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강의

전쟁 중

아빠와 함께 2026. 3. 9. 09:35

20260306a 울산강의-역대기하(19강) 22장 3절 : 전쟁 중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역대하 22장하겠습니다.

역대하 22장에 “예루살렘 거민이 여호람의 말째 아들 아하시야로 위를 이어 왕을 삼았으니”라고 돼 있지요. 여기서 아하시야, 이 사람이 유다의 왕입니다. 예루살렘 거민의 왕이에요. 성경에서 이렇게 사람 이름. 특히 왕 이름이 나온다, 왕 이름이 있다. 그러면 왕의 자리가 따로 정해져있다, 이런 뜻입니다. 왕의 위상, 자리가 따로 정해져있고 그 왕의 통치하는 자리가 어디냐? 여기 예루살렘이잖아요. 예루살렘은 현재 수도로 하여 왕국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예루살렘에서 왕의 자리가 있고, 자꾸 일이 일어나서 그 왕 자리가 누구 하나 죽고, 그다음에 그 아들이 왕이 되고, 계속 죽는다 이 말입니다. 왕 자리가 아버지가 왕이면 아들이 왕이 되거든요. 그게 왕의 세습제잖아요. 그런데 그 왕의 자리와 예루살렘이라는 장소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살펴야 돼요.

이 말은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다. 기름 부은 자라 합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 왕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왕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예수님의 왕국은 뭐냐 이 말이죠. 예수님의 왕국은 무슨 왕국이죠? 예수님의 왕국을 흔히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나리’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어려워요. 상당히 어려운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님의 나라가 같은 것이냐, 다른 것이냐, 차이 나느냐, 이런 문제가 생긴단 말이죠.

더 나아가서 하나님 계신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까? ‘아니오’에요. 하나님 계신 곳은 하나님 계신 곳이지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란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가 되려면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있어야 돼요. 그래야 그게 하나님의 나랍니다. 하나님의 왕국이에요.

나라가 있으려면 거기에 왕이 있어야 되는데 나라와 왕 사이에서 어떤 관계가 있느냐? 언약관계가 있어야 돼요. 이 언약관계는 이미 계약서가 성립돼야 되거든요. 그 계약서는 언제 만들어지는가? 창세전에 만들어져요.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계약이 있어요. 창세전입니다. 모든 게 만들어지기 이전에 계약이 있어요.

그 계약서에 의하면 하나님 계신 곳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누가 필요하단 말이죠? 왕이 필요하고, 그 왕은 이 지상에서 계약대로 왕의 역할을 완수했을 때 그 왕은 등장하게 되고, 그 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왕국이 되고, 그것이 바로 천국이 되는 거예요. 지금 머리 나쁜 사람 못 따라오는가 모르겠어. 이 정도는 따라오지요?

제일 먼저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 계신 곳이 곧 하나님의 나라냐? 아니에요. 하나님 계신 곳에 계약이 있고, 그 계약서에 의하면 왕이 등장해야 되고, 왕은 누가 되느냐? 그거는 하나님이 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아드님이 기름 부은 자, 왕이 되는 거예요. 어디에 근거해서? 창세전의 계약에 근거해서 왕이 되는 겁니다. 그게 왕국이고, 그게 천국이고, 그게 하나님의 나라에요.

마태복음 3장 1절에 보면 세례요한이 뭐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다른 말로 하면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했어요. 그럴 때 신학교 신학생이나 교수들이 그걸 마태복음 3장의 이야기를 설명을 안 하고 넘어가요. 설명을 안 하니까 학생들이 묻는 거예요. “교수님, 질문 있습니다.” 교수들이 제일 힘든 게 뭐냐? 학생들의 질문 받을 때 힘들어요. 지가 모르니까 질문 받을 때 제일 난감해요. 그래서 질문 하지 말라는 교수들도 많이 있어요.

학생들은 말씀에 관심 있고, 특히 신학생들은. 목사는 말씀에 관심 없어요. 신학생들은 말씀에 관심 있고, 교수는 목사잖아요. 목사는 이미 말씀에 관심이 떠난 사람이에요. 어디 있느냐? 교회 키우는데 관심 있어요. 교회. 교수 같으면 자기 자리에 관심 있겠지요.

신학기 됐는데 중학교나 고등학교 선생들이 제일 골치 아픈 게 자기 장래나 진로에 관심 있으면 선생들은 아무 문제없어요. 그런데 교과에 대해서 꼬치꼬치 묻는 아이, 물으면 선생님은 진도 나가야 되는데 질문에 답변한다고 벌써 끝나는 종쳐요. 교사 일에 훼방자, 방해자가 질문하는 아이들이에요.

“교수님, 구약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없었습니까?” 그 질문. 교수가 답변을 못해요. 방금 이야기했잖아요. 구약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없습니까? 그러면 교수가 아는 체한다고 멜렉이 어떠니 하고, 하나님의 나라라 하는 것은 통치 개념이고. 아무, 잘 모르면 모른다고 해야지 원어로 밀어붙이면 기죽을 줄 알고. 히브리 언어에서 나라 개념은 통치 개념이고, 그게 어쨌단 말이고?

그러면 구약에는 통치 개념이 있어요, 없어요? 구약에는 통치 개념이 있지. 그럼 하늘나라가 이미 끝났네요. 세례요한이 지금 말 잘못하고 있네. 하나님이 통치하고 있는 상태가 이미 하늘나라잖아요. 그런데 새삼스럽게 하늘나라가 지금은 없지만 가까이 온다, 천국이 가까이 온다는 말은 헛소리 아닙니까?

그 이야기를 제가 신학교 때 품었는데 여러분 가운데 그 질문하는 사람이 왜 없습니까? 관심사가 말씀에 없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거기에 관심이 있어서 그래요? 그걸 제가 지금 밝혀드리고자 하는 거예요. 왕국이 되려면 언약이 있어야 되고, 그 계약서 내용에 왕이 있어서 왕국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나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다’ 이러거든요. ‘예수님 믿으면 천국 간다’ 하는 거예요. 그럼 제가 묻지요. 천국이 어떤 나라입니까? 몰라요. 좋은데. 왜 좋은데? 지옥에서 벗어나서 좋다는 거예요. 그건 니가 좋지. 네가 불구덩이에 안 가고 좋은 데 가면 좋은데 천국의 좋은 점은 그래서 내가 지옥 불에 안 가고, 이제는 천국 묘사돼 있지요. 아픈 것도 없고 괴로운 것도 없고, 생명나무 과일, 열매가 열리고. 자꾸 상상해내는 거예요, 상상.

천국이 좋은 이유는 성경에서 딱 하나에요. 거기에 우리의 임금님이 계시기 때문에 좋아요. 그땐 아픈 것도 없고 괴로운 것도 없고 뭐 소가 여우와 아이가 사자와 함께 뛰놀고. 그렇다면 사자인형 만들어서 뛰놀면 천국이겠네? 뛰놀지 못해서 환장했습니까? 뛰놀지 뭐. 그게 뭐 천국이에요. 절 들으세요. 천국은 왕의 존재가 시작이고 끝이기 때문에 더 이상 내 존재가 어떠냐에 대해서 신경을 안 써도 되는 세계가 바로 천국입니다. 동의하시면 ‘예’ 하시기 바랍니다. 투표할 일은 아니지만.

천국은 ‘내가 얼마나 행복하느냐’가 아니에요. 내가 행복한 세계는 지옥이에요. 내가 행복한 세계가 왜 지옥인지 설명해드릴게요. 우리는 이 땅에서 태어났거든요. 이 땅은 뭐냐? 마귀가 왕 노릇해요. 왕이 없는 게 아니고 왕이 있는데 세상에 악마란 왕이 우리에게 뭐라 하느냐 하면 ‘뭐든지 네 위주로 너 좋은 대로 살아라’ 그걸 우리에게 세뇌시킨 거예요.

고린도후서 5장 15절인가(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더 이상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는 자가 성도잖아요. 그러면 자기를 위해 살려고 계속해서 우리에게 부추기고 독력하고 격려해주는 것은 누굽니까? ①예수님. ②마귀. 몇 번입니까? 마귀지요. “네가 최고다. 최종적으로 너만 챙기면 돼. 딴 것 생각하지 말고.”

질문 하나 할게요. 이란에 전쟁이 일어났다. 테헤란 시민들은 어떻게 사는가? ①나라 걱정한다. ②마트에서 물건 사재기한다. 몇 번입니까? 물건 사재기하죠. 나라고 뭐고 간에 마트에서 자기 아들, 갓난아기 먹일 물건 챙긴다. 이게 인간이에요. 누가 이렇게 시켰어요? 마귀가 시킨 거예요.

이란에서 전쟁 일어났다. 그런데 테헤란에 있는 어떤 사람은, ‘나는 드디어 처처에 전쟁이 일어나고 기근이 있다 하는 때가 이때구나’ 하고, ‘주여 이렇게 전쟁을 일으켜서 우리를 이제는 미국의 미사일 맞고 죽는 것도 주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주의 일로 폭탄 맞아 죽는다 해도 나는 감사하겠습니다’ 이런 테헤란 시민이 있겠지요. 잘 하면 찾으면 있을 것 같아. 머리에 보자기는 안 썼지만 보자기 쓰든 안 쓰든 관계없이. 그런데 드물지요.

그러니까 제가 지옥이 뭔지 설명할 때 지옥은 간단해요. 그냥 울산바닥에서 안 그러면 태어난 데서 살던 식대로 조용하게 행복하게 살면 그게 바로 지옥입니다. 왜? 누가 빠졌어요, 누가 없어요? 자기가 왕이잖아요. 그러니까 자기가 왕인 사람에게 내 존재만 챙기면 되는 것이 지옥이고, 내 존재는 신경 쓰지 말고 예수님이 왕으로 계셔서 그 예수님의 존재가 지금도 어떤 활동을 벌이는가, 거기에 관심 있으면 이미 천국에 들어온 거예요.

자기 존재에 관심 없고 예수님의 존재에 관심 있는 어떤 울산의 노인네가 아침밥만 먹으면 나가서 파크골프 친다. 오다가 보니까 이 동네, 태화강변에 왜 그렇게 골프장이 많은지. 시에서 빌려줬는지 아니면 동호회에서 지 마음대로 쓰는 건지 그건 내가 알바 아니지만 그 노인네가 파크골프 치거든요.

그러면 그 사람은 천국 온 거예요, 지옥 온 거예요? 천국 왔지요. 왜? 파크골프 누가 치게 해줬습니까? 임금님 되시는 주님의 현재적 활동성이잖아요. 이해 안 되십니까?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예수님께서 주신 은혜로 선물이잖아요. 그러면 이미 그 사람은 뭡니까? ‘내가 안 했어. 내가 원한 게 아니야’ 이런 식으로 살아가게 되면 그 사람은 지옥에 속한 사람이에요, 천국에 속한 사람이에요? 천국에 속하심이요.

그 사람은 뭐냐 하면 내가 안 했다는 그걸 통해서 그 사람에게 왕이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왕이 누굽니까? 예수님. 바로 그런 차원에서 세례요한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천국이 가까이 왔다.” 그동안 네가 너를 통치하다가 이제는 너를 통치할 분이 따로 오신다. 그게 바로 구원입니다.

구원은 구출인데 구출이란 말, 개념이 성립되려면 어디서부터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자리가 아니고 거기서 탈출이니까, 탈출하여 지금은 이 자리다. 대조되는 차이 나는 두 개의 지점을 알고 있을 때 구출의 의미가 있지요. 자, 이 지점은 어딥니까? 그동안 나를 위해 살았다. 이 지점은 뭡니까?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주께서 주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뭐든지 주셨다. 그전에는 뭡니까? 나의 존재의 가치와 잘남을 남한테 과시하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의미를 과시하기 위해서 있는 그 자리에서 주께서 나를 탈출시켰다. 그전의 자리는 바로 죄악의 자리고, 지금에 나오는 하나님의 의의 자리다. 이게 바로 구원이잖아요.

예수님의 행적을 따라가면 전에 있던 자리는 지옥이었고 저주였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이 왕이 된 자리는 바로 모든 게 축복이라서 어떤 누구도 이 자리에 있는 나에 대해서 누구도 시비 걸거나 정죄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내가 너희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아무도 너희를 정죄할 수 없다. 그 자리로 옮겨진 것, 이게 바로 구원입니다.

누가 했어요? 자식이 해주던가요, 남편이 해준 거예요, 아내가 해준 겁니까? 누가 해줬어요? 그거는 주님이 해주셨잖아요. 주님이 해줬다는 그걸 그냥 흔한 말로 아무 진정성 없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진정으로 그걸 알고 남한테 그걸 고백한다면 지옥 같은 이 세상에서는 그 사람을 미쳤다고 이야기해요.

“완전히 돌았구나. 너 손이 없어, 발이 없어. 네 인생 네가 알아서 하지 왜 자꾸 보이지도 않는 예수님이 해줬다고 하느냐” 이런 식으로. 그런 핀잔을 받을 때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5장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네가 환란을 당할 때 오히려 기뻐하라. 비로소 너희에게 소망이 있느니라.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평가에 제발 주눅 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누가 돈 좀 있다고 권세 있다고 좋은 집 사고 좋은 차 탄다고 으스대고 자식 공부 잘한다고 할 때 여러분들은 이렇게 해야 돼요. “너는 너를 대신할 왕이 있어, 없어? 난 있어.” 그럼 저쪽에서 뭐라 하느냐? “완전히 미쳤구나.” 그러니까 이거는 너는 너를 대신할 왕이 없잖아. 나는 왕이 있어, 라는 말을 하는 사람도 드물어요. 갈수록. 교회가 없어서가 아니라 성도가 없어서 그래요.

자, 언약관계라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뭐냐? 예루살렘은 다윗언약으로 생긴 곳이에요. 예루살렘은 원래 이방민족이에요. 이방민족인데 언약에 속한 다윗이 이걸 접수했어요. 접수하고 난 뒤에 여기다가 뭘 세웠느냐 하면 왕이 되신 하나님과, 그때는 하나님이 왕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이 왕이에요.

그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데 여호와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제공하신 분이고, 그 제공하셨다는 말은 알아서 지키라는 게 아니라 던져놓고 던져진 그것을 다시 완성 형태로 회수하는 책임을 지는 하나님이 여호와 이름이에요. 옛날 초등학교 애들 놀이할 때 1, 2, 3, 4, 5, 6, 7, 8 천국 계단이라 해서 있지요. 그게 <오징어게임2>에 보면 나와요.

언약을 먼저 던져놓고 자신이 던진 언약을 그 언약 하나하나를 다 성취해 나가시는 하나님. 성취하다보면 얻어걸린 자가 누구냐 하면 성도지요. 성도, 백성, 부산물. 성취할 때 인간이 모르는 체 악마와 주의 이름이 싸움을 해요. 전쟁을 해요. 전쟁을 함으로써 악마에 포로 잡힌 자를 되찾는 작업을 구원 작업이라 해요. 주의 이름으로 구원을 했습니다.

이게 출애굽기 15장에 나와요. 주는 하나님의 이름은 용사시라. 전쟁하는 분인데 우리를 애굽에서 건져냈다. 포로 잡혔는데 건져냈다. 출애굽할 때 히브리인들이 포로 잡혀있었잖아요. 문제 내겠습니다. 히브리인 중에서 포로 잡히지 않은 사람은 누구 게요? 딱 한 사람 있어요. 히브리인들은 다 노예에요.

그런데 노예인데 노예에서 벗어나서 노예가 아닌 딱 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굽니까? 왕궁의 왕족으로 돼 있는 모세지요. 모세만이 같은 히브리인인데 노예가 아니에요. 그런데 모세가 착각해서 자기가 히브리인 같은 동족을 도와주다가 누구한테 뒤집기 당해서 욕을 얻어먹습니까? 네가 재판장이냐, 해서 애굽에 있는 히브리인들 도와주려다가 오히려 덤터기 써서 쫓겨나가지요. 추방됩니다.

그때 하나님이 찾아와서 추방된 모세, 이미 본인은 해방됐는데 그 백성들은 해방되지 않는 상태에서 해방이 먼저 된 모세를 해방되지 않은 히브리인에게 다시 집어넣는 그 작업을 하는 그때 모세가 하나님께 묻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뭐라고 해야 됩니까?” 그때 바로 나의 이름은 여호와,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뭐냐 하면 내 이름 알려줄게. ‘내 이름 없다’가 내 이름이야. 스스로 있기 때문에. 누가 있어서 만들어진 이름이 아니죠. 스스로 계시기 때문에 그게 이름이에요.

그러니까 만들어져서 있는 이름은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불러요. 하나님의 이름을 못 부릅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부르려면 주의 이름을 한 단계 거쳐서 불러야 돼요. “이제부터 나의 이름으로 불러라. 아버지를 찾아라.” 이 말은 뭐냐? 네 이름 말고. 스스로 있는 자는 그 어떤 관계 속에서 스스로가 다 연결되는데 그게 뭐냐? 창세전의 언약관계에 들어와야 스스로의 혜택을 다 같이 누릴 수 있어요.

그런데 창세전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의 그 세계에 들어가려면 하나님과 아버지만 아는 택한 백성이라는 그것은 그분만 알아요. 몰랐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통해서 주님 안의 내용이 있는데 뭐냐? 창세전의 내용이에요. 주님은 일종에 아버지가 보낸 택배거든요. 택배 안의 내용이 우리에게 당도해서 뜯어보니까 이미 우리는 예수라는 왕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백성되기로 창세전에 이미 예정돼 있었다는 거예요. 에베소서 1장 4절.

그러니까 지금까지 설명한 것은, ‘나라가 있으니까 왕이 있겠지’ 나라가 있어서 왕이 있는 게 아니에요. 나라가 있으니까 왕이 있겠지, 하는 것은 어디 있느냐 하면 예루살렘 중심이 아니고, 예루살렘이 빠져있는 나라들은 사람 모이면 투표해서 왕 만들면 되잖아. 하나님의 뜻은 이겁니다. 미국 대통령 트럼프 생각과 똑같아요. 차기 후계자 세우기만 해봐라. 죽여 버린다. 하메네이 작살냈잖아요.

그다음에 후계자가 누구 되든 상관없어요. 왜냐? 예루살렘이 빠져있으니까. 예루살렘이 빠져있다는 것은 다윗언약이 빠져있으니까. 다윗언약이 빠져있는 이거는 공격대상이지 구원대상이 아니에요. 이 구약적인 지평적인 하나의 모형은 신약에 와서 어떻게 되느냐 하면 왕이 있는 자는 건지고 왕이 없는 자는 하나님께서 내친다는 그 원리에요. 왕이 있는 자만 건져요. 왜? 왕이 있는 곳에 백성이 있기 때문에. 그럼 백성은 뭐냐? 백성은 왕이 만들어요.

성경과 관련해서 신앙생활하면서 그걸 이해할 때 제가 하나의 원칙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뭐냐 하면 항상 바꾸어서 생각해야 돼요. 예를 들면 나는 어떻게 기도합니까, 또는 나는 어떻게 전도합니까, 어떻게 성경 읽습니까, 어떻게 예배드립니까, 어떻게 헌금합니까? 이런 질문을 하는데 제가 수백 번 이야기했는데 여기서 또 이야기합니다. 이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백성은 질문할 자격이 없어요. 성경에 나오는 기도, 전도, 성경, 예배, 찬송, 회개 뭐든지 그건 담당자가 누구에요, 책임자가 누굽니까? 백성이 아니에요. 누굽니까? 왕이잖아요. 그러면 이래돼요. 예수님이 기도케 하십니다. 이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예수님이 전도케 하십니다. 이러면 끝나는 문제라고요.

오늘 아침에 성경 좀 볼까, 하는데 누가 성경 보게 하십니까? 주께서 성경 보게 하시는 거예요. 성경 좀 보려하는데 창문 열었는데 먼지가 날려서 눈에 들어가면 ‘오늘 성경 안 볼란다’ 이러면 못 보는 거예요. 노방전도 나가려는데 갑자기 오십견 생기고 관절이 안 좋고 해서 오늘 필라테스 가서 몸 좀 추슬러야 되겠다. 이거는 모든 일은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시는 겁니다.

결혼할 때가 됐는데 남자 한 번 찾아볼까? 그러면 사회에서는 예루살렘이 빠진/없는 곳에선 어떻게 됩니까? 언약이 없는 곳에선 어떻게 됩니까? 어느 프로그램에 나가면 됩니까? 솔로에 나가면 되지요. 솔로에 들어가는 것도 수십 대 일이 넘어요. 이건 남자, 여자 찾으려는 게 아니고 연예인 되려고 가는 사람들이에요. 지 얼굴 폼 내면서. 사는 게 재미없으니까. 내가 이렇게 말 잘하고 주변머리 좋다는 걸 보이는 그런 건데 완전히 연예인 다 된 거죠.

인간은 이미 악마에 의해서 나를 위해서 살기 때문에 ‘나는 어떻게 기도합니까?’ 그럼 교회 목사는 이렇게 기도하세요, 하잖아요. 그러니까 교회 목사가 뭐 한 거예요? 마귀 앞잡이가 된 거예요. 주께서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것 듣고 만족스럽지 않아요. 그래도 시작은 내가 해야 되지 않습니까? 차이를 두지요.

왕 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기도의 개념과 내가 시작하는 기도의 개념에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하면 나는 기도할 때 어떤 효과나 결과를 미리 내기 짐작해요. 기도해서 이것 챙겨야지, 이런 식이에요. 그런데 막상 주께서 하는 기도를 보게 되면 내 기도를 작살내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는, 내가 원하고 내가 살아온 모든 것.

이걸 십자가로 일목요연하게 이야기하면 너는 죽었고 나는 살았다는 사실을 죽은 네 속에 담겨 되면 죽은 너희도 살았다가 돼요. 너는 죄인이고 나는 의인인데, 나는 죄인이고 주님은 의인이라는 사실을 담고 있으면 그 사람은 뭐가 돼요? 의인 되는 거예요. 참 쉽지요. 결과적으로 굉장히 쉬운 거예요.

그러면 다시 진도 나가보겠습니다. 역대하 22장 1절에 예루살렘 나오는데 예루살렘 이야기가 이게 분위기 좋지 않아요. 22장에서 분위기가 좋지 않은 이유는 21장에서부터 이미 예루살렘이 있는 곳인데 예루살렘에 있는 유다 나라에서 북이스라엘화 되고 만 거예요. 나라가 북이스라엘처럼 다시 말해서 예루살렘이 없는 쪽, 형식으론 이스라엘 전통이고 율법이고 있지만 예루살렘이 빠져있는 그런 북이스라엘, 약간 이단인 사이비적인 이스라엘이죠. 북이스라엘 쪽에 완전히 정신적으로 유다가 점령됐어요.

그 21장에 나오는 왕이 누구냐 하면 여호람이에요. 여호람은 누구 아들이냐 하면 여호사밧의 아들이에요. 여호사밧은 뭐 하는 사람이냐 하면 아합 왕과 사돈 맺으면서 굉장히 친하게 지낸 사람이에요. 북쪽과 친하게 지냈던 남쪽 여호사밧, 친하게 지낸 이유가 있어요. 뭐냐 하면 남쪽 유다가 굉장히 잘 사니까 못 사는 나라 깔보기 위해서 친하게 지낸 거예요.

그러면 아합 왕은 어떤 존재냐 하면 부인이 있어요. 이 세상에 몽땅 다 아내한테 세뇌당한 최고로 유명한 사람이 아합 왕이에요. 아합 왕의 부인 이름이 이세벨이에요. 이세벨은 수입품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쉬워요. 아합 왕은 겉으로는 여호와 믿는데 시집온 여자와 결혼했는데 여러분 상상해보세요.

예식장이나 교회에서 결혼식 할 때 ‘신부입장’ 하면 순백의 드레스 입고 와야 되잖아요. 그런데 신부가 차도르로 눈만 동그랗게 내놓고 전신을 시커멓게 덮은 여인이 들어왔다고 생각해봅시다. 여기는 여호와 믿는 언약의 백성들이 그것도 일반서민이 아닌 왕의 결혼식인데 옆에 차도르로 시커멓게 해서, 이스탄불 가면 그런 여자들 많데요. 온 전신을 시커멓게 해서 눈만 내놓고 눈도 가려요.

시커멓게 했다는 이 말은 뒤집어쓴 그 여자 입장에서는 유리한 점이 있어요. 뭐냐 하면 남은 못 봐도 본인은 다 보고 있거든요. 그래서 불편한 게 아니고 신나. 움직이는 장갑차잖아요. 움직이는 탱크 아닙니까. 탱크 특징이 뭐예요? 바깥에선 내부를 못 들여다보니까 안쪽에서는 사방을 다 보고 있어요. 다 보고 있으니까 포탄을 쏠 게 아니겠습니까. 감추면서 다 보고 있는 그런 묘지, 여러분들도 써볼래요? 테니스나 축구 하는데 약간은 불편하겠지요. 그것으로 필라테스 하려면….

그러나 본인은 신비주의로 무장할 수가 있지요. 벗는 여인은 천박하다는 소릴 듣지만 이걸 다 뒤집어쓰면 고귀한 여인이라고 오히려 추켜세우니까 그건 덤으로 챙기는 자기 위안이 되겠지요. 바로 이세벨은 노골적으로 이걸 다 뒤집어쓰고, 그게 그 당시는 이슬람이 없어서 그런데 바알종교거든요. 본격적으로 바알의 여전도사로 시집왔어요. 북이스라엘을 그리고 아합 왕은 바알에 미쳐있는 그 여전도사한테 흠뻑 빠졌어요.

빠진 이유가 뭔지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냥 설이에요. 뭐 가짜뉴스일 수도 있고. 북이스라엘에 시돈이라는 막강한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에 대해서 방비하기는 힘이 부치고 차라리 그 딸을 자기 부인으로 삼으면 설마 자기 귀한 딸이 있는데 그걸 칠까, 라고 해서 외교적으로 국방비를 절약하기 위해서 그렇게 할 수도 있는 문제겠지요.

그런데 여기에는 공짜가 아니에요. 조건이 있어요. 뭐냐 하면 북이스라엘 전체가 파견된 바알 여전도사 말대로 바알종교로 하나가 될 때 사돈끼리 강력한 평화가 유지된다는 그런 조건 하에 아합은 바알 나라가 된 겁니다. 그렇다면 북이스라엘이 있는 땅 있잖아요. 부동산, 땅은 누구 것입니까? ①북이스라엘 것. ②유다 것. ③하나님 것. 몇 번입니까? 하나님 것이죠.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라고 준 땅이잖아요. 자기 소유가 아니에요.

이거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배받고 상속받은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 쪽에서 가만있겠습니까? 가만 안 있겠지요. 등장한 선지가가 누구냐? 엘리야 선지자에요. 엘리야가 등장함으로써 아합의 친바알 정책, 또는 바알을 국교로 만드는 모든 정책이 저지당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대해서 바알종교는 바알종교다운 발상을 하게 돼요. 뭐냐 하면 ‘여호와를 죽여라’ 이렇게 되는 아니에요. 뭘 합니까? ‘엘리야를 죽여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 차이가 커요.

여호와를 죽여라, 이게 아니고 뭘 죽여라? 엘리야를 죽여라. 그러면 엘리야는 뭡니까? 여호와의 적, 보이지 않는 여호와의 원수가 있어요. 바알은 우상이기 때문에 적수가 아니에요. 신약에 와서 등장하죠. 여호와의 적이 누굽니까? 창세기도 마찬가지에요.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의 적이 누구에요? 악마지요. 뱀이잖아요. 요한계시록 12장에 그 뱀이 나와요. 옛 뱀, 용이 나온다고요.

여호와를 죽여라가 안 되고 그들은 뭐냐? 엘리야를 죽여라고 하는 거예요. 그럼 엘리야는 뭐냐 하면 나라가 둘로 쪼개지고 최초로 등장하는 선지자가 돼요. 남북을 다 관장하는 최초의 선지자, 남쪽만 하는 게 남북을 다 하는 선지자. 지난 수요일에 도자기 깨진다는 이야기했지요. 도자기가 깨져야 도자기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안다고. <대머리야>란 제목의 설교에서 했습니다.

엘리야를 죽여야 되지요. 그럼 엘리야는 뭡니까? 이 땅에서 바알이 있는 곳에 엘리야는 죽음의 대상이 되고 쫓겨나가겠지요. 거기에 대해서 엘리야는 저한테 죽느니 차라리 어떻게 하겠다? 내가 내 손으로 죽겠다고 나오지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고난 받는 선지자 속에서 잉태되는 언약의 왕, 바로 메시아의 활동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겉으로는 선지자, 안에는 누가? 메시아, 장차올 왕, 천국의 주인공의 활동성이 이 땅에서는 어떻게 온다? 고난 받는다.

그래서 고난이 없으면 환란이 없으면 성도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고린도후서나 신약성경 편지에 보면 그냥 계속해서 나옵니다. 특히 빌립보서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항상 기뻐하라” 이게 무슨 뜻이에요? 기뻐하란 말은 뭡니까? 복음만 포기하면 기쁘다는 것이 세상에서 이야기하잖아요. 복음으로 인하여 기쁘다는 건 뭡니까? 이거는 성령 안에서 하는 이야기에요.

복음으로 왜 기쁘냐? 주님이 받았던 그 환란의 연속성으로 거기에 가담돼 있으니까 네 위상, 네 소속, 네 자리가 보통 자리가 아니고 플러스알파, 초과적인 자리,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 주께서 추가적으로 제공한 자리가 복음으로 인하여 고난 받고 환란 받는 자리가 되는 거예요. 어떤 강의에서 이걸 lock 걸렸다고 이야기했는데, ‘나는 예수님이고 뭐가 다 귀찮고 내 식대로 사는 게 제일 본성에 맞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해요.

모든 인간들은 그냥 성경이고 뭐 다 덮어버리고 교회도 안 나가고 나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내 속에 내게 딱 맞아, 그건 저나 여러분도 마찬가지에요. 마찬가지인데 락이 걸렸어요. 무슨 락? 성령의 락이 걸렸다고요. 십자가에 걸려서 ‘아서라 말아라. 너는 네 마음대로 못해’ 주님의 왕이 이제 사나죽으나 나를 위해서 못 살도록 자물쇠를 걸어놨어요. 그게 바로 고난의 영,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이잖아요.

교회 안 나가는 교회 다니는 아내한테 자꾸 뭐라고 불평을 해요. 남편이 이렇게 힘들고 아픈데 교회 가지 말고 날 좀 돌봐주면 안 돼? 나도 너 밥 먹여준다고 엔간히 애썼는데 너도 교회 그만두고, 교회 많이 다녔잖아. 너도 성경 많이 아니까 아는 것으로 때우고 나와 같이 여행, 이태리나 시칠리아 여행 다니면서 좀 놀자. 파크골프하든지 안 그러면 돈 좀 쓰는 것 하며 같이 놀자.

이렇게 할 때 어떻게 답변해야 돼요? 나한테 해준 건 배려잖아. 나도 가정을 건사한다고 몸 다 망가지도록 돈 벌었는데 내 쉴 때 같이 여행 다니면 좋지 않겠느냐 할 때 뭐라 해야 됩니까? “나도 그러고 싶은데 이게 내가 락이 걸려서, 나도 그러고 싶어. 그런데 나를 창세전부터 예정하고 선택하신 분이 나를 위해서 살지 못하도록 그렇게 조치를 하네.”

그러면 퇴직한 다음에 뭐라 하느냐? “아아 진짜 인간적으로 그래 나오면 안 되지. 참 섭섭하다. 나 너한테 큰소리 안 하는데 여기서 진짜 큰소리 하고 싶다 정말. 인간적으로 왜 대화가 안 되냐.” 그때는 뭐, “그것 왜 그런지 알아? 내가 선지자거든. 그만하자” 이야긴 그걸로 끝나버리죠.

이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인간이 어떻게 개판이 되고 엉망이 되는 그 현장에서도 언약은 포기된 적이 없고 멈춘 적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죠. 르호보암 왕에는 스마야가 꼭 지적을 해요(역대하12:5,7). 이 왕 저리가 예루살렘 왕 자리잖아요. 그리고 아사 왕에는 하나니, 여호사밧에게는 미가야, 예후에는 아하시엘. 미가야 선지자는 여러분 아시죠. 사백 대 일로 붙은 선지자.

그리고 엘리야 선지자의 기능이 엘리사를 통해서 다른 선지자를 통해서 분산됩니다. 최초의 대표적 선지자가 엘리야기 때문에. 나라가 깨지고 난 뒤에. 그전에는 모세가 대표적 선지자고요. 마지막 때에 모세 같은 선지자 나타나기를 원한다, 이랬으니까. 선지자로 인하여 모세로 인하여 나라가 생겼고 나라가 두 쪽 나면서 엘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나라는 깨진다 할지라도 언약은 깨지지 않는다. 언약이 깨지지 않으면 천국은 이뤄지는 거예요.

인간적으로 생각하는 그러한 이스라엘은 깨지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라가 어디 있느냐 하면 마지막 인간적으로 생각했던 나라가 유다 아닙니까? 그러면 만약인데 메시아가 핍박을 받았는데 어느 나라에 핍박받겠습니까?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인간적 나라가 어느 나라에요? 유다지요. 그러니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유다에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게 돼요.

이로써 더 이상 이 세상에는 나라 같은 나라는 한 나라도 없다. 어떤 나라도 없어요. 어떤 나라도 없는데 인간들은 내 나라, 내 나라 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너희의 시민권은 하늘에 없다는 표시밖에 안 되는 거예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지 땅에 있는 게 아니에요. 이것을 염두에 두면서 그러면 어떻게 이 북쪽 바알이 남쪽 유다까지 접수하느냐? 그거는 10분 쉬고 합시다.

 

 

 

20260306b 울산강의-역대기하(19강) 22장 3절 : 전쟁 중
(강의:이근호 목사)


역대하 20장 15절 보겠습니다. “야하시엘이 가로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찌어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그렇게 돼 있지요.

전쟁의 특징은 뭐냐? 승패가 날 때까지 계속 된다는 거예요. 승패가 있다는 거예요. 어떤 결과가 있는데 그 결과는 누가 승자고, 누가 패자인지 나눠질 때까지 기필코 기어이 거기까지 가야 되는 거예요. 전쟁의 본질은 승패가 갈린다는 거예요. 나눠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전쟁은 사람에게 속한 전쟁이 아니죠.

전쟁은 승패가 있다. 그러면 이 전쟁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지요. 하나는 사람이 보는 견해와 하나님이 보시는 견해가 있을 것 아니겠습니다. 그런데 아하시엘 선지자가 뭐라고 합니까? 이것은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고 어디 속했다? 하나님께 속했다. 그럼 사람이 견해는 어떻게 돼요? 지워야 되겠지요.

사람이 보는 전쟁의 의미를 지워버릴 때 여기서 뭐도 같이 지워지느냐 하면, ‘이 전쟁으로 인하여 내게 돌아오는 이익은 무엇입니까’ 이게 어떻게 돼요? 이게 날아가 버려야 돼요. 예수 믿고 난 뒤에 나한테 돌아오는 이익은 뭡니까? 이게 날려버려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날려버리는 방법은 뭐냐? 하나님이 쓰시는 방법은 인간의 방법으로 전쟁에 승리할 수 있는 모든 구비조건을 다 없애버려요.

이쪽에 숫자가 이만이천이다. 이 정도면 싸울만하다. 그때는 다 나가라 해. 다 나가고 삼백 명만 남게 해요. 저쪽은 십삼만 오천 명. 삼백 명과 십삼만 오천 명, 이게 게임이 됩니까? 광야에서 모세가 들었던 것은 달랑 지팡이. 여호수아가 백날 전쟁해도 소용없어요. 지팡이 내려가면 지게 돼 있어요. 전쟁이 이렇게 인간들이 생각하지 못한 하나님의 전쟁의 특징은 인간들이 생각하고 대비하려는 전쟁에서 도저히 생각날 수 없는 다른 요건들이 이 전쟁에다 집어넣는 겁니다.

민수기 22장에 가면 발람 선지자 나오지요. 저주하려고 가는 발람 선지자의 앞길을 막은 자가 어떤 존재였습니까? 천사와 같지만 나타난 모습은 나귀죠. 발람 선지자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이걸 실험해보세요. 집에서 개나 고양이를 키우는데 개 밥그릇을 치우니까 보통은 깨갱하든지 왕왕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인공지능 달린 것도 아니고 갑자기 표준말로, 그것도 한국 훈민정음에 기초한 대한민국 언어로, “주인님, 왜 제 밥그릇을 치우십니까?” 이거는 밥그릇이 문제가 아니고 기절할 거란 말이죠. 주인님이 저를 키우시는 것은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고 말을 해버리면 더 기절이란 말이죠.

왜 그런 이야기를 성경에서 이렇게 벌어지게 하느냐 하면 자꾸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가 없다고 여겨요. 하나님의 존재는 인정하되 활동하지는 않는단 말이죠. 왜? 활동은 인간들이 하니까. 인간들끼리 활동하면 그게 세상이기 때문에 그런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21장에 아까 여호사밧은 아합 왕과 친하게 지냈다고 했지요. 사돈 관계로. 그러면 아합 왕과 이세벨 사이에 낳은 딸이 있어요. 그 딸이 여호람의 부인입니다. 여호사밧의 부인 이름은 성경에 안 나와요. 여호사밧이 죽고 그 아들 여호람이 왕이 되는데 그 여호람의 부인이 아달랴가 됩니다. 아달랴가 된다는 말은 차도르 뒤집어쓴 그쪽 사람이 여기에 시집을 온 거예요.

그러면 이러한 혼사가 이뤄진다는 말은 결국 친하게 지내지 말아야 될 나라와 여호사밧이 친하게 지냈다는 데 벌써 문제가 생기지요. 여호사밧은 나름대로 뭘 잘해보려고 했지만 이 여호사밧에게는 미가야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기야 선지자만 있었던 건 아니에요. 엘리야 선지자 다음의 엘리사입니다. 엘리사가 해야 될 일에 대해서 열왕기상 22장 40절에 이렇게 돼 있어요.

성경에서 이런 것 찾으려면 복잡한데 열왕기상 22장 40절에 보면, 이건 아합 다음에 아하시야가 태어난 이야기고요. 엘리야에게 예언한 게 있어요. 열왕기상 19장 15, 1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로 말미암아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흘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엘리사에게 기름을 붓는데 기름 붓는 자의 역할이 있어요.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17절) 하사엘은 누구였습니까? 아람 왕이죠. 아람 왕의 칼을 피하는 자는 누가 죽이고? 예후가 죽이고,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는 누가 죽인다? 엘리사가 죽인다.

결국은 엘리야에게 하나님이 예언한 모든 내용은 지금 하나님께서 전쟁 중이란 걸 나타내요. 전쟁은 반드시 뭐가 있어야 된다고 했습니까? 승패가 결정 나야 돼요. 승패가 결정 날 때까지 계속해서 밀어붙이는 겁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전쟁이기 때문에 여호와에 대한 적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 적을 누가 만드는가? 하나님의 예언이 하나님의 말씀이 여호와의 적이 누군지를 하나둘 씩 만들어내기 시작한 거예요.

그 만들어내는 데 누가 걸려들었는가? 여호람이 걸려든 거예요. 왜? 여호람의 부인이 누구 딸이에요? 이세벨의 딸이에요. 아합의 딸이고. 부부사이니까. 그 딸인 아달랴가 드디어 유다 왕 여호람을 장악했습니다. 그러면 일단 전쟁에서 누가 승리했습니까? 여호와를 누가 이겼습니까? 바알이 이긴 셈이 되지요. 이게 바로 여호와께서 유도한 거예요.

북쪽과는 달리 남쪽에는 예루살렘에 언약이 있으니까 ‘이 언약의 맛 좀 볼래? 네가 슬슬 멋도 모르고 기어들어오고 있지?’ 그렇게 하면서 유도한 나라에요. 그러니까 북쪽 이스라엘이 바알을 섬기든 무슨 난리를 치든 거기는 예루살렘이 없어요. 다윗언약이 없기 때문에 그냥 방치하듯이 두는데 땅은 여호와의 땅이지만.

이게 바알이 겁도 없이 이제는 북쪽 먹고 이젠 어디까지 침범했다? 남쪽까지 침범한 거예요. 예루살렘이 있고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장소, 성전이 있는 곳까지 발을 들여놓은 거예요. 선을 넘어버린 거예요. 선을 넘었을 때 북한에서 남한으로 6‧25 전쟁하듯이 그들이 밀고 들어온 거예요. 그런데 그 밀고 들어오는 그 모든 일까지 하나님께서 이미 엘리야에게 예고조치 다 한 겁니다. 다 예언한 거예요.

여러분, 해와 달과 별, 멀쩡하잖아요. 지금도 우리가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보지요. 그런데 지난 보름날 달빛이 어땠습니까? 붉었어요. 개기월식, 달이 붉었습니다. 제가 직접 봤습니다. 달이 누구한테 얻어맞았는지 벌겋습니다. 이게 정상이 아니지요. 이게 신약에 나와요. 해도 달도 다 떨어져요. 빛을 잃어버리고 마치 창세기 1장을 대조하면서 창세기 1장의 생생한 그 빛이 아니란 말이죠.

그러면 지금부터 이야기할 이 문제를 바알이 멋도 모르고 함정에 빠질 때 우리가 뭘 생각하느냐 하면 이걸 생각해야 돼요. 크게 쓰겠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냐?’하는 겁니다. 역대하 21장을 보겠습니다. 약간 지루하더라도 참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스멀스멀 북쪽 바알이 여호람을 통해서 남쪽까지 접수합니다.

5절에, “여호람이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삼십 이세라” 어디서 통치합니까? 예루살렘에서 팔년을 통치하지요. “저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으니 이는 아합의 딸이 그 아내가 되었음이라” 아달랴입니다. 이세벨 그 어미에 그 딸이에요. “저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다윗의 집을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음은”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지금 전쟁 중인데 아달랴는 전쟁 중이란 사실을 몰라요.

그런데 21장 8절 봅시다. “여호람 때에 에돔이 배반하여 유다의 수하에서 벗어”났어요. 그리고 1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과 구스에서 가까운 아라비아 사람의 마음을 격동시키사 여호람을 치게 하셨으므로” 자,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여호람이 됐다 칩시다. 이걸 생각해봅시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냐’에요. 이걸 오늘날 버전으로 바꾼다면 우리가 하루하루 사는데 도대체 문제가 뭐예요?

성경 덮고 성경 모른다 치고 교회도 안 나간다 치고 근원적으로 내 인생에 문제가 뭐냐? 내 인생에 누가 태클을 걸어요? 태클 거는 사람도 없는데 행복합니까? 도대체 내 인생의 문제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이호선 교수부터 시작해서 사자머리 정신과의사부터 해서 계속해서지금 끄집어내는 게 뭐냐 하면 너무나 문제가 많다는 거예요. 또 심리학 가르치는 사람 있잖아요. 남자, 김창옥인가.

도대체 그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하지만 그 외에 많은 모든 예능프로가 되지도 않은 상담 쪽으로 나가요. 심지어 개그우먼도 나와서 공개적으로 상담한다고 하니까. 근본적으로 제가 묻는 질문은, 도대체 우리가 사는 인생에 문제가 뭐예요? 도대체 무슨 문제입니까? 누가 이걸 한꺼번에 이게 문제라고 답변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21장 8절, “여호람 때에 에돔이 배반하여 유다의 수하에서 벗어”났지요. 그러면 뭐가 정상이냐 하면 에돔이라는 민족은 유다의 지배를 벗어나면 안 돼요. 왜냐하면 다윗 때 안 벗어났으니까. 솔로몬 때 안 벗어났어요. 왜? 그때는 뭐가 작동했습니까?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약속, 다윗언약, 언약이 정상적으로 작동한 거예요. 그래서 주변에 있는 모든 민족을 다 접수했는데 이거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한 그대로 된 거예요. 네가 밟는 모든 민족들을 너희들의 종으로 삼고 부릴 것이고 지배할 것이다.

이것은 바로 야곱과 에서 가운데서, 에돔이 누구 후손입니까? 에서 후손 아닙니까. 에서와 야곱은 형제간이잖아요. 쌍둥이잖아요. 누가 한 때 형이었습니까? 에서가 한 때 형이었지요. 그때 아버지가 눈이 어두워서 축복할 때 엉뚱한 동생한테 축복했잖아요. 그때 야곱을 축복하면서 내용이 뭐냐 하면 형은 동생에게 지배를 받고 종처럼 정처 없이 돌아다닐 것이다, 이렇게 했어요.

이거는 이삭에 대한 이스마엘의 운명도 마찬가지에요. 특히 이삭 같은 경우에는 잉태치 못한 아들이고, 이스마엘은 인간의 육으로 잉태가 된 자잖아요. 육에 대한 누구의 공격? 잉태치 못한 자의 공격, 이 전쟁을 언약을 앞장세우는 하나님의 전쟁. 그 전쟁은 어디서 이미 작성되었다? 창세전에 작성하고 그다음에 창조세계를 만들어놓고 창조의 전의 언약을 창조세계 속에 적용시키는, 하드웨어에 소프트웨어를 작동시키는 그 방법을 하나님이 사용하신 거예요.

다시 묻습니다. 도대체 이 세상 내 인생에서 전부 다 상담한다고 바쁜데 도대체 근원적인 문제가 뭐냐? 언약의 하나님을 모르지요. 교회 다니면서 하나님을 믿는데 뭐가 빠졌어요? 언약이 빠졌어요, 언약의 하나님이 빠졌어요. 언약은 말씀이지. 말씀 지키고 실천하면 되지 않느냐? 언약은 지금 완성태로 주어지지요. 그때는 율법이었지만 지금은 뭐냐? 십자가로 주어지지요.

결국은 뭐가 문제냐? 나와 십자가를 안 바꿔서 문제에요. 모든 것은 문제가 없는데 우린 자꾸 나 존재가 우선이다 보니까 아무 문제없는데 자꾸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의 해결책은 뭐냐? 문제 있다고 여기는 내 인생에 항상 문제는 터지게 돼 있고, 내가 조용한 가운데도 앞으로 무슨 사건이 터질지 모르고 불안 불안하다 하는 문제 있는 나를 주께서는 일부러 철저한 내 인생 위주로 살도록 그 문제에 발을 들여놓게 만들어요. 이 수법을 쓴 겁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나라 유다에 북쪽 바알종교가 한발, 두발 정도가 아니고 완전히 접수하도록 만들어버리는 일을 일으켜버려요. 그게 바로 아달랴, 여호람 때에 하나둘 씩 해체된 과정 뭐냐? 언약이 언약관계가 인간적 보기에 하나님 언약 잊어버리지 않았지만 선지자에게 있지만 언약적인 결과물이라고 여겼던 유다나라는 서서히 하나둘 씩 떨어져나가요. 블레셋 떨어져나갔지요, 에돔 떨어져나갔지요.

그다음에 21장 17절, “그 무리가 올라와서 유다를 침노하여 왕궁의 모든 재물과 그 아들들과 아내들을 탈취하였으므로 말째 아들 여호아하스 외에는 한 아들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여호아하스라는 아들 이름이 성경에서 복잡하게 나와요. 역대하 21장 17절에는 여호아하스에요. 그런데 22장에 넘어가면 아하시야란 이름입니다. 그다음에 22장 6절에서는 아사랴로 나와요. 셋 다 동일인물 똑같은 인물이에요.

그래서 성경 보는 사람들은 도대체 정리가 안 돼요. 이 사람은 누구고, 이 사람은 누구고, 이 사람은 누구고? 셋 다 똑같은 사람이에요. 일부러 이름을 세 개 사용해서 사기 치려는 건 아니고요. 그만큼 유다나라의 정세가 혼란스럽다는 거예요.

전쟁이란 보이지 않는 열이 생겨나는 현상이에요. 그 열은 숨겨진 혼돈과 혼란의 잠복된 열, 에너지. 물리적이 아니고 수사적으로 말하면 이렇단 말이죠. 창세기 1장 1절에 뭡니까? ‘혼돈’이 있지요. 그 혼돈이 사라진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창조에 덮여있어요. 땅이 생기고 그다음에 바다가 생겼을 때 혼돈이 없어진 게 아니고 바다 속으로 들어가지요.

노아홍수 때 바다고 땅이고 다 하나가 됐잖아요. 노아홍수 때 신기한 게 아무 잘못도 없는 육지의 짐승들, 하늘의 새가 죽어요. 그들이 무슨 잘못한 게 있습니까? 노아홍수는 경상도 말로 뒤비부렸다. 왜냐하면 노아홍수의 특징은 하늘에서 비가 오는 게 아니고 땅에서 비가 온다는 거. 땅에서 샘이 터져버렸어요.

샘이 터지고 수증기 되어 위에서 비 내리고 완전히 샌드위치처럼 아주 죽이려고 작정을 하신 사건이에요. 다 죽여 버린다, 이게 노아홍수에요. 앞으로 홍수보다 더 센 게 있습니다. 지금 트럼프가 이란 칠 때 더 센 있다 하잖아요. 하나님이 더 센 것 준비했어요. 그게 불 심판입니다. 에너지 심판이죠. 모든 게 에너지니까. 에너지가 활성화되면.

전쟁이란 바로 뒤비부리면 뭐가 나와요? 비빔밥 비빌 때 위에는 고추장, 아래는 채소 있는 때 그냥은 못 먹잖아요. 뭐 해야 돼요? 뒤집어야 돼요. 왼손으로도 괜찮고 오른손으로도 괜찮아요. 그런 질문을 할 필요 없어요. 오른손으로 비비고 왼손으로 비비고 아무 쪽으로 비벼도 괜찮아요. 참기름 쳐서.

모든 것을 완전히 비벼버리는 것. 비빔에 속해야 마땅한 자들의 세상, 그 비빔 혼돈이죠. 그 혼돈을 유다나라에 주께서 허락을 하십니다. 혼돈이 되려면 하나님의 전쟁의 원수가 이 유다나라까지 접수가 돼야 돼요. 그 혼돈을 주관했던 주관자는 아달랴입니다. 남쪽 책임자. 북쪽 책임자는 아달랴 엄마 이세벨. 하여튼 여자가 양쪽 나라 다 털어먹어요.

다시 우리가 여호람을 생각하면서 자기 나라인데 자꾸 조공을 바쳐야 나라에 관세가 들어오는데 관세 낼 나라가 독립해서 나가버렸다 이 말이죠. 재정이 악화되겠지요. 그때 우리가 여호람이라면 이 질문을 할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이여, 도대체 내가 뭐가 문제입니까?” 그 질문을 여러분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할 걸요? 도대체 뭘 어쩌란 말입니까?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 만족하시겠습니까? 어떻게 내가 대처해야 원상회복이 되겠습니까? 여기서 더 이상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이런 식으로 그러한 질문이 주어지지요.

그러나 질문 대신 그는 21장 12절에 여기에 선지자가 등장하지요. 선지자 이름이 뭐지요? 엘리야, 엘리야 등장합니다. 엘리야가 편지를 보내요. “선지자 엘리야가 여호람에게 글을 보내어 가로되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네 아비 여호사밧의 길과 유다 왕 아사의 길로 행치 아니하고 오직 이스라엘 열왕의 길로 행하여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으로 음란하듯 우상을 섬기게 하기를 아합의 집과 같이 하며 또 너의 아비 집에서 너보다 선한 아우들을 죽였으니”

선한 아우를 죽인 이유가, 또 권력 싸움에 지가 말려들었어요. 이게 21장 4절에 나옵니다. “여호람이 그 부친의 위에 올라 세력을 얻은 후에 그 모든 아우와 이스라엘 방백 중 몇 사람을 칼로 죽였더라” 아우를 왜 죽입니까? 이게 무슨 정난입니까, 왜 죽여요? 조선 초기에 이런 사건 있었지요. 다른 왕자를 다 죽임으로써 삼촌이 왕이 되는 그런 일이 있었잖아요(계유정난(癸酉靖難), 1453년(단종 원년) 음력 10월 10일).

내가 왕이 되는데 왕으로 제대로 정치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경쟁자들을 사전에 없애서 나라를 안정적으로 국가경영을 원활화하는 게 도대체 뭐가 잘못이냐. 본인이 하는 일은 아무 잘못이 없어요. 아무 잘못이 없기 때문에 이런 물의를 일으키는 거예요. 아무 잘못이 없는 내가 왜 내가 예상한 대로 인생이 안 풀리고 꼬이느냐.

근데 다 죽였는데 아우들은 그렇게 했고 적들이 와서 자식까지 다 죽였는데 여호아하스 외에는 한 아들도 남기지 않았다. 여호아하스가 이름이 22장에 가면 아하시야로 됐지요.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다. 같은 인물이라 했지요. 그런데 죽을 때 어떻게 죽었는가? 15절에 엘리야 예언대로 됐습니다. “너는 창자에 중병이 들고 그 병이 날로 중하여 창자가 빠져나오리라 하셨다 하였더라”라고 예언을 했지요.

자, 질문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예언은 변경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지요. 이유가 뭐냐? 이유가 중요해요. 하나님의 예언은 변경이 안 돼요. 변경이 안 되는 이유가, 말씀은 미래와 먼저 만나기 때문에. 인간에게 미래는 찾아가서 만날까, 이렇게 하잖아요. 그러나 말씀은 이미 미래가 확정된 채 미래에서 거꾸로 현재를 만들어내요. 현재에서 만들어져야 미래가 되는 게 아니고 시간이 역설적으로 거꾸로 흘러서 미래를 위하여 현재가 미리 구성되어가고 미리 주어진 거예요.

이 이야기는 원주강의에서 제가 초반에 했어요. 이렇게 하시면 구원받는다가 아니라 구원이 되었기에 이렇게 거꾸로 파고 들어와요. 그러니까 아까 질문 다시 해보겠습니다.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정답은 문제없지요. 문제없는 거예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그게 유명한 박찬욱 감독의 영화, 제목이 뭡니까? <어쩔 수가 없다> 인간이 자기한테 집중이 돼 있는 한 어쩔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인간이 자기한테 집중할 자격이 안 되는 이유가, 우리에게는 우리를 위한 언약은 지금껏 존재해본 적이 없습니다. 나를 위한 언약은 존재해본 적이 없어요. 나를 위한 것은 일단 죽입니다. 죽이고 난 뒤에 내가 살아 있을 때 예상한 나는 지금 있는 그걸 예상한 나를 죽임으로써 내가 예상한 나도 같이 없어지게 하고, 예상치 못한 다른 나를 하나님의 확정된 미래에 의해서 말씀에 의해서 우리를 건져내게 되면 그게 하나님의 이스라엘이고 그게 우리 임금 되신 예수님이 하실 일입니다.

너 아니고 너, 네가 생각한 너 말고 내가 생각한 너.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네 이름이 아니고 내 이름을 드러내는 너, 그렇게 바뀌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 그 차이점 두 개를 다 알고 있으면 성도고, 그걸 모르면 성도가 아니지요. 그 둘 다 차이점. 내가 아는 나, 그리고 주님이 아시는 나 이 사이에서 차이 있잖아요. 차이가 뭐냐 하면 이게 확정된 말씀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언약이에요.

확정된 말씀 중에서 한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 여러분 다 아시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것이 나에게서 나온 게 아니고 이 틈 사이에서 나오지요. 이 차이에서 말씀이 나온다고요.

이 차이가 생긴다는 말은, 내가 모르는 내가 따로 있는데 그 나는 내가 접근할 수 없어요. 왜? 나는 도중에 죽어야 되는데 접근하면 안 되지요. 유한은 무한을 만나면 죽어야 되니까 무한을 접할 수가 없어요. 없는데 그 미래를 다 아는 그분께서 중간에다 틈에다가 말씀으로 우리에게 줬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성도의 삶은 신앙 삶이죠. 신앙이란 뭐냐 하면 날마다 말씀을 품은 내용을, 그다음이 중요해요. 중요한 건 빨갛게, 어떻게 아느냐? 새롭게 아는 것. 오늘 며칠이죠? 3월 6일이죠. 3월 5일에 알았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장 1절과 3월 6일에 아는 1장 1절과 3월 7일에 아는 1장 1절이 어떻게 돼요? 날마다 새로워야 되죠. 어떻게 새로운가? 그 본문 가지고 새로운 게 아니고 성경에 있는 나머지 많은 말씀과 연관 지어서 초과적인 의미가 발생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지금 이란에 갔다고 칩시다. 이란에서 했던 비행기가 어제 밤인가 인천공항에 왔어요. 교민들 태운 비행기가. 그래서 기자들이 많이 있었던 거예요. 이건 뉴스에 안 나오는 거예요. 내가 아주 가까운 사람한테 들은 거예요. 그럴 때 만약에 여러분들이 성도라면 이십 년 전에 교회 다닐 때 좁은 길, 넓은 길 할 때 그때 느끼는 감흥이 어떻게 됩니까? 그것 써먹겠어요? 아니지요.

현재 주어진 사건 안에서, ‘야 죽을 뻔했다’ 할 때 바로 소수의 남은 자가 구원됐다는 것을 성경말씀 이곳저곳을 통해서 새롭게 구성하게 되겠지요. 그 일이 누구 일이다? 그 일이 성령의 일이고, 그게 바로 주님의 일이잖아요. 하나도 버릴 게 없어요. 나한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나로 하여금 바알숭배자인 것을 알려주는 일을 해요. 왜? 그게 역대하 21장, 22장 이야기니까.

따라서 성도기 때문에 옛날 나쁜 짓한 것 넘어갑시다, 이러면 안 돼요. 옛날에 나쁜 짓한 여호람, 여호사밧, 아달랴, 이세벨 전부 다 지금 우리 자신보고 하는 이야기에요. 도대체 뭐가 문제냐, 이거요. 자기 자신이 문제인 걸 모르고. 도대체 뭐가 문제냐? 정답은 문제없음이에요.

그러면 22장에서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잖아요. “유다 왕 여호람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더라” 그다음에 2절, “아하시야가 왕이 될 때에 나이 사십 이세라 예루살렘에서 일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아달랴라 오므리의 손녀더라” 오므리가 누구냐 하면 아합의 아버지가 오므리에요. 그럼 오므리라 하는 것은 북쪽 계열이에요. 북쪽 족보에요.

예루살렘이 없는 다윗언약이 없는 다윗의 등불이 없는 북쪽 계열의 사람이 어디까지 침투했습니까? 남쪽까지 침투한 거예요. 좌파인가? 북한의 김정은의 사주를 받는 자가 국회의원 되는 그런 식이죠. 북한이 얼마나 비참한가. 우리가 돈 좀 보태주자 해서 쌍방울 회사를 통해서 북한에다 돈 줬잖아요. 무기 사라고. 원자폭탄 만드는데 보태라고. 물론 그 이유는 아니지만 돈 받은 사람이 지 마음대로 사용하겠지요.

우리는 한민족이란 말이 뭔 뜻일까요? 생각하는 것을 맞추어야 된다는 뜻이잖아요. 그런데 북한은 종교단체거든요. 종교단체 북한은 이유가 없어요. 그냥 김정은 보기만 해도 눈물이 쏟아져요. 교주기 때문에. 아니 이만희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추종자가 많은데. 통일교도 마찬가지고. 세상의 어머니인데요. 문선명 부인 말입니다(한학자). 그가 뭘 했던 진리에요.

우린 한민족이다. 같은 한국말 쓰는 한민족이다. 한글 쓰고 그래서 마음도 하나, 사상도 하나. 여러분 그러고 싶어요? 북한은 종교단체입니다. 종교단체의 특징은 인간의 정신을, 인간의 사상이 이념이 이데올로기가 인간을 지배해요. 그럼 남쪽을 지배하는 건 뭡니까? 한글로 한 자로 뭡니까? 돈. 돈이죠. 정답해주니 기분이 좋습니다.

남쪽은 돈이에요. 지금 민주주의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남쪽에선 용납이 안 돼요. 헌법이 그렇다는 게 아니고 일반국민들이 자기 사적인 내 돈 건드리면 이거는 어떤 대통령이든 용서가 안 돼요. 돈에 죽고 돈에 사는 겁니다. 그게 자본주의로 하나가 된 거예요. 남쪽은. 둘 다 마귀나라란 건 변함이 없고, 둘 다 마귀가 지배한다는 데 다른 점이 없는데 각자가 자기를 위해 산다는 점에 다른 점이 없는데 차이점이 그렇다 이 말이죠.

그러면 아까 그 사상 있잖아요. 바알사상이 어디 있느냐 하면, 3절 봅시다. “오므리의 손녀더라 아하시야도 아합의 집 길로 행하였으니이는 그 모친이 꾀어 악을 행하게 하였음이라” 슬슬 여러분 윤곽이 그려지지요. 무엇이 문제입니까? 뭐가 빠졌어요? 언약이 없어졌지요. 아주 나라 자체를 인테리어를 새로 했어. 여호와 다 빼고 뭐고 바꿨습니까? 인테리어를 바알종교로 다 바꾼 거예요.

그런데 문제가 여기서 이렇게 가면 평화로워요. 아무 문제없잖아요. 바알종교로 어쨌든 하나 되면 되잖아요. 그런데 아까 엘리야의 예언 가운데 누가 등장했습니까? 예후 등장했지요. 아까 열왕기상 19장 16절에. 그다음에 등장합니까? 엘리사 등장하지요. 그 예후가 누굴 죽이느냐 하면 아하시야를 죽여 버린 거예요. 북쪽의 바알종교를 토벌하겠다고 예후가 쑤실 때 그 예후가 설치게 된 배경은 뒤에 누가 있느냐 하면 엘리야 선지자의 예언이 있어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전쟁은 멈춘 적이 없다. 지금 2026년 이 시대, 이 울산도 마찬가지고 대구도 마찬가지고 하나님의 전쟁은 멈춘 적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예언대로 돼요. 모든 것이 뒤집기입니다. 비빔밥이에요. 뒤집어버려요. 속에 숨어있는 혼란이 내 인생을 적실 때 우리는 매사에 있어서 내 뜻대로 안 되고 내 마음대로 내 몸도 마찬가지고. 건강하고 싶은데 건강하지 않아요. 모든 게 혼란스러울 때 우리는 바알종교의 본색이 드러납니다.

주님이여, 내가 어떻게 해야 정상적이 됩니까? 저한테 왜 이래요? 영어로 하면, Why me?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불행이 옵니까? 중간쯤 남들처럼 살도록 놔두면 안 돼요? 왜 남보다 못한 인생으로 살게 합니까? 예수님이 선지자고 왕이잖아요. 이게 뭐냐? 나의 왕국을 뭐로 바꾸기 위함입니까? 예수님의 왕국으로. 천국 만드는 그러한 작업에 개인사정은 죄송합니다만 안 봐줍니다. 내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그것에 대해서 ‘참 잘했습니다’ 하는 사람이 바로 내가 왕이 아니고 따로 있어요. 왕의 교체가 이뤄졌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게 7절에 나오지요. “아하시야가 요람에게 가므로 해를 받았으니 이는 □께로 말미암은 것이라” 네모에 누가 들어갑니까? ‘하나님’께로 말미암는다. 네가 북쪽 먹고 남쪽 먹었다고 해서 하나님마저 먹은 게 아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먹은 게 아니다. 그 당시에 누가 있습니까? 선지자가 있으니까. 선지자가 던진 그 말씀은 어느 누구도 변경될 수 없습니다. 왜? 말씀은 이미 미래와 손잡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차근차근해서 좋은 미래를 만들자. 이게 상담가의 특징이에요. ‘이것 고치고 저것 고치면 찬란한 행복이 있을 겁니다.’ 전부 다 그렇게 이야기해요. 상담가도 돈 벌어야 되니까. 이호선이란 그 사람의 남편은 목사에요. 복음을 전하는지 그건 모르겠어요. 문제는 복음을 전하고 부인을 통해서 막대한 돈이 들어오면 우리 남쪽의 사람들은 한마음이 되죠. “돈 벌었나?” “돈 벌었다.” “아이고, 인생 성공했네. 행복하겠다.” 우린 이 마음으로 이미 하나가 돼 있어요.

그래서 이 종교, 바알종교의 특징은 뭐냐? ‘돈 없으면 불행하고 돈 있으면 행복하다’ 이거에요. 외치는 표어는 아주 간단해요. 꺼진 불도 다시 보자, 그것보다 간단해요. 돈이 행복을 주는 거예요. 그래서 누가 여기서 독이 올랐습니까? 아달랴라는 적이, 그러니까 아달랴는 아달랴가 아니에요. 아달랴는 그냥 모습이고 그 안에는 누가 들어있습니까? 자기 엄마 이세벨이 들어있지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이세벨에 대해서 계속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세벨을 주의하라, 이세벨을 주의하라! 아달랴는 이세벨이 조종하는 대로 움직일 뿐이죠. 그 엄마에 그 딸.

그래서 여기 9절에 보면, “아하시야는 사마리아에 숨었더니 예후가 찾으매 무리가 예후에게로 잡아다가 죽이고 이르기를 저는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던 여호사밧의 아들이라 하고 장사하였더라” 네 아버지 봐서 내가 장사는 해줄게. 그래서 장례까지 치렀다 이 말이에요. “아하시야의 모친 아달랴가 그 아들의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유다 집의 왕의 씨를 진멸하였으나”(10절) 발작을 해버린 거예요.

이제 내가 더 이상 큰 것, 큰 폭탄 남았어요. 지금까지 큰 폭탄이 뭐냐? 아예 씨를 말려버리는 거예요. 누구 씨를? 유다의 씨를 말려버리는 거예요. 왜? 자기는 족보가 어딥니까? 누구 딸이에요? 이세벨 딸이기 때문에 남쪽 씨를 말리는 거예요. 끝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건 뭐냐? 바로 출애굽 이전으로 돌아가요.

애굽의 바로 왕이 누굴 죽입니까? 히브리인의 모든 아들을 죽이죠. 딸은 노동력으로 남겨두고 아들을 죽인다고요. 그럴 때 여호와의 이름이 애굽군을 홍해에 다 죽여 버렸잖아요. 이게 뭐냐? 하나님의 전쟁이란 말이죠. 지금 전쟁 중이란 것을 알려주는 거예요. 구약 이 말씀은 전쟁 중이다. 사람에 속한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의 전쟁 중이다.

아달랴가 드디어 궁극적으로 최후의 무기를 씁니다. 다 죽입니다. 다 죽으면 드라마가 안 되겠지요. 어떻게 되느냐? 그런데 보고 고모가, “왕의 딸 여호사브앗이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왕자들의 죽임을 당하는 중에서 도적하여 내고 저와 그 유모를 침실에 숨겨 아달랴를 피하게 한고로 아달랴가 저를 죽이지 못하였더라”(11절) 남은 자죠. 이름이 요아스에요. 그리고 난 뒤에 여호야다의 반정에 의해서 그다음에 23장에 뒤집어집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전쟁은 전쟁을 하면서 누가 이기는지 기다려보자, 이거는 신앙이 아닙니다. 끝난 전쟁이에요. 전쟁은 끝났는데 이 전쟁에 주님께서 락을 걸어서 우리를 어떻게 몇 년도에 태어나게 하시고 그동안 어떻게 이 전쟁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에 걸려서 남은 자로서 구원된 자로서 어떻게 활용하는가, 그걸 알면 더 이상 그 사람은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고 주를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이 우리를 움직인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우리의 삶의 현장 가운데서 날마다 새롭게, 새롭게 체험하면서 이미 끝난 전쟁, 다 이루었다는 것이 어떻게 우리 인생에 적용시키고 있는 것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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