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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강의-말씀환경140919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10. 10. 18:24

2014-09-20 01:47:00 조회 : 201         
말씀환경 140919 이름 : 이근호 (IP:119.18.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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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수 (IP:118.♡.140.136) 14-09-29 05:08 

광주 강의(2014. 9. 19) 7-1

마가복음 2장 15절을 봅시다.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저희가 많이 있어서 예수를 좇음이러라.”

세상에서는 죄인이 바깥으로 자유롭게 돌아다니지 못하고 교도소에 집결해 있지요. 자유롭게 길에 다니는 사람을 죄인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안 맞는 이야기지요. 그런데 본문에서는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라고 했는데, ‘도대체 죄인들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죄인인가’ 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 관점에서는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 당시에 죄인이라고 규정한 것 같으면 드러내놓고 함부로 돌아다닐 수 없을 것인데 예수님과 같이 있다는 것은 이상하지요? 그 죄인이라는 표현을 본인 스스로 한 것인지, 아니면 누가 그 사람을 죄인이라고 하는지,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도 그들을 죄인으로 보고 있는지 이것을 일단 알아야겠지요.

아는 방법이 있어요. 뭐냐 하면, 죄인이 세리와 함께 있다고 했지요. 그러면 이 사람들은 스스로 어떤 죄를 지은 것이 아니고 그 사회의 계급처럼 사람들에게 그런 평판을 받는 무리라고 보면 됩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에게 ‘죄인’이라고 말한 사람이 누구냐가 중요합니다. 그들이 바로 16절에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다시 설명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의 참된 취지가 뭔가?’ 물었을 때, 그 사회 사람들은 놔두고 예수님만 딱 뽑아서 “예수님, 우리에게 말씀하옵소서.” 이렇게 한다고 해서 해석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그 당시 만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셨지요. 

그러면 예수님 말씀을 해석한다는 것은 무엇을 전재로 하고 무엇을 염두에 둬야 된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이 살던 그 시대에 예수님 오시기 전부터 ‘이 사회는 이러해야 돼.’ 라고 했던 주장들이 있을 거예요. 그 주장들이 뭐냐 하면, 방금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죄인과 세리를 자신과는 다른 계급으로 간주했던 그런 분위기 속에 예수님이 들어오신 거예요.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 예수님과 나의 1대1 관계를 생각하잖아요. 예수님이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 했으면,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되는가? ‘주의 말씀을 믿으면 된다.’고 하니까,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 믿으면 나는 오늘 밤 죽어도 천국에 간다.’ 얼마나 간단합니까?

그런데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그 당시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는 거죠. 그것을 오늘날 우리에게 이야기하신 것으로 간주하게 되면 해석을 잘못 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해가 아닌 오해를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활동을 하실 때 뭘 의식하고 활동하십니다. 그 의식한 것이 뭐냐 하면, 지금 우리를 의식한 것이 아니고 그 당시 사람들을 의식했거든요. 그 당시 사람들이 이렇게 해야 옳다고 하면서 잡아놓은 체계가 있는데 그 체계가 뭔가? 세리같은 종류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성경에 전문가고 서기관들은 성경을 기록하고 전하는 사람으로 하나님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많이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 시대에 하나님 전문가가 평가하기를, 세리와 같은 사람들은 자신들보다 수준이 낮은 죄인이라고 규정을 했습니다. 이런 규정을 전제로 해서 예수님은 말씀을 하신 거예요.

이런 예수님을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가 “당신이 말씀하신 것을 내가 믿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니까 이것은 엉뚱한 생각을 갖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은 그런 이야기를 안 했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이용해서 구원 받는데 급급하다보니 예수님이 말씀하신 방향과 전혀 달라요.

다르다는 말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믿을 수 없으니까 남에게 예수 믿는 척을 해야 하니까, 자기가 생각한 것을 예수님께 일방적으로 덮어씌우고 그것을 자기가 믿는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골 할머니가 떡을 한 접시 놓고 “예수님, 떡 잘 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때, 성경을 보잔 말이지요.

예수님이 떡이 잘 되게 해주시는 분인지 성경을 찾아보면 유대 사회는 떡도 없어요. 그런데 왜 시골 할머니는 짐승들이 새끼 낳을 때나 차를 새로 구입하거나 할 때, “사고 나지 않게 하시고 --” 이런 기도를 한단 말이지요. 예수님이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사고를 막아주는 자다.’라고 했습니까? 그 당시에는 차도 없었어요.

지금 우리 자신이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은 나의 염려와 걱정인데, 그것을 일방적으로 예수님께 뒤집어씌워 “주께서 해결해 주실 줄 믿습니다.”라고 하면 이것은 예수님을 바보로 만드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절대로 기대나 짐작이나 예상을 하면 안 됩니다. 기대나 예상을 하면 고민과 스트레스만 나옵니다. 아무리 예수님께 간절히 기도를 해도 자기가 기대한 것이 있고 예상한 것이 있다면 돌아오는 것은 초조와 불안뿐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 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대할 때 마치 세상의 권세 있는 사람에게 부탁하듯 하는 사람이 있어요. ‘주님은 능력이 있잖아요. 그리고 돈도 많잖아요. 그러니까 저의 작은 부탁 하나 들어주시면 앞으로는 더욱 예수님 잘 믿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다루면 그 사람은 자기 기대와 자기가 예상한 패쇄적 공간에서 조금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계속 자신이 잘 되는지, 안 되는지 살펴보면서 초조하게 살아가지요. 기도는 이미 했는데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아직 응답이 없고, 그러면 ‘혹시 내가 기도를 잘 못 했나, 아니면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기에 응답하지 않으시는가? 그러면 내가 지금 죽으면 지옥으로 간다는 말인가?’ 이런 염려와 걱정에 휩싸이지요.

이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예수님은 그 당시 사람들(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등)에게 이야기한 것에 우리가 끼어들지 마세요.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를 대표해서 그 시대에 등장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공통점은 최종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모든 사고방식의 궁극적 목적, 그리고 모든 진리체계는 어디로부터 주어졌다고 믿었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다고 믿었어요. 따라서 그들이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사실은 모든 인간이 다 품고 있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들의 사고방식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있습니다. 인간의 사는 목적은 하나님을 위함인데,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순종하게 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확고한 신앙체계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체계에 대해 본인이 스스로 수납해서 이것은 완전한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인간의 목적이다.’ 이러한 체계에 대해서 그들은 추호도 잘못됨이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옳습니까?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은 하나님을 믿고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것이 틀렸다고 지적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19세기 서양 학계에 ‘인상주의’라는 것이 있습니다. 프랑스의 화가 마네가 그 중 한 사람인데, 그가 그린 그림 [풀밭 위의 점심식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이 대중들에게 분노를 유발했어요. 점잖은 신사들이 창기와 함께 식사를 즐기는데, 한 창기는 옷을 벗고 있어요. 이 작품이 대중들의 정서에 맞지 않고 너무 외설적으로 보였기에 흥분한 일부 관람객은 우산으로 작품을 훼손하려 했기에, 이 작품을 전시할 때 사람들이 손이 닿지 않는 높이에 걸어놓았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왜 하는가 하면, 예수님이 찾아왔던 그 당시 유대 사회는 완벽한 그림처럼 하나님의 율법과 사람의 관계가 완벽한 체계를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산을 들고 그 체계를 찢는다면 어떻겠어요? 아무리 착하고 점잖은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그냥 두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노렸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날 잡아 죽이라는 겁니다. 나는 죽임당하기 위해서 너희들이 완벽하다고 믿는 그 체계를 찢겠다는 겁니다. 마가복음 2장 14-15절을 보면, 예수님이 언제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를 하는가 하면 고난주간 때입니다. 전 국민이 식사를 금하고 회개하는 기간입니다. 회개하는 이유는, 예레미야에 보면 정기적으로 회개하는 절기가 있어요.

왜 회개해야 하는가 하면, 약속의 땅을 이스라엘이 차지하고 있으면 회개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 언약에 맞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데 이들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땅을 벗어났을 때는 회개하면 하나님이 돌아오게 하겠다는 약속을 했어요. ‘네가 죄를 지어 추방되었기에 회개하면 다시 그 땅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율법으로 있다면 유대 지도자들은 대중들에게 이것을 가르쳐야겠지요.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우리가 지금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은 아직 회개할 죄가 남아있기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회개해서 하나님께 응답 받으면 로마제국은 사라지고 우리가 온전히 이 땅을 차지하고 거룩한 제사장 나라가 이뤄집니다.’ 이런 논리 하에 고난주간을 정하고 온 백성이 금식하며 기도했어요. 여기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의를 했어요.

이런 분위기에서 예수님은 우산대로 구멍을 내는 일을 하셨어요. 남들은 금식하고 있는 기간에 예수님은 세리,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면서 즐겁게 술도 마시고 했어요. 그러면 바리새인, 서기관 입장에서 금식 기간에 누구보다 많이 회개해야 할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세리, 죄인들이지요.

예수님이 세리,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는 것은 바리새인들이 보기에는 단순히 금식일을 어겼다는 정도가 아니고, 이들의 잘못 때문에 지금 로마의 압제 하에서 온 민족이 고통 받고 있는데, 회개를 해도 시원찮을 판에 예수라는 이상한 사람이 등장해서 죄인의 무리들과 함께 보란 듯이 마음껏 먹고 마셨으니 얼마나 미웠겠습니까?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 구절을 보면서, 도대체 죄인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지금 금식하고 회개하면서 나라 되찾겠다고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고 있는 그들 눈에 비친 죄인은 자신들이 하는 일에 동조하지 않은 자들입니다. 왜? 그들이 하는 일은 의롭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성경에서도 그들의 평가 그대로 ‘세리와 죄인’이라고 평가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기존의 서기관, 바리새인의 체계가 도리어 나라를 망하게 한 죄라고 규정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율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도리고 만약 율법을 못 지키면 회개해서 긍휼을 바라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도리다.’라고 하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 보시기에 죄가 됩니다.

이 역전(뒤바뀜)을 우리가 무슨 수로 이해하고 납득하겠습니까? 우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을 서기관, 바리새인이 이해 못하는 이유를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인간도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까지 왔는가 하면, 여기(내 가까이)까지 왔는데 여기에서 멈췄어요. 그러면 요만큼 간격이 생기죠.

말씀이 여기까지 왔는데 인간이 이쯤 있다면 이 간격을 메워야 합니다. 유치원 운동회 할 때 과자 따먹기를 합니다. 그 과자는 아이들 입보다 조금 더 높이 있지요. 그래서 그것을 따먹으려면 폴짝 뛰어 따먹어야 합니다. 아이들 키와 과자의 간격이 있는 것처럼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내부까지 들어오지 못하고 앞에 까지 온 거예요.

이것은 마치 침례교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렸는데, 그 피를 믿는 자는 구원을, 안 믿는 자는 지옥 간다는 교리와 같은 거예요. 하나님이 하신 것은 피 흘리는 것까지고, 그것을 믿고 말고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알아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치원 아이들이 과자 따먹듯이. 이런 방식을 인간이 원하고 있어요.

이것은 예레미야 31장 33절에 나오는 말씀에 어긋나요. 이 말씀이 히브리서 10장에 그대로 인용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마지막 때에 내가 언약을 세우는데 그 언약은 네 코앞에만 온 것이 아니고(코앞에 온 것은 십계명입니다) 우리 안에 침투해서 우리가 다니는 곳마다 말씀이 출렁이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가 바로 예레미야에 나오는 ‘새언약’의 시대입니다.

그리고 에스겔 36장에 보면, 성신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게 되면, ‘내가 믿었습니다.’라는 것은 전혀 말이 안 되고, 아예 우리 속을 점령하고 장악하는 그런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이런 식으로 가르쳤습니다. 인간이 비록 범죄했지만 완전한 죄인이 된 것은 아니고 우리가 힘쓰면 말씀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양심이고 거룩한 것이고 선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말씀이 왔을 때 우리 양심을 개발하고 잠재력을 일깨워서 지키면 지킬 수 있다는 겁니다.

마치 식당에서 돼지수육이 나왔는데 내가 젓가락 들고 고기를 집어 입에 넣지 아니하면 맛을 모르고 먹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음식이 맛있고 영양가 있는 것이 나와도 내가 약간은 노력하고 힘써야 그것이 내 입에 들어가서 내 몸에 영양분을 공급한다는 것이죠.

바리새인, 사두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집어서 나의 것으로 만드는 시범 조교가 본인들이라고 여겼어요. ‘나처럼 하면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라며 시범 조교가 되어 행동했고, 그런 자신의 행동을 의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자신을 의인으로 생각했기에 자신을 따르지 않는, 자신과 다른 사람을 죄인으로 규정했습니다.

내가 의인이 되려면 나와 다른 사람은 반드시 죄인이 되어야 합니다.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의인이라는 것이 그 시대의 대세였습니다. 이것이 그 사회를 지배하는 체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리새인에게 찾아가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의인 될 수 있습니까?”라고 물을 때, “줄을 서시오.”라고 했고, 줄을 서니까 일곱 단계가 형성이 된 것입니다.

고분고분 순종하는 여자는 4단계, 매일 술을 마시는 자는 7단계, 이방인은 단계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저주 받은 자. 이런 식으로 서열을 정했어요.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어떤 심리가 생기는가 하면, 현재의 자기 위치에서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제자훈련을 할 때 최고의 단계를 목표로 훈련을 시키지요. 십일조와 주일성수를 하지 않으면 장로 후보에도 오르지 못합니다.

목사는 당연히 십일조, 주일성수를 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나처럼 하면 구원 받는다는 식입니다. 권위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정통적 권위, 카리스마 권위, 합법적 권위가 있는데, 목사는 카리스마 권위를 내세우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사회학자 베버가 주장한 것인데, 정통적 권위는 가부장 제도이고---

한 사회가 유지되는 것은 권위가 필수적입니다. 그래야 안정된 질서가 유지됩니다. 그 권위는 그냥 말로만 해서는 안 되고 모델이 있어야 되는데, 그 모델은 권위를 외치는 본인이 모델로 등장하기 마련이고 다른 사람은 그 모델을 본받겠다는 생각이 들어야 안정된 사회가 유지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다리처럼 계급을 만들고, 각 단계에 이를 때마다 거기에 필요한 율법(규칙)을 줬어요. 그 규칙을 감당한 사람은 한 단계 더 올라갈 수 있고, 규칙을 감당 못한 사람은 진급할 수 없습니다. 세리, 죄인들은 최하 단계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 시대 자체가 이미 그런 식으로 계급을 인정했기에 어느 누구도 거부하지 못했어요.

죄인으로 분류되어 차별과 가난의 삶을 살아도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지’ 하고 묵묵히 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최하 등급에 있는 자들과 어울렸어요. 사람들이 말렸지요. “금식하는 고난주간에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하고 이러시면 안 됩니다.”라고. 이 때 예수님의 답변은 “신랑이 왔다.” 결혼식에서 울고 금식하는 법은 없다는 거예요.

결혼식의 주인공은 신랑과 신부입니다. 결혼식에 하객들이 많이 온다고 신부가 하객들과 결혼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부는 신랑이 오면 됩니다. 신랑이 당당하게 자기 신부를 찾는데 신부가 움츠리고 겁먹는다면 신랑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요. “혼인 잔치에 신랑이 왔는데 금식하고 울고 왜 이러지? 정말 너희들이 나를 신랑으로 인정한다면 나를 잃어버릴 때에 진정 나를 신랑으로 인정했는지 아닌지 들통 날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 말씀입니다.

나를 잃어버렸는데도 “누가 왔다 갔나?” 이렇게 무관심하면 그것은 신부가 아니고, 나를 잃어버린 날에 “주여, 보고 싶습니다.” 하면 그는 신랑에 합당한 신부입니다. 지금 이 말을 예수님이 하신 거예요. 이런 예수님의 이야기는 무엇을 전제로 하는가? 예수님의 이야기와 그 당시 상황이 통째로 굴러 들어와야 해석이 됩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가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순종하므로 구원 받는데, 순종하는 방법은 하나님은 우리 코앞까지 말씀을 주시고, 약간의 간격은 우리가 믿음으로 메우고 말씀을 잡아 내 것으로 만들 때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이 납득이 된다는 그 체계.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체계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왜? 내가 아무것도 안 할 때 주님도 아무것도 안 하시면 정말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안 했지만 주님이 일하심으로 말미암아 뭔가가 됩니다. 이것은 나의 공로가 아니고 주님 공로라는 것을 알 때 이것이 결과적으로 믿음 관계가 되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의 대표적인 장면이 고린도전서 13장인데, 이것은 10월에 있을 결혼식 주례사로 할 계획입니다. 9-1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 했어요. 여기에서 온전한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지요? 그것은 바로 믿음도 아니고 소망도 아닌 사랑입니다. 믿음, 사랑, 소망은 같은데서 오지만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기에, 사랑에서 나온 믿음, 사랑에서 나온 소망일 때만 그것은 온전한 믿음, 소망이라는 겁니다.

그럼 사랑이 뭔가? 대신 죽으심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아무것도 아닌 나를 위해서 예수님이 대신 희생해 주셨습니다. 남편이 고생해서 돈 벌고, 아내는 돈 쓰는 재미로 사는 것과 같습니다. 홈 쇼핑으로 온갖 물건을 사는데 대부분 쓰지도 않고 창고에 그냥 쌓아둡니다.

창고에 쌓아둔 물건이 어디서 왔는가? 이 물음에 우리는 항상 ‘나’로 마감이 됩니다. ‘내가 잘못해서 광고의 유혹에 넘어가 물건을 구입했는데 내가 원하는 물건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소망도 아니고 믿음도 아니에요. “내 남편이 고생했지!” 이것이 사랑입니다. 결국 사랑이라는 것은 내가 설정한 내 자리에서 나를 떼어내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내가 앉은 방석을 빼내서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 방석은 주님이 나에게 깔아주셨잖아요. 주님의 자리로 인하여 나오는 능력으로 구원 받게 되었습니다. 나르는 양탄자 같아요. 그 자리가 의로운 자리가 되어서 그 자리에 누가 앉든지 의인이 되어버립니다. 이것을 예수 안에서 의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공짜로, 무상으로 받은 거지요. 무상으로 받은 것과 바리새인의 체제를 비교해 봅시다. 하나님이 있고 내가 있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 행함으로 율법을 지키면 되는데, 이 행함이 사도 바울의 복음과 다르다는 소리를 피하기 위해 행함을 “믿으면 됩니다.” 라고 합니다. 이것은 같은 행함에 속한 것입니다.

어리석은 교인들은 시키는 대로 하면서 “믿습니다.”라고 합니다. 믿음은 사랑에서 나와야 하는데 이것은 자기가 자기를 사랑해서 자기 자존심을 유지한 채 믿게 되니까 그 믿음은 자기 자랑하는 믿음이고, 나의 믿음을 믿는 것이어서 이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기입니다. 즉 믿음이 아닌 행함이죠.

이런 사기를 교회에서 자꾸 이야기합니다. “내가 믿으니까 이런 복을 받았습니다.”라는 소리를 하니까 “네가 믿어서 복을 받았다면 나도 믿고 복 받아야지.”이런 오기를 유발합니다. 그런데 사랑은 새삼스럽게 기대와 목적을 쟁취하는 것이 아니고 현재 있는 것을 소급해서 주님이 주신 것을 재발견하는 것이 사랑이고 믿음입니다. 내가 현재 가진 것도 어느 것 하나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고 주께서 주신 것입니다.

목욕탕 안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있어요. 이런 사람들에게 제가 잔소리를 합니다. 조용히 하라고. 탕 안에서 “어 좋다.” 이러고 있어요. 이런 사람에게 질문을 해 봅시다. “당신이 지금 좋은 것은 누구 덕분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주님 덕분입니다.” 이러면 됩니다. 목욕탕 가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무엇을 하든지 지금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로 알면 그것이 사랑에서 나온 믿음이고 소망입니다.

그런데 뭔가를 하고는 “이것은 내가 40년 동안 심혈을 기울였고, 내가 십일조를 성실히 했기 때문에 우리 집 창고가 넘쳐나고 --” 이런 사람이 있어요. 모든 것을 나로 출발하게 되면 이것은 바리새인입니다. 이런 사람은 마가복음을 천번 만번 읽어도 더 견고한 바리새인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의 뜻은 고난주간에 술 먹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남들은 고난주간에 금식하며 회개한다고 하는데 나는 술 마시며 즐기겠다는 것 또한 행함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자유함을 남에게 과시하는 교만의 일종입니다. “나는 십일조도 안 한다.” 이게 자랑입니까? 이 말은 ‘나는 돈이 좋아서 미치겠다.’는 뜻입니다. “나는 주일 날 즐거운 마음으로 백화점에 가서 물건 산다.” 이렇게 나오면 안 되고, “주께서 하게하셔서 했다.”고 하면 됩니다.

굉장히 위험한 발상이지요? ‘주일 날 무슨 짓을 해도 주께서 하게하셨다고 하면 그것이 믿음이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마치 부모한테 안 바치고 하나님께 드리면 그것이 부모에게 바친 것이 된다는 고르반 사상과 같은 논리가 되지요.

제 말은, 어떤 일을 해도 나의 정당성을 거기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일요일에 어쩔 수 없어서 마트에 가서 물건을 사는 것은 주의 뜻인데, “나는 일요일에 마트에 가서 물건 사는 것이 왜 이렇게 즐거운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물건 사는 것을 정당화 하는 식으로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았단 말입니다.

우리교회 집사님이 아주 좋은 말을 했어요. “나는 술 마시면서도 기도합니다.” 집사님이 이런 말을 한 것은, ‘술 먹으라는 지시에 따라서 술 먹었고, 거기에 대해서 주께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먹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니까 나는 잘 먹었다’고 하면 안 됩니다. 제 말은, 내가 어쩔 수 없이 친구 만나서 술을 한잔 먹어도 주님을 생각하면서 먹어야 되는데, 술 먹으면서 ‘내가 예수 믿고 율법에서 완전해졌기 때문에 술 먹어도 된다’는 것이 왜 나의 자랑거리로 느껴지는지 이 죄를 본인이 느껴야 된다는 말입니다.

주님을 핑계대고 내 먹고 싶은 술을 마음껏 먹으면서 ‘이것은 주님이 시킨 것이다’는 핑계를 대고 싶은 그 마음은 절대로 죄악 된 마음이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 마음을 함께 가지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하시는 일은 반드시 그 일을 주께서 정당하게 만들면서도 겸해서 나를 죄인으로 만듭니다. “주여 제가 참 부끄럽습니다. 술을 먹으면서도 주께서 먹게 했다고 핑계를 대고 싶은 이 충동, 이 교만한 마음을 용서하옵소서.” 이렇게 되어야지요. 주의 일은 주님만 자랑하게 되지 주님 이름으로 나도 잘났다고 나오면 안 됩니다.

10분 쉽시다.

(2014. 9. 29. 04:29 녹취 마침)

 서경수 (IP:118.♡.140.136) 14-10-10 15:59 
광주 강의(2014. 9. 19) 7-2

마가복음 2장 16절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자기주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예수께서--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라고. 그들의 상식으로는 세리와 죄인은 지옥 갈 자들인데 예수님이 그들과 어울리는 것은 함께 지옥 갈 자란 말이거든요.

율법에서 멀어지면 죄인이 되는 겁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어거스틴도 같은 이야기를 했어요. 어거스틴의 신학에 보면, 지옥은 빛이 도달되지 않는 곳이고, 천국은 빛이 풍성한 곳이라고 했어요. 이 말은, 하나님 말씀은 빛인데 빛이 뚜렷하게 보이는 곳일수록 천사와 의인들이 많이 몰리고, 점점 빛이 어두워지는 곳에는 나쁜 사람들만 보인다는 거예요. 일리가 있는 것 같지요? 시편을 보면 이와 비슷한 대목이 있어요.

시편에 보면, “주여, 주의 빛을 돌이키지 마옵소서. 주의 빛을 저에게 비춰 주옵소서.” 그리고 이사야가 봤던 진짜 하나님의 모습은 너무나 영광스러워서 감히 바라볼 수 없었고,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다 내려와서 백성을 만날 때 맨 얼굴로 못가고 수건으로 가렸어요. 이런 내용을 바리새인들은 다 알고 있어요.

이것을 알고 있기에 이것을 바탕으로 사회 질서체계를 만들었어요. ‘빛이 있는 곳은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사람이고, 빛이 없는 어두운 뒷골목 술집 이런 곳에 있는 사람은 지옥 갈 사람이다. 따라서 율법이 빛이니까 율법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 성경 말씀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은 빛의 세계에 접근한 사람이고, 성경과 멀어진 사람은 지옥과 가까운 사람이다.’

이런 주장은 상식적으로 이의를 걸 수가 없지요? 완벽하잖아요.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늘 연구하는 것이 보다 완벽한 체제,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진리 체계입니다. 이것을 전통적으로 이어오면서 여기에 문제될 요소는 고치고, 빼고, 추가하면서 점점 더 완벽에 가까운 신학을 만들었어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성경 해석은 본인이 깨달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수많은 사람의 역사적으로 내려온 전통적인 해석을 연구해서 합당하다고 여기는 해석을 따릅니다. 가말리엘 문화, 힐렐 문화, 산마이 문화 등 구약해석의 세 가지 전통이 있어요. 그 중 가말리엘 문화가 유명한데 가말리엘 문화의 수제자가 바로 사울(바울)입니다.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고,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였습니다.

바리새인들 생각에, ‘인간은 오류가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그것을 그대로 진리화 시킬 수 없고, 또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동의한다 할지라도 선조들이 해석한 것과 모순되지 않아야 하고, 어느 것이 이 시대에 맞는지는 다시 한 번 검토해야 한다.’ 이런 생각이 아주 철저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이성이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고, 신의 빛이 이 시대에 추가된다면 추가된 빛에 의해서 다시 옛날 진리라고 여겼던 것도 새롭게 검토해서 완벽에 완벽을 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바로 주님 보시기에 죄악이라는 겁니다. 이 말은 주님이 그들을 미워해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향해서 ‘똑바로 하란 말이야!’ 추궁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은 죄 바깥으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정말 하늘의 빛이 인간에게 도달했다면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이렇게 됩니다. 사람들은 주의 말씀을 문자로 생각해서 하나님 말씀이 주어지면 그것을 내 지식과 이해력으로 해석하겠다고 나서는데, 이런 사람은 주님이 직접 그 사람 내부에 오지 않은 증거입니다. 인간들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예수가 율법을 모르는 세리와 죄인과 어울리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한 거예요.

바리새인이 보기에 예수님은 나쁜 짓을 골라 하는 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죄인들과 어울리는지 의문입니다. 도무지 이해 못하겠다는 거예요. [예수님 + 세리, 죄인] 이 관계에 대해서 의문점을 품고 있는 인간들 바깥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예수님이 A라면, 진짜 예수님은 B가 되고, 그들이 생각하는 세리가 A라면, 예수님 안에 있는 세리는 B가 되고, 그들이 규정하는 죄인이 A라면, 예수님이 생각하는 죄인은 B가 되지요. A 세계관은 나의 세계관에서 나왔고, 이것은 예수님이 소개할 B 세계관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세계관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판단했기에 이것은 옳아야 한다는 선입관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에 [비타 500]이 있는데, 이것이 ‘비타 500’이라고 내가 생각하기 때문에 이것은 무조건 옳은 거예요.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것은 절대 의심할 수 없는 진리라고 했어요.

그러면 ‘나는 부족한 죄인입니다.’ 이 말은 거짓말이 돼요. 이 말은 “나는 스스로 반성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이 정도로 겸손합니다.” 이런 뜻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바리새인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기를 “제가 일곱 번 용서하면 주님이 원하시는 수준입니까?”라고 했지요. 이 물음은 “제가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괜찮은 사람이지요?”라는 생각을 갖고 질문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질문 속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습니까? ‘나는 어떻게 해도 주님이 말씀하시는 수준의 용서에 도달할 수 없다’는 생각을 조금도 갖지 않았어요. ‘남들은 지옥가도 나는 천국에 넣어주셔야 합니다.’ 라는 생각을 우리 모두가 갖고 있다는 자체가 우리는 우리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한계점을 갖고 있는 거예요.

바리새인이 A세계관을 갖고 있다고 했지만 바리새인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이런 세계관을 갖고 있습니다. B세계관은 오직 예수님만 알고 있어요. 심지어 예수님께 속한 제자들도 A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전에 예수 안에서 생명책에 기록된 자만 구원 받는다는 말은, 결국 인간들은 A세계관을 가지고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의 B세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A로써 B세계에 들어가 영생을 얻는 방법을 주께서 채택한 겁니다.

그러면 ‘B세계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가기를 원합니다.’라고 한다면, 반드시 A세계를 인정하고 그것을 가지고 B로 와야 됩니다. 그냥 B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A도 아니고 B도 아닌 중립지대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리새인이 우리의 대표자니까 ‘나는 무조건 잘 되어야 해.’라는 A사고방식을 죽어도 포기 못합니다. 그래서 이걸 가지고 죄인으로 주께 들어오는 겁니다.

내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고 내가 무엇을 판단한다는 자체가 결과적으로 죄를 유발할 수밖에 없는 몸체를 조상 아담으로부터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차후에 늘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바탕에서 성경을 해석하게 되면 “목사님, 우리는 뭘 해야 됩니까?”라는 질문이 성립이 안 됩니다. 지금 하고 계시는데 뭘 새삼스럽게 한단 말입니까?

어떤 분은 지금 가방을 짜고(뜯게질로 가방 만들기) 있습니다. 그걸 하시면 됩니다. 복음 안다고 가방 짜는 일을 던지지 마세요. 그냥 짜고 있으면 되는 거예요. 전도하는 것은 좋은 일이고, 가방 짜는 일은 나쁘다는 생각은 A사고방식으로 교육 받은 거예요. 하나님의 일이 따로 있고 내 일이 따로 있다는 것은 교회에서 그런 식으로 세뇌를 받은 거예요. 성경에는 그렇게 말하지 않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를 위해서 하라”고 했어요.

교회에 헌금하는 것은 주님 돈이고, 딸 피아노 레슨비 내면 그것은 세상적인 돈이라는 식으로 교육을 받고 길들여졌어요. 내 몸이 주의 몸이고, 내 몸을 위해 보약을 먹는 것이 주님을 위한 일인데 이것이 왜 세속적인 일이 됩니까? 제가 옛날 극동방송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시장에서 콩나물 사먹는 것도 주의 일인데 그 돈 아껴서 왜 교회 헌금 내려고 합니까? 누구 좋으라고 내는 거예요? 그러지 마세요. 여러분이 콩나물을 먹는 것은 내 몸을 위함이 아니고 나를 지으신 주님을 위함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하면 주의 일이 됩니다.

목사가 돈을 내라 말라 할 자격이 없어요. 목사가 나를 창조했고, 목사가 날 위해 십자가 졌습니까? 우리는 주님과 교제를 해야지 왜 다른 사람의 서선을 신경 습니까? 그것은 잘못된 세계관으로 강아지처럼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마음대로 살아보세요. 그러면 결코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을 느끼면 그 사람은 신자고, 마음대로 사는데 마음대로 되면 그 사람은 신자 아닙니다.

교회 오는 것도 여러분 마음대로 해 보세요. 주께서 오게 하시면 오는 것이고, 가고 싶어도 못 오게 하시면 못 옵니다. 교회 가려고 버스를 타고 가는데 중간에 버스 사고가 나서 내려 택시를 타고 가는데, 한 참 가다가 도로에서 연쇄 추돌사고로 길이 막혀 예배 시간에 늦어 기어이 예배에 참석 못하게 된 것은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그동안 교회 잘 온 것이 자신의 노력과 열심 때문이 아니라 주께서 오게 하신 것임을 깨닫게 하시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세계관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십니다. 예수님의 세계관에서는 내가 착한가, 악한가는 의미 없습니다. 마태복음 19장에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당당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그 말을 듣고 주님이 하신 말씀이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라오너라.”고 했고, 청년을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이 청년은 자기자랑하려고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인간은 내 중심의 세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구원 받습니까? 벗어날 수 없는 그것을 몽땅 그대로 주님은 거두어 주십니다. 그리고 ‘네 행함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늘 말씀으로 일깨워 주십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주님만 자랑할 수밖에 없도록 하십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이 바로 17절에 나옵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이 한 것이 뭔가 하면, ‘우리가 판단하기에 세리, 죄인은 완벽한 저주 받을 인간이고, 예수 당신은 우리가 싫어하는 자이지만 그래도 당신은 죄인이 아닌데 세리, 죄인과 어울린다는 것이 납득이 안 됩니다.’라고 한 거예요.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너희들의 사고방식은 ‘내 판단은 옳고 나는 잘났다’는 것을 바탕에 깔고 세리와 죄인을 판단하는데 내 판단은 너희 판단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17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제가 예수님의 역할을 잠시 맡겠습니다. 집사님께 묻습니다. “집사님, 병원에는 아픈 사람이 찾아오지 건강한 사람은 안 오지요?” 이 때 집사님은 “그래서 어쩌라고! 그것은 내가 익히 알고 있는 것인데 왜 새삼스럽게 말을 해.” 이렇게 답변하고 싶지요? 이런 답변이 나올 수밖에 없지요.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니까 굉장히 고상하고 대단한 말씀을 하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주님은 바리새인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도 수긍할 수 있는 너무도 당연한 말씀을 하신 거예요. 이 말은 타이밍이 중요한 거예요. ‘이 세상은 하나님이 만들었다.’ 이건 불교신자도 동의해요. 그들은 하나님보다 ‘공’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해요. 이것은 힌두교, 이슬람교, 유대교도 동의하고, 심지어 종교가 없는 사람도 ‘조물주’가 만들었다고 합니다. 조물주(造物主)의 뜻이 ‘세상을 만드신 분’이라는 의미잖아요.

조물주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성경대로 말합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했습니다.” 이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 믿는다고 구원 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말해야 해요.

그러면 이런 질문이 나오겠지요. “나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믿는데, 그것 믿는다고 구원 받는 것은 아니라고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그러면 “예수 믿어야 합니다.” 라고 하면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데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이야기는 왜 창세기에 나오지요?

‘하나님이 예수님에 의해 만물을 만들었다. 따라서 예수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지옥 갈 수밖에 없다. 천국은 예수 이름으로 가지 다른 이름으로는 갈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기 위함입니다. 이 말을 듣고 이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쉽네.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것에서 예수를 추가하서 알면 되겠네.”라고.

사람들이 예수 믿는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밥상을 차려놓았는데 여기에 내가 숟가락 하나 얹는 것처럼 생각해요. 밥상 다 차려졌는데 뒤늦게 동생이 오면 숟가락 하나만 가지고 오면 되잖아요. 반찬은 이미 다 차려져 있으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것은 맞고, 거기에 숟가락 하나 걸치면 [하나님 + 예수]가 되어 이제 완벽한 구원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엉터리입니다. 섞일 수가 없어요.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지요? 바리새인이 알고 있는 세리와 죄인의 규정에 예수님이 합류를 하니까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던 겁니다. 예수님은 누구와 합류해야 돼요? 자기들과 합류를 해야지요. 왜? 자기는 누가 봐도 의인이니까. 정말 예수가 하나님의 선지자라면 제일 먼저 자신들을 방문해서 위로하고 격려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토스토에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보면 조지마 장로가 나오는데, 그 장로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주께서 재림한다고 하니까 ‘우리가 체계를 잘 잡아 놓았으니까 주님이 오시면 높은 사람, 저와 의논해야 합니다.’라고 해요. 토스토에프스키는 의도적으로 그것을 피해 갑니다. ‘네가 바로 적그리스도다. 너는 세리, 창기보다 더 못한 자다.’ 왜? 자기의 세계관을 포기 못했기 때문에.

포기 못한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잖아요? 하지만 우리의 포기 못한 세계관이 곧 주님 보시기에 용서받을 죄라는 사실을 살아가면서 새롭게 발굴하게 됩니다. 오늘 그것을 알았다고 해서 내일 깨끗한 것만 나오는 것이 아니에요. 내일이 되면 그때까지 미처 알지 못한 새로운 죄가 또 발굴될 거예요.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할머니가 리어카를 끌고 언덕을 올라가는데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니까 밀어줘야지’라고 하는 죄. 옛날에는 이것이 죄가 아닌 성령의 열매로 여겼어요. 희생하고 봉사하는 일이니까. 그런데 주님 십자가 앞에서 이것마저 죄가 된다는 것을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착한 행동을 하면 반드시 자랑거리로 내 두뇌에 누적되는 기계장치를 지니고 삽니다. 제가 지금 오버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어떤 할머니가 리어카에 짐을 싣고 언덕을 오르고 있는데 내가 그 언덕까지 밀어서 할머니를 보내고 나는 버스를 탔는데 차창으로 할머니를 보니까 그 할머니가 또 새로운 언덕에 이르러 힘이 빠져 허덕이고 있고, 그 곁은 지나가는 청년이 할머니 리어카를 밀어주지 않고 그냥 지나칠 때 우리에게는 분노와 정의감이 생기겠지요.

이 말은 뭐냐? 리어카를 밀어준 나는 의인이 되고, 밀어주지 않은 그 청년은 죄인이 되지요. 이게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이 바보가 아닙니다. 자기만 아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늘 십계명을 어떻게 하면 잘 지킬 것인지 연구하고 노력하고 궁리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구제하고, 하루 세 번 기도하고 그것으로도 부족해 남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이 말에 동의하지?”라고 되묻지요. “나도 그것은 이해합니다. 병원에는 아픈 사람이 찾아가지요.” “그래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 말은 예수님이 죄인에게 합류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과 함께 있는 그들이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앞에 죄인 되어야만 했고, 죄인을 불러서 의인으로 바꾸기 위해 내가 이 세상에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들은 나를 평가할 생각만 했지 나와 함께 있으려 하지 않았다.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그들이 현장에서 때려죽여도 되는데 끌고 예수님 앞에 왔다는 것은 예수님을 난처하게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했을 때 주님 말씀에 따라 돌로 치면 돼요. 그것이 아니라면 “저희들이 잘못했습니다. 우리가 죄인입니다.”라고 무릎을 꿇었으면 될 텐데 그렇게 하지 않고 각자 자기 집으로 가버렸어요.

여인 혼자 남았는데 주님이 묻습니다.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라고. 여인은 “주여, 없나이다.”라고 답했습니다. 이 말은, 내가 너를 간음하게 해서 내 손에 잡히게 했다는 것입니다. 강도가 강도 되어야 영생 얻듯이 간음한 여인은 간음해야만 주님으로부터 구원 받는다고 주님 스케줄에 일방적으로 편입이 된 거예요.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여섯 번째 사귀고 있는 사람이 있었지요. 그런 여인을 예수님이 구원한 것입니다. 바리새인이라면 이런 질문을 했을 거예요. “그럼 우리가 몇 명의 여자와 사귀면 됩니까?”라고. 이것은 따라 할 문제가 아니고, 현재 각자가 처한 위치가 주님이 만드신 환경 속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간음한 여인은 고소한 바리새인이 아니었더라면 주님을 만날 수 없는 아슬아슬한 인생을 살았을 겁니다.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만나게 해 주었어요. 고마운 바리새인이죠. 그 자리에서 죽이지 않고 고맙게도 예수님에게 끌고 간 고마운 바리새인. 그런데 그 고마운 바리새인은 지옥 가고 여인은 영생을 얻었습니다.

이처럼 주님이 하시는 일은 도무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차후에 뒤늦게 감사하게 됩니다. 그 당시에는 몰라요. 제가 좋아하는 노래 중 노사연의 [님 그림자]가 있는데 가사가 아주 절묘해요. 너무 복음적이라. 님(달)은 저 앞에 가고 있고 나는 님의 그림자만 따라갑니다. 아무리 따라가도 그림자는 계속 멀어져 갑니다. 지금 이 여자(가수)가 달의 존재를 정복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님을 그리는데 달이고 별이고 다 거기에 쏟아 붓습니다.

성도는 자신이 어떤 직업을 갖든 관계없고 님(그리스도)에게 집중하라고 할당된 노선위에 있습니다.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했는데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됐어요. 그것은 주님만 사랑하라고 머리가 못 나온 거예요. 머리 못 나왔다고 짜증을 낼 때 우리는 주님께 너무 많은 것을 거대했어요. 미장원에서 내 머리모양 예쁘게 되는 것까지 주께 바랐어요. 그런데 정 반대의 상황이 닥쳤어요.

주님 이용해서 자기 이익을 얻겠다는 것은 A라는 자기 세계관을 고수하는 바리새인적 모습이 드러난 것입니다. 우리가 내일이 되면 내일의 죄가 또 나옵니다. 죽을 때까지 계속 죄만 나오는 식으로 이미 구원 받았습니다. 구원은 이미 받았는데 주님의 십자가 그림자를 따라가기 위해 죄를 지음으로 십자가의 피를 받을 수 있습니다.

님 그림자 밟으면서 우리는 죄를 쏟아내면서 용서의 사랑을 받으며 계속 주를 따라갑니다. 7절 끝에 보면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했는데, 이 이야기를 당시 바리새인들이 들었을 때 바리새인들은 자신과 같은 의인만 찾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의인되기 위해서 도외시하고 버렸던 자를 찾아가서 거기에서 의인을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은 주님으로부터 소외되었습니다. ‘너는 아니야. 네가 욕하는 그들이야.’

자, 그렇다면 제가 여기에서 질문을 드립니다. ‘바리새인에게 버림받으면 다 구원 받습니까?’ 부정에 부정이 긍정이 되긴 하지만 진리는 아닙니다. 반대에 반대한다고 진리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바리새인의 반대가 사두개인이고, 사도개인의 반대가 바리새인인데 이 둘이 예수님을 만나니까 둘이 뭉쳐 예수님을 대적했지요.

1과 2가 있는 곳에는 새로운 의미가 없어요. 1과 2는 자기 자신에게 갇혀 있습니다. 1이 있으면 ‘나는 나다.’ 2가 있으면 2는 피조물이라고 ‘너 나 좋아? 나 너 좋아.’ 이런 식입니다. 마치 결혼식 때 사돈이 상대에게 예단을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저쪽에서 뭐 왔지. 그러면 우리도 이것 보내자.’ 둘이 서로 경우 바른 시합을 하는 겁니다. 이건 한도 끝도 없어요.

그런데 제 3의 인물이 등장하게 되면, 그 때부터 제 3의 인물을 ‘내 편으로 끌어들일 것인가, 아니면 내가 적에게 먹힐 것인가’ 1과 2는 본색을 드러냅니다. 인간들은 자기 빼고 다 그런 식으로 상대를 대하는데, 예수님은 제 3의 낯선 인물로 등장해서 우리가 얼마나 서로 암투가 있고 싸우는지 우리의 본색을 드러내십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정이 좋다가도 아이가 태어나면 그때부터 각방을 썹니다. 왜냐? 직장에 출근해야 되기 때문에. 아이가 밤 새 울면 잠을 못자고 그런 상태에서 직장에 출근하면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방에서 자겠다고 양해를 구하는데, 그러면 아이가 커도 계속 각방을 씁니다. 이게 사실입니다.

18-20절 보겠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혹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이것은 예수님 혼자 알고 있는 것 같아요. 혼자만 알고 있는 내용을 그들에게 말했다는 것은 지금은 비록 모르지만 나중에 성령이 임하면 ‘아, 그때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지.’ 하면서 되돌아보게 되면 이 성경 말씀은 안다고 버릴 책이 아니고 영원히 간직해야 될 책이 됩니다.

또 성령이 와서 이사야를 깨닫게 할 수도 있고, 욥기를 깨닫게 할 수도 있어요. 그리고 이미 알았던 내용을 새롭게 퍼낼 수 있습니다. 영생의 샘물이 계속 나오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안다고 하는 그 순간 돌아서면 또 다른 뜻이 나옵니다. 이것을 ‘사건’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손에 잡히지 않고 눈에 포착되지 않아요. 바람도 마찬가지지요. 바람도 보이지 않고 손에 안 잡히는데 바람은 분명히 있지요. 갑자기 서늘하고, 빨래가 날리지요. “빨래야, 누가 너를 흔들었니?” “바람님이 흔들었어요.” “보이지도 않는 바람 말하지 말고 솔직히 말해. 누가 너를 흔들었어?” “바람님이 했어요.” “자꾸 없는 것 거론하지 말고 누구 했냐니까?” “바람이 했어요.”

성령이 임함도 이와 같습니다. “집사님, 교회 청소 누가 했습니까?” “주가 하라고 했습니다.” “농담하지 말고요. 누가 시켜서 했습니까?” “주님이 내게 그런 마음을 주셔서 했습니다.” “아, 목사님이 시켰구나?” 이렇게 나오지요. “엄마, 오늘 왜 이렇게 반찬을 맛있게 했지?” “다 주께서 하신 거야.” “엄마, 농담하지 마. 조미료를 뭘 넣어서 이렇게 맛이 있어?” 이렇게 말을 하지요.

주님이 일으킨 사건이란 말은, 모든 인간이 하나의 사건에 불과합니다. 야고보서에서는 이것을 ‘인생은 안개다.’라고 하지요. 그래서 젊은 날에 병들어 죽으면서 마지막 침상에서 부모가 지켜보는 가운데 하는 말이(드라마에 나오는 것입니다) “아빠, 엄마를 사랑했던 자식이 한 때 이 땅에 있었다는 것만 기억해 줘.”

말씀은 지금도 여전히 살아 활동하십니다. 그런데 이 살아있음은 존재로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바람이 불듯이 성령이 역사하면 설거지 하다가도 영생을 얻습니다. 성령이 휘몰아치게 되면 자기를 되돌아보면서 살게 되는데, 본인이 자기를 키우는 식이 아니고 주께서 보살피는 것을 줍듯이 ‘오늘은 이런 인간으로 만드셨군요.’하고 새삼스럽게 자기가 자기를 수용하고 만나 줍듯이 반기면서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왜? 하나님의 작품이니까.

우리가 난치병에 걸렸을 때, “주여, 다른 사람은 건강한데 나는 왜 이렇게 침대에 누워있습니까?” 이렇게 원망하면 나중에 자살하게 돼요. 그러지 말고 아프게 하는 바람이 불었다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낫고 안 낫고는 낫는 바람이 불면 낫게 됩니다. 예를 들면, 죽기를 작정했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도라지와 배즙을 먹으면 효과가 있습니다.”라고 했을 때, 그 사람 말대로 했더니만 알레르기 비염이 없어졌단 말이지요.

그러면 이건 누가 하신 일입니까? 친구가 묻기를 “알레르기 비염 때문에 수술해야 한다더니 어떻게 해서 나았지?”하면, “주께서 낫게 하셨어.” “농담하지 말고,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 낫게 되었냐고?” 왜? 자기도 똑같이 해서 나으려고. 항상 우리는 주께서 하셨다는 것을 남들이 안 믿기 때문에 그것은 생략하고 주께서 도구로 다뤘던 2차, 3차적 과정에 불과한 것을 꺼내서 “즙을 낼 때는 푹 쳐야 합니다. 그리고 도라지와 비율은 1:1로 하고 하루에 2컵 마시면 좋습니다.” 이런 이야기만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 말을 한 후에는 ‘아이고, 주께서 하신 것인데 내가 왜 엉뚱한 말을 했지?’ 후회를 하지요. 우리는 이 세상 살면서 이런 식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주께서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의 사건이니까.

19절을 보면, ‘혼인집, 손님, 신랑’이 나오는데, 이 단어가 구체화 되는 것은 누구에 의해 구체화 될까요? 이런 말을 내뱉은 것은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혼인집 손님과 신랑이 나오는 식으로 조정해 나가시겠지요? 그때 만약 우리가 신부가 되었다면 이것은 우리 작업이 아니고 신랑되신 주님이 미리 말을 던져놓고 그 신랑에 부합되는 신부가 바로 너라고 우리에게 언질을 주는 그 작업까지 이 말씀을 남기신 주님의 소관입니다.

따라서 신부된 사람은 마가복음 2장을 다시 보면서 ‘이 말씀을 사건화 시키도록 지금도 성령께서 조치하셨구나. 주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말씀을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바리새인이 됩니다. 이미 어느 대목에서 지켜졌는가를 매일 찾는 재미로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고 성도의 삶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의 사건이 됩니다. 사건이라는 말은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존재가 되면 그 존재를 유지하려고 오버하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 자존심과 자아가 발생해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아를 믿는 셈이 됩니다. 불교는 이것을 없애려고 머리 깎고 도를 닦는데 이것은 바보짓입니다. 사람들은 행동하면 할수록 이것이 누적이 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애써 감추려고 해요.

해탈하기 위해서 가족을 버리고 머리 깎고 산으로 올라갔잖아요. 그러면 그 사람은 평생 무엇을 기억하겠습니까? ‘나는 해탈하기 위해 이런 일을 했다.’ 이런 일을 한 자가 바로 나임을 본인이 잊을 수 없어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당신은 머리는 깎았지만 가짜 중이야.”라고 하면, 갑자기 화가 나지요. 왜 화가 납니까? ‘내가 이정도로 노력했는데 왜 안 알아주나?’ 하는 것 때문에 화를 내지요. 이게 해탈이 된 것입니까?

제가 이런 소리하면 “우리는 참습니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참는다고 잊어집니까? 용수철은 누르면 나중에는 더 크게 튀어 올라요. 남편이 “여보, 내가 잘못했어. 잊어줘.” 아내가 “그래, 이번이 처음이니까 잊어줄 게.”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아내가 정말로 잊었다고 생각합니까? 턱도 없는 소리입니다. 잊긴 뭘 잊어요.

사람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다 기억하는가? 다 기억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왜 잊는 것이 있고, 잊지 못하는 것이 있는가? 자신의 권리와 관련된 것은 잊지 못하고 자신에게 손해되는 것은 잊어버려요.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내려갑니다. 그런데 이 무의식이 언제 깨어나는가 하면 꿈에 일어납니다. 무의식이 꿈에 일어날 때 그냥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편집을 합니다. 편집해서 납득이 되는 식으로 꿈을 펴 나갑니다. 꿈을 꾸며서 내가 꿈을 조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꿈을 꾸고 그 꿈이 뭔지를 몰라요. 이게 프로이드가 밝혀낸 것입니다.

첫째로 인간은 절대 잊지 못한다. 하지만 어떤 계기가 되면 분출하게 되어 있어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TV에 나오는 사람 중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미운 이유를 모르겠어. 그런데 우연히 30년 만에 동창생을 만났는데 내가 평소에 미워했던 탤런트와 얼굴이 비슷해. 그러니까 평소에 자기가 미워했던 그것이 뭔지 몰랐는데 탤런트 볼 때마다 자기의 미움이 살아나는 거예요.  

우리 형님을 잡채를 못 먹어요. 왜냐? 어릴 때 잡채를 먹다 심하게 체해서 그 다음부터 잡채를 못 먹어요. 인간은 경험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누구나 이러한 정신적 상처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요. 따라서 인간이 착하게 산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자기 취향에 따라 살지요. 기분에 따라 살지 착하게 살 수 없습니다.

다만 그것을 감추려고 착한 척, 교회 다니면서 기도하는 척, 이웃을 사랑하는 척하지요. 그냥 그대로 오세요.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기 때문에 내가 어떤 꿈을 꾸든지 괜찮아요. 묻거나 따지지 않습니다. 왜냐? 이미 알기 때문에. 꾸미지 마시고 그냥 주님께 나오세요. 단, 사람 앞에는 그냥 나오지 마세요. 사람은 용납을 안 해줍니다. 괜히 아내한테 과거 이야기 하지 마세요. 주님이 절대 안 도와줍니다. 주님 앞에 숨김없이 나와야지 사람한테는 그렇게 할 이유가 없습니다. 똑같은 죄인이기에 적당히 감추시고 숨길 것은 숨기고 체면도 차리되 주님께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있는 그대로, 하던 행세대로 사세요. 인간의 자기 노력으로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안 된다는 자체가 이미 우리의 죄악 된 본성인 것을 십자가 용서의 피 앞에서 감사하면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남들 욕할 것이 아니라 내가 남들과 똑같은 성품을 지니고 있음을 감추는 방식으로 우리는 남을 비판해 왔습니다. 이제 그 비판을 나에게 적용시키고 그 가운데서도 이미 용서받은 죄를 다시 한 번 기쁨으로 주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4. 10. 10. 09:13 녹취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