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성령님의 코스

아빠와 함께 2026. 5. 24. 17:37

성령님의 코스 

2026년 5월 24일                           본문 말씀: 야고보서 2:11-13

(2: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2:12)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는 말씀은 구원을 노리는 모든 자의 입을 닫게 합니다. 왜냐하면 구원되는 것을 목표로 해서 교회를 찾아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원의 끝이 ‘심판 받은 자’가 된다고 하면 그동안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되는 게 아닐까요? 이 말씀은 ‘내가 심판받을 대상이 되는 것을 귀하게 여기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새로운 안목이 주입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기존에 인간의 나라에서 통용되는 안목이 아닙니다. 기존의 인간 세계는 예수님을 여지없이 추방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인간에게는 대속이 필요한 존재’라고 천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인간치고 정상인 존재는 없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비정상적인 존재가 정상적인 존재의 행세를 하고 다닙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을 처음 만드신 그 인간과 선악과 따먹은 범죄한 인간을 시대적으로 구분하십니다. “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인간들은 생각합니다. 결국은 심판에 이를 존재를 왜 하나님께서 태어나게 하시고 살려내시느냐고 말입니다. 그것은 있는 인간을 죽이시고 다시 살려내심으로서 그 과정에 인간들이 미처 몰랐던 하나님만의 원칙이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이 원칙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나서서 이 땅에서 펼쳤습니다.

예수님은 실체를 지니시고 어떤 현상을 만들어내셨습니다. 율법과 인간의 실체와 만날 때, 인간의 육신으로 인하여 그 어떤 자도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은 자유가 없습니다. 반대로 갇혀 있는 형편입니다. 마귀의 죄의 위세에 눌려 있습니다. 빠져 나올 수 없는 형국입니다.

그리고 그 죄로 인한 심판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죽어야 마땅합니다. 문제는 인간이 자기 목숨 잃을까 봐 두려워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런 인간의 약점을 악마는 너무나도 잘 압니다. 인간의 목숨은 생명이 아닙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이미 살아서 움직이는 아담과 하와를 향해, 선악과 나무 실과를 따먹지 말라. 그러면 죽는다는 말씀을 하신 이유가 생명나무 과실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즉 ‘살아 있다’고 해서 ‘생명’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저 ‘목숨’일 뿐입니다. 목숨에서 생명으로 나아가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시면서 어느날 밤에서 물로 위로 걸어오셨습니다.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마 14:26)

즉 제자들은 자신들의 안목이 악마에게 묶여 있는 안목인줄 모르고 예수님을 향하여 ‘유령’이라고 지칭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유령에 대해서 무서워했다는 점입니다. 즉 제자들은 ‘살아 있음’에 대해서 갇혀 있는 인식을 발휘하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마가복음 8:22-26에 나오는 대목을 살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가라사대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여기에 나오는 소경은 예수님으로부터 두 번의 안수를 받게 됩니다. 이 취지를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소경으로 하여금 강제성을 띠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침을 뱉았습니다. 이것은 ‘뿌림’입니다. ‘분사’입니다. 분사한다는 것은 흡착하는 방식으로 상대에게 자신의 속성을 이전시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성경에서 ‘피 뿌림’이 그러합니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즉 단일한 제물의 피가 다수의 백성들에게 이전될 때에 ‘뿌림 방식’을 사용한 겁니다. 그리고 그 ‘뿌림’의 대상은 필히 더러워야 합니다. 부정(不淨)적 존재입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히 9:13) 일단 예수님께서 침을 뱉는 식으로 소경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오시고 “무엇이 보이느냐”를 묻습니다. 여기서 소경의 고백이 흥미롭니다. 움직이지 못하는 나무와 인간을 일치시키는 고백을 내어놓습니다.

즉 전에 같이 있는 마을 사람들의 안목은 제대로 만물을 본 안목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생명의 안목이 아니라 목숨에 연연하는 안목이었던 겁니다. 예수님은 다시 안수를 하니 이번에는 ‘만물을 밝히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당부합니다.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로서 이 소경은 예수님의 세상 보는 것같은 같은 안목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소경은 옛적에 마을에 살던 그 인간들과 같은 안목이 아닙니다. 일종의 세상을 안과 밖으로 나누는 막의 기능을 발휘하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신 것은 이방민족과 차이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이 결국 망하게 되는데 이는 그들 속에 작용하는 희생제물이 자체적으로 그들 내부에서 막으로 형성되어 안/밖으로 새롭게 이루어짐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그들의 안목으로 항구성을 유지하려 했던 겁니다. 그들이 예수님 시대에 유대민족이라는 권력체를 형성했고 그 권력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인간 나라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피로 자유된 말씀을 이미 죽은 자기 백성의 마음에 뿌리십니다. 기존의 세상적 안목에서 벗어나 긍휼 안의 안목으로 세상을 향하여 막이 형성된 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예수님의 몸의 일부로 살게 됩니다.”(마 12:31-32)

성도는 오늘날 일종의 유령같은 주님의 현상입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 3:2-3)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살면서 엄살 피우지 말고 늘 십자가 앞에서 몰아세우는 성령님의 절차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5강-야고보서 2장 11-13절(성령님의 코스) 260524-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야고보서 2장 11-13절입니다.

야고보서 2:11-13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오늘 본문 12절에 ‘자유’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자유의 율법대로” 그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심판받을 자처럼 말을 하고”, 여기서 ‘심판받을 자’는 ‘심판’이라는 단어와 ‘사람’이라는 뜻의 ‘자(者)’가 같이 붙어 있죠. 그다음에 13절에 보면 ‘긍휼’이 나오고 ‘긍휼 없는 자’도 나옵니다. “긍휼을 행하지 않는 자는 긍휼이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이런 단어들이 나오는데 특히 12절과 13절에 나오는 이 단어들 자유, 심판, 심판받을 자, 긍휼 없는 심판, 긍휼 없는 자가 되겠죠. 그것을 이렇게 한꺼번에 조립해 봅시다. 12절, 13절을 한 문장으로 연결시키면 이렇게 됩니다. “자신이 심판의 대상이 된 것을 귀하게 여겨라.” 이렇게 돼요. 자기가 심판의 대상이 된 것을 굉장히 고맙게 여겨라, 그렇게 됩니다.

왜냐하면 긍휼이라는 것은 율법의 심판 없이는 우리 안에서 발생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율법으로 우리가 심판받는 자가 되려면, 율법을 보고서 ‘난 저런 죄는 안 지었어. 저건 죄가 아니야’하는 경우를 율법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잖아요. 소낙비가 쏟아지는데 빗줄기 사이를 빠져나갈 수 있는 수단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따라서 소낙비가 온다는 것은 심판이 거침없이, 쉴 새 없이 쏟아진다는 것이고 그 쏟아지는 것에서 자기를 지킬 수 있는, “이 죄는 나는 안 지었습니다” 할 수가 없어요. 그런 것이 성립이 안 됩니다. 율법을 보면서 사람들은 ‘난 저 죄는 안 지었어, 저 죄는 지었어. 저런 죄는 안 짓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어.’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 마련인데 그 생각이 어디서 나오는가?

좀 어려운 용어를 동원하면, 그것은 자기에 대한 항구성 또는 항상성이라고 합니다. 항상성이라는 말은,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로 똑같이 이어지기를 원하고 있는 것을 항상성이라고 합니다. 같은 말로 항구성, 똑같이 쭉 가는 것, 나는 계속 나로서 쭉 유지되어야 한다는 속성이 우리 내부에 있습니다. 이것은 뭐 당연하다고 생각이 되죠.

그런데 성경 말씀 12절은 그것을 일거에 거부합니다. ‘심판받을 자처럼 말해라, 심판받을 자처럼 말하고, 행하기도 하라.’ 이 말은 ‘제대로 우리에게 소낙비처럼 심판의 말씀을 계속 쏟아붓는 그 주님의 취지에 대해서 귀하게 여길 수 있는 사람이 되어라.’ 이 말입니다. 우리의 행동 하나 말 하나도 놓치지 않고 족족 거기에 심판을 행사하고 있는 이것이 주께서 지금 우리에게 주신 실제상황입니다. 이게 현실이에요.

성경을 보면서 “이것은 성경 안의 내용이에요”라고 하지 마세요. 성경은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진짜 제대로 된 실재를 이 성경 내용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리고 있는 거예요.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앞에 심판받는다고 하면 기분이 썩 안 좋잖아요? 불편하잖아요. 내 자긍심을 찾을 수 있는 여지가 박탈된 것에 대해서 가만있을 위인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심판받음에 대해서 고맙고 귀하게 여기라”가 잘 안돼요. 잘 안될 때는 어떻게 하느냐? 말씀을 줄 때의 근원, 말씀을 줄 때의 우리 처지, 그리고 말씀을 위반했을 때의 그 처지로 둘로 나누는 겁니다. 아까 기도하신 집사님이 이야기를 잘했어요.

‘한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로 몽땅 나온다, 또는 죄를 지었다, 짓고 있다’라는 이 말은 뭐냐? 처음 인간과 달라진 인간의 제대로 된 비교와 대조를 보여줬습니다. ‘우리는 그때 그 인간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우리는 그때 그 인간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처음 만들어준 그때 그 피조물이 아니에요. 달라졌어요.

달라졌으니까 하나님 입장에서 그 인간을 가만두겠습니까, 없애겠습니까? 없애죠. 제거합니다. 우리의 항구성 또는 항상성, 항상 나는 ‘나’이고 싶은 이 고집을 주께서 이걸 봐주기 없기, 안 봐주시면서 제거해 주시는 것에 대해 귀하게 여기고 고맙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다음 질문은 간단합니다. 그렇게 제거하려면 나기 전부터 제거하든지 일부러 나와서 고생할 필요 없이 지워주든지 해야 하는데 일단 태어나게 해놓고 “너 죄인이다.” 그런 이야기를 후차적으로 하시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인간이 타락하든 죄를 짓든 관계없이 피조물이 피조물 됨의 중요함이 주님에게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에게 피조물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단 말인가? 그것은 ‘있음’에서 ‘없음’으로 사라지게 함으로써 있는 것을 없애는 거기에 개입된 하나님의 일관된 원칙이 있어요. 그 원칙이 하나님 앞에 중요합니다. 분명히 살아있는데 살아있는 인간을 보고 죽음에 대해서 지시한다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 이것을 살아있는 인간보고 이야기했잖아요. 그러면 살아있는 사람의 기분이 어떻게 되느냐? 벌써 압박감을 느끼면서 기분이 좋지 않은 거예요. 살아있는 사람보고 ‘네가 죽으리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네가 살아있는 것이 살아 있음의 완제품, 완결품은 아니다’, 완성은 아닌 거예요.


왜냐하면 살아있는데 어떤 점이 살아 있느냐, 어떤 점이 미흡해서 살아 있느냐? 생명나무를 따먹지 못한 것을 전제로 해서 살아있는 거니까 생명은 아닌데 살아있어요. 생명은 아닌데 살아 있는 존재로서 인간이, 아담이 만들어진 거예요. 만들어졌고 일하고 움직인다고 해서 이것을 살아있는 것이라고 오해하지 말라 이 말입니다.

생명나무 따먹는 것은 요한계시록 21장, 22장에 보면 원 없이 따먹게 되어 있어요. 거기는 생명나무가 쫙 가로수처럼 펼쳐져 있으니까. 지금 이 시대는 그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기준에서 보기에 생명이 없는데 인간은 선악과 따먹고 죽어가고 있으면서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나에게는 목숨이 있다, 생명이 있다, 살아있다’ 이렇게 우기니까 하나님의 율법이 동원돼서 그 인간을 가만둘 수가 없죠.

그러니까 인간들은 “그렇게 괴롭히지 말고 차라리 안 태어나게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네가 얼마나 편하냐, 안 편하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있는 것을 없애는 가운데서 하나님이 처음 창조할 때 숨어있던 원리가 피조 세계에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단도직입적으로 “생명은 무엇입니까?”라고 한다면, 생명이라는 것은 절차를 통해 이야기할 수 있는데 절차란 뭐냐? 살아있지도 않으면서 살아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까 그 인간을 죽이고 난 뒤에 다시 살려주게 되면, 그때 ‘생명은 살아있다고 여기는 자를 죽이고 다시 살림으로서 그동안 없던 생명이 나오게 되어 있다.’ 그것을 표준적으로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서 살아있죠. 살아있는데 십자가에 죽게 되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 뒷말에 대해, 제자들도 이해를 못 했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마 16:21). 여기서 ‘내가 고난받아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한다’고 할 때 제자들은 뭘 잘라버리고 이해했느냐?

‘주님은 살아있고’, 거기까지는 이해가 되는데 ‘죽고 나서 사흘 만에 살아난다’에 대해서는 제자들도 이해를 못 했어요. 왜냐하면 안 죽으면 되지 왜 굳이 죽었다가 살아나야 하는지, 죽는다는 그 텀이 왜 필요한지를 몰랐던 거예요. 몰랐던 이유가 뭐냐? 목숨과 생명에는 어떤 항구성이 있고 항상성이 있다고 오해했기 때문에 그래요.

목숨을 갖고 있는 이 내가 생명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이게 제거 대상이에요. 오늘 본문 다시 말씀드리면, ‘심판받을 자처럼 말을 하라’는 말이에요. 뭘 통해서? 율법 앞에서, 율법의 자유 앞에서 그렇게 하라는 말이죠. 그러면 율법안에서는 뭐가 나오느냐 하면, 율법이 완성되면 자유가 나온다는 겁니다. 그 자유를 13절에 보면 ‘긍휼’이라고 이야기해요. 불쌍히 여기심, 긍휼.

촘촘한 율법을 통해서 우리는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죄를 지었기 때문에 마땅히 사라져야 된다는 사실과 더불어서, 그 율법이 ‘자유’라고 되어 있어요. ‘죽는 게 뭐가 자유냐? 살아있으면서 자유를 만끽해야 하지 죽고 난 뒤에 자유가 무슨 소용이 있나?’ 이런 생각이 들죠. 율법대로 했는데 자유가 된다는 이 시범을 예수님께서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보여줬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실 때 인간들이 예수님에게 호통을 쳤죠. “썩 나가, 이 인간아.” ‘이 인간의 세계에서 꺼져버려, 인간아!’ 그런 뜻이에요, 죽여 버린다는 것이. ‘이 인간의 나라에서 나가!’ 그래서 죽였어요. 죽였는데 사흘 만에 살아났습니다. 결국 인간의 나라가 통째로 자유가 없는, 악마에 갇혀있는, 그리고 율법의 저주에 갇혀있는, 죄의 무게에 억눌려 있는 그런 신세라는 것이,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해서 죽고 난 뒤 사흘 만에 빠져나가니까 비로소 우리 자신의 처지가 밝혀진 거예요.

따라서 인간이 구상하는, 인간이 탐구하는 이 모든 현실 세계는 전부다 가짜입니다. 가짜고 교도소에요. 갇혀있어요. 가둬놓은 악마는 자기 모습을 안 보여주죠. 율법의 기능은 있는 것을 없애는 기능이에요. 그런데 없는 것에서 새로 만드는 기능은, 이미 없어진 내가 나한테 무슨 행동을 한다고 없어진 내가 생명을 얻는 게 아닙니다.

율법에서 나온 자유, 예수님께서 완성했던 그분의 탈출하심이 이 세계에 뭘 주느냐 하면, 긍휼을 분사해 버려요. 긍휼을 뿌려버리면 우리는 없던 데서 새롭게 긍휼을 분사 받은 입장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생명을 누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이 작업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구약 때 이스라엘 민족을 만드셨어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있는데 그 이스라엘 민족의 특징은 뭐냐? 같은 육체를 가진 이스라엘 민족이 다른 아담의 후손으로서 육체를 가진 이방 민족과 뭔가 차이가 나요. 차이가 나면서 거기 뭐가 형성되느냐 하면 막이 형성돼요, 막(幕), 건널 수 없는 막. 이방인들은 개 같은 이방인이에요. 언약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마땅히 저주받아야 하는 이방인들, 그리고 아브라함 자손으로서 하나님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 택했다. 반드시 이스라엘은 구원하리라’ 하는 그러한 언질이 주어졌던 특수한 이스라엘, 그 사이에는 막이 형성되어 있어요.

이스라엘도 사람이고 이방인도 사람인데 막이 그렇게 형성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스라엘 안에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희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 나라에서 쫓겨난 이유가 딱 하나에요. 대속이 필요하다는 이야기 때문에 쫓겨난 거예요. “너희들 힘으로 영생이고 천국이고 구원이고 없다. 어떤 종교적 노력도 소용없다.” 그 이야기를 해서 추방됐던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추방되고 난 뒤에 인간 세계에서는 아무도 구원받지 못해야 한단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추방되며 흘렸던 그 피를, 구원될 수 없는 대상을 향하여, 심판 대상이 된 것을 향하여 그 피를 뿌려요. 그 피를 분사한다고요. 여러분, 성경에서 피 이야기 나올 때 그 뒤에 분사, 뿌려진다는 것이 같이 세트로 짜여 있다는 것을 생각해 줘야 돼요.

그 근원이 출애굽기 24장 8절에 보면 나옵니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그 피는 바로 제물의 피입니다. ‘단일성’이에요. 단일성이고 백성들은 ‘다수성’이에요. 단일성의 속성 그 본질이 다수성에 이전될 때 그렇게 옮겨 갈 수 있는 방법은 흡착하는 방법밖에 없어요. 그 피를 뿌려버려요. 피를 뿌리면 그 피가 닿게 되면서 그 피의 속죄 능력을 통해서 이미 자유의 본질, 긍휼의 본질이 그 사람 속에 삽입되게 되어 있어요.

그게 출애굽기 24장 8절에 나오는 피 뿌림입니다. 그 피 뿌림이 그다음부터는 아주 기다렸다는 듯이 히브리서 9장 13, 14, 19, 21절에 나오는데 좀 길죠? 살짝 짜증이 나지만 할 수 없어요. 들으셔야 해요.

히브리서 9장 13-14절,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그러니까 피를 뿌릴 때는 반드시 그 대상이 어떤 대상이 되어야 하느냐 하면, 더러워야 해요. 아, 이걸 인간이 못 견뎌요, 못 견뎌 합니다. 예를 들면 교인들이 세상에 살면서 일할 때 자기 뜻대로 안 되잖아요? 힘들죠. 힘들 때 막 간절히 기도하는데 남 때문에 힘든 것도 있지만 자신의 행동, 아주 통제 안 되는 행동 때문에 양심에 가책이 되면서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되는데 하나님, 용서해 주옵소서. 앞으로는 그런 짓 안 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할 때 주님의 뜻은 딱 하나, 호통이에요. “엄살 피우지 마라.”

하나님을 대상으로 해서 자기 항구성과 항상성을 지켜내기 위해서 하나님의 속죄까지 동원하고 이용하려는 인간의 더러운 심보, 인간은 계속 부정(不淨)해야 하는데, 자기 행동이 마땅찮고 ‘내가 이렇게 추잡한 인간이었어?’ 마음에 안 드니까 주님 앞에 신도답게 깨끗하게 살려고 자기 딴에는 아주 대견해 보이는 행동을 하는데 주님의 뜻은 딱 하나에요. “엄살 피우지 마. 네가 뭐 어때서? 너 원래 더럽잖아. 왜 또 갑자기 네가 오버하고 있어?”

주님의 피는 그 대상이 반드시 부정(不淨)해야 해요. 성경 자체가 그래요. 부정한 자를 거룩케 한다, 그리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 9:15).

여기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피의 흡착으로 깨끗해지는 거예요, 피의 흡착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생’을 줬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신앙적 자신감이 있어서 ‘뭐 이미 택한 백성인데…’ 꼭 오늘날 교인들 같아요, ‘이미 택한 백성이니까 이젠 세상적으로 좀 나가도 되지 않겠느냐’ 하고 예수님의 희생에 대해서 별로라고 여기고 이제는 관심도 없고 세상 적으로 나갈 때, 이스라엘 자체가 망해버려요.

그 이유가, 그들은 희생 제물을 바친다고 했는데 사실은 희생 제물의 제단은 주님의 이름이 계시는 곳이에요. 그 주님의 이름이 스스로 막을 만들어요. 이스라엘과 이방 나라 사이에 막 있죠? 첫째 막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내부에 하나님이 생각한 진짜 이스라엘을 이 사람들은 몰랐어요. 희생의 의미를 아는 그분 스스로 희생 자체가 막을 만들어버리면 막 자체가 스스로 안과 밖을 형성합니다.(둘째막)

진짜 남은 자와, 이스라엘이라고 우기는 가짜가 주의 이름으로 일하는 그것을 통해서 나뉘어져요. 그래서 가짜 이스라엘인데 스스로 남은 자라고 여겼던 자들이 유대인들이고, 유대인들이 그 남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버텼던 것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의 권력이었습니다. 자칭 이스라엘이라고, 남은 자라고 여기고 메시아를 기다리는 그들 안에 누가 투입되었는가?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희생 제물이 되시는 예수님이 투입되어서 예수님이 그들에 의해 추방됨으로써 그 희생, 예수 이름으로 막이 생긴 거예요. 주님의 이름으로 안과 밖이 생긴 거예요. 유대인들은 마귀의 자식이기 때문에 그래요. 모든 유대인들은 마귀의 자식, 심지어 제자들까지도 마귀의 자식의 지배를 받고 있었어요.

베드로도 예수님 있는 데서 “나는 저분을 모른다”(눅 22:57)라고 세 번이나 저주했어요, 교회 반석 되는 베드로가. 자유가 없었던 거죠. 긍휼이 없었던 겁니다. 아니, 긍휼을 몰랐던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스스로 막을 만들기 때문에 기존의 이 세상에서 거리를 둘 필요가 있어요. 이 세상 인간의 나라에서 거리를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걸 보여주는 예수님의 기적 대목이 마가복음 8장 23-26절에 나옵니다. 제가 읽어보면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마을, 빌리지, 기존에 사는 인간들이 항구성과 항상성을 늘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의 집단에서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나와서 “눈에 침을 뱉으시며…” 분사하시고. 뿌리시는 거예요. 뿌리시고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이러면 그 소경은 이미 눈을 뜬 것이 아닙니까? 눈 떴다고 할 수 있잖아요. 아니에요. 이것은 눈 뜬 거 아니에요. 옛날에 같이 살던 마을 사람들이 자기가 시력 1.5, 이런 식으로 보고 있는 그 봄은 그것은 눈 뜬 게 아닙니다.

그것은 갇혀있는 거예요. 자유가 없는 거예요. 생명이 없고 그냥 목숨만 붙어 있는 거예요. 지금 우리 이야기는, ‘목숨이 어떻게 사라지고 생명으로 가느냐?’ 지금 그 이야기입니다. 목숨은 오히려 우리의 자유를 박탈해요. 목숨에 연연해서 마귀의 종이 되거든요, 죽기를 무서워해서.

우리는 갇혀서 목숨에 연연해하는 것에서, 이 두려움에서 스스로 노력해서 못 빠져나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점을 아시고 한 차례 말고, 두 차례가 들어갑니다. 일단은 인간들이 알고 있는 그 보는 것은, 봐도 소경이에요. 1차로 인간들이 보는 수준은 어느 수준인가를 보시고, 두 번째 다시 안수합니다. 안수가 두 번 들어가요.

일단 마을 밖으로 나가야 해요. 마을 밖으로 나가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으로 인하여 막이 형성되니까요.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그런데 어떤 특이 현상이 그 소경된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나무는 물체니까요, ‘사람인데 그냥 물체가 움직이는 그런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소경은 그냥 보이는 대로만 고백할 뿐이에요. 나무하고 사람은 같은 게 아니잖아요. 나무는 움직이지 못해요. 동물은 움직이지만, 나무는 식물이라서 땅에 박혀있기 때문에 못 움직이잖아요. ‘움직이기는 하는데 나무 같습니다’ 하는 표현을 해요. 주님께서 의도한 거죠.

소경뿐만이 아니고 어떤 인간이든 주님의 분사, 성령이 임해서 피를 뿌린 사람은 그동안 세상을 알던 자기의 안목이 어떤 식으로 소경적 안목인가를 발견하는 절차를 통과하게 만들어요. 내가 그동안 안 것은 악마의 안목으로 알았다는 것을, 그 절차를 통해 빠져나오게 하는 겁니다.

나무 같은 것에 복종하고, 나무 같은 것에 고개 숙이고, 죽어 있는 나무 같은 것에 어쩔 줄을 모르고…, 탱크가 됐든 장갑차가 됐든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우르르 사람들의 여론이 그게 뭐 그리 대수에요? 거기에 몸 둘 바를 모르고 어쩔 줄 모른다는 말은 마귀한테 옴팍 갇혀있으면서 자기 목숨에 자기가 갇혀있는 거예요.

자기 안목은 곧 마귀가 지배하는 그 다수의 시선과 똑같은 시선에 그냥 같이 동조하고 있다는 것밖에 안 돼요. 그래서 주께서 다시 안수합니다.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만물이 밝히 보이는 이 안목은요, 이것은 전지전능한 안목이에요. 예수님이 갖고 있던 시선과 안목을 이 소경 된 자가 공유하고 있었던 겁니다.

따라서 이 소경은 자기가 어떤 절차를 밟아서 지금 내가 만물을 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이 들어온 것을 잊을 수가 없죠. 이젠 내가 보는 게 아니에요. 나는 껍데기고, 내 안에서 주님이 만물을 밝게 보는 그 시선을 내가 같이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가라사대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같이 놀 군번이 아니다. 성령을 받았으면 사람하고 같이 수다 떨 군번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이 점을 제자들도 알지 못했어요. 마태복음 14장 25-26절에 보면,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유령이라!” 유령이라서 반가웠습니까? 반가운 게 아니에요.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제자들은 나름대로 안목이 있고 시선이 있는데 눈에 보이는 것을 자기가 해석하잖아요. 그 해석하는 한계가 뭐냐 하면, 동일한 예수님인데 밤중에 물 위를 걸어오니까 자신의 항상성, 늘 일관되게 유지됐던, 그동안 세상 살아오면서 견지해 왔던 자기 삶의 해석에서는 예수님이 뭐가 돼요? 유령이 된 거예요.

의도적으로 예수님이 자신을 그렇게 노출시킨 거예요. 쉽게 말해서 예수님의 뜻은 이겁니다. ‘넌 유령을 왜 반길 줄을 모르느냐?’ 네가 입으로 유령이라 했으니까 그 유령을 기쁘고 반갑게, “아, 진짜 내가 만날 분을 이제야 만났습니다.” 하는 그런 말을 왜 못 하느냐는 말이죠. 왜냐하면 본인이 사람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사람이고 싶어서!

그러나 인간이 갖고 있던 그 사람은 로마서 5장의 말씀처럼 죄를 지은 사람이기 때문에 이게 사라져야 해요, 없어져야 합니다. 본인이 없어지는 것에 대해서 본인이 왜 그걸 기겁합니까? 왜 싫어해요? 내가 죽는 것에 대해서. 그래 놓고 예수 믿는다고? 이게 전혀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잖아요. 인간의 세상 보기, 인간이 만물을 보는 데 한계가 있다는 거예요. 갇혀있다는 거예요. 악마의 눈으로 본다는 거예요.

성령이 분사되어 뿌려지고, 피가 뿌려지고…, 아까 히브리서 9장에서 피가 뿌려질 때 성령에 의해 뿌려지는 겁니다. 성령에 의해서 피가 뿌려지는데 그렇게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과 같은 공통적 안목을 가지고 만물을, 세상을 다시 보는 거예요. 아주 쉽게 말해서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이미 한번 죽은 자가 다시 세상에 나가서 이 세상을 향해 선포하는 말씀이 성경에 나오는 말씀이었다 이 말입니다. “이제는 네 차례다!” 그 말이죠.

골로새서 3장 2-3절, 방금 제가 말씀드린 그 기준에 의해 골로새서 3장 2-3절을 보면 쉽습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너희가 죽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의 안목은 뭐냐? 죽음은 화장터에 가서 시멘트 무덤에 가든지, 없어져야 죽음이라고 하는데 주님은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이미 죽은 자인데 이 땅에 살게 하는 것은 그 안에 성령이 분사되었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가 전에 밤에 바닷물 위로 걸어올 때 나보고 유령이라고 했지? 이젠 네가 유령이야.” 그 유령이라는 말이 너무 과격하게 들리시면 수정하겠습니다. 그게 바로 ‘현상’이에요. 우리의 실체는 하늘에 있고 나타나는 것은 현상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심판받은 자처럼 된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하는 이유가, 우리의 실체가 하늘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에서 자유로운 사람이거든요. 그게 율법이 주는 자유에요. 이 자유는 왜 자유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로 주님의 안목을 가지고 우리의 아무 행함 없이, 우리의 노력 없이 그냥 주께서 원하는 자에게 분사했기 때문에, 성령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 긍휼함을 입은 유령으로서 이 땅에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야고보서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요 불신자보고, 악마의 안목을 가진 자보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성령을 받은 자에 한해서만 이해되는 말이라고 이 말씀을 준 거예요. 이거 가지고 남 납득시키려고 하지 말고요. 쓸데없이 알지도 못하는 자에게 고함지르면서 남 괴롭히지 말고요. 성령을 받은 자는 골로새서 3장 2-3절의 말씀이 그대로 정확하게 적용되어서, 내가 몰랐던 새로운 현실이 나에게 덮쳐서 ‘나는 이미 죽은 자인데 살아있는 것은 그 안에 주님의 영이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거’예요, 그 껍데기로서.

여러분, 이 땅에 있는 것은 다 없어집니다. 미련 둘 필요 없어요. 남들 앞에서 엄살떨지 마세요. 엄살떨어서 자기의 항구성, 항상성의 내 세계를 자꾸 붙들려고 하는데 그것은 다 부질없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함으로써 이제는 모든 시간이 종결된 상태거든요, 종결된 상태 안에 새로운 시간이 들어오는데 그게 미래의 시간이에요. 미래의 시간이 우리를 몰아붙여서 어디까지 몰아붙이는가? 십자가까지 몰아붙여요, 십자가까지!

예를 들면 여러분들이 말씀을 알고 복음을 알아도 실제로 세상에 나가면 저나 여러분들이 어떤 생각을 하느냐 하면, ‘내가 어떻게 행하고 어떻게 대처하느냐?’ 모든 일에 이것만 남아요. ‘오늘 또 차 밀리는데, 어떻게 빨리 가지?’ 이런 거요. 어떤 행동도 ‘어떻게 하느냐, 어떻게 대처하느냐?’

그런데 그 질문을 두 번 안수받아 소경 된 사람의 입장에서 질문한다면 이렇게 해야 돼요. ‘주님께서 이 땅에 나의 실체를 없애기 위해서 십자가에까지 몰아붙이는구나.’ 처음의 질문은 ‘내가 뭘 행해야 하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특히 연세 많은 아내 같으면 ‘오늘도 점심 반찬 뭐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죠? 벌써 주인공이 나거든요.

그런데 질문을, 물론 바꾸기 힘들지만 살짝 바꾸자는 거예요. 아직 남편이 살아있단 말이에요, 그러면 나로 하여금 어디까지 몰아붙이냐 하면, 밥 해줘야 하는 거기까지 나를 몰아세우는 거예요. 왜? 엄살떨지 말라고. 십자가에서 네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일들은 우리가 엄살 떨 일이 아니고 주께서 휘몰아치는 거예요. “넌 귀신이다. 넌 유령이다. 네가 마치 목숨이 붙어 있는 실체라고 여기지 말라”는 말이죠.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이미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2장 31-32절에서 이야기를 해 주셨어요. 이 말씀이 참 어렵지만, 어렵지만 이제는 그런 안목으로 우리가 볼 수 있어야 돼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예수님을 욕한다는 것이 잘했다는 것이 아니에요. 사하심을 얻는 대상은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용서하심을 받는 죄가 된다는 말이죠. 예수님을 욕하는 것,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저주했잖아요. 그거 잘하는 짓은 아니잖아요. 하지만 사하심이 되는 이유가, 베드로의 그 안목이 탈출하지 못한 안목, 성령을 받기 전의 안목, 마귀의 안목에 있기 때문에 자기 목숨 하나 부지하기 위해서 그런 악마의 권력 안에서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주께서 이해해요.

이해하시고, 그걸 미리 아시고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마 26:34)라고 했고, ‘차라리 닭이 너보다 낫다’라는 식으로 이야기했거든요. 닭까지도 하나님의 계시로 쓰신다는 것은 베드로가 사전에 생각도 못 했죠.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자기가 성경을 보면서 최선을 다해서 지키고 있는데 뭐가 잘못된 게 있느냐?’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그 이야기에 대해서 ‘그게 잘못이다’라고 제가 반박하면서 ‘참 저 사람 정말 인생 안 살았구나.’ 이렇게 할 수 있는데 내 말보다 더 적절한 문장이 있어서 내가 가져와 봤어요.

사연이 너무 많아 쓸 수가 없으면
백지라도 고이 접어
보내 주세요
지워도 지워도 지울 수 없는
백지로 보내신 당신의 마음
읽어도 읽어도
끝이 없을 거예요

김태정이가 불렀던 <백지로 보낸 편지>(1981)라는 옛날 노래의 가사입니다. 집에 가서 한번 들어보세요. 사연을 문자로 썼는데 그걸로 자기 마음을 표현하는 게 뭐 한 거예요. 그럴 것 같으면, 그렇게 한이 없고 무한대로 나를 지적할 것 같으면 차라리 백지로 보내주시면 그 백지에서 뿜어 나오는 성령이 지금도 우리로 하여금 ‘더러운 너를 피 뿌림으로, 피 분사로 말미암아 네가 이미 거룩하게 되었다’는 것, 그걸 알려주는 겁니다.

뭐 거기서 자기를 생각해 가지고 “나는 이 죄는 지었는데 이 죄는 안 지었다.” 그런 소리가 나올 수가 없어요. 그래서 마태복음 12장에 다시 돌아가게 되면, 베드로가 눈에 보이는 대로 봤었잖아요. 누구를요? 예수님의 실체를, 그 육체를. 그래서 예수님도 인간이고 그걸 보는 나도 인간이고, 예수님도, 지금 시력이 얼마인지 모르겠지만 눈 떠 있고 나도 눈 떠 있다고 본 거예요.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그런데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를 부정해? 나를 부인해? 그것은 용서의 대상이 돼. 하지만 장차 앞으로 내가 십자가 지면 올 그 성령이 오게 되면 지금 세대와 오는 세대에 영원히 사하심은 끝, 사하심은 없다.” 사하심은 없는 거예요. 성령이 이 세상에 새로운, 예수님 떠나고 난 뒤에 새로운 막(幕)을 만들어버린 거예요. 예수님의 영이 있어서 세상을 보는 것과 예수님의 영이 없이 세상을 보는 것, 그 막을 만들었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막은 율법의 완성에서 오는 율법의 저주, 죄의 저주, 그리고 저주에서 저주, 악마의 저주 거기서부터 탈출, 자유로운 시선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유일한 자유, 바로 주님의 성령에 의해서 주어지는 그 시대가 오는데 그때는 이미 끝났어요. 더 이상 없어요. 죄사함 없습니다.

지금까지 이 본문을 생각하면서 긍휼을 입었다는 것은 내 뜻대로 안 돼야 하고, 왜 안 돼야 하는가? 주님께서 천국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주님 안의 새로운 세포가 되어서 주님의 안목과 주님의 긍휼로만 천국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걸 누가 방해하느냐 하면, 내 육신의 항구성, 항상성이 자꾸 방해하거든요.

그렇게 방해하니까 내 뜻이라고 나오는 그것, 내가 아는 한계 내에서 ‘이렇게 되면 되겠다’는 내 뜻이 자꾸 좌절되는 그 자체를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한 사람만 ‘아멘’ 하네요. 내 뜻대로 안 될 때…,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제발 좀 내 앞에서, 주님 십자가 앞에서 엄살떨지 말라고요. 십자가 앞에서 엄살떨 수가 없어요. 목숨 버리고 생명 주겠다는데 그걸 감사해야지 그게 엄살떨 문제입니까?

다시 ‘나는, 나는, 나는…’, 왜 자꾸 ‘나’가 등장하느냐 이 말이죠. 어차피 백날 싸대도 죽을 수밖에 없는데. 제가 안심하고 안 하고 간에, 그럴 자격은 안 되지만 진짜 세상에 나가서 응용문제 풀 때 과연 우리가 주님의 긍휼로 눈을 두 번 뜬 사람으로서, 내 실체는 없고 내가 이 땅에 유령처럼 살아가는 그 자유를 만끽하는지 제가 그 예를 들겠습니다.

경산에 가게 되면 ‘제자국제크리스천학교’가 있어요. 그 학교를 15년 전에 전희경 교장 선생님 부부(황정환 목사)가 만들었습니다. 그 학교 졸업생이 총 78명인데 80%가 미국의 아이비 리그에 장학금 받고 들어갔어요. 그리고 18명이 올해 졸업했는데 졸업생 전부 다 미국, 호주, 캐나다, 영국 학교에 장학금 받고 대학 들어갔습니다.

그 학교는 오직 성경 중심으로만 학습하는 학교입니다. 정부의 인가를 안 받았어요, 의도적으로. 인가받게 되면 간섭받기 때문에 안 받고 오로지 성경 말씀으로만 합니다. 그 방법은 뭐냐? 이 이야기하면 또 쓸데없는 것 길게 한다고 할 텐데 하여튼 이것은 좀 길게 해야 돼요. 왜? 응용문제이기 때문에.

이 학교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합니다. 휴대폰이나 TV 하나도 없습니다. 다 없애버리고 특히 중요한 것은 2년 선배는 아버지, 1년 선배는 어머니가 되어서 후배가 잠잘 때 민수기를 가지고 축복 기도를 해주는 거예요. 마치 아빠 엄마가 돼서 축복 기도하면서 잠재우는 겁니다. 일어나면서 제일 먼저 하는 것은 새벽 예배드려요.

시범적으로 새벽 5시 반에 그 동네 조그마한 목욕탕에 애들을 데려가는데 남자애들은 남편 목사님이 데려가고 여자애들은 여교장 선생님이 데리고 갑니다. 그래서 세신법, 때 벗길 때 이렇게 한다는 것을 애들 몸을 직접 씻기면서 보여줘요. 그렇게 해서 각 지역에 있는 엄마 아빠를 떠나서 혼자 살면서 교장 선생님과 남편 목사님과 선배들이 부모의 정을 대신 채워 주면서 기독교적 부모의 사랑을 학교에서 다 만끽하게 하는 거예요.

그 학교 졸업할 때 미국의 아이비리그, 유명한 명문 대학에 원서 한 여덟 군데 내면 거기서 입학허가 다 와요. 왜? 애들이 부모 공경할 줄 알아요. 많은 성경 구절이 있지만 그 학교의 모토가 뭐냐 하면,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2-3).

그 구절을 잡고 ‘우리 학교에 애들 보내면 현대 부모가 못 해주는 것, 부모가 원하는 소원, 미국의 명문 대학 가는 거 우리가 책임지고 넣어주겠습니다.’ 거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훈련 시켜서 내보내는데 이게 전부 다 성공한 거예요. 우리나라 기독교 대안학교 많은데 다 실패했어요.

거기서 한 가지 이상 악기 다 배우고, 도서관에는 기독교 사상이 없는 것은 빼버리고 기독교 사상, 진화론은 빼버리고 창조론 쪽으로 공부하고, 그리고 서로 돕고 도와주고 존경할 줄 알고, 어른의 권위에 복종할 줄 알고, 이렇게 훈련받은 아이들이 미국의 명문대 가요. 단지 명문대만 졸업하면 안 돼요. 요즘 미국에서는 졸업해도 취직이 안 되니까. 취직할 때도 교수님의 권위를 잘 존경해 주니까 취직도 너무 잘 돼요. 취직 잘 돼 가지고 자기 학교에 헌금 보내고 이래요. 가까운 경산에 있습니다.

자, 문제 나갑니다. 이 학교의 문제점은? 그러니까 설교 백날 해도 소용없어요. 막 부러운 거예요. 돈도 없는데 그 넓은 학교 대지를 살 돈은 어디서 났을까? 기도할 때마다 응답해 주니까, 주께서. 이것은 내 목표가 아니라 내 사명이니까, 전희경 교장 선생님의 사명이니까.

다시 한번 이야기합니다. ‘제자국제크리스천학교’ 인터넷 찾아보세요, 나옵니다. 그 동영상 36분짜리 다 보고 난 뒤에 제가 나름대로 반박해 봤어요. 첫째, 부모를 떠났다는 게 문제에요. 지금 부모는 망해가고 있잖아요. 그러면 복음은 어디서 나옵니까? 망해가는 부모와 같이 망할 때 복음이 나와요. 지금 그 학교에서 시도하는 게 결국은 율법의 정죄에서, 소낙비 내리는 그 사이에서 빠져나가서 괜찮은 항구성 자아를 지키려는 시도 밖에 안 돼요.

그래서 내놓은 결론은 뭐냐? 성경에 나오는 요한복음 12장 25절,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그것을 위해서 학교는 어떤 교육을 하느냐? 마태복음 16장 24절,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 학교는 그것을 어떤 식으로 교육할 것인가?

골로새서 3장 3절,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라고 하는데 다시 이 땅에서 어떤 기대와 희망, 특히 부모님의 희망을 자기가 충족하겠다는 것은, 사람들을 모아서 틈새시장을 노리는 일종의 사업이 아니냐는 말이에요.

그리고 부모를 공경한다는데 에베소서 6장 1절에 보면,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부모를 어떻게 공경하느냐 하면, ‘주 안에서’ 공경하라고 했어요, 주 안에서. 주 안에서 공경할 때 부모를 어떻게 공경하느냐? 사도 바울이 이야기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고전 7:29-31).

세상의 것은 다 없어진다. 왜? 이 땅에서 우리는 유령 같은 존재니까. 그걸 학생들에게 어떻게 가르치는가? 부모가 복음을 모르잖아요. 그러면 그 자식도 같이 몰라야 돼요. 모르는 가운데서 우리는 못하지만 망할 수밖에 없는 강도 같은 그 자식에게 살아계신 성령이 올 때에 인간이 조작한 그러한 믿음이 아니라 진짜 성령이 주신 분사된 피 뿌림이 제대로 있을 때, 그것만이 진짜 이 땅의 막을 이루는 참된 교회요. 이스라엘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매일매일 복음 안다고 우기면서도 엄살은 얼마나 피우면서 살아가는지, 자기 자신 측정하고 점검하면서 내가 왜 이러냐고 탄식하지만, 사실은 그것보다 더 썩어야 하고, 더 망해야 하고, 더 아무것도 아니어야 하는 것을 이제는 희열과 고마움과 감사로 주 앞에 찬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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