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07a 울산강의-역대기하(17강) 20장 15절 : 대책 없는 전쟁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역대하 19장부터 시작합니다. 역대하 19장 초반에 들어가면 여호사밧이 평안히 예루살렘에 돌아왔는데, 2절에 보면, “하나니의 아들 선견자(선지자) 예후가 나가서 여호사밧 왕을 맞”이 했다, 이렇게 돼 있어요. 선지자 예후와 여호사밧의 만남이에요.
여호사밧은 왕입니다. 그리고 예후, 이는 선지자 또는 선견자, 이 둘이 만나게 되면 사람이죠.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서 성경에 기록된 것은 예후가 사람이고, 여호사밧이 사람인데 사람이 사람에게 말을 할 때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되었다는 식으로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어디서 나왔지요? 어디서 나옵니까?
사람 대 사람 같으면 사람의 말이 나와야지 왜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과 인간 사이에 왜 생겼습니까? 참 신기한 일이죠. 그것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구원되었다, 또는 탈출할 때 그 의미는 사람의 집합체에서 따로 분리된 하나님께 속한 민족이 나왔다, 이래 되는 거예요. 애굽에서 볼 때 이스라엘도 사람이고 보이지만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애굽과 하나님 사이에 등장한 민족이 이스라엘입니다. 그 이유가 초반에 나오는 중요한 명제 하나 쓰겠습니다. 초반부터 문장 하나 쓰겠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말을 듣지 않는다.’ 강의 초반에서 이것 하나 분명히 해야 돼요. 하나님은 인간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왜 안 듣느냐 하면 인간의 말이기 때문에 안 들어요. 하나님이 듣고 싶은 것은 인간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기 말을 회수하는 입장에서 듣고 싶은 거예요. 하나님은 자기 말을 듣고 싶은 거예요. 이걸 가지고 여러분 잘 알다시피 이게 바로 말씀입니다. ‘말’이 아니고 ‘말씀’이에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했다는 것은 말의 세계에서 말씀이 알아서 튀어나왔다는 겁니다. 그 말씀 따라 우르르 쫓아 나온 나라가 무슨 나라? 이스라엘 되는 거예요. 이게 이스라엘인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전체는 사람의 말로 나라가 만들어지는 게 아니에요. 그거는 APEC 정상회의에서나 하라 해. APEC 정상회의는 인간들이 하는 거예요. 베트남, 뉴질랜드, 태국, 미국 등 여러 나라 모여서 하는 것은 그건 인간의 말이에요.
그 APEC 정상들 보면서 티비에 나오는 나라들 보면서 여러분들이 이렇게 생각했습니까? ‘하나님이여, 나를 저 동네에서 구원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렇게 생각해본 적 있어요? ‘이 참에 관세협상이 잘 돼야 할 텐데….’ 이런 생각이나 하지 않습니까? ‘주여, 저들과 같지 아니하고 빼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뭐 이런 생각했던가요?
신명기 8장 3절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빼줬다 이 말이에요. 아주 알기 쉽게 설명할게요. 애굽나라, 여기는 사람의 말 밖에 없어요. 사람의 말 밖에서 없는데 여기서 빼줬어요. 뭘 빼줬는가? 언약, 약속, 같은 말로 하면 말씀을 빼줬습니다. 그래서 없던 데서 생긴 나라가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은 전혀 없습니다. 없는 데서 생겼고, 죽은 데서 산 민족이에요.
이 ‘없다’, ‘죽었다’를 한꺼번에 함축한 존재가 바로 어린양이에요. 유월절 어린양입니다. 어린양은 사람이 아니죠. 양이죠. 양인데 사람 구실해요. 왜냐하면 양인데 하나님께선 이 양을 뭐로 보느냐 하면 이스라엘아 너희들 모든 가정에 맏아들로 삼아라. 양을 맏아들로 삼아라. 맏아들은 마땅히 죽어야 되는데 죽었다 치고 양의 피를 맏아들, 거기에다 입혀버린 거예요.
세례 요한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그걸 이렇게 의미합니다. 그 양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희생의 양이라고 그렇게 설명합니다. 물론 요단강에서 자기도 성령을 통해서 계시 받아서 그렇게 확정 해석을 해버려요. 사람은 안 받는다. 하나님께서 받는 것은 사람을 다른 것과 교체돼야 된다. 교체되는 순간 그 인간은 없는 데서 생긴 것이고, 죽은 데서 살아 있는 자만 천국에서 받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를 이제 아시겠지요? 뭔가 중간에 걸림막이 있어. 필터가 있어요. 살아 있는 것은 죽이고, 있다는 것은 없애버리고. 그 필터를 통과한 자만 걸러서 천국에서 받습니다. 열심히 한다고 구원되는 것은, 그거는 열심이지 구원은 아니에요. 구원은 놀랍게도 열심히 하는 동네에서 빠져나온 게 구원입니다.
아까 차타고 오면서 자식 이야기 많이 했는데 자식보고 열심히 하라고 하지 마세요. 열심히 한다고 구원되는 건 아닙니다. 천국 가는 백성은 특별나요. 유난히도 특별나요. 이상해요. 자기 구원받는 것을 남에게 설명하기도 곤란해요. 뭐 자기가 행한 게 있어야지. 뭔가 너무나 특별나서 구원받은 당사자도 당황스러워, 구원받은 게. 남한테 설명하려해도 설명할 방법이 없네. 어떻게 해서 구원받았다 하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물론 하나님의 능력으로, 은혜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다음부터는 그 은혜와 능력을 유지하고자 하시는 거예요. 유지하는 방법이 뭐냐? 말씀은 언약에서 나왔기 때문에, 언약에서 구체화된 게 어린양이잖아요. 그러니까 약속과 언약과 말씀을 이스라엘에다 새겨 넣는 겁니다. 그걸 오늘 강의 주제로 삼습니다.
그 주제가 여기 19장에 보면, 여호사밧이 중점적으로 하는 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재판이에요, 재판. 여호사밧이 재판관을 세우고, 5절부터 아주 길기 때문에 다 읽을 수는 없어요. 쭉 재판, 재판, 재판하는데 6절에 보면 재판관에게 이야기합니다. “너희의 재판하는 것이” 그다음에 나오는 말이 뭡니까? 무엇을 위함이 아니요? “사람을 위함이 아니요” 이게 굉장히 독특하고 이스라엘의 본질을 제대로 말해주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말을 듣지 않기 때문에.
재판할 때 재판할 법률이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걸 가지고 말씀이라 하고 언약이라 하고 약속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다시 말씀드려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야기할 때 이스라엘은 뭔가 특별난 요소가 있어야 되고, 다른 민족과 달라야 돼요. 성도가 됐으면 다른 집안과 뭔가 달라야 돼요. 다른 집안에서는 자기 행동에 대해서 변명하거나 핑계거리가 그렇게 많아요.
그러다보니까 이렇게 됐다, 저러다보니까 그렇게 됐다는 둥 그 변명과 핑계는 누굴 위함이에요? 자기를 위함이죠. 이것을 이렇게 쓰는 것이 마음에 와 닿을 거예요. 내가 나를 인도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는 것, 그 차이를 여호사밧 왕이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내가 나를 인도하는 것, 이건 뭐 모든 인간이 태어나면서 하는 게 이거에요. 내가 나를 인도하잖아요. 그런데 내가 나를 인도할 때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이게 생겨요. 자존심, 또는 자존감.
그래서 18장에 보면 여호사밧도 인간인지라 지 자존심 세우려고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과 더불어서 전쟁을 했습니다. 전쟁을 하다가 시껍했어요. 죽을 뻔했어요. 그게 역대하 18장 31절에 보면, “병거의 장관들이 여호사밧을 보고 이르되 이가 이스라엘 왕이라 하고 돌이켜 저와 싸우려 한즉 여호사밧이 소리를 지르매 여호와께서 저를 도우시며 하나님이 저희를 감동시키사 저를 떠나가게 하신지라”
왕의 갑옷이 특별난데 그 갑옷을 아합 왕이 여호사밧에게 입히고 자기는 보통 병사처럼 위장을 한 겁니다. 안 죽으려고. 그런데 적들이 와서 “이스라엘 왕이다. 저 왕만 죽이면 끝난다. 빨리 승리하고 집에 가자”라고 했는데 여호사밧이 어떻게 했습니까? “아니야, 아니야. 나 아니야.” 이래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적들이, “어, 아니네. 저 사람 아니야. 저 사람 가짜야.” 그래서 “병거의 장관들이 저가 이스라엘 왕이 아님을 보고 쫓기를 그치고 돌이켰더라”(32절)
그러니까 아님을 본다는 것은 여호사밧은 인간과 인간의 전쟁에서 어떤 인간이 되느냐 하면 왕이 아닌 거예요. 남쪽 왕인데 왕이 아닌 것이 됐잖아요. 이걸 그냥 쉬운 말로 뭐냐?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어느 상황에서? ‘전쟁하는 상황에서 나는 전쟁의 목표가 아니야. 목표에 끼어들 가치도 없어. 아니야. 화살로 나 쏘지 마. 나는 이 전쟁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야’ 라고 외쳤던 경험을 여호사밧이 한 겁니다.
여러분도 이런 경험 하셔야 돼요. 주께서 그렇게 하실 겁니다. 되지도 아닌 게 지가 자존심 세서 ‘내가 앞장설게’ 앞장서지 마세요, 앞장서지 마세요. 이 세상 인간과 인간, 말과 말의 전쟁에서 나대지 마시고 나서지 마세요. 만약 여러분 붙들고, ‘네가 대장이야’ 하거든요 이렇게 하세요. 오늘 좋은 것 배운다.
“나 아니야.” “뭐가 아닌데?” “아무것도 아니야.” I'm nothing,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오야봉도 아니고, 나는 주요 인물도 아니고, 나는 무가치해. 쓰레기야. 똥피야. 화투에서 그냥 버려도 되는 것, 아무것도 아닌 것 이 경험을 여호사밧이 했습니다. 그럴 때 19장 2절에 예후 선지자가 나타납니다. 아까 처음에 했잖아요. 내가 다시 그려보면 이렇습니다.
왕 있고, 예후 선지자 있단 말이죠. 둘 다 인간이라 했잖아요. 그런데 이 위에 누가 있는가? 하나님께서 왕과 선지자에게 양쪽 다 말씀을 줬습니다. 말씀을 줬는데 왕은 지가 자존심이 있어서 인간나라치고 자기보다 높은 사람 없다. 왜?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고 나만 특별나다는 의식을 가지고 왕이 됐단 말이죠, 여호사밧이. 모든 권력가 부귀영화가 자기한테 집중돼 있으니까요.
그게 18장에 보면 나오지요. “여호사밧이 부귀와 영광이 극하였고”(1절) 요새 말로 하면, ‘나 돈 많아. 그러니까 내가 당신한테 함부로 이야기해도 괜찮아.’ 왜? 돈 많으니까. 피라미드 구조에서 자본주의사회에서 제일 높은 자리에 있으니까 아래 것들에게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자격이 된다고, 이렇게 해서 전쟁에 같이 뛰어든 거예요. 아합 왕과 연혼하여 사돈 맺어 같이 뛰어든 겁니다. 뛰어들었는데 막상 전쟁 통에서 여호사밧이 고백한 것은 뭡니까? “나 아무것도 아니야. 나 쏘지 마. 쏠 가치도 없어.” 이렇게 된 거예요.
인간의 말들이 통하는 인간의 세계에서 다시 한 번 여호사밧은 구출, 구원되었습니다. 구원되었다는 말은 뭐 대단한 게 아니고 아주 치사스러운 우스운 꼴을 보면서 그 동네에 합류하지 않고 빠져나왔다. 이게 구원입니다. 아주 치사스럽게. 그중에 뭐가 날아갔어요? 지 자존심, 자존감, 위신, 체면 그 딴 것 다 버린 거예요.
왜? 하나님의 구원은 그 딴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기 때문에. 위신, 체면, 전통, 자기 잘난 것, 가진 것, 자기 주특기 아무 관계없이 그냥 어린양의 희생으로 구원된 겁니다. 어떻게 그 구원 마음에 드십니까? 나의 의를 박살내고 구원하는 그 구원이 여러분 마음에 드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들고, 안 들고 간에 이거는 마음대로 우리 정하는 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 앞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끄실 거예요.
우리에게 수시로 올라오는 게 우리 자존심이고 우리 위신이잖아요. 그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허락 하에 우리가 망가지는 일이 벌어질 거예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요. 망가질 때에 우리는 뭘 느끼게 되느냐? 바로 희생, 십자가의 고통을 아는 기회로 삼아야 돼요. 그동안 고통 없는 행복한 인생을 추스르는데 전력을 다했다면 성령께서 관여하사 너의 모든 구원과 천국, 축복은 주님의 고통에서부터 나온 힘이에요.
그런데 우린 그걸 끊어버리고, 말씀의 완성을 끊어버리고 자기 몸 하나 추스르는데 평생을 급급했습니다. 자기 몸을 추스르고 자기를 방어해버리면 거기서 뭐가 나오겠습니까? 사명감 나오겠습니까, 자존감 나오겠습니까? 자존감 나오지요. 이 자존감을 예후라는 선지자를 통해서 왕에게 직접 전달합니다. 어떻게 전달하는지 19장 2절에 나옵니다. “하나니의 아들 선견자 예후가 나가서 여호사밧 왕을 맞아 가로되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가하니이까”라고 물었지요.
이러한 발언은 나단 선지자가 다윗 왕에서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당신이 죽이라고 한 사람이 죽는 게 아니고, 당신이 죽어야 될 그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그렇게 죽일 거예요, 하고 다윗에게 지적했을 때에 다윗은 비로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말이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저 사람을 통해서 나한테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달했다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때 다윗이 뭐냐? 성신 받았다고 돼 있어요. 신약으로 하면 성령 받은 게 돼요.
자, 그렇다면 머리 좋은 사람은 생각하겠지요. 성령 받은 게 뭐냐? 어떤 경우가 성령 받은 것이냐?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지적을 받았을 때. 그 지적받는 조건은 뭐냐? 이게 아무것도 아닌 게 없는 걸 있게 하고, 죽은 걸 살려놓으니까 다시 네가 있는 것처럼 여기고, 마치 펄펄 산 것처럼 여기는 그 점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십자가의 말씀으로 이걸 지적해줄 때 그 지적당하는 그 관계가 성령 받은 순간입니다.
그러면 그게 뭐냐 하면 우리 안에 말씀이 안착되는 순간이에요. 말씀이 심겨지는 거예요. 말씀을 듣고 끝나는 게 아니고 말씀이 심겨지는 거예요. 강의하고 우리교회 설교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게 그거에요. ‘목사님, 설교 들을 땐 아는데 돌아서면 다 잊어버립니다.’ 돌아서면 잊어버리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왜냐하면 안 잊어버리면 말씀을 듣고 내가 그 말씀을 실행에 옮기려고 설치기 때문에 그거는 자존감이에요. 자존심입니다. ‘나는 성도다. 이제 남은 것은 성도답게 바르게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이스라엘을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말씀이 안착, 들어오면 그다음부터는 말씀이 주인공이 돼야 되는데 말씀을 소유했다는 내가 주인공 돼버리면 그다음부터는 자존감이 돼버리지 이거는 사명감이 아니에요.
그러면 자존감 아니고 사명감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라고 물어보신다면 말씀은 주인이 전에는 내가 행위의 주체였지만 말씀이 행위 주체가 되게 되면 그 말씀이 사태와 상황을 만들어 줘버려요. 만들어주면서 그동안 잊어버렸던 말씀이 생각나게 만들어요. 어떤 상황들을 만들어 가냐 하면 하다보면 굉장히 염려가 되고 걱정이 되고, 그럴 경우 있잖아요.
그러면 그때 하나님께서 내일 일은 내일 하지 오늘 걱정은 오늘로 족하다. 무슨 말이냐 하면 너를 오늘 하루치를 살게 한 이유가, 걱정도 오늘 하루로 끝내기 위해서 내가 네 하루치만 허락했다. 내일 되면 오늘에서 내일로 네가 건너갈 수 있는 권리가 없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예를 들면 내일이 아들 결혼식인데 오늘 내가 관절이 갑자기 안 좋다. 걷지를 못해요. 그럼 내일 결혼식 때문에 염려를 언제 합니까? 내일 하는 것이 아니고 오늘 하게 된 거예요. 오늘 걱정을 안 할 수 없지요. 관절 때문에 결혼식에 참석 못하게 되면, 그동안 아들 잘 키웠다는 엄마는 왜 안 보이느냐, 수군수군거리고. 결혼식을 보니까 별로 꽉 찬 느낌이 안 들어. 뭔가 빠진 느낌 드는데, 이런 소리를 누가 할까봐 염려가 또 되는 거예요.
그러면 당사자 엄마는 뭐라 기도해요? 하나님이여, 아파도 결혼식 끝나고 아프지 하필이면 아들 결혼식 전날에 이렇게 관절이 안 좋으니 어떡하면 좋아요? 이제 와서 미룰 수도 없고. 개인적인 문제라면 미루겠지만 이거는 양가가 의논해서 한 거라 미룰 수도 없고, 예식장도 위약금 물어줘야 되고 이건 안 되는데, 하고 걱정이 늘어지겠지요.
그럴 때 해결책은 뭡니까? 제가 또 객관식으로 해야 됩니까? ①애들한테 업혀서 억지로라도 간다. 휠체어 타고 앉아있다. ②진통제 모르핀에다 마약 비슷한 것 먹고 아프지 않은 것처럼 앉아있다. 한 두 시간만 견디자, 이런 식으로. ③참석은 못하지만 남편보고 이래저래 해서 참석 못한다고 광고한다. ④염려하지 아니한다. 몇 번입니까?
지금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말씀대로 해야 기뻐요. 결혼식 무사히 마쳤다고 기뻐하는 것은 내 기쁨이지 하나님 기쁨은 아니에요. 하나님의 기쁨은 뭐냐 하면 관절이 아픈 상황을 누가 만들었어요? 하나님이 의도해서 만들었어요. 아들 결혼식에 너무 정신이 팔려서, 거기에 왜 정신이 팔립니까? 그게 내 자존감이거든요. 이때를 위함이다. 내 평생의 보람이 아들 장가보낼 때 한복 입고 랄랄랄라~ 한 바퀴 돌고, 이렇게 폼 내는 게 지금껏 그것 때문에 평생 살아온 거니까 이건 내 자존감이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자존감을 박살내고 사명감으로 바꿔요. 자존감과 사명감의 차이점은 뭐냐? 그게 잠언 25장 2절에 나옵니다. 누가 크게 읽어볼까요?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아멘. 철저하게 숨어있는 하나님이 나타난 일이 왕의 일입니다. 하나님은 숨기는 것이 영광이에요.
하나님은 인간의 말에 섞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말의 형태를 통해서 나타날 때 그 말은 뭐냐? 왕 자체가 인간이 우러러 보는 왕의 특별한 자리가 아니라 철저하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명자, 심부름꾼으로서 왕의 일을 할 때 그게 바로 임금이 해야 될 일이다. 그러니까 여호사밧이 아합과 더불어서 했던 전쟁에서 얼마나 통렬하게 자기 위치를 알았습니까?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럼 아무것도 아닌 나를 그 빈 그릇을 채울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빈 곳을 다 채울 것인가? 진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가만있을 것인가? 거기에 대해서 예후가 나타나서 당신은 악한 자와 함께 했습니다, 라고 지적을 할 때 여호사밧이 4절부터 11절까지 그 긴 내용이 한 마디로 말해서 뭐냐 하면 말씀에 입각해서 이스라엘을 말의 나라가 아니라 말의 나라에서 구원받은, 말의 나라에서 말씀의 세계로 구원받은 그 말씀을 속속들이 안착시키고 적용시키는 일을 왕이 실시한 거예요.
왕이 먼저 그 재판관들을 교육시켰습니다. 그 교육한 내용은 율법으로 교육을 시켰어요. 여기서 우리가 여호사밧을 통해서 알고 있지만 새롭게 발견하는 것은, 말씀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이 아니라 반드시 말의 세계에서 나타날 때는 재판으로 나타난다. 이거는 말의 세계, 인간의 세계에서는 재판의 형식으로 나타나고,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세계를 재판으로 지배한다. 통치한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의 단일화된 재판정이 되는 거예요. 재판소가 되는 겁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솔로몬 재판할 때 알지요. 솔로몬이 창기 두 여자의 아들에 대하여 지혜롭게 재판했다고 하잖아요. 그 지혜는 솔로몬 지혜 아닙니다. 숨어있는 하나님의 나타난 형식이 솔로몬 재판이었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 언약, 또는 말씀, 여기서 가리키는 것이 재판이니까 같이 이야기하면 언약으로 약속으로.
약속으로 언약이 나왔고,
언약으로 말씀이 나왔고,
말씀으로 그다음에 뭐가 나오느냐? 율법이 나왔고,
율법의 기능은 방금 나왔지요. 뭐라 했습니까? 재판으로 나오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아셔야 되지요. 재판이란 어떤 경우에 생깁니까? 여기 19장 8절에, “여호사밧이 또 예루살렘에서 레위 사람과 제사장과 이스라엘 족장 중에서 사람을 세워 여호와께 속한 일과 예루살렘 거민의 모든 송사를 재판하게 하고”
그러니까 재판은 뭐냐 하면 소송이에요. 소송할 때 아까 제가 언급한 것처럼 6절에 뭐는 아니다? 사람을 위한 것 아니다. 오직 뭘 위해서? 하나님을 위한 일이다. 재판은 인간을 위한 결과로 나타나면 안 되고, 하나님을 위한 결과가 나타나도록 하나님께서 소송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을 하나님의 말씀이 조절해 나가시는 겁니다. 조성해 가시는 거예요.
그럼 소송의 기준은 뭐예요? 율법이죠. 말씀이고 언약이고 율법이죠. 그렇다면 전 백성은 뭐가 교육돼야 돼요? 왕에 의해서 전 국민이 율법에 대해서 훤히 알아야 되겠지요. 그 역할을 누가 하느냐? 레위인들이 하는 거예요. 레인위들, 제사장 이게 왕 밑의 수하들이니까 다윗언약에 왕 밑의 수하들이에요. 제사장, 레위인들. 옛날에는 사사들이 했지만.
그것도 숫자가 모자라니까 백성들 가운데서 따로 재판할 사람들을 족장 중에서 사람을 세워서 재판하는 일을 맡겼습니다. 재판, 재판, 재판하다보면 저절로 국민들의 생각에는 인간들의 말의 다툼을 날아가 버리고 말이 있던 자리에 뭐가 주고받겠습니까? 율법에 보니까 이렇더라, 율법에 보니까 네가 틀렸어, 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이 오고가고 하겠지요. 저절로 그렇게 되겠지요.
그러면 정리해봅시다. 율법이 안착하기 위해서 그걸 강화하고 심화하는 방법은 소송거리의 발생으로 하여금 누가 옳은지, 그른지 따지는 가운데서 현재 우리 이스라엘을 사상적으로 정신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사람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이 우리의 모든 정신을 통치하고 지배한다는 것을 굳건히 할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리고 그 일을 해야 될 자가 누구냐, 책임자가? 왕이다. 왜? 왕은 하나님이 숨긴 것을 드러내는 역할, 그 심부름꾼 역할을 왕이 해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9장,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예후 선지자가,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가하니이까” 이렇게 돼 있지요. 그렇다면 묻습니다.
모든 율법을 주신 취지는 무엇이 돼야 되겠지요?
■악한 자를 악한 자라고 규명하는 일과
■두 번째, 그 악한 자를 절대로 도와주면 안 되는 것과
■마지막 세 번째 뭡니까?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를 절대로 사랑하면 안 되는 것,
그게 율법정신으로 온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리는 원칙이 되는 겁니다.
4절에 보면, 여호사밧이 이 일을 위하여, 여호사밧이 이제부터는 자존감 대신 자존감 자리에 사명감으로 바꿔서 자기가 알아서 순행을 했어요. 순행을 하면서 율법을 전하니까 많은 사람들을 그 열조의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고 유다와 온 이스라엘 견고한 성마다 재판관을 세워서 있게 하는 이 작업을 이제 여호사밧은 할 일이 생긴 겁니다. 지 생일이라고 함대 일곱 척 모아서 술 먹는 파티? 안 되지요. 그건 사명감 아니지요. 이건 이건희보고 이야기한 거 아니에요. 김건희보고 이야기한 것이지.
사람이 내 자리를 확보하면 안 돼요. 할 일이 있어서 자리 있는 거지 자리 있다고 그다음부터 띵까띵까 이건 놀아도 내 자리다, 이거는 안 된다고요. 사명감이란 일하는 자리지 내가 소지하고 강화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아까도 제가 차에서 이야기했지만 여자가 시집갔다. 이제는 나라가 보장한다? 안 되지. 시집왔으면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할 일을 하면 되지 시집왔는데 이제 와서 물어내라 하면, 위자료 반 청구할 거야. 이런 사고방식을…. 결혼한 것이 놀러온 것인지. 아니지요.
요새는 동등하게 저희끼리 결혼하지만 옛날에는 시집을 왔어요. 결혼한 게 아니고 그 집 며느리란 자리에 취직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고참 며느리가 있잖아요. 시어머니, 또는 자기보다 나이 많은 동서, 형님. 나는 아직도 그게 이해 안 돼. 같은 여자끼리 왜 ‘형님’이라 부르는지. 아직까지 나이 이만큼 되도 명쾌한 답을 얻지 못했어요. 여자 같으면 ‘언니’라 해야지 형님이라 합니까? 남자들 세계가 그렇게 좋아서 물들었는지 ‘형님’은 남자끼리 이야기할 때 형님이지 왜 여자끼리 형님이라 하는지…. 이건 지금 말씀과 전혀 상관없는 말의 세계와 관련된 이야기를 제가 시비 걸고 있는 거예요.
자칫 옆길로 내려갔습니다만 어쨌든 간에 지금 여호사밧은 일하는 왕이에요. 누리는 왕이 아니고. 자기가 한 번 당해봤거든요. 자존심은 뭘 방해한다? 내가 해야 될 사명을 내 위신과 자존심이 방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따라서 여호사밧은 자기의 위신 같은 것 다 하나님께서 늘 CCTV로 보는 걸 아니까 그걸 내세우지 않고 주의 말씀을 그 나라에 확산시키는데 왕의 여력을 열정을 다하여 몰입하고 있어요. 왕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이야기의 시작이 되겠지요. 이게 끝이 아닙니다. 그러면 제가 이렇게 물을 수 있어요. 왕이 율법을 정했는데 그게 온전합니까, 라는 질문. 여호사밧이 전 국민을 율법화 시켜서 율법의 도사가 되게 하고, 소송이 있든 없든 간에 율법이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는 이게 이스라엘답다, 하는 것을 확정시킨 건 맞는데 여호사밧이 개인적으로 온전했느냐 이 말입니다. 온전했겠어요, 온전하지 않았겠어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역대하 20장에 나옵니다. 20장 32절, “여호사밧이 그 부친 아사의 길로 행하여 돌이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그다음에 뭡니까? “산당은 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마음을 정하여 그 열조의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33절)라고 돼 있어요.
이 문제 해결해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어째 이렇게 되지? 다들 율법을 알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율법에 의해서 만들어진 나라, 율법에 의해서 움직이고 율법으로 작동하는 나라 그걸 다 알면서도 백성들의 깊은 마음은 어디로 돌아오지 않았다?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돼 있어요. 그리고 임금 여호사밧도 산당을 왕의 명령으로 폐지하지 않았어요. 산당을 없애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백성들이 율법, 율법 하면서 다급할 때 어려울 때 인생에 어떤 좌절을 느낄 때 절망을 느낄 때 그들은 율법의 하나님의 뜻으로 받지 아니하고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독자적으로 따로 만나는 신을 산당 위에서 산 위에서 찾았던 겁니다. 왜? 왜 사태가 이렇게 된 겁니까? 거기에 대한 답변은 하나밖에 없어요. 율법은 그냥 겉만 훑고 지나갔다. 아무리 율법이 강렬해도 율법의 확정과 실천은 인간의 마음 깊은 곳까지 그걸 변화시킬 수는 없었다. 인간은 그만큼 세다.
인간은 율법, 그것 안다고 해서 사람은 바뀌지 않습니다. 머리 검은 짐승 거두지 안 된다는 식으로 우리 자신을 우리가 받아주지 마세요. 냉정하게 대하세요. 네가 복음을 알고 율법을 알아? 그럼 우리 자신이 우릴 물어야 돼요. 나는 널 잘 알거든. 네가 성경 아는 건 다 껍데기야. 실제로 네가 좋아하는 것, 네가 좋아서 날뛰는 것, 네가 황홀해서 나자빠지는 것 따로 있지, 그지? 따로 있잖아.
하나님께서 이 여호사밧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이겁니다. 크게 써야 되겠어요.
①사람하고 상대하지 말라. 사람은 사람 상대한다고 이 인간이 바뀌지 않습니다④.
②성도는 하나님하고 상대해야 합니다. 3번, 4번이 있겠지요. 기대하세요. 성도는 하나님을 상대해야 됩니다.
③하나님은 성도에게 말합니다. 너는 바뀌지 않는다. 맞지요. 그래야 일관성이 있으니까.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는 일관성이 있어야 돼요. 사람은 안 바뀝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은근히 기대하고 내가 자식에게 말씀을 잘 가르치면 자식이 돌아온다, 그런 것 없습니다. 인간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럼 두 번째, 성도는 누구와 상대해야 돼요? 하나님과 상대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중보기도하고 내 자식을 위해서 기도하고 하겠지요. 세 번째, 2번에서 끝나면 안 됩니다. 큰일 납니다. 이거는 산당에서 비는 것과 똑같아요. 세 번째가 뭐냐? 하나님이 직접 우리에게 이야기해야 돼요. 너 백날 기도하고 말씀해도 너는 바뀌지 않는다. 이것 나와야 돼요. 이것까지 해야 돼요. 이게 끝일까요? 아닙니다. 4번이 있습니다.
④4번이 뭐냐? 십자가가 십자가를 증거합니다. 인간이 내가 바뀌는 게 목적이 아니에요. 주의 목적은, 모든 말씀의 완성은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위하여 너는 어떻게 다뤄지는가가 하나님의 뜻이고 목적이에요. 그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 누구죠?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그 내용이 뭔가를 위해서 성도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뽑힌 거예요. 초대받은 겁니다. 채택된 거고. 그런 겁니다.
여호사밧은 여러분, 신약의 성도가 아니에요. 여호사밧은 어디에 해당되느냐? 구약 사람입니다. 구약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보여주면 그걸로 자기 사명은 끝난 거예요. 율법대로 말씀대로 열심히 했는데 결국은 자기 뜻에 의해서 산당은 철폐하지를 못했습니다. 왜 산당을 없애지 못했는가? 산당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고 인간이 감출 수 없는 감정의 문제입니다. 물론 갓바위에 빌지는 않아요. 갓바위에서 빌지는 않지만 교회 나가서 새벽제단은 쌓아요.
그러나 갓바위나 새벽제단이나 똑같은 거예요. 평소에 안 나오다가 다급할 땐 나오고요, 수능 앞두고 나오고. 이거는 인간의 지식으로 설명이 안 되는 요소가 인간의 내부를 인간마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뭐라 하는지 아는데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고 내가 아는데 걱정이 안 될 수가 업는 거예요. 그 이유를 설명하고 첫째 시간 마치겠습니다.
‘인간의 내부에는 나를 처음 만들어놓은 괴물이 자리 잡고 있다.’ 자아를 처음으로 만든 괴물이 악마에요. 이게 자리 잡고 있어서 인간의 내부에는 뭐가 나오느냐 하면 화, 분노가 나옵니다. 남들 앞에서 미소 띠우면서 웃고 집안에 별일 있어요? 아무 일도 없어요. 늘 이렇게 행복하지요. 하지만 용암, 마그마, 안에 부글부글 끓는 게 있어요. 끓는 것이 뭘 하느냐 하면 이게 불안해요. 불안감과 공포심이 늘 안에 있어요.
이것은 악마가 인간에게 자아를 집어넣을 때 어떻게 집어넣느냐 하면 온전한 걸 집어넣는 게 아니고 이게 있어요. 선과 악의 불균형이 있어요. 이러면 내가 더 착했을까? 선은 뭐냐? 완전함이에요. 나의 완전함은 악마가 집어넣은 거예요. 인간은 나의 완전함을 추구해요. 선악을 아니까. 나의 완전함을 혹시 누가 훼방할까봐, 나의 실수나 오류나 나의 부주의가 나의 완전함을 훼방할까봐 그다음에 뭡니까?
나는 늘 불안하고 늘 공포심인데 이걸 행여 바깥의 상황으로 들키게 되면 터져 나오는 게 뭐냐 하면 화가 나오고 분노가 나옵니다. 제발 니가 뭔데 내 행복을 갉아먹어, 이런 것. 니가 뭔데 내 완전함을 흠집을 내, 하고 분노가 튀어나오는 거예요. 뭐 때문에? 이 자아 때문에. 그래서 이 자아를 어떻게 처리하는가? 그거는 10분 쉬고 두 번째 시간에 하겠습니다.
■20251107b 울산강의-역대기하(17강) 20장 15절 : 대책 없는 전쟁
(강의:이근호 목사)
첫 번째 시간에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실은 나를 위함이 아니라 했습니다. ‘너는 사람하고 상대하지 말라.’ 사람하고 상대하지 말란 말은 더 나가야 돼요. ‘너는 너하고 상대하지 말라.’ 너도 사람이니까. 너도 선악과를 알고 있으니까 선악과 아는 너를 상대하지 말라. 백날 너를 붙들고 복음대로 살라 해도 나에게서 나오는 것은 선악지식만 나오는 거예요.
선악지식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느냐? 악마가 얼마나 지혜로운지 아시겠습니까? 선악지식을 확보하는 순간 너희는 뭐가 되느냐 하면 신이 된다. 그리고 악마가 여기서 거짓말해요.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한 것은 선악지식을 알게 되면 네가 신이 되기 때문에 네가 신이 되지 못하도록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가르쳤다는 거예요. 그건 마귀의 주장입니다.
그래서 마귀의 논리에 의하면 선악과 따먹으면 우리는 뭐가 돼요? 신이 돼요. 그래서 됐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아니지요. 지금 악마가 잘못 집은 것은 나무가 하나가 아니고 나무가 둘이라는 거예요. 두 개로 분리시킨 것을 몰랐던 거예요. 선악지식을 알면 신이 되는 것이 아니고 생명나무 못 따먹으면 그거는 다 끝나는 거예요.
하나님께선 악마의 뜻을 알고 선악지식 뒤에다 뭘 붙여놓았느냐 하면 ‘정녕 죽으리라’를 붙여놓은 거예요. 악마가 뭘 몰랐느냐 하면 정녕 죽으리라, 정녕 죽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이 죽음을 없애야 신이 될 수 있다고 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은 뭐냐? ‘정녕 죽으리라’ 속에 들어가야 신이 돼요. 정녕 죽어야 하나님이 돼요. 그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잖아요. 그래서 예수님만 구원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당부하는 것은, 네가 남하고도 상대하지 말고 네 자신하고도 상대하지 말라. 그 이유는 네 자아가 구성되는 그 바탕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고 이미 하나님의 원수가 마련해준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구원받으려면 인간 자기 백성에서 뭘 떼어내야 돼요? 하나님의 원수를 떼어내면 돼요. 그 떼어내는 작업, 하나님의 원수를 자기 백성으로부터 떼어내는 이 작업이 바로 전쟁입니다. 또는 전쟁 상황.
왜 ‘상황’이란 말을 제가 붙였느냐 하면 구약에선 실제로 총 들고 칼 들고 싸우는 전쟁이잖아요. 그런데 오늘날 신약의 상황은 총칼 안 들이대도 매일 삶이 전쟁 상황이에요. 어떤 전쟁이냐?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선악과 따먹게 되면 선과 악을 알잖아요. 그러면 선은 뭐냐? 신이 되니까 다른 말로 하면 완전한 자가 돼요. 완전한 자가 되는 것에 대해서 행여나 내 오류나 실수나 악이 내 완전함에 흠집을 낼까봐 사전에 미리 불안하고 두렵고 공포스럽고 그런 거예요.
결국 이 목적은 뭐냐?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왕 따먹잖아요. 이왕 따먹어서 선악을 아는 나를 하나님이 어떻게 완전한 자로 좀 키워주면 안 되겠습니까? 키워주세요, 해서 비는 것이 어디로 가서 빌어요? 개인적으로 산당에서 비는 거예요. 율법에서 산당은 헐어버려야 돼요. 산당을 헐어버린다는 것은, 네가 직접 하나님과 만나는 그 모든 창구를 헐어버려야 되는 거예요.
나는 너를 단독으로 안 만난다는 거예요. 뭘 통해서 만난다? 율법을 통해서 만나는 거예요.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안 만나요. 어디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십자가 사건으로 와서 만나는 거예요. 왜? 십자가 사건에서 다 이루었기 때문에.
그래서 산당을 헐지 않은 것은 율법이 뭐로 바뀌었어요? 지식으로 바뀐 거예요. 왜냐하면 교육을 통해서 율법을 교육하고 그걸 실효성 있게 하기 위해서 재판관을 세웠는데 율법을 알고 재판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는 없어지지 않더라? 나의 완전함은, 모든 백성들의 완전함에 대해서는 포기할 줄 몰랐다. 완전함을 포기 못하니까 알 수 없는 공포와 불안감이 계속 생기는 거예요.
화장실에 갈 때 화장실 고리가 맞아야 되는데 안 맞으면 이것 신경 쓰여서 볼일도 잘 못 봐요. 껄끄러우면 나의 완전함에 흠집이 되잖아요. 그때는 어떻게 돼요? 분노하고 화가 나는 거예요. ‘에이, 화장실 고리 고치든지 해야지.’ 불도 안 들어와요. 위아래, 위아래 이거 벌써 내가 몇 년째 헷갈리거든요. 누구 하나 표시도 안 했어, 아무도. 아마 이걸 보고 전부 다 화내라고 이렇게 유도하는 것 같은….
그 상황이 무슨 상황? 전쟁 상황이에요. 나의 자존감과 나의 위신과 체면과 나의 의를 완전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벌이는 모든 상황은 하나님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상황입니다. 화나고 분노할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고 화나게 하는 것은 당신 탓이야’ 남 탓으로 돌립니다. 전쟁선포입니다.
우리나라에 범죄가 많은 것은 캄보디아 책임이야. 네 나라 때문에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돈의 유혹 받아서 범죄에 빠졌다. 전부 다 남 탓이에요. 모든 게 남 탓이라는 것은 너만 없으면 나는 어떻게 된다? 화날 일도 없고 불안할 일도 없고. 화 안 나고 불안하지 않으면 나는 뭐가 돼요? 행복한 완전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자아가 되는 겁니다. 그런 인간은 자기가 선하다고 여기는 거예요.
전쟁을 벌입니다. 역대하 20장 보겠습니다. 갑자기 전쟁이 일어났어요. 교육해도 안 돼. 재판하는 걸로 온전한 이스라엘로 자부했는데 갑자기 전쟁이 일어났어요. 이런 경우는 나중에 히스기야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히스기야가 얼마나 유월절을 크게 지내고 온 국민을 하나님 앞에 바르게 드리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누가 왔어요? 앗수르라는 막강한 잔인한 부대가 와서 예루살렘을 포위해서 산헤립 그 사람이 아주 협박을 합니다. 그것도 히브리말로 해서 모든 백성들이 알아듣도록 해서 여호와가 당신들을 도와준다는 말에 속지 말라. 하나님이, 너희가 믿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내사 앗수르 군대 앞에 굴복하도록 항복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니까 내가 너희들 밥은 먹여줄 테니까 항복만 하라고 외쳤습니다. 이사야에 보면 나옵니다. 36장 1절에 나오지요.
그런데 산헤립이 논리상, 그리고 자기의 지식상 맞아요. “너희들이 믿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징치하기 위해서 나를 보내셔서 예루살렘을 포위하니까 항복하는 것이 너희가 믿는 여호와 신앙에 합당한 일이다. 그러니까 항복하라.” 맞는 말인데 산헤립이 빠뜨린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37장 36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팔만 오천 인을 쳤”다고 돼 있지요. 이걸 빠뜨린 거예요.
산헤립이 빠뜨린 것은 아까 강의 처음 할 때 했어요. 인간이 누구와 상대했습니까? 인간하고 상대한 게 문제에요. 내가 이렇게 불행한 것은 네 탓이야. 뭐가 문제입니까? 인간이 인간하고 상대한 거예요. 자꾸 사람한테 은근히 기대한 게 있으면 성도 같으면 반드시 실망하도록 만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굉장히 치밀하신 분이거든요.
하나님이 어느 정도로 친절하신지 제가 문장으로, 문장 할 때마다 여러분들이 딱딱 정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문장을 쓸 때는 제대로 써야 돼요. ‘하나님이 얼마나 친절하시던지 우리의 목숨을 버릴 때를 지정해주신다.’ 인간이 불행한 이유는, 자기의 목숨을 바꿀 게 없기 때문에 불행해요. 처녀총각이 한 눈에 서로에게 반했을 때 그 행복도가 대단해요. 도파민 쫙 올라가거든요.
왜 대단하냐 하면 남자가 여자보고 뭐라 하느냐 하면, “걱정하지 마. 당신을 위해서 내 목숨 바칠게” 남자는 무슨 기회가 온 거예요? 드디어 내 목숨을 아낌없이 바칠 거리가 생긴 거예요. 그게 행복이에요. 근데 결혼하고 난 뒤에 그 새댁이 임신해서 애를 순산하게 되면 그때 그 엄마는(난 애를 안 낳아봐서 모르지만) 행복하데요.
왜 행복하냐? 걔를 위해서 어미가 아낌없이 목숨 바쳐서 널 키워줄게, 하는 어떤 목적의식이 발생된 거예요. 내 목숨을 나에게서 끄집어내서 저쪽으로 바꿔치기 할 수 있는 대상을 발견할 때 인간은 말할 수 없는 행복을 느끼는 겁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6장 24절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다음에 뭡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누굴 따르라? 나를 따르라. 그리고 뒤에 하는 말이,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지 목숨 잃으면 그게 헛방이다. 그리고 하는 말이, 너희들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를 볼 자가 있을 것이다, 하고 17장에 들어가면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 주를 위해서 모든 걸 바쳤던 그 사람들이 예수님과 같이 이야기하잖아요. 그리고 17장 5절인가 내려가면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 “너희는 저 예수의 말을 들으라.”
이 말을 다시 하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친절하시던지. 우리의 목숨을 버릴 그 상황을 주께서 친히 만들어주십니다. 그러니까 불행은 왜 생기지요? 목숨을 바치는 것이 아니고 꼬깃꼬깃 쥐고 있으니까 이거는 화와 저주를 자초하는 바가 되는 거예요. 썩은 것이 있으니까 온갖 일곱 귀신이 다 달려드는 거예요.
인생이 인간에게 불완전하고 한계가 있는 이유는, 분명히 처음 결혼해서 신혼 때는 나는 굶어도 당신은 밥 안 굶게 할게, 이렇게 해서 목숨 바치는 것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됩니까? 서서히 지가 목숨을 바친다는 것이 자기 행함이 되고 어떤 대가를 상대에게 요구하게 되지요. 그때부터는 뭐라 하느냐 하면 성격이 안 맞는다고. 성격 안 맞데. 그럼 처음에 했던 녹음 한 번 틀어보지. 동영상이나 프러포즈할 때 틀어보지요. 프러포즈 다 지워서 없애버렸어.
인간은 실패하면서 자기 자신을 알아요. 자기 어둠의 깊이, 실패하는 가운데서 들어갑니다. 들어가 보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어떤 인간도 자기 목숨을 안 버리려고 하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말씀과 복음으로 우리의 목숨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죄인으로 바꿔요. 우리를 죄인으로 간주함으로써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 필요가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께서 말씀을 사용하신 이유에요.
“너 행복해?” “예.” “행복해서 어디에 쓸 건데?” 따지고 보면 아무 의미도 없어. “너 행복해도 죽잖아. 그동안 왜 살았어?” 산 이유도 없어. 그냥 살고 싶어요. 그냥 살고 싶지 왜 살아야 되는지 몰라요. 누가복음에 보면 망대가 무너졌지요. 몇 명 죽었어요? 십팔 명 죽었잖아요. 울산화력발전소 보일러타워 붕괴로 벌써 세 명 죽었지요. 탑 철거하다가. 뉴스 안 봐요? 세 명 죽었는데 몇 명이나 묻혔는지 모르잖아요. 원래 인간은 언제 죽어도 마땅한 겁니다. 아직 살아 있는 게 이상하지요.
저들이 망대 무너져 죽었다고 우리보다 죄 더 지었다고 생각하지 마라. 너희들도 회개치 아니하면 그와 같이 망한다고 했지요. 자, 회개의 수준이 어느 정도 돼야 됩니까? 시껍했다 수준입니까? 아니지요. 회개의 수준은 어느 정도냐 하면 십자가에 들어갈 때 나는 그동안 내가 살 이유도 없으면서 예수님한테 차출되었기 때문에 살았다, 이래 돼야 돼요. 예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뽑혀 나왔다, 그 정도 돼야 이게 회개입니다. 운다고 회개 아니에요. 안 울어도 괜찮아요. 나는 주님이 이미 내 목숨의 소유자다.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 정도 될 때 회개 상태가 된다, 이래 보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는 것은 뭐냐? 주의 말씀과 우리가 갖고 있던 옛날 목숨이 얼마나 죄와 하나님의 의, 그러니까 너희는 그 나라와 뭘 구하라? 그의 의를 구하라. 더 이성 선악 간에 너의 완전함을 구하지 말라. 구하니까 뭐가 생긴다? 염려가 생기고 염려 때문에 바로 분노와 화가 생기고, 다 네 탓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네 탓이라는 손가락은 어디로 갑니까? 하나님께로 가겠지요. 하나님의 원수의 모습을 그대로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역대하 20장을 이걸 염두에 두시고 몇 가지 중요한 개념들을 제가 집어들이겠어요. 20장 9절, 갑자기 전쟁이 일어났어요. 전쟁을 일어난 이유를 다시 설명 안 해도 되겠지요. 인간의 율법과 지식으로 재판을 해봐야 이게 전부 다 누굴 위해서? 나 좋으라고. 나 목숨 건졌어. 자기 좋은 쪽으로 하기 때문에 온전하게 말씀의 취지가 나오질 않는 거예요.
분명히 너를 위함이 아니고 여호와를 위함이라고 돼 있으면 인간의 자기 위함에서 여호와 위함으로 넘어갈 재주가 인간에겐 없습니다. 모든 일어나는 것이 결국은 나한테 멈추는데 어떻게 그것을 하나님께 옮길 수 있습니까? 나를 위함이 최종적 의미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 목숨을 위해서 살 수밖에 없는 게 내 목숨에 최종적 의미를 여기다가 부어놓은 거예요.
나의 의미에서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나를 위함이 아니지요. 자기를 부인해야 되니까. 뭡니까? 하나님을 위함이잖아요. 어떻게 옮겨갈 수 있습니까? 여긴 뭐가 필요하다? 전쟁이 필요한 거예요. 전쟁이 필요하면서 하나님을 위한다는 것은 바로 말씀 본연의 취지로 옮겨가는 거예요. 인간을 위한 말씀이 아니고 하나님이 스스로 어떤 작업을 하는데 그 작업에 대한 청사진과 설계도면이 바로 말씀인 겁니다.
성경은 바로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 나오지만 성경은 곧 누구를 위해서 증거하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에 대해서 증거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5장 39절 말씀이에요. 신약에서 그 말씀하셨는데 구약은 인간이 어디서 한계가 되고 무엇이 부족하고 어느 것이 메시아보다는 못하느냐? 하나님이 지정한 사람 말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느냐를 역사를 통해서 실습을 통해서 현실상황을 만들어나가시는 겁니다.
20장 9절부터 보게 되면, “만일 재앙이나 난리나 견책이나 온역이나 기근이 우리에게 임하면 주의 이름이 이 전에 있으니 우리가 이 전 앞과 주의 앞에 서서 이 환난 가운데서 주께 부르짖은즉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 이것 이미 솔로몬 역대하 6장 24절에 나오는 말씀 맞아요. 솔로몬이 성전 짓고 난 뒤에 하나님이 솔로몬의 입을 통해서 백성들에게 알려줬습니다.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고, 숨겨놓은 내용을 왕이라는 직책, 사명을 통해서 자기 백성에게만 알려지게 돼 있다. 이게 이 구조입니다. 시스템이 그래요. 자꾸 예수님 보여주면 믿겠다, 하지 마세요. 인간을 통해서 숨겨진 하나님이 나타나게 돼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이 한계가 있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제대로 못 나타나지요.
그러니까 인간 대신에 새로운 진짜 인간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온전히 다 이루시는 겁니다. 그럼 모든 인간은 온전하다, 온전하지 않다? 온전하지 않아요. 온전하지 않은 것을 온전하게 만들 필요 없어요. 온전하지 않으면 죽으면 되는 문제지 온전하지 않은 것을 온전하도록 시도해봐야 그거는 실패입니다. 그거는 예수님의 공로를 훼방하는 짓이에요. 예수님이 어떻게 되든 모르겠고 나는 나의 온전함을 추구하겠다? 이것은 뭐냐 하면 ‘자기를 위해서’의 다른 버전이에요.
그래서 여러분한테 물어봅니다. ‘나를 위해서’에서 ‘하나님을 위해서’로 옮겨갈 때 전쟁이 벌어졌다. 전쟁이 벌어질 때 옮겨가야 되는데 이 전쟁을 누구 전쟁으로 바꿔야 돼요? 나의 전쟁돼야 됩니까, 하나님의 전쟁돼야 되겠어요? 하나님의 전쟁돼야 되겠지요. 그게 15절에 나옵니다. 아하시엘이, 아하시엘은 하나님의 성신을 받은 사람이에요. “야하시엘이 가로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과 여호사밧왕이여 들을찌어다” 왕보다 더 높아, 이제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전쟁은 누가 전쟁이라고요? 이건 네가 손댈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설 전쟁이다. 이것은 다윗이 골리앗과 전쟁할 때 골리앗에게 이야기한 말이에요. 골리앗 너는 사람을 상대하지 나는 사람을 상대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가지고 너를 상대하게 했다. 이 말입니다. 소년 다윗인데 나이 적다고 철없고 그런 것 아니에요. 나이 적고 소년이라도 하나님에 합당한 말을 하잖아요.
이 여호사밧에 온 전쟁은 어떤 전쟁이냐 하면 모압과 암몬이 연합해서 쳐들어온 전쟁입니다. 모압과 암몬이 어디 있느냐 하면, 이집트 여기 있고 중간에 홍해 있고, 홍해에서 올라가는 시내산. 홍해 건너와서 시내산으로 올라갑니다. 올라가면서 여기에 모압, 그 위에 암몬 이렇게 됩니다. 이게 사해, 갈릴리 바다 있고 여기에 요단강 있고. 이쪽에는 지중해, 이게 이스라엘입니다. 예루살렘 여기 있어요. 밑으로 8킬로미터 지점에 베들레헴 있고요. 베들레헴 밑으로 세일, 에돔. 에돔, 모압, 암몬 이렇게 됩니다. 암몬 위에는 아람. 지중해 쪽으로 가자지역, 이게 블레셋. 이건 이스라엘.
그런데 이 모압, 암몬이 계속 다윗 때는 조공 바치다가 이쪽 예루살렘을 공격을 합니다. 역대하 20장 끝부분에 가게 되면 모압, 암몬이 유다나라 여호사밧을 공격하게 돼 있는 이 나라가 어찌된 셈인지 이거는 여호사밧도 몰랐어요. 여기 나오는 아하시엘이라는 하나님의 신을 받은 본인도 몰라요. 이점이 중요한 거예요. 어떤 대책이, 두렵고 그것 봅시다. 20장 15절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고 돼 있지요.
17절 봅시다.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고 내일 저희를 마주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라, 이 말은 하나님이 만든 상황은 항상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온다? 두려워할 수밖에 없고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이걸 사자성어로 하면 ‘대책 없음’ 아무 대책이 없어요. 대책이 있으면 두렵고 놀라겠습니까? 아무 대책이 없어요. 심지어 하나님의 신을 받은 아하시엘도 대책 없습니다. 이 전쟁의 추이가 어떻게 개시되고 어떻게 끝나는지를 본인도 몰라요. 아무 대책도 없는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라, 이게 뭐예요? 사람들이 자신의 완전함을 지키기 위해서 두렵고 놀라운 일은 빨리 처리가 돼야 돼요.
간증집회에 그런 게 안 많습니까? 개척교회 하는데 삼백만 원 사기 당했다는 이야기를 제가 광주에서 했지요. 어떤 이름 모를 신실한 권사님이 새벽 기도하다가 은혜 받아서 자기한테 이천백만 원 줘서 삼백만 원 떼고 천팔만 원 다시 건져서 개척교회 하게 된 이 이야기했다고요. 그래서 두렵고 놀란 게 없어졌어요? 그게 지금 누굴 위해서 하는 겁니까? 그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거죠.
여러분, 아까 봤지요.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 자체가 인간에게는 하나님께서 맡긴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누가 전하느냐? 십자가가 전해요. 따라서 우리 인간은 내가 다이렉트로 하나님을 위해서 하면 안 되고 어디 가 있어야 돼요? 어디 가야 됩니까? 십자가 자리에 가야 되지요. 십자가 자리에 가서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살잖아요. 나는 죽을 때 무엇까지 죽어야 돼요? 나의 포부와 기대와 희망과 개척교회 성공부터해서 앞으로 내가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잘 전하는 이것까지 어떻게 해야 돼요? 어디 가서 죽어야 돼요? 십자가, 거기에 죽어야 되겠지요.
십자가 죽고 난 뒤에 또 손끝에 기를 넣어서 <킬빌2>처럼 나오지 말고, 그건 영화고요. 주께서는 관 채로 사용한다고요. 죽은 채로 사용하잖아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 채로 활동을 한다고요. 그러니까 고린도후서에서 사도 바울이 사십 대에 하나 감한 39대의 매를 네 번이나 맞고, 강도의 위협과 바다의 위협과 여러 가지 환경의 어려움이라도 자기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누가 했다? 주께서 그런 상황을 네가 한 게 아니고 내가 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아무것도 아닌 나를 사용했다, 이래 되는 겁니다.
제가 역대하 20장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뭐냐? 그들은 뭐가 없다? 아무 대책이 없어요. 이래 하면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주고, 그런 걸 몰라요. 그걸 알면 안 돼요. 그걸 알면 누구 일이 되느냐 하면 하나님 잘 믿는 나의 일이 돼버려요. 하나님 잘 믿어서 하나님한테 도움 받은 나의 일이 된다고요. 그러면 결국 남는 것은 뭡니까? 한 발자국도 ‘나를 위해서’에서 떠난 적이 없어요.
우리는 ‘나를 위해서’에서 주의 일로 떠나려면 아까 구약에선 하나님 하지만 신약에선 뭐로 가야 한다 했습니까? 십자가로 가야 되겠지요. 십자가로 가려면 그냥 갑니까, 죄인 되어서 갑니까? 죄인 되어서 가요. 십자가는 그냥 가는 게 아니고 우리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십자가 사건은 우리를 못 박는 사건이에요. 도마로 하여금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너는 멀쩡하고 나는 못 자국 있고. 네 배 한 번 들춰봐. 구멍 안 났잖아. 내 구멍 난 거야. 이제 믿겠냐? 네 대신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믿겠어? 이게 십자가 사건이에요. 주님께서 창 자국, 못 자국 왜 생겨야 됩니까? ‘나를 위해서’를 떠나지 못했기 때문에 생겼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신이 시킨 대로 아하시엘이 이렇게 지적합니다. 17절에, “너희는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고 내일 저희를 마주 나가라” 여기서 그다음 대목 나가기 전에 먼저 하나 생각할 게 있어요. 19장에서 8절에, “여호사밧이 또 예루살렘에서 레위 사람과 제사장과 이스라엘 족장 중에서 사람을 세워 여호와께 속한 일과 예루살렘 거민의 모든” 그다음에 뭡니까? ‘송사’ 소송 이야기하는 겁니다.
소송 이야기는 신명기 25장에서 28장까지 다 나와 있어요. 24장도 나와 있고. 한 가지 예를 들게 되면 신명기 24장 10절에서 11절에 보게 되면, “무릇 네 이웃에게 꾸어줄 때에 네가 그 집에 들어가서 전집물을 취하지 말고 너는 밖에 섰고 네게 꾸는 자가 전집물을 가지고 나와서 네게 줄 것이며” 그리고 생계수단이 되는 것은 담보물로 잡을 수 없다. 맷돌 위짝 같은 것은 담보물로 잡으면 안 된다. 하나 밖에 없는 외투도 담보물로 잡으면 안 된다.
그런데 돈은 빌려줬지 돈 받을 길이 없다. 그러면 어떻게 돼요? 차압딱지를 붙여야 되지 않습니까? 왜? 돈을 안 갚았으니까 그 집에 있는 맷돌 위짝이 됐든 옷이 됐든 전부 다 이건 뭐예요? 채권자 입장에선 이젠 누구 것이다? 내 것이다. 그 집에 들어가지 말라고? 그 집도 누구 집이에요? 돈 안 갚았으면 누구 집입니까? 내 집이니까 들어가는 거예요. “갚을 게 없습니다.” “그러면 나한테 노예로 팔려라.” 그럼 노예가 되는 거예요. 자발적 노예가 되는 거예요. 갚을 길이 없기 때문에.
그러면 왜 돈을 못 갚았지요? 돈 못 갚은 이유는, 갑자기 전염병이 돈다든지, 갑자기 기근이 가뭄이 온다든지, 전쟁이 일어나서 가장이 전쟁터에서 전사해버리면 농사지을 수 없어서 씨 뿌릴 종자도 없을 때는 일단은 빌려놓고 보는데 빌릴 때 이미 빚졌잖아요. 애들도 먹여 살려야 되니까 돈 빌릴 때 이미 이자 쳐서 받고 돈을 빌렸기 때문에 이자부터 다 달라는 거예요. 물론 유대 율법에는 이자 받지 말라 하지만 그건 마음대로 안 되잖아요.
신명기 좀 읽어보게 되면 얼마나, 지금 제가 하는 말이 이거에요. 선과 악 중에서 재판을 한다는 말이 뭔 뜻입니까? 모든 사람이 선하면 재판 일어날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창기가 자기 몸으로 애를 죽여 놓고 옆에 있는 애를 데려와서 자기 아이라고 우기는 이거는 악한 일 맞지요.
근데 악한 일을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발생시킵니까? 악한 일이 왜 일어나야 돼요? 그거는 선악에 대해서 인간이 온전하고 싶어도 지금 선악체제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 자체가 악이고 온전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온전하지 않기 때문에 율법에 의해서 너희들 율법 위반했을 때 저주하는 것이 하나님께서는 마땅하고 합당한 조치라는 겁니다. 너희들을 전부 다 몰살시켜도 너희는 할 말이 없고 당연한 걸로 받아줘야 돼요.
왜냐하면 율법에는 뭐가 붙어있습니까? 율법을 지키지 못한 자는 뭐를 받는다? ‘저주를 받는다’에 대해서 기존에 자기 완전함을 추구하는 자들이 자기가 믿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는다고 한다면 나는 그런 하나님을 안 믿을 거야, 할 거잖아요. 저주가 주어지는 하나님을 안 믿고 뭐 믿겠어요? 산당에 올라가서 바알과 아세라한테 비는 겁니다.
바알과 아세라의 특징은 뭐냐? 저주가 없어요. 다만 안 빌면 안 도와주지면 빌면 뭐한다? 도와준다. 여러분, 불교신자에 갓바위 미륵보살이 저주하는 것 봤어요? 없지요. 갓바위 알지요. 부산도 알고 대구도 알고 전국이 다 알잖아요. 갓바위가 저주하는 것 봤습니까? 다만 갓바위에서 정성만 다하면 세 가지 중에서 한 개가 얻어지잖아요.
그러니까 갓바위는 나를 안 쳐도 나는 갓바위에 빌면 나한테는 이익이 되고. 왔다지요. 그게 자비로운 신 아닙니까. 부처가 인간에게 벌 내린단 말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요새 얼마나 인간이 종교한테도 얼마나 자기 위주입니까. 이게 교육이론에도 그렇게 나와요. 비고츠키라는 러시아 교육학자인데 이 사람이 어떤 교육이론을 했느냐 하면 교육이론을 제가 적어드리겠습니다.
근접발달이론인데 뭐냐 하면, ‘혼자서 감당하고 익힐 수 있는 그 내용 이상으로 교사는 가르쳐라’ 이게 무슨 이론이냐 하면 집에서 혼자 알 것 같으면 학교 나올 필요 없다는 거예요. 교사의 역할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 말고 혼자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그것을 교사가 가르칠 때 학교라는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어때요? 상식적으로 맞아요, 안 맞아요? 맞지요. 지 아는 걸 왜 남한테 물어요. 모르니까 묻잖아요.
그러니까 인간 교육은 뭐냐 하면 이미 자기는 스스로 온전해지고 싶은 거예요. 신이 되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사회라는 건 왜 필요하냐? 온전한 나를 온전하게 도움을 주고 보탬이 될 때만 나는 그 사람에 대해서 한 수 배우겠습니다. 내가 제자가 되겠습니다, 하는 말을 하는 거예요. 이게 무슨 이론이라고요? 근접발달이론. 근접해서 가까운,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인간들은 지가 아쉬운 것만 지가 선택해서 자기 것으로 만든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뭘 몰라요? 진정 나의 깊숙한 어두움은 뭔지를 인간은 모르지요. 왜? 자기는 항상 완전해야 되니까. 자기 어두운 곳은 남한테 들키지 말아야 되니까. 이게 인간은 타고나잖아요. 여기에다 율법을 주니까 인간들은 율법을 어디다 써먹습니까? 자신의 죄를 아는데 안 써먹고 지금보다 내가 더 행복해지고 내가 완전하다는 것을 남한테 인정받을 때 율법을 써먹으려 한단 말이죠. 이게 오늘날 한국교회와 똑같잖아요.
“목사님, 저의 죄를 알려주세요.” 이렇게 찾아오는 사람 없어요. “완전하고 싶은데 어떻게 성화가 됩니까?” 지금 이렇게 온다고요. 우리 집안에 뭔가 우환이 있는데 어떻게 하면 이 우환이 벗어지겠습니까? 저 같으면 갓바위한테 비세요, 하지요. 산당 있잖아요, 산당. 거기 가 빌란 말이죠. 왜냐하면 불교는 인간을 지적하지 않거든요. ‘그저 욕심이 많습니다’ 이런 것. 욕심이 많다는 말은, 당신은 욕심을 본인이 알아서 뭐 할 수 있다? 조절이 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근접발달영역에다가 한 단계 들어가면 뭐냐? 잠재적 발달영역이 나와요. 잠재적이 뭐냐 하면 나중에는 이것은 교사가 그렇게 함으로써 그동안 학생 본인이 몰랐던 ‘이런 놀라운 능력이 있었네’ 하는 것을 자극을 줘서 이제는 스승을 뛰어넘는 학생이 된다 이 말이죠. 하여튼 지옥을 더욱더 지옥답게 이 세상 그렇게 굴러가는 거예요. 오로지 자기만을 위해서.
그런데 이 비고츠키가 잠재적 발달영역의 수준을 언급하면서 복음적으로 뽑아낼 중요한 교훈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잠재성이라 했지요. 잠재성은 인간이 학습자가 스스로 할 수 있는 능력 밖의 문제입니다. 악마의 통제는 인간이 다룰 수가 없어요. 왜? 인간은 모든 게 죄로 나타나게 되니까. 그게 율법의 기능이에요. 율법은 의롭게 할 수 있다가 아니라 네 근원상 네가 의롭게 될 수가 없다를 지적합니다.
그래서 많은 율법을 교육시키고 재판을 통해서 실제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문제지요. 개인적인 돈 관계 문제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 전쟁은 어떤 전쟁이에요? 통째로 포괄적으로 개인적으로 서로 누가 옳으냐, 그르냐 보다도 이스라엘 나라 자체가 지금 위기에 빠진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누구 앞에 나와야 돼요?
역대하 20장 20절, “이에 백성들이 일찌기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가로되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아 내 말을 들을찌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라고 하지요. 그리고 17절에 보면, “너희는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고 내일 저희를 마주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고 돼 있지요. 지금 하나님께서 전쟁을 통해서 너나와 네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 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한 그룹으로 이스라엘 전체를 누구 앞에 세웁니까? 여호와 앞에 나서게 하는 거예요.
여호와 앞에 서는데 어떻게 서는가? 그게 바로 찬양대를 가지고 만들었습니다. 찬양을 한다는 것은 일이 끝날 때 하는 겁니까, 끝나기 전에 하는 겁니까? 찬양이란 기분 좋아서 노래하잖아요.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이미 끝나고 난 뒤에 불러야 되잖아요. 끝나지도 않았는데 미리 지레짐작으로 성급하게 하다가 나중에 패배하면 낭패나 웃음거리 되잖아요.
그런데 여기에 보면 여호사밧이 이미 승리한 걸로 생각해서 찬양대로 군대를 조직했습니다. 조직해서 나가보니까 어떤 누구도 예상 못한 일이 벌어졌어요. 아까 이스라엘 지도에서 모압, 그다음에 암몬 이 두 나라가 유다나라 치다가 어딜 치느냐 하면 세일, 에돔을 쳐버려요. 에돔을 치니까 저희끼리 치다가 저희끼리 다 죽었어요. 이거 하나님의 신을 받은 레위인이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몰랐습니다.
주의 뜻은 이겁니다. ‘너의 미래에 대해서 네가 몰라도 돼. 미리 염려하지 마. 몰라도 돼. 자꾸 계산하지 마. 몰라도 돼.’ 다만 그 현실 속에는 이미 다 이루었다는 차원에서 주님께서 너를 죄인으로 다루어서 죄 용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로 주님의 사랑을 다루기 위해서 내일 되면 네가 모르는 상황이, 모레 되면 네가 모르는 상황이 계속 벌어지고 일어날 겁니다. 이러면 어떻게 하나, 저러면 어떻게 하나 그것 염려할 권한과 자격은 우리한테 없습니다.
그래서 24절에 가보니까 “유다 사람이 들 망대에 이르러 그 무리를 본즉 땅에 엎드러진” 건 뭐뿐이다? only 시체, 시체뿐이에요. 전쟁하러 나왔는데 시체만 있으니까 뭘 건집니까? “여호사밧과 그 백성이 가서 적군의 물건을 취할쌔 본즉 그 가운데에 재물과 의복과 보물이 많이 있는고로 각기 취하는데 그 물건이 너무 많아 능히 가져갈 수 없을만큼 많으므로”(25절) 많아도 너무 많아요. 찬양할 만 하지요.
그런데 미리 알고 찬양했습니까, 모르고 찬양했습니까? 모르고 찬양했다는 말은, 적군은 시체 되고 우리는 그 전리품 챙긴다는 걸 근거로 해서 찬양한 게 아니고 이 싸움은 우리는 빠지고 주님이 개입할 일인 것을 내용으로 삼아서 찬양한 거예요. 그래서 이름이 뭐로 바뀌느냐? 브라가 골짜기로 바뀌어요. 26절, 브라가. 브라가 뜻은 뭐냐? 찬양, 송축의 골짜기로 오늘날까지 그곳을 브라가 골짜기라 일컫더라, 이렇게 돼 있어요.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 강의를 정리한다면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냈잖아요. 건져냈을 때 이스라엘은 오해했어요. 하나님은 건져낸 우리를 위해서 일하신다고 오해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진짜 오해였어요.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신명기 8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만나를 줬어요.
만나를 줬는데 이스라엘은 그걸 양식으로 오해한 거예요. 그러나 신명기 8장에는 내가 준 것은 양식을 준 적이 없다. 말씀을 주었다. 그 말씀의 내용은 뭐냐? 가만있어. 내가 너를 키운다는 거예요. 어떻게 키웁니까? 집에 가만있으면 까마귀가 짜장면 배달해줍니까? 그거는 네 방식이고 네 대책이고.
네가 대책 세울 수 없는 다른 대책으로 우리를 살리는데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방해되는 주께서 일방적으로 살리는데 방해되는, 누가 방해되느냐 하면 나의 잘남과 나의 완전함과 나의 똑똑함과 나의 위대함과 자존심이 자꾸 방해를 일으킨다. 잘난 게 방해를 일으키는 거죠. 그걸 우리보고 고치라면 못 고쳐요. 우린 타고났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완전함을 지키는 것은 어느 누구도 욕하면 안 돼요. 타고난 거예요. 못 고칩니다. 참 죽으면 죽었지 나의 완전함을 포기를 못해요. 가룟 유다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하나님께서 뭘 일으키느냐? 예상 못한 다툼이나 힘겨운 전쟁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그 전쟁의 특징이 대책이 있는 전쟁 같으면 우리 전쟁이 돼요. 집안에 뭐 어려운 일이 있다. 그러면 누구한테 돈 빌리면 되고 ‘내년에 갚을게요’ 이게 되는데, 아무 대책 없는데 문제는 일어났을 때 그때 어떠냐 하면 전에도 바쳤지만 이제는 네 목숨을 니가 지지 말고 네가 목숨 바칠 곳이 새로 생겼다고 그걸 송축하라, 찬양하라, 기뻐하라. ‘아 내 목숨은 여태껏 내 게 아니고 주의 것입니다. 주께서 이끌었습니다’를 다시 한 번 깨닫는 순간이 찾아온 거예요.
그때 그 마음으로 여러분들이 찬송가를 불러보세요. 그렇게 상투적으로 반복해서 불렀던 찬송가가 어느 구절 하나하나가 진짜 쏙쏙 들어오지요. 체험이 되는 찬송가가 될 거예요. 어떤 찬송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갈 곳 있지. 갈 곳 있는데 또 내가 이 땅에서 완전자로 살려는 내 모습이 죄구나. 그다음에 또 딴 것,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또는 내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어느 찬송가 하나 그게 현실과 괴리된 찬송가는 하나도 없었다는 것을 새로운 현실감을 여러분들이 갖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대책 없이 그냥 천사 같이 찬송만 하도록 차출되고 부름 받은 자가 바로 오늘날 우리 성도인 것을 그 짧은 순간이지만 깨닫게 됩니다. 그럼 그다음 순간은 어떻게 되느냐? 그다음은 또 다른 전쟁이 준비돼 있어요. 그거는 우리 소관 아닙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도 바울이 말씀하신 고린도전서 15장 10절의 말씀이 사도 바울에게만 적용되지 말고 매일 우리에게 적용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