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의 톱날
2026년 5월 17일 본문 말씀: 야고보서 2:10-11
(2: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2: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율법은 모세를 통해서 주어진 ‘모세 언약’입니다. 그 전에 이미 언약에 있었습니다. 노아 언약입니다. 노아 언약은 일거에 하늘에서 대규모 홍수가 나서 땅에 있던 모든 이들이 다 죽어버린 심판의 언약입니다. 이 언약에서 우리는 그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홍수 나서 다 죽어야 하는데 노아 이후에는 율법이 주어집니다. 따라서 이 율법조차 너무 철두철미하고 완전해서 촘촘히 정죄합니다. 총 율법은 다음 두 가지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입니다. 하지만 이 계명은 열 가지 계명으로 나타났습니다. 결국에는 613가지로 촘촘히 나누어져서 주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그 어느 누구도 율법의 지적에서 따로 빈 자리를 찾지 못하기 위함입니다. 즉 ‘인간이 살아 있다’가 아니라 ‘율법이 살아 있다’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 모든 시간과 공간에 율법은 득달같이 달려듭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갈 3:10-11)
이 말을 한 사람은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율법으로 흠이 없음을 자부했던 사람입니다. (빌 3:6) 하지만 그런 모습이 예수님을 핍박하는 바가 됨을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들었던 사람임니다. 즉 율법의 기능이 그것을 지키는 자를 구원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던 겁니다. 더나아가서 인간에게는 아예 구원이 없음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인간 구원이 아니라 율법의 취지를 살리는 데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어느 누구도 율법이 요구하는 채권적 청구권에 대해서 합당한 대가를 치른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공짜로 살려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비용이 듭니다. 이 비용을 감당못하고 갚을 길이 없는 자라면 영원히 옥, 곧 지옥에 갇혀야 마땅합니다.
인간들은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는 본심과 본능에 의해서 각자 본인들이 신이 되어야 마땅하다는 의식으로 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신이 되어야 한다는 의식은 사실은 악마가 지닌 마음입니다. 악마는 최고의 천사로서 피조물과 창조주의 경계선마저 허물고자 했습니다.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사 14:13-14) 하나님께서는 악마는 가장 완전한 천사로 만들었습니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겔 28:15)
그런데 악마는 하나님에 의해서 죽은 자들이 모이는 음부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아래의 음부가 너로 인하여 소동하여 너의 옴을 영접하되 그것이 세상에서의 모든 영웅을 너로 인하여 동하게 하며 열방의 모든 왕으로 그 보좌에서 일어서게 하므로”(사 14:9) 그동안 이 세상의 모든 영웅이나 왕들은 악마를 충실히 모시는 쫄개들이었던 겁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악마로부터 시험받을 때도 이런 제안을 받았던 겁니다. 권력을 주겠다는 겁니다. 율법은 인간들로부터 그가 무엇을 하든지 저주받게 되어 있는 존재임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이런 율법을 지우고 인간으로 하여금 권력자 중심으로 똘똘 뭉쳐 우리 인간에게 살 이유나 권리가 있음을 보이겠다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장로나 서기관들도 나름대로 권력자들입니다. 다 나라를 위해서 일하다고 자부했던 자들이었고 백성들의 그들의 권력 행사마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인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악마의 자식인 줄을 몰랐습니다.(요 8:44) 철저한 율법 지킴이 곧 유대나라를 천국으로 만들어줄 줄 알았던 겁니다.
그들은 마귀나 하나님은 영이시니 자신들을 보지 못하는 줄 알았던 겁니다. 그러나 마귀도 눈으로 보도록 예수님께서 조치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요 6:70) 하나님도 보이는 식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8-9) 인간들은 악마와 하나님을 구분할 수 없지만 사단인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자기 존재 앞에서 치워버립니다.
사단의 특징은 저주가 주어진다는 근거가 되는 말씀과 율법은 자꾸만 자기 앞에서 치워버리는 일을 되풀이하게 만듭니다. 그 말씀을 치워버린 빈 자리에는 타인이 주는 권력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즉 “나는 타인이 보기에 어떻게 보일까”를 노심초사 생각하면서 항상 발발 떱니다.
이 자체가 지옥갈 사람임을 나타냅니다. “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8-19) 모든 인간의 출생은 지옥에 퐁당 빠지기 위해서 세상에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특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습니다. 이 사람들만이 율법의 저주가 악마의 존재를 전제로 할 때 참으로 적절한 처사임을 인정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율법의 조항이 다수인 것은 마치 나무 자르는 톱의 몸체는 하나이지만 그 톱날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는 이치와 같습니다.
즉 어느 누구도 자신의 행함으로 의롭게 될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애초부터 구원받을 자격없습니다. 사랑해 달라고 요청할 권리도 없습니다.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5-16)
이미 일방적 사랑으로 인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은 이제 본격적으로 율법과 말씀이라는 날카로운 톱날을 자기 마음에 칭칭 감습니다. 도대체 주님께서 무슨 부채를 일거에 탕감하셨는지 그 긍휼을 놓치지 않기 위함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구원은 우리의 소원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드님의 소원인 것을 감사히 그냥 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4강-야고보서 2장 10-11절(율법이라는 톱날) 260517-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야고보서 2장 10-11절입니다.
야고보서 2:10-11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오늘 본문이 인간 세상에 도전적으로 다가오는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사람이 살아있는 것, 태어나서 이 땅에 살아가는 것이 사람을 위해서 태어나게 한 것이 아니고, 율법을 위해서 인간이 있다’는 겁니다. 율법은 모세 언약입니다. 모세 언약 그 전에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시고, 그 전에 노아에게 언약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 홍수를 통해서 ‘언제든지 모든 인간을 다 죽여 버릴 수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줬습니다. 정말 노아마저 방주가 없었으면 물속에 빠져 그냥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노아 홍수 이후에 하나님이 언약이라는 걸 주셔서 하나님께서 어떤 의미가 있는 계획하신 바를 꾸준히 진행하는데, 그중 하나가 모세 때 와서 율법을 주신 거예요. 그게 바로 모세 언약의 율법입니다. 율법이 주어졌다는 것, 율법이 시내산에서, 하늘에서 왔잖아요? 그렇다면 그것은 해답이에요.
율법이 해답인데 인간은 일하는 데 있어서 어떤 동기라든지 행동에 있어서 그냥 답이 없이 움직여요. 인간은 무슨 행동을 할 때 자기 마음에 어떤 동기를 가지고, 이유를 가지고 행동하는데 그런 동기는 해답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현실 속에서 자기의 문제와 의심을 낳게 되죠. 자기가 행동해서 자기 뜻대로 안 될 때 ‘왜 세상은 내 마음대로 안 되느냐?’ 하는 생각을 여러분들이 가질 때가 있죠. 율법이 살아있는데 자기는 자꾸 본인이 살아있다고, 살아있으니까 살아야 한다고, 무슨 권리처럼 그렇게 우기기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는 거예요.
그래서 율법이라는 것이 인간을 상대로 해서 어떤 식으로 나타냈는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오늘 본문이 있는 겁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 2:10). 율법 자체가 인간을 대상으로 “너희들 모두 율법을 범한 자 맞지, 그렇지?”라고 다그치는 식으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라고 분명히 변명할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본문 야고보서 2장 10절에, ‘누구든지 율법 중에서 하나라도 어기면 다 어긴 것이 된다.’ 이 게임은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불공평한 게임처럼 그렇게 느껴집니다. 다 지키려면 율법을 하나만 주든지, 하나가 좀 심심하면 두 개를 주시든지 그러면 되지 않느냐는 거예요.
누가복음 10장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 10:26). 율법을 요약하면 뭐가 되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율법사의 답변을 예수님이 인정했듯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눅 10:27)는 이 둘로서 요약이 된다고 하셨어요. 그러면 율법을 두 개만 줘야죠. 두 개만 줘야 하는데 십계명은 몇 개의 계명을 줬는가? 10개를 줬어요.
그러면 10개만 지키면 되도록 했다 싶은데 율법이 613개입니다. 참 어떤 사람들은 할 일도 없어요. 그걸 일일이 셌어요. ‘지키라’는 것이 248개가 있었고, ‘하지 말라’는 것은 그것보다 훨씬 많습니다. 365가지의 하지 말라는 것으로 율법이 확대되었어요. 한 개를 지키려고 해도 지킬까 말까 한데, 두 개 지키는 그것도 야무지게 한 번 지켜보려고 마음을 먹을 것인데, 10개 정도, 십계명이지요, 그 정도 같으면 어떻게 지켜보겠다는 생각이 들겠는데 613가지, 촘촘해도 너무 촘촘해요.
이것은 왜 그런가? 율법이라는 것이 노아 심판의 물 같아요. 하늘에서 내려오는 홍수 같아요. 어느 인간이 위에서 내려오는 빗방울 사이를 피해 가겠습니까? 율법에는 이 세상에 앞으로 어떤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과거에 어떤 일이 벌어져도 빈칸을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지킨 것도 아니고 안 지킨 것도 아니고, 내가 숨 쉴 만한 어떤 빈 곳, 어떤 중립적인 영역이 있을 거라는 생각, 그것을 하나님 율법은 일체 용납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나는 지키는 것도 아니고 안 지키는 것도 아니고,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중간 지점에 있다는 것은 ‘이 세상에 내가 존재하는 것은 살기 위해서, 내가 사는 게 권한이고 권리’처럼 여기는 것, 그래서 그 빈칸에 자기를 두려는 거예요. 그것을 주님께서는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613가지의 율법은, ‘네가 이 땅에 어디 살든지, 나이가 얼마인지, 그동안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든지 그 살아온 세월 가운데서, 그 공간 가운데서 촘촘히 율법의 저촉을 받게 될 것이다.’
“하라고 한 이것을 했어, 하지 않았어?” 그리고 “하지 말라는 것을 해버렸나? 하지 말라는 것을 네가 위반했어?” 끝까지, 끝까지 따라가는 거예요. 율법은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나무 밑둥치를 베는 큰 톱 같아요. 톱은 몸체가 하나잖아요. 그런데 톱날을 보면 날카롭게 촘촘히 무수한 날이 있기 마련이죠.
율법을 주신 모세 언약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하나입니다. 하지만 하나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613가지의 모든 율법 조항은, 우리가 이 땅에서 어디 가서 무슨 생각을 하든지 어떤 핑계나 변명을 대든지 일체 인정하지 않고 톱날이 찾아가서 우리를 지적합니다. 율법이 613가지의 낱개로 포장되어 있다, 낱개로 되어 있다는 말은, 율법이라는 톱날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나는 나라고 하나로 생각하는 그 ‘나’를 613가지로 토막 내버리는 거예요. 전기톱 살인사건이에요. 토막을 내버린다고요.
나라는 것, 나라는 육신, 나라는 그 생각을 조각조각 내버리는 겁니다. 다시 조각들을 모아서 ‘이것이 나’라고 구성할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는 거예요. 네가 어떤 존재인지와 관계없이 율법이라는 톱날 앞에서 나라는 자체가 성립될 수 없도록 모든 말씀이 조각조각 내버리는 거예요.
“교회 왜 안 나왔습니까?” “내가 바빠서.” 거기 ‘나’가 들어가잖아요. “주님을 왜 사랑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게을러서.” 거기 또 ‘나’가 들어가잖아요. “기도를 왜 안 하십니까?” “요새 바쁜 일이 있어가지고” 거기 또 ‘나’가 들어가죠. 나라는 것은 율법에 의해 조각나서 성립될 수 없는데, 자꾸 우리는 이 율법 앞에서 율법을 기피하기 위해 ‘나’라는 것을 따로 만들어요.
“내가 교회 나오려고 하는데 아는 사람이 - 요샛말로 지인이 - ‘뭐 좀 같이 해보자’라고 해서 그렇게 되었다.” 그 아는 사람은 율법의 613가지의 톱날에 의하면 조각난 거예요. 허상이라니까요. ‘저 사람이 살아있다.’ 그리고 ‘내가 살아있다.’ 인간이 사는 이유는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살잖아요. 설교 실컷 듣고 문만 열고 나오면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이 생각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요.
그런데 그들은 살아있는 게 아닙니다. 동시에 나도 살아있는 게 아니에요. 살아있는 것은 말씀이 살아있고, 율법이 살아있는 거예요. 노아 홍수가 살아있는 겁니다. 노아 홍수를 옴팍 받았던 당시의 그 땅 위에 사람들은 자기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했습니다. 그러나 노아 홍수가 덮치니까 그중에 산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홍수의 취지가 담긴 것이 율법이에요.
그렇다면 여러분 생각하기를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 땅에 인간이 왜 태어나게 했는가? 태어나게 해서 율법으로 이렇게 구박하기가 있기, 없기?’ 이런 식으로 주님 앞에 불평하는 거예요. 그러나 여러분, 율법은 인간에게 준 게 아니에요. 인간을 장악하고 있는 마귀에게 준 겁니다. 마귀한테 줬는데 마귀는 안 보이면서 인간을 부추겨요.
인간을 부추기면서 “네가 율법을 지켜라. 네가 율법을 지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될 것이다.” 소위 신학에서 말하는 성화론이라고 하는 게 그거죠. 마귀가 신학을 만들어서 인간을 그렇게 부추기는 겁니다. “율법으로 인해 네가 살아야지.” 이렇게 부추깁니다.
여러분, 인간은 살면 안 돼요. 살아있는 것은 인간이 아니고 마귀가 살아있죠.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또는 2장에 보면 마귀가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라고 자꾸 다독거려 줍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2장과 3장에서 율법으로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른 말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또는 율법으로 살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고 되어 있어요.
갈라디아서 3장 10-11절에 보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을 만드신 것은 저주가 무엇인지를 알리기 위해서, 인간은 저주받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태어나는 족족 지옥에 풍덩, 풍덩! 꼭 백제 시대 백화암에 투신자살했던 궁녀들 같아요. “궁녀 되었느냐?” 강물에 풍덩! 삼천 궁녀가 강물에 빠졌다는 전설인데 내가 보기엔 좀 구라 같아요.
인간은 저주받기 위해서 태어난 겁니다, 저주받기 위해서! 왜? 인간이 저주받아야 율법의 취지가 살잖아요. “내가 분명히 말했어, 안 했어? 율법대로 살지 않으면 내가 저주받는다고 했어, 안 했어?” 율법이 살아나기 위해서 인간은 율법과 만나야 되고, 그렇게 만난 인간은 어느 누구 하나 예외 없이 다 지옥으로 갑니다.
그게 인간의 존재 이유에요. 다른 꼼수 생각하지 마세요. “내가 율법대로 살고 말씀대로 살고 열심히 진정성 있게 노력하는 것을 왜 하나님은 진득하게 지켜보지 못합니까? 나는 나름대로 할 걸 다 했습니다. 교회 나가고 말씀 지키고 복음 듣고 다 했는데, 그것 가지고 안 된다면 전 어쩌라는 말입니까? 제가 하나님 안 건드렸죠? 하나님이 절 먼저 건드렸어요. 전 거기에 대해 못 참습니다”라고 해서 인간들이 신학을 만들어 놨어요. 고집 세죠?
지옥 가라고 하는데, 안 가려고 버티는 거예요. 뭐 아무 근거도 없어요. 자꾸 마귀가 배후에서 우리보고 넓은 길로 가래요. 그래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면 우리의 소망이 있어요. 우리의 소망은 남북통일이 아닙니다. 넓은 길이에요. 남북통일이 되든 말든 관심 없고, 이란이 전쟁하든 말든 관심 없고, 내가 가는 길이 만사형통한 길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게 타고난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 그렇게 넓은 길로 가서 어디로 가느냐? 마태복음 7장 13절에, 넓은 길로 가서 어디로 가느냐? 풍덩, 어디 쪽으로? 지옥으로 ‘풍덩’이에요. 멸망의 길로 풍덩, 가게 되어 있어요. 멸망의 길로, 지옥으로 안 빠진다는 것은 ‘특이 현상’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인간이 아닐 거예요.
인간은 아담의 죄로 다 지옥 가게 되어 있는데 중간에 가는 방향이 지옥이 아니고 천국으로 빠졌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무슨 반칙 같은, 정당한 조치가 아닌 특혜 같은 그런 것들이 감잡히지 않습니까? 거기에 우리가 화를 내야 해요. “쟤는 뭔데 빼주십니까? 이러기가 있어요? 우리는 지옥 가고 저주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이 율법을 통해서 이미 분명하다고 했으니까 확정됐잖아요. 그런데 왜 쟤는 빼주는데요?” 분노해야 해요.
그 인간이 율법 지켜서 천국 가는 게 아닙니다. 지금 지옥 가는 인간은 율법을 본인이 맞이해서 자기가 율법을 지키겠다고 나선 그 자체가 문제에요. 천국 가는 사람은 율법을 아예 상대하지 않았어요. 원래부터 저주받게 되어 있는데 율법을 지킨다고 그 저주를 안 받는 게 될 리가 없거든요. 이미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을 자는 없다고 주께서 이미 단정했다면, 이 말씀을 인정한다면 적어도 자기 구원을 포기할 줄 알아야 됩니다. ‘남들은 교회 안 가서 지옥 가지만 나는 교회 나와서 지옥 간다.’ 그렇게 받아줘야 해요.
그러면 이 율법은 누구에게 줬는가? 율법은 인간 배후에 있는 악마한테 준 거예요. 이 사실을 우리가 왜 모르냐 하면, 악마는 우리의 눈을 어둡게 했어요. 악마는 영이니까 눈에 안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악마는 자기를 못 찾도록 자꾸 눈에 보이는 같은 인간들끼리만 상대하게 해요.
울고불고 좋다고 뛰고, 그러다가 또 싸우고 전화해서 한판 따지고, 이 모든 일이 눈에 보인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인데요, 나이 세 살, 일곱, 아홉, 칠십, 팔십, 구십까지 맨 생각이 뭐냐? 눈에 보이는 인간하고 상대하는 거예요. ‘너는 나 어떻게 생각하는데? 이만하면 괜찮잖아, 그렇지?’ 이런 거요. “걔는 영 아니야.” 뒷담화하고.
이야기의 테마, 주제가 사람에 관한 이야기예요. 마귀에 관한 이야기가 없어요. 마귀에 관한 것은 어디에 있느냐? 성경에 나옵니다. 이제부터 마귀에 대해서 제가 언급을 해드리겠습니다. 이사야 14장 14절에 보면,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서 지극히 귀한 자와 같이 막 먹을 것이라는 말이에요. 에스겔 28장 15절에 보면,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악마가 하나님의 하늘나라에서 완전한 자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불의가 나타났어요. 다시 이사야 14장, 이사야 14장과 에스겔 28장을 제가 왔다 갔다 할 거예요. 이사야 14장 13절에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피조물과 신의 경계를 없애겠다는 게 일관된 악마의 마음이라는 거예요. 그 악마의 마음으로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게 하면서 악마가 인간에게 한 게 있습니다. “네가 저걸 따먹어서 경계선을 없앴어? 잘했어. 네가 앞으로 신처럼 되리라.” 곧 ‘그 마음, 내 마음을 네 마음에 심어주겠다.’
신이 필요 없이 내가 신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은 인간이 자기 속에 손을 집어넣어 끄집어낼 수 없는 야망입니다. 이것은 나이가 한 살이든 두 살이든 관계없어요. 오히려 나이가 많으면 점점 구체화 될 뿐이에요. 다시 에스겔 28장 16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내었고 화광석 사이에서 멸하였도다.”
‘화강석’이라고 하는 것은 하늘나라의 불, 불 속에 있는 천사의 자리에서 널 쫓아냈다, 그렇게 추방되었다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그 추방된 마귀가 어디로 왔는가? 뱀 속에 들어가서 땅에, 에덴동산에까지 찾아온 거예요. 악마에게는 우리가 모르는 과거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악마가 떨어졌는데 이사야 14장 9절에 보니까, 악마가 땅 정도가 아니고 음부로 내려가는 데 여기에 재밌는 이야기가 있어요. 14장 9절입니다. 음부는 죽은 자들이 가는 곳이에요. “아래의 음부가 너로 인하여 소동하여…”
“왔어, 왔어, 왔어!”
“누가?”
“하늘나라의 최고 완전한 자가 떨어져서 우리가 죽어서 있는 이 지옥에 왔어!”
그 소동이 일어났어요. 그리고 “…너의 옴을 영접하되…” 누가 영접하느냐 하면, 이 땅의 왕들, 열왕들이 영접한다고 갑자기 지옥이 부산스러워지고 소동이 일어났다는 거예요. “그것이 세상에서의 모든 영웅을 너로 인하여 동하게 하며 열방의 모든 왕으로 그 보좌에서 일어서게 하므로.” 곧 “어서 오소서. 우리의 왕이시여!” 하고 영접한다는 겁니다.
왕은 악마의 똘마니였어요! 이 세상에 악마로부터 가장 직접적인 인상을 받고, 악마로부터 가장 가깝게 많은 것을 부여받은 자가 권력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을 때 악마가 예수님에게 제안한 게 이 모든 권력이에요. 권력을 추구한다는 것, 이것은 가장 악마에 가까이 가는 거예요. 바리새인들 보고 악마의 자식(요 8:44)이라고 하잖아요? 사두개인들이.
악마가 안 보인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안 보인다고 하는데 성경은 말합니다. 악마는 이미 인간이 보고 있어요. 요한복음 6장 70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악마가 없다? 그런 이야기 하지 마세요. 악마는 비존재다? 그러지 마세요. 마귀를 눈으로 봤다는 말은 하나님도 눈으로 봤어요, 하나님도! 요한복음 14장 8-9절에,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사탄을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사탄의 특징은 뭐냐? 가룟 유다가 대표해서 보여줬어요. 예수님을 자꾸 넘기는 거예요. 예수님을 치워라, 하고 자기 눈앞에서 예수님을 제거하는 것을 되풀이해요. 요즘 말로 하면, 교회 와서도 또는 세상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복음을, 하나님 말씀을 먼지 털듯이 자꾸 이렇게 털어버려요.
“내 앞에서 예수 같은 소리하지 마라. 예수 이야기하지 마라.” 왜? ‘나’는 신이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권력이다.” 교회 집사도 장로도 별로 성에 안 차요. 그래서 ‘목사가 돼야겠어’ 이런 것. ‘교인 10명 모아놓고 목사 할 것이 아니라 1,000명 모아놓고 목사 하고 싶어.’ 이런 것. 뭔가 땡기는 게 있거든요.
악마가 만든 세계는 예수 없이, 복음 없이, 율법 없이, 하나님의 말씀 없이 ‘너 나 어때? 나 괜찮잖아.’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사람이 모든 행복과 축복을 맞보게 하는 그런 시도를 악마가 이 세상 모든 인간들에게 다 했어요. 남한테 인정받으면 나는 위대한 스타가 되고 신이 된다는 것, 여기에 정신이 팔려있습니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1등을 목적으로 하는 더러운 세상, 우리는 전부다 그 권력에 맛이 들어있습니다. 지금 비리비리하니까 ‘마귀 그거 뭐…’ 하는데 여러분들이 권력에 맛을 한 번 들여보세요. 우리 중에 누구 하나가 ‘이번에 부름받아서 청와대에 입성했다’ 해보세요. 갑자기 교회 예배 시간에 빛이 나요.
그걸 성경 이사야서에서는 ‘새벽별’이라고 합니다. 해 뜨기 전에 가장 빛나는 것, 금성이죠. 해 뜨면 비리비리 해지지만 해가 없는 세상에서 가장 빛이 나는 것은 권력자밖에 없어요. 트럼프, 이재명, 김정은, 국회의원…. 악마가 국가를 만들고 국가에서는 율법 대신에 국가법을 제시해서 율법을 가리는 획책을 한 거예요. 마귀가 배후에서.
세상 법은 지키면 인간답다는 인정을 받아요. 그러나 율법의 톱날은 613가지에요. “저주나 받아라, 인간아.” 이거에요. “넌 지옥 가야 돼.” 이게 율법이에요. 그것은, 우리가 악마로부터 부여받은 심성과는 마찰을 일으킵니다.
“나는 되어야 해.”
“뭐?”
“나는 누구 못지않게 신이 되어야 해.”
율법은 치워버리고 그대신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헌법을 가지고 내가 얼마나 정당한가를, 내가 얼마나 삐까삐까한 존재인지를 대외적으로 알리고 싶어 하는 겁니다. 거울 보세요. 그게 바로 마귀입니다. 거울에 비친 마귀가 그 모습이에요. 자기가 마귀인지를 모르고, 마귀는 없다고 해요. 교회 와도 전부다 마귀들이에요. 교회 밖에 나가도 다 마귀들이에요.
교회 안이나 밖이나 전부다 세상은 딱 하나입니다. ‘남들이 날 어떻게 좋게 보겠느냐?’ 그거 외에는 생각할 게 없어요. 인간들은 자기의 행함을 집어넣어서 복을 받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걸 용납한 적이 없습니다. 세상은 그걸 용납해요. ‘열심히 하면 복 받는다.’ 그러나 율법은 그걸 인정한 적이 없어요.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이유가 마태복음 18장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18장 23-35절인데 상당히 길어요. 시간 관계상 제가 안 읽고 싶은데 뭐 하나 뺄 것이 없어서 죄송하지만 읽어보겠습니다.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 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율법은 뭐냐? 청구서입니다. “햇빛 준 것, 그 값 갚아라. 공기 준 것, 그리고 단비를 내릴 때 너 비용 처리 했어, 안 했어? 네 목숨을 부지해 줄 때 그 비용 갚았어, 안 갚았어? 나한테 다 갚아라.” 그러면 인간들이 뭐라고 합니까? “비용이 너무 무겁습니다. 불쌍히 여겨주세요.” 이럴 게 아니냐는 말이죠.
마태복음 5장 23-26절에, 그 율법이 청구서라는 것이 나와요.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이게 돈 문제가 아닙니다. 죄 문제입니다. “죗값을 다 치르지 않으면 결단코 널 지옥에 보내리라. 넌 네가 죄인인 줄 모르지? 알려줄까? 율법 줄게.” “율법을 두 가지 정도로 주세요.” “아니. 613가지.” “왜 그렇게 많이 주십니까?” “네가 어디 가서 무슨 행동을 하든지 전부다 율법이 빈틈없이 너에게 값을 치르게 한다. 네 죗값 어떻게 할 거야? 무슨 수로 네 죗값을 갚을 거야? 내가 너에게 끝까지, 끝까지 추궁할 거야.”
그러니까 이 율법이라는 것은요, 우리가 ‘신자냐, 불신자냐’와 관계없이 인생을 살면서 이 톱날이 우리 몸에 칭칭 감겨 있습니다. 우리 몸에서 나오는 모든 행위와 행동의 그 동기까지 전부 추궁해서 우리를 아주 토막토막 절단해 버려요. 다 죽여 버립니다. 살 수가 없어요.
예수님께서 사울이라는 사람에게 찾아왔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스스로 주장하기를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빌 3:6)라고 했어요. 율법에서 흠이 없다고 자부했던 사울이 “율법이 있는데 뭐가 더 필요해?” 그런데 예수 믿는 자들은 “예수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라고 하니까 “저 이단들을 가만두면 안 됩니다.” 당국에 건의해서 자기가 나서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처단하고 죽이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내려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때 사울과 예수님의 만남은 딱 하나였어요. “누구십니까?” 물으니까 “네가 핍박하는 그 나다.” 율법에 흠이 없는 자가 하나님께는 어떻게 보일까요? 예수님을 핍박하는 자로 간주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방인들은요? 이방인들은 아예 율법이 없어서 죗값을 갚을 길이 없는 인간이에요. 유대인들도 지옥 가고, 이방인들도 지옥 가는 것은 율법에 준해 지극히 마땅한 겁니다.
에스겔 28장 13절을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마귀가 인간을 어떻게 저지레를 해놨는지 잘 한번 보세요. 마귀에 대해서 하나님이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여기에 보석이 몇 가지냐 하면, 9가지가 나와요. 최고 등급의 보석으로 나오는데 14절에, 그게 바로 기름 부은 그룹, 천사였다는 거예요. 천사 중에서도 아홉 가지 보석으로 치장하면서 그렇게 으스대는 자, 아까 이야기한 완전한 자였어요. 피조물 중에서 최고 위치에 있던 완전한 자가 마귀예요.
그런데 출애굽기 28장 15절에, “너는 판결 흉패를 에봇 짜는 법으로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공교히 짜서 만들되” ‘판결 흉패’가 나옵니다. 제사장 가슴에 붙이는 거예요. 16-21절에, “장광이 한 뼘씩 두 겹으로 네모반듯하게 하고 그것에 네 줄로 보석을 물리되 첫 줄은 홍보석 황옥 녹주옥이요 둘째 줄은 석류석 남보석 홍마노요 세째 줄은 호박 백마노 자수정이요 네째 줄은 녹보석 호마노 벽옥으로 다 금테에 물릴찌니 이 보석들은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대로 열둘이라.”
여기에 보석이 12개에요. 아까 최고 천사는 몇 개냐? 9개입니다. 호박과 백마노와 자수정이 악마한테는 없어요. 사사기에 보면, 베냐민 지파가 너무 악한 짓을 해서 열한 지파가 모여서 베냐민 지파를 아예 없애버린 사건이 있어요. 그걸 보고 누가 기겁했느냐 하면, 남아있는 11 지파가 기겁했어요.
이유가 뭐냐? 제사장에게는 12가 다 갖춰져야 해요. 12가 갖춰지지 않고 한 지파가 없이 11개의 보석이 박혀있으면 하늘나라에서 안 받아줘요. 모세 율법 613가지 율법 중 하나가 제사장의 율법이 있고, 제사장에게는 열두 개의 보석이 하나의 금테로 묶여 있어야 해요. 사탄보다 더 완벽한 최고 등급의 보석으로 치장된 게 누구냐 하면, 피조물을 능가한, 하늘나라에 속한 자에게만 있는 영광입니다.
그게 뭐냐?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지금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영광과 동일한 영광으로 만들어주려고 모세 율법을 준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조금 어려운 이야기지만, 데칼코마니라고 하는 것을 여러분 아십니까? 좌우 대칭이지요. 나비의 두 날개가 좌우로 똑같아요.
인간은 이미 악마의 마음이 들어서 자기가 신처럼 되었잖아요? 오는 8월에 수련회 할 때 강의 주제가 창세기에요. 창세기 교재를 작성하고 있는데 교재 첫마디가 뭐냐?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창세기에서 의미를 끄집어내면 모조리 다 엉터리’예요.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부터 시작한다면.’ 나를 버려 버려도 마땅하다는 것, 나한테는 어떤 의미도 없어야 한다는 그런 안목으로 창세기를 봐야 해요.
현재 어엿이 있는 나를 스스로 없앨 수는 없어요. 그런데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버젓이 있는 나를 주께서는 ‘지옥에나 가라’ 하고 없애버리고, 그 바탕에 나타나는 창세기의 의미, 그 뜻 그 뜻이 주께서 원하는 뜻입니다. 주기도문 여러분이 아시죠? 이 세상에 있는 ‘나의 의미가 뭐냐, 너의 의미는 뭐냐?’ 모조리 그 의미를 찾는 데에 과학과 철학이 동원되는데, 주기도문에 보면 의미가 확정되었어요.
“뜻이…”, 의미가,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 끝났잖아요. 그걸 누가 방해합니까? 악마한테 부추김을 받은 우리가 방해하는 거예요. 주기도문이고 뭐고 간에 하여튼 말씀 들으면 먼지 털 듯이 다 털어버려요. 말씀 없는 곳으로 계속 피신합니다. ‘안 들을란다!’ 이거예요. ‘안 들을란다. 못 듣겠다!’ 이렇게 나와요.
할 수만 있으면 생각하는 것이 ‘이 정도 되는 나를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 결국 인간 대 인간, 눈에 보이는 인간들의 그 평가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요. 성경을 안 보니까, 율법에 의해서 우리가 지옥 가야 된다는 사실도 몰라요. ‘얼마나 성실하게 말씀 지켰는데, 하나님께서 봐줄 거야.’
안 봐줍니다. 그게 바로 마귀의 생각이에요. ‘우리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기도 합니다.’ 이렇게 주장하는데 주님께서 바보입니까? 다 알아요. 마태복음 15장 8절에서,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입술로는 존경해도 마음에서는 마귀를 섬기고 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겠다는 말입니까? ‘데칼코마니’니까, 인간에 의해서는요 나를 분간 못하듯이 남도 분간 못해요. 데칼코마니, 똑같아요. 똑같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심판할 때 양과 염소를 똑같이 배치해요. 야곱과 에서가 쌍둥이입니다. 쌍둥이, 둘 다 성질이 똑같아요. 남한테 지고는 못 사는 것, 야곱도 대단하지만 에서도 만만치 않아요.
어떤 인간도 타인은 나의 복제판이에요. 데칼코마니, 좌우 대칭이에요. 좌우 대칭인데 주님께서 심판할 때 “오른쪽에 있는 자들아, 너희는 천국에 가라. 왼쪽에 있는 자들아, 너희는 지옥에나 가라.” 이 결정을 내려버리죠.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남들이 나를 인간이라고 보니까 인간인 줄 알았죠.
왜? 율법은 털어버렸으니까, 613가지의 말씀 다 털어버렸으니까. 남들이 “아이고, 이번에 승진했다면서요? 출세했다면서요?” 권력으로 치장하는 것, 이 방향은 어느 방향, 어느 지향성이냐? 이것은 악마가 멱살, 멕아지를 끌고 잡아당기는 거예요. 더, 더, 더, 더, 더…,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서 자꾸 높은 자리, 돈 많은 자리, 권력 있는 자리, 인기 있는 자리로 잡아당기면서, 그렇게 당겨서 추종 세력이 많아지니까 자기는 인생 성공한 줄 알고 이걸 행복이라 여깁니다. 그런 것은 이 더운데 갓바위나 올라가면 돼요.
그렇다면 율법에서는 이미 떨어졌고요, 지옥 가는 것은 요지부동입니다. 우리는 본의 아니게 마귀의 하수인으로서 마귀가 준 마음 외에는 다른 마음이 없으니, 마귀가 가 있는 곳에 가야 되죠. 아까 이사야 14장 봤지요. “아래의 음부가 너로 인하여 소동하여 너의 옴을 영접하되 그것이 세상에서의 모든 영웅을 너로 인하여 동하게 하며 열방의 모든 왕으로 그 보좌에서 일어서게 하므로 그들은 다 네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도 우리 같이 연약하게 되었느냐 너도 우리 같이 되었느냐 하리로다”(사 14:9-10).
최고 중의 최고의 권력자 트럼프가 온 거예요. 뒤에 있는 다른 시시한 권력들, 나폴레옹부터 해서 전부 다 “아이고 형님, 형님 오십니까?” 이렇게 된 거죠. 마귀를 좋아해서 그것을 하나의 정치인으로, 영웅으로 구현시킨 자가 지옥에 갔다는 말은, 그 영웅을 영웅 되게 하는 마귀와 지옥에서 영원히 만나게 해줬던 거예요. 지옥은 만남의 장소예요. 고속도로 휴게소 같이 만남의 장소, 이게 지옥입니다.
그런데 아까 제가 말씀드렸죠. “쟤가 왜 천국 갑니까? 그것은 반칙이잖아요.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쟤는 무슨 노력을 해서 저렇게 천국 갑니까?” 그런 것도 좀 먼지 떨지 말고 성경 로마서의 9장에 나와 있어요. 16절에,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로마서 11장에 30-32절에 보면,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이스라엘의 문제점은, ‘하나님의 긍휼’로부터 시작해서 ‘육’으로 끝났다는 거예요. 사울도 그런 사람이죠. 그런데 놀랍게도 사울이 갈라디아서 3장 2절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았으면 율법의 행위를 누가 지적한다? 성령이 지적하는 거예요. 성령이 지적하는 겁니다. 성령의 거저 주시는 그걸로 이미 끝났어요. 그 안에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는 사람은 없는 꼭 그렇게 말씀 지키고 율법을 지키려고 나댑니다.
그 이유가 뭐냐? 요한일서에 보면, 그게 두려워서 그래요. 요한일서 4장 18-19절,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했다는 거예요. 제발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에게 ‘나 어때?’ 인정받으려고 하지 마시고, 도리어 다른 사람한테 이상하게 여김을 받기를 원하세요. “너는 뭔데 천국 갔어?”라는 소리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네까짓 게 뭔데 천국을 가? 네가 뭐한 게 있다고?” 그때 우리는 싱긋이 웃으면서 이렇게 해야 해요.
“내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다.” 요한일서 4장 10절에 나오는 말씀이지요. “나는 주님을 사랑한 적 없어. 그런데 주님이 먼저 나를 사랑했어.” “그래서 뭐?” “그래서 두려움이 없어.” 그런데 너희들은 사랑을 받아본 적은 없고 율법과 말씀이 있으니까 자기 장래가 두려워서 죽어라 하고 말씀 지키고, 죽어라 하고 율법 지키는 거예요, 교회 와서.
예배 시간 몇 분 전에 와야 합니까, 올 때는 슬리퍼 신지 말아야 합니까, 오후 예배는 굳이 꼭 드려야 됩니까, 다 지키면 더 유리합니까, 십일조는 지출 빼고 전체 수익의 십일조입니까…, 이런 거. 인간이 어떤 말을 한다는 것은 그 안에 두려움을 품고 말하는 거예요, 벌벌 떨면서. 한 시도 두려움 없이 살 수가 없는 거예요.
성도가 주의 사랑을 받고 보니까 우리는 내 죄를 갚을 길이 없잖아요. 이미 주님께서 우리를 “얘는 빚 못 갚아” 하고 죽여버렸어요. 이미 우리는 산 자가 아니고 죽은 자이기 때문에, 죽은 자는 더 이상 빚을 갚을 수가 없죠. 이미 죽어버렸으니까! 살아있는 분이 누구냐 하면, 주님이 살아 있는데 그 주님이 모든 율법을 다 이룬 분으로서 살아계셔서 “그 빚을 내가 갚겠습니다”라고 해서 갚아주고 난 뒤에 성령이 오거든요.
성령이 오게 되면 “야, 야, 야, 야, 일어나! 갚았어, 갚았어, 다 갚았어.” 이것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이 갚았다는 사실을 받았을 때 이걸 믿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믿는 자의 특징, 믿는 자의 독특한 특징이 있어요. 그 특징은 뭐냐 하면, 나의 모든 죄를 속속들이 지적하는 그 율법을, 그 칼날을 몸에 칭칭 감고 살아간다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 너무 따갑고 아프지 않습니까? 안 아파요. 왜? 옛날에,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이 말씀 때문에 바들바들 떨었거든요. 그 시체에다가 율법을 감음으로써 ‘율법과 시체 사이에 있는 계약이 종료됨, 다 끝났음’, 예수님에 대한 고마움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거예요. ‘나 이제 구원받았으니까 성경 안 본다.’ 이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한테 한번 스스로 테스트해 보세요. 이 말씀을 여러분이 감고 다니세요. 이제 던집니다. 고린도전서 16장 22절,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여러분들이 성령 받아서 사랑받았으면 신바람 이 박사, 완전히 신나요. 신나야 됩니다. 또 디모데전서 6장 7-8절,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이 말씀을 몸에 칭칭 감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아주 신바람 날 거예요. “주여, 때려죽여도 제가 이 말씀 못 지키는 것이 너무나 감사합니다.” 이걸 종합해서 말씀드리면 고린도전서 2장 2절, 강의 시간 같으면 다 같이 제창합시다, 하겠는데 참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채무 관계 다 해결했어요. 그러니까 당신은 어떤 청구서를 받았는지, 이 율법, 이 말씀을 몸에다가 칭칭 감고 그 톱날에 늘 베이면서, 피 나면서 그럴 때마다 그 긍휼하심, 불쌍히 여겨주심에 감사하고 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발 사람 그만 보게 하옵소서. 남 의식 그만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운명을 결정한 것은 나하고 똑 닮은 마귀가 하는 게 아니라, 십자가 지신 주님이 이미 우리 문제를 해결했는데 왜 우리는 이 길고 긴 인생을 살면서 한 시도 바들바들 떨지 않을 때가 없나이까. 왜 자꾸 우리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지. 이제는 그게 우리 모습이고, 그런 우리를 십자가에 함께 죽였다는 이 기쁜 소식으로 인하여 힘들 때마다 도리어 감사로 바뀌는 즐거움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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