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일곱 교회

아빠와 함께 2026. 5. 10. 17:05

일곱교회 

2026년 5월 10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1:17-19

(1:17)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1:18)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19)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1: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인간에게 사는 코스도 있지만 죽는 코스도 있습니다. 살고 죽으시는 것을 몸소 다 겪으신 분이 계십니다.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어디에서 말합니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일상 속에서 이점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합니다.

도대체 이 세상의 어떤 요소가 예수님을 죽게 했는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도 알고 우리 자신도 압니다. 곧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이 세상은 결코 우리가 계속 희망 품고 살 동네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점을 알기 위해 이 세상 사람들이 당연히 여기는 삶의 방식을 예수님의 죽으심에 입각해서 검토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다녀가시므로서 이 세상은 아무리 시간을 더 진척대로 그들의 운명은 전혀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은 똑같은 사상의 반복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은 특수한 민족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은 만드신 이유가 출애굽 3:12에 나옵니다. “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여기서 ‘하나님에 대한 섬김’이 나옵니다. 이것은 인간 고유의 모든 계획과 비전은 하나님에 의해서 박탈된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섬기는 자가 없으면 인간은 필히 자기 자신을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처음이요 나중이니”라는 식으로 나와 있습니다.

“처음이요 나중이니” 안에서 사는 것이 성도가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입니다. 성도는 따로이 자신이 할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시간이 멈춰져 있가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시간 안에 갇혀 있습니다. 이 땅에 그 어떤 변화가 일어나도 무의미합니다. 변화라고 할 게 못됩니다.

성도만이 이점을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런 마음 자세를 나타내듯이 오늘 본문의 사도 요한은 주님 앞에서 ‘죽은 자’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죽은 자가 무슨 자기만의 계획을 설계할 수 있습니까? 죽은 자는 그저 죽어있으면 됩니다. 모든 것은 이 세상에 대해서 완벽한 규정과 관련된 일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죽으시므로서 이 세상은 다시 사신 주님에 의해서 파멸의 대상입니다. 일곱교회란 예수님의 안목으로 인해 이 세상이 꼭 파멸되어야 될 이유와 그 증거를 수집하는 주님의 말단 기구에 해당되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세트장입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기존의 시간과 공간과는 달리 이미 하늘나라에 속한 이들이 보여주는 시간과 공간은 심판으로 채워질 수밖에 이유를 드러내는 시간과 공간입니다. 주님은 죽은 자처럼 엎드려 있는 사도 요한에게 지시를 내려주십니다. 그리고 일곱교회의 존재과 그 기능이 사도요한도 더불어 주님의 손에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주님의 오른손’에 붙잡혀 있는 교회는 ‘인자 같은 분’의 기능의 연속성으로 채워집니다.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 7:13-14)

이 양상은 마치 포장마차 어묵이 나무 꼬지에 꽂아서 뜨거운 육수 물에 담그고 있는 형상입니다. 어묵의 몸통은 뜨거운 물이 다 잠기지 않고 물 밖으로 그 실체를 드러냅니다. 하지만 어묵의 아래쪽은 여전히 뜨거운 물 속에 두게 됩니다. 어묵을 중심으로 상호 다른 시간과 공간을 나타냅니다.

반면에 이 세상 민족과 나라는 이와 같은 ‘인자(人子) 같은 나라’와는 무관합니다. 세상 나라가 충실하게 추구하는 이념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B.C 480년 경, 그리스 남쪽에 자리잡은 스파르타라는 나라를 통해서 대충 정리될 수 있습니다. 그 나라는 기원전 480년 여름에 페르시야 대군을 맞이해서 300명 군대로 승리한 바 있습니다.

이 스파르타 민족의 국가관은 일반적인 다른 국가관을 함축해서 보여줍니다. 즉 ‘국가가 백성에 앞선다’는 의식입니다. ‘토지+노동=국가’입니다. 나라가 수립되려면 토지가 확보되어야 하고 그 위에 사는 백성들이 열심히 노동을 하므로서 지상에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강인한 시민을 확보하기 위해 스파르타는 어릴 때부터 기정의 온화한 환경을 떠나야 했습니다.

7살 때에 집을 떠나 23년 동안 나라를 지켜내는 전사로 성장됩니다. 약자는 국가에 쓸모없고 모든 면에 강자인 자만이 최종 스파르타 시민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전사(戰士) 양성 단계에서는 헐벗고 최소한의 양식만 제공하므로서 버틸 수 없는 자들은 아예 국가의 이름으로 버리게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강한 민족도 B.C 188년도 테베라는 이웃 민족에게 망하게 되는데 페르새를 이길 때에는 시민권을 가진 자가 8,000명이 되었지만 B.C 371년 경에는 1,000 이하로 줄어듭니다. B.C 244년 경에는 700명 정도이며 B.C 188 경에는 부유층 70명만 남아 있어 사실상 전투가 될 수도 없었습니다.

왜 이런 식으로 인구가 줄어들었을 까요? 그것은 국가를 유지하는 세금이 너무 가중해서 감당할 수 있는 토지를 소지한 귀족들만 자기네 가문 토지를 지키면서 모든 노동은 노예를 사서 경작토록 했기에 많은 자녀를 낳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자녀의 수가 많으면 토지를 자녀 대에 다 나눠주게 됩니다. 어느 형제도 토지세를 감당할 길이 없게 됩니다. 그러면 그들도 노예로 전락합니다.

이점을 합리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기존의 시민권자들은 자녀를 적게 낳았습니다. 즉 토지를 대대로 자기 가문에서 전달하기 위해 자체적인 노동력을 줄이고 노예들에게 일을 맡긴 겁니다. 이런 비용이 막대하게 들어가는 겁니다. 자기들 가문만이 살아남기 위해서 애썼지만 전쟁할 군사도 잃고 토지도 잃고 국가도 잃었던 겁니다.

예수님을 죽여서 추방시킨 이 땅의 사람들은 미확정된 시간관을 가지고 미래를 내다보면서 그들이 토지 소유권을 지탱하려고 했습니다. 이게 과연 누구를 섬기는 일입니까 자기 자신을 섬기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미확정된 것은 일체 남겨두지 않은채 살아가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것이’라는 의식이 주님 섬기는 것을 방해함을 명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강-요한계시록 1장 17~19절(일곱 교회)260510-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계시록 1장 17~19절입니다. 신약성경 401페이지입니다.

“내가 볼때에 그 발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아멘.

여기 예수님 자신을 소개할 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전에 내가 죽었었노라” 주님이 어디서 돌아가셨느냐 하면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려고, 또는 계속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 이 세상에서 우리 주님은 오히려 반대로 돌아가셨어요. 그렇다면 이 세상에 대해서 우리가 그냥 살기만 하면 된다는 인식 자체가 주님이 하시는 일에 훼방자요, 방해자요, 주님을 모독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살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것을 쉽게 이야기하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예수님이 이 땅에서 죽으심으로써, 이 땅을 형성하는 시간과 공간은 그 속성이, 그 성질이 예수님을 살해하는 속성으로 가득 차 있어요. 예수님에 대한 독가스를 뿜어내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죽었다가 그다음에 “내가 전에는 죽었었는데 이제는 계속 세세토록 살아 있다”라는 이 말은, 주님의 시공간이 이곳 말고, 달리 주님의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따로 만든 세상이 형성돼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겁니다.

주님을 따라서, 주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시간과 공간이 새롭게 만들어진 세상이 따로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보는 세상 입장에서, 이 세상은 어떻게 보이는가. 이게 18절 끝에 나옵니다.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러니까 주님을 죽게 한 이 세상에 대해서는, 사망 도 음부니까 지옥이죠, ‘지옥이다. 사망이다’라고 이렇게 확정 지을 수 있는 근거가 우리 주님에게 계시고, 그 근거를 사도 요한에게 말씀으로 담아서, 사도 요한에게 지금 외치라고 전달해 주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다녀갔기 때문에 이 세상은 사망과 음부의 세계이고 거기서 누구도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이 확정돼 있다. 왜? “내가 전에 살아봤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거기서 죽어봤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거기서 탈출해서 따로 하늘나라에서 살기 때문에, 이 세상은 곧 지옥이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주님이 떠나버리면, 주께서 모든 자기 백성을 데리고 전부 다 철수하면 되죠.

철수하면 되는데, 여기에 보면 이렇게 돼 있어요.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라고 이렇게 돼 있어요. 이 대목을 보면서 제가 생각난 것은 뭐냐 하면, 바로 치킨집이라든지 그리고 포장마차에 오뎅 국물에 담겨있는 오뎅 꼬치, 어묵 꼬치가 생각이 나요.

그 뜨거운 물에, 펄펄 끓는 물에, 그냥 오뎅이 이렇게 잠겨있어요. 그런데 다 잠기느냐? 아니에요. 온몸이 잠겼는데, 그 꼬치의 끝은 삐쭉하게 나와 있죠. 그러니까 본래 연결되어있는 것은 예수님과 연결돼 있으면서, 교회의 발은 어디에 잠겨있는가. 이 지옥에 담가져 있는 이런 양상이에요. 설거지하다가 제가 발견한 건데, 분홍색 고무장갑이 있었는데, 분홍색 고무장갑이 이렇게 반듯하게 위에서 아래로 쳐져서 걸려있었어요. 내가 분홍색 고무장갑을 보니까, 거기 한 2cm쯤 되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조그마한 고리가 달려있어요.

고리하고 그 고무장갑은 후크로 연결돼 있고, 연결된 고리를 건조대 철망 구멍에 딱 걸어놓으니까, 고무장갑이 축 처져서 그렇게 있어요. 설거지 다들 한 번쯤 해봤으니까 그런 고무장갑 여러분도 아시죠? 전에는 고무장갑을 그냥 싱크대에 걸쳐놨잖아요. 그런데 이건 고리가 있어서 걸어놓으면 물기가 다 빠지도록 그렇게 돼 있었어요. 이제 그래 놓고 성경은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이미 주께서 다녀간 이 세상에 푹 물로 젖게 해놓고, 하는 말이 “죽도록 충성하라”라고 하세요. 우리가 여기서 생각하는 것은 도대체 하나님께서 교회에 요구하는 것이 뭐냐는 겁니다. 왜 교회라는 것을 철수시키지 않고, 데려가지 않으시고, 이 세상이 지옥이라고 하시면서도 거기에 성도들이 몸을 담고 살라고 하시는 그 이유가 뭐냐 하는 겁니다.

이걸 알기 위해서, 출애굽기에 보면 애굽에서 나왔던 그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특수성에 대해서 우리가 살펴볼 필요가 있지요. ‘이 나라는 특수한 나라다’ 특수한 나라라는 것은 다른 일반적인 나라와 다른 특수한 나라다. 그래서 저는 이 시간에 두 개를 분리해서 하겠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주님께 붙잡힌 바 되지 않았던 일반 나라는 어떤 식으로 이 세상에서 자리 잡고 있는가.

그 한 가지와, 두 번째는 그 나라와 전혀 다른 특별한 나라 이스라엘은 어떤 목적과 취지 때문에, 하나님에 의해서 이 세상에 등장했는가. 출애굽기 3장 12절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라고 되어있어요.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내신 그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백성으로서 모집된 자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라는 백성들은 일체 뭐가 없느냐 하면, 자기 생존과 자기 삶을 도모하는 것은 애당초 이건 거부되게 되어있어요. 이건 성립이 안 됩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만들어진 나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나라라면, 어떻게 섬기는데?

뭐, 찬양하고 기도하고 그렇게 섬기느냐. 거기에 대해서 출애굽기 3장 13~15절까지 보게 되면 상당히 어려워요.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여기서 스스로 있는 자가 너희를 보냈다고 할 때, 스스로 있는 자가 뭐냐 하면,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1장 19절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라고 나오고, 또 1장 8절에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라고 되어있어요.

여기 “스스로 있는 자, 알파와 오메가”라는 이걸 한마디로 축약하면 이렇습니다. “모든 시간을 멈춰버리고” 우리가 ‘얼음, 땡’ 하듯이 모든 시간을 멈추게 하신 하나님이 스스로 있는 하나님이에요. 시간 자체를 멈췄다는 말은, 고정해서 하나의 전체를 투명한 얼음처럼 굳어지게 만든 거예요. 그렇게 되면, 시간이 흘러간다고 생각한 그러한 집단이 있을 것이고, 시간은 흘러가지 않고 어디 있더라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난다고 확정된 사람이 따로 있겠죠.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은 우리 인간이 생각하는 기존의 시간과 공간이 흘러간다는 것이, 움직인다는 것이 이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게 된 사람입니다. 하나님 손에 있다는 자체가 모든 것이 확정되었고, 결정 났고, 종착점에 도달했다는 것을 아는 자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섬기지 않고, ‘내가 여기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라고 나오는 순간, 우리는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아직도 미진한 일이 남아있게 됩니다.

그것은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솜씨 발휘하고 자기 재능을 자랑질하는 거예요. 우리가 어떻게 하든 간에 그냥 얼음이라고 보면 됩니다. 시간이 꽁꽁 얼어버린 그 안에서, 우리가 거기에, 시간을 얼게 한 분과 함께 있는 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유일한 방식이에요. 그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왜냐 하면, 오늘 요한계시록 1장 17절에 보면,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도 요한을 죽은 자 같이 다루시는 거예요. 근데 죽은 자와 같이 다뤘다면,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굉장히 두려워하잖아요. 그런데 뒤에,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나는 처음이고 나중이다. 지금 아직도 네가 생각하고, 네가 어떻게 계획을 잡고, 어떤 프로젝트를 생각하고, 네가 어떤 인생의 목표와 계획을 생각한다는 그것은 네가 지금 죽은 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건 네가 지금 살아 있는 거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 나를 섬긴다고 할 수 있어? 안 돼” 섬기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 ‘당신의 이름은 뭡니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은 나와 함께 있는 백성들은 시간이 이미 그 안에서 고정돼 있고 끝나버린 거예요. 내 시간, 내 공간, 캐나다 이민 가고, 호주 이민 가고, 그거 소용없어요.

어느 장소든 간에, 거기에서도 시간은 처음이고 끝이고 함께 있습니다. 내가 새삼스럽게 뭔가 추스르고 해야 할 게 남아있지 않습니다. 내 계획은 없습니다. 죽은 자가 무슨 계획이 있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뭐 할까요? 오른손으로 가지고, 오른손으로 주께서 붙들었다는 말은, 일곱 교회를 오른손으로 붙들었다는 말은, 주께서 이제 말씀대로 우리를 사용하시는 거예요.

무슨 사용하는데? 예수님이 재림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춰주는 겁니다. 오뎅 꼬치를 뜨거운 물에 푹 담갔을 때, 그게 사라지거든요. 내가 만약에 오뎅 꼬치를 가지고 뜨거운 물에 넣는다면, 내 팔의 연장으로써 어묵의 끝이 거기 뜨거운 물에, 뜨거운 지옥에 있다고 봅시다. 그러면 나의 몸을 타고 거꾸로 올라가면, 내 몸체가 여기 있잖아요.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몸이고 성도를 자기의 일곱 손가락, 일곱 지체, 오른손에 일곱 (나무의) 가지로 보는 거예요.

가지로 봐서, 주께서 지금 이 세상을 재림하셔서 완전히 심판하는 빌미와 그 근거를 자기 일곱 교회를 앞장세워서 심판의 합당성과 정당성을 거기서 찾아내는 일을 하시는 거예요. 교회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이래서는 이 성경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죠. 그래서 조금 짧은 시간이지만, 나머지 시간에는 인간 나라에서는 어떻게 인간들이 계획 잡고 움직이는가 그걸 말씀드리겠습니다.

BC(기원전) 480년경에, 지금의 그리스 남쪽 지역에 있는 반도, 거기에 스파르타(Sparta)라는 나라가 있었어요. 그 스파르타라는 나라는 애가 7살이 되면, 남녀 가리지 않고 7살부터 부모 품을 떠나서, 애를 떼놓게 하고 합숙 훈련을 들어갑니다. 무슨 합숙 훈련을 하느냐 하면, 장차 군인을 만들기 위해서 합숙 훈련을 들어갑니다. 부모를 떠나서 23년 동안 전사, 군인으로 양성합니다.

양성할 때 1년 동안 허름한 옷 한 벌만 주고, 양식도 겨우 먹을 양식만 딱 줍니다. 그중에서 못 버티고 애가 살지 못하고 죽으면, 그 아이는 갖다 버리는 거예요. 왜? 장차 이 스파르타라는 나라를 건사하지 못할 그런 나약한 인간은 우리 스파르타라는 나라에서는 정식 시민으로 안 받아준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그렇게 훈련을 시킵니다.

이 스파르타가 그렇게 훈련을 시켜 놓았는데, BC 480년 테르모필레(Thermopylae) 전투에서 페르시아(지금의 이란)가 데려온 군대 20만 명과 이쪽에 스파르타 군인 300명과 붙어서, 300명이 이겼습니다. 효과를 본 거죠. 그래서 애를 어릴 때부터 그렇게 키웠는데, 이 말은 뭐냐 하면은, 국가가 있고 그다음에 백성이 있는 거지, 국가 없는 백성은 그거는 용납이 안 된다는 거예요.

국가가 튼튼해야 백성도 살아남기 때문에, 국가를 위해서 자식을 바치는 것은 국가의 장래, 국가의 존립을 위해서 마땅하고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이에게 양식을 얼마 안 주면, 배고프니까 도둑질하고 하겠지요. 이 도둑질을 하다 걸리면 채찍으로 때립니다. 때리는 이유가 도둑질해서 때리는 게 아니고, 왜 들키냐는 말이죠. 몰래 해야지, 이거는 뭐 군에 가 본 사람들은 많이 경험했죠. 군에서는 도둑질이 나쁜 게 아니고 도둑질하다가 걸리는 게 나쁘지요.

아무튼 그렇게 해서 나중에 군인이 되고, 시민이 돼요. 스파르티아타이라는 이름의 시민이 되면, 시민권을 유지하는 비용으로 시시티아(Syssitia)에 회비를 매달 내야 해요. 그 회비가 그야말로 엄청나게 많은 회비인데, 50인분의 치즈와 헌물과 고기 살 돈과 과일과 무화과와 보리, 이런 것들을 회비로 내야 돼요. 그런데 결론부터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BC 480년경에 그 나라의 인구 숫자가 8천 명이었어요.

거의 한 100년 뒤인 BC 371년경에는 천 명으로 줄어듭니다. BC 244년, 130년 후에는 700명으로 줄어요. 그다음에 188년에는 70명으로 줍니다. 그리고 아주 망할 때는, 테베라는 민족이 쳐들어왔을 때인데, 군인이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고 조용하게 멸망 당했어요. 그렇게 철두철미하게 국가를 만들었는데, 어떻게 해서 나라가 그렇게 폭삭 망했는가. 그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가 시민권을 갖게 되면 그 국토의 토지를 갖게 되는데, 시민권이 없는 자들은 노예로 삼고, 자기들은 일하지 않고 노예가 했던 노동의 대가를 시민권에 합격한 그들만의 가문을 위해서 노예를 활용했던 거예요. 그런데 왜 그렇게 하냐. 그래야 시시티아(Syssitia)에 그 회비를 매달 낼 수 있는 여력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그게 망했느냐.

애를 낳았는데, 토지가 주어진 상황에서 만약에 애를 4명을 낳았다면, 토지를 4 등분해버리면 토지의 1/4을 가진 자식들이 시시티아(Syssitia)에 회비를 내지를 못해요. 못 내면, 4명 다 시민권에서 탈락해서 노예로 전락해 버려요. 노예로 전락하면 토지 소유권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걸 알고 있던 귀족들이 애를 하나만 낳든지, 아예 안 낳든지 그렇게 해서, 자기 가문을 그런 식으로 살리고 토지를 계속 붙들고 살아가는 거예요. 토지를 붙들고.

국가가 뭐냐. 국가라 하는 것은 토지에다가 자기의 노동력을 입혀서 국가가 되는 거예요. 이게 인간 나라입니다. 토지가 있는 거, 거기에 노동이 있으면 안 돼요. 토지가 있어야 해요. 이 땅이 있고, 이 땅이 누구 땅? 내 땅이 될 때 비로소 우리는 나만의 작은 국가가 성립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가면서 계속해서 이 토지를 우리 가문, 우리 가문의 땅으로 유지를 해야 하고, 자식도 내가 죽고 나면, 자식이 그 토지를 이어받아서 노동력을 입혀서 그렇게 국가, 이 땅에 국가가 유지돼야 하는 거예요.

여기 요한계시록 1장 13절에 보면,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라는 단어가 나오죠. “인자 같은 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에 나오는 단어냐 하면, 다니엘 7장 13절에,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라고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인자 같은 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뭐냐 하면은 하늘나라의 백성을 모집하기 위해서, 이 땅에 토지 붙들고 자기 노동 투자해서 이 땅은 우리 땅이라고, 스파르타 땅이라고, 대한민국 땅이라고 하는 이 세상, 이것을 모조리 전부 다 완전히 불로써 멸망할 계획을 잡고, 인자 같은 이가 이 땅에 와서, 그들이 멸망할 근거, 심판받을 이유를 일곱 교회를 통해서 그들에게 이유를 굳히는 거고, 찾아내는 거예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토지가 있다. 그 토지는 내 소유다. 재산이 있다. 그 재산은 내 거다. 내 거다. 그럼 나는 죽는다. 그럼 남은 자손에게 물려주면 되지. 물려주면 남는 것은 뭐냐? 대대로 ‘아~대한민국, 대한민국은 영원하리라’라고 이렇게 되잖아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다녀갔던 세상이고요, 그거는 하나님을 섬기는 데 방해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계획은 뭐냐? 일곱 교회를 앞장세워서, 일곱 교회가 하는 일이 이렇게 토지를 갖고 노동으로 이 세상을 이렇게 생활하겠다는 것과는 정반대되는 일곱 교회를 이 땅에 남겨두어서, 일곱 교회는 그러한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점유가 다 부질없는 짓이고, 그거는 사는 코스가 아니라 죽는 코스고, 멸망 코스라는 것을 알리는 이유를 일곱 교회로 하여금 하게 하셨던 겁니다.

조금만 말씀 더 드릴게요. 이거는 꼭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러면 이 교회라는 것이 주님의 발로써, 팔로써, 그리고 주님의 사지로써 정말 필요한 거예요?’라고 물으면 정말 필요하지요. ‘야, 그러면 교회가 있다는 것은 곧 주님이 계신다는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교회에 있다면 주님이 계시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에 와서 주의 말씀 듣고 주님을 섬기고 예배하고 하잖아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그건 이해하겠다고 하겠지요. 끝으로 문제를 하나 낼 테니까 여러분은 속으로 한번 맞춰보세요. 어떤 사람이 제 집에 전화해서, 근데 그 어떤 사람이 자기가 재벌이에요. 재벌인데, 이 교회에 큰 헌금, 1~2억 정도가 아니고 적어도 수십억 헌금을 하기 위해서, 어떤 교회가 바른 교회인지를 테스트하기 위해서 전화를 거는 거예요.

‘교회 목사님 되십니까?’ 제가 여러 번 받아봤거든요. ‘제가 먹을 게 없어서 이렇게 힘든데, 지금 교회 찾아갈 테니까 먹을 것 좀 내놓겠습니까?’라고 물었어요. 그런 전화를 자주 받으니까. 그러면 이제 제가 받아서 대답하죠. ‘교회 예배도 끝났지만, 교회는 그냥 먹을 거 하나 주는 그런 게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사도행전 3장에 이런 게 있어요. “내게 은과 금은 없으나 주 예수 이름으로 걸으라” 아주 편리하죠.

‘우리는 은과 금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있습니다’라고 이렇게 할 때 그쪽에서 ‘예, 잘 알았습니다’라고 하고 전화를 탁 끊지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람이 우리 교회에 헌금을 수십억 하려고 테스트해 보았는데, 목사가 딱 부러지게 ‘우리는 그런 구제할 의사가 없습니다’라고 이렇게 했을 때, 그런 사실이 밝혀졌다고 합시다. 여러분한테 묻습니다.

그러면 제가 잘못한 겁니까? 어떻습니까? ‘그때 그 전화 좀 친절하게 받을걸. 우리 교회는 어려운 사람 이렇게 외면하지 않는다고, 진짜 가난한 자에게 한 것이 바로 예수님한테 한 것이라고, 목마른 소자에게 한 것이 예수님한테 한 거라고, 그런 말씀을 실행하는 진짜 교회라고 했으면, 교회에 수십억 현금이 들어왔을 건데...’ 이렇게 되는 거예요?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거는 지난 오후 설교 때 했습니다. 교회가 망해야 교회가 뜹니다. 교회가 망해야. 일곱 교회, 주님 가신 길대로 일곱 교회가 망하기 위해서, 일곱 교회가 있는 거예요. 진짜 교회는 그러한 시험에도 두려워하지 않는 거예요. 왜? 교회는 안 망하니까, 안 망하니까 망해도 괜찮지요. 왜? 그리스도의, 이미 다 이루었던 그리스도의 손에 있기 때문에, 이게 바로 진짜 교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교회 자체가 시험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다 이루심을 파괴하지 않게 하옵소서. 이 세상이 멸망해야 할 것을, 이제는 느긋한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세상에서 토지를 가지고 노동력으로 부자 됐다는 이런 자들이 얼마나 죽는 코스인 것을, 과감하게 외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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