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십자가를 껴 안기

아빠와 함께 2026. 5. 31. 18:16

십자가를 껴 안기 

2026년 5월 31일                      본문 말씀: 야고보서 3:1-5

(3: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선생이 되지 말라
(3: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에 굴레 씌우리라
(3:3)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3:4)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3:5)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선생되기’를 말리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자의에 의해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에게 있어 선생, 곧 스승이란 그 위치와 자리가 율법에 의해서 지정되어 있습니다. 선생은 제사장의 기능에서 파생된 자입니다. 거룩이 발산되는 현상의 한 단면이 선생의 기능입니다. 가르치는 일을 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고전 12:28) 거룩한 내용만이 내놓아야 될 자들입니다. 그래서 선생 된 자들의 가르치는 내용은 일반적인 상식과 지혜와는 전제가 다릅니다.

도대체 어떤 점에서 세상 지혜와 다르다는 겁니까? 세상 지혜는 인간들이 ‘살아 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율법 세계에서는 모든 인간은 ‘죽은 인간’입니다. 이 ‘죽음 있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 참으로 살아 있는 것과 참으로 죽어 있는 것을 레위인들과 제사장과 대제사장의 존재로 구획확합니다.

“그들은 그 장막과 그 모든 기구를 운반하며 거기서 봉사하며 장막 사면에 진을 칠지며  장막을 운반할 때에는 레위인이 그것을 걷고 장막을 세울 때에는 레위인이 그것을 세울 것이요 외인이 가까이 오면 죽일지며”(민 1:51-52) 이번에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구분이요 구획 결정책입니다.

“장막 앞 동편 곧 회막 앞 해 돋는 편에는 모세와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이 진을 치고 이스라엘 자손의 직무를 대신하여 성소의 직무를 지킬 것이며 외인이 가까이 하면 죽일지니라”(민 3:38) “너희는 고핫 족속의 지파를 레위인 중에서 끊어지게 말지니  그들이 지성물에 접근할 때에 그 생명을 보존하고 죽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너희는 이같이 하여 아론과 그 아들들이 들어가서 각 사람에게 그 할 일과 그 멜 것을 지휘할지니라 그들은 잠시라도 들어가서 성소를 보지 말 것은 죽을까 함이니라”(민 4:18-20)

언약궤는 3중으로 인간의 접근을 막습니다. 최종적으로 제사장이라고 할지라도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에는 들어설 수 없습니다. (레 16:17)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 차례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로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저주와 거룩을 모시는 유일한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죽음’과 ‘삶’이란 이미 지성소의 존재에서 결정났음을 아는 유일한 민족입니다.

구원이란 이처럼 공간 이동입니다. 죽음의 공간에서 생명의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인간이 이미 죽음과 저주의 공간에서 출생해 있는 상태입니다. 생명의 공간으로 이동될 수가 없습니다. 생명되시는 분이 이 죽음의 공간, 저주의 공간에 찾아오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시므로서 구원의 절차는 비로소 알려집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1-2) 이미 인간은 죽어 있는 존재입니다. 공간이 이점을 결정내린 겁니다. 이 공간 안에서 아무리 바르게 살아도 ‘살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죽은 것은 죽은 겁니다. 각자가 모두 죽은 겁니다. 인간의 삶이란 모두 무의미한 것이며 한낱 해프닝에 불과한 현상입니다. 이스라엘에 있어 제사장은 선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그들의 활동하는 공간은 언약궤가 있는 그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현상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공간에 이들 제사장이 있습니다.

‘사명에서 생명으로’옮겨지기 위해서는 먼저 전면적인 ‘죽음’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 ‘죽음’이 어떤 사고방식으로 드러날까요? 누가복음 17:11-19에 잘 나와 있습니다. “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궁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열명의 문둥병자들 중에 아홉명의 문둥병자들은 병고침을 받고서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즉 그들은 비록 문둥병이 들었지만 사는 것은 여전히 살아있다고 자부했습니다. 하지만 한명의 문둥병자는 병고침을 받고 난 뒤, 예수님 계신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구원의 병들고 안 들고가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자리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십자가 사건 현장에 있던 강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망의 자리에게 영생의 자리로 옮기는데서 있는 인간의 노력으로 불가능함을 아십니다. 그래서 제사들을 향하여 ‘사람 낚는 어부’가 된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강제 조치있습니다. 이들 제자들은 이 ‘사람 낚는 어부’의 기능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십자가 이후에 고기잡으로 갔습니다. 본래의 자기 자리로 돌아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의 고기 잡는 현장에 나타나셔서 어부의 기능이 끊어진 것이 아님을 알려주십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선생이 될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물으십니다.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요 21:15)

에베소서 2:4-6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 ‘큰사랑’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자가 바로 모든 인간의 지혜를 능가하는 복음의 내용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 소소한 모든 일이 우리를 죽이는 죽음의 일인 것을 이제는 감사하게 받아들여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6강-야고보서 3장 1-5절(십자가 껴안기) 260531-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야고보서 3장 1-5절입니다.

야고보서 3:1-5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몸도 굴레 씌우리라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몸을 어거하며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여기 ‘선생 된 자’가 등장하는데 이 선생 된 자는 야고보서 1장 1절에 나오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 열두 지파는 구약 때 이스라엘 민족이죠. 열두 지파가 신약 때 확 퍼져 있단 말이죠. 퍼져 있기 때문에 오늘 본문의 선생 된 자라는 것은, 구약의 이스라엘 지파에서 선생이라는 자가 어떤 일을 했는지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게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비록 지금은 흩어져 있긴 하지만, 한곳에 모여 있지는 않지만 동일하게 이스라엘에게 작용했던 그 원칙을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똑같이 적용하는 거예요. 적용하는 가운데서 선생 된 자가 있다는 것은, 과거에 있었던 것처럼 지금 오늘날도 있습니다.

이 선생 된 자가 어떻게 등장하느냐에 대해서 주보 요약에 보면, 제가 고린도전서 12장 28절을 가지고 소개해 놨습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라고 되어 있고 교사가 첫째, 둘째, 셋째에 해당되고 있습니다.

첫째, 둘째, 셋째라고 하는 것은 첫째의 기능이, 그 능력이 둘째로 연결되고 둘째의 기능이 셋째로 연결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도에게 연결되어 있던 예수님과 사도의 관계가 셋째가 되는 교사, 가르치는 선생 된 자에게도 동일하게 연결되어 있는 겁니다. 하나님과 선생 된 자가 연결되어 있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12장 28절에 의하면 구원된 자의 특징, 구원된 자라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엮이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하고 연결되는 사람, 그게 구원이라는 거예요. 교회 와서 신자 흉내 내는 게 교인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그 사람이 연결되어 있게 하기 위해서 가르치는 은사를 받은 자가 선생 된 자입니다.

이 선생 된 자가 뭔가를 가르치게 되면 그 결과가 뭐냐? 아름다운 교회, 좋은 교회, 그게 아니에요. 성도끼리 친하게 지내는 것, 그런 게 아닙니다. 가정이 화목하고 그런 게 아니에요. 하나님과 각자 연결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 그런 결과가 일어나는 것이 선생 된 자가 말씀을 전하는 효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선생 된 자’라고 한다면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구약에서 선생 된 자가 처음에 어떻게 출현했는가, 출몰했는가를 알면 되겠죠. 어떻게 출몰했는가? 율법에 의해서 출몰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교사 되는 것도 헌법에 먼저 있고, 국가법에 법률로서 ‘교사는 이렇다’고 규정이 되어 있는 것처럼 성경에도 율법이 먼저 나타나고, 그 율법의 기능을 할당받은 자 중에서 어떤 사람은 선생 된 자로 등장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더 물을 수 있죠. “율법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율법은 어떤 바탕 세계에서 나왔습니까?” 그런 것을 우리가 궁금해해야 합니다. 신명기 5장 3-5절에 보면 율법은 어디서 나왔는가? 불에서 나왔어요.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열조와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날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 여호와께서 산 위 불 가운데서 너희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매 그 때에 너희가 불을 두려워하여 산에 오르지 못하므로 내가 여호와와 너희 중간에 서서 여호와의 말씀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라고 하시면서 불 가운데서 율법이 나왔다는 것을 신명기 4장과 5장에서 계속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것을 알아요. 그래서 신명기 5장 23-25절에 보면, “산이 불에 타며 캄캄한 가운데서 나오는 그 소리를 너희가 듣고 너희 지파의 두령과 장로들이 내게 나아와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날 우리가 보았나이다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 큰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

장로들이 “불 속에서 나오는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지킵니까?” 도리어 모세한테 대들어요. 불 속에서 나온 말씀, 인간이 인간끼리 사귀면서 ‘우리 대충 이렇게 하자. 제직회 의결할 때는 3분의 2 다수결로 하자’ 이런 것은 인간들이 만든 거예요, 인간들이! 다수결 할 수 있고, 민주주의 할 수 있고, 3분의 2 의결대로 땅, 땅, 땅 치는 것도 다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율법은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게 아니에요. 불 속에서 나온 거예요. 불 속에서 나온 그 말씀을 못지키겠다고 그 당시 사람들이 모세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은, 우리가 그 현장에 가본다고 했을 때 역시 우리도 이 율법은 우리가 지킬 수 있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는 겁니다. 사람의 말 같으면 지키는데 이게 불 가운데서 나온 말씀이기 때문에 못 지키면 어디로 가느냐? 그냥 저주, 지옥 불에 가는 거죠.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야고보서 3장 6절에 보면 이상한 말씀이 나옵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지옥 불에서 나왔다는 거예요. 저주의 불 속에서 나오는 이 율법대로 살지 못할 때 그 사람을 어디로 이끄느냐 하면, 지옥으로 이끈다는 거예요.

불 속에서 뭐가 나왔는데 그 나온 것이 어디로 인도한다? 우리를 지옥 불로 인도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불 속에서 나온 율법의 놀라운 점은…, 보통 사람들이 말을 하잖아요. 말을 할 때 말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본질을 드러내요. 그 본질이 지옥 갈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인지 천국 갈 사람에게서 나오는 말인지, 즉 천국으로 말씀이 인도할 것인지 아니면 그 사람의 말을 통해서 그 사람이 지옥으로 골인해야 할지 그것을 율법이 안다는 겁니다.

그냥 인간들만 아는 말 대충 주고받고 하면서 이 세상에서 나름 잘 살았다고 우길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바로 율법이고, 그 율법의 특수성은 이스라엘 민족 열두 지파의 특수성으로 이미 앞선 세대 구약에 나타났어요. 그러니까 이방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을 싫어하는 이유를 알겠죠? 이방 민족들은 율법이 없어요. 인간끼리 ‘Yes!’ 하면 그냥 Pass에요. 뭐 다수결이 진리고요. “우리 마음 맞춰서 잘하자.” 하면 “오케이!” 하면 끝나는 문제에요.

그러나 율법은 그게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진짜 성령의 은사를 받은 선생이라면 어떤 것을 이야기해야 하느냐 하면, 사람이 아무리 공부하고 아무리 지혜를 짜내도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야기가 그 사람이 입에서 나와야 해요. 사람으로서 알 수 없는 것. 인간끼리 알 수 있는 것은 법륜 스님에게서나 듣고 이호선 교수에게서나 들으세요. 상담하는 사람 요새 많잖아요. 많대요! 그런 인간들한테나 들으란 말이죠.

율법에게 듣는다는 것은 그 율법이 이야기하는 것과 내가 평소에 말하는 것을 대비해 봐서 내 본질이 지금 어디로 미끄러져 가고 있는지, 어디로 끌려가고 있는지를 파악하게 만드는 것이고, 그래서 바로 은사를 받은 선생이 전하는 그 율법의 내용으로 판정이 가능하다는 그 말이에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선생 된 자의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자기 이야기를 끄집어내려거든 아예 선생을 하지 마라.’ 지금 그 이야기에요.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순서가 율법부터 나왔으니까, 율법에 제일 근접해서 율법을 제일 아는 자가 선생 된 자인데 뭐 남 가르쳐서 자기 사람 만들고, 지금 이것은 문제도 아니고 율법 바로 앞에서, 말씀 바로 앞에서 그 말씀이 ‘지금 천국 갈 거냐, 지옥 갈 거냐?’를 결정하는 그걸 제일 먼저 맞닥뜨리는 존재가 뭐냐? 선생 된 자잖아요.

겁나서 어디 하겠습니까? 겁나서 못 하죠. 할 수가 없어요. 하다가도 슬슬 거짓말 나온다, 뭐 사람을 좋게 한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의 말처럼 사람을 좋게 하는 말이 나온다고 하면 즉시, 후딱 그만둬야죠. ‘내가 미쳤지. 왜 이래?’ 그만둬야 해요. 이스라엘이 망했던 것은 가르치는 선생 레벨에서 이들이 여호와 앞에 서지 않고 세상의 유력한 사람 앞에서, 사람들 앞에 서서 발언했기 때문에 지도자가 무너지니까 줄줄이 2차 3차, 나라의 사다리가 다 무너진 거예요.

그러면 그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왜…, 지도자들이라는 것은 선생 된 자들, 제사장과 유사들 또는 그 당시의 장로들도 마찬가지죠. 왜 그 사람들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언약도 없는 엉뚱한 소리를 해서 나라가 망했느냐? 그 이유는 단 한 가지에요. 왕이나 제사장이나 백성들이 정신적으로 압박을 가했어요. “우리들이 듣기 좋은 소리 하면 십일조 할게, 헌금 할게.” 이렇게 나온 거예요. 거기에 선생들이 호응했고.

그러니까 이렇게 복잡한 말을 한마디로 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이 살고자 한다면 다 거짓말이다.’ 인간이 살고자 하는 마음가짐으로 나오는 말들은 전부 다 율법 앞에서 거짓말로 들통나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요한복음 10장에서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예수님 빼놓고 선생은 없어요, 예수님 빼놓고! 마태복음 23장에도 그런 말씀이 나와요. 8절,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랍비는 선생입니다. 여기서 그 하나가 누구냐? 바로 그리스도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선생님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0장에서 ‘나 말고 온 모든 선생들은 전부다 삯꾼’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이 아직도 이 시대에 유효해요. 예수님 빼놓고 다 삯꾼이에요. 그 이유가 뭐냐? 예수님은 양을 딱 보고 ‘내가 목숨 바치지 않으면 저 양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갈 수가 없’어요.

그것을 누가 아느냐? 예수님만 알아요. 예수님만 압니다. 다른 인간들은, 뭐 설교나 하고 썰만 풀면 저 사람이 천당 가는 줄로 알고 있어요. 자기는 말하고 설교한 덕분에 밥 먹고 살고요. 그런데 제가 어디서 강의할 때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요. 요한복음 10장 12-13절에 보면,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삯꾼들은 양을 돌보지 않고 자기 배만 불린다는 그 말이거든요. 그리고 14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여기서 무엇이 기이하냐?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예수님이 양을 아는 거야 당연하죠. 문제는 ‘양이 예수님을 안다’는 거예요. 뭘 매개로 아느냐 하면, ‘나는 사망에 있어서 생명을 얻을 수 없는데 저 예수님만이 목숨을 바쳤기 때문에 목숨을 바친 그것으로 인하여 죽은 양이 영생 얻은 양이 되었다’라는 것을 양이 알고 있어요, 양이! 그것을 아는 양이 있다는 겁니다, 양이!

이게 여러분, 신기하지 않습니까? 양이 뭘 아느냐? ‘저 사람은 삯꾼이고, 저분은 진짜 목숨을 바친 예수님’이라는 것을 구분할 줄 아는 양이 생겨난다는 거예요. 요한복음 10장 15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그래 놓고 16절에 보면 지금 이 말을 듣는 양 말고, 우리에 있지 않은 다른 양들이 또 있다는 거예요.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그러니까 이 문장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죽어서 이 땅을 떠나고 난 뒤에 죽은 예수님의 음성을 그 음성으로 들을 줄 아는, 주님과 성령으로 연결된 양이 생겨난다는 거예요.

뭐 하나하나 신기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기존 교회 모습과 완전히 딴판이에요, 이 성경 내용이. 그 이유가 구약에 나옵니다. 민수기에,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서 같은 이스라엘 장소를 특수한 장소와 일반적인 장소, 두 장소로 나눴어요. 특수한 장소는 뭐냐? 언약궤가 있고, 그 언약궤를 중심으로 한 좁아터진, 얼마 안 되는 구역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과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을 나눴습니다.

민수기 1장, 2장, 3장, 4장 계속 나오는데 민수기 1장 51절에 보면, 레위인이 나옵니다. “장막을 운반할 때에는 레위인이 그것을 걷고 장막을 세울때에는 레위인이 그것을 세울 것이요 외인이 가까이 오면 죽일찌며.” 이게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안에 하나님의 저주를 운반하는 민족이 이스라엘이에요. 거기에는 언약궤가 있고 그 언약궤에 들어오면 누구든 죽어요.

누구든 죽는데 레위인 자체가 ‘이스라엘 백성들 누구든 가까이 접근하면 죽는다’라는 철책으로, 울타리로 언약궤를 두고 둘러치는 그 지파가 레위 지파에요.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 언약궤가 있는 곳이 성막인데 성막은 날마다 죽음을 발생시키는 곳이에요. 양, 소, 염소 그걸 집어넣어서 죽음을 발생시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 앞에 ‘산다’의 의미가 뭐냐? 그 죽음을 껴안고 살면 살고, 그냥 나 혼자 살면 죽고, 이 사실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길 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요.

“당신은 뭘 껴안고 삽니까?”
“나의 행복을 껴안고 삽니다.”
“지옥!”
“당신은 뭘 껴안고 삽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을 껴안고 삽니다.”
“천국!”

이것이 이미 구약 성경 이스라엘에 나온다 이 말이죠. 나옵니다. 그런데 이 말을 알아듣는, 그 말이 옳다고, ‘그렇다. 맞다’라고 알아듣는 양이 있다는 것이 더욱 신기하지 않습니까? 이게 인간의 능력이겠어요? 인간의 보통 능력은요, 살기 위해서 사는 거예요. 자기 삶을 껴안고 살아가는 게 인간입니다.

여러분, 자녀에게 뭐라고 교육시킵니까? ‘어쨌든 간에 밥 먹고 살아야 한다.’ 그거 가르치잖아요. “죽기 살기로 살아야 해. 사는 게 남는 거야. 내가 한평생 살아보니 그거 알겠더라. 돈 없이는 못 산다.” 그것을 가르치잖아요. 자식에게 정신적 압박을 가하잖아요. 그게 보통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민수기는 그게 아니에요. ‘가까이하면 죽는다’는 것을 모시는 거예요, 가까이하면 죽는다는 것을. 여호와의 종교, 여호와의 종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옥 불, 저주의 불, 진노의 불을 가운데 두고 ‘이 저주의 불이 있는 한 일단 너희들은 다 죽었다.’ 일단 죽었다고 치고, 일단 이미 죽었어요. 왜? 가까이 못가니까요.

“죽었는데, 죽어야 되는데 너희는 지금 레위인 바깥에서 농사짓고 살잖아. 이유가 뭔지 알아?” 일반인들은 오지 못하게 하고 레위 지파는 뭘 하느냐 하면, 제사하는 일을 돕는 지파에요. 그러면 레위 지파의 동심원보다 더 언약궤에 가까이 있는 게 누구냐? 지파는 역시 레위 지파인데 그중에서 누구냐? 제사장입니다.

따라서 레위 지파라고 할지라도 제사장이 활동하는 구역에 넘어오면 죽습니다. 죽어요. 철조망 안에 그보다 더 고압 철조망을 따로 쳐둔 거예요. 그게 바로 민수기 4장에 나와요. 18-20에, “너희는 고핫 족속의 지파를 레위인 중에서 끊어지게 말찌니 그들이 지성물에 접근할 때에 그 생명을 보존하고 죽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너희는 이같이 하여 아론과 그 아들들이 들어가서…” 제사장입니다. “…각 사람에게 그 할 일과 그 멜 것을 지휘할찌니라 그들은 잠시라도 들어가서 성소를 보지 말 것은 죽을까 함이니라.”

제사장이라고 할지라도 지성소에 들어가면 또 죽어요. 민수기 3장 10절에 보면, “너는 아론과 그 아들들을 세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외인이 가까이하면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 일반 지파는 레위 지파가 차단해서 못 오게 하고, 레위 지파는 제사장이 차단해서 제사장만 하게 하고, 언약궤 자체가 있는 지성소에는 제사장이라도 들어가면 죽어요. 그곳에는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밖에 못 들어갑니다.

자, 왜 그렇게 하느냐? 신약 성경에 구원받았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하잖아요? 흔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하면 아주 좋다고들 하는데 어떻게 옮겨지느냐? 내가 살고자 하는 자리에서 나를 이미 죽은 걸로 간주하는 그 자리, 장소 또는 장(場), 그 장으로 옮길 때 비로소 구원을 받아요.

그 언약궤를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잖아요? 지금 이 땅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없는 존재로, 이 땅에 없는 존재로 만들었어요. “이 세상에 예수님이 있어, 없어? 아들의 내용이 있어, 없어?” “없어.” 그렇다면 이 세상을 사랑할 이유가 없죠. 그러면 성도한테 묻습니다.

“이 세상에 네 땅이 있어, 없어?” “없어.” “없으면 네 땅은 어디 있는데?” “천국에 있어.” 이러면 이제 천국 백성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없는 땅에 나도 없고, 예수님이 있는 곳에 나도 있는 거예요. 그게 구원인데, 인간들이 아는 의미의 장소에서 인간들이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의미의 장소로 옮겨지는 거예요. 이게 구원입니다.

‘구원이 뭐냐?’라고 묻거든 모르겠다고 하지 마시고요, 예수님이 떠난 장소에서 떠나서 예수님이 있는 장소로 옮겨서 같이 합류하는 게 구원입니다. 예수에 의해서 죽고 예수에 의해서 사는 거예요. 그 장소가 바로 구원의 장소다, 이 말이죠. 그 이야기를 스승을 통해서, 예수님의 은사를 받은 스승을 통해서 전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그 자리로 가는 방법, 내 자리에서 주님 자리로 가는 방법은 없습니다. 도저히 갈 수가 없어요. 무식해도 갈 수 없고 유식해도 갈 수 없고, 나쁘게 살아도 갈 수 없고 착하게 살아도 갈 수 없고, 게으르게 살아도 갈 수 없고 부지런히 살아도 갈 수 없어요.

그래서 잠시 제가 죽은 데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절차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일단 우리는 죽었습니다. 죽은 목숨이고 죽은 목숨인 이유가 뭐냐? 저주받았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께서 율법을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네가 있는 장소가 저주의 장소다. 저주의 장(場), 저주의 공간이다.” 이렇게 규정해요. 그 저주의 공간에서 인간은 노력해도 못 빠져나와요.

그 저주의 공간에 누가 오느냐? 예수님의 축복의 공간, 생명에 계시는 주님께서 이 저주의 공간에 오십니다. 오셔서 예수님 중심의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요. 장소를 만듭니다. 그러면 그게 십자가 그늘 밑입니다. “십자가 그늘 밑에~” 제가 맨날 대중가요만 하는 것이 아니에요. 십자가 그늘 밑에 와요.

그 십자가 그늘 밑에 누가 있느냐 하면, 살인강도가 거기 있습니다. 살인강도에게 주님께서 “네가 오늘 밤 나와 함께…”, 함께! 함께!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공동의 자리로 이동하는 겁니다. 이 자리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는 철저하게 말씀으로 뭐냐? 저주의 공간에서 우리가 한평생 살고 있어요, 저주의 공간에서.

똑똑해도 안 되고 무식해도 안 되고, 부지런해도 안 되고 착해도 안 되고, 게을러도 안 되고 직장 있어도 안 되고 백수라도 안 되고. 주님께서는 이 열두 제자에게 은사를 내리기 전에 자신의 능력을 가지고 일부러 일을 시키면서 베드로와 열두 제자에게 이렇게 합니다.

“이제부터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한다”(마 4:19). 어부입니다. 여러분, 어부가 하는 일이 낚는 거예요. 강제 조치로 낚싯대로 딱 집어서 “너 여기 있으면 안 돼. 저쪽으로 가야 돼.” 하면서 데려가는 그 기능이 낚시 기능이에요. 제자들 자기가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사람들 좀 건졌다고, 자기는 구원받는다고 착각했는데 예수님 십자가 지고 난 뒤에 예수님이 부활하든지 말든지 관심도 없어요.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제자들은 다시 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고기 잡으러 갔을 때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요. 6절에 보면,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처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찾아갔을 때 그때를 다시 한번 시행해요. “베드로야, 그물 던져라.”

왜 그렇게 하느냐? 베드로에게 뭘 기억나게 하느냐 하면,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한다”라는 그 말씀을 다시 되새기는 거죠. 그것을 들춥니다. ‘네가 지키나 안 지키나 그 말씀은 내 안에서 유효하다’ 이 말이죠. 반드시 그 말씀대로 되게 한다는 겁니다. 그래 놓고 요한복음 21장 그다음에 나오는 말씀이 “내 양을 먹이라.” 그래서 선생이 나와요. 목자가 나옵니다.

그 목자가 나올 때 선생이 출현하는 바탕은, 율법이 온전히 이루어진 바탕 세계에서 나옵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럴 때 베드로가 “주께서 나를 사랑하는지는 주께서 아시나이다.” 주님은 세 번씩이나 묻습니다. 그럴 때마다 “내 양을 먹이라.”

율법이 완성되면 등장하는 게 뭐냐 하면, 사랑이에요. 사랑. “내가 인간도 아닌 너를 사랑으로 강제로 천국으로 이끌듯이 너도 양을 대할 때 내가 준 그 사랑, 네 사랑 말고, 네 사랑 말고 내 죽음이 포함된 그 사랑, 죽으면서까지 이룬 그 사랑을 네가 양들에게 증거하라.” 이게 바로 베드로와 요한과 사도들의 모습이에요. 그리고 그 사랑은 사도 바울에게도 이어지죠.

이 장소 이동 문제에 대해서 이미 누가복음 17장에 그 예시가 나와 있어요. 문둥병자 10명이 예수님을 보고 뭐라고 하느냐? ‘어? 예수다. 남은 못 고치지만 저분은 못 고치는 병이 없어. 기회가 왔다. 우리 다 같이 부르짖자.’ 해서 “예수여,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고쳐주세요.”(13) 이렇게 아주 소리 높여 부르짖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래?’ 불쌍히 여겨서 그들의 병을 깨끗이 고쳐줬어요. 고쳐줬는데 이 사람들이 병 고치고 난 뒤에 지옥 갔어요. 지금 그들은 자기 병만 나으면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병든 자나 안 든 자나 저주받은 자, 인생을 어떻게 살아도, 삼성 그룹 현대 그룹 어떤 재벌이 되든,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이 되든 그 공간은 예수님이 없는 곳이에요. 영생이 없는 곳이에요. 그곳에서 국회의원하고, 그곳에서 단체장 하고 있단 말이죠. 예수가 없는 자리, 그게 저주의 장이에요.

문둥병 걸렸는데 예수님께 병 고침 받고 도로 어디로 갔습니까? 자신의 장으로 갔어요. 자신의 삶의 장(場)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단 한 사람, 단 한 사람은 예수님 옆으로 왔어요. 그때 예수님이 그 취지를 알고 이렇게 묻습니다. 누가복음 17장 17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아홉은 어디 있지요?’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는가? 뻔히 아셔요. 병 나으면 뭐 괜찮은 인간, 복 받은 인간이라고 여기는 그 인간들이 지금 내가 없는 곳, 자기가 옛날에 그리워하던 장소, 살던 그 장소로 도로 갔다는 사실을 예수님이 알면서 물어요. “아홉은 어디 갔느냐?” 쉽게 말해서 ‘너는 이방인인데 왜 나에게 왔느냐?’ 그 말입니다.

예수님을 알아보는 양이 생겼다는 것이 참 기이한 일이에요. 어떤 사람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을 때 그 사람 걱정합니다. 그 사람을 걱정하지 말고 네 걱정 하세요. 네가 지금 죽음 자리에 있어요, 우리가! 우리가 꼭 숨이 끊어져야 죽습니까? 주님께서는요, 영생을 줄 때 공짜로 주지 않아요. 계약에 의해서만 줘요, 계약에 의해서만. 주님께서는 죽을 인간하고는 계약을 안 해요. 살아있는 사람과만 계약합니다.

양 집사님 장례식장에서 처음 알았어요. 공원묘지 계약을 본인이 안 해요. 자녀분이 계약했어요. 죽었다가 부활하신 분과 아버지가 계약해요. 따라서 그 계약에 누구도 우리 인간은 배제됩니다. ‘나 구원해 주세요’ 한다고 구원 안 됩니다. 우리는 계약 자격 자체가 없어요. 죽었다가 살아난 예수님이 아버지와의 계약이 체결될 때 그 체결된 통지서, 계약서 가지고 우리한테 성령으로 와요.

신학자들 가운데 신학 좀 한다고 사도 바울 욕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요. ‘자기도 인간인데 뭘 아느냐?’ 이런 식이에요. 그러나 사도행전 19장에 분명히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귀신이 보증해 줘요.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저는 사도행전 19장 15절의 이 대목을 보면서 감전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마귀가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마귀니까 예수님을 아는 데 거기에 인간이 끼어들었다는 것,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 누가요? 귀신이, 영적 존재가 알아요. 그 영적 존재가 알아 모시는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고린도전서 2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2장 4절에,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그다음에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인간의 신학에 있지 않고, 조직 신학이나 성경 신학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신다.

이게 제가 아까 이야기한, 스승 된 자가 복음을 전하면 그 결과가 뭐냐? “아이고, 우리 목사님 설교 잘합니다. 아이고, 우리 목사님 참 능력 있습니다.” 이게 아니라, 주님하고 맞상대, 주님하고 연결됐다는 거예요. 주님하고 영적으로. 다시 말해서 주님의 십자가를 껴안고 사는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를 껴안고.

제가 지난 수요일 설교 때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마태복음 16장 26절에 보면,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해서 ‘복음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라고 되어 있거든요. 그러면, 진짜 그 복음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면 그때부터 그 사람은 온 천하 및 자기가 가진 것들이 자기로부터 뜯겨 나가도 복음을 아는 기쁨은 한결같이, 도리어 더 기뻐하게 될 것이라고 했어요.

세상도 챙기고 복음도 챙기고, 그게 아니고. 그렇게 되면 복음의 빛이 빛나지 않아요. 복음의 가치가 그렇게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아요. 진짜 복음의 가치가 대단하게 느껴진다면 소위 그동안 내가 살기 위해 의존했던 모든 것이 다 뜯겨 나가는 경우가 있더라도 나의 기쁨은 변함이 없어야 해요. 인간에게 있어서 그 모든 인생의 문제점이 뭐냐? 고민과 걱정 염려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 도대체 왜 생기는가? 귀한 것을 귀한 것으로의 그 값어치를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거예요.

그냥 쉽게 갑시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라는 그 말씀은 내가 지키는 게 아니라고 했잖아요? 저주받을 인간이 어떻게 지킵니까? 지옥 가야 할 인간이 무슨 말씀을 지킨 적이 있어요? 없어요. 그 말씀을 주님께서 사랑의 결과로 우리에게 다 주게 되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다는 그 말씀대로 일하시는 분에게 모든 것을 맡기세요.

그냥 맡기면 그다음부터 나오는 결과가 뭐냐?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형제 우애가 그냥 한꺼번에 터져 나와요. 왜? 소위 인간이 걱정하는 것이 무의미하기 때문에 그래요. 의미 없어요. 우리 인간이 살았다고 하는 것은 산 게 아니에요. 살았다는 것은 하나의 해프닝이라니까요? 결국 죽잖아요. 구약의 다니엘과 세 친구는요, 그 특징이 뭐냐? 살아있으면서 산 채로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다니엘 3장, 뭐 굳이 이야기 안 해도 여러분 아시죠? 다니엘 세 친구는 불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불 속으로 들어갔는데 그것이 뭐냐? 사람들이 말하는 ‘불에 들어가면 죽는다’라는 그 무대, 그 공간에 산채로 들어갔어요, 산채로. 약간 뜨거울 거예요. 아마 뜨거웠을 거예요. 산채로 들어갔는데 들어가 보니까 거기서 생명의 주를 만났습니다.

3명이 들어갔는데 네 번째 분을 만났어요. 하나님의 아들을 만났습니다. 어디에서? 죽음 속에서. 십자가 사건이 바로 그거잖아요. 강도가 십자가 사건을 알게 된 것은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졌기 때문에 알았잖아요. 그러니까 말씀은, 내가 살아 살아 있다고 여기는 그 공간을 인정하지 않고 나로 하여금,

“오늘도 밥 먹고 살았느냐?”
“예!”
“그것은 실은 죽은 공간이야.”

몸이 아파서 죽는 죽임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살아서 하는 모든 것이 죽은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이에요. 오늘 양 집사님께서 떡을 준비해 주셨는데 점심 식사 때 떡을 잡술 때 ‘죽은 인간 떡 먹고 죽어라’ 하고 떡을 먹으면 되는 거예요. 이 땅에 살아가면서 하는 모든 일이, 장사하면서 손님을 접대하는 일, 교사로서 일하는 것, 공직이든 뭐든 한순간도 나를 죽이지 않는 일은 없어요. 다 나를 죽이는 일들이에요 그게!

그게 다니엘 세 친구잖아요. 다니엘도 마찬가지고요. 다니엘 6장에서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갔습니다. 소위 살았다는 인간들은 본인이 누군지를 몰라요. 본인이 죽은 줄을 모른다고요. 살았다는 인간이, 왕이 묻습니다. 다리오 왕이 “야, 다니엘! 거기 살아 있느냐?”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 생각, 우리 의미를 통용하는 이 인간 세계에서 너는 죽어야 하는데 왜 너는 살아 있어?’ 이 뜻이에요.

“어떻게 해서 너는 살아 있어?” 하니까 다니엘 하는 말이 “천사가 사자의 입을 봉했습니다.”하고 천사의 존재를 언급해 버려요. “다니엘이 왕에게 고하되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단 6:21-22).

이게 기이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으로 교육을 받아서 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것이 천사 빠지고, 예수님 빠지고, 성령 빠지고, 아버지 빠지고, 이렇게 다 빼고 그 나머지 이야기를 가지고 우리는 그동안 ‘살았다’ 하면서 살아온 거예요, 지금껏! 거기서 ‘무슨 걱정이나 염려, 고민이 있고 상담 거리가 있습니다’ 하는 되지도 않는 소소한 이야기, 시시한 이야기, 해결해도 아무 의미 없고 해결 안 해도 의미 없는 거기에 놀아나면서 ‘나는 살아야 해. 어떻게든 살아남는 게 남는 거야’ 이런 식으로 억지 부리면서 살아온 거예요.

다니엘 세 친구의 시원함, 다니엘의 시원함, 그리고 사도 바울의 시원함이 우리한테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입만 열면 전부 다 거짓말만 하고 있었던 거예요. 성경을 이야기해도 다 거짓말인 거예요. 목사가 설교해도 그 목사 자체가 다 거짓말쟁이들이에요. 선생님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런데 왜 사도 바울은 설교하고 복음을 전하느냐? ‘지가 뭔데? 자기도 죄인이고 죄인의 괴수면서 왜 복음을 전하느냐?’ 이게 말씀의 편재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씀의 편재성. 말씀의 편재성이 뭐냐? 출애굽기 19장에 4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여기 ‘독수리 날개’가 나오거든요. 독수리 날개의 평수가 몇 평쯤 됩니까? 거기에 남자만 해도 60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독수리 날개에 다 업혀서 애굽에서 지금 빠져나왔다는 거예요.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전부 다 미친 사람 아닙니까? 이게 말이 돼요? 독수리 날개가 지금 몇 평, 한 평도 안 돼요. 어떻게 그걸 다 업어서 가느냐?

그걸 편재성이라고 해요. 말씀이 없는 곳이 없게 만들었어요. 자기 백성 건지기 위한 독수리 날개의 용도로 말씀이 개입되면 이 세상 전체를 독수리 날개로 다 변환되게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마가복음 14장 9절에도 비슷한 말씀 나옵니다. 이게 무슨 대목이냐? 한 여자가 향수를 가지고 예수님의 발 앞에 부으니까 어떤 사람들이 화를 냈어요.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막 14:4-5). 한두 명이 아니었던 모양이지요. 요한복음 12장에는 가룟 유다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어떤 사람들’이라고 했어요.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면서 “저 비싼,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그 향수를 어떻게 일시에 한꺼번에 땅에 쏟아서 허비하느냐?” 이렇게 하니까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막 14:7-9).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인간의 행동은 거짓말밖에 없어요. 거짓말밖에 없는 이 거짓말이 예수님이라는 독수리 날개로 전환되니까 독수리 날개로서 사랑이 완성된 그 말씀 안에서 그 죄인이 하는 행위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사람을 구원하고 능력으로 살리는 하나님의 그 일의 용도로 사용이 되는 거예요, 사용이! 그러니까 쓰임 받는 거예요, 쓰임 받는 겁니다.

사도가 지금 나 똑똑하다, 그거 자랑하는 게 아니에요. 마리아가 ‘내가 향수 붓는 거 자랑질한다. 나는 이것 때문에 구원받았다.’ 그 소리 하는 게 아니고, 주님의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그 능력, 그 능력이 그 사람의 행한 것을 채용해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확 뿌려버리는 거예요. 그게 편재성이에요, 편재성.

끝으로 성경의 한 대목을 설명하면서 마치겠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들과 관련돼 있는 건데요, 사도행전 28장 25절에 사도 바울이 이제 로마로 잡혀가서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 설교한 내용대로 하면 사도 바울의 개인적인 견해가 아니고, 성령의 능력으로, 사람의 지혜가 아닌, 인간들의 철학과 과학으로 ‘안다, 안다’ 하는 그걸 능가하는, 도저히 인간이라면, 보편적인 인간이라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을 전하는 이유가, 주님의 양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 그 현장에 주님의 양들이 있을 수 있어요 - 지 잘 났다 하지 않고 쓰임 받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전합니다.

전할 때에 사도행전 28장 23절에,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24절에,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이제 25절, 잘 들어보세요.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이 대목입니다.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사도가 복음을 전했어요. 사도가요 사람들을 곱게 설득하려고 했을 것 같으면요, 안 믿는 사람들 없었을 거예요. 왜? 사도는 성령을 통해서 이야기했거든요. 성령을 통해서 일했는데 “그 이야기 앞으로는 나에게 하지 마세요. 나는 거절합니다. 이상한 소리 하고 있네.” 그렇게 간 사람이 있고, 간 그 사람은 너무 당연한 거예요. 학교에서 교육받은 것, 상식적인 것을 능가하니까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건 당연한데, 놀라운 사실은 놀라운 사실은 그걸 믿는 사람이 생겼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 이야기를 왜 믿어요? 자기가 죽었다는 사실을 왜 믿어요? 멀쩡히 살아 있으면서. 거울 보세요. 살아 있잖아요. 팔 움직이면 움직이잖아요. 아직 죽을 때까지는 살아 있잖아요. 그런데 살아 있을 동안도 죽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이게 웬 말입니까? 이 구절 보고 마치려고 했는데 갑자기 생각이 나서 한 구절 더 추가 시키겠습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이미 허물과 죄로 죽었다 이 말이죠. 공중 권세 잡은 자에 의해서, 이미 불순종 아들 가운데 역사한 영에 의해서 너희는 이미 죽었다는 거예요. 그렇게 죽었는데 4-5절에 보면,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큰 사랑입니다.

큰 사랑으로,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살리셨고’, 미래 완료, ‘끝냈고!’ 더 추가할 것이 없어요. 보탤 것도 없어요. 이미 죽은 나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고, 이미 하늘에 앉히셨다. “너는 이제 살았어. 그러니까 너는 이제 죽어야 돼.” 그 말이에요.

‘하는 모든 것이 너로 하여금 죽게 만드는 행위라는 것을 네가 기쁘게 받아줘야 해. 왜? 이미 살았기 때문에.’ 그 이야기라는 말이지요. 다시 사도행전에 28장 계속 보면, 서로 안 맞아서 흩어졌죠. 그런데 왜 우리는 안 흩어지지요? 그것이 참 이상하다니까요.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복음이! ‘이 복음 믿으면 하나님께서 소원 성취해 준다.’ 그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지금!

‘우리는 살고 싶은데 더 편하게 살려면 하나님께 어떤 복을 받아야 합니까?’ 지금 그 이야기하는 게 아니잖아요. ‘죽었다는 사실이 기쁘냐?’ 지금 그 이야기하잖아요. “뭘 해도 죽습니다. 기쁘죠? 그렇죠? 감사하죠?” 지금 그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행 28:26-28).

구약 성경 이사야 6장의 말씀대로 “‘나는 안 믿겠다’ 하는 사람은 말씀대로 지옥이나 가!” 하면서 가는 거예요. 지옥 갈 사람은 보냅시다. 붙들지 말고, 자꾸 말씀을 변개하지 말고. “이 땅에서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삽니까?” 좀 이런 이야기, 이런 소원 이야기하지 말고, 쓸데없는, 무의미한, 어떤 의미도 없는 고민거리 끄집어내지 말고.

이래 사나 저래 사나 산다는 자체가 다 해프닝이에요. 애 낳고 키우고, 그거 다 해프닝입니다. 소용없는 거예요. 주께서 일체 그걸 안 봅니다. 의미 없기 때문에. 의미 있는 것은, 주께서 없는 데서 사랑을 만들기 위해서 이 양 같지도 않은 양을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죽었다는 것, 그 이야기.

그래서 사도행전 28장 31절 마지막에 보면,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이게 사도행전 끝입니다. 10년 듣고 20년 들어도 여전히 ‘어떻게 하면 복 받고 삽니다’ 하는 그런 이야기는 끝까지, 끝까지, ‘살아 있는 나를 어떻게 하면 더 건강하게 잘 살게 만듭니다’ 하는 이야기는 끝까지 이 성경에 나오지를 않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십자가 강도처럼 되지 못해서 문제였습니다. 기대할 것도 없고 기대할 필요도 없는데, 우리는 아직까지 몸이 건강하고 돈 있고 살 만하니까 그저 세상 걱정이나 하면서 부질없는 세월을 보내고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 자신을 십자가 앞에서, 그 그늘 밑에서 어떤 모습이고, 어떻게 우리가 영생을 얻었는지, 이제는 예수님께 모든 걸 맡기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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