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4. 3. 21) 1-2
마가복음 1장 1절에서 “복음의 시작”이라고 했는데, 성경은 창세기가 시작의 책이고, 이 때 복음이 시작되면 되는데 왜 한참이 지나 예수님이 오셔서 시작이 되는가? 그 전에는 시작한 것이 없는가? 있어요. 아담도 있었고, 에덴동산도 있었지요. 그러나 그것은 복음의 시작은 아니고 창조의 시작이었습니다.
창세기는 창조의 시작이고, 마가복음은 복음의 시작입니다. 창조의 시작은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것이라면, 복음의 시작은 미래에서 출발해서 거꾸로 내려옵니다. 천지 창조는 시간 따라 가지만 복음은 시간에 매이지를 않습니다. 복음의 시작은 위에서부터 아래로의 시작이고, 창조의 시작은 창조된 것이 마지막 새로운 시작과 교체되기 위해서 종말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제 3의 지역에서 이것을 관찰하는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이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드라마 [기왕후]를 보면, 대성상이라는 최고 실권자가 있는데 국고를 빼돌려서 주석 광산에다 숨기라고 노예들에게 시켜놓고, 작업하는 과정에 자기 신하들을 보내 그 노예들을 잡아 죽이라고 합니다.
노예들이 대성상의 지시로 보물을 숨겼는데, 그 명령을 따른 자를 또 다른 신하를 보내 죽입니다. 그러면 부하의 위치가 어디입니까? 대성상이라는 사람과 같은 자리입니까, 아니면 같이 죽어야 될 자리입니까? 같이 죽어야 될 자리입니다. 그 죽은 부하를 이스라엘로 본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전했어요. 그 후에 투사구팽. 사냥개를 실컷 부려먹고 나중에는 사냥개마저 잡아먹지요. 단, 진작 죽어야 될 인간이 여기에 가담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대성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기 위해 만들어 놓았어요. 그런데 그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복음 속에 있어야 압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죠? 참 재미있지요.
내가 하나님의 시키는 일을 했고, 흐뭇해하면서 돌아서는 순간 하나님의 칼이 나를 쳤고, 나는 죽어가면서 ‘할렐루야’를 외치면서 기쁨으로 죽는다는 거예요. 실컷 하나님께 이용당하고는 “저 같은 죄인을 사용하시다니 너무나 감사합니다.”하고 앞뒤가 안 맞는 소리를 하면서 죽는 자는 주 안에서 죽는 자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삽니까, 아니면 자기만의 고유 영역이 따로 있어요? 자기만의 자리가 따로 있지요. 그래서 세상에서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를 저울질 하면서 자기 챙길 것 다 챙기면서 살아요. 그러면 이들에게 기쁜 소식은 뭡니까? 자신이 이 땅에서 더 편하게 살고, 더 건강하게 살고, 더 오래 살고, 남들에게 큰 소리 치면서 살 때 그것을 복이라고 하고, 행복으로 본 거예요.
그런 사람들(이방인)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벌써 만났지요. 그래서 그들에게 동화되었어요. 그러면 이미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방 나라가 저주 받는 것이 확인 되었지요. 그 다음에 확인하라고 준 이방인에게 이스라엘도 동화됨으로 말미암아 이미 그들도 한 통속인 것이 확인되었어요.
그러면 이 저주 받은 세상에서 구원 받을 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있습니다. 이 인간은 시간관념이 있어요. 그래서 천지 창조를 볼 때마다 과거 이야기고, 지금은 현재고, 장차 종말이 온다고 생각하는 것이 인간인데, 인간은 죽으면 없어요. 그러면 방금 이야기한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신약에서는 ‘때’ 또는 ‘이 세대’가 나옵니다. “아직은 내 때가 되지 않았다.” 혹은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시간은 어느 몸에서 나왔습니까? 우리 인간의 몸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인자되시는 예수님의 몸에서 새롭게 주어지는 때며 시간관이죠. 이것이 우리에게 기쁜 소식의 내용을 전하는 시간 틀이 됩니다.
인간의 시간관은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가잖아요. ‘주께서 오실 것이다.’ 그런데 이미 주님은 오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미래를 기다린다는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이 되었어요. 그래서 위를 보라고 했어요. 온갖 개념들(천국, 땅, 영생 등)이 위에서 쏟아져요.
아브라함 언약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삭 언약, 그리고 야곱 언약이 있어요. 이것을 합쳐서 나라를 만드는데 그것이 이스라엘입니다. 이 나라에 모세 언약이 주어지고, 그 다음에 다윗언약이 있고, 계속 언약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망해도 언약은 남아요. 언약이 언약을 이끌어가면서 새언약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인간이 제 3의 지역에서 보면 이렇게 보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죽었습니다. 죽으면 시간도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모든 것이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면 아담, 노아, 아브라함 이렇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때가 있는 거예요. 새언약이 복음의 시작입니다. 그러면 복음에서 거꾸로 이쪽을 뿌려놓은 거예요.
그러면 시간이 어떻게 되는가 하면 거꾸로 흐르지요. 시간의 역전인데, 창조할 때 이미 예수님이 거기 계셨다는 것이 복음의 시작이 된 거예요. 복음의 시작은 마가복음에서 시작되었는데 따지고 보니 창세기부터 이미 복음은 시작이 된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감추어진 비밀이에요.
에베소서 3장 9절을 봅시다.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은 시간 흐름은 없고 그동안 숨겨진 것이 드디어 밝혀진 것입니다. 숨겨졌다는 것은 미완성이 아닙니다. 제주도 앞바다에서 갈치를 잡았습니다. 그러면 갈치가 잡히기 전에 바다에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있었지요. 은닉되어 있었지요. 아직 안 잡혔을 때이니까.
인간의 자아는 내가 있기 전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인간은 이것을 몰라요. 내가 있기 전에도 있다고 보는 거예요. 없었어요. 인간에게는 자아가 없어요. 육신이 있을 뿐입니다. 자아는 마귀가 관리하지만 육신은 하나님이 관리합니다. 그러면 그 육신은 나의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서 창세전에 계획된 대로 나타나야 될 그 육신이죠. “사나 죽으나 죽의 것이다.”라는 말이 새삼스럽게 믿어질 때 그런 것이 아니고 믿기 전부터 아브라함은 주님의 것이었어요.
로마서 9장을 보세요.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되었잖아요. 그것이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예요. 제 말이 어렵게 느끼지는 것은, 우리가 시간관을 고수하기 때문에 어려운 거예요. “그것이 언제입니까?” 라고 묻는데, 우리는 그런 것을 물을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라는 것이 없어요. 90년을 살아도 사라지면 우리의 시간도 소멸됩니다.
그래서 우리 자아는 없는 것이고, 예수 안에서 어떤 역할과 기능을 해 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신약에서는 ‘예수 안에서’라고 하고, 구약에서는 ‘언약 안에서’라고 합니다. 사울이 처음에 왕이 될 때 성신이 임했어요. 그런데 그 사울이 다윗을 만났을 때는 악신이 임했어요. 만약 자아가 성립이 되면 이것이 복잡해져요.
‘악신을 소유해야 됩니까, 성신을 소유해야 됩니까?’ 이런 질문 자체가 자아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악신이 들어오느냐, 성신이 들어오느냐를 묻는데, 자아는 없고 육신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성신을 보낼 수도 있고, 악신을 보낼 수도 있는 겁니다. 한 번 성령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하는 경우가 있다고 히브리서 6장에 나와 있어요. 구약 성경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신약의 성령은 그런 것이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 육신이 아니고 예수님이 주님으로 승격된 그 몸체에서 나온 성령이에요. 그 성령이 우리를 장악하게 되면 그 성령은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성령의 은사(능력)들은 있다가도 사라질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자 하는 성령은 우리를 떠나지 않아요. 이것을 성령의 인을 받았다. 혹은 보증금이다. 그렇게 말합니다.
신학과 성경 주석이 왜 엉터리인가 하면, 나의 존재를 1차적으로 인정하고 어떻게 구원 받을까를 생각하니까 엉터리가 된 거예요. 우리 자아는 구원의 대상이 아닌데 마귀의 장난으로 내 구원을 생각하는 자체가 틀려먹은 거예요. 주님은 우리가 자아만 챙긴다는 것을 익히 아십니다. 그런 주님 앞에 우리 자아를 챙긴다는 것이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유다야, 이제 네 할 일 해야지.” 그 때 사단이 임한 겁니다. 사단이 사용한 육신이 된 거예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으로 임한 것이 아니고 육신으로 오셨어요.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면 적그리스도라고 요한일서에서 말씀했어요.
주께서 육신으로 오셨습니다. 이 말은 주님이 우리를 육신으로 다루겠다는 것입니다. 언약 안에서의 육신은 심판받아야 할 죄악 덩어리죠. 이것을 아무리 자아로 위장해도 소용없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내가 사람들에게 잡혀서 죽게 된다.”고 했어요. 그 때 베드로가 하는 말이 “결코 그런 일은 없습니다.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주님을 지키겠습니다.” 라고 했지요. 그 때 주님은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베드로가 한 말은 사단이 시켜서 한 것임을 예수님이 지적하신 거예요.
그러면 베드로에게 사단이 들어갔는데 그는 구원 못 받습니까? 베드로는 구원 받아요. 마귀가 설쳐서 베드로를 잡으려 해도 주께서 기도하셔서 그를 지키셨지요. 그러기에 베드로는 마네킹입니다. 아침에 백화점 직원이 여름옷을 입히든지 봄옷을 입히든지 그것은 직원 마음대로지요.
이처럼 인간은 주님이 조작하는 마네킹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21:18).”고 하신 거예요. 만약 베드로가 스스로 생각해서 “이 길로 가면 하나님 뜻이고, 저 길로 가면 내 뜻이야. 그래서 나는 이 길로 갈 거야.” 라고 했다면 주님이 허락했겠어요? 아니지요. 왜냐? 주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가기로 결정한 그것도 자기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허락지 않습니다.
지난 일들을 뒤돌아보면 나는 내 마음대로 했는데 그 모든 것이 다 주께서 띠 띠우고 내가 원치 않는 길로 인도하신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내가 원하는 길로 갔다고 여기는데, 이것은 나의 자아가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 자아의 생각을 버리고 주님 생각을 들어야 해요. 내가 평생을 살아도 그 모든 삶은 내가 원치 아니하는 길로 띠 띠고 끌려가는 거예요.
제가 가락교회에서 강의하면서 환란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아줌마들이 마사지 숍에 가서 누워있으면 직원들이 와서 마사지를 해 주지요. 이것도 환란입니다. 왜냐? 환란은 부활된 상태에서 볼 때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환란이라고 주님이 그렇게 규정을 하셨습니다. 마사지 받는 것이 좋습니까, 천국 가서 사는 것이 좋습니까? 천국이 좋지요. 그러니까 마사지 받는 것이 환란입니다. 성도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도 환란이고, 성도 아닌 자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도 지옥 가기 위한 마땅한 짓입니다. 우리의 시간은 잊읍시다. 잊는다는 것은 Let it be. 그냥 내버려 둬. 그런 뜻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던지 주님은 소급해서 그것을 다 용서해 주시기에 주님의 어떤 일이라도 우리에게는 기쁜 소식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나는 쏙 빠져서 관찰자, 헤아리는 자가 돼요. 독단적인 자아 때문에 나 아닌 타인은 나에게 평가를 받아야 될 자로, 심지어 주님도 그런 분이로 여기는데 이건 말이 안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헤아림 속에 담겨서 우리의 모든 것이 이 땅에서는 환란이고, 내가 원치 않는 길로 가게 하시는 겁니다.
‘공부 끝나고 치킨 시켜서 먹을까’라고 원해서 치킨을 배달시켜 먹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원치 않는 길로 인도받는 것입니다. ‘어, 이게 웬 치킨이지. 주께서 주셨네.’ 하면서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자리에서 볼 수 있는 눈, 이것은 성령이 임해야 위에서 볼 수 있는 눈이 생깁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자아가 평가하지 말고 주님이 소급해서 평가하도록, 기쁜 소식에서 어떤 평가가 주어지는지 관심을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서론이 너무 길었는데,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봅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1:1).” 이것을 해석하면, ‘복음은 이제 하늘나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 ‘시작’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을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개념으로 이해하면 성경 중간중간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내 때, 이 세대’ 등의 해석이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이 마치 우리의 때와 동일하게 가시면서 ‘시작’이란 단어를 사용하신 것은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었기에 우리에게 맞추어서 글을 써다 보니까 우리에게 그렇게 보이는 거예요.
“주님도 어릴 때가 있었고, 장성할 때가 있었잖아?” 그렇지요. 주님도 육신으로 오셨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복음의 시작’이라고 한다면, 복음의 끝은 어디인가? 요한계시록인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을 끝이라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나는 시작이고 끝이다.”라고 했어요.
이것은 우리가 아는 ‘시작’과는 다릅니다. ‘알파요 오메가’ 즉 ‘시작과 끝’이란 말은, 끝이 곧 시작이란 말입니다. 우리의 시간관으로는 구약 지나면 신약이 나오고, 신약에서 십자가 지면 종말이지요. 그런데 주님은 십자가로 시작해서 신약 지나고 구약에 가면 여기에 종말이 있는 거예요. 끝에도 주님, 시작도 주님. 이것이 알파와 오메가의 주님입니다. 그 가운데도 주님.
복음을 안다는 것은 복음을 알게 된 시작점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위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전체가 다 시작 안에 있고, 전체가 다 끝 안에 들어있습니다. 복음을 알게 되면 복음만 아는 것이 아니고 창세기부터 전체 의미를 다 알게 된 거예요. 선지자가 아무리 똑똑해도 천국의 어린아이보다 못하다고 예수님이 말씀했어요. 이게 무슨 뜻일까요? 어린애가 다 아는 거예요.
어린아이가 선지자보다 공부를 더 많이 해서가 아니라 성령이 와서 그에게 알려줬기 때문에. 그러면 성령이 알려줘서 성경을 다 외우는가? 아닙니다. 그들이 아는 것은 복음 안에서 복음의 뜻대로 모든 것이 되어질 뿐. 그리고 끝. 세상 모든 것이 복음을 위하여, 주를 위하여,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간다.
제가 다니엘 강의를 끝내면서 마지막에 약 5초 정도 침묵을 했어요. 왜냐? 할 말이 없었어요. 이미 우리가 종말 속에 있기 때문에 할 말이 없는 거예요.
1절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했는데, 이게 ‘복음의 시작’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죠. 이 말은 복음은 예수님이 독점한다는 것이고, 따라서 예수님을 모르면 복음을 모르는 것이 됩니다.
“내가 구원 받았다.”고 하는 사람은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에요. 이 사람은 ‘내가 구원 받았다.’는 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진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입니다. 그러면 나는? 복음에서 나는 찾을 수 없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에 편입되었으니까.
그전에는 누가 기쁜 소식입니까? 내가 나라는 점이 기쁜 소식이었는데 이제 주객이 바뀐 거예요. 내가 기쁜 소식이 아니고 주님이 기쁜 소식이죠. 따라서 내가 구원 받았다는 것은 절대로 기쁜 소식이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나의 이름과 자아는 제거되어야 합니다. 십자가 자체가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어서 죽입니다. 우리 이름을 죽이는 거예요.
야곱의 이름은 야곱이죠. 그러면 이스라엘은 누구의 이름입니까? 그것은 야곱의 이름이 아닙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될 때 야곱은 이미 죽은 자입니다. 죽었는데 야곱의 육신을 이스라엘 이름을 위하여 계속 살려준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누구의 이름입니까? 장차 오실 예수의 이름이에요.
예수님을 위하여 야곱이라는 육신은 이제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서 야곱은 손자를 축복 할 때 손을 어긋맞게 한 거예요. 요셉의 두 아들을 놓고 형이 동생이 되고 동생이 형이 된다는 것,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본 자손은 쫓겨나고 이방인이 그 자리를 채우고.
거지 나사로가 천국에 가서 자신의 거지 노릇을 자랑하면 됩니까? 안 되지요. 강도가 천국 가서 강도짓 한 것을 자랑하면 안 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해야 돼요. 자기는 강도가 아니었어요. 그냥 육신이었고, 거지 나사로는 거지가 아니라 그냥 육신이었어요. 강도와 거지는 직업이었어요.
육신이란 점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나 달라지지 않습니다. 남자, 여자? 천국에서는 남자, 여자 구분도 없어요. 세상에서 아내의 역할을 했고, 남편의 역할을 했지요. 천국에서는 역할극이 끝났어요. 남편 죽고 시동생 7명과 결혼했던 여자가 죽어서 천국 갔다면 누가 자기 남편인가? 곤란하지 않은가? 라고 바리새인이 질문할 때, 주님 대답은 ‘너는 천국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천국에는 시집도 아니 가고, 장가도 아니 간다. 그 때는 천사와 같다.
천사로 사는 것이 좋습니까, 남자로 사는 것이 좋습니까? 우리의 육신은 천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나의 자아는 그동안 해왔던 남자의 역할이 좋아요. 익숙한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우리 육신을 흙으로 만들어 놓고 흙에서 다시 천사로 만들 때는 일체 흙에 대해서는 Let it go.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만들어요. 말썽꾸러기든 재벌이든 다 잊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Let it go.가 소원입니다. 빨이 이 몸을 잊고 새 몸을 받기를 기대합니다. 하늘에 속한 육신으로 주와 함께 누리는 것이 바울의 소망이었습니다. 제 딸이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가훈을 적어오라고 해서 가훈을 적어줬더니 교사가 깜짝 놀랐어요. 가훈이 간단했어요. ‘죽자!’ 이것이 사도 바울의 소원이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직업과 직위를 경유하는 것이 아니고, 네 인생, 내 인생을 경유하는 것이 아니고, 육신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경유해서 보면 쌍꺼풀 수술이 별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육신으로 독점됩니다. 내 육신을 집어넣지 마세요. 내가 은혜 받은 경험을 집어넣지 말고 주님의 육신, 그리스도의 복음이 중요합니다.
모든 성경 말씀은 이 복음을 위해서 있습니다. 2-3절 말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이것은 이사야 40장 말씀을 인용한 것인데, 이 말씀을 이사야가 보는 앞에서 주가 예수라는 것을 끄집어 낼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끄집어 낼 수가 없지요. 왜냐하면, 복음이 시작 될 때가 아니기 때문에. 복음이 시작되지 않으면 내 자아가 살아 있잖아요. 자아는 성경을 천독을 해도 거기서 자아의 모습만 나와요. “주여, 이 말씀 믿으면 구원 받습니까?”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지금까지 설명한 것이 뭐냐 하면, 이사야 말씀도 복음을 경유해서 해석해야 됩니다. 그런데 복음이 오기 전 그 당시에는 우리는 관찰자, 해석자가 되어서 성경을 볼 때 출발점이 복음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서 출발하니까 결국 내 자아가 잘 되는 쪽으로 해석해요. 내 자아가 잘 된다고 하는 그 순간에도 내 육신은 오실 주님을 위한 기능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내 자아를 위해 봉사하는 그 순간도 내 육신은 나의 죄로 말미암아 죽어 흙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모세, 아브라함, 엘리야를 죽였습니다. 누가 죽였습니까? 예수님이 죽였어요. 바로 그것을 아브라함이 알고 예수님을 보고 기뻐한 거예요. 죽으면서도 기뻐한 거예요. “내가 죽는 것이 언약에 합당합니다.” 하고 죽는 거예요. “나는 죄인입니다.”하고 죽는 거예요.
모세, 엘리야, 예수님이 의논한 것은 ‘내 죄를 언제 씻으실 거예요?’라고 묻는 거예요. 예수님이 별세하셔야 모세, 엘리야가 죄 용서를 받는 겁니다. 어제 영화 [노아]가 개봉되었는데 평이 별 2개 반으로 나와 있는데, 종교성이 강하면 강할수록 발작을 일으킵니다. 문제는 거기서 복음이 나오느냐 하는 거예요.
복음이 안 나와도 저는 봐야 합니다. 보고 평을 해주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저를 원치 않는 방향으로 띠 띠고 가시기에, 저는 원치 않는 영화 [노아]를 봐야 합니다. 나의 육신은 내 자아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고 주께서 몰아가는 식으로 갈 수밖에 없는데, 우리는 거기에서 또 나를 집어넣어요. “주님, 제가 봤습니다.”주님이 이끄셨는데 우리는 내가 한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2-3절에 나오는 이야기가 이사야 때에는 그 누구도 해석이 불가합니다. 이사야 40장 3절 이 말씀은 복음을 모르는 상태에서 문법적으로 문자적으로 원어를 분석하면 여기에서 예수님이 나옵니까? 안 나옵니다. 미지의 X입니다. 그러면 X의 자리에 예수님을 넣으면 되지 않는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만났을 때 “미지의 X가 예수님이다.”고 그들이 고백할 수 있었겠습니까, 없었겠습니까? 없어요. 이유가 뭐냐? 이사야 40장을 보면서 이사야 40장의 바탕, 그 형틀을 자기 쪽에서 이미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해석 틀에 예수님은 절대 담기는 법이 없습니다.
오늘날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문자적으로 성경 해석을 했지요. 그 해석으로 그들이 구원 받을 수 있습니까? 구원 못 받습니다. 그러면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구원 받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내가 신학공부하고 박사학위 받은 것이 바로 죄다.” 그러면 구원 받는 거예요. 평생 간호사를 했지요. 그러면 어떻게 구원 받습니까? 육신의 껍데기가 간호사지요. 그러면 이제는 간호사의 허울을 벗고 “나는 죄인이고 흙입니다.” 이것을 십자가 앞에서 고백하면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 받는 겁니다.
이 해석을 누가 했는가 하면, 빌립 집사가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해석을 해주니까, 그 내시의 반응이 뭐였지요? 세례를 받았잖아요. 돈을 얼마나 주고 세례를 받았습니까? 그런 것 없습니다. 감사의 인사를 드리기도 전에 성령이 와서 두 사람을 갈라놓았습니다. 시간이 정지되면서 우리 시간 말고 다른 시간이 적용되었지요. 성령이 적용하는 시간이 따로 있어요.
질문 드립니다. 강도가 십일조를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안 했지요. 그런데 주님 계신 낙원에 갔어요. 강도는 성경도 모르고 구원 받았는데 그러면 우리도 성경 덮을까요? 이 성경은 성경책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성경이 살아서 우리에게 상황을 만들고 우리를 인도하고 적용시킵니다.
법은 우리가 선택해서 골라서 지키는 것이 아니고 법은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현재 닥치고 있어요. 내리는 비를 우리가 막을 수 없고, 부는 바람을 어찌할 수 없듯이 현재 율법이 우리에게 쏟아지고 있어요. 강도면 강도에게 그 사실이 한꺼번에 덮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의 행동이 모델이 될 수 없고, 성경 내에서 육신이란 점을 주께서 어떻게 다루시느냐 하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남을 어떻게 다루시는가에 대해서 시기하거나 부러워하거나 할 필요가 없어요. 나사로는 거지로 구원 받았다고 하니까 그것이 싫은 거예요. 왜냐? 내 사업이 파산해서 거지꼴이 되어 구원 받을까 염려가 되기에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자리에서 다 고통이 있습니다. 고통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 제일의 부자도 아픔이 있어요.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췌장암에 걸려 젊은 나이에 죽었어요. 늘 새로운 것을 연구 개발한다고 고생 많이 했어요. 지금 오단(오 목사님 아들)은 공부한다고 힘들어하는데, 다른 또래 친구들은 군에 입대해서 죽도록 고생하고 있어요.
세상에서 인간의 욕망은 채워지지 않게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았어요. 본래 육신은 자신을 위해 사는 육신이 아닙니다. 마귀가 우리의 육신을 엉뚱하게 사용하도록 유도하고 있고 다루고 있어요. 마귀가 심어준 환상 때문에 우리 육신은 더욱 힘들고 어려운 거예요. 내 바람은 권력의 자리에서 멋있고, 화려하고, 넉넉한 삶을 누려야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아요. 이 현실과 이상의 간격 때문에 고통스럽습니다.
KBS 화요일 [아침마당]을 보면 늙은 나이에 재혼할 분들이 나와요. 안정된 직장에서 많은 봉급을 받는 남자 한 사람을 놓고 여자 3명이 경쟁을 벌입니다. 누구는 요리를 잘하고, 누구는 어떤 취미를 가지고 있고 각자 자기의 장기를 말하는데 시청자는 어떤 여자가 선택되는지 다 알아요. 누구냐 하면 셋 중 제일 예쁜 사람이 뽑힙니다.
여자가 선택되기 위해서는 운이 좋아야 돼요. 자기도 잘 생긴 얼굴이 아닌데 같이 나온 다른 여자가 자기보다 더 못생기면 그 사람이 채택됩니다. 이게 인간의 욕망이에요. 나는 절대 존재가 아니고 누구와 비교되느냐에 따라 나의 자아가 울다 웃다 합니다. 그러니 누가 우리를 이렇게 농락합니까? 주님의 소유인 육신을 가지고 마귀가 거짓말을 합니다. “육신은 너의 것이야. 그러니 네가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 살아야 해. 누구도 너의 육신을 책임지지 않아. 네 몸은 네게 챙겨야 해.” 이런 식으로 속삭입니다.
이게 복음입니까? 내 자아를 빛나게 하기 위해 예수 믿기로 작정했다면 그게 믿는 것입니까? 내가 믿기로 작정해서 예수 믿고 천국 간다는 것은 마귀가 마지막 카드로 내놓는 종교적 유혹입니다. 그런데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은 구원 받기를 시도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 받지 않기 위해서 도망치는데 주께서 강제로 구원을 시킵니다. 아이들 밥 먹기 싫어할 때 엄마가 숟가락에 밥을 떠서 쫓아다니면서 먹이듯이. 이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도 싫고, 설교도 듣기 싫고, 내가 욕망하는 것을 추구하며 살려고 하는데, 주님은 끝까지 따라와서 강제로 구원하시기에 모든 구원의 능력은 주님께 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 받으려 하지 마세요. 그것이 구원의 시작입니다. 예수 믿지 맙시다. 이것이 믿음의 출발입니다. ‘예수 믿지 말라. 그러면 네가 예수 믿게 될 것이다.’ 그러면 안 믿어지면 어떻게 합니까? ‘너의 시간으로 기다리지 마라. 네 시간은 적용이 안 된다.’ 10년 후에 믿게 되더라도 그 때는 10년의 시간을 공들여서 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때에 의해서 믿을 때가 되었기에 믿게 된 거예요. 성령이 임하실 때가 되어 믿게 된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구약에 있는 말씀대로 예수님 오실 때 우리는 제 3의 영역에서 구경꾼이었고, 관찰자였고, 해석자였고, 간 보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니 주님 복음을 위해서 다루어진 육신을 갖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초부터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임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4. 4. 28. 09:35 녹취 마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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