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이전지역강의포함)

수원강의4a-생명수140501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5. 25. 20:22

수원140501a-(생명수)4강 - 이 근호 목사

저는 창세기부터 죽 할 예정인데 언약 적으로. 그 전에 지금 4강을 거쳐서 성경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석해야 되며, 성경의 주제가 무엇이며, 전체적인 것을 먼저 하려고 했습니다. 첫 째, 둘째, 셋째 지났고 오늘은 서론의 마지막 시간 네 번째 시간이에요. 오늘하고 난 뒤에는 제 생각에는 창세기를 할 예정인데 목사님이 어떻게 생각할지를 모르겠습니다마는 첫째, 둘째, 셋째, 넷째를 요 내용은 계속해서 반복되기 때문에 또 늦게 오신 분도 있으니까 첫째, 둘째, 셋째를 복습하고 오늘 넷째를 하겠습니다.

제가 제일 먼저 한 것이 예레미야11장3절 말씀을 했거든요. 이제는 아이고, 목사님, 그만하세요. 지겹습니다, 이렇게 하더라도 짧게 할 테니까 11장3절에 보면, 이 언약의 말을 듣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제가 이 말씀을 거론할 때에 그 취지가 뭐냐 하면, 언약 없는 하나님과 언약 있는 하나님을 구분했지요. 그림 그리는 것도 시간 아까워서 안 그리겠습니다.

언약이 없는 하나님은 이방인들이 그냥 본성상 섬기는 신이고, 가짜입니다. 그걸 구약에서는 우상이라 하고 진짜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먼저 하나님의 언약을 제시했다 했잖아요. 언약이란 말을 잘 안 쓰는 용어를 한 것은 제가 예레미야11장3절에 언약의 말을 쫓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해서 언약이란 자체가 성경에 바로 나오기 때문에 언약 말을 했습니다.

언약이란 말을 생소한 말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걸 약속으로 바꿀게요. 같은 뜻이니까. 하나님께서 우리한테 그냥 빈손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먼저 오시면서 뭐를 들고 온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오시는 거예요. 약속을 가지고 왔을 때, 우리에게 약속을 풀어놓으면서 그 우리를 통해서 약속을 다 이루시고 그 약속에 포함된 사람만 보따리 싸가지고 데려가면 그게 천국이에요.

그러니까 쉬운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껌을 좋아하신다고 합시다. 껌을 좋아해서 질겅질겅 껌을 씹으시면서 하나님의 껌이니까 덩어리가 아주 큰 것으로 생각하고 껌을 씹고서 오셔가지고 사람들이 오! 신이시여, 신이시여, 하니까 껌을 가지고 전부 다 몸에다 붙여놓고 예가 촌스럽더라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질겅질겅 씹던 껌을 그 사람에게 붙여놓고 껌을 살살 잡아당기는 거예요. 이 껌은 안 떨어져요. 그러면 그 사람 몸에 뭐가 붙어있습니까? 주님이 씹던 껌이 붙어서 그 주인이 잡아당기면 마치 낚시하듯이 작살 던져놓고 감으면 낚시되듯이 그 껌을 감아버리면 그게 약속의 완성된 상태가 되고 그 약속의 완성된 상태를 천국이라, 하나님의 나라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껌이라는 것은 인간이 상상도 못한 거예요. 가인의 제사에서는 그냥 빌면 복 주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껌을 붙일 줄이야 상상도 못했지요. 그 껌을 방금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껌을 하나님의 약속 또는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이라 했지요. 하나님의 언약이 붙어있기 때문에 언약의 완성된 상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언약이 없는 사람은 언약의 나라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겁니다. 로마서8장9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 사람이 아니요, 라고 있지요. 갈라디아서3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영을 뭐라고 하는가 하면, 그걸 ‘약속’이라고 했어요. 약속.

그 약속은 무슨 약속이냐 앞에 뭐냐,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그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그 약속을 문자적으로 성경을 보는 사람은 뭐로 보느냐 하면, 씨와 땅으로 보지요. 지금도 유대인들은 그걸 생각해요. 자기는 약속의 땅에 살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통해서 이 약속이 씨와 땅이 아니고 뭐로 바뀌는가 하면, 이것이 성령으로 바뀌었어요.

요한복음14장에서는 성령을 뭐라고 하는가 하면, ‘처소’라고 해요. 처소. 처소니까 이건 공간개념이잖아요. 이게 뭔가 어떤 제약된 공간이죠. 그 처소 안에서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나 예수가 아버지와 하나된 것처럼 그날에는 너희가 아버지와 하나가 되고 내가 너희와 하나가 되어서 우리는 같은 처소 안에서 모두가 하나가 된다고 이렇게 요한복음14장에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17장가면 예수님이 겟세마네기도 내용이 나와 있어요. 겟세마네 기도에서 피와 땀이 됐다 해가지고 그것만 신경 쓰는데 우리도 악발이 같이 기도하면 응답된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기도내용이 중요한 거예요. 기도내용이 뭐냐 하면, 바로 “내가 아버지와 하나된 것처럼 주여, 저희들도 우리와 같이 하나 되게 하옵소서.” 이게 겟세마네기도의 요지입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세상을 위함이 아니고 세상 중에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바로 선택된 그 자를 위해서 내가 기도합니다.” 라고 요한복음17장에 나옵니다. 상당히 중요한 말이에요. 왜 중요한가 하면, 요한복음3장16절 때문에 중요한 말이 되어버렸어요.

요한복음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세상이 나오잖아요. 그래서 그걸 이야기하는 사람은 뭐냐 하면,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한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일이 진척이 되고 구체화되니까 요한복음17장6절에서는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한 게 아니고 세상 중에 따로 뽑아놓은 사람들을 사랑하는 거예요. 그걸 모르고 요한복음3장만 들이대면서 전도하는데 그게 아니고 세상 중에 따로 포함된 그러니까 요한복음17장에서는 이렇게 조감도로 비춰보면서 세상을 사랑하되 초점은 어디에 있는가 하면, 세상 전부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 속에 기다려라 내가 간다. 자기 택한 백성이 따로 있는 겁니다. 따로 있는 거예요.

요한복음 6장에 보면, “하나님이여 내가 온 것은 내 뜻을 위함이 아니고 아버지 뜻을 위함인데 아버지 뜻은 뭐냐, 내게 주신 자중에서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 다시 살리는 이것입니다.” 라는 말씀을 함으로서 이것은 사도 수준에서, 인간 수준에서의 전도와 선교가 모두가 의미가 없음이, 손 털어라 하는 그런 이야기죠. 인간이 하는 모든 전도, 선교, 교회 크게 키우기, 모든 어떤 시도나 노력이 의미 없는 거예요. 인간 수준에서.

사도에게 성령이 임해버리면 사도는 인간수준에서 전도, 선교하는 게 아니고 이미 완성했다는 택한 백성만 찾아간다는 주님의 수준에서 비로소 전도, 선교를 하는 거죠. 인간 수준에서는 전도, 선교 백날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괜히 선교 전도했다고 그것가지고 닦달 낼 가능성이 있어요. “제가 공들였는데 왜 합당한 대가를 주지 않습니까?” 이렇게 시위할 가능성이 많아요.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세상이 아니고 세상 중에 있는 내 백성, 그들에게만 껌이 있는데 아브라함이 약속한, 아브라함의 언약이죠. 언약인데, 언약의 뜻은 뭐였습니까? 바로 준비된 성령을 보내주심으로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죽은데서 살고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건 저주받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영이 있고, 없고 결정한다는 것은 오늘 강의하면서 요거하나 꼭 생각을 해줘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무 차별성. 인간 대 인간의 도토리 키 재기에서는 어떤 차별도 두지 않는다는 겁니다.

어제 수요일날 설교에서 언급한 게 있어요. “저 사람은 성질이 더러워서 성경이 나빠서 지옥가고 나는 성격이 좋아서 천국 간다.” 라고 할 수 없다는 거예요. 왜냐 하면, 인간 대 인간의 어떤 차별성은 주께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이 와야 구원받고, 성령이 오게 되면 강도라 할지라도 창녀라 할지라도 구원받고 성령이 오지 않으면 아무리 사람이 점잖다 할지라도 그것은 천국에 못 갑니다. 왜냐 하면, 약속과 성령은 아브라함의 약속과 관련돼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목사님 약속을 수정하면 안 되겠습니까?” 약속은 수정이 안돼요. “왜 수정이 안 됩니까?” 아버지와 아들이 두 분만이 머리 맞대고 창세전에 결정했기 때문에 그 뒤에 태어난 인간이 거기에 끼어들 여지가 없어요.

여러분, 자식이 부모보고 “부모님, 왜 저를 이렇게 태어나게 했습니까?” 이렇게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어요? 없어요? “저는 왜 이렇게 들창코입니까?” 이렇게 할 수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저는 왜 쌍꺼풀이 없어요?” 이런 거 따질 수 있습니까? 그걸 따질 수 없으니까 기껏 부모들이 하는 소리가 너도 나중에 부모 되면 알리라, 해서 노래가사에도 나와요. 부모 되면 알리라. 부모 돼도 몰라요. 과학에서는 DNA 때문에 그렇다. 그러면 DNA 때문에 그러면 나중에 왜 부모님은 병원에 가서 미리 DNA조작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따지고 소송 들어올 수가 있어요. 생명과학이 발달하면 소송 들어옵니다. 미리 IQ170만들지 않았던 부모를 향하여 고소할 수 있어요.

하나님의 답변이 이거에요. “그러니까 내가 차이를 안 뒀잖아.” 그러니까 차이를 안 둔 거예요. 참 말 뉘앙스가 희한한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은 차이 없이 구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저 사람은 왜 일방적으로 천국가기로 결정했고 나는 왜 지옥가기로 결정했는가, 왜 차이를 두십니까?” 이리 되는 거예요. 갑자기 말이 어려워졌지요.

제가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모녀 두 분이 만약에 외식을 갔는데 어머니께서는 자장면, 따님께서는 짬뽕을 시키고 있는데 제3자인 제가 차타고 가다가 갑자기 내려가지고 “여기 탕수육 하나요!” 이렇게 할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 맡기세요. 괜히 우리가 끼어들 문제가 아닙니다. 창세전에 결정한 것에 대해서 자장면 먹을 것인가, 짬뽕 먹을 것인가에 대해서 우리가 끼어들어가지고 탕수육 하나요! 할 수가 없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위하여 만들어졌지 나를 위하여 내가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를 위하여.

자식이 부모보고 “어머니, 왜 저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그런 소리 할 때는 뭐냐 하면 ‘나는 날 위해서 살지 나는 부모 위해서 안삽니다.’ 생각할 거다 말이죠. 만약에 부모를 위해서 내가 존재한다고 한다면, 그런 반발을 하겠어요? 안하겠어요? 안하겠지요. “어머님, 어떻게 낳아졌던 나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된다 말이죠. 그러면 어머니께서 “니는 영원토록 나의 나라에 살아라. 내가 만든 나라에 살아라.” 이렇게 되거든요. 따지고 보면 이야기가 굉장히 간단한 문제에요. 부모가 만든 나라에 자식이 살거나, 아니면 자식이 따로 만든 나라에 부모를 모실 것이냐, 그 문제라니까요. 2000년 신학이 결국 그 문제에요.

인간이 편안하게 행복하기 위해서 만든 나라에 예수님과 하나님을 모실 것이냐, 아니면 예수님과 아버지가 결정 놓은 그 나라에 우리가 들어가서 살 것이냐 그 문제입니다. 들어가서 살 문제 같으면요, 군소리하지 마세요. 군소리하면 그 나라 데모 일어납니다. 시위합니다. 이 복잡한 성경이 그렇게 간단하게 정리되잖아요. 결국 문제가 뭐냐 하면, 나만의 따로 영광 받는 다른 세계를 내가 궁시렁 궁시렁하면서 자꾸 만들어낸다는 거예요. 그걸 주님께서는 그걸 배후에 악마가 있다는 거예요. 마귀 사탄이 있다는 겁니다. 고린도후서4장 이야기입니다. 제가 하는 이야기 아닙니다. 너희가 복음의 광채를 흐릿하게 하기 위해서 세상신이 너희로 하여금 그 눈을 감기게 했다는 거예요. 눈 떠라. 주님이 부모라면, 부모의 나라에 들어가 살지 너가 영광 받는 이름이 영광 받는 니 세계 따로 만드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성도는 철저하게 마마보이 되어야 됩니다. 마마 걸, 마마보이. 마마보이, 마마 걸 할수록 사랑받아요. 범사에 감사해야 돼요. 애가 물에 빠져죽던지 이왕 죽은 애가 죽었다고 확인할 차원일 뿐이에요. 망대에서 떨어져서 18명 죽을 때에 “니, 살았다고 좋아하지? 회개치 않으면 다 같이 망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서 우리가 토 달면 안돼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라고 토 달면 안돼요. “왜 이 컵이 녹색입니까? 빨간 컵 안 가지고 오고.” 주신 사람 마음대로잖아요. 마찬가지에요. “내 애가 죽든 살던 간에 주신 분이 만든 거지 나만의 세계에 왜 손대십니까?” 이렇게 하게 되면 천국 가는 자세가 아니에요.

천국은 고맙습니다! 하고 기도하는 나라고, 내 것 따로 챙겨가지고 어디 천국 가서 부동산중개업할 일 있습니까? 따로 부스 만들어가지고 거기서 지가 딴 살림 차릴 일이 아니잖아요. 천국은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천국 사는 생활을 지금부터 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목회자는 교회를 어떻게 하느냐에 신경 쓰지 말고 저 분들이 천국 가는 삶을 보이고 있느냐, 눈에 보이는 교회의 삶이 아니고 지금 당장 죽었을 때, 천국 가는 그 삶의 자세가 천국에서 통용되는 삶이냐를 그걸 주시하면서 그쪽으로 말씀을 증거 해야 돼요. 그 쪽으로. “집사님, 그런 식으로 천국 가서 살겠어요?” 이런 식으로.

제자들이 말했지요. 예수님, 우리 중에 하늘나라가면 누가 높겠느냐 할 때, 주님 마음이 이래요. 니가 그런 식으로 천국 가서 살겠느냐, 천국이 그런 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갈 수 있느냐 말이죠. 차라리 어린아이 데려가죠. 있는 것 전체가 아이고, 감사합니다! 그런 자세가 바로 천국 가는 자세라고 말씀하시면서 너희들은 누가 높으냐 따질 것이 아니라 내가 주는 게 있다. 뭡니까? 내가 마시는 쓴잔을 너희들이 마셔야 된다. 아이고, 씁니다. 안마시겠습니다. 그렇게 빼지 말라. 주면 주는 대로 다 먹어야 돼요. 그게 천국생활이에요. 인생은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만들어가니까. 훈련을 시키는 겁니다. 천국에서는 이래도 니가 감사하느냐, 저래도 감사히 받느냐하는 그것이 되게 되면 그 환란가운데서 소망의 나라 ‘아! 천국은 뭐든지 감사할 것밖에 없는 곳이 바로 천국이구나!’ 이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언약을 이야기한 겁니다.

두 번째 시간에 한 것이 뭐냐 하면, 사도행전8장에 보면, 빌립과 내시의 만남에 대해서 언급한 것이 기억나십니까? 그때 제가 한 것은 뭐냐, 성경해석이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알겠는데 성경해석을 어떻게 할 것인가? 성경 말씀을 해석하는데 구멍이 있어야 되거든요. 구멍 뚫고 들어와서 확 퍼지게 하면 된다 말이죠. 태백시 장성에 석탄 공사 있지요. 구멍 아무나 팝니까? 구멍 갱도 먼저 뚫고 옆으로 퍼져서 무려 지하1Km가가지고 지금도 파내고 있어요. 고 성경 속으로 뚫고 들어가는 것. 그 뚫고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저한테 어떤 분이 질문한 걸 가지고 십자가마을에 올렸어요. 질의와 저의 답변하는 제목으로. 성경말씀을 어떻게 할 것인가?

예를 들면 어떤 분이 저한테 질문하기를 에스겔23장에 거기 창녀가 나오는데 창녀로서 오홀라와 오홀리바가 나오지요.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이스라엘을 비유한 대목이 나옵니다. 그걸 보면서 어떻게 내 인생과 똑 같으냐 하면서 질문한 거예요. 나는 남자를 데게 좋아했는데 차였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남자는 앗수르같은 남자다. 너무나 잘 생기고 멋있는 남자를 좋아하다가 완전히 소 뒷발 차듯이 차여가지고 있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아직도 나는 결혼도 안하고 임신도 한 적 없고 애도 없는데 성경에 보니까 니가 애를 불속에 집어넣는 우상숭배를 했다는데 왜 다른 건 다 적용되는데 나는 애 자체가 없는데 어떻게 내가 애를 우상으로 불 속에 내놨다고 하십니까? 어떻게 설명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라는 질문을 한 거예요.

질문 자체가 굉장히 순박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어떻게 QT를 해도 어떻게 성경문자대로 현실을 그대로 봤느냐 말이죠. 자기는 그게 천사가 와서 가르쳤다고 해요. 천사님이 와서 가르쳤다고 하는 거예요. 질문 자체를 그대로 올려놨으니까. 그래서 내가 답변을 했지요. 성경해석을 할 때에 사적으로 1:1로 맞아주는 게 아니고 집단적으로 일괄해서 성경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답변했거든요.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두 다 자기 아들을 우상의 제물로 불태운 게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그들이 그 당시 앗수르라는  잘사는강대국의 것에 대해서 현혹되었고 마음이 빼앗겼고 그것이 삶의 목표였고 목적이 되었다는 겁니다.

지금 같으면 호주, 뉴질랜드, 미국, 캐나다 이게 지금 목적이 된 거예요. 빨리 돈 벌어서 호주로 이주 갈 생각을 하고 미국 갈 생각을 하고 유럽에 살 생각을 하고 성경을 해석을 할 때, 그래서 주님께서는 창녀 짓을 한 게 아니고 이스라엘의 멸망된 시점에서 회개하고 다시 한 번 회구하는 입장에서 너희들은 창녀 짓했다. 왜? 앗수르, 바벨론 이처럼 멋있고 정력 좋은 남자를 찾았다는 것은 그만큼 종교가 어떻든 간에 결과가 너무 너무 잘사니까 잘살고 여유 있는 것이 행복이라고 여기고 여호와 다 버리고 여호와 섬겨도 껍데기는 완전히 저 쪽 잘사는 나라 종교로서 다 바뀌어버린 거예요. 솔로몬부터 이미 그랬으니까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거 유지입니다. 내거 유지. 더 나아가서 확장입니다. 이 공식이면 끝나는 거예요.

내 건 여기 있다. 그 안에서 나는 살아있다. 유지해야 돼! 그 다음에 아내는 유지 쪽으로 남편은 확장 쪽으로. “아니야, 세상에 나가봐라. 우리보다 잘사는 사람 많은 거야. 여기서 멈출 수 없어. 내가 일 들어갈 테니까 앞으로 아파트 평소 넓은 데로 옮기자. 차는 좋은 것으로 바꾸고. 애들은 미국으로 유학 보내고.” 이게 유지와 확장이에요. 그러면 유지와 확장이 아주 잘된 곳에 사람들을 인생의 모델로 삼는 겁니다. 이미 모델이 있다는 것은 자기 목적은 정해져 있지요. 사람은 목적 없이는 권태로워서 못 살아요. 목적 없으면 죽은 자입니다. 사람의 소망 없으면 사는 것이 사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끊임없이 소망을 만들어내야 되고 절대로 그 소망은 이루어지면 안돼요. 왜냐 하면, 소망이 조금씩, 조금씩 끌고 가야 하기 때문에.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소망이 마무리되면 허탈에 빠져요. 그러니까 소망은 계속 조작해서 만들어내야 돼요. 이번에 소치동계 올림픽 할 때, 이상화선수가 스케이트 타잖아요. 중계 방송하는 카메라 어떻습니까? 이상화선수보다 항상 조금씩 앞서가서 달리지요. 카메라가. 카메라가 자동적으로 앞서 달려가면서 찍잖아요. 그게 소망이에요. 소망은 나를 유인하는 유인책이지 우리가 달성용이 아닙니다. 하나 목적 끝나면 새로운 목적을 또 만들어내요. “엄마, 나 요번에 전교에서 10등 했어.” “그래, 5등까지 끌어 댕겨.” “5등 했어.” “2등 되어야 돼.” “요번에 승진했어.” “부장되어야 돼” 계속 끌어당긴다 말이죠.

그걸 누가 잘하는가, 그걸 앗수르가 잘하는 거예요. 이방나라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 그건 앗수르만 잘하기 때문에 앗수르 같은 교회에 사람이 모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왜 계속해서 연초에 신년예배 드리면서 계속 목적을 하고 교회 자체가 계속 비전과 비전을 유발해내야 돼요. 프로젝트를 만든다고요. 올해는 600명. 3년 내에 1000명 만들겠습니다. 올해는 교육관 짓기, 주차장 넓히기, 여러분들이 아낌없이 헌금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나오는 겁니다.

그것에 대해서 조금도 우리가 뭔가 께름칙 않게 생각하는 것은 교회나 회사나 자기 자신의 가정이나 앗수르에 물들은 걸 가지고 창녀라고 합니다. 그걸 가지고 창기라고 하는 거예요. 감사함이 없어요. 감사함이 없다니까요. 사람이 현재 현상유지하면 감사할 줄 알아요? 아닙니다. 여러분, 돈 많은 부자들이 행복하십니까? 아닙니다. 그 돈 노리고 사돈의 팔촌 다와 가지고 갈아먹을 가능성이 많아요. 좀 뭔가 맞벌이 하게 되면 뜯는 사람도 더 많다는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맞벌이 안하게 되면 주부가 놀게 되면 주위에서 또 찾는 사람이 많아요. 심심하니까 놀자 해가지고 찾는 사람이 또 많아요. 이 세상 자체가 잘되는 것에 대해서 타의 욕망이 나의 욕망으로 날마다 바꿔치게 하면서 우리는 뭔가 내 욕망이 목말라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킨다는 거예요.

주님은 저 낮은 곳을 향하여 인데, 인간들은 뭡니까? 주님 이용해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낮은 곳에 가야 천국으로 빠지는 개구멍이 거기 있거든요. 개구멍이. 높은 곳에는 출구가 없어요. 마귀가 기다리고 있어요. 염라대왕이 기다리고 있어요. 이게 빌립보서2장 이야기입니다. 죽기까지 십자가에 복종하니까 주께서 그를 지극히 높여 만유의 주가 되게 하셨잖아요. 빌립보서3장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바울이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서 어떻든 간에 십자가로 간다. 이게 하나님의 약속의 공식인데 사람들은 반대로 나가요. 집안 거덜 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고 나의 소망은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를 두고 사시라 이 말입니다.

남이 잘되고 남이 승진하고 부자 되더라도 그건 헛되고, 헛되고 헛된 것이니라. 물론 주는 돈까지 거부하지 마시고요, 또 잘사는 걸 가지고 죄악된 거라 그럴 필요 없는데 잘산다는 것이 소유의 넉넉함에 잘사는 것이 아니고 생명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곳을 보고 사는 게 잘 살고 있는 거예요. 물론 마귀가 와서 시야를 흐려놓지요. 안개가 끼어서 시야가 확보가 안 돼. 누가 잘된다는 소리를 들으면 갑자기 화가 치밀고요. “주님은 뭐하시노?” 이런 식으로 나오면, 하여튼 마귀가 와서 시야를 흐려요.

성경에 두 세 사람이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다고 분명히 이야기했잖아요. 주님의 최소 교회는 두 명입니다. 충분해요. 주님이 계시느냐가 관건이지 5천명이 있어도 주님 없으면 그건 교회 아니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앗수르 같은 교회, 바벨론 같은 교회를 원하는 거예요. 그걸 목표로 하고 있고 또 목적으로 하고 있고. 마귀가 누구를 무서워하는 줄 알아요? 십자가 보고 주님을 그리워하는 사람을 제일 무서워합니다. 오천명, 육천명 쓰레기 같은 인간들 겁나지도 않아요. 단 하나라도 자기가 돌아온 탕자라고 여기는 사람을 제일 무서워해요. 주님의 껌이 붙어있는 사람, 주님이 늘 잡아당기는 사람을 늘 무서워해요. 그걸 가지고 히브리서11장38절에서는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게 바로 신앙의 선배들이 그렇게 살았어요. 세상이 감당치 못했어요.

그래서 제가 둘째 날 한 것은 뭐냐, 십자가로 가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멍을 파서 십자가로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전부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이다. 니 계획 아니고 벌써 창세전에 성부와 성자만의 확정된 그 계획이었고 너희들 있는 곳에 찾아온 것은 그 계획에 참여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태어나게 했다는 겁니다. 쓸데없는 걱정하거나 쓸데없는 니 권리 있다고 주장하지 마라, 우리는 따질 권리조차 우리한테 없고 그냥 우리는 결과물로 하나님의 약속의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물로 오늘도 발걸음을 세시고 머리카락도 세시면서 이 자체가 하나의 결과물로서 감사하면 되는 겁니다.

세 번째 한 게 뭐냐 하면, 에스겔3장 이야기했습니다. 에스겔3장이야기를 왜 끄집어냈느냐 하면 에스겔3장 이야기가 뭐냐 하면, 니가 이 말씀을 먹어라. 그러면 니 입에는 굉장히 달 것이다. 좋지요. 니 배에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된다? 쓰디쓸 것이다. 왜 그렇습니까? 달면 끝까지 달아야지. 처음에는 달고 끝에는 쓰고. 무슨 이상한 한약을 집어넣었는데? “말씀이 왜 그렇습니까?” 했을 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너는 괜찮은데 너는 말씀 듣고 구원 받고 줬는데 주변 세상이 너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이죠.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그게 우리로 하여금 고난의 길로 인도해요. 고난의 길로 가게 만들어요. 지금 말씀 전하는데 가만두지 않잖아요.

많은 사람이 이야기합니다. 당신이 하는 모든 것이 정상이고 상식적이고 합리적이고 참 좋은데, 이상하게 왜 성경내용에 대해서는 삐딱하게 보느냐, 모든 걸 매사를 긍정적 사고방식이 아니고 부정적 사고방식으로 보느냐, 많은 그러한 비난을 받을 거예요. 십자가 자체가 부정적입니다. 성경에 보면, 십자가 언급할 때는 반드시 나오는 게 있어요. ~~가 아니요, 가 먼저 앞서 나와요. 뭐가 아니요. “~~가 아니요 ~~다.”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가 먼저 나와요. 내가 너희를 기쁘게 하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항상 무엇 무엇이 아니다, 가 먼저 나와요.

“여러분, 외롭습니까? 우리 교회에서 천국 갈 때까지 재미있게 삽시다.” 이게 아니고 무엇 무엇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것이 교회가 아니요, 라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순교한 이유가 있지요. 긍정적이었으면 순교했겠습니까?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어느 정도 융통성이 있는 사람 같으면 이리 이야기했어요.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따라서 예수란 작자가 이상한 소리해도 그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거니까 우리가 손대지 말라.” 라고 할 정도로 그만큼 마음이 넓은 자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하는 공부 보세요. 놀라울 정도로 삶이 성화된 삶이에요. 상상을 초월합니다. 거기에 보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나와요. 소위 대자대비 다 갖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리 했어요.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인간의 힘으로 해낼 수 있는 가장 자비롭고 경건한 것에 최종 주자, 제일 앞선 선봉주자가 누구냐, 바리새인이에요.

나머지 사람은 바리새인 저 뒷자리에 줄줄이 서야 돼요. 지금도 유대교에는 유대교에 대한 해석 책이나 유대교에 대한 성경 해석 책이 있거든요. 미드라쉬 그리고 탈무드라는 유명한 게 있지요. 탈무드 책에 봐도 그 지혜가 얼마나 놀랍습니까? 항상 남을 배려하고 이웃을 먼저 사랑하고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것, 그것이 녹녹히 녹아져있고 그것이 예수님 이전부터 이미 그런 것이 역사가 되어있다 말이죠.

바리새인이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우리는 구제했고 우리는 이레에 금식했고 십일조 했습니다. 십일조 왜 했는지 알아요? 구제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가난한 사람 돕자고 내는 겁니다. 그 십일조를. 그런데 그 바리새인은 성전에서 어떻게 됐습니까? 천국 갔습니까? 지옥 갔습니까? 누가복음18장에서 그 바리새인 어떻게 됐어요? 지옥 갔어요. 그리고 천국 간 사람은 주여, 죄인입니다 한 사람은 세리는 니가 의인이라고 이야기해요. 우리가 생각하는 그 기준 아닙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바리새인이 다했습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한 가지 몰랐던 것이 있었습니다. 뭐냐 하면,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본인이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그들은 수긍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이 죄인도 아니고 의인도 아닌 중립지대에 있어야 하나님께서 말씀을 줘도 말씀에 주는 취지가 살아나요. “야, 똑바로 해!”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야, 똑바로 해. 니가 만약 똑바로 하면 복주고 못하면 벌 줄 거야.” 이 말은 그 말을 하는 순간은 어떻다는 말입니까? 그 사람이 아직 죄인 자리나 의인자리까지 아직 모든 것이 확정되지 않았다는 그 뜻이겠지요. 이제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분류되고 악인도 될 수 있고,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의인도 될 수 있다는 그러한 중립지역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요. 바리새인은 해석할 때 그렇게 한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은 말합니다. 너희는 이미 처음부터 죄 아래에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바리새인이 하는 말이 요한복음8장에서 우리는 아브라함 자손이기 때문에 누구한테 죄에 매인 적 없다고 이야기했어요. 예수님은 그러니까 느그 애비가 사탄이라고 하는 거예요. 악마라고 하는 거예요. 바리새인도 대화가 안 되는데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과 대화가 된다는 것은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이해한다는 것은 성령이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성령이 와야 이런 취지가 납득이 되고 이해가 돼요. 출발점을 중립지역에 놓지 마시고 아예 죄인으로 놔버리면 이해 안 될 게 없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볼 때 참 달지요. 단데, 그 달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 단가 하면, 우리가 이 땅에 나와서 세상한테 시달릴 때, 그 시달리니까 말씀 포기할까요? 힘드니까 이제는 예수 없다고 할까요? 내 자식이 진도 앞바다에 창원 바다에 섭씨10도에 빠졌으니까 이제부터 하나님 믿지 말까요?

“하나님은 없습니다. 있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라는 밀양이라는 영화 테마입니다. 자기 아들을 납치해서 죽였던 사람을 만나고 난 뒤에 그 사람이 전도하기 전에 회개하니까 전도로서 복수하려고 하다가 그게 실패로 끝나니까 여자주인공 전도연이가 하나님은 없다. 다시 말해서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하나님이라. 하나님은 내가 어떤 뜻을 담고 기도해도 절대로 그 뜻에 장단맞춰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녀는 알게 돼요. 그렇다면 자기가 믿고자 하는 것은 자기가 손에 쥐는 하나님을 원했던 겁니다. 내 손에 쥐이는 하나님. 아까 자식이 부모 집으로 가면 델 텐데 자식이 자기 집을 만들어 놓고 거기다 부모를 자기 집에 모셔서 쥐려고 하는 그런 심보를 우리도 여전히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에스겔 본문을 언급한 것은 이 땅에 살면서 어떤 경우가 있더라도 그렇기 때문에 말씀은 달달하고 맛있다는 사실을 오히려 더 감사해야 된다는 그 취지로 제가 말씀드린 겁니다.

오늘 네 번째 말씀은 에스겔37장12,13절을 언급해드리겠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그 다음에 22절, “그 땅 이스라엘 모든 산에서 그들로 한 나라를 이루어서 한 임금이 모두 다스리게 하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두 나라로 나누이지 아니할찌라” 요 대목입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강의 내용이 저로서는 무척 쉬웠다고 생각하는데 오늘 할 강의내용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상당히 난해한 내용입니다. 어떤 데서 난해한가 하면, 에스겔37장 12절 말씀,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리라 할 때, ‘개인구원은 없습니다.’ 이게 오늘 네 번째 강의의 핵심내용입니다.

개인 구원은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개인적으로 상대하지 않습니다. 강냉이 죽 끓일 때 처음에 강냉이 들어가지요? 알맹이가 들어가요. 옥수수죽에 알맹이를 집어넣습니다. 물 넣고 센 불에 끓이면 알맹이가 어떻게 돼요? 다 뭉그러져서 알맹이가 없어지지요. 호박죽도 마찬가지고 없어지지요. 하나님께서는 개인적 입장에서 “저, 어때요?” “왠 이런 일이?” “저 어떻게 구원될까요? 지옥 갈까요? 알려주세요.” 항상 개인문제에서 출발하잖아요. 그걸 죽으로 녹여버리면 개인이 사라져요. 이 사실을 기독교 역사가운데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이 사실을.

자크엘룰이라는 사람이 그것 때문에 격분해서 L'homme et l'argent(하나님이냐, 돈이냐) 대장간에서 나온 책입니다. 초대교회부터 시작! 일본 말로 요이 땅! 하거든요. 시작할 때부터 벌써 복음은 날아가 버린 거예요. 초대교회부터. 사도바울이후에 교회 시작하면서 이미 복음은 날아가 버렸어요. 자크렐룰은 그 책에서 말하기를 왜 교회에서 복음이 날아가 버렸는가 하면, 진리가 날아갔느냐 하면, 교회가 권력의 맛을 본 거예요. 교회가 힘의 맛을 본 거예요.

그 당시의 초대교회 때는 로마나라 아닙니까. 로마나라는 네 번째 짐승이에요. 다니엘에 의하면 네 번째 짐승이에요. 첫 번째 짐승이 바벨론, 두 번째 짐승이 바벨론을 멸망시킨 페르사 바사, 세 번째는 바사를 공격했던 헬라BC313년, 그 다음에 그 헬라를 쳐 부신 것이 BC163년경에 로마에요. 바벨론 다음에 바사, 헬라, 로마. 첫 번째 짐승이 바벨론이에요. 그러면 그 전에는 왜 짐승이란 표현을 안 썼을까요? 그 전에는 뭐가 있었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렵더라도 어차피 우리의 강의는 어려워질 것이니까 미리 맛보시라고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건재하게 되면, 하나님의 언약은 이스라엘만 상관을 해요. 관계를 했습니다. 아직 이방인들은 놓아버리는 거예요. 이방인들은 그냥 묵인하신다. 사도행전17장에 나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이방나라가 어떤 신을 섬기든 하나님은 묵인했으나 마지막 때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를 보내서 죽고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모든 민족, 민족이라 할 것 없이 모든 민족의 제한 없이 마지막 심판 날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기준으로 삼아서 심판해버리겠다는 것이 사도행전17장에 사도바울이 아덴 설교하는 가운데 그게 나와요.

사도바울이 그런 이야기한다는 것은 사도바울은 이스라엘이 건재했던 그 시점과 그 후를 나누어서 발하는 겁니다. 현실이. 주님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관여할 때는 이방나라는 어떻게 놓든 관계있어요. 하나님이 스스로 이스라엘 백성을 공격을 해서 저주받아서 없애버렸어요. 없애버리면 나라는 없어지지만, 뭐는 남아있습니까? 나라는 없지만, 뭐는 연속되어야 돼요?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은 연속되어야 되겠지요. 벌써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자체가 “목사님 저 어떻게 하면 구원받아요?” 이 질문은 이미 벌써 끝났지요. ‘어떻게 하면 우리 남편 술 끊는가’ 벌써 이 문제도 떨어져 나갔어요.

하나님은 지금 사적으로 상대하는 게 아니에요. 그걸 다 떼어내 버려요.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잘 믿는 우리 언약의 하나님이셨던 그 언약 공동체를 없애버려요. 이 땅에서 이 지상에서 날아가 버려요. 없다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데 언약에 의하면, 언약에서 한 나라를 만들어요. 그런데 언약은 나라를 만든다는 약속은 있는데 이게 구체화 된 게 없지요. 왜? 있는 나라가 멸망했으니까. 그러면 이 나라가 역사 속에서 새로운 언약의 나라가 역사 속에서 이루어질 겁니까? 아니면 역사를 초월해서 이루어질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겨요. 어떻습니까? 역사에 있는 이스라엘을 한 번 실험을 해봤는데 이게 안 되니까 역사에서 사라졌지요.

역사에서 사라지면, 언약은 살아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요? 언약마저 “아이고, 나 인간 때문에 일이 안되네.”이런 하나님이 아니잖아요. 너희들이 못해도 하나님의 약속은 성실하게 이루어지잖아요. 그 이루어진다는 것은 뭘 초월한다? 역사를 초월하잖아요. 역사를 초월하면서 그 때 등장한 용어가 뭐냐, 짐승이라는 묵시적 용어가 등장하는 겁니다.

왜 바벨론부터의 짐승이냐, 그 전날에 모압, 암몬, 이런 나라가 있는데 왜 그건 짐승이 아니고 왜 바벨론부터를 첫 번째 짐승으로 보느냐 하면, 이미 짐승이 등장했다는 이 말은, 사람보고 짐승이란 말은 기분 나쁜데 느브갓네살 보고 짐승이라 이야기했다 말이죠. 내가 보기에는 아저씨인데, 아저씨가 왜 짐승입니까? 짐승이라 하는 것은 소, 돼지, 가축 이런 것이 짐승이지. 하이애나 같은 거 있잖아요. 먹이 찾아 헤매는 하이애나를 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킬로만자로에서 볼까요? 짐승이라 하는 것은 사람이하를 말하고, 땅에서 온 짐승 같으면 개나 돼지나 하이애나지만, 이 짐승이 어디서 올라와요? 바다에서 올라온다고요.

바다에서 올라온다는 것은, 바다와 육지의 가름은 이것은 창세기 초반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창세기 초반으로 돌아가면 하나님이 셋째 날에 뭐했습니까? 땅과 바다를 분리했잖아요. 그러니 이것은 창조이전에 숨겨진 비밀이 이스라엘 나라가 멸망하고 난 뒤에 드디어 배후에 숨겨진 아우라가 피어난다는 거예요. 제가 이런 말을 하니 마치 소설 쓰는 느낌 드는데. 소설이 아닙니다. 마치 세월호 침몰하고 난 뒤에 귀신들이 진도근처에서 피어오르는 그 느낌이 든다니까요. 눈에 보이는 역사만 인정되는, 눈에 보이는 역사와 이순신장군, 강감찬 장군만 인정되는, 이 세상에서 짐승의 역사가 등장한다는 것은, 짐승의 세계가 등장한다는 것은, 이건 상상도 못한 거죠.

그래서 느브갓네살은 바벨론입니다. 바벨론에 대해서 모든 역사는 실제에 있는 바벨론나라에요. 실제로 그 나라에 있었어요. 지금 북한이 있고 필리핀이 있는 것처럼. 실제 나라가 바벨론이거든요. 성경은 그렇게 보지 말라는 거예요. 그것은 짐승과 관련된 나라라는 거예요. 바벨론.

그런데 이스라엘 멸망하고 난 뒤에 이쪽이 묵시가 돼버리면, 묵시가 된 상태에서 이젠 짐승에 대한 공격이, 짐승에 대한 공격을 하려면, 인간은 짐승을 공격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 이스라엘 멸망을 통해서 증명되었어요. 왜냐 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는데 율법을 줬는데, 율법을 줬을 때, 나름대로 자기 딴에는 지킨다고 지켜봐야 율법이 완성됩니까? 안 됩니까? 안되지요.

로마서 3장, 4장, 5장, 6장, 7장이 뭡니까? 율법을 준 것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으라고 준 것이 아니고 모든 입을 막고 저주아래 있게 하심이라. 죄를 더욱 더 죄 되게 확장시키기 위해서 율법을 준 거예요. 이게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확실하게 됐습니다. ‘아! 어떤 인간도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어떤 인간도 십계명 지키려고 덤벼들다가는 십계명 앞에서 더욱 더 죄인 됨을 더욱 더 노출시킬 수밖에 없구나!’ 그 이유가 뭐냐, 너희들은 사단 밑에 짐승 밑에 예속돼 있는 거예요.

신약의 내용은 이거에요. ‘너희들은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다.’ 왜? 짐승이 너희를 누르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누구에게 시험받아요? 성령께서 일부러 광야에 보내가지고 누구한테 시험받습니까? 마귀한테 3번 시험받지요. 그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어떤 인간도 마귀의 시험에 안 겪게 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거예요. 이겨낸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었고 예수님 빼놓고 그 모든 인간들은 마귀가 누르는 그 압력을 그 힘에 대해서 지배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 말입니다. 결국 구원 안 된다 이 말이에요.

자기 힘으로 율법 지켜서 구원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오히려 죄가 더욱 더 증강하고 더욱 더 힘을 발휘하게 되어있습니다. 사람이 반성하면 반성할수록 자기가 점점 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어있는 게 인간이에요.

따라서 여기서 개인으로 어떻게 개인적인 나라, 이스라엘 나라가 어떻게 구원받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개인적인 시도는 모든 것이 실패로 끝났을 때, 그러면 약속대로 천국은 이루어지는데, 그 천국은 어떻게 구원되는가, 개인은 손들고 저 구원해 달라면 구원해 줍니까? 이미 실패로 끝났음이 확정됐는데.

이거 하나만 하고 10분 쉽시다. “내가 예수 믿겠습니다.”하고 손들고 나와 버리면 그 사람은 그게 하나의 율법이 되어버려요. “내가 몇 월 몇일 날 예수 믿었습니다.” 이게 바로 구원파에요. 구원파는 뭡니까? 개인구원이에요. 그야말로 이단이에요. 이스라엘이 했던 그 짓을 또 하고 있는 거예요. 신천지도 마찬가지고. 구원파도 마찬가지라면 나머지 모든 교파도 마찬가지에요.

“목사님, 내가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받습니까?” 이 시작부터가 이 언약 계통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지금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안 된다는 것을 모르는 거예요. 이 짐승이 있는 시대에는. 그런 질문이 용납이 안 되거든요. 질문 자체가 용납이 안돼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그건 10분 쉬고 합시다.

 첨부파일 : 수원140501a-(생명수)4강 - 이 근호 목사.hwp (34.0K), Down: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