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마태복음2강d 10021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5. 21. 20:49

마태복음 2강-d

 정리 한번 해봅시다. 마태복음 안에는 구약이 있다. 구약이 있는데 구약을 담고 신약에 마태복음이 있다. 그래서 이 마태복음에 나오는 이 모든 이야기는 바로 역사위에 하나의 점선으로 하나의 언약에 의해서 이루어지는데 이 역사위에 언약을 펼치고 있다. 그런데 이 역사라하는 것은 육의 역사다. 하지만 여기서는 영의 역사가 따로 있어서, 사람이 육으로 태어나면 육으로 죽고-구원받지 못하고, 성령으로 거듭 태어나야 하늘나라 갈 수 있기 때문에, 이 영의 활동이 필요했다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육의 노선에서 영의 노선으로 바뀔 수 있느냐? 그러면 여기에 족보 이탈이 벌어지는데, 같은 육이면서도 육에서 영으로 이어가는 그 노선에는 특별히 낯선 여인들이 개입해서 이 육의 노선을 영의 노선으로 바꾸었다고 했죠.

그 최후에 오시는 분이 다윗이 오게 되어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다윗이 아니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더라. 그러면 당신의 자손이니까, 이스라엘사람들이 솔로몬을 기대했지만, 솔로몬과 다윗의 자손이 따로 분리되서 가는거에요. 이게 뭐냐하면은, 이 14대가 이어오면서 다윗이라는 인간이 우리야를 죽였지요? 육적인 다윗에 의해서 피해를 본 우리야의 자식으로써 그 다음 후반기의 역사가 시작이 되는데, 여기는 육적인 다윗이 우리야-하나님의 백성을 죽였다는 그 사실을 책임지면서 이스라엘-다윗의 나라 자체가 멸망 되버리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멸망이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면은. 앞에 있는 14대와 맟추기 위해서 한대를 빼버렸어요. 결국 내려가는 14대는 하나님이 계획한 14대하고 그 취지가 다른 14대로 생각했기 때문에 멸망 되는거에요. 그러면 이 이스라엘의 역사 자체는 이방인이든 누구든간에 결국은 육적인 역사였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여기에 완전히 육적인 역사가 되어가지고, 어느 누구도 자력으로 구원받을 수 없는 상태에서, 마리아에게서 예수님이 나심으로 말미암아 이 다윗이 최종지점에서 만나는 영적인 진짜 모든 언약을 이루시는 메시야-구세주가 바로 다윗의 자손으로써 요셉의 가정을 통해서 오시는데. 이 요셉의 육적인 것과 관계없이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그냥 나셨다 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 나신 이 분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모든 예언들-그리스도를 향하여 그동안에 있었던 모든 예언들이 예수그리스도에 촛점을 맞추어서 여기서 다 이루었다가 성취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예수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게 되면, 바로 우리야와 같은 모습으로 오시기때문에,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고, 사람들로부터 결국 살해당하지요. 죽음을 당하지요.

그들은 위를 쳐다보고 있는데, 막상 내려오신 이 메시야는 "누가 믿었으리요. 누가 알았으리요". 그냥 우리한테 아무 쓸모짝이 없는. 그런 무의미한 그런 분으로 오신 거에요. 그런데 그분의 이름이 뭐냐하면은, 천사가 지은 이름이 있어요. 성령을 통해서 천사가 지은 이름이 뭐냐하면은. 예수.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은 '구원자'. 구원자가 되는겁니다.

그런데 이 의미가 뭔지를 우리는 모르는데, 그 의미를 천사가 뒤에서 달아줬지요. 뭐라 되어있습니까? 세가지. 예수이름이라고 해놓고, 첫째. 자기백성. 이 자기 백성이기때문에 모든 유대인들은 자기 백성이다 아니다? 백성이 아니고, 그 안에서 자기백성을 따로 뽑는 작업을 하는겁니다.

"내가 온 것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하셨거든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중에서 무엇을 따로 뽑습니까? 잃어버린 자기 양을 찾으러 왔기때문에. 이 작업을 하려면, 현재 이스라엘이라고 여기는 유대인으로써 구원받는다고 여기는 이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납득이 안되고. 도저히 매치가 안되는 그런 행동과 태도와 설교를 이 예수님이 내뿜어야 되는겁니다.

들어도 깨닳지 못하게 하는거에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게 만드는 겁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주님께서 비유로 얘기할때에 그 이야기를 하셨어요. 너희는 듣기는 들어도깨닫지 못하고. 이것은 의도적으로 한 것인데-이것은 이사야6장에 나오는 예언입니다. 그런데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아무도 볼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어른에게, 슬기로운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에게는 숨기시리라. 이 모든 것은 기적. 기적을 주면 사람들이 기적을 원해서 자기에게로 가져오고, 뭘 주면 또 자기에게 유리한데로 하는거에요. 실제로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것은 예수님 자기쪽으로 끌어땡기는 겁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하나님이 주신 이름-예수라는 구원자의 이름에 합당하게 하는 겁니다. 이것이 첫째 자기백성이고요.

두번째가 뭐냐하면은, '죄에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죄가 뭔질 몰라요.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자기 죄가 뭔지를 모릅니다. 사도바울이 만났던 예수님이 악마일까요 예수님일까요? 분명히 예수님이죠. 그러면 그 예수님이라는 증거가 어딨습니까?

자기가 우겨서 그렇습니까? 그러면 나도 우기겠다. 어젯밤에 예수 만났다 우기면 되겠네요. 그런 부흥사들 많습니다. 예수 만났다 하는 부흥사들요. 키가 180이고 이런 사람들. 6.25때 전쟁났을때 대포에 맞아서 죽을 뻔했는데,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나타나가지고, "너는 커서 유명한 부흥사가 되어야되" 이래가지고 부흥사가 되었다는 이야기 많이 하잖아요. 사람들 거기에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잘 듣고 하잖아요.

그 사람이 주의 종이라는 증거가 어딨습니까? 그런 구라? 그런 환상적인 증거? 증거는 하나밖에 없어요. 바로 이겁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죄인중에 괴수입니다. 내가 상한 심령입니다". 내가 사람앞에 죄지은것이 아니고, 누구 앞에 죄지었다? 날때부터 모태에서 날때부터 원래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라고 고백하는것. 바로 그 고백이죠.

이 고백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뭐냐하면은. 내가 죽음으로 다 죽었다는거에요. 그게 고린도후서5장에 나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모든 자가 죽은 자이다. 이거는 뭐 살아있는 사람이 자기 살았다고 우겨봐야 소용없어요. 십자가를 통해서만 사람이 그 앞에서 어느 누구도 의인이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겁니다.

심지어 율법을 지키라는 사람도 죄인이고, 심지어 이방인들조차도 십자가 앞에서 죄인입니다. 죄인이기때문에 그분이 피를 흘린거에요. 우리가 죄인이 아니라면 그 분이 피를 흘릴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만약에 어떤 선한 요소가 있다면 그분들은. 그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필요가 없고, 우리의 선한 요소를 끄집어 내서, 그걸 개발해서!, 그걸 장려해서!, 그 은사를 살려서!, 그것을 유포시켜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으로 충분했을거에요.

"너는 딴 거는 못해도 기도하나는 멋지구나. 내가 너의 기도를 키워가지고 기도 잘하게 해줄게" 흔히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유명한 용어가 있잖아요. '달란트'라는 용어에요. 이것처럼 오해받는 용어가 어딨습니까? 달란트를 가지고 재능이라고, '탈렌트'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언어적으로 뭐라고 이야기하든지,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또 뭐가 있어요? 악마의 이름이 뭐라고 합니까? 세상에 어디서 이런 거짓말이 나왔는지 몰라요. 악마의 이름은 없어요. 왜냐하면 이름이라는것은. 영적인 것에는 이름이 못붙습니다. 영적인 것은 기능만붙지 이름이라는 것이 없어요. 왜? 존재적으로 보는게 아니에요. 루시퍼라는 악마는 없어요. 루시퍼라하는 것은 그당시에 바벨론에 대한 이름이지, 악마의 이름이 아니에요. 어떤 사람은 루시퍼를 반복함으로써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이 있어요.

달란트라는 것은 재능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겁니다. 그냥 동전 이름이에요. 제가 너무 바른 소리 했습니까? 그냥 돈 이름입니다. 그 비유에서 포인트도 안됩니다. 포인트가 될 수 없어요. 포인트는 뭐냐하면은, 주인의 존재와 부재를 말합니다. 주인이 있음-존재, 주인의 없음-부재성. 주인의 부재성에 대한 비교를 말하는거에요. 달란트라하는 것은 흔히 말하는 재능 그게 아니고요. 진짜 착실한 성도는 주인이 있든 없든, 늘 주인과 함께 있다. 그것을 말하는 거에요. 마치 다섯 처녀처럼.  

"재능을 키워보라하시고. 구원받은 것과 재능을 왜 썩히십니까? 재능을 썩히면 악한 종 됩니다. 교회에서 재능을 발휘해보시기 바랍니다. 꽃꽃이, 피아노, 성가대, 주일학교에서 재능을 발휘하시면 여러분 죽어서 구원받는 것은 기본이고 이것을 통해서 보너스를 받습니다"하는 그런식으로 사람들을 상급론으로 이끌어 갔어요. 이점이 누가 주인이냐하면은 본인이 주인이에요. 예수님을 이용해서 자기 챙길것 챙기겠다는 우리의 장삿속이 드러난겁니다. 이건 선교사들이 들어올때부터 잘못됬어요.

이것을 교회사에 보면, 지적한 신학자들이 있어요. 잘못됬다고 지적해도 소용없어요. 그래도 목회자들이 장사가 되니까 이것을 써먹는거에요. 루터도 이것을 지적했을거에요 달란트 비유는 그게 아니라고. 오늘날처럼 치밀하진 않지만 그게 아니라고 지적했을거에요.

 세번째가 뭐냐하면은. 첫번째가 자기백성. 자기백성에서 뭐냐하면은. 분류. 분류작업하지요. 두번째-죄입니다. 죄에서 구원하는거에요. 그래서 구원받았다는 사람치고 '나 죄인 아닙니다'라고 하는 사람 한사람도 없어요. 다 내가 구원받은 것은 내가 죄인되서 구원받았습니다. 그럴때 물어봐야되요. 가만있지말고요.

"그럼 당신이 말한 그 죄가 무슨 죄입니까?". "나는 마음속으로 간음했습니다.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했습니다". 이것 전부다 엉터리에요. 날때부터 나는 원래부터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죄인입니다. 이렇게 되야 그게 죄가 되는거에요.

그런 것은 죄의 결과이지, 죄를 말하는게 아니에요. 우리는 죄속에서 태어나서 그냥 죄속에서 사는거에요. 다윗의 말처럼 모친의 죄중에서 태어난거에요. 모친의 하나의 통과기구이고요. 죄가 나를 만드는 거에요. 나는 죄가 만드는 작품이에요. 모친의 자궁은 그냥 죄가 나를 이용한 것 뿐이에요.

그래서 그 결과가 뭐냐? 우리가 죽는 것은 죄값으로 죽는거에요. 죄값으로 죽기때문에 우리가 이땅에서 무슨짓을 해도 구원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거에요. 그게 전도서 9장에 나옵니다. 니가 이땅에서 제사를 드리든, 제사를 안드리든, 착한일을 하든 안하든. 그거는 구원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구원은 주님이 할 소관이지. 너의 행위가 너의 구원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하지 마라 이말이지요.

이것을 수요일날 설교했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그냥 가만있으면 되겠네요? 가만 못있게 하지요. 구원을 받은 사람은 구원 받은 행세를 하도록 주께서 사태를 몰아가요. 저주 받을 사람은 저주를 받을 수 없는 사태로 몰아간다니까요. 그 구조. 우리 자신을 둘러싼 주변의 상황이 내가 선택한 상황이 아닙니다. 나는 그 상황에 대해서 선택 당했어요.

세상에 어떤 자식이 재벌집에 태어나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은 태어나보니 재벌집에 태어났고, 어떤 사람은 태어나보니 가난한 집에 태어났고. 아버지 엄마 맨날 싸우는 집에 태어난거에요. 그래서 옛날에 유명한 노래 있잖아요. 양희은이가 불렀나 하여튼, 제목이 부모란 노래가 잇어요. 어머니 저를 왜 태어나게했나요 하니까. 니가 부모되면 알리라 하지요.

근데 부모되도 몰라요. 얘가 예수 안 믿으면 부모되도 몰라요. 인간이 왜 우리가 이 부모를 만났는지. 그것은 우리가 알 바도 없고 우리가 알 필요도 없어요. 이것을 샤르트르는 투기라. '내어던진거'다라고 하죠. 던진거에요 그냥.

그래서 잠언서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가난하게도 지으시고, 부하게도 지으시고. 이것은 누구 마음이라? 하나님 마음데로입니다. 이게 마음이 낮아지는 것. 주님의 사랑을 알면, 이게 보입니다. 이 말씀이 보여, 말씀이.

모든 것이 어느 것 하나라도 주님의 뜻에서 벗어나는게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 뜻을 지킬려고 하니까. 그 다음부터는 주의 뜻인 것과 아닌것을 우리가 분류하는거에요. 주님이 분류해야하는데요. 그래서 이것은 지킨 것, 이거는 안지킨것. 앞으로 내일 지킬것. 모레 지킬것. 이렇게 분류를 해버리면. 이 구조가, 우리가 선택당한 구조가 아니고. 이 구조가 뭐냐하면은, 내가 선별한 구조, 내가 다듬어 나가는 구조가 되어버려요. 그러면 그 주변에 있는 것은 뭐냐? 나의 주체층이 되어버려요. 주체층.

말씀층이 아니고, 나의 주체층이 된다고요. 내가 임의로 내가 상상해서 만든, 내 상상에 의해서 만들어낸, 내 이성에 의해서 만들어낸, 내 의지에 의해서 뭔가 관리되는 대상. 나란 인간이 관리의 대상이 되요. 그럼 이것이 뭐냐? 누적이 되어버리면 이게 자기의가 되어버려요.

요것은 1980년도에 은혜받아서 한것이고, 요부분은 1992년도에 은혜받아서 한것이고, 이거는 2008년도에 은혜받아서 체험했고. 이렇게 체험해서 된 것을 모아버리면. 그 앞에 우뚝 선것은 뭐냐면. 주체가 내가 주체가 되요. 그러면 인간이 자기가 죽는 이유를 몰라요. 그러니까 하는 말이 어떤 어려운 사태가 되면, 제가 한번 적어볼께요. 하도 말이 많아가지고요.

"하.필.이.면.나.에.게"

이거는요. 예수 믿든 안 믿든간에 엄청 듣습니다. '하필이면 나에게'. 앞으로 이말을요. 여러분 자녀가 사법고시3차 합격 되거든 이야기 하세요. "하나님이여 왜 내 자식이 검사되는 시련을 주십니까?" 이렇게 이야기 하세요. 여러분들이 검사 되면 좋은 줄 알지요? 검찰 직원이 여섯시 반에 퇴근합니다. 검사는 열한시 반에 퇴근해요. 아내는 완전히 살아있는 과부꼴이 되요. 이거는 완전히 남편이 있으나 마나에요.

열한시 되어서 퇴근해요. 왜냐 법원을 제가 실제로 가봤어 하는 말이에요. 검찰 직원 다 퇴근해도, 검사실에 가면 옆에 서류가 이만큼 쌓여있습니다. 열시고 열한시까지 일해봐야 다음날에 또 이만큼 쌓여요. 아내들은 일류대학 나온 남편뒀다해도 소용없습니다. 집에서 애 젖이나 먹이고, 매일 티비나보고, 연속극이나 들여다보면서 계속 남편 올때까지 기다리는 거에요. 남편 들어오면 파김치가 되서 뻗어버립니다. 그러면 부인이 하는 소리가 뭐냐? "치우고 변호사 해라". 변호사 하면 장사 잘될 줄 압니까? 변호사 해봐야 안되는데. 세상에 의사든 뭐든. 남들 보기에 좋지요. 사람이 돈을 번다는 것은요. 돈을 번다는 그 돈값을 하게 되어있어요. 제일 편한 것은 머리깎고 절에 들어가는 것이 제일 편해요. 고기먹고, 술먹고 해도 주지라도 술먹고 해도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게 제일 편하지, 괜히 돈버는 장소에 가면 반드시 돈값하게 되있고. 또 돈버는 장소에 노리는 점이 한둘이 아닙니다. 모함하는 사람.

이상화 선수 금메달 땃지요? 다음에 은메달 따보세요. 욕합니다. 그동안 놀았구나 이럽니다. 죽었어요 이제는. 연금 백만원씩 타는데 이제. 그거 하느라고 애먹었습니다. 사람이 한번 공부 잘해서 1등 올라가면 걔는 죽었어요. 그 다음에 내려오면 그것은 놀은 것이 되요. 사람이라하는 것은 항상 주변의 상황을 자기가 관리하기때문에. 진리와 비진리. 선과 악을 누가 체크하냐면. 내가 체크해요. 바로 이것이 인간이기때문에. 이 인간을 우리는 못벗어 납니다.

 오늘 우리가 했던 강의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이겁니다. 방금 이야기했던 이 자기관리를 우리가 벗어날라고 하지 마세요. 그건 또 하나의 위선입니다. 그냥 사세요. 그냥 살고. 이 자체가 늘 말씀으로 엑스레이를 찍어버리면, 히브리서6장의 말씀처럼, 말씀이 우리의 골수와 관절을 쪼개서 우리로 하여금 벌거벗은 채로 다 드러내게해요. 벌거벗은 채로 드러나게 해서 우리의 위선층을 다 드러내요. 다 드러내게 되면 남는것이. "그렇다면 이 못난 나를 왜 하나님께서 구원하십니까?" 그러면 그 다음 말이 뭐냐. "나는 너를 사랑해서. 예수님의 은혜를 온 세상에 전파하기 위해서 나는 너를 그런 상황 아래 집어넣었다"이렇게 되지요. 그러면 이제 나오는 것이. "하나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고백이 나와요. 은혜입니다. 처음에는 "하필이면 나에게, 하필이면 나에게"라고 하다가.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라고 합니다. 이 변화가 바로 욥이 당했던 변화의 과정을 밟고 예수님이 갔던, 베드로가 갔던 그 길을 우리가 답습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의 층은 '나의 층' 이렇게 있고, 그것을 둘러 싸서 '주님의 은혜의 층'이 우리를 폭~ 감싸게 되지요. 그렇게 감싸게 되면, 우리는 하나의 '비닐하우스에 들어있는 아주 영롱한 난초'. 비닐하우스에 있는 하나의 청초한 난. 불면 흔들리는 거죠. 그런데 그런 흔들림 조차 갈라디아서 6장에서 보면. 이것이 바로 '예수 안'. '십자가 안'에서 있기때문에. 이것을 갈라디아서 6장에서 아주 중요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우습게 보지 마라. 나는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야~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말입니다. 나 못난 것 내가 더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나를 건들지 마라. 나는 나의 흔적이 아닙니다. 누구의 흔적? 예수님의 흔적을 가졌다. 이 흔적이 나의 중심을 차지 합니다. 흔적이 이 변두리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어~흔적 있구나". 옥상에 있는 장농을 늘 보는게 아니잖아요. 위에 있는 석유통을 늘 보는게 아니잖아요. 가끔 가다가 기름 떨어지면 보듯이. 늘 보는게 아니고. 물론 우리는 그렇게 밖에 안봐요. 우리는 예수를 24시간 매일같이 생각하는게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내가 관리하는 내 가족과 내남편 관리해요. 중요한 건 그게 중요하니까. 그들이 살아야 내가 사니까. 그들이 내 연장일 수 있고, 몸의 연장이니까.

하지만 주께서는 우리 시선을 어떤 사태를 일으켜서, 우리가 천대시한, 우리가 저 바깥에 한데 추운데 그냥 내버려 둔 방치해 논 그 예수님의 흔적이 사실은 우리를 움직이는 엔진인것을. 자동차를 움직이는 엔진으로써 은혜로써 우리 가정을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문득문득 느끼게 되는 겁니다. 그때 느끼는게 무엇이냐 하면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을 마태복음에서 뭐라고 되어있느냐 하면은. '임마누엘'이라고 하는 겁니다. 임마누엘의 뜻을 여러분 알지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주도권 싸움이지요. 함께 하신다는게. '임마누엘'이 어디에 응축되죠? 임마누엘이라는 그 기능이 어디에 응축됬습니까? 예수라는 이름에 응축됬는데, 그게 분류적이기때문에. 사람들은 임마누엘만 쳐다보고 있는거에요. 예수안에 자기백성,죄 그리고 또 한가지, 구원. 아까 세가지 했죠?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자. 이게 다 응축이 되있는데. '자기백성'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니죠. 근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몽땅 집단적으로 구원되는 임마누엘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에요. 그런데 그들의 임마누엘하고 누구하고 차이가 납니까? 예수님하고 차이 나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너희들 가운데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는데, 이 사람들은 뭘 요구하느냐 하면은, 그렇게 따로 떼지 말고 몽땅 다. 왜? 우리는 아브라함의 혈통적 자손이니까.

요새 말로 하면, 6대 할아버지부터 전부다 목사 가정이니까. 당연히 유아세례 받았으니까. 여러분 유아세례받아서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세례하고 성만찬 한다고 구원받는게 아닙니다. 저는 세례 줄때마다 그 소리 해요. "이 세례 받는 다고,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다만 이것의 의미를 아시고, 잊어버리세요"  그래서 임마누엘하고 예수님하고 매치가 되는거에요. 결국 이 임마누엘하고 매치가 된다는 것은 결국 누구한테만 해당되느냐 하면은, 아까 자기백성이라고-자기에 해당되는 사람에게만 임마누엘로, 진짜 메시야가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을 알겠지요.

그러면 제가 여기서 짧은 문제 하나 낼게요. 그러면 자기백성은 자기는 어떻게 만들까요? 자기 백성이요. 손들까요? 구원받은 사람 손들라고 할까요? 손들라고 하면 유대인들 손 다 드는데요.

질문자: 성령의 오심으로요. 질문자2: 주도가 하나님께..

포괄적으로 다 맞는 이야깁니다. 맞는 이야긴데요. 성경 절차상 뭐가 있어야 하느냐면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아야 되요. 어디 가야 되느냐면은. 물에 들어가야됩니다. 예수님이 물속에 들어가면, 여기 누가 있느냐하면은. 그전에 물속에 들어간 사람이 있겠죠. 이 사람은 세례요한에게 뭘하고? 회개하고 물속에 들어간 사람이지요. 그러면 물밖에서 만나는게 아니고, 물속에서 만나지요. 물속이 뭐냐하면, 잠수지요 잠수. 옛날에 세례는 물뿌리는 것이 아니였잖아요. 모가지를 전부 물속에다 집어 넣어 버리지요. 이거 잠수입니까 수장이에요?
 
죽음이죠. 죽음과 죽음인데. 회개하는 사람이 죽으면 이사람 구원받습니까? 안되요. 구원 못받아요. 왜? 자기 백날 회개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죽어서 구원받는게 아닙니다. 베드로가 목숨 바쳐도 구원 못받고, 하늘나라 못가요. 그러면 여기서 죽은 것은 무엇을 보기 위해서. 죽음 자리에서 뭐가 이해되느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우리같이 죄도 없으면서 물세례받는 것은 그때부터 예수님께서 뭐냐하면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에 예수님께서 합류하는 거에요.

우리가 구원받겠다고 손드는 것이 아니고. 먼저 주님께서 죄속에 들어오고 그 죄속에 들어와서 죄를 함께 가지고, 십자가에서 죄를 해결해야 그 같이 뭉쳐졌다는 이유때문에 우리가 구원받는겁니다. 방향이 예수님쪽에서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는 거에요. 제가 이렇게 얘기하면은, 여러분들은 "저는 세례요한 만난적 없어요." 이러하거든요. 걱정하지마세요. 성령세례가 오게되면, 우리가 물세례를 안받아도 예수님이 겪었던 모든 경로가 성령세계 안에 압축이 되있어요. 그래서 성령을 받게 되면, 그 안에 예수님의 행적이 함께 다 들어있는 겁니다. 여러분 구정때 선물 받지요. 선물 포장지만 받습니까? 발렌타인 데이때 초콜릿 받으면 초꼬렛 포장지만 받습니까? 그안에 뭐가 들어있어요? 진짜 알멩이 들어있잖아요.

 성령을 받게되면, 그안에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했던 모든 경로가 다 들어있지요. 경로가 들어있다는 말은, 결국 그 경로를 살펴볼때, 우리 현재 모습과 경로를 대비해보면 우리는 뭐로 드러납니까? 우리는 죽을, 예수님 아니면 저주받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인 것을 드러내지요. 그러면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항상 우리 안에서 뭐와 뭐가 대조된다. 예수님의 행적과 죄도 없으신 분이 죄의 길을 가시는 그 고난의 십자가의 길과, 그리고 그것도 모르고 내 주체층만, 내 의로움만 관리하는, 그저 내 중심적으로 살아가는 내 모습과 대비가 되죠. 그 대비가 되는 그 자체가 이미 그 사람은 이미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면 그 대비가 계속해서 이루어지려면,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죄악된 본성을 그저 노출시킬 수 밖에 없지요. 죄를 지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지으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것을 해도 그것이 주님 앞에서는, 하나의 주님처럼 완전치 못한 죄가 될 수밖에 없다 이말입니다. 베드로가 그걸 알았어요. 알고, 베드로가 뭐했느냐하면은, "일곱번 용서하면은 용서의 레벨에 도달합니까?"이랬어요. 일곱번.

아까 이야기한 것 같으면, "우리가 이디오피아에서 의사 때려치우고 신부해서 거기서 병고치면 우리는 착하다는 레벨에 도달합니까?"라는 물음과 똑같은 물음이지요. 뭐라고 했습니까? 주께서. 이디오피아가 아니라, 수단이고 나이지리아를 돌아다녀도 구원못받는다. 일곱번에 일흔번. 490번해도 니는 용서해라. 이말은 아마 490번 용서하고 난 뒤에, 491번째 무슨 효과라도 나옵니까? 왜 효과가 없느냐 하면은, 이미 490번이 누적이 되어있기때문에, "주여 드디어 489번째 용서입니다. 이제 주님 시키신데로 490번째하면 내가 의인 되겠지요?"라고 한다는 그 자체가 결국 뭡니까? 490번을 잊지않고,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자기 의를 포기 안하고 거기에다가 덧붙여서 의를 이루려니까 이 의는 바리새인들이 하는 주특기가 되지요.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죽게 만드는 거에요.

 자, 세례는 세가지가 있지요. 처음에는 뭐였습니까? 물세례. 두번째는? 불세례. 그 다음에는 성령세례인데. 이 세가지 예수님이 다 겪었습니다. 처음에는 물세례라 해가지고, 예수님쪽에서 먼저 이 더러운 물속에 들어갔다는 말이, 때국물이 흐르는 죄속에 들어갔지요. 세례요한이 말렸어요. "주님이여. 주님같이 깨끗한 분이 이 더러운 물에 들어가면 안됩니다" 하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이고 이 사람아 내가 여기 들어가야 말씀을 이룬다. 내가 죄에 합류해야 너희들의 죄가 용서받아"하고 들어오신다고요. 그러니까 세례요한이 "그러면 주님 마음대로 하세요"하고 세례를 주거든요.

그 다음에 불세례가 있는데, 불세례가 뭐냐하면은 바로 십자가 죽으심입니다. '십자가 죽으심'. 불세례란 말은 나중에 심판이 무슨 심판이지요? 물심판 말고, 그 다음에 불심판. 저주의 세례를 말합니다. 이게 내가 받을 세례가 아직 남아있다. 그게 뭐냐? 십자가의 세례. 물세례는 인간의 죄에 들어가신 것이고, 불세례는 아버지로부터 저주받는 거에요. 아버지로부터 끊어지는거에요. 십자가에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버지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아~ 영원한 저주지요? 영원한 저주. 그래놓고 다 이루었다고 하셨죠.

그래서 교회에서 예수님이 어떤 경로로, 예수님이 우리같은 죄인을 어떻게 했습니까를 전파하면, 그 듣는 교인들이, 성령받은 교인들에 한하지만, 그 듣는 교인들이 "아 예수님만 증거해야되겠구나"하는 사람. 납득이 된다면, 그 사람은 이미 자기백성에서 '자기'에 해당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똑같은 말. 아까 제가 세번째 시간에서 이야기했지요. 복음을 전할때 망하는 사람에게는 뭐로 들린다? '악취'로 들리고, 구원받는 사람에게는 '향기'로 들리지요. 아까 제가 이야기 했지요. 고린도 후서 2장 이야기했잖아요.

그러니까 성령받은 사람은 "왜 이런 좋은 말씀이 저쪽에서 악취가 될까?" 이해가 안되고. 성령받지 못한 사람은 "왜 인간의 가능성과 인간의 그 선한 의지를 저렇게 꼭 못된 심보로, 부정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비관적 의지를 가지고, 저렇게 못되게 꼭 눌어서 밟아 터트려야 그래야 목사들이 속이 시원한 이유를 모르겠다"는거에요. 성질이 못됬다는 거에요. 왜 자꾸 부정적으로,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행하면 힘얻는데, 왜 부정적으로 해가지고 왜 있는 교회들 다 쫒아내고. 왜 그렇게 하냐 이말이죠. 어떤 메조키스트들이, 자학적인 행동을 왜 벌리는가. 정신적으로 가정교육이 무슨 문제가 있었는가. 이렇게 나와요.

예수한테 물어보세요. 예수님의 발언 가운데 왜 그리 부정적이 많은지. 긍정적인 게 왜 없는지.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해요. "예수님 당시에는 그랬지만, 부활할때는 말끔히 씻어졌다" 그렇게 주장해요. 그러면 정반대로 이야기해요. 부활이라 하는 것은 오히려 예수님이 있는 좁은 영역을 크게, 십자가를 더 넓힌 것 그게 부활이에요. 십자가를 단회적으로 취소 시킨 것이 아니고요. 십자가만을 더욱 더 확산 시킨 것이 바로 부활의 능력이에요. 그래서 부활의 능력. 성령이 오게되면, 무엇만 증거하느냐하면은. 부활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증거해요. 우리는 이미 죄로 인해 죽었다는 것. 그리고 내 안에 사는 것은 그리스도가 산다는 것을 증거하게 되어있습니다. 이게 바로 물세례, 불세례. 설명 되었지요?

 자 이렇게 끝나버리면 누가 구원받습니까? 예수님 홀로 구원받지요? 그렇잖아요. 그러면 우리 구원이 되려면. 이 두개의 내역을 합해서 이걸 선물로 받들어서, 선물로 삼아서 우리에게 운송비도 택배비도 안받고 그리고 예상치도 않은, 설걷이 하다가, 또는 잠자다가, 축구하다가, 스케이트 sbs 중계방송 보다가, 갑자기 이 내용이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선물로, "선물이요~ 택배요~"라고 하늘나라에서 오게되면, 이걸 가지고 성경에서 뭐라고 하느냐면, 선물이라고 합니다. 선물. 선물을 다른 말로 두자로 하면, 이걸가지고 은사라고 하지요.

성령의 선물을 받게되면 그때부터 나오는 것은 뭐냐하면은, 세가지가 나와요. 이것은 불신자가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겁니다. 그게 뭐냐? 믿음과 소망과 사랑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인데. 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중에서 그 원천이 뭐냐하면은, 믿음과 소망은 그냥 나오는것이 아니고, 사랑에서 나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 원천은 사랑이라. 사랑이라 하는 것은 뭔뜻이냐. 반드시 그 배후에 '미워할 수도 있었는데, 사랑한다'는게, 미움을 바탕으로 해서 사랑이 나오는거에요.

이걸 가지고 로마서 5장에서 뭐라고 하느냐하면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강퍅케하시는 이유가, 오직 긍휼을 입게하심이라. 강퍅하기때문에 구원받았다면, 이것은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참 인간아~ 내가 봐줄께! 아이 봐줄께봐줄께봐줄께! 어이 택배! 구원! 티켓! 생명나라! 니는 가열에 7번". 리스트. 생명책. 창세전에 있던 리스트. 니는 가열의 7번. 좌석을 티켓으로 던져줘버려요. "자! 이게 니 좌석이다. 앞으로 이 식대로 너를 끌고 갈거야. 원망하지마. 네 행복인줄 알아라. 축복인줄 알아라"하고 끌고가는거에요.

그러면 우리는 그때부터 어떻게 되느냐하면은.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아니라, 그 티켓을 받고 난 뒤에, 그 다음부터 뭘보게 되는가? 성경을 보게 되요. 성경을 보게 되면. 왜 성경을 보느냐면. 도대체 나는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도대체 성경에 어떤 어떤 내용을 주께서 일방적으로 이루셔서 그것을 어떻게 내한테 일방적으로 적용시켰기때문, 나로하여금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한 것도 없이 죄만 짓는데 경건하다함을 얻고,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의롭게 되었는가를 쭉 조사하게 되요.

 조사를 해보면, 그 마지막 최종 정점에 뭐가 있느냐하면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화목 제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원수된 자를 그의 피로 말미암아, 너희와 화목케 했다는 그 대목이 나와요. 그러면 이 대목이 오기전에, 그 전에 뭐가 있느냐하면은. 권면과 훈계가 있어야 되요. 권면과 훈계. 그게 사도바울에 보면, 가득 들어있습니다. 권면과 훈계. 아내된 자는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교회가 주께 복종하듯 하라. 술취하지 말라. 너는 술취하지 말고 어디에 취하라? 성령에 취하라. 빛의 자녀처럼 살아라. 어둠에 속할 것은 옛 사람으로 족하다. 이제는 빛에 살아라. 너희가 주님한테 용서받았기때문에 이제부턴 너도 남을 주님처럼 용서하면서 너도 살리라. 이것이 주변에 쫘악~ 전진배치되요. 전진배치. 쫙 되있거든요.

거기에 어떤 귀절도. "너는 서울대학 가거라. 너는 재벌 되어라. 너는 삼성 취직되라"하는 대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은, 우리의 죄라는 것은 우리의 육신과 관련되어있기때문에. 욕심이 나오는 우리의 마음을 겨냥해서 치기때문에. 모든 말씀은 우리의 중심되는. 우리가 얼마나 재산 가졌는가 그것을 보는게 아니에요. 그래서 성경에서는 가난한 자라고 두둔하지 말라는거에요. 가난하다고 착한 것이 아닙니다. 가난하다면 뭘 바랍니까? 항상 그 마음속에는 "나도 언젠가는 부자되고야말리라"하는게 있거든요. 그래서 가난한자라고 착한 사람이 아니고. 항상 그 마음에. 디모데 전서같은. 디모데 전서6장에 이런 말씀이 있다고요. "우리가 아무것도 세상에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갈 것이 없다"라는 말을 교인들이 들었잖아요. 그랬는데 연말에 목사가 당회에 모여놓고 하는 말이. "우리 애가 대학들어가는데 교인들이 염치가 없지, 저그들은 복받아서 아파트 옮기고 상가 넓히면서 목사를 물로보고, 목사가 얼마나 어렵게 사는지도 모르고, 이래가지고 복을 받겠다고? 에이~나쁜 인간아. 목사가 저주하면 저주받는 거 알지?". 보통 연말이나 연초 넘어갈때에 송구영신 예배라고 해가지고, 애들 불러가지고, 안수하고 축복하고 헌금하고 하는것 있잖아요.

그때 만약에 이 본문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목사한테 뭐라고 해야됩니까? "목사님 디모데전서 6장을 보세요. 목사님 있는 것 없는 것 족한 줄을 아세요. 목사가 천국을 이야기하고, 천국이 세상보다 더 좋다면, 본인이 솔선수범해서 그 좋은 나라 먼저 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보내드릴게요. 우리는 죄가 많아서 고생더해야되니까. 이땅에서 소화도 안되는 맛있는거 사먹고, 비싼 것 사먹지만. 목사님은 그냥 가세요"라고 할 수 있는 교인이. 진정 그 목사를 사랑하는 교인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그 교인이 목사한테 매이지 말고, 말씀에 매여. 말씀의 구조에서. 항상 매트릭스. 말씀의 구조에 매여있어야. 그런 말들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걸 만약에 자기 구조에 있다면,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은.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세상에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리라. 이 말씀을 딱 대하게 되면, "주여! 제가 예수입니까! 이걸 하나님만이 지킬 수 있는 것을 저보고 지키라는 것은 이것은 너무 심합니다". 다음에 이 말은 또 너무 심해요.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악의 뿌리다'. 아니 자식들 피아노 과외시키고, 영어 과외 시키는 것이 자식들한테 남보다 뭘 벌기 위해서 하는 짓입니까? 자식들 뭐 영어 박사하라 하는 겁니까? 영어가 뭐가되요? 영어가 돈 되잖아요! "너는 나처럼 살지 말고, 나보다 더 잘살아야돼"라고 하는 그런 일념으로 자식들에게 그 비싼 돈을 대고 과외를 시킨다고요. 그렇지 않습니까? 아니 돈 벌기위해서 하지, 돈 줄려고 공부시키는 것 아니잖아요. 말이야 바른 소리 아닙니까?

 그런데 성경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올때 우리는 얼른 덮어버려요. 덮어 눌러버려요. 나오지 말라고. 얼굴 돌리고 못본체 한다고요. 그런데 우리가 언제 이것을 들추느냐하면은, 사기 당했을때, 그리고 영 남편의 수입이 적을때, "역시 하나님이 또 선하게 말씀대로 인도하시네요.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시네요". 이것은 본인이 형편이 별로 안좋으니까 변명을 그렇게 하는거에요. 사실은 내부에 뭐가 있습니까? 내부에 지금 돈 한10억 주어지면 좋아서 춤을 출 사람이. 현재 형편이 너무 어려우니까. 어려운 가운데서 신앙생활 잘하는 티를 낼려고, "주여 아무것도 가져온 것 없으면, 그냥 빈손으로 가겠습니다". 지금 당장 누가 유산준다고 생각못했던 200억 준다면, 좋아서 입이 벌어지면서.

그러니까 이래도 저래도 뭡니까? 이래도 저래도 우리는 이 말씀에 대해서. 우리는 이 말씀을 한 5초는 지켜요. 5초는 지키지만, 성경말씀에 "모든 말씀을 항상 지키지 아니하면 저주 아래있다"는 거에요. 5초가지고 안되요. 모든 말씀을 항상 지켜야되요. 24시간 이래야 됩니다. 24시간 돈 사랑하지 말아야되요. 어디가서 돈을 세하리면서, "나는 돈을 사랑안한다"이래 되야됩니다. 어디 그런 미친 사람이 있습니까? 입이 좋아서 헤헤 "보너스 받았구나" 이렇게 되지요.

 결국 이 말씀은, 우리보고 못 지키니까 나와 상관 없다는 것도 아니고, 때로는 정말 형편이 어려울때 이 말씀을 억지로 적용시키라는 것도 아니고. 이것은 뭐냐하면은, 바로 이 말씀의 끝에 십자가와 부활이 있어서. 왜 우리가 이땅에 살면서, 예수님께서 대신 우리의 죄를 감당할 정도로. 물세례, 불세례, 성령세례를 통해서 그냥 우리에게 주시는가? 하는 이유를 설명한거에요.

 우리가 이렇게 이 말씀대로 못살수밖에 없는 그것이 이게뭐냐? 이 그림하고 마치겠습니다.

이 안에 벌레가 이렇게 있어요. 이 벌레가 우리입니다. 이 벌레가 '꿈틀'거리죠. 꿈틀. 오늘 모든 강의의 핵심입니다. 꿈틀! 꿈틀거리죠.

다른 말로 하면, 행함이지요. 늘 꿈틀거려요. 꿈틀거리때 여기에 뭐가 풍기느냐? 아우라. 이 행함으로 인하여 새로 생겨서 유익되는 새로운 선행이라든지 악한 것들. 죄를 지으니까 악한 것들. 이런 자기안의 아우라를. 나의 흔적을 남기지요. 그런데 감사한 것은, 이 바깥에 방치되있는, 예수님의 흔적이 이런 모습을 포함시켜서 예수님의 흔적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것을 포함시켜서. 

이미 다 이루었던 그 예수님의 용서가. 그 예수님의 용서의 깊이와 사랑과 넓이를. 더욱 더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가 마음껏! 니 속셈있는 그대로! 그래서 기도할때는 솔직하게 기도해야되요. 스웨타를 벗을때 이래 벗지 마시고, 꺼꾸로 뒤집어서 벗으면 편하지요? 기도할때 이래하지 마세요. 고상한 것 내지 마시고. 기복신앙 나무랄것 아니고. 내가 기복신앙인 것을 마음껏 드러내세요.

 제가 어떤 교인의 기도부탁을 받았어요. 저보고 "목사님 제가 차를 사러 가는데, 그 창문 위에 올라가서 기도해주세요"해가지고, 제가 올라갔습니다. 아니 올라간게 아니고, 갔습니다. 아니 복음을 전파하면서 어떻게 그런 기복신앙을! 또 어떤 사람은 촌에서. 제가 박사교회에 있을때인데. 돼지 새끼 나은 것을 잘 키우게 해달라해서. 갔지요. 거기 갔어요. 차위에서는 기도 안했지만. 거기서 기도하면서 이랬습니다. 바로 그 사람은 그것이 꿈틀한거에요. 그런데 그 사람에게 감사한 것은. 바로 마음 속에 "차가 사고없어야돼. 사고 없어야돼"라는 것을 속에만 담아두지 않고. 그걸 목사한테 그대로 노출시켰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목사가 누굽니까? 영원한 목자가 누굽니까? 예수님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가 속에 내가 무의식적으로 담아놓은 것들이 있을게 아니겠어요? 차마 기복신앙을 욕할까 싶어서 못끄집어낸 것. 남앞에서 음성으로 할 필요 없어요. 괜히 남이 들어가지고, 유포시키면 스캔들 일어나니까 할필요 없고. 속으로 마음껏 다~ 이렇게 뒤집어 내면 그게. 그 순간 우리는 하나의 이쁘장한. 청초로운 바퀴벌레가 되는 겁니다. 이럴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님의 흔적속에 놓여있는 것을 체감하게 되는 겁니다. "주여 저 못사는 저사람보다 훌륭해서 잘사는 게 아닌 것을 제가 자인합니다"라는 것을. 지금 병원에 누버있는 사람보다 건강한 내가 결코 착해서 병원에서 퇴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망대가 넘어져서 18명 죽은 것이, 나보다 더 죄가 더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은 병원에 누워있어야 하나님의 영광이고. 나는 멀쩡해야 하나님의 영광인데. "인간적으로 솔직히 말해서. 병원에는 가기 싫습니다. 우리 가족도 가기 싫습니다. 다만 건강하게. 죽을때까지 아무 탈없이, 밥세끼 잘먹고 잘 산다고 똑똑하다고 하는 소리 들어가면서 주의 영광 돌렸으면 좋겠습니다"라고 기도하세요. 그러면 주께서 "그거는 내 마음대로 할께" 하실거에요(하하).

그런데 그런 기도를 어디서 누구 앞에서, 주님앞에서 하지 부끄러워서 누구한테 하겠습니까? 그 부끄러운 구원을 속으로도 애들 자고 난뒤에, 이불 위에서 마음껏 하시고. 남편 술먹는다고 해서 지옥가는 것이 아니지만, 제발 술을 좀 끊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기도도. 마음껏~ 하여튼 우러나오는 데로 다~하시면, 여러분들의 스트레스는요. 아마 없어질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저희들이 태어난 것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세전에 예정된 데로 예수님 증거하라고. 어느날 어느시에 태어났습니다. 살아가는 것도 우리 가는 길이 이렇게 편하고 태평스럽지만 사실은 주님 가신 그길을 우리가 가고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죄인의 개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행복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모든 영광과 공로를 면류관을 주님앞에 던질때까지 주님의 은혜를 잊지 않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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