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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말씀화(서울강의130914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3. 9. 24. 07:35



2013-09-14 01:27:09 조회 : 124         
일상의 말씀화 130913 이름 : 이근호  (IP:119.18.9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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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의존교회130913a (일상의 말씀화)―이 근호 목사 

오늘은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을 봅시다. 
살후 3:10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는 말씀이 우리 사람들이 의논해서 지어낸 게 아니죠. 사람들이 야 모여봐라 해서 우리 이제부터 일하기 싫거든 밥도 못 먹게 만들자 하는 식으로 사람들이 의논해서 만든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한번 생각해 봐요. 사람들이 의논하고 사람 머리에서 나오지도 않았는데 우리가 이것을 왜 믿어야 됩니까?  세상이라 하는 것은 사람 좋으라고 있는 거잖아요.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는 것을 주장한 사람이 없어요. 주장한 사람이 있으면 맞아 죽습니다. 네가 배부르구나! 배부르니까 이런 소리 하는 구나! 네가 재산 꽤나 있다고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게 하자 네가 악덕 업주야! 하면서 대번에 욕할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는 것이 어느 인간의 머리에서도 이런 소리가 나올 수 없다면 우리는 그런 소리를 무시하면 안 될까요? 좀 터무니 없이 들린다 말입니다. 

집에 할머니가 있는데 몸이 아프다. 일을 못한다. 그러면 죽일까요?  할머니! 왜?  일하세요! 허리가 아파서……. 그러면 할머니도 밥 없다! 너무 냉정하고 비정하고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어느 인간도 우리가운데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맙시다! 라는 이야기할 사람이 없어요. 이야기할 사람이 없다는 말은 아무도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인데 사람이 동의하지 않은 말에 왜 사람이 의식하고 신경을 써야 됩니까? 

이것은 분명히 둘 중에 하나에요. 하나는 뭐냐 하면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하는 그 말이 거북스러워서 이 말을 믿어주는 척을 하는 겁니다. 말이 좀 어려운데 다시 해 봅시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는 말을 하나님이 하셨잖아요. 그 말이 싫은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싫은데 그 싫은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내 말 싫어?  듣기 싫어?  먹지도 마! 그러니까 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에 의해서 너 굶어죽어! 하는 말이 듣기 싫은 거예요. 

안 굶어죽기 위해서 억지를 부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척들을 하기 위해서 이 본문의 말씀을 우리가 성경에서 빼내지를 못하고 외면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싫은 것이 아니라 내가 밥 못 먹고 굶어 죽을까싶어서 그런 내가 싫어서 이 말씀을 억지로 믿어주는 척하는 겁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누구든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하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 생각이고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생각에 동의 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터치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우리식대로 살고 하나님은 그런 잔소리를 하든 말던 하나님식대로 하세요. 이 말씀대로 반드시 실행되지 않는다는 것을 굳게 믿기 때문에 이 말씀을 그냥 부담 없이 보고 있는 거예요. 이 말씀은 결코 이루어 지지않는다는 거예요. 

장차 주님께서 오실 것이다. 메시야가 오실 것이다. 그것은 믿어요. 왜?  우리의 경험상,  우리의 경험 속에 있지 않기 때문에 행여나 올수가 있잖아요. 그런데 일 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이 말은 이 세상에 밥 못 먹는 사람치고 다 일 했다고 볼 수 없잖아요. 일 안해도 얼마든지 먹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러면 그거 누가 먹이는 겁니까? 하나님께서 먹이셨다면 이 말씀하고 다르다 말이죠. 일하기 싫어도 잘 먹는 사람이 있고 일 해도 못 먹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면 이 말씀하고 안 맞으니까 하나님이 그냥 엄포 놓는 거다 그러니까 쉽게 가자! 라는 식으로 이 말씀에 대해서 사람들은 무시하기로 작정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하신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개인적으로 이야기하신 것인가, 아니면 이 말씀의 바탕이 어디에서 이런 바탕이 나왔는가을 우리가 생각 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의 개인의 견해가 아닙니다. ‘일상을 말씀화’ 시키겠다는 의도에서 전한 것입니다. 이 세상은 사도 바울이 믿기는 이 세상은 말씀의 세계이죠. 필리핀이나 아프리카 어느 구석에 가도 거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대로 진행이 됩니다. 아침에 해 뜨고 해지고 하는 이 모든 것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믿어요. 하늘의 별이 떨어지고 지구가 어떻게 되는 것도 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뭐가 있느냐 하면 일상생활이 있거든요. 일상생활이 있으니까 사람들이 어떤 꾀를 부리느냐 하면 말씀의 세계 따로, 내 일상세계 따로, 일상생활할 때는 말씀이 잔소리 하지 마세요! 그리고 일상이 끝나고, 하루일과가 끝 난 뒤에 말씀, 성경 봐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더 나아가서 사람들은 내 일상생활 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보탬이 되겠느냐를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 일상생활은 꿈쩍도 안해요. 이것은 마치 바위섬같아요. 아주 단단해요. 바위섬에는 파도가 치치요. 파도가 친다고 해서 바위가 어머나! 놀래서 바위섬이 딴 데로 이사갑니까? 여기는 파도가 심해서 딴데로 이사가야겠어! 이럽니까? 이런 것 없어요. 

말씀이란 파도가 늘 쳐대도 하나님은 말씀대로 해도 일상만큼은 끔쩍도 안하고 버티고 앉아있는게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일상을 위하여 하나님은 나한테 무슨 보탬이 되고 무슨 도움을 주시겠습니까? 하는 쪽으로 거래합시다. 우리 흥정합시다. 하는 것이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방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도리어 끔쩍도 않는 것이 일상이 아니고 뭐가 끔쩍도 안한다? 사도 바울은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끔쩍도 안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일상생활 한다는 핑계로 떨어져 나가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일상생활을 말씀화시킨다. 일상생활을 말씀화 시킨다. 일상생활도 말씀의 연장으로 보겠다는 것이 사도 바울을 통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당신은 성경 몇 번 읽었습니까? 나는 100번 읽었습니다. 성경이 있으면 읽는다는 의미가 단어를 소지해서 읽으면 그것은 말이 돼요. 그런데 당신의 일상은 몇 % 말씀화 되었습니까? 이것은 성경 몇 번 봤습니까? 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100번을 보던 천 번을 보던 상관이 없습니다. 오늘 오전에 제가 누구 장례식에 다녀왔습니다. 갑자기 비가 오는데 내 옷은 다 젖었는데 우산은 작은데 바지도 다 젖었는데 하여튼 간에 갔는데 허은숙 선교사님이 어제 돌아 가셨는데 누가 생전에 설교한 것 아마존에서 방송 촬영했던 것이 나오게 해 놨는데 그 죽는 게 일상이죠. 

그러면 성도의 존재의 이유는 누가 죽음을 맞이해서 슬프다 이것은 말씀이 아닙니다. 슬프긴 슬픈데 이것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상황을 말씀화 하시겠는가? 이게 지금 관건이거든요. 송재원씨가 그러고 보니까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은데 살 빠진것도 어떻게 말씀화시키지? 성도의 관심사는 사도 바울처럼 우리의 일상생활이라는 것이 어떻게 말씀화될 수 있느냐에 대해서 하나님이 우리가운데 개입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해야 돼요. 

우리가 말씀화 되지 않으면 우리는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이런 이야기를 해요 내가 환자가 안 아프게 기도를 했는데 기도 응답이 안됐습니다. 그대로 이야기하면 나는 저의 어머니가 안 아프기 위해서 기도를 했는데 돌아가셨습니다. 아팠습니다. 그래서 그 순간에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라고 그 따님이 이야기했어요. 아주 참 훌륭한 따님이에요. 하나님이 없는 거예요. 원래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없다 에서부터 시작해야 돼요.  

하나님이 있다고 하는 것은 어머니의 죽음이 일상에 와 버리면 하나님을 믿었다, 예수 믿었다 하는 것이 다 날아가 버려요.  내 일상에 무슨 보탬이 되겠느냐?  라고 생각한 그 하나님은 없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없어요. 내 보탬이 되고 나를 도움 주고 나 어려울 때 힘주는 그런 하나님은 없어요. 왜냐 하면 말씀은 나 도와주는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니까 내가 어려울 때  도와주실 거야 라는 것은 꿈쩍도 하지 않는 이 바위섬 같은 일상,  말씀은 버려도 일상은 못 버리겠다는 대단한 집념, 그것을 또다시 폭로된 샘이거든요. 어머니의 죽음앞에서 그분이 복음을 모른다는 게 아니고 솔직한 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머니가 아파서 돌아가셨는데 내 기도의 응답이 안 될 때 나는 순간적으로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적절하다싶어서 타임을 잡아서 했죠. 하나님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느낄 때 이미 그 사람은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그러한 상황이 된 거예요. 자,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면 사람은 아무 것도 안 믿습니까? 하나님이 없다고 할 때 누구를 믿습니까? 자기 자신을 믿죠. 자기 일상을 믿는 거예요. 자기가 벌거벗은 채로 드러나는 순간이 하나님이 다루시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타날 때에 우리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어요. 착하다고 여겼는데 천하에 못된 인간으로 지적받을 인간으로 사람들에게 공개당할 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드디어 너의 일상은 말씀화 되는구나! 라고 하나님은 흐뭇해 하시는 겁니다.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할 때에 일한적도 없이 밥 숟가락 뜰 때에 우리의 입장은 난처합니다. 당황스럽습니다. 많이 당황하셨어요?  일하지 않는데 숟가락 드니까 숟가락 놔! 어디서 밥먹어?  라고 말씀이 우리 일상속에 침투해 버려요. 도대체 밥도 함부로 못 먹어요. 밥 먹기 전에 오늘 밤먹기 위해서 일을 했느냐 안 했느냐?  그것을 따질 것 같으면 나는 하나님하고 안 놉니다. 그렇게 나를 난처하게 만드는 하나님 같으면 내 일상에 천하에 보탬이 안되는 하나님은 나는 인정 못합니다. 라고 나올 때 그것은 어머니의 돌아가신 것처럼 그 순간 하나님은 애초부터 나에게 없는 하나님입니다. 뭐 이익이 있어야 믿지요. 

여기 어린 자녀분들, 본인은 어리지 않다고 여기겠지만 다 큰 자녀분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물으면 머릿속으로 계산해요. 가만있어 봐 내가 하나님앞에 이익 받은게 뭘까? 하나님 덕분에 이런 것을 얻었어요 할 때 남한테 믿음 있는 자랑꺼리가 되고 나도 믿음 있는 사람이 되고 머리가 계산이 막 돌아가요. 그거 하나님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분명히 공부 잘하게 기도 했는데 한 문제도 내가 아는 문제가 안 나왔을 때 많이 당황하셨어요? 좋은 거 나오라고 기도 했는데 전혀 안본 거 안 나와서 많이 놀라셨어요? 신입이 이래가 밥 먹고 살겠어요?  그런 하나님 믿고 밥 먹고 살겠어요?  그게 바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나의 일상은 나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 하면서 다가오실 때 하나님입니다. 내 일상은 나만을 즐기고 나만의 영광과 나의 멋있음과 나의 위대함을 보여 주려는 빌미로서 절대로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거기에다 쏟아 붙지 않습니다. 압수해 갑니다. 차압해 갑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000그룹의 회장이 있는데 그 회장을 기독교 교회에서는 000장로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분이 13년째 세금을 37억 원을 내지 않았습니다. 세무서에서 그 자택을 방문했습니다. 빌라 문을 안 열어줬어요. 그것 뜯는데 30분 걸렸어요. 뜯고 들어갔는데 회장 부부가 안 보였어요. 어디 갔나 보니까 1층 뜯고 들어가니까 2층으로 도망갔어요. 2층 문이 잠겼어요. 2층  문 뜯는데 1시간 걸렸어요. 그래서 1시간 뜯어서 만났어요. 세금 내에요. 하니까 그 장로가 하는 말이 한푼도 없어요. 말을 끝나자 마자 세무 공무원이 금고를 열어보니 3천만원이 있었어요. 이것은 돈 아니고 뭡니까? 종이입니까? 내꺼 아니고 우리 마누라 것입니다. 거기서 재미있는 것은 일층 뜯으니까 2층, 그 집이 2층집이니까 다행이지 만약에 3층 같으면 3층으로 도피하고 4층 같으면 4층으로 도피했을 거예요.  이 모습이 뭐냐 하면 오늘날 우리의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1층 뜯어놓으니까 2층으로 도망가는 겁니다. 2층 뜯으니까 3층으로 도망가는 겁니다. 왜? 자기 일상 빼앗기기 싫어서 정말 이것만큼은 봐주소! 하는 그것 하나님은 우리의 속 마저도 말씀화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디를 가도 우리가 말씀이 걸어가는 사람이 되기를 원해요. 그런데 우리는 그 그룹의 회장이라 그 장로라 말씀은 하나님의 것이고 내꺼 있어야 돼! 하나님이여! 내꺼! 이것은 내꺼야! 그 내꺼라는 것, 그것은 있어야 되지 않느냐 이 말이죠. 

결혼식할 때 남편이 신부한테 반지해 주는 것이 그 자체가 문제라고 봐요. 반지해 주는 자체가  문제라고 봐요. 다이야가 됐던 풀뿌리로 했던 금으로 했던 저는 반지 하는 자체가 문제라고 보는 겁니다. 왜냐 하면 남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그 반지를 사랑하게 되어 있어요. 남편 빼앗겨도 끔쩍도 안하다가 반지 빼앗기면 와락 달려듭니다. 왜?  그것은 나의 것이기 때문에 평생 나를 기념하는 나는 결혼했다는 나를 기념하는 마지막 나의 자존심 같은 거거든요. 그래서 그것을 여자의 반지화, 억지가 있지만 하여튼 반지화, 반지가 나이고 내가 최후의 모습은 반지와 같다.  그 만큼 소중하다는 뜻이에요. 

오늘 첫 번째 시간에 일상생활의 율법화를 어떻게 하나님께서 진행시키시는지를 그것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열왕기상 17장에 보게 되면 거기에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엘리야가 하나님께서 우리가 마지막 챙기고 싶은 귀한 반지를 어떻게 빼앗는가를 보세요. 그 돌아가신 선교사의 딸이 저한테 이야기했어요. 하나님은 나한테 깡패라고 아, 제대로 믿음의 고백을 했구나, 깡패 같은 나도 그런 하나님이에요. 

그게 아까 이야기한 일상을 말씀화 시키기 위해서 전부 다 말씀에 의해서 말씀 증거하라고 우리에게 깔아놓은 다 주님의 것이 돼요. 하루하루의 삶이 우리의 직장과 모든 자녀와 소위 내껏이라고 여겼던 것이 사실은 말씀 것인데 말씀의 것이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를 거기에 사용케 하시는 겁니다. 

사르밧에 가면 과부가 한 사람 있어요. 과부에게 아들이 하나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엘리사에게 수년 동안 아예 비고 이슬이고 물 한 방울없다고 예언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난뒤에 그 과부집에 가니까 마치 과부 집에서 요리를 하려고 하는 거예요. 이 집에 먹을것이 있네요? 과부라고 해도 먹을것이 있네요. 가난한 과부에 얻어먹을 것이 있네요. 하니 하는 말이 이것 마지막 기름이고 마지막 통의 밀가루인데 탁 털어서 내 아들하고 동반 자살하려고 마지막 음식 먹고 죽으려고 했습니다. 

엘리야가 하는 말이 그것 나 주라했습니다. 그거 내가 먹을게. 그렇게 못된 선지자 봤습니까? 지금 아들이 그것을 먹고 난 뒤에 죽어요. 어차피 아들은 죽을 아들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사르밧 동네가 가뭄 들었다는 것은 그 동네 다 죽였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다 죽였어요. 다 죽였으니까 죽은 모습들을 보여 주는 거예요. 그럼 엄마와 아들이 죽는데 그것을 선지자가 뺏어 가버리면 이제는 진짜 당겨 온거죠. 요거 먹고 난뒤에 마지막 되는 거야, 그 마지막 먹을 때까지는 살아있는데 그 과부 아들은 선지자를 만나자 마자 죽은게 되지요. 왜?  먹을게 없으니까 그렇죠. 

그 다음에 네가 이 빈통, 그리고 이 기름병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차고 또 차고 부어도 차고 퍼내도 또 밀가루는 있을 것이다. 그 기름과 밀가루 어디서 수입한 겁니까? 인도네시아입니까? 미국산입니까?  그 밀가루하고 기름이 어디서 온거예요?  이게 일상생활에 말씀을 도입하다가 아닙니다. 그러니 성경해석이 전부 다 엉터리입니다.  일상생활을 지금 말씀화 만드는 거예요. 우리 일상이 하나님의 무슨 본질이 되느냐 이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겁니다. 그래서 그 이스라엘이 지금 벌 받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나밖에 모르고 하나님은 나를 도와 줘야 좋은 하나님이라 갖고 있는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는 어떻게 합니까? 일괄적으로 죽어 마땅함을  보여 줄 수 밖에 없어요. 이것을 저는 ‘평탄작업’이라 이렇게 하고 싶은데 100미터 달리기를 할 때 트랙이 6개있다고 합시다. 선수가 달립니다. 이게 100미터 달리기 같으면 우사인볼트가 1등인데 그러면 이 트랙을 200미터로 늘려 봅시다. 역시 우사인볼트는 잘 뛰어요. 역시 1등이에요. 그러면 400미터로 늘려봅시다. 여기 선수중에 단거리는 못해도 중장거리는 잘하는 사람이 있어요. 우사인 볼트가 2등하고 다른 사람이 1등하겠지요. 이러면 이것을 더 늘려 봅시다. 40KM로 합시다. 우사인 볼트고 뭐가 전부 다 헥헥 거리고 들어오죠. 그러면 200KM로 늘려봅시다. 나중에 누가 1 등이고 2 등 이고 할 필요 없이 나중에 다 뻗어 있지요. 요거 평탄작업입니다. 

일상생활에서는 뭐가 가능 하느냐 하면 누가 누가 잘하나가 가능해요. 금요일 오후에 KBS1에서 애들 노래 자랑할 때 나오잖아요. 누가 누가 잘하나? 이것을 늘어버리면 어떻게 돼요?  누가 누가 잘하는 것이 없지요. 기름하고 밀가루 주고 누가 누가 요리를 잘하나?  그러면 맛있게 하는 사람하고 백날 해도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그런데 전체로 가뭄이 들었다, 가뭄이 들었다 에 대해서 누가 누가 요리를 잘하느냐가 의미가 없지요. 왜? 재료 자체가 고갈된 입장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랏다 과부에게 찾아가는 것은 엘리야는 하나님의 편이고요 하나님이 하는 일은 뭐라 했습니까? 일상화를 뭐로 바꾼다? 지금 말씀을 바꾸는 거예요. 그러나 사랏다 과부의 생각은 그런 일상을 말씀으로 바꾸지 말고 지금 내 굶어죽게 생겼으니 밀가루나 좀 주고 병이 기름이나 채워달라 그것을 은근히 요구했을 거예요. 왜?  선지자니까 나부터 살고 봅시다. 살고 난 뒤에 하나님 섬길게 이게 사랏다 과부의 요구조건이었을거예요. 그렇다면 엘리야가 와서 자 수리수리마수리 준다. 이러면 되는데 뭐라 하는지 하면 어이 마지막 남은 밀가루로 빵을 만들어 어떻게 해 달라?  나에게 달라 했죠. 

이것은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어린 애 도시락을, 세상에 아이 것을 뺏어 먹는다, 참,  그 보리떡 5개, 물고기 2마리, 그것을 뺏어먹습니까? 하여튼 제자들도 못됐어요. 그것을 들고 와서 주님이여 이것 하나 가져왔습니다. 뭐 어쩌라고요? 예수님 1인분도 안되는데 그 빼앗긴 사람은 굶어요?  안 굶어요?  굶지요. 지금 도시락 있는 사람 것을 뺏어가 버려 뺏긴 사람은 없잖아요. 없으니까 없는 자에게 일상이 됩니까? 안 됩니까? 없는 자가?  뭐 있어야 일상이 되지 마지막 털어먹고 죽으려고 하는데……. 

아마 그 사랏다 과부가 농약을 먹으려고 했으면 주께서 농약도 뺏었을 거예요. 농약을 뺏어서 이제부터 너희집에 농약이 넘칠 것이다. 사람이 끝까지 자기 일상은 포기 안 합니다. 하나님이여! 제발 너무 심합니다. 이것 뺏어 가면 정말 나는 나의 일상은 없습니다. 제발 이것 만큼은 좀 참으소서! 주님께서 그것 뺏어오라! 뺏어왔습니다. 뺏어오고 난뒤에 그 다음에 밀가루와 기름을 주십니다. 언제 까지 주시느냐? 비가 올 때 까지 줘요. 그렇다면 지금 사랏다 과부는 밀가루통과 기름통에 밀가루와 기름 없는 것을 보지 말고  일상에 필요한 것을 보지 말고 어, 왜 가뭄이 들지! 자기 일상을 떠나서 모든 것을 평탄으로 만드시는 일관적인 하나님의 그 뜻에다 관심을 둬야겠죠. 그게 바로 일상에서 말씀으로 전환되는 겁니다

가뭄이 왜 왔느냐?  말씀에 위반해서 죄를 지었기에 가뭄이 온 거예요.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가뭄이 왔다는 것만 알뿐이지 이게 도대체 무슨 죄 때문에 왔느냐가 연결이 안돼요. 가뭄이 왔다?  오늘날 하고는 달라요. 오늘날은 이스라엘이 없기 때문에요 옛날에는 이스라엘이 유일한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에 일어난 일이 곧 하나님의 계시로 등록이 돼요. 그래서 다른 나라와 달리 그 나라가 가뭄들었다는 이 말은 옛날에 하나님이 약속의 땅에 내가 말씀 지키면 가뭄이 들지않고 축복을 내려할 것이고 말씀을 어기면 가뭄이 든다는 레위기 말씀이나 민수기 말씀이나 출애굽 말씀이 나오지요?  그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이스라엘 나라는 존재 했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지금은 안 그래요. 지금은 이스라엘도 없고 말씀 지켰다 안 지켰나를 농사가 잘 되느냐 못 되느냐로  측정했던 그때 그 시대가 있었어요. 그 시절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쨌든 사랏다 과부는 가만 있어봐 밀가루 없지 기름 없지?  이것에 신경 쓰지 말고 이제는 폭을 높여야 해요.  도대체 이 세상에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일괄적으로 어떻게 가뭄이 들었느냐 말이죠. 100미터 달리기하면 우사인볼트가 1등하지요. 그런데 갑자기 규정이 바뀌어서 200키로 미터를 뛰라하니까 우사인 볼트가 헥헥 거리면서 도대체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200키로미터를 뛰느냐 말이에요. 100미터만 뛰면 되는데 모든 등수를 무의미하게 만들어요. 

인간들끼리 도토리 키 재기, 네가 잘했어 내가 잘했어 내가 복 받았어 네가 복 못받았어 라는 것을 일관성으로 평탄화 작업, 미장할 때 시멘트 미는 흙손 가지고 밀듯이 모든 것을 쭉 밀어버려요. 그러면 그 과부를 죄를 알았습니까? 몰라요. 그래서 17장을 보게 되면 이 일후에 아들이 죽습니다. 하여튼 선지자 만나 집안이 풍비박산 나요. 아들이 죽었을 때 20절에 보면 

왕상 17:20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로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제가 뭐가 잘못되어 내 아들을 죽입니까? 내가 무엇을 잘못을 했기에 우리 어머니를 죽게 하고 우리 아버지를 죽게 하십니까?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내 남편, 내 아내를 죽게 하십니까? 라는 발언, 극히 일상적이었습니다. 평소에 이 말 연습했습니까? 나, 누가 뭐라 하면 이 이야기해야지 하고 연습했습니까? 연습 전혀 필요 없습니다. 그냥 터져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냥 터져 나옵니다. 

엘리야 선지자 앞에서 하나님이 내가 뭐가 잘못됐는데 어떻게 내가 아들 죽일 죄를 지었다 말입니까? 답답해 죽겠습니다. 내가 뭐가 잘못됐습니까? 라고 했을 때 엘리야가 네가 이게 문제라고 죄를 이야기했습니까? 죄를 이야기했습니다. 왜냐 하면 일상생활에는 죄가 없습니다. 일상생활이 죄라고 한다면 정말 우리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이렇게 됩니다. 이것을 동의 못한다?  밥 먹고 사는 것이 죄다. 밥먹고 살고 물먹는 것이 죄다. 배고파서 밥을 먹고 밥먹고 목이 답답해서 물을 마시는데 그게 죄라면 우리가 일상에서 느꼈던 죄하고 전혀 다른 죄지요. 

그런데 밥 없다고 밥달라하고 물 없다고 물 달라고 하다가 죽어버린 사람이 있어요. 광야에서 물 없다 하다가 죽어 버리고 먹을 것 없다고 죽었어요. 이게 뭐가 나쁩니까? 원망하다가 죽었어요. 그럼 이래 돼요. 물이 없으면 이래야 돼요. 물이 없네, 배고프면 어 꼬르륵 소리가 나네, 이러다가 죽겠네 뭐 죽어야지, 이러면 되는데 그럴 위인이 이 세상에 없습니다. 누구야?  나로 하여금 나에게 고통을 안겨 주는 자가 누구야? 내가 목말라 죽어봐야 정신 차리지! 이런 식으로 누구야?  나로 하여금 목마르게 하는 자 누구야?  라고 나올 때 그때 그게 바로 죄가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의 일상은 우리가 관리할 입장이 못 되는 일상을 그동안 우리가 내 일상을 관리해 왔다는 것이 그게 죄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관리하는데 우리가 중간에 끼어든 거예요. 하나님이여! 이건 내 인생입니다. 내가 관리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 믿을 때가 언제이냐 하면 우리가 스스로 좀 재물좀 가졌고 돈좀 있고 스스로 살만하다싶으면 백이면 백 하나님을 안 믿습니다. 

겉치레에요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의 취미고 활동지 정말 약간이라도 하나님을 의식할 때는 언제냐, 정말 일상이 원활치 않고 깨어질 때는 하나님의 뜻이뭡니까? 사랏다 과부의 말처럼 왜 나의 아들을 죽입니까? 이렇게 합니다. 엘리야가 아무 말하지 않고 그 아들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려서 하나님께 기도 했더니 아들의 혼이 다시 돌아와서 살았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이렇게 살릴 애였다면 애초부터 죽이지는 말아야 되지 않습니까? 제가 엘리야 이야기 제일 먼저 뭐가 했던가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상을 말씀으로 바꾸는 방식이 뭐냐고 하면서 엘리야를 보자고 했지요. 이것은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원하시는가 그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는가?  일상에 매여 있는 우리를 말씀으로 전환시켜서 구원합니다. 말씀의 사람되어서 우리를 구원합니다. 그 과정에 대해서는 엘리야와 사랏다과부의 만남을 통해서 언급했습니다. 

정리를 하면 이렇습니다.

사랏다 과부는 전혀 자기 죄를 알 수가 없습니다.

죄는 알수가 없는데 오늘날 우리도 죄를 몰라요.

없는데 딱 죽은 아들을 살려주니까 비로소 뭘 느끼느냐 하면

그동안 내가 생각했던 모든 나의 생각은 전혀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소급해서 이야기하면 나는 내 일상에 죄 없이 착실하게 열심히 산 자체가 죄가 된다는 사실이에요. 

나쁜 짓을 한 것이 아니고 추가적인 하나님의 뜻을 몰랐다는 것이 죄가 된다는 겁니다. 

나는 내 일을 그냥 했을 때뿐인데 이게 죄가 되는 경우는 십자가 졌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 우리는 내 일에 몰두 한 것이 죄가 된다는 겁니다. 십자가? 그것은 하나님, 주님의 전문이고 나는 내 밥 먹고 사는 것이 전문이고 각자 전문이라고 합시다. 이랬던 우리가 주께서 그런 너를 이미 구원받았다고 했을 때 구원받고 보니까 그동안 나의 일상에 목숨을 걸고 살았던 이 모든 것이 너무나 철딱서니 없는 죄도 모르면서 죄를 아는 척 했던 이 철딱선이 나밖에 모르는 그게 달라지죠. 그게 뭐냐?  일상생활이 말씀화된 거예요. 복음화되고 무엇을 해도 십자가를 위하여 내가 하나의 과부로서 내가 요것 먹고 마지막 죽는 그러한 경우도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매일같이 수렴하고 인정해야 됩니다. 

엘리야에 의하면 그 여자는 자기 집안만 생각했지 포괄적으로 전체 가뭄이 들었던 그 의미를 몰랐고 그리고 난 뒤에 아, 모든 나라가 죄졌구나!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하니까 너도 죄인이고 나도 죄인이다. 라고 할 때는 마치 우리가 죄를 아는 것처럼 했는데 막상 내 일상에 직접 주님께서 찍하고 저기를 대니까 거기서 퍼뜩 우리가 뭐가 나왔습니다.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일이 나옵니까? 저보고 어쩌라고?  이렇게 나올 때 그것은 주님의 구원이라는 의미를 주님께서 거저 구원해 주셨다는 그것을 우리 일상 생활속에 스며들지를 못한 거예요. 건드리니까 화가 나오잖아요. 용서 받고 구원받아놓고 건드리면 화가 난다는 말은 구원은 따로고 내 일상도 따로라는 이런 심보 밖에 안되는 겁니다. 

이제 다시 오늘 본문을 봅시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누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보기만 해도 화가 납니다. 사람이 일하는 이유가 나중에는 일 안해도 먹을 수 있도록 지금 빡세게 고생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아 놓으면 나중에 일을 안 해도 먹을 자격이 있다고 마음놓고 먹고 싶은 것 많이 먹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어요. 아주 좋은 말을 했는데 자신이 부자라는 생각 언제 했느냐 하면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마음 껏 사먹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는 부자라는 생각을 했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애들이 추석때나 설에 부자가 돼요.  왜냐 하면 그 전에 달고나를 못 먹었는데 그때는 달고나를 먹을 수 있고 전에는 돈이 없어 딱지를 못샀는데 마음껏 살 수 있고 전에는 피씨방에 정액제 1시간밖에 못했는데 이제는 10시간하고 있을 때 그 순간 자기는 부자라고 느낄 때, 그러니까 부자라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는 것이 바로 이게 부자에요. 

그러면 내가 하고 싶은 것 중에서 ‘나는 빡세게 일하고 싶어’ 이런 인간은 없습니다. 놀고 싶지요. 그러니까 인간은 영원히 어떻게 하면 노는 날을 놀면서도 밥먹고 사는 날을 그리워하는 폼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든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했으니까 이것은 밥그릇 뺏어버린다. 이 말 아닙니까? 사료밥 그릇 뺏는다는 이 말아닙니까? 우리를 아주 강아지 취급을 해서 어디서 사료 밥을 먹어! 짖지도 않거든 먹지도 말라 했거든! 해서 뺏아버릴 참인데요. 

밥그릇이 체일 때 우리가 내가 말씀의 작업에 내가 벌써 들어갔구나 하고 생각해야 돼요. 왜 찹니까? 하면 네가 일 했나?  오늘도 얼마나 일했는데요. 일을 했으니까 먹을 수 있다 이것은 이 관계와 성립되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누구든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했거든요. 그러니까 일을 해도 억지로 일을 하면 먹으면 안돼요. 왜?  일하기 싫거든 이라고 되어 있으니까 말장난 같기도 한데 일을 좋아서 하는 사람은 미친사람이에요. 일을 좋아서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일하는 것은 쉬기 위해서 일하는데 일에 미친사람이, 아 일에 미친사람이 있긴 있겠네요. 워크홀릭이라 해서 일에 완전히 중독된 사람인데 그것은 정신병자이고요. 

여러분, 우리는 말씀을 못 지킵니다. 우리는 단지 말씀을 못 지킨다는 것을 인정하고서 우리는 말씀화 되어 가는 거예요. 왜?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또 이렇게 머리가 돌아가요. 목사님 저 이제 십자가 알아요. 그러니까 이제는 일하기 싫어도 먹어도 돼지요?  십자가 아니까 이제는 진짜 내가 원하는 일하기 싫거든 먹지마라는 것을 무시하고 먹어도 돼지요?  어차피 죄인인데 뭘 못해?  

이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고 우리가 어떤 일을 해도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에 위반이 돼요. 그 위배된 줄 알고 먹으시면 주의 은혜입니다. 문제가 너무 간단해 졌어요. 밥을 먹음으로서 이런 것은 내가 먹을 만한 자격이 돼! 왜? 나는 부자니까 이런 소리 하지 말고 왜 그러합니까? 왜?  일용할 양식이니까 

사랏다 과부처럼 마지막 기름과 밀가루처럼 그냥 탁 털어내야 될 우리에게 왜 선지자가 찾아와서 말씀이 찾아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일하기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먹을 것을 주십니까? 그것은 이미 말씀이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는 그 말씀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가 회개 하는 이 땅에서 거기에 가담하게 되어 있어요. 주여 우리는 죄인입니다. 이 말씀은 오직 우리에게 실현시킬 뿐이지 우리는 해 내지못하리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고백케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이 말씀을 우리는 못 지킵니다. 지켰다면 이 말씀을 이제부터 지워버리세요. 

이 말씀을 지켰는데 구원은 필요 없잖아요. 매직가지고 지워버려요. 내 생애에는 그 말씀이 없다 왜? 나는 그 말을 지켰으니까 이런 것은 없어요. 이 말씀은 항상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일상을 말씀화 시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야기합니다. 내가 일을 안 하면서도 밥을 먹어가면서 하는 소리가 어이 친구야, 왜? 나 일 안하면서 밥을 먹는데 그래도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는 말은 그것은 맞어! 그것을 우리가 남한테 증거하는 겁니다. 어차피 우리는 일하기 좋아 하지 않아요.  

성경이 말씀이다. 전부 다 맞지요?  그런데 성경이 말씀이라고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 구원받습니까?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그 성경이 말씀인데 그 말씀이 살아 움직여서 우리 일상 속에 파고 들어옵니다. 그러면 우리는 강력하게 저항하지요. 하나님이여! 지킬 테니까 너무 깊숙이 내 일에 관섭하지 마세요. 나는 마지막 남은 자존심 같은 이것을 나는 누구한테도 건드리는 것을 저는 싫어합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더 파고들지요.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그러면 깜짝 놀랍니다. 일하거든 먹어라! 이게 아니고 일했거든 먹어도 돼! 이 말이 아니고 일 하기 싫거든 좋아서 일한 사람만 먹으라는 말은 우리에게 너무 심한 말입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과부되게 하시고 멀쩡한 아들 죽게 만들고 그래서 마지막 자살하고 싶어 떨어 먹는데 그것까지 선지자가 뺏어 버리고 엘리야의 일들이 벌어지죠. 그러면서 아는 것은 멀쩡한 아들을 죽였다가 다시 살리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께서 너를 살려주신다는 거예요. 뭐로?  네가 못 지키는 그 말씀가지고 매일같이 살려주는데 나 좋으라고 살려주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말씀대로 맞는다는 것을 증거하라고 우리를 살려주는 거예요. 못난 우리를.... 

역시 주의 말씀은 빈틈이 없어 맞아!  못 지켜도 맞아 라는 고백을 우리 보고 토하도록 그렇게 조치하시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서울 의존교회130913b (일상의 말씀화)―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살후 3:13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 
살후 3:14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아까 이야기하는 것은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는 개인에 관한 문제이고 두 번째 시간은 뭐냐?  형제들아 라고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대인관계에 있어서 어떻게 말씀화되느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친한 사람이 있는데 친한 사람이 내 복음에 대해서 공격을 하고 서로 잘 아는 사이인데 복음을 알고부터 그 다음부터 나를 멀리할 때에 그때에 우리가 ‘하나님 때문에 참 못살겠어! 내가 친한 친구도 떨어져 나가고’ 하지 말고 우리가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이렇게 대꾸합니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우리보고 사람하고 사귀라는 말입니까? 떨어져서 가란 말입니까?’ 왜 하나님말씀 때문에 서로 잘 사귀는 사람까지 떨어져 나가는 이러한 아픔을 우리가 격어야 된다 말입니까? 이게 말씀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는 개인 일상 말고 우리끼리의 일상도 우리는 포기 못하겠습니다. 라는 반발심이 나오기 마련이죠. 

그래서 이 시간에는 성경에 나오는 대인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거기에 적용하고 그것을 사용하는 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7장11절에 보면  마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그 다음에 나온 것이 뭐죠? 누구한테?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아니하겠는가?  아버지와 아들, 아빠와 아들의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그거 해도 소용없어 이게 아니라 하나님과 자기 아들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아빠와 아들의 관계를 세상적인 관계를 활용하신다는 사실이에요. 

단순히 너희 친하게 지내라 말씀대로 살아라가 이게 아니고 대인관계에 있어서 대인관계라고 하는 것은 나 말고 모두가 대인관계입니다. 대인관계에 있어서 가까운 사람이 부부,  부모, 자식, 그것을 촌수로 따지면 무촌, 1촌, 2촌 따지잖아요.  그 다음에 삼촌, 올케, 그 다음에 이웃사랑,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아무리 세상이 각박해도 일가친척, 특히 가족들의 유대감을 우리가 무시할 수가 없어요. 아무리 친구가 좋다고 해도 마지막에 갈곳 없어 들어설 수 있는 곳은 형제간이나 부모밖에 없어요. 

나는 너 같은 인간 자식으로 둔적이 없다 하고 매몰차게 찼지만 그 자식이 부도 당해서 마지막에 집에 기어 들어오는데 아버지가 ‘이게 어디를 기어 들어와! 난 너 같은 자식둔적 없어!’ 하고 내 쫓아도 엄마는 ‘들어본 나, 어이고 배고프지? 비빔밥 해 줄까? 계란후라이 해 얹어 줄까? 어이고 고생 많이 했네 내 새끼 어이고 내가 다 도와줄게’ 그러면 아빠가 나타나서 ‘어허 이놈을 나가라 했는데 당신이 거두느냐? 당장 나가라 해’  ‘너희 집에 가 있어라, 내가 쌀 퍼가지고 갈게‘ 해서 쌀 퍼서 수송하고 그 다음에 주주대 새마을금고에서 받아서 아들 갖다 주고 시장에서 고등어 한 마리살것 두 마리 사서 오면서 하나는 아들하나 주고..... 뭐 욕하고 호로자식 해도 마지막 건사해 주는 사람은 부모자식간입니다. 

그 부모자식은 첫 째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그것을 일상생활이라 합니다. 인간의 일상생활은 못 떠납니다. 정이 있는데 자기가 무슨 수로, 무슨 힘으로 정을 뗍니까? 너는 복음도 모르니까 지옥가거라! 하지만 쌀 퍼주는 것은 따로 쌀 퍼주게 되어 있고 보증 서게 되어 있고 도와주게 되어 있고 어려울 때 결국 아버지집에 찾아가게 되어 있어요. 종교가 달라도, 종교가 대수입니까? 아들이 우선이죠. 종교가 뭔데요?  기독교가 뭔데요? 기독교 믿는다고 자식이 자식이 아니고 아버지를 아버지가 부르지 못하고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지 못합니까?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합니까? 

그러니까 성경을 백독을 천독을 봐도 나는 내 가족사이 좋으면 나는 예수고 뭐고 나는 우리 집안이 최고 좋아 라고 돌아설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근본 본성인것입니다. 이것을 누가 아시느냐?  하나님이 아시거든요. 하나님이 아신다 말이죠. 아시면서 끊어라 버려라 하시지만 그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 자신의 노를 나타내는데 활용하시는 겁니다. 악한 자라도 네 자식한테는 그러니까 불량식품을 제조하는 사장이라도 자기 자식한테는 너 우리 회사 제품 먹으면 안 된다 큰일난다 하면서 안 먹이면서 아주 좋은 것 비싼 것 사 먹이고 자기 불량식품을 팔고 그렇게 하는 거예요. 

자식한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나님께서도 자식에게 그렇게 주지 않겠느냐? 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이 세상에 부녀지간, 또는 부자지간이 것이 그냥 우연히 혈육적인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이 다 필요해서 그 관계를 만들어 주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요.  그러면 여기서 일상을 말씀화 할 수 있는 그러한 틀이 가족관계, 친척관계라고 할 수가 있는 겁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런 것이 있어요. 고린도전서 7장에 보면 지금 서경수 목사님이 주례할 때 하려고 벼루고 있는 성경본문 말씀이 어떤 말씀이냐 하면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라, 결혼식 주례를 하시면서 시집가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시려고 하는 모양인데 시집가도 소용없다고 혼자사는게 최고라고 결혼식 주례로 하려고 마음먹고 있어요. 

결혼은 안하는 게 하는 것 보다 안 하는 게 좋다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결혼을 하게 되면 혈육적인 정이 주님의 복음보다 혈육적인 정이 앞서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결혼하지 마라 했으면 사도 바울이 결혼을 하지 마라 했으면 결혼 자체를 저주해야 되고 이 나쁜 놈들, 믿음도 없는 것들, 나같이 믿음 있는 사람은 결혼도 안하는데 얼마나 믿음이 없었으면 결혼을 했을까?  어이고 결혼 하는 자에게는 고난이 있으리라 맞잖아요? 성경에 나오지요? 결혼해서 사는 사람가난이 있으리라 바보같이 고난을 자초하고 결혼을 하다니 혼자 살면서 될걸.... 믿음이 워낙 없으니 결혼을 했지……. 이런 식으로 할 것 같으면 에베소서 5장 말씀을 하지 않아요. 

에베소서 5장 말씀이 뭐냐 하면 ‘아내 된 자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하면 우리가 결혼하지 말라며?  결혼하지 말라 해 놓고 뭐 아내 된 자들이여야 결혼하는 것은 믿음없는 사람이 하는 거라 분명히 이야기 해 놓고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복종은 무슨 복종이에요. 차라리 갈라서서 결혼 없이 사는게 낫지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결혼 자체가 주의 일을 방해 한다면 결혼하지 말아야 이게 앞뒤가 일관성이 있잖아요.  그런데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고 남편 된 자들은 아내을 사랑하기를 주님이 교회를 목숨을 바친 것처럼 사랑하라 그 사랑을 하려고 한다면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뭘 해야 돼요?  결혼을 해야 되겠네. 

그러니까 에베소서 5장을 지킬 겁니까? 안 지킬 겁니까? 5장을 지킬 것 같으면 결혼을 해야 되고 고린도전서 7장을 지키려면 하면 안돼요.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이 일관성이 없다 말이죠. 그래서 이래 가지고 대인관계의 일상화가 어떻게 말씀화가 될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의 말씀이 일관성이 없는데요. 

창세기 5장을 보겠습니다. 참 지루한 말씀인데 창세기 5장 4절을 보면 
창 5:5 그가 구백 삼십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창 5:6 셋은 일백 오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창 5:7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 칠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창 5:8 그가 구백 십 이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이게 무슨 일상의 말씀화가 되느냐 말입니다. 여기 일상의 말씀화는 뭐냐 하면 결국 끝은 어떻게 됩니까? ‘죽었다’ 죽었더라죠.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됩니다. 결혼을 하는 것, 전부 다 죽음의 의미를 보여주기 위해서 너희는 결혼도 해야 되고 부자간에 돈독하게 유지를 해야 한다. 죽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여기서 죽음을 보여 준다는 것은 어차피 죽을 건데 뭐 그런 좋은 관계 뭐합니까? 뜻이 아니고 죽음이라는 것은 너희들이 죽어 가면서도 죽음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죽음을 모르는 거예요. 죽음을 모르면 생명도 몰라요. 생명나무는 어디에 있습니까? 인간세계에 생명나무 없지요. 생명나무는 독점해 있죠. 생명나무는 여기만 있습니다. 다른 데는 없습니다. 없는데 인간들이 여기서 인간들이 생명을 언급합니까? 이거 100% 가짜입니다. 

생명나무가 에덴동산에 있어버리면 에덴동산 말고 전부는 뭐냐 하면 이게 죽음의 동산이에요. 공동묘지에요. 에스겔 37장에 보면 해골만 있는 골짜기에 에스겔을 데려가잖아요. 거기에 뭐가 일어납니까? 거기에 말씀을 주니까 일상에 말씀이 주어지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핏줄이 하나님의 군대가 되지요. 그런데 평소에 그 해골들이 군대 되고 싶어서 이스라엘이 되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냥 일상생활하다가 죽은 사람들이에요. 

일상생활하다 죽은 사람을 말씀이 임하니까 일상생활이 말씀화되면서 같이 그들이 일상으로 되돌아가지 않아요. 하나님을 위해서 싸우는 하나님의 군대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군대는 이스라엘을 말하는 거예요. 생명은 위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밑에는 생명이 없는 곳은 죽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거죠. 죽음의 세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죽어 마땅한 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다 사기입니다. 우리교회 오게 되면 생명 드리겠습니다. 다 사기입니다. 생명은 교회가 주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것이 아니고  남편이 아내 주는 것도 아니고 아내가 남편 주는 게 아니에요. 

생명나무 되는데 왜 부부 사이가 있고 부자 관계있고 부모관계가 왜 그런 게 있느냐?  그것은 죽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우리가 결혼한 것은 죽음이 뭔가를 보여 주기 위해 한 겁니다. 죽음이 뭔가 보여 준다는 이 말은 생명은 우리 딴 데 있다는 겁니다. 

아리스토델레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뛰어난 철학자인데 그 철학자의 스승이 플라톤이고 플라톤의 스승이 소크라테스입니다. 그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어요. 그 사람들이 사람 사는 목적은 행복에 있다 했어요. 제가 시민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이야기했습니다. 옛날에 로마 사람들은 지혜와 용기와 절제와 정의를 가르쳤다 했습니다. 

만약에 집에 우리 가훈은 지혜와 용기와 절제와 정의라고 했다 합시다. 그러면 어린 애가 묻기를 ‘엄마 저거 뭔데?’  ‘저거? 저거하면 훌륭한 사람 돼!’ ‘훌륭한 사람되면 뭐하는데?’ ‘훌륭한 사람되면 돈번다’ ‘돈 벌어서 뭐하는데?’ ‘이 바보야 돈 벌면 행복한 거야!’ 그 다음 질문은 뭐가 나와야 돼요? ‘행복해서 뭐할 건데?’ 거기에 대한 해답을 과학이나 철학자들은 제시할 수가 있어요. 첫 번째 시간에 이야기 했죠. 인간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아이디어를 인간들이 믿을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일하기 싫거든 이야기를 어느 누구도 이야기를 안 하잖아요. 그러니까 성경말씀에 있더라도 무시하자는 쪽으로 다 가버려요. 

성경에나 있지, 우리는 필요 없어 그런 것 안 믿어! 왜 안 믿는데요? 행복하면 그만이라는 거예요. 행복이 싫은 사람?  행복이 미워,  행복한 게 미워도 너무 미워요. 행복 안 했으면 좋겠어! 그런 사람 실례하지만 손 한번 들어시기 바랍니다. 없지요. 그 당연하다는 진리가 어린 애가 던진 질문에 그 ‘엄마, 행복해서 뭐할 건데?’ 거기에 대해서는 천하에 똑똑한 철학자 어른들도 할 말을 잊어버렸다니까요.  부부관계?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고 부자관계? 행복이 최고에요.  모든 영화, 모든 소설, 모든 드라마 전부 다 어떻게 하면 행복해 질 수 있느냐?  거기에 초점이 있어요. 

마마하고 사귀다가 설희하고 사귀고 그게 행복을 위해서 그러는 거예요. 오로라공주, 그러다가 중되겠다고 집에서 나가고 제 32회 우리가 그것을 보는 이유가 저것처럼 행복해지고 싶은 욕망이 우리속에 있기 때문에 행복해 질 수 있다면 우리는 뭐라도 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행복해서 뭐할건데요?  그런 질문에 어린 애 쥐어박으면서 행복이 최고지 하면서 구박할 거예요. 행복해서 뭐할 건데요? 행복하면 그게 끝이에요. 왜?  내가 신이 되니까 그렇습니다. 

이것이 기껏 생명이 없는 동네에서 그것을 죽음의 동산, 죽음의 동산에서 마지막 노리는 것은 행복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세요. 행복이던가요?  사랑이던가요?  아가 서에 보면 사랑은 죽음보다 더 세다고 했죠. 사랑의 동산입니다. 행복의 동산이 아니고 사랑의 동산입니다. 그 사랑이라는 말을 언급하는 것은 생명이 없는 자에게 사랑을 주고 싶은 것이 하나님이 기뻐 하신 자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베품이거든요. 내가 사랑을 줄게 너는 사랑이나 받아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너는 바구니이고 나는 퍼주는 존재이고 이것을 설명하면서 부자 관계 부부관계를 설명하는 거예요. 이것이 일상생활의 말씀화입니다. 

행복이 큰 것입니다. 그런데 방금 제가 뭐라 했느냐 하면 행복보다 사랑이 전부라고 했습니다. 그 사랑을 안 받은 사람 같으면 어떻게 될까요?  아이 역시 행복이 죄고야! 하지만 행복은 누구의 행복이냐?  남을 등을 쳐먹어서 내가 잘돼는 행복입니다. 아내를 위하여 남편인 내가 행복하고 남편을 위하여 아내인 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해서 서로 마주 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당신의 기쁨을 위하여 내가  희생할게! 바보 입니까? 남의 행복을 위해서 희생하는 그런 짓, 하지 마세요.  주의 사랑을 위해서 희생하라 했지 그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희생하라는 것 없어요. 

행복이란 분수의 넘치는 죄악된 인간의 탐욕을 말합니다. 복 받을 짓을 안 해 놓고 복을 받는다면 이것은 터무니없는 반칙입니다. 제가 수요설교에 했습니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터무니 없는 반칙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살아야 될 이유가 없는데요. 뭔가 반칙 같아요.  내가 살아아있으니까 내 일상이 중요하고 일상이 중요하니까 내 행복를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나에게 협조해 달라고 일방적으로 요구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이기주의 이것은 사랑도 아니고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고 탐욕이고 악마적인 더러운 심보입니다. 

사랑은

사랑받을 수 없는데 사랑받은 경우에만 사랑이라는 것이 성립되고

그 사랑이 있을 경우에만 행복을 잊어버려요

사랑받으면 돼지 행복해서 뭐할 건데? 

 

그런데 세상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행복하기 위해서 날 좀봐봐. 날 좀 사랑해 줘!  이럽니다.

사랑이 나를 행복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사랑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자기, 나 사랑해? 아담 같으면 당신이 나 사랑 안하면 불행해 질 꺼야! 

죽음의 동산에서는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 죽게 될 수 밖에 없는 원인을 제시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우리가 생각할 것은 뭐냐 하면

죽음의 동산에서 죽음밖에 없으면

그럼 죽어야지 죽음의 동산에서 왜 사랑을 거론합니까? 할 때

여기에 언약이 투입됩니다. 

죽음의 동산에서 생명의 나무가 주어지면서 그냥 오는 것이 아니고 언약의 방식으로 주어지게 됩니다. 솔솔 내려오지요. 선녀와 나무꾼에서 선녀가 목욕하고 있을 때 나무꾼이 선녀의 옷을 훔쳤습니다. 동대문 시장에 땡 처리하고 팔려고 할 것이 아니고 옷을 훔치니까 옷을 뺏긴 선녀는 날개옷이기 때문에 추진력이 없어요. 둘은 올라갔는데, 둘은 의리도 없어요. 날개 있으니까 같이 가면 되는데 둘이 홀랑가 버렸어요.  같은 여자 이면서 의리가 없어요. 자기 밖에 몰라요. 날개옷을 찾을 때 까지 못 기다리고 먼저 가 버렸어요. 그 여자는 날수가 없어서 못 가고 돌아다니다 보니 나무꾼이 가져갔어요. 옷 둬! 옷줘! 옷 주서요! 

내 아이를 나아둬! 아이를 낳아주면 옷 돌려줄게! 아이를 내 놨어요. 옷 둬! 하나 더 놓으면 줄게! 또 나았어요. 나아 줬다. 옷 둬! 하나 더 놓으면 또 나았습니다. 세 명 낳았습니다. 그래서 애를 셋을 낳으면 못 헤어진다는 말이 있어요. 언약은 선녀의 두레박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두레박입니다. 이게 솔솔 내려와요. 죽음의 동산에서 주의 사랑이 내려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을 붙잡으면 되겠네! 그런데 그 사랑을 우리가 붙잡을 만한 모습이 아니에요. 왜냐 하면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붙잡힐 사랑은 없습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살아오는 그 사랑은 항상 핍박받고 배척당 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받을 인간이 없으니까 하나님께서 살살 약을 올려요. 어떻게 약을 올리냐 하면 아브라함의 경우입니다. 아브라함아!  너 자식 없지?  예, 삐져서 아브라함이 늙어서 자식이 없으니까 행복하지 않은 거예요. ‘자식 줄게’하니까  ‘네 자식이 하늘의 별들보다 많다 하니까 그때서야 아버지가 아버지 노릇을 해서 자기 부인은 애를 못 낳으니까 이미 죽은 자니까요 종 하갈을 통해서 하갈은 놀랍게도 애굽 여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브라함 언약할 때 애굽에 갔다가 어쨌든 애굽여인 하갈과 자식을 낳았어요.  낳고 부자 관계가 성립됐습니다. 

부자 관계가 이미 성립됐잖아요,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이 하나님이 약속한 그 자식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여기에 선녀 비슷한 선녀 세 사람이 갑자기 왔습니다. 천사 세명 인줄 알고 마실 것을 대접했지요. 그분들이 하는 말이 뭐냐 하면 자, 뭘 축복할꼬 하다가 내년에 이 맘때쯤 아들을 하나 낳을 것이다. 부엌에서 음식준비하면서 일하던 사라가 픽 하고 웃었어요. 웃었는데 천사는 귀도 밝아요. 웃었지?  어데에?  안 웃었다고 시치미를 딱 떼었어요. 아무렇지도 않게 시치미를 딱 떼었어요. 이삭은 웃음이란 뜻인데 그 말은 벌써 그 전에 이름을 정해 줬어요. 이름을 이삭이라고 지어놓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웃음 사건을 유발시킵니다. 

어느 대목에서 웃어야 되는지 몰랐던 거예요. 이 아브라함의 내외가요. 그냥 천사가 와서 웃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 때에, 많이 당황 스런 상황을 만들 그 때에 아브라함은 아하 이거구나! 하나님은 나의 행복을 보장하기 위하여 자식을 주신 적이 없다는 거예요.  나의 행복을 위해서 자식을 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나는 자식이 있음으로서 우리 집안이 대대로 잘 된다는 나의 행복을 꾸준하게 우리의 일상을 유지하는데 이 일상이 말씀화 되기 위해서는 당황스러운 나로 하여금 내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는 것을 밝혀내는 일을 하나님께서 유발시킵니다. 
  
우리는 우리 가정에 창피스러운 일을 발견할 때 우리는 이런 일이 있다니 차라리 자살하는 게 낫겠다 그런 너를 구원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우리의 구원 관념에 그 안에 뭐가 섞여 있습니까? ‘역시, 나는 구원받을 만한 그런 그릇이야, 역시 나는 잘났어!’ 이게 포함되어 있었잖아요. 그것을 어떻게 합니까? 그것을 쏙 빼는 겁니다. 그것을 쏙 빼서 ‘세상에 이렇게 지저분한 내가 아, 그런데 내가 구원받아?' 이것이 바로 선녀의 두레박이고 날개옷입니다. 
무엇이 박탈됩니까? 나의 행복은 거기에 어림도 없게 만들어요. 나의 행복이 아니고 하나님의 기뻐하는 대로 그 사태에 말려든겁니다. 부자 관계에서 이스마엘이 자기 아들이라고 여겼는데 하나님이 두레박처럼 개입하니까 누가 진짜 자식이고 누가 가짜 자식이다? 하나님의 생각은 저 종의 자식은 종과 더불어 내 쫓아라 그는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수가 없다. 

이삭이 등장하니까 이스마엘은 전개가 어떻게 됩니까? 그는 무대에서 사라져요. 드라마에서 배역이 끝났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무대였어요. 그 무대에서 이스마엘은 사라지고  이제 이삭이 등장합니다. 등장하면서 부자 관계가 행복한 의미를 계속 말씀 드릴게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아, 네 아들 있지?’ ‘예’  ‘사랑하나?’ ‘너무 너무 사랑합니다.’ ‘죽여라! 제사로 바쳐죽여라!’ 모순되지요?  걔가 있어야 하늘의 별같이 자손이 대대로 많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 지잖아요. 걔가 있어야 약속이 되거든요.  그런데 이스마엘은 아니니까 걔가 없으면 하나님의 약속도 걔가 없는 동시에 뭐도 날아가 버립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 이야기를 아브라함에게 했습니까? 

아브라함은 육신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자기 인생에다가 집어넣을 수가 있어요. 내 좋으라고 하나님이 약속을 줬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말이에요. 봐라, 하나님이 약속 줬잖아 그러니까 나는 행복하고 복 받은 거야! 라고 생각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렇게 생각하는 그 약속은 본래의 약속의 의미와 다릅니다.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준게 아니고 죽어야 될자, 죽어야 될 이삭을 위하여 그 약속이 뒤 따라 온 거예요. 네 자식이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레처럼 많다 하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이 아니고 아브라함은 정계를 은퇴해야 돼요. 이제는 하나님이 주신 이삭에게 해당되는 약속이어야 됩니다. 그 다음에 이삭도 정계를 은퇴해야 되느냐 그 약속은 어디로 가야 하느냐 하면 야곱으로 가야 돼요. 야곱도 정계 은퇴해야 되고 그 약속은 요셉에게 가야 되고 요셉한테 가서 요셉 후손된 다음에 야곱의 자식들이 엄청나게 불어서 나중에 애굽나라에서 애굽 본토 민족을 위협할 정도로 강력한 많은 숫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축복해 주셔서 그렇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바로 왕이 히브리인들을 죽이기 위해서 산파에게 영향을 미쳐서 아들은 죽이고 딸은 살려줘라 죽었다고 생각한 그 모세가 살아나서 이스라엘을 이끌고 애굽에서 빠져 나오잖아요. 그 일련의 말씀화가 지금 우리의 인생 속에 작용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놀랍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하루 일과 가운데서 그 출애굽과 그 전에 있던 아브라함의 언약이 지금도 여러분의 인생속에 실시 됩니다. 


왜냐 하면 그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우리 예수님의 아버지이고 그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예수님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예수 믿는 그 사람에게 아버지가 함께 있거든요. 그냥 그 기능이 그대로 우리에게 되풀이 하면서 계속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어데에? 언제?  무슨 소리야?  나는 그거 몰랐는데? 못 느꼈는데?  그것을 내가 발췌할 수가 없는데?  이제 발췌하도록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좀 섭섭하더라도 참으시고 발췌하도록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왜 섭섭하다는 말을 하느냐 하면 그 약속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우리가 갖고 있던 모든 기독관, 선입관을 전부 다 내려놔야 됩니다. 

고린도전서 11장 봅시다.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의 그 작용이  동일한데 지금도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제가  설명해서 우리의 일상이 어떻게 말씀화 되는지를 그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에 보면 고린도전서 11장 3절에 보면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이거 뭐 기분 나쁘지 않습니다. 할렐루야 아멘입니다. 그 다음에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이거 아주 기분 더럽습니다. 결혼을 해서 집을 샀는데 명의를 공동명의 할 거예요?  남자명의 할 거예요? 머리가 명의를 해야지 머리 밑에 있는 지체가 명의가 되면 곤란하잖아요. 갑자기 일상이 말씀화 되기가 싫으네요. 아무리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고 간에 지금 중요한 것은 이 부부가 언제 갈라설지 모르는데 부부가 날라가버리면 나는 빈 깡통 되잖아요. 법원에 고소해서 남편이 내 재산가져갔다고 한다면 법원에서 공동투자 했다면 그만 끝나버리잖아요. 공동투자 했겠지 당신 사업하다가 손해 보면 부당스럽지 만약에 돈을 벌면 아내가 돈을 벌면 아내가 가만히 있겠다?  내 돈 내놔라 분명히 할거다 마찬가지잖아요. 장사가 잘되면 내돈 내놔라 하다가 안되면 니 혼자 다 가져라 하는 이런 식이 되면 이것은 책임 못진다 하면 어떻게 할 건데요?  이럴 것 같으면 차라리 결혼하지 말걸, 그러니 누가 하라 했습니까? 예수 믿고 하지 말아야지,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합니까? 하고 싶으면 걸려든 거예요. 

성경이 정해 놓은 부부,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 사이에 걸려든 겁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안타까울 수밖에 없습니다. 남자라고 해서 좋은게 아니에요. 그 이유가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할 때 남자들이 이것을 좋아할 수 있습니까? 이 말은 끝까지 여자의 평생을 희생적으로 남자가 책임을 져야 돼요. 자기 몸 관수도 못하는 인간이 무슨 배우자까지 책임을 져? 아이고 남자는 이게 엄청 부담돼요. 여자는 뜬거 없어요. 남자가 돈 벌어주면 그것으로 살림하는 재미, 그게 여자의 재미입니다. 그리고 자기만 예뻐해 주는 재미, 딱 두가지에요. 돈벌어다 주고 너 아무 것도 하지 마! 그냥 살림만 살아!하는 그런 복된 소식,  기쁜 소식과 그 다음에 오직 평생 너만 사랑할 거야! 하는 그 기쁜 소식, 투톱! 병들어도 차버리지 않고 내 간까지 떼어주면서 살려줄게 하는 그런 소식, 그 두가지가 여자로 사는 행복이잖아요. 그 행복이 문제에요. 

세상은 죽음의 동산이라 했는데 행복이 왜 나옵니까? 죽음의 동산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자체가 반칙이에요. 첫 번째 시간에 했던 것을 다시 이야기합시다.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그것이 우리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싫어합니다. 이것도 마찬가지에요. 성경 말씀을 펼쳤지만 우리는 성경말씀이 내 행복을 보장해 줄 때만 우리는 이것을 참고할 예정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행복을 깬다면 성경을 더 이상 볼 필요가 있느냐 하는 문제가 자꾸 생겨지네요. 하나님이 말합니다. 일상을 뭐로 바꾼다? 말씀화 되지 않으면 너는 생명나무는 없다는 겁니다. 일상이 말씀화 되어야 돼요. 

나의 행복을 위해서 말씀이 있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말씀되기 위해서 어설픈 우리가 이 땅에서 일상이랍시고 하루하루생활하고 있는 중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 교회에서는 하나님 잘해 주면 헌금 드릴게요. 이런 식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복음을 아는 교회라면 그러면 안돼요. 우리는 말씀에 걸려든거예요. 그리고 미리 결론을 이야기하지만 이 말씀을 못 지킵니다. 못 지키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지켜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지요. 그렇다면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어떠냐 하면 결혼의 행복은 끝났어요. 날아가 버렸어요. 하나님은 우리를 결혼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저 결혼생활 행복합니까? 그런 거 묻지도 마! 애초부터 그런 거 없었어요. 남자는 여자의 머리다. 남자는 여자의 머리가 돼요. 그러면 머리가 무슨 뜻이냐 하는 것은 남자의 머리된 그리스도와 남자의 관계가 머리였던 것을 보여 주는 거예요. 

그리스도와 남자는, 남자는 죄인이고 그리스도는 용서하는 자에요. 용서해 주는 자가 머리가 되고 용서받는 자가 남자, 아담이 되지요. 아담이 대표자이니까요  그러면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남자는 여자 에게 용서해 하는 자에요. 충분히 여자가 하는 모든 저지레와 모든 책임을 남자가 자기 저지레로 떠 안는 겁니다. 이렇게 주례하면 감당하겠습니까? 

아내 된 자들이여! 예, 저지레하라! 예. 남자 된 자들이여! 예. 다 감당해라! 예. 아마 여자 쪽에서 파토 이거 무효 할 겁니다. 이 관계가 주기도문에 나옵니다. 주기도문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외우지요? 참 그대로 살지어다라는 말은 차마 못합니다. 그냥 외우지요? 그 다음에 뭐라 합니까?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해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하죠. 에덴동산 이후에 생명나무는 이미 우리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없는데 두레박이 내려와요. 두레박이 내려오면서 생명이 내려왔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관심은 뭐냐, 생명이에요.

생명은 그냥 주지 않고 어떻게 주는가? 사랑으로 줍니다

사랑은 뭐냐, 네 잘못을 내가 대신 담당했으니까 담당한 자가 너를 용서해 주면 그 용서가 유효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에 그 기도를 하라는 거예요. 주님이여! 왜?  돈 줄까?  아니요. 뭐 밥 줄까?  아니요. 뭐?  뭐달라고 기도 하는데?  주여! 저희의 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생명을 아는구나! 돈만 아는 줄 알았는데 생명도 아네! 생명을 아는 자에게는 바로 죄사함 권세를 하러 이 땅에 온 것을 아는 겁니다. 그래서 남편 된 자는 아내의 모든 것을 용서를 해야 돼요. 
  
그러면 목사님, 죄 졌으면 용서합니까? 죄 지었을 때 용서하는 것은 그것은 용서가 아니에요. 이게 어려운데 죄 져야 용서가 되기 때문에 죄를 지어 줘야 돼요. 여자는 죄를 지어져야 되고 빨리 나가 죄져! 그래야 남자답게 용서해 주지! 라는 식이라니까요. 그 여자가 신부이고 그게 오늘날 교회입니다. 말이 안 되고 참 희한한 관계지만 이게 신랑되신 주님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돌아서면 죄를 집니다. 하지만 돌아서면서 우리는 이미 용서받았어요. 왜?  그게 남편의 할 일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야 비로소 우리는 신부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에베소서 5장에 부부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부부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한 겁니다. 기껏 남편 된 자여, 아내된 자여 해 놓고는 교회가 사실은 주님의 신부이다. 신랑은 누구입니까? 예수님밖에 없다. 돈줬어?  밥을 줬어?  아니에요. 생명을 사랑이라는 형식으로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뭡니까? 그냥 용서해 주는 겁니다. 책임을 감당해서 죄를 대신 가져가고 모든 것을 용서해 주는 관계에요. 지금 우리의 부부는 어설프기 짝이 없지요. 서로가 나쁜 짓 하기를 기다렸다가 잔소리 해 데기 시작하면 상대를 스트레스 푸는 상대로 보는 겁니다. 

실제로 우리 인간의 육체라 하는 것은 너무 약해서 혼자서 못살아요. 아무리 맛있는 음식, 아무리 재미있는 드라마도 티브이 깨고 싶어요. 뭐 재미있다고 저렇게 헤헤 웃고 있노? 사람은 누가 저 드라마 우습지도 않아! 라고 이야기할 상대가 있어야 돼요. 없으면 개라도 키우든지 해서 개라도 대신 이야기를 해야 돼요. 뭐가 있어야 돼요. 

주님은 뭐라 합니까? 그 이야기 상대 나보고 해라! 주님이 이렇게 합니다. 내가 남편이니까 네가 언제 남편으로 인정해 준적 있느냐 집에 있는 남편만 남편이지 난 남편도 아니지?  영적으로 ……. 이것을 예수님께서 남편이라고 생각할 때 그 가정은 아내와 남편, 남편과 아내의 사랑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되는 겁니다. 왜냐 하면 여자는 남편을 보는 것이 아니고 남편 위를 보는 거죠. 그리스도를 보면서 남편을 보니까 남편의 혜택을 내가 받고 입고 있다, 어떤 혜택?  돈 벌어줘서?  아니에요. 남편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저 남편같이 용서해 주는 다른 영적 남편이 저 위에 계시다는 것을 느끼도록 하나님께서 이렇게 기도를 하게 해 주셨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부부라는 일상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말씀의 관계가 되는 겁니다. 부부 사이가 아니고 그 부부는 교회가 되어 버리는 겁니다. 

부자 관계를 아까 언급했는데 악한 자라도 자식한테는 좋은 것을 주지요.  좋은 것이라는 것은 뭔가 누가 복음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성령을 주신다고 했어요. 좋은 것은 곧 성령입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성령 받았거든 더 달라 하지 마세요. 그러면 성령 받았는데 성령이 파란색인가 노란색인가 왜 그것을 하느냐?  성령 안에는 성령만 오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다른 게 들어 있어요. 
군에서 배낭을 받게 되면 배낭 껍데기만 받는 게 아니고 그 안에 보면 속옷부터 군화까지 다 들어있거든요. 그래야 군인이 혼자서 살 수 있으니까요. 성령이 올 때는 성령만 달랑 오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어요.  모든 것이 어떤 것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루어 놓은 모든 것,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그것, 그것은 이질적인 것 다시 말해서 낫선 것이고 우리가 예상도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끝으로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이 인생사시면서 여러분이 갖고 싶은 것 말고 여러분이 얻을 수 있는 것 말고 이질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헤아려 보시기바랍니다. 이질적인 것이 있다면 여러분의 남편은 예수님이십니다. 여러분 성령 좋은 것 받은 겁니다. 그 이질적인 것이 구체적으로 뭐냐 하면 바로 예수님 때문에 참고, 견디고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견디지요. 그것은 내 자존심이 아니라 진리를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참고 견디는 것, 사도 바울 같은 사람 말이죠. 

그것처럼 십자가가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나는 십자가 있다면 나는 참을 수 있어 하는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좋은 거 받았습니다. 그 좋은 그것 얼마 합니까? 이건희 재산 다 바쳐도 수조 받아도 그거 못삽니다. 

 오늘 낮에 제가 강남에 삼성본사에 가봤는데 하여튼 건물이 예쁘긴 이뻐요. 40층 짜리가 세 개가 쭉 서 있는데 생각했어요. 저렇게 5천억 원이 넘어도 자기 목숨 잃으면 에덴동산 생명나무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좋은 것 받은 겁니다. 성령 받으면 생명나무 받은 겁니다. 물동이 이고 가던 사마리여인이 어땠습니까? 물길러 갔다가 물동이 버려놓고 하는 이것은 나중에 시어머니한테 혼날 거예요. 그래도 자기는 좋은 거예요. 왜?  진짜 좋은 거니까요. 

우리는

 일상을 사는 사람이 아니고

 말씀에 의해서 말씀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②그래서 성령을 받게 되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오면서 

 우리는 이 땅에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거기에 집착이나 미련을 갖지 않게 되지요.

③세상 것에 미련을 갖지 않으면 우리의 짐은 점점 더 가벼워집니다.

 몸무게가 다이어트를 안해도 빠져요.

 몸무게가 빠져서 그야말로 죽을 때는 제로가 될 정도로

 모든 것을 다 버려도 괜찮고

 모든 것을 다 버릴 때

 지금의 우리의 모든 것은 다 주님의 것으로 등기 이전된 상태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내 것이라는 착각을 했을 뿐인데 사실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다 주님 앞에 은사로 받은 것이라고 믿으신다면 그 사람의 대인관계는 정말 말씀화된 대인관계입니다. 아빠, 어떻게 살아?  주님 바라보고 살아! 아빠는 섭섭하지 않아?  섭섭해도 괜찮아! 내 몸은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알면 아빠도 만족해! 그 부자 관계, 그게 바로 자식한테 좋은 것을 진짜 좋은 것을 주는 거예요. 아빠, 돈 줘! 유산 줘! 돈 없다! 아빠 나쁜 아빠야! 그 대신 좋은 것 줄게! 뭔데? 네 몸 자체가 주님의 것이야! 그것 말고 돈 줘! 이게 어디서 나보고 돈을 달라해! 사실은 주기 싫잖아요. 돈이 없으니까 그렇지 .... 

바로 그런 관계가 말씀화이기 때문에 육신의 죄를 우리를 지금도 성령께서는 육신적인 우리를 말씀으로 바꾸고 있는 중입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모든 생활이 말씀화 되는 작업에 우리가 말려들었습니다. 우리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낯설게 참 특이하게도 다른 사람과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성령께서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모든 영광을 주께 돌리고 주와 함께 교제하고 말씀의 사람, 걸어가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