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140403b-(원약속)2강 - 이 근호 목사
그림으로 간단하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여러분, 피리가 있잖아요. 피리에는 관이 있는데 관이 중간 중간마다 구멍이 나있지요. 구멍이 있어서 손가락으로 막고 열고하면서 불면 소리가 나잖아요. 전체 성경의 역사에서 이렇게 구멍이 난 점이 있어요. 요게 아까 이야기한 사도행전8장 빌립집사 아까 봤잖아요. 그리고 여기서는 고린도전서 십자가 이야기, 특히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 창세기3장에서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이렇게 구멍이 나있어요.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렇게 했다가 잠입을 하다가 이렇게 튀어나와서 들어왔다가 튀어나오면 되는 겁니다. 요 구멍을 ‘언약’이라고 합니다. 피리 생각하면 쉬워요.
언약을 통해서 어린양이 점점 더 사람이 돼가요. 처음에는 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해한 것이 양 잡으라고 하니까 양 잡으면 복 받는 줄 알았어요. 백날 잡아 봐도 복 못 받아요. 양을 잡으면서 사실은 양 잡는 우리가 ‘이 양의 죽음에 동참해야 사는구나!’ 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양을 잡는데, 이 양을 잡으면서 양 잡는 전문적으로 잡는 사람과 더불어 그 다음에 뭐하는가 하면, 양 같은 사람이 등장해요. 양 같은 사람. 양 같은 사람은 뭐냐 하면, 언약 때문에 하나님의 신이 임해가지고 핍박을 받는 사람이에요. 대표적인 사람이 다윗이지요.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려고 애쓴 사람도 아닌데 다윗은 그냥 가만히 있었어요. 아버지 따라서 형님들에게 도시락 전달하는 현장에 갔다가 골리앗 만났고 골리앗이 할례도 받지 않은 인간이 너무 까불어서 할례 받은 쪽을 공격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시킨 대로 공격하니까 죽었고 난데없이 그 때부터 환영 인사되었고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 되었고 자기는 팔자 필 줄 알았는데 갑자기 쫓겨 다녔습니다.
그런 사람이 또 있어요. 요셉 같은 경우입니다. 요셉은 가만히 있었는데 꿈꿨고 꿈은 지가 꾼 게 아니잖아요. 꿈 꿨고 꿈 때문에 자기 처지는 형편없이 낮아졌고 자기가 봐줬던 사람들도 잊어버리고 하나님이 꿈을 꾸게 하신 바로를 통해서 자기가 갑자기 국무총리로 승진되어 버렸지요. 또 있지요. 다니엘과 세친구도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양이 사람 될 때에 그냥 되는 것이 아니고 양 같은 그러한 사람이 등장하면서 양을 잡는 제사와 양같이 실제로 살아가는 사람과의 간격이 점점 더 간격이 벌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벌어지는 거예요. 양에서 갑자기 예수님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어린양처럼 살아야 될 그 사람들이 앞당겨서 줄줄이 나오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아시는 얼굴이니까 제가 그 다음부터 진도 착착 나가도 막히지 않을 것 같아요.
제일 먼저 나온 게 아벨입니다. 아벨은 양을 잡았습니다마는 아벨의 운명은 뭘 닮았어요? 양과 닮았어요. 양이 죽었잖아요. 양을 드린 아벨도 양처럼 죽임을 당합니다. 성경에서는 이렇게 죽음을 유발시켜서 그 죽음 근처에 대한 본질을 드러내는 용도로서 죽음을 유발시켜요. 죽음은 언약 적 죽음인데, 그냥 자살하면 안 되고요, 그냥 살다가 늙어 죽은 것 안 되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죽게 되면 그 주변에 있던 모든 속성이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이건 죽었으니까 이건 없어진 거죠. 잘 들으세요. 중요한 겁니다. 죽음은 구멍이 없어지고 이쪽은 살았다가 되고 여기서는 죽었다가 되지요. 자, 구원은 어디서 생겨나느냐 하면 죽었다, 에서 구멍을 통해서 죽었다가 올라옵니다. 어떻게 올라오느냐, 하나님의 이름으로 올라오게 되어 있어요.
창세기4장 한번 봅시다. 4장 25,26절,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여호와가 튀어나온 거예요. 여호와가. 이름을 부른 사람은 중요하지 않아요. 이름을 부른 사람은 그냥 역할이라 보면 되고 실제로 드러나는 것은 여호와 이름이 어디서 나온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위에서 내려오잖아요. 실제로는 여호와의 이름이 어디서 나옵니까? 주의 이름이 어디서 올라옵니까? 그냥 땅을 파고 올라오는 게 아니고 누가 죽어야 돼요.
언약이 먼저 주어지게 되고 언약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발생되고 그 죽음을 잊어버리거나 놓치지 않고 허비하지 아니하고 그 죽음을 통해서 생명이 나오면서 여호와의 이름이 여기서 올라오는 거예요. 이게 주님을 발견하는 원칙입니다. 주님을 어디서 발견하는가, 주님의 발견 장소는 지금 오늘날 2014년도 4월 3일 날 우리 주님을 어떻게 발견하느냐 하는 거예요. 여기서 할까요? 저기서 할까요? 특정 장소에? 수원에? 대구에 할까요? 어디에 할까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 너희 안에 있다고 했거든요. 하늘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고 어느 때에 있는 게 아니고 너희 안에 있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안에서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내가 싫어 죽은 자다, 라고 느끼면 내 안에서 주님이 “그래서 내가 너를 살려내는 거야.” 라고 하면서 주님이 부활하게 되는 겁니다. “주님, 오늘도 제가 죽어 마땅하죠?” 라고 물으니까 주님께서 “그러니까 오늘 아침부터 너를 살려냈잖아. 심장이 뛰게 하고 발걸음 세고 머리카락 세면서 살려냈잖아.” 그래서 항상 주님이 살아남은 뭐냐 하면, 우리가 언약대로 내가 죽은 자라는 것을 인정할 그 순간에 주님이 내 안에서 살아나는 겁니다. 이 말을 이렇게 해야 되지요. “살려내는 주님이 나를 들고 사용하실 때, 나를 죽이는 방향으로 일을 하신다.”라는 말과 같은 말이에요.
말을 타는 사람이 말을 다룰 때, 말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그냥 “이랴!” 하고 말 타잖아요. 주님께서 우리의 등에 타고 우리는 말이라면 말이 자기 자존심을 내세울 때는 위에 타신 주님은 뒤로 넘어져버린다고요. 그런데 말이 고분고분하고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고 주인님은 내 등에 탔습니다, 하는 순간 우리는 누구를 증거 하는가 하면, 예수님을 증거 하는 삶이 된다 말이죠. 그게. 이런 마음이 오래 갔으면 좋겠는데 오래가지를 않아요.
하나님이 일부러 그래요. 이렇게 우리는 내가 주인이 아니고 주님이 주인이라고 하는데, 그 때 누가 만약에 옆에 지나가는 사람이 욕하게 되면 갑자기 죽었다고 여기던 말이 갑자기 어떻게 됩니까? 펄쩍대면서 성질이 나면서 “니가 뭐냐?” 이리 나온다 말이죠. 우리가 펄쩍 뛰는 순간 누가 떨어져버립니까? 우리 주인님이 떨어져버리지요. 그 다음부터는 너하고 나하고 싸우면 자존심 싸움에 들어가는 겁니다.
우리가 신약시대에는 이렇게 즐겁게 할 수 있는데, 구약에서는 그렇게 즐겁지가 않아요.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이름, 주의 이름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쪽 부분을 죽음의 상태로 유발시킵니다. 그런데 그냥 자살하는 게 아니고 가해자들을 유발시켜 놓고 주의 이름을 드러내게 되는 겁니다. 그게 창세기4장 이야기입니다.
창세기5장을 보게 되면 이건 좀 복잡한데요, 창세기5장21~24절에 보면,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앞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선배들은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되었는데 이 에녹은 어떻게 됩니까? 에녹은 죽음을 보지를 않지요. 그건 왜 그런가 하면, 에녹의 4대손이 있습니다. 에녹의 4대손이 누구냐 하면 노아에요.
자, 여기서 그전에 몰랐던 새로운 법칙이 또 하나 추가가 됩니다. 기존 법칙이 뭐냐 하면, 언약에 의해서 죽음의 상황이 벌어지고 그 죽게 되면 죽음에서 생명이 나오면서 이 생명은 주의 이름과 동반해서 나온다. 그래서 주의 이름이 우리에게 생명을 준다. 낙후한 법칙을 세웠습니다. 그게 피리부분에서 구멍 난 부분에서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다윗이 범죄로 죽어야 되는데 다윗이 죽지 않고 다윗 아들이 죽고 다윗 아들이 죽고 난 뒤에 이들이 하나님이 사랑하셨다. 이러면서 솔로몬이 다윗과 밧세바를 통해서 다시 태어나죠. 그렇지요? 다윗의 아들이 죽고 밧세바와 다윗관계에서 여디디아 솔로몬이 나오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계속 이어지는 겁니다.
다윗이 분명히 범죄 했음에도 불구하고 범죄 한 자리가 주님이 나타나는 자리가 되는 겁니다. “범죄 하세요.”가 아니라 범죄 안 해도 우리는 범죄 한 자로 돼요. 하지만 주께서 그걸 이용한다는 점에서 영광스럽습니다. 이게 다른 사람한테 혜택이 안 되고 창세전에 구원될 사람에게만 주어진 혜택입니다.
뭐냐 하면, 니가 죄인임에 불구하고 죄인을 내가 충분히 사용하겠다는 거예요. 충분히 사용하겠다는 겁니다. 남이 버린 그 가건물을 주께서 돈 주고 사가지고 거기서 생명을 뽑아내겠다는 말입니다. 뽑았는데 거기에 걸려든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생명의 면류관도 반납합니다.
사도바울은 사람을 죽였어요. 사람을 죽인 사도바울에게서 뭐가 뽑아져 나옵니까? 복음이 나오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조치하신 거예요. 그 원리로만 구원받는 거예요. 따라서 자기 자신이 잘 날 존재가 될 이유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등의 그런 이유가 없어요. 그런 기대도 하지 마세요. 충분히 기대하지 마세요. 훌륭하고 잘난 존재 될 생각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안 그래도 돼요. 주께서 쓰시면 되는 거예요. 심적 부담을 갖고 살면 마귀만 좋아할 뿐입니다. 우리는 충분하게도 못난 존재에요.
여기서 노아와 에녹사이의 관계를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어제 수요일 날 그런 이야기했는데 여러분, 출생이 먼저입니까? 장례식이 먼저입니까? 순서상. 출생이 먼저 되고 난 뒤에 늙어죽어야 뭐됩니까? 장례식 하잖아요. 우리의 생각은 출생이 먼저고 장례식이 나중인데, 성경에서는 이걸 바꿔버립니다. 장례식이 기정사실이 돼요. 장례식은 기정사실이고 그 장례식의 의미를 보여주기 위해서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서 태어나게 해버려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하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도 죽을 수밖에 없는데 우리는 선택을 하면서 내가 이런 선택을 했기 때문에 올바른 선택을 했기 때문에 내가 살았다고 오해하는 거예요. 살았다고 오해하게 만들어서 출생에서 지속되는 것은 결코 장례식이 아니고 엉뚱한 데로 장례식이 없는 곳으로 갈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가 바로 우리라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이렇게 되어야 우리 자리가 죽어 마땅한 자리, 죽음의 자리, 예수님을 배태하는 자리, 예수님을 임신하는 자리가 되어버려요.
이렇습니다. “나, 부처 믿을까? 예수 믿을까?” “예수 믿어야지.” 이런 경우는 예수는 뭐냐, 살아있는 내가 보다 잘 살기 위해서 올바른 선택을 해서 예수님을 믿기로 작심하고 교회 등록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내 자신이 ‘문제없어. 나는 제대로 된 선택을 했어.’ 라고 이걸 기존사실로 했는데 이런 출발점은 성경에서는 어디에도 없는 출발점이에요.
주께서 이미 구원받기로 작정했으면 우리의 모든 선택은 엉터리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드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철저하게 쓰레기 같은 존재이고 개 같은 존재고 죄인 중에 괴수되게 만들어서 그래서 우리 속에서 예수님이 등장해버리면 이 예수님의 등장은 내가 선택한 등장이 아니고 오히려 주님 쪽에서 말도 안 되게 먼저 나를 선택했다는 그것을 확인해주는 겁니다. 처음부터 주님이고 내가 죽고 난 뒤에도 주님이고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주님이 있다는 것. 창세전에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주님은 주님이라는 것을 탄생을 통해서 깨닫게 하는 거예요. 야~ 참, 어렵다.
다시 하겠어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주께서 내가 태어나기로 작심했다는 것은 어떻게 아느냐, 내가 태어나서 하는 짓거리가 모든 것이 내 잘되는 위주로 하는 짓거리임을 폭로시키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어서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나는 내 좋아라고 하는 거야.’ 라고 생각하게 되면 창세전에 우리가 미리 예상한 그것에 대해서는 내가 관여할 수가 없잖아요. ‘일단 태어난 거 잘해보자.’ 이 식이지, ‘내가 왜 태어났지?’ ‘뭣 때문에 태어났지?’ 그건 우리의 무지에 속하는 거예요. 우리는 그 사실을 모르면 우리는 구원 못 받아요.
내가 어떤 짓을 해도 이 짓과 상관없이 태어나게 했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짓을 해도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말은 어렵지만, 알아서 챙겨 들으세요. 이해하실 겁니다. 평소에 우리의 신앙 생활하는 것이 다 내 살기 위해서 내 살기 위해서 유익되라고 했던 짓거리가, 사실은 짓거리라는 말을 상스럽게 말은 했지만, 짓거리라는 말이 맞아요. “일단 태어났으니 살아보자.” 이것은 창세전의 우리하고 이건 매치가 안 되는 거예요.
창세전의 우리가 어땠는지 알려면 우리의 죽는 것도 살려고 애써봐야 이미 죽기로 확정되었음을 우리가 수용을 해줘야 창세전의 모든 고난도 주님의 고난이라는 것. 나를 죽이는 그 주님이 창세전에 나를 만들었다는 것이 이렇게 엮이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나는 빠져야 되지요. 그런데 우리는 잘 안 빠지려 해요. 우리 자신이.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자꾸 이런 고집을 부리지 빠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은 거예요. 에녹이 잘나서가 아닙니다. 에녹과 동행하신 분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동행하신 분이 “에녹아!” “예” “니는 죽음을 보지 않는다.” “아이고, 제가 착하기 때문에.” “아니야, 그게 아니야. 니 4대 손자한테 내가 무슨 일을 할 거야.” 그 일이 손자에게 있는 일을 보여주기 위해서 미리 4대전부터 주님께서 준비단계에 들어 간 겁니다.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은 것은 에녹과 관련된 4대후손이 어떤 일을 벌이게 되면 그 일을 벌이는 것이 4대 선배들까지 영향을 미치는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그게 뭐냐, 심판에서부터의 구원. 단순히 안 죽고 사는 게 그게 문제가 아니고 우리 개인으로서는 안 죽고 사는 게 최고 중요한 문제이겠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냥 사적으로 “니, 오래 산다.” 그거 해주려고 구원해 주는 게 아닙니다. 우리를 가지고 주님의 하신 일이 얼마나 거대하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를 활용하고 싶은 거예요.
따라서 우리는 그냥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이미 살게 된 내가 하나님께서 어디에 우리를 종사케 하시느냐 더 중요한 문제에요. 에녹처럼 쓰셔도 되고 노아처럼 쓰셔도 되고 그건 주님 마음대로에요. 에녹이 노아 부러워하면 안 되고 노아가 에녹 부러워하면 안돼요. 우리 4대 고종 할아버지는 방주도 안 짓고 구원받았다. 이것을 너무 부러워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노아가 부러워요. 왜냐 하면, 방주 지었기 때문에 구원받았잖아요.
우리보고 뭐 만들라고 해보세요. 차라리 그게 나아요. 편해요. 우리가. “애야, 예배당 지어라.” “우리는 예배당 지으면 구원받습니까? 그러면 짓겠습니다.” 이게 편해요. 그런데 우리보고 뭘 요구합니까? “예수 믿어라.” 이건 더 힘들어요. 왜냐 하면, 우리는 나를 사랑하거든요.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말 앞에서 우리가 주를 사랑한다는 말이 얼마나 불가능한 말인가 우리는 실감나야 됩니다. 우리는 매일 돌아서면 나만 사랑하니까. 차라리 무엇을 만들라하면 그게 더 쉽지, 그냥 망치 들고 만들면 되니까.
노아는 방주 만들어서 구원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구원받아요. 계속해서 선배들 믿을 때, 자기 행동으로 믿은 거 같지요? 선배들은 창세전까지 가야 돼요. 오늘날 우리와 똑같은 거예요. “아니야, 내가 뭘 행동해서 구원받은 게 아니야. 분명히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그 일이 나를 지금 구원시킨 거야. 그 일이 뭐지?” 그 일은 우리가 태어나서 주께서 시키신 안에서 나의 태어남과 상관없는 태어나기 이전의 일이 태어나고 난 뒤에 시키신 일 속에 그게 합류되게 되어있어요. 포함이 되게 되어있습니다. 그걸 성령을 통해서 언약을 통해서 우리에게 까발려주는 겁니다.
그렇게 밝혀진 그 사건은 우리의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시간에 매이면 안 되고 우리의 시간을 초월한 창세전부터 창세 끝까지 모든 걸 그 안에 창세전부터 있었던 그 시간대로 해석을 해줘야 돼요. 그 해석이 얼마나 어려우냐, 어렵기 때문에 제가 장례식이 출생보다 먼저다고 먼저 설명한 거예요. 믿거나 말거나. 인간의 시간대가 아니고 주님의 시간대에서는 이게 가능한 겁니다.
세례요한도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나보다 뒤에 오신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이다. 엘리야, 모세도 마찬가지지요. 특히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먼저 계신 분은 내 뒤에 오시는 예수님이다. 아브라함이 그걸 이야기한다 말이죠.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계신 분은 내 후손으로 오실 그 분이 나보다 앞서 계시다. 요것이 내 시간인 걸 아는데 내 구원은 내 시간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바깥에 있는 이 시간대가 나를 구원한다. 이걸 누가 고백합니까? 내가 고백하는 거예요. 어떤 경우? 내가 실패했기 때문에.
나는 항상 나의 행동이 죄고 내 행동으로 내 행함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 구원은 바깥에서 조종하고 이 바깥의 조종은 내 이 시간을 초월한 시간들을 갖고 있다 이 말입니다. 말은 어렵지만, 이해는 되시잖아요. 그렇죠? 느낌 아니까.
성경해석을 시간 속으로 해석하는 게 아니고 뒤에서부터 소급해서 해석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면 아담은 어떻게 되는가, 아담은 구원받았지요. 아담도 구원받은 거예요. 아담은 에녹이 아닙니다.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았고 아담은 죽었는데, 관계없어요. 아담이라는 이 열차가 있는데, 열차에서 객차가 자꾸 연결이 되는 거예요. 연결되면 이 아담의 형상을 닮은 에녹이 나오잖아요. 그럼 에녹이 나왔으면 에녹이 죽지 않았으면 아담도 죽지 않게 돼요. 왜? 한 열차로 묶여져 있으니까.
그런데 에녹의 역할은 뭡니까?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매 죽지 않았다, 잖아요. 그 뒤에 하나, 둘, 셋, 네 번째 누가 나와요? 노아.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매 뭐가 되었다? 방주를 지었다, 되었잖아요. 그러면 노아방주에서 노아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소급해서 앞에 있는 모든 아담부터해서 여기 이 계통의 창세전의 예정된 계통은 다 방주에 구원받지요.
노아로 끝났습니까? 방주로 구원받습니까? 또 나오지요. 셈. 셈의 계통이 또 나와요. 셈 계통에 누가 나와요? 아브라함. 아브라함 뒤에 또 나와요. 이삭. 이삭 다음에 야곱. 그러니까 계속 소급해서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실 때, 엘리야와 모세가 같이 이야기하잖아요. “예수님, 구원자 예수님! 제 죄 언제 씻어줄 건데요?” “언제 돌아가셔서 죄 씻어주실 건데요?” 엘리야와 모세가 변화산에서 같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 이게 얼마나 신기하고 정말 신기하고 신기한 이야기에요.
그저 내 자식 좋은 대학에 붙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목사가 시키는 대로 헌금하면서 “주여, 받으소서. 이 헌금 받으시고 그저 복주세요.” 정화수 떠놓고 비는 그런 것. 인간이 신에게 비는 이런 거하고 이건 완전히 언약 이야기하고. 이 언약 속에 들어가야 십자가가 보입니다. 그냥 십자가는 차안에 덜렁대는 십자가지, 이 안에 들어갈 때, 내가 그냥 십자가 믿는 게 아니고 죄인이 되는 가운데서 십자가가 내안에서 유효하고 발휘가 돼요. 내가 죄인인 경우에.
나 잘났고 십자가 잘났고 그런 거 없어요. 나 못났고 십자가만 잘났어요. 나 못났고 십자가만 잘났고. 거기서 자랑하는 것은 오직 뭐만 자랑한다? 오직 나는 십자가만 자랑한다, 이리 되어야 돼요. 나는 훌륭한 목사라서 큰 교회 짓고 주님의 십자가 믿고, 그거 아니에요. 내가 선교사로서 29년 다니면서 선교했고 십자가 믿고, 아니라니까요. 어느 나라 가더라도 나는 그 나라에서 죄인일 수밖에 없고. 탄자니아에 가도 나는 죄인이고, 내가 이디오피아에서 선교한 내가 죄인이고, 알라스카가도 내가 죄인이고, 영국가도 미국가도 죄인이고.
주의 이름은 여기다가 구멍을 뚫어서 주의 이름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노아가 무슨 머리가 좋아서 방주를 만듭니까? 노아가 “토끼야, 이리 좀 들어 와줘. 토끼야 나와 놀자.” 하면 토끼가 들어옵니까? 주께서 알아서 다 들어왔어요. 알아서 다 들어왔다니까요. 그러니까 노아가 방주이면서도 자기가 겁났어요. 왜? ‘아! 나 같은 인간에게 들어 쓰시지?’ 오직했으면 모세가 “주여, 저 말 못합니다. 저 상대하지 마시고 그냥 사는 대로 살게 해주시고 다른 사람 쓰세요. 다른 사람. 제가 감당 못합니다.” 그럴 때 그게 주의 종이에요. 감당 못한다는 소리가 늘 나올 때.
주께서는 “감당하는 것은 니가 감당하나?” “니 살대로 살았는데 감당은 왜 니가 하는데? 니 숙제야? 내 숙제지.” 자식문제도 그렇고 남편, 아내 문제도 그렇고 우리가 감당 못합니다. 주 안에서 하도록 하세요. 주 안에서 한다는 말은 내가 한다는 게 아니고 주 안에서 그렇게 주께서 하시는 것에 감사함으로 그냥 결과를 수용하라 그런 뜻입니다. 모든 것이 주께서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거니까 니가 평가하고 니가 판단하지 말라 이 말이에요.
6장에 봅시다. 노아의 뜻이 뭐냐 하면, 안식인 거예요. 땅의 안식. 에녹은 개인적으로만 구원받았지만, 노아 때 오게 되면 그 후의 노아 후의 사람들은 노아덕분에 땅의 안식을 누리는 그런 시대가 오는 겁니다. 6장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이렇게 되어있지요. 이게 누가 이야기한 겁니까? 여호와죠. 여기서 하나님하지 마세요. 여호와가 등장합니다. 왜냐, 하나님과 여호와가 다르거든요. 엘로우힘과 여호와가 달라요. 여호와는 언약을 몸소 실천에 옮기신 분이고 엘로우힘은 천지를 창조한 그것을 유지, 보전하시는 분이 엘로우힘입니다.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창조한 것을 유지, 보전하고 지키는 분이고 여호와께서는 지키신 그 환경 속에서 실제로 언약을 성취시키는 분이 여호와하나님이에요. 누가 주의 이름입니까? 엘로우힘이 주의 이름이에요? 여호와가 주의 이름이에요? 여호와가 주의 이름이에요. 그걸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여호와 또는 주의 이름 이렇게 하는 거예요. 하나님도 이렇게 갑자기 하나님이 두 분으로 나눠지잖아요. 하나님의 신까지 하면 세분됩니다.
하나님의 자신이 나눠지는 이것은 언약으로만 이해가 되지 그냥 하나님해서는 몰라요. 합체하지 마세요. 우리는 신은 하나라고 합체하는데, 합체하는 신을 하지 마세요. 일을 하실 때는 세 분이 나눠서 일을 하기 때문에 같이 우리도 덩달아서 나눠서 이해를 해야 돼요. 합체하는 것은 편리하기는 하지만 이건 하나님은 우상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현재하지 않는 하나님이고 이렇게 나누어서 될 때는 나름대로 다 이유가 있어요. 나누는 이유가 있다고요. 인간을 도외시하기 위해서 이렇게 나눠지는 겁니다.
도외시하는 이유가 뭐냐, 3절에 보니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여호와께서 그 다음에 사람이 있을 때, 여기 여호와께서 뭐라고 합니까? 나의 신이죠. 나의 신. 하나님의 신을 통해서 사람과 함께 하겠다? 안 하겠다? 함께 안하겠다. 영원히. 영원히 함께하지 않겠다. 이유가 뭐라 했습니까? 그들이 뭐가 되기 때문에? 그들이 육체가 되기 때문에. 육체가 되기 때문에 함께하지 않겠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이 말이 굉장히 어렵지요. 제가 쉽게 바꾸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육체로 만들겠다는 뜻이에요. 흙이 되게 하겠다는 겁니다. 이 말은 창세기3장에 하나님이 약속한 “아담아, 니가 이름이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것을 반복해서 재확인해주는 겁니다. “너희들은 잊었지? 나는 안 잊었다.” 흙은 반드시 흙으로 돌아가라, 는 그걸 반복하는 거예요. 그럼 인간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원히 함께하지 않겠다는 것은 육체로 만들어서 없애버린다면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신이 임할 사람을 따로 만들어내지요. 그럼 육체에서 신이 임할 사람을 따로 만들어내는 방법은 여기에 뭐가 투입됩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투입될 때, 언약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신과 함께 동행이 가능합니다.
그 창세기6장9절에 보면,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했지요. 에녹과 동행한 건 달라요. 여기서 동행한 것은 앞에 뭘 전제로 했습니까? 육체가 된 인간을 영원히 함께 하지 않겠다고 하고 난 뒤에 노아와 동행하기 때문에 노아 본인의 자랑거리나 잘남을 가지고 동행했다고 하지 말고 노아에게 어떤 할 일이 있기 때문에 동행하신 거예요. 여호와께서 할 일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야곱과 함께하신 것은 야곱이 착해서가 아닙니다. 야곱이 욕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함께하신 거예요. 그래서 성도에게 중요한 것은 성도의 받은 사명이 중요한 겁니다. 그 사명은 그 때 그때 달라요. 사명을 본인이 예상하거나 짐작하지 마세요. 어떤 상황이 만들어지게 되면 그 사명을 감당케 해주실 능력을 함께 주십니다. 사도바울이 말했지요. 내게 능력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했잖아요. 사람들이 이걸 오해해요.
사도바울이 건물을 왔다, 갔다 뛰었습니까? 사도바울이 공중을 날아다녔습니까? 그렇지 않잖아요. 사도바울이 물위를 막 걸었습니까? 그런데 사도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모든 일을 했다고 했잖아요. 그 모든 일의 모든 것이 인간이 기대한 모든 일은 포함이 돼요? 안돼요? 안되잖아요. 그러니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도바울을 일을 시키겠다. 그걸 사도바울이 볼 때는 모든 일을 한 게 되도록 그렇게 해석이 되도록 하겠다는 거예요.
내가 기대한 모든 일을 하게 하신 게 아니고 “하나님, 제가 남자인데 여자로 바꾸어주시옵소서.” 이런 거 안돼요. 주께서 복음전하는 일에 니가 할 수 있는 것은 하겠다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쉽게 모든 객소리치우고 간단히 말해서 “내가 하게 된 것은 주의 은혜입니다.”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말도 어렵게 해. 쉽게 할 수 있는 문제를요. 사실은 쉽게 이야기했어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쉽게 이야기했는데 하도 사도바울을 비난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그걸 설명한다고 복잡해졌는데 “내가 하는 모든 것이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은혜로 지금 살고 있고 내가 존재하는 것도 주의 은혜로 존재합니다.” 라는 말이에요.
그렇다면 우리도 성령 받은 우리도 매일같이 그 고백을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까?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냥 마사지 받으면서 “아이구, 시원하다. 이것도 주의 은혜군요.”이리 하면 된다니까요. 뭐가 어려워요. 축구하면서 아침에 조깅하면서 “오늘도 모든 일을 하게 되는군요.” 할 수 있다 말이죠. 뭐가 어려워요. 꼭 2000명 전도하고 예배당 10개 세우고, 병든 자가 나아야 모든 일이 해당되는 줄 알아요?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사람 몇 명 전도했어요? 사도바울은 자기 할 일만 했을 뿐이고 죽을 때 되어서 죽었을 뿐이에요. 모든 소관은 주님의 소관입니다. 노아 때나 오늘날 우리 때나 달라진 거 하나도 없어요. 주께서 동행할 때는 주 안에서 동행하지, 뭐가 예쁘다고 동행해줘요. 우리가 십자가 안보면요, 동행 안하십니다. 니 맘대로 해, 니 맘대로. 니 맘대로 해. 니 잘난 대로 마음대로 해.
하나님께서 복음을 생각할 때는 도와주고 복음 생각 안하고 자기 잘난 맛에 살려고 하면 절대로 안 도와줘요. 제가 장담합니다. 입이 백 개라도 장을 지을게요. 주님께서는 복음밖에 몰라요. 새 언약이기 때문에.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서 벌거벗은 것도 언약입니다. 노아가 실수한 게 아니에요. 그것도 언약이에요. 그렇게 해야 함과 가나안이 떨어져나가요. 떨어져나가거든요. 주의 뜻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도 술 마셔서 벌거벗자, 이런 말은 아니고 노아한테는 그걸 시켰지만, 우리한테는 다른 걸 시키지요. 부동산 투기하다가 망하는 거 이런 거 시키지요.
그러니까 그냥 사세요. 그냥. 그게 주의 일이니까. 자꾸 주의 일을 따로 뽑고 내 일 따로 뽑지 마시고 그냥 다루어지시면 됩니다. 하나의 도구로서 하나의 말로서 타시는 분이 “이랴!” 하면 가는대로 가면 되지 괜히 그걸 측정하거나 평가나 판단하지 마세요. 이렇게 사는 것은 주의 은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일하시는데 우리는 논다고 착각했습니다. 절대로 우리를 놀리지 않고 창세전의 내용을 창세 이후에 태어난 작은 짧은 우리 인생으로서 말하게 하시는 그 놀라운 기적을 우리가 늘 매일 체험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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