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와 교회의 차이
2026년 5월 24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2:1-4
(2: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2: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2: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에베소 교회의 사자, 곧 천사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는 교회는 주님께서 천사를 통해서 친히 드러나게 하시는 것이지 교인들의 집단에게 교회를 맡기지 않으시겠다는 겁니다. 도리어 정반대 취지입니다. 교회의 사자에게 준 계시에 위배하면 아무리 ‘교회’라고 자처해도 주님께서 가차없이 제거해 나가시겠습니다.
그래야 성도들의 집단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교회는 일찍이 사도 바울로부터 편지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 편지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엡 1:1)
여기에 나오는 ‘성도’ 혹은 ‘신실한 자’라는 것은 인간이 마련하거나 구성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서 나오는 능력 자체가 달성합니다. 따라서 사도를 통해서 실현되는 교회는 소위 ‘교회’라고 우기는 것들을 삭제하고 제거하는 도구로 말씀이 사용되어집니다. 이렇게 제거되는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제거되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용도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말씀을 동원해서 자신을 지키는 식으로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기초에 대해서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자신의 뿌리, 기초에 문제가 있음이 드러납니다.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막 4:36-41)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므로 예수님의 존재 기초와 자신들의 존재 기초가 동일하다고 여겼습니다.
인간들은 시공간을 그동안 존재의 기초로 알고 있습니다. 이는 육신이 사는 데 있어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으로 안정적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땅과 천체의 변화가 한결같이 그러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 자기 존재에 대한 애착이 너무 강렬하여 예수님과 함께 있음이 그다지 귀한 일인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참으로 예수님과 함께 있음을 원한다면 바다에 풍랑이 일어 다 죽게 되었을 경우를 고맙게 여겨야 합니다. “이참에 잘되었다. 예수님과 함께 죽을 수 있었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배에 들어온 물 퍼내기에 급급합니다.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협조를 구합니다. 무슨 협조 말입니까?
자신들의 존재 뿌리를 유지할 수 있는 상황이 되기를 주님에게 요청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주님은 제자들을 나무랍니다.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도리어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서 신기해 합니다.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막 4:41)
인간에게 있어 육은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니고데모는 예수님에게 찾아와서 자신의 육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육 말고 다른 기초, 다른 바탕을 제시하십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6-8)
따라서 인간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끌어모아서 그것을 실천하신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뿌리 자체가 육에 그대로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교회의 사자는 교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있고 열심도 있고 자칭 사도도 아닌 자를 들추어내고 어떤 어려움에도 인내하고 게으르지 않는 것에 대해서 칭찬합니다.
이것으로 성도되는 데 충분하지 않을까요? 도리어 자신의 잘하는 것은 그대로 두고 거기에다가 책망한 것을 고쳐서 책망받지 않아서 추가시키면 구원되는 성도가 된다고 여기는 것이 바로 가짜 교회의 특징입니다. 기본적으로 책망하는 것은 인간의 육의 뿌리를 겨냥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말씀 실천에 열심히라고 자신의 육의 근본은 바뀌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내하고 악한 자를 용납하지 않고 열심내는 것은 놀랍게도 처음 사랑이 없이 가능한 일이라는 점입니다. 이점에 대해서 고린도전서 13:1-3에 잘 나와 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지식, 신앙, 구제, 기적 이 모든 것도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이 모든 행위가 ‘사랑’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사도 바울을 통해서 에베소 교회에 복음이 전달되었습니다. 그 내용을 보게 되면 1장에서 ‘영원한 때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예정해 두신 자에 대한 구원’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런 예정된 선택 구원도 사람이 해내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하십니다.
그 성령님께서 일하시면서 드러나는 체제가 바로 성전입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1-22) 교인들이 아무리 노력해 봤자 첫 사랑을 유지하는 능력은 나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나오는 지적을 기적으로 여기게 됩니다. 감사의 이유가 됩니다. 구원을 위한 일관성 있는 취지로 봅니다. 말씀이 말씀대로 되어지면 성도는 구원이 됩니다. 교회는 떨어져나가고 성도들만 남는 것이 바로 말씀의 지적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대하면서 지적받은 즐거움에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8강-요한계시록 2장 1~4절(성도와 교회의 차이)260524-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계시록 2장 1~4절입니다. 신약성경 376페이지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아멘.
에베소 교회에 편지한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했습니다. 그 차이는 뭐냐 하면, 에베소 교인들 집단이 에베소 교회가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들의 집단은 어디에 저촉을 받느냐 하면, 인간이 알고 있는 시간과 공간에 저촉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 사이에서, 늘 불안에 떨고 미흡하고 어떤 것도 안정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뭔가 스스로 신앙이 되었다 싶다가도 어느새 새로운 사태가 날아오게 되면, 무서워서 벌벌 떨게 되어있어요. 마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같이 배 타고 가는 대목이 나옵니다.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는데요, 예수님의 시공간과 제자들의 시공간에 대해서, 제자들은 동일한 시공간이라 생각하고, 예수님은 동일한 시공간에 있지 않다고 봤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는 불안정한 시공간에 두 발을 딛고 거기에 뿌리를 박고 살아가는 육적인 존재인데, 그것을 늘 잊어버려요. 마가복음 4장에서 갈릴리 바다를 지나가는데, 갑자기 광풍이 일어났어요. 마가복음 4장 35~41절까지 보면, 광풍이 일어나서 파도 때문에 배가 뒤집어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물 퍼낸다고 난리도 아니죠. 왜 물을 퍼내지요?
바람이 불고 배가 뒤집어지게 되면, 절호의 찬스가, 기회가 왔잖아요. 주와 함께 죽을 수 있는 찬스가 왔잖아요. 태도가 바뀌어야 하지 않습니까? ‘고맙다. 바람아~신난다. 신난다, 풍랑아!’라고 이래야 하는데, 물 퍼낸다고 바쁜 것은, 뿌리가, 예수님한테 뿌리를 둔 게 아니고, 자기가 익히 아는 기존의 시공간에 뿌리를 두고, 그다음에, 예수님한테는 한번 잘해보면 되겠지, 좋은 관계 유지하면 되겠지,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겠지, 이런 식이에요.
인간이 딛고 있는 존재의 뿌리에 자기가 예수님을 끌어당겨서, 내 뿌리는 뿌리대로 유지하면서, 구원은 구원대로 되고, 천국 가려고 한 거예요. 천국이 어디 골프장입니까? 그런 것은 여호와 증인의 그림에만 나오죠. 그런 게 아니거든요.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성령 안에서 희락과 의와 평강이라 했습니다. 성령 안에서. 그게 하나님의 나라예요. 하늘나라에서 투표하는 거, 이런 거 없어요. 기초 자체가, 이게 예수님과 함께할 수 없는 기초를 두고, 인간은 자기 기초가 흔들린다고 호들갑을 떨고 있을 때, 40절에서,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라고 그렇게 하니까, 자기 믿음 없는 것을 인정하는 게 아니고 41절 제자들이 서로서로 수근 대면서 하는 말이에요.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라고 되어있어요. 이 원인이 이제, 이게 마가복음입니다. 마가복음. 그런데 요한계시록을 썼던 사도 요한의 요한복음에 보면, 인간의 그 존재의 뿌리에 대해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와서, “어떻게 하면 천국 갑니까?”라고 하죠.
모든 인간이 궁금해하고 정말 묻고 또 묻고 싶은 이야기. “어떻게 하면 내가 천국 갑니까?”라고 할 때, 예수님은 이렇게 이렇게 하면 천국 간다고 하시는 게 아니라, 뭘 하느냐 하면은, 우리의 육의 뿌리, 존재의 뿌리부터 건드려요. “네가 너의 엄마한테서 태어났다. 그게 문제다. 바로 네가 잘못해서 지옥 가는 게 아니고, 벌써 육으로부터 태어난 그 자체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조건을 네가 가지고 있는 거야. 네 뿌리부터 잘못됐다는 거야”
그러면 그 존재의 뿌리를 뭐로 교체하느냐?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3장 7~8절에, “존재의 뿌리를 육에 두지 말고, 네가 든든하게 믿음과 애착과 육에 두지 말고, 영에 두어라”라고 하니까, 영이 뭔지를 모르죠. 그것은 좀 설명해야 됩니다. “내가 영에 두라고 하니까 네가 기이히 여기지 말라” 영에 두라 하는 것은, 이건 바람 같아요. 바람 같은데, 설명하면, “어디서 오는지 어디로 가는지 네가 알지 못한다”
쉽게 말해서 “네가 딛고 있는 뿌리 잘라라”라는 이 말이에요. 이걸 오늘날 복음 전파 또는 전도에다가 적용하면 이렇습니다. 팔을 내미는 자에게 손을 잡아주지 마세요. 그 사람은 몸통은 안 옮기고 팔만 내민 사람이에요. 예를 들면 그게 열왕기하 5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나아만 장군이라는 사람이 문둥병에 걸리니까 팔만 내밀었어요. 몸통은 두고, 옛날에 나의 깨끗한 몸을 얻고 싶어서, 엘리사라는 용한 의사의 소문을 듣고 가서 문둥병을 낫게 해 달라고 갔습니다.
하나님의 명을 받은 엘리사는 자신의 뿌리 자체가, 그게 바로 저주가 되는 거예요. 네가 문둥병을 나아도, 뿌리 자체가 저주에서 올라오는데, 그거 나아져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래서 요단강에 7번 들어가라고 했죠. 수요설교에서 설명하면서, 그 요단강이 뭐냐 하면은 이스라엘이 구원받은, 애굽에서 탈출한 인간의 그 뿌리를 언약궤로 뿌리 존재 자체를 바꾸는 일이 요단강에서 일어났습니다.
너는 건너올 수 없는 약속의 땅으로 건너오는 그 뿌리가 언약궤이지, 네가 잘 건너온 두 다리가 아니라는 거죠. 길이 없는 곳에 주께서 그들을 데려가는데, 네가 그동안 이 길에서 걸어왔고 또 걸어왔다고 여기는 그 뿌리는, 여기서 그만두자! 하직하자! 약속의 땅이 타박타박 걷는다고 갈 수 있는 땅이 아니다. 시공간이 동일한 시공간이 아니다. 언약궤와 함께 껴안지 아니하면, 너는 그 땅에 가도 쫓겨나는 겁니다. 살 수 없어요.
그 언약궤 때문에 요단강을 건너왔듯이, 주께서 나아만 장군에게 그 요단강으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그래 억지로 들어가는데, 들어가고 난 뒤부터는 비로소 그동안 내가 인생을 살아온 내 뿌리는 이 육을 유지하는 데 나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한 그 님몬당, 기존에 자기의 환경, 살아왔던 환경에서 지배적으로 가르쳤던 종교, 자기는 그게 신이지 우상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어요.
그 님몬, 그 신의 세계 자체가 저주의 세계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 저주로 문둥병 걸렸고요. 그런데 이 문둥병이 나았다는 것은, 이제는 뿌리가 바뀐 거예요. 내가 다시 고향에 돌아와서 님몬당 성전에서 절을 하더라도, 나는 내 뿌리인 여호와께 뿌리를 두고 절하는 것으로, 그렇게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 대신 내가 흙을 가져가겠습니다.
흙을 가져가는 거예요. 무슨 흙? 약속의 땅의 흙을 가져 가요. 약속이 이제는 약속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내 인생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시공간에 있는 저주는 어디로 가느냐? 엘리사의 사환인 게하시에게 가요. 엘리사 바로 옆에 있던 비서한테 나아만의 저주가 떠돌아다니다가 거기에 도달한다고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어느 인간치고 자기 뿌리를 하나님의 약속에 두지 않는 자는 비록 그자가 선지자 편에 선 것처럼 여겨지더라도, 사실 그 뿌리는 저주의 뿌리입니다.
이게 오늘 본문과 관련 되어있습니다. 여기 오늘 본문 2~3절에,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에베소 교회에서 2~3절 읽었잖아요. 이걸로 끝내고 에베소교회 교인들은 전부 다 한꺼번에 휴거(携擧)하든지 뭐 다 죽이든지 해서, 천국 보내면 되잖아요.
요한계시록 2장에 에베소 교회에서 이걸 언급하면서 제일 난맥이라 할까요? 이해가 안 되는 것이, 2~3절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이걸로 신앙의 절정에 이른 게 아니겠어요? 우리는 사적으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신앙의 최정점에 섰을 때, 주여 저를 데려가옵소서’라고. 이 무슨 꼼수를 부리고 있어요.
그런데 2~3절 칭찬해 놓고, 그러면 여기서 이야기를 끝내야 하는데, 왜 4절에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라는 이 대목이 왜 나옵니까? 여기서 성경 보는 사람이 진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처음 사랑을 버린 자도 얼마든지 행위와 인내로 폼을 내고,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의 정체를 드러내고, 그리고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인내하고 견딜 수 있다는 거, 게으르지 않고 열심을 낼 수 있다는 거예요. 처음 사랑이 없는 상태에서도.
그걸 어떻게 해명합니까? 보통 문제 아니죠.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본인이 자꾸 신앙이라는 것을 조립하는 경향이 있는데, 제가 아까 그 마가복음 이야기했듯이, 내가 자기의 뿌리를 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 든든한 뿌리에, 신앙적인 폼으로 거기에 가득 채우면, 그 뿌리와 가득 채우는 나는 하나의 덩어리로, 몽땅 천국에 가서 영원한 영생을 누린다는 이 계산, 이 계산이 요한계시록에 에베소 교회의 편지로 인하여, 이거 사달 난 거예요.
그런 꼼수는 주님 앞에 통하지 않는 겁니다. 인간은 장벽에 막힌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네 뿌리, 네가 신앙생활을 하는 그 뿌리의 주체가 너냐,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이 내 뿌리가 되느냐?”라는 그것을 보라는 거예요. 처음 사랑을 버리게 한 것도, 버렸으니까 처음 사랑을 찾으면 되잖아요. 그러면 인내했다, 그다음에 성실했다, 자칭 사도라 하는 악한 거짓 사도를 들춰냈다, 게으르지 않았다, 거기에다가 플러스(+) 처음 사랑까지 확보했다.
그러면 하나님, 저는 그럼 합격입니까? 그러면 이거는 온전한 신앙의 절정입니까? 이렇게 하나님 앞에 따지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가만히 있어봐. 여기 8절에 서머나 교회가 있어. 그것도 네가 들어야지” 왜? 편지를 보낸 에베소 교회 사자가 결국은 7개 교회의 몸통을 따라가면, 하나의 몸통인 그리스도의 몸으로 귀착된다면, 나는 뭐 에베소 교회니까, 서머나 교회 책망하는 것은 나랑 상관없지. 나는 에베소 교회니까 에베소 교회의 책망에 대해서 하자 없도록 완비하면 된다는 꼼수를 또 쓰기 마련이에요.
참, 이 신앙생활을 좀 잘 해보려고 하다가, 점점 더 추가적이고 추가적인 그러한 문제가 자꾸만 생기죠. 이게 육신이 시공간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에베소교회에서 나왔던, “이러면 안 돼”라는 그 에베소라는 교회, 항구 도시예요. 그 에베소라는 지역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서, 서머나 교회 교인이 ‘나는 그 동네 사람 아니야’라고 할 수 없는 이유가, 에베소 교회의 시공간과 서머나 교회의 시공간이 동일한 시공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에베소 교회에서 나오는 이 모든 말씀뿐만이 아니라, 다른 일곱 교회 모든 말씀을 다 지키지 않는 한, 천국은 이제는 물 건너갔네’라고 또 이렇게 절망하고 좌절해요. 하고 싶으면 하라 하세요. 그게 바로 자기의 팔만 내민 사람이에요. 내 구원에 환장해서, 내 구원에 미쳐서, 성경 말씀에 팔만 내밀면서, 나를 건져 달라는 거예요.
팔 내미는 것은 자기가 할 수 있잖아요.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없는 그 뿌리를 건드려서, 삽을 통해서 통째로 뿌리까지 뽑아서 건지게 된다면, 이런 에베소 교회든, 서머나 교회든, 우리는 감사함으로 받으면 되는 겁니다. 어떻게?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그것마저도 이게 내 일이 아니고 주님께서 나를 그렇게 몰아붙인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면 되는 거예요.
참 쉽지요.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잖아요. 사람이 내가 믿음이 없다고 인식하는 것이, 그게 바로 신앙이 있는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신앙이 넉넉하게 있는 사람에게 줄 수 있는, 하나님이 일으키는 일이에요. 어떤 인간이 믿음이 없어요? 다 태어나면서 믿는데요. 인간은 태어나면서, 다 믿음을 갖고 태어나요. 그게 거짓된 믿음이지만, 하여튼 믿음은 다 갖고 태어나요.
근데 내가 태어날 때 갖고 있던 믿음 자체가, 아무리 종교적인 흉내를 내도, 그거는 무조건 육이라는 이유 때문에, 무조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고 신나게 믿어버리는, 신나게 믿어지는 현상은, 내가 믿는 게 아니고, 육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영에서 주입된 거거든요. 제가 아주 쉽게 가겠습니다. 너무 어렵게 이야기했는데, 쉽게 가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절에서 이런 이야기를 해요.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누가 옆에 와서 귀에 대고, ‘이게 복음이야’라고 귀 바로 옆에다가 말하면 이거는 뭡니까? 갱!갱!갱!갱! 꽹과리 치는 거예요. ‘근데 이게 천사의 복음이거든’ 이렇게 해도, 천사의 복음이라도 갱!갱! 꽹과리 치는 거예요. 그리고 구제를 해요?
어려운 사람 구제하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다고요? 산을 옮길 만한 믿음, 기적을 유발하는 믿음, 그것은 성경에서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 보면, 그거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어요. 왜? 이유는 사랑이 빠져 있기 때문에. 사랑이 빠져 있는 채, 기적을 행하든, 권능을 행하든, 복음을 전파하든, 주의 이름으로 강의를 하든 설교를 하든, 그거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으로 전달돼야 해요. 그래서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언급하는 이유가, 앞에 있는 너의 열심, 거짓 사도를 드러내는 그 지식, 그 모든 지식이 사랑이 빠져버리니까 그거는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을 축약하면 이겁니다. “에베소 교회야” 예, “넌 아무것도 아니야!” 감사합니다!! 이러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교회는 사람의 집단이 교회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는 교회의 사자에게 줬지, 교회의 당회장 목사부터 집사나 장로한테 준 게 아니에요. “이미 하나님의 사자, 성령, 천사에게 붙잡힌 사람이 누구예요?”라는 이거 확인하기 위해서 준 거예요. 이거 확인하기 위해서. 천사에 붙들리는 사람은 성경에서 어떤 욕설을 하더라도, ‘당연하죠!’ 왜? 아무것도 아니니까. 이러면 끝날 문제 아닙니까?
이러면 끝날 문제라고요. 변명하면서, ‘주여, 내가 거짓 사도를 드러낸 건 잘했잖아요’라는 뭐 이런 게 있는데, 여기서 이 짧은 시간에 설교를 끝내면서, 이 점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도대체 이 에베소 교회에 사도 바울이 뭐라고 계시했는지, 분명히 에베소서라는 편지가 있어요. 그 편지에서, 사도 요한에게서 나오는 에베소의 천사에게 준 그 내용 말고, 이미 사도 바울에 의해서 에베소에 준 편지가 에베소서입니다.
그 에베소서의 내용을 여기서 짧게 보게 되면 이거예요. 1장 1~2절에,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라고 했거든요. “있을찌어다”라고 하는 것은, 이 은혜를 뺄 사람이 없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그 대상이 누구냐? 교인이 아니에요. 성도예요. 주님이 자기 성도를 성도 만드는 거, 성도 만들기예요. 사람이 아니고 성도라니까요. 성도. 성도는 베드로전서 1장 2절에 보면 피뿌림을 받는 자를 성도라고 해요.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
피 뿌림을 받는 자. 인간보다, 인간의 행위보다, 생각보다, 인간이 하는 사랑과 믿음과 소망보다도 피의 위력이 그 사람을 붙들고 있는 것, 그 능력으로 붙들고 있는 것, 피와 함께 살아가는 자, 이게 성도입니다. 왜? 피로 거룩하게 되니까요. 그러면 이 에베소 교회에서 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된 것이, 1장에 보면 창세기 전에 선택되었다고 나옵니다.
그리고 2장에서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인하여 너희가 이미 거룩한 성전이 되었다고 나오고, 3장 10장에서는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나오고, 5장에서는 네가 죽었는데 살아났다고 나오고, 그다음에 6장 10~12절에 너희는 악한 마귀와 싸운다고 나옵니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이게 뭐냐? 이게 말씀입니다. 문제는 에베소 교인들이 이걸 지키려고 할 때, 이게 사달 나는 거예요. 이걸 지키는 것이 아니고, 지적받고 적용받는 거예요. 지적받으면서 감사하는 겁니다. 왜? 우리의 육신은 아직도 시공간에 있으니까, 아직 눈에 띄는 그런 신체로 있으니까, 이것이 없어질 때까지 계속 지적을 받는다는 것은, 이거는 창세전에 이미 구원되기로 작정 된 사람, 이미 성도가 된 사람, 십자가의 피의 영역에 있기에, 말씀과 더불어서 성령이 찾아오기에, 우리가 딛고 있는, 내가 스스로 나를 구성하는 이 시공간의 이 허사를, 허사로 돌리도록 지적해 주시는 거예요.
따라서 결론적으로 우리가 이 땅에서 성도로 살아가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교인 되고, 하나님 백성 되려는 우리의 헛된 시도, 몸통은 밖에 그대로 두고 손만 내밀어서 도와달라는 이 손을 뗏지! “네 몸통이 밖에 있는데 쓸데없는 손 내밀지 말고, 날마다 사건을 통해서, 일상을 통해서 지적이나 받아라”라고 하는 그거, 그게 바로 우리 속에, 안 지키는데 말씀이 우리 속에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우리 자신에 대해서 미련과 애착으로 지독하게 붙들고 있습니다. 성경 안다, 복음 안다, 하나님, 주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육신은, 그러니까 내 인생을 내가 꾸려나간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시도가 끊임없이 있을 때, 날마다 주님의 사랑의 말씀이, “너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라는 식으로 찾아와 주시는 이 은혜를 늘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