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010a 울산강의-역대기하(16강) 18장 21절 : 비밀은 없다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역대하 18장하겠습니다. 두 왕이 등장해요. 하나는 여호사밧이라는 남쪽 유다의 왕, 여호사밧은 그 당시의 스타입니다. 성공한 왕이라 보고 있습니다. 18장 1절에 보면, “여호사밧이 부귀와 영광이 극하였고” 이렇게 돼 있어요. 부귀와 영광이 극하니까 자기 아들 여호람을 장가보내는 데 있어서도 사돈끼리 격이 맞아야 되겠지요. 자기가 대단하니까.
그래서 이 대단한 자기의 아들을 누구와 결혼시키느냐 하면 역대하 21장 6절에 보면, 아합의 딸과 혼인합니다. 아합의 딸이니까 안 사돈이 이세벨이겠지요. 이세벨 딸 아달랴와 결혼했으니까 그 안 사돈은 이세벨이 되는 겁니다. 그것을 18장 1절에서는, “아합으로 더불어 연혼하였더라”고 돼 있어요.
근데 신명기 7장 3절에 보면,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찌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라고 돼 있어요.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자는, 시돈은 이방민족이거든요. 이방민족에다 종교는 바알종교, 바알종교와는 혼인하지 말라. 이방민족과 혼인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이게 오늘 강의에서 첫 번째 나오는 어려운 점이에요. 어떻게 어려우냐 하면, 우리의 상식은 뭐냐 하면, ‘우리가 잘못했을 때 말씀으로 지적한다’ 이게 우리네 상식이죠. 잘못한 것에 대해서 말씀으로 지적하는 것, 우리의 상식이죠. 근데 성경은 우리가 잘못할 때 말씀으로 지적하는 게 아니에요.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를 지적하게 되면 말씀에 합당한 그러한 선한 일이 나올 수 있을 경우에는 지적하는 보람이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지적하는 효과, 효력이 있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잘못됐으면, ‘말씀으로 지적하시면 제가 고치겠나이다’ 보통 이렇게 나오지요.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서 아무리 퍼내고 퍼내도 인간은 선한 것이 없습니다. 인간에게서 선한 것이 나오지 않는 이유가 자기와 딱 달라붙어서 그래요.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기가 아무리 악독한 죄를 짓는다 할지라도 자신을 좋게 봐요. 타고난 천성입니다. 좋게 봅니다. 선악 지식을 알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데요. 그래서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할 때는 나쁜 행동을 하는 게 아니에요. 자기가 보기에 항상 자기에게 최선을 다했고, 자기에게 유리했고, 자기한테 도움이 된다는. 자기한테 도움이 된다면 그게 나쁜 일일 수 있겠습니까? 아니지요.
내가 나한테 도움 된다는 일을 하겠다는데 자기 자신의 입장에서 볼 때 이건 뭐냐 하면 악한 일이 아니고 선한 일이에요. 인간에게 선하다는 것은 내게 유리했다, 그런 뜻입니다. 내게 도움이 됐다, 그런 뜻이에요. 내 생존에 내 가치를 지키는 데 상당한 보탬이 되었다, 이게 인간에겐 선한 겁니다. 인간들 생각에 굳이 악하다 하는 것은 좀 실수한 것, 아차 한 것, 그런 것을 잘못이라 하지만 근원적으로는 자기가 지금까지 한 모든 것은 선한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이여, 내가 잘못한 것을 지적해주시면 제가 고치겠습니다’ 하는 그 고치겠다는 그 자체가 악해요. 인간은 자기가 자기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니까 악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의 지적은 인간 개과천선하라고 지적하는 게 아니에요.
이게 상식이거든요. 상식: 우리가 잘못했을 때 말씀으로 지적한다.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가 잘못을 모르고 있을 때 말씀으로 우리가 근원적으로 잘못돼 있는 존재를 새삼 확인하는 겁니다. 동생 일 도와준다고 성경공부도 참석 못하고 할 때 ‘동생만 없으면 내가 성경공부 참석할 건데’ 그런 경우가 있지요. 누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경우 있겠지요.
근데 성경공부 참석하는 이유가, 내가 성경공부 참석함으로서 질 좋은 내가 이 정도 괜찮은 존재구나, 확인하는 의도를 갖고 참석하거든요. 일부러 교도소 찾아가는 사람 없어요. 면회 말고. 저 구속시켜주세요, 이렇게 하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본인은 어디를 봐서 교도소에 수감될 저질 인간이냐, 라는 그런 생각으로 평소에 살아가거든요. 그런데 걸렸다? ‘아 운 없다. 안 들킬 수 있었는데’ 이래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말씀을 주는 그 현장이 어디냐 하면 교도소입니다. 뭘 확인하느냐? 처음부터 죄인 됨을 확인해 줄 수 있는 곳은 감옥, 교도소밖에 없습니다. 교도소는 물론 밥도 주고(요새 콩밥 주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잠도 재워주는 데 교도소에서 밥 주고 잠 재워주는 목적이 뭐냐? ‘네 죄를 알렸다’잖아요. 너는 이 교도소란 공간에서 네 주장, 네 의견은 삭제당해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입 다물어, 너는 입 다물어. 말하지 마. 너는 무조건 이 곳에 와야 될 정도로 합당한 죄인이야.’ 이게 교도소잖아요.
주께서 말씀을 주시는 것은 영적인 교도소를 만든 겁니다, 이 땅에서. 영적을 교도소를 만들어서 그 말씀에 의해서 죄인임이 드러날 때 그것이 그렇게 고맙고 기뻐하고 감사할 때 그게 집합된 하나님의 참 된 백성이에요. ‘내가 얼마나 잘났어요’ 그것 확인하려고 교회 나오고, 성경공부 참석하고, 이거는 생각이 완전히 반대에요. 잘못된 겁니다. 지금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지만 이렇게 자진해서 자기가 죄인 됨을 확인하는 식으로 귀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준비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이거에요. 전쟁, 전쟁입니다. 18장 2절, “두어해 후에 저가 사마리아에 내려가서 아합에게 나아갔더니 아합이 저와 종자를 위하여 우양을 많이 잡고 함께 가서 길르앗 라못 치기를 권하더라” 친다는 것, 이거는 전쟁 벌이자는 뜻이지요. “이스라엘 왕 아합이 유다 왕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당신은 나와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시겠느뇨 대답하되 나는 당신과 일반이요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일반이니 당신과 함께 싸우리이다”(3절) 싸운다, 전쟁입니다.
전쟁을 이렇게 하게 될 때 여러분, 어떤 게임이나 20세 이하 월드컵 시합이나 삼성:SSG 준플레이오프 야구를 하든지 간에 뭘 하나 전쟁은 뭐냐 하면 자기가 패배하려고 환장해서 전쟁합니까? 몇 년 동안이나 열 개의 프로야구 구단 가운데 정규시즌 끝나고 가을에 야구하는 팀은 다섯 개밖에 없어요. 열 개 중에서 반 떨어지고. 롯데자이언트는 수 년 째 가을야구 하고 싶다고 부산은행에서 이자까지 더 준다고 그런 혜택을 줬건만 올해도 역시 가을야구 못했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며 롯데자이언트 팀을 응원하고 그 팀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올해도 진짜 이것 하려고 야구장에 오고 야구 시합합니까? 없지요. 북한에 핵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구라 같은데, 핵이 있다고 구라를 떠는 이유가 한국과 미국한테 얻어터지려고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전쟁을 하겠다는 의도, 그 전제가 뭐예요? 나는 이번 전쟁에서 승리를 가져갈만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전쟁을 통해서 내가 증명하고 확인하겠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인생은 뭐예요? 전쟁이잖아요. 무슨 명분의 전쟁, 전쟁을 왜 합니까? 나는 이 땅에서 계속 이기고 또 이기는 재미로 살 가치가 있는 그런 존재라는 것을 살아가면서 확인하려고 이 세상을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세계에 지상 전쟁을 허락하느냐? 오늘 내용은 이겁니다. 전쟁의 본질이 둘로 나눠진다는 그 이야기를 지금 성경에서 하고 싶은 거예요. 전쟁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지상 전쟁, 또 하나는 영적 전쟁. 영적 전쟁을 누가 하느냐? 미가야 선지자. 지상 전쟁은 왕한테 빌붙어서 생계수단으로 선지자 노릇하는 사백 명의 아부쟁이들, 비비고, 비비고 비비는 거예요.
여러분, 갈라디아서 1장 10절 아십니까?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사도 바울이 참 엄청난 말을 했어요. 그 당시에도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고 많이 나타났을 때에 일반 교인들이나 성도들이 얼마나 궁금했겠습니까? 개나 소나 하나님이 종이라고 했으니까. 그리스도의 진짜 종과 가짜 사기꾼들을 어떻게 구분하는지 그 문제에 일반 교인들의 관심사가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전도해서 교회 세우지만 그 교회에 얼마나 많은 거짓 종들이 거기에 들어가 있겠어요? 그때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기준을 세웠어요. ‘사람을 기쁘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이 문장을 제가 이해하기 쉽게 바꾸겠습니다. 이걸 아주 단출하게 명백하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사람하고 상대하지 마라.’ 왜? 사람은 지상 전쟁을 하기 때문에.
사람은 뭘 못하기 때문에? 영적 전쟁을 못해요. 지상 전쟁, 미가야가 되지 못하고 일반적인 눈에 보이는 인간들한테 빌어먹고 그게 자기한테 유리하게 작용하는지 한평생 생각하는 것이 그것밖에 없어요. 괜찮은 사람 만나서 그 사람 뜯어먹는 것, 이거 외에는 아무 생각하는 게 없어요. 내가 희생한 만큼 저 사람이 나한테 제공하겠지, 이런 것. ‘사람을 상대하지 마라’에요.
사람을 상대하지 말라면 교인들끼리 인사도 하지 말고 말도 섞지 말고 그러란 말이냐? 교회 와서 모조리 묵언 수행, 입에 자크 채우란 그런 뜻일까요? 그게 아니고, 영적 전쟁에 미가야가 대표적인 데요. 그걸 미가야 어떤 사람인지 미리 말씀 드리겠습니다. 18장 13절에, “미가야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이건 뭐냐 하면 이번 전쟁, 길르앗 전쟁하는데 있어서 여호사밧이 의견을 제시해요. 그냥 전쟁하러 갑시다, 이렇게 아합이 나오니까 “그래도 하나님의 사람한테 물어보고 가야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제안을 받아들여서 아합 왕이 사백 명 되는, 숫자가 400 같으면 운동장에 학생들 사백 명 모인다고 해보세요.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옛날에 우리 국민학교, 중학교 다닐 때 사백 명 됐었어요. 운동장 가득 차요. 요즘은 사람 모으려면 케데헌(KPop Demon Hunters), 스타 이찬원이나 전유진이나 임영웅이나 가수 아니면 그 동네에 모일 리가 없어요. 울산에서 축제한다? 어느 가수가 오느냐가 문제거든요, 사백 명 이상 모이는 것은. 가득하지요.
아까 뭐라 했어요? 인간은 지상 전쟁을 하잖아요. 왜 지상 전쟁을 하느냐 하면 내가 잘났다는 것을 늘 증명하고 확인하는 데 정신이 팔려있으니까 남들에게 물어보는 거예요.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남들이 나를 생각하는 거기에 시선이 멈춰있는 거예요. 이게 지상 전쟁이에요. 남들에게 인기 있고 인정받으면 나는 살고 남한테 인정 못 받으면 나는 죽는다. 이것이 사백 명이라는 그 많은 사람을 똘똘 뭉치게 만들었던 거예요.
사백 명 모여야 개성 다르고 지문 다르듯이 성장과정 다 달라요. 다 다른데 이게 한 목소리를 내는 거예요. 다른데 한 목소리에요. 케데헌의 <골든>이란 노래 가사 보세요. up, up, up 하잖아요. 위로, 위로, 위로. 왜 거기에 대해서 떼창을 합니까? 외국사람이나 한국 사람이나 왜 떼창을 합니까? 심지어 유치원 아이들도 하고. 그것 왜 해요? 집안이 같은 집안이라서, DNA가 같아서? 아니에요. DNA 다르고 집안 다르고 환경 달라도 생각하는 것은 딱 하나입니다.
‘나는 이 세상에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입니다.’ 이건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어요. 시키지도 않은 타고난 거예요. 나는 나다. 지가 하나님도 아닌 게. 너 누구야? 나는 나다. 이게 뭐 가르친다고 될 문제입니까? 놀라운 사실은 이것이 정신적으로 장애인들도 이런 생각을 갖고 있어요. 나는 나다. 이건 교육이 아닙니다. 교육을 받아들이는 바탕, 교육 이전의 바탕이 그래요. 그걸 무의식의 세계라고 합니다.
무의식의 세계란 태어난 환경이 인간 본인도 모르고 있는 잠복돼 있는 잠재돼 있는 다른 어떤 영적인 영물이거든요. 인간의 영적인 요소가 이 세상의 사상과 정신에 대해서 그것이 활성화 된다고 보면 돼요. 좀 이렇게 음침하게 표현하자면 이 세상의 모든 말들은 우리에게 우리의 의식 말고 무의식에 이렇게 속삭이지요. ‘깨어나라 귀신아. 깨어나라 네 본성아. 너는 너에게 신이잖아.’
그런데 인간은 교육받으면 이성적인 존재가 되고 눈치 보잖아요. 눈치 보니까 안에 있는 어두운 힘은 잠시 잠깐 바깥으로 안 나오는 식으로 잠복돼 있지요. 그걸 연출하는 거예요. 만나는 사람 따라서 자기 내부가 들키지 않는 쪽으로 연출하고 치장을 하고 메이크업하고 조정하고.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조정하는 능력이 능숙해진다는 것. 적어도 노벨문학상 받는 정도 되면 아주 능숙하죠. 자기 괴물성, 짐승성을 아름다운 문학으로 아름답게 묘사해 나오지요. 안에 짐승 들었는데.
아까 미가야의 고백은 이런 거예요. 역대하 18장 13절,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내가 분명코 맹세한다. 나는 무능자다.’ 이게 미가야의 태도에요. ‘나는 무능자로 계속 남을 거야. 괜찮은 사람 만나서 유능한 사람 될 마음 일체 없어. 사람 사귀어서 남들한테 나는 이 정도로 대단한 존재라는 것을 증명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
지금 미가야는 누구와 상대하는 거예요? 사람과 상대하지 않고 누구와 상대하는 겁니까? 우리 주님과 상대하는 거예요. 그게 무슨 전쟁이냐? 이게 바로 영적 전쟁이고,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나오는 결론은 뭐냐? 영적 전쟁 아니면 상대하지 마세요. 영적 전쟁 아니면 사람 상대할 필요 없다. 만나지 말라는 게 아니라 기대할 게 없다 이 말이에요. 만나지 말라 하면 지가 자연인도 아니고. 요새 자연인이라도 밑천 많이 들어요.
산속에 혼자 살란 말이 아니고 남한테 기대하지 말라는 말이에요. 남이 나를 사랑한다는 말을 믿지 말라는 말이에요.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람들을 사랑하지 마세요. 왜? 사랑이란 말 자체가 별로 믿음직한 말이 아니에요. 사랑이란 말을 톡 깨놓고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내 너한테 잘해줄 테니까 너 나한테 잘해줘, 이런 관계를 보통 흔히 줄여서 사랑이라 하지 않습니까? 내 너 이뻐할 테니까 너 나 이뻐해줘, 그걸 사랑이라 하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사람과 상대하는 게 된다 이 말이죠.
지금 미가야가 사람한테 사랑받으려고 환장을 했습니까? 그런 거예요? 성경에 미가야 선지자가 왜 등장하느냐 말이죠. 이게 전쟁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 전쟁은 뭐냐? ‘나 잘났다’를 증명하는 전쟁이잖아요. 그런데 그거는 지상 전쟁이고. 둘 다 똑같아. 모든 인간이 붙어봐야 아무 의미 없어요. 지 잘난 척하는 건 마찬가지인데 거기에 그 전쟁을 통해서 인간의 내부를 들춰내는 인물로 여기에 끼어들어가는 자가 누구냐? 미가야 선지자에요.
이 미가야 선지자를 보면서 공식 하나, 내가 만든 공식입니다. 공식 같지도 않지만 그냥 내가 지어본 공식입니다. ‘말씀을 기피하면 내가 나와요.’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내가 나와요. 그런 것은 여러분들이 사회에서 많이 체험하고 있을 거예요. 그러면 교인끼리 묵언 수행하느냐? 그건 교회도 아니지요.
뭐냐? 만화 같은데 보면 학교에 말썽꾸러기 개구쟁이를 담임선생님이나 지나가는 교사가, “까불지 말라 했지? 복도에서 뛰지 말라 했지” 할 때 옛날 만화에 보면 뒷덜미를 잡아요. 잡으면 옷이 올라가고 상대적으로 몸은 고개를 숙이면서 내려가잖아요. 교사가 아이를 딱 잡아서, “요거, 요거 까불지 말라 했지” 이 상태가 영적 사람이 사는 모습이에요. 주님에 의해서 달랑달랑 붙잡힌바 된 거예요.
저는 이걸 꼴사납게 표현했지만 디모데후서에서는 달리 표현하고 있어요. 지금 말썽꾸러기 개구쟁이, 어떻게든지 까부는 그 아이를 선생님이 목덜미를 잡고, ‘까불지 말라 했지, 조용하라 했지’ 그 장면을 생각하시면서 디모데후서 2장 26절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러니까 교인들이 교회 와서 묵언 수행, 말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할 말이 많아야 되지요. 왜? 까불다가 주님한테 당했다는 그 이야기. 그럴 때 상대방이 너 나보다 못났구나가 아니라 저 사람이 지금 주님 손에 붙잡혀 있는 존재구나, 하는 것을 확인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인이 다섯 명이라면 주님에 의해서 붙잡힌바 되어서 교회 온다면 그들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세상 사람들에 까불락 거리다가 낭패당한 이야기, 교만하고 촐랑대다가 혼난 이야기, 그게 교회 와서 내놓잖아요. 그래야 누굴 증언하는 겁니까? 주님을 증언하기 때문에. 그 영적 공동체를 교회라 합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자기의 못난 것을 이야기해야 되는데 썰을 풀어야 되는데 교회 와서 조용하게 있다? 그런 경우가 있을 수가 있잖아요. 아무리 영적 교회지만. 조용하다. 밥 먹었나? 묵자. 집사님, 아침 잡수었어요? 잡수었군요. 오늘 날 좋지요? 상당히 중립적인 것, 누가 들어도 욕하는 걸로 안 느껴지는, 날 지적하는 말로 안 느껴지는 것.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십 년 째 탐색전을. 저 사람 십 년 째 교회 나오는데 성도 맞는지 내가 자신이 없네. 괜히 내 약점 이야기했다가 그걸 어디 가서 나발 불면 나만 손해잖아, 이런 것. 그러면 자신의 방어기제가 작동하지요. 나는 나 지킬 거야.
말씀을 기피하면 내가 나오잖아요. 그럼 아까 전쟁에 두 종류가 있다 했어요. 하나는 무슨 전쟁이라 했습니까? 지상 전쟁, 또 하나는 무슨 전쟁? 영적 전쟁. 놀라운 것은 지상 전쟁 이것을 성경에선 뭐로 보느냐? 망상이라 해요. 분명히 사람이 죽어나가는데 분명히 영토를 빼앗기고 총칼 소리와 피가 튀는 게 분명히 현실적으로 넘쳐나는 데 성경은 이걸 망상으로 봅니다.
왜 망상인가? 지상 전쟁이 망상인 이유가 지상 전쟁은 누가 이기든 하나님 보시기에 그 사람은 죽는다, 또는 죽는 존재다, 라는 것을 증명하고 확인하는 전쟁으로 허락해준 것이 지상 전쟁입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가자 전쟁 이 모든 전쟁은 이긴 쪽도 죽고, 죽은 인질도 죽고, 살아남은 인질도 죽고 결국 나이 팔십, 구십 되면 다 죽고. 결국 하루하루가 죽기 위해서 또 죽음을 향하여 질주하는 하루를 보낸 거예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돼봐야 그날 아침은 죽어야 될 이유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루치 더 사는 거예요. 망상으로 시작해서 망상으로 끝나는 거예요.
망상이 되는 이유가,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은 죽는다는데 여기에 ‘나’가 나오면 뭡니까? 죽은 나가 아니고 엄연히 살아 있다는 이 사실이,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 남을 보니까 이 전체가 망상이 되는 겁니다. 망상이란 말은 아무 실속이 없다는 거예요. 잘 먹고 잘 살아봐야 실속이 없고, 추석날 친척들 모여서 고스톱 쳐서 돈 따봐야 실속도 없고, 추석날 촌에 와서 효도해봐야 실속도 없어요.
죽어가는 부모한테 죽어가는 자식이 절하고 있는데 죽은 자가 절 받고 죽어가는 자가 절하고. 그리고 손자보고 할아버지 곧 돌아가신다, 절해라. 절해봤자 절하는 인간이나 절 받는 인간이나 죽음이라는 이미 확정된 방향으로 좁은 골목길을 그냥 같이 끼어들면서 나란히 라인처럼 하나의 라인을 구성하고 있는 거예요. 망상의 라인. 죽어가면서 엄연히 살아 있잖아. ‘나 살아 있어. 나 안 죽었어.’ 예를 들면 ‘나 배철호야. 나 왕년에 잘 나간 인간이야’ 평소엔 수그려 있다가 술 한 잔 들어가면 소리가 높아지고 그렇지요. 술 한 잔 먹은 기분에 의도적으로 객기를 부리고 그렇게 하는 거예요.
전쟁이 죽음이라는 것을 제가 성경을 통해서 증명해드리겠습니다. 열왕기상 20장 14절, 15절에 보면, “아합이 가로되 누구로 하시리이까 대답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각 도의 방백의 소년들로 하리라 하셨나이다 아합이 가로되 누가 싸움을 시작하리이까 대답하되 왕이니이다 아합이 이에 각 도의 방백의 소년들을 계수하니 이백 삼십 이인이요 그 외에 모든 백성 곧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을 계수하니 칠천 인이더라”
벤하닷, 아람나라 지금의 시리아에요. 옛날에 아람나라 그 사람들이, 왕이 삼십이 명이 술 먹고 취했다. 어쨌든 간에 전쟁했는데 여기 29절에 보면, “진이 서로 대한지 칠일이라 제 칠일에 접전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하루에 아람 보병 십만을 죽이매 그 남은 자는 아벡으로 도망하여 성읍으로 들어갔더니 그 성이 그 남은 자 이만 칠천 위에 무너지고 벤하닷은 도망하여 성읍에 이르러 골방으로 들어가니라”
벤하닷 이 사람은 체포되었어요. 아합이 이겨서 체포해 있으니까 벤하닷이 위장으로 항복에 아주 비굴한 모습을 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너무나 마음씨가 좋아서 잘못했다고 하면 살려주더라, 이런 전략으로 바꿔서 혹시 왕의 생명은 살릴 수 있습니다, 해서 슬픈 척하면서 살려만 주이소, 이렇게 하니까 아합 왕이 뭐냐? 그렇다면 살려줄 테니까 아람나라가 북이스라엘에서 빼앗아 간 모든 성읍들, 요새들이죠. 다 돌려줘야 돼?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위하여 거리 이름을 ‘아합 거리’로 만들어놓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했어요.
그런데 오늘 역대하 18장에서 길르앗 라못이 돌려주지 않았어요. 급할 때는 살려달라고 하다가 풀어주니까 다시 군사력을 증대해서 ‘내가 너한테 약조 지킬 거라고 생각한 네가 나빠’ 해서 길르앗 라못을 안 돌려줬거든요. 그래서 아합이 화가 나서 군사력으론 안 되니까 남쪽 여호사밧 불러서 같이 치자고 한 거예요. 그러면 여호사밧으로선 칠만한 능력이 되나? 오늘 18장 1절에 보니까 여호사밧이 부귀와 영광이 극에 달했어요. 아주 대단한 힘을 갖고 있었단 말이죠.
대단한 힘, 강대국이 되었으니까 무기도 많고 재산도 많고 인기도 많고 백성들에게 존경도 받고 많고, 많고, 많은 것밖에 없을 때에 이런 자들에게 뭐가 없을까요? 없다는 것은 어떤 게 없을까요? 결핍이 없어요. 모자람이 없어요. 같은 말이잖아요. 잠언서 16장 18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여기 패망이라 하니까 지금 어떤 상태에 있다는 거예요? 패망이니까 전쟁 상태에 있지요. 전쟁 상태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자질은 어떤 자질입니까?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것은 넘어짐의 앞잡이라.
사람이 왜 교만하고 거만한 거예요? 성격이 못돼서 그래요? 가정환경이 나빠서 성장과정이 나빠서 교만하고 거만한 겁니까? 어떤 경우에 교만하고 거만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없을 때에요. 부족하다고 백날해도 말씀이 없으면 그거는 건방지고 교만한 거예요. 왜 말씀이 없으면 교만하고 건방질까요? 말씀은 우리를 뭐하기 때문에? 지적하기 때문에. 지적을 해줘요.
지적의 내용은 이런 겁니다. 너는 네가 죽었다는 것을 네가 알고 있어? 그 죽었다는 걸 지적하게 되면 그럼 그쪽에서 뭐라고 반박하느냐 하면, ‘나 살아 있잖아. 집도 있고 아파트도 있고 차도 있고 재산도 있어. 우리 자식도 돈 잘 벌어’ 이렇게 나오겠지요. 그럴 때 어떤 의식이 결핍이 됐느냐 하면 이거에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뭐로 줬습니까? ‘공짜’로 주신 거예요. 이게 탈락한 거예요.
공짜로 주셨다는 것을 성경에서 뭐라고 해요? 하나님이 은혜로 주셨다, 이래 되잖아요. 그냥 값없이 준 거예요. 값없이 줬는데 값없이 줬다는 의식이 날아가 버리니까 이거는 뭐 백 프로 뭐가 돼요? 교만하고 거만한 거죠.
이렇게 보니까 우리는 하루도 지상 전쟁은 안 일어나도 영적 전쟁은 하루라도 쉴 날이 없지요. 진짜 묵언 수행하시나. 전쟁은 영적 전쟁이든 지상 전쟁이든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로 이미 확정돼 있는지 드러내는 방식이 하나님의 영적 전쟁이든 지상 전쟁이든 주께서 벌이는 전쟁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일생 하루하루는 뭐냐 하면 이걸 제목 삼고 싶어요. ‘죽음체험’이에요. 야고보서 4장 14절 누가 읽어보세요.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감사합니다. 우리의 생명은 생명이란 말을 떼고 그 자리에다가 ‘생명’ 두 자잖아요. 그 자리에다 같은 두 자를 집어넣으세요. ‘나는 안개다.’ 나 홀로~ 있다가도 없어지고 나타나고도 사라지고.
그러면 목사님, 허무하다 하잖아요. 말끝까지 들어보세요. 없어지는데 나타나고, 죽었는데 살아나고, 이게 얼마나 긍정적입니까? 허무 아니지요. 어제부로 죽었는데 또 살고. 이게 뭡니까? 누가 갖고 노시는 거예요, 우리를. 좋은 의미로 우리를 농락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또 주님께서 우리를 농락한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늘 집결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성경대목이 있어요.
이건 제 개인적인 거지만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천국을 이야기할 때 신랑이 온다 할 때 열 처녀가 준비하는 것, 그 열 처녀 모두 다 신랑한테 농락당한 거예요. 좀 값 비싸게 노신 거예요. 연락할 때 미리 나 여기 있다, 하고 ‘결혼하고 싶은 신부 와’ 하면 되는데 밤새 오질 않는 거예요. 심지어 지혜로운 다섯 처녀까지 다 잤어요. 눈 부릅뜨고 잠 안 잔 아가씨 한 명도 없었어요.
모조리 다 잘 때 오셨어요. 우리가 주께서 오시는 걸 간파 못하도록 신랑이 오는 걸 간파 못하도록 ‘그냥 너대로 사는 대로 살아. 내가 와서 너희 열 명 가운데 다섯 명 골라잡을 거야. 그건 나한테 일임하고 너는 그냥 잠이나 자, 편안하게’ 이것이 인간들이 뭔가 남을 상대하듯이 우리가 주님을 상대할 수 있는 그런 역량이 우리한테는 없다는 것을 뜻하는 거예요. 농락당하는 것을 고맙고 기쁘고 가볍고 감사한 마음으로 사시면 되는 겁니다. 어떻게 주님이 우리와 상대할 수 있을까요?
죽음체험, 공짜, 이런 마을 가지게 되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왕 살았으니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상관없다.’ 이왕 살았으니 이왕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왔으니 주의 말씀의 모퉁이 잡았으니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내가 걱정할 일은 아니다. 설이나 추석의 덕담은 이만한 게 없어요. 망해도 괜찮지요? 그럼요. 보이스피싱 당해도 괜찮지요? 예, 괜찮지요. 이런 것. 이게 공짜.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값없이 살아온 거예요.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고. 공짜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순간, 말씀이 주는 하나님의 취지를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건방짐, 그리고 교만, 나의 가치를 세상에서 증명하기 위해서 이거는 주님의 전쟁이 아니고 누구 전쟁? 나 잘남을 티내는 전쟁, 이것은 바로 스스로 참 피곤한 인생, 정말 안타깝고 피곤한 인생사는 겁니다. 말씀을 기피하지 맙시다. 10분 쉽시다.
■20251010b 울산강의-역대기하(16강) 18장 21절 : 비밀은 없다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지상 전쟁에서 영적 전쟁으로 옮겨가는 방법은? 전쟁에 두 종류가 있다, 그걸로 그치면 안 되겠지요. 지상 전쟁에서 영적 전쟁으로 옮겨가는 방식을 하나님이 일으키는 전쟁, 또는 하나님이 허용한 전쟁에서 그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전쟁이다’라는 것을 서글프게 자꾸 생각하지 마시고 이 세상에서 남한테 지지 않으려는 이 전쟁, 나의 고집, 자존감, 자존심 이것을 주께서 들쑤시는 이유는, 지상 전쟁에서 망상에서 벗어나서 진짜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 실제로 있는 세계로 옮겨놓기 위한 하나님의 친절하심이다, 그렇게 생각을 해야 돼요.
그 가는 길목에 뭐가 있느냐? 신약적으로 보면 그것이 아주 간편하게 그 해답이 벌써 나와 있어요. 요한계시록 2장 4절에 보면,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그러니까 말씀은 이렇게 책망해주는 친절함과 고마움이 배겨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를 책망하지 않아요. 자꾸 변명해요. 핑계대고 변명하고, ‘열심히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너무 나를 밀어대지 마. 나는 그러면 자빠져. 격려를 해줘야 내가 용기가 나서 잘해볼 게 아니야.’ 이런 식으로 버티지요.
그러나 성경말씀은 그런 인간과 거래하거나 협의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냥 밀어버립니다. 자빠뜨립니다.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면 지상 전쟁에서 영적 전쟁으로 옮기는 방법은 그 처음 사랑을 알면 되잖아요. 사랑이, 지상 전쟁에서 영적 전쟁으로 가는 그 다리가 사랑입니다.
사랑이란 다리, 지상 전쟁은 뭘 위한 전쟁입니까? 나의 가치를 사수하려는 전쟁. 서로서로 마찬가지입니다.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으로 버티지요. 실제로 전쟁할 때 주먹다짐하는 것은 중‧고등학교 학생들이고, 사회 나가면 요령껏 하지요. 사회에서 지상 전쟁을 어떤 식으로 하느냐? 그걸 제가 올해 2025년도 노벨화학상을 예를 들어서 여러분에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MOF(Metal-Organic Framework) 금속 유기 격자체(골격체), 이걸 발명해서 이번 노벨화학상 받았습니다. 이건 뭘 만드느냐 하면 금속으로 사각형, 사각형 또는 오각형, 오각형, 육각형, 육각형 하나하나마다 세포처럼, cell처럼 chamber 빈방을 만들어놔요. 빈방을 만들어놓으면, 오염물질이나 요새 탄산가스가 온난화의 주범이라 하잖아요. 탄산가스를 이 발명품에다 채집하거나 포집해서 이걸 버리게 되면 탄산가스를 대폭적으로 줄일 수 있는 그걸 발명했다고 보시면 돼요. 원리상.
그런데 제가 주목하는 것은 원자구조에서 빈방을 의도적으로 만들었다는, 인공적으로 만들어놓은 거예요. 이게 뭘 닮았느냐 하면 오늘날 젊은 사람들이 세상을 이해할 때, 아까 세상을 인간은 뭐로 본다? 망상으로 본다는 거죠. 인간은 안개니까 망상이에요. 그 망상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자기의 살 자리, 이걸 주일 낮에 뭐라 했느냐 하면, 내가 자리 잡으면 만사 오케이 되죠.
이 땅에서 내가 기거할 자리 마련하면, 내 직장 마련하고 내 차 마련하고 내 아파트 마련하고 내 가족 마련하게 되면 만사 오케이에요. 국가가 널 부르면 뭐가 어떻고, 국가도 필요 없어. 사상도 필요 없고 종교도 필요 없고 교회도 안 나오고 제사도 안 드려요. 아무것도 안 해. 추석 명절 연휴가 며칠이냐? 그러면 어디 가면 돼요? 해외 놀러 가면 돼요.
모든 사고방식이 여기에 있는 금속 유기 골격체, 프레임워크, 틀 안에 자기 안에 들어가 있으면 돼요. 여기가 자기 존재 자리에요. 이 틀 있잖아요. 이 틀은 뭐로 구성돼 있는가? 지금 이런 화학적으론 금속이지만 인간의 정신사상에선 폭을 넓히고 확장해보면 이 틀은 시간과 공간성입니다. 이게 뭐냐? 망상이에요.
여호사밧이 아합과 연합했잖아요. 여호사밧이 아합과 연합해서 되찾고자 한 것은 길르앗 라못이란 곳이에요. 길르앗 라못은 여기 있어요. 어느 강의에서 이스라엘 지도 그리는 방법 이야기했는데 A4 용지 있다면, 중간에 지중해 그리고 지중해에서 사선으로 홍해 그리고, 대칭되는 곳에 사해, 위쪽 갈릴리 바다에서 중간에 요단강 있다 했어요. 이렇게 그리면 대충 맞아요. 사해에서 갈릴리 150~140킬로 되거든요. 그 바깥에(동쪽) 길르앗 라못이에요. 이거는 갓 지파 땅에 길르앗 라못이 있어요.
길르앗 라못을 왜 다시 찾아야 되는가? 여기에 바로 도피성이 있기 때문에. 도피성은 이방나라에겐 아무 소용없어요. 그러나 신명기 4장 43절에 보면, “하나는 광야 평원에 있는 베셀이라 르우벤 지파를 위한 것이요 하나는 길르앗 라못이라 갓 지파를 위한 것이요” 이렇게 돼 있어요. 위에는 바산 골짜기인데 그것까진 알 필요 없고요. 하여튼 여기에 도피성이 있어요.
도피성은 살인사건에 말려들었는데 그 살인자가 하나님의 법에 의하면 죽어야 되는데 엄연히 살아 있게 돼요. 그러면 살인했으면 죽어야 된다. 이건 어렵지만 물어보겠어요. 사람이 살인했으면 율법에 의하면 죽어야 돼요. 이것 망상입니까, 망상 아닙니까? 어렵지요. 살인했으면 죽어야 된다. 이게 비현실일까요, 현실일까요? 현실이란 말보다도 이게 하나님의 뜻일까요, 사람의 뜻일까요? 사람의 뜻이에요.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몰라요. 모르니까 율법으로 자기가 해석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해석을 해버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그렇게 여기고 자기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주님 보시기에 엉터리기 때문에 망상이 되는 거예요. 살인한 자를 죽여야 된다는 것이 왜 망상이냐 하면 살인 안 한 자는 죽지 않아야 되잖아요. 그런데 살인 안 한 자도 늙어 죽습니다.
왜 늙어 죽을까요? 살인했다는 율법에 걸려서 죽어요. 살인을 안 했는데 살인죄 되느냐? 형제를 보고 누굴 보고 미워하면 그거는 어디에 해당되느냐 하면 살인죄에 해당됩니다. 바로 율법 해석에 대해서 그것까지 확장시킬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어요. 인간들은 율법을 보면서 그냥 보는 게 아니고 나는 남보다 저 사람보다 더 훌륭하고 낫지, 라는 그러한 욕망이 내부에서 작용하면서 율법을 성경을 보게 돼 있어요.
여러분, 자기가 나쁜 짓했을 때 성경이 술술 넘어갑니까, 착한 일했을 때 술술 넘어가요? 이러나저러나 안 보기는 마찬가지겠지만. 만약에 집안에 우환이 있다? 성경이 들어옵니까, 안 들어옵니까? 성경 집어 던져버려요. 성경이 문제가 아니야, 지금. 내가 죽을 판인데 성경이 문제냐, 이래 되지요.
아까 했잖아요. 말씀을 기피하면 누가 부각이 돼요? 내가 부각이 돼요. 나의 눈물과 나의 한숨과 고통과 나의 만족감과 나의 승리감이 부각이 돼요. 언제 말입니까? 말씀을 대하지 않을 때 말씀이 사라지게 되면 내가 화끈하게 드러난다니까요.
이런 것 한 번 생각해보세요. 젊은 얘들이 디제이 하는 모임이나 중년들이 가는 나이트클럽이나 육십 넘어가는 콜라텍이나 거기 가서 다 같이 우리가 예레미야 20장을 지금부터 읽어봅시다, 이래 나옵니까? 창세기 3장부터 같이 읽어볼 사람, 이렇게 나옵니까? 없지요. 강남에 마약 왔다 갔다 하는데 성경 들이대보세요. 이게 분위기에 안 맞지요.
그러면 묻습니다. 왜 사람들은 나이트클럽이나 그런데서 성경 거론 안 합니까, 거론 안 하는 이유가 뭡니까? ‘나는 당신(주님)을 찾을 마음이 없습니다.’ 나는 당신을 찾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나 당신을 찾지 않을 겁니다. 이번 추석날 난 당신을 찾지 않을 겁니다. 그 이유는 간단해요. ‘당신은 내게 필요치 않기 때문에.’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에게 필요한 건 뭐냐? 나에게 필요한 것은 나를 자리 잡아주고, 그것도 안정적인 자릴 잡아주고 나는 나만으로 만족케 하는 나만의 시공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은 원래 누굴 위한 땅이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땅이에요. 하나님의 이름을 찾지 않을 것이면 그들은 살아서는 안 되는 곳이에요. 퇴거명령 당해서 쫓겨나야 돼요. 그곳은 하나님을 위한 자만 살아야 될 땅이지 나를 위해서 살 자는 거기에 약속의 땅에 있으면 안 돼요.
그리고 약속은 그것을 추방시킵니다. 약속의 땅이 구체화된 것이 천국이거든요. 그러면 천국 간다고 생각하지 말고 천국은 누가 가느냐를 따져봐야 돼요. 천국은 누가 가느냐 하면 이렇게 갑니다, 라고 설명해도 되는데 예수님 식으로 설명하게 되면 내 아들 혼인잔치가 있는데 너 혼인잔치에 참석해줄래, 라고 했을 때 어떤 사람은 밭을 새로 샀다고 안 가고, 어떤 사람은 소 열 마리 샀다고 안 가고, 어떤 사람은 자기 장가간다고 시간 겹쳤네, 하고 안 갔지요.
그럴 때 초청한 임금님이 그들의 정당한 이유에 대해서 동의했습니까? 동의 안 했어요. 그거는 네 이야기잖아, 이런 뜻이에요. “천국은 이와 같으니” 천국은 뭐냐 하면 네 일이 없다는 게 아니고 네가 해야 될 일이 백수다, 이 말이 아니고 너는 네 일이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내 일에 내 아들 혼인잔치에 참석하라, 그 말이거든요. 주님께서.
그러니까 혼인잔치에서 화난 주인이 그 빈자리가 있으니까 누굴 채우라 했습니까? 비렁뱅이, 거지들 이 사람들 공통점이 뭐냐 하면 자기가 자기를 위해서 할 건더기가 없어요. 개뿔도 뭐 있어야 자기 사업체가 있던지 몸이라도 건강해야 뭘 할 텐데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환자에요. 환자가 가진 재산도 없어요. 그러다보니까 자기 일이 없어요. 자기 일이 없으니까 길거리에서 아무나 오라 하니까 그들이 온 거예요.
그들이 와서 천국에 합격했습니까? 들어올 때 앞에 유니폼 옷 걸치고 와라. 자기 일 바쁜 인간이나 할 일 없는 비렁뱅이나 장애자나 거지도 마찬가지야. 어쨌든 간에 인간은 천국에 들어오지 못한다가 분명히 그것을 드러내는 옷을 입어라. 나는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그 사실 자체가 나한테는 최고의 영광이고 기쁨이란 것을 티낼 수 있는 옷을 입어라. 그게 그리스도의 옷이에요. 맛있는 밥 주고 잔치한다니까 천국 괜찮은 거야, 하고 어슬렁거리며 가볼까 하다가 그 현장에서 저 인간 수갑 채워서 구속하라. 집어넣어라.
그러니까 방금 이야기한 걸 하나의 문장으로 써보겠습니다. ‘인간은 자신을 만든 창조주가 궁금했는데 정작 오신 분은 심판주였습니다.’ 너 딱 기다려, 예수님이 심판주로 오셨어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이사야가 고뇌한 것처럼. 그러면 왜 창조주를 신에 대해서 왜 궁금한 겁니까? 교회 안 다녀도 신이 있는지 없는지 궁금해 해요.
왜 그렇습니까? 궁금한 이유가, 인간은, 다른 말로 나는 나를 만든 창조주가 궁금하다. 왜 이렇게 궁금하냐 하면 현재 나는 기존의 내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시공간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시공간에 둘러싸인 내가 나를 만든 하나님이 신이 어떤 분인지 되게 궁금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존의 시공간을 익히 내가 이미 알고 있음을 전제로 해서 그런 내가 나를 만든 하나님이 궁금하다는 거예요.
그럼 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일까요, 안 그러면 우상이겠습니까? 우상이죠. 왜? 기존의 시공간을 본인이 안다고 했으니까. 시공간은 망상이에요. 우리가 아는 시공간은 망상이라고요.
길르앗 라못 거기에 도피성이 있어요. 도피성은 뭐냐 하면 이미 이왕 죽은 자에요. 살인해서 죽은 자잖아요. 죽은 자인데 죽은 채로 살아 있어요. 다만 공간이 달라요. 자기 집에서 죽은 채로 살아 있는 게 아니고 어디 가서? 도피성이라는 율법에 의해서 만들어낸 공짜로 주신 피난처 shelter죠. 그 피난처에서 살아 있어요. 그런데 그 피난처에 누구 덕분에 살아 있는가? 그 시대의 대제사장이 살아 있다는 그 조건 하에 그 조건에 부합할 때만 그 인간은 살아 있어요.
만약에 도피성에서 나가면 어떻게 됩니까? 죽어요. 왜 죽느냐? 사람 죽였으니까 죽어야지요. 죽어야 마땅한데 살아 있어요. 그러니까 죽어야 마땅함은 전혀 신기하지 않는데 뭐가 신기하냐? 왜 내가 살아 있지가 신기해야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도피성이고, 그 도피성이 신약에 오면 그게 바로 그리스도 안이 돼요. 예수 안, 언약 안, 성령 안, 십자가 안. 사도 바울 편지에서는 그걸 다양한 표현으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도에게 있어서 또 하나의 문장은 뭐냐? 내 인생? 아니지요. 주님의 인생, 이게 맞지요. 주님의 인생이에요. 주님의 인생이니까 이걸 신약처럼 한다면 말씀 속의 나가 되지요. 그러면 내가가 알고 있는 시공간은 이거는 말씀에 의해서 파괴되어야 될 시공간이고, 말씀 안에 예수님의 영광을 위한 새로운 시공간이 여기 마련돼 있지요. 영적 전쟁에서는 시공간 자체가 달라져요.
기존의 달력은 우리를 현혹시키는 겁니다. 11월 25일과 12월 25일이 뭐 차이점이 있습니까? 하나는 크리스마스라고 차이나요? 크리스마스라는 그 인간적인 시공간이 주님 앞에 그게 통합니까? 월요일과 주일이 차이나요? 차이 안 나지요. 구십 먹어서 죽으나 사십 대에 죽으나 차이 납니까? 차이 없어요. 구십 넘어서 지옥이고 그냥 살아도 지옥이고 성령이 임하면 서른 살 살아도 천국이고 그래요.
성경에서는 이렇게 시공간에 차이가 난다고 언급하고 거기다가 무엇까지 이야기하느냐 하면 기존의 시공간에서 인간의 능력으로선 기존의 자기 망상, 자기 시공간을 내가 잘되기 위한 시공간에서 벗어날 재주 있는 인간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자기에서 자기를 빼내지 못해요.
인간의 본 마음은 이렇습니다. ‘나는 당신(주님)을 필요치 않습니다.’ 이게 우리의 타고난 본심이에요. 정 할 짓 없어서 몸부림쳐. 어디 갈 데 없나? 그때는 교회 나가고. 심심해 미쳐, 하여튼. 어디서 나 티낼 때 없나? 진짜 심심해라. 할 게 없어? 교회나 가자. 본심은 뭡니까? 나는 당신이 필요치 않습니다.
홍서범이라는 가수가 불렀던 노래의 가사에 이런 게 있어요. ‘나는 당신을 원하지 않았어요.’ 나는 당신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에다 예수님 집어넣으면, 나는 예수님을 하나님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나만 있으면 족합니다. 제발 하나님이여 나만 있어도 부족함이 없이 행복할 수 있도록 당신이 좀 도와주면 안 되겠습니까? 그것 때문에 교회 다니는 거예요. 제발 내 인생을 힘들게 하지 마세요.
여기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이라고 봅시다. 그리고 자기 백성을 이 지상 전쟁에서 영적 전쟁으로 구원하고자 하는 그런 마음이 하나님 마음인데 그것을 여러분들이 그 마음을 하나님이라고 잠시 계획해서 세상의 인간의 본성은 이거니까 이런 자기 백성들에게 해야 될 어떤 괜찮은 조치가 있으면 아이디어를 제시해주시길 바랍니다.
아예 싫데.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내가 필요할 때는 부르겠지만 그냥 들이대는 건 싫데. 기존에 살던 내가 좋다는 거예요. 이것을 파괴시키는 어떤 방법이 있겠습니까? Metal-Organic Framework 아까 뭐라 했습니까? 줄여서 MOF죠. 주님께서 새로운 유기 골격체를 이 지상에다 만들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빈 공간을 만들어요. 새로운 시공간,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와 죄 사함으로 골격을 만들고 그 안에 빈 공간을 두는 거예요.
근데 기존의 인간들은 뭐냐? 나를 위해서 살겠다는 것은 뭐냐? 기존에 내가 알고 있던 시간 있잖아요. 과거, 현재, 미래로 흘러가는 시간, 10월, 11월, 12월, 내가 인식하고 있는 시간, 나 여기 있다, 여기는 내 자리다. 너는 거기 있으니까 그건 너의 자리고 여긴 내 자리라는 자기의 공간 소유, 소유성 이런 것 속에서 자기만의 절대화된 삶을 추구하잖아요. 그걸 아까 자리 잡기하잖아요.
자리를 일찍 잡으면, ‘너 인생 성공했네’ 하지요. 이겼다 이 말이거든요. 이 세상에서, 지상 전쟁에서. 그것이 만약에 실패로 끝나면 ‘너는 패배자야’ 이런 식으로 하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제가 지난 낮 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는데요. 그 대목에 자살한 사람 언급했어요. ‘자살하는 사람은 자기가 자기에게 속고 있는 사람이다.’ 아무것도 아닌데도 지가 뭐 대단한줄 여기는 거예요.
그러니 이건 자살한 사람에게만 해당될 이야기가 아니겠지요. 소위 살아 있다는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것이 자기가 자기에게 살아 있는 거예요. 숨 쉴 만 하니까 내가 으스대며 살고 싶고. 만약에 자기 일이 안 되면 자연인 되겠다고 지리산으로 들어가서 찾지 마, 혼자 살고 그렇지요. 어쨌든 간에 아까 문제 낸 것, 여러분 아이디어 있습니까?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을 주님 안에 끌어낼 수 있는 좋은 방안이 있습니까? 그게 미가야와 관련돼 있어요. 이게 오늘 강의 핵심이에요.
‘인간아, 너에게는 비밀이 없다.’ 인간의 모든 비밀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들통 났습니다. 거짓말탐지기도 필요 없어요. 말씀이 이거는 남은 모르고 나만 안다, 그런 것 있잖아요. 그것 비밀 아닙니다. 연세 많은 분들 속상하게 되면 자식들이 와서 어머님 왜 그러시는데요? 어디서 속상합니까, 물으면 연세 많은 부모들이 자식한테 유세 떨면서 뭐라 합니까? 거기다가 술 한 잔 먹으면 뭐라 해요? 너희들은 내 마음을 몰라, 이러거든요.
평생토록 남편한테 구박받다가 나이 많은 할머니 되어 외손자, 증손자 다 본 할머니가 뭐가 속이 상하느냐? 안 먹던 술 한 잔 걸치고 땡깡부리면서 “너희 아버지도 내 마음 모른다. 너희들 다 집에 가. 새끼들 데리고 집에 가. 이 세상 아무도 내 마음 몰라준다. 막걸리 가져와라.” 젊은 사람들 부부싸움 할 때도 마찬가지에요. “당신은 왜 그리 화를 내는데?” “당신이 내 마음 알아줬나?” “니 마음이 어떤데?” “봐. 모르잖아.” “이야기를 해. 이야기하면 알아줄게.” “치워라 그마. 이야기하기 전에 부부라면 알아줘야지. 이거는 아무도 모른다, 정말. 나밖에 모른다.”
여러분, 인간에게는 더 이상 비밀은 없습니다. 왜? 미가야 때문에. 그 비밀 탈탈 털어볼까요. 바로 모든 인간의 비밀은 거짓말이었어요. 역대하 18장 봅시다. 18장 20절.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저를 꾀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가로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 하는 영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여기 선지자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아니에요.
열왕기상 19장 18절에 바알에 절하지 않는 칠천 명을 남겨두었다는 대목이 나와요.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더라도 여호와께도 역시 꿇지 않았어요. 바알에게 안 꿇었다는 그 이야기지 여호와를 제대로 안다는 게 아닙니다. 이 사람은 권력에 아합이라는 절대적 왕권에 밉상 보이면 선지자고 뭐고 모가지 다 날아간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아는 자들이에요. 그 아는 자들 중에서 사백 명이 지금 노골적으로 비비고 아부하면서 나온 겁니다.
길르앗 라못에 전쟁하러 가는데 이기겠습니까, 하면 그 사백 명이 한결같이 “예 나가세요. 이기십니다. 반드시 승리하십니다.” 여기 18장 9절에,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 여호사밧이 왕복을 입고 사마리아 성문 어귀 광장에서 각기 보좌에 앉았고 모든 선지자가 그 앞에서 예언을 하는데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는 철로 뿔들을 만들어 가지고 말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리라 하셨다하고”
하여튼 오버하기는. 지가 어디서 그런 소품을 제작해서 와가지고 아주 자극적이고 인상 깊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계시를 확실히 받았다는 타인의 시선에 부각되도록 이 짓하고 있는 거예요. 이거는 연극배우입니다. 뿔을 만들어 가지고 ‘무소의 뿔로 가라’ 하는 것 있잖아요. 지 혼자 무대에 나가서 ‘돌격’해서 이렇게 아람 장군을 이깁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렇게 해놓고 ‘나 이뻐. 나 살려줘’ 이런 식이죠. 오버를 해요, 오버를. 과잉행동을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백 명이 서로 경쟁자 아닙니까? 눈에 띠어야 위기 사회에 권력자에 잘 보이면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거든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본 거죠. 그러니까 11절에, “모든 선지자도 그와 같이 예언하여 이르기를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서 승리를 얻으소서” 이랬단 말이죠.
그러니까 왕이 가면 되는데 제가 아까 첫째 시간이 이야기했잖아요.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을 상대하고 의견 조율하는 계시가 아니에요.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미리 사전에 알고 지적하기 위해서 계시를 준 거예요. 인간과 인간의 문제 같으면, ‘그래? 그렇다면 목사님들 때문에 승리하고 오겠습니다’ 하고 용기를 얻어서 분기탱천해서 나갈 텐데 이것 말고 다른 선지자를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아합을 전쟁에서 죽이기 위한 계획을 어떤 인간이 노려도 그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7절에 보면 미가야 선지자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그리고 아합 왕이 벌써 선입관을 갖고 있어요. “저는 내게 대하여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항상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저를 미워하나이다” 이 말 자체가 지금 나한테 아부하지 않는다는 그 말과 똑같은 거예요. 예언이란 그 말이 아니에요. 예언이란 말은 인간이 일체 개입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정해놓은 일이 그게 예언이잖아요. 예언을 변경할 수 있는 재주는 인간에겐 없어요.
인간은 손 털어야 됩니다, 그 이야기를 해줘야 그게 예언이잖아요. 그게 뭡니까? 하나님은 창조주로 오신 게 아니고 무슨 주로 오셨다? 심판주로 오신 거예요. 인간은 빼도 박도 못해요. 인간은 자꾸 미래에 대해서 어떤 비밀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비밀을 자기의 능력으로 캐보려고 시도하는 겁니다. 노벨상이 그것 때문에 있는 거예요. 장래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미리 대처하는 것, 노벨경제학상.
노벨경제학상 내용이 뭡니까? 어떤 경제적 혼란이 왔을 때 그 혼란을 잠재울 수 있는 규칙과 원칙과 질서를 잡아주는 게 경제학상이잖아요. 노벨생리학상도 마찬가지고, 노벨물리학상도 마찬가지고. 문학상도 평화상도 마찬가지고. 전부 다 인간의 자질들을 끄집어내서 미래에 혹시 닥쳐올 재앙에 대해서 극복해보자는 의견 모음과 의견 조율이 노벨상이에요.
그런데 선지자는 뭡니까? 거기에 노벨선지자상이 있어야 돼요? 노벨예언상이 있습니까? 선지자는 하늘에서 이야기한 것을 전하면 돼요. 제가 아까 미가야는 어떤 자라 했습니까? 무능자라 했지요. 아무 능력이 없어요.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뺌이 없이 그리고 왜곡 없이 그대로 전할 수 있는 거예요. 결국은 무능하니까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주의 말씀만 전할 뿐이에요.
이게 어렵습니까? 이게 굉장히 어려워요. 왜냐하면 자신의 행복이 자꾸 가로막아요. 내가 이걸 하게 되면 나한테 어떤 콩고물이 떨어지느냐, 어떤 경제적인 것과 나의 여유 있음과 인정받음이 어느 정도 주어질 것인가를 계산하는 이 육신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마귀가 그 짓하고 있는 거죠. 계속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미가야한테 갑니다. 하나님께 받은 계시가 뭐냐? 18절에, “미가야가 가로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 좌우편에 모시고 섰는데”라고 돼 있지요. 자, 이 대목에서 사람이 보좌에 끼어있습니까? 사람은 빠져있지요. 이게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사람과 상대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미래뿐만 아니고 현재 일어나는 모든 일은 주님의 영광을 위한 시공간 차원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인간의 시공간으로 미리 대비하거나 손쓸 수 있는 여지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말씀이 말씀대로 되어질 뿐이고 심판한 대로 이뤄질 뿐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누가 이야기하느냐 하면 어떤 영이 있는데 그 영이 어떤 영이냐? 거짓말하는 영이 있어요.
거짓말하는 영이 내가 사백 명의 선지자를 꾀어서 그들이 하는 말을 통해서 뭐만 나오게 한다? 거짓말만 나오게 한다, 그렇게 제가 조치하겠습니다, 하고 하나님께 부탁해서 하나님이 허락했거든요. 왜? 그것마저도 예언이기 때문에. 악마의 활동도 예언이기 때문에 우리가 미리 대비하고 할 입장이 못 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나갑니다. 아까 오버했던 시드기야는 자기 행동이 거짓임을 압니까, 모릅니까? ①안다, ②모른다, 몇 번입니까? 모릅니다. 몰라요. 그러면 우리가 오늘날 교회 나오나, 또는 소위 교회 다니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 가운데 저 사람은 거짓말하는 영, 악령이죠. 악령이 있다, 안 왔다를 어떤 식으로 판별할 수 있습니까? 오늘 강의한 전부 안에 내가 바로 그걸 이야기한 거예요. 조금 전에 이야기했어요. 다시 말씀드릴게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나에게는 비밀이 없다. 다 들킨 거예요. 나는 안개입니다. 아까 야고보서 4장 14절 보세요. ‘너는 안개다’ 이렇게 이야기했던가요? 앞에 뭐가 붙었든가요? 앞에 뭔가 사설이 있고, 너는 안개라고 했지요. 그 앞에 붙은 게 뭐라 했습니까? 우리가 어느 도시에 가서 장사해서 이익을 보려하는 너희들아, 너희는 뭐다? 너희들의 그런 결심과 의지가 그게 아무짝도 소용없단 말이죠. 그거는 주님의 시공간에서 거짓된 거예요.
거짓 된다는 말은 안 이뤄진다는 말이 아니고(안 이뤄지면 다행이죠), 진짜 어느 도시에 가서 재벌 될 수가 있어요. 해도 재벌 됐지만 여전히 뭡니까? 재벌 된 거짓이죠. 어디 가서 출세하고 성공하고 노벨상 받아도 뭡니까? 그게 거짓이에요. ‘인간 뭐 그래서 잘될 때가 있지.’ 인간은 앞으로 잘된다는 게 인간에게는 해당이 안 돼요. 이미 인간은 죽을 걸로 확정이 났기 때문에 죽었다는 이 사실은 변함이 없어요.
여러분들이 만약에 95세에 돌아가시면서 자식에게 남겨줄 재산이 2조 4756억이라고 봅시다. 그런데 본인은 지금 숨넘어가고 있습니다. 그 2조 4000억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아이고 어머님 대단합니다. 아버님 대단합니다. 세상이 이 많은 유산을 저한테 남겨주다니’ 그런 칭찬이 죽어가는 나에게 무슨 위로가 돼요.
아까 야고보서 4장 14절에 보면,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그다음에 뭡니까?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한다.” 나에 대해서 내가 모른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모르는 것을 우리는 기뻐해야 돼요. 왜? 매일같이 우리는 무능력자가 되는 즐거움이 있어야 돼요. 그게 바로 수고한 모든 짐이 날아간 현상 아닙니까.
나는 주님이 필요치 않아요. 그 정도로 우리는 엉터리고 우리는 거짓말 영으로 가득 찬 사람입니다. 주님을 원하지 않아요. 그런데 미가야도 마찬가지고 우리에게 이런 말씀이 들려오면 이거는 뭐냐 하면 내가 주님을 초청한 것도 아니고 원했던 것도 아니에요. 그러면 이건 무슨 현상이냐? 박찬욱 감독 영화제목이 뭡니까? <어쩔 수가 없다> 내가 구원받는 것은 어쩔 수가 없어요. 내게 어떤 비밀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
주께서 모가지 쥐고, 이것 또 까불고 있고 교만하네, 쥐고 지옥 같은 세상에서 남은 생애를 계속해서 활용해서 미가야처럼 다루는 이 일에 대해서 내가 손 좀 놓으면 안 되겠습니까? 손 좀 빼주세요. 나는 내 인생 살겠습니다, 이럴 수가 없어요. 그게 뭐냐 하면 어쩔 수가 없다니까요. 미가야가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미가야가 하늘나라 궁금해서 망원경 들고 본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계시가 예언이 사백 명한테 찾아가지 않고 오직 미가야 빼놓고는 다 거짓말 영을 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미가야는 빼라. 빼야 돼. 마귀야 미가야는 빼고 다른 사람에게 예언을 줘” 하나님의 조치가 있었기 때문에 미가야는 진실을 말할 수 있었던 겁니다. 이제 끝으로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슬슬 이제 잠이 오지요.
여기 역대하 18장 29절,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나는 변장하고 군중으로 들어가려 하노니 당신은 왕복을 입으소서” 야아 이것 비겁하다. 카케무사라 하지요. 그림자 무사, 남인 양 변장한 것. 이건 뭐냐 하면 하나님을 상대하는 게 아니고 사람과 상대하는 거예요. ‘저 사람을 속이면 나는 나로서 유지할 수 있다.’ 그 계산이잖아요.
이 계산에 의하면 아합 왕이 죽는 게 아니고 누가 죽어요? 여호사밧이 죽을 판인데 저가 이스라엘 왕이다, 하고 쫓아가다가 32절에, 어 아니네. 그리고 더 재미있는 것은 아합 왕은 안 죽잖아요. 여호사밧은 일단 아니고 아합 왕은 따로 있다. 33절에 보면, 한 사람이 그 뒤에 무슨 단어 나옵니까? 부사, 뭡니까? ‘우연히’ 나의 예상과 나의 예지를 넘어서는 우연히 활을 쏘았는데 활이 이스라엘 아합 왕의 갑옷을 뚫어버렸지요.
그다음에 “이스라엘 왕이 병거에서 스스로 부지하며 저녁때까지 아람 사람을 막다가 해가 질 즈음에 죽었더라”(34절) 죽음체험, 모든 인간은 결국은 예언 안에 갇혀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비밀이 없습니다. 예언이 진리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는 세상도 알고 우리 자신도 알게 하고 그리고 하나님도 알게 하옵소서. 말씀의 세계에서 이 세상의 인간들이 생각하는 건 전부 다 망상에 불과한 것을 거짓말의 세계인 것을 이제는 똑똑하게 확실하게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