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20260611a 요한일서 5장 18절(상징과 있음)-이 근호 목사
오늘은 요한일서 5장 18절,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We know that whosoever is born of God sinneth not; but he that is begotten of God keepeth himself, and that wicked one toucheth him not.
이 한 구절에 등장인물이 너무 많아요. 적어볼게요.
① 하나님
② 하나님께로서 난 자
③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
④ 악한 자
이것이 요한일서 5장 18절 한 구절에 들어있는 등장인물입니다. 이 등장인물은 어디에 있느냐? 말씀 안에 있죠. 하나님의 계시 안에 이런 분이 들어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입장을 생각해봅시다. 우리 입장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여기 있다. 지금 우리가 아는 것은 뭐냐 하면, 분명히 확실히 아는 것은 ‘내가 여기 있다’, 끝이에요, 우리는. 내가 여기 있다, 끝. 내가 여기 없어요? 있죠. 그럼 됐잖아요. 내가 있는 걸로 됐잖아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것 외에 굳이 더 알 필요가 뭐가 있느냐? 없죠.
자기 자신한테 정직합시다. 우리 자신에게 정직해보면 가장 확실하고 확실한 것은, 내가 여기 있다. 내가 여기 있는 게 확실한데, 나는 어떤 인간이냐 하는 그것은 ‘내가 여기 있다’의 확실함에 대해서 불확실한 것이 자꾸 달라붙는 거죠. 달라붙어서 코팅하는 겁니다. 자꾸 달라붙어요.
아름다운 케이크가 있다고 봅시다. 참 아름답죠. 그런데 숟가락으로 한 숟가락만 딱 퍼서 그 앞에 있는 코팅된 설탕부분을 탁 덜어내면, 그냥 빵이죠. “아름다운 케이크가 있네.” “그 앞에 붙어있는 ‘아름다운 케이크’ 다 떼버리고 우리 정직하게 하자. 여기 뭐가 있는데?” “빵.” 끝. 이게 끝이잖아요.
‘내가 여기 있다’로 끝난 사항 같으면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내가 여기 있다’로 충분하단 말이죠. 내가 여기 있으면서 여기 있는 게 그동안 살아왔다. 살아왔는데 그 살아온 결과가 뭐냐? 있다. 어제 열심히 일했다. 그래서 결론이 뭐냐? 있다. 오늘도 열심히 일했다. 결론이 뭔데? 여기 있잖아. 그럼 내일 열심히 일한다. 나타난 결론은? 여기 있다.
있다, 있다, 있다, 있다,… 그 이상 뭐를 원합니까? 아니, 뭘 원하느냐가 아니라 그걸 왜 원해요? ‘있다’ 외에 다른 것이 더 있기를 원하는 그 심보는 욕심 아니에요? 굳이 ‘있다’ 외에 거기다 다른 의미를 덧붙일 이유가 없다니까요. 정직하게, 정직하게 자기 자신을 보고 정직하게 세상을 보게 되면, ‘거기 있네.’ 그 한마디로 모든 것은 종결돼요.
내가 있고 여기 컵이 있다. 뭐가 있는데? 컵이 있다. 컵이 있으면 이걸로 되는 것이지, 이 컵은 누가 마시기 위해서 더 깨끗하게 씻어야 되고 뭐 깨끗한 물로… 그런 쓰잘데기 없는 의미 덧붙이지 말고, 내가 여기 살아가는 데 있어서 ‘내가 있다’ 그것으로 뭔가 모자랍니까? ‘있다’ 외에 다른 것 없어서 아주 환장을 한 거예요, 우리가?
지금 정직하자는 말을 몇 번째 하는지 모르지만, 우리가 정직하게 생각해봅시다. 여기 있잖아요. 그럼 됐잖아요! 뭐를 더 기대해요? 만약에 뭔가 더 기대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순수하지 않은, 욕심이면서도 욕심 아닌 척하는 것이 되겠죠. 결국 남는 것은 ‘여기 있네.’ 여기 있잖아요. 그걸로 끝나죠. 그걸로 끝납니다.
지금 네 번째 이야기합니다. 정직하게 생각합시다. 정직하게. ‘내가 있다.’ 그것으로 왜 충분하지 못하는가? 왜 성경 들추고 교회 다니고 왜 하는가? 교회 다니고 성경에 관심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욕심이 더 많아서 그래요. 다른 사람은요, 그냥 있는 걸로 충분해요. 신났어. 운동도 하고 뭐 여러 가지 하는데 항상 어디로 돌아옵니까? ‘나 있잖아!’ 나 있잖아,로 돌아와요. 우리도 ‘나 있잖아.’로 돌아오잖아요. 뭐 별난 존재도 아닌데. 왜 그렇게 탐을 내느냐 이 말이죠.
여기까지는 여러분들 이해되시죠? 씉데없이 지식으로, 성경지식이나 세상지식으로 ‘자기 있다’에 그걸 덮어씌우지 마세요. 포장하지 마세요. 페인트칠하지 마세요. 그냥 있는 것으로 오케이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만약에 여기 탈북자가 참석했다 합시다. 북한에 사시다가 오신 분이 계시다. 그럼 “뭘 도와드릴까요? 한국생활 좀 수월치 않죠? 여러 가지 정보도 모자라고 자칫하면 사기꾼한테 걸릴 수도 있고…. 뭘 어떻게 도와줄까요?” 그렇게 탈북자를 도와주려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나 여기 있다’에서 over하고 있는 거예요. 주제넘게 벗어나고 있는 거예요.
탈북자가 있다. 여기서 ‘탈북자’ 떼버리면? 어떤 사람이 있는데 탈북자다. ‘탈북자’ 떼버리면 이 안에 남는 게 뭐에요? 나 있고, 그다음에, 너 있네? 끝. 있잖아. 그럼 됐지, 뭐. 뭐 주제넘게 도와주고 ‘필요한 것 없습니까?’ 왜 그런 짓하는데요?
어떤 아주머니가 있다. 아주머니가 있는데 그 아주머니는 가자 지역주민들 고생한다고 무상으로 도와주겠다고 갑자기 지중해로 가자 지역에 가다가 이스라엘한테 잡혔죠. ‘가자 지역’이라는 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마세요. 그냥 그 사람은 거기에 있는 거예요, 나 있듯이.
내가 저 사람을 도와준다는 게 뭐냐 하면 ‘나 여기 있음’으로 성이 안 차니까 도와준다는 것을 보태서 ‘내 도움을 받을 사람 손들어 보세요.’ 이렇게 나오는 것인데, 그렇게 나온다는 것은 지금 본인부터가 본인한테 솔직하지 못한 거예요. 정직하지 못한 거예요. 있는 걸로 그냥 종쳐라 이 말이에요. 땡! 하고 종치면 되는 거예요. 저 사람은 저 사람 알아서 살겠죠. 안 도와줘도 있고요. 내가 여기 있어도 있잖아요.
‘있다’에 추가해서 거기다가 의미를 덧붙일 어떤 정당성이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자, 방금 이야기한 게 성경적으로 왜 중요하냐 하면 ‘있음’에다 성경지식으로 완전히 범벅을 해서 옴팍 뒤집어씌운 거예요, 성경지식으로. 성경지식을 나한테 뒤집어씌우면 하나님께서 이거 인정합니까? 인정 안 해요. 하나님은 뒤집어씌우기를 원하는 게 아니라 있는 것도 벗겨내요. 벗겨내면 남는 게 뭐냐? 방금 이야기한 ‘너 있다’에요. 그것만 남겨요. 그것만 남긴다고요.
어떤 형이 동생 골탕 먹이기 위해서 “오늘 갈치조림이 있다. 오늘 엄마가 저녁 때 해준다.”했어요. 그래서 애가 그 소리 듣고 일찍 와서 “엄마, 갈치조림 먹고 싶어요.”하는데 형이 “내가 줄게.”해서 보니까 과연 갈치에요. 갈치 뼈다귀만, 있어요. 살점은, 없어요. 뼈다귀만 있으면 갈치 아닙니까? 어디 뭐 홍어입니까? 갈치 뼈다귀 있잖아요. 있잖아요, 갈치 뼈다귀.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돼요. 하나님 뜻은 우리가 뒤집어씌우는 것, 이런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아주 꼴 보기 싫어해요, 하나님께서. 성경지식가지고 뒤집어씌우는 것. 하나님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 ‘있음’에 슬그머니 주님께서 같이 ‘있음’으로 이 땅에 왔어요. 있음+있음. ‘있음’에 대해서 ‘있음’으로 왔다고요.
‘있음’에 대해서 ‘있음’으로 왔는데, 여기서 이 ‘있음’과 ‘있음’이 사람들 보기에 똑같이 있어요. 바리새인도 있고 주님도 있고 세리도 있고 창기도 있고. 뭐 뒤집어씌운 어떤 의미가 있더라도 다 벗겨놓으면 ‘당신이 거기 있네.’라고 하는 거예요.
이걸 주일 낮 설교에서 ‘body’라고 한 거예요. 몸, 신체가 있죠. 신체가 있는 걸 누가 부정합니까? 부정할 수 있어요? 권사님, 몸 있죠? 이거 부정합니까? 권사님 자리에 거미가 앉아 있어요? 그건 아니잖아요. 신체가 있잖아요. 있다 이 말이죠.
있는데, 이쪽 예수님의 body에 뭐가 생기느냐? 자꾸 예수님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하늘에서 왔다.’ 이런 이야기하더란 말이죠, 요한복음에서. 오늘 요한일서 하니까요. 그런 이야기, ‘나는 하늘에서 왔다.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다.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그냥 있는 사람에게 자꾸 뭔가 발언을 하는 거예요. 무슨 발언을 하는데 그 발언이 주님의 body에 변화를 주더란 말이죠. 변화를 주는 거예요.
있는데, 뭐 늙어 돌아가신 게 아니잖아요. 어떤 변화가 있어요. 있는데 어떻게 있느냐? 이 body가 마태복음 17장에서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어떤 산에 올라가요. 변화산에 올라가요. 변화산에 가니까 예수님의 body가 어떻게 됐어요? 이 있음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냥 있음이 아니고 영광스럽게 해같이 빛나게 있었잖아요. 해같이 빛나게 있었죠.
제자들은 거기서 뭐를 간파했느냐 하면 예수님이 평소에 내뱉는 말이, 우리가 보기에 그냥 신체가 있는 이 신체에 변화를 주더라는 사실을 발견했어요. 변화를 주는 거예요. 모두 다 같이 있는데, 있는 것이 변화를 발산하는 식으로 몸이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몸이 어떻게 되느냐? 없어져요.
예수님이 사형당해서 죽었다 할 때 강도 둘도 같이 죽었어요. 강도도 사형집행 받아 죽고 예수님도 죽었어요. 이것은 인간과 같이 ‘있음’이에요. 있음이 무덤에 갔는데, 분명히 있어야 될 있음, 그분이 어떻게 됐습니까? ‘있음’이 뭐로 바뀌었습니까? ‘없음’이에요. 있음이 뭐로 바뀌었다? 없음으로 바뀌고 없음이 다시 사흘 만에 부활체로 나타나서 막달라 마리아한테 “아직 만지지 마라” 그런 이야기했죠. 이야기가 될 정도로 부활했고, 요한복음 21장에서 고기 잡는데 왔죠.
있음→없음→부활체
있음이 없음을 거쳐서 부활체로 된 거예요. 출발점이 우리의 있다는 것과 예수님의 있다는 것과 차이가 없어요. 당신도 있지만 나도 있다고 했는데, 그 있음이 없음이 되고 무덤에 없음이 되고 그 없음이 부활체가 되는 것. 부활체로의 이 변화는 너 있다, 나 있다, 있다, 있다, 이런 데서는 이러한 변화를 찾아볼 수가 없어요. 이런 특이한 변화를 찾아볼 수가 없어요.
그리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예수님의 이 변화는 예수님이 평소에 내뱉은 그 말이 이 변화를 준 거예요. 그럼 우리가 내뱉은… 예를 들어 전현무가 북미 월드컵 중계방송 한다 칩시다. “손흥민이 지금 한 골 드리블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전현무라는 있음이, 몸이 막 변화합니까? 그 말하고 난 뒤에 없고 부활되고 이렇게 합니까? 전현무라는 아나운서가 그렇게 해봤자 돌아서서 수수료 받고 그다음 다시 그 몸이 그 몸이에요. 있음에서 우리는 요지부동이라니까요. 있음에서 우리는 달라지지 않아요, 그 있음이. 달라지지 않는다고요.
달라지는 건 어떻게 달라지는가? 본인은 ‘나는 있다, 있다’하다가 “야야, 나 간다.”해서 몸도 죽고 나라고 말할 수 있는 언어도 같이 날아가 버리고. 그런데 예수님의 몸은 있을 때도 말하시고, 없고 난 뒤에 부활되고 제자들에게 와서 또 이야기를 하죠.
이야기를 하는데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너희가 나와 함께 있을 때 있음과 부활되고 난 뒤에 내가 이야기한 그 있음이 다른 있음인데, 그 근거는 뭐냐? 내가 전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했던 그 말이 실효성 있다는 거예요. 실효성이 있어요. 그러면 예수님의 있음에 작용하는 것은 뭡니까? 예수님의 말씀이죠. 말씀.
그러면 아까 우리가 처음에 봤던 것으로 돌아갑시다. 요한일서 5장 18절. 거기에 등장인물이 누굽니까? 하나님, 하나님께로서 난 자,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 그리고 악한 자 이 모든 것이 첫 번째는, 중요합니다, 첫 번째는 이 의미에 대해서 우리 있음에서는 이 의미와 끊어져 있다. 우리 있음은 의미를 모릅니다. 성경지식으로 달달 외워도 몰라요.
지금 예수님의 있음은 이 말씀에 의해서 같이 교류가 되는데,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그냥 코팅할 뿐이에요. 빵에 그냥 아름다운 설탕 코팅, 크림 코팅할 뿐이지, 한 숟갈 퍼먹으면 결국 어디로 돌아옵니까? 성경 뭐 백독하고 뭐해도 결국 남는 분명하고 확실한 것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뭐냐? 뭐라 해도 나는 있다. 끝! 나 있으면 됐지, 뭐.
나 있으면 됐지. 천국 가봐야 알지. 가본 사람이 있나. 그냥 믿지. 지식으로 인정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천국 있음보다 더 확실하니까 우리는 요지부동 달라질 기색이 안 보입니다. 내가 있다,에서. 30년, 40년 복음 들어도 다시 어디로 돌아오느냐? ‘나 여기 있잖아. 이걸로 됐잖아.’ 그걸로 끝나죠.
여섯 번째 이야기합니다. 정직하게 우리 자신을 봅시다. 내가 있다는 것 외에 전부다 이건 사치에요. 그게 사치고요, 그걸 김치 종류로 하면 겉절이 있죠. 후다닥 만들어내는 겉절이. 있으면 맛있죠. 맛있는데 그거 없다고 밥을 안 먹는 건 아니란 말이죠. 그건 기본이 아니거든요. 기본은 있음에서 양보를 안 해요, 우리는. 내가 있다는 이것은 확고부동한 전부이고 결국 이 전부로 나는 항상 되돌아와요.
교회 갔는데 어떤 집사님이 나보고 복장 불량으로 욕했다. 나한테 직접은 안 했지만 복장 이상하게 해서 교회 왔더라 이런 소리 들었다. 그러면 그다음 대처는 간단합니다. 교회 안 가면 나 없나? 그 교회 안가면 되지. 그렇잖아요. 누가 삐쳤다고 하든 말든. 교회 안 가도 그동안 정이 쌓인 것은 약간 양보가 되고 좀 섭섭하지만, 그래도 덩어리는 있잖아요, 덩어리. 뭡니까? 나라는 덩어리는 교회 안가도 그 시간에 집구석에 있잖아요. 그럼 됐잖아요. 다른 교회 갔다가 쪼끔하고 또 튀어나오면 되죠.
그러니 우리 자신이라는 것은 속일 수 없고 숨길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5장 18절을 하는데, 저기 나오는 네 분의 등장인물은 사실 내 있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저게 요한일서 5장 18절 말씀이죠, 말씀은 나하고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나만 챙기면 되지, 굳이 말씀을… ‘있으면 알면 좋지만, 필수적으로 굳이 알 필요는 없다.’를 내 강력한 있음의 의지가 그걸 대변해주고 있어요.
아이고, ‘있다’ 이야기하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지 모르겠다. 자, 그다음에 이삭을 봅시다. 이삭이 야곱에게는 축복을 주고, 에서에게는 저주를 주었죠. 아무것도 안 준 게 아니고 저주를 주었어요. ‘너는 네 동생한테 빌어먹고 살 거다.’ 저주를 주었다고요.
이삭한테 한번 물어봅시다. “큰아들한테 가야될 축복을 왜 동생한테 줍니까?”라고 물으면 이삭이 뭐라고 이야기하겠어요? 뭐라고 이야기하겠습니까? “분명히 맏이를 그렇게 좋아하고 둘째는 안 좋아했는데, 맏이한테는 저주를 주고 별로 안 좋아했던 야곱에게는 복이 갑니까?” 질문하게 되면 이삭의 정답은 이겁니다.
“나는 무지(無知)했으니까.” 그때 눈이 어두웠죠. 그렇죠? 눈이 어둡다는 것은 주체적인 판단이 정지된 거죠. 사도 바울이 된 사울이 처음에 주님 만날 때 제일 먼저 뭐가 갔습니까? 눈이 갔죠. 눈이 가니까 스스로 걷지도 못하고 어떤 사람이 이끌어줘서 갔죠.(“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행 9:8) 자기가 알아서 네비 쳐서 갔습니까? 다른 사람 손에 이끌려갔죠.
사울이 그랬지요. 맞죠? 장님 된 사울이. 그럼 사울에게 ‘나는 있다’가 됩니까, 아니면 ‘네가 있다’가 됩니까? 둘 중에 어느 것이 정답입니까? 사울이 눈이 갔을 때, ‘내가 있다’입니까, ‘네가 있다’입니까? 질문을 너무 어렵게 한 거 아닌데. 어느 쪽이에요? 눈이 갔을 때.
그럼 문제 다시 낼게요. 사울이 예수님 안 만났을 때 자기가 있어요, 남이 있어요, 우선적으로? 자기가 있죠. 눈이 갔어요. 눈이 가니까 다른 사람 손잡고 따라갔죠. 그때 내가 있는 거예요, 남이 있는 거예요? 남이 있죠. 종속되죠. 그러면 그 순간에 사울은 눈이 어두웠으니까 무지하죠.
여기서 내린 결론은 뭐냐? 알지 못해서 구원받는 거예요. 알지 못해서. 구원은, 알지 못해서 구원받아요. 알지 못해서. 인간이 아는 마지막 최후의 보루는 뭐냐? ‘내가 여기 있다’에요. 내가 있다. 그게 인간의 앎이에요. 아는 거예요. 내가 있다고 여기는 이상은 절대로 말씀으로 건너갈 수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을 경유해야 되니까.
그런데 인간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을 내쳤잖아요. 그러면 말씀세계로 건너갈 수 있는 다리가 없어졌죠. 자기가 똑똑하잖아요. 인간은 뭐가 똑똑합니까? 천하 몰라도 ‘내가 있다는 이것은 확실하다.’ 이것은 분명히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내가 여기 있잖아! 이거 양보 못 해! 진짜로 있어. 끝!’ 여기에 대해서는 인간은 양보 못합니다. 결국 인간은 이걸로 다 돌아와요.
교회 50년 다녀도 소용없어요. ‘내가 여기 있다’로 그것만 붙들고 살아가는 거예요. 도대체 무지하고 싶어도 무지를 못해요. 무식하고 싶어도 무식 못 한다니까요. 내가 똑똑하게 여기 있는 걸 아는데 굳이 왜 그걸 모른다고 할 수 있느냔 말이죠. 아는데. 아는 걸 안다 하지, 그걸 억지로 모른다 할 수 없잖아요.
지금 여러분들이 성경을 볼 때… 또 하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게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에요. 우리는 말씀으로 건너갈 수가 없어요. 성경에서 여러 가지 이유를 댑니다. 왜냐하면 에베소서 2장 1절에 그 이유가 이렇게 되어 있어요. 제가 이야기하면 ‘나 그거는 알고요.’ 이렇게 나올 거예요. 그러나 이 있음을 가지고 다시 한번 생각하면 이래요.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절에,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이렇게 되어 있다고요, 에베소서 2장 1절과 2절에.
그러면 이것은 뭐냐? 성경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내가 있다’라고 하는 너보다 이 세상에 악한 권세자가 먼저 있기 때문에, 그 권세자에게 복종하는 결과물로서 너는 뭘 주장한다? ‘누가 뭐래도 나는 있다. 그걸로 난 오케이. 나 교회도 안 나가. 절에도 안 가. 내가 있으면 이것으로 내 인생 살면 그만이지.’라는 발언이 거침없이 나오는 거예요. 나는 내가 있는 걸 아는데, 뭐 굳이 종교를. 나는 무교. 종교 없다. 우리 엄마는 교회(혹은 절) 다니지만 나는 종교 없습니다, 이런 거. 그걸 거침없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조그마한 판대기 같은 바위 위에 앉았다. “이번에 광수가 발언하세요.” 광수가 나왔어요. 앞에 옥자하고 <나는 솔로>에 나오는 여자 여섯 명이 있다고 합시다. 여자가 물어요. “혹시 종교는 뭡니까?” “무교입니다.”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해요. 종교는 없더라도 누구는 있다? ‘종교는 없어요. 그러나 뭐가 있어요? 당신 앞에 있는 나는 있잖아요. 이걸로 나는 발언권을 갖고 있고 나는 충분히 살 자격이 있습니다.’ 이걸로 모든 인간은 환원되지 않습니까, 그 의지가. 자신만만하게. 사울도 그런 사람이었어요. 사울도.
자, 그러면 성경에 의해서 분명히 해봅시다. 제가 묻습니다. 진짜 답변해보세요, 가만있지 말고. 놋뱀이 있습니다. 놋뱀을 든 자는 살았다 되어 있거든요. 그럼 놋뱀을 안 본 사람은 왜 놋뱀을 안 쳐다봤죠? 놋뱀을 쳐다보지 않은 이유가 뭐죠? 그거 참 이상하죠.
놋뱀이라는, 놋으로 만든 뱀이 있잖아요. 있단 말이죠. 만약 지금 내 근처에 불뱀이 와있다. 그럼 그 현장에 있는 게 뭐냐? 인간이 만든 놋뱀이 있고, 살아서 꿈틀거리는 불뱀이 있고, 또 뭐가 있어요? 진짜 중요한 것은? 내가 여기 있잖아요. 불뱀이 물었잖아요. 꿈틀거리는 불뱀, 있는 게 와서, 그 동물이 와서 나를 물었다.
동물이 있다. 그런데 있는 나를 물었다. 그런데 앞에 놋으로 만든 놋뱀이 있다. 있다, 있다, 있다,가 세 개 있죠. 내가 왜 쳐다봐야 되는데요? 있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다 알고 있잖아요. 쳐다봐야 될 이유가 없다고요. 놋뱀 눈에 보인다, 보인다. ‘그걸 쳐다보면 살 것이다.’ 그게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그게.
있는 것은 있는 것으로 끝나야 되는데, 그걸 쳐다보면 이쪽 뱀한테 물린 것이 낫는다는 게… 그 원인과 결과가 연결이 안 되는 거예요, 그게. 납득이 안돼요, 납득이. 아니, 있는 것이 최종인데, 있는 것끼리 뚝 떨어져 있는데, 내가 이걸 쳐다본다고 불뱀에서 낫는다는 그걸 누가 설명해봐라. 설명이 됩니까, 안 됩니까? 설명 안 되죠. 설명이 안 된다고요.
이게 요한복음 3장에 그대로 나와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4-16절)
이것이 있음에서는 나올 수 없는 요구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 지식으로 받아들이자.’ 지식이 아니고! 지식을 말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 하려면 거기에 나온 단어들이 나 있음을 떠나서, 내가 있다는 확실함을 떠나서 자기들끼리 연결, 연결되어야 된다고요.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할 때 이 ‘믿는 자’, ‘영생’, ‘독생자’ 이 단어가 연결되어야 되는데, 이 있음에서는 그것과 연결되는 절차, 그 경로에 끼어들 여지가 없다니까요. 내가 있는 게 너무 확실하기 때문에. 저것은 모호하다니까요. ‘나 있다는 것은 확실하고, 저건 뭐 어쩌다 되겠지.’ 되겠지,는 아니에요! 그것은 모호하잖아요. 모호해.
송파구에 투표용지 반밖에 준비 안 한 것은 ‘이만하면 되겠지.’ 했다는 거예요. 핑계지만. ‘되겠지’라고 했는데 안됐는데? 더 많이 와버렸는데? 선거위원장이 사임했잖아요. 사표 냈잖아요. 사표 내도 괜찮아요. 왜? 선거위원장할 때는 타이틀이 ‘선거위원장’이라고 있었지만 그까짓 거 선거위원장 벗어버려도 남는 게 있어요. 그게 뭡니까? 선거위원장 할 때나 사표 낼 때나 확실한 건 뭐에요? 내가 여기 살아있다. 그럼 됐잖아요. 그동안 월급 많이 받고 했으니까 그것가지고 나이도 많겠다, 여생 즐기면 되죠.
그런데 ‘선거위원장 사표 더하기(+) 지옥이나 가라’ 이건 못 받아들이죠. 이건 못 받아들이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있음으로 모든 것이 종결되었는데, 내가 있다는 것과 내가 지옥 간다는 것의 연결을, 내가 있음보다 더 확실하게 설명해줄 사람이 있어요, 없어요? 내가 있음이 최종적인 설명이기 때문에, 내가 있는데 네가 그런 짓해서 지옥 간다 하는 연결고리에 대해서 내 있음보다 더 세게 나를 설득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그렇잖아요.
또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지금 내가 답변도 안 했어요. 답변은 그냥 넘어갑시다. 모세가 전쟁을 할 때 지팡이를 위로 올리니까 산 밑에 땅에서 아말렉과 전쟁하는 이스라엘이 이기고, 지팡이를 내리니까 아말렉이 이겼더라.(출 17:8-16) 이 인과관계를 한번 설명해보세요. 설명됩니까?
지금 밑에서는 여호수아가 칼 들고 열심히 싸우고 있어요. ‘칼이 있네. 나는 여호수아 장군. 어? 적들이 있네? 칼 들고 설치네? 그럼 나는, 있는 내가 있는 칼을 들고 챙! 챙! 챙!해서 물리쳤다.’ “모세 지도자님! 선지자님! 제가 열심히 칼 들고 싸워서 우리가 이겼습니다!”라고 이야기했는데, 모세가 산 위에서 “네가 있고 네 칼이 있고 저쪽 적이 있고 칼 있고 해서 네가 승리했다,가 아니라 내 지팡이가 올라가니까 승리한 거다.”라고 이야기하면, 여호수아 장군이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겠어요? 터무니없죠.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명백하고 정직한 일을, 명백과 정직으로 그대로 계시에 담아버립니다. ‘‘있다’ 외에 더 의미를 붙이지 말라.‘ ‘네가 있다’ 외에 다른 의미를 네가 당겨서 붙이지 말란 말이에요. 이 말씀은 우리가 너무 잘하고 있어요. 원래 우리는 이러하니까. ‘있다’ 앞에 덧붙이는 것, ‘나 예수 믿고 구원 받는다’ 같은 것은 전부다 하나의 가식이니까. ‘있다’ 외에 의미를 덧붙이지 말라는 것은 우리가 너무 너무 반긴다고요.
모든 말씀은 ‘예수님이 있다’의 변화와 관련되어서 말씀이 있지, 말씀은 ‘우리 있다’와 연관성 없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내리면 지고 올리면 승리했다. 그러면 모세가 메시아입니까, 아닙니까? 모세는 메시아 아니에요. 지난 주일 오후 설교 때 했죠. 히브리서 3장에 보면 집의 아들이 아니고 사환이죠. 실제 주인공은 아니죠. 따라서 주인공도 아닌 모세가 그렇게 했을 때, 그거 쳐다보고 있는 그들이 구원받겠어요, 구원 못 받겠어요? 구원 못 받죠.
모세도 이야기하고 엘리야도 이야기했어요, 변화산에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별세해야 구원받아요. 누가복음 9장에 나오는 변화산에서 모세하고 엘리야하고 예수님이 이야기할 때 엘리야, 모세가 예수님께 말하는 내용이에요, 그게. ‘언제 별세하십니까?’ 이게 무슨 말이에요? 내 있음과 구원이 연결이 된다, 안 된다? 연결이 안 되는 있음이 자기한테 있다는 거예요. 내 있음이 구원 안돼요. 내 있음이라는 의식이 구원과 연결 안 된다니까요.
구원은 누구와 연결되느냐? 예수님 있음과 천국이 연결되죠. 요한일서 2장 18절에 보면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여기 적그리스도가 등장하죠. 적그리스도가 등장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적그리스도는 인간의 있음에다가 뭘 보태느냐 하면 의미를 더 보태주는 거예요. ‘내가 너를 구원해줄게.’ 이게 적그리스도에요.
여러분, 신이 있어야 구원이 됩니까, 아니면 신이 죽어야 구원됩니까? 정말 이거 중요한 질문인데, 신이 죽어야 구원됩니까, 신이 살아 있어야 구원됩니까? 하나님이 그냥 하늘에 살아계시면 구원돼요, 안돼요? 안되죠.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방금 중요한 질문한 거예요.
‘아휴, 목사님, 자꾸 뜸들이지 말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데요? 좀 분명히 이야기해주세요.’ 그걸 지금 이야기합니다. 저도 눈치 있거든요. 자꾸 접근은 안 하고 빙빙 돌리기만 하고…. 요한일서 5장 18절, 이제 그 본론에 들어갑니다. 여러분들 애태우는 게 내 취미가 아니기 때문에 힘들게 하지 않겠어요.
잘 들으세요. 5장 18절, “하나님께로서 나지 않은 자마다 범죄한다…” 같은 뜻이잖아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이렇게 되죠. 그러면 하나님께로서 나지 않은 자가 하는 모든 것은 뭐가 된다? 범죄가 된다. 그걸 지킵니까? 사람들이 그걸 지켜요, 안 지켜요? 내가 하는 것이 다 죄가 된다는 것에 대해서 흔쾌히 동의하며 지킵니까, 안 지킵니까? 안 지키죠.
그렇다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이것을 지켜낼 수 있어요, 없어요? 못 지키죠. 못 지키니까 그 다음 단어… 지금까지 한 강의 다 지웁니다. 오늘 이 시간 첫 번째 강의 40분 넘게 했는데 강의 다 지우고 딱 한 단어만 남기겠어요. ‘허락’. 허락이에요. 구원은 하나님이 허락해서 구원되는 거예요. 허락해서 구원되는 거예요.
우리는 왜 허락되어야 됩니까? 우리는, 나는 무지하기 때문에. 이삭같이. “왜 큰 아들한테 복 안주고 둘째 아들한테 복 주었습니까?” “나 무지하거든. 내 배 째라. 나 몰라.” 무슨 일을 몰라요? 주께서 어떻게 할지 난 몰라. 그 ‘몰라’가 구원받는 거예요, ‘몰라’가.
자기는 최선을 다 했죠. 에서 맞나 한번 확인해보고. 아닌 것 같은데? 확인해봤죠. 그러나 다 일이 끝나고 보니까 내가 한 모든 일은 나한테 뭐로 돌아온다?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로 돌아오는 거예요. 몰랐다.
이 ‘허락’에서 비로소… ‘있음’에다 ‘허락’을 집어넣으면, ‘있음’이 하나님의 허락에서 왔다면, ‘나 있음’이 뭐로 바뀌느냐? 이 현장에 ‘감사’가 있는 거예요, 감사가. ‘와, 이거 뭐 내가 주인공 아니네. 나 있음은 개뿔도 아무것도 아니네. 나한테 허락하신 그분이 있네. 내가 있는 게 아니고.’ 그분이 있어서 활동하시고 그분의 허락 하에 우리는 예수님이 한 일을 알아듣게 된 거예요. 허락 때문에.
이 간단한 이야기를 빙빙 돌리지 말고 진작 이야기하지. 그냥 이야기해버리면 이게 지식이 된다고요! ‘뭐 다 압니다.’ 아는데 중요한 것은 뭐가 방해 놔요? 결국 우리의 본성은, 성경에 뭐라고 써놨는지 다 잊어버리고 ‘뭐 나하나 밥 잘 먹고 살면 되지.’ 이걸로 돌아온다고요, 이걸로.
여기서 수요일에 설교했던 것 잠깐 인용해볼게요. 성막에 성소 있고 지성소 있죠. 성소에는 제사장이 들어가도 되지만 지성소에는 들어가면 죽어요. 대제사장도 7월 10일 빼놓고 들어가면 죽어요. 그게 하나의 공간을 차지해서 택지가 되죠. 택지가 되어서 가건물 지어놨죠.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동합니다. 이동하고 난 뒤에 그 빈터에 지성소 있던 자리에 가면 죽어요, 살아요? 안 죽죠.
터가 있잖아요. ‘있음’이에요. 터가 있는데 어떤 때는 죽고 어떤 때는 왜 안 죽죠? 그걸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걸 설명하는데 그냥 말로 풀이하면 너무 난해해요. 그래서 알기 쉽게 하겠습니다.
아버지가 있는데, 물리적 아버지가 사망했어요. 그런데 아버지 살아있을 때 그 아버지와 자식의 정이 너무 깊었어요. 그럼 아버지 죽고 난 뒤에 빠이빠이하고 부조 얼마 들어왔는지 그것만 계산하고 끝납니까? 섭섭하죠. 특히 남편 같으면 죽고 난 뒤에 섭섭하죠. 그럼 아버지가 그리워서 돌아오는 1년 째 아버지를 위해서 추도예배를 하든지 아버지 산소에 다시 가보든지 할 거 아니겠습니까. 그 아버지가 무슨 아버지냐 하면 ‘상징적 아버지’에요.
아버지가 죽었어요, 살았어요? 분명히 아버지가 죽었잖아요, 1년 전에. 그런데 상징적 아버지는 그 자식에게 살아있어요, 죽었어요? 살아있어요. 그런데 자기는 있음이 마지막 진실이잖아요. 내가 있는 건 확실하니까. 있는데, 아버지라는 타인의 상징적 의미가 내 있음을 덮쳐서 나로 하여금 1주기 맞아서 공동묘지에 가보게 했다면, 나는 지금 누구한테 끌리고 있는 거예요? 나 있음으로 그냥 종결되는 겁니까, 아니면 아버지의 의미가 나와 결합되어 있는 거예요? 어떻게 됩니까? 결합되어 있죠.
죽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나와 영원히 함께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죽었기 때문에 제대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할 수가 있습니다. 산 하나님, 제자들 아무도 안 믿었어요. 믿는다고 얼마나 용을 썼는데 실패했습니다. 이유가 뭔 줄 알아요? 나의 존재 있음이 예수님의 있음에 다가갈 수 없는 한계를 제공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종교를 가진다, 뭘 가진다? 의미 없습니다. 살아계신 주님이,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한테 임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인간은 물리적, 실증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뭐로 산다? 상징성으로,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주신 의미로 사는 거예요. 그 의미는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계속 계시, 말씀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게 되고, 우리는 그것을 부여받으면서 지금 성도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왜 말을 멈추지 않느냐? 뭐가 나와야 돼요? 전에는 ‘나 있음’을 최종의미로 봤는데, 있음이 뭐로 바뀐다고요? 감사로 바뀔 때, 자기한테 감사하지 않아야 된다는 말을 뜻하죠. 내가 감사할 분은 나를 있게 한 주님이고, 그 주님께 감사하기 위해서 나는 예속된 상태에서 있음이죠.
있음을 부정하는 게 아니에요. 실제로 있어요. 세포가 있다고요. 있는데 누굴 위한 있음이에요? 나에게 내가 감사할 그분의 있음을 위해서 내 있음이 종속적인 관계로서 현재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있는 한 우리가 나에 대해서 걱정할 권한이 있어요, 없어요? 걱정할 권한이 없어요. 내 것도 아닌데. 그분의 의미에 꽉 잡혔는데, 걱정을 왜 내가 합니까? 의미가 내 의미입니까? 내가 관리해야 될 의미에요? 아니죠.
주님이 내뱉은 말씀에 의해서 예수님의 몸이 변화되었다면, 그 변화된 몸에서 그런 상징적 의미가 우리에게 주어졌다면, 현재 거울에 비친 우리의 몸은 일시적이에요. 이것은 빠이빠이해야 돼요. 내 있음과 나는 헤어져야 돼요. 헤어지고 주님의 있음으로 대체됩니다. 주님의 변화된, 영광된 부활의 몸으로 우리가 부활돼요.
그렇다면 여기 성경에 나오는 말씀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요한일서 4장 6절,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했죠. 우리는 우리 단독으로 우리가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자의 있음으로 우리가 여기 있는 겁니다.
제가 찾고자 한 것은 사실 3장 6절이에요. 이 말씀 설명하고 10분 쉽시다. 요한일서 3장 6절, “그 안에 거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나니…” 같은 뜻으로, 예수 안에 있지 않는 자는 어떤 걸 해도 범죄가 돼요.
왜냐하면 자기 있음으로 끝이니까. 가장 확실한 그들의 진리는 ‘나 여기 있잖아. 뭐 어때서?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산다.’ 이게 범죄에요, 이게 범죄. 죄라는 것도 우리가 함부로 단정하고 규정 못해요. 죄라는 그 개념을 예수님의 몸을 가지고 규정했고 그 규정의 상징적 의미가 우리한테 왔으면 그게 죄의 개념이에요.
6절에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이 말씀과 오늘 우리가 봤던 요한일서 5장 18절과 통하죠. 10분 쉽시다.
■서울강의20260611b 요한일서 5장 18절(상징과 있음)-이 근호 목사
첫째 시간 한 것을 다시 요약하게 되면, ‘있음 외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마라.’ 그런데 인간은 있게 되면 자기가 멋있게 있으려 해요, 멋있게. 대외적으로 내 존재가 존경을 받는 식으로 치장하고 싶거든요. 그걸 ‘환상’이라고 하는 거예요, 환상.
자, 이 환상의 예를 들겠습니다, 성경에서. 신명기 12장 31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는 네가 그와 같이 행하지 못할 것이라 그들은 여호와의 꺼리시며 가증히 여기시는 일을 그 신들에게 행하여 심지어 그 자녀를 불살라 그 신들에게 드렸느니라” 심지어 자녀를 불살라 그 신들에게 드렸다. 인신공양(人身供養)이에요. 인간의 몸을 공양하는 거예요, 신에게 바치는 거예요. 왜냐하면 신이 있기 때문에, 신이 없는 게 아니고 있기 때문에 이 짓하는 거예요.
너희는 주 너희의 하나님을 섬길 때에 이방 민족들이 그들의 신들을 섬기는 방식으로 섬겨서는 안 된다. 주께서는, 그들이 신들을 섬길 때에 사용하는 모든 의식을 싫어하시고 역겨워하신다. 그들은 자기들의 아들이나 딸마저도 불에 살라 신에게 바친다.
그러면 인간에게 신이 있다는 것은 ‘나 여기 있음’에다가 ‘신 있음’으로 여기서 덮어씌우려고 하는 거예요. 신 있음으로 나의 있음에서 뿜어져 나오는 나의 욕구 또는 욕망의 정당성을 찾기 위해서, 내 욕구와 욕망은 신의 뜻이라는 것을 얻기 위해서 신은 반드시 있어줘야 돼요. 없으면 안돼요. 있어줘야 돼요.
신은 전능하잖아요. 천지를 창조하고 전능하죠. 모든 인간은 다 알고 있어요. 이 자연은 네가 안 만들었고 내가 안 만들었잖아요. 그럼 누가 만들었어요? 신이 만들었죠. 그걸 모든 인간이 다 알고 있어요. 천지를 만드신 신이 나 있음을 위하여, 잘 들으세요, 나 여기 있음이 자랑거리 될 만한 있음이기 위해서 신과 나는 교류하고 있다고 보는 거예요.
신은 있어줘서 있는 내가 인신공양을 하는 겁니다. 극단적으로 자기 자식이나 또는 사람을 신에게 바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죠. 현재 멕시코에 있는 옛날 제국들, 마야 문명 같은. 마야 문명뿐 아니고 옛날 모든 종족에는 전부다 이게 있었어요. 만약 비가 안 온다. 그럼 왕이 뭐해야 됩니까? 왕이 베옷을 입고 하늘을 향하여 비 내려달라고 빌어야 되잖아요. 왜 그러느냐 하면, 왕부터 해서 모든 백성들이 무슨 존재를 인정하기 때문에? 신의 존재를 인정하기 때문에 그래요.
지금도 기우제 드려요. 군수가 나서서. 다른 지역은 비 오는데 자기 지역에 비 안 올 때는 군수가 인신공양까지는 아니지만 제사장이 되어서 해줘야 다음 지방선거할 때 표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신이 나의 핵우산이 되는 거죠. 인신공양이 다른 게 아니에요. 나는 알라를 위해 내 목숨 바치겠습니다, 이게 인신공양 아닙니까. 자기 자신을 바쳐서 자기 자신을 구원하겠다는 거예요.
그 모든 공통점은 뭐냐 하면, 신이 있다는 거예요. 신이 죽었다는 것은 인간이 상상도 못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신이 죽으면 원천적으로 이 해와 달과 별은 누가 만들었으며 나는 누가 만들었는가에 대한 최종 근거가 날아가 버리니까요. 신을 걱정하는 게 아니고, 자기 있음의 정당성을 위해서 신이 반드시 있어야 되는 거예요. 바알 종교 있잖아요. 바알 종교의 특징은 뭐냐 하면 바알 종교 신이 있음으로써 내 욕망을 보존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요. 내가 무슨 욕망으로 기도해도 신은 들어주니까.
인도에서 싯다르타(석가모니)가 불교를 만들었어요. B,C, 6세기경에. 그런데 그 불교가 인도에서 소멸되었어요. 처음에는 반짝하고 불교가 확 번성했어요. 왜냐하면 브라만 제도, 계급제도를 철폐하고 인간평등을 주장했기 때문에. 깨달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 이거 해서 인기 얻었어요.
인기를 얻었는데 그전부터 있었던 힌두교는 뭐냐 하면 제물을 바쳐서 신에게 복을 받는 종교가 힌두교였어요. 그전까지는. 그런데 힌두교가 ‘어? 불교 이것 봐라? 우리 종교 교인 데려가네? 그렇다면 야, 우리도 짐승 잡는 거 그만두고 우리는 그냥 신을 믿기만 하자.’ 이래가지고 짐승 잡는 제사를 그만두고 정신적으로 부처를 비슈누라는 자기 힌두교의 신의 일부로 간주해서 그다음부터 부처한테 빌기 시작한 거예요.
불교는 비는 종교가 아니고 깨닫는 종교에요. 자기가 부처니까. 누구한테 빌어요? 안 빌고 스스로 해탈하면 되는 종교인데, 힌두교는 제사지내면 돈 많이 들잖아요. 돈 많이 드는 것보다 부처처럼 우리도 그냥 빌기만 하면 복 받는다, 이렇게 하니까 그다음부터는 불교 쪽으로 안 가고 집 가까이 있는 힌두교 서원에 가버렸어요.
그러니까 그다음부터 불교가 위기에 봉착해서 불교가 변신합니다. 우리도 부처한테 빌기만 하면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불교가 깨닫는 종교가 아니고, 신을 만들었어요. 불교 내에 보살들을 만들어서 관세음보살, 힌두교 신처럼 팔이 여러 개인 천수천안관음 같은 신을 만들어서 돈줄 대는 교인들이 저쪽으로 안 빠지고 이쪽으로 와서 중들이 먹고 살도록 그렇게 했단 말이죠.
그런데 노골적인 신이 쳐들어왔어요. 이슬람이 발현된 거예요. 이슬람은 신과 직접 계명으로 통하는 종교에요. 신이 시키는 대로 계명을 지키게 되면 죽어서 천국 가는 거예요. 그 종교가 와서 절대신, ‘알라를 위해서 우리는 무조건 꿇어!’가 되는 종교가 와서 불교 승려들 다 죽이고 했어요. 그래서 불교는 인도에서 없어졌습니다.
불교가 없어지고, 중을 후원하던 상공업자들이 이슬람 때문에 유럽으로 가는 상거래, 무역로가 막혀서 그들 수입이 없어졌어요. 그러니까 이 불교 승려들이 보따리 싸서 더 동쪽으로, 옛날의 버마(미얀마), 태국, 라오스, 베트남, 저 위로 중국, 중국 가서 일본, 한국 쪽으로 불교의 전기 철학이 다 넘어갔어요.
그렇게 넘어왔는데 신라에 유명한 중이 있어요. 한국 역사상 불교 최초의 순교라 하는 이차돈의 죽음(법흥왕 때 불교 공인을 위해 목숨을 바침)도 있고요. 그리고 이후에 복잡하게 하지 말고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만 빌면 만사형통된다, 누구나 극락갈 수 있다고 가르치면서 한국 불교를 대중화시킨 원효대사가 있습니다. 그 사상이 녹아있는 게 조계종이고요.
지금 복음은 뭐냐? 예수님이 죽었어요. 예수님이 죽었다는 말은, 우리 있음이 부정된다는 말이에요. 우리는 살아있어도 이게 죽은 형태로 살아있는 거예요. 그래서 죽은 자는 더 이상 질문을 할 권리가 없습니다. 만약에 죽은 자가 질문해서 해답을 얻어버리면 이것은 죽은 자가 아니라, 해답을 쥐고 있는 또 하나의 산 자로 버티고 있다는 것이 증명되기 때문에 안돼요.
『오이디푸스』라는 신화가 있죠. 그 신화에서 오이디푸스가 스핑크스를 만나요. 스핑크스 있는 데에 사람 시체가 많이 있어요. 왜? 스핑크스가 낸 질문을 못 맞추면 죽어야 되니까. 그런데 스핑크스 질문의 중요한 점은 만약에 그걸 맞추면 누가 죽어야 되느냐? 스핑크스가 죽어요.
스핑크스가 오이디푸스를 만나서 질문합니다. “아침에 네 발로 걷고 낮에는 두 발로 걷고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게 뭐냐?” 오이디푸스가 “참 쉽다. 그거 사람이잖아.”하니까 스핑크스가 꽥,하고 죽었어요.
오이디푸스가 왕이 된, 지금도 있는 테베(Thebes, 테바이)라는 지역(그리스 아테네 북서쪽에 위치)에 저주가 걸렸는데 페스트라는 전염병이 돌았어요. 오이디푸스가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 테베 도시를 구하고 그 도시의 왕이 되었는데, 수 년 후에 테베에 페스트가 돕니다.
오이디푸스가 처남 크레온을 델포이 신전으로 보내 얻은 신탁에 따르면, 이 역병은 전임 왕인 라이오스를 살해한 범인이 테베 땅에 그대로 살고 있기 때문에 내린 신들의 벌이었습니다. 역병을 멈추려면 라이오스 왕을 죽인 살해자를 찾아내어 테베에서 추방하거나 사형에 처해야만 했고, 왕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직접 범인을 찾아내겠다고 공언하며 범인에게 강력한 저주를 내립니다.
오이디푸스는 역병을 끝내기 위해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스핑크스가 죽고 왕이 된 오이디푸스가 테베에 들어가 보니까 나이는 많지만 예쁜 여왕이 있어서 그 여왕과 혼인했는데, 그 여왕이 자기 엄마였던 거죠.
그럼 여왕의 남편은 어디 있냐? 남편은, 예전에 자기와 시비가 붙어서 죽여버린 그 남자가 자기 아버지였단 말이죠. 그런데 처음에 오이디푸스는 몰랐고 주변 인물들은 그 사실은 안 자도 있었지만 침묵했고요. 그렇게 오이디푸스는 테베의 왕이 된 거예요.
그 테베 도시의 특징은 뭐였나? 아무도 질문하지 않습니다. 왜? 스핑크스를 죽인 자가 왕이 되었기 때문에. 질문이 없죠.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아요. (신화에서는, 핵심을 아는 예언자도, 진실을 아는 목격자도, 왕인 오이디푸스 자신도 오랫동안 아무도 진짜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금지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 된 거죠, 금지가. 금지를 해야 인간은 자꾸 질문을 해요. 왜냐하면 이 금지를 넘어서게 되면 벌을 받기 때문에 벌 안 받는 나 있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 정확한 진리, 정확한 것, 내가 어떻게 정확히 행하면 나는 계속 살 수 있습니까,를 버티고 버티기 위해서 인간은 계속해서 질문을 하는 거예요. 질문을 하고 해답을 얻고, 질문하고 해답을 얻는 거예요.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이미 그쪽은 금지가 작동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여기 요한일서에 의하면 적그리스도가 그런 짓하거든요. 그런데 진짜 그리스도는 요한일서 5장의 말씀처럼 물과 피와 성령으로 그분을 증명한다 했죠.(6-8절) 물과 피가 나왔다는 말은, 진짜 그리스도는 이 땅에 와서 죽었다는 거예요. 죽어버렸어요. 아까 있음에서 없음이 됐죠. 죽어버린 거예요.
죽었는데, 요한일서에 보면 그분이 성령으로 찾아온 거예요. 요한일서에 나왔죠. 그게 아까 이야기한 예수님 몸의 변화잖아요. 몸의 변화. 그러니 예수님이 성령으로 온 사람한테는 뭐가 없습니까? 이 금지가 있어요, 없어요? 이미 금지를 철회시켰죠.
여러분, 에덴동산에서 모든 걸 따먹되, 생명나무 과실까지 모든 것을 따먹을 수 있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는 따먹지 말라고 했어요. 따먹지 마라. 그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너는 어떤 것도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에요.
왜냐하면, 선악과 안 따먹고 27년 5개월 버텼다 해봅시다. 계속 뭐가 있어요? 금지가 작동하고 있죠. 금지가 작동한다는 것은 네가 뭘 해도 어떤 정당성은 유보된 거예요. 언제든지 금지에 걸릴 여지가 있다면 ‘나는 여태껏 바르게 했습니다.’가 성립돼요, 성립 안돼요? 성립이 안돼요. 성립이 되질 않는다고요.
그러니까 나쁜 짓하기 전에 금지가 먼저 있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자체적으로 의인될 수 있는 여지가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그냥 따먹을 때까지 무죄 상태이지, 의인은 아니에요. 의라 하는 것은 금지 자체가 날아가서 ‘뭐를 해도 죄가 안 된다’가 아니라 ‘뭘 해도 의가 되는 세계, 하나님의 의가 되는 세계’가 바로 하나님께 속한, 그리스도 안에 속한 세계입니다. 엄청나요, 엄청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 그 은혜가 뭐에요? 죄가 더한 곳에 의가 넘친다는 말이에요. 주께서 의의 생산에 대해서 계속 넘치게 한다는 거예요. 이게 다 어디서 나왔어요? ‘하나님은 죽었다.’가 돼요. 하나님은 죽었다.
한번 적어볼게요. 이게 요한복음의 특징인데요. ‘하나님은 죽었다’와 ‘하나님은 죽임을 당했다’ 어느 말이 맞습니까?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이 죽었다’고 되어 있어요. 스스로 죽은 걸로 되어 있어요, 요한복음 10장에. 누가 나를 죽인 게 아니고 내가 알아서 죽었다. 죽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다. 내가 스스로 죽음으로써 나는 목자가 되고, 그 스스로 죽는 나의 의미를 부여받은 자는 나의 양이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요 10:14-15, 17-18)
인신공양, 바알 종교 전부다 자기 몸을 바치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을 바치라 했어요. 네 아들을 바쳐라. 그럼 아까 첫째 시간에 한 것처럼, 아버지 있습니다. 거짓말 아니에요. 아버지 있어요. 또 누가 있느냐 하면, 아들 있어요. 두 있음이 있고, 나무 있어요. 나무, 불쏘시개 있어요. 다 있습니다.
있음과 있음의 조합이 되어서 산으로 올라가는데, 이삭이 이런 질문을 해요. “아버지, 나무 불쏘시개도 있고, 추가해서 제사 드리는 아버지도 계시고 나도 있는데, 제물은 어디 있습니까?”라고 해요. ‘제물은 어디 있습니까?’ 그때 아브라함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하나님이 알아서 한다 했죠.
정답을 말씀드리면, 아브라함은 (제물이) 어디 있는지 몰라요. 아까 무지(無知)가 구원받는다 했죠. 왜냐하면 무지함으로써 내가 하나님 하는 일에 토 달거나 질문을 할 자격 자체가 박탈된 채로 주님의 허락 하에 움직이기 때문에. 이게 성령의 움직임입니다.
알고 행했는데, 성령이 찾아오니까 알고 행한 것은 모조리 죄가 되고, 내가 죄가 되었다는 그 사실이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의 의가 되는 이런 혜택이 바로 모든 금지가 철폐된 그리스도 안의 세계입니다.
이것은 쉽게 말해서, 너 자신보다 말씀을 더 귀하게 여겨라 이 말이죠. 너의 있음보다 너의 있음에 추가된 하나님의 의미가 너 있음보다 더 확실하고 더 명백하다는 거예요. 불신자한테는 그게 안 통하죠. 하나님이 나 있는 것보다 더 확실하다는 것은 신자에요, 불신자에요? 그건 불신자죠. 아까 인신공양 했잖아요. 신이 있어야 내가 정당화되니까 내 정당화를 위해서 신은 반드시 있어야 돼요. 신은 반드시 있어야 된다고요.
그런데 신은 있는지 모르겠고, 나는 분명히 있다고 했는데 내가 분명히 있다고 한 이것이 바로 죄라고 지적한 게 있다면, 죄라고 지적한 그쪽이 내 있음보다 더 확실하게 있죠. 내가 지금 그냥 막 밀어붙이는 것 같아서 좀 미안한데… 안 그래요?
강의 처음부터 새로 할게요. 우리가 있는데 주님도 있다, 있다,의 세계에 주님도 끼어든 거예요. 있음으로 들어온 거예요. 마리아가 낳음으로써. 있음, 있음, 있음, 있음이 섞여있죠. 우리와 똑같은 있음이에요.
“예수여, 지금 포도주가 떨어졌는데 네가 좀 해결해봐라.”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하는 말이, “여자여, 그게 나와 무슨 상관있습니까?” 약간 되바라진 것 같은 발언을 하죠. 그리고 유월절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갔는데, 엄마와 아버지가 예수님을 잃어버렸어요.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사흘 동안 우리가 너를 얼마나 찾았는지 아느냐?” 이러니까 예수님이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하는 게 마땅한 도리 아닙니까? 뭐라고 합니까? “내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 왜 알지 못했습니까?” 오히려 되묻습니다.
이게 지금 무슨 이야기하는 거예요? 있다고 해서 다 같이 있음이 아니라는 거예요. 한쪽은 아버지와의 관계 때문에, 아버지의 계시의 의미 때문에 있는 거고, 우리의 의미는 그 의미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너무나 강력하게 우리 있음이 확실하기 때문에 있음의 확실함보다 더 플러스된 확실함이 없기 때문에. 내가 점검하고 내 있음에 도움 되면 그때 우리는 믿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게 환상인 거예요, 환상.
미스코리아 대회 나올 때 드레스 입고 나오죠. 평소에 그 사람이 자기 집에서 살 때, 옷 그렇게 입고 삽니까? 아니죠. 불편해서 못 살죠. 바깥에 뭘 걸쳐야 된다는 것, 그거 누굴 위한 걸침입니까? 나의 있음을 위한 걸침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인간들로 인하여 죽어버렸어요. 스스로 죽든 죽임을 당하든 하여튼 인간들 때문에 죽었어요. 죽고 난 뒤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든 말든 자기는 고기 잡으면 돼요. 고기 잡는 있음이 옛날 자기 있음의 연장책이기 때문에. ‘아이고, 예수님 참 보고 싶다. 그립다.’ 끝. 그걸로 끝나요. 자기는 멀쩡하면 됐으니까.
그때 주님이 찾아와서 제일 먼저 한 게 뭡니까? “베드로야, 배 오른편에 그물 던져라.”할 때, 베드로는 갑자기 잊어버렸던 예수님을 찾는 게 아니고, 잊어버렸던 예수님과의 첫 만남에서 나눴던 그 대화가 기억난 거예요. “오른편에 던져라” 할 때, 베드로가 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했죠.
‘나같이 돼먹지 않은 인간은 주님이 상대할 가치가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좀 내버려 둬요. 나는 내 있음으로 그냥 가게. 나는 이대로 살렵니다.’ 이렇게 되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너는 내 고기 잡는 어부가 되어라.” 이렇게 했죠. 주님이 또 찾아왔잖아요, 마지막에 요한복음 21장에 또 찾아와요. “던져라.” 그다음에 여러분들이 제 설교에서 들은 것처럼 사랑 이야기를 끄집어냅니다. 사랑 이야기를 끄집어내요.
그때 베드로가 ‘네. 사랑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했습니까? “내가 주님 사랑하는지 주께서 아시잖아요.” 의미가 나한테 멈추는 게 아니고, 나를 통과해서 어디로 돌아갑니까? “주께서 이미 허락했잖아요. 주께서 이미 아시고 오셨잖아요. 모든 일은 주님이 알죠. 나는 무지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 무지를 받아서 이렇게 해요. “네가 앞으로 어떻게 죽는가도 네 마음대로 안 될 거야.”
쉽게 말해서, 그걸 섭섭하게 여기지 말고 그걸 감사하라 이 말이죠. 내가 알아서 행동하지 않더라도 주님이 알아서 이끄신다는 그게 얼마나 놀라운 가벼움이요, 놀라운 자유요, 얼마나 이게 두고두고 고맙고 고마운 일이에요.
내가 주님께 뭘 바쳐야 됩니까? 뭘 열심히 해야 돼요? 그럴 필요 없어요. 우리는 이미 금지가 철회된 상태에서 뭐든지 합니다. 뭐든지 하게 되면 주께서는 금지를 철회한 상태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뭐가 돼요? 죄가 됩니다. 죄가 되는데 그게 주님 입장에서 보면 ‘죄짓지 않음’이 된다는 말은, 우리는 분명히 죄인데 주님한테는 그게 뭐로 번역이 돼요? ‘하나님의 의로움’으로 번역이 돼요. 죄 없음 정도가 아니고, 의로운 행위가 되어버렸어요.
만약에 마귀가 와서 “에이, 쟤가 어떻게 의로우냐?” “내가 의롭다 했다. 왜? 내가 허락한 거야. 까불지 말고 입 다물고 있어. 내가 허락했다고, 내가! 내가 그 일을 하게 했다고. 에서는 저주하고 야곱은 복 주는 그 일을 내가 했다고, 내가. 아버지 이삭이 아니라, 내가 했다고.”
그래서 다시 아브라함으로 돌아와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아버지, 제물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주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다.” 아브라함도 모르죠. 내가 이삭이라면 “그럼 아버지나 나나 둘 다 지금 아무 제물도 없으면서 제사 드린다 그 말이죠?” “그래, 그 말이다.” 어처구니 없죠. 그럼, 모르죠.
제물이 없으면 뭐가 있습니까? 아까 땔감, 불쏘시개 있었다. 그리고 아빠 있다, 나 있다. 있다, 있다,가 제물 없음에 의해서 졸지에 뭐가 됩니까? 있으나 마나 아무 의미 없이 됐죠. 그러니까 주의 뜻은 뭐냐? 너에다가 의미를 붙이지 마라. 왜? 안 붙여도 되니까. 환상을 붙이지 마라. 환상을 안 붙여도 되니까.
그러면 있는 환상은 어떻게 하느냐? 주의 말씀이 다 뜯어낼 거예요. 뜯어내가지고 “너한테 있는 것은 ‘있음’ 그것뿐이다.” “나 이것도 했습니다, 저것도 했습니다.” “아니, 넌 그냥 있을 뿐이야. 거기 존재할 뿐이야. 그 존재로 너는 죄를 지었을 뿐이고.”
그래서 요한일서에 보면 죄 없다 하는 사람은 거짓말하는 사람이라 했죠.(요일 1:8) 그러니까 요한일서 5장 이야기하고 요한일서 1장 이야기하고 안 맞잖아요! 요한일서 1장은 뭡니까? 죄 없다 하는 인간은 없다는 이야기고, 요한일서 5장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범죄하지 아니하나니”라고 했잖아요. 지금 이거 설명한다고 시간이 이만큼 걸렸어요. 두 개가 어떻게 같은 말이 되는가, 이거 설명한다고 시간이 이만큼 지났다니까요.
이왕 시간지난 거 노래 가사나 보고 넘어갑시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금지라는 것이 없어요. 성도한테는 금지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금지를 의식해서 행동하게 되면, 죄로 드러나요. 죄로 드러나고, 그것이 금지 없는 예수님의 피와의 만남에서 그건 바로 죄가 아니고, 내가 그 일을 허락했다는 거예요.
완전히 장발장이에요. 신부 집에 가서 촛대 훔치니까 경찰이 와서 “얘가 촛대 훔쳤어요?” “그거 내가 줬는데? 내가 줬어.” “이 사람은 감히 대통령이 되어서 내란을 공모했습니다.” 그럼 주님께서 “내가 윤석열 태어나게 해서 그렇게 계엄하도록 했는데?” 그럼 끝나죠. 마귀 앞에서.
중요한 것은 적그리스도가 존재한다는 거예요. 적그리스도가 존재해서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를 대체하잖아요.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를 보지 말라고 아주 다짐을 하고 설쳐요. ‘여러분도 훌륭하게 될 수 있습니다. 죄 안 지을 수 있습니다. 성경말씀은 바로 여러분들이 죄 안 짓게 하기 위해 줬습니다.’ 이런 이야기.
그러면 그것은 요한일서 1장 10절,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거짓말이 안 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살아있다,가 아니라 놀랍게도 하나님은 죽어 있어야 돼요. 그래야 7절에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따라서 아브라함의 제사에서 끝까지 아브라함은 자기의 행동을 해요. 아들을 눕혀놓고 죽입니다. 아버지가 눕고 아들이 죽여도 괜찮은데, 아들 눕혀놓고 아버지가 죽일 때, 그때, 스탑! 옆에 예상도 못한 양이 있었어요. 그 양, 아브라함이 준비했습니까? 아브라함 이레에요? 아니에요. 여호와 이레에요. 하나님이 준비하신 거예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양을 허락하시고 이 허락하심에 인간의 있음으로써는, 인간 쪽에서는 건너올 수 없게 만들고, 오히려 알 수 없는 무지한 인간에게 이 허락하심이 하나님 쪽에서 이쪽으로 건너와서 덮치게 만드는 것, 이게 바로 인신공양을 대체하는 대체물이에요.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그 대체물을 안다는 것은, 이미 우리의 있음은 우리 단독으로 있는 게 아니고 주님의 있음의 연장으로서 그리스도 안에 소속된 자로서의 있음이 되는 겁니다. 그래야 요한일서 전체가 마무리될 수 있어요. ‘뭐 죄지었다 해놓고는 뒤에 가서 죄 없다 하니까,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 하느냐?’ 거기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설명이 되어야 됩니다.
그러면 도대체 인간의 있음은 어떤 한계를 보여주는지 가사를 보겠습니다. 영어 팝송 가사 나오죠. ‘Living next door to Alice’. 가사 내용이 굉장히 쉽게 잘 되어 있어요.
[Living next door to Alice]
Smokie(1976)
Sally called when she got the word
샐리가 소식을 듣고 나에게 전화를 했어요
샐리는 주인공을 알고 지내는 다른 어떤 여자 친구에요.
She said, "I suppose you've heard about Alice"
그녀가 “너도 엘리스 얘기 들었지”라고 말했어요
엘리스도 여자입니다. 엘리스는 바로 앞집에 사는데요.
Well I rushed to the window, and I looked outside
나는 창가에 뛰어가 창밖을 보았어요
But I could hardly believe my eyes
그리고 내 눈을 믿기 어려웠어요
As a big limousine rolled up into Alice's drive
대형 리무진이 엘리스네 집 차고로 들어가고 있었어요
이삿짐 센터 차가 리무진이에요. 장례 치러서 간 게 아니고.
Oh, I don't know why she's leaving, or where she's gonna go
오, 나는 왜 그녀가 떠나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I guess she's got her reasons, but I just don't want to know
그녀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싶지도 않아요
'Cause for twenty-four years I've been living next door to Alice
왜냐하면 나는 24년 동안 엘리스 곁에서 살았잖아요
바보같이 24년 동안 사랑한다는 고백을 못했어요, 심약해서. 거절당하면 나는 우사당한다 싶어서. 그러니까 지금 이 집에 주인공이 살고 있어요. 주인공, 있음이죠. 앞집에 엘리스라는 여자가 살고 있어요. 24년 동안이라 했으니까 얼마나 어릴 때부터 같이 컸겠어요. 그것도 있음이에요.
있음과 있음인데 서로 일방적 의미만 던지고 있어요. 왜 상대방에게 내 의미를 전달하지 않느냐? 마지막에 튕겨져 나오면 웃음거리가 되죠. 웃음거리가 어디에 쌓입니까? 내가 청혼했는데 ‘내 취향이 아닙니다.’ 그 소리 듣고 튕겨져 나와서 튕겨져 나온 게 어디에 도달되죠? 마음먹고 고백했던 나한테 오게 되죠. 나는 그러면 어떻게 돼요? 나의 있음 가치는 우습게 되죠.
그럼 그냥 있으면 될 텐데, ‘아, 속상해.’ ‘속상해’가 뭐냐? 환상이에요. 그냥 딸딸 다 떨어내고 있을 뿐인데. 하나님 말씀에 보면 인간은 있음이에요, 마지막 보루는 그것뿐인데 여기서 갑자기 뭐가 나왔어요? ‘속상해’가 나와요. 속상해. ‘아휴, 자존심 상해.’가 나와요. 이건 뭡니까? 타인을 향해 욕망하는 것이 마음대로 안 되었기 때문에 속상하죠.
그럼 나는 있음에서 건방지게 환상 쓰레기로 그동안 자기를 가리고 싸고 살았던 거예요. ‘나 저런 사람 되고 싶어.’ 이런 거요. ‘맞아, 난 저런 사람 맞아. 난 훌륭해. 똑똑해.’ ‘나는 ( )’ 해놓고 괄호에다가 너무 많은 것들을 집어넣은 거예요. 나는 건강해. 나는 안 아파. 내 애는 공부도 잘해. 내 애는 잘 가르쳤어.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말씀으로… 말씀이 예리하잖아요. 칼로 다 떨어내면 남는 것은 뭐냐? 그냥 있어요. 그냥 있을 뿐이에요. 그냥 있음이 환상을 덮어썼으니까 이게 뭐에요? 죄짓는 거죠. 하나님 나라에서 안 받아주는데 잔뜩 자기가 뒤집어쓴 거예요. 계속 봅시다.
Twenty-four years just waiting for a chance
24년 동안 기회를 기다렸어요
왜 24년 동안 기회를 기다렸습니까? 내년에는 할라고. 25년 째 하려고 했는데
To tell her how I feel, and maybe get a second glance
(내 마음을 고백하려) 그리고 나를 (단순한) 친구가 아닌 사람으로 달리 봐주지 않을까 (기대하며)
그러나, 이사해버렸죠.
Now I've gotta get used to not living next door to Alice
지금은 더 이상 엘리스가 옆에 없다는 것에 익숙해져야만 해
We grew up together, two kids in the park
우리는 정원에서 뛰놀며 같이 자랐지요
Carved our initials deep in the bark, me and Alice
나와 엘리스의 이름(이니셜)을 나무에 깊이 새겨 넣었지요
이게 무슨 뜻이에요? 직접 ‘좋아한다. 결혼하자.’는 표현을 한 게 아니고, 빙빙 돌려서 이정도 했으면 이제 내 마음 알아주겠지, 이러고 있다고요. 그거는 자기 일방적인 환상이죠. 여기서 주인공이 엘리스하고 결혼한다 해서 환상이 없어질까요? 어떻게 돼요? 환상이 계속 그대로 있을까요? 계속 그대로 있어요.
인간은 환상쟁이입니다. 인간이 사는 재미는 환상을 자기가 떠안는 재미로 살아가요. 있는 것은 기본이고, 보다 멋있고 대단하고 잘난 채로 있고 싶어요. 이렇게 고백 못한 걸 후회하고 있을 때, 자기는 창가에서 이사 가는 것을 보고 있죠.
Now she walks through the door with her head held high
이제 그녀가 고개를 들고 문을 나서네요
Just for a moment I caught her eye
(그때) 아주 잠깐 그녀와 눈이 마주쳤지요
보지도 말고 그냥 가지.
As the big limousine pulled slowly out of Alice's drive
대형 리무진이 천천히 엘리스의 집 차고에서 빠져 나오네요
Oh, I don't know why she's leaving or where she's gonna go
(여기서 감탄사, 오! 탄식하면서) 오, 나는 왜 그녀가 떠나는지 어디로 떠나는지 모릅니다
I guess she's got her reasons, but I just don't want to know
그녀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싶지도 않아요
그 뒤에 보면 반전이 있어요. 노래 가사가 참 재미있지요.
'Cause for twenty-four years I've been living next door to Alice
왜냐하면 나는 24년 동안 엘리스 곁에서 살았잖아요
Twenty-four years just waitin' for a chance
24년 동안 기회를 기다렸어요
To tell her how I feel, and maybe get a second glance
(내 마음을 고백하려) 그리고 나를 (단순한) 친구가 아닌 사람으로 달리 봐주지 않을까 (기대하며)
Now I've gotta get used to not living next door to Alice
지금은 더 이상 엘리스가 옆에 없다는 것에 익숙해져야만 해
Then Sally called back and asked how I felt
샐리가 다시 나에게 전화를 걸어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어요
샐리가 이제 나섭니다. 나에게 전화를 걸어 ‘어이, 기분 어때?’ 하고 쑥 들어오죠.
And She said, "I know how to help get over Alice"
그녀는 자신이 엘리스를 잊도록 도와줄 수 있다고 말했지요
이게 아가서에 나오는 여우(2:15) 같은가? 나와 여호와 사이를 이간질해서 쑥 들어오는 거죠.
She said, "Now Alice is gone, but I'm still here"
샐리는 말했죠. “엘리스는 떠났지만 나는 여기 (네 옆에) 있잖니”
그리고 말합니다.
"You know I've been waiting for twenty-four years"
“너도 알잖아, 내가 너를 24년이나 기다려왔다는 것을…”
지옥 보내기 위해서 마귀가 세상을 떠나지 않았어요. 마귀는 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죽었지만 마귀는 안 죽어요. 마귀가 존재하고, 인간도 존재하고. 같이 존재함으로써 아까 에베소서 2장 2절, 이 세상의 신, 불순종의 영이 인간의 마음의 영을 그동안 통제하고 관리해왔던 겁니다.
And the big limousine disappeared
그리고 리무진은 서서히 눈앞에서 멀어져 갔어요
Oh, I don't know why she's leaving or where she's gonna go
오, 나는 왜 그녀가 떠나는지 어디로 떠나는지 모릅니다
I guess she's got her reasons, but I just don't want to know
그녀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싶지도 않아요
'Cause for twenty-four years I've been living next door to Alice
왜냐하면 나는 24년 동안 엘리스 곁에서 살았잖아요
Twenty-four years just waitin' for a chance
24년 동안 기회를 기다렸어요
To tell her how I feel, and maybe get a second glance
(내 마음을 고백하려) 그리고 나를 (단순한) 친구가 아닌 사람으로 달리 봐주지 않을까 (기대하며)
But I'll never get used to not living next door to Alice
그러나 나는 엘리스가 옆에 없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을 거야
No, I'll never get used to not living next door to Alice
아니, 나는 엘리스가 옆에 없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을 거야
마지막 구절 보세요. ‘아니, 나는 엘리스가 옆에 없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어.’ 잊어야 된다 해놓고는 마음이 휙 바뀌어가지고 고집이 있어요. ‘아니, 나는 엘리스를 그리워할 거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왜? 엘리스라는 그 존재가 이제 더 이상 실증적으로 옆집에 살지 않지만, 상징적으로 어디에 있어요? 이 주인공의 마음에 있죠.
스모키가 불렀던 노래인데 조금만 들어볼까요, 아니면 여러분들이 들을래요? 조금만 틀어도 저작권 뭐라고 나와서 여러분들이 알아서 들으세요. 아, 듣고 싶은데… 참을 수가 없어. 하여튼 내가 하는 어떤 짓도 나쁜 짓입니다. 어떤 짓도 나쁜 짓이니까 조금만 한번 들어봅시다.
자, 그다음에 보겠습니다. 질문 없는 세계는 무중력 상태에 돌입되죠. 그냥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오이디푸스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오이디푸스’가 신화이지만 인간의 정신 상태를 글로 표현한 거예요, 이 비극을.
누가 아느냐? 그 여왕이 알고 그 여왕과 있던 하녀가 알아요. 저게 내 아들이고 저게 내 남편, 자기 아버지를 죽였다는 걸 알아요. 그런데 말을 안 해요. 왜냐하면 나 있음, 너 있음 그걸로 끝났어요. 옛날에 내 아들이 남편을 죽였다는 사실이, 아들이 새로운 왕이 됨으로써 그 옛날 아버지의 상징을 이 엄마는 자기에게서 떨어내려고 하는 거예요.
계속 입을 다물고 쉬쉬하는 거예요. 그런데 오이디푸스 신화를 계속 보게 되면, 결국은 알게 돼요. 결국은 알게 되면서 그다음에 나오는 오이디푸스의 행동을 주시해야 돼요. 이 모든 것이 내가 눈을 뜨고 세상을 안다고 여기며 판단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내 이 두 눈 탓이다 해서 자기 눈을 없애버립니다.
이미 자신의 존재에 덮어씌워져 있는 이 모든 상징들이 물리적인, 신체가 물리잖아요, 물리적인 눈을 뺀다고 해서 그게 사라질까요? 이게 오늘 강의에서 마지막 중요한 정리 부분인데요. 근본적으로 생각해봅시다.
아브라함이 수풀에 있는 양을 보고 자기 아들 비키라 한 후 그 제단에 양을 잡았습니다. 양을 잡았죠. 그럼 양은 뭐냐 하면, 아들이 죽었다는 것을 대신하는 상징물이죠. 상징물. 그렇죠? 앞으로 내 이후에 아들이 나같이 하나님의 언약으로 복을 받고 계속 그 자손이 복을 받을 것이라는 상징이 양의 존재로서 이미 확정되었잖아요.
그런데 아브라함 때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뭐가 동원되었어요? 양이 동원됐죠. 그럼 신약은 어떻게 돼요? 양이 사람이 되면서, 사람이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이 아니고, 예수님을 보이는 하나의 증인으로서 상징이 되어버린 거예요. 인간은 있다, 없다가 성립이 안돼요. 인간은 ‘있다, 없다’ 서술어가 붙을 자격이 안 되는 거예요.
인간에게는 이름이 붙을 자격도 안 되는 거예요. 모든 이름은 누구 이름입니까? 주의 이름에 의해서, 세상의 모든 일어나는 일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 일어나는 일이 되어버렸어요.
마태복음 8장을 한번 봅시다. 여러분 아시지만 그래도 한번 봅시다. 보시고 제가 질문을 할게요. 8장 8절,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9절에,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라고 했잖아요.
그때 예수님이 뭐를 칭찬했습니까? 이 사람의 행동을 칭찬했습니까? ‘이스라엘 중에 이만한 행동을 본 적 없다’ 이렇게 했습니까? ‘이만한 믿음’이죠. 그런데 지금 백부장이 뭐라고 고백했어요? 집에 들어오지 말라 했죠. 나 같은 인간, 도와주십사 했지만 그럴 필요 없다는 거예요.
뭡니까? 예수님께서는 뭐만 하면 된다? 예수님께서는 말씀만 하고, 말씀이 주가 되고 자기는 말씀에 종속되면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믿음인 거예요, 그게. 그래서 백부장이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이 어디로 인도해요? 믿음이 엿가락이라면 백부장은 그 찐득찐득한 엿가락에 붙어서 가는 거예요.
주님의 믿음이 주님의 천국으로 인도하는 거예요. 백부장의 믿음이 아니고, 주님의 믿음이에요. 왜? 왜 백부장의 믿음이 아니냐? 백부장이 고백했거든요. 말씀이 먼저 있을 때 이런 현상이 일어났으니까 이게 내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난 뒤에 뭐냐? 그다음에 완전히 코미디죠. 나가, 나가, 나가! 천국이 자기 자리도 아닌데 떡 있는 거예요,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그래서 주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나가, 나가, 나가! 어딜, 네 자리도 아닌데. 너희는 저 어두운 데 가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해놓고 이 자리는 누가 차지해야 된다? 말씀이 나를 만들었다는 이 사람이 천국을 차지해야 된다.
왜? 나는 상징이니까. 누구의 상징? 나는 실재가 아니고 주님의 상징이니까. 분명히 손 있고 세포 있어요. 거울 보면 내 모습만 비치지, 주님의 모습이 안 비쳐요. 없어요. 그런데 보이는 이것을 상징으로 이해해야 된다는 거예요. 실재는 따로 계시니까. 예수님이 따로 계시니까요.
끝으로 빌립보서 4장 13절, 결론 삼아 말씀드리겠습니다. 다 같이 읽어볼까요, 빌립보서 4장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잘 아셨죠? 이걸 한번 반 토막 내서 볼게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 그걸 뺍시다. 빼고 다시 읽어봅시다.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러면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합니까? ‘네가 슈퍼맨이야?’ 이렇게 할 거예요. 내가 원하는 것을 다 하는 게 아니고, 아까 허락. 주께서 허락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이루어진 상태다, 이 상태가.
분명히 중국집에서 짬뽕을 주문했는데 뭐 바빴는지 짜장면이 왔어요. 그럼 성도라면 뭐라고 해야 돼요? 이것은 주방장이 실수한 게 아니고, 주께서 오늘 너 짬뽕 먹지 말고 짜장면 먹으라고 허락하신 거예요.
범사에 감사하는 거예요. 현재 주님이 살아있음을 중국집에 앉아서 보여주는 증인 노릇을 해야 되니까. 성도로 살기 참 쉽죠잉? 뭘 해도 죄 아니고, 그 점에 대해서 또 모든 것이 감사하고. 뭘 안 해도 주께서는 또 일을 벌이시고. 오늘은 아무 일 없겠지, 하는데 식당 갔다가 휴대폰 놔두고 오고.
불신자 같으면 “주여, 왜 자꾸 나를 괴롭히십니까?” 이러는데, 신자 같으면 “오늘도 왜 이렇게 내가 예상 못한 감사거리를 주십니까?” 이러고 있다고요. ‘그것도 찾아야 감사가 되지, 못 찾고 잃어버리면…’ 그런 또 환상을 꾸지 마세요. 싸대다 싸대다 두 시간 동안 싸대다가 겨우 전화연결이 되어서 찾았단 말이죠. “주여, 오늘도 주께서 너무 힘들게 하십니다.”하면 주께서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휴대폰 누구 건데?” 따지면서 “네가 있는 것은 ‘네가 있다’ 그것뿐이야. 끝.”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참 주께서 놀라운 하나님으로 찾아와주심을 감사합니다. 그전에 우리는 내 좋으라고 믿는 하나님, 바알이었습니다. 엉터리 하나님이었고 마귀였습니다. 이제는 마귀를 신봉했음을 이제사 아는 기쁨과 감사가 계속 죽을 때까지 이어지게 해주시고, 주의 있음에 비로소 우리가 종속적으로 있음의 그 관계가 항상 주의 감사로 채워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