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다니엘 12장(한때 두 때 반 때)140320-36강a-이 근호 목사
오늘 다니엘 12장 마지막으로 끝냅니다. 그동안 길게 달려왔는데 그 다니엘이 오늘 강의로서 일단 다니엘 강의를 그만하면서 다니엘이 얼마나 어려운 책인가를, 중요한 책인가를 제가 언급을 하고자 합니다. 다니엘 12장 1절부터 보는 게 아니고 11절부터 봅시다. 왜 11절부터 보느냐 하면 거기에 날짜가 나와요.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여 멸망케 할 미운 물건을 세울 때부터 일천 이백 구십일을 지낼 것이요 기다려서 일천 삼백 삼십 오일까지 이르는 그 사람은 복이 있으리라” 45일 더 길죠.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 날에는 네 업을 누릴 것임이니라” 다니엘 12장, 마지막이 이렇게 끝납니다.
이걸 지금 누구에게 이야기했죠? 다니엘보고 이야기했죠. 여기서 1290일, 이게 뭐며 1335일, 이건 또 뭐냐, 이걸 설명을 해야 되는데요. 그 힌트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11절에 보면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할 미운 물건을 세울 때부터”라고 그렇게 1290이라고 돼 있습니다.
이걸 지금부터 설명할 텐데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제 강이 들은 가운데서 제일 어려운 시간은 오늘 보내야 될 것입니다. 너무너무 난해해요. 난해할 때는 제가 미리 하는 방법이 있죠. 쉬운 것부터 이야기해서 어려운 것으로 나아가는 제 방법을 쓰겠습니다.
제가 오늘 새마을 기차 타고 수원에 오면서 7호 칸 34번이 제 자리였습니다. 그러면 봅시다. 제가 시간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성경 다니엘에서 묵시 세계에서 시간을 어떻게 다루는가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여기 새마을이 1, 2, 3, 4, 5, 6, 7 … 앞에는 열차가 있고 뒤에는 객차가 있죠. 1, 2, 3, 4, 5, 6, 7 … 제가 여기 7호 칸에 있었거든요. 동대구에서 기차 섰을 때 이렇게 들어가서 이렇게 갔습니다. 그러면 보세요. 4에서 5를 거쳐서 6 거쳐서 7호 칸에 갔죠? 자, 1을 과거라고 보고 7을 마지막 종말로 봅시다. 그러면 우리의 시간은 뭐냐 하면 저는 4에서 5, 6, 7을 갔기 때문에 이 시간대에서 종말로 가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구미 지나면서 보니까 열차가 이렇게 앞으로 달리니까 7호 칸에서 분명히 나는 4, 5, 6, 7로 분명히 이렇게 방향을 4에서 7쪽으로 이렇게 갔다 말이죠. 그런데 열차 전체는 앞으로 이렇게 가더란 말이죠. 특히 철로가 휘어지는 대목에서는 7호 칸의 차 안에서 보니까 앞의 열차가 방향을 트는 것까지 다 보이더란 말이죠. 나는 방향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4에서5, 6, 7 쪽으로 갔는데 전체 열차는 내가 가는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이렇게, 이렇게 가는 거예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역사라 하는 것은 시간의 흐름을 우리는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서 미래로 이렇게 가는 겁니다. 여기도 마찬가지로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미운 물건을 세울 때부터 일천 이백 구십일을 지낼 것이요”라고 돼 있다 말이죠. 1290일 이니까 1290일이라는 것은 1200도 아니고 1280도 아니고 1290이 될 때 이게 완료가 되죠. 제 말이 뭔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1290이라고 했을 때는 1270도 아니고 1285 이것도 아니에요. 점점 더 4에서 5, 6 점점 더 가잖아요. 그런데 만약에 이렇게 종말을 이야기했던 그 전체가 거꾸로 간다면 새마을기차처럼, 거꾸로 간다면 우리가 기다리는 방향으로 가는 겁니까? 역사는 반대로 가는 거예요? 전체는 반대로 간 거죠.
자, 그래서 제가 이야기합니다. 사람은 과거 현재 미래로 시간이 흐른다고 생각합니다. 그 역사중심, 시간 중심은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내가 가는 방향으로 우리는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한 방향밖에 몰라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방향을 우리 인간들의 방향을 인정하면서 그걸 허용하면서 전체는 거꾸로 다른 방향으로 반대로 했을 때 우리의 시간 개념은 차질이 발생되는 거예요. 우리의 시간 개념은 차질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럼 어떤 차질이냐 하면 1290일 자체를 도달지점으로 보는 것은 우리지만 그걸 도달지점으로 보지 말고 이걸 출발점으로 보자는 거예요.
마치 겨울에 엄마가 뜨개질할 때 고양이 좋아하는 둥그런 실 뭉치 있잖아요. 실 뭉치가 어느 날 보니까 하나의 스웨터가 되고 실 뭉치는 날라 가 버리죠. 그 실 뭉치를 1290일, 또는 1335일로 보자 말이죠. 보게 되면 그 실에서 솔솔 풀리면 이게 어디까지 풀리느냐 하면 창세기까지 도달되겠죠. 왜? 시간이 거꾸로 흐르니까.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흐른다고 하잖아요? 만약에 그게 진짜 시간이 그렇다면 어떻게 해요? 누가 거꾸로에요? 우리가 거꾸로인 거예요. 열차가 지금 이리 가고 있는데 나는 나 혼자 4, 5, 6, 7로 가고 있기 때문에 열차는 반드시 내가 가는 방향으로 같이 가야 된다고 고집을 부리면, 이건 내 고집이라니까요. 일방적인 내 고집이지 이건 열차 기관사 뜻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내 고집이거든요.
그럼 내 고집은 꺾여야 되고 기관차 운영에 따라 줘야 되죠. 지금까지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창세기가 시작이고 요한계시록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잖아요. 왜 그렇게만 생각했느냐 말이죠. 그런 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조지기 위한 덫이라는 생각을 못해봤어요? 인간이 스스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이유를 대기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시간을 흐르게 했다는 생각을 못했습니까?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을 뭐라 합니까? “나는 시작이요 끝이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끝이요 시작이 되는 거예요. “나는 알파요 오메가”만 생각하지 말고 오메가와 알파인 분이 예수님이다 말이죠. 이렇게 갈 수도 있는 거지만 이렇게 갈 수도 있는 분이란 생각을 왜 미처 못 했느냐 말이죠.
그러니까 이 1290일이 아무리 봐도 풀리지 않는 거예요. 요렇게 따져도 저렇게 따져도 1290일 푼 주석 책이 없습니다. 글도 논문도 없어요. 이 대목에서 손을 놔버린 거예요. 70이레도 못 푸는데 1290일을 어떻게 풉니까? 풀 수가 없어요. 주석 찾아보세요. 아무도 설명 안 해놨어요. 요한계시록 논문 보세요. 설명 못합니다. 도대체 이게 뭔지.
발상의 전환을 못하니까, 발상의 전환을!! 주님한테는 얼마든지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왜 몰랐느냐 이 말이죠. 세례요한이 말했죠? 내 뒤에 오실 분은 나보다 앞서다는 이야기를 왜 세례요한은 알고 있는데 우리는 왜 미처 알지 못했느냐 이 말이죠.
미리 아시고 아담을 만들었다는 생각을 우리는 왜 못하느냐 말이죠. 주님이 미리 아시고 아담을 만들어 놓고 미리 아시고 뱀에게 보냈고 미리 아시고 선악과 따먹게 했다는 사실을 왜 몰랐느냐 이 말이죠.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했잖아요? 우리가 알기는 선악과만 따먹지 말지 생명나무는 따먹으라는 나무라고 알았죠.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졸지에 무슨 나무도 못 따먹는 나무가 됐어요? 생명나무를 따먹을 줄 알았던 생명나무가 선악과 따먹는 순간 생명나무가 ‘이거 따먹기만 해봐라.’ 이런 나무로 바뀌었죠?
우리는 미처 몰랐죠. 선악과 생명나무가 한 뿌리로 배후에 숨어있는, 그렇게 엮여져 있다는 걸 몰랐죠. 우리는 나무가 두 송이인 줄 알았죠. 선악과하고 생명나무가 이게 두 나무가 아니고 그 밑바닥에는 연결된 나무라는 사실을 이걸 아담이 건드려줘야 돼요.
전에 있던 교재 ‘복음이냐 교회냐 그 제일 마지막 논문에 뭐가 있습니까? 선악과를 건드려줘야 생명나무가 그 가치를 보여준다고. 아담이 선악과를 건드리기 전까지는 생명나무가 뭔지도 몰랐어요. 선악과를 건드리니까 ’생명나무 따먹지 마라.‘ 고 돼 있어요.
그러면 순서가 우리 인간 순서는 선악과 건드리고 생명나무 못 따먹게 돼 있죠. 주님의 순서가 반대라면 어떻게 됩니까? 생명나무가 뭔지 보여주기 위해서 미리 선악과 덫을 놓은 거예요.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죠?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어놨잖아요. 그러면 하나님한테는 모든 것이 ‘아니요’란 게 있을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하나님이 뭐가 무서워서 ‘아니요“가 있겠습니까? ‘그거 해서는 안 돼.’ 부모가 자식보고 ‘이거 먹어서는 안 돼.’ 이 말은 다른 말로 부모도 무서운 게 있다는 말이죠. 행여나 애가 이거 먹어서는 안 돼. 부모가 스스로 공포를 느끼고 두려움을 느끼는 셈이 되거든요. 하나님한테 그런 게 있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 무섭고 두려운 게 있습니까? 하나님이 마귀가 무서워서 ‘어머나’ 하고 이런 하나님이십입니까?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선악과 먹고 정녕 죽으리라 이 말은 그건 덫이었고 다른 진짜 실상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건드리면 걸려드는 것, 건드리면 덫에 걸려드는 다른 비밀이 있었던 거예요. 그 비밀은 인간은 모르고 성부와 성자 사이에 창세전에 이미 모든 게 확정 나버린 그 비밀, 그래서 성경에서는 복음을 뭐라 합니까? 비밀! 그것도 에베소서 보면 창세부터 숨겨온 비밀! 누굴 상대로? 인간을 상대로.
보험회사 직원이 보험 가입하면서 ‘그런데요. 이 보험 가입하면 내가 만약에 암에 걸리면 얼마 받습니까?’ 하면 ‘ 그거는 비밀’ 이러면 보험 가입하겠어요? 내가 미리 알아야 가입할 게 아닙니까? ‘그거는 걸려봐야 아는 거예요.’ 이러거든요. 암에 직접 걸려보면 당신이 액수를 얼마 받느냐? 그건 그때 안다는 거예요. 그래도 말합니다. ‘가입할 거요? 말거요?’ 다시 말해서 ‘믿을래? 안 믿을래?’ 예수 믿을 거야? 안 믿을 거야? 아니 미리 예수 믿으면 이런 거, 이런 거 있다고, 이런 혜택 준다고, 예수 믿으면 천국 가고, 예수 믿으면 지옥 안 가고 이런 걸 줘야 우리가 ‘아하 좋구나.’ 하고 그걸 받아들여서 믿죠. 그 믿음이 가짜에요. 그게 걸려든 거예요.
사람이 따져서 믿는 것은 가짜입니다. 그거 누구 좋은 거예요? 자기가 평소에 결핍된 거, 모자란 거, 사실은 죄악 된 본능에서 요거만큼은 얻었으면 좋겠는 거, 다시 말해서 이 땅에서는 고생하지만 죽어서는 좋은 나라에 가고 싶은 그런 탐욕, 죄, 그런 것들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데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 하니까 ‘옳다구나, 예수 믿는 걸 믿어야지.’ 그거는 덫에 걸린 거예요. 그게 가짜 믿음 이예요. 유대인들이 걸려든 거예요.
율법 지키면 뭐준다? 복 준다. 이거 유대인들이 걸려든 거예요. 율법 지키면 복 분다 하니까 자꾸 율법 지키는 거예요. 자꾸 율법 지키니까 점점 더 깊이 걸렸어요. 얼마나 깊이 걸렸으면 메시야를 죽였겠습니까?
신명기에 보면 이 말을 지키면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와도 복을 받죠. 못 지키면? 못 지키면 저주 받는다. 이건 들리지도 않고 나중 문제고 무조건 따내야 하니까 한 구찌 따내야 하니까.
동네 보면 뽑기 있죠? 뽑기 실패하면 200원 그냥 날리잖아요? 그런데 200원 날리는 건 생각 안하고 눈앞에 뭐가 보입니까? 살림살이, 인형들이 있고, 애들이 ‘엄마, 아빠, 이거 뽑기 해줘. 못하면 아빠 바보야.’ 이렇게 놀리고 있으니까 아빠 자존심 때문에 하는데 200원만 날리는 게 아니고 하루 종일 하다 보면 2천 원, 2만원 날린다 이 말이죠. 도박이 그런 거 아닙니까? 도박을 한방이거든요. 그저 한방만 바라보고 도박하고, 로또도 결국은 뭡니까? 로또 1등하면 2천 원. 이러면 누가 합니까? 아무도 안 해요. 로또 1등하면 50억, 이거는 자기가 50억 더 써도 할 거예요. 이게 바로 인간입니다.
미래는 1290일 지나고 1335일 지나면 뭐 있겠지? 없어요. 이 바보 같은 인간이 1290일 지나면 없어요. 왜, 1290일 지나면 뭐가 기다리느냐 하면 바로 ‘십자가’가 기다린다니까요. 이리 와, 너 죽었어.‘ 이 십자가가 기다려요. 1290일 기다린 유대인들은 결국은 무슨 사건 일으켰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사건을 일으켰죠.
이 다니엘 1290일 지나면 구원 온다. 천국 온다. 하는 이것이 하나의 미끼라니까요. 미끼! 미끼인데 왜 미끼를 던지느냐 하면 그 미끼에 걸려들어야 그동안 감추었던 비밀이, 주님이 준비해 놓은 비밀이, 복음의 비밀이, 걸려듦으로 말미암아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개그 콘서트 보면 어떤 코너에 보면 후궁들이 ‘왜 이리 시끄러우냐?’ 하니까 ‘말 못할 아픔이 있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어떻게 말 못할 아픔을 내 앞에서 하느냐?’ ‘말 못할 아픔이 뭔지 알려드려요? 오골, 오골.’ 하면서 하죠. 그러니까 그 후궁들은 뭘 몰라요? 자기 존재에서 나오는 아픔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몸이 아프고 어쩌고 저쩌고 돈이 없고, 하는데 주님은 뭐라 합니까? ‘말 못할 아픔을 진짜 알려드려요? 하고 내신 게 십자가에요.
우리는 나름대로 고생한다고 여기는 것과 인간들 위주로, 같은 몸을 지닌 예수님의 아픔, 진짜 말 못할 아픔을 알려드려요? 하고 십자가! 우리는 이 죄악 된 인간이 마땅히 받아야 될 벌인데도 불구하고 이 억울해 하는 못 된 나밖에 모르는, 나의 존재만 챙기는 이런 어설픈 나의 고통과 거기 따르는 어떤 해방을 기대하는 그 구원론과 진짜 모든 것을 완료해서 아버지만 아시고 아들은 반드시 십자가 죽어야 되는 것이 이미 확정된 지경에서 아버지께 버림받아야 될 예수님의 십자가의 아픔, 그 아픔 사이가 1290일입니다.
날짜로 계산해서는 이게 안 나오죠? 그래서 제 말은 이거에요. ‘시간은 없다.’에요. 시간의 형식은 1290일, 하루하루가 1290일 동안 반복한다는 거예요. 형식은 나와요. 하루 해 뜨고 해 지고 하루잖아요. 그게 1290일 이 말 아닙니까? 우리가 아는 형식을 사용했는데 실제로는 시간은 없습니다.
왜 시간이 없느냐? ‘왜 목사님 시간이 없습니까?’ 1290일 기다려도 메시야가 안 와요. `16년 동안 해도 애인이 없는 것처럼, 1290일이 돼도 주님이 안 와요. 그러면 이 1290일 계산은 맞았다는 거예요? 틀렸다는 거예요? 틀린 거죠. 내가 4호차에서 5호차 6호차 7호차 가니까 열차도 내 맘대로 저리 가야 된다고 그거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온몸에 흐르는 시간 시간개념입니다.
우리는 내가 눈 떠서 해 뜨고 해 지면 하루에요. 주님은 그런 하루 인정한 적 없습니다. 시간이 흐른다는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시간 자체는 메시야의 오는 걸 봉사하도록 돼 있는데 우리의 시간상 백날해도 백날 천날 봉사해도 메시야가 우리 시간 따라 오시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겐 시간이 있다? 없다? 시간은 없는 거예요. 시간은 주님을 요청하는 그런 기능을 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은 주님의 완성에서 새삼스럽게 터져 나와야 돼요. 아시겠습니까? 제 말이 어려운 거예요. 제 표현이.
지금까지 생각한 것은 시간은 누구에서 나와요? 내가 여기 있으매 내가 생각하는 내가 알고 있는 시간도 하나님이 같이 알아야 된다고 말도 안 되는 내 중심으로 우기는 거예요.
인간은 항상 진리에 관심 없어요. 자기만 관심 있어요. 이걸 가지고 뭐냐 하면 그걸 실천적 유아론이라 해요. 유아론이란 말은 자기밖에 몰라요. 세상에, 세상에 진리를 외치지만 막상 세상에 나가면 모든 살아가는 모든 삶은 누구만 배 채우면 돼요? 나만 배 채우면 행복해요.
우리가 집에 키우는 강아지나 개 보면서 개가 참 무식하게 산다고 욕하죠. 왜, 개는 사료만 주면 되니까. 개가 북한 핵문제에 대해서 고민한 적 있습니까? 없잖아요. 개는 안개 꼈다고, 스모그 현상 있다고 고만하지 않아요. 개는 오뉴월만 되면 팔자 늘어져요. 배 쩍 벌리고 이건 옷도 안 입었어요. 옷 입혀주는 착실한 주인도 있습니다마는 옷도 안 입고 그냥 자고 있어요. 그게 오뉴월의 개 팔자입니다.
인간은 어때요? 인간은 자기밖에 모르잖아요. 개나 인간이나. 차라리 진짜 ‘제가 갭니다.’라고 고백했던 수로보니게 여인의 말이 맞아요. ‘주님 보시기에 저는 개라고 할 수 없어요. 개라고 하면 개가 화냅니다.’ 개보다 더 못하죠. 개가 예수님을 죽이지는 않았잖아요. 인간이 죽였죠.
정리합시다. 인간은 시간이 없습니다. 시간이 없고 자기중심으로 시간을 조작해 냈고 하나님은 그걸 이용해서 1290일 이라고 덫을 놓았고 1290일 지나면 메시야 온다고 생각했는데 오지도 않았고 1335일, 45일 차이가 나거든요. 1290일이면 1290일이지, 45일 추가해서 하는 건 뭐에요? 장사해서 그냥 팔려니까 아까워서 45일 추가해서 팔려는 거예요? 어떻게 된 거예요?
45일 추가의 의미가 뭐냐? 다시 합니다. 진정한 시간이라 하는 것은 메시야를 모실 수 있는 시간일 경우만 진정한 시간입니다. 왜냐, 모든 시간은 주님께 봉사하기 위해서 주께서 만들었기 때문에. 골로새서 1장 16절, 세상의 모든 것들은 주님을 위해서 있는 겁니다. 시간이든 공간이든.
자,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알았다치고 내가 보니 전혀 아는 얼굴도 아니지만, 그 다음에 더 어려운 거 해봅시다. 그러면 주님의 시간을 알아채면 간단한 문제네요. 모든 시간은 다 창세전에 예정된 것이다. 오케이, 창세기에 있는 성부와 성자의 뜻을 위해서 시간이 지속된다. 그러면 그 시간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종말론부터 거꾸로 창세기로 찾아간다. 오케이.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오케이’가 아니에요. 뭐가 있느냐 하면 여기 11절에 보면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할 미운 물건을 세울 때부터 일천 이백 구십일”이거든요. 11절에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할 미운 물건을 세울 때부터 일천 이백 구십일”이니까 결국 시간이라 하는 것은 지금 우리는 건방지게 하나님과 우리를 직접 상대하려고 건방을 떨었는데 주님께서 우리의 건방짐에 동조하지 아니하시고 뭘 앞장세우느냐 하면 악마를 앞장세웁니다. 우리 인간은 여기 있는데.
우리는 주님과 직접 상대하려는데 중간에 주께서 뭘 집어넣는다? 미운 물건이죠. 마귀, 악마를 중간에 집어넣어 버려요. 그러면 결론부터 먼저 이야기하면, 시간이란 악마를 체포하기 위한 용도로 집어넣은 거예요. 우리는 지금 구원받고 싶어서 시간만 알려주시면 시간 알아서 구원받겠습니다. 메시야 오시는 시간 알아서. 이 우리의 구원 자체가 이미 인간은 어디 속했다? 악마에게 속한 인간이기에 그따위 소리를 할 수밖에 없는 줄 아시고 이 인간을 직접 상대하지 아니하시고 인간을 다스리고 통치하고 있는 공중권세 잡은 이 악마를 체포하는데 소비되는 시간이 1290 이예요.
어려운 거 하나 해봅시다. 이 세상의 시간 따라서 모든 것이 변합니까? 안 변합니까? 변하죠. 변할 때 모든 것이 쇠퇴합니까? 쇠퇴하지 않습니까? 다 쇠퇴하죠. 그러면 돈 봅시다. 동전이란 것이 물질이죠. 물질이니까 시간이 지나면 동전이 100원 짜리든 10원 짜리든 500원 짜리든 동전이 닳으면 변하죠. 그럼 집사님, 동전이 500원 짜리가 닳으면 은행에서 400원 쳐줍니까? 200원 쳐줍니까? 똑같죠.
이게 신기한 거예요. 이 세상에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인간들이 아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잡히지 않는 게 있어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이상하게 원래 동전, 돈, 지폐, 이거는 찢어지고 후패하고 썩어야 되는데 이상하게 사람들은 썩은 500원 짜리도 500원으로 바꿔주고 생생하게 갓 구워 낸 500원 짜리도 1000원 쳐주는 게 아니고 500원 쳐줘요.
그럼 인간 머릿속에 물질 이상의 가치를 돈에서 구성하고 있잖아요. 시간의 변화에도 변화하지 않고 있는 것, 이건 인간의 역사와 시간으로 포착이 되거나 체포가 불가능합니다. 수갑에 묶을 수가 없어요. 인간 위에서 노는 거예요.
한번 물어봅시다. 집사님, 10만 원 짜리 물건 2개 있는 게 좋습니까? 20만 원 현찰이 있는 게 좋습니까? 돈이 더 좋죠. 20만 원 있으면 이 물건 싫다고 다른 걸로 바꿀 수 있잖아요. 돈이 더 좋죠. 그러면 사람이 사는 데는 물건이 필요하지, 돈이 필요합니까? 농사짓는데 호미가 필요하지, 돈으로 땅이 갈리지 않고 호미가 필요하잖아요. 필요한 것을 마르크스는 사용가치라 하는데 사용가치가 필요한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용가치를 원하는 게 아니고 교환가치, 시장에 나가서 바꿀 수 있는 걸 원하는 거예요. 그런데 물건 바꾸는 건 괜찮아요. 문제는 자기 자신을 바꾼다니까요.
자, 이건 성경에 나온 이야기니까 보세요. 사람이 살기 위해서 삽니다. 그러면 사람이 살기 위해서 살 경우에 누가 중요합니까? 내가 중요하죠. 내가 중요하기 때문에 나는 어떻게든 살아야 돼요. 내가 살기 위해서 삽니다. 그런데 갑자기 여자가 결혼을 했는데 남편이 농사를 착실하게 짓는 남편인데 나라에서 차출해서 전쟁에 나가서 전사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농사를 못 지었다 말이죠. 농사는 못 지었는데 애들은 무럭무럭 자라니까 그 식대를 벌기 위해서 농사는 힘센 남자가 지어야지, 여자가 하니까 이건 비료 사야하고 농사해봤자 팔아도 장사를 못하고 사기를 당했다 말이죠. 그럼 어떻게 합니까? 자기 몸을 바치는 거예요.
자, 여기서 모순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내 몸을 비싼 부잣집에 자기를 돈 받고 팔아버렸어요. 그러면 나는 그 집에 하나의 가구가 되고 물체가 되죠. 그 집이 어렵다 하면 나를 또 다시 팔아버립니다. 이게 ‘노예 12년‘이란 요번에 아카데미 상 받은 영화 주제에요. 그걸 내가 비행기에서 봤어요. 돈 주고 못 보고 비행기에서 봤는데 재미가 진짜 없지만 이게 비극이거든요.
이게 모순된다 말이죠. 살기 위해서 몸을 팔았는데 자기가 이제는 물건이 돼 버리면 물건은 산다. 죽는다. 성립이 안 돼요. 이 안경, 안경이 살았니? 죽었니? 이 묻는 자체가 내가 나빠요. 안경은 죽었다. 살았다. 성립이 안 돼요. 노예는 죽었다. 살았다. 그걸 말할 권리가 없는 자가 노예에요. 주인이 살면 자기도 살고 주인이 어려우면 자기도 물건이 돼서 다시 팔리는 거예요. 팔려서 노예가 말 안 들으면 죽여도 괜찮아요. 왜, 노예는 인간이 아니고 노예 붙어 있는 값이 문제에요. 그 값이 노예가 아프면 어떻게 됩니까? 아프면 약값이 들어가니까 주인이 약값이 없으면 어떻게 돼요? 죽이는 것이 헐하게 친다니까요. 그때는 죽여 버려요. 심지어는 주인이 춤추고 있는데 노예를 싣고 가다가 노예가 시끄럽게 하니까 노예가 상품이니까 노예를 반짝 들어서 물속에 집어넣어버려요. 내 물건 내 맘대로 하는데, 내가 내 물건 내 맘대로 벗는데, 안경인데, 네가 왜?
노예 입장에서는 자살 안 했죠. 왜냐, 노예지만 내가 살려고, 내가 스스로 내가 살아보겠다고 한 거예요. 이게 ‘노예 12년‘의 미국 이야깁니까? 오늘날 우리 자본주의 사회 이야깁니까? 우리 사회, 우리 이야기라고요. 자기를 사물로, 상품으로 팔아먹어야 이 세상은 내가 살아요.
성경은 뭐랬는가? 성경은 이렇습니다. 참, 귀한 거 나왔네요. ‘50년 희년’ 이야기가 있습니다. 50년 희년이 뭐냐 하면 7X7=49+1, 아닙니까? 49년 다음에 50년이 되면 네가 주인이 어떤 식으로 노예를 갔던 간에 다시 땅 다 돌려주고, 땅 안 돌려주면 소용없어요. 또 팔리니까. 땅 다 돌려주고 그 사람 다 돌려줘라. 이유는 너희들은 애굽에서 종 되었던 사람인데 누가 값을 치르고? 이 주의 이름이 주님한테 자기 어린양의 피라는 것을 문설주에 발라서 값을 치르고 피 값으로 애굽에 있던 히브리인 자기 사람으로, 품꾼으로 삼아서 약속의 땅이라는 그 가나안 땅을 자기 임대차 한 거예요. 세금이 십일조고. 레위기 25장에 보면 나옵니다. “너희들은 나의 품꾼이고 내가 너의 주인이다.”
나봇이 자기 포도원 땅을 값을 쳐준다 해도 아합 왕에게 안 판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그 땅이 누구 땅입니까? 그 땅이 여호와 땅이기 때문에 이미 주인이 따로 있어요. 자기 주인이 주님이라면 우리는 이 세상에 어떤 것도 나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하늘의 태양이 두 개가 될 수 없어요. 집사님 주인이 주님이십니까? 그러면 어떤 누구도 나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노예의 죽고 사는 것은 누구 손에 달려 있습니까? 우리 주인님에게 달려있지 나한테 달려있는 게 아니에요. 노예가 살려준다고 살려줄 줄 압니까? 죽여 버리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스스로 살려고 시도합니까? 기껏 스스로 살아봤자 기껏 하는 것이 살기 위해서 내 몸을 물건으로 내 놓아야 될, 진열장에 내놓듯이.
제가 그런 데는 안 가봤습니다마는 TV에서 옛날 청량리에 보니까 여인들이 한복을 입고 밤중에 쇼 윈도우에 죽 앉아 있어요. 손님이 뷔페 고르듯이 고르고 있어요. 깜짝 놀랐어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애들 연수 보내고 애들 유학 보내는 것도 결국 시장에서 그거 내놓은 거예요. 자기를 상품으로 내놓는 거예요.
지금 희년 이야기했죠? 자, 보세요. 희년은 뭐냐 하면 우리는 시간을 7X7+1=50이잖아요. 어디서 어디까지 흘러갑니까? 내가 여기 존재한다. 앞으로 49년 지나고 1년 지나면 희년 된다. 방향이 내 쪽에서부터 방향이 어느 쪽으로 갑니까? 희년으로 이쪽으로 가죠.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합니까? 희년부터 시작해서 거꾸로 소급하죠. 다시 너희 땅 다 내놔, 저 사람 땅 주인 다 돌려줘. 왜? 처음부터 이 땅의 주인은 내가(하나님) 이 땅의 주인이었어. 어디 네 맘대로 팔아먹고, 어디를 누구 땅이라고 해. 내가 그동안 땅을 넓게 해주니까 네 땅이라고 해? 다시 원상대로 돌아가. 그렇게 되는 거거든요.
그러니 보세요. 하나님의 시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시간도 원래 없고 우리 시간도 원래 없어요. 왜냐, 감추었던 비밀이거든요. 잘 들어요. 어려우니까. 우리가 시간을 따지는 순간 그 자리에 중첩되어서 뭐가 등장합니까? 주님의 시간이 등장해요. 등장하면서 우리의 시간은 어떻게 돼요? 방향이 정반대가 되는 거예요.
오늘 강의 어렵더라도 여러분이 녹음되고 하니까 잘 들어보세요. 처음에 주인하고 노예하고 땅 흥정할 때는 인간 대 인간하고 따지는 거예요. ‘몇 년간 쓸 건데요?’ 몇 년간 쓰고 돌려주고 갚아야 돼.‘ 그들의 시간은 뭐냐, 인간과 인간들끼리 자기중심적 시간만 논하고 있어요. 그런데 저 위에서 팔짱만 끼고 있는 거예요. ’누구 맘대로? 시간이 누구 건데? 누구를 위한 시간인데?‘ 누구를 등장시키기 위한 시간인데 자기들끼리 몇 년 지나고 몇 년간 쓰고 돌려주고, 누구 건데? 네 몸 자체가 누구 거냐 말이죠. 그래 놓고 나중에 49년 지나고 50년에 오시는데 ‘다시 돌려줘’라고 하는 겁니다.
다니엘 마지막 시간이기 때문에 제가 마지막을 어렵게 끝나는 것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4장 18절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하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 해” 주의 무슨 해라 합니까? 주의 은혜의 해. 이게 희년이거든요.
희년 때가 되게 되면 그동안 시간은 주님의 메시야를 반기기 위해서 메시야가 털실이고 그 짜여 진 스웨터가 인간의 남아있는 역사입니다. 아까 새마을 기차에서 나는 4, 5, 6, 7로 갔잖아요. 그래서 맨 끝에 탔잖아요. 타고 보니까 열차가 1호 쪽으로 가고 있는 거예요. 내가 생각하는 종말은 종말이 아니었고 종말이라고 여겼던 그것이 시작이었던 거예요.
그러면 그 종말은 뭐냐, 종말은 내가 가면 되느냐? 내가 가는 것이 아니고 그동안 나를 지배했던 마귀가 우리한테 그렇게 속여 왔던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체포하는 것이 아니고 뭐가 먼저 체포가 성급한 겁니까? 악마를 체포해야죠. 악마를 체포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 1290이고 1335일이 되는 겁니다.
다니엘 12장 오늘 마지막입니다. 악마를 체포한다? 그 악마를 체포하는데 그게 되느냐? 제가 악마를 체포하는 인간의 시간은 안 된다 했죠? 왜냐, 아까 동전 이야기 했잖아요. 흙 묻는 500원 동전도 500원이고 오래된 동전도 500원이고 방금 나온 동전도 500원이고, 이거는 동전 자체가 상품가치가 있다? 없다? 없고 우리는 동전을 상품이상으로 보는 거예요. 뭔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시간이 흘러도 영원한 500원. 그런 게 인간 세계에 있는 거예요.
따라서 인간은 20만 원짜리 물건 두 개 있는 것보다도. 두 개 있어봐야 얼마 안가면 고물 돼서 10만 원도 못 받습니다. 20만 원 짜리 두 개 보다도 20만 원 현찰이 더 좋은 거예요. 왜, 돈은 영원하니까.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해서 하나님의 라이벌로 이 땅에서 유일하게 되는 것이 바로 돈 이예요. 사람은 이유도 목적도 없이 돈을 좋아해요. 우리의 상식은 사람은 물건을 좋아하게 돼 있어요. 밭 있는 사람은 호미를 좋아하고 또 쟁기도 필요하고 컴퓨터도 필요한데 더 나아가보니까 컴퓨터 살 돈이 더 좋고 호미보다 호미 살 돈이 더 좋고, 돈이 좋다는 말은 뭐냐 하면 바로 내 식대로 살기 위해서는 쟁기나 컴퓨터보다도 변하지 않는 것을 내가 소유할 때 나는 그 돈과 더불어 나도 영원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는 겁니다. 그런 가능성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힘! 자본주의에서는 돈이지만 힘에 의해서 종속되게 돼 있는 인간이 되라고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게 한 겁니다. 따먹으라고 부추기는 그 악마가 사실은 우리가 직접 주님을 애초부터 상대할 상대는 안 되고 중간에 집어넣어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상대하려고 하나님께서 임의로 집어넣은 덫과 같은 존재가 뭐냐 하면 바로 뱀이었습니다.
뱀이 선악과를 건드려줘야 비로소 잠자고 있던 생명나무가 꿈틀거리는 거예요. 이는 덫에 걸린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감추었던 비밀! 창세로부터 감추었던 비밀! 창세전에 나타나지 않아요. 감추었던 비밀이 어디에 나타난다? 마지막 때에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났잖아요. 그러면 감추었던 비밀이 주님께 나타난다면 그럼 주님은 아직 안 나타났다고 해서 주님이 안 계신 것은 아니죠? 주님께서 팔짱 끼고 이미 지켜보고 있던 거죠.
그래서 저는 말합니다. 십자가로부터 시간을 거꾸로 흘러 보내야 된다. 십자가가 수원지에요. 십자가가 물 저수지고 저수지로부터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죠. 십자가로부터 위에서 걸쳐놓고 고랑을 파서 물이 졸졸 흘러가게 되면 우리는 물이 흘러가는 대로 따라 가게 되면 우리는 뭘 만납니까? 원초적 뱀을 만나죠. 원초적 뱀을 만나면서 주께서 뱀을 잡기 위해서 그동안 하나님께서 인간을 활용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을 만듦으로 말미암아 뱀이 인간을 건드리도록 해서 왜 인간을 건드리느냐를 빌미로 해서 뱀을 잡는 그러한 전략으로 하나님께서는 시간이란 것을 계속 길게 이어져 나간 겁니다.
그러면 1290일은 뭡니까? 1290은 창세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체 시간을 말합니다. 왜, 거기에 바로 뱀이 있었기 때문에. 뱀이란 존재는 아까 한 거와 같이 시간에 따라 매이지 않습니다. 뱀이, 악마가 받은 형벌은 몇 년 언도 받았습니까? 악마가 지옥 갈 때 수행년도가 몇 년 입니까? 무한대죠. 한번 들어가면 못 나오죠.
뱀은 인간의 시간에 얽매이지 않아요. 10년, 20년 매이지 않아요. 인간의 육체는 길어봐야 1000년이 못 됩니다. 창세기 5장에 아무리 오래 살았다고 내세워도 결국은 몇 년을 못 넘어요? 1000년을 못 넘겨요. 이미 1000년은 인간이 손댈 수 없는 지역입니다. 그런데 실질적 일은 어디서 합니까? 1000을 넘어선 그 동네에서 다 이루어져요.
요한계시록 20장에 천년왕국이란 말 들어봤죠? 요한계시록 20장에 천년왕국이 있는 이유가 뭡니까? 그리스도가 뭐하기 위해서? 왕 노릇하죠. 요한계시록 20장에서 누굴 잡습니까? 바로 뱀의 삼위일체, 악마, 거짓 선지자, 그거 잡기 위해서 왕 노릇하잖아요. 그러면 거기 당한 사람은 누구냐? 우리 성도는 목 베인 영혼이 돼 버려요. 그러니까 성도 하나 미끼 던져서 뱀이 걸려들게 만들어서 성도를 고생시켰다는 이유 때문에 뱀을 영원한 형벌에 집어넣어 버리는 거예요. 뱀을 집어넣는 그 지옥에는 시간이라는 것이 무한대에요. 시간 자체가 없는 게 돼요.
그럼 시간은 왜 있는가? 뱀을 잡기 위한 한시적으로 만든 포승줄이라니까요. 뱀을 어떻게 잡는데? 인간을 만들어서 뱀이 인간을 관리해서 인간을 악마, 뱀이 건드리게 해서 인간에게는 뭐가 있어야 적용돼요? 인간은 날짜가 카운트가 돼요. 하루, 이틀, 사흘,… 1290일, 카운트가 되는데 카운트 되는 인간을 하나님이 심판하면서 그 현장에 있던 뭐를 덮쳐요? 악마를 덮쳐보니까 악마는 이렇게 시간에 체포가 될 때 비로소 짐승으로 드러나요. 내가 어렵다 했으니까 여러분이 이해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왜냐 하면 이건 너무 어렵기 때문에 다시 천천히 해볼게요. 빨리 한다고 이해될 문제가 아니고.
지금 짐승이란 말을 했잖아요. 짐승이 실제로 누굽니까? 짐승은 왕들 이예요. 어디? 바벨론, 바사, 헬라 마케도니아, 마지막에 로마. 이 짐승들이 왜 다니엘에 나옵니까? 자기 나라 지배한다고 나옵니까? 자기 나라 지배하면 자기 역사에요. 왜 이방 역사가 의미가 없느냐 하면 이방역사는 자기들끼리는 인간의 역사뿐 이예요.
일본의 천왕부터는 연도가 다르잖아요. 세종 몇 년 나오잖아요. 왕이 등장하면 거기 따라 자기 왕 된 역사 새로 시작하잖아요. 나중에는 통합되면 서기를 쓰지만. 옛날에는 왕이 등장하면 역사 새로 가는 겁니다. 자기들끼리 시간개념이라니까요.
그러면 뭐가 포착이 안 돼요? 악마가 포착이 안 되죠. 이해되시겠습니까? 모든 다니엘이 짐승 이야기한 것은 그 안에 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자의 나라와 관련돼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의 성도가 있어요. 누구? 다니엘과 몇 친구? 원, 투, 쓰리, 세 친구 있어요. 느부갓네살이 이걸 잘못 건드린 거예요. 건드릴 걸 건드려야지요. 다니엘 세 친구보고 뭐라 했습니까? ‘금 신상 섬기면 살려줄게.’ 다니엘 세 친구 하는 말이 ‘아이고,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냥 죽을게요.’ 죽잖아요.
자기는 왕 대 그냥 포로 잡혀 온 세 명이예요. 집어넣었잖아요. 거기에 네 번째 사나이 등장했죠? 그 네 번째 사나이가 악마를 잡을 사나이라니까요. 큰 소리 안 쳐도 이해되죠? 다시 합시다. 지금 인간은 미끼라니까요. 미끼! 다니엘도 미끼고 다니엘 세 친구도 미끼에요. 인간 백날 모여보세요. 박근혜 대통령 회의하면서 ‘여러분, 지금 국정원 통해서 악마를 잡읍시다.’ ‘악마를 잡읍시다.’ 하면 악마가 뭘 잡아요? 지금 국정원이 뭐냐? 간첩 잡으려 하는 것이지 악마 잡는 게 아니잖아요.
악마는 인간들끼리는 악마가 체포가 안 돼요. 자기가 악마 속에 있으면서 무슨 악마를 잡아요? 지금 악마 못 잡으면 우리 부활 안 됩니다. 당신 어떻게 장담하는가?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해야 그게 구원이 되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 인자가 오지 아니하면 우리는 부활도 안 되고 천국 못 가요. 그런데 사람들은 뭐라 합니까? ‘날짜 계산하면 그때 되면 오겠지. 1290일 되면 오겠지.’ 1290일 와도 인자 안 옵니다. 안 생겨요. 16년 동안 여자 밝혀도 여자 안 생깁니다.
이게 얼마나 다니엘이 어려운지 몰라요. 그래서 다니엘 푸는 주석이 없어요. 1290일 지나면 오겠고 1335일 되면 오겠지. 안 와요. 유대인이 이거 기다리는데 실패했어요. 아이고, 한 때, 두 때, 반 때, 기다리면 오는가? 안 와요. 7절에. 42달? 42달 지나도 안 생겨요. 주님이 안 온다니까요. 42달, 1290일 계산하면 비슷하게 3년 반입니다.
3년 반 지나도 안 와요. 왜, 3년 반이 누구 숫자기 때문에? 4, 5, 6, 7로 가는 나의 숫자, 내 몸에서 나온 인간들이 통용하는 인간들의 역사 숫자라니까요. 그런데 인간은 숫자가 없어요. 없는데 하나님께서 만들어 버렸어요. 왜, 악마를 잡는 미끼로 사용하기 위해서. 오늘도 하루가 지났네. 내일은 또 어떻게 될까? 내 나이는 50이고 60이고, 이게 누구 계산입니까? 자기중심 계산이라니까요. 제 나이 벌써 60이 넘었어요. 왜 이런지 몰라요. 늙은 것은 죄가 아니라 했습니다. 늙은 것은 죄가 없다고 은교란 영화에 보면 나와요. 아픈 것도 죄가 아니에요.
마리아 마르다 오빠 죽은 게 죄가 아니에요. 나사로 죄 맞아요. 하지만 죽은 거 자체는 죄가 아니라니까요. 죽음을 통해서 미끼죠. 이 세상에 믿음이 있다? 없다? ‘아무도 믿지 않았다.’를 보여주기 위해서. 왜, 악마가, 마귀가 인간을 그렇게 만들어 놨어요. 기다려라. 올 것이다. 뭐가 오는데?
세례요한은 말합니다. 내 뒤에 오실 분은 이미 오신 분이 온다는 거예요. 이미 계신 분이 오신다는 거예요. 우리만 괜히 호들갑 떨었지, 애초부터 이미 계셨던 그분이란 말이죠. 우리가 만날 수 없지만 우리 때문에 숨어있던 그분이 등장된 거죠.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우리가 마귀한테 잡힘으로써 비로소 감추었던 비밀이 노출되면서 실상 길과 진리와 생명은 드디어 우리 앞에 확연히 다 드러난 겁니다. 마귀는 마귀 짓을 해야 돼요. 예수를 잡아 죽여야 됩니다.
그럴 때 그 기간이 뭐냐 다니엘이 예언했던 1290일입니다. 다니엘을 봤던 모든 사람들은 1290일 오게 되면 메시야가 온다고 봤거든요. 그게 아니고 메시야가 오게 되니까 1290일은 이건 사람이 기다릴 시간이 아니고 마귀가 마귀 정체를 폭로하는 그 순간이 1290일이고 동시에 그 현장에서 비로소 숨겨졌던 메시야가 누구고 진짜 하나님이 누구냐? 예수님이 하나님이죠. 그게 드러나는 그 때가 뭐냐, 1290일 마감될 때에요.
그러면 1290일은 뭐냐, 그때로부터 다시 하게 되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전체가 1290일이 되고, 1335일이 되는 겁니다.
10분 쉬고 합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