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

부활절의 성령과 오순절의 성령(이준)

아빠와 함께 2013. 1. 28. 10:16

부활절의 성령과 오순절의 성령 
이준   2006-08-19 13:56:03, 조회 : 137, 추천 : 1

성경을 읽다보면, 요한복음 20:22의 성령 불어내심(A)과 사도행전 2:17에 나오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B)을 두고서 어떤 차이가 있느냐고 궁금해 하기 마련이다.

우선 몇 가지 선행 연구들을 간략히 살펴보면,

1. A는 교회의 기초인 사도들에게 내린 성령의 선물로써 개인적으로 임한 것이다. 신자의 내면에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보혜사적 역할이 강하다. 이 점에서 요한복음의 성령은 개인적이며 정적이고 내재적이다. 이러한 부활절의 성령 주심은 활동적이라기 보다는 잠정적이었다. 즉 하나님의 때(오순절을 가리킴)를 기다려야 했다. B는 전체교회에 내린 성령의 선물로, 공적으로 강림하셔서 성령의 역사적인 임재를 대중에게 확인시킨 사건이었고, 선교를 목적으로 한 외형적이고 은사적인 성격을 강하게 지닌 것이었다.
A는 소생시키는 은혜를 가져왔고 B는 능력부여의 은혜를 가져왔다.
양자의 관계는 “단계” 원리 측면에서 이해되어져야 하는데, 이는 성령의 선물이 오순절이라는 단회적 사건을 통해 한꺼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부활절-오순절로 이어지는 단계를 통하여 주어진 것이다. 이러한 정황을 보건대, A와 B의 성령 역사는 같은 게 아니다. 오순절 전에는 구원사역이 시간적 간격을 두고 일어나는 구원사적 단계가 있었으나 오순절 후에는 이 모든 사건들이 동시에 우리에게 나타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 표준은 A가 아니라 B이다.

**참고 문헌**
김유미(1995). 성령강림의 시기에 관한 연구-요한복음 20:22과 행 2장을 중심으로-.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신학석사학위논문.

2. A는 B에 대한 요한적 해석도 아니고, 요한복음 군데군데에서 약속하신 성령 강림 예언의 약속에 대한 성취도 아니다. A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당신의 부활 후 당신을 대신하실 성령님의 특수 활동이나 임무 - 그리스도의 사역 계승자로서의 교회(제자들)에 그 자격을 부여함. (죄를 사해주는 그리스도를 증거함을 통해 행사되는) 사죄권을 교회에 부여하기 위함 - 에 강조를 두고 있다.
A는 B에 대하여 예변적, 예상적 말씀이다. 이는 A가 B에 대한 예표적 언급으로서, 마치 예수님께서 부활하여 육체로 돌아와 그의 제자들과 일시적으로 함께 계신 것이 그의 영적 귀환으로 “영원히” 제자들과 거처를 함께 하실 것(요 14:16)에 대한 예상적, 예표적 행동이었던 것과 같다.
교회(제자들)에 증거적 사명을 위한 궁극적이고도 강력한 힘을 제공하시는 분은 ‘생명수여자이며 성령수여자이신 부활하신 그리스도시다. 교회(제자들)가 그리스도 부활의 진리를 확신하는 기초위에 서 있다는 사실은 교회(제자들)의 증거적 생활에 있어 대전환점이 된다. 따라서, λαβετε πνευμα αγιον(성령 받으라)는 말씀으로 성령의 새시대가 이제 도래한 것이다.

**참고 문헌**
이승미(1985). 요한복음 20:22의 λαβετε πνευμα αγιον 해석. 고신대학 논문집 제3집.

3. 오순절을 전후로 하여 성령께서 구원의 은혜를 사람들에게 주신 것을 두고서 카이퍼는 B와 비교하여 하늘에서 내리는 비로 설명한다.
하늘에서 단비가 내렸다. 그 빗물을 사람이 받아 갈등이 일어날 때 목을 축이기 위해 간직한다. 그러나 간직하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각자가 따로 받아 간직한다. 다른 하나는 아주 다른 방법인데, 현재 도시에서 하고 있는 것처럼 공동수도 시설을 하게 되면, 개인은 물통이 필요가 없다. 다만 수도꼭지를 틀기만 하면, 각자가 원하는 대로 물이 나온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구원의 은혜가 몇 방울의 빗물처럼 성령께서 부드럽게 뿌리셨고, 꼭 같은 방법으로 각자가 자신을 위해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단순히 모은 것에 불과하다. 이런 것이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계속된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한 변화가 생긴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 자신의 인격 안에서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성령님의 충만한 흐름을 준비하시고, 그와 상관된 모든 성도들이 신앙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연관되게 하셨으며, 그의 승천 이후에는 이와 연관된 성도는 온전해졌고, 그가 성령을 아버지께로부터 받아서, 최후의 장애물이 제거되고, 성령의 충만한 흐름이 신자들의 각 심령 속에 통로를 통해서 밀려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 전에는 각자가 자신을 위해서 고립적으로 노력하여 성령의 은혜를 받았으나, 이제는 그들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 아래 에 있는 모든 지체된 자들은 유기적 연합이 되었으니, 이것이 오순절 이전과 이후의 차이이다. 그러므로, 오순절에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로부터 그의 몸의 지체된 우리들에게 성령은 부어진 것이다.

**참고 문헌**
류동현(1998). A.Kuyper의 성령사역과 오순절성령강림.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신학석사학위논문.

4. A는 B와의 연관 속에서 오랫동안 많은 논쟁을 일으킨 신약의 어려운 문제중 하나이다. 이 구절의 해석에 대한 주된 견해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요약이 가능하다.
첫째, 공적으로 성령의 강림은 오순절이었으나 이 날 제자들이 성령을 부여받았다는 해석이다. Calvin은, 성령은 예수의 은혜와 함께 뿌려진 것이지 B와 같이 충만한 능력과 함께 넘쳐 흘러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즉, 성령이 주어졌지만 아직 넘쳐흐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Turner는 성령께서 두 번 오신 것이되, 그 성격은 다르다고 본다. 즉, A의 경우 요 17:17-19의 성취와 보충으로 주어진 것이고, B의 경우 보혜사 성령에 대한 약속의 성취라고 본다.
둘째, A는 B에서 주어질 성령에 대한 상징적인 약속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요한복음에서의 성령 오심에 대한 약속은 예수의 영광과 관련이 있고, 이 영광은 예수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A의 성령은 의도된 선물이었다고 본다. 혹자는 A를 ‘요한의 오순절’로 이해하면서 부활절과 오순절을 구별하는 것은 요한 신학 - 요한복음서를 통하여 예수의 죽음, 부활, 승천을 근본적으로 하나로 제시함 - 과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요한이 동일한 사건을 다른 관점에서 기술한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즉, A와 B는 동일 사건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수혜자가 다르다는 점, 시간적, 공간적 차이점, 제자들이 계속 성령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점 등등으로 미루어볼 때 이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셋째, Gaffin의 견해에 따르면, 요한복음은 교회의 기초인 사도들에게 성령이 임함을 기술하고 있고, 사도행전은 교회 전체에 성령이 임함을 기술하고 있다고 묘사한다. 이에 따르면 성령은 단계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이렇듯 부활의 날과 오순절에 걸쳐서 단계적으로 주어진 것이기에, A는 B의 첫열매라 할 수 있다. 또한, A는 선교의 문맥 속에서 제자들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부활하신 예수는 제자들에게 사역을 위임하시면서 그들의 사역을 준비시키기 위해 성령을 부여하신 것이다. 이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의 선취적 의미를 갖고 있으며 성령의 부여로 제자들은 오순절을 기다리며 주님의 사역을 맡은 자들로서의 사역을 계속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것이다.

**참고 문헌**
노재관(2002). 칼빈논단.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성령. 칼빈대학교.


위의 선행 연구들을 얼마든지(?) 참고로 할 수도 있다. 그러나, A와 B의 차이에 대한 이해를 통해 성령 주심과 성령 강림의 문제를 포함하여 평소 성경을 읽으면서 품어왔던 몇 가지 의문들은 ‘예수님의 주되심’, ‘성령’, ‘언약’, ‘십자가’, ‘종말’ 등을 포괄적으로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하였다.

A와 B의 차이에 대하여 이해하기에  앞서, 통상적으로 알려진 바, ‘오순절 성령 강림 = 교회의 시작’이라는 도식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여 왔다. 그러나, A에서만 보더라도, B 이전에도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이 임하셨다는 사실 자체가 기존의 우리의 선입관과는 다른 각도로 성경을 대하게 한다(일단 논의를 위하여 구약시대와 오순절 이후의 성령 임하심의 수많은 사례들은 배제하기로 한다).
또 한 가지,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는 교회가 없었단 말인가? 스데반의 설교에서 볼 수 있듯이, 구약시대의 유태인 종교 공동체를 두고서 ‘광야 교회’라 불렀었다(행 7:38). 교회를 가리키는 ‘ekkle?sia’라는 단어는 교회에만 사용된 게 아님을 그리스어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에베소에서 있었던 아데미 은감실 세공업자들의 소요 사태와 관련하여 등장하는 ‘민회’라는 단어도 ‘ekkle?sia’이다(행 19:39). 이렇듯, 성경해석에 있어서 늘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방법들 가운데 하나가 어학적 접근이다. 교회를 결정짓는 기준은 용어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주되심 내지는 거기에 담긴 신구약에 흐르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결정되어져야 한다.
의문점의 대상은 이외에도 많다. 몇 가지 예를 더 들어보고자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십자가 사건이 있기 전에도 예수님께서 멀쩡하게 살아계시면서(!)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포하고 다니셨다는 점이다(본인이 원하지도 않았음에도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하신 사례). 또한, 부활 사건이 있기도 전에, 더욱이 예수님께서 채 죽으시기도 전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선포하시면서 죽은 사람들을 살리고 다니셨다는 점이다(대표적인 사례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나서 나사로를 살리신 사례). 이러한 모습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희생 제물로서의) 죽으심과 상관없이 죄사함을 베푸실 수 있는 권한과 더불어, 자신의 부활과 상관없이도 부활의 능력을 베푸실 수 있는 권한이 있으심을 보여주신 사례들이다. 이는, 죽지 않으시고도, 부활하지 않으시고도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완수하실 수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러한 권한들 - 사죄권, 생명권 - 을 지니셨음을 보여주신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성취하실 진정한 주님이심을 ‘미리(인간들이 이해하는 시간적 표현으로는)’ 보여주신 것이라는 말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내가 그리스도라고 하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가(설령 살아났다 해도) 정작 그러한 권한을 (공생애를 통해) 보여주시고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말이다.
앞의 선행 연구들에서 신학자들이 ‘예표적’, ‘예상적’, ‘예변적’, ‘선취적’이라는 용어들을 사용하였는데, 이러한 용어들을 차용하여 굳이 시간적으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다.
1) 예수님이 죽으시기 전에도 죄사함 받은 사람들은 십자가의 공로로 죄사함 받을 보편적인 성도들을 예표한 것이요,
2)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에도 나사로와 같이 죽었다가 살아난 사례들은 앞으로 죽었다가 부활하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 안에서 영생을 얻고 함께 부활에 참여하게 될 보편적인 성도들을 예표하는 것이요,
3) 요 20:22의 성령 불어내심은 행 2장의 오순절 성령 강림에 앞서 교회(엄밀히 말하면 ‘신약교회’)의 대표격인 사도들을 대상으로 하여 앞으로 보편적으로 성도들에게 임하실 성령강림을 예표적으로 보여주신 실제 사건이며,
4) 구약시대의 특정 민족 집단인 유태인 공동체를 가리켜 ‘광야 교회’라고 부른 것은 장차 도래할 보편적, 세계적(우주적) 교회로서의 신약 교회를 예표적으로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등등...

그런데, 왜 굳이 우리가 느끼기기에 ‘시간차’로 다가오는 ‘예표-성취’의 단계(?)로 섭리해 나가시는 것일까? 이 점에 대하여 나는 ‘선취’ 혹은 ‘예표’라는 것이 오히려 시간적(순차적) 단계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순차적 단계를 뒤엎는 것이라 이해하고 싶다. 이 말은 예수님의 행적에 포함된 일련의 행위들이 사건들에 대한 인간의 보편적인 시간 의식-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를 향해 진행하는 - 을 뒤엎는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시간 의식에 비춰보면 ‘예표-성취’는 ‘맛보기-개시’의 의미로 다가오기 십상이다. 이것은 사건 자체에 의미를 두는 인간 본연의 의식적 활동의 결과이지, 사건 주체(예수님)에서 비롯되는 게 아님을 드러낸다. 이렇듯, 인간의 시간 의식을 뒤엎는 것을 핵심적으로 표현한 개념이 바로 ‘종말’이라는 것이다. ‘종말’의 의미는 실로 의미심장하다. 기존의 시간 의식에 오류가 있다면, 시간 의식 속에서 인간 세계가 벌여온 모든 것들도 문제가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나는 다음 인용글을 통하여 ‘종말’의 의미를 새겨보고자 하였다.
---------------------------------------------------------인용글---------------------------------------------------------------
[re] 다시 질문드립니다. 
이근호   2006-08-18 20:13:26, 조회 : 25, 추천 : 0

예수님의 하신 일의 취지는 인간 세계의 시간 인식 순서에 의해서 정립되지 않습니다. 즉 "이것 다음에 이것 하시고 이것 다음에 저것 하시고..."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우리 인간들은은 시간적인 순서를 따라 인식 하고 싶어합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하신 일들이 인간들의 이해틀로서 해석이 가능한 일이 되고 맙니다. 여기에는 십자가 사건의 특창성이 빠져 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들의 이러한 인식의 틀까지 용인해주지 않고 파괴시키는 방식으로 작용합니다. 즉 인간들은 주님의 일을 이해가능한 지식으로  정립하여 소지하고 싶어합니다. (물론 자기 만의 지식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여기에 인간부정의 취지가 사라지고 인간긍정으로 마당이 되고 맙니다...(중략)...
종말이란 예수님께서 구상한 상황이 실제로 적용되는 와중에서 더이상 '시간적 지연'이 불 필요해져 버린 상황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서 1:2의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활동을 개시한 그 상황입니다. 이 '상황'을 자꾸만 '시점'으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이는 여전히 인간들의 본성적인 순서적 인식틀을 망가트리고 싶지 않겠다는 본능적 반발에 해당됩니다. 예수님과 하나됨 영적 공간성, 그 외부가 다 종말입니다. 이 종말상태에서는...(중략)...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일하심을 증거하고 고백하는 식으로 가르쳐야 합니다...(중략)...성령님은, 성도들이 성령님 자체의 능력을 증거하라고 임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십자가 공로만 드높이라고 일하시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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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이라는 단어를 놓고서 나는 ‘끝장’이라 이해하고 싶다. 굳이 ‘시간’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때, 종말은 시간의 끝이다. 시간이 끝장나버렸다는 말이다. 흘러가는 시간을 아무도 막을 수 없는데, 시간이 어디서 끝장 나버렸다는 것인가? ‘예수님 안’에서 그러하다.
척 스미스(‘세대주의’라는 종교 사기극단의 일원)는 자신의 계시록 강해에서 사도 요한이 ‘시간의 방’으로 이끌려 가서 미래에 펼쳐질 사변들을 미리 보고 기록하였다고 했는데, 굳이 표현하자면, 나는 ‘예수님 안’에서 ‘시간이 멈춰버렸다’고 말하고 싶다. 보다 엄밀히 말한다면, ‘인간의 시간 의식(보다 광범위하게 말하자면 인간의 역사의식)이 복음 안에서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시간이 끝장나버렸다’는 것은 그 시간이라는 것을 논의해왔던 인간들의 시간 의식도 더 이상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놓고서 시간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아담의 자손들은 그 모든 사변들을 순차적으로 이해하려 든다. 예컨대, 구원이라는 것을 놓고서 ‘예정선택-소명-중생-회심-믿음-칭의-양자-성화-영화’라는 식의 무의미한 순차적 나열에서 볼 수 있듯이 말이다.
(무엇이 끝장났다는 말인가? 인간 세계가 끝장 나버렸다는 것이다. 아담의 세계, 인간 사회의 의식과 그 의미, 아담 세계의 정신, 그 역사성 등이 총체적으로 종말을 맞이했다는 말이다. 물리적 종말은 굳이 표현하자면 ‘시간적’으로 분명히 있지만, 십자가 사건은 이미 아담 세계, 곧 역사 세계에 대한 종말을 결정적으로 선언하신 것이다.)

인간의 의식이 시간에 지배된다, 달리 말해 인간이 시간 의식에 매여 있다는 것은 인간, 즉 아담의 세계가 시간 의식 속에 놓여 있다는 말과 같다. 아담의 세계는 동산에서 추방당할 때부터 노동이라는 저주받은 운명 속에 살아가도록 결정되어졌다(여기서 타락한 인간의 저주받은 노동 원리와 하나님의 노동하심을 연관짓지 말라). 종교에 대해서도 이러한 원리는 똑같이 작용한다. 왜? 종교는 아담 세계의 구색 갖추기에 동원되는 필수품 중의 필수품이기에.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성경이라는 종교적 경전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변들에 대해서 본연의 인간의 시간 의식으로 정리하려 애쓰는 것도 알고 보면 아담 세계 정신(의식)의 발로다.
나는 (굳이 신학자들이 표현한 바) ‘예표적’, ‘예상적’, ‘예변적’, ‘선취적’ 행적들이 예수님 자신의 주되심을 드러내시는 것이라 본다. 이러한 주되심을 드러내는 행위들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특정 시점에만 국한되어야 함을 뛰어넘어 말 그대로 선취적으로 작용하는데, 이것은 소위 말하는 ‘이미-아직 아니’라는 영적, 건설적 긴장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건전한 종말적  삶을 살아가도록 하려는 성경신학자나 기독교 윤리학자들의 입장에 우선적 역점을 두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아담 세계의 역사적 진행은 묵시 세계의 원리에 비춰볼 때 의미가 없다는 선언적인 말이다. 말 그대로 끝장나버린 것이다. 예수님의 주되심 속에는 주님으로서의 권한 속에 종말적 섭리가 담겨 있다. 언약은 아담 세계에 종말을 몰고 왔다.
부활절 이후의 성령 주심 또는 오순절의 성령 강림 사건 등과 같은 사안들도 반드시 예수님의 주되심이 띠는 성격과 관련하여 이해해야한다는 주장은 흔히 성령론은 기독론적으로 풀어가야 한다는 신학적 진술을 달리 표현한 것이라 하겠지만, 정작 그것이 아담 세계에 던져주는 바는 의미심장하다.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오시면 죄, 의,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실 것이라 말씀하셨다(요 16:8-11). 성령의 역할은 오직 예수님의 것을 가지고 성도들에게 알리시는 것이라 하셨다(요 16:14). 그런데, 그러한 사안들은 (여태까지의 것들이 아니라) ‘장래 일’이라는 것이다(요 16:13). 정리하면, 성령께서 성도들에게 알려주시는 ‘장래의 일’이란 어디까지나 예수님과 관련된 것인데, 그 내용물은 죄, 의, 심판에 대한 내용이라는 것이다.

우선, '장래'라는 말로 미루어 보아, 기존의 것, 여태까지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는, 인간의 의식에 비추어 이러하다 저러하다는 식으로 여겨져 오던 것, 생각해 오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즉, 아담의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죄, 의, 심판에 대한 내용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전혀 다른 각도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죄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다. 인간의 통념상 적법하지 못한 것, 반인륜적인 것들이 죄로 여겨지는 법인데도 예수님께서는 죄임, 죄 아님의 기준 한가운데에다 예수님 자신을 꽂아버리셨다.

의란, 더 이상 예수님을 뵙지 못하는 것이라 하셨다. 기존의 ‘의’ 개념이란 인간의 자기 정당화이다. 인간은 어떨 때 자신을 정당화하는가? 자신의 행위와 관련짓지 않을 수 없다. 사회적 관계 측면에서든, 심지어 신 앞에서든 간에 특히 자신의 언행심사가 떳떳하다 싶은 부분에서는 당당한 게 인간의 의식이다. 그러나, ‘의’에 대하여 내리시는 예수님의 개념정의는 다르다.
본문은 다르지만, 요20:22과 이어지는 문맥 끝에서 도마의 의심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고 말씀하셨다. 성경은 믿음으로써만 의롭다 인정하심을 받는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뵙지 못한 상태에서 믿음으로써 의롭다 인정함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바로 성령이 오셔서 하시게 될 일, 즉 ‘장래 일’, 달리 말해, 아담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 예수님의 구속 사역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순절 이전에도 능히 성령을 베푸실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은 이러한 일들을 가능케 하시는 성령이 오직 예수님으로부터만 나오신다는 것을 확인시키려는데 있다.

심판이란, 이 세상 임금이 심판 받았다는 것이다. 아담 세계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요, 하나님의 심판은 아담 세상의 임금인 악마가 심판받았다는 말이다.

보라. 이 모든 개념들 - 죄, 의, 심판 - 이 아담 세계와의 단절, 아담 세계에 대한 심판, 아담 세계에 속한 기존의 통념 내지는 의식에 비춰 논해왔던 내용들과 단절됨을 확인할 수 있지 않는가. 이것은 그야말로 ‘종말’적 의미를 띠는 것이다. 이러한 아담 세계(의 정신, 의식)에 대한 ‘종말’은 어디가서 결정적으로 성취되는가. ‘십자가’이다. 구약으로부터 전해져온 언약의 정신이 모두 이 ‘십자가’를 향하고 있다. 아담 세계의 종말을 십자가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아담 세계의 끝장나버림’은 영원한 예수님 나라의 전개와 동시에 이루어진다. 성령 주심 또는 성령 강림은 반드시 이러한 종말적 맥락 하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성령론적 사안들은 기독론적 중심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명제 하에, 이 글의 논점 - 성령 주심 또는 성령 강림과 관련된 차이점에 대한 이해 - 에 대하여 성경에 등장하는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을 두고서 순차적으로 그 관계를 풀이해 나가는 것은 아담의 세계의 정신, 곧 인간의 시간 의식에 걸맞게 기존의 신학자들이 논의해 온 것이라 본다. 이에 대하여, ‘종말’이라는 개념은 예수님의 주되심, 아담 세계에 대한 심판, 묵시 세계, 성령님의 사역을 언약적 차원에서 포괄적으로 접근하게 한다.
성령 주심 또는 성령 강림의 차이성에 대한 이해도 바로 이러한 ‘종말’의 주도권이 예수님께 있으며, 이러한 예수님의 ‘종말’의 주도권은 구속과 심판이라는 언약적 섭리 -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예수님께만 사죄권과 심판권이 주어져 있다고 말씀하셨다. 마 9:6, 요 5:27 - 의 전개의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계 1:18)”라고 말씀하셨었다.
전에 죽으셨던 예수님...즉,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영원히 살아계시면서 사망과 음부에 대하여 지니시게 되신 권한으로 이어진다. 앞서 ‘종말’은 ‘십자가’와 연관되어 있다고 했는데, 이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말한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아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성격을 띤다. 동시에 아담 세계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인자를 죽임으로 그 본색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사망과 음부는 무엇인가? 천국에 대한 것이 아니다. 사망과 음부는 어디까지나 아담의 세계를 겨냥한 것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이 ‘종말’에 대한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사망과 음부는 아담 세계의 파멸이요, 종말이다. 즉, 예수님께서 지니신 사망과 음부의 열쇠(권한)는 곧 예수님께서 지니신 바, 아담 세계에 대한 종말(심판)의 권한을 뜻한다.
예수님께서 이 아담의 세계에 오셨을 때 어둠의 세계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죽여 버리고 말았다. 빛과 어둠은 양립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대결 관계에 놓여 있다. 그러한 대립의 절정이 또한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이제 예수님을 죽인 아담 세계를 겨냥하고, 그리하여 아담의 세계는 하나님의 전쟁의 대상으로서 판정받았음이 드러났다.

(히 12:27-28)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성령님께서 오셔서 죄, 의, 심판에 대하여 예수님의 것만 말씀하신다는 것은, 아담 세계의 죄, 의, 심판에 대한 의식을 철저히 부숴버린다는 말이기도 하다. 진동치 못할 나라에 대하여 이 진동하고(겔 31:16) 요동치며(시 65:7) 소동하는(사 17:12) 세계의 의식을 거부하고 심판하여 거짓되다 판정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는데(요 7:7), 이러한 예수님의 의식(정신)을 성령님께서 그대로 자기 백성들에게 알리실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을 알게 된 백성들, 즉 성도들은 이 아담 세계 안에서 가인과 아벨처럼 대결 관계에 놓이게 될 수밖에 없다. 히 11장에 언급된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통념상 ‘종말’을 ‘시간의 끝’에 해당하는 어떤 정점(특정 시점)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쥐고 계신다. ‘죽음과 지옥의 권세’를 예수님께서 쥐고 흔드신다는 말은 ‘종말’이 시간 의식을 넘어 예수님의 인격, 예수님의 주되심, 언약 성취자로서의 십자가의 예수님께 속한 것임을 말한다.
‘종말’이 시간의 끝이라고 여기는 의식은 그 특정 시점으로서의 ‘종말’ 이전의 시간의 선형적 흐름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예수님 = 종말에 대한 권한 소유자’라는 의식에 비춰보면, 이미 기존의 인간들의 시간 의식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성령 주심과 성령 강림의 차이점을 시간적 간격을 바탕으로 하여 공간적 차이, 수여 대상의 차이, 선교적 관점에서의 차이...등으로 논하는 잡다한 논의들도 ‘종말’의 개념 틀 안에서 다시금 논의되어져야 할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 받으라 하신 것은 이 아담의 세계가 이미 “끝을 맞이했다(끝장났다)”는 것이요(아담의 의식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종말의 대상이 됨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성도에게는 “끝을 기억하라”는 말씀이다. 다시 말하지만, 부활절의 성령 주심과 오순절 성령강림의 차이점 이해에 대한 문제도 이러한 맥락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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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아, 드디어 수련장에 도착했네...어, 이제 강의 끝나고 물놀이 할 시간이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음, 풀장이 어디지. 아, 그 전에 몸부터 씻고 들어가야지. 씻는 곳이 어딨나? 아, 여기군. 그런데, 왜 이리 샤워기 물줄기가 가늘어...
B: ^^ 집사님, 조금만 참으세요. 조금 있으면 풀장에 풍덩하고 시원하게 몸 전체를 담글 수 있을테니까...어, 꼬마야, 안 씻고 풀장에 먼저 들어가면 어떡하냐, 하여튼...애들은 저렇다니까...어쨌든 보기 좋네요. 아이들이 마냥 즐거워하니...^^
A: 아, 마침 저기 풀장 주인이 오시는구만...사장님~ 사장님 맞으시죠?
C: 아 네, 제가 수련장 관리를 맡고 있는 ‘김상식’입니다. 무슨 일이라도...
A: 여기 샤워 시설이 좀 그렇네요. 물줄기가 빡세게 안나오는 거 같던데...풀장 관리하시면서 이런 우선적인 것에 신경 좀 써주셨으면 하는데요...
C: 에? 샤워 시설에 문제가 있던가요? 음, 그럼 풀장은 별 문제 없던가요? 그래도 저희 시설은 이 부근에서 유일한데다 그간 다녀가셨던 분들도 물 좋다 그러시고, 다른 별 말씀을 안 하셔서...실은 샤워장의 물도 풀장과 마찬가지로 ‘같은 곳’에서 끌어오거든요. 어쨌든...제가 이곳 주인이니 속히 점검해 보고 업자 불러서 조치하겠습니다.

김상식 씨...그는 분명히 이렇게 말했다. “제가 수련장 관리를 맡고 있는...” 그는 샤워장과 풀장 모두를 맡고 있다. 이용자들의 만족도와는 상관없이. 샤워장이든 풀장이든 그의 책임 하에 놓여 있다. 일부 꼬마들과는 달리 성숙한(?) 이용자들은 순차적인 수칙(?)을 지킬는지 모르겠지만...그러나 세 가지만은 기억하자. 하나는 수련장 ‘전체’를 관리하는 주인의 입장이요, 다른 하나는 순서에 아랑곳없이 물로 뛰어들어 마냥 좋아하는 아이들의 모습.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샤워장의 물이든 풀장 물이든 그 수원은 똑같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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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랑하라에 대해서... 
손무성  (Homepage)  2006-08-23 00:59:39, 조회 : 208, 추천 : 0

복음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사랑'이 넘치기를 바라면서 글을 퍼 올려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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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이 우리교회 홈에 하신  질문을 퍼 왔습니다.

질문:
목사님께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과 보통 교회에서 들을 수 있는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과 어떤 차이가 있는 지요?


이근호목사 답변:
서로 사랑하라에 대해서... 

복음 안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겁니다.

자기를 부인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무슨 목적을 가지고 사랑하게 되면 복음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사랑함을 알아도"가 됩니다.

예를 들면,

목사님이 열심히 성도 한 사람에게 정성을 쏟아 사랑했는데

그 사람이 덜렁 옆의 교회로 옮겼을 때,

평소에 그 목사의 사랑에 무슨 목적이 없으면, 비록 옆의 교회가도 계속 사랑할 겁니다.

하지만

그 목사의 평소 사랑에 무슨 목적이 있었던 사랑이라면

자기 곁을 떠난 그 교인에 대해서 증오의 마음을 품게 될 것입니다.

즉 그동안 그 사람에게 퍼부은 자기 노동과 정성과 수고를 묵사발로 만든 그 사람에 대해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겠지요.

복수, 오직 복수심만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상태에서 '서로 사랑했다'고 우기는 사람들의 자기 의로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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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서로 사랑하라에 대해서... 
김성수   2006-08-24 08:18:27, 조회 : 150, 추천 : 0

그런 자기를 부인하는 사랑은 어떻게 나오는 것입니까?
나오기는 나오게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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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랑하라에 대해서... 
손무성  (Homepage)  2006-08-23 00:59:39, 조회 : 209, 추천 : 0

[re] 서로 사랑하라에 대해서... 
오용익   2006-08-24 14:15:16, 조회 : 144, 추천 : 0

손목사님의 취지를 저는 이렇게 이해합니다.

복음을 이용해서 역사위에 인간의 영광을 세우는 일을 일삼는 자들의 신앙의 내용인즉

"인간의 행함(책임성)이 어떤식으로든 하나님의 일에 개입하는 식"이어야 한다는 것인데,

인간의 행함의식 속에는 "그냥 놔둬 알아서 하게"(자율성) 라는 것도 도사린다는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손목사님의 취지란,

"바로 이런 육적 사고방식을 다 공박하면서 다가오는 충만한 죄용서의 복음을 증거하지 않고서는 견딜수 없는데,

왜냐하면 복음안의 세계란

이미 충만이어서 아무도 못말리도록(인간의 그 어떤 행함조차 저항할수 없도록, 아예 죽은것으로 처리하면서)

그 충만이 흘러 넘치는 식으로 이 지상에 펼쳐질수 밖에 없다"

라는 뜻으로 저는 이해합니다(엡 1: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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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서로 사랑하라에 대해서... 
손무성  (Homepage)  2006-08-24 15:00:14, 조회 : 157, 추천 : 0

네 그렇습니다.
복음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넘쳐남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 속에 넘쳐나는 것을 우려할 필요도 없고 넘처 나서는 안된다는 식으로 방종한 모습으로 있어서도 안된다는 취지입니다. 성령의 활동으로 넘치는 것을 인간의 행위로 간주하려 하지 말고,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의 분명한 취지는 구원과 구원 이루신 분의 은혜위에 인간의 행함(육적인)이라는 책임이 가미되어 하나님께 영광되게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다윗이 역대상 21장에서 이스라엘의 군사될 만한 자들을 계수하여 이스라엘의 구원을 인간의 수(육체)로 관리에 들어가게 된 것이 화근이 되어 온역 3일간을 격고 7만명의 사람들이 죽은 것이 이를 경고로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육체의 행위로 간주되는 것으로 구원을 관리하겠다, 교회를 교회 되게 하자는 것에 대해 저는 단호히 거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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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 글] '영적 리더십'은 없다(1)~(2) 
이준   2006-08-23 19:47:22, 조회 : 108, 추천 : 0

**출처 : 코리아 위클리
**바로가기 주소 :
http://www.koreaweeklyfl.com/news/cms_view_article.php?aid=4491&start=0
http://www.koreaweeklyfl.com/news/cms_view_article.php?aid=4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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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창] '영적 리더십'은 없다 (1) 
교인들의 행동과 의식 전반을 장악하고 있는 무소불위의 세속적 리더십

한참 지난 일이지만 나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행정학과 경영학을 배웠다. 행정학의 기초는 조직관리다. 그 조직을 관리하기 위한 필수적인 방법이 바로 리더십이다. 경영학에서도 리더십을 다룬다. 접근 방향은 다르지만 어떻게 하면 사람을 효율적으로 움직여 조직에 도움이 되게 하느냐는 리더십의 원리는 동일하다.

행정학-경영학 리더십 이론이 '영적 리더십'으로

그렇게 리더십을 배우고 다시 신학교에 들어갔는데, 신학교 과목 중에도 리더십이 있었다. 과목 이름은 리더십인데 실제로는 그 앞에 한마디가 더 붙었다. '영적' 리더십.

그런데 과목을 들으며 놀라게 된 것은 그 영적 리더십이란 과목에 기초가 되어야 할 것은 분명 예수님의 리더십인데 그 예수님의 리더십은 겉껍질뿐이고 실질적으로 그 속을 꽉 채우고 있는 것은 바로 세상에서 배웠던 리더십이었다. 행정학과 경영학에서 배웠던 리더십 이론들이 신학책에서는 마치 저자들의 독창적인 이론인 양 포장을 하고 나타나고 있었다. 인간의 조직을 관리하기 위하여 쓰이던 이론들이 어느새 교회에서 영적인 면을 관장하는 도구로 둔갑하고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지금 교회 주변에서 펼쳐지는 리더십 세미나에서는 행정학에서 쓰이는 리더십 이론을 누가 먼저 예수라는 이름으로 바꿔놓느냐, 열거되는 각종 사례들을 어느 누가 멋지고, 감쪽같이 성경구절로 바꿔놓느냐 하는 경쟁을 하는 것 같다.

분명한 것은 그러한 세속적인 리더십은 예수님이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리더십을 빌려오게 된다면 영적 리더십이 세속화될 뿐만 아니라, 결국 예수님의 섬김 을 리더십 이란 미명하에 훼손시키고 만다.

예수님의 리더십은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앞에서서 사람을 리드하여 조직을 융성하게 하는 리더십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만드신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 으로 섬기는 리더십이다. 그래서 그 리더십은 사람을 리드하지 않는다. 다만 섬길 뿐이다. 그래서 나는 영적 리더십'과 리더십'이란 용어가 교회에서 쓰이는 것을 반대한다. 아니 용어뿐만 아니라, 예수님 앞에서 사람의 '영적 리더십' 자체가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교회에서 목회자는 '영적 리더십'으로 교인들을 리드해가는 것이 아니다. 함께 손잡고 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섬김을 실천하면서 말이다.

확장일로의 리더십 영역

그런데 이 영적 리더십의 영역은 오늘날 점점 확장일로를 걷고 있다. 맨처음에는 순수한 영적 리더십 만을 다루던 영적 리더십이 이제는 교인들의 행동과 의식 전반을 커버하는, 더 나아가서 교회전반을 아우르는 무소불위의 도구로 등장하고 있다.

그래서 리더십이란 열차에 타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진 것 같고 목회에 무언가 부족한 것 같은 그러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름조차 애매한 수상쩍은 단체, 출신과 경력이 어딘지 모르는 수상쩍은 강사들, 그리고 전혀 수상하지 않는 강사들 까지 하는 리더십 세미나 광고는 계속해서 목회자들을 유혹하고 있다.

수상쩍은 강사든 수상쩍지 않은 강사든 요즈음 시행되는 리더십 세미나, 그리고 서점의 한 코너를 너끈히 꿰차고 앉은 영적 리더십 책들, 그 내용을 살짝 들여다보자.

맨 처음에는 경영학의 리더십 이론을 살짝 차용해서 영적 리더십에 사용하던 영적 리더십 주창자, 강사님들이 이제 그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아예 이제는 성경을 가지고 영적 리더십을 강의하는 시대는 지났다. 그중의 많은 분들은 아주 세상적(?)으로 성공한 성공학 강사로 나섰다. 그래서 교회안과 밖을 넘나들며 강의를 하다보니 리더십이란 말 앞에 조심스럽게 붙여져 있던 영적 이란 말도 어느새 없어져 버렸다. 아예 그 경계를 없애버려 책 판매량과 수강자의 대상을 늘이려고 하는 것일까? 아니면 내용이 도저히 영적이라는 말을 넣기에 부끄럽기 때문일까?

이제는 그런 강사 목사님들이 세상 학문인 경영학 속에서의 리더십 이론과 리더십 학자들의 이름을 교회 안팎에서 줄줄 읊어댄다. 성도들 중에 학교에서 행정학 혹은 경영학을 배운 사람들의 수가 얼마나 되겠는가? 대다수교인들은 그런 말과 이름을 처음 들었을 것이니 그저 신기하게 들릴 수밖에.

제발 '영적'이라는 단어를 떼 주었으면...

앞으로 예상되는 것은 리더십 강사들의 큰 폭으로의 영역확장이다. 어디로 영적 리더십의 영역을 확장시켜 나갈것인가?

첫번째 생각되는 것은 그분들이 이제 완전히 성공학 장사로 나서는 경우이다. 이제 그 내용을 웬만큼 알 사람들은 다 알고 있으니 굳이 영적 이 아니라는 것을 감출 필요가 없다. 그래서 성공이라는 말을 가져다 강의 제목이나 책 제목에 과감히 붙일 수 있는 것이다. <예수라는 성공의 물감으로 실패를 지워버려라>는 설교제목을 본 적도 있다.

이런 성공학 강의로 벌써 스타(?) 강사 목사님이 나왔다 한다. 이렇게 나선 분들이 앞으로 쓰실 책들의 제목으로는 이런 것들이 예상된다. 책 제목에 성공 과 예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당신의 성공을 원하신다>, <실패한 인생이 예수 때문에 리더로 변했네>.

간절히 바라기는 리더십 앞에 붙어 있는 '영적' 이라는 말을 확실히 떼어 주기를 부탁한다. 내용 또한 영적이 아니라는 것을 강의 시작이나 책 서문에서 알려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바라기는 리더십 앞에 붙인 영적 이라는 말을 확실히 떼어 주기를 부탁한다. 내용 또한 영적이 아니라는 것을 강의 시작이나 책 서문에서 알려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차별화를 위한 영역 확장

성공학 장사로 나서지 않더라도 리더십 강사들은 서로 차별화를 해야만 명성이 유지되고 살아남을 수 있으니 자꾸만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여 선을 보일 것으로 예측된다. 또 리더십의 주입 대상도 자꾸 새로 만들어 내기 위해 애를 쓸 것이다.

가장 손쉬운 것은 아직 영적 리더십 책에 사용되지 않고 묻혀 있는 진주 같은 성경인물들이 많이 있는데 그런 인물들을 찾아내어 갈고 닦아 세상에 드러낼 것이다. 이때에는 누가 먼저 그런 사람들을 꺼내어 놓느냐가 관건이다. 그래서 그런 인물들이 다 떨어지게 되면 마리아의 남편 요셉도 언젠가 빛을 볼 때가 올 것이다. 마리아 남편 요셉의 <관용의 리더십>, 그 정도면 책 한권은 얼마든지 메울 수 있는 소재이니 말이다.

그 다음에는 성경속의 인물이 아닌 믿음의 본을 보인 사람들이 대상이 될 것이다. 빌리 그래함은 <빌리 그래함 리더십의 비밀>이란 책이 이미 나왔지만, 아직 나오지 않은 사람들이 무궁무진하다. <요한 웨슬레 리더십>, <윌리암 캐리 리더십>.

또 신앙소설 등 신앙을 토대로 하는 문학작품이라든지 간증집에서 뽑아내는 리더십 이론도 가능하다. <천로역정 리더십>, <하늘에 속한 리더십>, <갈대상자 리더십>.

유행어와 접목시키는 방법도 있다. 2%가 부족하다, 라는 말이 유행인데 이렇게 만들어보자. <당신에게 2% 부족한 리더십을 채워라> 꼭짓점 댄스가 유행이니 <꼭짓점 리더십>도 괜찮다.

요즈음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이며 무언가 내용이 있어 보이는 말인 패러다임 , 시너지 효과 , ‘EQ'도 있다. 그래서 <리더십의 패러다임을 바꿔라>, <시너지 효과 리더십>도 좋을 듯 하다.

또 이건 어떨까? <목적이 이끄는 리더십>, 너무 속 보이는 제목인가? / 오세용 목사 (에반스빌 제자침례교회) (다음호에 계속)
  
올려짐: 2006년 8월 15일, 화 2:56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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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창] '영적 리더십'은 없다 (2) 
"으뜸이 되려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라"에 대한 오해

리더십을 주창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리더십의 성경적 근거는 어디일까? 그 근거는 마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그 중에서도 43절과 44절의 말씀이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막 10:43~44)

또 마가복음 9장 35절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명성훈 목사는 그의 책 <성경 속의 리더십 마스터키>에서 마가복음 10장 43~44절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지도자가 되고 싶은 열망은 지극히 좋은 것이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성서적이다. 주님께서도 그것을 인정하셨다.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 ,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 라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크고자 하는 마음이나 으뜸이 되고자 하는 마음 그 자체가 잘못이 아니라는 말이다. 얼마든지 크고 으뜸이 되라는 것이다. 문제는 그 방법이 좋아야 하고 올바른 것이어야 한다. 성경의 방법은 세상과 정반대이다.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의 리더십은 세상의 리더십과 정반대의 방법론을 가르칠 때가 많다. 하나님나라는 거꾸로 왕국(the upside- down kingdom) 이다." (<성경 속의 리더십 마스터키, 39쪽)

과연 위의 해석대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세상 사람들보다 '큰 사람'이 되라고 하셨을까? '으뜸'이 되라고 하셨을까? 지도자가 되려는 열망을 갖는 것이 과연 명 목사의 말대로 성경적일까?

명 목사가 인용한 성경말씀 마가복음 10장 43~44절 두 절만 놓고 보면 마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으뜸이 되라 하셨고 첫째가 되라 하신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첫째가 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섬김을 강조하고 계신 것 처럼 들린다.

주님은 우리 모두 리더가 되기를 원하시는가?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에게 와서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라고 청하니 예수님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라고 물으신다. 그런데 이때 상상치 못한 엉뚱한 요청이 그들로부터 나왔다.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우편에 하느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께선 이들의 요청을 받기 바로 직전에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죽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 말씀을 하실 때에 과연 제자들은 어떤 의미로 받아 들였기에 그 말이 끝나고 나자 야고보와 요한이 와서 이같은 요청을 하게 되었을까?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가서 돌아가시겠다는 말을 전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예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실 때에도 그들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누가 첫째가 되는가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했던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이에 앞서 '우리중에 누가 큰 자인가' 라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도 이미 충격을 받으셨고, 이에 대하여는 예수님은 딱 부러지게 짚고 넘어 가셨다.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막 9:35)

예수님이 앞서 이같은 말씀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야고보와 요한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우편 자리와 좌편 자리를 넘보고 있었으니 얼마나 기가 막히셨겠는가. 이윽고 한번 목을 가다듬으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하여 정색을 하고 말씀하신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이렇게 질문하신 것은 그들이 요청한 것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하심이었다. 그러나 멍청하기 이를 데 없는 두 제자는 아무런 생각 없이 불쑥 대답한다. 할 수 있나이다 . 이런 대답에 예수님은 너무 너무 안타까워서 이렇게 대답하신다.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조건 없이 섬기라

문제는 다음에 다시 일어났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에게 그러한 청을 했다는 소식을 들은 다른 제자들이 다시 분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다시 부르신다. 부르셔서 말씀하신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이 말이 무슨 말인가? 세상 권세 있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은 권세로 부리며 자기들 마음대로 몰아가지만은 너희는 그러지 말라는 말씀이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다 는 말이 다음 이어질 말의 전제가 된다. 해석의 방향이 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말을 다시 한 번 해석해 보자.

"너희들이 그렇게도 첫째가 되고 싶고, 으뜸이 되고 싶으냐? 그러냐? 그렇다면 그래 일등이 되어라. 첫째가 되어라. 으뜸이 되어라. 단, 남들보다 크고자 하는 자는 남을 섬겨야만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자, 그래도 너희가 첫째가 되고 싶고 으뜸이 되고 싶으냐? 어리석은 것들아, 정신 차려라.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일등이 되어서, 크게 되어서 섬김을 받으러 온 게 아니잖으냐? 도대체 몇 번이나 말해 주어야 알아듣겠느냐? 나는 다른 사람의 종이 되어서 섬기러 왔단 말이다. 다시 말해 줄까? 죽기 위해 왔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이 말씀 속에서 섬김을 말씀하셨지만 그 섬김은 제자들에게 으뜸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으로 언급하신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그 행간에 숨은 뜻을 살필 수 있어야 한다.

말씀 속에서 한 두 절을 쏙 골라내어 예수님이 우리더러 첫째가 되어도 좋다고 하셨다며 으뜸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해석은 과연 제대로 된 해석인가?

명 목사는 '얼마든지 크고 으뜸이 되라'는 것이다. 문제는 "그 방법이 좋아야 하고 올바른 것이어야 한다. 성경의 방법은 세상과 정반대이다" 라고 말한다.

과연 방법만 세상 것과 정반대로 하면 되는 것일까? 목적이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라면 아무리 방법을 세상 것과 반대로 한다 할지라도 이미 전제가 틀렸다. 목적 자체가 틀렸으니 아무리 방법이 다르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정말 하나님나라가 ‘거꾸로 왕국(the upside-down kingdom)’이라고 한다면, 방법만이 아니라 목적도, 목표도 세상 것과는 달라야 한다. 우리들이 지향해야 할 목표는 그냥 '섬김'이다. 지도자가 되기 위하여 하는 섬김은 지양해야 한다.

궁금한 게 하나 있다. 리더십 주창자들은, 리더 양성을 위하여 밤낮으로 수고하는 분들은 그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 마태복음에 있는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혹시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도자로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마 23:10)
  
올려짐: 2006년 8월 19일, 토 10:09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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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55편을 읽으면서 
이준   2006-08-29 13:07:06, 조회 : 107, 추천 : 1

시편을 읽을 때 오늘 읽었던 본문과 같은 경우, 다윗의 체험담에 그리스도가 투영되어 있다는 점에 입각하여 읽어야 한다고 본다. 성경은 근본적으로 예수님께 대한 이야기이다(요 5:39). 성경의 모든 내용을 예수님께만 끌어다갖다 붙인다고 해서 그게 바른 해석이냐, 그게 신앙이냐 라고 반문하는 세력들도 있는가 하면, 또 예수님이라는 이름하에 선포되는 악마적 메시지들도 있지만 말이다.

아담들에 관한 이야기만 늘어놓으려면 굳이 성경이 이 세상에 존재할 필요가 없었다고 본다. 성경에서 다루는 예수님의 섭리에는 아랑곳없이 겉으로 보기에 아담의 역사는 아담들에 의해서 잘도 지속되어 온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상담을 하려면 성경 없이도 상담 지침서들이 있고, 개별 혹은 집단 상담 과정들이 잘 준비되어 있다. 리더십을 갖추려면 잘 조직된 리더십 매뉴얼과 프로그램들이 산재해 있다. 건강을 위해서라면 굳이 과거 유태인들의 종교적 식단을 찾아 성경을 탐구하지 않아도 된다. 수많은 식이요법 전문가들과 그들의 조언들이 대기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언젠가 시 55편을 본문으로 한 설교 한편을 접한 적이 있다. 아들 내외가 있는 미국에 건너갔다가 인간적 소외만을 경험하고 다시 귀국한 어느 권사 이야기, 믿었던 친구가 자신의 아내와 함께 도피해버린 어느 남성 이야기...이 두 가지를 예화로 들면서 본문에 등장하는 바, 주변의 믿었던 자들로부터의 배신과 실망감을 어떻게 극복하고 치유할 것인가 라는 내용의 상담적 설교 말이다. 아담들은 수많은 문제 거리들을 커다란 바지게에 힘겹게 지고 살아간다. 어쨌든 그런 문제들에서 빠져나오고자 그 어떤 도움이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예수도 좋고, 부처도 좋다는 식이다. 그래서 성경을 펼칠 때마다 예수로부터 그런 도움을 얻고자 한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보았던 군중들처럼...

이사야는 다윗이 별세한 지 수백년 후에 다윗의 부친 이새의 줄기에서 새로운 싹이, 그 뿌리에서 새로운 가지가 나올 것이라고 예언하였다(사 11:1). 죽은 다윗을 부활시킨다는 말인가? 앞서 성경의 모든 내용이 근본적으로 예수님만을 향하고 있다는 말을 했는데, 그렇다면 이사야의 예언 당시를 기점으로 하여 그 이후에 오실 새 다윗은 누구란 말인가? 예수님이시다. 시편 55편의 다윗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시간 속에서 다윗 당시를 기점으로 하여 미래에 오실 새 다윗의 행적을 미리 엿볼 수 있다.

15절의 경우, 다윗이 대적들을 저주하는 말이 나오는데, 인간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저주를 퍼부을 수 있는 권세와 자격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점을 우리가 염두에 둔다면, 한 인간으로서의 다윗이 누군가를 저주하는 것은 하나님의 고유 권한에 속하는 저주권을 일개 인간일 뿐인 다윗이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아울러 그가 제사장의 빵을 먹었던 일을 비롯해서 기타 여러 행적들을 미루어보건대, 그리스도의 권세(그 중에서도 심판권, 요 5:22 참조)가 이미 인간 다윗에게 투영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정황 가운데 우리는 다윗이 그저 일개 인간으로서의 다윗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사울에게 악신이 임했을 때, 다윗이 수금을 연주하여 악신이 물러가기도 했는데, 왜 다른 연주자도 아니고 궁중 전문 악사도 아닌 다윗의 수금 연주가 그런 효력을 유발한 것일까(당시 사울 왕가는 우리가 상상하는 번듯한 기반을 갖춘 수준이 아니어서 전문 악사를 두지 못했을 수도 있겠지만...어쨌든 부차적인 내용이긴 하지만 굳이 삼상 8:11-17을 보면 왕 앞에서 노래하거나 연주하는 자들은 언급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런 다윗으로부터의 은혜에 대하여, 그리고 여러 번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데 대하여 사울이 급기야 악으로 되갚은 이유는 무엇일까?
서로 다른 두 기름부음 받은 자의 대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뭔가 하실 말씀이 있으시기 때문이다. 사라와 하갈은 단순히 두 여자가 아니라 대조적인 두 언약이었던 것처럼(갈 4:24). 두 기름부음 받은 자, 곧 두 피택자는 단순히 두 남자가 아니라 두 가지 권력(내지는 세력)을 의미한다. 사울과 다윗...한 사람은 당대의 최고 권력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최고 권력자로부터 핍박받는 자였다. 이러한 대조적인 관계가 나중에 다윗과 우리야의 관계 - 최고 실세, 그리고 그 권력에 의해 살해당한 자의 관계 - 로 이어졌듯이.
이 두 남자의 조우는 각자의 배후에 놓여진 두 권력(세력)의 충돌을 드러낸다. 사무엘 기자는 이 점을 놓치지 않고 고스란히 기록했던 것이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께 선택된 사람들이지만, 서로 다른 양상으로 사건이 진행된다. 한 쪽은 억압하고 핍박하며, 다른 한 쪽은 억압당하고 핍박당한다.

이러한 다윗 당시의 충돌은 미래의 새 다윗, 곧 예수님께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곧, 빌라도와 예수님이라는 대조적인 두 통치자(권력자 또는 왕)의 만남으로 말이다.
이 두 사람의 만남과 대화, 그리고 그 이후에 벌어지는 사건 - 한 통치자가 다른 한 통치자를 처형시킨 것 - 을 통해 하나님께서 택하신 서로 다른 두 부류의 만남과 대조를 통해 한쪽을 폭로시키시고 누군가를 심판하시며, 반대로 다른 한 쪽을 구원시키시는 것이다.
왕과 왕의 만남... 곧, 당시 예수님 앞에 선 - 빌라도 앞에 선 예수님이라는 흔한 표현을 반대로 생각해 보면 - 빌라도는 한 지역을 관할하는 일개 총독의 지위를 넘어, 당대 전세계를 지배했던 로마 황제로부터 통치 위임을 받은 자였다. 즉,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 서신 것은 로마 황제 앞에 선 것이나 다름없었다. 황제(의 권한을 위함 받은 빌라도) 앞에 선 예수님...이것은 성령님에 의해 이미 마 4장에서 악마와 예수님의 만남이 성사되었듯, 황제의 대리자를 통하여 예수님은 다시금 악마와 조우하게 된 것이었다.

통치자와 통치자의 만남...한 쪽은 당시 로마로 상징되는 아담 나라 임금(이 세상신, 곧 악마)의 대리자요, 다른 한 쪽은 이 세상(아담 나라)에 속하지 않은 자기만의 왕국이 별도로 있다고 주장한 통치자이다. 그런데 그 두 왕의 관계가 한쪽이 다른 한쪽을 죽여버린 결과로 치달았다는 사실은, 한 왕국이 다른 한 왕국과 근본적으로 대결(전쟁)하는 관계에 놓여있다는 말이다. 십자가 사건...이것이 악의 실체(악마)가 품고 있는 바가 온전히 폭로된 것이요, 악마과 그의 세상을 겨냥하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의지 표명이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에 하신 말씀, 곧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요 14:30)”라는 말씀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두 왕의 만남을 통해 양측의 관계가 어떻게 전개되는가에 있다. 조화가 아닌 부조화, 공존이 아닌 대립이다. 한치의 양보도 없는 전쟁에 이미 돌입되어 있는 상황이다. 이 전쟁의 판도와 결과가 십자가 사건을 통해 결정지워졌던 것이다. 십자가는 '늘(오늘날에도)' 실제 상황이다.

두 왕의 대립...한 왕은 죽이려 들며, 다른 한 왕은 죽임 당한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왜 한 왕은 대적하지 않았을까? 다윗이 사울을 대적하지 않았듯이 예수님도 빌라도 정권에 물리적으로 대항하지 않았다. 이 와중에 이런 점도 생각해 본다. 충신 뒤에 사람이 백이면 역적 뒤에도 사람이 백이라고, 두 왕에게 속한 각각의 백성들도 자기네 왕과 똑같은 운명에 놓여 있다는 점을 말이다. 성도는 다윗처럼, 이 아담의 땅에서 고난당하고 짓밟히신 왕께 속한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이러한 점까지 그 자체적인 틀 안에 묶어놓고 있다. 아담이 대적을 일삼는 역사, 그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심판으로 응수하시는 역사, 그 과정에서 남은 자만 구원받게 된다는 사실이 그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13-14절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원수요, 악의 실체는 시편 기자(다윗)의 영적 동무로서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부류에 속한 자였다. 악의 실체는 바로 우리 주변에 있으며, 그 힘은 우리 가까이에 있다. 아담과 하와 곁에 머무르고 있었으며, 가인의 문지방에 엎드려 도사리고 있었으며, 스스로를 신자라고 생각하는 속사람에 형제를 미워하는 살인의지로서 감추어져 있다. 이러한 상태에 대하여 시편 기자는 저주로 다가선다. 시편 기자의 저주는 곧 하나님의 심판이다. 저주받은 악의 실체는 음부로 운명지워진다(15절).

18절에 언급된 바, 다윗이 말한 ‘전쟁’은 21절을 통해 다윗이 과거에 참전했던 수많은 물리적 전투들만을 가리키는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따라서, 18절의 ‘대적하는 자’ 또한 단지 블레셋 등과 같은 이교도들만을 의미하는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동무라고 생각했던 자들...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는 듯 보였던 자들...그들이 새 다윗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려했다.

(요 8:39)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요 8:41)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21절에 따르면, 악의 실체는 ‘전쟁’을 품고 있다. 악마는 끊임없이 전쟁하려는 자이다. 누구와? 사울은 다윗과 전쟁했으며, 빌라도와 유태인들은 예수님과 전쟁했던 것이다. 이 전쟁은 이 아담의 땅 위에서 예수님, 다윗, 성도가 핍박당하는 전쟁이다.
이 여호와의 전쟁은 ‘미끄러운’ 뱀의 혀요, ‘부드러운’ 용의 입과 싸우는 전쟁이다(21절). 비복음, 비진리를 배후에서 조종하는 악마와의 전쟁이다. 혀와 입은 그 마음에 담긴 것을 말로써 겉으로 표출하는 데 대한 상징이다. 이것은 곧 말씀과 말씀 아닌 것(가짜 말씀), 즉 진리와 비진리 사이의 대결을 말한다. 이것이 영적 전쟁의 실상이다.
이 와중에서 18절의 ‘나를 치는 자’의 실체가 밝혀진다. 바로 ‘악’이요, ‘악의 실체’이다.

우리는 전도하다가 핍박 받거나 순교하는 것만을 두고서 ‘그리스도 안에서(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으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생활 속에서 평소 인간 관계 속에서 뜻하지 않게 발생하는 사건들을 통해서 성도의 삶 주변에 관여하는 악의 실체(특히 불신자들의 의식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배후), 성도 속에 뿌리 박혀 있는 악의 실체(까닭 없이 유혹에 넘어가고, 언제고 무기력해지기도 하며, 근본적으로는 은근히 예수님께 대드는 고약한 심보)가 폭로됨과 동시에 또한 그런 세력들에 대한 예수님의 관여하심(영적 전쟁을 주도하심)을 알게 하신다.

처음에 하만은 단지 모르드개의 오만불손한(?) 태도가 마음에 안들었을 뿐이었다. 모르드개라는 자가 심중에 무슨 저의로 감히 자기 앞에서 오만방자했는지 그는 제대로 감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만이 그저 자신의 일상생활 속에서 발생한 순간적인 불쾌감이 유태인들에 대한 민족적 증오심으로 돌변한 과정을 바라볼 때, 그의 분노는 단지 표면적인 사건에만 자극받아 생겨난 일시적인 감정 문제가 아니었다. 감정은 빙산의 일각일 뿐, 그 밑에는 거대한 악의 실체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하만 사건의 전모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는 갈고리로 악어를 꿰어 깊은 강바닥 속에서 끌어내듯(겔 29:3-4), 악마의 실체를 폭로시키시고 징벌(심판)하신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앞서, 본 장을 통해 인간 삶의 온갖 국면들이 발생시키는 스트레스와 고통의 문제들에 대한 치유를 이끌어내는 설교를 접했었다고 했는데, 이 또한 원수의 ‘미끄러운’ 혀와 ‘부드러운’ 입에서 나온 소리가 아닌가. 이것을 복음이라고 주장하는 데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참 복음으로 대적하시는 전쟁을 펼치신다.

모르드개와 하만의 이야기에서와 같이,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신 바 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여러 가지 산발적이고도, 사소해 보이며, 그저 그 경위가 해프닝에 불과한 듯한 사건들을 틈타(?) 우리 주변의, 그리고 우리 속의 악의 실체들을 그때그때 들추어내신다. 그러면서 우리의 외적 조건에 상관없이 우리의 정체성(성도임)을, 즉 이 아담의 땅 위에서 평화롭게, 안일하게, 이 세상과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님을 상기시키신다. 또한, 악의 실체가 이 세상의 일상사 - 내 주변에, 내 속에 - 와 보편적으로 결부되어 있음을 새삼스레 실감케 하신다. 그리고, 동시에 이것은 성도임에 대한 예수님의 위상(주되심)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듯, 성도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은 성도가 놓인 관계(주변과 자신)에 작용하는 악의 실체를 들추어내시고 폭로시키시고 ‘죽이시는’ 사랑이다. ‘치유하시는’ 사랑이 아니라.
아담 안에서 태어나 몸이 죄로 죽은(롬 8:10) ‘시체’인 우리는 ‘치유의’ 대상이 아니라, 죄에 대하여 ‘죽임 당한’ 대상이다. ‘시체’는 이미 절명하였으므로 치유할 필요가 없다. 고칠 대상이 아니다. 시체에 약을 먹일 수도 없을뿐더러, 주사 놓는다고, 연고 바른다고 낫게 될 리 만무하다. 이 아담 세계가 포획하고 있는 저주의 사슬을 끊고 그 속에 놓인 시체를 재생시킬 수 있는 방법은 창조 당시처럼 ‘생명의 입김’을 다시 불어 넣는 길 밖에는 없다. 뱀의 혀에서 나온 거짓 말씀이 아닌, 예수님의 참된 '말씀'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신다.
우리는 그저 예수님이 벌이시는 전쟁터 가운데 놓여있는 존재들이다. 우리의 일상사를 통해 다윗이 경험했던 전쟁은 오늘도 예수님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이 아담의 땅(나라) 위에서, 그 배후에 도사린 악의 실체에 대항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