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

전체로서의 예수와 부분으로서의 십자가(이준)

아빠와 함께 2013. 1. 28. 10:12

전체로서의 예수와 부분으로서의 십자가(?) 
이준   2006-09-23 18:46:38, 조회 : 179, 추천 : 2

최근 대구우리교회 질문답변 게시판에서 이어지고 있는 열띤 문답의 일부를 옮겨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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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1247  이름:질문  2006/9/11(월) 22:43
Re..모태 신앙 
(전략)...인간이 자기의 힘으로 사랑할 수 없겠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또 하나님은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라고 하신 것은 인간들에게 주신 즉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들에게 주신 책임이 아닌지요?...(중략)...복음을 주셔서 이것을 듣게 하시고 믿게 하신 하나님께서 구원 받은 자들에 주시는 책임을 간과하면 안 될 것이라 생각이 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우리는 주님을 믿는 것이지 십자가 사건만을 믿는 것은 아니지 않은지요? 주님이 해 놓으신 모든 것을 또 주님의 하시고 계신 모든 것을 또 주님이 하실 모든 것을 믿는 것이 바로 온전한 믿음이 아닌지요?...(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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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 내용을 대하다 보면 글에 나타난 글쓴이의 생각뿐만 아니라 평소 그를 전인격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의식까지도 엿볼 수 있다.

(잠 23:7)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나는 위의 글을 쓴 이가 최근 올려놓은 모든 글들과 아울러 각각 제시된 답변들도 꼼꼼히 읽어보았다.
위의 글의 표현을 놓고 보면, 예수는 전체이고, 십자가는 부분이라는 셈이다. 전체와 부분...예수와 십자가...과연 그런가?
여러 해 전에 내 모친과 어느 안경점을 운영하는 서로 형제지간인 카톨릭 신자들 사이에 오고 간 대화가 다시금 떠오른다.
논쟁 아닌(?) 그 대화의 요지는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생각의 대립이었다.
즉, 그 두 사내들의 입장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사랑'이라는 것이었고, 모친의 입장은 '예수'가 본질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대립을 다시금 떠올리며 좀더 좁은 각도에서의 대립 관계를 생각해 보았다. 즉, 예수와 십자가...어느 것이 신앙의 핵심이냐는 점 말이다.

구약시대에 유태인들이 길렀던 가축떼 중에 수많은 양들과 소들이 있었다. 그 가축떼 전체 중에 희생 제물로 드려지는 것은 선택된 일부였다.
나아가, 오직 제단을 중심으로 하여 그 아래에서 피 흘려지고 제단 위에서 불살라지는 것만이 희생 제물의 의미를 띠게 되었다. 즉, 제단과 상관 없는 양, 소는 희생 제물로서의 의미가 없는 것이다. 희생 제물을 희생 제물되게 하는 것은 곧 제단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 적이 있으시다.

(마 23:19-22) 『눈 먼 자들아! 어느 것이 더 중하냐? 제물이냐? 그 제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제단을 두고 맹세하는 사람은, 제단과 그위에 있는 모든 것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요,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사람은, 성전과 그 안에 계신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다. 또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보좌와 그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다."』(표준새번역개정판)

위 말씀의 일부를 취하여 새겨보면, 제물을 제물 답게 하는 것은 제단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이 아니라 예수를 예수답게, 복음을 복음 답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달리 말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진짜 예수님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증거가 무엇인가? 성경은 그것이 다름아닌 '십자가'라고 말씀하신다.

(고전 1: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이것을 반대로 생각해 보면, 십자가와 상관 없는 예수는 참 예수가 아니라는 말이 된다. 그렇다. 십자가와 예수를 떼어놓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 입장이 아니다.

시내산 위에서 모세가 여호와를 대면하고 있었을 때, 시내산 아래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가리켜 하나님(여호와)이라 떠받들고 있었다(출 32:4). 그 당시를 두고서 우리는 어느 여호와가 진짜 여호와인가 라는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물론 현재의 우리로서는 이미 그 답을 다 알고 있다고 자신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해가 지면 여기저기 우후죽순처럼 피어나는 수많은 십자가 네온사인을 보면서 우리는 다시금 또 하나의 질문 앞에 서야만 한다.

"어느 예수가 진짜 예수인가?"

십자가 없는 예수는 예수가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십자가의 의미를 안다는 말이다. 모든 아담들에게 있어서, 과거 가짜 여호와를 믿었던 유태인들의 전철을 되밟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 유태 왕국이 멸망하는 과정을 지켜본 자라면 누구나 말이다.
자신에게 어느 수준 이상의 믿음이 있노라는 마음가짐으로 그 멸망의 역사를 대하는 자들마다 저 유태인들이 섬겼던 온갖 우상들의 이름들을 보면서 '어찌하여 참 여호와를 거부하고 저런 되지도 않은 우상들 쪽으로 기울었는가, 이 어리석은 유태인들아!' 라고 탄식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마음가짐의 소유자들 앞에도 여전히 참 여호와께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들이대신다.

"어느 예수가 참 내 아들인지 너는 아느냐?"

십자가 없는 예수는 참 예수가 아니다. 시내산 위의 여호와와 시내산 아래의 여호와의 대조적인 이야기(출 32장)을 접해본 사람이라면, 거짓 예수와 참 예수 사이에 십자가라는 기준을 두고서 그 진위성을 가늠해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와 관련된 제대로 된 통찰력은 오직 성령님의 허락하심 하에서만 제공된다.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이외에는 아무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앞서 인용된 말씀에서와 같이, 신앙의 핵심은 '예수'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이다(고전 2:2). 우리를 부르신 분은 '예수'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이시다. "예수가 전체요 십자가는 어디까지나 전체로서의 예수에 부속된 일부"가 아니라, 오히려 부분으로 보이는 그 십자가 사건이 전체라 여겨지는 예수의 진위성을 결정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아담의 세계로 보내신 이유는 다른 일이 아닌, 바로 그 '십자가 사건'에 있다. 십자가 짊어지라고 보내신 것이다. 십자가 짊어진 어린 양만이 참된 어린 양이었던 것이다. 요한계시록도 일관되게 그 점을 증거한다.

(계 5: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계 11:8)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우리에게 있어 '일부'란 처음부터 없었고 오직 '전부'만 있었을 따름인데, '십자가'가 바로 그것이다. '십자가'가 전부라는 말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전부라는 뜻이다. '예수'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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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이 글을 '예수 사회' 원고로 하고 싶은데 이의 없으신지요? 
이근호   2006-09-23 19:13:10, 조회 : 127, 추천 : 1


'예수 사회'의 출간의 의의를 지표할 수 있는 중요한 테마가 담겨 있고 또 정돈되어 이 의견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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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목사님께...;; 
이준   2006-09-23 19:45:17, 조회 : 140, 추천 : 1

목사님,
저로서는 감히...감히...감당할 자격도 없는 처지에서
귀하신 부탁을 받았기에 뭐라 말씀드려야 할 지 모르겠지만,
그저 말씀하신대로 따르고자 합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 생각할 따름입니다.
감사합니다.

(마 8:8-9) 『[8]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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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감사합니다. 
이근호   2006-09-23 21:10:33, 조회 : 131, 추천 : 0


>받아 누리는 사람들이 고마워 할 것을 생각하면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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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아멘~(냉무) 
권범식   2006-09-25 01:33:07, 조회 : 53, 추천 : 0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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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윤범 목사 주일설교(2006년9월24일) 요약본(=칼럼) 
십자가만   2006-09-24 21:55:12, 조회 : 146, 추천 : 3

제목:하나님의 비밀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을 따라오려면,'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그 말씀을 들은 우리는 어떻게 하면 '자기 부인'이 될까?하고 고민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살다보면 자기 부인은 커녕
자신이 드러나기가 일쑤니 말씀 앞에 부끄럽기 짝이 없고 송구스럽기 그지 없지요.

여기서 제가 감히 당신에게 면죄부를 드릴까 합니다.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수천 년 철학의 주제가 '존재의 있음'을 토대로 발전해 왔음을 눈여겨 보면 자신을 부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는 아무리 몸부림 쳐도 '나'를 부정하지 못합니다. 이걸 해보겠다고 각종 프로그램을 돌리고 훈련을 받으라고 독려하는 모습이 눈물겹습니다. 인간의 본성을 뛰어 넘으려는 초절한 노력이여!

예수 믿고 더나은 나, 바르게 사는 나로 더 깊이, 더 높이 나아가야 되지 않을까 하는 강박관념은 거의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골로새교회에 침투한 비밀스런 지식을 소유 했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도 바울의 주장은 다릅니다.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빌3:8)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며 살았다고 고백합니다.
단지 그의 소원은 이 세상에서 멋진 자기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면 더 이상 뭘 더 바라겠느냐는 겁니다. 아무리 남보다 뛰어난 영적 지식을 소유 했다고 주장하더라도 주 안에 있지 않으면 저주 받은 인생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비밀을 털어 놓으셨는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그걸 누가 모르겠느냐고 하실지 모르지만 그 안에 감추어진 지혜와 지식이 값으로 상상할수 없는 보물입니다. 하지만 우리 눈에는 어쩜 그렇게 미련하게 보일까요?
십자가를 보고 외면 하는 자신을 미워하거나 이상스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누구나 다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혹시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지혜와 지식을 소유 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일말의 자기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펴 보이는 분에게 말씀드립니다. 꿈 깨십시오! 이 지혜와 지식은 물건처럼 살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은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를 믿는 자와 끝없이 새롭게 만나고자 하시는 살아계신 그리스도 안에 간직되어 있지,이미 묵시적으로 끝난 죽은 그리스도 안에 간직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의 것은 그 어떤 것도 소유할 수 없습니다. 믿음도 , 사랑도, 성령도, 교회도, 천국도, 그밖의 주의 모든 것도. 성도는 주의 것을 가지지 않아도 그걸 다 누리는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면 그뿐입니다.단지 그 비밀을 알게 하신 분을 자랑 하며 또한 감사하며 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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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느낌 
이근호   2006-09-24 22:23:34, 조회 : 138, 추천 : 0

세월이

성경보다 교회쪽을 선호하는 식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성경은 돈이 안되지만

교회는 돈이 되는 곳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성경을 볼 리가 없지요. 

그 대신 교회를 운영해서 돈이 생기게 하는 수완만이 목사 자신의 살 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목사라는 것을 이왕 평생 직업으로 선택했다면 

성경 말씀 자체 보다 정작 마음은  헌금함에 담겨 있을 액수에 신경쓰게 됩니다.

목사라는 직업에 울고, 웃고 싶지,

복음 때문에 울고 웃는 일이 없는 없는 자들, 이런 사기꾼들이 오늘날의 목사들입니다.

이들 사기꾼들에게 이렇게 대놓고 욕해도, 그들은 히죽 웃습니다.

"인생, 그것 별거야? 그러구 사는 거지 뭐"

목사들이 이 모양새이니 교인들이 오죽하겠습니까!

누구를 탓하고 원망하겠습니까.

예수님의 고난을 잊은 시대, 예수님의 쓴잔을 기피하는 시대, 이 시대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계십니다.

"좁은 길로 가라. 찾는 이는 적을 것이니라"

한목사님의 설교을 보고서 따분하게 느끼는 사람은 이미 넓은 길로 접은 든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한목사님에게 이렇게 퉁명스럽게 쏘아붙일 것입니다.

"한 목사님, 그런 설교하시면 돈이 안생깁니다. 제발 이제는 좁은 길에서 벗어나세요."라고. 

악마가 괜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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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신 속에 있는 하라와 하지 말라는 명령어들... 
손무성  (Homepage)  2006-09-26 16:54:26, 조회 : 294, 추천 : 12

서신 속에 있는 하라와 하지 말라는 명령어들...

바울은 서신에서 ‘사랑하라. 봉사하라. 온유하라. 남을 나보다 낫게 여겨라. 모이기를 힘쓰라.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뿐만아니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6:10)
“[개정]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데살로니가후서 3:13)
야고보, 요한 역시
“[개역]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야고보서1:19)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요한2서1:10)
“[개정]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한1서 2:15)....
등등의 수많은 명령어들이 있다.

혹시라도 누구든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있을까 싶어 걱정 어린 심정으로 이 글을 쓴다.

우리는 위의 내용을 보면서 바울, 야고보, 요한, 베드로 등의 사도들이 명령어들을 사용할 때 성도들을 향해
‘성도들이여 이 명령어 대로 해보라. 해 보려니까 못하지? 그러니까 너는 죄인이라니까! 이 명령어 대로 못하니까 십자가의 은혜가 필요한 거야!’ 라는 ‘차원으로만’ 주어진 것들인가? 라는 질문부터 해보아야 한다.

서신서의 명령어들이 과연 죄를 죄로만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만 주어진 또 다른 ‘율법의 행위’의 법인가?

만약 서신서의 명령어들을 ‘율법의 행위’로만 간주하게 된다면 이런 논리가 성립된다.

* 바울의 경우 에베소서 2장에서  하나님의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 받았다라고 했다가 4장 이후의 ‘명령어들 즉 율법의 행위를 제시한 것은 성도에게 ’너는 봐! 어쩔 수 없는 ‘하라와 하지 말라’ 라는 이 말씀을 실천 못하는 죄인 맞지‘ 이것을 드러나게 하기 위해 이 명령어들이 주어 졌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십자가의 은혜가 은혜 되게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믿음으로 구원을 이야기 하고 그 다음 ‘명령어들’(율법의 행위)을 던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오직 믿음이라는 일관성 있는 맥도 제시하고, 십자가의 은혜의 은혜 됨이 더 더욱 드러난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냉정하게 서신을 쓰고 있는 바울과 그 외 사도들의 입장을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는 여기 한 부분 즉, ‘사랑하라, 겸손하며, 돈을 사랑하지 말며...’등의 말씀에 이르지 못하는 자신의 죄가 드러날 때 비로소 ‘십자가의 은혜가 절실히 필요한’ 것에 대해서는 변함없이 동의 한다.

그러나 서신서를 기록하고 있는 야고보, 베드로, 요한과 바울이 과연 앞에서 말하고 있는 입장으로만, 즉 명령어들을 율법의 행위로 간주하여 제시하여 성도는 어쩔 수 없이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만’ 기록한 것들인가? 이 말에 대해서는 동의 할 수 없는 것이다.

분명 바울과 다른 사도들이 일관성 없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라고 한 후에 율법의 행위(명령어들) 라는 차원에서 제시하지 않았다.

바울은 로마서 1장17절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러니 사도들의 일관성 있는 표현은 믿음 + 행위를 제시하지 않았고,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이야기 하다 ‘...행하라. ...섬겨라.... 하지말라...’ 라는 문구에 유의 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바울이 제시한 바는 ‘믿음으로’를 이야기 했다가 행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분명 일관성 있게 믿음을 주장했다. 믿음에 이르게 하시는 분이 ‘주님’이시오. 구원을 이루신 분이라는 것을 증거하며 드러나게 하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서신서를 쓰는 사도들과 바울은 특이한 문구를 계속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안에서, 사랑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도들은 서신서 전반부에서는 믿음으로 구원을 철저히 말하고 이어 명령어들의 문장들을 나열하고 있다. 명령어 문구 꼭 앞 문장에서는 위의 문구를 먼저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악서세리나 겉치레의 표현이 아니다. 명령어들을 선포하는 사도들은 그 특이한 문구 ‘성령 안에서.....’라는 용어를 통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성전)로 삼은 자들에게 드러내고 싶은 것이 있다.
‘주의 이름.’ ‘주님의 마음(....사랑, 봉사, 구제 등<주께서 우리를 위해 가난해 지심으로 우리를 부유롭게 하심-고린도후서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이 이렇다.

십자가의 주님은 이 세상에서 이런 대우(주의 이름으로 고난 받아야 하는 이유, 복음과 함께 고난 받아야 하는 이유)받았다. 이러한 주님 때문에 구원 받았다는 것을 성전(십자가의 죽음으로 3일 만에 세운 주님의 몸)을 통해 성령이 주체가 되어 드러내고 찬양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된다.

물론 어떤이들은 이것도 모르고 자기들이 나서서 지켜보려고 한다는 것이다.그렇게 되면 큰 코 다치는 명령어들이다. 이 명령어들은 인간이 주체가 되어 지켜 내거나 지킬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체가 되어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을 포기 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성령께 위탁해야할 부분이다.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안에서, 믿음 안에서...’라는 말씀을 통해, 구원도 믿음으로 받았으면 ‘그 구원을 이루신 분이 주님 이십니다.를 드러내는 일을 즉, 주체 자를 하늘 소관에 맡기며 자기를 부인하고, 의지하며 살자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하면 ’믿음으로‘ 살라는 것이다. 그럴 때 요한 1서에서의 말씀하는 식의 ’주님의 사랑이 나오게 되어 있고‘, ’주께서 주시는 힘으로 봉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도들의 서신서에서 나오는 명령어들은 철저히 주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고(인간의 아름다운 덕이 아님과 인간의 도덕 윤리 보여주기 위함 아님) ‘주님의 이름’을 드러나게 하기 위한 성령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나타나는 것이요. 나타나게 하시는 것이다.(제 3자들이 보면 성도 개인의 인격변화나 도덕 윤리적 도약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은 주님을 드러냄이 목적하는 바이다.)

만약 이 명령어들은 인간이 나서서 행해 보려 했다가는 판판히 죄인 된 자신의 죄를 드러내게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성령 안에서 행하고’도 자신이 한 것처럼 하여 자기 공로를 내세우기도 한다. 그를 때 성도는 성령 안에서 서로 권하여 회개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성전 된 그리스도의 몸은 ‘인간의 이름’이 끼어들 틈이 없게 하시고 ‘주의 이름’만 높이게 하기 위해 성령이 거하는 성전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의 서신에 있는 명령어들을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죄를 죄로 드러나게 하기 위하여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활동하여 ’주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라는 사실까지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성도들은 오해하기 싶다.

그렇게 되면 성령이 주체가 되어 성도의 삶 속에서 ‘주의 이름’이 증거 되게 하는 삶을 무시하게 되고, 마치 발생되게 하고 드러나게 하는 일이 내게서 일어나면 안 되는 것처럼 여기고 율법의 행위로만 간주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성전 된 우리들에게 어떤 목적을 두고 활동하고 계신가를 다시 눈을 들어 살펴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