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705b 울산강의-출애굽기 28장 : 제사장 복장 (강의:이근호 목사)
지난 시간에 중요한 것이 제사장 복장을 사람들이 요구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이렇게 해라. 그런데 사람들이 오해하기를 이런 사람 있으면 구원받겠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받으라고 한 것이 아니고 제사장 속에서 구원받는 사람이 새롭게 나와요. 제사장이 달라지면서. 제사장에서 멜기세덱으로, 멜기세덱에서 그리스도. 제사장이 걸치고 있는 이것이 제사장으로 하여금 달라지게 하지요. 제사장 앞에 있는 인간들이 달라지지 않아요. 주님께서 일종에 약 올리는 거지요.
이런 사람 있으면 구원받는다 하는데 그게 아니고 이런 복장한 제사장도 죄인이라. 이런 복장해도 죄인이라면 결국 어떤 식으로도 인간의 죄는 없어지지 않고 그냥 죄는 죄대로 죄 값을 치러야 되는 겁니다. 죄 값 치루지 않고 구원되는 수는 없어요. 주님이 죄 값 치렀으니까 공짜로 구원받는다. 말은 맞는데 주님이 치르는 죄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으면 나는 당연히 구원받아야 사람이라는 오해를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애초부터 주님과 엮여질 수 없는 사람이죠.
흔히 시중에 나온 제사장 복장은 관은 무엇을 의미하고, 견대는 무엇을 의미하고, 이런 식으로 사람을 수술하듯이 복장 하나하나 다 떼어서 그러니까 예수그리스도가 ( )입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하는 그 취지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그런 식으로 강의하면 신천지 같은 일이 생기는 거예요. 여러분 이렇게 영적으로 해석되고, 또 이렇게 해석됩니다.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신천지에서 배포하는 전도지에 뭐라 돼 있느냐 하면, 요한계시록에서 전쟁이라 하는 것은, 지금은 기존교회와의 교리적인 전쟁이라고 해석했어요. 음행한 포도주를 마신다는 것은, 기존교회에서 목사한테 음행의 포도주로 해석한 거예요. 왜 그렇게 해석하느냐 하면, 영적 해석은 내 마음대로지.
그래서 제사장 예복이라 할 때 우리가 하나하나 지적으로 알아서 종합하면 나는 성경에 대해서 이미 알았다는 식으로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잘못 된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그러면 제사장 예복이 이런 복장을 한 이유가 뭐냐? 여기 특징을 보게 되면, 사람은 속에 시커먼 죄가 들어있습니다. 여기 제사장은 하얀 복장을 걸치고 있지요. 그럴 때 이것은 뭐가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지시한 규격대로 했을 때 거룩한 제사장이 되는 겁니다. 이 사람만이 성소라는 거룩한 공간에서 활동이 가능합니다. 그러면 이런 복장을 하지 않은 다른 사람은 그 성막 안에 못 들어가지요.
그렇다면 제사장이란 성막 제사법이란 범위 안에서 활동해야 될 역할을 배치 받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해야 될 것은 뭘 생산하느냐 하면, 제물을 통해서 피를 만들어내서 성전 제일 구석진 방에 가면 피를 발라야 되는 장소가 있어요. 그 장소가 바로 언약궤가 안치된 곳이죠. 전에 했지요. 성막 있고 안에 지성소 있고 언약궤 있잖아요. 천사가 마주보고 있는 조각상 있는데. 이런 것도 이야기하려면 복잡해요. 그 만들어진 천사가 천사이겠습니까? 만들어진 천사는 천사가 아니지요. 그냥 조각품이지요. 조각품인데도 하나님께서 그걸 천사로 간주해준다는 것은 조각품을 만들라는 그 명령 자체에서 하나님 스스로 실체로 뽑아내는 그것이 그 다음에 그런 절차가 남아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 좋은 예가 있는데 비타500이 착한 비타500이란 말이죠. 이것을 사모님이 주셨는데 이걸 하나님 주셨다고 합시다. 하나님이 주셨을 때 우리는 오해하기를 착한 비타500을 마시면 착함이 내 위로 내려가서 완전히 착해진다고 오해하잖아요. 그게 아니고 착함 자체에서 뿅~하고 착한 거인이 튀어나오는 거예요. 착한 비타500 자체 내에서. 그런데 우리는 이걸 마심으로써 내 것 만들려고 했는데 그게 아니고 하나님께선 그 자체 내에서 착함이 나오기 때문에 우리는 졸지에 이걸 바라볼 때마다 그 착함에 비해서 악함이 되는 거예요.
예수그리스도만이 거룩하고 예수님만이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원래 이 세상에 인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두 번째 아담이고 총괄 개념입니다. 두 번째 아담이고 마지막 아담이 예수님밖에 없어요. 예수님을 통해서 아브라함언약처럼 하늘에 별 같이 바다에 모래 같이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형상의 이름으로 만들어놓고 그 사람들의 집합체가 천국을 이루겠다는 겁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그러니까 우리는 거기에 낄 자리가 없어요. 우리가 끼어들지 못한다는 말은, 구원 못 받는다는 말입니까? 구원 못 받지요. 왜요? 살아있기 때문에 구원 못 받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집어넣을 때 우리를 죽여 버리지요. 그럼 자살하면 되겠네요. 그냥 죽으면 안 되고 주의 이름으로 죽여 놓고 주의 이름으로 죽인 자에게만 주의 이름으로 살립니다.
그 주의 이름이 뭐냐? 착한 비타500 안에 들어 있잖아요. 이 복장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참 이것 안 믿으면 복장 터진다니까. 이 복장 안에 복장 자체가 스스로 움직여서 하나의 사람이 돼버려요. 그걸 걸치고 있는 제사장은 뭐냐? 자기가 비록 걸치고 있지만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거룩한 분 때문에 연약한 죄인이 돼버리는 겁니다. 제사장이 죄인이면 자기가 하는 제사도 죄가 되고. 그것 전체가 예수님 앞에서 모형이 되는 겁니다. 기껏 네가 한 것은 구원에 전혀 보탬이 된다든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 겁니다.
그래서 한 마디로 제사장의 취지는 이렇습니다. “너는 안 돼!” 이걸 더 포괄적으로 일반화시키면, “안 돼!” 그러니까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안 되는구나. 제사장이 있든, 복장을 제대로 끈으로 묶었든, 금테를 어떻게 했든 이건 안 되는 거예요. 안 되는 이유가, 주의 성취가 주의 말씀 성취, 제사장 복장의 성취가 하나님께서 따로 이룰 분이 있어요. 제사장은 가짜거든요. 가짜를 보내신 것은, 진짜 제사장이 있음을 알리기 위함이에요. 그래서 이 제사장은 “안 돼!”라고 해야 되고 안 된다는 걸 느낀다는 것은 진짜 제사장을 알 경우에만 진정으로 안 됨을 기쁨의 행복한 고백을 하는 거예요. 나는 안 됨을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주여, 저는 뭘 해도 안 되는 것 맞지요?” 이게 기쁨의 고백이 나와요.
여기 제사장 복장의 모든 사물들은 안 돼와 됨을 두 개로 나누어서 구체화시킵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언약을 생각해봅시다. 아브라함언약과 모세언약의 차이점은, 아브라함언약은 개인에게 주어져서 집안을 만듭니다. 그런데 모세언약은 국가, 어떤 집단에게 준 거예요. 아브라함언약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이삭을 죽이고 수풀 속에 나타난 수양, 그 수양과 이삭과의 관계 때문에 이삭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었던 거예요. 수양 때문에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아들 될 수 있었고 야곱도 하나님의 아들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국가단위 이스라엘에서는 애굽에서 나올 때 그들은 잘난 사람, 못난 사람 관계없이 공통적으로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른 거예요. 제가 어느 강의에서 했잖아요. 피 바를 때 한 벌 발랐습니까, 두 벌 발랐습니까? 한 번 바르면 죽음의 사자가, “이 집은 성의가 없어. 죽여야 되겠다.”고 나오고, 세 번 바르면, “이 집은 구원해야지.” 이렇게 나오는 겁니까? 어린양의 피라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성의가 있느냐, 없느냐, 얼마나 열심히 했느냐 하는 인간 쪽에서 할 수 있는 행함에 대해서 일체 “안 돼”라는 원칙으로 묻지를 않는 거예요. “제가 내보일 것은 내가 어떤 행동한 것을 보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만을 저희들은 고백할 뿐입니다.” 이게 십자가의 피의 의미가 되는 거예요.
그렇게 양이 죽음과 심판과 저주를 막았습니다. 근데 양은 생물체지만 아직까지 인간은 아니거든요. 그 다음에 양의 모습이 주의 이름으로 동행을 하게 돼요. 주의 이름으로 동행하면서 여기서 언약이 나오는데 그 언약의 핵심이 제사법입니다. 양을 잡는 거예요. 그러니까 양이란 동물이 장차 어떤 인간으로 생긴 인물과 연관되기 위해서 주의 이름 하에 양을 잡는 인간이 등장하는 거예요.
제 말은 양을 잡는 인간들이 등장하면서 인간이란 한 명이 아니지요. 제사장이 많잖아요. 인간들, 복수, 여러 사람이 등장하면서 나도, 너도 아니고 한 분으로 전환되는 중간과정의 매체를 형성하는 거예요. 양에서 인물 나오기 전에 양 잡는 일을 하는 여럿 사람들이 나오고 여럿 사람 다 죽이고 그리고 어떤 인물, 그런 일을 위에 있는 주의 이름께서 언약이란 모습으로 계속해서 새로운 언약, 새로운 언약을 주입 시킨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잘리면서 레위지파에서 잘리면서 유다지파. 유다지파에서 왕이 나오게 돼있어요. 제사장은 여러 명입니다. 그런데 영원토록 왕은 달랑 하나이어야 돼요. 이스라엘 왕들이 많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영원한 왕이고, 그 왕 되신 분이 전에는 양의 모습이지만 이제는 하나의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야 되는 겁니다. 그 준비과정이 주의 이름이 이스라엘과 동행하면서 진행된 거예요. 주의 이름이 동행한다는 증거로써 제사법이 주어졌고 그 제사법과 더불어 주어진 것이 성막, 성소구조였고, 겸해서 그 제사에 종사할 제사장이 있어야 되고, 그 제사장은 장차오실 주의 기능과 역할을 그들은 몸에 걸치는 옷 모습으로 나타난 거예요. 내막이 그렇게 돼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등장할 때 방금 이야기한 것은 하나님 쪽에서 이야기한 것이고, 우리 쪽에서 다가가면 이렇게 됩니다. 제사장의 복장이 눈에 들어오지요. 보석들도 들어온다 말이죠. 보석들을 평소에 얼마나 귀하게 여깁니까. 고귀하다고 여기는 거잖아요. 저 보석 얼마 하겠나? 지금 제사장이 길에 다니면 도대체 저 사람 옷은 얼마짜리야? 그러니까 인간은 제사장을 보게 되면 어쨌든 눈에 보이기 때문에 제사장을 통해서 자기 구원을 이루려고 하게 되는 거죠. 그렇다면 제사장이 옷을 입었다는 자체가 하나의 제사장이 할 수 있는 우리와 차이 나는 기능에 속하는 겁니다. “제사장은 좋겠다. 좋은 옷 입고. 우리는 좋지 않은 옷 입고. 옷 입었다고 하나님과 그들과 함께 있고 우리는 그 옷 없다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3장 봅시다. 27절 누가 읽어볼까요.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여기 그리스도 옷 입는다는 말은, 제사장이 죽을 때 반드시 자기 옷을 벗어서 자기 아들 제사장에게 넘겨줍니다. 그러면 안에 시커먼 벌거벗은 몸이 중요하다는 말입니까, 걸치고 있는 옷이 중요하다는 말입니까? 옷이 중요하지요. 옷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제사장 기능을 하게 하죠. 또 죽으면 옷을 벗어 또 주는 거예요.
그렇다면 옷 자체가 갖고 있는 그것이 갈라디아서 3장에 보니까 모든 성령 받은 사람은 주님한테 그리스도의 옷을 걸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리스도의 옷을 입었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이런 복장을 해왔습니까? 이런 복장 아니란 말이죠. 아닌데도 구원이 된다는 말은 이 복장에 담긴 모든 의미와 취지가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이미 완성이 되어서 그 완성된 것을 옷 입은 사람은 헬라인이나 이방인이나 관계없이 우리는 구원을 받고 천국에서 살 수 있게 된다는 말이거든요.
그 말이 진짜라면 이 사물, 물체의 완성이 예수님의 피라고 연결시켜줘야 비로소 논리적 해석이 완료가 되는 겁니다. 여기 있는 보석들 모아서 짜내면 피가 나와야 돼요. 십자가 피로써 완성이 돼야 되는 거예요.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그걸 설명하려고 합니다. 설명이 참 막연하지요. 안 될 것 같잖아요. 보석을 짜면 피 나옵니까. 안 되잖아요. 그 중간과정이 바로 멜기세덱이 있어요. 이것은 제가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히브리서에서 그렇게 설명해요.
히브리서 5장 1~3절.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러면 히브리서 5장에서 하는 말이 속죄제를 드렸으니까 그 사람은 연약하지 않습니까? 제사장이 나도 죄인이다. 따라서 나를 위해 먼저 속죄제를 드리고 난 뒤에 다른 사람을 위해서 속죄제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응답한다는 식으로 자기를 위해서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드렸으니까 그 순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속죄제를 드렸는데 속죄제 드렸으면 연약하느냐, 연약하지 않느냐? 이 말입니다. 참 그래서 히브리서가 좀 어렵지요. 이것은 속죄제 천 번, 만 번 들여도 연약해요. “예수님이여,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해서 죄인입니까, 아닙니까? 그래도 죄인이 맞잖아요.
속죄제를 드리면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죄인이라고 확정짓는 거지요. 제사장이 드리는 모든 제사는 뭐냐? “전부 다 입 다물고 죄인이라고 고백해.” 그런 뜻이지 이것 드리면 용서받는다. 이건 아니란 말이죠. 주님 앞에 꿇어. 이 말이에요. “주님이여, 제사 드렸으니까 죄 지어도 좀 봐주소.” 이건 아니란 말이죠. 연약합니다. 우리는 죄인 맞습니다. 그렇게 제사 드려도 그 제사가 우리의 연약함을 면죄시키는 효과가 아니고 그걸 규정짓는 효과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제사법에 있어서 제사는 전부 다 죄인 만들기 위함이죠.
그런데 6절에 봅시다.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여기 멜기세덱이 나와요. 차이점이 뭐냐? 제사장은 드리고 늙어 죽고, 드리고 늙어 죽고. 옷을 입어도 죽고, 벗겨도 마찬가지. 옷 입은 그 인간도 죽고. 결국 이 복장은 사람 죽이는 복장이에요. 사람을 죄인 되게 만들고 죽어 마땅함을 보여주는 복장이에요. 뭔가 고귀하니까 오래 살 것 같지요. 이것 걸치나 안 걸치나 죽기는 마찬가지라니까요. 이것 보고 집에 가서 디자이너에게 부탁해서 만들서 이것 걸치고 있으면 돈만 날리지 이것 걸친다고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요. 성령을 입으면 이것 입은 것으로 대치됩니다. 성령 받으면 그 사람은 이 옷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과 똑같아요.
멜기세덱은 이런 복장이 없습니다. 없는데도 불국하고 영원한 안 죽었어요. 멜기세덱은 분명히 같은 제사장이지만 옷감이 달라. 원단이 달라서 이런 복장을 한 제사장이 아무리 제사 드려도 백날 제사 드리고 피 바르고 또 죽고, 피 바르고 또 죽고 하는데 한 번 제사장은 영원한 제사장, 이게 멜기세덱 아닙니까. 영원해요.
그 원단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히브리서 7장 1~3절에,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으니까 결국 이런 뜻입니다. 제사장이 죽는 이유는 자기 어미 아비가 있으니까 죽는 거예요. 그걸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육이라 합니다. 육에 속한 인간은 연약할 수밖에 없고 육에 속한 제사장이 이런 복장을 걸치고 제사를 해봤자 숨어있는 육의 정체만 폭로될 뿐이란 말이죠. 육은 안 돼. 육은 이것밖에 안 돼. 육이란 것은 어쩔 수가 없어. 육은 하나님께 먹힐 이유가 없어. 왜? 육이기 때문에. 이런 복장을 하고 제사 드린 제사장이 죽었단 말이죠. 육이니까. 그러면 모든 육은 다 그렇지.
그림을 그려야 돼. 말로 하면 논리가 어려워서 그림 그리면 쉬워요. 어떤 한 미지의 인물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멜기세덱입니다. 이상하게 이 사람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다는 말은, 사실은 창세기 당시에는 아비가 누군지, 어미가 누군지 모른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성경은 모른다는 것을 아예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는 특수한 존재로 다뤄지는 겁니다. 그러한 전설적인 인물을. 분명히 사람이고 아브라함을 길에서 만났잖아요. 아브라함이 귀신 만난 게 아니거든요.
아브라함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은 318명, 자기 사병 데리고 전쟁을 했는데 이게 이길 전쟁이 아니에요. 그런데 이겼단 말이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분명히 하늘의 요소가 나한테 언약을 준 하나님과 관련된 전쟁이다. 그런데 이 관련된 전쟁에서 내가 승리한 건 아니다.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습니까? 하나님이 개입하니까 이긴 거예요. 아브라함도 분명히 내가 이길 전쟁이 아닌데 누군가 개입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개입하셨다는 걸 아는데 그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멜기세덱이라는 진짜 어떤 인물로서 등장할 줄은 상상도 못했지요. 사실은 하나님의 대리자인데. 하나님은 제사장을 통해서 일하기 때문에.
이 사람은 하늘에 속해요. 하늘에 속한 것이 너무 늘어져서 땅에 닿았어요. 아브라함이 오는데 당신이 기도한 덕분에 이번 전쟁에 승리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얻은 전리품은 사실은 제가 갖는 것이 아니고 당신이 가져야 됩니다. 왜? 당신의 원천은 하늘에 있기 때문에. 전리품을 준다는 뜻에서 십분의 일을 십일조로 드렸다는 거예요. 십분의 일을 드린다는 말은 로켓의 제일 윗부분, 캡슐부분이 중요하기 때문에 이걸 드렸다는 거예요.
십일조를 이 사람이 받고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내렸어요.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제사장이 있어야 되고 그 제사장은 육에 속하지 않고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는 하늘에 속한 제사장이 있어야 땅에서는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펼칠 수가 있습니다. 성도는 자기가 구원받기 위해서 하나님 믿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 뜻을 펼치다보니까 거기에 말려든 사람이에요. 마치 멜기세덱과 같은 사람이에요. 하나님께서 자기가 하는 일에 집어넣어버린 거예요. 이게 원래 이스라엘 나라가 그래요. 하나님 하시는 전쟁에 이스라엘을 거기에 집어넣은 것은 이스라엘 전쟁에 하나님이 하시는 전쟁에 끼어든 겁니다. 하나님의 원수와의 전쟁에서.
이 사람이 제사장이에요. 무슨 제사장? 히브리서 5장에 보니까 영원한 제사장. 그런데 이 말이 5장 11절에 보니까,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해석이 어려워서 이것은 때가 알게 되는데 지금 연약한 사람은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먹지 못할 자가 되었도다. 하지만 나중에 멜기세덱을 알게 되면 너희들은 거기서 벗어났다는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멜기세덱을 알면 신앙의 초보가 아니란 말이거든요. 신앙의 초보가 아니란 걸 좋아하면 안 돼요. 신앙의 초보가 아니란 말을 이제는 이 땅에서 망해도 괜찮습니다. 그 정도 돼야 되지 초보가 아니니까 복을 더 받을 줄 아는 이런 꿍꿍이속을 하지 마세요. 원래 스데반 집사같이 믿음 좋은 사람은 그냥 설교하다 죽는 사람이지 설교해서 떼돈 벌고 하는 이런 사람 아닙니다. 이제 죽어도 좋아. 이런 사람이에요. 다른 말로 “나는 역시 안 돼.”를 확실히 아는 사람이 신앙이 좋은 사람입니다.
멜기세덱에 대해서 관련이 있으면서 그 다음에 6장 뒷부분에 가면 드디어 멜기세덱 이야기가 나오면서 하나님께선 거짓말하지 않는다. 7장에서 레위지파가 유다지파로 바뀌면서 멜기세덱과 연관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멜기세덱이란 영원한 제사장은 그 뒤에 8장, 9장에 보면 예수그리스도가 영원한 제사장이 되어서 멜기세덱의 반열을 좇은 영원한 제사장이 오십니다. 그러면 이것은 육이 아니고 영적 제사장이 되는 겁니다. 이런 영적 제사장이 될 때에 그렇다면 그 동안 죽을 수밖에 없는 제사장, 복장 벗어서 자기 아들한테 주는, 그 복장의 의미는 출애굽기 28장에 나오는 데로 거룩이에요.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것은 이 거룩이 물체로 돼있는 거예요. 물체로 돼있는 이것이 거룩한 인물로 바뀌게 되는 겁니다. 여기에 어떤 일이 개입해요. 이 일이 제사법이라 하죠. 제사법을 행하는 사람이 구원받습니까? 아니면 본인이 제사제물이 되는 사람이 당사자입니까? 히브리서에 의하면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제사법 안에 풍덩 뛰어들어서 본인이 제사장도 되고 본인이 제물도 되는 그런 분이 이 제사법을 완성해버려요.
원래 제사장들은 위임받을 때 오른손가락과 발가락에 기름과 피를 발라요. 기름과 피는 어디서 나온 겁니까? 바로 자기가 잡은 짐승의 피를 발랐잖아요. 이것은 아프리카 토인들이 양을 잡기 위해서 양의 탈을 쓰는 것과 똑같은 수법이란 말이죠. 희생의 피를 바른다는 말은, 자기 자신이 하는 일이 곧 자기를 오히려 덮칠 때 비로소 그 일의 온전함이 이뤄지는 거예요.
그렇다면 제사장은 피를 뒤집어쓰고 구원받는다고 칩시다. 거룩하다고 칩시다. 그럼 제사장은 이런 복장을 하고 있는데 일반 많은 백성과는 어떤 관계가 있느냐? 그때 나오는 것이 그림에 보면, 제일 중요한 가슴에 보석 열두 개가 있지요. 이걸 흉패라 하는데 판결 흉패. 제사장이 판결하게 되면 이 거룩한 하나님의 의가 이 사람한테 의로움이 남겨지는 거예요.
만약에 의로움이 남겨질 때 너는 착하고 너는 악하라. 이걸로 끝나는 겁니까? 어떻게 됩니까? 예를 들어서 사기 친 사람이 있어서 재판받는다 합시다. 판사가 다 이야기 듣고, “네가 사기 친 것 맞네. 당신은 사기 당하고.” 판결. 그러면 끝나는 거예요. 거기 있는 경관에게 사기 친 사람 지금 구속해서 교도소로 이송하라고 하지요.
이 말은, 판결은 판결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거기에 대한 심판과 저주를 처벌을 가하게 돼있지요. 제사장이 없고 판결문안만 있다고 한다면, 주의 이름이 자기 백성을 의로운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서 직접 하나님께서 대자연을 통해서 그들에서 심판과 판결을 내리는 작업을 누가 고스란히 인수인계 받은 거예요. 이런 복장을 한 제사장이 인수인계 받아서 한 거지요.
왜 우리가 이 점을 알아야 하느냐 하면, 제사장이 멜기세덱으로 바뀌잖아요. 멜기세덱도 제사장이 하는 이 일을 그대로 한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원한 왕으로 모셨다는 말은, 주님의 판결이 우리한테 옴팡 뒤집어씌움으로써 그래서 주의 나라가 임하게 하옵소서. 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믿는 성도라 이 말입니다. 제 말은.
“주님, 저 어때요?” 이게 아니고, “주님, 저 착하지요?” 이게 아니고, “주님 판단해서 판단으로 끝나지 않고 판단의 결과도 뒤집어써서 의의 종으로 되게 하옵소서. 그런 식으로 이 땅에 살게 하옵소서.” 산다고 되는 게 아니고 의의 종으로 그냥 하게 됐으니까 그런 고백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실제적이에요.
아까 첫째 시간에 끝에 한 것 다시 해봅시다. 어떤 여자가 배가 불러와요. 뭔가 이상해. 6개월 동안 관계 한 적도 없는데 얘가 생겼단 말이죠. 지가 마리아도 아니고 이상하단 말이죠. 그래서 민수기 5장이 신기한 게 보통 그럴 경우에는 아내를 종용히 불러서 갈라서자고 하든지, 이실직고하라든지 이렇게 하겠는데 현대인들이 이상한 것은 이걸 제사장에게 찾아간다는 거예요.
요새 같이 판사한테 찾아가는 그 취지가 아닙니다. 판사는 판결하면 끝나는 거예요. 그걸 제사장한테 간다는 말은, 나는 잘 했지요가 아니라 우리 가정에 일어난 날이 하나님이 우리를 의로운 나라를 만드는데 어떤 취지로 이런 일을 발생시켰는지 우리는 그 사태에 빠지기 위해서 아내를 데려가는 거예요.
그때 제사장이 하는 말이, 기다려보세요. 해놓고 궁시렁궁시렁 이야기해놓고 이런 이야기했는데 아까 글자 쓰고 물에 빤다고 했지요. 제사장만 다니는 성막의 티끌을 집어넣고 물을 마시란 말이죠. 만약에 네가 간통했으면 얘는 유산되고, 만약에 간음 안 했으면 건강한 아기를 낳는다는 이야기가 민수기 5장에 나온다 말이죠. 그렇다면 아기를 잉태했다면 그 얘는 의인의 아들, 곧 이스라엘의 본질을 부합시키는 아들이 되는 거예요. 한 번 이스라엘은 영원한 이스라엘이다? 아니에요. 그건 해병대나 하는 이야기고.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이스라엘 되려면 제사장이 있어서 하나님을 대행해서 효과 있는 법이 계속해서 주어져야 돼요.
안식일에 나무하면 죽여 버려라. 죽여 버리면 이스라엘 백성의 숫자가 하나 줄어드는 거예요. 줄여들어도 괜찮아요. 어차피 천국 못 갈 인간인데. 천국은 숫자가 많아야 좋은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의 의가 있어야 돼요. 왜 천국에 의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원래 하나님의 의를 제공하신 분이 천국의 중앙지점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린양의 보좌가 있고 여기에 빙 둘러서 144,000이 섬기는 양상이 바로 천국이거든요. 이런 위치가 아니면 안 돼요.
마치 요즘 MBC 드라마에 나오는 [여황의 교실]처럼. 여왕벌 주변에 일벌들이 포진돼 있잖아요. 고현정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카리스마 있는 교사한테 얘들 스물 몇 명이 꼼짝도 못하잖아요. 그게 천국이에요. 이게 의롭게 이게 법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바꿔 나가는 거예요. 내 중심의 세상관을 예수님 중심으로 바꿔나가는 겁니다. 바꿔나가려면 그냥 바꾸면 안 되고 제사장이 날마다 우리에게 의로운 말씀을 주셔야 되고 그 말씀이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무엇이 의고, 무엇이 죄라는 것을 날마다 표출해야 되고 표현해야 돼요. 사실은 무엇이 의고, 무엇이 죄라 하지만 뻔하지요. 우리 육신이 죄고 주님의 성령은 의고. 그래서 은혜로 살잖아요. 그 작업을 이미 이스라엘 내에서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복장의 의미는 뭐냐? 간단합니다. 열두지파를 붙들어 매기 위한 장치에요. 제사장 몸에다가. 제사장 몸을 하나의 면적으로 부착물, 광고판. 붙을 놈은 붙어 있어라. 나이순대로 여섯 지파씩. 그것도 모자라서 여기는 열두지파. 모자에는 “여호와께 성결”이라 쓰고. 그러니까 제사장은 전 이스라엘을 압축해놓고 하나의 인물로 내세운 제사장이 대표로 나설 수밖에 없어요. 거룩한 제사장 나라. 왕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왕이기 때문에 제사장이 중심이에요.
이런 부착물이 붙어있기 위해서 에봇을 입고 붙어있을 때 명찰을 새겨야 될 것 아닙니까. 그냥 나무 명찰해도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티를 낸다고 보석에다 이름을 새겨요. 여기에 보면, 홍보석에는 르우벤, 황옥은 시므온, 녹주옥은 유다, 석류석은 단, 이렇게 돼있지요. 그렇다면 나이순으로 돼있는데 여기 보석 중에서 홍보석이 르우벤인데 만약에 시므온지파가 홍보석을 더 좋아한다. 이게 말이 됩니까? 말이 안 돼요. 왜냐하면 이 보석들은 다 같은 보석이에요. 어느 보석이 나을 것 없습니다. 그런데 한 보석으로 안 했느냐? 열두지파를 구분 짓기 위해서 그랬습니다. 왜 열두 지파를 구분 짓느냐 하면, 이게 마지막 어려운 건데 좀 참으세요.
열둘이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구원이란 열둘이 1로 소급돼야 됩니다. 야곱의 열두지파는 나, 구원받았다고 하면 안 되고 열두지파가 어떤 지파든 간에 우리는 한분 때문에 열둘이 되더라도 구원받았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에서 열둘이 나온다면 열둘은 무엇에 해당하느냐? 이것은 축복의 배당, 축복이 흘러넘치는 것으로 볼 수 있어요. 만약에 열둘이 새끼 쳐서 열둘이 된다면 이 144는 이것도 하나에서 나왔기 때문에 무한대로 넘쳐나는 거죠. 그러니까 열둘에 속한 이 사람들은 열둘에 머물러있으면 안 되고 오직 하나를 봐야 돼요. 열둘인데 이 절차를 천 번했다. 숫자로 표현하면 144,000 되는 거예요. 12*12*1000, 무한대니까. 144,000이 가지가 퍼져도 모아보면 하나지요.
여러분 머리카락이 몇 개지요? 보통 십만 개라 하거든요. 머리는 몇 개입니까? 하나잖아요. 교회의 머리는 뭡니까?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우리는 그의 지체니. 이게 야곱언약을 그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그걸 인체로 표현할 때 너희들 전부 이 몸에 다 갖다 붙어라. 여호와의 성결의 진액을 내 몸에 붙었다는 이유 때문에 열두지파는 골고루 받아먹어라. 너희들은 축복의 결과물이다. 복 받은 족속들이에요. 붙어있기 때문에.
그래서 제사장이 움직인다는 말은, 그 제사장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백성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겁니다. 제사장이 잘못하면 백성들이 저주받아요. 왜? 제사장의 복장에는 열둘을 다 가져왔기 때문에. 골로새서 3장에 이런 말씀이 있지요. 너희는 땅에 있는 목숨을 목숨으로 보지 말라. 너희 생명은 하늘에 그리스도 안에 있지요.
그러면 이 땅에 있는 목숨은 사실은 목숨이 아니고 우리 목숨은 한분의 가슴팍에 있다고 보면 돼요. 그 목숨은 주님의 몸에 달려있는, 주의 이름에 달려있는, 언약의 완성체에 달려있는 거고, 우리의 목숨을 그 목숨을 보여주기 위해서 육신과 더불어서 이건 사라져야 될 목숨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다하면 우리의 목숨도 다하는 거죠. 하지만 목숨이 다하는 순간 우리는 생명으로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그때는 보석과 같이, 천사와 같이 이 모습 그래도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모습은 예수님 모습이고, 여기 대롱대롱 달려있는 보석들은 우리가 거기에 달려있다고 보면 돼요. 그리고 달려있는 그것이 바로 우리 하나하나가 중요하다는 말이 아니고 달려있음 그 자체가 축복입니다. 환란,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어떤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주님 앞에 달려있는 보석을 절대로 떨어지지 않아요. 아주 바느질을 잘했어. 뛴다고 보석들을 흘리고 이런 것 없습니다. 어깨에 걸려서 날아가고 이런 것 없어요. 제사장 온 몸 전체가 열둘이 하나요, 하나가 열둘이 되는 같은 운명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주의 이름에 속한 백성이라 해서 주의 이름으로 불려지는 겁니다. 그 관계를 인 치심, 오늘의 주제에 이제 도착했습니다. 내 이름이 아니고 내가 살아가는 것이 내 인생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축복으로 할당된 인생이기 때문에 인생 하루하루 삶이 주님이 주신 은혜의 삶이고 축복된 삶입니다. 머리카락 빠진 것도 축복이고, 설거지하다가 손가락 밴 것도 축복이에요. 왜? 전부 다 주께서 친히 만들어가는 주님의 인생이기 때문에 그 관계를 인치심이라 합니다.
그러면 가슴팍에 있는 우림과 둠밈은 뭐냐? 이것은 판결을 하는데 의로운 판결을 해요. 의로운 판결을 어떻게 하는지 학자들은 모르겠다는 거예요. 이게 주사위 같으면, 당신은 간음했구먼. 이렇게 숫자를 보고, 이번 전쟁에 승리합니다. 이런 건지. 아니면 이걸 끄집어내서 빨간색이 보라색으로 변하고 노란색으로 변하면 전쟁에 승리합니다. 안 변하면, 안 되겠네요. 이런 건지. 여러분은 어느 쪽으로 생각합니까.
사무엘상 끝에 보면, 28장 6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시므로” 여기 우림이 나오잖아요. 가슴팍에 있는 이거. 그러니까 사울 왕이 제사장에게 내가 어떻게 되는지 물어보라 하는데 아무 징후가 없네요. 이랬단 말이죠. 이게 색깔이 변하는 것인지 아니면 굴려서 하는 건지 어쨌든 간에 점치는 겁니다. 좋은 의미에서 점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제사장에게 이걸 맡겼다는 말은, 판결할 때 이것으로 판결했거든요. 이것으로 판결했다는 말은, 제사장은 하나에 들러리고 제사장 안에 주의 이름이 함께 있어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친히 조성해나갔다는 이야기를 제사장 앞장세워서 일을 하고 계시고 지금은 바로 예수님이 제사장으로써 여러분들을 천국 사람으로 만들어나간다는 그 이야기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기에 저희들이 안 믿고 싶어도 믿으나 안 믿으나 현실로 다가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러한 원칙과 이러한 질서 속에 이미 우리가 놓여서 산다는 그 감사와 기쁨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