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왜 개혁주의 성화론을 거부하는가?(이근호 목사님의 글)
이준 2006-08-31 10:55:44, 조회 : 158, 추천 : 2
**사전 양해 말씀**
( )로 처리한 소단락 제목은 제가 이글을 읽으면서 내용 이해를 위해 편의상 임의로 삽입했던 것이며(단락의 내용을 완벽하게 요약한 것은 아니라 사료됨), 원문에는 없는 것임을 밝혀 둡니다.
**출처**
우리교회 홈페이지(본 십자가 마을 강의녹취->성경신학 및 기타 강의란에도 탑재되어 있음).
**시중 판매 중인 참고 자료 소개**
멜빈 디이터 외(1991). 김원주 역. 성화에 대한 다섯 가지 견해. 서울 :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이 책에 보면 성경에서 벗어난 다섯 교파(감리교, 개혁주의, 오순절, 케직, 세대주의)의 성화론에 대한 논찬들이 잘 정리되어 있음. 이 책에서 개혁주의 성화론을 대변한 안토니 후크마의 논지는 존 머레이의 것을 그대로 반영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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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Murray의 "결정적 성화 교리" 이론의 문제점
- [신학지남] 1997년 겨울호 김광렬 교수의 논문 범위 안에서-
1. 기독론에서 구원론이나 성화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여기는 그 정신은 성경적 기독론에 비추어 볼 때에 과연 허용될 수 있는 작업인지를 먼저 확인해 보았는가?
(1)성경이 말씀하시는 ‘주’ 사상
성경에서의 기독론은 '주' 사상에서 도출된다. '주'란 구약에서 여호와 이름으로 벌리시는 전쟁을 주관하시는 신이시다. 전쟁이란 필히 적이 있게 마련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벌리시는 전쟁에서 무엇이 여호와의 원수인지, 그리고 진멸의 대상인지를 미리 알려져 있다. 즉 저주받을 자가 누군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비언약, 비약속 집단들이다. 창세기 3:15에는 '뱀의 후손'으로 나와 있고 창세기 9장에서는 가나안과 함의 종족으로 나와 있다.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25절)
이것이 현실화되면서 아브라함과 야곱(이스라엘) 때는 에서(에돔)의 후손과 (창 27:39-40) 가나안 10족속이다.(창 15:19-21) 그런데 아브라함에 대한 이러한 축복과 특별 배려의 원천이 무엇인가? 그것은 멜기세덱의 존재로 입증된다.
(2)멜기세덱에 나타난 ‘주’ 사상
멜기세덱, 그는 이름 이외는 아무 것도 없는 자이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히 7:3) 이 본문에 의하면 '없음(부재성)'과 '있음'이 절묘하게 잘 결합되고 있다. 하늘에서 '항상 있는 계신 자'의 지상적(地上的) 형식은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있는 자'이다. 예수님이 이 멜기세덱의 족보를 따름으로서 이 세상에는 '없음을 나타내는 존재자'로서 나타나시게 되었다. 단지 주의 이름 이 외에는 아무 것도 핵심적이 것이 될 수 없었던 운명을 지니고 나타나신 것이다. '항상'이라는 표현이 말해 주듯이 이 하늘의 항존성은 지상에서의 '없음'을 충분히 보상시켜 주는 의미로서 작용된다. 그러면 왜 멜기세덱은 아무 것도 없는 자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언약)이 오로지 하나님 자신에게만 맹세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다른 이를 신임하거나 성취력을 인정해야 할 존재자가 따로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히 6:13-14)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 의 이름으로서 자신의 약속을 담는 매개로 사용하시고 그 이름에다 성취력을 전부 일임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이름'이란 ('주의 이름'이란), 하나님 스스로가 언약의 상대자로 삼고자 해서 설정한 하나님이시다. 즉 하나님의 자기 맹세의 대상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에게 맹세하시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름 관계의 증거자로 등장된 것이 멜기세덱이기에 이 멜기세덱은 이름 이외는 아무것도 없는 자로 나타났다. 그런데 바로 이 멜기세덱이 모든 이스라엘 제사장 제도의 원형이 되기에 멜기세덱을 만났던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언 약 관계에서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는 자'로부터 '항상' 복받는 자가 되었다. 멜기세덱 은 이 하나님의 언약 관계를 증언하려 아브라함에게 나왔던 것이다. 소돔 전쟁에서의 승 리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에 의해 얻어진 것임을 말하려고 나왔다. 그렇다면 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앞으로 이 지상에서 진행시켜 나가시는 전쟁 사역에서 그 위상은 멜기 세덱과 같은 왕으로서의 제사장 역할을 하는 자가 될 것이다.
(3)시편에 나타난 ‘주’사상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 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주의 우편에 계신 주께서 그 노하시는 날에 열왕을 쳐서 파하실 것 이라 열방 중에 판단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파하시며 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고 인하여 그 머리를 드시리로다"(시 110:1, 4-7)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곧 애굽에 포로 잡혀 있던 히브리인들을 찾으신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동일한 내용의 전쟁이 벌어질 것이 뻔한 일이고 바로 이러한 전쟁에서의 만약 승리는 곧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공로라는 것을 증언하게 되니 여호와 전쟁이란 다름 아닌, 이름 외에 아무 것도 없으면서도 오직 이름 하나로 하나님의 자기 맹세를 성취해 나가는 그 분의 공로만을 증 언하는 전쟁이다. 이것이 '주'가 벌리시는 전쟁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여호와 전쟁에서의 원수들이 가지고 나오는 무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나름대로 '있음'을 가지고 사는 자들이다.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시편 20:7)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 야곱에게 구원을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려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도 나를 구원치 못하리이다 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대적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케 하셨나이다 우리가 종일 하나님으로 자랑하였나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영영히 감사하리이다(셀라)"(시 44:4-8)
위의 본문을 보면, 인간의 팔과 하나님의 팔이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우리들은 일단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백성으로 새롭게 거듭났기에 이제부터는 모든 전쟁을 우리의 팔로 한다"는 그런 의식은 도저히 이 본문 안에서는 찾아보려야 찾아 볼 수 없는 사상이다.
"이제부터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원수나 적이 아니기에 본격적으로 우리가 팔 걷어붙이고 나설 차례이다"라는 사상은 위의 본문에 비추어 볼 때 도저히 신앙으로 인정해 줄 수 없는 사상이다. 하나님의 이름만이 실시할 수 있는 언약의 성취력은 만고의 변치 않을 진리이다. 기독론, 즉 주님을 기초한 신론 이외에 달리 구원론을 따로 형성할 그 어떤 여지도 생길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이름, 즉 인간의 존재는 이미 주의 이름의 그 '없음'의 원리 앞에서 그저 '있음'으로 드러날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가치한 것이다. 즉 멜기세덱 반차에 속한 인물 외에는 그 어떤 일도 실지로 하나님의 약속을 실행해 낼 수가 없을 뿐 더러 더나아가서 오히려 그 '원수적 속성'만 드러날 때문이다.
(4)로마서에 나타난 ‘주’ 사상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 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 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로마서 5:10-11)
이 본문에서 화목이란 순전히 예수님의 죽으심과 살으심에만 기인된 것이지 그 어떤 인간들의 구원적 노고가 추가적으로 삽입될 수가 없고 그리고 화목 되고 난 뒤에는 오직 '우리 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즐거워할 뿐이지 그 외에 그 어떤 요소로도 즐거워할 근거는 존재 못하는 것이다. 즉 화목 되고 난 뒤에도 '없음'의 원리는 소멸되지 않고 유일 한 원리로 계속 지속된다는 것이다.
(5)머레이 성화론의 원천적 오류
지금 J. Murray에게 있어 신학적인 큰 문제점은 구원 론을 끄집어내는 지점이 성경적인 기독론이나 '주' 개념에서가 아니라 다른 데서 도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있음'에서 '있음'을 끄집어내고자 그는 애쓰고 있는데 그 장소가 바로 '성도의 존재함'이다. '주님만 계심'(주님만 활동하심) 에서 '주님만 계심(주님만 활동하심)' 으로 이어져야 될 약속의 실행 장은 지상에서는 항상 '없음'에서 '없음'의 형식으로 드러나 는 범주이다. 그러나 머레이는 생각하기를 '성도(하나님의 백성)가 생겨나 있게 되었음'에 서 '성도가 활동하게 되는 그 원리'를, 처음 성도(백성)이 되는 원리와는 또다르게 적용될 원리로서 간주해서 따로 장만해 두려고 하는 것이다.
논문 p249에 보면, "따라서, 로마서 6장에서와 같이,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란,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죄에 대하여 죽었으 므로, 죄의 세력, 죄의 통치에서 벗어나, 이제는 의에 대해서 살아갈 수 있는 존재로 변화 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 문장에서 '죄의 세력, 죄의 통치에서 벗어나'에 해당되는 원리가 무엇인가? 그것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죽음뿐이지 결코 곧장 성도될 자의 '같이 죽 어 주는 행위'도 아니요 '예수를 믿어 줌'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사실이라면 성도가 된 후에 갑자기 이 원리가 소실되는가? 아니면 또다른 원리를 추가적으로 보충시켜야만 하는 요인이 벌어졌는가? 만약 '죄의 세력, 죄의 통치에서 벗어나'에 해당되는 원리가 되 는 주님의 죽으심이, 단지 인간의 결단력 부족이라든지, 예수님 보시기에 제대로 이루어지 지 않고 있는 인간의 회개나 겸손이나 기도나 순교 같은 것을 고려해서 생겨난 원리로 작 용해서 '죄의 세력, 죄의 통치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면야 그 다음 행위, 즉 '이 제는 의에 대해서 살아갈 수 있는 존재로 변화되었음'이라는 주장이 의미가 있게 된다. 무슨 말이고 하니, 그 동안 성도되기 이전에 의를 못 행한 것은 죄의 통치 안에 놓여 있는 의지력 때문인데 이제는 성도가 되었기에 의를 행할 수 있는 의지력이 제대로 회복되었다 는 점에다 주안점을 두는 것이다.
그러니깐 소위 성화의 원리를 도로 칭의의 원리에 침투 시켜 버리면 이 주장자의 칭의의 원리도 함께 노출되게 된다. 왜냐하면 성화의 원리가 칭 의의 원리에서 도출했다고 계속 주장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머레이는 칭의, 혹은 구원 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면은, 인간의 의지력이 제 기능을 죄 때문에 제대로 발휘할 수 없어서 의를 행하지 못했다고 보는 견해이다. 그러니깐 처음부터 인간을 제외시킨 채 일방적으로 주의 이름으로만 진행되는 구원의 은총과 그 원리가 머레이 한 테는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는 것이다.
(6)고후 5:21와 조화되지 못함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 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이 성경 본문을 도저히 받아 드릴 수 없을 것이다. 즉 머레이는 하나님의 약속 성취에 인간도 개입할 자격이 처음부터 있다고 보는 자이다. 단지 죄로 인해 의지력이 제대로 발휘가 불가능했을 뿐이라는 견해를 그의 성화론을 근거해 볼 때 드러나고 있다. 성부와 성자만의 언약에 대해서 머레이는 그 가운데 인간이 끼여들 수 있는 것처럼 논리를 진행시켜 놓고 있다.
(7)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에 대한 머레이의 오해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6)
머레이는 오해하기를, 이제는 성도가 주님 사이가 더 이상 원수지간이 아니라 화목지간이기 때문에 원수 시절의 관계 원리는 더 이상 계속 적용시키기에 부적절하고 마땅히 청산되고 폐지되어야 되는 것으로 여긴다.
논문 p249를 보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단지 죄를 대속하는 목적으로만 설명되지 않고, 신자들로 하여금 죄에 대해서 죽는 결과를 가져오는 죽음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 보면 '- 않고'라는 말을 그가 하고 있다. 그러니깐 머레이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서 '죄를 대속하는 것'과 '신자들로 하여금 죄에 대해서 죽는 결과를 가져오는 죽음'과 상호 다른 것으로 오인하고 있다.
그는 '죄 에 대해서 죽음'이라는 의미를 '죄를 대속하는 것'에도 도출해 내지 못하고 있다. 단지 의에 대해서 실천 자질이 새로 발생될 가능성을 염두에 둔 '죄에 대한 죽음'으로 이해하려 든다. 그는 '죄'에 대한 규정을 인간 행위에 기초하고 있다. 이는 엄청난 오류이다.
논문 p256에 보면, "즉 Murray의 성화관은, 성화도-칭의와 마찬가지로- 옛사람의 계속된 도덕 적 노력의 차원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의 영역에 속한 것을 밝혀 주면서도, 성화의 영역을 약화시키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대 목이 나온다. 그것은 '옛 사람의 도덕적 노력의 차원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의 영역'이 라는 표현이다. 이 말대로라면 성화 안에서는 옛사람의 도덕적 노력의 차원과 다른 성격의 도덕적 노력이 담겨 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는데 여기서 '옛 사람'을 그는 어떻게 규정하고 있단 말인가? 그는 도덕적 노력 자체를 옛사람의 특징으로 보지 않고 있다는 것 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렇다면 '옛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이 문제 삼는 것은 도덕적 노력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딴 데 있다는 말이 되는데 이는 성경에서 말하는 죄 의미와 전 혀 무관한 주장이다.
성경에서의 죄라는 것이 단지 선악과 따먹고 난 뒤 바른 의지력으로 선을 행사해 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선악과 따먹고 선악을 아는 지식을 함유한 그 자체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즉 성경에서의 죄란 피조물인 인간이 자기 행위에 가능성과 애착을 두게 된 그 왜곡된 비창조적 상태를 상태를 두고 말한다. 이러한 것이 죄라는 점 은 그 뒤에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더욱 구체화되고 표면화되는 것이다.
언약이 추가되고 언약이 실현되면 될수록 심화되는 즉 죄의 본질은 다름이 아니라, 의나 죄나 심판에 대해서 모든 것을 자신의 자기 행위에 기초해서 규정지으려는 그 정신 상태 자체가 바로 선악과를 따먹은 죄악된 결과를 보는 것이 성경적 안목이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 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 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 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요 16:8-11)
그러나 머레이는, 인간의 의로운 행실에 기초한 하나님과 주님과 구원을 생각하고 있기에 이러한 그 의 사상과 인식의 틀 자체가 죄가 세상에 들어온 결과인 줄을 그는 전혀 감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죄에 대해서 죽음'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대속 죽음' 안에 같이 참여한다는 말이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이 인간의 죽음을 늘 장악하게 되는 구심점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머레이 거꾸로 이해하기를 그리스도의 죽음보다 인간의 죽음을 구심점으로 잡아서 되레 그리스도 죽음을 옛사람의 죽음 쪽으로 끌어당기려 한다. 즉 새사람 되는데 있어 그리스도 죽음을 이용하려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머레이가 주장하는 새사람이라는 것도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한 새사람이 아니라(그리스도 죽음을 구심점으로 하는 새 피조물 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과는 별도로, 자신의 옛사람의 죽음을 구심점으로 하는 새 피 조물로 간주하고 있다. 이것은 큰 오류이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대속'을 '그리스도의 대체 (代替) 죽음' 차원에서만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같이 죽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혼자 죽고 성도는 나름대로 그 효과를 받아서 무사히 사는 쪽으로 회생한 것처럼 이해하고 것이다. 다음 성경 본문을 찬찬히 보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여기에서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라는 말이 과연 비성도에게 해당되는 말인가 아니면 이미 성도된 자에게 해당되는 말인가? 이것은 누가 봐도 성도의 실존에 대해서 언급한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라 는 원리는 '믿음'에 대해서 규정지을 때마다 본질로서 늘 자리잡고 있어야 옳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라는 말은 결코 '나의 의지력이 이제는 제대로 자리잡혔고'라는 말과 같은 내용이 아니다. 혹은 "옛사람이 죽은 것이지 새사람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 다"라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정말이지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다. 왜냐하 면 '믿음' 안에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자리잡고 있고 그 그리스도 죽음의 위력으 로 그 안에 계속 내가 죽은 채로 함유되어 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6:14에서 이 사실 이 현실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 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8)로마서가 말하는 ‘의’
로마서 6장에 언급된, '의에 대해서 산 자가 되었다는 말'을 머레이는 윤리를 제대로 행하기 위하여 '의에 대해서 살아갈 수 있는 존재로 변화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라고 해석했는데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여기서 말하는 '의에 대해서 산 자'란 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이다 는 뜻이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 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10-11)
이 본문에서,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성도와 하나님과의 관계의 범주로 간주한다는 내용인데, 예 수님께서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가 되었기에 '산 자'라는 새로운 영역이 오로지 그리스도 홀로의 사역과 그 가치성만으로 (결코 성도의 윤리적 가치성을 고려함이 아니라) 확정지 어졌는데 단지 그 확정된 범주 안에 있다는 것 때문에 성도도 하나님에 대해서 산 자로 여겨라 는 말이다. 따라서 의의 종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확정지은 그 사역의 증인이 되라는 것이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윤리적인 행위를 하라는 것이 아니 다. 왜냐하면 죄의 종이라는 것이 윤리적인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주의 이 름) 사역에 대한 도발적인 반발성을 두고 말하기 때문이다. 로마서에서 의란 로마서 1:17 에 미리 언급된 바 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 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여기서 '의'라든지, '의인'이라는 개념이 윤리적 개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사역을 통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를 뜻한다. 즉 선악과에서 나올 의가 아니라 생명 나무에서 나오는 은혜와 사랑을 말한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 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 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3:21-22,25)
바로 하나님 자 신의 의로움을 나타내는 증인이기에 성도는 의의 종이 되는 것이다. 그의 윤리적 행위가 율법적 차원에서 도덕적으로 의로운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어 놓으신 그 약속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의' 였던 것이다.
로마서 11:31-33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 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 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 심이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 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이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의 긍휼 하심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필히 순종치 않음에 가두어야 했다. 이 원리는 하나님이 성도를 대속한 원리이며 동시에 성도에게 내내 적용될 유일한 원리이다. 즉 끊임없이 '순종치 않음'과 '긍휼'이라는 대립적 요소가 계속적으로 성도에게 적용될 뿐이다. 결코 '긍휼'이 '성도의 순종함'으로 희 석되거나 전환되거나 대체되어 버리는 것이 아니다. '순종치 않음'이 계속 일어나게 하므로서 동시에 '긍휼'과 '의의 왕노릇'을 발휘하는 바탕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순종치 않음'을 유발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성도에게 있어 십자가이다. 제대로 순종함이 무엇이며 제대로 된 이웃 사랑과 긍휼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십자가 사건 이외에는 없다.
(9)십자가는 인간의 자력적 ‘의’ 실천을 거부함
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이 기준이 되어 여기서 '순종치 않음'이란 구약에서 신약까지 줄기차게 확인된 바, 하나님의 이름에서 흘러나오는 자비나 긍휼을 의존하기보다는 자신의 윤리적 행함이나 선행의 힘에 의존해서 의를 이루겠다는 교만함이 근원적인 선악 체제의 형식으로 모든 아담 후손의 내부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 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 심이니이다"(시 8:2)
이 본문에서 왜 젖먹이와 어린아이가 등장할까? 그것은 인간이 하나 님 말씀 앞에서 자력으로 그 말씀과 약속을 성취해 낼 수 있다고 자기 행위를 의존하는 심성이 바로 '순종치 않음'의 본 모습이 였던 것이다. 따라서 왜 이 일이 '순종치 않음'에 해당되는가를 나타내 보이기 위해 성령께서는 십자가의 영으로서 성도에게 내주하시는 것이다.
십자가 사건 앞에서는 성도는 자신의 육체의 소욕의 유감없이 정체가 드러내고 활동한다. 분명히 자기 딴에 도덕적인 미덕을 남겼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바로 시기와 질투의 형식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께서는 거기에 맞서서 끊임없이 성도로 하여금 자신의 육체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을 상기시키면서 오로지 십자가의 증인, 의의 종만이 되도록 나타나게 하신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 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6-17)
그런데 성도에게는 이제는 아예 육체의 소욕이 일어나지 않는다든 지 혹은 혹시 일어나더라도 이제는 성도가 자체적으로 지니고 있는 제대로 된 윤리적 의 지력으로 이길 수 있다든지, 이겨야만 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전혀 주님의 뜻과 무관하다. 왜냐하면 다음의 성경 구절 때문이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 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갈 5:18)
원래 율법은 육체의 소욕을 유발시켜 육체 가 도리어 주의 뜻을 무산시키는 열매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태를 성령 은 그냥 두지 않으신다는 말이다. 기어이 성도로 하여금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인도하신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반복되는 끊어지지 않는 '순종치 않음'과 '긍휼' 사이의 관계성이며 '그리스도의 대속 사건'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것이 결코 성도의 윤리적 자질을 고양하고 회복시켜 주는 그런 '대체 죽음'이 아닌 것이다. 성령께서는 오직 십자가 사건으로서만 이와 같은 인간들의 모든 죄 개념과 의 개념과 심판 개념 자체를 고 발하고 부정하는 대속 사건으로 영원토록 발휘시키는 이유가 여기 있다.
(10)머레이 성화론과 타종교 구원론 사이의 공통점
머레이는, 생명 나무에서 도출된 언약관과 메시야론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 오셨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나름대로 선악과 나무에서 도출된 행위적 구원론을 따로 장만했다. 그래서 그것을 생명 나무와 억지로 접목시키려 했다. 이 자체가 바로 인류의 모든 종교들이 민중들이 대대로 시도했던 비언약적 이방 종교 형식이라는 사실을 그는 알지 못한다. 그는 성경 계시에 충실하기보다는 성경을 눈에 보이는 종교적 현실과 윤리적 인식과 조화를 이루려 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 피흘림 앞에서 위선임을 알아야 한다. 그의 구원론은, 종교적 위선자가, 계속 위선을 머금은 채, 궁극적으로 하나님마저 속이고 천국에 진입할 수 있는 방법론을 대중들에게 제시한 것밖에 안된다.
머레이의 구원론은, 인간 자아의 가치성과 의미성을 기초로 한 구원론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아관은 이미 헤겔이나 자크 라캉이나 네비나스 라는 철학자들이 언급한 바와 같이 타자와 이웃 공동체과의 관계성 안에서 비로소 자아를 정립하는 범주 밖으로 나아갈 수 없이 갇혀 있다. 헤겔은 타자라는 대상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인간의 자기 인식을 정신 세계의 본질로 보았다. 한 자아의 사회적 현실이란 타자 속에서 이루어지는 통일적 직관이 되며 이 때 자의식은 또 하나의 자기존재를 타자 속에서 확인하게 된다. 자크 라캉에 있어 자아 의식이란, 무의식 차원에서 비로소 밝혀지는데 그것은 타자의 행위와 진술에 의해서 구성된다는 것이다. 의식 차원에서는 마치 내가 스스로 주체적으로 자발적으로 행위하는 것 같지만 실은 그것은 허상에 불과한 것이다. 왜냐하면 자아의 원천이 되는 타자에로의 욕망이 그 근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임마누엘 네비나스에 의하면, 타인은 우리에게 얼굴로 나타난다. 그 얼굴은 나에 대한 모든 의미를 담고 있으며 그 힘은 상처받을
가능성을 지니고 무저항적으로 다가서는 도덕적 힘이라고 보고 있다. 이러한 타인이 자아의 이기심을 꾸짖고 제대로 서로를 섬기는 독립적 존재로 만들어 주는 계시다는 것이다.
타자가 있으므로서 자아는 비로소 자아답게 초월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잠사 칸트의 윤리관을 언급하고 싶다. 왜냐하면 머레이의 성화관이라는 것이 인간들의 철학적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칸트와 같은 인간들인 우리들이 더불어 직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 칸트의 윤리관 ¤
나무를 베는 것은 악이 아니지만 인간을 베는 것은 왜 악이 될까? 인간은 자아를 매개로 하여 이야기를 시작하는 그 날부터 허락하는 한 자기를 노출시키며 그의 에고이즘은 시작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 에고이스트만의 세계란 형성될 수 없다. 결국 나와 공동 관계 안에 있는 다른 존재자의 전체를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에 관한 문제로 나아가는데 이는 실용적 범위를 능가해서 칸트는 형이상학적 물음까지 이른다. 인간이 에고이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이성적 존재자 상호의 관계에 기초한 도덕원리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실천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여기서 칸트는 세상을 둘로 나눈다.
하나는 예지계이며 다른 하나는 실천계이다. 예지계는 실천적 세계의 이념이 된다. "인간은 무엇 때문에 자기 준칙에만 따라 행위해야 하는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나는 이 원리에 따라야만 하는가"라고 우리 자신들이 물을 때 "나는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으며, 어떻게 그것이 생기는지를 통찰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무릇 이 당위는 이성적 존재자(가령 하나님)에 있어 이성이 아무런 장애도 없이 실천적일 경우에는 모든 이성적 존재자에게 타당한 의욕이다"라고 칸트는 말하고 있다.
여기서 '이성'이라는 말과 '의욕'이라는 말이 칸트의 도덕적 당위를 설명해 주는 핵이다. 즉 인간에게 있어 의욕이 당위(당연히 해야 됨)보다 앞선다는 것이다. 이 의욕은 순수 이성에서 나온 순수 의지이다. 따라서 순수 이성이 인간에게 보편적 법칙이라면 순수 의지 또한 보편적 실천 법칙이 된다. 이 법칙을 칸트는 도덕법칙이라고 이름 붙인다.
인간의 의지는 감성에 의해서 촉발되기 때문에 결코 신성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감성계 영역에서 통하는 욕망의 질서와는 전혀 다른 예지적 질서에 의해서 인간의 의지는 통찰 될 수 있다. 비록 지독한 악한(惡漢)일지라도 이성을 가지고 있는 한 여기서 유래하는 도덕적 당위는 없어지지 아니한다.
그런데 인간 본유의 자애의 원리에 방해를 받아 순수 의지가 규정하는 대로 바로 선택되어지지는 아니한다. 그러므로 도덕법칙의 의식은 항상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라는 의무 의식이 되는 것이다. 즉 "너는 의욕적으로 반드시 하게 된다"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로 바뀐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욕이나 실천이 인간에게 가능한 것은 인간에게는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칸트는, 자유로 둘로 나누고 있다. 자율로서의 자유와 선택 의지에 있어서 자발성으로서의 자유가 바로 그것이다. 자율의 반대말은 타율이다. 칸트는 행위 하는데 있어 질료를 의지의 규정 근거하는 것은 타율로 보았다. 즉 법적인 규정을 의지 근거로 삼는 것을 타율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타율적이라고 해서 반드시 자유의 부정이 아니다. 인간의 자유는 의지의 자유이다. 그러므로 도덕법칙을 따르는 것도 자유이고 도덕법칙을 위반하는 것도 자유이다. 달리 말해서 자율의 원리를 선택하거나 타율의 원리를 선택하는 것은 언제나 선택의지의 자발성을 전제로 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칸트가 생각하는 참다운 도덕적 자유란, 자율로서의 자유와 자발성으로서의 자유의 합일에 있다. 만약 이성에 의한 의지에서 필연적인 행위가 나온다면 그 행위는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도 필연이다. 이것이 순수 의지이다. 즉 선이라고 인정하는 것만을 선택하는 능력이다. 그런데 인간의 선택의지는 자체적으로 순수 의지와 일치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객관적으로 필연적인 행위가 주관적으로는 우연적이기 때문에 이것의 일치를 위하여 의무가 강제되어 지는 것이다.
도덕법칙을 따라야 할 것인가 혹은 위반해야 할 것인가는 선택의 대상이 되 지만 도덕법칙 그 자체는 선택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분명히 인간은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 주체이다. 그러나 도덕법칙은 자유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대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반드시 도덕법칙에 따르는 것은 아니지만 도덕법칙 아래에 있는 존재이다. 순수 의지는 원리로서 이 도덕법칙에 대하는 순수 의식이다. 따라서 순수 의지는 선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도덕법칙을 늘 통찰하고 있다. 순수이성 의지는 선택되지 않고 불가피하게 이성의 명령을 따른다.
칸트는, 의지와 선택의지를 구별한다. 의지 즉 순수실천이성은 자유도 부자유도 아니다. 단적으로 필연이다. 다만 직접 입법만을 한다. 주관적인 준칙을 정립하는 선택의지만이 자유라고 불린다. 그런데 이 선택의지만으로 선악의 관념은 성립하지 않는다. 선택 의지는 우리 안에 있는 도덕법칙의 의식과 결부됨으로써 이른바 도덕적인 감화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선악의 개념은 도덕법칙에 선행하는 아니고 역으로 도덕법칙에 의해서 비로소 규정되어 진다.
칸트는, 볼프 학파의 "할 수 있는 한 완전한 것을 하라"라는 원칙을 타율적이라고 비판했다. '실제로 할 수 있는 한' 이라고 말 할 때 그것이 전혀 무규정적이라면 안정성 정도는 각자의 자의에 맡겨져 그 질료는 천부적 재능이나 소질 혹은 과거의 그 경험에 의해서 한정되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원칙적으로 자연 질서에 내재한 그것에 복종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칸트는 이러한 자연주의적 태도에 의해서는 도덕적 자유의 개념이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도덕은 경험에서 나와서는 아니된다. 이미 행하여진 사건 혹은 지금 행하여지고 있는 사건의 계열로부터 초월함이 없이는 자유에 근거한 윤리적 가치의 영역은 없다. 만일 이점을 허용한다면, 선악의 관념은 개인의 기호에 따라 일어나고 없어지는 것이 되기 때문에 윤리적 가치는 주관화 되어 버린다. 하지만 인간의 선택의지는 그 자유의 범위가 초경험적인 것까지 확대된다. 즉 경험에 선행하는 질료적인 원리로부터 초월이 가능하다. 타율에서 자율로 전환되는 것이다. 인간의 그 어떠한 의욕에도 그 대상인 질료가 포함되어 있다. 질료를 행위의 규정 근거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타율이다.
타율이란, 자기애를 원리로 하는 이기적인 입장이다. 여기에 대해 참다운 도덕적 행위는, 도덕법칙의 표상이 이성의 판단에 있어서 자기애의 원리에 우선하고 이것과의 균형을 파괴하는 곳에서 성립한다. 질료의 유혹을 벗어나 질료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도덕법칙이 알려주는 보편적 형식을 매개로 해서 새로운 어떤 질료와 결부되어지는 것이다. 마치 수평의 차원이 수직의 차원에 의해서 절단되어 초월적 통일을 얻는 것과 같다.
타율에서 자율에로의 이러한 전환은 유한한 존재자에게는 현실이 아니라 언제나 실현해야 할 의무이다. 도덕법칙의 의미는 순수 의지에 의해서 통찰된다. 그런데 인간의 의지는 신성한 것이 아니다.
순수 의지와 선택의지의 완전한 합일은 실천적 이념의 원형이다. 인간이 내재적으로 성취해야 할 것은, 도덕적인 노력, 즉 덕에 의해서 그 원형에 무한히 접근할 수 있을 뿐이다. 덕은 유한한 실천이성이 실현해야 할 최고의 것이다. 그러나 덕이 확실히 몸에 밴다는 것도 결코 확정적인 것이 아니다. 그처럼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칸트는 주장한다.
모든 사람은 의무의식을 통해서 윤리적 관계의 근원인 예지계의 이념을 인식하고 거기에 대해서 책무를 느끼게 된다.
예지계란, 인간이 본래적 자기의 위치를 가지는 세계이고 인간들이 목적하는 바 그 세계이다. 이 왕국의 법칙은, 인간들의 행동에 의해서 자연 안에 도덕이 실현되는 세계를 뜻한다. 이 왕국의 최고 존재자가 바로 신이라는 것이다.
이상이 칸트의 대략적인 윤리관이다. 이 칸트 윤리에는 혹시 반성이라는 것이 있을지 모르지만 회개라는 요소는 생겨날 수 없다. 왜냐하면 의가 무엇인지, 선이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인간 세계에 들어온 하나님의 사건인 십자가 사건만이 유일한 기준으로 등장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인간이 적용시켰던 그 기준 자체에 대한 부정이 이 십자가 사건 안에 담겨있기에 십자가 안에서 윤리적 자기 인식마저 포기하지 않는 한 회개의 열매라는 것은 생길 수 없다.
이처럼 철학에서 말하는 윤리는, 땅에서 시작해서 하늘까지 닿을 수 있는 인간의 실천력에 기조를 둔, 일종의 '인간 독립 선언서'와 같은 것이다. 이성의 실재성과 자유성을 재료로 해서 구성된 이런 행위론들이 이들 독립선언서 내용의 전부이다. 인간이 현재 살고 있는 땅에서 출발하고 또는 땅의 이야기로 국한되기에, 자아와 타자의 관계성, 즉 사회성 속에서 비로소 윤리와 도덕의 의미를 재확인하려고 한다.
이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 사이의 언약을 염두에 둔 '구원적 하나님의 아들 행위론'이 아니다. 이러한 비복음적 윤리관은 왜곡된 죄관, 사랑관, 의관, 심판관의 소산들이다. 동시에 인간 자아성의 한계이기도 하다.
주님 앞에서 그 한계는 어떤 모습인가는 어떤 부자 청년이 잘 대변해 주고 있다. 다음과 같은 구절은 머레이가 주님 앞에서 말하는 바이다.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마 19:20)
결국 이 청년은 주님 곁을 떠났다는 사실을 우리는 다같이 명심하자.
2.믿음에서 실천력을 끄집어내기 위한 논리가 과연 예수님의 공생애를 통해서 예수님 자신의 삶에 합당하게 적용되는지를 검토해 보았는가?
(1)‘거룩’의 의미와 관련된 머레이의 오류
머레이는,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되는 원리와 그리스도에게 적용된 원리를 별개의 것으로 구분 짓고 있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도 바울이 소개한 실존적 위상을 고려하지 못한 채 마치 또 다른 독립된 몸인 것처럼 간주해서 나름대로의 위상을 따로 마련하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 사이에 있어 그 어떤 구원적 관계가 성립되어 있는가를 먼저 언급해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성부와 성자 사이에 성사된 구원 관계가 그대로 '그리스도 몸'이라는 위상 안에서 유일무이한 구원 원칙으로 자리잡아서 선물로, 은사로 제공되기 때문이다.
과연 예수님이 세례 요한한테 세례 받고 난 뒤에 죄 아래 놓이기 위해 열심히 각가지 죄 사냥에 나선 적이 있는가? 예수님의 노력이 결국 온전한 참여에 있었지 결코 어떻게 하면 내가 인간들처럼 죄를 많이 지을 수 있을까 에 힘씀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생각하고 있는 성스러움과 거룩이란 개념은 분리 개념이었는데 그것은 이미 하나님 아버지와 계약된 바, 바로 피흘림과 거룩으로 관련지어진 언약적 내용에 의한 거룩이었다. 그 피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요 심정을 토로한 것이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면서 "이로서 모든 의를 이루자"고 하셨다. 그 의는 바로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는 외침 안에 다 들어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가는 길과 부활과 승천으로 나아가는 행함은 머레이가 주장한대로 (논문 p.256) 결정적 성화를 발판으로 삼아 점진적 성화로 나아가는 과정이 아니었다. 계속해서 완전한 거룩이었다. 그 거룩으로 심판에 나서시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이 안고 있는 위상이다. 그리스도 몸이 계속 추구해야 될 점진적 성화라는 남은 숙제는 전혀 없다.
그리스도의 몸의 기능은 계속된 심판 기능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지 계속해서 자기 사람 성화시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비거룩을 심판 못할 정도로 거룩에 부실한(아직도 성화가 남아 있기에 성화에 미진한) 그리스도 몸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구원이란 항상 완전한 의를 기준으로 하여 벌리시는 여호와 전쟁 심판 와중에서 이루어지는데 이 원칙은 예수님 공생애 때나 신약 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를 그리스도 몸이라는 표현도 이런 취지에서 나왔다. 결코 성도 개인적인몸으로서 심판의 기준을 삼으시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정사와 권세를 쥐고 계신 분은 성도가 아니라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이다.(엡 1:20-23) 만물은 성도 중심으로 통일되는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으로 통일된다. 이것이 이미 하나님이 예정한 일이다.(엡 1:9-10)
(2)머레이의 성화론은 불완전한 구원론을 담고 있음
바로 이런 안목에서 보면 머레이의 문제점은 또 드러난다. 그리스도 중심의 구원을 생각하기보다는 개인의 구원 중심으로 구원론을 전개할 수 있다고 함부로 단정해 버린 것이다. 그러니깐 '완전치 못한 성화' 개념을 상정하게 된다.(논문 p 259 중간) 머레이는, 성도의 영적 싸움을 점진적 성화 과정으로 분류해서 완전한 성화와 구분시킨다. (논문 p 259 하반부) 즉 성도가 미완성된 성화인 채 영적 전쟁을 벌려서 그 영전 전쟁의 결과로 완전 성화로 나아간 다는 식의 논리를 암시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
이 본문 에 의하면, 거룩이란 단번에 생기며 인간이 만든다든지 장차 만들어 나간다든지 아니라 '얻어서' 비로소 주어진 것이며, 무엇보다 더 더 중요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의 해서 거룩이 주어지지 결코 인간의 몸이 개입되어 거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본문은, 인간이 어떻게 성화되어 온전한 구원에 이룰 수 있느냐 라는 사적인 구원론을 부각하는데 조금도 관심 없고 단지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구원의 능력이 얼마나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탁월하며 홀로 행하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따라서 머레이가 펼치는 '구원론'은 그 자체가 이미 성경 전체에서 거부당할 수밖에 없는 사고 방식에서 도출된 논리이다.
(3)신약이 말하는 ‘하나님의 행위의 완전성’을 반영하지 못함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 계실 때 어떻게 행위 했으며 그 제자들이 어떻게 행위 하게 되느냐 하는 문제는 요한복음 3:21에 명확하고 규범적으로 나와 있다.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이 본문에 볼 것 같으면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이라는 분명히 나와 있다. 이 원칙에 예수님도, 제자들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전서 4:11에 같은 취지의 말씀이 나와 있다.
"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머레이의 사고 방식에 의하면 이 인용된 두 본문에서, '하나님 안에서' 라는 말과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제거하고 구원론을 전개하는 식이 된다.
(4)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인 주도권을 무시함
이것이 어떻게 복음이며 기독교적 구원론이라고 할 수 있는가? 또한 그렇게 꼭 제거하고 싶어하는 마음의 동기는 어디서 유발된 것인가? 그것은 구원의 대상 선정 작업부터 전적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에게 일방적으로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근거해서 구원론을 시작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다.
즉 예정 선택론으로부터 구원론을 전개하면 구원론의 그 나머지 모든 전개 과정에서 일방적 선택이라는 요소를 제거하고 펼칠 수가 없기 때문이요 더나아가서 인간의 행함의 의미가 희석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자.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롬 9: 11) 혹은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 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9:4-6)
이런 말씀들을 가지고 성화론을 전개해 보라. 과연 성공하리라 보는가? 아직 나기도 전에 그리고 무슨 악이나 선을 행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택한 자를 사랑했다는 이 사실에, 이 구원론에 무슨 인간의 행함의 긍정적 요소가 파고들 수 있단 말인가! 머레이는 참으로 무리수를 남발하고 있다.
요한복음 6:65에 성도 구원에 대해서 명확하고 명확하게 분명히 그 원리가 기재되어 있다.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자기에게로 몰려오고 있는 군중들을 보고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 곁을 찾아왔다가 미련 없이 떠나 버린 무수한 군중들을 보면서 이 말씀을 남기신 것이다.
나름대로 구원의 원리를 갖고 예수님에게 자진해서 찾아온 군중들을 향하여 일갈하신 설교이시다. 즉 너희들이 알고 있는 구원론 소용없다는 것이다. 나 예수는 반드시 아버지가 보내 주시는 자만 받겠다는 선언이다. 다시 말해서 구원이란 결코 인간들의 의지나 행함에 기초해서 이루어지지 않을 뿐더러 비록 주님을 찾아오고 제자로 자청한 그 이후라도 사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행함이나 의지가 가미된 구원론 이미 그리스도를 떠나 상관없는 이방 종교적 구원론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님은 자신들과 그 제자들에게 머레이가 주장하는 그런 성화론을 가르치신 적이 없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 뜻대로만 될 뿐이기 때문이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8-39)
따라서 이러한 주님만의 구원론으로 인간들의 근원적인 구원론을 심판하려 오신 분이 바로 주님이시고 이러한 심판성은 오늘날 오직 그리스도의 몸 되는 교회를 통해서 반복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요 9:39)
3.머레이는 신약 성경에 나오는 명령형 서술 처리에 대해서 감당을 못하고 있다.
(1)‘믿음’을 ‘행함’으로 변질시킴
사도는 주님의 명령에 대해서 믿음으로 받아야 될 문제는 머레이는 행함과 실천력으로 받아 드리려고 한다. 그 이유는, 그 주어진 말씀의 행위자가 인간들뿐이라는 불신앙적 태도 때문이다.
신약에서 성령이 왜 내주하시며 주님은 왜 하나님 우편에서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신가? 이 문제는 예수님 공생애 때에 예수님과 12제자들 사이의 관계를 통해서 실체가 열려진다.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마 10:1)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 10:20)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행 3:11-13)
가롯 유다가 믿음이 좋아서 권능을 행했는가? 베드로가 자체적 능력이 악마보다 커서 마귀가 하늘에서 떨어졌는가? 베드로와 요한의 권능과 경건으로 앉은뱅이를 낫게 했는가? 베드로와 요한이 자신들의 권능과 경건으로 기적을 했다고 그렇게 논리를 펼치고 있는가?(머레이 교수처럼 말이다.)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물론 12제자들이 주님의 권능에 따라 능력을 행할 때는 분명 명령형으로 발언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일어나 걸어가라!" 혹은 "주 예수를 믿어라" 등등으로 말이다.
가령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은 명령을 설교단에서 했다 하자.
"여러분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시기 바랍니다. 분을 내어도 죄 짓지 말고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빛의 자녀들처럼 행합시다"라고 말이다.(엡 4장-5장)
그런데 이 설교를 듣고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또한 술도 끊고 이웃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치자. 이 광경에 접해서 사도 바울이 다음 중 어떤 식으로 고백하겠는가?
"여러분 저분은 저의 명령형 설교를 듣고 순종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라고 했을까 아니면 "여러분,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머레이 교수의 문제점은 여기서 궁극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자신의 모든 학문이 주님 증거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학문적 틀에 준해서 일단 일단 나름대로 치밀한 학문적 업적을 수립해서 그 논리에 설득 당하는 그런 성과가 있게 되면 그 성과와 자신이 구축한 학문적 업적을 하나님께 헌납하면 그때 비로소 하나님이 영광 받는 줄로 알고 있다.
(2)주님께서 구원을 전적으로 주도하신다는 사실을 약화시킴
도대체 믿음이 없다! 단지 있는 것은 타인들을 어떻게 하든 학자의 자질로서 예수 믿게 하려는 희생적 봉사 정신뿐인데 놀라운 것이 이 희생적 봉사 정신이 바로 보편적 인간의 종교성에서 출현한 윤리 정신이지 결코 언약적 복음 정신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 얼마나 교묘한가! 머레이의 정신 상태는 주님만을 쳐다 본 사도의 정신과 확연히 다르
다. 그는 자기 존재의 의미성과 가치성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주님이 하실 일을 못믿으워 한다. 마치 자신의 기도는 믿지만 성령의 탄식 기도와 주님의 기도는 못믿으워 하는 자와 같다. 자기 기도의 효과는 믿지만 지금도 쉬지 않는 주님의 기도 효과를 못믿으워 하는 자와 같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고 예정론이 빠져 버린 구원론은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구원론도 아니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세상을 심판할 수 있는 완전한 거룩성을 내비치는 구원론도 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필히 주님의 기도에 의해서 성취된다는 사실이다. 이점을 믿어야 그리스도의 종이다.
결 론
모세나 다윗이나 이사야나 예레미야나 사도 바울이 과연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존재들인가? 라고 반문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성경을 통해서 본인들에게 물어 봐야 하는 질의이다. 그들은 자신을 무가치한 것으로 보았다. 단지 하나님과 자기들 사이에 언약 관계가 형성되어 있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종이 된 것이다. 바로 그 언약 관계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였고 그 주인공이 주관하여 세상은 모든 것이 주의 뜻대로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5-7)
이 언약적 관점이 바로 머레이가 잘못 사용해서 표현해 버린 그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의 영역'(논문 p 256 하반)의 본 모습이다. 머레이는 언약적 요소를 제거하거나 혹은 사용해도 인간 중심의 입장에서 언약을 해석하거나 혹은 언약의 세계과는 다른 세계를 구성하기 위하여 언약을 보조적인 것으로 삽입시켜 이용하려 했으므로 그는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른 세계를 제시하고 말았다.
그는 왜 허상적 세계를 참된 복음적 세계로 이해해고자 했던가? 그것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빠졌던 오류에 그대로 빠져 버린 것이다. 즉 "말씀은 사람이 지켜서 하나님께 순종하라고 주신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무엇 때문에 주셨겠는가. 우리는 이미 주 여호와를 믿어 거듭난 자들이 아닌가! 그러니 이제 구원받은 문제에 대해서 더 이상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고 다만 이미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바르게 살아서 주께 찬양하고 이상적인 주의 집회를 이루어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내는데 있다! '이미' 구원받았지만 '아직' 도 구원받을 자가 수행해야 될 구원의 길이 남아 있다" 라는 인식과 머레이는 맥을 같이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바로 이러한 사고 방식이 '육'이며 '영'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영'은 영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를 뜻하기 때문이다. 즉 율법은 인간이 지켜서 의를 얻어서 구원 얻으라고 준 것이 아니라 영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하여 주신 것이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이 본문 말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그 사역을 가르킨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리고 이 원리가 세상 끝날 까지 중단 없이 적용된다고 믿으시면, 그 사람이 바로 거짓 메시아를 위해 참된 메시아인 예수를 죽이지 않을 사람이다.
제발, 주님을 믿는다고 주창하고 그렇게 느껴지도록 다른 이들에게 유도하는 자들이나 혹은 무언중에 자기 자신이 제대로 주님을 믿고 있으니 변화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애착을 갖고 신봉하는 일은 곧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자존심 경쟁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머레이의 주장의 해악은 딴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머레이의 잘못된 주장에 옹호하는 자들이 참된 주의 종을 이단시하면서 배척해서 결국 하늘에 주를 또 근심되게 하는데 있다. 바로 이로서 참된 그리스도의 몸은 심판의 기능을 오늘날 차질 없이 수행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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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가정, 그리고 국가,사회에서의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 있어서 성경적인 기준이란 무엇입니까?
문휘웅 2006-09-01 02:30:45, 조회 : 96, 추천 : 0
평소 목사님의 글들을 많이 읽어봅니다.뭐 다 읽어봤던건 아니구요.^^맨날 눈으로 읽기만 하다가 이제 궁금했던 점이 생각나서 글 올려봅니다. 가끔씩 인터넷이나 교회관련 신문을 보면 여자 목사안수에 대해서 말이 굉장히 많습니다. 관심이 있어서 읽고 자료를 모으긴 했지만, 좀 미진한 부분도 있어서 질문을 드리는데, 교회와 가정, 그리고 국가와 사회에서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 대한 성경적인 기준이 무엇입니까?가령 장로교 칼빈주의 교단에서는 디모데전서에서의2장 11절에서 15절까지의 내용과 남자가 여자의 머리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라고 하면서, 주님께서 남자를 여자의 머리로 세우시고 교회와 사회,국가, 가정모두에서 남자를 여자의 머리로 세우고 여자는 그 권위에 복종해야 하며 절대로 교회에서 여자는 목사안수를 하지 못하도록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외 칼빈주의를 뺀 나머지 교단은 그 주장과 근거는 설득력이 없고 칿빈주의자들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시대적으로는 그 당대와 장소로는 디모데가 사역을 하고 있던 당시 에베소교회에 국한된 단회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안수를 줘도 얼마든지 상관없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과연 어느 쪽 주장이 맞을 까요?제 생각엔 칼빈주의자들의 생각이 좀 더 성경적인 근거가 있다고 생각은 합니다만, 주장에 비해서 근거가 좀 부족한것 같기도 하고...껄쩍 지근합니다. 과연 어느 쪽 말이 맞을 까요?(목사님도 아시겠지만 칼빈주의자들은 성경중심과는 전혀 다른 신학적 견해를 갖고 있는 사실상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기독교와는 완전히 출발점 자체가 다른 현대주의 사고 방식이 지배적인 교단들이 대부분 여성 목사 안수를 주장하고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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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교회와 가정, 그리고 국가,사회에서의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 있어서 성경적인 기준이란 무엇입니까?
이근호 2006-09-01 08:32:03, 조회 : 128, 추천 : 2
우선
오늘날 흔히 규정된 목사라는 개념이 복음적인 아닌
종교집단 경영 차원에서 도입된 관리직 개념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교회'개념을 오늘날 소위 교회들이 반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성립되려면
우선 성령받은 자들이 선행되어야 합니다.(엡 2:20-22)
그리고 성령받은 자들의 특징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신들의 머리로 인정할 뿐입니다.(엡 1:22)
즉 그 어떤 인간이나 천사의 말을 진리로 받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머리가 된 자들은
세상적인 육적인 힘을 초월하는 예수님의 부활의 강력한 힘이 그들 위에 일하고(역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엡 1:20)
따라서
예수님의 머리되심을 인정하지 않는 남자들이, 여성에 대해 자신의 머리됨을 인정받겠다는 것 자체가 폭력적이며 악마적인 태도입니다.(세상권세의 연속이니까)
남자(남편)를 머리로 삼고 여자(아내)를 남자(남편)의 영광으로 생각하는 (고전 11:2-18) 일이나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치 않는다는 디모데전서 2:11-12의 말씀은
복음 전파를 위하여 주님께서 실시하는 입장에 있지
인간들이 정치 제도화해서 굳혀놓을 입장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 존재성이 우선이 아니라
교회는 그 복음성이 우선입니다.
여자로 인해 죄가 이 세상에서 들어왔음을 보이는 것이
복음의 배경이 된 이상,
그러한 상황을
이 지상에서 남자와 여자를 통해서 재현하게 되는데
이것은 오직
부활의 능력이 드러나는 그 순간에만 파악될 뿐입니다. (인간들이 실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님)
여성이 특정 직책이 못가진다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복음적 견해를 버리고 남성에 대해 우월적 입장에 있다고 여기고 살아간다면 이는 비복음적이라고 보는 겁니다.
이러한 복음적 내용을 조직적으로 제도화 한다고해서
그것을 말씀성취라고 볼 수 없습니다.
말씀 성취는 오로지 성령의 일하심을 통해서 그때그때 성도에게 적용될 뿐입니다.
그 순간이 되면
남성이나 여성이나
자신이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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