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일곱 교회의 원천

아빠와 함께 2026. 5. 17. 19:04

일곱 교회의 원천

2026년 5월 17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1:20

(1: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교회가 어디 있을까요? 교회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전에 이스라엘에는 성막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막은 지금은 없어졌습니다. 따라서 교회도 이 세상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교회는 일곱 촛대’라고 되어 있습니다. 촛대는 성막 중에서도 성소라는 곳에 있습니다.

가지가 일곱 개로 되어 있다고 해서 일곱 촛대입니다.(출 25:31-40)? 그런데 일곱 촛대가 놓여 있는 장소는 일반인들이 거주하는 곳이 아니라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곳입니다. 제사장 외에는 들어갈 수 없기에 일반인으로서는 ‘없는 곳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도 ‘없는 곳에 있’습니다.

왜 교회가 없는 곳에 있어야 할까요? 그것은 교회가 인간의 손을 타서는 아니되기 때문입니다. 신약에서 다른 복음이란 딴 게 아니라 인간의, 행함이 섞이는 복음을 말합니다. 왜 복음에 인간의 행함을 섞는 것일까요? 그것은 교회 같은 교회로, 인간이 편하게 살고 있는 그 현장에 같이 공존할 수 있는 교회이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조성된 종교단체를 구약 역사를 통해서 필히 거짓되고 망할 수밖에 없는 단체임이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직업 설계까지 제공한 성막과 성전도 가차없이 망하도록 조치했음을 감안하시기 바랍니다. 성전이나 성막이 망한 것은 ‘거룩한 공간’은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제시한 조건에 맞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조건 말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질투심을 알아채는 조건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신 4:24) 왜 사랑이면 사랑이지 왜 ‘질투’라는 요소를 언급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일반적인 사랑은 그냥 받기만 하면 그만이지만 ‘질투’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본성까지 헤아리는 것을 조건으로 한 사랑입니다.

경쟁자가 있음을 감안하라는 겁니다. “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 20:5) 즉 하나님께서 무엇에 분노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를 고려한 사랑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사람들도 나름대로 뭔가 하고 계획잡습니다. 그런데 항상 목표를 세우고 일합니다. 목표는 어떻게(how)에 주안점이 있습니다. 즉 “어떻게 하면 목표에 달성할 수 있느냐”라는 겁니다. 반면에 목적은 목표를 지나가서 달성될 사항입니다. 목적인 ‘어떻게’가 아니라 ‘왜why’입니다. 인간은 어떻게까지만 하지만 왜 그 일을 하는지 궁극적 의미는 없습니다.

캐고 또 캐고 들어가면 자신이 왜 그 일을 하는지 ‘목적 없음’이 들통납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자신의 왜 사는지 왜 죽는데 조차 아는게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저 살고 그저 뭐든지 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자기 자리에 있기에, 무조건 있기에 무조건 뭘하는 겁니다. 망해도 쌉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철저하게 망하게 하므로써 진정한 하나님의 일의 목적을 드러내십니다. 그것은 “너희가 나의 질투심을 아느냐”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주님으로부터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사랑해주시면 ‘고맙습니다’하면서 받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질투의 대상이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질투성 있는 사랑으로 인해 하나님 자신만큼이나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는 가치없이 버리시겠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에서 무슨 일을 하셨는데요? 성막 안에는 진설병이라고 해서 10개의 떡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습니다.

“너는 고운 가루를 취하여 떡 열둘을 굽되 매 덩이를 에바 십분 이로 하여 여호와 앞 순결한 상 위에 두 줄로 한 줄에 여섯씩 진설하고”(레 24:5-6) 그런데 이 떡 12개를 항상 지켜보듯이 맞은편에서 비추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일곱 가지의 촛대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하찮은 떡 12개이지만 그 떡이 놓인 공간은 일반인들이 들어설 수 없는 거룩한 성도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설병이나 금촛대는 ‘없다’가 성립되는 공간에 함께 짝을 이루어 놓여 있습니다. 거룩하지 않는 자는 결코 들어설 수 없는 공간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결국 망해버린 것은 하나님의 질투심에 의거한 사랑의 요구를 감당할 수 없어서 그러합니다.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신 32:16)

즉 질투하시고 소멸의 불로서 분노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취지를 이스라엘은 들어줄 수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그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국은 멸망한 이스라엘을 통해서 나타내시려는 것은, 숨겨진 하나님의 목적 곧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진수가 공개되는데 있어 이스라엘을 격발로 사용하시게 한 겁니다.

다음의 성경 구절을 보면 보다 확실할 겁니다.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아 8:6-7)

하나님께서 자신이 지니신 사랑을 묘사하면서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 같다’고 하십니다. 왜 사랑을 표현하는데 이런 극단적인 묘사해야 할까요? 그것은 주님의 사랑이 인간 세상에서 결코 있을 수 없이 귀한 사랑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진정으로 사랑을 아는 자는 자신의 전 재산을 내어놓아도 상관없을 정도로 고귀하다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인간들의 ‘자기 위주 의식’과 경쟁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저 ‘나 너 사랑한다’ 정도가 아닙니다. 교회와 하나님 사이에 형성되는 사랑은 전 세상과 경쟁하는 질투심으로 둘러쳐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관계는 하나님에게도 가장 소중한 것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행 20:28-29)

다른 복음, 그것은 인간 자신의 행함의 자존심을 복음 안에 섞어넣은 복음입니다. 가짜 교회이라서 그 교회들을 뜯어내면서 진짜 교회가 등장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참된 교회라면 십자가 사건에서 빛만 보며 살게 하옵소서. 그래서 나의 일은 일체없고 모두 주의 일임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7강-요한계시록 1장 20절(일곱 교회의 원천)260517-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계시록 1장 20절입니다. 신약성경 401페이지입니다.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아멘.

지금 우리가 방금 읽었던 것은 신약성경에 나옵니다. 신약성경은 그 구조가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이 말씀이 나왔기 때문에, 이 말씀에 걸려든 성도는 그 구조상 어디로 들어가야 하는 거냐 하면, 예수님 영생 안, 다른 말로 하면 천국 안으로 이 말씀에 붙잡혀서 그쪽에 끌려가면서 그쪽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겁니다.

성경에 신약의 성경 한 구절, 한 구절은 너의 위치와 너의 장소, 네 존재의 영역이 이미 천국이라는 이걸 일깨우시려고 주시는 말씀으로, 이 요한계시록을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주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 영생을 받지 못한 사람에게 있어서, 여기 오늘 본문에 일곱 별, 일곱 교회라고 했는데, 그들에게 있어서는 교회가 없습니다. 교회가 없어요. 인간에게는 원래 교회는 없어요.

구약에 있지 않겠느냐? 구약의 이스라엘은 내부적으로 망했어요. 내부적으로. 여러분, 구약에서 외부로부터, 외세 때문에 이스라엘이 망한 줄 아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멸망은 내부적 요인 때문에 그들은 망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이렇게 하면 필히 망한다는 그런 조건을 갖고, 이스라엘은 시작이 됐거든요.

그래서 그 이스라엘 조건에 부합되지 않을 때, 이스라엘이 망하면서 이스라엘은 망해도 이스라엘에 조건을 걸었던 그 조건은 도리어 티가 난 거예요. “그거 봐. 내 말 맞잖아. 내가 망한다고 했지? 다른 우상 섬기면 망한다고 했잖아” 우상 섬기면 너는 망한다는 그것은 살아남아 있는 거예요. 껍데기 이스라엘은 폭삭 망하고요. 이 원리가 신약에 그대로 옵니다.

신약에 그대로 왔는데, 오늘 제목이 뭐냐 하면 ‘일곱 교회의 원천’이에요. ‘교회의 원천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은, 사실 이 세상에서는 그런 질문을 할 자격조차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자체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 세계에서 사람들이 어디까지는 가능하냐 하면, 어떤 목표까지는 가능해요. 인간 세계는. 인간은 항상 목표를 정해놓고, 목표를 시도하는 거예요.

쓸데없는 인간이 전화할 때는 제발 전화 소리 좀 안 들렸으면 좋겠다는 목표가 생기잖아요. 근데 인간 세계는 늘 이렇게 내가 존재하게 되면, 내 존재를 지켜내기 위해서 어떤 일이 생기고 그 일에 대해서 우리는 목표가 있어요. 목표가 있는데 뭐가 없느냐면, 목적이 없어요. 목표 그다음에 목적이 있는 거예요. 목표라고 하는 것은 영어로 하면 ‘어떻게?’라는 이게 목표입니다.

그 일을 달성하는데, 어떻게 하면 되느냐? 그런데 주님께서는 ‘어떻게?’를 목표로 묻는 게 아니고, “왜? 왜? 왜? 네가 그 일을 왜 하는데?” 자식이 3명이 있습니다. 3명을 낳았습니다. 세 명을 낳았으니까 갑자기 애가 있고, 내가 있으니까, 목표가 생긴 거예요. ‘하나님, 이 애를 어떻게 잘 키워낼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 애를 남보다 더 훌륭한 애로 잘 키우겠습니까?’ 우리도 지금 손자 손녀 생겨서 목표가 생겼어요. 어떻게 하면 꼴찌 안 하고 버티느냐는 목표가 생겼어요. 그런데 주님은 묻습니다. ‘왜? 왜 자식을 잘 키워야 하는데?’ 이유가 없어요. 이게 인간의 세계 한계입니다. 여러분들이 이스라엘 욕하지 마세요.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왔고, 그들은 후손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에는 우리하고 똑같은 인간이에요.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잘 키우고 하나님을 섬기겠습니까? 하나님 묻습니다. “왜? 왜?” 그들은 모릅니다. 뭔가 목표는 있는데, 목표가 있다는 이유로 목적이 가려져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드신 이유는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로 유지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목적이 있어요. 그 목적은 뭐냐? 질투심입니다.

하나님의 질투심. 하나님은 질투의 화신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서, 신약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을 아주 유행어처럼 교회에서 난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명기 4장 24절을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질투하는 하나님. 인간의 목표는 사랑이에요.

사랑을 받아야 하겠어요. 그런데 그 목표 때문에 가려진 목적이 있습니다.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설마 하나님이 그렇게 쫌상이실 리가 없지. 어떻게 질투를 해?’라고 하는데, 이게 사랑을 언급할 때는, 사랑받을 내가 여기에 존재한다는 걸 전제로 할 때, 나는 이왕 존재하는 거, 사랑받고 싶다는 것과 같이 연결돼 있어요. 자동으로 연결됩니다.

근데 이미 사랑이 아니고, 그걸 넘어서서 질투하는 하나님이 됐다면, 내가 사랑하는 이스라엘도 나는 얼마든지 잘라내는 거예요. 멸망시키는 겁니다. 왜? 나의 질투심으로 나는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랑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질투심은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려운데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인간을 사랑하지 않고, 난 질투하도록 내가 보낸 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라는 이겁니다.

이거는 인간으로 상상도 못 했어요. 하나님이 사랑, 사랑하고 나오니까, 난 우리 인간을 사랑하는 줄 알았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말합니다. “네가, 네가 아니잖아. 이미 네가 내가 시킨 대로 안 했다는 거야. 선악과 따먹지 말라 했지? 근데 왜 사랑을 구걸하고 간구해? 너 주제 파악이 그렇게 안 되냐?” 나는 비교할 거야.

이미 뱀의 후손이 된 인간과 그리고 여자의 후손에 대해서, 없는 데서, 남자 없이 자식이 안 생기잖아요, 없는 데서 나왔던 예수 그리스도인 내 아들과 경쟁시킬 거야. 그리고 질투심으로 내 아들의 가치를 지킬 거야. 어떤 식으로? 너를 다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내 아들을 지킬 거야. 그 아들이 구약에서는 뭐냐 하면, “여호와의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내 이름만 섬겨야지, 내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을 신봉하면 너는 죽는다. 멸망한다. 내가 필히 너를 멸망시킬 거라고 이미 십계명부터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상당히 어려워지죠. 상당히 어렵습니다. 쉽게 말해서 딱 깨놓고, ‘아니 교회의 원천이 뭡니까? 딴소리는 치우고 교회의 원천이 뭡니까?’라고 물으면, 진설 병이 12개의 떡이에요.

그러면 그 떡을, 그 떡이 있다, 없다를 어떻게 합니까? 빛을 비춰 줘야 있거든요. 그 빛을 비추는 빛의 조명발이 어디서 나오는가? 일곱 가지를 가진 일곱 등잔이에요. 등잔. 이게 오늘 일곱 별의 비밀이에요. 일곱 금 촛대예요. 일곱 가지가, 한 가지당 한 교회가 등장한다. 일곱 가지에서 빛을 비춰야, 없다고 여기는 데서 진설 병이, 그 테이블 위에 진설 병 6개, 6개씩 12개가 놓여 있습니다.

12개, 이스라엘이 놓여 있어요. 여기서 그 진설 병은 그냥 보통 떡이에요. 그러니까 허름한 인간을 대변한다고 보면 됩니다. 인간은 떡 먹고 배설하고, 떡 먹고 배설하다가 그냥 허무하게 죽잖아요. 그 허무하게 죽는 떡, 떡을 먹어도 살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그들은 떡을 갈구하고 있죠. 땅에 있는 떡, 떡을 먹었는데, 결국 그들은 하나의 먹은 떡과 함께 없어지는, 그렇게 없어지는 운명을 되풀이할 뿐이에요.

인간이 먹는다는 거, 12개가 그런 한계밖에 없는데, 거기 위치가 어디 있느냐 하면은 거룩한 성소 안입니다. 공간 자체가, 자리 자체가 특별한 자리예요. 12개의 떡을 성소가 아닌 바깥쪽에 내버리면 햇빛에서 이게 다 말라비틀어집니다. 그런데 감히 허름하기 그지없는 그 12개 진설 병을, 그 떡을 거룩한 테이블 위에 그 물잔과 더불어서 함께 놓였을 때, 마치 ‘꼼짝 마. 내가 지켜줄게. 끝까지 지킬 거야. 너한테는 실패나 낙오나 이런 게 없을 거야’

왜? 왜냐하면 나의 질투심으로 너를 특별히 세상에서 구별하여서, 차이 나게 해서, 내가 채택해서, 내가 여기 있는, 거룩한 이름이 있는 이 공간에, 너희를 내가 집어넣었으니까, 내가 파수하고 지켜줄 거야. 그런 의미에서 12개의 떡이 등잔 빛 앞에서, 조명발 앞에서, 누가 마치 지켜보는 것처럼 늘 그 자리에 있습니다. 이걸 안식일마다 이렇게 떡을 바꿔줘요.

자, 그렇다면 이제, 이게 신약의 구약적 표현으로 나타난 신약이거든요. 그러면 구약을 해석할 때는 신약을 십자가를 통해서 해석해야 하고, 신약을 해석할 때는 구약의 실패함을, 왜 실패했냐를 통해서, 십자가를 따라서 이미 실패가 없다는 쪽으로 이 해석이 여기서 완료되면 돼요. 쉽지요. 신약 볼 때는 구약의 실패담을 통해서 십자가까지 가세요.

구약의 실패담은 우리의 실패예요. 실패입니다. 실패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못했는데 주님이 홀로 뭘 다 해내셨는가를 발견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이스라엘은 거룩한 곳에 들어서지도 못했습니다. 떡은 제공했고, 금으로 등잔은 만들었는데, 정작 본인은 그 거룩한 공간에 함께 동반하면서도, 도리어 거룩한 곳 때문에 그들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거룩을 거룩답게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다는 책임을 물어서 이스라엘을 멸망케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다른 신을 섬길 때, 하나님께서 신명기 32장 16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32장 17절에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마귀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의 알지 못하던 신”이라고 그렇게 돼 있거든요.

그리고 16절에 보면,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 이게 오늘 설교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 어려운 대목이지만, 어차피 맞닥뜨려야 하니까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목도 안 좋으니까 찬찬히 말씀드릴게요. 이스라엘의 존재는 인간이 아는 범위 바깥에 어떤 질투심이 있는가, 어떤 무엇이 있는데 그 무엇이 무엇인지 인간은 몰라요.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은 존재하기 때문이에요. 존재하기 때문에 몰라요. 주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유일하게, 인간의 한계 밖에 무엇이 있는지를 격발하는 거예요. 트리거(Trigger)라고 하죠. 손가락을 대고 당기는 거, 방아쇠를 당기듯이 격발하는, 방아쇠를 당기는 그런 원인자로서 주께서는 그들에게 율법을 주어 활용케 한 거예요.

32장 16절에,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그러니까 이 “그들이” 들어간 자리에 우리들을 집어넣으세요. 하나님이 뭐라고 잔소리하고 말씀을 줬던, 우리는 관심 없고요.다만 우리는 내가 내 본성대로 살거든요. 그 본성이 어디로 가느냐면, 기어이 너희들이 나의 노를, 분노를 격발시키는 쪽으로 너희들이 행동해 왔다는 거예요.

그 당시 이스라엘이 못되고 나빠서가 아니라, 그 현장에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인 거예요. 그러면 거기에 대한 노를 격발했으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용서해 주면 될 거 아닙니까? 여러분 용서라고 하는 것은 구약에다가 십자가를 경유해야 용서가 돼요. 이거는 뭐, 진짜 수천 번 이야기해도 사람들이 그 취지를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우리가 용서받을 대상이 아닙니다. 어디서 용서를 구합니까?

용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사람, 예수님을 용서할 때, 그 용서의 현장에서 합일될 때 우리가 용서받아요. 주님의 아버지께 용서받고 부활된 그 영토가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덮칠 때, 우리는 난데없이 하나님의 용서가 덮쳐진 거예요. 이게 웬 용서입니까? 이거 안 해도 되는데 왜 용서를 해줘요? 성도한테는요, 용서부터 먼저 해놓고, 네가 어떤 죄, 어떤 죄로 인하여 너만 생각했다는 그 죄를 끄집어내는 겁니다.

그걸 아침에도 이야기하는데 다시 이야기하면, ‘해답의 상황을 위해서 문제가 발생하도록’ 우리를 사용하시는 거예요. 구약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노를 격발시켰잖아요. 우리에게 신약은 뭐냐? 우리의 죄로 주님의 긍휼하심과 질투하신 사랑을 격발시키는 거예요. 여러분 이해 되셨습니까? 묻는 게 잘못이지만, 이해 안 됐다고 치고 다시 다른 성경 구절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제는 좀 이해되실 것 같아요. 아가 8장 6~7절에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라고 했을 때, 이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아마 딴 거 안 들어요. 안 듣고 ‘주님께서 지독히 우리를 사랑한다’라는 그것만 듣는 거예요.

그러면 되지, 뭐 앞에 “불같은, 잔혹하며, 지옥같이, 투기나 질투”라는 이런 것은 난 모르겠고 이래나 저래나 사랑해 주면 될 거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그게 사랑에 대해서 잘못 오해한 거예요. ‘사랑받으면, 챙기면 되지’라는 그런 뜻이 아니고, 7절에 보면,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찌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바꾸려 해도 안 바꿀 정도로 귀한 사랑이라는 이게 7절의 말씀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은 ‘네가 사랑하는 건, 네 목숨까지 다 바쳐라’라는 이런 뜻이에요. 이게 구약입니다. ‘아, 나 있는데, 하나님이 나를 되게 사랑한대. 그런데 그냥 무조건 사랑한대. 아이고, 고맙습니다. 그럼, 우리 게임 끝났지요. 내가 고맙다고 이야기해 줄게요. 저 가겠습니다. 이제는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겠습니다’라고 하고 갈 때,

“잠깐, 잠깐. 이리 와. 이리 와. 이리 와. 내 사랑이 어디서 나왔는데?” ‘아니, 그건 모르지요.
그냥 이 사랑을 받으면 됐잖아요’ “아니야, 지옥에서 올라온 거야. 지옥에서. 그러니까 이 사랑을, 너는 이 질투하는 사랑을 격발했어. 자극했어” 그러니까 이 사랑을 받았으면, 이제는 네가 가진 재산이나 네 목숨까지도, 어떤 것도 이 사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어요.

“오케이? 그러면 네 목숨과 네 모든 수모와 그러한 험난한 일도, 거기에 대해서 나한테 불평할 거야, 말 거야? 네 목숨 날아가는 것도, 네가 암으로 죽는 것도 불평할 거야, 말 거야?” 우리가 할 말을 잃지요. ‘예, 고맙습니다. 사랑해 줘서 고맙습니다’라고 하고 자꾸 내빼요. 도망을 친다고요. 아이고, 얻을 거 얻었으니까 도망치는데 자꾸, 자꾸 불러요.

불러서, “이 사랑이 지옥에서 온 사랑이다. 이게 질투심이다. 네가 내 질투를 알아? (네가 게 맛을 알아?) 내 질투를 알아? 내가 얼마나 끔찍하게, 끔찍하게, 내 아들까지 죽여가면서, 너를 질투하듯이 사랑한 것을 알아? 아브라함이 이삭 바친 거 알지? 내 아들 예수님이, 독생자가 죽게 된 걸 알지?” 그 정도로 했다면 거기에 대해서 네가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네가 안다면, 다시 너의 사적이고 개인적인 네 소유가 없어야 한다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나오잖아요.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이 신약도 아가서의 말씀과 서로 연결돼 있어요. 우리는 자꾸 사랑 챙기고 도망칠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가서가 구약이잖아요. 제가 천천히 설명해 드릴게요.

구약이잖아요. 구약은 지킨다 못 지킨다? 못 지켜요. 우리는 대번에 이렇게 합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데, 죽음보다 더 심한 질투심으로 너를 죽음에서 끄집어냈다. 어때? 너의 모든 가산, 모든 재산을 기꺼이 나한테 바칠 용의도 있나?” 우리는 대답하죠. ‘아니요. 사랑은 고맙습니다마는 아직 저한테는 그런 용기나 자신감이 없네요’

‘딩동댕~’ 그게 구약이에요. 그게 구약이에요. 어느 인간도 사랑의 말씀을 안 준 게 아니에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안 준 게 아니에요. 줬지만 감당할 수 있는 육신은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 중에도 없었고, 오늘날 어떤 인간에게도 없습니다. 항상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살게 되기 때문에, ‘고마운 건 맞지만 나까지 건드리지는 마세요’라는 이게 인간의 근원적인 겁니다.

성경 공부해서 구원받는 거? 하여튼 구원 자체가 인간에게는 없어요. 인간은 교회 자체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준비한 게 뭐냐? 하나님의 거룩한 공간에는 촛대도 있고, 촛대의 빛을 감시하듯이, 촛대 빛 안에 종속된 영토라는 것을 지정할 수 있는, 그러한 12개의 특별한 떡이 있어요. 이스라엘입니다. 있고, 있는데 아까 이야기했지만, 그거는 어디 안에 있느냐 하면 거룩한 공간 안에 있어요.

그러나 세상은 구약의 율법을 주니까, 모든 인간이 나자빠지는 거예요. ‘나는 몰라요. 몰라요. 나는 하나님 고마운 줄은 알지만, 나는 내 식대로 살 거예요’라는 이런 식이란 말이죠. 성경에는 뭐 한두 개가 아닙니다. 네가 이방 나라를 본받지 말라고 하는 것은, 네가 이방 나라를 본받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성막, 성소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인간은 지킬 수 없는 것인데, 하나님 스스로 그 말씀대로 지켜나갑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지켜서 나온 생산물이 뭐냐? 일곱 교회예요. 일곱 교회. 이제 결론 부분 들어갑니다. 일곱 교회입니다. 다시 한번 결론을 정리합니다. 교회는 없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만들어내십니다. 교회는 없어요. 주께서 만들어내십니다. 어떻게 만들어내는가? 인간이 만든 교회를 제거하는 그 현장에서, 진짜 이미 사랑받았고, 이미 거룩한 곳에 있는 일곱 교회가 그때야 나타나게 돼 있다는 이 말이죠.

그 일곱 교회를 제거 하는데, 거기에 동원되는 일꾼이 뭐냐? 마귀예요. 이 세상입니다. 또 실제 예를 들면, 바로 사도바울이 한 예를 들 수 있어요. 너희들은 복음을 전하는데, 그게 다른 복음이에요. 다른 복음. 예수를 전하는데 다른 예수예요. 성령을 언급하는데 다른 성령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 나온 말씀이에요. 왜? 인간은 오늘 아침에도 이야기한 것처럼 분간을 못 해요.

데칼코마니. 분간을 못 해요. 그러면 다른 복음 할 때, 사도 바울이 이렇게 분간합니다. 다른 복음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 십자가의 공로만이 복음이 되는데, 다른 복음은 거기다가 인간의 행함이 끼어드는 것, 그게 다른 복음이에요. 진짜 복음은 모든 인간의 행함을 삭제합니다. 왜 삭제해야 하느냐? 인간은 눈에 보일 수 있는, 할 수 있는 걸 자꾸 보태려고 하기 때문에.

그러나 십자가가 복음인 것은, 바로 진짜 우리의 모든 것을 해결한 것은 예수님이 하신 일 그것뿐이에요. 그것뿐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원천은 없습니다. 없는데 이미 있습니다. 어디에 있느냐? 인간들이 발견하지 못한 곳에 일곱 교회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있는 교회는 뭐냐? 다른 복음 전해요. 다른 복음. 다른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행함이 섞였다고 방금 이야기했죠.

왜 인간의 행함이 섞입니까? 기왕이면 자기가 행복하게 살려는 의도 때문에. 이게 하나의 이론이 아니고, 실제로 사도행전 20장 28절에 나옵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에 보면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는데, 29절에 보면,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그러니까 복음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교회가 망해야 교회가 나타날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의, 예수님의 십자가 빛이 비치는, 비추어서 질투심으로 이미 완벽하게 완성을, 거룩과 사랑으로 완성을 한, 여러분들이 진짜 교회인 일곱 교회에 속한, 영원한 교회에 속했다면, 이제부터는 ‘나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내 생각에서 다른 복음이 무엇이며, 어떤 점에서 내 생각이 뜯겨나가야 하는지, 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날마다 주께서 나에게서 나의 두려움과 염려를 뜯어내는 그 작업에, 여러분들은 신나야 하고, 감사해야 하고, 이 말씀을 주시는 것에 대해서 고마워해야 합니다.

진짜 끝으로, 한 말씀 더, 이거 놓치면 안 되지 싶어서 합니다. 요한계시록 2장 11절에, 서머나 교회에 보내는 말씀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10~11절에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자는 ( □ )를 받지 아니하리라” 네모 안에 뭐가 들어가 있어요?

“내가 첫째 사망은 내가 죽일게. 하지만 둘째 사망은, 지옥 가는 것은 내가 너한테 면제해 줄게. 너 정말 기쁘지? 그지?” 우리에게 이 말씀하십니다. 정말 이게 우리 힘으로 말씀 못 지키는데, 주께서는 이 땅에서 고난 시켜 봤다가, 망했다는 소리 듣고 죽더라도, “걱정하지 마. 둘째 사망, 다시 말해서 지옥에 안 가고 부활 되잖아” 그걸 주께서 위로랍시고 주는데, 세상에 가짜들은 다 뜯겨나가요. 그런데 진짜는, ‘주여, 부활이 웬 떡입니까’라고 하고 감사할 거예요. 이게 진짜 교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쓸데없는 꼼수가 우리 주님 앞에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성경에 나오는 여러 가지에 대해서 건성으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역시 하나님 최고야. 우리 주님의 십자가 고맙습니다’라고 하지만, 실상 우리의 모습에, 나를 붙잡고 있지 않은지, 놔주지 않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의 일은 없고 몽땅 이미 주의 일이 되었음을 깊이 생각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주일오후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곱 교회  (0) 2026.05.10
완성된 성전  (3) 2026.05.04
밧모섬  (7) 2026.04.27
십자가 반복  (1) 2026.04.19
주관해석의 한계  (0) 2026.0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