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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시작(광주 강의)140322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4. 29. 08:26


2014-03-22 01:44:30조회 : 310         
복음의 시작 140321이름 : 이근호 (IP:119.18.9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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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수 (IP:118.♡.139.25)14-04-18 08:47 
광주 강의(2014. 3. 21) 1-1 

마가복음 1장 1절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고 되어 있지요. 우리가 아는 ‘시작’은 창세기입니다. 창세기가 천지를 만든 시작인데, 마가복음에서 시작이란 말을 했을 때, 새롭게 뭔가를 시작한 것이라면 창세기부터 마가복음 이전까지는 무효인가, 실패작인가? 

여하간 시작이 두 개입니다. 창세기에서도 시작이라고 했고, 마가복음에서도 시작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일이죠? 그러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한 일은 누구의 일입니까? 그것도 하나님 일이잖아요. 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할 때의 시작으로 통합시키면 되는데 먼저 시작해 놓고 마가복음에 와서 또 하나의 시작을 유발시키는가? 그러면 시작이 두 개가 되잖아요. 

그러면 마가복음의 시작이 처음 시작에 포함이 된다는 것입니까, 안 된다는 것입니까? 포함이 안 되지요. 안 되니까 새롭게 시작을 거론한 것이지요. 

따로 시작을 한다면 노선이 두 개가 되지요. 창세기에 천지를 시작했다는 노선이 하나 있고, 복음의 시작 노선이 따로 있다면 이것을 마주하는 인간은 두 개의 시작을 믿어야 될 입장에 놓였어요. 무엇이든 둘이 된다는 것은 불안해요. 왜냐하면 하나를 놓치면 실패인가 하는 생각을 가질 수가 있잖아요. 

두 개이니까 둘 다 잡을 때 성공이라면, 하나를 놓치면 실패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하나에 치중하게 되면 다른 쪽은 소홀하기 마련입니다.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시작이 둘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창세기의 시작을 통해서 도대체 무엇을 남기느냐? 창세기의 시작이 그동안 우리에게 뭘 보여주었기에 마가복음에서 새로운 시작이 필요했던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러면 창세기부터 마가복음 이전까지는 복음이 아닌 것이 됩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인데, 그동안은 기쁜 소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 기쁜 소식의 시작이라고 하니까 그 전에는 기쁜 소식이 아니 슬픈 소식이지요. 그러면 창세기부터 복음 전까지 하나님은 무엇을 유발시켰는가? 복음이 시작되게 하기 위해서 슬픈 소식으로 이끌어 왔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슬픈 소식을 따로 이야기한 것은 없습니다. 

여하간 저는 이것을 슬픈 소식이라고 일단 언급을 했습니다. 창세기부터 복음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하나님 뜻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게 되어 있어요. 복음의 시작에서는 미움 받으시는 그분이 기쁜 소식의 시작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미움이 없는 곳에서는 기쁜 소식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누가 누구를 미워했는가? 인간이 하나님을 미워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해서 일어난 일은 그 속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창조자 되시는 하나님을 미워하게 만드는 상황과 사태들이 줄곧 일어나는 도가니로 그동안 천지창조가 활용이 되었다는 일시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미움을 받는 경우가 생겼는데 그러면 미워하면 구원 받습니까? 그것은 아니지요. “주 예수를 미워하라. 그러면 구원을 받으리라.” 이런 말씀은 없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의 미움을 받으면 구원 되는가? 그것도 아닙니다. 어쨌든 여기에서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우호적인 관계가 아닌 적대적 관계로 형성되는 상황이 이루어졌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성령을 통해서 복음을 받아들이면 복음을 받는 것이 아니고 ‘이 복음이 오기 전에 나는 뭘 했지?’ 라고 되돌아 볼 수 있는 여건도 같이 부여받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우리가 복음을 알기 전에는 하나님을 미워했다는 것이 드러나도록 하면서 복음이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여기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써 내가 그동안 살아왔다는 것을 복음을 받는 순간에 같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미워하면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이미 구원 받은 사람이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그동안 미워했다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생각해 봅시다. 지금 우리가 육신을 갖고 있지요. 그런데 우리 자신을 육신으로 봅니까, 자아로 봅니까? 자아는 ‘나’지요. 나는 나지 ‘나는 육신이다.’ 라고 생각하지는 않지요. 그러면 왜 나는 나를 육신으로 생각하지 않는가? 내가 육신이라는 자체가 나에게 공포와 염려를 줍니다. 왜냐하면, 나는 나를 구상할 수 있고 상상해서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육신이란 내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 허락도 없어 일방적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자아의 허락 없이 주어진 것은 전부 이질적이고 타인이 되고 나를 공격하는 공격자처럼 느껴집니다. 나는 내 육신이 무서운 거예요. 나는 나를 원했지 육신을 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현실은 나는 나로 있는 것이 아니고 육신만 있을 뿐이거든요. 그리고 이 신체는 나의 허락도 없이 주어진 거예요. 

그러면 육신이 있는 이상은 누가 가짜가 될 공산이 많습니까? 육신이 현실이고 실재라면 누가 가짜입니까? 나(자아)가 가짜에요. 그게 싫은 거예요. 이 사태가 미운 거예요. 그래서 내 허락도 없이 이런 육신을 주신 하나님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럼 자아는 어디에서 왔습니까? 뱀(사단)으로부터 온 거예요. 사단으로부터 형성된 자아가 하나님이 주신 육신을 볼 때 도저히 어울리지를 않아요. 나는 그냥 나가 아니라, 멋있는 나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거울을 보면 나는 못생긴 나입니다. 내 인물이 마음에 안 들어요. 그리고 젊을 때는 그나마 괜찮았는데 나이가 들면 더더욱 마음에 안 들어요. 청춘을 돌려달라고 땅을 치고 통곡하고 싶어요. 흰 머리카락이 싫고, 주름살이 싫고, 기억력이 쇠퇴하는 것도 싫어요. 

어느 것이 현실입니까? 기억력이 영원한 것이 현실입니까, 기억력이 쇠퇴하는 육신이 현실입니까? 육신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 현실이 자아가 있는 이상은 마음에 안 드니까 현실을 도망치고 싶은 겁니다. 자꾸 피하고 싶은 거예요. 

저는 주변 사람들을 만나면 자녀들이 술을 마시는지 물어봅니다. 술을 마신다고 하면, 적극적으로 금주하도록 권합니다. 왜냐하면, 술이 사람을 비겁하게 만들어요. 자아와 현실 사이의 갭이 짜증스러워서 술에 취해 그것은 잊으려고 합니다. “나는 육신의 현실은 없어. 나는 자아뿐이야!”라고 나를 감추는 비겁한 일을 술을 마심으로 합니다. 

술 마시는 인간들은 다 비겁한 자들입니다. 자기 육신은 발로 차버리고 헛된 자아를 간직하려고 몸부림치는 수단 중 하나가 술을 처먹는 거예요. 제가 이런 쌍스러운 표현을 잘 안 쓰는데, 우리 집안에 술 먹고 죽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지난 주일 낮에 어떤 분과 대화를 하면서 “술 마시는 사람들을 보면 죽이고 싶다.”고 했어요. 

사람과 대화를 할 때 맨 정신으로 해야 자기가 얼마나 어설픈지 양쪽 다 동등하게 이야기가 됩니다. 그런데 술 취한 사람과 대화를 하면 안 마신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는데 상대는 잘난 척을 합니다. 허세를 부리지요. 

육신이 참된 현실이란 점을 자아가 핍박을 해요. 술을 마시게 되면 육신의 모든 기능이 잠시 흐릿해 져요. 그럴 때 정신을 못 차리면서 비틀거릴 때, 육신이 비틀거릴 때마다 오히려 자아 정신은 더 생생해요. 마귀가 그렇게 만들어요. 마귀가 준 자아의 집착은 오히려 더 강렬한 겁니다. 

아버지라는 자아 때문에 술 취해서 자녀들에게 용돈을 팍팍 주는데 이것이 뭐냐? “나는 훌륭한 아버지다.”라는 것을 과시하는 겁니다. 술 마시지 않고 용돈을 주면 됩니다. 왜 꼭 술에 취해서 과한 용돈을 줍니까? 정말 비겁한 짓입니다. 자기의 진면목을 안 들키고 싶고, 자기 육신이 마음에 안 드니까 술로 잠시 육신을 잊고 자신이 원하는 자아에 도취되고 싶어서 술을 마시는 것입니다. 불쌍합니다. 

드라마를 보면 남편이 바람피운다는 소식을 듣고 아내가 평소에 안 먹던 술을 마십니다. 그게 뭔가 하면, “그럴 리 없다.”는 것입니다. ‘바람 안 난 남편의 아내’가 자신의 자아상입니다. 그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서, 현실을 잊기 위해 술에 취하는 겁니다. 

지금 나의 자아를 서글프게 만들고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누가 그렇게 하는 겁니까? 우리의 육신을 누가 관리합니까? 우리의 발걸음을 누가 헤아립니까? 하나님이잖아요. 하나님이 만든 발자국에 자아가 따라갈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나이가 들면 늙은 나가 되어야 하는데, 육신은 늙었는데 자아는 계속 젊음을 고집하고 있어요. 

이 자아는 이미 선악과를 따먹은 자아고, 생명나무를 못 따먹게 했던 자아입니다. 자아가 있는 이상은 자아가 생명나무를 따먹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취지가 아닙니다. 자아가 우리 이름이 됩니다. 바벨탑을 세웠는데 그 목적이 뭡니까? 탑에 자기 이름을 담아서 그 이름이 하늘에 닿게 한 거예요.  

탑의 처음 벽돌을 놓을 때부터 이것은 탑을 쌓는 것이 아니고 자기 이름을 쌓고 또 쌓는 일이었고, 그 사람들이 온 세상에 흩어져 현재의 인류가 된 것입니다. 노아의 후손들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의 이름, 인간의 자아에 영생을 줄 마음이 없습니다. 

에덴동산에는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있었지요. 이 두 나무가 곁에 있다는 것을 인간들은 몰랐어요. 선악과를 건드리기 전에는 생명나무는 따먹을 수 있는 것으로 알았는데, 선악과를 건드렸는데 갑자기 생명나무가 따먹을 수 없는 나무가 되고 말았어요. 그렇다면 나무에 문제가 있습니까, 나무에 접근하는 우리 자아에 문제가 있습니까? 자아와 생명나무는 엮여 질 수 없는 자아입니다. 

마귀가 천국 갑니까? 못 가지요. 마귀도 자아가 있잖아요. 마귀는 생명나무가 있는 천국에 못 가지요? 우리가 그 꼴이 된 거예요. 마귀의 유혹에 빠져서 우리 조상이 그 꼴이 된 거예요. 생명나무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있어요. 있어도 못 따먹을 정도로 이미 우리의 자아는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자아와 상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육신과 상대해요. 우리 육신을 흙으로 바꿉니다. 

흙으로 바꾸면서 약속의 징후를 육체에 남깁니다. 그게 가죽 옷이고, 아담의 아내에게 새로운 이름(생명)을 줍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자아와 상대합니까, 우리 육신과 상대합니까? 해답이 나왔지요. 육신과 상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관심사가 우리 자아에 두어야 합니까, 육신에 두어야 합니까? 육신에 두어야 합니다. 

머리카락을 보면서 “오늘도 주께서 이렇게 자라게 하셨구나.” 길을 걸으면서 “주께서 오늘도 내 걸음을 인도하시구나.”라고, 내 육신에서 하나님의 뜻이 깨달아져야 되는데, 우리는 육신을 볼 때마다 싫고 미워요. 그래서 내가 상상하는 나(자아)를 따로 만들어요. 우리가 꿈속에서는 몇 살로 나옵니까? 대부분의 경우에 실제의 나이보다 훨씬 젊게 나와요. 

이 자아 구성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하면, 공동체에서 와요. 타인의 욕망에서 자아의 내용이 채워집니다. 쌍둥이 아이에게 똑같은 것을 주면 안 싸웁니다. 그런데 다른 것을 주면 상대방의 것을 가지려고 싸워요. 내게 없는 것을 원해요. 이게 바로 욕망이고 잉여입니다. 내게 없는 것, 내 결핍을 채울 수 있는 다른 것은 나에게 있지 않아요. 그러면 어디에 있습니까? 남에게 있지요. 

타인을 경유하지 않으면 자아를 구성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육신은 어떻게 됩니까? 육신이 육신을 아는 것은 어떻게 압니까? 육신을 하나님이 관리합니다. 하나님(하나님의 언약)을 경유하지 않으면 육신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육신을 알기 위해서 예수님을 경유하지 않아요. 자아를 알기 위해서 타인을 경유해요. 

왜 그런가? 자아 안에 있는 모든 내용들은 욕망이 자아를 그때그때 재구성하기 때문입니다. 자아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자아를 깨보면 전부 남들이 가진 것이 내 안에 차 있어요. 친구가 젊게 보이면 나도 젊어지고 싶고, 남이 입은 옷이 예쁘게 보이면 나도 그 옷을 입고 싶고, 옆집 사람이 새 집을 사서 이사를 가면 나도 새 집으로 이사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내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가에 따라서 나도 그들과 유사한 모습을 띠게 됩니다. 내가 어떤 노래를 좋아하는가 하는 것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시중에서 어떤 노래가 유행하는가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이스라엘은 두 가지를 관철했어요. 그들 눈에는 가나안 땅 사람들이 보였어요. 이스라엘의 자아는 이방민족을 통해서 구성됩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겼는데 왜 섬겼습니까? 인간은 주변을 경유해서 자신을 압니다. “저들은 어떻게 해서 저렇게 잘 살지? 저들이 섬기는 신이 저들에게 복을 주는구나. 나도 저들의 신을 섬겨야지.”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인간에게는 욕망이 있고, 그 욕망은 결핍을 통해서 옵니다. 사마리아 여인처럼 늘 목이 마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100억을 주면서 집에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돈을 쓰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합니다. 그동안 돈이 없어서 못했던 골프도 치고, 스포츠카도 사서 타고 다니면서 뽐내야 됩니다. 

만약 자기 아들이 학교에서 전교 1등을 했다면 가만히 못 있습니다. 평소에 잘 만나지도 않는 친구 찾아가서 친구 안부를 묻는 척하다가 결국은 자식 자랑을 하게 됩니다. 떠벌여야 돼요. 왜냐? 다른 사람 때문에 내 자아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자아는 외부에서 왔기 때문에 외부와 섞여야 살 수가 있어요. 

가인이 받은 형벌이 뭡니까? “너는 땅에서 피하여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형벌인 이유가, 가인이 타지로 가면 그들이 가인을 가만 두지 않습니다. 그러면 가인이 사는 방법은 그들과 한통속이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특히 학생들이 학교에서 왕따를 당해 자살을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왕따를 당해 자살하는 것을 잘 이해 못합니다. 친구들이 안 놀아주면 혼자 놀면 된다고 생각하지요. 아이들에게는 그것이 안 됩니다. 친구들과 같이 나쁜 짓을 하더라도 그들 무리와 어울리기를 원해요. 왜냐? 그들이 곧 나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고, 그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이 곧 ‘나’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는 타인을 향해 내 결핍을 채워달라고 하소연하고 있어요. 

사람은 누가 날 호명하지 않으면 자살합니다. 자살의 이유는 호명 받지 못해서입니다. 남편이 집을 나갔을 때 아내가 전화로 불러주면 집으로 들어오는데, 일주일이 지나도 찾지 않으면 강물에 뛰어듭니다. 누가 나를 부르지 않으면 우리는 의미를 찾을 수 없어요. 희한하지요? 내가 종일 나를 불러도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누가 나를 불러주면 “예”하고 얼른 달려갑니다. 강아지하고 똑같아요. 누가 불러줘야 돼요. 누가 불러줍니까? 이미 세상을 장악한 쪽이 불러줘야 돼요. 그게 바로 악마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불러줘야 돼요.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내 이름을 귀히 여기는 것이 누적이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자녀는 점점 죽음으로 가게 됩니다. 괴리가 생기고, 간격이 점점 멀어집니다. 거지 나사로와 부자가 살 때 부자의 하루 일과가 뭐였습니까? 매일 파티를 열었지요. 혼자 산해진미를 장만해서 먹었습니까? 사람들을 불러서 같이 놀았지요. 그런데 그와는 정 반대로 거지 나사로는 아무리 찾아주는 사람이 없어요. 

예수님이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하기 전에 하신 이야기가 있어요. “사람에게 높임을 받으면 하나님께 미움을 받는다.” 그런데 인간들은 하나님께 미움 받으려고 작정을 했어요. 그것이 사는 보람이고 재미고 행복입니다. 

세상에서 호명 받지 못한 나사로는 마지막 날 누가 호명해 줬습니까? 주님이 호명하셨어요. 부자는? 그냥 지옥에 떨어졌어요. 부자는 지옥에 떨어져서도 이 땅에서는 하던 버릇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동생들이 지옥에 올까봐 걱정했습니다. 이런 착한 마음을 가졌다면 지옥에서 잠시 고생하다 빼주면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지요? 안됩니다. 주님이 호명하지 않았기에 그는 지옥에서 영원히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호명 받은 나사로의 이름은 뭔가? 육신에는 이름이 없어요. 그냥 흙입니다. 우리가 붙인 이름은 가짜입니다. 나사로 육신에 주님의 자기 이름을 붙여서 주님이 자이 이름을 부른 거예요.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겁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나는 주의 것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그 작업을 이스라엘에게 먼저 했었어요. 이스라엘은 두 가지를 봐야 합니다. 하나는 인간의 죄악 된 본성, 이방 민족이 섬기는 그 신에 합류해야 잘 살 수 있다는 인간의 근원적인 자아성, 혹은 죄악 된 욕망이지요. 

욕망은 결핍으로 채워지는데, 매울 방법이 없어요. 욕망은 채우라고 있는 것이 아니고 결핍을 생성하는 것이 욕망입니다. ‘나는 욕망이 있다’고 하는데, 내가 욕망이 있는 것이 아니고 욕망이 나를 그때그때 임시적으로 만들어 내는 겁니다. 나는 없고 욕망만 있습니다. 선악적인 욕심. 하여튼 마귀가 인간을 버려놓았어요. 

끝도 없는 갈증입니다. 강의 중에 집사님이 전화를 받았는데, 언제 또 전화가 걸려올지 조마심이 납니다. 나는 육신이어야 하는데 강의하고 있는 자아가 된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지요? 이스라엘은 이방인과 만나면서 그들과 하나가 되고 싶었고, 또 그들과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법을 따라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법을 경유하게 되면 죄인으로 등장합니다. 육신 자체가 죄악 된 육신이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너는 흙이다.”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시기 위함입니다. 율법은 주님이 하신 일의 반복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지요. 이것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을 율법으로 반복시키는 것입니다. 

행함으로 의롭게 될 수는 없다고 행함을 부정하면서, 행하지도 않았는데 의롭게 되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아가 있기 때문에 법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이 아니고 건성으로 법을 이용해서 자아를 유지하려고 하지요. 

진짜 법에 의해 우리가 죄인으로 지적 받는다면 우리는 법에 복종할까요, 피해 버릴까요? 피하게 됩니다. 법은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어 있지 우리가 법을 반기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율법아래 놓여 있습니다. 우리가 싫어서 피하고 도망쳐도 피할 수 없는 것이 법입니다. 우리는 나의 건사한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서 나를 부정적으로 규정하는 법을 피하고 싶어도 이미 우리는 법 안에 있고, 그 법에 따라 저주 받게 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복음의 시작(막1:1)’을, 창세기는 ‘천지 창조’의 시작을 말씀하고 있는데, 어떻게 같은 성경에서 시작이 2개가 되는가? 그러면 창세기에서 복음서까지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 때까지는 우리가 하나님을 충분히 미워해야 돼요. 그 기간을 만드는 것이 창세기에서 복음서까지의 기간입니다. 

그 기간에 활동에 나선 나라가 이스라엘이고,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았고, 율법에 따르지 않으면 저주 받게 되어 있고, 이스라엘은 인간의 대표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저주 받아도 마땅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창조라는 틀이 필요했던 거예요. 하늘과 땅, 봄, 여름, 가을, 겨울, 공간과 시간. 

시간과 공간은 우리 자신을 포승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창조의 모든 것은 우리가 저주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의 경유해서 모든 것을 봐야 하는데 우리의 자아는 율법을 외면하고 우상과 한 통속이 되어 살기에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5장 16절에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지금 누구 들어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관심사는 죄가 있는 곳에 어떻게 의를 발생시키는가? 죄와 의의 문제로 세상을 다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를 육신으로 보지 않고 자아로 보기 때문에 ‘자아가 어떻게 복을 받는가? 그리고 어떻게 해서 죽어서 천국을 가는가?’ 여기에 관심이 있어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 같지만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에 묶여 살아요. 행복이 뭔지도 모르면서 행복을 좇습니다. 지금은 행복하지 않다는 이유로 행복할 수 있는 모든 길을 향해 질주합니다. 왜냐? 자아 속에는 욕망이 있고, 욕망이 복을 원하기 때문이지요. 

죄가 천국을 원하는 겁니다. 이게 말이 안 되지요? 죄인이 어떻게 천국에 들어갑니까? 천국을 개판으로 만들일 있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죄인은 생명나무 가는 길이 차단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이것에 대해 수긍을 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육신을 주었는데 이상하게 자아라는 괴물이 등장했어요. 이 자아는 실체도 없어요. 그런데 육신을 건드리면 자아가 아파요. 왜 그런가 하면, 내 육신은 아파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나의 자아를 형성시켰기 때문입니다. “누구라도 날 건드리기만 해봐. 하나님이라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이런 악마가 준 마음이 육신 속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귀신은 우리 육신을 제 마음대로 들락거립니다. 자아가 강렬할 때는 일곱 귀신이 날 장악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무슨 일만 벌어지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라고 불평을 합니다. 나는 없습니다. 내 이름은 없어요. 

이스라엘은 두 가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죽여서 재로 만들고, 그 재로 이스라엘을 새롭게 만들어 냅니다. 언약을 시행하시면 이스라엘은 멸망합니다. 그러면 멸망 자체가 언약의 실행이지요. 그러면 실행 지점에서 이스라엘이 나옵니다. 

처음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을 위한 이스라엘이기에 멸망했지만 새롭게 생긴 이스라엘은 주를 위한 이스라엘이기에 멸망하지 않습니다. 다니엘의 인자의 나라지요. 짐승에게 인간을 내어주었고, 짐승인 인간을 덥석 물었어요. 이것은 미끼에 걸려든 겁니다. 잘못 문 거예요. 에덴동산에 사단이 출연해서 인간을 물게 만들어놓고 그 물린 인간 속에 하나님이 뛰어 들어가요. 주의 이름이 뛰어 들어갑니다. 그렇게 되니 악마가 주의 이름마저 물지요. 

헤롯이 베들레헴의 2살 이하의 아이를 다 죽이고, 애굽으로 도망친 예수님을 결국 잡았지요. 결국은 사형 언도를 내려 죽였지요. 그러면 이 땅에서 누가 이긴 것입니까? 예수님은 지고 악마가 이긴 거예요. 처음부터 이 땅에서는 악마가 이긴 세상이었습니다. 힘만이 진리입니다. 

이 힘의 기세에 12제자도 다 도망을 쳤습니다. 예수님을 재판한 빌라도가 이런 말을 했어요. “네가 말만 잘 하면 내가 너를 풀어줄 수도 있다.” 이 때 주님 하신 말씀이 “아버지가 원하시면 천사들이 와서 나를 건지실 것이다.” 이 세상은 예수님의 세상이 아닙니다. 이것이 언약입니다. 이 세상이 예수님의 세상이 아닌 것을 각인시키기 위해서 주님은 약한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성도는 그 약한 주님을 좋아해요. 그리고 성도 역시 주님을 담아 약합니다. 이것이 성령 받은 사도들이 간 길이었습니다. 

10분 쉽시다. 

(2014. 4. 18. 08:26 녹취 마침)
 서경수 (IP:118.♡.139.25)14-04-28 10:25 
광주 강의(2014. 3. 21) 1-2 

마가복음 1장 1절에서 “복음의 시작”이라고 했는데, 성경은 창세기가 시작의 책이고, 이 때 복음이 시작되면 되는데 왜 한참이 지나 예수님이 오셔서 시작이 되는가? 그 전에는 시작한 것이 없는가? 있어요. 아담도 있었고, 에덴동산도 있었지요. 그러나 그것은 복음의 시작은 아니고 창조의 시작이었습니다. 

창세기는 창조의 시작이고, 마가복음은 복음의 시작입니다. 창조의 시작은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것이라면, 복음의 시작은 미래에서 출발해서 거꾸로 내려옵니다. 천지 창조는 시간 따라 가지만 복음은 시간에 매이지를 않습니다. 복음의 시작은 위에서부터 아래로의 시작이고, 창조의 시작은 창조된 것이 마지막 새로운 시작과 교체되기 위해서 종말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제 3의 지역에서 이것을 관찰하는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이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드라마 [기왕후]를 보면, 대성상이라는 최고 실권자가 있는데 국고를 빼돌려서 주석 광산에다 숨기라고 노예들에게 시켜놓고, 작업하는 과정에 자기 신하들을 보내 그 노예들을 잡아 죽이라고 합니다.  

노예들이 대성상의 지시로 보물을 숨겼는데, 그 명령을 따른 자를 또 다른 신하를 보내 죽입니다. 그러면 부하의 위치가 어디입니까? 대성상이라는 사람과 같은 자리입니까, 아니면 같이 죽어야 될 자리입니까? 같이 죽어야 될 자리입니다. 그 죽은 부하를 이스라엘로 본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전했어요. 그 후에 투사구팽. 사냥개를 실컷 부려먹고 나중에는 사냥개마저 잡아먹지요. 단, 진작 죽어야 될 인간이 여기에 가담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대성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기 위해 만들어 놓았어요. 그런데 그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복음 속에 있어야 압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죠? 참 재미있지요. 

내가 하나님의 시키는 일을 했고, 흐뭇해하면서 돌아서는 순간 하나님의 칼이 나를 쳤고, 나는 죽어가면서 ‘할렐루야’를 외치면서 기쁨으로 죽는다는 거예요. 실컷 하나님께 이용당하고는 “저 같은 죄인을 사용하시다니 너무나 감사합니다.”하고 앞뒤가 안 맞는 소리를 하면서 죽는 자는 주 안에서 죽는 자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삽니까, 아니면 자기만의 고유 영역이 따로 있어요? 자기만의 자리가 따로 있지요. 그래서 세상에서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를 저울질 하면서 자기 챙길 것 다 챙기면서 살아요. 그러면 이들에게 기쁜 소식은 뭡니까? 자신이 이 땅에서 더 편하게 살고, 더 건강하게 살고, 더 오래 살고, 남들에게 큰 소리 치면서 살 때 그것을 복이라고 하고, 행복으로 본 거예요. 

그런 사람들(이방인)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벌써 만났지요. 그래서 그들에게 동화되었어요. 그러면 이미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방 나라가 저주 받는 것이 확인 되었지요. 그 다음에 확인하라고 준 이방인에게 이스라엘도 동화됨으로 말미암아 이미 그들도 한 통속인 것이 확인되었어요. 

그러면 이 저주 받은 세상에서 구원 받을 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있습니다. 이 인간은 시간관념이 있어요. 그래서 천지 창조를 볼 때마다 과거 이야기고, 지금은 현재고, 장차 종말이 온다고 생각하는 것이 인간인데, 인간은 죽으면 없어요. 그러면 방금 이야기한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신약에서는 ‘때’ 또는 ‘이 세대’가 나옵니다. “아직은 내 때가 되지 않았다.” 혹은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시간은 어느 몸에서 나왔습니까? 우리 인간의 몸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인자되시는 예수님의 몸에서 새롭게 주어지는 때며 시간관이죠. 이것이 우리에게 기쁜 소식의 내용을 전하는 시간 틀이 됩니다. 

인간의 시간관은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가잖아요. ‘주께서 오실 것이다.’ 그런데 이미 주님은 오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미래를 기다린다는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이 되었어요. 그래서 위를 보라고 했어요. 온갖 개념들(천국, 땅, 영생 등)이 위에서 쏟아져요. 

아브라함 언약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삭 언약, 그리고 야곱 언약이 있어요. 이것을 합쳐서 나라를 만드는데 그것이 이스라엘입니다. 이 나라에 모세 언약이 주어지고, 그 다음에 다윗언약이 있고, 계속 언약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망해도 언약은 남아요. 언약이 언약을 이끌어가면서 새언약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인간이 제 3의 지역에서 보면 이렇게 보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죽었습니다. 죽으면 시간도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모든 것이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면 아담, 노아, 아브라함 이렇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때가 있는 거예요. 새언약이 복음의 시작입니다. 그러면 복음에서 거꾸로 이쪽을 뿌려놓은 거예요. 

그러면 시간이 어떻게 되는가 하면 거꾸로 흐르지요. 시간의 역전인데, 창조할 때 이미 예수님이 거기 계셨다는 것이 복음의 시작이 된 거예요. 복음의 시작은 마가복음에서 시작되었는데 따지고 보니 창세기부터 이미 복음은 시작이 된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감추어진 비밀이에요. 

에베소서 3장 9절을 봅시다.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은 시간 흐름은 없고 그동안 숨겨진 것이 드디어 밝혀진 것입니다. 숨겨졌다는 것은 미완성이 아닙니다. 제주도 앞바다에서 갈치를 잡았습니다. 그러면 갈치가 잡히기 전에 바다에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있었지요. 은닉되어 있었지요. 아직 안 잡혔을 때이니까. 

인간의 자아는 내가 있기 전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인간은 이것을 몰라요. 내가 있기 전에도 있다고 보는 거예요. 없었어요. 인간에게는 자아가 없어요. 육신이 있을 뿐입니다. 자아는 마귀가 관리하지만 육신은 하나님이 관리합니다. 그러면 그 육신은 나의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서 창세전에 계획된 대로 나타나야 될 그 육신이죠. “사나 죽으나 죽의 것이다.”라는 말이 새삼스럽게 믿어질 때 그런 것이 아니고 믿기 전부터 아브라함은 주님의 것이었어요. 

로마서 9장을 보세요.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되었잖아요. 그것이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예요. 제 말이 어렵게 느끼지는 것은, 우리가 시간관을 고수하기 때문에 어려운 거예요. “그것이 언제입니까?” 라고 묻는데, 우리는 그런 것을 물을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라는 것이 없어요. 90년을 살아도 사라지면 우리의 시간도 소멸됩니다. 

그래서 우리 자아는 없는 것이고, 예수 안에서 어떤 역할과 기능을 해 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신약에서는 ‘예수 안에서’라고 하고, 구약에서는 ‘언약 안에서’라고 합니다. 사울이 처음에 왕이 될 때 성신이 임했어요. 그런데 그 사울이 다윗을 만났을 때는 악신이 임했어요. 만약 자아가 성립이 되면 이것이 복잡해져요. 

‘악신을 소유해야 됩니까, 성신을 소유해야 됩니까?’ 이런 질문 자체가 자아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악신이 들어오느냐, 성신이 들어오느냐를 묻는데, 자아는 없고 육신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성신을 보낼 수도 있고, 악신을 보낼 수도 있는 겁니다. 한 번 성령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하는 경우가 있다고 히브리서 6장에 나와 있어요. 구약 성경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신약의 성령은 그런 것이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 육신이 아니고 예수님이 주님으로 승격된 그 몸체에서 나온 성령이에요. 그 성령이 우리를 장악하게 되면 그 성령은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성령의 은사(능력)들은 있다가도 사라질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자 하는 성령은 우리를 떠나지 않아요. 이것을 성령의 인을 받았다. 혹은 보증금이다. 그렇게 말합니다. 

신학과 성경 주석이 왜 엉터리인가 하면, 나의 존재를 1차적으로 인정하고 어떻게 구원 받을까를 생각하니까 엉터리가 된 거예요. 우리 자아는 구원의 대상이 아닌데 마귀의 장난으로 내 구원을 생각하는 자체가 틀려먹은 거예요. 주님은 우리가 자아만 챙긴다는 것을 익히 아십니다. 그런 주님 앞에 우리 자아를 챙긴다는 것이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유다야, 이제 네 할 일 해야지.” 그 때 사단이 임한 겁니다. 사단이 사용한 육신이 된 거예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으로 임한 것이 아니고 육신으로 오셨어요.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면 적그리스도라고 요한일서에서 말씀했어요. 

주께서 육신으로 오셨습니다. 이 말은 주님이 우리를 육신으로 다루겠다는 것입니다. 언약 안에서의 육신은 심판받아야 할 죄악 덩어리죠. 이것을 아무리 자아로 위장해도 소용없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내가 사람들에게 잡혀서 죽게 된다.”고 했어요. 그 때 베드로가 하는 말이 “결코 그런 일은 없습니다.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주님을 지키겠습니다.” 라고 했지요. 그 때 주님은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베드로가 한 말은 사단이 시켜서 한 것임을 예수님이 지적하신 거예요. 

그러면 베드로에게 사단이 들어갔는데 그는 구원 못 받습니까? 베드로는 구원 받아요. 마귀가 설쳐서 베드로를 잡으려 해도 주께서 기도하셔서 그를 지키셨지요. 그러기에 베드로는 마네킹입니다. 아침에 백화점 직원이 여름옷을 입히든지 봄옷을 입히든지 그것은 직원 마음대로지요. 

이처럼 인간은 주님이 조작하는 마네킹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21:18).”고 하신 거예요. 만약 베드로가 스스로 생각해서 “이 길로 가면 하나님 뜻이고, 저 길로 가면 내 뜻이야. 그래서 나는 이 길로 갈 거야.” 라고 했다면 주님이 허락했겠어요? 아니지요. 왜냐? 주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가기로 결정한 그것도 자기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허락지 않습니다. 

지난 일들을 뒤돌아보면 나는 내 마음대로 했는데 그 모든 것이 다 주께서 띠 띠우고 내가 원치 않는 길로 인도하신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내가 원하는 길로 갔다고 여기는데, 이것은 나의 자아가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 자아의 생각을 버리고 주님 생각을 들어야 해요. 내가 평생을 살아도 그 모든 삶은 내가 원치 아니하는 길로 띠 띠고 끌려가는 거예요. 

제가 가락교회에서 강의하면서 환란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아줌마들이 마사지 숍에 가서 누워있으면 직원들이 와서 마사지를 해 주지요. 이것도 환란입니다. 왜냐? 환란은 부활된 상태에서 볼 때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환란이라고 주님이 그렇게 규정을 하셨습니다. 마사지 받는 것이 좋습니까, 천국 가서 사는 것이 좋습니까? 천국이 좋지요. 그러니까 마사지 받는 것이 환란입니다. 
  
성도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도 환란이고, 성도 아닌 자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도 지옥 가기 위한 마땅한 짓입니다. 우리의 시간은 잊읍시다. 잊는다는 것은 Let it be. 그냥 내버려 둬. 그런 뜻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던지 주님은 소급해서 그것을 다 용서해 주시기에 주님의 어떤 일이라도 우리에게는 기쁜 소식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나는 쏙 빠져서 관찰자, 헤아리는 자가 돼요. 독단적인 자아 때문에 나 아닌 타인은 나에게 평가를 받아야 될 자로, 심지어 주님도 그런 분이로 여기는데 이건 말이 안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헤아림 속에 담겨서 우리의 모든 것이 이 땅에서는 환란이고, 내가 원치 않는 길로 가게 하시는 겁니다.  

‘공부 끝나고 치킨 시켜서 먹을까’라고 원해서 치킨을 배달시켜 먹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원치 않는 길로 인도받는 것입니다. ‘어, 이게 웬 치킨이지. 주께서 주셨네.’ 하면서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자리에서 볼 수 있는 눈, 이것은 성령이 임해야 위에서 볼 수 있는 눈이 생깁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자아가 평가하지 말고 주님이 소급해서 평가하도록, 기쁜 소식에서 어떤 평가가 주어지는지 관심을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서론이 너무 길었는데,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봅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1:1).” 이것을 해석하면, ‘복음은 이제 하늘나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 ‘시작’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을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개념으로 이해하면 성경  중간중간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내 때, 이 세대’ 등의 해석이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이 마치 우리의 때와 동일하게 가시면서 ‘시작’이란 단어를 사용하신 것은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었기에 우리에게 맞추어서 글을 써다 보니까 우리에게 그렇게 보이는 거예요. 

“주님도 어릴 때가 있었고, 장성할 때가 있었잖아?” 그렇지요. 주님도 육신으로 오셨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복음의 시작’이라고 한다면, 복음의 끝은 어디인가? 요한계시록인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을 끝이라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나는 시작이고 끝이다.”라고 했어요. 

이것은 우리가 아는 ‘시작’과는 다릅니다. ‘알파요 오메가’ 즉 ‘시작과 끝’이란 말은, 끝이 곧 시작이란 말입니다. 우리의 시간관으로는 구약 지나면 신약이 나오고, 신약에서 십자가 지면 종말이지요. 그런데 주님은 십자가로 시작해서 신약 지나고 구약에 가면 여기에 종말이 있는 거예요. 끝에도 주님, 시작도 주님. 이것이 알파와 오메가의 주님입니다. 그 가운데도 주님. 

복음을 안다는 것은 복음을 알게 된 시작점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위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전체가 다 시작 안에 있고, 전체가 다 끝 안에 들어있습니다. 복음을 알게 되면 복음만 아는 것이 아니고 창세기부터 전체 의미를 다 알게 된 거예요. 선지자가 아무리 똑똑해도 천국의 어린아이보다 못하다고 예수님이 말씀했어요. 이게 무슨 뜻일까요? 어린애가 다 아는 거예요.

어린아이가 선지자보다 공부를 더 많이 해서가 아니라 성령이 와서 그에게 알려줬기 때문에. 그러면 성령이 알려줘서 성경을 다 외우는가? 아닙니다. 그들이 아는 것은 복음 안에서 복음의 뜻대로 모든 것이 되어질 뿐. 그리고 끝. 세상 모든 것이 복음을 위하여, 주를 위하여,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간다. 

제가 다니엘 강의를 끝내면서 마지막에 약 5초 정도 침묵을 했어요. 왜냐? 할 말이 없었어요. 이미 우리가 종말 속에 있기 때문에 할 말이 없는 거예요. 

1절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했는데, 이게 ‘복음의 시작’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죠. 이 말은 복음은 예수님이 독점한다는 것이고, 따라서 예수님을 모르면 복음을 모르는 것이 됩니다. 

“내가 구원 받았다.”고 하는 사람은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에요. 이 사람은 ‘내가 구원 받았다.’는 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진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입니다. 그러면 나는? 복음에서 나는 찾을 수 없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에 편입되었으니까. 

그전에는 누가 기쁜 소식입니까? 내가 나라는 점이 기쁜 소식이었는데 이제 주객이 바뀐 거예요. 내가 기쁜 소식이 아니고 주님이 기쁜 소식이죠. 따라서 내가 구원 받았다는 것은 절대로 기쁜 소식이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나의 이름과 자아는 제거되어야 합니다. 십자가 자체가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어서 죽입니다. 우리 이름을 죽이는 거예요. 

야곱의 이름은 야곱이죠. 그러면 이스라엘은 누구의 이름입니까? 그것은 야곱의 이름이 아닙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될 때 야곱은 이미 죽은 자입니다. 죽었는데 야곱의 육신을 이스라엘 이름을 위하여 계속 살려준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누구의 이름입니까? 장차 오실 예수의 이름이에요. 

예수님을 위하여 야곱이라는 육신은 이제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서 야곱은 손자를 축복 할 때 손을 어긋맞게 한 거예요. 요셉의 두 아들을 놓고 형이 동생이 되고 동생이 형이 된다는 것,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본 자손은 쫓겨나고 이방인이 그 자리를 채우고. 

거지 나사로가 천국에 가서 자신의 거지 노릇을 자랑하면 됩니까? 안 되지요. 강도가 천국 가서 강도짓 한 것을 자랑하면 안 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해야 돼요. 자기는 강도가 아니었어요. 그냥 육신이었고, 거지 나사로는 거지가 아니라 그냥 육신이었어요. 강도와 거지는 직업이었어요.  

육신이란 점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나 달라지지 않습니다. 남자, 여자? 천국에서는 남자, 여자 구분도 없어요. 세상에서 아내의 역할을 했고, 남편의 역할을 했지요. 천국에서는 역할극이 끝났어요. 남편 죽고 시동생 7명과 결혼했던 여자가 죽어서 천국 갔다면 누가 자기 남편인가? 곤란하지 않은가? 라고 바리새인이 질문할 때, 주님 대답은 ‘너는 천국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천국에는 시집도 아니 가고, 장가도 아니 간다. 그 때는 천사와 같다. 

천사로 사는 것이 좋습니까, 남자로 사는 것이 좋습니까? 우리의 육신은 천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나의 자아는 그동안 해왔던 남자의 역할이 좋아요. 익숙한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우리 육신을 흙으로 만들어 놓고 흙에서 다시 천사로 만들 때는 일체 흙에 대해서는 Let it go.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만들어요. 말썽꾸러기든 재벌이든 다 잊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Let it go.가 소원입니다. 빨이 이 몸을 잊고 새 몸을 받기를 기대합니다. 하늘에 속한 육신으로 주와 함께 누리는 것이 바울의 소망이었습니다. 제 딸이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가훈을 적어오라고 해서 가훈을 적어줬더니 교사가 깜짝 놀랐어요. 가훈이 간단했어요. ‘죽자!’ 이것이 사도 바울의 소원이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직업과 직위를 경유하는 것이 아니고, 네 인생, 내 인생을 경유하는 것이 아니고, 육신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경유해서 보면 쌍꺼풀 수술이 별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육신으로 독점됩니다. 내 육신을 집어넣지 마세요. 내가 은혜 받은 경험을 집어넣지 말고 주님의 육신, 그리스도의 복음이 중요합니다. 

모든 성경 말씀은 이 복음을 위해서 있습니다. 2-3절 말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이것은 이사야 40장 말씀을 인용한 것인데, 이 말씀을 이사야가 보는 앞에서 주가 예수라는 것을 끄집어 낼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끄집어 낼 수가 없지요. 왜냐하면, 복음이 시작 될 때가 아니기 때문에. 복음이 시작되지 않으면 내 자아가 살아 있잖아요. 자아는 성경을 천독을 해도 거기서 자아의 모습만 나와요. “주여, 이 말씀 믿으면 구원 받습니까?”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지금까지 설명한 것이 뭐냐 하면, 이사야 말씀도 복음을 경유해서 해석해야 됩니다. 그런데 복음이 오기 전 그 당시에는 우리는 관찰자, 해석자가 되어서 성경을 볼 때 출발점이 복음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서 출발하니까 결국 내 자아가 잘 되는 쪽으로 해석해요. 내 자아가 잘 된다고 하는 그 순간에도 내 육신은 오실 주님을 위한 기능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내 자아를 위해 봉사하는 그 순간도 내 육신은 나의 죄로 말미암아 죽어 흙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모세, 아브라함, 엘리야를 죽였습니다. 누가 죽였습니까? 예수님이 죽였어요. 바로 그것을 아브라함이 알고 예수님을 보고 기뻐한 거예요. 죽으면서도 기뻐한 거예요. “내가 죽는 것이 언약에 합당합니다.” 하고 죽는 거예요. “나는 죄인입니다.”하고 죽는 거예요. 

모세, 엘리야, 예수님이 의논한 것은 ‘내 죄를 언제 씻으실 거예요?’라고 묻는 거예요. 예수님이 별세하셔야 모세, 엘리야가 죄 용서를 받는 겁니다. 어제 영화 [노아]가 개봉되었는데 평이 별 2개 반으로 나와 있는데, 종교성이 강하면 강할수록 발작을 일으킵니다. 문제는 거기서 복음이 나오느냐 하는 거예요. 

복음이 안 나와도 저는 봐야 합니다. 보고 평을 해주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저를 원치 않는 방향으로 띠 띠고 가시기에, 저는 원치 않는 영화 [노아]를 봐야 합니다. 나의 육신은 내 자아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고 주께서 몰아가는 식으로 갈 수밖에 없는데, 우리는 거기에서 또 나를 집어넣어요. “주님, 제가 봤습니다.”주님이 이끄셨는데 우리는 내가 한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2-3절에 나오는 이야기가 이사야 때에는 그 누구도 해석이 불가합니다. 이사야 40장 3절 이 말씀은 복음을 모르는 상태에서 문법적으로 문자적으로 원어를 분석하면 여기에서 예수님이 나옵니까? 안 나옵니다. 미지의 X입니다. 그러면 X의 자리에 예수님을 넣으면 되지 않는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만났을 때 “미지의 X가 예수님이다.”고 그들이 고백할 수 있었겠습니까, 없었겠습니까? 없어요. 이유가 뭐냐? 이사야 40장을 보면서 이사야 40장의 바탕, 그 형틀을 자기 쪽에서 이미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해석 틀에 예수님은 절대 담기는 법이 없습니다. 

오늘날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문자적으로 성경 해석을 했지요. 그 해석으로 그들이 구원 받을 수 있습니까? 구원 못 받습니다. 그러면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구원 받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내가 신학공부하고 박사학위 받은 것이 바로 죄다.” 그러면 구원 받는 거예요. 평생 간호사를 했지요. 그러면 어떻게 구원 받습니까? 육신의 껍데기가 간호사지요. 그러면 이제는 간호사의 허울을 벗고 “나는 죄인이고 흙입니다.” 이것을 십자가 앞에서 고백하면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 받는 겁니다. 

이 해석을 누가 했는가 하면, 빌립 집사가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해석을 해주니까, 그 내시의 반응이 뭐였지요? 세례를 받았잖아요. 돈을 얼마나 주고 세례를 받았습니까? 그런 것 없습니다. 감사의 인사를 드리기도 전에 성령이 와서 두 사람을 갈라놓았습니다. 시간이 정지되면서 우리 시간 말고 다른 시간이 적용되었지요. 성령이 적용하는 시간이 따로 있어요. 

질문 드립니다. 강도가 십일조를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안 했지요. 그런데 주님 계신 낙원에 갔어요. 강도는 성경도 모르고 구원 받았는데 그러면 우리도 성경 덮을까요? 이 성경은 성경책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성경이 살아서 우리에게 상황을 만들고 우리를 인도하고 적용시킵니다. 

법은 우리가 선택해서 골라서 지키는 것이 아니고 법은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현재 닥치고 있어요. 내리는 비를 우리가 막을 수 없고, 부는 바람을 어찌할 수 없듯이 현재 율법이 우리에게 쏟아지고 있어요. 강도면 강도에게 그 사실이 한꺼번에 덮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의 행동이 모델이 될 수 없고, 성경 내에서 육신이란 점을 주께서 어떻게 다루시느냐 하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남을 어떻게 다루시는가에 대해서 시기하거나 부러워하거나 할 필요가 없어요. 나사로는 거지로 구원 받았다고 하니까 그것이 싫은 거예요. 왜냐? 내 사업이 파산해서 거지꼴이 되어 구원 받을까 염려가 되기에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자리에서 다 고통이 있습니다. 고통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 제일의 부자도 아픔이 있어요.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췌장암에 걸려 젊은 나이에 죽었어요. 늘 새로운 것을 연구 개발한다고 고생 많이 했어요. 지금 오단(오 목사님 아들)은 공부한다고 힘들어하는데, 다른 또래 친구들은 군에 입대해서 죽도록 고생하고 있어요. 

세상에서 인간의 욕망은 채워지지 않게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았어요. 본래 육신은 자신을 위해 사는 육신이 아닙니다. 마귀가 우리의 육신을 엉뚱하게 사용하도록 유도하고 있고 다루고 있어요. 마귀가 심어준 환상 때문에 우리 육신은 더욱 힘들고 어려운 거예요. 내 바람은 권력의 자리에서 멋있고, 화려하고, 넉넉한 삶을 누려야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아요. 이 현실과 이상의 간격 때문에 고통스럽습니다. 

KBS 화요일 [아침마당]을 보면 늙은 나이에 재혼할 분들이 나와요. 안정된 직장에서 많은 봉급을 받는 남자 한 사람을 놓고 여자 3명이 경쟁을 벌입니다. 누구는 요리를 잘하고, 누구는 어떤 취미를 가지고 있고 각자 자기의 장기를 말하는데 시청자는 어떤 여자가 선택되는지 다 알아요. 누구냐 하면 셋 중 제일 예쁜 사람이 뽑힙니다. 

여자가 선택되기 위해서는 운이 좋아야 돼요. 자기도 잘 생긴 얼굴이 아닌데 같이 나온 다른 여자가 자기보다 더 못생기면 그 사람이 채택됩니다. 이게 인간의 욕망이에요. 나는 절대 존재가 아니고 누구와 비교되느냐에 따라 나의 자아가 울다 웃다 합니다. 그러니 누가 우리를 이렇게 농락합니까? 주님의 소유인 육신을 가지고 마귀가 거짓말을 합니다. “육신은 너의 것이야. 그러니 네가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 살아야 해. 누구도 너의 육신을 책임지지 않아. 네 몸은 네게 챙겨야 해.” 이런 식으로 속삭입니다. 

이게 복음입니까? 내 자아를 빛나게 하기 위해 예수 믿기로 작정했다면 그게 믿는 것입니까? 내가 믿기로 작정해서 예수 믿고 천국 간다는 것은 마귀가 마지막 카드로 내놓는 종교적 유혹입니다. 그런데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은 구원 받기를 시도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 받지 않기 위해서 도망치는데 주께서 강제로 구원을 시킵니다. 아이들 밥 먹기 싫어할 때 엄마가 숟가락에 밥을 떠서 쫓아다니면서 먹이듯이. 이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도 싫고, 설교도 듣기 싫고, 내가 욕망하는 것을 추구하며 살려고 하는데, 주님은 끝까지 따라와서 강제로 구원하시기에 모든 구원의 능력은 주님께 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 받으려 하지 마세요. 그것이 구원의 시작입니다. 예수 믿지 맙시다. 이것이 믿음의 출발입니다. ‘예수 믿지 말라. 그러면 네가 예수 믿게 될 것이다.’ 그러면 안 믿어지면 어떻게 합니까? ‘너의 시간으로 기다리지 마라. 네 시간은 적용이 안 된다.’ 10년 후에 믿게 되더라도 그 때는 10년의 시간을 공들여서 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때에 의해서 믿을 때가 되었기에 믿게 된 거예요. 성령이 임하실 때가 되어 믿게 된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구약에 있는 말씀대로 예수님 오실 때 우리는 제 3의 영역에서 구경꾼이었고, 관찰자였고, 해석자였고, 간 보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니 주님 복음을 위해서 다루어진 육신을 갖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초부터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임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4. 4. 28. 09:35 녹취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