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9가지 이미지

아빠와 함께 2026. 7. 16. 20:01

[그리스도 속의 이사야] 책에 보면 말씀의 움직이는 책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9가지의 이미지를 가지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9가지 이미지.

첫 번째 창조 이미지, 두 번째 낙원 이미지, 세 번째 악마 이미지, 네 번째 노아 이미지, 다섯 번째 아브라함 이미지, 여섯 번째 출애굽 이미지, 일곱 번째 민수기 이미지, 여덟 번째 할례 이미지, 아홉 번째 소돔과 고모라 이미지가 있는데 이미지라고 이렇게 언급한 이유는 이 이미지로 구원받을 수 없어요.

이미지는 영상 같은 거. 그림 같은 거기 때문에 사진 같은 거기 때문에 사진을 들여다 보면 구원받는다 이런 거 없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의 그 말씀이 이미지화되는 것은 우리가 이사야를 천독 백독해도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본다. 못 알아봐요. 우리가 이사야를 보고 백독해서 알아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우리의 구원받는 것은 예수님의 일방적인 은혜와 사랑 때문에 구원받아요.

이미 구원을 받아 놓은자에 한해서 왜 이런 인간이 이미지를 통과하지 못하고 이걸 기쁘게 못 받아들이는가를 그다음부터 차후에 사후에 이런 이미지화 시키는 거예요.

창조 이미지, 낙원 이미지, 악마 이미지, 이런 이미지들은 어디에는 인기가 없어요? 인간들이 자기 자체적인 사회와 국가를 위해서 일상생활에 몰입할 때는 이런 이미지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옛날 제가 어릴 때에 이발소에 가잖아요. 이발소에 가면 꼭 이발소에 그림이 있어요. 이발소 그림이라 해가지고 돈 얼마 안 줘도 길거리에서 파는 삼류 작가들의 남 흉내 내서 그린 그림들이 있어요. 깊은 산속에 계곡이 있고 어떤 외로운 사람 뱃사공이 노 젓는 거. 이발소에 앉아서 그 그림을 바라보면 ‘야, 참 좋다. 저런 세계가 있구나! 나도 저런 데서 살고 싶다.’ 하지만 이발 끝나면 나와야 돼요.

이발 끝나면 이발 한 채로 나와서 일상생활을 해야됩니다. 따라서 이런 이미지를 표현한 것은 일상생활에 아무 도움이 안 돼요. 이건. 일상생활에. 1번 하나님이 창조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창조했다, 뭐 어쩌라고? 어떻게 창조했는데? 무에서 창조했다. 이사야 45장 7절을 보겠습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이거 외우고 안다고 해서 직장생활이나 살림살이 나아지는 거 없잖아요. 없지요.

 어떤 경우에 이것이 단지 이미지가 아니고 실제 현실이다, 라는 것을 언제 알까요? 이 창조 이미지가. 간단해요. 언제 아느냐 하면, 창조 이미지로 알았던 이 창조가 나한테 내 인생에 여기에 내 인생을 새롭게 만들어 버리면 비로소 그때는 우리가 알고 싶지 않더라도 온몸으로 느끼지요.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 안에 말씀이 와서 침입을 해가지고 말씀으로 완전히 뒤집어씌운 거예요. 말씀의 샤워. 말씀에 샤워 돼서. “나는 빛을 지었단 말이야. 알았어? 나는 어둠도 창조했어. 알겠어? 나는 평안도 만들어. 알았어? 환란도 창조한 거야. 이게 여호와야.” 하는 것을 실감 나게 만드는 경우가 생길 거예요. 늘 그런 거 아닌데. 그런 경우가 생기면 그것은 바로 이미지에서 벗어나, 이미지는 못 알아들어요. 실감 나게 실제로 나는 이 말씀의 현실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만듭니다.

자, 그다음에 낙원 이미지. 51장 3절. “대저 나 여호와가 시온을 위로하되 그 모든 황폐한 곳을 위로하여 그 광야로 에덴 같고 그 사막으로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그 다음에 35장5,6절,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이걸 사람들이 보게 되면 ‘아, 이리 됐으면 좋겠다.’ 이미지죠.

이발소에 가서 ‘야, 저런 계곡 저런 강물이 넘치는 곳에 한 번 가보면 얼마나 풍경이 좋겠나’ 이발 끝나면 나와야 돼요. 잠시 내 영상속에 영상이 떠올랐던 것 뿐이지요. 이게 실제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저는 자가 뛸 것이며, 어떤 자만이 이런 고백이 나오겠어요? 소경, 귀머거리, 벙어리, 저는 자, 이 전부를 실감하는 사람. 다른 사람은 소경 실감할 사람이 있을 거고, 다른 사람은 귀머거리 실감할 사람이 있을 거예요.

이것이 실감하게 나온다는 것은 내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다가 어느 날 ‘아, 이 말씀이 내가 주님하고 상대하는 게 아니고 주님이 아버지하고 상대해서 결과물로 선물로 그냥 나한테 덮어씌었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한꺼번에 이것이 온몸으로 느껴지는 거예요.

나는 그냥 주께서 다루시는 꼭두각시 인형 같은 주께서 갖고 노는 인형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때, 이 현실에 잠시나마 이 현실에 확 담겨 들어오게 되지요. 담깁니다.

그다음에 악마의 이미지. 이사야27장1절,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는 것은 신경 쓰는 것은 그 무역하는 사람이나 고기 잡는 사람이나 신경 쓰지, 공장의 일하는 사람들이 바다에 관심도 없지요. 이건 하나의 이미지처럼 느껴지잖아요.

그런데 이사야47장을 봅시다. 과연 이미지로 끝날 것인가. 47장7,8절, “말하기를 내가 영영히 주모가 되리라 하고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지도 아니하며 그 종말도 생각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 뿐이라 나 외에 다른이가 없도다” “Yet you said, ‘I will be a queen forever.’ These things you did not consider Nor remember the outcome of them. 나 뿐이라. 나 외에 다른이가 없도다. 복음 모르는 여러분의 남편, 가족들 생각해 보세요. 그들의 주장은 뭡니까.

“나 뿐이라. 나한테 소중한 것은 나만 있으면 됩니다. 앞으로 나 잘될 거예요.” 이게 바로 마귀 이미지지요. 너무 너무 자기에게 충실하지요. 바짝 긴장할 정도에요.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짝 긴장해서 행여나 남이 귀하고 귀한 나를 건드릴까봐 완전히 털이 고추설정도로 곤두설 정도로 신경이 예민해요. 젊은 사람들이 갈수록. 전 세계가 전체가 음녀의 세계, 악마의 세계입니다. 자기한테 그렇게 예민해요. 자기한테.

그다음에 네 번째, 노아 이미지. 54장 9절, “이는 노아의 홍수에 비하리로다 내가 다시는 노아의 홍수로 땅 위에 범람치 않게 하리라 맹세한 것 같이 내가 다시는 너를 노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너를 책망하지 아니하기로 맹세하였노니” 내가 다시는 노아의 홍수로 땅 위에 범람치 않게 한다. 분명히 노아 때 홍수하고 다시는 물로서 멸망치 않겠다는 거예요. 그 말을 잘 알아 들으셔야 돼요. 다시는 멸망하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고, “노아 홍수 때 네가 사정없이 완전히 다 작살났지. 그치? 내가 다른 수단으로 그렇게 작살낼게.” 그런 뜻이에요. 이제는 물로서가 아니라 불로서 다 싸질러 버리겠다.

그다음에 다섯 번째, 아브라함 이미지. 51장12절, “너희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생산한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혈혈단신으로 있을 때에 내가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케 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의 이미지라 하는 것은 아브라함과 언약이 맺은 이상은 도중에 취소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이 보다 더 구체화되고 더 심화될 뿐이지. 한 번 택한 자를 주께서는 버리지 않는다는 이미지가 아브라함 이미지에요. 왜? 누가 먼저 찾아왔어요? 주님이 먼저 찾아왔잖아요. 주님이 먼저 찾아왔어요.

주님이 먼저 찾아온 사람과 자기가 주님을 불렀다고 여기는 사람의 차이는 뭐냐, 주님이 먼저 찾아온 사람은 항상 모든 것을 주께서 하신 결과로 보는 반면에 내가 주님을 찾아가는 사람은 내가 행동을 똑바로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내 뜻대로 일이 잘 풀리게 하겠지. 그게 안 찾아온 사람의 특징입니다. 주님이 안 찾아온 사람의 특징이 그 특징이에요.

요렇게 행동을 반듯하게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나한테 징벌을 좀 줄여준다든지, 봐줄게. 한다든지 앞으로 어떤 일도 어떤 사고도 안 일어나게 조치하겠지. 은근히 기다리는 거. 요게 바로 아브라함의 이미지하고 다른 거예요. 아브라함 바깥 이미지인 겁니다.

여섯 번째, 출애굽 이미지. 이사야11장16절, 아, 참, 출애굽 하기 전에 이사야45장 다시 한 번 봅시다. 이사야45장은 워낙 중요한 구절들이 되어서요. 45장15절, 다 같이 읽어볼까요.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야~~, 스스로 숨어계신다. 사람한테 포착되지 않기 위해서 모든 조치를 다 하시는 하나님.

“내가 먼저 주님을 찾아냈습니다.” 라는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열심히 기도해서 응답하셨다.” 하는 소리를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 내가 어려웠으니까 하나님이 찾아와서 도와줄거라는 생각 자체가 망상이라는 것. 어렵다고 도와주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이 세상에 안 어려운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다 어려워요.

어제 수요일날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우리가 살 수 없는 곳에 살고 있다고. 떠나야 할 곳에서 우리가 지금 머물려고 용쓰고 있다고요. 어릴 때부터 그래요. 어릴 때부터. 20살 때만 그런 생각이 아니고 줄곧 그것이 우리 몸에 베어있어요. 떠날 필요가 있는데 우리는 안 떠나는 반대로 살고 있으니까 본인이 얼마나 긴장되고 힘들겠습니까. 그래 놓고 자기가 이렇게 애써서 하나님이 좀 도와주면 안 되냐고 또 하나님보고 닦달내내요.

장사 좀 해보려고 하는데 또 비가 와가지고 개업하는데 손님 안 오게 만들고. 이런 식으로. 거기에 대한 답변은 하나님은 “니가 그런 소리하니까 내가 피해서 숨어버렸잖아. 시작을 내가 나대야지 왜 니가 나대. 니가 왜 그렇게 나대냐. 내가 알아서 다 하겠다는데. 진짜 믿음 없는 것도 참. 니가 믿음 없는 것도 정말 재능이다. 정말. 기술이다. 기술. 정말.” 이런 욕을 들을 때마다 그걸 감사하는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도대체 내가 어디서 문제가 있는지를 인생 살면서 그걸 늘 경험하는 거예요.

출애굽 이미지. 그거 참 중요하지요. 이사야11장16절, “그의 남아 있는 백성을 위하여 앗수르에서부터 돌아오는 대로가 있게 하시되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게 하시리라” 제2의 출애굽, 제3의 출애굽, 제4의 출애굽, 매일같이 출애굽 시키는 하나님. 이 출애굽 이미지를 말씀에 담아서 매일같이 우리를 하루 하루 스케줄과 일과를 주님쪽에서 정해 놓고 출애굽하기 위한 그러한 원칙을 그것이 오늘 우리의 하루의 삶입니다. 조금씩 조금씩 빼내는 거예요. 출애굽을 잊지 않으셨죠.

그다음에 일곱 번째 민수기 이미지. 이사야41장15절, “보라 내가 너로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 기계를 삼으리니” 민수기가 뭐 하느냐 하면, 숫자 세기거든요. 그 숫자를 왜냐하면 그 숫자 세는 게 이스라엘을 군대로 여겨서 숫자를 세요. 그래서 민수기에 보면 언약궤를 앞장세워서 그 주변에 언약궤가 댓방이고 대장이고 그 주변에 뭘로 둘러싸느냐, 이스라엘 군대로 둘러쌉니다.

그럼 전쟁을 누가 하느냐, 언약궤가 전쟁을 승리하게 되면 그 군대는 하는 일이 뭐냐, 이삭줍기. 이삭줍기하는 거예요. 폐전병들 확인하고 전리품 챙기고. 그게 이스라엘 종족, 이스라엘이 주와 함께 있는 사람이 해야될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들도 인생 살면서 여러분들이 주께서 일하시는 그 남으신 업적들을 주우세요. 공짜로 주워보면, 쏙! 쏙! 전부 다 하나님의 선물이고 은혜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주울 때 이걸 돈, 주식 이런 걸 줍지 마시고 말씀으로 주워야 돼요. 말씀으로. 건강해졌다. 그런 걸 줍지 마시고 말씀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설명이 우리를 치료하니까요. 이 말씀에 대해서 새로운 인식이 나와 이 세상과 주님을 한꺼번에 알게 만듭니다.

그다음에 할례 이미지. 이사야37장30절, 아, 요거. 야, 요거 중요하지요. “왕이여 이것이 왕에게 징조가 되리니 금년에는 스스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제 이년에는 또 거기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제 삼년에는 심고 거두며 포도나무를 심고 그 열매를 먹을 것이니이다”

요게 레위기19장23절, 25절에 나오는 나무에다가 할례를 행하면 나무에게 할례를 행하면서 나무에게 나온 실과를 니가 농사해서 내 농사의 결과를 내가 내 거 따먹는 게 아니고, 반드시 할례라는 원칙을 경유해서 죽은 나무에서 죽은 나무를 주님이 살려서 열매 맺게 해서 그 열매를 따먹는 식으로 우리가 열매가 있는 땅에 같이 살아간다, 요런 이미지를 말합니다. 이 할례가 뭐냐 하면 할례가 그런 거예요. 죽었는데 계속 살려주는 거예요. 매일같이. 그 이미지가 바로 할례 이미지입니다.

마지막으로 아홉 번째, 소돔과 고모라 이미지. 이사야13장19절, “열국의 영광이요 갈대아 사람의 자랑하는 노리개가 된 바벨론이 하나님께 멸망 당한 소돔과 고모라 같이 되리니” 이것은 이렇게 이해를 해주셔야 돼요. 우리가 보기에는 소돔과 고모라가 되는 것이 바벨론이라고 보지요. 바벨론. ‘최후의 서막을 알리는 단일제국’ 이게 바벨론입니다.

최후의 서막. 다른 말로 하면 시작된 최후. 시작된 종말. 이게 어떻다고요? 단일제국이에요. 단일제국이라 하는 것은 나라가 꼭 하나가 될 필요가 없어요. 모든 나라가 한 나라처럼 그냥 소통이 된다는 말이에요. 한 나라처럼. 서로 통하는 하나의 바벨탑처럼. 이게 뭐가 된다? 소돔과 고모라가 된다는 거예요. 불로서 유황불을 받았던 그 시범조로 받았던 소돔과 고모라.

그게 벌써 이사야에 이렇게 예언돼 있습니다. 그럼 끝으로 이사야의 이 많은 일을 누가 하느냐는 거예요. 누가? 우리 중에 누가 할까? 인간 중에 누가 할까요? 어떤 인간도 못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인간도 처녀 출신이 아니에요. 처녀에서 태어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이사야를 다 보고 백독을 하고 은혜받겠다고 다했는데 초반에 처음 이 출발점 ‘처녀가 잉태하여’ 여기에 대해서 못 믿겠다고 나자빠져버리면 소용없어요. 처녀가 잉태했다는 것은 처녀가 아닌 자는 나는 사람 취급하지 않겠다는, 나는 처녀가 아닌 데서 나온 건 사람 취급하지 않고,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상대하지 않겠다는 그걸 여러분들이 확고히 명심해야 돼요. 그게 왜냐 그게 기쁜 소식이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이 누굴 상대 안 한다? 나를 상대 안 한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왜 자꾸 쓸데없는 기도를 해요? 상대하지 않는데. 그럼 기도 어떻게 합니까? “기도하지 마!” “그럼 어떻게?” 기도하게 하실 거예요. 어떤 식으로? 주께서 하신 일을 알기 위해서. 이런 일을 했다는 것을 감사하라고 주께서 기도를 시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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