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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 복장-울산강의130705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5. 5. 09:08


2013-07-05 23:31:14 조회 : 669         
제사장 복장 130705 이름 : 이근호  (IP:119.18.69.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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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05a 울산강의-출애굽기 28장 : 제사장 복장 
(강의:이근호 목사) 


출애굽기 28장의 내용은 동영상에 보이는 그림, 어떤 할아버지처럼 생겼지만 원래 젊었다고 보면 돼요. 레위인들은 오십 때까지 하고 제사장들은 죽을 때까지 하는데 이 그림을 보면 28장, 29장까지 내용이 다 담겨 있습니다. 오늘 강의는 이 아저씨 알고 있으면 돼요. 그런데 이 그림을 보면서 무엇을 우리가 생각해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천국에 보낸답니다. 이게 말이 돼요? 우리에게 “그냥 천국 와.” 이러면 쉽잖아요. “너, 이 땅에서 고생 많이 했지. 천국 가서 편히 쉬어라.” 하고 초청하면 되는데 이 아저씨는 웬 아저씨에요? 이게 왜 필요 하느냐 말이죠. 

옛날 교회에 신부들, 지금도 있지만 신부들이 무슨 일을 했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이 불러준다고 해서 여러분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이것과 비슷한 복장을 한 우리가 여러분을 인도해줘야 천국에 갑니다.” 해서 중세교회,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그 신부에 속아 넘어가서 주님이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아직도 신부라는 제사장이 구원하는 줄로 안 겁니다. 

1517년에 루터가 종교개혁하기 직전에는 이태리 바티칸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 짓는다고 돈을 내라는 겁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성전세를 내는 거예요. 그걸 내면 천국에 도착한다는 거예요. 루터는 거기에 대해서 단호하게 반대했지요. 캘빈도 거기에 대해서 반대했습니다. 그들에게 충고하느니 마귀한테 충고하겠다는 그런 이야기했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이런 식으로 구원하는 걸 더 좋아해요.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님께 이런 해괴한 복장한 사람을 보내셔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시고 관계를 유지시키느냐? 어쩌면 그 당시 인간들은 이렇게 눈에 보이는 복장 걸치고 설치는 것이 그들에게는 쉽게 납득이 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납득하기 쉬우라고 이런 사람을 보낸 것이 아니고 이런 식으로 구원된다고 오해를 하기 때문에 이런 복장을 한 사나이를 보낸 거예요. 

사람들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걸 별로 안 좋아합니다. 그런데 신부 복장을 하고 설치면 오히려 그게 더 신뢰가 가고, 신빙성이 있어 보여요. 예배당에 와도 아무도 없고 목사도 남방 입고 설교하고 하면 별 신빙성이 없어 보여요. 그런데 신부가 특수복장을 하게 되면 왠지 구원되는 것 같고 천국은 따낸 당상 같고 그렇게 사람들은 인식하고 있습니다. “거룩이란 걸 말로 하지 말고 거룩의 티를 내주시면 우리가 쉽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라는 생각을 인간들이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보내셔서 그러니까 너희들이 하는 그러한 아이디어조차 너희의 구원을 방해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이 제사장 지파는 열두 지파 가운데서 레위지파지요. 히브리서 7장에 보면 레위지파는 하나님의 일을 진행하지 못합니다. 레위지파가 유다지파로 바뀌어요. 그렇다면 레위지파에 속한 레위인과 아론의 자손, 제사장에 잔뜩 기대를 걸던 사람들은 이 바뀜에 대해서 주님의 취지를 수용할 수 없겠죠. 

좀더 자세히 말씀드리면 히브리서에 보면 레위지파 이야기가 나오고 난 뒤에 멜기세덱 이야기가 나와요. 제사장 이야기는 히브리서 5장에 나옵니다. 6장에 들어가면 멜기세덱과 같이 담긴 내용은 신앙의 연조가 적다든지 신앙이 연약한 사람들은 이해 못한다. 그러면 신앙이 약한 사람은 제사장은 이해하거든요. 같은 제사장인데 천사의 제사장, 멜기세덱으로 이전시키고 이 멜기세덱에서 7장에서 바로 예수님과 연관시킵니다. 제사장에서 멜기세덱, 멜기세덱에서 예수님으로 전환할 때 그 전환 과정에 하나님의 진짜 뜻이 여기에 투입되거든요. 사람들은 이걸 이해 못하는 거예요. 투입될 때 다윗언약 들어가고, 십자가 새 언약, 완성이 들어가요. 

하나님께서 이런 제사장을 보낼 때 우리한테 제사장 복장을 한 사람이 만약에 새순교회 가운데 있다면 새순교회 교인들은 얼마나 안심이 되겠습니까? 비록 나는 부족해도 교회만 가면 이 사나이 하나 있다. 그러면 마음에 얼마나 든든합니까. 그래서 이런 쪽으로 계속 갔으면 좋겠어. 왜? 평소에는 반바지 입다가 주일에는 이런 복장 걸치고 나오면 새순교회 자부심이 대단할 거예요. “우리 교회는 제사장 있다. 너희 교회는 양복 입은 목사 있지. 그것과 게임이 안 돼. 우리에겐 제사장이 있어.” 머리는 관 쓰고, 금으로 된 흉패 있고, 그 다음에 청색 띠 띠고, 금 사슬에 금 고리에다가 호마노에다가 금테, 견대는 두 개가 있는 한쪽에는 여섯 개 지파의 이름을 쓰는데 연치라 해서 10절에 보면 나이가 많은 순대로 지파 이름을 쓰는데 르우벤, 시므온, 유다해서 등급이 나와 있어요. 

한국축구대표팀 같지요. 대표팀 11명이잖아요. 여기에 한 명 추가한 것으로 보면 됩니다. 감독에 홍명보, 등등해서. 대표팀이 있다는 거예요. 대표팀을 대표한 제사장이니까 홍명보 감독이 제사장이에요. 열두 지파를 대표하는 감독이에요. 동메달은 따낸 당상이에요. 동메달이 아니라 천국을 가니까. 

요즘도 이렇게 해서 구원시킨다면 얼마나 쉽겠어요. 이런 아이디어를 쓴 게 바로 천주교입니다. 천주교는 제사장이 하는 것을 축약했어요. 등 들고 향 뿌리고 미사는 제사거든요. 제사를 드리는 거예요. 제사를 드릴 때 질문을 하지요. “신부님, 제사를 안 드리면 죄 용서가 안 됩니다.” 그들은 머뭇거리지요. 왜냐하면 히브리서에 보면 이제는 죄 용서해주는 제사는 두 번 다시 없습니다. 이 말은, “제사 드리지 마. 제사 드리고 싶다고? 그러면 너는 천국 갈  사람 아니야. 제사 드리지 마.” 그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제사로 해결할 죄는 진짜 죄가 아니에요. 

우리가 아는 죄는 우리가 제사로 할 수 있는 죄는 죄가 아닙니다. 하이타이로 빠질 때는 찌든 때가 아니에요. 삶아야 돼. 귀찮지만. 주일에 예배드린다고 용서 받고 복 받는 그런 식의 죄라면 그것은 죄 본질 근처가 안 갔습니다. 그럼 죄가 뭡니까? 몰라요. 죽어도 몰라요. 죽을 때까지도 우리는 모를 거예요. 내가 무슨 죄로 지옥 가는지를 죽을 때까지도 모르고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거기에 합당하게 예수님의 피, 생명이 거기와 연결시키느냐 그 위치, 수위, 그 높이도 우리는 죽을 때까지 몰라요. 그냥 믿어요. 

내가 어떤 죄를 지었는데 죄를 분석하는데 평생을 보내도 안 됩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가도 분석이 안 돼요. 안 되지만 어쨌든 간에 피로 말미암아 피 흘림이 있은즉 사함, 용서가 되니까. 어쨌거나 피 흘림이 있으면 우리가 미처 놓치는 죄책이라든지 내가 놓쳐버린 죄의 항목이라 할지라도 이미 그것은 처리가 다 된 거예요.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나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오지 마세요. 이 정도 같으면 안다고 주님 앞에 나서게 되면 예수님을 내가 안 만큼의 예수가 되기 때문에 온전한 예수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언급할 때는 성경에 입각해서 해야지 나는 이것은 착하고 이것은 악하다고 본인이 판단하거나 결정하지 마세요. 본인은 계시가 아닙니다. 계시는 성경이 계시지. 성경대로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주님은 성경대로 우리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돌아가신 겁니다. 

그래서 제가 대구강의에서 그랬지요. 인간의 체험은 하나님의 체험에 이르지 못한다. 사람이 아무리 평생을 체험해도 그게 죄의 체험이든, 의의 체험이든 관계없이 어떤 체험도 주님의 체험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체험 되지도 못하면서 믿는다는 것도 성립되지 않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믿는다는 것은 뭘 알고 믿어야 되지 그냥 모르면서 믿는다는 것은 성립이 되지 않는 게 아니냐고 제대로 평가할 수 있겠지요. 

그 논리는 이래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장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제사장에서 멜기세덱으로 이전할 때 망하게 하십니다. 제사장이 있음에도 이스라엘은 망해버립니다. 그들은 그게 못내 아쉬워서 망하고 난 뒤에도 자기 임의대로 누가 제사장 시키지도 않았는데 저희들끼리 알아서 제사장을 임명한 거예요. 그걸 에스라-느헤미야 할 때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제사장 있어야 구약 메시아 기다리는 폼 나잖아요. 지 마음대로 제사장 안수하고 기름 부은 거예요. 하나님은 허락도 안 했어요. 그래야 백성들이 하나의 이데올로기라 하지요. 하나로 단결할 수 있는 사상으로 얼추 맞춰나가거든요. “우리도 제사장 있으니까 곧 있다가 구름 타고 메시아 올 거야.” 그런 희망이라도 있어야 한 나라로 단결 될 수 있지 않습니까. 정치적인 책략이에요. 그런데 주님은 거기에 속아 넘어가지 않지요. 제사장 있는 나라 망했습니다. 

그러면 “망해야 메시아가 오는데 왜 오늘날 우리는 안 망합니까?” 하고 물으면, 지금 울산만에 사시는 게 망한 거예요. “목사님, 왜 저는 탕자가 아닙니까?” 니가 탕자야. 우리는 이 땅에서 말씀에 의하면 돈만 사랑하고 그야말로 망한 모든 모습을 다 보여줍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음녀란 뭘 탈퇴를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음녀는 탈퇴가 없어요. 오늘 강의의 핵심은 ‘인 치심’이에요. 출애굽기 28장 21절에 나오는데 “이 보석들은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대로 열둘이라 매 보석에 열두 지파의 한 이름씩 인을 새기는” 

요한계시록에 보면 온 세상이 음녀입니다. 음녀는 예외가 없어요. 예외가 없다는 말은, 태어나게 되면 산후조리원부터 해서 전부 달려들어요. 같은 사상을 주입시키는 거예요. 음녀는 성경에서 음녀지 성경 밖에 나가면 그냥 자본주의사회, 다들 그렇게 똑같이 살아가는 거예요. 이것을 현대철학에서 ‘평균인간’이라 합니다. 아주 표현을 잘했어요. 평균인간이란 도토리 키 재기에요.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잘 사는 사람이나 못 사는 사람이나 비슷비슷해요. 

드라마에 보면 연기자들이 밥 먹을 때 외출복을 입고 밥을 먹어요. 그것은 평균인간 아닙니다. 잘 사는 사람이나 못 사람이나 집에서는 다 반바지 입고 돌아다니거든요. 안 그러면 추리닝 입고 돌아다니고. 이것은 재벌 집도 마찬가지고. 나오게 되면 꾸미지요. 모든 가정은 대충 비슷하게 삽니다. 음녀 안에서 통합되어 있는 거예요. 사고방식이나 사상이. 

그것은 바로 음녀는 마귀가 인을 줬다고 하거든요. 그건 요한계시록 이야기고 마귀가 인을 박았다가 아니라 특별조치가 뭐냐? 하나님이 생명책에 이름이 있는 자기 백성에게 그리스도 인을 박았다는 사실은, 그 사람 빼놓고 나머지는 마귀에게 인 박혔다고 이야기해야 대비가 되거든요. 성령의 인 치심을 받았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인 치심을 안 받은 사람은 아무 도장이 없는 사람이 아니고 마귀한테 이미 도장을 받았다고 해야 성령의 인 받은 취지가 살아나기 때문에 성경에서 그렇게 표현한 거예요.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것은, 인간이란 하나님이 주신 제사장 법, 언약이죠. 이 법에서 통합되어 있어요. 어느 누구도 언약적인 원리원칙에서 제외되거나 예외일 수 없습니다. 아간이란 사람이 아이성 칠 때에 몰래 외투와 금은 챙겼잖아요. 내가 갖고 싶은 걸 내가 챙겼다. 뭐가 문제냐? 그런데 그걸로 인하여 이스라엘 전체가 아이성이란 작은 성을 칠 때 36명이 죽었어요. 이게 뭐냐? 언약 안에서는 너, 나가 없고 같이 움직이는 거예요. 

그래서 제사장에게 하나님이 거룩한 복장을 줬다는 말은 하나님의 거룩한 복장에 속하지 아니하면 인 맞지 아니하면 어느 누구도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한 걸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을 준 것은 어떤 인간도 제사장을 준 원리원칙에서 빠져있다고 착각하지 말라. 이것은 신자든 불신자든 이방인이든 관계없이 하나님께선 동일한 원리원칙으로 심판하시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나타내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우리를 구원하려고 이렇게 오셨군요. 하나님은 구원이 일차적인 목적이 아니고 너희는 갇혀있다는 거예요. 어디에? 하나님의 원리원칙에. 예수 믿든 안 믿는 관계없어요. 니 마음대로 절에 가라 했어요. 어쨌든 죽든 살든 심지어 죽고 난 뒤에도 동일한 원리원칙이 적용되는데 그게 뭐냐? 제사장언약이에요. 

오늘 이야기할 게 많지만 차근차근합시다. 제가 먼저 물어볼게요. 하나님께서 이런 복장으로 제사장을 만들었는데 제가 만약에 하나님이라면 이런 복장을 걸쳐서 구원하지 않고 이 사람을 발가벗길 거예요. 홀딱 벗겨서 나체로 만들 거예요. 왜? 그게 인간의 모습 아닙니까. 옷을 걸치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서기를 “하나님이여, 저 죄인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늘나라에 합류할 수 있습니까? 살려주세요. 영생을 얻고 싶습니다.” 할 때에 하나님께서 “너는 네 본색을 모르는구나. 내거 너의 본색을 보여주랴?” 하고 제사장에게 “옷 벗어. 홀딱 벗어. 이게 너희들 본 모습이야. 자, 너희들도 자기를 위장하면 지옥 가고 이처럼 주님 앞에 모든 걸 노출시키면 구원받는다.” 이런 아이디어 어때요? 괜찮잖아요. 

왜 하나님께서는 홀딱 벗기지 않고 오히려 이 세상에서 귀하다는 보석 열두 개를 박고 금으로 테를 두르고. 사람들이 좋겠다, 귀하다. 그런 소리가 나오도록 왜 그런 인간으로 만듭니까. 이게 여러분 거창하고 멋있지요. 이 멋있는 것이 아무짝도 소용없게 하는 그런 힘이 이 세상에서 지금 밑에서부터 솟구쳐 올라오고 있습니다. 이런 제사장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거죠. 

여러분 이 제사장 보니까 아이언맨 생각나지 않습니까. 온갖 적들, 모든 악한 지구의 적들을 물리칠 수 있는 최첨단 병기로 완전무장한, 바지 위에 팬티 입고 슈퍼맨 또는 거미줄을 쏘아내는 스파이더맨, 그리고 그걸 종합한 아이언맨, 독수리 오형제, 딱 그 폼 아닙니까. 

제사장 이야기가 어려운 이유가, 거룩이 힘이 된다는 논리를 이어가는 게 그렇게 난해해요. 거룩이 우리한테 거룩한 복장, 물체 아닙니까. 사물이거든요. 재료가 실로 돼있고, 금으로 돼있고, 어떤 물질이에요. 보석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요소가 된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그 두 개를 연결시키기 위해서 여기에 논리적인 다양한 발전과 변화가 투입이 돼야 돼요. 보통 작업이 아닙니다. 중요한 작업이에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예를 들어볼게요. 28절 30절 봅시다. “너는 우림과 둠밈을 판결 흉패 안에 넣어 아론으로 여호와 앞에 들어갈 때에 그 가슴 위에 있게 하라 아론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판결을 항상 그 가슴 위에 둘지니라” 구원한다는 말이거든요. 그런데 고린도전서 1장에 구원의 능력이 십자가지요. 십자가가 물 

우림이란 말은 빛이란 뜻이고 둠밈이란 완전함이란 뜻인데 어쨌든 간에 판결 흉패 안쪽에 넣으라고 한 거예요. 이것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고 어떤 물건이잖아요. 이 물건이 우리를 건입니까? 십자가를 작게 만들어 넣으면 되겠어요? 십자가를 보석으로 만들어 넣으면 거기서 어떤 특수한 에너지, 알파선, 감마선이 나와서 우리를 구원합니까? 

인간 자체가 사물체라면 사물체에서 사물체를 구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요. 왜냐하면 사물체는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기를 팍팍 넣는다 하지요. 제가 강구에 갔는데 식당에 부적이 있어요. 부적이 요즘 스마트폰으로 찍으면 내용이 나오는 그것과 비슷하게 생겼어요. 스마트폰은 물체입니다. 그림이거든요. 그림과 물체의 만남, 이게 현대 신기술이에요. 그런데 옛날에는 부적으로 했단 말이죠. 부적을 한 이유가 글자를 보고 귀신이 물러가는 거예요. 

10세기, 11세기부터 알프스 산 계곡 곳곳에 성모 마리아를 모셨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낙서할까 싶어서 자물쇠로 채웠어요. 왜 그렇게 했느냐 하면 귀신이 성모 마리아 상을 보고 이쪽 마을은 못가겠다고 피해간다는 거예요. 사상을 보세요. 귀신이 석고로 만든 마리아상을 무섭게 느낀다고 인간들이 느끼는 거예요. 그렇다면 도대체 인간들이 생각하는 영적 세계란 결국 딱딱한 물질과 통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니까 옛날에 우리나라 같으면 글자를 쓰잖아요. 귀신이 그것 보고 이 동네 오면 안 되겠구나. 하고 피해가서 저주가 안 온다는 거예요. 우리는 그것은 그런 미신을 믿느냐고 욕하잖아요. 

문제는 제사장 흉패 뒤쪽에 우림과 둠밈이란 두 물체를 집어넣어단 말이죠. 그러니까 사람들이 뭐라고 오해하겠습니까? 제사장은 아마 어떤 죄도 안 질 거야. 왜냐하면 가슴 품에 하나님이 기를 받으라고 준 요새 같으면 부적 같은 것, 우림과 둠밈을 집어넣었기 때문에 우리는 안 되지만 제사장이 기도하면 복을 받고 제사장이 용서하면 용서받게 된다고 인식하게 되겠지요. 

그런데 멜기세덱은 이런 사물, 물질이 있었습니까? 없어요. 그러니까 점차로 인간이 인식하고 있는 영적 세계에 대해서 인간이 이해하고 있는 그 수준, 아주 뒤틀린 고목이라든지, 특수한 보석이라든지 이런 것만 있으면 거기서 자동적으로 복을 받는 어떤 기운이나 능력이 나온다는 이러한 인간들의 보편적인 생각 속에 하나님도 같이 끼어들어 들어가면서 그러니까 너희 생각이 틀렸다고 그걸 알려주는 새로운 언약, 새로운 사건이 벌어지면서 우리가 지금 짐작했던 것은 말도 안 되는 너무나 미신적인 사고방식인 것을 깨닫게 하는 밑바탕이 되는 거예요. 제사장이. 

그러나 그 당시에 제사장들이 처음 이런 복장을 할 때 사람들은 혹 하지요. 우리나라에 제사장이 있다. 그러면 우리는 안 망한다. 복 받는다. 제사장이 앞서서 언약궤 들고 설치면 적들은 물러간다. 그런데 홉니가 비느하스가 언약궤 들고 나갔다가 그들은 죽고 언약궤는 빼앗기고. 그런 것은 마치 뭐와 같으냐하면, 우리나라 최고의 목사, 기독교 총회장이 십자가 앞세우고 개성공단 빨리 정상화하라. 김정은은 물러가라고 평양까지 갔는데 십자가는 빼앗기고 지는 죽고. 꼭 그 식이에요. 당시에 십자가 만드는 걸 왜 가르치느냐 하면, “십자가가 마귀 이길 줄 알았지. 십자가가 공산당을 이길 줄 알았지.”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 편이기 때문에 나는 반드시 이겨야 된다는 그 사고방식 자체가 글러먹었다 이 말입니다. 결국 제 말대로 제사장 홀랑 벗깁니다. 이런 제사장 복장을 해도 히브리서 5장에 보면 그들을 죄인들이에요. 화려한 복장을 해놓고 죄인. 화려한 복장이 그 사람의 죄를 없앨 수가 없다 이 말입니다. 화려한 복장을 하고 누가 봐도 거룩하고 누가 봐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같지만 그 죄는 그대로 들어있는 거예요. 그걸 찌든 죄? 아무리해도 다 씻겨지지 않는 찌든 죄. 아담이 지은 죄의 위력 그것은 무슨 복장을 하고 관을 쓰고 보석을 둘둘 감아도 죄는 여전히 죄가 된다는. 죄는 위대하다. 

전도서 할 때 할지 안 할지 모르겠는데요. 신은 위대하다고 하잖아요. 보통 이슬람 쪽에서 신은 위대하다고 해서 전쟁도 하고 테러도 하는데 신은 위대한 게 아니에요. 정답은 자연이 위대해요. 자연이 위대한 걸 사람들이 평소에 자연을 우습게 봤기 때문에 신이란 이름을 붙인 거예요. 부산에서 영천 가는 길에 토사가 내려와서 내일 돼야 다 치워진답니다. 지금 막혀있어요. 못 올라가요. 

그런데 토사라는 대자연이 그래 너는 살려줄게. 내가 만약 토사라면 토사가 내려오다가 자동차에 보니까 신혼부부네. 오늘 결혼했으니까 봐주고. 뒤차에 보니까 노인들이네. 얼마 안 있으면 죽을 테니 놔두자. 이렇게 골라서 덮칩니까? 대자연이 위대한 이유는 전혀 우리 인간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아요.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라 한 거예요. 하나님은 너무나 위대하기 때문에 그저 충성하고 복종하자는 것이 인간들 심상 속에 보편적인 거예요. 음녀에요. 이 세상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하나님. 그걸 개혁주의 신학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겁니다. 인간이 다룰 수 있는 여분의 것을 하나님 것으로 남기고 우리는 위대하다는 말로서 숭상하게 되면 그걸로 우리는 올바른 하나님의 피조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을 갖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신이 위대한 게 아니고 자연이 위대해요. 그 자연 중에 하나가 바로 질병입니다. 사람이 병 걸리기 전까지는 병 안 걸리려고 애를 씁니다. 일단 본인이 병 걸리면 대번에 고개 숙입니다. 꼬리 내리고 병한테 순종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병은 위대하다. 암은 위대하다는 말을 차마 못하잖아요. 그걸 달리 바꿔서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러니 그것은 신앙도 아니고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그 자체가 자연스런 현상이에요. 내가 다룰 수 있는 여지를 신의 몫으로 돌리고, 돌림으로 말미암아 내가 다룰 수 있는 것은 자기가 다루겠다고 기어이 따로 챙기는 것, 하나님 잘도 넘어가겠다. 하나님이 신은 위대하다고 해서 봐주는 것 아닙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제사 드렸지요. 무슨 마음으로 드리겠습니까? 신은 위대하다고 드렸겠지요. 가짜 하나님이니까 날름 받는 거예요. 그 제사를 거부하는 게 진짜 하나님입니다. 아벨의 제사를 받았잖아요. 아벨의 제사를 받은 게 아니고 아벨의 제사를 만들었지요. 하나님은 자기가 받을 제사는 자기가 손수 만들어버려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사람은 천국에 못 가요. 천국 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직접 만들어낸 피조물만 천국 가는 거예요. 사람들이 이 제사장 나오면 우리나라는 구원받겠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제사장을 모델로 해서 제사장 같이 하나님이 친히 만들어요. 그러면 우리는, “제사장처럼 우리도 관 쓰자.” 아니에요. 그 방법이 아니고 제사장이 되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그 다음 단계 멜기세덱, 그 다음 단계 예수.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구원받아요. 

여기서 정리해봅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천국에 갈 사람을   만드시는 창조하는 작업을 하시는데 그 창조의 설계도가 이거에요. 그런데 우리는 오해하기를 나 여기 있고, 날 구원하려고 주께서 오셨다고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는 구원받을 만한 가치가 있고 그걸 보고 주님께서 특공대를 보냈다고 생각합니다. 특공대 보내실 게 아니죠. 차라리 생명나무 갈 길을 완전히 터버리지. 입산금지가 아니라 입산개방하면 지가 알아서 기어올 건데 뭐 때문에 이런 이상한 아저씨 왜 보내는 거예요. 주께서는 이 이상한 아저씨 못 박아버립니다. 나중에. 

멜기세덱이 영원한 제사장이죠. 그 다음 단계가 예수님이죠. 히브리서 5장, 6장, 7장에 보면 예수님을 영원한 제사장이라. 영원한 제사장을 십자가에 못 박아버렸는데. 구멍 났어요. 제사장이 완전히 구멍 나버려요. 그럼 제사장 직 자체가 하나님이 생각한 진짜 참 제사장은, 인간 세계에서는 전혀 통하지도 먹히지도 않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가짜 제사장들, 죄 있는 제사장들을 보낸 겁니다. 좋다고 좋아들 하면서 이제 이런 복장을 했으니까 이런 원리만 알면 그러면 된 거죠. 

집에서 붕어빵 먹고 싶다. 간단하지요. 붕어빵 기계를 들여놓고 그 다음에 붕어빵 굽는 원리를 갖추면 우리는 아침저녁마다 매일같이 지겹도록 붕어빵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맛있는 붕어빵을 매일 먹을 수 있는 겁니다. 인간들은 영생의 나라를 자기가 자기 손으로 만들기를 원해요. 따라서 제사장 복장을 그대로 하고 그 다음에 제사장이 양 바치고, 소 바치는 제사하는 방법을 알면 자기는 영원한 붕어빵을 먹을 수 있는 것처럼 영원한 영생을 먹을 수 있다는 그런 아이디어가 나오거든요. 그걸 구멍을 뚫어요. 그러니까 너희들이 멸망해야 돼. 

이 제사장이 사라집니다. 마지막 사라질 때는 이런 복장이 아니었어요. 발가벗고 십자가에서 사라졌어요. 이런 복장 하나도 없어요. 옷 다 벗기고 맨살로 십자가에 그냥 남아있다면 피와 땀, 피가 쏟아지는 그 모습으로 사라졌을 때 이 제사장 복장도 같이 거기에 삽입되어서 피와 더불어 이 땅에서 사라졌어요. 사라지고 부활할 때 이 복장은 부활의 모습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그때는 이 복장의 보석은 어떻게 됩니까? 인간들의 보석은 이름으로 새겨진 보석이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열두 지파 하나하나가 보석1, 보석2, 보석3 계속 나오지요. 요한계시록 22장에 예루살렘 성 전체가 보석으로 돼 있잖아요. 문도 보석이고 다 보석이죠. 완전히 보석상 가게 같아.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예루살렘 자체가 보석 덩어리. 예루살렘 성에서 여러분이 미끄러졌다면 보석에 미끄러지신 겁니다. 여러분들이 예루살렘 성에서 낙석 하나 맞으면 다이아몬드한테 얻어맞은 거예요. 

이 보석은 원래 사람의 복장에 묶여있던 거잖아요. 붙어있는 보석이 그 실체를 드러내는데 예수그리스도의 하늘에 속한 형상에 붙어있다 보니까 그 보석들도 하나 둘씩 사람이 되어서 천사 같은 모습으로 천국에서 마음껏 뛰어놀고 있어요. 그러니까 제사장이 품고 있는 모든 것은 천국의 축소판이라. 천국을 압축시켜서 죄 덩어리 세상에 올 때는 이런 모습으로 올 수밖에 없는 겁니다. 나, 천국인데 지금 달려있다. 

그런데 이 모습이 끝이 아니고 이건 그림자고, 모형이고 언젠가 나중에 실체가 드러날 텐데 그건 요한계시록 22장에 너도 보석, 나도 보석, 모두 보석, 천국에서는 모든 것이 보석이 되는 그 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부는 하늘에서 내려오고. 신부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걸 봤어요. 어느 예식장에서 신부 입장하는데 그네 타고 신랑은 땅에서 기다리고. 완전히 요한계시록 21장을 그대로 재현해요. 

복장 이야기 근처에 들어가지도 않았습니다. 민수기 5장 봅시다. 이걸 믿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 혀를 찰 이야기가 나옵니다. 1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만일 어떤 사람의 아내가 실행하여 남편에게 범죄하여 타인과 정교를 하였으나 그 남편의 눈에 숨겨 드러나지 아니하였고” 

뒤에 이야기는 모른다 치고 제사장이 이 사람의 범죄를 입증하든지 무죄를 입증하든지 판결할 수 있는 방법은 뭐겠습니까? 남편이 의심은 가는데 물증이 없어요. 그래서 남편이 자기 아내를 데리고 제사장 앞에 섰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제사장이라면 어떻게 해야 돼요? 남편이 아내를 의심하는 의처증 환자라면 어떻게 할 거예요? 그 연약한 불쌍한 여인 하나 인생 조지는 셈이 되잖아요. 판결을 잘 해야 돼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렇게 해요. 제사장이 글을 씁니다. 네가 만약에 간통을 했으면 저주도 받아야 마땅하다는 글자를 써놓고 이 글자를 어떤 물에 빨아요. 빤 물을 버리지 않고 컵에 담아둡니다. 그리고 그 여자에게 제물을 가져오라고 해놓고 성전바닥에 티끌에 보태요. 마술사가 이것 넣고, 이것 찢어 넣고 수리수리마수리 하는 것처럼 글자 빤 물에다 성막에 있는, 다른 장소는 안 돼요. 공간적 제한이죠. 성막바닥의 티끌을 넣고 그걸 마셔야 되는 거예요. 그걸 마시기 되면 그 물속에 아미노산, 비타민 이런 게 있는 게 아니고 네가 진짜 간음했으면 저주받아도 군말하지 말라는 말이 담겨있거든요. 

이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말이란 것은 음파, 소리에너지가 있는 것뿐이지 말이 소금입니까, 커피믹스도 아니고. 우유 타는 것도 아니고. 같은 물질에 물질을 탈 수 있습니까. 농도로써. 어쨌든 간에 타놓고 그걸 마실 때에 만약에 여자가 거짓말했다면 이게 마셨으니까 위장으로 해서 십이지장으로 해서 작은창자, 큰창자로 내려가면서 아랫도리까지 부으면 그 여자는 죽고, 만약에 간음 안 했으면 그냥 오줌으로 나오겠지요. 이걸 제사장이 주도해야 되는 거예요. 제사장이 별짓을 다하지요. 도대체 그 의미가 뭐냐? 그건 10분 쉬고 합시다.
 한윤범  (IP:14.♡.134.60) 13-07-10 11:24 
20130705b 울산강의-출애굽기 28장 : 제사장 복장 
(강의:이근호 목사) 


지난 시간에 중요한 것이 제사장 복장을 사람들이 요구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이렇게 해라. 그런데 사람들이 오해하기를 이런 사람 있으면 구원받겠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받으라고 한 것이 아니고 제사장 속에서 구원받는 사람이 새롭게 나와요. 제사장이 달라지면서. 제사장에서 멜기세덱으로, 멜기세덱에서 그리스도. 제사장이 걸치고 있는 이것이 제사장으로 하여금 달라지게 하지요. 제사장 앞에 있는 인간들이 달라지지 않아요. 주님께서 일종에 약 올리는 거지요. 

이런 사람 있으면 구원받는다 하는데 그게 아니고 이런 복장한 제사장도 죄인이라. 이런 복장해도 죄인이라면 결국 어떤 식으로도 인간의 죄는 없어지지 않고 그냥 죄는 죄대로 죄 값을 치러야 되는 겁니다. 죄 값 치루지 않고 구원되는 수는 없어요. 주님이 죄 값 치렀으니까 공짜로 구원받는다. 말은 맞는데 주님이 치르는 죄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으면 나는 당연히 구원받아야 사람이라는 오해를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애초부터 주님과 엮여질 수 없는 사람이죠. 

흔히 시중에 나온 제사장 복장은 관은 무엇을 의미하고, 견대는 무엇을 의미하고, 이런 식으로 사람을 수술하듯이 복장 하나하나 다 떼어서 그러니까 예수그리스도가 (    )입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하는 그 취지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그런 식으로 강의하면 신천지 같은 일이 생기는 거예요. 여러분 이렇게 영적으로 해석되고, 또 이렇게 해석됩니다.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신천지에서 배포하는 전도지에 뭐라 돼 있느냐 하면, 요한계시록에서 전쟁이라 하는 것은, 지금은 기존교회와의 교리적인 전쟁이라고 해석했어요. 음행한 포도주를 마신다는 것은, 기존교회에서 목사한테 음행의 포도주로 해석한 거예요. 왜 그렇게 해석하느냐 하면, 영적 해석은 내 마음대로지. 

그래서 제사장 예복이라 할 때 우리가 하나하나 지적으로 알아서 종합하면 나는 성경에 대해서 이미 알았다는 식으로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잘못 된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그러면 제사장 예복이 이런 복장을 한 이유가 뭐냐? 여기 특징을 보게 되면, 사람은 속에 시커먼 죄가 들어있습니다. 여기 제사장은 하얀 복장을 걸치고 있지요. 그럴 때 이것은 뭐가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지시한 규격대로 했을 때 거룩한 제사장이 되는 겁니다. 이 사람만이 성소라는 거룩한 공간에서 활동이 가능합니다. 그러면 이런 복장을 하지 않은 다른 사람은 그 성막 안에 못 들어가지요. 

그렇다면 제사장이란 성막 제사법이란 범위 안에서 활동해야 될 역할을 배치 받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해야 될 것은 뭘 생산하느냐 하면, 제물을 통해서 피를 만들어내서 성전 제일 구석진 방에 가면 피를 발라야 되는 장소가 있어요. 그 장소가 바로 언약궤가 안치된 곳이죠. 전에 했지요. 성막 있고 안에 지성소 있고 언약궤 있잖아요. 천사가 마주보고 있는 조각상 있는데. 이런 것도 이야기하려면 복잡해요. 그 만들어진 천사가 천사이겠습니까? 만들어진 천사는 천사가 아니지요. 그냥 조각품이지요. 조각품인데도 하나님께서 그걸 천사로 간주해준다는 것은 조각품을 만들라는 그 명령 자체에서 하나님 스스로 실체로 뽑아내는 그것이 그 다음에 그런 절차가 남아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 좋은 예가 있는데 비타500이 착한 비타500이란 말이죠. 이것을 사모님이 주셨는데 이걸 하나님 주셨다고 합시다. 하나님이 주셨을 때 우리는 오해하기를 착한 비타500을 마시면 착함이 내 위로 내려가서 완전히 착해진다고 오해하잖아요. 그게 아니고 착함 자체에서 뿅~하고 착한 거인이 튀어나오는 거예요. 착한 비타500 자체 내에서. 그런데 우리는 이걸 마심으로써 내 것 만들려고 했는데 그게 아니고 하나님께선 그 자체 내에서 착함이 나오기 때문에 우리는 졸지에 이걸 바라볼 때마다 그 착함에 비해서 악함이 되는 거예요. 

예수그리스도만이 거룩하고 예수님만이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원래 이 세상에 인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두 번째 아담이고 총괄 개념입니다. 두 번째 아담이고 마지막 아담이 예수님밖에 없어요. 예수님을 통해서 아브라함언약처럼 하늘에 별 같이 바다에 모래 같이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형상의 이름으로 만들어놓고 그 사람들의 집합체가 천국을 이루겠다는 겁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그러니까 우리는 거기에 낄 자리가 없어요. 우리가 끼어들지 못한다는 말은, 구원 못 받는다는 말입니까? 구원 못 받지요. 왜요? 살아있기 때문에 구원 못 받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집어넣을 때 우리를 죽여 버리지요. 그럼 자살하면 되겠네요. 그냥 죽으면 안 되고 주의 이름으로 죽여 놓고 주의 이름으로 죽인 자에게만 주의 이름으로 살립니다. 

그 주의 이름이 뭐냐? 착한 비타500 안에 들어 있잖아요. 이 복장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참 이것 안 믿으면 복장 터진다니까. 이 복장 안에 복장 자체가 스스로 움직여서 하나의 사람이 돼버려요. 그걸 걸치고 있는 제사장은 뭐냐? 자기가 비록 걸치고 있지만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거룩한 분 때문에 연약한 죄인이 돼버리는 겁니다. 제사장이 죄인이면 자기가 하는 제사도 죄가 되고. 그것 전체가 예수님 앞에서 모형이 되는 겁니다. 기껏 네가 한 것은 구원에 전혀 보탬이 된다든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 겁니다. 

그래서 한 마디로 제사장의 취지는 이렇습니다. “너는 안 돼!” 이걸 더 포괄적으로 일반화시키면, “안 돼!” 그러니까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안 되는구나. 제사장이 있든, 복장을 제대로 끈으로 묶었든, 금테를 어떻게 했든 이건 안 되는 거예요. 안 되는 이유가, 주의 성취가 주의 말씀 성취, 제사장 복장의 성취가 하나님께서 따로 이룰 분이 있어요. 제사장은 가짜거든요. 가짜를 보내신 것은, 진짜 제사장이 있음을 알리기 위함이에요. 그래서 이 제사장은 “안 돼!”라고 해야 되고 안 된다는 걸 느낀다는 것은 진짜 제사장을 알 경우에만 진정으로 안 됨을 기쁨의 행복한 고백을 하는 거예요. 나는 안 됨을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주여, 저는 뭘 해도 안 되는 것 맞지요?” 이게 기쁨의 고백이 나와요. 

여기 제사장 복장의 모든 사물들은 안 돼와 됨을 두 개로 나누어서 구체화시킵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언약을 생각해봅시다. 아브라함언약과 모세언약의 차이점은, 아브라함언약은 개인에게 주어져서 집안을 만듭니다. 그런데 모세언약은 국가, 어떤 집단에게 준 거예요. 아브라함언약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이삭을 죽이고 수풀 속에 나타난 수양, 그 수양과 이삭과의 관계 때문에 이삭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었던 거예요. 수양 때문에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아들 될 수 있었고 야곱도 하나님의 아들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국가단위 이스라엘에서는 애굽에서 나올 때 그들은 잘난 사람, 못난 사람 관계없이 공통적으로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른 거예요. 제가 어느 강의에서 했잖아요. 피 바를 때 한 벌 발랐습니까, 두 벌 발랐습니까? 한 번 바르면 죽음의 사자가, “이 집은 성의가 없어. 죽여야 되겠다.”고 나오고, 세 번 바르면, “이 집은 구원해야지.” 이렇게 나오는 겁니까? 어린양의 피라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성의가 있느냐, 없느냐, 얼마나 열심히 했느냐 하는 인간 쪽에서 할 수 있는 행함에 대해서 일체 “안 돼”라는 원칙으로 묻지를 않는 거예요. “제가 내보일 것은 내가 어떤 행동한 것을 보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만을 저희들은 고백할 뿐입니다.” 이게 십자가의 피의 의미가 되는 거예요. 

그렇게 양이 죽음과 심판과 저주를 막았습니다. 근데 양은 생물체지만 아직까지 인간은 아니거든요. 그 다음에 양의 모습이 주의 이름으로 동행을 하게 돼요. 주의 이름으로 동행하면서 여기서 언약이 나오는데 그 언약의 핵심이 제사법입니다. 양을 잡는 거예요. 그러니까 양이란 동물이 장차 어떤 인간으로 생긴 인물과 연관되기 위해서 주의 이름 하에 양을 잡는 인간이 등장하는 거예요. 

제 말은 양을 잡는 인간들이 등장하면서 인간이란 한 명이 아니지요. 제사장이 많잖아요. 인간들, 복수, 여러 사람이 등장하면서 나도, 너도 아니고 한 분으로 전환되는 중간과정의 매체를 형성하는 거예요. 양에서 인물 나오기 전에 양 잡는 일을 하는 여럿 사람들이 나오고 여럿 사람 다 죽이고 그리고 어떤 인물, 그런 일을 위에 있는 주의 이름께서 언약이란 모습으로 계속해서 새로운 언약, 새로운 언약을 주입 시킨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잘리면서 레위지파에서 잘리면서 유다지파. 유다지파에서 왕이 나오게 돼있어요. 제사장은 여러 명입니다. 그런데 영원토록 왕은 달랑 하나이어야 돼요. 이스라엘 왕들이 많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영원한 왕이고, 그 왕 되신 분이 전에는 양의 모습이지만 이제는 하나의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야 되는 겁니다. 그 준비과정이 주의 이름이 이스라엘과 동행하면서 진행된 거예요. 주의 이름이 동행한다는 증거로써 제사법이 주어졌고 그 제사법과 더불어 주어진 것이 성막, 성소구조였고, 겸해서 그 제사에 종사할 제사장이 있어야 되고, 그 제사장은 장차오실 주의 기능과 역할을 그들은 몸에 걸치는 옷 모습으로 나타난 거예요. 내막이 그렇게 돼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등장할 때 방금 이야기한 것은 하나님 쪽에서 이야기한 것이고, 우리 쪽에서 다가가면 이렇게 됩니다. 제사장의 복장이 눈에 들어오지요. 보석들도 들어온다 말이죠. 보석들을 평소에 얼마나 귀하게 여깁니까. 고귀하다고 여기는 거잖아요. 저 보석 얼마 하겠나? 지금 제사장이 길에 다니면 도대체 저 사람 옷은 얼마짜리야? 그러니까 인간은 제사장을 보게 되면 어쨌든 눈에 보이기 때문에 제사장을 통해서 자기 구원을 이루려고 하게 되는 거죠. 그렇다면 제사장이 옷을 입었다는 자체가 하나의 제사장이 할 수 있는 우리와 차이 나는 기능에 속하는 겁니다. “제사장은 좋겠다. 좋은 옷 입고. 우리는 좋지 않은 옷 입고. 옷 입었다고 하나님과 그들과 함께 있고 우리는 그 옷 없다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3장 봅시다. 27절 누가 읽어볼까요.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여기 그리스도 옷 입는다는 말은, 제사장이 죽을 때 반드시 자기 옷을 벗어서 자기 아들 제사장에게 넘겨줍니다. 그러면 안에 시커먼 벌거벗은 몸이 중요하다는 말입니까, 걸치고 있는 옷이 중요하다는 말입니까? 옷이 중요하지요. 옷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제사장 기능을 하게 하죠. 또 죽으면 옷을 벗어 또 주는 거예요. 

그렇다면 옷 자체가 갖고 있는 그것이 갈라디아서 3장에 보니까 모든 성령 받은 사람은 주님한테 그리스도의 옷을 걸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리스도의 옷을 입었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이런 복장을 해왔습니까? 이런 복장 아니란 말이죠. 아닌데도 구원이 된다는 말은 이 복장에 담긴 모든 의미와 취지가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이미 완성이 되어서 그 완성된 것을 옷 입은 사람은 헬라인이나 이방인이나 관계없이 우리는 구원을 받고 천국에서 살 수 있게 된다는 말이거든요. 

그 말이 진짜라면 이 사물, 물체의 완성이 예수님의 피라고 연결시켜줘야 비로소 논리적 해석이 완료가 되는 겁니다. 여기 있는 보석들 모아서 짜내면 피가 나와야 돼요. 십자가 피로써 완성이 돼야 되는 거예요.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그걸 설명하려고 합니다. 설명이 참 막연하지요. 안 될 것 같잖아요. 보석을 짜면 피 나옵니까. 안 되잖아요. 그 중간과정이 바로 멜기세덱이 있어요. 이것은 제가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히브리서에서 그렇게 설명해요. 

히브리서 5장 1~3절.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러면 히브리서 5장에서 하는 말이 속죄제를 드렸으니까 그 사람은 연약하지 않습니까? 제사장이 나도 죄인이다. 따라서 나를 위해 먼저 속죄제를 드리고 난 뒤에 다른 사람을 위해서 속죄제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응답한다는 식으로 자기를 위해서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드렸으니까 그 순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속죄제를 드렸는데 속죄제 드렸으면 연약하느냐, 연약하지 않느냐? 이 말입니다. 참 그래서 히브리서가 좀 어렵지요. 이것은 속죄제 천 번, 만 번 들여도 연약해요. “예수님이여,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해서 죄인입니까, 아닙니까? 그래도 죄인이 맞잖아요. 

속죄제를 드리면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죄인이라고 확정짓는 거지요. 제사장이 드리는 모든 제사는 뭐냐? “전부 다 입 다물고 죄인이라고 고백해.” 그런 뜻이지 이것 드리면 용서받는다. 이건 아니란 말이죠. 주님 앞에 꿇어. 이 말이에요. “주님이여, 제사 드렸으니까 죄 지어도 좀 봐주소.” 이건 아니란 말이죠. 연약합니다. 우리는 죄인 맞습니다. 그렇게 제사 드려도 그 제사가 우리의 연약함을 면죄시키는 효과가 아니고 그걸 규정짓는 효과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제사법에 있어서 제사는 전부 다 죄인 만들기 위함이죠

그런데 6절에 봅시다.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여기 멜기세덱이 나와요. 차이점이 뭐냐? 제사장은 드리고 늙어 죽고, 드리고 늙어 죽고. 옷을 입어도 죽고, 벗겨도 마찬가지. 옷 입은 그 인간도 죽고. 결국 이 복장은 사람 죽이는 복장이에요. 사람을 죄인 되게 만들고 죽어 마땅함을 보여주는 복장이에요. 뭔가 고귀하니까 오래 살 것 같지요. 이것 걸치나 안 걸치나 죽기는 마찬가지라니까요. 이것 보고 집에 가서 디자이너에게 부탁해서 만들서 이것 걸치고 있으면 돈만 날리지 이것 걸친다고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요. 성령을 입으면 이것 입은 것으로 대치됩니다. 성령 받으면 그 사람은 이 옷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과 똑같아요. 

멜기세덱은 이런 복장이 없습니다. 없는데도 불국하고 영원한 안 죽었어요. 멜기세덱은 분명히 같은 제사장이지만 옷감이 달라. 원단이 달라서 이런 복장을 한 제사장이 아무리 제사 드려도 백날 제사 드리고 피 바르고 또 죽고, 피 바르고 또 죽고 하는데 한 번 제사장은 영원한 제사장, 이게 멜기세덱 아닙니까. 영원해요. 

그 원단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히브리서 7장 1~3절에,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으니까 결국 이런 뜻입니다. 제사장이 죽는 이유는 자기 어미 아비가 있으니까 죽는 거예요. 그걸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육이라 합니다. 육에 속한 인간은 연약할 수밖에 없고 육에 속한 제사장이 이런 복장을 걸치고 제사를 해봤자 숨어있는 육의 정체만 폭로될 뿐이란 말이죠. 육은 안 돼. 육은 이것밖에 안 돼. 육이란 것은 어쩔 수가 없어. 육은 하나님께 먹힐 이유가 없어. 왜? 육이기 때문에. 이런 복장을 하고 제사 드린 제사장이 죽었단 말이죠. 육이니까. 그러면 모든 육은 다 그렇지.  

그림을 그려야 돼. 말로 하면 논리가 어려워서 그림 그리면 쉬워요. 어떤 한 미지의 인물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멜기세덱입니다. 이상하게 이 사람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다는 말은, 사실은 창세기 당시에는 아비가 누군지, 어미가 누군지 모른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성경은 모른다는 것을 아예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는 특수한 존재로 다뤄지는 겁니다. 그러한 전설적인 인물을. 분명히 사람이고 아브라함을 길에서 만났잖아요. 아브라함이 귀신 만난 게 아니거든요. 

아브라함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은 318명, 자기 사병 데리고 전쟁을 했는데 이게 이길 전쟁이 아니에요. 그런데 이겼단 말이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분명히 하늘의 요소가 나한테 언약을 준 하나님과 관련된 전쟁이다. 그런데 이 관련된 전쟁에서 내가 승리한 건 아니다.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습니까? 하나님이 개입하니까 이긴 거예요. 아브라함도 분명히 내가 이길 전쟁이 아닌데 누군가 개입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개입하셨다는 걸 아는데 그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멜기세덱이라는 진짜 어떤 인물로서 등장할 줄은 상상도 못했지요. 사실은 하나님의 대리자인데. 하나님은 제사장을 통해서 일하기 때문에. 

이 사람은 하늘에 속해요. 하늘에 속한 것이 너무 늘어져서 땅에 닿았어요. 아브라함이 오는데 당신이 기도한 덕분에 이번 전쟁에 승리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얻은 전리품은 사실은 제가 갖는 것이 아니고 당신이 가져야 됩니다. 왜? 당신의 원천은 하늘에 있기 때문에. 전리품을 준다는 뜻에서 십분의 일을 십일조로 드렸다는 거예요. 십분의 일을 드린다는 말은 로켓의 제일 윗부분, 캡슐부분이 중요하기 때문에 이걸 드렸다는 거예요. 

십일조를 이 사람이 받고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내렸어요.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제사장이 있어야 되고 그 제사장은 육에 속하지 않고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는 하늘에 속한 제사장이 있어야 땅에서는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펼칠 수가 있습니다. 성도는 자기가 구원받기 위해서 하나님 믿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 뜻을 펼치다보니까 거기에 말려든 사람이에요. 마치 멜기세덱과 같은 사람이에요. 하나님께서 자기가 하는 일에 집어넣어버린 거예요. 이게 원래 이스라엘 나라가 그래요. 하나님 하시는 전쟁에 이스라엘을 거기에 집어넣은 것은 이스라엘 전쟁에 하나님이 하시는 전쟁에 끼어든 겁니다. 하나님의 원수와의 전쟁에서. 

이 사람이 제사장이에요. 무슨 제사장? 히브리서 5장에 보니까 영원한 제사장. 그런데 이 말이 5장 11절에 보니까,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해석이 어려워서 이것은 때가 알게 되는데 지금 연약한 사람은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먹지 못할 자가 되었도다. 하지만 나중에 멜기세덱을 알게 되면 너희들은 거기서 벗어났다는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멜기세덱을 알면 신앙의 초보가 아니란 말이거든요. 신앙의 초보가 아니란 걸 좋아하면 안 돼요. 신앙의 초보가 아니란 말을 이제는 이 땅에서 망해도 괜찮습니다. 그 정도 돼야 되지 초보가 아니니까 복을 더 받을 줄 아는 이런 꿍꿍이속을 하지 마세요. 원래 스데반 집사같이 믿음 좋은 사람은 그냥 설교하다 죽는 사람이지 설교해서 떼돈 벌고 하는 이런 사람 아닙니다. 이제 죽어도 좋아. 이런 사람이에요. 다른 말로 “나는 역시 안 돼.”를 확실히 아는 사람이 신앙이 좋은 사람입니다. 

멜기세덱에 대해서 관련이 있으면서 그 다음에 6장 뒷부분에 가면 드디어 멜기세덱 이야기가 나오면서 하나님께선 거짓말하지 않는다. 7장에서 레위지파가 유다지파로 바뀌면서 멜기세덱과 연관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멜기세덱이란 영원한 제사장은 그 뒤에 8장, 9장에 보면 예수그리스도가 영원한 제사장이 되어서 멜기세덱의 반열을 좇은 영원한 제사장이 오십니다. 그러면 이것은 육이 아니고 영적 제사장이 되는 겁니다. 이런 영적 제사장이 될 때에 그렇다면 그 동안 죽을 수밖에 없는 제사장, 복장 벗어서 자기 아들한테 주는, 그 복장의 의미는 출애굽기 28장에 나오는 데로 거룩이에요.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것은 이 거룩이 물체로 돼있는 거예요. 물체로 돼있는 이것이 거룩한 인물로 바뀌게 되는 겁니다. 여기에 어떤 일이 개입해요. 이 일이 제사법이라 하죠. 제사법을 행하는 사람이 구원받습니까? 아니면 본인이 제사제물이 되는 사람이 당사자입니까? 히브리서에 의하면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제사법 안에 풍덩 뛰어들어서 본인이 제사장도 되고 본인이 제물도 되는 그런 분이 이 제사법을 완성해버려요. 

원래 제사장들은 위임받을 때 오른손가락과 발가락에 기름과 피를 발라요. 기름과 피는 어디서 나온 겁니까? 바로 자기가 잡은 짐승의 피를 발랐잖아요. 이것은 아프리카 토인들이 양을 잡기 위해서 양의 탈을 쓰는 것과 똑같은 수법이란 말이죠. 희생의 피를 바른다는 말은, 자기 자신이 하는 일이 곧 자기를 오히려 덮칠 때 비로소 그 일의 온전함이 이뤄지는 거예요. 

그렇다면 제사장은 피를 뒤집어쓰고 구원받는다고 칩시다. 거룩하다고 칩시다. 그럼 제사장은 이런 복장을 하고 있는데 일반 많은 백성과는 어떤 관계가 있느냐? 그때 나오는 것이 그림에 보면, 제일 중요한 가슴에 보석 열두 개가 있지요. 이걸 흉패라 하는데 판결 흉패. 제사장이 판결하게 되면 이 거룩한 하나님의 의가 이 사람한테 의로움이 남겨지는 거예요. 

만약에 의로움이 남겨질 때 너는 착하고 너는 악하라. 이걸로 끝나는 겁니까? 어떻게 됩니까? 예를 들어서 사기 친 사람이 있어서 재판받는다 합시다. 판사가 다 이야기 듣고, “네가 사기 친 것 맞네. 당신은 사기 당하고.” 판결. 그러면 끝나는 거예요. 거기 있는 경관에게 사기 친 사람 지금 구속해서 교도소로 이송하라고 하지요. 

이 말은, 판결은 판결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거기에 대한 심판과 저주를 처벌을 가하게 돼있지요. 제사장이 없고 판결문안만 있다고 한다면, 주의 이름이 자기 백성을 의로운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서 직접 하나님께서 대자연을 통해서 그들에서 심판과 판결을 내리는 작업을 누가 고스란히 인수인계 받은 거예요. 이런 복장을 한 제사장이 인수인계 받아서 한 거지요. 

왜 우리가 이 점을 알아야 하느냐 하면, 제사장이 멜기세덱으로 바뀌잖아요. 멜기세덱도 제사장이 하는 이 일을 그대로 한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원한 왕으로 모셨다는 말은, 주님의 판결이 우리한테 옴팡 뒤집어씌움으로써 그래서 주의 나라가 임하게 하옵소서. 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믿는 성도라 이 말입니다. 제 말은. 

“주님, 저 어때요?” 이게 아니고, “주님, 저 착하지요?” 이게 아니고, “주님 판단해서 판단으로 끝나지 않고 판단의 결과도 뒤집어써서 의의 종으로 되게 하옵소서. 그런 식으로 이 땅에 살게 하옵소서.” 산다고 되는 게 아니고 의의 종으로 그냥 하게 됐으니까 그런 고백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실제적이에요. 

아까 첫째 시간에 끝에 한 것 다시 해봅시다. 어떤 여자가 배가 불러와요. 뭔가 이상해. 6개월 동안 관계 한 적도 없는데 얘가 생겼단 말이죠. 지가 마리아도 아니고 이상하단 말이죠. 그래서 민수기 5장이 신기한 게 보통 그럴 경우에는 아내를 종용히 불러서 갈라서자고 하든지, 이실직고하라든지 이렇게 하겠는데 현대인들이 이상한 것은 이걸 제사장에게 찾아간다는 거예요. 

요새 같이 판사한테 찾아가는 그 취지가 아닙니다. 판사는 판결하면 끝나는 거예요. 그걸 제사장한테 간다는 말은, 나는 잘 했지요가 아니라 우리 가정에 일어난 날이 하나님이 우리를 의로운 나라를 만드는데 어떤 취지로 이런 일을 발생시켰는지 우리는 그 사태에 빠지기 위해서 아내를 데려가는 거예요. 

그때 제사장이 하는 말이, 기다려보세요. 해놓고 궁시렁궁시렁 이야기해놓고 이런 이야기했는데 아까 글자 쓰고 물에 빤다고 했지요. 제사장만 다니는 성막의 티끌을 집어넣고 물을 마시란 말이죠. 만약에 네가 간통했으면 얘는 유산되고, 만약에 간음 안 했으면 건강한 아기를 낳는다는 이야기가 민수기 5장에 나온다 말이죠. 그렇다면 아기를 잉태했다면 그 얘는 의인의 아들, 곧 이스라엘의 본질을 부합시키는 아들이 되는 거예요. 한 번 이스라엘은 영원한 이스라엘이다? 아니에요. 그건 해병대나 하는 이야기고.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이스라엘 되려면 제사장이 있어서 하나님을 대행해서 효과 있는 법이 계속해서 주어져야 돼요. 

안식일에 나무하면 죽여 버려라. 죽여 버리면 이스라엘 백성의 숫자가 하나 줄어드는 거예요. 줄여들어도 괜찮아요. 어차피 천국 못 갈 인간인데. 천국은 숫자가 많아야 좋은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의 의가 있어야 돼요. 왜 천국에 의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원래 하나님의 의를 제공하신 분이 천국의 중앙지점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린양의 보좌가 있고 여기에 빙 둘러서 144,000이 섬기는 양상이 바로 천국이거든요. 이런 위치가 아니면 안 돼요. 

마치 요즘 MBC 드라마에 나오는 [여황의 교실]처럼. 여왕벌 주변에 일벌들이 포진돼 있잖아요. 고현정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카리스마 있는 교사한테 얘들 스물 몇 명이 꼼짝도 못하잖아요. 그게 천국이에요. 이게 의롭게 이게 법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바꿔 나가는 거예요. 내 중심의 세상관을 예수님 중심으로 바꿔나가는 겁니다. 바꿔나가려면 그냥 바꾸면 안 되고 제사장이 날마다 우리에게 의로운 말씀을 주셔야 되고 그 말씀이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무엇이 의고, 무엇이 죄라는 것을 날마다 표출해야 되고 표현해야 돼요. 사실은 무엇이 의고, 무엇이 죄라 하지만 뻔하지요. 우리 육신이 죄고 주님의 성령은 의고. 그래서 은혜로 살잖아요. 그 작업을 이미 이스라엘 내에서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복장의 의미는 뭐냐? 간단합니다. 열두지파를 붙들어 매기 위한 장치에요. 제사장 몸에다가. 제사장 몸을 하나의 면적으로 부착물, 광고판. 붙을 놈은 붙어 있어라. 나이순대로 여섯 지파씩. 그것도 모자라서 여기는 열두지파. 모자에는 “여호와께 성결”이라 쓰고. 그러니까 제사장은 전 이스라엘을 압축해놓고 하나의 인물로 내세운 제사장이 대표로 나설 수밖에 없어요. 거룩한 제사장 나라. 왕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왕이기 때문에 제사장이 중심이에요. 

이런 부착물이 붙어있기 위해서 에봇을 입고 붙어있을 때 명찰을 새겨야 될 것 아닙니까. 그냥 나무 명찰해도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티를 낸다고 보석에다 이름을 새겨요. 여기에 보면, 홍보석에는 르우벤, 황옥은 시므온, 녹주옥은 유다, 석류석은 단, 이렇게 돼있지요. 그렇다면 나이순으로 돼있는데 여기 보석 중에서 홍보석이 르우벤인데 만약에 시므온지파가 홍보석을 더 좋아한다. 이게 말이 됩니까? 말이 안 돼요. 왜냐하면 이 보석들은 다 같은 보석이에요. 어느 보석이 나을 것 없습니다. 그런데 한 보석으로 안 했느냐? 열두지파를 구분 짓기 위해서 그랬습니다. 왜 열두 지파를 구분 짓느냐 하면, 이게 마지막 어려운 건데 좀 참으세요. 

열둘이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구원이란 열둘이 1로 소급돼야 됩니다. 야곱의 열두지파는 나, 구원받았다고 하면 안 되고 열두지파가 어떤 지파든 간에 우리는 한분 때문에 열둘이 되더라도 구원받았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에서 열둘이 나온다면 열둘은 무엇에 해당하느냐? 이것은 축복의 배당, 축복이 흘러넘치는 것으로 볼 수 있어요. 만약에 열둘이 새끼 쳐서 열둘이 된다면 이 144는 이것도 하나에서 나왔기 때문에 무한대로 넘쳐나는 거죠. 그러니까 열둘에 속한 이 사람들은 열둘에 머물러있으면 안 되고 오직 하나를 봐야 돼요. 열둘인데 이 절차를 천 번했다. 숫자로 표현하면 144,000 되는 거예요. 12*12*1000, 무한대니까. 144,000이 가지가 퍼져도 모아보면 하나지요. 

여러분 머리카락이 몇 개지요? 보통 십만 개라 하거든요. 머리는 몇 개입니까? 하나잖아요. 교회의 머리는 뭡니까?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우리는 그의 지체니. 이게 야곱언약을 그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그걸 인체로 표현할 때 너희들 전부 이 몸에 다 갖다 붙어라. 여호와의 성결의 진액을 내 몸에 붙었다는 이유 때문에 열두지파는 골고루 받아먹어라. 너희들은 축복의 결과물이다. 복 받은 족속들이에요. 붙어있기 때문에. 

그래서 제사장이 움직인다는 말은, 그 제사장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백성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겁니다. 제사장이 잘못하면 백성들이 저주받아요. 왜? 제사장의 복장에는 열둘을 다 가져왔기 때문에. 골로새서 3장에 이런 말씀이 있지요. 너희는 땅에 있는 목숨을 목숨으로 보지 말라. 너희 생명은 하늘에 그리스도 안에 있지요. 

그러면 이 땅에 있는 목숨은 사실은 목숨이 아니고 우리 목숨은 한분의 가슴팍에 있다고 보면 돼요. 그 목숨은 주님의 몸에 달려있는, 주의 이름에 달려있는, 언약의 완성체에 달려있는 거고, 우리의 목숨을 그 목숨을 보여주기 위해서 육신과 더불어서 이건 사라져야 될 목숨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다하면 우리의 목숨도 다하는 거죠. 하지만 목숨이 다하는 순간 우리는 생명으로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그때는 보석과 같이, 천사와 같이 이 모습 그래도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모습은 예수님 모습이고, 여기 대롱대롱 달려있는 보석들은 우리가 거기에 달려있다고 보면 돼요. 그리고 달려있는 그것이 바로 우리 하나하나가 중요하다는 말이 아니고 달려있음 그 자체가 축복입니다. 환란,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어떤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주님 앞에 달려있는 보석을 절대로 떨어지지 않아요. 아주 바느질을 잘했어.    뛴다고 보석들을 흘리고 이런 것 없습니다. 어깨에 걸려서 날아가고 이런 것 없어요. 제사장 온 몸 전체가 열둘이 하나요, 하나가 열둘이 되는 같은 운명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주의 이름에 속한 백성이라 해서 주의 이름으로 불려지는 겁니다. 그 관계를 인 치심, 오늘의 주제에 이제 도착했습니다. 내 이름이 아니고 내가 살아가는 것이 내 인생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축복으로 할당된 인생이기 때문에 인생 하루하루 삶이 주님이 주신 은혜의 삶이고 축복된 삶입니다. 머리카락 빠진 것도 축복이고, 설거지하다가 손가락 밴 것도 축복이에요. 왜? 전부 다 주께서 친히 만들어가는 주님의 인생이기 때문에 그 관계를 인치심이라 합니다. 

그러면 가슴팍에 있는 우림과 둠밈은 뭐냐? 이것은 판결을 하는데 의로운 판결을 해요. 의로운 판결을 어떻게 하는지 학자들은 모르겠다는 거예요. 이게 주사위 같으면, 당신은 간음했구먼. 이렇게 숫자를 보고, 이번 전쟁에 승리합니다. 이런 건지. 아니면 이걸 끄집어내서 빨간색이 보라색으로 변하고 노란색으로 변하면 전쟁에 승리합니다. 안 변하면, 안 되겠네요. 이런 건지. 여러분은 어느 쪽으로 생각합니까. 

사무엘상 끝에 보면, 28장 6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시므로” 여기 우림이 나오잖아요. 가슴팍에 있는 이거. 그러니까 사울 왕이 제사장에게 내가 어떻게 되는지 물어보라 하는데 아무 징후가 없네요. 이랬단 말이죠. 이게 색깔이 변하는 것인지 아니면 굴려서 하는 건지 어쨌든 간에 점치는 겁니다. 좋은 의미에서 점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제사장에게 이걸 맡겼다는 말은, 판결할 때 이것으로 판결했거든요. 이것으로 판결했다는 말은, 제사장은 하나에 들러리고 제사장 안에 주의 이름이 함께 있어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친히 조성해나갔다는 이야기를 제사장 앞장세워서 일을 하고 계시고 지금은 바로 예수님이 제사장으로써 여러분들을 천국 사람으로 만들어나간다는 그 이야기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기에 저희들이 안 믿고 싶어도 믿으나 안 믿으나 현실로 다가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러한 원칙과 이러한 질서 속에 이미 우리가 놓여서 산다는 그 감사와 기쁨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