도 아닌 나를 위해서 예수님이 대신 희생해 주셨습니다. 남편이 고생해서 돈 벌고, 아내는 돈 쓰는 재미로 사는 것과 같습니다. 홈 쇼핑으로 온갖 물건을 사는데 대부분 쓰지도 않고 창고에 그냥 쌓아둡니다.
창고에 쌓아둔 물건이 어디서 왔는가? 이 물음에 우리는 항상 ‘나’로 마감이 됩니다. ‘내가 잘못해서 광고의 유혹에 넘어가 물건을 구입했는데 내가 원하는 물건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소망도 아니고 믿음도 아니에요. “내 남편이 고생했지!” 이것이 사랑입니다. 결국 사랑이라는 것은 내가 설정한 내 자리에서 나를 떼어내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내가 앉은 방석을 빼내서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 방석은 주님이 나에게 깔아주셨잖아요. 주님의 자리로 인하여 나오는 능력으로 구원 받게 되었습니다. 나르는 양탄자 같아요. 그 자리가 의로운 자리가 되어서 그 자리에 누가 앉든지 의인이 되어버립니다. 이것을 예수 안에서 의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공짜로, 무상으로 받은 거지요. 무상으로 받은 것과 바리새인의 체제를 비교해 봅시다. 하나님이 있고 내가 있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 행함으로 율법을 지키면 되는데, 이 행함이 사도 바울의 복음과 다르다는 소리를 피하기 위해 행함을 “믿으면 됩니다.” 라고 합니다. 이것은 같은 행함에 속한 것입니다.
어리석은 교인들은 시키는 대로 하면서 “믿습니다.”라고 합니다. 믿음은 사랑에서 나와야 하는데 이것은 자기가 자기를 사랑해서 자기 자존심을 유지한 채 믿게 되니까 그 믿음은 자기 자랑하는 믿음이고, 나의 믿음을 믿는 것이어서 이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기입니다. 즉 믿음이 아닌 행함이죠.
이런 사기를 교회에서 자꾸 이야기합니다. “내가 믿으니까 이런 복을 받았습니다.”라는 소리를 하니까 “네가 믿어서 복을 받았다면 나도 믿고 복 받아야지.”이런 오기를 유발합니다. 그런데 사랑은 새삼스럽게 기대와 목적을 쟁취하는 것이 아니고 현재 있는 것을 소급해서 주님이 주신 것을 재발견하는 것이 사랑이고 믿음입니다. 내가 현재 가진 것도 어느 것 하나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고 주께서 주신 것입니다.
목욕탕 안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있어요. 이런 사람들에게 제가 잔소리를 합니다. 조용히 하라고. 탕 안에서 “어 좋다.” 이러고 있어요. 이런 사람에게 질문을 해 봅시다. “당신이 지금 좋은 것은 누구 덕분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주님 덕분입니다.” 이러면 됩니다. 목욕탕 가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무엇을 하든지 지금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로 알면 그것이 사랑에서 나온 믿음이고 소망입니다.
그런데 뭔가를 하고는 “이것은 내가 40년 동안 심혈을 기울였고, 내가 십일조를 성실히 했기 때문에 우리 집 창고가 넘쳐나고 --” 이런 사람이 있어요. 모든 것을 나로 출발하게 되면 이것은 바리새인입니다. 이런 사람은 마가복음을 천번 만번 읽어도 더 견고한 바리새인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의 뜻은 고난주간에 술 먹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남들은 고난주간에 금식하며 회개한다고 하는데 나는 술 마시며 즐기겠다는 것 또한 행함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자유함을 남에게 과시하는 교만의 일종입니다. “나는 십일조도 안 한다.” 이게 자랑입니까? 이 말은 ‘나는 돈이 좋아서 미치겠다.’는 뜻입니다. “나는 주일 날 즐거운 마음으로 백화점에 가서 물건 산다.” 이렇게 나오면 안 되고, “주께서 하게하셔서 했다.”고 하면 됩니다.
굉장히 위험한 발상이지요? ‘주일 날 무슨 짓을 해도 주께서 하게하셨다고 하면 그것이 믿음이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마치 부모한테 안 바치고 하나님께 드리면 그것이 부모에게 바친 것이 된다는 고르반 사상과 같은 논리가 되지요.
제 말은, 어떤 일을 해도 나의 정당성을 거기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일요일에 어쩔 수 없어서 마트에 가서 물건을 사는 것은 주의 뜻인데, “나는 일요일에 마트에 가서 물건 사는 것이 왜 이렇게 즐거운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물건 사는 것을 정당화 하는 식으로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았단 말입니다.
우리교회 집사님이 아주 좋은 말을 했어요. “나는 술 마시면서도 기도합니다.” 집사님이 이런 말을 한 것은, ‘술 먹으라는 지시에 따라서 술 먹었고, 거기에 대해서 주께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먹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니까 나는 잘 먹었다’고 하면 안 됩니다. 제 말은, 내가 어쩔 수 없이 친구 만나서 술을 한잔 먹어도 주님을 생각하면서 먹어야 되는데, 술 먹으면서 ‘내가 예수 믿고 율법에서 완전해졌기 때문에 술 먹어도 된다’는 것이 왜 나의 자랑거리로 느껴지는지 이 죄를 본인이 느껴야 된다는 말입니다.
주님을 핑계대고 내 먹고 싶은 술을 마음껏 먹으면서 ‘이것은 주님이 시킨 것이다’는 핑계를 대고 싶은 그 마음은 절대로 죄악 된 마음이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 마음을 함께 가지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하시는 일은 반드시 그 일을 주께서 정당하게 만들면서도 겸해서 나를 죄인으로 만듭니다. “주여 제가 참 부끄럽습니다. 술을 먹으면서도 주께서 먹게 했다고 핑계를 대고 싶은 이 충동, 이 교만한 마음을 용서하옵소서.” 이렇게 되어야지요. 주의 일은 주님만 자랑하게 되지 주님 이름으로 나도 잘났다고 나오면 안 됩니다.
10분 쉽시다.
(2014. 9. 29. 04:29 녹취 마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