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05a 울산강의-역대기하(15강) 18장 7절 : 온전치 못한 존재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역대하 17장부터 하겠습니다. 거기에 왕이 나와요. 여호사밧이란 왕이 나오는데 이 여호사밧이란 왕 이야기가 17장, 18장, 그다음에 19장, 20장까지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여호사밧에 대해서 굉장히 주목을 합니다. 주목을 하는데 17장 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여호사밧과 함께하셨으니”라고 돼 있어요. 그러니까 여호사밧과 여호와의 관계에 주목하라, 오늘날 우리보고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반인들과 함께 한다는 말을 안 하고 왜 왕인 여호사밧과 함께 하신다는 이야기를 하시는가? 그것은 왕이라는 한 사람과 하나님과의 계약관계가 성사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인간이 아니라 왕의 자리와 그리고 하나님의 왕 되심의 자리가 서로 계약이 체결돼 있습니다. 그 계약을 다윗언약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윗계약이라고 합니다.
왕에 대해서 하나님이 계약을 한 것은, 왕이 그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하나님 앞에 제대로만 한다면, “네가 왕이니까 왕 밑에 있는 나라 백성들도 내가 봐줄게. 내가 그들에 대해선 너와만 상대하고 저쪽은 상대 안 하고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복을 줄 수도 있고 저주를 줄 수도 있다.” 이 계약이 하나님의 다윗언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다윗언약에 여러분 나설 의향 있습니까? 그 자리, 왕 자리에 제가 나서서 다른 사람 제치고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겠습니다, 뭐 이런 의사가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네가 해라, 자기는 뒤로 꽁무니 빼고 남한테 밀어붙여가면서, 계약자리에 네가 나서라, 하고 좀 미는 경향이 있습니까? 여러분 둘 중에 어느 것 하고 싶어요? 내가 하나님과 계약하고 싶습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 덕보고 싶습니까? 어떤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이게 오늘 강의 초반에 나오는 어려운 점입니다.
‘나의 행위를 예언(하나님의 계시)과 결부시킬 의향이 있습니까?’ 이게 신약에 오게 되면 모든 사람이 지금 이 원칙에 어쩔 수 없이 말려들게 돼 있습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구약에서는 ‘왕, 네가 잘해라. 우리는 당신만 쳐다보겠다’ 이렇게 되는데, 신약에 오게 되면 베드로전서 2장 같은 경우에 너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 했거든요. 우리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의 예언과 하나님의 계시와 결부시킬 수밖에 없어요. 의향이 있든지 없든지 관계없이 강제로 이렇게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나라는 것은 우연이에요, 우연.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그런 우연. 우연적 존재입니다. 그런데 예언을 뭐냐 하면 이거는 필연이거든요, 필요. 반드시 세상은 우연 따라 가는 것이 아니고 필연 따라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필연이니까 이거는 진리겠지요. 이 세상은 원칙과 진리가 있는 그게 필연이에요. 필연에 내가 결부되지 아니하면 나는 무의미한 존재로 전락해서 필연의 세계에 들어갈 수도 없이 탈락되지요.
그걸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는 강제로 왕에게 이 우연한 인간 존재가 필연적인 하나님의 뜻과 결부시키도록 강제 조치한 것이 다윗언약이에요. “너 왕 이리 나와. 너는 좋고 싫고 없어. 무조건 너는 계약과 결부될 인간으로 살아야 돼”라고 하면 왕이, “왜 많은 사람 있는데 저보고 그래요? 다른 사람들 있잖아요.” 그러면 안 돼요.
왜냐하면 너는 왕이니까. 그럼 다른 사람은 뭐냐 하면 다른 사람은 이렇습니다. 크게 쓰겠습니다. ‘잡범’ 시시한 되지도 않는 죄 지은 잡범. 죄 같지도 않은 죄 지어서 파출소 왔다 갔다 하는 그 잡범. 노상방뇨 이런 것 있잖아요. 추잡스럽기 짝이 없는 자기 몸뚱이 하나 건사 못해서 법에 저촉된 잡범들이죠.
그러면 예언과 결부된다는 왕은 법, 율법입니다. 율법과 자기 몸뚱이가 어떻게 돼요? 연결돼야 되고 결속돼야 돼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나 건드리면 법 건드린 것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첫 번째 나오는 중요한 대목에 들어왔어요. 여러분 그렇게 살아갑니까? ‘나 건드리면 하나님 건드린 거야’ 그렇게 살아갑니까?
만약에 어떤 가정형편이 열악한 가진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모든 게 돈도 없고 권력도 없고 가진 게 없어서 학교에서 왕따 당하는 그런 아이가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이 그 사정을 아주 무시해요. 어느 날 삼촌이 왔는데 삼촌이 재벌이에요. 그다음부터 그 삼촌이 그 반에 햄버거 다 돌리고 피자 사주고 누구든지 내 조카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는다고 엄포 놓고 갔다면 그럼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아이 입장에서는? 전처럼 연약하고 아무것도 없고 나약하고 누구나 함부로 건드리는 그런 대상이 되었어요, 안 되었어요? 안 됐지요. 갑자기 신분이 달라졌지요.
왕이란 것은 본인이 왕 노릇하면 안 되는 겁니다. 왕은 뭘 해야 되느냐 하면 자기의 연약함과 모자람을 율법에게 그 권한을 넘겨주고 자기는 빠지면 돼요. 자기가 있는 왕 자리를 이거는 인간들이 권력 모아서 만든 그 자리라고 하면 안 돼요. 그 자리에다 내가 얼마나 대단한 인간인 줄 아느냐, 그걸 집어넣으면 안 돼요. 자기가 있던 자리에다 뭘 바꿔치기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율법을 거기다가 집어넣고 자기는 빠져버려야 돼요. 그걸 왕은 뭐냐? 율법의 수호자.
자, 그러면 신약시대에 와서 성도는 무엇의 수호자가 되겠습니까? 구약에선 왕이란 율법의 수호자라면 신약의 성도는 율법의 완성이니까 뭐가 되겠습니까? 복음의 수호자가 되겠지요. 또는 예수님의 수호자가 되는. Ranger, 레인저가 뭐냐 하면 삼림감시원이에요. 수호자, 유격대원 이런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레인저라 하는 것은 자기를 돌보지 않습니다. 명분 같은 게 있어요.
내가 지킬 것이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이 뭔가 있는 자, 그리고 그 중요한 것을 내 목숨과 맞바꿔치기해서 그다음부터 자기 인생은 신바람 나는 인생이에요. 그전까지는 나를 지키는 인생이었는데 이제는 나를 지키는 것이 아니고 내 목숨보다 소중한 것을 지키는 자로써 내가 신분이 달라졌어요. 이게 그겁니다. 레인저, 수호자거든요. 감시원.
성경에서 성도에게 주신 주의 말씀은 딱 한 가지입니다. “전하라” 이 전하라는 이것이 우리의 귀에 안 들어오면 그다음부터는 내 것 지킨다고 평생을 핍절해요. 핍절한다는 말이 뭔 뜻인지 알겠지요. 자기 걱정에 자기가 감당을 못해서 슬슬 야위어가는, 점점 쪼그라드는 인생. 불안해서 못 살아요. 누가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걱정근심이 떠날 날이 없어요. 도대체 어떻게 지켜야 내 인생 잘 지켰다고 할 수 있느냐, 그 고만으로 아침 눈 떠서 저녁 잘 때까지 꿈속까지 걱정이 그 걱정이에요.
그러니까 핍절했다는 말, 내 영혼이 바짝 말라갔다는 말은 나의 온전함의 무게와 중량을 견뎌내지 못한다. 나의 온전함의 그 무게성을. 뭐 젊을 땐 까불기도 하는데 나이 들면 이게 무너집니다. 요새 자식들이 전화 한 통 없다, 무심코 나오는 이 말. 저희 아파트 살 때 4억 내놨거든. 입 닦고 나보고 오지 마래. 내 돈 4억 들어갔는데. 이런 이야기.
지금 이 사람은 자기 온전함을 사수하기 위해서 견뎌내지 못하면서 낑낑거리면서 그 무거운 돌, 화강암, 채석장에 사각형 돌 있잖아요. 그게 어깨 위에 얹은 것 같아요. 그걸 밀어낼 수가 없어요. 왜? 그게 평생에 마음에 둔 자기의 온전함과 자기의 가치거든요. 자기의 존재감이란 말이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그게 귀에 들어오지 않아요. 내게로 오라 편히 쉬리로다, 편히 쉬고 뭐고 그 소리도 듣기 싫어요. 내가 원하는 온전함을 지탱하고 싶은데 그게 평생토록 나의 과업이었거든요. 그런데 이게 날이 갈수록 수월치가 않아요.
그럼 이 사람은 뭘 모르느냐 하면 말씀의 온전함을 몰라요. 하나님의 언약의 온전함, 하나님의 약속의 온전함을 모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기껏 안다는 게 뭐냐? 내가 이 정도 하면 온전할까, 내가 어떻게 살면 대단할까? 지금 여기에 온 정신을 평생의 에너지를 거기다가 다 쏟아 부은 거예요.
내가 가정화목을 위해서 얼마나 새벽부터 일하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자기 아내보고, 당신은 내 이 고통을 아나? 코피 쏟아가면서 일했는데 당신은 내가 돈 번 것을 흥청망청 썼잖아. 콩나물 사먹고, 뽀빠이과자 사먹고 흥청망청 썼지? 내 알아. 보통버스 탈 걸 급행 탔잖아. 이백 원 더 많은 것, 이런 식으로.
모든 나오는 게 뭐냐 하면 나의 온전함을 내가 못 지킨 것은 누구 탓이다? 전부 다 남 탓이에요. 모조리 다 남 탓이에요.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서 여호사밧은 하나님과 동행해서 어떻게 됐습니까? 자신의 온전함을 포기해버리고 말씀의 온전함으로 옮겨 탄 거예요. 내 온전함을 애당초 포기한 거예요. 쪼다가 되던 바보가 되던 상관없어요.
내가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은 말씀이, 하나님의 약속이 온전하다는 그것에 대해서 너무 기쁘다. 그 기쁜 이유가 뭐냐? 신약성경에서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딱 세 자지요. ‘전하라’ 다시 말해서 너한테 이런 사명감이 있나? 사명감이 없으니까 내 것 지키려고 하잖아요. 사명감이 주어지게 되면 내 것 지키는 나의 사명은 애당초 이걸 포기하게 됩니다.
나 지키는 것이 내 평생 사는 이유가 의미와 가치가 아니었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약속의 온전함은 우리를 실망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을 기쁨으로 소개하고 알려주고 그걸 자랑하는 것, 거기에 대해서 감사하는 것, 이 순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다 없어졌지요. 평생을 나를 괴롭히던 짓누르던 채석장의 무거운 돌덩어리, 그런 것들이 어디 갔지? 다 없어진 겁니다.
제가 늘 생각하는 것은, 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해서 늘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이 육적에서 영적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는가? 한시도 이걸 생각 안 할 수가 없어요. 세상에 있는 뉴스나 만나는 사람 모든 그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안 들으려 해도 들리니까, 전부 다 육적이에요. ‘내가 나의 온전함 지키기 위해서 이렇게 애썼다.’ 전부 다 그 이야기에요. 교회 가도 마찬가지지요. 하나님이 도와줘서 내가 온전해졌다. 그 자랑 아닌 자랑 같은, 이상하게 자랑 아닌 것 같은데 가만 들어보면 자랑 같기도 하고. 하나님이 도와줬다느니.
하나님은 누굴 안 도와줘요. 이런 걸 적어놓으면 참 좋은데요. 진짜 따라 해보세요, 하고 싶다, 정말. ‘말씀의 성취는 나의 죽음’이에요. 근데 교회 가면 말씀의 성취가 뭐냐 하면 지 멀쩡한 게 말씀의 성취인 줄 알고 착각하고 있어요. 말씀이 성취되면 나는 있으나마나 에요. 나의 온전함, 생각도 안 나요. 내가 온전하든 안 하든 구원받는 것은 나의 온전함과 상관없는 일이거든요.
‘나는 평소에 이렇게 살았습니다.’ 주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내가 아이 네 명을 다 키웠고, 물론 세 명 키우는 것보다 힘든 건 알지만, 다섯 명 키운 것보다는 덜 힘들잖아요. 어떤 사람은 어린이집 오십 명 키우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보단 덜 하잖아요. 우리의 온전함은 구원받는 데 방해돼요. 주님의 말씀의 성취는 약속이거든요.
약속은 네가 따로 뭘 하는 게 아니고 내가 일방적으로 다 했기 때문에 너는 신바람 이박사, 신나게 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분이 다 했어, 이것 전하면 돼요. 어떤 환경이든지. 내가 해도 얼마 버느냐가 아니라 그 직장 환경은 나 봐. 쪼다라도 기쁘게 살잖아. 그걸 전하는 거예요. 가정생활이 됐든 직장생활이 됐든. 오늘 한 달 수입은 얼마고, 짜증내고 걱정한다는 것은, 도대체 한 달 수입이 얼마나 돼야 만족하겠어요? 만족이 어디 있어요.
그래서 제가 지금 과제를 드렸잖아요. 어떻게 하면 육적인 인간이 자기밖에 인간이 어떻게 영적 인간, 천국 갈 수 있는 사람으로 달라질 수 있느냐? 이 질문, 답변 다들 갖고 있습니까? 갑자기 걱정이 막 되네. 여호사밧을 통해서 우리가 이 점을 해답을 찾아봅시다. 어떻게 하면 육적인 내가 영적인 내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제가 아까 초반에 이야기했어요.
여호사밧은 본인이 문제가 아니에요. 본인의 자리가 하나님과 계약 맺은 자리에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냥 그 자리에 덜렁 앉게 된 거예요. 왜? 아버지가 왕이니까 세습제로 자기가 왕 자리에 왔다 이 말이죠. 왕 자리에 와보니까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에요. 여기 ‘전하라’ 하는 이 자리는 우리가 육적인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에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이 전하는 자리 내 자리 아닙니다, 이러면 간단한 문제 아닙니까. 이 전하라고 하는 명령을 주께서 하셨다면 내가 전하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주님이 함께 동행하셔서 주께서 그때그때마다 이끄시겠지요. 걱정을 왜 내가 합니까? 우리 인생은 걱정할 권한도 자격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성취되면 뭐라고요? 나는 그 앞에서 어떤 존재라고요? 내가 죽은 존재기 때문에 죽은 존재를 내가 왜 자꾸 거론하고, 그걸 자꾸 건드립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데 너는 똑바로 살았어? 왜 죽는 것보고 똑바로 살았느냐는 질문이 성립이 안 돼요. 그냥 죽어 있어. 너 온전하지도 않아. 뭘 봐서 온전해? 안 온전해. 말씀 비춰봐. 온전할 리 없어. 그러니까 군소리하지 말고 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네가 들어온 자리가 말씀 성취의 자리다, 이 말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고 살고 있으니까 너는 그리스도의 시바다리나 하라, 이 말입니다. 그게 어려워요? 이게 어려워도 보통 어려운 게 아니구나. 우리는 이런 기쁨을 가지고 사는데 둘째 아들이, “엄마, 밥 줘” 하면 다시 현실로 확 돌아오지요. “엄마, 오늘 반찬 뭐고? 또 미역국이가?”
또 이렇게 나올 때는 다시 한 번 분명히 잃어버린 나를 육적인 아들의 그 육적인 질문이 팍 차고 들어올 때 졸지에 그 아들한테는 다시 영적에서 뭐로 변했습니까? 육적으로 변했어요. “가만있어 봐라. 집에 돈 떨어졌다. 헐은 반찬이라도 할게.” 갑자기 영적 생각, 전하라, 이런 것 다 잊어버리고 내가 온전한 엄마는 돼야지, 갑자기 온전한 엄마가 돼버려요.
세상이 그렇게 보게 되면 그런 세상, 육적으로 가득 찬 세상, 천국 갈 생각 없이 전부 다 지옥 가는데 차질 없는 만반의 준비를 다 하고 있는 세상, 지옥 못 가서 환장한 세상 있잖아요. 그 세상 우리 성도한테는 참 도움 되는 세상입니다. 왜냐? 성도로 하여금 내가 과연 육적인지 영적인지 되돌아볼 수 있는 그런 경우의 수를 우리에게 마구마구 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육적인 사람이 영적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알려면 육적인 경우에 우리가 있다고 치고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봅니다. 그 질문이 어떤 질문인지 제가 써보겠어요. 여러분이 이 질문에 답변할 준비하시면 되는 겁니다. 비슷한 질문인데요. 두 개로 나눠보면, ①그냥 혼자서도 살 수 있는데 왜 하나님을 의식해야 하는가?
질문을 제가 여러분에게 던집니다. 거창하게 하나님 믿자, 교회 가자 그 무례한 요구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을 왜 의식할 필요가 있느냐? 혼자 잘 사는데. 이 질문 누가 해보실래요? 죽을 때까지 이 질문 안 끊어집니다. 가장 인간의 근원적인 질문이잖아요. 나, 나 혼자 잘 사는데 그게 나한테 친근하고 친숙한데 왜 더불어 귀찮게 하나님 의식까지 해야 되느냐 이 말이죠.
제가 이렇게 물으면 그거는 교회 안 다니는 사람한테 물어야지 교회 다니는 사람에게 묻는 건 예의가 아니지요, 하잖아요. 근데 우리가 사는 세상 전체가 따로 그런 질문들이 우리한테 쏟아지는 가운데 우리가 놓여있을 때 남을 어떻게 교화시키려는 의무는 아니고, 나는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다시 한 번 자기에게 되새기는 차원에서 이 답변이 돼야 돼요.
남들은 하나님 없이도 잘 사는데 나는 왜 하나님을 의식해야 되지? 믿음도 좋지 않고 교회도 오는 둥 마는 둥 하는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왜 의식하느냐 말이죠. 교회 안 가면 안 가는 거지 가야 될 것 같은데, 그걸 왜 의식하느냐 말입니다. 첫 번 질문입니다. 첫 번째 질문에 답변 없는 줄 알고 넘어가겠습니다.
두 번째 질문, ②나는 하나님 버려도 살 수 있는데 왜 나는 나를 버리면 못 사는가? 평생 가는 질문, 이것도 중요하지요. 뭐 교회 오십 년 다니니 나는 목사니 집사니 권사니 그런 다 걷어치우고요. 근원적인 질문이에요. 나는 하나님 버려도 살 수 있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나는 나를 버리고서는 내가 못 살겠다는 거예요. 왜 그러냐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뭔데? 제가 지금 여러분께 묻는 겁니다.
이게 한두 번 하고 말 질문이 아니고 평생토록 동행하는 질문이에요. 은혜 받았습니다. 복음 너무 감사합니다. 개코. 근원적인 질문은 은혜 받고 뭘 해도 그거는 그냥 에프킬러 뿌리고 모기향 피워도 돌아서면 앵~ 하고 모기 돌아다니잖아요. 내 안의 앵~ 모기가 뭐냐 하면 역시 하나님 버려도 나는 못 버린다. 다시 말해서 나는 하나님보다 내가 더 소중한 걸 어쩌란 말인가?
따라서 육적 인간에서 영적 인간으로 달라지는 것은 실패에요. 왜 실패냐? 나는 나부터 못 빠져나가요. 내가 나로부터 빠져나올 수가 없다고. 내가 나로부터 빠져나오는 대신 어디 가느냐? 교회 다녀요. 성경 공부해요. 자기는 자기에서 못 빠져나오면서 교회 다니고 성경 공부하니까 남는 건 뭐냐? 남는 것은 나의 온전함이죠. 나의 대단함, 나의 우수함, 훌륭함. 이게 무슨 신앙입니까? 자기 도 닦는 거지 자기 우상화지 이게 무슨 신앙이겠어요.
그래서 성경말씀이나 십자가는 말합니다. 인간에게 가장 부정적인 것은, 네가 살아 있다는 의식이다. 성경은 우리보고 죽었다고 하는데 우리는 거울 앞에 서도 아무리 봐도 우린 안 죽었어. 생생하게 살아 있어요.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 이게 나의 신체성이에요. 만져지잖아요. 죽은 자는 이런 것 못해요. 아직 살아 있으니까 만져지잖아요. 허리 아프면 파스 붙이고 해요. 이게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수집입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영적인 인간은 때려죽어도 안 됩니다. 오십 년, 육십 년 복음 공부한 것 다 헛방이에요. 소용없어요. 아무리 복음 해도 그 복음은 나를 세우기 위함이지 주님을 세우기 위함이 아니에요. 나의 대단함을 뽐내기 위함이지 주님에 대한 기쁨, 영광 전혀 상관없습니다.
자, 그렇다면 성경에 보면 천국 간 사람도 있고 영적인 사람도 있는데 그 사람은 본인이 해내지 못한 일인데 어떻게 그들은 육적에서 영적으로 변했는가? 그게 강의 처음에 나왔어요. 뭐냐 하면 우연성이 필연성과 접목됐기 때문에. 접목이란 것은 접붙임이에요. 내가 다른 필연성, 절대성이죠. 필연적인 것, 세상은 이렇게 되고 만다는 약속에 접붙임을 당하는 거예요. 그걸 보궐로 들어왔다. 또는 회사에서는 무슨 인사? 낙하산 인사. 그냥 접붙임을 당한 거예요.
그걸 여러분들이 알기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중요하기 때문에 자꾸 글을 쓰게 되네요. 물론 글 써봐야 따라 쓰지 않을 사람인데. 이제 정답 나옵니다. 아까 부터한 질문의 정답 나와요. ‘나밖에 모르는 나를 나에게 끄집어낸 것은?’ 이게 불가능하죠. 나밖에 모르기 때문에. 나밖에 모르는 나에게 끄집어낸 것은 ‘너의 사랑’이죠.
뭐 대중가요 가사에 너무 많아요, 이게. 내가 너를 만나기 전에는 나는 나밖에 몰랐는데 너를 만나고 난 뒤부터는 나는 너밖에 몰라. 내가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너의 있음에 나는 비로소 살 이유를 발견했다는 거예요. 저한테 무슨 노래가 그런지 묻지 마세요. 우리나라 노래 가사가 다 그래요. 이건 너무 많아서 따로 뽑을 수가 없어요.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너에게 찾아와서 너로 하여금 사랑이 없을 때는 완전히 폐쇄적으로 자폐증처럼 자기한테 갇혀 있던 너를 하나님의 사랑이 너에서부터 너를 탈출시킨 거예요. 사랑이. 탈출시키고 난 뒤에 어떤 달라짐이 있는데 그건 뭐냐 하면 내가 있음에 사는 보람이 있는 게 아니고 나를 사랑해주신 당신의 있음에 비로소 나는 살 이유가 생겼습니다.
언젠가부터, 존재의 이유 있잖아요. 김종환의 <존재의 이유> 기다려 내가 달려갈 테니까. 달려갈 목적이 생긴 거예요. 내가 중국집 배달까지 하면서, 김종환이 배달까지 했어요. 배달까지 하면서 쓰지 않고 돈 하나하나 모으는 것은 조금 더 기다려봐. 방 한 칸 마련해서 우리 같이 살자. 그런 갑자기 목적의식이 발생된 거예요. 물론 지금도 그런지 장담 못합니다만. 이십 대 후반의 그때에 네가 나에게 살 보람과 용기와 힘이 되게 했다는 거예요.
이번 수련회 때 진시몬이 불렀던 <애원>있잖아요. 녹취 정리하면서 보니까 거기 나오데요. 애원하고 통곡하데요. 누워있는 저 사람 대신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신앙이 보통 신앙이 아니잖아요.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그런, 하여튼 간에 나는 내 것은 아니라는 거예요. 손사래 치는 거예요. 내 것은 아니니까 친구로서 너는 어떻게 그동안 애쓰고 노력해서 이렇게 잘 사나? 손사래 치는 거예요. 내가 그래서 그런 게 아니야. 이게 어디에 해당합니까? 저 나라에 해당돼요. 그 사랑의 힘이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거기서 빠져나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과 대중가요에 나오는 사랑이 똑같단 말입니까? 이렇게 화낼 수도 있고요. 동영상이 싫어요, 할 수도 있단 말이죠. 그런데 차이점이 있어요. 세상사랑은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이 떠나면 도로 나에게 와요. 저는 이걸 장난삼아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사랑했던 사람이 배신하고 떠나고 난 뒤에 다시 자기에게 오는 것, 나를 향한 회개. 육적인 회개입니다. 성령의 회개는 그게 없어요.
육적인 회개는 어떻게 됩니까? 내가 좋아할 때 ‘내가 이렇게 잘해주면 너는 나한테 시집 와야 돼’ 했는데 내가 죽도록 사랑했던 그 여자가 나한테 가방 두 개 챙기고는 다른 남자 만나서 청첩장 보내면서 ‘이주 후에 내 결혼식인데 친구 의리로 봐서 참석할 거지’ 이렇게 왔을 때에 그다음부터 뭘 생각합니까? 여자 떠났으니까 배신감이 넘치겠지요.
넘친다고 해서 죽는다고 하면 지만 어리석은 짓이니까 어디로 와야 됩니까? 다시 옛날에 그 여자 없던 거기로 돌아와야 되지요. 돌아올 때 그냥 어떻게 돌아옵니까? 가만있어보자 가방이 한 개에 얼마더라? 돈 계산하는 거예요. 그때 카페에서 네가 돈 몇 번 내고 내가 몇 번 냈잖아. 돈 계산한다고요. 이 계산을 왜 합니까? 주섬주섬 추려야지. 그런 정도로 해줘야 배 열두 척 남은 것으로 온전함을 시도해야지요. 여자 때문에 다 날렸지만 남아있는 배 열두 척으로 또 나에게 충성해야지요. 왜? 건질 것은 나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서 도저히 분해서 못 견뎌서, 지금 강의하다가 무슨 이야기하는지 모르겠네. 또 그 여자한테 합니다.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카드빚까지 쓰고 하면 그 여자 쪽은 뭐라 합니까? “그것 나를 사랑하다는 빙자로 네가 너 사랑한 거야. 다시 연락하지 마.” 카톡, 끝내버렸어요.
방금 이 이야기가 바로 구약의 한계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호사밧 있지요. 여호사밧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아주 그야말로 유다나라의 삼대 성군, 첫 번째가 여호사밧, 두 번째가 히스기야, 세 번가 요아스. 다윗 이후에 솔로몬 이후에 착한 임금, 삼대 성군이라 생각하는 여호사밧이 메시아입니까? 아니지요.
메시아란 말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뭔가 온전함을 했는데 그 온전함이 길지 않았습니다. 이건 히스기야도 마찬가지고요. 자기 목숨 살겠다고 한 히스기야가 목숨 살려주니까 자기 잡아먹는 바벨론 사신 왔을 때 자기 창고 활짝 열어서 내가 이만큼 잘났어, 하고 자기 온전함을 자랑하다가 홀라당 다 빼앗기지요.
요시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개혁하면 하나님 뜻대로 살자고 앞서 선봉자로 서서 법의 사수자로서 후견자로서 했는데 그게 너무 과잉이었어요. 너무 오버해서 지가 관여할 필요도 없는 전쟁에 관여해서 전쟁터에서 전사했습니다. 착함, 내 착함, 이것보다 더 착함, 이것보다 더 훌륭함 이쪽으로 가게 되면 그거는 말씀 성취 쪽이 아니에요.
말씀 성취는 뭐라고요? 내가 죽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꾸 복 주고 백성들은 훌륭한 성군이라고 하니까 이게 오버한 거예요. ‘야아, 나의 잘남의 끝은 어디냐? 나의 훌륭함의 끝은 어디냐?’ 계속 엉뚱한 방향으로 내가 아무것도 아닌 방향으로 가야 될 텐데 내가 이렇게까지 괜찮았어? 괜찮은 방향으로 가다가 그렇다면 하나님께 충성을 다해야지. ‘충성하지 마, 충성하지 마. 그쪽 아니야.’ 왜 시키지도 않은, 왜 나대냐 말이죠. 나의 온전함의 극치를 보여줄게, 이런 것 있잖아요.
그 이야기하면 그런 예가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너무 오버해서 망해버린 사람의 예, 그게 바로 구약성경의 한계에요. 인간은 어쩔 수 없다. 칭찬 받는 것 맞고, 훌륭한 것 맞는데 인간은 어쩔 수 없다. 그러면 여호사밧이 어느 정도 훌륭했는가? 여러 가지 예가 있습니다만 그중의 하나가 17장 9절에 나옵니다. “저희가 여호와의 율법 책을 가지고 유다에서 가르치되 그 모든 성읍으로 순행하며 인민을 가르쳤더라”
그전에 이런 일이 없어요.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일상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왕이 나서서 가르친다는 말은, 왕 자체가 왕이라는 이 자리는 내가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본인이 알았어요. 왕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걸쳐있는 이 왕 자리가 나보다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여호사밧이 알았습니다. 그럼 그 왕 자리가 무슨 자리냐? 그게 바로 율법의 완성 자리에요. 이것 읽고 10분 쉽시다.
신명기 17장 17절에서 20절,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왕이 되는 사람은) 아내를 많이 두어서 그 마음이 미혹되게 말 것이며 은금을 자기를 위하여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렇게 돼 있어요.
그러면 그 왕 자리가 인간 와의 자리가 아니고 율법의 자리지요. 율법이란 것은 하나님의 왕 되심을 나타내는 내용이 율법이에요. 이스라엘은 내 나라이지 너의 나라가 아니란 말이죠. 그럼 왕은 뭐냐? 왕은 그냥 레인저지요. 파수하고 사수하는 거예요. 보이는 신체성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기능, 이게 왕이고 오늘날 성도, 우리가 받은 자세입니다. 10분 쉽시다.
20250905b 울산강의-역대기하(15강) 18장 7절 : 온전치 못한 존재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여호사밧, 히스기야, 요시아 참 훌륭한 임금이라고 성경에선 그렇게 기재돼 있는데 그들은 왜 온전하지 못하는가? 질문 잘못됐지요. 온전하지 못한 게 아니고 그들의 온전하지 못함은 언제 들통 나는가, 질문이 이렇게 바뀌어야 됩니다. 그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바르게 산다, 산다, 산다. 글쎄요? 그게 어디까지 가는지 보자. 언제 나락에 떨어지는지 보자. 이런 질문이 그게 바람직해요. 구약에서. 인간은 메시아가 아닙니다.
그 질문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있어 약속, 다른 말로 하나님의 비밀이요. 또는 예언. 약속의 내용이 명확하질 않아요. 이게 구약이거든요. 세례 요한이 아무리 대단하지만 천국의 어린아이보다 더 모른다고 돼 있어요. 마태복음 11장 11절에 나왔던 이야기에요. 이번 설교시간에 약간 언급을 했잖아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인간이 하나님이 주신 약속, 그 비밀을 백 프로 알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약속이 인간에게 올 때는 점선으로 오는 거예요. 점선으로 오니까 이거는 애매함, 또는 모호하게 되는 거예요. 애매하고 구체적으로 이거다, 라고 감 잡을 수 없는 식으로 약속과 비밀이 옵니다. 오게 되면 인간은 이 점선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그래 내가 알아서 실선으로 바꾸고 싶습니다. 바꾸어서 이건 뭐 때려죽여도 이것만 믿으면 나는 구원받는다, 라는 것을 확정짓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모호함에서 실선, 이거다, 하고 결정되는 이 사이에 뭐를 집어넣느냐? 바로 권력, 권세, 힘이 들어가요. 이 힘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내가 나의 온전하다는 것을 증명해 줄 수 있는 그 힘이 여기서 들어가는 겁니다. ‘과거에 내가 복음 전하고 강의 많이 했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내가 천국 간다는 것을 좀 인정해줘. 인정 안 해? 내가 이만큼 했는데’ 할 때 ‘내가 이만큼 했는데’가 들어가면 이게 뭐가 돼요? 내 존재에서 나오는 힘이 되는 거예요.
플러스 힘이 섞이면 안 돼요. 힘이 섞여버리니까 이건 뭐냐 하면 제대로 된 것에 잡티가 들어간 거예요. 티가 들어가 버린 겁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예가 되겠지만 열두 제자 전부, 거기다가 니고데모, 자기가 율법의 선생이잖아요. 주님을 알아서 찾아올 정도로 주님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던 니고데모. 지가 예수님 말씀 듣고 아 이거군요, 라고 깨달았습니까? 모호했습니까? 모호하지요. 뭔가 다 알 수 없는 희미한 것, 그 희미한 게 있습니다.
그 희미한 이유가 있어요. 진리가 우리에게 왔어도 우리가 희미하게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의 자아 한 구석에 늘 미지의 영역, 또는 미지의 구멍, 또는 수요일에 이야기한 여백, 공백이 우리 안 에 구멍 뚫려 있어서 그래요. 평소에 온전함에 있어서 자신이 마저 채울 수 없다는 것을 본인이 알거든요.
본인이 아는데 그동안 인생을 살면서 힘들고 애쓰고 고민이 많고 항상 불안과 초조가 왜 오느냐 하면 행여나 내 속에 있는 허풍선이, 허점, 취약점이 남한테 노출될까봐 주변에 포진시켜놓은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말이 뭐냐 하면 변명조에요. 핑계와 변경조로 누굴 만나도 변명과 핑계로 줄줄 나옵니다.
나라가 잘못된 것은 우리가 대통령을 잘못 뽑아서 그래, 이런 것. 남 탓하고 변명을 하는데 근원적인 문제 있잖아요. 왜 나라가 잘돼야 될 이유를 대라. 대한민국이 잘돼야 될 이유를 대라, 라고 물으면 뭐라고 답변합니까? 내가 행복해지거든. 네가 행복해지는 이유가 뭐냐? 간단하지요. 지금 내가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행복하지 않는 이유가 뭐냐? 본인이 몰라요. 왜? 처음부터 자기 안이 허하기 때문에. 허할 땐 흑염소 괜찮아요. 한두 달 먹으면. 본인이 허해요.
아무리 좋은 것, 우리 자식이 어떻고 손자가 어떻게 자랑거리를 집어넣어도 이게 마저 채워지지 않는 온전함이 다 맞춰지지 않는 레고에 뭔가 부속품이 빠진 것 같아. 이케아 가구에서 물건 택배로 받았는데 뭐가 하나 빠졌어. 안 되는 것처럼 뭔가 항상 빠져있어요. 빠져있기 때문에 행여 그것이 들킬까 싶어서 온전하지 않음이 남들에게 노출될까 싶어서 과잉, 과도하게 그걸 감추다보니까 자기가 자기한테 힘이 들어가는 거예요. 어깨, 다리 안 아픈 데가 없어요. 자기 사수하는데 너무 많은 힘이 들어가요.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소외’라고 합니다. 이게 여호사밧과 관련 있습니다. 소외란 말은 뭐냐 하면 첫 번째, 나는 온전하고 싶다. 두 번째, 지금보다 내일이 온전함이지만 다른 말로 노골적으로 완전이죠. 나는 완전하고 싶다. 세 번째, 그런데 성에 차지 않는다. 실패다, 이 말이죠. 지금보다 더 완전함에 늘 실패감을 느낀다.
이게 나의 완전함에 대해서 현실적 나는 배제당하는 거예요. 그게 일치 않는 불일치, 늘 불일치 상태를 본인이 느낍니다. 내가 되고 싶은 것, 되지 못하고 늘 추구는 하는데 만족스럽게 일치되진 못한 상태, 그것을 나의 희망사항으로부터 내 이상형으로부터 내가 밀침을 당하는 소외당하는 배제당하는 그 상태가 있습니다.
그게 역대하 18장 1절, “여호사밧이 부귀와 영광이 극하였고” 아까 여호사밧이 백성들에게 뭘 가르친다 했습니까? 율법을 가르쳤지요. 그만큼 본인도 율법이 중요한 줄 알아요. 중요한 걸 아는데 그 율법이 자기의 성에 차질 않는 거예요. 자기의 온전함이 율법을 지킨다고 해서 온전하지 않고 있어요. 그런데 여호사밧이 부귀와 영광이 극에 달했어요. 대단한 거죠. 그럼 이걸로 만족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게 구약의 다윗언약의 왕들은 결코 메시아가 아니에요. 완전한 자아가 될 수 없어요.
그러니까 구약성경은 뭐냐? 예수님과 비교해보란 말이죠. 예수님과 비교해볼 때 그들은 방향이 뭐냐? 완전한 왕, 대단한 왕, 백성들에게 우러름 받는 왕, 흠도 티도 없는 왕, 그런데 그러한 의식 자체가 점점 더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거예요. 오실 메시아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안 되니까 어떻게 합니까?
안 되니까 백성들로 하여금 그 미진한 부분을 뭐로 채운다 했어요? 아까 비밀에 대해서 알지 못했을 때 명확하지 않을 때 주변에 뭐가 온다 했어요? 권세, 권력이 드디어 굳어지기 시작한 겁니다. ‘나는 왕이야.’ 평소에 하는 일이 있잖아요. ‘내가 하는 일은 나 좋으라고 하는 일이 아니야. 다 집안 잘되기 위해서 하는 일이야.’ 가장들이 얼마나 많은 말을 그런 식으로 했습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지요. 장로님이 되어서 목사님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하면 목사가 발끈하면서 뭐라 합니까? ‘내가 지금 나 좋으라고 하는 일입니까? 교회 부흥해서 하늘나라 확장하려고 내가 이 일하는데 협조는 못할망정 교회 텃세한다고 젊은 목사 하는 일에 지금 방해합니까?’ 마주카포 가져와. 김정은이 북한에만 있는 게 아니야. ‘젊은 목사 무시하는 겁니까? 4대째 장로님들. 이건 나 좋으라고 하는 게 아니고 주님 영광을 위해 하는 거예요.’
그런 것이 학교 교장에서도 있고, 회사 사장도 될 수 있고 모든 단체가 뭐가 되느냐? 바로 권력으로 돼 있어요. 힘. 인간의 모임은 권력의 결집체입니다. 거기서 누굴 희생해야 되느냐? 개인적인 의사, 힘이 약한 사람을 희생물로 희생타로 사용할 수밖에 없어요.
18장에 그래서 여호사밧이 여기서 누굴 만나느냐 하면 북쪽을 만납니다. 쉽게 말해서 남쪽의 훌륭한 이재명 대통령께서 누굴 만난다? 북쪽의 김정은 위원장을 만난다, 이래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북쪽의 김정은이 먼저 손을 내밀었어요. “아합으로 더불어 연혼하였더라 두어해 후에 저가 사마리아에 내려가서 아합에게 나아갔더니” 아합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호사밧 임금님, 군사가 많지요.
여호사밧 군사가 몇 명이냐 하면 백십육 만이었어요. 이게 정규군은 아니고 민병대인데 17장 12절부터 나와 있어요. 유다지파에서 삼십만, 이십팔만, 이십만 대군의 우두머리가 거기에 천부장이라고 해서 나오지요. “유다에 속한 천부장 중에는 아드나가 으뜸이 되어 큰 용사 삼십만을 거느렸고”(17:14) 베냐민지파에서 이십만, 십팔만 합해서 총 백십육 만이라는 그러한 민병대 대군을 거느렸습니다.
그 정도 되니까 북쪽의 아합 왕이 아부를 하면서 이렇게 군사가 많은데 우리 옛날엔 이스라엘 땅인데 지금은 아람 나라인 그 땅을 칩시다. 그 땅 길르앗 라못 치기를 권했다고(18:2) 돼 있어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겁니다. 개인적 행복과 국가적 번영 어느 것이 우선됩니까? 어느 것이 범위가 커요? 국가적 번영, 이게 크지요. 개인적 행복은 소소하지요.
그런데 소소한 행복을 누가 통제하고 누가 빼앗아갈 수 있어요? 국가에서 언제든지 개인적 행복을 빼앗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개인적인 소소한 행복, 마음만 낮추면 행복해지겠지. 아니에요. 개인적 행복에 뭐가 있느냐 하면 국가의 권력, 또는 권력의 폭력성이 개인을 지배하기 때문에 개인적 행복은 한계가 있어요. 행복하고 싶어도 자식 군에 보내야 되고, 갈 때 눈물 찔끔 흘려야 되고. 그리고 여러 가지의 법적인 통제 같은 게 국가적으로 압력이 들어오면 개인은 약해서 거기에 버텨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개인은, 이런 게 참 어려운데 개인은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 혈통에 속하는 거예요. 그런데 국가는 혈통을 능가한 상상의 세계, 또는 상징적 세계라 하는데 이거는 환상인데 실제 권력을 갖고 있는 환상이에요. 환상이 모호한 게 아니고 실제적인 권력, 국가적인 권력이 있는 겁니다. 개인적인 인간의 행복은 혈통에 꽁꽁 묶여 있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통계가 있는데요. 통계 제목은 이렇습니다. 인간을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의 서열. 인간이 어떤 때 가장 스트레스를 받느냐? 열 가지가 있는데 가장 스트레스가 많은 게,
①자식의 죽음
②배우자의 죽음
③부모의 죽음
④이혼
⑤형제자매의 죽음
⑥배우자의 외도
⑦일곱 번째가 재미있어요. 별거 후 재결합, 이게 무지무지 스트레스 받는다는. 또 헤어지면 안 되니까 신경이 많이 쓰여서.
⑧부모 이혼. 이혼도 스트레스 받지만 부모 재혼도 스트레스 받아요.
⑨직장해고
⑩친한 친구 사망
도대체 사망이 열 가지 가운데 몇 개 들어갔습니까? 자식 사망, 배우자 사망, 부모 사망, 친한 친구 사망. 그런데 여기 순번 높은 게 뭡니까? 자식, 배우자, 부모, 형제자매지요. 이게 어떤 식이에요? 인간의 소소한 행복은 혈육, 혈통에서 나온 거예요. 가족에서 나온 거예요. 이 가족을 누가 지배한다? 국가가 지배해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는 개인적인 행복한 희망이 있더라고 그 희망은 물 건너갔습니다. 아무리 행복을 갖더라도 그 나라가 어떤 나라냐에 따라서 그 행복은 다 날아갑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할 때 러시아 청년들이 밀항해서 우리나라까지 온 것 아시죠. 자기가 총알받이 되기 싫다고 우리나라까지 왔어요. 우크라이나 청년들도 마찬가지고요. 전쟁 내가 하자 했나? 내 인생 따로 있어. 그런데 국가가 뭔데 나보고 내 청춘 국가를 위해 받쳐라. 국가가 뭔데 나보고 그걸 요구하느냐? 말은 그렇게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안 끌려갑니까? 안 끌려갈 수 없지요. 도대체 세상이 내 위주가 아니에요. 국가 위주지. 국가가 내 위에서 내 인생의 행복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그 국가가 성경에 보면 짐승이에요. 마귀의 나라에요.
여호사밧은 하나님과 동행해서 이 고리, 이 연결고리를 뭐로 바꾸느냐 하면 율법으로 대체해버린 거예요. 세상에서는 이방나라에선 국가가 개인의 행복조차도 통제합니다. 그런데 여호사밧은 처음에 어떻게 했습니까? 그 국가 자리에 뭐를 집어넣었어요? 율법을 집어넣었지요. 율법을 집어넣는다는 말은 하나님이 뭐다? 하나님이 왕이시다. 하나님이 왕이신 국가의 백성이 되는 그것이 하나님의 현실에 가장 부합되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한 것이 바로 여호사밧이에요.
그래서 여호사밧은 아까 제가 이야기한 것처럼 여호사밧은 그 법과 누구와 바꿨습니까? 자기 자신과 바꾼 거예요. 하나님의 왕 되심과 소소한 나의 행복과 바꿔버린 거예요. 육적에서 영적으로 바꿨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18장에 들어가게 되면 구약시대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의 내용이 온전하게 다 알려지지 않습니다. 모호합니다.
모호하니까 그 모호한 대목에 뭘 집어넣었어요? 나는 왕이니까 왕이라는 권력을 그걸 땜질을 해서 백성들로 하여금 지금 여호사밧은, ‘내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과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자알 되고 있습니다. 염려하지 마세요. 나만 믿으세요’ 이렇게 나간 거예요. 여러분, 다윗이 암몬과 전쟁할 때 우리야 장군은 열심히 싸웠잖아요. 그때 다윗은 뭐했습니까? 뒷짐 지고 부하 아내를 꼬셔서 동침했지요. 그건 뭐냐 하면 자기가 이스라엘의 권력자라는 거예요.
다윗이 범죄 할 때에 왜 범죄 했는가? 이것 때문에 범죄 했어요. 하나님의 전쟁 앞에서 나의 전쟁은 없어야 된다, 이 원칙을 몰랐던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 나의 전쟁은 어떻게 합니까? 네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 이 전쟁 또는 네가 이겼느냐, 내가 이겼느냐 이 전쟁, 인간들끼리 이기고 지고가 성립이 안 되거든요. 모든 전쟁은 여호와 하나님의 전쟁이지 내 전쟁을 따로 뽑아낼 수가 없어요. 내 위신과 체면을 위한 전쟁, 이 세상에 하나님이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모르니까 나는 복음 아니까, 나는 성경 아니까 복음과 성경의 내용이 모호하니까 거기다가 내 존재의 힘이 주변에 몰리고 쏠린 거예요. 나는 이렇게 인생이 행복한 것은 복음 때문이다. 복음을 내가 모시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모시고 있는 나는 유지돼야 돼요, 안 그러면 죽어야 돼요? 모시려면 내가 유지돼야 되잖아요. 이런 식으로 다윗은 암몬과의 전쟁에 안일한 태도를 보였던 거예요. 그것 때문에 우리야 장군을 죽이게 되었어요. 그 부인도 빼앗고. 그렇게 된 겁니다.
권력이란 것, 그게 바로 구약의 한계인데 이 권력이란 것은 분명히 권력을 버렸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이름, 영광을 위해서라는 그걸 빌미로 또 다시 나의 권력이 거기에 동원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나는 오래 살아야 된다’ 이게 말이 돼요, 안 돼요? 주께서 뭐라고 하느냐? ‘죽어, 인간아.’
여기서 원칙을 어렵기 때문에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자기 자신의 욕망과 일치되지 않는 걸 소외라 해요. 자아가 내가 원하는 주체로부터 이렇게 밀림 당한다. ‘아니야, 아니야. 네가 생각한 네 모습 아니야.’ 자꾸 밀침을 당할 때 우리는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서 애쓰게 되는 거예요.
내가 만족할만한 나의 이상형, 내가 이 정도 직장, 이 정도 인물, 이 정도 건강, 이 정도 가정화목, 이 정도 신앙될 때 나는 나답다는 자꾸 그러한 환상을 좇아가면서 그걸 애쓰고 있는 거예요. 그게 엉터리죠. 일종에 내가 살아 있다는 조건하에 내 권력으로 복음과 만나겠다는 것은 복음을 이용해서 내가 온전한 사람 되겠다는 그 잘못을 또 반복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소외에서 주께선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걸 분리로 끌어당깁니다. 분리는 뭐냐 하면 예수님과 나와의 분리에요. 그러니까 예수님 앞에서는 쨉도 안 된다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게 분리에요. 나는 죄인이고 주님만이 의인이다. 그리고 주님은 의인을 부르는 게 아니고 분리된 자를 자기 백성으로 삼는다. 그래서 그 분리성, 소외성에서는 아등바등 자기 지키기 위해서 변명 애썼는데 분리되고 난 뒤에는 전하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다이루심만 기뻐하고 감사하는 거예요.
지금 여호사밧은 소외돼 있습니다. 자기가 극치의 부강한 나라지만 성에 차질 않아요. 그런데 북쪽에 있는 김정은이 아합이 꼬십니다. 네가 지금 영토가 나라가 있지만 그걸로 만족하나? 만족하지 않지. 길르앗 라못이라는 땅까지 우리가 빼앗자, 라고 나온 거예요. 제안을 한 거예요. 좋지, 하고 우리 힘 있겠다 빼앗자고 한 거예요. 그거는 율법이 아닙니다. 자기 욕망이 자기 주인공된 거예요.
법을 자기의 주인공으로 여겼던 여호사밧이 맛이 간 거죠. 내가 그래도 이스라엘 임금인데 백성들한테 존경받아야 되지 않느냐.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을 이렇게 화끈하게 보여줄 절호의 찬스다, 해서 드디어 길르앗 라못이란 땅을 점령하려고 공격합니다. 길르앗 라못은 어디 있느냐 하면 여기 지중해 있고, 여기에 갈릴리 바다 있고, 사해가 있고, 요단강 흐르고 있고, 사해 이쪽에 예루살렘 있고, 길르앗 라못은 요단강 동쪽, 현재 요르단 땅이에요.
이 땅을 공격하는데 그 당시는 뭐냐? 아람 나라는 시리아에요. 시리아가 이 땅을 접수하고 있을 때 시리아를 공격해서 빼앗자고 같이 연합을 했던 겁니다. 하면서 여호사밧은 습관성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하기 때문에 아합 왕이 그냥 가자 할 때 여호사밧이 묻습니다. 그래도 선지자에게 물어봐야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선지자 사백 명한테 물어봤어요.
북쪽 이스라엘 선지자가 갑자기 여호와 선지자가 많으냐고 생각하는데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는 엘리야 때 850명 다 죽었어요. 이들은 뭐냐? 여호와 믿는다는 그러한 모습을 띤 선지학교에서 양성된 선지자들이었어요. 오늘날 같으면 노회 목사들 단체 있었어요. 그들에게 물으니까 승리합니다, 한 거예요. 특히 오버한 사람이 있어요.
18장 10절 보겠습니다.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는 철로 뿔들을 만들어 가지고 말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리라”라고 연출을 하는 거예요. 철로 해서 두 분 임금한테 잘 보이기 위해서 오버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어젯밤에 계시를 받았는데 철로 무기를 제작했습니다. 이 철로 적이라 치고 적이 어떻게 섬멸되는가? 돌격하면 다 무너뜨립니다. 어떻습니까? 신나지 않습니까? 공격하면 이깁니다, 라고 했어요.
누구한테? 사백 명한테. 사백 명이 이구동성으로 다 이깁니다. 모든 사람이 ‘예스’한 거예요. 그러나 모든 사람이 예스할 때 ‘아니요’란 사람이 딱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게 누구냐 하면 미가야 선지자에요. 미가야 선지자한테 물으려하니까 다른 선지자들이, “아아 그 사람한테 묻지 마세요.” 왜? “그 사람은 항상 부정적인 것만 이야기하기 때문에 물어도 소용없습니다. 사백 대 일이니까 다수결로 밀어붙입시다. 전쟁하면 승리합니다. 염려하지 마세요.”
18장 7절에 보면,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오히려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한 사람이 있으니 저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물을 수 있으나 저는 내게 대하여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항상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저를 미워하나이다”라고 북쪽 아합 왕이 이야기했어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말씀의 부정성입니다.
말씀의 세계가 따로 있지요. 인간의 세계, 눈에 보이는 현실 세계가 따로 있어요. 현실이 잘되기 위해서 말씀을 어떻게 보느냐 하면 긍정적으로 봅니다. 지금의 현실에 잘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서 긍정적인 그러한 내용을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준비했다, 현실 사람이 이렇게들 믿고 싶은 거예요. 그렇게 알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현실의 세계가 벌써 이건 뭡니까? 진리가 아니고 뭐가 돼요? 거짓이죠, 거짓. 이들이 거짓이기 때문에 말씀의 세계를 뭐로 보느냐 하면 긍정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본인이 거짓된 걸 모르고 좋은 긍정적인 것이 나를 더욱더 긍정적인 희망을 달성시킨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 거짓을 거짓으로 들추는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지요. 이게 뭐냐 하면 말씀의 세계에서 뭐가 오면 돼요? 이 거짓에 대비해서 반응해서 말씀의 세계에서 뭐가 오면 됩니까? 진짜가 오면 돼요, 거짓이 오면 됩니까? 오늘은 좀 침묵하지 마시고 답변해주세요. 거짓된 것을 요구할 때 긍정적인 것을 기대하면서 질문을 할 때 거짓을 거짓으로 들추는 방법은 어떻게 돼요? 거짓을 줘야 돼요.
거짓을 이렇게 줍니다, 미가야가. 12절에 정치적으로 초를 치지요. “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자가 일러 가로되 선지자들의 말이 여출일구하여 왕에게 길하게 하니 청컨대 당신의 말도 저희 중 한 사람처럼 길하게 하소서” 선지자들의 말이 벌써 하나로 뭉쳐졌다. 결정됐으니까 당신의 말도 저희들처럼 자알 될 겁니다, 라고 이야기하라고 정치적 압력이 들어왔지요.
13절에 보면, “미가야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하고 이에 왕에게 이르니 왕이 저에게 이르되 미가야야 우리가 길르앗 라못으로 싸우러 가랴 말랴 가로되 올라가서 승리를 얻으소서” 전쟁해서 승리를 하소서. 그런데 우리가 모르는데 그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눈치를 챘지요.
어떤 식으로 했는가? 미가야 이렇게 이야기했지요. “올라가서 승리를 얻으소서” ‘많이 하소서. 열심히 한 번 해보소서. 그래서 승리를 해보세요.’ 꼬고, 꼬고 또 꼬고 비아냥거리면서 말투가 벌써 그런 말투로 이야기한 거예요. 그러니까 눈치 챘지요. 벌써 북쪽 왕은 김정은은 미가야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요.
15절, “왕이 저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이름으로 진실한 것만 말하라고 내가 몇 번이나 너로 맹세케 하여야 하겠느냐” 또 이렇게 비꼬고 비아냥거리면서 올라가란 말이냐? 그때 미가야가 그 뒤에 이런 이야기해요. 나도 하나님께 언질 받은 게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에게 압력을 가하는 것이 17절, 18절에 나와요.
18절에 “미가야가 가로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 좌우편에 모시고 섰는데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이스라엘 왕 아합을 꾀어 저로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저를 꾀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가로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 하는 영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꾀이겠고 또 이루리라” 이렇게 돼 있어요.
자, 여기서 질문합니다. 지금 미가야 말고 다른 선지자들은 진실을 이야기했습니까, 거짓을 이야기했습니까? 이게 질문입니다. 둘 중에 하나밖에 없어요. 진심으로 이야기했습니까, 아니면 억지로 거짓말로 꾸며서 이야기했습니까? 진심으로, 진심으로 그들은 거짓말, 사탄의 말을 한 겁니다. 꾸미지 않고 노림수 없이. 받은 계시대로 악마의 마이크가 된 거예요. 받은 계시대로.
이게 이런 뜻이에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됩니다. 그 말씀 가운데 이 말씀도 들어있어요. 말씀을 위반한 자는 반드시 죽는다가 되어야 말씀대로 되는 거예요.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 육적인 사람이 어떻게 영적인 사람이 되겠느냐, 할 때에 어떤 방법도 그 사람은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성경말씀을 어떻게 해석해도 최종 결정은 누가 내립니까? 본인이 내린다는 그 자체가 거짓된 거예요. 나는 이제부터 예수 믿기로 작정했어, 그것 자체가 거짓된 거예요. 내가 지옥 가고 천국 가고는 이미 하늘에서 다 정해진 거예요. 그 정해진 것을 완전히 무시하고 내가 어떻게 마음가짐을 가지느냐에 따라서 나는 천국도 갈 수 있고 지옥도 갈 수 있다, 이건 이미 정했다는 그 진리에 대한 도발입니다. 마귀의 반발이에요. 마귀가 하는 저항이 그런 겁니다.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는 겁니다, 하나님’ 하고 마귀가 하나님에게 한 수 가르치는 거예요. 하나님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내 인생이니까 내가 알아서 결정하기에 따라서 천국이든 지옥이든 내가 결정합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결정한다면 내가 결정해서 하나님 계신 곳에 안 가고 나 지옥 가겠습니다. 이런 고집. 내 자율적인 결정을 만약에 하나님께서 무시한다면 나를 무시하는 그 나라에 내가 오기가 있지 보내줘도 나는 안 갑니다. 이게 바로 우리 마음속에 악마의 모습이에요.
그러니까 전해야 되지요. 전해야 안의 독사가 나오지요. 나는 누구의 강요에 따라 사는 지금까지 살아온 적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내 인생 산 것은 어디까지나 순전히 내가 판단해서 내게 이익이라 싶어서 내가 옳은 결정을 내가 책임진다는 하에 내가 결정해서 이만큼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내가 천당 가고 지옥 가고 하는 것도 내가 결정하겠습니다. 이게 마귀 아닙니까. 그게 자기 온전함이잖아요. 마귀는 항상 우리의 온전함을 격려해왔어요. 부추겼어요.
그렇다면 이 악한 영, 악한 영이니까 거짓말하는 영, 마귀입니다. 마귀의 영이 어디에 나타나는가? 진실이 드러날 때 주위에 갑자기 마귀의 영이 들끓지요. 이게 정치에요. 좀 어렵게 하겠습니다. 미안합니다. 끝 다 됐으니까. 필연이 나타나면 마치 우연인 것처럼 나타나고 우연은 마치(as if) 자신이 필연적인 또는 절대적인 존재인양 매일 매일을 살아갑니다. 나에 대해서 내가 잘 아는 것처럼 살아가는 이게 바로 우연이 필연을 가장하기 때문에 그래요. 속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그때그때 살아요. 거지도 이런 거지도 없습니다. 빌어먹는다면 여러분 좋게 들립니까? 욕으로 들리지요. 그런데 가장 빌어먹는 사람이 이 땅에 천국의 모습을 드러내요. 왜냐? 주님의 사랑 없이는 못 사니까. 근데 주님은 보이지 않는 우연적이거든요. 주님이 붙들면 붙드는 게 아니잖아요. 있다가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세계에서 봐서는 뭐냐? 우연적 존재에요. 나도 주님 따로 우연히 살래. 주님이 우연이라면 나도 필연이 해체돼서 우연 될래. 하루하루를 주께서 주신 은혜로 산다는 것을 나는 감사하겠어. 이게 바로 자기를 우연한 존재, 내가 왜 아직 살아 있지, 이렇게 되질문하는 존재, 이게 바로 오늘날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아주 솜털처럼 가벼운 성도에게는 뭐가 중요하냐 하면 ‘전해라. 이게 말씀이다’ 그게 내 목숨보다 더 기쁨으로 다가오지요. 이런 소리 안 하려했는데 또 하게 되네요. 우연이가 부른 <우연히>란 노래가 있어요. 그 가사를 보면 심오해요. 떠났던 남자를 토닥거리면서 위로해주는 노랜데….
다시 처음 돌아갑시다. 육적에서 영적으로 변할 때 이제 해답이 나왔어요. 육적은 늘 거기에 보이는 것, 늘 거기에 그 모습으로 있는 것, 육적이죠. 왜? 육적은 자신을 무슨 존재? 이거는 세상 천하보다 귀한 것이 내 존재, 필연적 존재로 보지요. 그러나 영적은 뭡니까? 모호해요. ‘한 달 전에 은혜 받았잖아요. 그 은혜 지금도 유효하죠.’ 이러고 있다고. 그때그때 은혜인데 ‘한 달 전에 믿음 좋았잖아요. 그 믿음으로 계속 효과 봅시다.’ 이런 식으로 나온다고요.
늘 주님께서 주신 은혜 가운데 사는데 옛날에 한 때 믿음 좋았던 것으로 계속 그걸 우려먹으려고 하는 겁니다. 그때 믿음 좋은 것으로 그 덕을 봐서 지금 나는 거기서 과거의 어떤 은혜를 지금의 형태화시키는데 여기에 뭐가 포함됩니까? 권력으로 힘으로 형태화시키는 그것이 나의 온전함에 보탬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영적으로 된 사람은 하루하루를 빌어먹고 사는 거예요. 주기도문에 나오잖아요. 우리에게 뭘 주시고? 빌어먹을 양식을 하루치만 주시고. 완전히 우크라이나 난민이다. 늘 하루치만 주시고.
물론 그것도 그냥 같은 메뉴 말고 하루는 양갈비에다 회도 좀 주시고, 갑오징어도 먹게 하시고, 초밥도 먹게 하시고 이런 욕심이 있겠지만 어쨌든 간에 자기 자신이 해체되는 것은 주님이 이 시대에 우연적 존재로서 나타날 때 나타나고, 인간이 붙든다고 붙잡는 대상이 아니고 안 나타나면 끝나는 것처럼 우리 자신도 우리가 살아가는 것도 주께서 살려주니까 계속해서 매일같이 하루하루 우연한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보고 필연적인 게 뭐냐? 아까 이야기했지요. 하나님의 약속이 필연적이죠. 그걸 어떻게 구분하느냐? 매일 나타났던 그 일들은 나로 하여금 죄인이라고 규정짓고 주께서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그 차원에서 날마다 늘 말씀이 그때그때 떠오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지난 수요일 설교가 그거였습니다. 말씀을 위반하고 난 뒤에 말씀이 다가온다고요. 말씀을 위반하지 않으면 말씀을 봐도 소용없어요. 어떤 말씀도 위반 안 한 게 없다고 될 때 그게 말씀이 그렇게 고마운 거예요. 주께서 우리를 죄인으로 간주하실 때에 그게 내가 죄인이고 내 힘으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 더할 나위 없는 복음의 기쁜 소식으로 들어와야 됩니다.
끝으로 한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18장 23절이요.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가까이 와서 누구의 뺨을 칩니까? 미가야의 뺨을 치지요. 그러니까 예수님 십자가에 달릴 때에 곱게 돌아가셨습니까, 아니면 맞았어요? 뺨 맞았지요. 잘 들어보세요. 시드기야가 진심으로 이야기합니다.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말미암아 가서 네게 말씀하더냐” 하나님의 영은 나한테 있어야 되지 나한테 있는 영이 내 허락도 없이 왜 너한테 갈 리가 있느냐?
이게 뭡니까? 시드기야가 자기를 무슨 존재로 봅니까? 굳어진 존재, 필연적 존재로 보는 거예요. 한 번 선지자는 영원한 선지자라는 이런 정치적 고집이 있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복음 나오면 한 번 복음 나왔다고 그다음에 복음 나옵니까? 그거는 우리 소관 아닙니다. 주님 소관입니다. 어떤 직장에서 가정에서 신앙적인 행동했다고 그것이 다음에 또 행동이 나온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없어요.
얼마나 우리가 인간 같지도 않았으면 잠시 신앙을 보여줬겠습니까? 따라서 그다음에는 역시 인간 아니어야 똑같은 신앙적 모습이 나옵니다. 그걸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부정성이 내 존재에 더 깊이 징이 박혀야 되지요. 내가 모르는 죄를 더 깊이 깨부수면 깨부술수록 그래서 우리의 부정성이 더욱더 깊이 폭로되면 폭로될수록 우리는 전하라는 사명감이 우리의 행복을 대신하게 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몰랐습니다. 이렇게, 이렇게 요령부리고 신앙생활 잘하면 천국 갈 줄 알았는데 우리가 천국 가는 게 아니고 천국이신 주님이 우리 안에 함께 있어서 우리를 더욱더 죄인 되게 했다는 이것이 이제는 우리의 기쁜 소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