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140501b-(생명수)4강 - 이 근호 목사
얇은 베니아판(합판)을 한 번 그려보겠습니다. 우리 머리위에 이렇게 있습니다. 이리 있으면 우리는 이렇게 합니다. “하나님, 저 구원될까요? 안 될까요?” 옆 사람이 “저는 어떻게 됩니까? 저는 합격이에요? 불합격이에요? 천국에.” 다른 사람은 “설마 저는 지옥 보내지는 않겠지요?” 이렇게 할 때, 위에서 합판이 내려오면 합판은 넓고 개인전체에게 한꺼번에 떨어지거든요. 베니아판이 뭐냐 하면, 구원의 조직체에요. 성경에서는 이걸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내가 가입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자체가 내려와요. 그러면 여기서 이스라엘 자체가 뭐냐 하면, 좌석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빈자리가 그냥 내려오지요. 이미 구원에 있는 구조가 내려온다면 우리가 이야기하는 구원이란 개념은 이 구원과 안 맞게 되어있어요. 안 맞는 게 뭐냐 하면, 그럼 당신은 안 맞는 증거는 있느냐, 있습니다. 안 맞는 증거가 뭐냐 하면, 처음 이스라엘 될 때에 어린양의 피를 발라서 그들이 홍해바다를 건너왔고 애굽에서 탈출이 성공할 수 있었잖아요.
자, 그러면 제가 어린양의 피를 언급했는데, 이게 없다고 생각해 봅시다. 없다고 생각하고 이스라엘 나라 히브리인들밖에 없다고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애굽에서 고생합니다. 어떻게 저희들을 구원해 주시고 험한데서 벗어나게 해주세요. 여호와의 하나님,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우리는 조상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구원해 주세요.” 할 때에 그렇게 요구할 때에 그들 머릿속에 어린양의 피라는 것이 그들의 머릿속에 나올까요? 안 나올까요? 처음에 그들이 애굽에서 고난 받을 때, 모세가 오기 전에 그들의 머릿속에 고생하는 히브리인들 속에 ‘어린양의 피만 있으면 되는데.’ 라는 생각을 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안 했지요. 그러니까 일방적이에요. 일방적.
“하나님, 우리 가정 구원해 주세요.” 뭐 해달라는 것과 너무나 일방적이에요. 하나님의 진짜 준비된 천국은 전혀 생각 못하고 자기가 너무나 이 세상이 고생되니까 남자는 이마에 땀이 흘러야 되고 여자는 해산하는 고통을 하면서 남자한테 지배받는 그런 저주를 받았으니까 너무나 사는 게 힘드니까 힘든 것을 모면해 보자. 힘들면 불행하고, 불행은 눈물 나고, 눈물 나면 괴롭고, 그렇게 괴롭게 하다가 나중에는 죽으니까요.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고 제가 가슴이 아팠어요. “이래 살다가 내가 고생하다가 죽겠다.” 고 짧은 멘트에 굉장히 제가 실감나는 감명을 받았어요. 그게 당신뿐만 아니고 모든 사람이 다 그래. 다 그렇다고요. 고생만 하다가 인생 끝나는 거예요. 언젠가는 고생이 면해지겠지~ 언젠간 고생이 면해지겠다고 그렇게 희망은 품고 있지만, 막상 살아보면 고생뿐이에요. only 고생. 오직 고생뿐이라니까요. 고생 좀 덜하다 싶으면 온 몸이 삭신이 쑤시면서 안 아픈 데가 없고 몸이 성한 데가 없고 사람이 늙어가는 모습이 그렇게 뭔가 자신이 파괴되어 간다는 걸 느끼지요. 왜냐 하면, 젊은 날을 기억하니까. 이놈의 기억이 문제라. 잘났을 때, 멋있을 때를 기억하니까 지금과 비교가 되니까 그만큼 자괴감이 더 커지는 거예요.
너무나 예쁜 여자하고 살다가 사별을 하거나 이혼을 해놓고 그 다음에 두 번째 결혼을 하려하면 반드시 찾는 것이 전번보다 더 예쁜 거나 더 나은 사람 찾지 못생긴 여자 같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혼자 살면 혼자 살지. 전처가 너무 예쁘면 그 다음 후처는 괴롭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이 기억이라는 것이 자기를 힘들게 만드는 요인 중에 포함이 돼버렸어요. 애를 잃고 난 뒤에 애가 뛰노는 거 보면 미치고 환장할 거예요. ‘내 애가 살아있었으면 물에 안 빠졌으면 이 나이 때면 이렇게 뛰어놀 텐데.’ 지금 그걸 자꾸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걸 생각하니까 안 보이는 곳에 가야되는데 안 보이는 데가 있습니까? 다 TV있는데.
그러니까 사는 거 자체가 트라우마, 정신적인 상처를 다 지니고 살기 때문에 얼마나 사람들이 사는 게 힘들었으면 천국을 그리워하겠어요? 그래서 다 천국 갈 것 같으면 십자가 필요도 없어요. 예수님이 오실 필요도 없어요. 괴로우면 구원받으리라, 이런 공식이 있으면 돼요. “괴로우냐?” “예” “그럼 죽어서 어디 가고 싶은데?” 사람들은 “좋은데요.” “보내줄게.” 사람들은 그런 하나님을 원합니다. 어떤 공식도 필요 없고 방정식도 필요 없고 괴로움만큼 그만큼 더 상상을 하게 되는 그 세계. “그것만 하면 구원해 줄게.” 하는 우리는 편하게 그런 세계만 상상하고 있어요. 일부러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인들을 애굽의 복속을 받게 했습니다.
힘이 있다는 것은 힘은 주체를 만들어내요. 힘은 아까 말씀한 자아를 만들어내요. 힘이 있는 곳에. 무슨 말이냐 하면, 힘이 없으면 자아가 생각나지를 않아요. 힘이 있음으로서 여기서 반발하고 반항함으로서 주체가 느껴지는 겁니다. 가정에 문제가 없으면 전부 다 그럭저럭 살아가요. 가정에서 누구하나 도둑이 들어왔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거기서 도둑하고 싸워서 이겨서 그 도둑을 파출소에 신고했을 때에 그 때부터 식구들은 아버지를 와! 하고 아버지의 주체가 부하게 되는 겁니다. 그걸 어떻게 논리로 정리할 수 있느냐 하면, 힘이 있고 힘에 저항함으로서 비로소 주체는 주체 값을 하면서 드러나게 되어있어요.
지금 성도님 직장에 다니시잖아요. 그게 힘입니다. 그 힘이 있음으로서 힘에 밀리지 않기 위해서 버틸 때에 비로소 자기가 자아다운 거예요. 그런데 아무도 여러분을 핍박하지 않고 누구나 여러분을 칭찬할 때, 사람은 내가 누군 줄 도대체 몰라요. 붕 떠버려요.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에요. 뭔가 헤엄을 치되 진공에서 헤엄을 치면 헤엄치는지를 몰라요. 그런데 물에 빠뜨렸을 때는 악착같이 헤엄치면서 살아야 돼! 살아야 돼! 가 느끼게 되어있어요. 자아가 느껴진다니까요. 자극이 없으면 자아가 생기지 않는 법입니다. 미안합니다만, 현실이 그래요.
누가 나를 공격하고 쥐어뜯고 이렇게 해줘야 돼요. 누가 공격을 해줘야 되고 누가 자꾸 옆에서 시련을 줄 때, 나는 비로소 ‘나는 어떻게 하면 되지?’ 하고 자기 자아가 다시 부각이 되는 겁니다. 고요해 보세요. 이것은 공동묘지지 이건 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재미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니체라는 철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힘이 아니고 반대로 힘이 없는 권태다.’ 사람이 권태로우면 사람이 사는 게 아닙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나이 80넘은 노인네들이나 할아버지나 할머니 사는 거 보세요. 행복합니까? 노인정해서 지하철도 공짜지요. 뭐든지 반값이지요. 하고 싶은 대로. “야, 야, 용돈 없다.” 전화만 하면 재각 와가지고 부모한테 탁탁 드려가지고 그놈의 유산 때문에 찾아오지요. 자기가 뭐든지 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그게 부모한테 행복하십니까? 물어보세요. 내가 사는 게 귀신이지 이게 무슨 사는 거냐, 사람은 부딪기고 뭔가 저항할 때, 주체가 드러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할 때, 하나님의 원수를 배치를 해놔요. 하나님의 원수가 하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이 원수가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반대하는 겁니다.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한다는 것은 마귀는 알고 있는데 누구는 몰랐느냐, 애굽인도 모르고 바로왕도 모르고 인간이라고 생겨먹은 것은 몰라요. 왜냐 하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때는, 그 약속에는 사람들은 빠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빨리해서 미안합니다. 그런 것은 나중에 천천히 할 건데, 어쨌든 간에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아이디어가 애굽에 있던, 고생했던 사람들은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몰랐지요. 몰랐다는 말은 구원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백날 고생 실컷 해도 고생했다고 구원하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한 맺혔다고 구원해 주는 하나님 아닙니다. 한국교회는 한의 교회에요. 한. 한 풀러 온 교회가 한국교회에요. 그래서 부흥된 거예요. 그렇게 맺힌 한이 많기 때문에. 그러나 한 맺혔다고 구원해 주는 게 아니거든요. 한을 달래서 교회가 부흥됐어요.
실제로 출애굽은 한 맺혀서 하는 게 아니고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은 거예요. 어린양의 피로. 그러면 하나님께서 히브리인들을 왜 애굽을 통해서 왜 그리 핍박을 했는가, 애굽 바로왕을 통해서 히브리인들을 핍박을 하니까 히브리인들은 자연스럽게 자아가 발생돼요. 자아가 발생되면서 그 자아가 얼마나 문제성 있는 자아인지 본인들도 상상도 못했어요. 우리가 지금 받는 것이 하나님 때문에 당하는 일이라고 해서 자기 자신을 긍정적으로 본 겁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 편에서 이렇게 고생하는데 지켜보실 분 아니지요? 어떻게 와서 사태를 해결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여!” 마치 구원받는 것이 자기 권리가 되는 양. 그러한 정당한, 자기 있는 한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모세를 보내니까 모세가 왔으니까 하나님이 구원하러 왔는지 알았지요. 그런데 모세가 와서 하나님하고 의논하기를 “아직도 멀었어. 아직도 자기의 자아가 얼마나 더러운지를 몰라. 더 밝혀내야 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더욱 더 모세가 오고 난 뒤에 바로에 대한 학대정책이 더욱 더 강화가 되고 말았어요. 그러니까 이제는 그 히브리인들이 누구를 공격하는가 하면, 바로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모세와 아론을 공격하는 겁니다.
히브리인들의 소원은 뭐냐 하면, 애굽을 떠나는 게 소원이 아니에요. 일단 순서를 정합시다. 일 단계: 자아는 없다. 2단계: 자아발생 3단계: 발생된 자아 구원. 이것이 바로 인간 속에 내장돼 있었던 겁니다. 잠재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인간이라 생각하는 구원이라는 문제, 하나님이라는 영광, 하나님이라는 문제는 먼저 하나님보다 뭐가 우선입니까? 이 자아가 우선이었어요. 나를 구원하라 이 말이에요. 이게 출애굽기32장에 나오지요. 모세가 하나님께 시내산에 가고 단 뒤에 밑에 있는 아론과 사람들은 금가락지 빼서 뭘 만들었습니까? 금송아지 만들었지요. 누구 위해 만들었습니까? 자기를 위한 하나님, 이것을 확연하게 굳혀줘야 됩니다. “고상하고 추상적인 관념적인 그런 신학적인 것은 다 때려치우고 지금 나를 행복하게 해 달라 이 말이야.” 라고 요구하지요. 그리고 난 뒤에 그렇게 해놓고 주님께서는 여기다가 뭘 만나게 하십니까? 어린양의 죽음을 만나게 하지요. 그럼 어린양의 죽음이니까 어린양은 어린양의 나름대로 뭐가 돼요? 주체가 되는 겁니다.
히브리인들은 나라는 주체가 죽게 되었고, 너무 힘들게 되었으니까 살려달라고 하나님을 요청했는데 막상 자기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은 우리의 주체에 대해서 관여 말고 우리 주체를 덮어요. 우리 주체 말고 다른 주체로 하여금 우리가 살고자 하는 우리 주체를 덮어씌우는 새로운 주체를 들고 오신 거예요. 나를 구원하려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어떤 분을 주신 거예요. 그러면 구원은 누가 독점합니까? 나의 구원은 물 건너 간 거예요. 내 구원 없어요. 애초부터 내 구원은 성립이 안 될 요소기 때문에 내 구원은 없고, 누구 구원하는가 하면, 바로 예수님 구원이에요. 오늘 핵심이 이겁니다.
구원은 누구만 구원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만 구원해요. 인간은 구원 요구할 입장도 안 되고 자격도 안 됩니다. 애초부터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입장이기 때문에 쫓겨난 취지를 살린다면 구원해 달라는 소리가 나오면 안돼요. 주님께서 자기 아들 보내시고 자기 아들 다시 건져내심으로서 거기에 콩고물 묻히듯이 묻혀서 나온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지체 바로 천국의 백성이 되는 거예요. 그 방법을 사용하는 겁니다.
주체가 자아라고 했지요. 그 자아는 뭔가 다른 자아에 의해서 덮여질 자아로서 건짐 받는 거예요. 나는 나밖에 몰라요. 우리는 타고난 거예요. 인간의 자아는 뭐가 우선이냐 하면, 자아가 우선이 아니고 몸이 우선이고 몸이 만들어낸 이미지가지고 자아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증거가 바로 정신분석학자나 또는 생리학자들이 밝혀냈는데 아기가 6개월 이전에는 자아가 없어요. 엄마 몸과 자기 몸이 엄마 자아가 자기 자아를 대신하는 겁니다.
엄마가 장에 가변 아기는 울게 되어있어요. 왜냐 하면, 가게 되면 내가 떠난 게 되기 때문에 떨어지면 안 되거든요. 엄마가 만약에 아빠한테 야단맞으면 아기는 울어요. 왜? 엄마자아가 자기 자아를 대신하기 때문에 엄마가 꾸중 들으면 자기가 꾸중 듣는 것이기 때문에 우는 거예요. 6개월 이후에 2살, 3살, 4살 조금씩, 조금씩 성장하면서 엄마자아 따로 있고, 내 자아 따로 있다. 그걸 가지고 거울단계라고 합니다. 하여튼 이것은 성경에 관계없으니까 그냥 들어나 두세요.
자아라고 하는 것은 몸부터 먼저 있지 자아는 없다. 왜 그러느냐 하면, 애가 엄마 자궁에서 나올 때부터 남들이 볼 때는 자궁에서 나왔지만, 아직도 탯줄은 끊어졌지만 절대로 정신적으로는 끊어지지 않았어요. 엄마 품속에 있는 겁니다. 언제까지? 28세까지요. 이 두뇌가 독립적인 두뇌로서 28세까지 자라나고 보통 19세쯤 되면 드디어 독립할 마음이 생긴다고 하는데 자라나기는 28세까지 자라나요. 어쨌든 간에 그 전까지는 의존적입니다. 참, 인간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면서도 인간에 대해서 우리가 이렇게 무지해요.
사랑이라 하는 것은 우리는 흔히 사랑하잖아요. 사랑은 뭐냐 하면, 엄마하고 한몸된 그 기억을 두고 사랑이라 해요. 엄마의 몸에서 하나로 있다가 떨어져 나오거든요. 사람은 19세까지 계속 떨어져나갑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는 떨어졌다고 하지만. 이게 떨어지게 되면 엄마 몸 있고, 아기 몸 있는 게 아니고, 엄마 몸 전체가 아기에게 퍼져있는 거예요. 이게 출산하면서 떨어져 나오거든요. 떨어져 나오면 엄마 몸 이만큼에다가 점선으로 자기는 일부 상실한 거예요. 떨어져 나오면서 상실해요. 두 살, 세 살 되면서 상실 폭이 점점 떨어지잖아요. 그 상실된 것을 보충하기 위해서 엄마와 옛날에 함께 있었던 그 정서를 그대로 요청할 때, 그걸 요청하는 걸 가지고 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 사랑이라는 것은 뭐냐, 상실된 원래 내 몸을 매워 달라고 요청하는 게 사랑이에요. “당신, 나 사랑해?”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엄마한테 받은 사랑을 당신이 줄 수 있어?” 그런 뜻이에요. 처음에 남편이 결혼해가지고 “아이고, 이 미역국이 이상해.” “왜 이상해? 내가 해주는 맛이 싫어?” “우리 엄마는 맛있게 하던데 당신은...” 보세요. 엄마 찾잖아요. 엄마의 맛을 어느 정도 잃어버렸어요. 기본이 엄마 거고 당신은 엄마에게 맞추기만 하라는 말이죠. 니 솜씨부리지 말고. 내 입맛은 엄마 입맛이지 니 입맛에 맞추면 안 돼. 그러다가 잔소리 몇 번 듣고 바가지 긁고 하면 알아서 감사합니다! 하면 입맛이 바뀌기 시작하는 거예요. 나중에 십년 살면 “엄마는 요새 음식을 영 못해. 당신 음식이 최고야!” 이리 나온다 말이죠. “당신, 음식이 최고야.” 그러니 인간의 자아라고 하는 것은 자아는 내가 만드는 게 아니고 주변에서 만들어주는 거예요. 이미 상주되어 있는 정신세계에요.
그러니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독자적으로 개인적으로 살아본 적이 없고 앞으로 살 수도 없습니다. 다 들었던 풍얼 이고 다 들었던 정서와 감정을 그냥 수입해서 그냥 조립해 나온 거예요. 그게 꿈입니다. 도대체 현실이 꿈인지 꿈이 현실인지 둘 다 꿈인데. 인간이 사람을 너무 고상하게 만들어놨어요. 이 세상 자체가. 뭔가 독자적인데, 독자적인 것은 없습니다. 젊은 16살 애가 물에 빠졌을 때,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팍 쏟아지는 것, 누가 울라고 했습니까? 누가 아프게 했습니까? 왜 눈물이 납니까? 누가 돌로 나를 때리면 돌이 날아와서 때리니까 피부조직이 상처니까 거기에 신경조직이 그대로 있으니까 내가 아야! 를 느끼니까 그래서 눈물이 흐른다. 이것은 이해되잖아요. 과학적으로.
그런데 누가 나보고 욕을 했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잖아요. 욕이 실체가 있습니까? 욕이 기어이 돌멩이가 되어서 나를 때렸습니까? 우울증으로 자살한 사람이 누가 목 졸라서 자살했습니까? 세상은 싫어. 약 먹고 죽었잖아요. 누가 당신의 육체를 힘들게 했는데? 아무도 해롭게 한 게 없어요. 그런데 우울하다. 왜? 몰라. 이미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정신은 본인 게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한 지붕 세 가족이라. 같은 지붕에 있다가 자기는 그걸 못 느꼈지요. 왜냐 하면, 나는 나다. 매일 자기는 나는 나다! 하는데 절대로 인간은 나는 나가 아니에요. 나는 나가 아니고 남한테 빚져있고 남한테 지금 놀아나고 있어요. 뭔가 다른 정신에 놀아나고 있어요. 그걸 가지고 성경에서는 ‘악마의 정신’이라고 해요.
악마가 퍼트려준 유포한 스캔들에 허무맹랑한 낭설에 이미 우리는 푹 빠져가지고 몸이고 뭐고 돈이고 다 갔다 바쳤어요.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그걸 가지고 죄가 왕 노릇한다고 해요. 죄가 왕 노릇하는 입장에서는 이미 죄라는 베니아판에 있어서 우리는 이미 물려서 살고 있습니다. 나요? 베니아판이에요. 누가? 죄라는 베니아판이 내 육신을 이렇게 조작하고 있고 지배하고 있었던 겁니다.
자, 다시 봅시다. 애굽에 살던 사람 중에 두 사람이 있어요. 하나는 애굽인이 있고, 또 한 사람은 히브리인들이 있었지요. 그 때는 이스라엘이 아니고 히브리인이에요. 히브리인이 있는데 이 사람들이 애굽을 형성합니다. 애굽의 정신이 양쪽 다 지배하고 있어요. 여기서 히브리인들이 탈출했습니다. 히브리인들이 과연 출애굽 했을까요? 정신적으로? 맨날 돌아가자는 거예요. 맨날.
몸은 나왔는데 마음은 기껏 아는 것은 애굽 이외에는 배운 게 그것밖에 없어요. 아는 게 없어요. 우리가 천사를 이해합니까? 천사를 이해 못해요. 만약에 내가 어떤 프로야구팀을 LG를 응원한다. LG를 응원해가지고 LG하고SK하고 응원을 하는데, LG가 마지막 9회 말에 끝나기 전에 5점차로 이겼다. 이번엔 LG가 이겼다 했는데 9회 말에 투수가 엉뚱한데 던지더니만 5점차로 극복해서 SK가 이기면 내가 야구선수도 아니고 내가 서울가지고 않고 중계방송을 봤을 뿐인데 왜 그렇게 화가 나는지. 도대체 내 정신은 누가 장악하고 있습니까? LG라는 그 팀이 내 정신을 줬다, 폈다, 가지고 놀았잖아요. 그 LG배후에 누가 있어요? 나는 LG응원해야 될 몸으로서 지금 부림을 당하는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거예요.
출애굽?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마세요. 무슨 출애굽이 돼요. 우리가 이 세상 사람이 내려놔서 천국 만드는 게 천국이 그런 곳이에요? 주님께서는 말도 안 되는 우리 정신세계에다가 드릴로 구멍을 뚫었어요. 이걸 구멍이라고 하게 되고 이걸 철학에서는 공백이라고 해요. 텅텅 비어있는. 철학용어입니다. 공백이라는 것은 수학에서는 공집합이라고 합니다. 텅텅 비어있는 것.
뭐냐 하면, 우리가 애굽으로 꽉 차있는 것에 구멍을 뚫어버려요. 그 구멍을 뚫어버리면 바람이 어떻게 됩니까? 낯선 바람이 구멍을 뚫고 나오지요. 우리는 꽉 차있는데 이 세상으로 꽉 차있는데 어느 한 구석에 뭔가 비어있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마치 최백호가 불렀던 ‘낭만을 위하여’ 가사가 있거든요. 어느 한 곳에 비어있는. 가사 알지요? 여러분. 이 나이에 낭만이 있으랴마는, 뭔가 한 곳이 텅 비어있는 느낌이 들지요. 내 것은 아닌데 분명히 내 것으로 채울 수 없고 내 것으로 마저 채울 수 없는 텅 빈 상태. 그것을 확장시켜 나갑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다가 어린양의 죽음을 집어넣어요. 그러면 나는 나머지 몸으로 살아야 돼! 살아야 돼! 이왕 사는 거 어떻게 산다? 행복하게 살아야 돼! 어떻게? 긍정적으로 살고 우리 가족, 내 새끼 너무 너무 잘 되어야 돼! 출세해야 되고 나는 교육 잘 시켜야 되고 잘 키워야 돼! 그런데 이 느낌은 뭐지? 뭔가 한 쪽에 텅 비어있는 느낌, 누가 와서 드릴로 지금도 구멍을 뚫어가는 것. 그리고 우리의 밑바닥까지 내려앉아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붕 뜬 상태로 만드는 것. 그게 뭐냐, 살아야겠다고 하는 나의 정신세계 속에서 살아야 되기 때문에 우리는 마귀로부터 놀림을 받고 지배를 당하는데 “너는 죽어도 이미 너는 살은 거야.” 라는 소식이 들어올 때, 내가 굳이 살려고 한다는 자체가 얼마나 마귀의 놀림 상대가 되었는가, 참 부끄럽고 미안하고 정말 그동안 속아 넘어가고 원통하고 분통하고 그래요.
이미 살았는데 내 식으로 나를 또 살려야 된다는 그것이 이 세상 정신에 젖어있는 거예요. LG가 8:0으로 져도 그게 주님의 은혜고 주님의 하신 일이 되거든요. 한국 팀이 일본에 가서 5:0으로 져도 그것 때문에 술 먹고 하지 마세요. 짜증낼 필요 없이 ‘주께서 그렇게 공 넣게 하셨다.’ 이렇게 생각하면 되거든요. 왜냐 하면, 어린양의 죽음이 우리 몸속으로 하나의 정신을 불어넣을 때, 그게 성령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 주의 영이 우리로 하여금 붕 뜨면서 나중에 완전히 파쇄, 산산조각 내버려요.
뭔가 들여놓고 빵! 하고 터트려버리면 다이너마이트 집어넣고 하나, 둘, 셋 빵! 터지면 전체가 다 떨어지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의 헝겊 덩어리에 지나지 않은 존재를 우리는 그동안 이 정신, 저 정신 어떤 철학 정신, 모험 정신 해가지고 대충 말도 안 되게 얼기설기 대충 우리의 껍데기를 이렇게 이어붙인 거예요. 헝겊 조각 공예품, 퀼트라고 합니까? 헝겊 같은 넝마 같은 정신세계를 가지고 주님이 주신 몸을 가지고 유지하는 거예요.
자, 여기서 제가 구분해 보겠습니다. 방금 뭐라고 했느냐 하면, 넝마 같은 정신이라 했지요. 자, 지금까지 이거 설명했습니다. 실제로 주님께서는 뭐냐, 우리의 몸은 누가 준 거예요? 육신, 이건 하나님이 주신 거잖아요. 그럼 하나님께서는 일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꾸 넝마 같은 정신이 주님의 일을 자꾸 방해하지요. 이게 마귀에서 왔기 때문에. 이 이미지가 자꾸 방해하니까.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걷어내라, 말이죠. 넝마 같은 이것을. 제가 말함은 성경대로 하는 게 좋겠지요. 누가 너희를 속이거든 차라리 속는 것이 낫다. 이 이야기에요. 누가 너희를 사기 치거든 그래, 차라리 사기 당해버려라. “나는 사기 안 당해야 돼! 나는 똑똑하니까 나는 돈이 아까워.” 이게 바로 넝마 같은 정신에 해당된다는 겁니다.
더 이야기해볼까요. 고린도전시11장, 누가 아내 있거든 아내 없는 자같이 하고 누가 돈이 있거든 돈도 다 소용없는 것처럼. 다 쓰지 않는 것처럼, 쓰지 못하는 것처럼 생각하라. 왜? 세상 흔적은 지나기 때문에. 만화에 보면 이런 게 있어요. 미키마우스가 주인공이잖아요. 모자를 이렇게 쓴다든지 옷을 입고 있으면 뒤에서 고양이가 잡아먹으려고 오잖아요. 그러면 놀래가지고 미키마우스가 몸이 확 빠져나오면서 그 순간 몸은 모자와 같이 옵니까? 공중에 붕 떠 있습니까? 몸이 너무 빨리 빠져나오다 보니까 모자부터 몸하고 그 현장에 그냥 붕 떠있지요. 만화에 보면 바퀴가 빙빙 돌아가고 먼지 일으키고 확 빠져나가면서. 고양이는 기다려라 하면서 오잖아요.
몸은 주님께서 어린양의 죽음으로 동참시키면서 손목잡고 몸을 확 빼내면 뭐가 그대로 남아있어요? 비로소 넝마 같은 정신세계가 애굽에서 배웠던 세계가 그냥 공중에 붕 떠있지요. 미련 끊어버려라. 내가 얼마나 훌륭하게 살아왔으며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며, 내가 얼마나 착한 존재며, 얼마나 성실하게 자기를 관리했다, 이런 것을 실천했다 하지 말고 그랬기 때문에 일곱귀신도 오는 거예요. 니한테 의롭고, 착하고.
“이 더러운 몸아, 세리와 창기 같은 몸아” 하고 몸만 쥐고 가지고 오게 되면 이것은 마귀가 마음 놓고 짓밟던 놔더라,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몸은 빠져나오면서 이 몸은 뭐냐,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주여, 제가 감히 얼굴을 못 들고 저는 죄인입니다.” 할 때 주님께서는 “니가 바로 의인이다.” 하시는 겁니다. 출애굽은 우리를 착하게 만드는 게 아니고 그 몸둥아리, 알맹이 원래 죄 짓게 했던 몸이 얼마나 죄를 유발할 수밖에 없는 죄인의 몸이냐, 그것을 까발려주면서 발가벗은 몸만 달랑 빼고 내빼는 거예요. 요거하고 마치겠습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간음하고 잡히고 난 뒤에 사람들이 다 잊어버렸을 때, 주님께서 “너 간음했지? 용서해줄게.” 이게 아니고 간음한 현장에서 그 여자를 용서하지요. 그 다음에 다윗이 밧세바하고 관계를 끊어버리고 용서하는 게 아니고 밧세바하고 다시 결혼하잖아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의 몸은 아무리 포장과 치장을 해도 주님보시기에 그 몸은 어린양의 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 덩어리로 보는 거예요. 그 죄 덩어리라 하는 사실을 육신이 있는 육신그대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주의 영으로 인도해 주시는 겁니다. 바로 어린양의 피로서 대체의 몸으로서 어린양이라는 주체가, 자아가 나라는 이 몸에 대체함으로서, 그걸 대신 죽으심으로서, 대신 용서함으로서, 우리를 같이 구원하는 거죠. 그런 하늘나라에 죄인들만 모여 있는 거예요. 그리고 공로는 누가 받습니까? 그 죄인들을 자기 피로 씻어주신 주님만 공로 받는 그 상태가 천국입니다.
문제는 바로 넝마 같은 우리 정신세계, 이게 애굽에서 왔다는 사실입니다. 훅! 성령께서 빼낼 때, 우리는 죄의 몸에서 얼마나 나를 건사하게 만들기 위해서 쓸데없는 것들을 많이 동원했느냐 함을 우리 눈으로 다시 쳐다보면서 감사해야 되지요. 이렇게 빼낼 때, 너와 내가 할 것 없이 다 같은 아담의 몸이기 때문에 사람이 잘나고 못나고 차이는 없는 거예요. 그리고 차이가 없는 그것을 가지고 교회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의 성령 안에서 눈이 어떻고 발이 어떻고 코는 어떻습니까? 전부 다 한 성령을 마셔서 모두 다 육신으로서 그냥 맨몸으로 뽑혀져 나온 입장에서 니 자랑, 내 자랑할 수 없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입니다. 이게 바로 에베소서에 나오는 그 교회라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서 알곡 아닌 거 덮어 세워봐야 주님 십자가 앞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옵소서. 주께서는 우리의 죄를 가지고 아버지께 버림받을 때, 우리도 마땅히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입장인 것을 날마다 십자가 생각하면서 되새기고 그게 우리의 진 모습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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