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속과 관계
2026년 6월 7일 본문 말씀: 야고보서 2:14-19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2: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2: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 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2:18)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이방인인 우리들 입장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삶의 필수 조건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 믿는다고 해서 사회 공동체에서 추방당하거나 죄인 취급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는 본문은 원천적으로 이방인에게 해당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야고보서는 처음부터 ‘흩어져 있는 12지파’에게 보내는 주님의 계시입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약 1:1) 즉 이방인들 가운데서 ‘흩어진 12지파에 소속될 자들’이 있다는 겁니다. 이들에게는 왜 예수님 오시기 전에 이스라엘이 망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될 자들입니다.
이스라엘은 특수한 집단이요 민족입니다. 이들에게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율법과 말씀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이방민족들의 아이디어 같은 것은 인간들의 머릿속에서 끄집어내어 의견 조율하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율법은 엄중한 불 속에서 주어진 율법입니다. “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신 5:25)
이 율법을 못지키면 진짜 하나님으로부터 진짜 저주받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요구에 반응을 보여야 되는 겁니다. 반면에 이러한 특수한 민족이 아닌 이방민족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냥 나름대로 살면 그만인 겁니다. 따라서 이들 이방인들의 시작은 자기 자신을 믿는 믿음부터 시작합니다.
이 믿음에 근거한 행함은 자동적으로 발산하면서 평생을 보내게 됩니다. 즉 ‘하나님 안 믿고 나를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이방민족의 신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이 어디서 망해서 지금은 그저 ‘흩어진 12지파’형태가 되었는지를 알려줍니다.
그것은 하나님 믿는 믿음에 합당한 행함이 없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19절을 유의해야 합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즉 귀신들이 제공된 믿음이 바로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인데 이런 믿는 자는 이미 지옥에서 떨고 있는 악마의 신세가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죽은 믿음’과 ‘없는 믿음’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없는 믿음’은 이방인들의 출발점입니다. 하나님에 아예 관심도 없는 이방인들의 믿음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들에게는 body(몸, 신체)가 있습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너무 확실합니다. 이 몸을 근거로 그들은 자아를 형성시켰습니다.
이로서 나의 몸과 타인의 몸을 구분되니 자아와 타인도 분간됩니다. 자기에게 몸이 있으니 그 몸을 굴려서 얻어낸 성과를 그들은 믿습니다. 즉 믿음이란 자기 행함의 모아진 것이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첫째, 나는 나를 믿는다. 타인을 믿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나의 몸이 아닌 타인의 몸이 있으니까
둘째, 나는 나의 몸으로 노동을 하여 결과물을 만든다. 이 결과물은 내 것이다. 나는 이 행함의 결과물을 믿는다.
셋째, 나는 내가 모아놓은 결과물을 남은 여생을 즐긴다. 즐기는 것이 사는 보람이요 나의 행복이다.
따라서 내가 모아놓은 내 신체 행함의 결과물이 보호하기 위해 관계망에 나갑니다. 이게 사회요 국가입니다. 즉 인간의 몸에서 도덕과 윤리가 나오는데 도덕이란 “나는 선하다. 그러니 나는 그 어떤 경우라도 살 가치가 있다”라는 정신을 말합니다. 윤리란, “이런 나를 지켜주기 위해 사회가 안정적이어야 한다. 평화로워한다. 이를 위해 내가 기여할 준비가 되어 있다”입니다.
즉 내 몸이 있고 이 내 몸을 인정적으로 계속 유지하고 살려내기 위해 주위 사람이 힘을 빌리고 이용하는 식으로 자신의 노동의 결과물을 얻고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그리고 즐기려 합니다. 따라서 이방인에게 ‘행함 없는 믿음’은 애초에 성립되지 않습니다. 믿음대로 행하고 그 행함을 믿고, 그런 식으로 삽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비록 이방인들의 삶으로 전락했지만 그들은 ‘없는 믿음’이 아니 ‘죽음 믿음’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해입히신 하나님의 취지가 무엇이겠습니다. 옷을 안 해입혀도 되는데 옷을 해 입혔다는 말은 이미 하나님의 행하심이 아담과 하와에게 덧입혀졌다는 겁니다.
이점은 이스라엘 민족을 통한 율법의 개입으로 인간의 믿음과 행함에 대해서 철저하게 추궁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 신체가 통해서 이 땅에 오셨는데 나름 하실 노동이 있었습니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유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않도다 전에 잉태치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삼상 2:3-8)
쉽게 말해서 인간은 살아 있다는 의식마저도 교만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악마도 나름대로 신체가 필요해서 인간에게 찾아왔고 인간 속에 악마 자신의 생각을 집어넣고 그동안 인간을 다루어왔던 겁니다. 따라서 주님은 이런 체계를 뒤엎으려고 하시는 겁니다. 인간은 뭘해도 교만입니다.
교만치 않는 경우는 다음의 상태 뿐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즉 성령이 있는 쪽과 성령이 없는 쪽을 철저하게 나누고자 하십니다. 세례 요한이 모범 사례를 보여줍니다.
자신의 활동을 점검하려 온 바리새인들에게 세례 요한은 이렇게 답변합니다. “이 신체를 나타나는 나는 나가 아니다. 오직 내 신체에 있는 것은 소리다. 예수님 소리!”(요 1:20-25)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위한 나가 사라지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나로서만 쓰여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7강-야고보서 2장 14-19절(소속과 관계) 260607-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야고보서 2장 14-19절입니다.
야고보서 2:14-19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여기에 나오는 이 말씀 역시 흩어진 열두 지파를 향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흩어진 열두 지파는 옛날 이스라엘을 구성했던 요소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신약까지 하나님이 계획했던 그 이스라엘이 지금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구원된 자가 지금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이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14절에, “형제들아”라고 나온 것이 그냥 무심한 말이 아니고, 형제자매라고 하는 것은 흩어진 열두 지파의 위치, 흩어진 열두 지파가 갖춰야 할 조건을 그대로 끌고 오는 겁니다, 유지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흩어진 열두 지파라면 그다음에 기본적인 게 뭐냐, 바로 18절에 나옵니다.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이렇게 했어요.
누구한테 이야기했느냐? 형제들과 자매들, 하나님 믿는다는 그 믿음의 모임, 그런 입장에서 이 말이 무슨 뜻인지의 그 이해가 계속 살아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야고보서 2장의 이 말씀은 흩어진 열두 지파라는 그 환경을 전제로 해서 하나님 믿는다, ‘하나님, 나는 누가 뭐래도 하나님 믿습니다’ 하는 자에게 그렇게 믿는다, 믿는다, 하지 말고 형제자매가 어려울 때 실질적으로, 실천적으로 도와줘야지 믿는다는 말로만 해버리면 믿는다는 말을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뭐가 누락 되어 있느냐 하면, ‘행함’이 빠져 있는 거예요.
행함이 빠져 있으니까 그 다음엔 이렇게 돼요. 17절에,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그래서 이 오늘 말씀은 “믿는다”라고 하니까 “잠깐 와보세요.” “왜요?” “당신이 믿는 것이 그 믿음이 살아있는 것인지 아니면 죽어 있는 것인지를 한 번 사도입장에서 관찰해보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믿는다는 것을 인정한다 치더라도 이렇게 행함이 없으니까 내가 보기에 그 행함이 없는 믿음은 자체가 죽은 믿음’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바탕을 전제로 했을 때 이런 말씀이 일단은 직접적으로 의미 있게 들어갈 수 있어요.
그런데 야고보서의 말씀을 받을 때 받는 우리가 지금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에요. 유대인도 아니고요. 우리는 이방 사람입니다. 이방 사람은 “나는 하나님 믿습니다”라는 말, 그 하나님 믿음이 내 삶에 필요치 않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살아가는 자들이 이방 민족이에요. 이방 민족의 헌법에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으며” 이런 게 전문에 나옵니까? 안 나오잖아요. 헌법 전문에 하나님이 이야기가 빠져 있잖아요. 그게 이방 나라의 특징입니다.
흩어진 이스라엘 열두 지파, 지금 야고보는 그걸 전제로 이야기해서 오늘 본문에 나온단 말이죠. “우리는 이스라엘입니다. 믿음이 있습니다.” “그래요? 그러면 행함은? 행함을 보니 당신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라는 내용이 여기 있을 때 그 내용을 보는 우리는 ‘하나님을 반드시 믿어야 한다’라는 식으로 이 땅에 태어나지를 않았어요. ‘아쉬우면 믿고, 안 믿어도 대한민국 사람이고’, 이게 이방 민족의 특징입니다.
여기서 오늘 본문, ‘믿음은 있는데 행함이 없다’라는 말씀에 들어가려면 뭐부터 확고히 되어야 하느냐? 우리는 이방 민족이지요. 이방 민족인 우리는 뭘 믿고 사는지, 그리고 거기에 대한 행함은 어떤 것을 행함이라고 하는지부터 먼저 확실하게 정리하고 들어가야 해요.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인간은 몸이 있어요. 영어로 body, 몸이 있어요. 몸이 있기 때문에 어릴 때 이 모든 것이 자기 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내 몸이 있는 한 나는 오직 이 몸의 주인공인 나, 나만 믿어요. 이방인들이 믿음이 없는 게 아니에요. 믿는 게 있어요. ‘나는 나를 믿는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아무도 내 body가 아닌 남의 body, 남의 몸, 남의 육체 그것을 안 믿는다. 난 내 body에서 나온 나를 믿는다. 나는 나 외에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가 전제입니다.
그러면 그 믿음의 행함은 뭐냐? ‘나는 내 행함의 결과물만 믿는다. 내가 열심히 이 땅에 살고, 공부하고, 애쓰고, 노동하고, 그것의 결과물을 믿는다.’ 첫 번째는, 내 body, 내 몸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 남의 몸은 안 믿어요. 내 몸만 믿어요. 두 번째는, 그 몸을 통해서 행한 것만을 믿는다. 내 노동만 믿는다. 세 번째가, 그래서 행한 것의 그 결과물을 믿는데 그것으로 나는 즐긴다. 딱 이 세 가지에요.
첫째, 나는 내 몸을 믿는다. 두 번째, 내 몸으로 열심히 살았다. 그래서 어떤 결과가 나왔다. 돈을 벌었다. 가정을 이루었다. 세 번째, 나는 그 자체를 즐긴다. 언제까지? 죽을 때까지. 끝! 확실하잖아요. 믿음 있어요. 그리고 뭐도 있느냐? 행함도 있습니다. 자기한테 충실해요. 자기한테 너무 충실해서 말씀이 들어올 틈이 없어요. 이 야고보서 말씀 같은 게 들어올 틈이 없다고요. 그게 이방 민족이에요.
여러분, 이스라엘은 특수한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은요, 하나님이 율법을 가지고 침입한 국가예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이 침입해서 요청하는 거예요. ‘너는 말씀대로 살라’라고 요청하는 민족은 이 세상 단 하나의 민족 이스라엘 열두 지파밖에 없어요. 다른 이방 민족은 자기의 body, 몸만 있으면 돼요. 아무 문제 없어요. 하나님 안 믿어서 걱정, 염려? 그런 거 없습니다. 자기 몸이 멀쩡하면 끝나는 거예요.
이 body, 몸에서 두 가지가 나옵니다. 하나는, 나는 착하고 선하다는 정신이 나와요. 이게 도덕이고, 또 하나는 뭐냐? 윤리가 나옵니다. ‘이 세상은 안정되어야 한다. 내가 속해 있는 이 삶이 안정적이어야 내 body도 안정적이다.’ 이방인 몸이 이것을 그대로 반영해요. ‘나는 착하다’, 착하다는 말은 ‘남은 죽어도 나만은 살아남을 가치가 나에게 있다는 것을 나는 믿습니다’라는 거죠.
그래서 이 도덕과 윤리라고 하는 것은, 바로 ‘내 몸을 안정적으로 하는 그 세상도 안정적이어야 된다.’ 이게 바로 자기를 믿는 인간이 기대하고 소망하는 거예요. 그래서 경상도 지역에서 선거가 끝나면 교회 와서 기도할 때 하나님 말씀이 어떻고 하는 그런 뻔한 이야기, 보여주기 위한 그런 기도보다도 아주 이방인다운 기도, 오직 나만 믿고 나 외에는 아무도 안 믿는, 남을 이용하고 하나님을 이용하기는 하지만 오직 믿는 것은 나밖에 없다는 것을 믿을 때 선거 끝나고 하는 기도는 이렇게 되어야 해요.
‘하나님 아버지, 서울만큼은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왜? 온통 관심사가 거기니까. ‘한동훈이를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한국을 빨갱이로부터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현 정권의 부정선거가 완전히 근본적으로 터지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특히 송파 주민에게 감사합니다.’
왜 그게 속마음이냐 하면, 이 body를 안정적으로 몰고 가야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고 뭐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 body, 내 힘으로 내 몸으로 만들었던 성과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는데 모든 것을 몰입해요. 왜냐하면 내 노동의 누적이 믿음이거든요. 내가 열심히 행했던 것, 열심히 행했던 것이 모아져서 ‘나는 그것을 믿습니다.’
왜 남을 안 믿느냐 하면, 그 사람은 그 사람의 노동이 있잖아요. 다른 사람의 노동의 결과이기 때문에 안 믿어요. ‘나는 저들을 믿지 않습니다. 나는 나만 믿습니다’ 하는 것은, 내가 평생 힘들게 어렵게 살아왔지만 뭔가 남는 게 있어야 되잖아요. ‘그 남는 것, 그 결과물을 나는 믿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런 이방인의 입장에서는 오늘 본문에 ‘형제들아’라고 할 때 그 형제에 해당되지도 않아요. 자매에도 해당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약 2:15-16).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라고 이야기했잖아요.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이방인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하나님 자체를 애초부터 믿은 적이 없습니다” 하고 성경 덮어버려요. “난 태어날 때부터 평생 내 body, 내 몸만 믿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가식으로 믿는 사람한테나 이야기하세요. 난 하나님을 믿은 적이 없어요. 왜? 난 날 믿는 내 믿음이 너무나 굳건하기 때문에. 내 가족, 믿습니다. 난 나를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뒷전입니다. 내가 필요하고 아쉬울 때 요청은 하겠지만 결국 그 요청의 결과는 기도하는 내 노동이고, 내 노동의 결과물로 얻은 것이라면 그것도 내 것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에 내가 믿는 것은 내가 기도한 행함의 누적, 그 총집합을 나는 믿습니다.”
“왜 사는데?” “그걸 즐기기 위해서.” “즐겨서 뭘 얻는데?” “행복하잖아요, 내가 행복하잖아요.” 여기서 한발자국이라도 벗어나 본 적이 있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이게 이방 민족이거든요? 자, 그렇다면 이스라엘에게 준 하나님의 율법, 계시는 뭐냐?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떠나보낼 때 가죽옷을 입혔어요. 이게 문제가 됩니다.
가죽옷을 입혔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야, 너 치마를 무화과 잎으로 만들어서 입었어?” “예” “앞으로 계속 무화과 잎으로 만들어 입어.”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하신 행함이 아담에게 도달 안 돼도 그만입니다. 가죽옷 지어달라고 인간이 요청했습니까? 요청한 적 없어요. 하나님의 행함이 또는 하나님의 노동이 아담에게 도달됨으로써 아담은 그때부터 자기가 어디 있든지, 자기 body가 어떻게 되든지, 흙이 되든 어떻든 간에 여기에 행함부터 먼저 주어진, 그래서 그 행함을 제공한 하나님을 제대로 믿어야 한다는 요청을 받은 대상이 아담과 하와입니다.
이걸 ‘빼박’이라고 해요. 빼도 박도 못해요. 이걸 유일하게 알게 된 민족이 이방 민족이 아니고, 특수한 민족 이스라엘 민족이었고, 그게 열두 지파였고, 그 정신이 흩어진 열두 지파에 있다는 것을 전제함으로써 야고보는 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다음부터 가죽옷을 입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되어 있어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됐다는 것은 어디서 알 수 있느냐? 아담과 하와의 두 아들도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거예요. 창세기 4장에 보면 이런 말이 있어요. 10절에,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여러분이 출애굽기나 민수기나 기본적으로 안다고 치고 함축해서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이 땅을 제사화시킬 요량입니다. 이 땅을 제사가 일어나는 공간으로 아주 작심하시고 하나님께서 차후에 계속해서 말씀을 주고 있었던 거예요. 제사가 뭐냐 하면, 죽어야 산다는 겁니다. 죽어야 산다.
이 세상에 많은 민족들이 있지만 유독 그것을 구체화시킨 민족이 뭐냐? 흩어지기 전의 열두 지파, 열두 지파에게 이 내용을 전달했습니다. 전달했으니까 이스라엘은 이방 민족과는 전혀 다르게 날마다 제사하는 곳이 국가의 센터가 되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피를 흘리는 제물을 바치면서 ‘우리는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라는 것을 자부심으로 느끼며 살았어요.
이게 뭐냐 하면, 소속감입니다, 소속감. 다시 이방 민족으로 돌아올까요? 이방 민족에게 뭐가 없는가? 관계는 있어요. ‘이번 투표, 내가 찍는 사람이 잘되어야 할 텐데.’ 민주당 입장에서 보면, ‘내란의 그 여파가 아직도 안 밟히고 계속 살아있네? 내란에 관련된 것은 다 제거하고 새 민주화를 이룹시다.’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그게 관계성이에요. 이 세상은 관계입니다. 자꾸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이유는, 인간이 자기 자신의 성과를 즐기고 싶은 환경의 조성 때문에 자꾸 관계를 주장해요.
그런데 이스라엘로 다시 와봅시다. 이방 민족은 관계다. ‘나는 나를 믿는데, 난 내 행복을 믿는데 좀 행복에 방해되지 않도록 우리 좋은 관계를 이룹시다.’ 이게 이방 민족인데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되면,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요구가 있어요. “너, 나 제대로 믿어? 제대로 믿고 사냐는 말이야.” 이걸 요구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흩어지게 된 이유가,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가 뭡니까? 이방 민족 따라가서 그래요, 이방 민족을! 이방 민족의 신이 자기에게 딱 맞아서 그래요. 그때 선지자들이 나서서 뭐라고 이야기했습니까? “여호와께 돌아오라, 여호와께 돌아오라” 했잖아요. ‘여호와에게 돌아오라’는 말은, ‘여호와의 노동으로, 여호와의 행함으로 네게 먼저 주어졌으니, 하나님의 행함의 결과물이 먼저 주어져 너희가 되었으니, 너희는 그 결과물로서 마땅히 너희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그게 이미 확정된 너의 소속’이라는 거예요.
‘소속’과 ‘관계’의 계열 차이를 계속해서 하나님께서는 날카롭게 분명하게 둘로 나누려고 하는 거예요.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소속이 어디예요? 이것은 백 명에게 물으면 백 명 다 이야기해요. “내 소속, 난 나에게 소속되어 있어요.” 이게 이방 민족이죠.
그러면 하나님 믿는 사람에게 이야기합니다. “당신 소속이 어디예요?” “나는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그래요? 잠깐 이리 와보세요. 야고보서 2장 14절을 같이 봅시다.” 해놓고 “당신 소속이 하나님에게 있다고 당신은 그렇게 믿는데 그러면 당신의 형제와 자매가 어려울 때 도와줬어요, 안 도와줬어요? 말로 하는 거 말고 실제로 도와줬습니까, 안 도와줬습니까? 행했습니까, 행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뭐 바빠서 못 행했네요.” “그러면 당신의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하나님 믿는다고 자부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추궁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긴 거예요. 추궁할 수 있는 근거. 쉽게 말해서 ‘특수 민족에 소속될 수도 없는 게 어디서 흉내 깨나 내고 있어?’ 이런 뜻이에요. “나는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놀고 있네. 네가 하나님께 속했으면 하나님의 ‘이런 것을 행하라’는 요청에 네가 어떻게 반응했어?” “신경을 거기까지는 못 썼네요.” “그러니까 네 믿음은 이것은 죽은 믿음”이라는 거죠.
참, 이게 어려워요. 여기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에요. 그런데 ‘없는 믿음’은 아니에요. 없는 믿음은 아니라고요. 지금 야고보가 예수님의 사도잖아요. 예수님의 사도라면 야고보는 옛날 이스라엘의 약속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어떻게 완성되었는지를 전제로 해서 이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제사법에 의하면 이게 제사입니다.
제사의 특징은 뭐냐? 아벨의 제사처럼 죽었던 분의 그 거룩한 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계속 천국까지 이어가게 하신다는 그 원칙입니다. 그렇다면 그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 야고보는 2장 10절부터 계속 이야기합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이게 뭐냐? 소위 ‘하나님 믿는다, 난 이렇게 행한다’에 대해 율법을 가지고 끝까지 추궁하고 또 추궁해요. 끝까지 추궁하고 또 추궁합니다. 그러면 남는 것은, ‘없는 믿음’이 나오는 게 아니고 뭐가 나오느냐 하면, ‘죽은 믿음’이 나와요. 죽은 믿음이 나올 때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의 십자가 효과가 어떻게 오늘날, 이스라엘은 멸망해 버렸는데 멸망해 버린 그 가운데서 어떻게 주님께서 흩어진 열두 지파라는 완료된, 완성된 진짜 이스라엘을 탄생시킬 수 있었는가를 지금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없는 믿음’이 아니고 ‘죽은 믿음’이어야 해요, 죽은 믿음이어야 한다고요! 없는 믿음이 아니고 죽은 믿음이에요. 이 죽은 믿음이 인간의 몸에 있다는 말, 여기 19절에 이 말씀이 있어요.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이것은 “자알~한다~!” 비꼬는 거죠. “아주 잘도 한다.” 이것은 못 한다는 뜻이죠.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뭐냐 하면, 네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율법대로 못 하는 이유는, 네 속에 욕망이 있는데 그 욕망이 바로 지옥이고, 귀신은 이미 미리 그 지옥에 가서 어떻게 하고 있는가? 발발발 떨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율법의 특징은 뭐냐? 야고보서 3장 6절을 봅시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지옥 불이라고 했지요, 지옥 불. 그러니까 율법과 야고보의 말씀, 곧 주님의 말씀은 우리 인간들 속에 결여돼 있는, 빠져 있는 그 빈자리에 지옥의 실재성으로 마저 채우는 일을 하시는 거예요. “너 지금 귀신의 앞잡이야.” 이런 뜻이에요. 귀신이 뭐냐? 귀신도 body를 원해요. 그것 때문에 마귀가 에덴동산에 찾아와서 인간을 건드린 겁니다. 귀신은 몸이 없으니까 자기 정신대로 움직이는 body, 인간의 신체, 몸이 필요했던 거예요. 그때부터 가인 계열과 아벨 계열이 나눠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똑같은 body, 신체를 가지고 있는데 한쪽은 지옥으로 끌려가고 있고 한쪽은 천국으로 끌려가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서 하는 가장 큰 오해는 뭐냐 하면, 내가 죽은 믿음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말씀대로 실천해서 온전한 믿음으로 바꿔야 한다는 이 발상, 이 발상이 오늘 본문을 보면서 가장 오해하는 해석입니다. 2000년 동안이나 오해했어요. 이 본문을 가지고 2000년 동안 오해했습니다.
“예, 하나님의 충고 잘 받아들이겠습니다. 이제 정신 차려서 혹시 어려운 사람 있으면 실제로 내가 도와주겠습니다. 실제로 도와드려서 믿음에 합당한 구제를 하겠습니다. 어려운 형제가 있으면 도와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나온다고요. 그러면 성경 말씀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다른 걸 또 건드리겠습니까? 다른 걸 또 건드리겠죠. 다른 것을 또 건드려요.
“세금 때문에 어려워서 지금 사는 집도 팔지를 못하고 고통받는 형제자매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 서울시장만큼은 ‘국민의 힘’이 되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 이게 구제 아닙니까? 서울 강남에 삼촌이 살고 엄마 아빠가 살고 있는데 집만 하나 덜렁 있지 현찰은 하나도 없고 연금 받아 겨우 사는데 이거 팔려고 하니까 세금이 12억 나왔다, 집값이 42억이라고 그렇게 나왔을 때 ‘하나님, 오세훈 후보가 시장님이 되어서, 그것도 기적적으로 되어서 어서 강남에 사는 사람들 세금을 감면해 달라.’ 이것이 더 현명하고 더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이잖아요.
그러면 그런 사람들은 태극기 들고 어디로 가야 돼요? 송파 선거 관리 위원회 앞에 데모하러 가야 될 것 아닙니까? 이게 바로 이웃 사랑이잖아요. 엄마 몇 푼 도와준다고 해서 세금 폭탄 맞은 거 어떻게 안 되잖아요. 독일에 자녀들 유학 보내는데 요즘 독일에서 외국 유학생 보조금이 없어지고 등록금을 받는다고 하니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 이제는 독일이 좌파 되지 말고 우파가 되게 해 주세요.’ 이게 말만이 아니고 실제적으로 도와주는 거잖아요. ‘하나님이 좀 도와주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렇게 도와주고 강남 부동산 세금 좀 적게 해줬다. 그러면 네가 얻는 게 뭐냐?” 역시 “나는 행복합니다.” “결국 넌 누구 믿는데?” 넌 네 믿음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씀이 얼마나 오해가 되는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이 오해와 잘못된 해석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뭐냐? 주님께서 이 땅에, 이 인간 세계에 왔을 때 주님께서 무슨 일을 행했느냐, 그걸 놓치면 안 되죠. “주님이여, 제가 어려운 형제자매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할까요?” 그것은 커트하고요, 그것 생각하지 말고 ‘주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어떤 일을 하셨는가?’ 그걸 보면 되는 거예요. 그걸 알면 되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제가 사무엘상과 누가복음 1장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주께서 하신 일입니다. 사무엘상 2장 4-8절에 보면, “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유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않도다 전에 잉태치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 이렇게 되어 있다고요.
잉태하지 못하던 자에게 잉태케 했다는 말은, 잉태한 자, 나는 자식을 가졌다는 자를 율법으로 비춰버리면 백 퍼센트 교만입니다. 자식이 있으니까요.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이냐 하면, 나만 믿고 나만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안 믿어요. 그리고 오직 나의 행복만 추구하는 것, 하나님께서 일을 안 할 경우에는 그 body, 그 육체는 뭐냐? 악마의 앞잡이예요. 그냥 악마의 세계에요.
악마의 세계는 뭐냐? “악마를 믿습니다”가 아닙니다. “나만 최종 믿고 나만 사랑하면 끝!” 모든 것이 끝이에요. 그다음에는 성경 덮어버려요. 왜? 행복하니까, 즐거우니까, 아쉬울 때만 성경 보면 되니까. 이게 내 믿음인데 그게 귀신의 믿음이에요. 지옥 갈 자의 믿음이에요 그게! 믿음이 없는 게 아니고 ‘죽은 믿음’이라니까요!
하나님께서 ‘내 가죽옷을 내놔라’라고 할 때 여러분 어떻게 대응하겠어요? “내가 가죽옷 입혀줬잖아.” 거기에 대해 인간은 입을 닦아버려요. “하나님께 받은 것 없습니다.” “자식 줬는데? 건강하게 살게 해줬잖아. 너 그동안 권력이라든지 재산은 좀 모아놨잖아.”
주께서 어떻게 일하느냐 하면, 없는 사람을 가지고 가진 자의 교만을 드러내고, 자식 없는 자를 통해 있는 자의 교만을 드러내고, 권력 없는 자를 들어 써서 있는 자의 교만을 들춰서 교만한 자 악한 자를 땅에서 내치는 그 작업을 하는데 이 땅, 제사화 되어 있는 이 땅에서 한결같이 그 작업을 하는 겁니다.
이 이야기가 누가복음 1장에도 마리아를 통해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마리아가 이렇게 찬양합니다. 47-48절에,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비천한데 복이 있대요. 49절에,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어떤 일을 하느냐?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거지로)로 보내셨도다”(눅 1:51-53). 이렇게 되어 있단 말이죠. 이 본문을 보고 교만한 자가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나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기 때문에, 사람들이 내가 뭘 가졌다, 자식이 있다, 잘 됐다, 권력 있다, 할 때 난 이제 낮은 마음으로 살아가야지.’ 이렇게 나온다고요.
그게 교만이에요. 그게 교만이라고요! 제발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거기 끼어들지 말고 그냥 가만히 계세요. 스스로 비천하지 말고, 거지 되지 말고, 재산 팔고 이런 짓 하지 말고 너 잘하는 거 있잖아, 너만 사랑하는 것, 그냥 그거 그대로 하세요. 하지 말란다고 안 할 여러분도 아니니까.
지금 우리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에요. 죽은 믿음 가지고 이 말씀 지킨다고요? 이건 터무니없는 위선 중의 위선입니다. 우리 믿음이 죽었어요. 그러면 죽었으니까 이것을 살려야 될 게 아니겠습니까? 살리는 방법은 백 프로 누구 소관이냐 하면, 우리 소관이 아니에요. 예수님 소관입니다.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 body를 가지고, 그 몸체를 가지고 이 땅에 오시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시는가? 일단 요한복음 1장에서 세례 요한이 어떤 믿음과 어떤 행함을 보여줬는지를 보면 되겠죠. 1장 20-23절 세례 요한에게 어떤 사람들이 와요. 자, 아까 이야기한 것을 한 번 그대로 여기 적용해 봅시다. 세례 요한이라는 body, 신체가 있는데 다른 신체가 왔어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왔다고요.
그들도 역시 body, 신체를 가지고 있어요. 이 신체와 신체의 관계를 통해서 그들은 인간들의 세계라는 관계망을 형성한 겁니다. 그리고 그들은 뭐라고 하느냐? 자기들 소속이 하나님 소속이라고 우겨요. 인간은 자기 소속이에요. 하나님 소속은 없어요. 자기한테 속해 있어요. 자기 body, 자기 몸한테 속했다고요. 몸 아프면, 손톱에 뭐라도 들어가면 난리도 아니에요. 인간은 자기 몸에 민감하기 짝이 없어요. 자기뿐이에요, 자기뿐!
그런데 이제 허세를 떨면서 ‘하나님께서 보호하사 우리가 이만큼 되었다’하고 온다는 말이죠. 묻습니다. 같은 body니까 말이 통할 거 아닙니까? “넌 누구냐?” 하니까, 세례 요한의 답변을 잘 들으세요. “나는 아닙니다.” 이게 시작이에요. “나는 내가 아닙니다.” ‘이 body, 당신이 내 몸을 보고 있어? 당신은 자기 몸이 자기인 줄 알지?’
“내 body, 내 몸은 내가 아닙니다.” “그러면 지금 넌 지금 왜 슬퍼하고, 세례도 주고 그렇게 하느냐?” ‘내 몸에는 소리가 있는데 그 소리가 내 몸을 지금 앞당겨 사용하고 있습니다’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세례 요한에게는 뭐가 없느냐? 자기 믿음이 없어요. 자기 믿음이 없다는 말보다, 주님의 믿음이 내 믿음을 밀어내 버렸어요. 살아있는 믿음이 죽어 있는 내 믿음을, 나밖에 없는 내 믿음을 밀어냈다고요. 주님의 사랑이 지독한 나의 사랑을 밀어버렸어요.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저는 오늘 이 마태복음 11장을 핵심 구절로 그렇게 생각해 봤습니다. 세례 요한이 묻습니다. “오실 메시아가 당신이 맞습니까?” 자기는 지금 옥에 갇혔으니까, 자기 body가 옥에 갇혀서 활동을 못 해요. 자기 활동은 이제 끝났어요. 자기는 활동을 못 하는데 예수님은 하니까 “예수님이 오실 메시아가 맞습니까?” 이렇게 물으니까 예수님이 옥에 있는 사람에게 전갈을 보냅니다.
4-5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그다음에 6절,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인간은 신체밖에 모르니까, 나의 신체를 보고 실족하지 않는 자만이 뭐가 있다? 복이 있다. 같은 신체인데 주님의 계열과 기존 인간들의 계열이 달라요. 한쪽은 지옥 가고, 한쪽은 아버지에게로 가고 그 계열이 다르다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똑같은 body, 똑같은 신체를 보냈거든요? 신체를 보냈는데 그 신체가 하는 일이 뭐냐?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특히 이것을 종합해서 “죽은 자가 살아나며.” 다시 말해서 “네 신체, 그 body는 예수님 보기에 네가 눈 뜨고 살아 있어도 눈 뜬 것도 아니고,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귀가 들리는 것도 아니야. 그것은 자체가 죽어 있어.” 자체가 죽은 거예요, 자체가 죽은 것. 귀신의 앞잡이가 되어 있는 신체인데 뭐 기대할 것이 있겠어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거기에 덧붙입니다. 인간이 자기의 body, 신체를 가지고 자기의 노동, 애를 써서 뭔가 즐길만한 그 직업군의 최고정점에 있는 자가 누구냐? 왕이에요. 그래서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눅 7:24). ‘아니겠지?’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눅 7:25).
다시 말해서 “너희들이 이 body, 예수라는 이 신체를 구경하는 것은 ‘우리는 어떻게 하면 우리의 부러움이 되는 왕만큼의 권력과 돈과 권세와 성공, – 성공해야 행복하니까 – 성공해서 행복한 그 표준모델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가?’ 그런 것을 너희가 기대했느냐? 부드러운 옷 입은 것, 행복하지. 피부에 감촉이 좋으니까. 그런데 그런 사람은 왕궁에 있느니라.”
왕궁 계열, 지옥 가는 왕궁 계열이에요. ‘그런 것은 그쪽 계열, 국회의사당이나 청와대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는 뭐냐? 너희는 광야에 가야지요. ‘광야로 간 이유가 뭐냐? 선지자? 옳다. 선지자다.’ 그런데 선지자가 뭘 갖고 있는가? 말씀을 갖고 있어요. 말씀 가지고 뭐합니까? 오늘 야고보서 본문에서 말씀 가지고 뭐합니까?
끝까지, 나만 사랑해서 나오는 행함에 대해서 끝까지, 죽을 때까지 추궁할 거예요, 그 말씀이. 그게 침노에요.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는, 말씀을 전하는 세례요한이 이 시대에 말씀으로 “다 엉터리야, 다 거짓이야, 다 가짜야!”라고 계속해서 말씀을 가지고 침노하는 것.
어디까지? 천국이 이 땅에 다 이루어질 때까지. 다시 말해서 내 믿음이 죽은 믿음에서 산 믿음 될 때까지 세례요한이 그 이야기를 시작했다는 거예요. 그 결과가 11절에 나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천국이 완성되면, “…지극히 작은 자라도 저(세례 요한)보다 크니라.” 세례요한보다 더 크다는 거예요.
지금까지 한 말씀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이미 믿음이 있습니다. 심지어 율법 받은 이스라엘도 믿음이 있습니다. 이방인들도 믿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믿음은 반드시 거기서 행함을 방출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믿음은 뭐냐? 귀신이 갖고 있는 믿음인데 귀신이 body, 인간의 신체를 앞장세워서 귀신이 집어넣은 믿음인데 그 믿음은 뭐냐? ‘나는 신이다. 오직 나만 잘되면 게임 끝났다. 나는 행복하고 싶습니다. 신이시여, 나는 행복하고 싶습니다. 우리 가족 잘되기 바랍니다.’
1월 1일에 포항까지 왜 갑니까? 울산까지 왜 가요? 빌려고 가지요. 떡국 먹으러 갑니까? 빌려고 가잖아요, 해 뜰 때. 왜 빕니까? 비는 내용은 공개되어 있어요. 뭘 위해 빌었습니까? ‘올해도 남편 사업 잘되고, 우리 아들 공부 잘하고 건강하게, 남산 위의 노루 새끼처럼 잘 뛰어놀면서 살기 바랍니다.’
믿습니다. 태양을? 아니지요. 태양에게 기도한 내 노동을 믿지요. 교회에서 무슨 기도합니까? 하나님 믿습니까? 아니지요.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 노동을 믿지요. 내 믿음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행함 없다는 소리 하지 마세요. 나는 열심히 믿음생활 잘 하고 있고, 믿음에 합당한 행위를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투표든 뭐든 세상에서 행하는 뭐든 간에 내 행복에 이익이 될 수 있는 결과를 우리는 간절히 원했던 거지요. 결국은 세례 요한 계열과 얼마나 차이 나는가를 보세요. “너 누구냐?” “나는 나다.” 세례 요한은 그게 아니지요.
“너 누구냐?”
“나는 아니다.”
“너의 그 빈자리에는?”
“빈자리에 예수님 들어갔다.”
이게 소속입니다. 소속이라 하는 것은 관등성명을 새로 부여받는 것이 소속이에요. 제가 울산강의에서 했거든요. “‘있음’은 ‘없음’ 안에서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고 그 이름으로 우리에게 도달될 수 없던 그 나라에 들어간다.”
사람이 자기를 믿는 게 편할지 싶지요. 우리는 실패에 시달립니다. 미완료에 시달려요. 그러나 주님의 소속에서 관등성명을 새로 부여받고 이름을 부여받은 이것은 나의 승리가 아니고 이미 주님이 승리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새로운 소속으로 다루어집니다. 제가 끝부분에 와서 꼭 말씀드리고 싶어서 미리 생각했던 구절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내 증인이 되리라.’ 이것은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너는 네 증인이 되리라.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리라.’ 계열이 다르지요? 가는 방향이 다르지요? 한쪽은 지옥이고 한쪽은 천국이에요. 교회 왔다고 지옥 안 가는 게 아니지요. 자기 노동이 이 정도고, 나는 열심히 착실하게 살았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교회 나온다면 이것은 자기 증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 말씀을 위해서 누가복음 15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말씀이에요. 4절에,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잃어버린 것을 찾아 나설 때 여러분이 주님에 의해서 찾음이 되는 양이라면 여러분은 이렇게 이야기하세요.
“너 누구냐?” “나, 하나님의 잃어버린 양이야. 내 이름은 잃어버림이야. 왜? 나는 내 맘대로 행했거든.” 내 맘대로 내 행복을 위해서 내 사랑을 위해서 살았다는 그것이 잃어버린 거예요. “그런데 그 잃어버렸다는 그것을 어떻게 알았어?” “찾아주니까 알았지.” 주님이 찾아주니까 ‘나는 잃어버린 상태에 있었구나.’
잃어버렸다는 것은, 뭐가 없다? 소속이 없었던 거예요. 하늘나라 소속이 아니었던 거예요. 하늘나라 소속이 아니니까 나 믿는 이것이 정상인 줄 알고, 학교 교육에서 그렇게 배우고, 주변이나 가족들이 그렇게 가르쳤고, 나를 안 잃어버리는 그것이 정상인 줄 알고 그렇게 살았는데 잃어버림이 정상인 것은 예수님이 찾아오니까 비로소 알게 된 거예요.
누가복음 16장에서는 주님께서 도발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 누가 봐도 불의하고 누가 봐도 비윤리적이에요. 그런데 불의한 청지기가 그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견주어볼 때 딱 하나 다른 점이 있어요. 뭐냐 하면, 불의한 청지기는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이에요. 나라는 이 body, 신체는 손해 보고는 못사는 신체로 이미 태어날 때부터 본능이 작동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불의하게 행해서 퇴직당하니까 ‘내가 손해 볼 인간인 줄 아냐?’ 해서 회계장부 조작해서 사장 돈을 자기 돈으로 횡령해서 옮겼어요. 나쁜 짓 했지요. 그런데 나쁜 짓을 한 이 불의한 청지기가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이 찾던 그 인물이라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이에요?
그런데 누가복음 16장의 그 비윤리, 비도덕적이고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하고, 오늘 야고보서 2장의 어려운 사람 도와주라는 그 이야기하고를 한번 비교해 보세요. 그게 어울리는가, 일치되는 내용이 나오는가를 비교해 보라고요. 야고보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행함’을 문제 삼는 것 같지만 사실은 행함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고, ‘죽은 믿음은 죽은 행함을 드러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네가 어려운 사람을 안 도와준다는 그것을 역추적해서 – 안 도와주는 그것도 행함이거든요 – 안 도와주는 그 행함의 원천에 그 믿음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를 말씀으로 X-선 사진 찍듯이 찾아주겠다는 겁니다.
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친절입니까! 또 요한복음 9장을 봅시다. 길가에서 소경을 보고 제자들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2절에,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사태 파악 안 되고 있지요? 9장 3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주님께서 지금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다 뒤집으려고 하는 거예요, 다 뒤집으려고. 누가복음 13장에 망대가 무너져서 18명이 죽었어요. 세월호 같은 사건이지요. 망대가 무너져서 18명이 죽었을 때 예수님께서 같은 취지로 답변해요. 4-5절에,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인간 대 인간의 관계가 아니고 소속이에요. ‘너 지금 남하고 어떤 관계야? 너 어느 영역에서 놀고 있어?’ 우리는 지금 그걸 생각하고 있는데 주님께서는 “너 소속이 어디야?”라고 묻습니다. ‘내가 있다’로 형성된 관계에 소속이냐, 아니면 ‘내가 없다’로 만들어주신 그 세계 소속이냐는 말이지요. 내가 없는데 모든 주어지는 것들, 먹을 것, 입을 것, 하나님의 의, 용서 그 모든 것은 소속이라는 이유때문에 그냥 주신 거예요. 주님의 ‘행함!’입니다. 주님의 행함이니까 그 행함의 원천인 믿음은 어디서 나왔어요?
나의 믿음 아니지요. 누구의 믿음입니까? 주님의 믿음이고 주님의 믿음이 성령으로 오니까 우리는 이제는 나의 증인이 아니고 누구의 증인이다? 예수님의 증인, 그게 주께서 일하심의 마감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결과물이고.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참 우리 어떻게 하루하루 삽니까? 정신머리를 어디에 팔고 사는지. 나만 편하면 되고, 나만 건강하면 되고, 나만 넉넉하면 되고, 선거 내 뜻대로 되면 되고, 이 모든 일어나는 일을 통해서 우리가 잃어버렸던 자고, 우리가 마귀에 소속된 자요, 우리가 살아서 이름이 있으니 실은 죽은 자라는 것이, 새삼스럽게 밝혀지고 발각되는 즐거움이 있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