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피 묻은 안감

아빠와 함께 2026. 5. 10. 17:03

피 묻은 안감

2026년 5월 10일                       본문 말씀: 야고보서 2:8

(2:8)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율법이 세상에 등장한 것은 이미 인간의 몸이 망가진 이후입니다. 선악과 과실을 따먹을 때부터 인간의 몸은 하나님께서 안 받아주시는 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자아의 눈이 밝아진 인간들은 넙죽 그 몸을 자신의 관리 하에 가져갑니다. 이제부터 폼나고 멋있고 남들에게나 하나님에게 보란 듯이 정상적인 몸이라고 자부하고 싶어했습니다.

시내산을 통해서 주어진 율법에 의할 것같으면 이 몸은 썩어질 몸입니다. 지옥가야 될 몸이요 영원토록 저주받을 몸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입장에서는 떠안아진 자신의 몸을 달리 처리할 길이 없습니다. 열심히 노동해서 그 열매로 자신의 몸을 먹이고 입히고 잠재우고 하면서 지탱하려고 애를 씁니다.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는, 인간의 몸이 율법을 온전히 지켜낼 수 없는 몸인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이웃 사랑’이 제대로 되지를 못합니다. 그 예가 누가복음 10:30-32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자신이 원하는 이웃을 따로 선정하고 있습니다. 내 몸의 건전함과 우수함을 증명해줄 이웃을 본인들이 골라서 정하겠다는 겁니다. 이는 여전히 자기 몸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해 내어서 그런 몸을 통제하고 있는 ‘자아’의 가치를 인정받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은 이웃을 정의내리면서 강도만난 자를 피해하는 사례부터 먼저 거론하시는 걸까요? 그것은 이미 인간의 몸은 율법을 완수할 수 있는 몸이 아님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몸을 ‘내 것’이라고 우길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내가 관리하는 내 몸은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몸이 아님을 인정해야 하는데 주력해야 합니다.

즉 자신의 몸을 가지고 ‘나는 어디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는가’를 파악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봐야 합니다. 인간의 몸은 여자의 몸과 남자의 몸으로 구분되어져 있습니다. 창세기 3:15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서 ‘남자’는 나오지 않습니다. 남자는 그 뒷 구절에 나옵니다. 평생 저주받은 환경 속에서 이마에 땀이나 흘리다가 죽어 흙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자는요?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창 3:20) 즉 여인의 몸에 ‘누구를 살려주는 산 자’가 출생한다는 겁니다.

그 출생된 자에 의해서 따로 설정된 노선이 생겨난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노선이 두 개입니다. 두 계열이 형성됩니다. 우선 구원되는 계열부터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마 23:35)

And so upon you will come all the righteous blood that has been shed on earth, from the blood of righteous Abel to the blood of Zechariah son of Berekiah, whom you murdered between the temple and the altar.

그래서 죄 없는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에 흘린 의로운 사람들의 모든 피에 대한 형벌이 너희에게 내릴 것이다.

아벨과 사가랴 선지자와 그리고 예수님은 모두 ‘피 흘리심’으로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셨습니다. 피를 흘린다는 것은 인간 내부가 겉으로 노출된 결과입니다.인간 내부는 대대로 죄를 전달하고 있었는데 그 죄가 밖으로 나오게 된다는 겁니다. 이 죄는 개인적인 죄가 아니라 아담 후손의 공통적인 피로서 전반적으로 흘려내려가는 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피에 참여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죽으시면서 하나님으로부터‘버림받았음’을 선언해 버립니다. 반면에 지옥 가는 계열이 따로 있습니다.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은 자기 속의 죄성을 겉으로 포장해버리는 식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래놓고서는 자아가 멀쩡하다고 자부라는 자들입니다.

성경에서는 ‘산자의 어미’계열을 통해서 창세기 3장의 범죄성을 계속 작용하고 계심을 보입니다. 레위기 12:2-5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여인이 잉태하여 남자를 낳으면 그는 칠 일 동안 부정하리니 곧 경도할 때와 같이 부정할 것이며 제팔일에는 그 아이의 양피를 벨 것이요

그 여인은 오히려 삼십삼 일을 지나야 산혈이 깨끗하리니 정결케 되는 기한이 차기 전에는 성물을 만지지도 말며 성소에 들어가지도 말 것이며 여자를 낳으면 그는 이 칠 일 동안 부정하리니 경도할 때와 같을 것이며 산혈이 깨끗하게 됨은 육십륙 일을 지나야 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식을 낳는 기능은 여인 담당입니다. 이 여인의 육신을 통해서 인간은 기본적으로 죄를 실어나르고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죄의 죄됨을 위해 인간의 육체를 활용하고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디모데전서 2:15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님께서는 피흘리시는 몸으로 오셨습니다. 반면에 세상의 모든 몸들은 다음과 같은 구호에 묶여 삽니다. “내 노동으로 나는 산다!” 하지만 성경적으로 봐서는 “내 노동으로 나를 지옥에 떨어지게 한다”가 맞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몸에 의해서 새로운 이웃이 등장됨을 그들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0:35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비유를 마무리하십니다.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부비가 더 든다는 말은 미래까지 완전 보장해 주시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 입장에서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웃이 되시고 친구가 되시면 어떤 미래가 들이닥쳐도 이웃에 대한 비용은 전부 지불하시겠다는 겁니다. 달리 말씀드려서, “내가 갈 수 없는 곳에 이미 내가 거기에 가 있다”가 됩니다. 이 모든 것이 기존의 아담 노선에게 이탈시켜 새로운 그리스도 노선으로 바뀌게 하신 결과입니다.

이 결과가 곧 열매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는 율법을 온전히 이룬 성도는 예수님의 부활의 열매로서 나타난 자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피흘리시는 그 현장을 떠나지 않는 주님의 이웃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3강-야고보서 2장 8절(피 묻은 안감) 260510-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야고보서 2장 8절입니다.

야고보서 2:8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야고보서 2장의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 당시에 율법사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왔을 때 그 답변을 주께서 하신 겁니다. 누가복음 10장 25절에,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을 때의 이 질문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한결같이 궁금하기 짝이 없는 질문을 이 율법사가 대신 해준 겁니다.

“What is written in the Law?” he replied. “How do you read it?”

He answered, “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strength and with all your mind’; and,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You have answered correctly,” Jesus replied. “Do this and you will live.”

 

2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율법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느냐’라는 말은, 너와 나 사이에 하나님의 율법을 경유해서 오라는 거예요.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잘 보이고, 예뻐 보이고, 그런 것은 다 소용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율법을 줬겠어요? 인간 대 인간으로 좋은 관계 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받아주지 않습니다.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을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 율법이 살아있는 것, 말씀이 살아있는 것만 하나님께서 받습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율법을 주신 취지에요. “네가 살아 있느냐, 네 안에 말씀이 살아 있느냐? 딱 이야기해. 분명히 이야기해.”

27절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율법사가 ‘이렇게 율법에 되어 있습니다’라고 하니까 28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라고 하니까 그 사람이 추가적으로 질문을 합니다.

29절에,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고 질문을 했어요. 여기서 그 율법사가 엄청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라고 되어 있어요. 네 이웃을 ‘너’처럼 사랑하라는 뜻이 아니에요. 기독교 수 천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이걸 백 번 봐도 백 번 다 곡해하고 있습니다. ‘나’라는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적이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몸’을 만들었지 ‘나’를 안 만들었어요.

‘나’라는 것은 이미 몸이 망가지고, 그 망가진 몸을 망가지지 않았다고 여기고, 선악과를 아는 내가 내 몸을 다시 인수인계하면서 생긴 것이 바로 내 지배하에 있는 내 몸이 된 거예요. 이 몸을 하나님이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통제와 지배를 받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몸이 되는 조건은 하나님이 이미 정했어요.

선악을 아는 과실을 따 먹지 말라는 조건을 유지해야 그 몸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몸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과실을 따 먹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하나님께서 거부하는 몸이 되었어요. 쓰레기 같은 몸, 하나님께서 거부하는 몸을 후딱 주워다가, 선악을 알게 되었다는 나의 정신세계가 ‘이제 이 몸은 내 거야’라고 하면서 거기서 ‘나’가 나온 겁니다. 거기서 내가 나온 거예요.

그래서 그 몸을 어떻게 관리하느냐? 자기 몸을 보니까 수치스럽잖아요. 수치스러우니까 그다음부터는 자기 몸 관리에 들어가는 겁니다. 무화과나무로 치마 만들어서 내가 알아서 내 몸을 가리겠다는 거예요. 하나님 보시기에 몸은 이미 버린 몸인데, 무가치한 몸인데 ‘나’가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부끄럽다고 내가 그 무가치한 것을 내 소유로 만들어서 뿌듯하게 아무 문제 없는 몸으로 관리하게 됐습니다.

그런 몸을 가지고 아담이 후손을 낳고 후손끼리 서로 몸들을 보여주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속아 넘어가고 있어요. 정작 몸을 만드신 하나님 생각은 전혀 다른 생각인데, 서로 보기에 괜찮은 몸, - 사실 괜찮은 몸이 아니라 괜찮은 것을 걸치고 있는 몸이죠. 패션화시켜서 자기 몸의 수치를 가리는 몸 - 그런 껍데기를 드러내면서 서로서로 자기가 기죽을 거 없다고 살아가는, 가짜와 가짜가 넘쳐나는 세상, 여기에 우리가 속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안 속지요?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께서 그 후에 계명을 또 주십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할 때 우리가 괜찮다고 자부하는 이 몸이 하나님의 율법과 만나게 될 때 과연 괜찮을까요? 과연 이웃이라는 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요? 몸이 망가진 상태에서 주께서 원하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 과연 성공적으로 구현될 수 있을까요?

구현되지 못한다면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어겼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은 저주밖에 없어요, 지옥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율법사가 예수님께서 ‘옳다’ 해주니까 완벽에 완벽을 기하기 위해서, “그런데 내 몸이 어디서 망가졌습니까?”라고 물어야 할 자신이 엉뚱한 질문을 합니다. “이웃이 누굽니까?”

왜? ‘알기만 하면 사랑할 자신이 있는 자기 몸이다’라고 이렇게 자부한 거예요. 이웃만 알면 내가 내 몸을 가지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그렇게 한 겁니다. “이웃이 누굽니까?” 할 때 주님께서는 “이것이 이웃이다”라고 답변하시는 게 아니고, 인간의 자아가 자기 자신의 몸을 가리는 식으로 이웃을 골라잡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드러내요.

“저 사람은 내 이웃이 아니야…, 이 사람도 내 이웃이 아니야”라는 그것을 누가 결정하느냐 하면, 자기가 결정해요. 예수님께서 드시는 비유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이 생겨났다 치자…” 강도 만난 사람이 거의 죽어가고 있어요. 거기에 제사장이 지나가고 있어요. 제사장은 바쁘죠. 예루살렘으로 복귀한다고 가는데 보니까 강도 만난 사람이 있단 말이죠.

그럴 때 그 제사장이 ‘저 강도 만난 사람은 내 이웃이 아니야. 난 저런 이웃이 필요 없어’라는 결정을 제사장 자아가, 본인이 내린 거예요. 그다음에 레위인, 둘 다 제사하는데 필수 요원들이잖아요. 이 필수 요원이 또 지나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은 내 이웃이 될 요건을 갖추지 않았어.’ 그냥 갑니다.

율법에서 말하기를, “내 망가진 몸의 이웃이 누구냐?”라고 율법에서는 분명히 이야기했는데 사람들은 그 율법을 받으면서 ‘나는 안 망가졌다. 안 망가졌는데 이 안 망가진 몸을 더욱더 빛내고 괜찮다고 옹호할 수 있는 자를 자신의 이웃으로 간택해 버리는 그런 자아가 발동하는 거’예요.

내 몸과 내 자아가 건전하고 괜찮다는 것을 확인하고 증명해 줄 수 있는 이웃을, 사람은 은근히 원하고 있었던 겁니다. 거기에 율법이 투입되었죠. ‘네 이웃을 네 자아 말고 네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느냐?’ 선악과 안 따먹었으면 율법이 필요 없어요.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시내산에서 율법을 줬잖아요.

그러면 ‘내 몸은 어디서부터 하나님 앞에 망가졌고, 하나님의 관계가 어디서 끊어졌는가?’ 그 지점으로 가라는 식으로 율법을 주신 거예요. 율법을 주신 것은, ‘도대체 내가 어디에서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졌으며 버림받았느냐, 그 지점이 어디냐?’를 율법이 이끄는 대로 가서 내 몸이 어떤 몸인지 엑스레이 한 번 찍어봐야죠.

목이 잠겨서 안 좋으면 병원에 한 번 가봐야죠. 5일 치 약을 한 번 먹어봐야죠. 사람들은 자기 몸에 대해서 뭔가 엄청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 중풍병자와 친구 4명이 왔을 때 5명 다 오해했어요. “내 친구는 중풍 병에 걸렸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못 고칩니다.” 중풍병자도 “내가 지금 중풍 병에 걸려서 걷지를 못합니다.”

전부다 하나님에게서 이 몸이 잃어버린 그 지점을 생각 못 하고, 내가 건강하게 뛰놀던 그 지점이 나한테 쏙 맞는, 진짜 내 자아의 잘남을 증명해 줄 수 있는 몸이었다고 여기면서 몸 건강하기 위해서 주님한테 왔습니다. 그것도 새치기했어요. 미안한 것도 없이 지붕 뚫고 위에서 내려왔거든요, 번호표 뽑지도 않고요.

그럴 때 주님께서 보시고 자기 몸 고치러 온 사람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네 ‘죄’ 문제를 언급합니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그 중풍병자나 친구 4명 어느 누구도 주님 만났을 때 주님 앞에서 죄를 지적받기 위해 주님을 만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어요. ‘내가 모르는 죄가 철저하게 갈 데까지 끝까지 가서 들춰져야 해. 이걸 해내실 분은 우리 주님밖에 없어’라는 생각으로 그들이 자진해서 주님 앞에 나왔습니까? 그래서 교회 나왔습니까? 자기 죄를 지적받기 위해서?

하나님 보시기에 절대로 천국에서 받아주지 않는다는 그 몸을 우리가 얼마나 귀하게 여기면서, 평생을 챙기면서 살아가잖아요. 하늘나라에서는 안 받아주는데요. 이 몸은 이미 버려놓은 몸이에요. 주께서 천국에서 아시는 몸은 어떤 몸이냐 하면, 내가 갈 수 없는 곳에 미리 가 있는 나, 그걸 여기서부터 미리 발견하라는 거예요.

가지도 못할 나라에 내가 미리 가 있어요. 이것은 미친 생각 아닙니까? 이것은 너무 터무니없는 생각 아니에요? 나 여기 있는데, 주께서 미리 나를 저 천국에 만들어놨단 말이죠. 그러면 ‘나’가 두 개잖아요. ‘나’가 두 개라는 그 말이지요. ‘나’를 두 개로 주께서 만든 이유는 노선을 갈아타라는 거예요, 노선을. 둘 중에 어느 하나는 네가 잃어버려야 될 게 아니냔 말이죠.

인간의 유전자 요소가 DNA로 구성되어 있어요. DNA는 두 개의 고리가 서로 얽혀 있어요. 마치 담쟁이넝쿨처럼 얽혀 있는 그런 모양새에요, ‘디오시리보핵산’이라는 게. 주님께서는 율법을 통해서 두 개의 몸을 준비했어요. 코스를 두 가지 코스로 했어요. 하나의 코스는 지옥 가는 코스를 만들었어요. 또 하나의 코스는 천국 가는 코스를 만들었습니다.

두 가지 계열을 따로 만드시고, 그 두 가지 계열을 어떻게 분류하느냐? “현재 네가 아는 몸은 그 두 가지 계열, 노선 가운데 어느 쪽에 속하는 몸인고?”라고 우리에게 물어요. 네 몸이 어디에 속하는 몸이냐? 그러면 지옥 가는 노선과 차이가 나야 할 것 아닙니까? 정말 여러분들이 성경을 통해서 두 가지의 노선이 있다는 것을 알면, ‘나 두 가지 노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알지 말고 저쪽 노선과 내가 속한 노선의 차이점을 알면 이미 두 가지 다 아는 바가 돼요.

그러면 지옥 가는 자의 노선은 어떤 노선이냐 하면, 이것은 성경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자기 눈에 보이는 이 몸을 자아가 붙들고 있는 유일한 몸으로 간주하는 사람, 이게 지옥 가는 사람이죠. ‘이 세상에 어떤 인간을 만나도 전부 다 나와 똑같은 몸이 있더라’라고 우기면서 ‘너나 나나 뭐 똑같은 몸이니까 이 몸 붙들고 살자.’ 이게 지옥 가는 노선이에요.

그러면 천국 가는 노선은 뭐냐? 마태복음 23장 35절에 보면,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이것은 무슨 이야기냐 하면, 지옥 가는 사람에게는 참 특이한 몸인데 그 몸은 무슨 몸이냐? 안에 들어있는 피를 바깥으로 드러내는 식으로 살아가는 몸이 있어요.

창세기 4장에 아벨, 그리고 제사장 사가랴, 요아스 왕에게 맞아 죽은 그 사가랴, 여호야다의 아들 사가랴의 피, 선지자의 피입니다. 그 노선, 그 DNA의 계열에는 전부 공통점이 있어요. 뭐냐? 자기 속에 있는 죄를 바깥으로 드러내는 거예요. 자기 안에 있는 죄 ‘아담에서 흘러 내려오는 이 아담의 피는 죄악 된 피다.’ 곧 ‘이 죄악 된 피 + 죄를 알리는 몸.’

몸 있고 죄를 짓는 그것은 아니고요, 그것은 유교에서 말하는 거예요. 몸이 있고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 몸이 붙어 있는 식으로 나는 살아간다.’ 따라서 안에 있는 죄가 피 모습으로, 죄는 붉거든요, 죄가 붉은 피 모습으로 나왔다는 것을 드러내는 식, 안감을 바깥으로 드러내는 식으로 살아가는 노선, 그 노선에 누가 끼어드는가? 예수님이 같이 끼어들어서 자기 노선으로 전환 시켜버려요.

‘네 안에 있는 죄가 피로 나올 때 그 피에 내가 합류 해줄게. 그래서 이 천국 가는 노선의 마지막 모습은 내가 일괄해서 총괄적으로 보여줄게.’ 그래서 내 피를 십자가에서 쏟아버리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 15:34). 하나님이 만든 이 인간의 몸이 어디서 마귀의 몸으로 전환되었는가, 그 지점을 찾기 위해 율법을 준 거예요.

이것을 몸이 있는 인간에게만 시켰습니다. 천사는 따라오지도 못해요. 왜? 천사는 똑똑하고 대단하고 영광스럽지만 뭐가 없느냐? 몸이 없어요. 몸이 없으니까 예수님께서 대속할 건덕지도 없어요. 천사는 주님의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게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나옵니다. 주님께서는 이웃을 한발자국 더 심화시켜서 close 더 가까운 관계로 만들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친구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3-15절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이 말은, 천국에 간 사람은 몽땅 다 예수님의 친구며, 그 말을 달리 이야기하면 이 땅에서 예수님의 친구, 예수님의 이웃 빼놓고는 다 몰살당합니다, 몰살당해요. 하나님께서 천사하고 상대하는 것이 아니에요. 사람하고 상대합니다. 그것도 죄지은 사람하고 상대해요. 그냥 하나님이 아닙니다. 오실 하나님의 기능이 부여 되는 겁니다. 죄인을 위해서 대속하시는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시는 거예요.

그분을 ‘주님’이라고 하고, 그 주님의 특징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약속에 담긴, 율법이지요, 그 약속에 담긴 내용을 이 땅에서 유일하게 완성시키는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의 그 완성으로 인하여, 친구가 될 수 없고 이웃도 될 수 없는데 이웃이 되고 친구가 된 겁니다. 이웃을 사랑하게 되면 나오는 결과물, 열매가 뭐냐?

‘넌 이제부터 내 친구’라고 이야기하고, 그래서 예수님에겐 친구고요, 그다음에 아버지한테는 뭐냐? 아버지한테는 예수님이 상속자인 것처럼 성도는 하나님의 상속자가 됩니다. 천국을 같이 공유하는 것은 당연하죠. 로마서 8장 15-17절에 보면,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후사, 상속받는 상속자, 하늘나라의 상속자에 합류하게 되는 겁니다.

자, 이렇게 성경에서는 이미 정답이 나와 있어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는데 하나는 자기 죄를 덮는 쪽으로 살아가는 노선, 그쪽 계열에 서 있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주장하는 모토가 있어요, 구호가 있습니다. 구호를 이 시간에 제가 먼저 선창하겠습니다. 지옥 가는 사람들의 구호, 설교 시간이니까 후창은 하지 마시고 목이 안 좋은 제가 3번 선창하겠습니다.

“나는 내 노동으로 산다.” 한 번 더 “나는 내 노동으로 산다.” 한 번 더, 삼세판이니까 확정해야지요. “나는 내 노동으로 산다.” 이겁니다. 인간이란 이거에요.

“노동해서 누가 사는데?”
“내 몸이 산다.”
“네 몸이 어떤 몸인데?”
“내 몸은 눈에 보이는 네 몸이나 내 몸이나 똑같지.”

그래서 그들은 말합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 왜? ‘그게 어떤 직업이든 자기 노동으로 돈을 벌어서 그 돈으로 내 몸을 살리는데 질 좋은 노동, 질 나쁜 노동 따져서 욕하지 마라. 산다는 것, 내 몸을 살려야 한다는 너무나 분명한 명제, 이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다급한 상황, 살아남아야 한다는 그 시급한 목적을 두고 어떤 노동을 하든 밥 먹고 살면 되지 않나? 돈 많이 벌면 그야말로 일등 급 신랑감 아니냐?’

양상국이라는 개그맨이 나이 40 넘어서 결혼하려고 결정사, - 결정사가 뭐냐 하면 결혼 정보 회사에요 - 결정사에 가서 물어봤어요. 기재할 것 다 하고서 양상국이 물었어요. “저 몇 등급 되겠습니까?” “6등급입니다.” “여기서 꼴찌는 몇 등급입니까?” “6등급입니다.” “방송 그만!” 그 양상국이라는 개그맨이 왜 삐졌냐 하면, ‘돈 많으면 1등급 아니냐?’ 하는 거예요.

그들이 말하기를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참 재밌는 이야기인데, 원래 지옥에는 귀천이 없어요. 지옥에는 귀천이 없습니다. 대속의 피가 없기 때문에, 자기들 피밖에 없으니 더러운 피끼리 무슨 귀천이 있어요? 그냥 죄를 뿜뿜 뿜어내면서 영원토록 저주받으며 살아가는 세상, 그걸 그들은 이 세상에서 앞당겨 살아요, 앞당겨서.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이 몸이 죽어서도, 죽고 난 뒤에 혹시 뭔가 있더라도 이 몸을 가지고 들어간다는 거예요. 그들에게는 율법이라는 게 없습니다. 내 몸을 괜찮은 몸으로 다듬어 놓으면 이 괜찮은 몸이 혹시 없지만, 있더라도 천국에 갈 때 이 몸을 가지고 들어간다는 거예요.

참 세상에서 나오는 노래 보면 가관이에요.

60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젊어서
못 간다고 전해라

뭐 <백세 인생>(이애란, 2015)인지 하는 노래 있잖아요?

70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할 일이 아직 남아
못 간다고 전해라
--------------
100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좋은 날 좋은 시에
간다고 전해라

지금 내 몸이 하나님과 끊어진 몸이에요. 이 끊어진 몸이 갈 곳은 이미 정해져 있어요. 주께서 거부하는 몸을 자기가 거부하지 않고 이걸 붙들고 ‘노동으로 돈 많이 벌어서 6등급에서 1등급 되면 됐잖아. 돈 많으면 최고잖아.’ 이러고 있다고요. 누가요? 나하고 똑같은 몸을 가진 자들이 전부다! 유튜브 보면 다 그 이야기잖아요. 내 노동으로 잘 됐고 성공했다는 것, 인생 등급 올렸다는 그 이야기뿐이잖아요.

어디서 사가랴의 피가 나오고, 아벨의 피가 나오고, 예수님 십자가의 피가 나옵니까? 안 나옵니다. “그 예수의 피가 왜 필요한데?” 그들이 외치는 건 그거예요. 주님께서 노선을 바꾸기 위해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을 주셨는데 그 율법에서 기존의 몸은 하나님께서 받지를 않아요, 받지를 않습니다.

받지 않는다는 것이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옵니다. 창세기 3장 15절을 보시면서 거기에 누가 빠져 있는지를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여기서 빠져 있는 자가 있어요. 누구냐? 남자가 빠졌어요.

그러면 남자의 역할은 뭐냐? 17, 19절에 나옵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흙으로 나가리 되라, 그 말이죠. 창세기 3장 15절에는 남자가 빠져 있어요. 그러면 인간의 몸에서 남자가 빠졌으니까 남는 것은 여자의 몸밖에 없죠. 여자의 몸에 대해서는 창세기 3장 20절에,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모든 산 자, 살아있다는 자의 의미니까 여자의 몸에서 모든 자를 다시 살릴 수 있는 분이 임신 돼서 나온다는 이야기에요, 아기의 모습으로.

그러면 남자는 땀, 여자는 피죠, 피.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가 아니에요. 남자는 땀, 여자는 피. 레위기 12장 2-4절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여인이 잉태하여 남자를 낳으면 그는 칠일 동안 부정하리니 곧 경도할 때와 같이 부정할 것이며 제 팔일에는 그 아이의 양피를 벨 것이요 그 여인은 오히려 삼십 삼일을 지나야 산혈이 깨끗하리니” 이렇게 되어 있고요, 5절에는, “여자를 낳으면 그는 이 칠일 동안 부정하리니 경도할 때와 같을 것이며 산혈이 깨끗하게 됨은 육십 륙일을 지나야 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아기를 생산하는 그 현상이 결코 선악과 따먹어서 죽었다는 창세기 2장, 3장의 상황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 노선으로 계속 이어져 오는 거예요. 여자가 먼저 선악과에 손대고, 그다음에 남자가 손댔다는 그 원칙에서, 남자와 여자라는 육신이 있는 한 주께서는 그 원칙에서 이탈하지 못하게 만들어요.

죄지었다는 원리가 일관되게 우리 몸에 담기게 하는 겁니다. 우리 자아, 아닙니다. ‘나’에게 담기는 게 아니에요. 우리 ‘몸’에 담기는 거예요. 여자가 아기를 낳는 것은 여자 자아의 결정의 문제가 아니고, 몸 자체가 아기를 낳을 수 있는, 남자와 차이 나는 그런 몸이 여성의 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치는, 거기서 진짜 살릴 자를 살리는 분의 등장을 기획하고 그 프로젝트를 계속해서 여성의 몸으로 진행시킵니다. 디모데전서 2장 15절에 보면,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여자가 아기를 낳는 것 자체가 여자 몸에 작용하고 있고 적용되고 있는 하나님의 율법의 실현으로서 여자의 몸이 고려되고 있고 활용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남자는 땀 뻘뻘 흘리다가 죽으면 그만이죠. 그렇게 해서 나중에 마리아의 몸에서 어떤 분이 등장하게 되면 그분의 몸은요, 기존의 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의 몸과 차이 남을 보여줘요, 차이가 나는 거예요.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그분은…, 여러분도 잘 아시지요. 그분은 죽었다가 3일이라는 텀을 두고요, 그 텀에 대해서는 제가 얼마 전에 설교했죠, 3일의 텀을 경유해서 3일 만에 다시 그 몸이 살아났어요. 그 몸이 어떤 몸이냐 하면, 율법을 온전히 이룬 몸만 죽음이라는 텀, 3일의 텀이라는 시간을 넘어설 수가 있습니다.

다시 해봅시다. 진도 나간다고 될 문제가 아니거든요. 지금 뭐가 문제냐면요, 방금 설교 가운데서 어떤 점이 인간들의 유튜브에서 들을 수 없는 요소가 되느냐? 아까 제가 이야기했지만 몇 개만 뽑으면 이런 거예요. ‘인간은 하나님과 어디서 끊어졌는가?’를 찾아갈 때만 구원이 된다는 거예요.

이 몸은 뭔가 문제가 있는데, 문제 있는 몸이 문제가 있다는 걸 알려면 하나님과 끊어진 그 지점을 찾아가야 한다는 그 말이죠. 그런데 그 지점은 이미 옛날 조상 아담 때 일어난 일이잖아요. 이미 지나간 거잖아요. 이미 지나간 사건이잖아요. 그런데 몸이 있는 한 이 몸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시간과 공간에 적용받지 않는 몸으로 하나님께서 활용해 주시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사도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십자가가” 그다음에 “눈앞에 보이거늘”라고 했어요. 그러면 눈은 어디에 달렸느냐 하면, 기존의 몸에 달려 있잖아요. 기존의 몸을 가지고 눈으로 아무리 봐도 십자가가 보입니까? 안 보이죠.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자아가 생각하는 몸이 시간과 공간에 제한을 받고 저촉을 받기 때문에 말씀에서 벗어나 있다는 거예요. 지금 내가 여기 있어도 이미 주께서는 천국에 이미 나를 마련해줬다고 할 때 여기 어떤 텀이 있느냐 하면, 부활이라는 3일의 시간 텀이 가로막고 있어요. 가로막고 있는 이 시간 텀은 기존의 썩어 빠진 내 몸 가지고 극복이 안 돼요.

뚫어낼 수가 없어요. 시간을 어떻게 뚫어냅니까? 내 몸은 여기 이미 있는데 저 몸은 뭐냐? ‘내가 슬슬 걸어가지.’ 이렇게 걸어갈 문제가 아니잖아요. ‘시간을 거슬러 가면 되지.’ 시간을 어떻게 거슬러 갑니까? 안 되죠. 불가능하죠. 그런데 여기서 친구가 있습니다. 친구의 몸으로 갈아 타기를 하는 거예요.

누가복음 10장에서 주님께서 강도 만난 사람을 이야기할 때 이 점을 여러분들은 주목해야 해요. 강도 만난 사람에 대해서 일단 응급처치는 했어요. 그리고 35절에 보면,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부비가 더 들면” ‘지금 현 상황에서는 이것으로 되었는데 혹시 내가 떠나고 난 뒤에 치료비가 더 필요하다면 그것은 다시 돌아와서 더 주겠다’라는 거예요. 이것은 무슨 뜻이냐? 주님이 우리와 친구가 되셨잖아요. 우리는 강도 만난 사람이니까 그냥 죽어가고 있어요. 본인만 모르고 있지요. 강도 만나서 죽어가고 있는 몸, 무능력하게 그냥 패대기쳐진 우리의 몸인데 주님께서는 이웃을 내 몸같이, 예수님의 몸, 예수님께서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그 율법을 이룹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치료가 거기서 종결되었다, 끝났다고 생각할 거예요. 내 몸이 아픈데 더 필요한 것이 뭐가 있는가, 하는 것을 본인은 모르는데 그것을 누가 아느냐? 한 번 친구가 아니고 한번 이웃이 아니라, ‘내가 다시 와서 그 상태를 봐서 치료의 진도가 잘 안 나간다 싶고 그래서 비용이 더 들게 되면 다 채워준다’라는 그것은, 미래의 사정까지 누가 안다는 것인가?

우리의 친구 되시고 이웃 되시는 그분이 미래의 사정을 다 아시고, 우리가 장래 어디까지 도착해야 할 그곳에 이를 때까지 필요한 모든 부비, 비용을 주님께서 다 대겠다는 거예요. 그러니 세상에 어느 친구가 이런 친구가 있어요? 우리가 죽고 난 뒤의 지옥, 천국까지 어느 인간 친구가 장담합니까? 이미 부활에 이른 친구만이 ‘얘는 영원한 천국에서 내 친구 되어야 해’라는 다짐 하에 거기 필요한 모든 비용은 내가 다 갚아준다는 그 말입니다.

“이 친구를 내가 믿을게요”라고 하지 마세요. 우리가 해야 될 것은 내 몸이 어디서 주님과 끊어졌는가를 생각하면 돼요.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라고 했을 때 그 십자가를 이렇게 고쳐보세요.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피 흘리고 있는 몸이 눈에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육체 안에 들어 있어야 할 피가 바깥으로 흐르고 있는 분을 네가 만나 본 적이 있느냐?’ 마태복음 27장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릴 때 이런 일이 벌어졌어요. 45절에,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데 갑자기 해가 그 빛을 잃어버렸어요.

이 말은, 이 우주의 모든 자연 세계가 운행하는 그 목적이 딱 하나로 이미 모아져 있다는 거예요. 이 피조 세계는 예수님의 몸이 이뤄야 할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달성하는데 협조하도록 해와 달과 별들이 그동안 같이 운행했던 겁니다. 어떤 분이 사형당하는데 해가 빛을 잃었다? 이것은 인간들의 몸으로는 알 수 없는 모든 자연 세계가 하나의 목적에 꽂혀 있으면서 그동안 꾸준하게 운행해 왔다는 거예요.

그리고 마태복음 27장 51-52절에,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라고 되어 있어요. 이 대목이 재미있어요. 예수님 십자가에 달릴 때 율법을 다 완성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있는데 먼저 죽었던 성도들의 무덤, 그게 수직형 무덤이잖아요, 돌멩이로 막아놨지요, 막아놓은 그 돌멩이가 터지고 무덤에 누워있던 성도들의 몸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이지요. “자~알 잤다!” 하는 거지요. ‘아침인가? 지금 몇 시쯤이나 되었지?’ 하는 식으로요. 성도들의 몸이 무덤에서 일어난 거예요.

이것은 뭐냐 하면,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우리의 착함과 이성과 훌륭함과 윤리나 도덕을 보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죽어 마땅한 몸을 지목하면서 일으킨 사건이에요. 그러니까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더러운 몸을 십자가 앞에 등장시켜야지요, 이 죄뿐인 몸을. 내가 죄지은 것이 아니고 죄가 지금까지 이끌어온 이 몸, 그리고 이 몸의 노선은 뭐냐? 아담의 노선이에요.

아담의 노선은 전부 다 탈락되어야 해요. 탈락되어서 “영광 받지 못하고 지옥 가야 될 이 몸이 바로 이 몸입니다”라고 이야기하면서 주님 앞에 십자가 앞에 나타나야 한다는 그 말이지요. 우리가 생각을 나쁘게 먹어서가 아니라, 인수인계받은 몸 자체가 죄의 몸을 인수인계 받았어요. 양심이 짐이 확 벗어지지요?

내 인생이 이렇게 된 것이 누구 잘못이다? 우리 엄마 잘못이지요. 모친의 죄 중에서 내가 이렇게 태어났으니까 이것은 내 잘못은 아니다. 그 ‘내 잘못은 아니다’의 계단을 밟아서 끝까지 가보세요. 이것이 누구 잘못인가? 아담의 잘못이라는 말이지요. 아담의 잘못이니까 어미의 잘못, 아담의 잘못을 다 떼버리면 남는 것은 뭐냐? ‘이유도 따지지 않고 무조건, 무조건 내 몸은 잘못돼 있다’는 겁니다. 무조건 내 몸은 잘못돼 있다.

여러분, 십자가 옆에 한 강도가 구원받은 것 아시지요? 저 강도가 나보다 나쁜 짓 많이 했다고 얼마나 손가락질들 했겠습니까? 강도는 같은 몸끼리 지적받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인수인계받은 이 몸이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져서 버림받았다는 그것을 들춰내는 그 장소가 어디냐, 어느 자리에 가야 하느냐의 그 장소, 예수님의 십자가에까지 자기를 이끌어준 데 대해서 강도는 지금 횡재한 거예요.

‘비로소 내 몸을 이제는 내가 알게 되었다. 예수님 버림받은 것같이 내가 하나님께서 버림받아 마땅한 몸임에도 그동안 내 이 몸을 지키려고 해왔다.’ 내 노동으로 내가 산다고요? 내가 돈 벌어서 그 돈으로 내가 산다고요? 그런 식으로 구호 제창하면서 살아왔잖아요. 그리고 그 외 다른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어요, 이 세상 살면서.

몽골군이 쏘는 화살처럼 쏟아져 내리는 것들, 유튜브를 비롯해서 모든 말들의 화살은 ‘네가 돈 벌어야 산다’라는 그 외 다른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이제 문제 삼아야지요. 내 몸이 무슨 몸인지를. 내 몸이 어떤 몸인지를, 그 노선이, 계열이 어떤 계열인지를? 지옥 갈 계열 아닙니까? 지옥으로 직행하는 계열이라고요.

모든 내 잘못을 꼬깃꼬깃 옷으로 감고, 패션으로 감고 안 들키기 위해서 애썼던 그 몸, 겉을 통해서 속을 감추는 몸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아벨과 사가랴, 선지자는 속의 안감이 바깥으로 피 흘리면서 튀어나온 거예요. ‘내가 내쏟을 것은 이 피밖에 없다.’ 이것을 여성의 몸이 아기를 낳으면서 보여주고 있다는 겁니다.

‘여성은 해산을 함으로써 구원을 받는다.’ 이것이 무슨 뜻이겠어요? 여성이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여성의 몸을 보라. 창세기의 하나님의 일률적인 원칙은 여전히 살아있다.” 여성이 피 흘린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여기에 나오는 단어가 오늘 설교의 결론처럼 나타납니다. 어느 누구도 죄지은 몸은 하나님이 안 받습니다. 안 받는데 천국 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첫 번째 아담에게 접목이 되어서 그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피를 흘려서 죄를 제대로 드러내고, 그 가운데서 아버지께서 사흘 만에 살리신 아들 그분이 어떤 열매를 맺느냐? ‘저 사람, 저 이웃은 내가 사랑했습니다’라는 열매, 증거물로서 나타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들이 첫 열매, 예수님 부활의 열매인 그 계열에 속하게 된 사람이에요.

주님이 부활하셔서 성령을 주시고 그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의 열매를 받은 거예요. 그래서 이제 몸의 바꿔치기가 성사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4절에,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육의 몸이 있은즉, 육의 몸을 여러분이 갖고 있은즉, 그 몸은 흙에 속한 몸이기 때문에 나가리되어 없어지고 이제는 영의, 영광스러운, 하늘의 영광이 빛나는 몸이 있습니다’라는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십자가의 피 흘림을 쳐다보면서 살아가는 그쪽 방향에 소속된 자들이에요. 그 코스에 소속된 겁니다. 이것은 천국 가는 길입니다.

오뎅 꼬치가 두 개 있잖아요. 이쪽은 지옥 가는 오뎅 꼬치고, 나머지 하나는 천국 가는 오뎅 꼬치인데 그 하나의 꼬치에 꿰어져 있는 거예요. 그 나이가 세 살을 살았느냐, 10년을 살았느냐, 스물이냐 서른이냐 나이는 아무 상관 없어요. 그 꼬치에 꽂히면 돼요. 70이 되든, 80이 되든 거기에 꽂혀 있으면 그쪽으로 방향이 정해져요.

너는 천국 가는 뱡향이기 때문에 자신의 몸이 늘 십자가에 의해 그 중앙이 관통된 몸이라서 그 몸은 이미 버린 몸이에요. 그래서 더 살아도 소용없고, 일찍 죽어도 상관없어요. 중요한 것은 내 몸을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활용했다는 그 사실, 이것이 바로 이웃사랑 율법의 절정이고 완성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성도시라면 같이 대화할 때 주님의 이웃에 영원히 취직된 사람으로서 대화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피 이야기하면서,

“나 취직했다.”
“어디에?”
“천국에.”
“어떻게?”
“십자가로 우리 몸을 대신했대. 그것이 이웃사랑이래. 우리는 못하는데 주께서 홀로 하셨대.”

이것을, 우리의 살아오면서 갖고 있던 죄와 아울러 들춰내면서 기쁨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태가 이렇습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주께서 십자가 지셔서 다 이루었다는 그 외에 다른 현실이 다 가짜인 것을, 세상의 무슨 소식이라도 들어가면서 이제는 그 차이 남을 발견하는 기쁨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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