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102a 울산강의-출애굽기 24장 : 시간의 출처 (강의:이근호) 목사
출애굽기 24장 12절부터 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와 와서 거기 있으라” 산에 올라오라고 했는데 그것은 산에 계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리고 산 밑에 있는 곳은 하나님이 안 계신 장소가 되겠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인데 하나님이 안 계시는 자기 나름대로의 집단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딴 데 계시고.
이게 오늘날 참 의아해하죠.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무소부재, 아니 계신 곳이 없는 분,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 그거잖아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은 산에 계시고 산에 계시는 하나님과 만나는 사람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고 모세에게만 그것이 허락이 될 때 이것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하나님이 있는 상황과 없는 상황이 어떤 차이가 나는가를 하나님께서 알려주시고자 하는 겁니다.
모세가 산 위에 올라갔을 때와 모세가 산 위에 올라가지 않았다 치면, 올라갔을 경우에 이스라엘은 어떻게 달라지고, 만약에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이 그냥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에서 나와서 끄덕끄덕 광야 지나서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갔을 때 상황과 어떤 차이가 나느냐 이 말입니다.
그 차이에 대해서 산에 올라가지 전에는 그들에게는 율법이라는 게 없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산 위에 올라가서 뭘 가지고 내려옵니다. 뭘 가지고 내려왔다는 것은, 강의를 다시하게 되면, 사람들끼리 모인 곳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이건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들 상식이거든요. 우리의 상식은 하나님은 어느 곳이든 계시는 분이라는 그런 이미지를 갖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시내 산 위에만 계시면서 모세만 올라오더라고 해서 하나님이 아니 계시는 상태를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부각을 시키는 거예요.
하나님이 아니 계시다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은 빠져있고 그저 사람들만 모여 있는 곳이죠. 사람들만 모여 있는 곳에 나중에 모세가 하나님 만나고 내려올 때 빈손으로 내려오지 않고 하나님의 율법과 하나님의 계명과 돌판을 가지고 내려왔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정리할 수 있어요.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가 비로소 정립이 되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있을 경우에만 하나님이 있다고 이야기해야지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인데 어디나 다 있는데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추상적으로 대충 넘겨서는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란 거죠.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는 것이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이라고 보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말씀이 그렇게 우리 생활에 필요한 건가요? 김치냉장고 없이는 못 살아도 말씀 없이는 살 수 있잖아요. 자동차 없이는 우리는 못 살지만 말씀 없이는 못 산다고 합니까? 하루 세끼 먹으면 그게 사는 것으로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말씀 안 먹으면 죽는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지요.
그래서 제가 강의 초반부터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계신 곳은 산 자는 볼 수 없는 곳이다.] 산 자는 볼 수 없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결국 산 자가 과연 산 자이겠습니까, 아니면 죽은 자이겠습니까? 죽은 자가 되는 거죠.
말씀이 없을 때는 너도 살고, 너도 살고 다같이 살아있는 사람들끼리 모였다. 한 집안을 이루었다. 며느리, 딸, 손자, 칠순잔치 할 때는 모두가 살아있고, 교인들 모일 때는 우리 교인 몇 명이라고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경유해서 상대방에게 이야기하고 말씀으로 상대방과 엮여지지 아니하고 그저 너 살아있고, 나 살아있으니까 우리는 살아있다. 이런 식으로 관계가 엮여버리면 그것은 말씀이 빠져있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죽은 집단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사람은 인간관계나 인정이나 혈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그런데다 살았다는 명칭을 붙이지 말라. 그런 것은 하나님한테 이야기하지 말라.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와서 결국 보여준 것은 참된 죽음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잖아요. 숨 끊어진 걸 죽음이라 하는데 참된 죽음이란 하나님이 없는 세계가 참된 죽음, 저주받는 세계. 그걸 예수님이 대표적으로 보여줬습니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아버지께 버림받은 입장이라면 그것은 아무리 살았다고 우기지만 죽은 존재가 되는 겁니다.
죽은 존재이면서도 자기가 죽은 줄 모르는 이유는 말씀이, 모세가 받았던 그 말씀이 그들 속에 없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망상 가운데 살았어요. 죽어있으면서도 살아있다고 우기는 식으로 매일같이 살아갑니다. 그래서 저는 이야기합니다. 사람이 살아도 아무런 이유가 없이 살아요. 이유가 없는 사는 것은 산다고 볼 수 없는데 “아저씨, 왜 살아요?” “이유 없지요.” “사는 게 이유 없다면 죽어도 할 말 없네요?” 그런데 죽으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사는 이유가 뭡니까? 무조건 죽으면 안 된다는 게 사는 이유가 돼버렸어요. 쫓기듯이. 무조건 죽어서는 실패다. 죽어서는 인간 망가지는 거다. 그러니까 죽지 않기 위해서 결과적으로 사는 쪽으로 내빼는 것, 죽음에 쫓기는 것, 이게 진정 산다고 할 수 있습니까? 산다고 할 수 없어요. 이거는 이유도 모르고, 의미도 모르고, 목적도 모르는데 그걸 산다고 하지 않고 그냥 존재한다고 이야기하죠. 돌멩이를 살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건 생명이 없다고 해서 무생물이라고 하잖아요. 인간도 마찬가지에요. 인간이 사는 이유가 없으면 그것은 무생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에서 이런 이야기했어요.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지 아니하면 그것은 들풀이나 잡초나 참새보다 더 못한 존재가 돼요.
다시 한 번 강의 정리하면, 하나님께서 시내 산 위에 좌정해 계시는 것은 우리들에게 진정 하나님의 있음과 하나님의 없음이 어떤 차이로 규정되는가를 특별한 자기 백성에게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 하나님 주신 계시가 없으면 그것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죽은 자의 집단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개입되면 그 개입은 죽은 자를 살려내는 작업의 개시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이 있어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나님의 개입으로 일어난 공통적인 사건들, 현상들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없는 가운데 있게 했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내는 작업을 했어요.
아브라함 같은 경우를 잘 아시죠. 자식이 없는데 이삭을 낳게 했잖아요. 천사가 와서. 그런데 그 자식이 멀쩡하게 살아가다가 하나님께서 죽이려고 했는데 숫양 때문에 살아났잖아요.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하는 것은 두 가지 면,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게 되면 두 가지 면이 생기는데 없는데서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하고, 나는 죽었는데 하나님 때문에 살았다는 느낌을 갖게 할 때 그것만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그것만이 천국 백성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오기 전에, 율법 주어지기 전에 이미 우리에게 그런 말씀을 남겨주셨습니다. 그런 말씀을 남겨주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향한 그 의미가 진정 자기 위치에서 그게 무슨 뜻인지를 그들은 모르게 돼요.
그걸 왜 모르는가? 그 어려운 걸 이제부터 설명하려고 합니다. 어느 정도 어려운지 그냥 듣기만 하세요. 모세가 하나님께 불려갔는데 모세가 불려간 그곳은 시간과 공간이 처음 만들어진 곳이었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처음 만드신 분이 누구죠? 하나님이죠. 그럼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러갔습니다. 어디로 갔지요? 시내 산 위로 갔지요.
제가 어렵다는 말은, 밑에서 보면 시내 산 윈데 시내 산 위와 밑과 같은 흙이 아니고, 같은 바위가 아니고, 같은 공간이 아니에요. 지금 시내 산 올라가게 되면 같은 흙이지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때문에 시간과 공간이 완전히 의미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친히 시간도 만들고 공간도 만들었지요. 천지창조 때. 지금 모세는 어디로 간다고 했습니까? 시간이 처음 나왔던 그분에게 가고, 공간이 처음 만들었던 그분한테 간다고 했지요. 그분과 합세했을 때에 이미 만들어진 시간과 만들어진 공간과는 다른 시간과 공간이 거기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강의하기 전에 어렵다는 말을 한 거예요.
인간들 보기에는 시내 산이니까 흙먼지 일으키면서 한 발자국씩 올라가게 되면 이쪽 흙이나, 저쪽 흙이나 같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모세가 갔던 그곳은 40일 동안 물도 마시지 않고 40일 동안 잠도 자지 않아도 거기서 모세가 피곤에 지쳐서 스트레스 받았습니까? 쉽게 이야기합시다. 지상에서 40일 동안 산 속이나 울산바닥에 있으면 누가 돈 갖다 주고 양식 갖다 줍니까? 안 주잖아요. 울산바닥에서 태화동에서 물도 안 마시고 잠도 안 자고 양식도 안 먹고 40일 지나면 낯짝이 어떻게 돼요? 바짝 야위겠지요. 그게 바로 이 땅에 흙에 사는 인간의 참 모습이에요. 인간의 실정이 이렇습니다.
그런데 모세란 것이 우리가 알다시피 모세 키나 우리 키나, 모세 체중이나 우리 체중이나, 모세 피부나 우리 피부나 마찬가지거든요. 그 피부, 그 체중, 그 몸뚱이로 사뿐히 사뿐히 시내 산 올라갔더니만 어떻게 됐다? 물도 안 마시고 양식도 안 먹고 잠도 안 잤는데 다이어트해서 홀쭉해졌습니까? 얼굴이 어떻게 됐지요? 고린도후서 3장에 나오죠. 해같이 빛난다.
도대체 그 땅은 어떤 땅이기에 해같이 빛납니까? 공간이 처음 출발했던 공간입니다. 지금 우리가 감히 예수 믿고 그 안에 가요. 이 땅에서는 죽음에 애도하고 죽음이 절망스럽지만 그 세계는 산 자의 세계지, 아픈 것이나, 목마른 것이나, 괴로운 것이나, 스트레스나, 류마티스 관절염, 손 저리고, 편두통 이런 것. 한의사도 필요 없고, 수술 집도할 의사도 필요 없고, 아픈 것도 없고, 괴로운 것도 없고, 눈물도 없어요.
오직 기쁨과 우리 몸은 피부는 전에는 흙에 속한 형상을 입었지만 이제는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습니다. 감히 그 세계에 가는데 그 세계가 어떤 세계입니까? 시간도 처음 만들어지고 공간도 처음 만들어진 세계죠. 그러면 모세가 잠입했던 시간과 공간은 우리가 경험했던 시간도 아니고 공간도 아니고 처음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진 세계란 말이죠.
그렇다면 모세가 받아온 율법이라는 것, 하나님의 계명이란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썩어질 역사와 시간을 길게 이어주려고 준 율법도 아니고 계명이 아니겠지요. 모세가 처음으로 맛봤잖아요. 모세가 농담하는 겁니까? 어떤 대선주자 이랬어요. “정치가 장난이냐?”라고 문재인이 말했어요. 현재 하늘나라가 장난입니까? 현실 아니고 그것은 만화입니까? 그것은 안 중요한 거예요? 울산바닥에서 사는 게 중요한 거예요? 먹어도 돌아서면 배고프고, 마셔도 돌아서면 목마름, 이런 목숨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살려줘도 또 죽으려하고, 살려내도 또 죽으려하는 이 목숨이 뭐가 중요합니까? 여기다 24시간 다 투자해. 그래놓고 왜 투자하는가? 살려고 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생각하는 산다는 것은 따로 있는데 우리가 살려고 하는 것은 죽으려고 하는 짓이에요.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면, 사람은 자기 하는 짓으로 사는 게 아니고 죽는다. 인간은 살려고 하는 짓거리가 모여서 자기를 더욱더 죽이게 만들어요. 살려고 매일같이 애썼던 그것이 자기를 죽인다니까요. 사는 것은 말씀에 의해서 사는 거예요. 이 말은 말씀이 원래 나왔던 곳, 공간도 시간도 우리가 경험한 공간, 시간이 아니고 처음의 공간, 시간이 흘러넘쳤던 그 자리에서 말씀이 나왔다는 말은 현재 이런 시간, 공간이 아닌 다른 차원, 다른 질의 시간과 공간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혓바닥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나온 거예요. 말씀이 은하수가 되어서 그걸 따라가게 되면 어디에 합세하게 됩니까? 모세가 경험했던 것, 40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 않아도 모세의 얼굴은 해같이 빛나는 그 경지에 넣어주려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겁니다. 살라고 준 거예요.
이스라엘 불신앙이라 하지만 하나님 만나보지 않고 하나님 안 믿는 것은 이해는 되잖아요. 이처럼 율법 받으면서도 안 믿는다면 이건 대책이 서질 않지요. 이방인들이야 원래 율법을 모르고 하나님 모르니까 그냥 그저 밥 먹고 사는 것, 땅 파서 사는 것, 자기 노동의 대가로 월급 받아서 그것으로 먹고 사는 게 사는 것이라고 치자 이 말입니다. 그게 인간의 전부니까. 사는 이유도 모르고 목적도 모르고 도대체 나는 어디서 나왔는지도 모르니까 이해가 되는데 이스라엘, 이들은 뭡니까?
분명히 처음에 강의했듯이 하나님이 없는 곳과 하나님이 있다는 것은 그들만큼은 그 차이를 알아야 되잖아요. 말씀이 없으면 하나님이 없는 것이고, 말씀이 있으면 우리를 살려주시려고 그렇게 애쓰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 그런데 그 귀한 말씀을 버립니까?
빌립보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이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모든 것은 배설물로 여긴다는 이야기를 해요. 뭘 똥오줌으로 여겼는데? 그동안 내가 귀하다, 이것은 소중하다 한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알고 난 뒤에는 똥오줌 취급했다. 냄새나고 더럽다는 말이죠. 나에게 귀하다고 여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난 뒤에는 전혀 나한테 귀한 것이 아니고 도리어 진짜 귀한 것을 가리는 훼방시키는 앞에서 얼쩡거리는 도구밖에 안 되는 겁니다. 그게 집에 패물일 수도 있고, 그것이 자식 출세한 것일 수도 있고, 그것이 남편 성공한 것일 수도 있고, 좋은 아파트에 좋은 차도 될 수 있지만 사도 바울은 궁극적으로 배설물로 여겼던 것을 뭐로 보느냐 하면, 자기 의, 자기 의로움.
그럼 그동안 사도 바울이 예수님 만나기 전에 자기가 믿었던 것은 뭐냐 하면, 내가 하나님 잘 믿는 자기 자신을 믿었던 거예요. 기어이 자기 의를 챙겨야 만족했던 그거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선배 되는 모세가 하나님 앞에 나갔을 때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말씀 들을 때 그가 뭘 챙깁니까? 또 챙길 게 뭐가 있습니까? 없지요.
내가 실제로 가본 적은 없어요. 용인의 에버랜드를 티비에서 보니까 이렇게 돼있어요. 수영장이 있고 미끄럼틀이 있는데 물이 쏟아져 나와요. 물이 쏟아져 나오니까 수영복 입은 사람들은 물길이 너무 세니까 거침없이 브레이크도 없이 떨어져요. 이 물길이 말씀이고, 저항 없이 탄 사람은 모세가 되는 거예요. 말씀이 가라 하는 대로 그냥 앉아서 미끄러져서 풍덩 빠지는 거예요. 말씀으로.
바로 이 말씀이 나왔던 여기가 원래 하나님이 생각했던 시간과 공간이 여기 있단 말이죠. 그러면 율법 따라서 나오면 하나님이 생각했던 원래 시간과 공간이 율법에 섞여서 같이 흘러들어오겠지요. 그런데 아담이 죄를 지었잖아요. 죄를 지었기 때문에 느끼는 시간과 공간이 또 따로 있겠지요. 이 공간은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무리 밭 갈아도 애써도 가시와 엉겅퀴와 찔레가 있어서 남자는 이마에 땀을 있는 대로 쏟아내면서 흙으로 왔으니 그냥 흙으로 가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대우는 그냥 죽이는 겁니다. 흙으로 만들어져서 흙으로 돌아가는데 섭섭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초등학교 6학년 되는 남자애가 엄마와 목욕탕 가면서 엄마가, “너는 컸으니까 남탕에 가고 나는 여탕에 갈란다. 한 시간 뒤에 만나자.” 했을 때 그 애가 왜 섭섭해 합니까? 지가 여자입니까? 남자가 남탕 가고 여자가 여탕 가는 게 당연한 것 아닙니까.
아담 이름이 뭐예요? 흙이잖아요. 흙이 흙 됐는데 섭섭할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울고불고 난리 났어요. 장례식장에 가면. 예수님도 장례식에 참석하셔서 우셨는데 우는 것 보고 울었어요. 울 필요도 없는 왜 우느냔 말이죠. 마치 안 죽어도 되는데 죽었다고 억울하다고 우는 거예요. 좀 더 살아야 되는데 일찍 죽었다고. 세상에, 누구 마음대로. 처음부터 죽은 존재로 태어났어요. 그동안 살려준 것도 고마운 줄 아세요. 그러다가 7,80 살다가 죽은 것도 고마워야 돼요. 범사에 감사해야 돼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니까.
인간의 시간과 공간은 인간을 죽이려고 만들어진 공간이고, 죽일 놈은 죽이려고 만들어진 시간입니다. 시간과 공간이 우리를 포위해서 목을 졸라요. “이래도 안 죽어.” 하고. 젊을 때는 바쁘다고 불평, 나이 많으면 할 일 없다고 불평. 이래도 불평, 저래도 불평. 우리가 불평할 주제가 안 됩니다.
그런데 이 시간과 공간에 말씀이 주어지면, 말씀 안에 뭐가 포함 돼있느냐 하면, 우리를 살려내는 우리가 영생 얻는, 새 하늘과 새 땅과 영원한 시간이 율법에 버무려져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거예요. 그러면 그 말씀을 보고 우리는 분석하고 해체해서 그 안에 영생을 발굴하고 찾아내면 되겠지요. 그래서 그 말씀을 다른 민족에게는 안 주고 오직 내 백성, 언약의 백성, 약속의 백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에게만 특별히 하나님이 말씀을 주신다. 따라서 너와 나는 언약이 체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영생을 너에게 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광야에서 만나를 줍니다. 만나를 줄 때 다른 민족들은, “드롭포스가? 카스텔라야?” 이렇게 양식 쪽으로 생각하는데 모세가 이야기합니다. “그게 네 눈에 양식으로 보이느냐?” 신명기 8장에. “내 눈에는 양식으로 보이는 게 아니고 말씀으로 보이는데.” 여기 먹을 것 있다고 주워 먹자고 하지 말고 만나를 주웠으면 도대체 이 만나가 어디서 왔는지를 봐야 돼요. 하늘에서 왔잖아요.
오늘날 울산에 사는 여러분, 여러분의 생명이 어디서 왔습니까? 회사 사장에서 왔겠지요. 하늘에서 왔습니다. 이걸 평소에 잊어버리고 살아요. 자식은 어디서 왔습니까? 하늘에서 왔지요. 아내는 어디서 왔습니까? 하늘에서 왔고, 남편은 하늘에서 왔어요. 전부다 배치된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형성시키기 위해서. CF에 그런 게 있지요. “땅콩으로 버무린 튀김과자~”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버무린 율법인 거예요. 그 안에 영생 들은 겁니다. 그것을 모세가 배급받으러 온 거예요. 어디에? 시내 산 위로.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의 상식은 하나님은 무소부재, 어디든 다 계시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24장 12절에 보니까 모세를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있다고 소식 전하고 모세에게 너만 올라오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있는 곳과 하나님이 없는 것이 어떤 차이가 나는가를 택한 백성에게 보여줍니다. 어떤 차이가 나느냐 하면, 하나님이야 천지를 만드셨으니까 어디에도 있겠지? 어디에도 있는 게 아니고 모세가 직접 받아온 말씀이 있으면 하나님이 함께 있는 거고, 말씀이 빠져버리면 지 몸뚱이만 있고 하나님은 거기 없어요. 그저 하나님의 죽이는 작용만 있을 뿐이죠.
그래서 절에 가고 하나님 안 믿는 사람도 지금 늙어가고 있잖아요. 하나님께서 작용은 하지만 거기는 하나님은 계시지 않아요. 왜? 하나님은 말씀이 있는 곳만 계시기 때문에.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하나님은 살아계실 경우에만 우리에게 말씀이 죽은 말씀이 아니고 날마다 사건화 시키는 거예요. 그걸 좀 깊이 있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말씀을 살리기 위해서 덩달아 우리를 살리는 식으로 다루십니다. 하나님은 말씀 위주에요. 어떤 말씀? 죽어도 산다는 그 말씀을 위해서 실제로 우리를 죽이고, 실제로 우리를 살리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있어서 항상 있는 데서 없게 하죠. 이삭이란 게 원래 없습니다. 이삭이라는 존재가 있기 전에 무슨 말이 먼저 있었습니까? 네가 내년 이만쯤에 아들이 있으리라. 약속이 먼저 있지요. 약속이 먼저 있고 약속에 비추어서 합당한 아들이 태어났잖아요.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창세전에 약속이 먼저 있고 그 약속에 맞추듯이 우리가 태어난 것입니다. 그 관계가 창세전에 있는 우리와 현재 우리와 연결되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 언약관계라 하는 겁니다. 고무줄이 굉장히 길지요. 고무줄이 길어서 기다랗지요. 택한 백성 같으면 우리가 미국에 살든, 이라크에 살든, 아프리카에 살든 그 고무줄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왜? 우리 속에 있는 그 말씀 자체가 바로 새로운 공간, 새로운 시간, 새 하늘과 새 땅이기 때문에.
우리 곁에 묻혀있는 옛 하늘과 옛 땅은 그냥 툴툴 털어버리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우리의 추억의 부스러기들이죠. 오히려 지금 우리를 힘들게 하고 스트레스 받게 하는. “내가 옛날에는 잘 나갔는데 옛날에는 예뻤는데” 하는 그런 쓸데없는 그런 것들이 우리를 더욱더 가시처럼 찌르고 있잖아요. 그게 말씀이 버무려버리면 툴툴 털어버린다니까요.
주일날 말씀을 들으면 내가 고민할 것도 없는데 고민했고, 걱정할 필요도 없는 걱정했구나. 지금 내가 살아있는 것이 주님의 힘으로 살아왔는데 나는 내 힘으로 살아왔다고 하니까 오히려 내 힘으로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내 힘으로 살았다는 그것이 하나님이 살린 것마저 질식시키고 답답하게 만들어버려요. 하나님의 작품을 우리가 후작질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의 작품을 내 마음에 안 든다고 내가 구멍을 다 파는 거란 말이죠. 그러다 정 성 안 풀리면 자살해버리고. 아파트 15층 올라가서 뛰어내리고. 빌라 사는 사람들은 죽을 기회도 없어요. 뛰어내려봐야 2층인데. 고층아파트 살아야 뛰어내릴만하지 2층에서 뛰어내려봐야 발만 아프지.
하나님이 말씀이 살아있다는 걸 말씀이 새롭게 창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작품으로 우리를 만들었는데 우리는 말씀 때문에 내가 만들어져 있다는 걸 생각 안 하고 우리는 내 자존심을 위해서 내가 만들어져 거기에 맞추어야 된다고 생각하니까 같은 몸을 두고 하나님은 이렇게 잡아당기는데 우리는 억지를 부려서 내 고집대로 잡아당기니까 나만 찢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택한 백성에게 말씀을 준 것은 이제부터 어떤 것보다 말씀이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모세는 시내 산에 세 번 불려 올라갑니다. 바빠요. 세 번 불려 올라갈 때마다 자기 자신의 기대나 희망사항, 포부를 품고 올라갑니까? 없지요. 그게 바로 기도 아닙니까? 기도란 주님이 주신 것으로 채워야지 기도하기 전에 자기가 원하는 것, 자기가 바리는 것으로 잔뜩 배낭에 넣어서 이것 응답받아야지, 저것 응답받겠다는 것은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이방인이 하는 기도다. 이방인이 하는 기도는 말을 많이 해야 그중에 하나 건질까 싶어서 온갖 것, 여러 가지 상황을 다 거론해요. 그중에 하나만 걸려라. 이런 식으로. 갓바위입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방인처럼 기도하지 마라. 왜냐? 하나님께서는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이미 아신단 말이죠. 너희에게 있어야 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있어야 되는 게 아니고, 우리 자신은 어떤 존재입니까?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아야 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게 살아야 될 그런 너희거든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너희라고 할 때 내가 생각한 나, 나를 위해서 필요한 걸 주는 게 아니고 주의말씀을 드러내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하나님께서 있어야 할 것을 있게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그 뒤에 나오는 말이 뭡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우리가 아버지의 영광을 돌리는데 필요한 것을 줬는데 우리는 마귀의 시험을 받아서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을 그걸 챙겨서 자기 이름을 남한테 과시하는 “나는 이렇게 센 놈이다. 나는 남한테 기 안 죽어. 나는 강자야.” 자기 폼 내는 것에 아버지가 주신 것은 거기다 전부다 집어넣었으니까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것은 어디 갔어요? 없잖아요.
모세가 시내 산 갈 때 배낭에 아무것도 안 가져갔어요. 김밥 두 줄, 오이 들고 등산하기 위해서 소시지, 초콜릿 몇 개 가져간 줄 압니까? 아무것도 안 가져가고 멀쩡하게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빈손으로 내려오지 않았죠. 하나님이 앞으로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실 일을 잔뜩 부여받고 머리에 기억해서 이 땅에 내려왔어요.
그게 뭔가? 출애굽기 20장에 보게 되면, 모세가 첫 번째 올라가서 했던 것이 뭐냐 하면, 죄가 무엇인가를 밝혀내는 항목들이었어요. 20장에 십계명 나오지요. 21장에 보면, 대인관계에 있어서 종들의 관계, 도둑질하지 말라는 그런 것도 나오지요. 저당 잡히는 것도 나오지요. 돈 빌리는 것, 행음하는 것, 소가 사람을 받아죽이면 소를 팔아서 갚는 그런 내용도 나오지요.
이 모든 것이 뭐냐 하면, 인간이란 덩어리가 어떤 식으로 죄를 지상으로 퍼뜨리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율법 없으면 죄가 나오질 않아요.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모든 게 죄라고 드러나는 겁니다.
오늘 본문 24장 12절에 두 번째 올라오라 합니다. 두 번째 올라가서 하는 내용은 뭐냐 하면, 25장에 보게 되면,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하고 ...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과 염소 털과 붉은 물들인 수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 ” 25장 4절부터 쭉 나오죠.
교회 처음 나온 사람들 창세기 읽을 때는 재미있다가 여기 오면 중도 포기합니다. 재미없다고. 내가 미쳤지. 아까운 시간에 이걸 왜 읽어야 되느냐? 우리가 이걸 읽고 안 읽고 문제가 아니고 지금 이 말씀의 식대로 덮쳐지는 겁니다.
제가 어릴 때 이불을 덮고 있으면 그 이불에 있는 촌스런 문양, 목단, 모란 있는 것. 그런 걸 보면서 이게 무슨 아름다움이냐. 누가 이걸 염색을 했어? 누가 그렸지. 생각을 했단 말이죠. 지금 우리가 25장을 이불로 덮고 있는 거예요. 특히 26장, “너는 성막을 만들되 앙장 열 폭을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을 공교히 수놓아 만들지니” 이런 이불을 우리가 덮는 거예요.
27장 봅시다. 진도 잘 나가지요. “너는 조각목으로 장이 오 규빗, 광이 오 규빗의 단을 만들되 네모반듯하게 하며 고는 삼 규빗으로 하고” 이건 뭐냐 하면, 앞에 20장, 21장, 22장은 인간의 죄를 다 끄집어내요. 두 번째 올라갔을 때 이 죄가 어디서 처리되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병 주고 약 주는 거예요. 왜? 살리기 위해서. 이 땅에서 밥 먹고 사는 그건 생명이 아니라고. 그거는 사는 축에 들어가지 않다는 거예요. 그건 사는 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일하고 월급 받고 아이 키우고 피아노레슨 보내고. 그건 사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죽지 못해서 죽기 전에 그냥 해보는 거예요. 할 것도 없어서 그런 것 해보는 거예요. 유세하고 대선 나오고. 5년 내에 반값 등록금 하겠다고 외치고. 그것은 그 인간 죽기 전에 해보는 거예요. 그런 짓하면서 늙어가고 그런 짓하면서 죽어가는 거예요.
어떤 동네에 가면 플래카드가 붙어있어요. 최 아무개 아들 서울 종로경찰서 서장 됐습니다. 아이고. 누구 집 아들 경찰서장된 게 내가 보기에는 누가 화투쳐서 이번에 홍단 됐습니다. 그것과 똑같은 거예요. 아무 의미 없어요. 그 서장들 내년에 퇴직해보세요. 동네 기원에서 바둑 두고 있다니까. 그나마 나이 많아서 직장이나 갖고 있는 사람이 총장 중의 총장 반 총장, 유엔 사무총장. 그 나이에 친구들 다 나왔어요. 벌써. 서울 탑골공원에 앉아있고. 여기는 태화강 변에 아침에 운동한다고 하고. 낮에 술 먹고 엎어져있고. 특별한 일 없습니다. 죽어 가는데 사다리 타기라니까. 결국 죽음에 어떤 코스를 밟아서 동창생들 다 모여서 공동묘지 가면 다 모여 있다고. 울산에 공동묘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거기 가면 옛날 한가락 했던 사람들 다 모여 있어요. 인간은 안개입니다.
인간이 의미가 있으려면 그 의미는 우리가 만들어지기 전에 인간이 처음 나왔던 그 지점에서 의미를 담아줄 때만 의미가 생기는 거예요. 그 지점에서 흘러넘치고 나온 것이 아까 에버랜드 물줄기 있죠. 그 물줄기가 말씀입니다. 사람은 말씀으로 사는 거예요. 말씀의 급류에 쓸려서 사는 거지 말씀 지켜서 사는 게 아닙니다. 사람은 말씀을 지키면 안 돼요. 왜냐하면 말씀을 지키게 되면 말씀 위에 타는 것이 아니고 지가 말씀을 어부처럼 챙기는 게 돼요. 챙긴 그 인간이 죽는데?
“범사에 감사하라”를 우리가 지키는 게 아니고 범사에 감사하다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범사에 감사 못한 인간을 여기다 집어넣어서 예수님께서 범사에 감사하게 맞추도록 만들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성도가, “아, 짜증나.” 이걸 천사가 와서 찍어갑니다. “하나님이여, 울산의 성도 하나가 감사하고 있습니다.”가 되는 거예요. 우리는 찡그렸는데 주님 보시기에는 범사에 감사한 게 돼요. 믿거나 말거나. 왜냐하면, 모든 것이 말씀 되게 하신 것은 우리 몸이 아니고 우리 말고 다른 몸이 있어요.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영이 우리로 하여금 기어이 말씀에 합한 사람 되게 하십니다.
하나의 예를 들게요. 서 목사에게 “네게 준 사람은 끊어지지 않는다.”라고 하죠. 서 목사님은 안 그렇지만 “안 끊기기 위해서 노력해야지.” 이러고 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 말씀은 뭐냐? 환란, 핍박, 기근, 적신, 칼을 안겨 줘버려요. 그러면 서 목사님은 뭘 포기하느냐 하면, 환란, 핍박, 압박이 오게 되면 태풍이 불게 되면 그동안 내가 믿은 좋은 나를 만들기 위해서 애썼던 모든 것을 결국 끊을 수밖에 없어요. 이제는 마지막에 버텨도 환란이 더 세요.
그리고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것은 유혹에 들어가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못 이기기 때문에 유혹이에요.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우리가 이겨버리면 유혹 근처도 안 간 유혹이에요. 괜히 유혹이라고 착각한 거예요. 이길 수 없는 유혹이 온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주에 안 끊어지기 위해서 애썼던 그것은 다 헛수고로 드러나게 만들고 환란 주면서 하는 말이, “그것 봐. 환란, 곤고, 핍박이 와도 내가 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 이제 믿나?” “믿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내가 행했습니다. 이 말씀을 지켰습니다.”가 아니라 믿습니다. 말씀은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친히 지켜서 우리한테 적용시켰다는 사실을 내가 믿습니다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가 할 것은 오직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밖에 할 게 없어요. 집에 문고리가 떨어져도 화나지요. 전화해서 “고쳐주이소. 바쁘다고요? 내일 아침에는 됩니까? 오늘 저녁에 문고리 고장 나서 살겠나. 신경 쓰이는데. 하나님이여, 왜 이렇게 어려움을 주십니까?” 하다가 네가 평소에 네가 받은 은혜는 생각하지 않고 네 자신을 챙기는 것을 믿었어. “너는 그만큼 챙겼지. 나는 이만큼 챙겼어. 너보다 내가 더 많이 챙겼어.” 그것을 믿던 우리를 문고리 하나 떨어지고 형광등 하나 갑자기 가게 만들어서 주님이 우리를 친히 챙긴다는 사실을 그 순간에 깨닫게 하십니다. 하여튼 매 순간에 말씀이 개입 안 하는 순간이 없어요.
초등학교 때 놀이 중에 막대기 하나 세워놓고 흙을 덮어놓고 흙을 많이 가져가는 거예요. 흙을 가져가되 막대기가 넘어지지 않을 정도로 가져가는 거예요. 그래서 누가 흙을 많이 모았느냐로 승부를 내잖아요. 이게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여기까지는 네 것이고 이건 내 것인데 내 소유가 네 소유보다 많을 때 우리는 인생 성공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막대기 넘어지는 건 모르고. 주의 말씀이 왜 넘어지는지 생각도 안 하고 그저 내 소유만 챙길 때 주의 말씀은 어디서 찾습니까? 없지요. 날아가 버렸어요.
그래서 아까 20장, 21장, 22장에 나오는 모든 말씀의 죄는 그 원인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자비로운데 그 자비로움을 상실할 때는 네가 어떤 짓을 해도 자비가 담겨있지 않기 때문에 그게 죄가 된다고 하는 겁니다. 약간 구체적으로 말해서 너희가 애굽에 있을 때 고아였고, 과부였고, 나그네였잖아요. 그런데 네가 약속의 땅에 오고 난 뒤에 갑자기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학대하면 뭘 상실한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와 자비와 긍휼하심을 우리는 내 것 챙긴다고 급급해서 어느새 빠져버렸지요. 그 빠진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 너희 자녀를 고아로 만들고 너희 아내를 과부로 만들겠다. 출애굽기 22장 20절에서 24절까지가 그 말씀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알아요. 너희들이 천국가려면 나의 자비가 필요한데 우리는 자비가 필요한 게 아니고 챙기는 게 필요하거든요. 그래서 주께서는 챙기는 것을 빼고 뺀 그 자리에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집어넣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말씀의 급류를 타서 현재 우리가 느꼈던 그게 사는 게 아니고 그건 죽는 거고 진짜 생명은 계속해서 흘러오고 있다는 흘러온 생명에 거기다 관심 두라고 주께서는 지금도 역사하고 그 당시에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