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주어를 뺀 구원

아빠와 함께 2026. 5. 31. 18:18

주어를 뺀 구원 

2026년 5월 31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2:4-7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2: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니골라 당’이라고 했을 때, ‘니골라’는 사람은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입니다.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행 6:5-6)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편에 선다고 해서 과연 주님의 손에 붙잡힌 바 된 완료된 교회라고 할 수 있을까요? 히브리서 12:22-24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하늘에 어떤 공간이 있는데 그 공간이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교회를 역사 속에서 소개하실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피냐 아니면 인간의 행함이냐는 겁니다. 끈질기고 지독한 것이 ‘행함으로 구원’입니다. 이것은 과거와 과거로 계속 이어지는 시간축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완료라는 것은 없고 그저 해볼데까지 해보겠다는 악마의 고집같은 것입니다. 성경책을 펼치고 성경이 ‘행함’ 형식으로 주어졌으니 자신도 ‘행함’ 형식으로 말씀의 효과를 성사시키겠다는 오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니골라당이 하는 행세입니다. 이 정신은 이미 민수기 25장에서 이방인 선지자 발람이 이스라엘을 파멸시키는 비책을 알고 있었음에 전제한 결과물이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여자들이 그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부속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의 두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을 떠나리라”(민 25:1-4)

즉 발람 선지자는 하나님의 손으로 자기 백성을 치는 비법을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으로부터 침을 받는 당사자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지니고 있는 완료성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것은 오늘날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십자가 자체가 발휘하는 완료성에 대해서 본인들의 시간 이해로 접수하는 것과 같습니다.

한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너희가 처음 사랑을 버렸노라’고 했을 때, 사랑을 행함으로 성취하는게 아닌 것을 사람들이 알지 못합니다. 사랑이란 사랑을 행사하는 행함의 주체자가 따로 있습니다. 사랑이란 자기편으로 강제로 끌어당기는 것을 말하고 반대로 미움이란 강제로 내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주체자의 일방적 행위입니다. 자기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사람이 아닌 것을 밀어내는 것은 도르래 운용과도 같습니다. 우물에서 두 개의 물 바가지를 한 줄에 달고 사용할 때, 한 바가지를 올리게 되면 자동적으로 다른 바가지는 아래로 내려가게 됩니다. 즉 사랑만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있는 곳에 미움 작업도 같이 이루어집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8:10-12)

이런 작업을 조정하시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십니다.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을 위로 올라가게 하든지 아래로 떨어지게 하든지 그것은 침대 누워있는 당시자가 아닙니다.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 짐승과 달리 취급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전 3:19-21)

흙이 된 채 누워있는 그 빈자리에서 비로소 모든 일의 주체자가 등장하십니다. 인간은 자기 일의 주인공이 못됩니다. 초대교회에서 위대한 신앙인으로 부추겨지면서 새로운 계열을 형성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이는 다름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침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함이라”(고전 1:11-15)

‘나’는 어떻고, ‘너’는 어떻다‘가 교회라면 도저히 성립될 수가 없는 겁니다. 그것은 행함의 주체로서 인간이 나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머리 속에서 결국에는 과거로 소실될 수밖에 없는 기억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과거 기억에 기초해서 자신을 구원받은 자로 정립하고 싶은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생명나무’ 과실을 먹게 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제안과 맞지 아니합니다. 생명나무 되시는 분이 직접 이 땅에 오셔서 먹을 자에게 먹여주시기 때문입니다. 생명나무 과실으 주인공은 따로 계십니다. 예수님이십니다. 인간이 아닙니다. 따라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이 성취되는 주인공은 예수님뿐이십니다.

이미 이점은 완료된 사실입니다. 이 완료된 사실을 계속 분명히 하는 방법은 인간이 옛 안목에 의거해서 행함으로 자기 구원을 챙기겠다는 의식입니다. 그런 인간의 행함을 마중 나오시는 주님의 말씀은 책망할 것은 책망하시고 격려하실 것을 격려하십니다. 여기에 인간의 옛 안목을 휘말리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이중성이 실제 역사 중에서 벌어지게 됩니다.

오늘날도 예외가 아닙니다. 구원된 자 입장에서 세상을 대하게 되면 항상 자기 행함의 실천성으로 말씀 완료를 성취하려합니다. 즉 생명나무를 자기 행함으로 따먹으려는 것은 결코 ‘멱여주시는 일’의 사랑을 훼손하는 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 하나님, 내 인생의 주인공은 한시도 내게 된 적이 없음을 감사한 마음으로 세상 속에서 일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9강-요한계시록 2장 4~7절(주어를 뺀 구원)260531-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계시록 2장 4~7절입니다. 신약성경 376페이지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아멘.

요한계시록 2~3장에 일곱교회가 나옵니다. 일곱교회가 나오는데 거기서 주님께서 책망도 하시고 또 격려도 해주는 말씀처럼 들리는 것도 나옵니다. 그러면 그 말씀을 대하면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보고 어떻게 행동하라고 이야기하시는 겁니까? 우리가 무슨 행동을 하면 되는 겁니까?’라는 식으로 받아지는 경향들이 있을 수 있어요. 이 말씀이, 이 책망이나 격려가 우리에게 그대로 의미 있게 다가온다면, 그때부터는 우리는 내 행동을 주시하게 됩니다.

내가 평소에 살아가는 행동과 성경에 나와 있는 이런 지시하는 행동이 일치되는지 안 되는지에 대한 여부를 계산해서 일치된다고 하면 안심하고, 좀 이렇게 일치되지 않는다면 그 부분은 이렇게 개선하고 수정하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을 우리 인간 쪽에서 하게 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바로 그런 모습 자체가 오늘 본문 6절에 나오는 니골라 당의 행위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이 니골라 당의 행위를, 여기 요한계시록에 에베소서 교회는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고 거기에 대해서 주님도 칭찬하면서, “나도 그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한다”라고 돼 있어요. 그런데 그 니골라 당의 행위가 이미 에베소 교회에서 일어났잖아요. 일어났는데, 그 교회가 그것을 지적했다는 말씀이거든요. 이 니골라 당의 행위는 15절에 보면, 버가모 교회에도 역시 니골라 당의 행위가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2장 14~15절에 보면, “그러나 네게 두어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라고 돼 있어요. 우리 보기에는 이건 니골라 당의 교훈이 아니고 발람 당의 교훈이어야 되는데, 이건 니골라 당의 교훈이라고 나왔단 말이죠.

첫째, 니골라라는 그 사람 명단이 어디서 출발하고, 어디서 등장하느냐. 이게 사도행전 6장 5절에 나오는 교회가 처음 교회를 만들 때, 일곱 집사를 세웠습니다. 근데 일곱 집사가 그 조건이 뭐냐 하면, 5절에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7명입니다. 그중에 한 사람이 제일 처음에 등장한 스데반 집사.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 사도행전 6장 5절을 보면서, 교회가 있는데, 교회 전체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것은 아니죠.

그중에서 7명을 뽑았다는 이 말이죠. 뽑힌 7명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에 해당합니다. 그 충만한 사람 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안디옥 사람 이름이 니골라예요. 설마 이 니골라가 당을 만들어 독립해서, ‘나도 새로운 사도다’라는 이런 식으로 교회를 어지럽힌다는 사실이, 믿음과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에게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고 그렇게 여러분들이 짐작할 것입니다.

문제가 이렇게 복잡해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오늘 본문 말씀인 2장의 말씀을 우리가 무시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건성으로 안 듣고 진지하게 받는다면, ‘그럼, 저들에게 어쩌란 말입니까? 저들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해요?’라는 이것이 굉장히 규정하기가 힘들어요. 왜냐하면 니골라 당은 그때 그 이야기예요. 그 당시 초대교회 이야기거든요. 니골라라는 사람 이름도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 하나이고.

그러면 지금 21세기에 있는 우리에게는, 그러면 니골라 당 말고 뭐로 이걸 적당하게 현대식 니골라 당에 해당 되는 것으로 바꿀 수 있느냐는 거예요. 그것은 바로 자기의 행함에 기초해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들이 니골라 당입니다. 그 당시에 니골라 당이 버가모 교회에 있었으니까, 그들에게 한번 물어봅시다. ‘어이, 니골라 당, 너희들이 외치는 것이 진리야?’ 그래, 진리야.

‘너희들이 외치는 진리를 믿으면 너희들은 영생을 얻는 거야?’ 영생을 얻어. ‘그러면 니골라 당에 가입하지 않으면 우리는 어떻게 돼?’ 지옥 가는 거야. 이런 식으로 니골라 당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건 인간들이 니골라 당을 ‘싫다, 좋다’라고 하기 전에, 그게 ‘싫다, 좋다’라고 할 수 있는 기준을 어디서 찾느냐? 나에게서 찾느냐, 너에게서 찾느냐, 에베소 교회에서 찾느냐, 어디에서 찾느냐?

이것을 물으면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거는 말씀에서 찾아야지’ 말씀에서 기준을 찾는다는 말은, 그거는 하나 마나예요. 하나 마나 한 말이에요. 아무 쓸데 없는 말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기본적으로 이야기하는 거는 이거예요.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이단이 아닌 자가 단 한 명도 없는 거예요. 따라서 성경을 볼 때, 이런 원칙을 준비하시면 여러분은 잘하신 겁니다.

주어를 생략하고 보세요. 성경을, 주어를 생략하고 보세요. ‘나 어떻게 해야 돼요?’ 여기 ‘나’가 들어가잖아요. ‘너, 이렇게 해야 해’ ‘너’가 들어가죠. 성경의 주어는 따로 계십니다. 말씀하신 분이 주어예요. 말씀하신 분이. 그 말씀하신 분, 자신의 말씀이거든요. 자신의 말씀을 자기 스스로 이루어 나가신다는 이 말이에요.

그러면 그 주인 되시는 분이 행사할 때, 그 주어가 우리가 아니고 주님이 주어라면, 주님이 자기가 던진 말씀을 자기가 행할 때, 그때 나오는 그 행함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습니다. 주의 행함으로 구원을 받아요. 우리는 그 주 자리에 낄 위치가 못 됩니다. 천국은 어떻게 갑니까? 천국은 주님의 행하심으로 갑니다. 얼~~마나 이게 간단합니까? 그러면 저는 뭐 합니까? 하지 마세요.

그럼 나는 뭐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입니까? 뭐든지 하는 것도 주님의 행하심입니다. 어떤 일을 행할 때, 자기 주어를 빼세요. 주어를 생략하고 그 일을 행하면 되는 거예요.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했다, 그런데 나도 미워한다”라고 할 때, 이 이야기를 천사를 통해서 들을 때,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이렇게 해야 해요. ‘내가 단독으로 행하는 일은 아예 일체, 이게 있을 수 없구나’라고 그렇게 받아들이면 돼요.

그게 바로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2장 4절에,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라고 이렇게 나오면, ‘아, 나는 처음 사랑을 버렸구나’라고 이러면 되는 거예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걱정할 그러한 주체의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나는 내 걱정의 대상이 아니에요. 우리는 하나의 현상일 뿐입니다.

주께서 말씀으로 춤추면서 나오는 그 물결, 물결이 치는 거예요. 호수에 물이 스스로 물결치잖아요. 그러면 그 돋아나는 물결, 그 물길 하나하나가 바로 우리 자신들이에요. 우리는 이 땅에 어떤 내 자리, 내 인생이라고 붙잡을 수 있는 어떤 권리나 권한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이것이 전도서 3장에 보면 이렇게 돼 있어요.

3장 21절에 보면,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우리가 짐승보다 나은 게 없는 이유는, 짐승이나 인간이나 전부 다 원질, 본질은 그냥 흙이다. 흙이 이렇게 만들어지면 짐승이 되고, 또 이렇게 만들어지면 인간이 된다. 성경은 믿기만 하면, 정말 간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흙 주제에 흙을 지킨다. 흙인 주제에 나를 지킨다. 애초부터 이런 일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적이 없습니다.

나를 지키지 마세요.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되느냐? 내가 없어지면 그 빈 자리에 진짜 주어가 등장해요. 여러분 ‘시몬스 침대’ 혹시 들어본 적 있습니까? 세계에서 제일 편안한 침대라고 하는 시몬스 침대. 근데 시몬스 침대에 우리가 흙으로서 누워 있다고 봅시다. 누워있는데, 그 흙이 아래로 떨어지는 흙이 있고 위로 올라가는 흙이 있어요.

침대 밑으로 떨어지게 되면 지옥, 침대 위로 올라가게 되면 천국, 그리고 천국과 지옥의 그 사이에서 침대에 누워 있는 우리는 천하태평이고 만사가 근심 걱정이 없어요. 어차피 우리는 위로 올라가든지 아래로 떨어지는 둘 중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전도서 3장 21절에,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여기서 인생이라 하는 것은 바로 전도서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스라엘 백성, 약속의 백성을 의미하는 겁니다. 흙에서부터 시작해서, 인간도 아니고 흙인데, 하늘에서 받아주면 비로소 너는 내 백성으로서의 인간이 된다는 그런 이야기거든요. 그러면 오늘 다시 요한계시록으로 와봅시다. 요한계시록에서, 주님께서는 “나는 이런, 이런 식으로 행한다”라고 이야기하시거든요.

“말씀대로 행한다”라고. 여기 보면 5절에,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라고 이렇게 돼 있잖아요. 그러면 주께서 주체가 돼서, 이 말씀이라는 설계도에 입각해서 우리를 데리고 다닙니다. 이 세상에 우리를 데리고 다니면서, ‘아, 이게 처음 사랑을 버린 모습이구나’ 아직 니골라 당 이야기는 안 했어요. 그 발람 당 이야기도 안 했습니다.

“네가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 여기다” 그다음에, “곧 회개하는 것은 이런 것을 회개하는 것이다. 이게 바로 처음 행위를 가지는 것이다. 회개치 아니하면 촛대를 자리에서 옮긴다”라고 하는 그런 모든 행위가 주님의 행위 안에서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니에요. 따로 떨어져 있으면 이건 문제가 커요. 24살 때, 이 말씀대로 회개했는데, 34살 때, 이 말씀을 어겨버리면, 이거는 촛대가 10년 동안 있다가, 나중에 촛대가 날아가 버린 것이 됩니다.

그런데 처음 교회에 나와서 촛대는 나와 함께 있다고 우기다가, 연세가 74세가 됐는데, 그만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어요. 그러면 74년 동안 한 것은 ‘나가리’, 끝나고 없어요. 그러면 우리는 걱정이 돼 가지고, ‘주님,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공들인 거는 어떻게 됩니까?’라고 물으면, 주님께서는 그게 바로 니골라 당이라는 거예요. 그게. 이렇게 보면 제일 쉬워요.

인간의 안목과 하나님의 안목이 있는데, 인간의 안목은 백날 살아도 과거, 과거, 과거의 연발이에요. 인간의 안목이라는 것은 내년에 뭘 해도 그다음 해가 되면, 내년에 한 것은 과거가 돼 버린다고요. 모든 것이 과거가 되는 거, 이게 인간의 안목이에요. 그런데 주님의 안목은 이미 하나님의 오른편에 지휘자 있기 때문에, 이 모든 게 완료가 돼요.

완료. 완료된 상태에서 옛날 나의 안목을 다시 들추어주는 거예요. 완료된 상태에서. 그래야 완료가 의미가 있기 때문에요. 그러면 우리는 옛날 내 행위에 의지해서, 이 요한계시록 말씀을 지켜서 구원에 이르고자 했던 그 시도가, 결국 옛사람이 갖고 있던 극히 인간적인 안목에 불과하다는 것을 완료 입장에서 알려줍니다. 그 대표적인 주기가 바로 처음 사랑이에요.

이 사랑을 설명합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미움과 반대돼요. 사랑은 단독으로 사랑을 설명 못 하고 미움을 통해서, 차이점을 통해서, 사랑을 설명하는데, 사랑이라는 것은 내 편으로 끌어당겨 주는 게 사랑입니다. 내 편으로. 따라서 사랑을 받으면 그 사람 본인의 것은 없어져요. 또 미움이라고 하는 것은 반대로 내치는 거예요. “너, 오지 마!”라고 떠밀어내는 게 미움이에요.

‘저, 주님 사랑해요. 구원받고 싶어요’라고 해도, “저리가!”라고 떠밀어내는 겁니다. 구원은 완료해서 되지, 시도한다고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이미 구원은 완료가 따로 있어요. 그걸 사랑이라고 해요. 사랑받은 자는 너의 옛날 과거 입장에서 너의 안목이 어떠어떠했기에, 나의 사랑이 없었으면 구원이 안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사랑의 차원에서 말씀을 통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야 주의 증인이 되거든요. 지금 사도 요한이 증인 아닙니까? 그리고 교회가 증인이거든요. 요한계시록 11장에. 그러니까 사랑을 알았으니까 나는 뭐 이제 성경 안 봐도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더욱 철저하게 옛날에 나는, 옛사람인 나는 얼마나 내 행위에 입각해서 구원을 안 놓치고, 구원을 따내기 위해서, 무슨 짓까지 했느냐를 똑똑히 보게 하는 거예요.

그중 하나가 니골라 당이에요. 성령 받았다는 거, 믿음 좋다는 거. 성령 받고 믿음 좋다는 게 구원의 요건이 안 돼요. 오직 주님의 사랑뿐이에요. 남들이, ‘야, 집사님 믿음 좋습니다’라는
그게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그 안목 자체가 뭐냐? 니골라 당이라는 것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상황을 마련하죠. 이것은 바로 고린도전서 1장 12절에서 사도 바울이 언급을 한 겁니다.

1장 12절에서, “이는 다름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는 이게 뭐가 나쁘냐? 앞에 ‘나’가 붙으니까 나쁜 거예요. 주체를 빼야 하는데, ‘나는 그리스도에 속한다. 너는? 나는 이런데, 너는?’ 이것 자체가 과거적 안목이에요. 근데 그 과거적 안목은 육신이 살아 있는 한, 계속 질질 끌면서 우리를 괴롭힐 거예요.

그때마다 성경을 보세요. 이 일이 그렇게 내가 흔들리고, 내가 좌절하고, 혼동되고 또다시 내 행위를 회개하는데, ‘난 또 잘린 게 아닌가?’라는 이런 걱정거리 자체가, 주께서 주의 사랑을 더 높이기 위해서 우리의 육신을 가지고 흔들기에 나섰다고 보면 됩니다. 이 도르래의 원칙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나오는데, 마태복음 8장 10~12절에 보면, 이제 그 백부장을 칭찬하시지요.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마8:9) 그 이야기를 듣고 칭찬하는 가운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아, 이런 사람도 있구나’ 하신 거죠.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리고 12절에,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도르래가 뭐냐 하면 한쪽이 내려가면, 한쪽은 올라가게 돼 있잖아요. 두레박이 내려가면, 한쪽이 또 올라가게 돼 있고, 두레박의 바가지가 두 개라면, 한쪽 내려가면 또 한쪽은 올라가게 돼 있죠.

누가 지옥 간다는 말은, 누가 천국 가게 되었다는 뜻이고, 누가 천국 간다는 말은, 누가 지옥 가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숫자가 동등하지는 않아요. 하늘나라 가는 사람이 극히 적다고 했으니까 동등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일하심이 사랑과 사랑만 일하는 게 아니라, 사랑과 더불어서 ‘너, 오지 마!’라고 밀어내는 미움도 같이 일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육신을, “너, 성경 요한계시록 2장에서 이야기했지? 처음 사랑에서 네가 떨어진걸, 네가 찾아서 회개했어, 안 했어? 안 했지? 저리 가!”라고 우리의 옛사람을 밀어낸다는 것은, 그걸 보고 즐거워하고 감사하는 우리가 이미 천국에 갔기 때문에, 우리의 옛사람을 물리치고 우리의 새사람을 받아준다는 그 이야기입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요한계시록 오늘 본문 7절에, “이기는 자에게는”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이기시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죠.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누가 이걸 먹어요? 예수님께서 이걸 먹게 해줄 때, 먹으면 되는 거예요.

먹고 난 뒤에, 우리의 과거 모습을 보면서, ‘아, 이게 주님이 주체구나. 내가 주인공이, 내 구원의 주인공이 아니구나’라고 알 때, 바로 사도 요한처럼 우리는 이 교회가 주님의 증인으로서, 계속 완료된 입장에서 증인이에요. 증인 하다가 말다가 그런 건 없어요. 우리는 망가지면서 구원받는 그걸 통해서, 주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새롭게 새롭게, 새록새록 느끼는 감사와 기쁨이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발람처럼 하나님이 구원받았다고 우기면서, 결국은 작은 일에도 우상숭배하고 넘어질 수밖에 없는 우리의 옛사람을 니골라 당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 옛사람 속에 품고 있음을 발견하는 기쁨을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으로 구원받았다고 백날 말은 하면서, 어느새 돌아서면 내 행위에 주목하는 우리의 옛사람. 또다시 말씀을 통해서 주의 사랑을 드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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