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두 가지 사망

아빠와 함께 2026. 6. 7. 20:54

두 가지 사망 

2026년 6월 7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2:8-9

(2: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2: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오늘 본문에 보면, ‘사단의 회’가 나옵니다. 즉 ‘총회’가 나옵니다. 그리고 ‘마귀’가 나옵니다. 그리고 ‘둘째 사망’이 나옵니다. 다 이런 개념이 이미 주님으로 인해 완료된 개념입니다. 이는 개별자들이 새로 성취해야 될 개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미 다 이루진’ 개념을 성도는 느끼고 체험될 뿐입니다.

특히 10절에서,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는 말씀에서 사람들은 주눅이 들 수밖에 없을 겁니다. “아, 나는 또 신앙생활에 실패가 할 수밖에 없단 말인가”라고 단식할 마음 준비부터 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 개별적 의식으로 무장되어 있는 탓입니다.

특히 ‘유대인의 총회, 유대인의 모임’이라는 것은 인간들의 행함으로 하나님을 믿어내겠다 는  투쟁적 의지로 뭉쳐진 단체입니다. 이들 단체의 적극적 활동으로 인하여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이 여기 저기서 많은 괴로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집단’이라는 의미로 총회 개념을 세우는 것은 이미 구약에서도 많이 등장합니다.

민수기 16:1-3에 보면,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에 유명한 어떤 족장 이백오십 인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리니라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자칭 ‘총회’라고 표현한 이들의 모임의 근거는 내용은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에 있습니다. 언뜻 보면 바른 소리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누락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민수기 12:19에 나옵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알아야 할 점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의 옳음에서 출발해서는 아니된다는 점입니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여호와께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에게 이르시되 너희 삼인은 회막으로 나아오라 하시니 그 삼인이 나아가매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로서 강림하사 장막 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시는지라 그 두 사람이 나아가매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여호와께서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떠나시매” 즉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집’을 먼저 상정하십니다. 이것은 ‘구조’입니다. 개별자 의식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본인이 노력 여하에 따라 구원되든지 아니되든지 판가름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들은 자기 실패에 스스로 괴로움을 당합니다. 실패한 것과 괴롭고 또한 앞으로 실패당하지 않으려고 긴장하는 것도 힘든 일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아무리 서로를 의지하기 위해 단체를 만들어도 그들은 자신들의 실패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모세의 경우, 그는 하나님의 영광과 마주 대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살아도 산 자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일에 대해서 히브리서 3:4-6에 잘 나와 있습니다.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또한 모세는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성도란 구조, 하나님의 집, 즉 그 안에 주님으로 인해 새로 정립된 ‘사망’이라는 개념을 위하여 사환으로 일하게 됩니다. 이 ‘사망’이라는 개념은 예수님께서 죽었다고 살아 나심으로 인해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으로 절차가 마련되었습니다. 이는 인간들의 개별적 자기 의식에서 나올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상령님께서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는 자에게만 알아 들을 수 있습니다.(계 2:11) 성도는 ‘사망’이라는 말씀을 드러내기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들 성도는 예수님의 육체에 의해서 형성도 구조 안으로 이미 들어왔기에 ‘둘째 사망’의 존재가 실제로 있음을 알리는 역할을 합니다.

이 역할을 위해 성도는 ‘첫째 사망’의 한도를 몸으로 체험해야 합니다. 이 체험에 동원되는 피조물이 바로 마귀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죽였던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마귀가 기껏 할 수 있는 것은 ‘첫째 사망’뿐입니다. 마귀에 속해서 성도를 괴롭히는 자들은 첫째 부활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계 20:5-6)

그렇다면 첫째 부활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는 어떻게 될까요? 요한계시록 21:8에 보면,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악마의 사주를 받은 인간들, 즉 유대인의 총회는 예수님을 살해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 조직의 후손에게 있어 예수님의 주장이 도움이 되지 않다고 판단했기에 미리 제거한 겁니다. “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요 11:50)

지금의 사단의 회는 ‘민주주의’입니다. 이들 인간들은 자신의 바탕이 오류인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 홀로 이루신 하나님의 집에 취직된 것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0강-요한계시록 2장 4~7절(두 가지 사망)260607-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계시록 2장 4~7절입니다. 신약성경 376페이지입니다.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아멘.

본문은 9절까지 읽었지만, 사실은 거기에 10~11절에 보게 되면, 거기에 유명한 말씀 나옵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이런 말씀을 본인이 원해서 듣든지, 안 그러면 상황이 그래서 억지로 듣게 됐든지, 우리에게는 자신의 실패에 대해서 걱정을 유발하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성경 보면서 구원받았다고 자부했는데, 막상 요한계시록 2장 10절 같은 경우를 보게 되면, 자신감이 뚝 떨어지죠.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여기에 보게 되면, 여기서 나온 성도가 환란을 되게 받는데, 그 환란은 죽음에 이르도록 환란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환란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주체가 있어야 하겠죠. 그게 바로 마귀라고 했어요.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그러면 이거는 마귀의 뜻이 아니고 마귀로 하여금 그런 일을 벌이도록 뒤에서 마귀를 부추기는 분이 계시죠. 그분이 어떤 분이냐 하면, “그거 봐. 나는 죽었다가 살아났잖아. 내가 죽었다가 살아났잖아. 너희들도 내 짝 나야지. 내 꼴 돼야지”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날 때, 그때 너희를 옥에 집어넣는 악마가 이미 앞당겨서 나에게도, 나를 죽였던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우리가 이제 시험을 받아서 고생하는 것이, 이게 실패가 아닌 거예요. 정상적인 코스에 들어섰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11절에 보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라고 나오는데, 이 귀는 어떤 귀냐 하면 성령의 말만 체크할 수 있는 귀, 그냥 사람의 말을 체크하는 귀 말고, 성령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따로 달린 너희들.

너희들에게는 어떻게 하느냐?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사망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첫 번째 사망이 있고 두 번째 사망이 있어요. “첫 번째 사망은 너희들이 실컷 어떤 해(害)를, 첫 번째 해를 받아야 한다. 그 해를 받기 위해서 너희들은 악마로부터 시련을 당해야 한다”라는 그런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너희가 어떤 어려움을 당할 때 실패했다는 그러한 걱정, 실패했다는 그러한 두려움으로 인하여, 네가 너를 괴롭히지 말라는 겁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이렇게 질문할 수 있어요. ‘이 성경의 말씀이 개별적인 삶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인가요, 아니면 어떤 구조를 이야기하는 건가요?’라고 이렇게 물을 수가 있어요. 여전히 개별적인 삶을 제대로 살아야 구원이고 천국이고 있다는 그런 뜻입니까?

아니면 네가 구조 안에 갇혀있고, 그 안에, 이미 그 구조의 틀 안에 들어왔다는 뜻일까요? 그 점에 대해서는 히브리서 3장이 해답을 줍니다. 히브리서 3장 4~6절에 보면, 거기에 모세가 나오는데, 그 대목은 모세와 예수님을 비교하는 대목이에요. 여기 히브리서 3장 4절부터 보면,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여기 집이라는 말이 있어요.

집이라는 말을 하면 딱 떠오르는 것은 구조입니다. 구조. 개별자가 아니에요. 개별자가 따로 열심히 뭔가 자기 세계를 만드는 그게 아니고, 이미 개별자가 설치기 전에, 구조 안에 놓여있는 개인, 구조 안에 놓여있는 개인이에요. 또한 모세 이야기가 나옵니다.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러니까 모세가 취직한 거예요. 모세 때는 모세가 하나님의 집에 취직했고,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이미 천국 안에 취직해 있는 겁니다. 공통점이 있는데, 모세도 모세가 일할 때 개별적으로, ‘나 이렇게 해야 구원받는다’라는 그런 의식이 하나도 없어요. 그냥 ‘하나님의 집에 취직해서 일한다’라는 이런 개념이거든요. 그러면 그 일이 무슨 일인가.

그게 바로 히브리서 3장 5절에 보면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일했다. 장래에 대해서 말할 것을 위해서 일했다고 이렇게 돼요. 젊은 사람도 나중에 취직하면 직장 생활을 하잖아요. SK나, LG나, 삼성에서 일한단 말이죠. 일하는데, 일 좀 하고, 대모 좀 하니까, 8억. 그러면 그건 만약에 삼성그룹이 하늘나라라면 이렇게 해야 해요.

그 8억은 개별적으로 자기가 쓰는 돈이 아니고, 이 삼성그룹이라는 집을 위해서 쓸 비용이라고 생각해야 되겠죠. 그게 바로 오늘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개인 소유가 아닙니다. 이 생명의 면류관은 나중에 요한계시록에 4장에 보면, 도로 반납해요.

4장 10절에, “엎드려서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내가 줬지?’ 예, 받았습니다. 그러면 제가 도로 드립니다. 이렇게 도로 드리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이나 그리고 모세나 오늘날 성도도 개별자라는 건 없어요. 구조를 위해서, 하나님의 집을 위해서 봉사했을 뿐입니다. 그 봉사하는 중에, 마귀와 더불어 옥에 갇히는 봉사를 하시라는 그런 뜻이에요.

계속 히브리서 3장 6절을 보면,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아들로 충성한다는 것은 그 집이 아들 집이 돼요. 골로새서 1장 13절에 “사랑의 아들의 나라”가 돼요. 천국은 주의 나라가 되고, 그 주가 예수님이 주가 돼요. 주님이 주인공이 되는 나라, 주님의 공로로 만들어진 구조, 그 구조에 네가 말려든 거예요.

우리 성도가 거기에 끌려 들어갔고, 말려 들어간 거예요. 역시 또 개별적인 거, 개별적인 가치는 여전히 존재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개별적인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여기 요한계시록 2장에 이런 말이 나왔어요. 9절에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사단의 회. 악마가 회장님이 되어서 추진하고 모아진 사탄의 회. 이 사탄의 회의 특징은 바로 이상하게 조직은 갖추고 구조가 있는 것 같지만, 그 안에 특징은 개별자 의식으로 충만한 곳이에요. 저는 이 사탄의 회를 민주주의라고 봅니다. 민주주의. 왜냐하면 헌법 전문의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돼 있어요. 우리나라에 국민으로부터.

헌법이 시작이고 끝, 알파이고 오메가 헌법. 국가는 헌법이잖아요. 헌법 시작에서 뭐가 빠져 있느냐 하면, ‘나는 오류가 있습니다’가 빠져 있어요. 오류가 있는 나에게서 어떤 주권이 나와 봤자, 그 주권은 엉터리 주권이죠. 그러니까 인간은 아무리 연구하고 공부하고 박사 학위를 받아도, 뭘 모르느냐 하면, 나는 어떤 오류에서부터 출발했느냐는 요 대목이 인간에게는 빠져 있습니다.

나는 대단하다. 나는 자비롭다. 뭐 이런 거. 자기가 선한 척하고 잘난 척하고, 출발점은 자기로부터 시작을 하는 거예요. 유대인들이. 유대인들이 자기로부터 시작하는데, 이것이 사탄의, 악마의 모임이라고 하는 것이 언제 들통났느냐 하면은, 그 유대인의 집합체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거기에 들어오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제거했잖아요. 없애버렸잖아요.

앞으로 우리 후배들 조직에 이 예수님의 이야기가 계속 밝혀진다면, 우리 유대 국가의 조직에 지장이 된다. 우리가 알아서 없애버리자. 그게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대제사장 가야바가 연설한 내용이에요.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요11:49~50)

한 사람을 죽여서 우리의 미래가 보장된다면, 한 사람을 우리가 사형시킵시다. 오케이? 좋아요? 저것들은 다 아멘 했어요. 무엇을 위해서 예수님을 제거해야 했느냐 하면은, 유대인의 모임을 위해서 하나님마저 굳이 제거해야 할 그러한 집단이 유대인 나라라면, 그러면 그 유대인 나라는 뭐라고 지칭해야 하는가? 악마의 집단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악마의 집단이에요.

이런 일이 민수기 16장 3절에 보면, 이런 말이 나와요. 모세를 이제 거스르는 거예요. 모세를 반대하면서, 그들이 이제 모였고 총회가 되었죠?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

모세와 아론을 배제하는데, 배제한 핑계가 뭐냐? 거룩한 여호와의 총회에 네가 독보적으로 높아지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는 당신을 제거하고 싶다는 이런 뜻이에요. 그러면 그들이 말하는 여호와의 총회가 뭐냐? “우리가 각각 거룩하다”라고 하는데, 이게 뭔 뜻이냐 하면, 그들이 출애굽 할 때, 그들은 각자 왔다는 거예요.

모두가 거룩한 자들, 애굽에서 벗어난 모두가 거룩한 자들이기 때문에, 다 같이 거룩하다는 거고, 다 같이 거룩한데, 네가 뭔데 우리한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는 지시와 명령을 내리느냐고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소위 여호와의 총회라고 하는 사람, 자꾸 여호와의 총회 하니까, 합동측 총회를 생각하게 되는데, 여호와의 총회라는 사항에 그들은 뭐가 빠져 있느냐 하면, 그건 바로 민수기 12장에서 구스, 현재 에티오피아죠, 흑인 여자를 취해서 모세의 아내를 삼으려고 할 때, 그 시누이가 아주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그런 여자를 데려오냐. 반대할 때, 갑자기 여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그 미리암에게, 미리암이 여자인데, 여자의 가장 약점은 뭐냐? 자기 미모가 작살나는 거예요. 문둥병이 되고 말았어요. 자기 얼굴이 있을 자리에 하나님 저주의 얼굴로 바뀐 겁니다. 그 이유가 있어요. 모세가 갖고 있는 특별한 온유함이 없다는 거예요.

모세의 온유함은 어디서 얻은 것인가? 모세의 온유함은, 하나님을 직접 만나니까 도대체 내가 살았다는 것 자체도 이거는 기적이라는 것을, 그 하나님 앞에서 비로소 모세는 경험한 사람입니다. 이거는 내가 산 게, 산 게 아니다. 그런데 내가 왜 살아야 되는가? 오늘 본문대로 하면 이겁니다. 사망을 위해서 모세는 일하고 살아야 했다는 거예요.

사망으로 사는 겁니다. 사망이라는 특별한 하나님의 현실이 되어버린 말씀을 위해서 모세와 아론은 활동해야 했어요. 죽은 자로서 사는 자만이 살게 된다는 원칙. 이 사망이 바로 오늘 요한계시록 2장 11절에 아주 어려운 단어로 함축돼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둘째 사망”이에요. 둘째 사망. 참, 도대체 이 성경 말씀이 인간의 지혜에서 나온 말씀이 아닌 거예요.

둘째 사망이에요. 그러면 인간이 이 성경 말씀에 둘째 사망이란 것이 어디서 나오는가? 예수님의 Body, 예수님의 신체가 이 땅에 오심으로써, 신체가 구조를 만들었고, 그 구조가 교회가 된 거예요. 그래서 그 교회 안에 통용되는 의미는 예수님께서 온 말씀을 다 이루었잖아요. 다 이루었으니까 구조가 마련돼 있고, 구조 안에는 미완료가 없어요.

이미 다 이룬 거예요. 이미 이루어진 개념을 성도로 하여금 예수님이 겪었던 체험을 그 구조 안에서 같이 겪게 함으로써, 제대로 된 하나님 여호와의 총회가 되는 겁니다. 그 총회가 되기 위해서, 그 개별자끼리 이어지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다 이루었다”, 그러니까 그냥 말씀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이미 다 이룬 말씀이 각자의 개별자 속에 엮어져서, 이 말씀은 이루어진 말씀대로 그것을 드러내는 증거로서 성도들이 살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가 할 게 없다고요. 성도가 할 게 없어요. 성도가 죽도록 고생하는 것도 누가 시켰어요? 그 마귀가 와서 그렇게 시킨 거예요. 마귀 보고 고맙다고 할 필요는 없고요. 자기도 그리스도의 총회를 위해서 봉사하는 악한 부정적 역할을 하거든요. 그럼,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딱 이거죠. 둘째 사망이니까 분명히 첫째 사망이 있죠.

그럼, 첫째 사망이 뭐고 둘째 사망이 뭐냐. 그 개념을 위해서 우리는 아직도 살아 있어요. 사망을 위해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뜻이에요. 살려고 사는 게 아니고 사망을 위해서. 이미 죽었다가 살아난 분의 손에 잡혀 있으니까, 그 손에 잡힌 구조는 하나의 집이라고요. 하나의 집. 직장에 사환 또는 직원 생각할 때, 늘 염두에 두는 그런 직장이 있는데, 그게 바로 봉화에는 어린이 문구사예요.

제가 봉화에 살았거든요. 어린이 문구사하고 친하게 지냈고, 아직도 친하게 지내는데, 만약에 그 어린이 문구사에 직원으로 취직했다고 봅시다. 직원으로 취직을 할 때, ‘저, 사장님 옛날부터 월급이 적어서 나는 안 나옵니다’ 그럼 사장님, ‘나오지 마. 너 안 나와도 어린이 문구사는 그대로 유지해야 해’ 지금 어린이 문구사가 아직도 있어요. 지금 간접 광고하고 있는 거예요.

봉화 갈 때 한번 찾아보세요. 농협이 어린이 문구사 바로 앞에 있어요. 그러니까 이게 지금 구조가요, 우리가 개별적으로 나쁜 짓을 하고 안 하고 하는,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이 구조는 네가 뭐 들락날락하든 어떻든, 이 구조는 그대로 있는 겁니다. 그 구조가 뭐냐? 이미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 그 개념을 이루기 위해서 이 구조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이니까, 성령께서 활동하고 있고 그 성령이 하는 말을 따로 들을 수 있는 귀, 이 귀는 이비인후과 가도 소용없어요.

성령이 주시는 귀가 있는 자는 구조적으로 하는 것을 들을 것이다. 쉽게 말해서, “네가 모세다”라는 이 말이죠. 네가 이 하나님의 구조 안에서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집을 위하는 모세와 같은 존재라는 이 말입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사환이고, 주인은 예수님이 주인이라는 그 말이죠. 그러면 이제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을 우리 몸을 통해서 증거하는 일만 하면, 그러면 그게 바로 오늘날 우리 하는 일입니다.

어렵지 않죠? 사는 게 그렇게 실패라는 게 애초에 존재하지 않아요. 성도한테는 실패가 없습니다. 구조적이니까요. 그럼, 첫째 사망이 뭐냐. 요한계시록 12장 11절에, 어린 양의 피가 이겼어요.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니까 어린 양의 피가 있어서, 개별적 인생 살다가, 내 인생이 왜 이러냐고 하면서 살다가, ‘어?’하고 들어가 보니까, 하늘나라에 취직이 된 거예요.

취직이 되다 보니까, 거기에는 어린 양의 피만이 깨끗함을 주는 곳이라는 것을 이미 알게 되었잖아요. 알게 되었으니까, 그때부터 이 남은 Body, 육신을 가지고 뭘 하느냐? 첫째 사망의 한계를 보여주면 되는 거예요. 첫째 사망의 한계. 첫째 사망은 어떤 인간도 거기서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신자든 신자 아니든, 빠져나갈 수 없어요. 이게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옵니다.

20장 6절에 보면,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여기에 둘째 사망 나오지요. 그리고 앞에 4절에 보면, 성도가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이라고 했어요.

왜 목을 베었느냐 하면,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표를 받지 아니하여서 목이 베인 거예요. 제가 아까 말씀드릴 때, 이 사탄의 회, 예수님 같으면 유대인, 그 당시에 이 서마나 교회도 유대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총회가 있기 때문에 핍박을 많이 받았어요. 그러면 오늘날은 뭐냐? 오늘날 성도는 어디한테 핍박받는가? 공산주의? 사회주의? 아니죠.

민주주의 그리고 자본주의한테 핍박받는 거예요. 왜? 민주주의나 자본주의는 아직도 첫째 사망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혼자 자기 인생 살아보겠다고 몸부림치는 자들이에요. 굳이 살 필요도 없는데, 이유도 없는데 산다는 것은, 그만큼 이미 자기의 공포와 두려움을 사서 하는 인간들이에요. 죽은 자한테 째려봐야 소용없잖아요. 이미 첫째 사망은, 이거는 둘째 사망에 이르지 않은 거, 첫째 사망에서 벗어나면 뭐가 있느냐. 첫째 부활이 있어요.

첫째 부활. 이게 바로 요한계시록 20장 5절에 나오거든요. “이는 첫째 부활이라” 첫째 사망이 있고, 첫째 부활이 있고, 둘째 사망이 있고, 둘째 부활이 있고, 첫째 사망과 첫째 부활은 이 땅에 있을 때 이야기, 이 세대에서 일어난 일이고, 우리 육신이 있는 세대. 그리고 나중에는 둘째 사망인데 둘째 사망은 지옥입니다.

거기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 보면,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거기에 누가 있느냐? 악마와 왕들, 이런 사람들이 다 기다리고 있다고요. 첫째 사망을 벗어나서 첫째 부활이 된 사람은 어떤 혜택이 주어지느냐 하면, 지옥에 안 가요. 지옥에 안 갑니다. 아니, 못 갑니다. 우리들이 이런 신세예요. 신세가 지옥에 못 가는 신세예요.

왜냐하면 우리가 갈 세계가 아니거든요. 거기는 예수님이 없어요. 제가 울산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어요. 오늘날 사람들이 때려 죽어도 예수 없는 곳에 가려고 해요. 죽어도. 아주 버텨요, 버텨요. 예수 잔소리 안 듣는 곳에서 살고 싶어 해요. 이게 얼마나 하나님께서 일을 잘하십니까? “네 소원대로 되리라, 네 소원대로” 끝으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사야 29장 14절. 지금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잖아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뭐라고 착각하느냐면 우리가 하나님의 총회라는 거예요. 근데 29장 13~14절에 보면,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의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리워지리라”라는 거예요.

왜? 성령을 들을 수 있는, 성령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제2의 귀가 장착된 자만이 이미 구조에, 천국에 취직해서 합격된 자가 그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제 설교는 일단 끝났어요. 문제는 그 귀가 있느냐는 겁니다. 그건 제 소관이 아닙니다. 그건 제 소관 아니고, ‘아,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첫째 사망의 한계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가 계속해서 사는구나’

아닌데, 첫째 사망이 끝이 아닌데, 인간은 그게 뭐 전부인 줄 알고 보람상조만 생각하고, 그런 거예요. ‘장례 치렀다, 안 했다, 울었다’라는 그것만 생각한다고요. 요새는 우는 사람도 없지만. 둘째 사망은 아예 몰라요. 왜? 그 구조의 밖에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위해서 우리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감사합니다. 더 이상 개별적인 나의 미래나 행복이나 나의 성공이나 나의 구원 받아야됨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의 손에 붙잡힌 바가, 이미 구원된 상태에서 주께서 체험한 그 체험을 이제는 진실로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을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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