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

이준 성도님과 박윤진 성도님의 성경 증거 차이점(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3. 1. 28. 08:38

1. 박윤진 성도님은, 십자가 복음을 접촉하기 전의 인간들이 상호 소통하면서 피어내는 기존 형성된 개념들이 십자가를 통과하면서 사라진다는 겁니다. 따라서 십자가에서 발산될 때는, 전에 있는 인간들의 언어적 개념들이 무의미한 것으로 산산조각 쪼개져 버리는 것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쪼가리를 줏어봐자 앞 뒤가 연결이 안되기 때문에 그냥 그 부정적 역할을 지적하는 만으로 숨어있는 피의 능력을 증거하는 것이 성령님의 활동이라고 보자는 겁니다. 

반면에

2. 이준 성도님은,

 십자가 복음을 접촉하기 전의 인간들이 상호 소통했던 기존의 개념들은 십자가를 통과하면서 그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본래의 복음적 의미를 소개하는데 충실하게 동원되어 쓰여진다는 점을 유념하자는 겁니다. 충분히 복음적 의미로 새롭게 태어났는데 무가치하게 그런 언어적 의미들을 심사숙고로 하지 않고 방치하는 것이 복음전파자로서의 직무유기에 해당된다는 겁니다.

납득을 시키고자 하는 납득이 아니라 이미 복음을 알고 그리스도 십자가 안에 있는 자들만 치밀하게 정리해서 간직할 수 있는 합리성을 스스로 비합리성이라고 자책하지 않고 그대로 외부로 드러내는 것도 충분히 성령께서 벌리시는 성령님의 자신감(성도 자신의 자신감이 아니라)이라면 그 성령님에게 휘돌리는 기회를 애써 성도쪽에서 무서워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반문하고 있는 겁니다.  

초점은 이것입니다. 과연 십자가 안에서 언어가 갖는 개념의 질서가 새로운 질서로 정립되는가 아무면 확실하게 그 언어적 가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공중분해되는가 하는 겁니다.

정답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초반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실 후반 쪽에 가서 어떤 식으로 세상을 향한  언어들을 사용하셨는가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예수님을 그렇게 들어쓰시듯이 그 과정이 그대로 성도들의 세계에 적용이 되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예수님께서는 난해한 말씀으로 일관하시면서 모든 인간관계와 멀어지신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예를 들면 요나의 표적을 언급하기 전에 오해 살만한 무수한 기적들, 특히 오병이어같은 기적들로 통해서 인간들 자신들조차 미리 간파할 수 없었던 내부적인 기대성이 어떤 내용들로 꽉 차있느냐를 드러내셨습니다. 하지만 요나의 표적 언급 이후에는 노골적으로 세상 파토를 내셨습니다.

바로 이러한 흐름이 오늘날 성도에게 그대로 적용이 된다고 한다면, 종국적으로 개념 파괴는 필연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개념 파괴를 선언한다고 해서 그 경지에 벌써 이른 사람이라고 선언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닙니다. 언어적 개념에 십자가 피복음을 새삼 담는다고 해서 십자가 전으로 되돌아간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매일같이 자신의 외부와 내부를 뒤집어가면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상규 (IP:121.♡.224.198) 10-09-26 21:37 
극히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한사람을 통하여는 말씀과 은혜를 나눔으로 읽고
또한사람을 통하여서는 성경과복음을 듣고 이해하고 정리하는쪽으로 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