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05a 울산강의-역대기하(18강) 21장 20절 : 묶음과 풀림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역대하 21장부터 하겠습니다. 여호사밧의 아들, 유다의 다섯 번째 왕, 여호람 이야기입니다. 이 여호람에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사건이 있었는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여호람은 딱 20절을 주목하면 됩니다. 20절 마지막에, “열왕의 묘실에는 두지 않았다.”
사람이 살아 있을 때 그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가 사람한테는 관심사가 돼요. 그런데 그 사람 죽은 장소가, 죽은 지점이 어디지? 그거는 일반사람한테는 보통사람한테는 관심 밖의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이 결정하는 것은 살아서 뭘 했느냐가 중요하지 그 사람이 죽어서 어떤 지점에 묻혔느냐는 그거는 인간에게는 에피소드,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중요하지 않은 끄트머리 이야기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근데 성경은 이러한 인간의 관점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거는 인간들 네 생각이고 하나님의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생각은 성도는 죽는 자리가 반드시 천국이어야 돼요. 천국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천국 가고 싶다가 아니라, 그거는 우리 생각이고. 가고 싶다고 천국 가는 게 아니거든요. “내가 너의 죽는 자리가 천국 되게 해줄게. 그러니까 네가 한 평생 뭘 하며 살았는가에 대해서 네가 신경 쓰지 마.” 이거에요.
인간의 기본적인 인식 차이가 엄청나게 차이 납니다. 이걸 다시 한 번 글로 쓰면 이렇습니다. 죽는 자리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죽는 자리가 천국의 출입구가 되도록 하나님의 약속(또는 언약이라 하지요), 언약이 그렇게 정했으니까. 죽는 자리가 천국의 출입구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했습니다.
여러분의 자리는 어느 공원묘지에 준비해놨습니까? 여러분 장례 치르고 어디 갈 거예요? 뭐 현충원에 갈 겁니까? 현충원에 아무나 가는 게 아닙니다. 거기는 대통령 쯤 돼야 갈 수 있는 데에요. 천국의 출입구가 되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서 정해버렸어요. 그렇게 정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의 일생을 가지고 딱 이거에요. 죽음에 대해서 패배했는가? 아니면 죽음에 대해서, 음부의 권세라 합니다. 죽음에 대해서 이겼는가? 서로 상반되는 서로 완전히 대비가 되는 이 두 가지로 그 인생을 끌고 가는 거예요.
장난감 기차를 유치원에서 두 아이가 놀고 있는데 한 기차마다 선로가 따로 돼 있다고 칩시다. 한쪽은 빨간 철로노선을 따르고, 한쪽은 파란 노선을 따르고 그렇게 유치원에 와서 논다 합시다. 그러면 그 기차를 손에 갖고 놀 때에 빨간 노선에 접어든 자는 어떤 경우라도 파란 노선의 기차로 갈 수 없어요. 마찬가지로 파란 노선의 기차는 빨간 노선의 기차가 될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그 기차에 비바람이 불든지, 유치원에 지붕이 있으니까 비바람 불리는 없고. 낙엽이 떨어지든지, 안 그러면 기차 자체의 여정에서 어떤 사고가 있든지, 아니면 이혼을 했다든지 어떤 경우라도 그 노선을 탈선되지 않습니다. 인생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위아래로는 그냥 롤러코스트 타듯 하지만 그 노선만큼은 인간 본인이 조종할 대상이 아니에요. 인간은 그 결정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노선대로 가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두 종류의 인간을 만들었는데 하나는 뭐냐 하면 죽음에 대해서 패배한 자, 또는 죽음에 대해서 이긴 자, 이미 확정된 두 개의 노선으로 둘을 대비해서 달리게 합니다. 그 대비해서 달리는 현장, 이스라엘이 현장이거든요.
이스라엘 현장이 이게 확대가 되면 그게 뭐냐 하면 오늘날 인간들이 말하는 현실세계에요. 오늘날 현실세계를 축소를 하게 되면, 또는 수렴, 축소를 하게 되면 두 종류만 나오는데 그걸 미리 앞당겨서 이스라엘 역사의 현장을 통해서 이걸 미리 보여주는 거예요. 여기에 동원된 역할, 배역이 왕입니다. 유다 왕.
어떻게 이렇게 장담할 수 있느냐? 방금 이런 식으로 확정됐다는 사실을 무슨 근거에 의해서 주장할 수 있는가? 그것은 이스라엘 왕만이 하나님의 다윗의 언약과 관련성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언약은 보이지 않습니다. 언약은 안 보이지만 그 언약이 나타내는 결과상태, 어렵게 해서 결과태, 또는 결과적인 모습은 이렇게 상반되는 두 종류의 왕을 통해서 알려줍니다.
상반되는 그 일이 역대하 21장 7절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 볼 때에 ‘너 어떻게 살아? 똑바로 살아야지. 인생 바르게 사는 거야. 이렇게 살다가는 지옥 가’ 인간들은 보통 그런 식으로 상대방을 조언을 하든지, 가족을 대할 때 그런 마음가짐으로 붙잖아요. 그러면 제가 여러분한테 달리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 지금 어느 노선 위에 달리고 있습니까? 빨간 노선입니까, 파란 노선입니까? 내가 손댈 수 없는 확정된 기차 철로는 여러분은 어느 철로 위를 달리고 있습니까?” 설운도 씨가 불렀던 노래에 나오잖아요. <나침반> “종로로 갈까요, 명동으로 갈까요” 확정된 노선이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그게 정이 없어서가 아니고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노선 자체가 밑의 차바퀴를 꽉 물고 달리는, 한 번 물면 놓지 않는 그 노선이 확정되면 갈 길이 다른 겁니다. 달라져요.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무는 게 아니고 주께서 우리의 발목을 잡아버리면 빼도 박도 못합니다. 주님에 발목 잡힌 사람은, 천국에 가 있는 주님의 능력에 의해서 발목 잡힌 사람은 이미 확정 난 팔자입니다.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했다면 그 부활의 권세, 능력으로 자기 백성을 창세전부터 이미 고정화시켰거든요. ‘너는 반드시 내 곁에 와야 돼. 너는 나와 떨어지지 못해.’
그것이 여기 7절 용어로 한다면 이렇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의 집을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음은 이전에 다윗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시고 또 다윗과 그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허하셨음이더라” 설명이 이렇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이 대목을 여러분들이 이해할 때에 어떻게 이해하면 쉬우냐 하면 다윗과 하나님과 맺은 그 약속은 그 후대 사람들이 어떤 인생을 살았든 이 언약을 파기시킬 수가 없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파기되지 않습니다.
더 아주 제대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다윗언약이 굳건함을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서 항상 제멋대로 살아가는 인간들을 주께서 채택하여서 이 언약이 자신의 제멋대로를 능가한다는 것, 내 마음대로 산다는 그 능력보다 더 초과적인 능력으로 분명히 제멋대로 살았는데 도착해보니 천국, 이런 거요.
분명히 지 마음대로 살았는데 나중에 도착해보니 여기가 어디지? 여기는 천국이다다다다~ 천사의 나팔소리 나오고 완전히 새 하늘과 새 땅 나오고 딴 세상 돼버리는 것. 그렇게 거기 도착한 자기 백성은 움찔거리는 정도를 넘어서 깜놀, 깜짝 놀래버리죠. 이럴 줄은 몰랐다는 거예요. 야, 여기서 참 어려운 문장, 미안하지만 여러분들이 어려운 문장 대할 때마다 되지도 않은 교양이 팍 올라간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좋게 봅시다.
도대체 무슨 어려운 문장이기에 뜸 들이는가, 적어볼게요. ‘재인식이란 나의 표상으로 다시 만드는 것’ 문장이 어렵지요. 이걸 용어를 바꿔서 수능에 내고 싶어. 그래서 수능에 만점 못 받도록.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모든 인간은 자기 외부의 것을 본인 입장에서 다시 해석해서 자기가 일방적으로 만들어낸다는 이야기에요.
어떤 것도 상대를 볼 때 남편, 아내를 보든지 자식을 보든지 교인들을 보든지, 안 그러면 사람을 만날 때에 그냥 보는 게 아니고 보이는 대로 보는 게 아니고 나의 표상은 내게 유리하도록 나의 가치가 이 정도로 건재하고 우수하고 나 잘났어, 라는 것은 증명해주기 위해서 상대에 대해서 물건에 대해서 세상에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서 전부 다 그걸 다시 개념을 본인이 제작하고 만들어내는 식으로 살아간다 이 말입니다.
이게 인간이에요. 이걸 염두에 두고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시는 겁니다. 염두에 두신다는 말은 뭐냐? 이걸 염두에 두면 똑바로 알아, 제대로 알아야지, 이런 식으로 한다는 말이냐? 아닙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이 표상은, 재인식이란 인간은 타고났어요. 재인식과 누구를 만나느냐 하면 이게 악마와 그리고 죄의 능력과 만나요. 만나서 그 결과가 뭐냐? 죽으면서도 죽는 이유를 몰라요. 죽는 이유를 모르는 채 죽는다.
모든 인간의 특징이 뭐냐? 죽어가면서도 죽는 이유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열심히 살았는데, 바르게 살았는데, 하나님 잘 믿었는데, 예수 믿었는데. 그 예수 믿었다는, 믿는다는 그 개념 자체가 나 잘남을 증명하기 위해서 내 안에서 재창조한 개념들인데요?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와 만나서 어떤 인간도 죄에 대해서 패배자라는 인식으로 몰아세운다. 죄를 이길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에 대한 성경 근거는 어디 있느냐? 로마서 5장 12절, 누가 크게 읽어보세요.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진짜 성경이 어려워요. 여러 사람, 여러 의견, 다양성을 인정해주자? 성경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의 다양한 의견들은 단 한 사람으로 나와서 한 사람으로 돌아가게 돼 있어요. 그거는 구원하는 출구가 한 방법이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원칙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 사람은 저 죄 때문에 죽고, 나는 내 죄 때문에 죽는다는 이거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어떤 죄를 짓든지 인간은 단 하나의 죄로 죽습니다.
그거는 뭐냐? 만나는 사건, 보이는 모든 것은 내 안에서 바로 내가 나의 세계 구성을 위해서 내가 개념을 다시 창조한 그 죄, 원래 진실 된 그 개념과 그 진리는 모르고 내 유리한대로 재해석한 죄, 그 죄는 백 사람, 천 명이고 십억이고 칠십억, 팔십억이 되도 모든 인간은 지금도 부지런히 하고 있는 일입니다. 어떤 인간도 그 그렇게 해요.
사건은 한 사건 일어나도 보는 관점은 사람마다 다 다른데, 차이난다, 다르다 말이죠. 그런데 그게 그 다름이 똑같아요. 뭐가 똑같으냐? 그게 바로 사건을 일으킨 하나님의 진의, 진짜 뜻에 대해서는 무지몽매하다는 점에선 동일해요. 똑같아요. 몰라요. 이거는 어려운 게 아니고 쉬운 거니까 쉬운 것 말씀드리겠습니다.
역대하 20장에서 여호사밧 나왔습니다. 여호사밧 왕. 21장 1절, “여호사밧이 그 열조와 함께 자매 그 열조와 함께 다윗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여호람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그렇다면 여호사밧과 여호람이 같은 사람인가? 그건 아니지요. 다른 사람이에요. 그러면 그냥 다른 사람인가? 그건 아니에요. 그 아버지의 아들이에요. 여호사밧이 먼저 있었고 그다음에 여호사밧이 있다는 조건 하에 여호람이 있는 겁니다. 그러면 여호람은 어떤 일을 해도 여호사밧의 범위 바깥으로 못 벗어나요.
그다음에 여호사밧의 아버지 이름이 아사에요. 역대하 17장. 여호사밧이 아무리 어떤 일을 해도 아사 그 사람의 범위를 못 벗어납니다. 그다음 이야기는 제가 계속 해봐야 시간 낭비가 되겠지요. 그게 바로 르호보암까지. 르호보암은 어디서 나왔는가? 솔로몬에서 나왔잖아요. 솔로몬은 다윗에게 나왔습니다.
그러면 아까 봤던 역대하 21장 7절은 뭡니까? 다윗의 등불을 생각해서 여호사밧으로 하여금 나라가 조기에 망하지 않도록 해주었다. 여기 “저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다윗의 집을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음은” 7절에 나오잖아요. 이 성경에서는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하면 성경 전체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한꺼번에 파악하는 방식을 다윗의 등불이 보여줍니다.
이게 뭐냐 하면 묶인 것이 풀어지고 풀어진 것이 도로 묶인다. 다시 묶인다. 하나님의 방법은 이 방법이에요. 다윗언약으로 묶어놓은 것은 그 묶인 것을 풀어줘야 다윗언약이 성립되기 위해서 구원될 자와 구원 안 될 자로 이게 다윗언약에서부터 해서 두 개와 같이 나란히 나와야 돼요. 여기에 우리 개인이 있다 합시다. 개인이 나 구원될래요, 라고 그의 외침과 몸부림, 노력은 여기선 전부 다 소용없습니다.
왜? 우리는 묶인 게 아니고 풀리는 대상이고, 묶여야 될 대상이지 우리가 스스로 내 인생을 내가 손질해서 이사 가듯이 내가 알아서 짐 꾸릴 수 없는 입장이에요. 왜냐하면 우리는 아버지가 있거든요. 그 아버지는 또 아버지가 있고. 로마서 5장 12절의 말씀처럼 모든 것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죄가 흘러나오는 거예요.
이게 여러분에게 기쁜 소식으로 들려야 돼요. 왜냐하면 내가 어떤 행동을 어떤 태도를 가지고 정신자세로 어떤 마음가짐을 하던 그것은 내 운명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이야기로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 땅에서 뭘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그거는 아의 종말과 전혀 무관한 거예요. ‘전혀’란 말이 모자라서 여기 영어방언 들어갑니다. Never, never! 결코 상관없어요. 아무 상관없어요.
남편과 사이가 좋든 안 좋든 전혀 나의 종말과는 무관한 거예요. 왜냐하면 나의 시작이 나의 태어남과 무관함과 똑같은 원리에요. 내가 태어나서 뭘 하든지 간에 이미 태어남 자체가 내가 손쓸 수 없이 태어났기 때문에. 뭐 우주만 빅뱅인 줄 알아요? 여러분도 빅뱅이에요. 내 인생에 대해서 빅뱅, 빵하고 터지듯이 후차적으로 생겨난 내가 처음 생겨난 사건에 대해서 내가 관여할 수가 없습니다. 그 약속에 내가 관여 안 돼요. 관여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방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나의 어떤 행동도 내 시작과 끝에 관여되지 않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내가 묶지도 않은 어떤 묶음이 그 묶음의 내용을 설명해주기 위해서 그 내용이 어떤 내용인지 드러내기 위해서 나는 마치 자유의지를 가지고 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마치 마구잡이처럼 풀린 것처럼(as if) 그게 아닌데 마치 그것 인 것처럼 평생을 내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불신자들은 그 사실을 모릅니다.
여러분 티브이에 아침드라마 같은 것 보세요. 얼마나 악착같이 애를 쓰면서 자기 인생을 꾸려나가는데 온 혼신의 노력을 다 합니다. 남편 일찍 잃고 저 아이 둘 키운다고 내가 못한 일이 없습니다. 주인공 엄마들은 그런 이야기를 해요. 애들 키운다고 모진 고생 다 했습니다.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어떤 내용을 품고 있습니까? 내가 모질게 고생하고 어렵게 했던 그 결과로서 우리 애가 이렇게 재벌가 사람 만나서 신데렐라처럼 잘 돼서 뒤늦게 내가 호강을 합니다. 다 내가 고생을 많이 한 덕분이지요 뭐. 드라마 이야기가 주로 그렇게 흘러가잖아요. 지옥이나 가라.
그래 돼버리면 인생이 어떤 인생이 되냐 하면 결정 난 게 아무것도 없어요. 나 하기 나름대로의 결과가 그때그때 주어진다면 미리 결정된 것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여러분 들어나 봤습니까? 그걸 이렇게 이야기해요. 우울증이에요. 결정된 게 아무것도 없어요. 뭘 해도 불안해요. 혹시 행동 잘못해서 결과가 내 인생을 나쁘게 만들면 지금껏 살아온 모든 것이 무너지지 않느냐.
언약이 빠진 인생, 약속을 모른 인생, 약속은 인간이 모르게 돼 있어요. 언약에서 풀린 인생,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언약에서 추방된 인류의 세계, 이걸 하나님께서 이렇게 표현해요. 파편적이다. 조각조각난 정신세계. 이게 근거가 창세기 11장. 인간은 자신을 통일시키기 위해서 모든 정신이 조각난 게 아니고 단출하게 전부를 다 알기 위해서 인간이 창세기 11장에서 했던 거대한 작업이 있습니다.
그 작업이 뭐냐 하면 탑이에요. 탑 쌓았는데 하나님께선 이 탑을 무슨 탑이 되게 했느냐 하면 바벨탑이었습니다. ‘바벨’ 뜻이 뭐냐 하면 혼선, 혼란입니다. 전부 다 분산시켜요. 분산시키면 인간의 정신은 파동처럼 돼 있지만 사실은 순간순간 전부 다 조각났어요. 다 끊어져있어요. 끊어졌으니까 틈새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우울증세가 나옵니다.
이거는 부부생활한 사람들은 상대를 보고 이런 경우를 많이 경험해요. 아침까지 기분 업 되어 기분 좋다 하다가 저녁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갑자기 음성이 높아지고 속에서 울분이 터져 나오고. 굳이 결혼 안 해도 직장생활에서 상사나 동료들 간의 대인관계, 인간관계를 보게 되면 전부 다 환자 같아. 일관성이 하나도 없어요.
좋게 이야기할 걸 탁자를 치면서 지시하고. 나중에 알고 보니까 주식이 3000 밑으로 내려갔어. 코인이 내려갔든지. 자기 성질나는 것을 참지 못하고 바깥으로 터뜨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좋게 이야기할 것을 심하게 이야기하고. 어떤 작업의 모든 현장에서, 직장의 현장에서. 교사들 그렇잖아요. 만약에 아침에 부부싸움 했다. 그날 학교 가서 애들 죽었어. 잡아요. 괜히 애꿎은 애들 잡는다고요. 안 그러면 열불이 나서 못 참으로니까 바깥으로 풀어야 되니까.
이게 모든 생각이 딱딱한 엿처럼 다 끊어져있어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셔요. 내 일관성을 유지 못하게 만들어요. 정신병 환자를. 좀 좋으면 기마이 쓰고, 좀 못하면 좌절하고. 그 끊어진 굴곡을 보여주는 배우들의 누구냐? 유다나라의 왕, 바로 이스라엘의 왕 역대상, 역대하에요.
이스라엘의 그 역사는 현장을 결국 묶어진 언약을 하나님께서 풀어냄으로서 언약 자체가 어떤 사람은 꼭 지옥 가야 될 사람과 어떻게 해도 천국 가야 될 사람으로 서로 다른 결과를 바로 이스라엘 역사의 왕들이 미리 앞당겨서 역할로서 연극무대에서 자기 배역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 그게 바로 역대상, 역대하입니다. 성경을 안 볼 수가 없어요. 봐도 모르겠다고 하는데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조금씩 성경말씀과 엮여집니다.
적어보겠습니다. 인간의 삶의 현장이 말씀과 맞게 되면, 말씀은 이미 하나로 묶여있다. 이미 진리는 확정되어 묶여있는데 우리의 말씀 현장은 뭐냐 하면 정신병처럼 다 끊어져있어요. 끊어져있으니까 인간들이 자기의 삶의 현장에서 끊어진 것을 잇기 위해서 뭐냐? 자기 끊어진 생각들을 잇는 방법이 뭐냐? 변명과 핑계죠.
구차한 변명과 핑계로서 자기가 그만큼 나는 최선을 다하고 나는 정당하다고 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아까 이야기한 모든 개념을 재창조해요. 재인식. 이게 인간의 삶의 현장입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하나님의 묶여있는 언약이 보기에 같잖지요. 코미디에요, 코미디. 구차한 변명과 핑계.
주일 낮 설교에서는 구질구질한 변명과 핑계를 남발해가면서 어찌 되었든 자기 의, 자기 사수, 자기 방어, 자기 체면유지 이걸 누가 하느냐? 여호람이 해요. 이걸 누가 했는가? 여호사밧이 해요. 아사가 해요. 솔로몬이 해요. 다윗이 합니다. 그 시대에 일어난 사건을 맞닥뜨리면서 사건은 언약에 의해서 이루어졌는데 언약이 일으킨 사건 앞에서 인간은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인생을 억지로 꿰맞추면서 나 그래도 잘났다는 것을 허세 떨고 과시하는 그런 식으로 살아갑니다.
이게 한 마디로 말해서 자기 주제도 모르면서 건방떠는 거예요. 건방진 거예요.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게 뭐냐? 교만과 건방짐이에요. 주께서 제일 좋아하는 것은 뭐냐? “주여, 제 죄인입니다” 세리가 했던 그거. 주께서 제일 미워하는 것은? “나 바리새인인데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간음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고 십일조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천국으로 가는 철로가 구질구질하게 천국으로 가고 있음을 인정하면 되잖아요. 지금 나는 구질구질한데 그걸 딱 발목 잡고 있는 철로는 어디로 가고 있어요? 천국 가고 있어요. 천국 가는 마지막 모양새는 뭐냐? 어디 가서 죽느냐? 어느 출입구에서 죽느냐? 천국 출입구냐, 지옥 출입구냐, 어느 쪽에서 죽느냐는 거예요.
제가 어느 쪽에서 죽느냐, 하는 말은 구약적 안목에서는 제 말이 맞았어요. 인생을 살면서 죽을 때 천국 들어가고, 지옥 가는 사람은 죽을 때 지옥 간다, 이게 구약적 안목에서는 맞는 말을 했는데 신약적으론 틀린 말이에요. 왜? 이미 우리가 죽어있었기 때문에. 내가 죽어 있는 모양이 살아 있는 모양이에요. 이게 뭐냐? 이미 천국에 와 있는 모습이다. 신약은 더 어렵지요.
아까도 권사님도 이야기했지만 부엌에 냄비가 저절로 움직였다. 이상하다 발도 없는 냄비가 왜 움직이지? 들어보니까 쥐가 안에 들어가서 쥐가 움직이니까 아무 생각도 없는 위에 껍데기 냄비도 같이 움직이게 되잖아요. 성도는 이미 냄비에요. 성도 안에 누가 있느냐? 이미 죽은 냄비를 누가 뒤집어쓰고 가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서 인도하는 데로 가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성도는 죽었는데 어떻게 죽느냐? 죽을만해서 죽어요. 왜? 입만 떼면 핑계고 변명이니까. 하여튼 하나님이 싫어하는 그 건방짐, 체면, 교만, 으스댐, 허세덩어리, 과장됨 이게 만약이 아니고 덕지덕지 붙어서 일상이 돼버렸어요. 아예 머리에 붙었어. 나는 우울증 환자입니다. 이어질 이유도 없는 걸 억지로 이어가는 거예요. 자기 유리한 쪽으로. 모든 사건과 모든 상황을 재인식하면서, 우리의 삶이.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뭐냐? 이렇게 자기 자신을 억지로 조작하는 것, 물론 죄죠. 죄 짓는 것 외에는 할 재주가 없어요, 우리는. 모든 게. 뭐 순수하게 했다고요? 순수하게 한 것 돌아서서 5분 안 돼서 그건 내가 잘나서 그렇게 잘했어, 믿음이 좋아서 그랬다. 전부 다 자기 마음대로 개념을 재인식하고 있다 이 말이죠.
지금까지 한 걸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죽는다. 왜? 죄에 패배했으니까. 그러면 죄 안 지으면 되잖아. 죄 안 지으면 우린 승리하잖아. 죄를 안 지을 수 없어요. 왜? 우리 아버지 때문에. 우리 아버지 안에서 못 벗어나니까. 그럼 아버지가 죄를 안 지으면 되잖아. 우리 아버지는 그 할아버지한테 또 못 벗어나요.
한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어떤 인간도 죄에서 못 벗어나는 것을 로마서 5장에서 뭐냐? 죄의 왕 노릇. 사도 바울이, 죄가 왕이란 게 뭐예요? 왕은 권력에 누수가 없어요. 도망칠 수 없는데 도망치는 걸 허용하면 그건 왕답지 못해요. 왕다우려면 어떤 누구도 탈출이 불가한 왕 아래 있는 모든 자들은 그 왕의 위세에 눌려서 아예 탈출이 안 되는 상태가 왕 노릇 된 상태에요. 모든 아담에 속한 인간들은 죄가 왕임을 떠받치고 살아갈 운명으로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어떻게 대책이 없어요.
죄의 왕 노릇이 이게 복음일까요, 기쁜 소식일까요, 아닐까요? 이건 시험문제지요. 어느 쪽입니까? 복음이죠. 왜 복음이냐 하면 달리 내가 노력할 게 없기 때문에. 이건 뭐냐? 내가 나한테 책임질 게 아무것도 없어요. 기쁜 소식을 문장으로 안 남길 수가 없어요. 남겨야 돼. ‘내가 나를 평가하지 마세요.’ 평가가 안 되려면 나는 스톱, 그러니까 존재가 되면 평가가 돼요. 존재 말고 flow 흐름이어야 돼요. 만약에 내가 나 어떻지, 하고 스톱이 되면 그 동네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곱 귀신이 달려듭니다.
제가 일곱 귀신이라 했잖아요. 그냥 좋게 말해서 상담가가 등장합니다. 건강상담가, 신앙상담가, 그다음에 여러 가지 다채로운 상담가들이 조언해주겠다고 달려듭니다. 당뇨에 운동 좀 해주시고. ‘당뇨에는 운동 좀 해주셔야 됩니다.’ 그럼 물어봅니다. 당뇨에 운동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당뇨가 낫겠지요. 나으면 뭐가 돼요? 당뇨병 있었는데 없어지면 나는 어떻게 돼요? 있을 때보다 나는 정상이고 훌륭한 사람 되겠지요. 그게 뭐냐 하면 내가 나를 뭐합니까? 평가했으니까 상담가가 뭡니까? 일곱 귀신이에요.
어차피 우리는 건강하든 안 하든 지금 폭주하는 기차를 우리가 멈추게 할 수 없어요. 건강해서 죽으나 골골대다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에요. 왜? 죄가 왕 노릇하는 상황에서. 그 시추에이션에서 우리는 죄에 패배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만 살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왜 기쁘냐? 내가 보기엔 절망적인데 인생 끝났는데 왜 기쁘냐? 바로 그럴 때만 묶음이 나오거든요. “다윗을 생각하사” 신약에 오면 누굴 생각합니까?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를 꾀더냐? 어느 일곱 귀신이 너를 꾀더냐? 우리가 아담에 묶였거든요. 근데 십자가는 뭐냐? 두 번째 아담인데 어떤 기능? 우리를 묶어주는 기능이에요. 아담은 시작부터 묶어졌지만 주님은 시작을 고려해서 아울러서 마지막 우리가 아직 모르는 우리의 최후까지 주님이 절단을 내려서 확정을 했어요. 네가 나 있는 곳에 온다고.
그렇다면 우리가 죽음에 승리했습니까? 아니지요. 우리가 죄를 승리했습니까? 아니지요. 그럼 누가 우리를 천국에 묶어줍니까? 누가 승리한 거예요? 예수님의 승리죠. 이걸 구약적으로 하면 언약의 승리, 다윗과 맺은 언약의 승리. 언약이 우리가 어디에 매여 있고 우리가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미리 간파하시고 또는 그걸 아는 세계에 풀어주시고 풀어준 자기 백성을 다윗언약에 의해서 묶어버리는 거예요.
다윗언약이 뭐냐 하면 다윗의 자손을 너한테 보내주겠다는 거예요. 다윗의 자손은 누구냐? 이게 어떤 기능이냐? 이게 왕 기능이에요. 왕 기능은 왕과 단독으로 하나님과 모든 언약을 맺어서 그 나머지 백성들에게 언약의 효력을 혜택을 왕국이란 이름으로 뒤집어씌우는 그 역할이 바로 왕의 역할입니다. 첫째 시간 마치면서 여러분에게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질문은 굉장히 간단한 질문이에요.
사단장이 집에 와서 잠잘 때 ①군복 입는다, ②잠옷 입는다. 몇 번입니까? 바로 잠옷 입겠지요. 군복 입을 때는 사회적 기능성 때문에 옷을 입어요. 인간이 옷을 갈아입는다는 말은 뭐냐 하면 사회적 존재에서 어디로 바뀌느냐 하면 개별적 존재로 바뀌면서 옷을 갈아입습니다. 집에 와서 옷을 갈아입는다는 것은 더 이상 사회적 기능성을 잠시 멈추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희한한 사람이 있는데 잠잘 때도 군복을 입는다면 그 사람은 집에 와서도 개인적인 기능을 하지 못할 자가 되겠지요. 밖에 나가서 사회적인 자기의 포지션, 위치 그 일을 해야 될 사람인데 군복을 그대로 입고 잠을 잔다는 것은 혹시 비상상태면 빨리 나가서 진두지휘해야 될 사람 같으면 잠옷을 입을 여유가 없겠지요.
바로 이 역할이 누구냐? 왕이 해야 될 역할입니다. 왕은 자나 깨나 개인적인 일을 해서는 안 되는 존재에요. 다시 말해서 왕에게 주어진 언약에 의해서 주어진 왕 자리는 개인의 영달과 개인을 위해서 활용할 자리는 아닌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왕이 주께서 만든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을 위해서 희생하고 봉사해야 될 왕이 만약에 개인적으로 돌아섰다? 그러면 그 왕은 어떻게 돼요? 그 노선이 하나님의 다윗언약 노선이 아니고 다른 노선인 것이 드러나지요. 그 사람이 바로 여호람입니다. 여호람은 왕직에 있으면서 개인적인 영달과 명예와 위신과 체면과 허세를 위해서 자기 왕의 권력을 이용한 사람이에요. 그 이야기는 10분 쉬고 두 번째 시간에….
■20251205b 울산강의-역대기하(18강) 21장 20절 : 묶음과 풀림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역대하 21장에서는 하나님에 묶여있는 언약이 역사 현실 속에서 어떤 방식의 풀림으로 나타나는가? 그게 이렇게 돼요. ‘전쟁만이 현실이다.’ 이게 여호람도 피해갈 수 없어요. 8절에 보면, “여호람 때에 에돔이 배반하여 유다의 수하에서 벗어나 자기 위에 왕을 세운고로 여호람이 장관들과 모든 병거를 거느리고 출정하였더니”
전쟁을 할 때에 바로 군대를 동원시키고 그들에게 군사 지시를 시켜서 본래 나라의 그 본질, 나라가 갖고 있는 권세를 유지해야 될 임무가 왕에게 집중돼 있습니다. 집중이라 할 때 아까 첫째 시간에 했던 묶임과 관련 있죠. 집중, 묶임 뭐냐 하면 왕이 있다는 것은 왕은 무슨 기능? 묶음 기능. 백성은 무슨 기능? 백성이 왕이 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뭡니까? 풀림 기능. 이 풀림을 제대로 묶어야 될 그 업무는 누구한테 주어졌습니까? 왕에게 주어진 겁니다.
여러분들이 구약의 이러한 전쟁하는 현실에 대해서 현재 21세기의 우리 한국은 전쟁 안 일어난 지 오래 됐어요. 칠십 년 넘었지요. 1950년 6월 25일. 75년 됐습니까? 하여튼 그 정도로 전쟁이 없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성경말씀이 와 닿지 않을 수가 있는데 그럼 제가 실제로 1940년에 일어났던 전쟁 하나 이야기하겠습니다.
1940년 덴마크와 독일과의 전쟁. 독일은 덴마크(독일 북쪽에 혹처럼 나와 있는 곳)를 삼키기 위해서 최첨단의 우수한 강력한 전차를 동원했어요. 최신식 전차 동원. 덴마크는 뭘 동원했느냐? 자전거 부대. 이 자전거 부대가 해야 될 일은 뭐냐? 전차와 이기는 게 아니고 후퇴하는 법을 보여주는 것. 총 좀 쏘고 도망치고, 총 좀 쏘고 도망치는 거예요.
이 자전거 부대가 전투하는 장면을 보면 실제로 영화로 나왔는데, <1940 : 최강의 독일 전차부대> 그 영화에서 동네 마을의 어른들이 커피 따라주고 그래요. 자전거 부대, 우리 덴마크 군인 용감하다고 같아 담소 나누고 하다가 드디어 앞에서 ‘독일 전차 온다’ 하면 잠간 기다리세요, 하고 근처로 가서 총 쏘는 거예요.
독일 쪽에서 보면 같잖지요. 웃기지도 않아요. 그래서 독일에서 우수한 화기로 마구 쏘아대면 자전거 부대는 “중대장님, 소대장님 총알이 없습니다.” “빨리 도망쳐.” 역할이 도망치는 거예요. 도망치고 난 뒤에 보면 마을주민들은 벌써 커피를 독일 장병들에게 웃으면서 담소 나누고 그래요. 그런데 그중에서 고지식한 소대장이 하나 있었어요. 소위가 중령, 대령한테 가서 병력을 지원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랬다고요. 자전거 부대의 소위가. 상관은 “알아서 후퇴해!”
또 자전거 부대가 가다보니까 자전거 타이어에 빵꾸난 거예요. 독일군 오는데 빵꾸 때운다고 수리한다고 바빠. “빨리 수리해. 그냥 하는 척하고 후퇴해.” 이게 명령이에요. 그런데 그 소대장에게 병사가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 병사가 하는 말이 오늘 강의와 관련돼 있어요. “너 어디서 왔어?” 동네에서 차출되어 온 거예요. “네 소원이 뭐냐?” “빨리 군인 그만하고 평범하게 살고 싶습니다.” 이 한 마디에서 이 사회의 진실을 엿보게 됩니다.
‘평범하게 살고 싶습니다.’ 여기서 제가 질문을 하겠습니다.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할 때 소대장의 답변은 다음 중 무엇일까요? 자전거 부대의 하나의 병사가, 나 이런 짓하기 싫어요. 평범하게 살고 싶습니다, 할 때 소대장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①군이 지켜주지 아니하면 평범하게 못 산다. 이 말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그 영화에 보면 이렇게 나와요. 군이, 우리 자전거 부대 덴마크 군이 지켜주지 아니하면….
“네 소원이 뭐냐?”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나는 나라도 싫고, 왕도 싫고, 국가도 싫고, 조국도 싫고 그저 뭐가 좋으냐? ‘나’가 좋습니다. 이 이야기거든요. 여러분, 얼마나 솔직하게 이야기한 거예요. 그런데 덴마크 부대가 자기 나름대로 전쟁에 나갈 때 외치는 구호가 있어요. 파이팅처럼 구호가 뭐냐 하면 ‘하나님을 위하여, 왕을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전쟁에 용감하게 나서자’ 이래 된 거예요.
그런데 막상 사람한테 물으니까 하나님이고 왕이고 나라고 다 싫고 나는 평범하게 농사짓고 싶습니다, 할 때 소위가 하는 말이, 네가 하는 소원은 군대가 지켜주지 않으면 이뤄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 틀렸습니까, 맞습니까? 정말 맞는 말이지요. 오늘 역대하에서 보면 왕이 지켜주지 아니하면 밑에 있는 백성들은 그냥 자기의 소원 있잖아요. 조용하게 나 즐겁게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용납되지 않아요. 이게 현실세계입니다.
현실은 뭐다? 전쟁입니다. 그냥 나 혼자 내 한 몸 편하게 살고 싶어도 여기에 보호막을 누가 지켜줘야 돼요. 이걸 누가 지켜주느냐? 이스라엘의 왕 여호람이 지켜줘야 돼요. 여호람이 지켜준다면 여호람은 뭘 해야 되느냐? 하나님이 지켜주는 조건 하에 이스라엘을 유다나라를 지켜야 돼요. 하나님이 지켜주는 조건이 뭐냐? 하나님의 언약이 언약대로 왕이 행세를 해야 나라가 지켜져요. 그게 현실이에요.
그런데 밑의 백성들에겐 하나님이 지켜준다는 것은 너무 멀어요. 어차피 생각에서 비현실적으로 들립니다. 진짜 현실은 뭐냐? 다 귀찮다는 거예요. 군대고 하나님이고 나라고 뭐고 다 귀찮고 좀 소박하게 내 하는 대로 그냥 텃밭 가꾸면서 우리 새끼들하고 행복하게 잘 사는 것, 이것 내 소원입니다, 하니까 소대장이 하는 말이, 그걸 군대가 안 지켜주면 안 된다니까 네가 사는 게 현실이 아니고 전쟁, 누가 침범했고 그 침범을 막아야 되고 그걸 막기 위해서 군대에 가야 될 이게 현실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거예요. 얼마나 바른 말을 했어요.
이거는 반박의 여지가 없지요. 그러니까 이 사병은 너무나 자기중심이에요. 그런데 소대장은 군에 높은 사람이라고 자기중심에서 범위가 좀 더 폭이 넓은 거예요. 군대 지켜줘야 돼. 그래서 네가 군에 강제로 끌려온 거예요. 다 이것 나라를 위해서? 아니야. 너 좋으라고 하는 거야. 승리만 한다면 네 소원대로 해주는 거야. 이게 현실이야. 이게 실제사회야. 너는 빼도 박도 못해. 우리는 그 사회 속에서 살고 있어.
두 번째, 하나님이 지켜주지 아니하면 우리는 평범하게 못 산다. 맞습니까, 틀렸습니까? 아주 묵언수행을 하세요. 세 번째, 언약이 지켜주지 않으면 우리는 평범하게 살지 못한다. ①번, 땡입니다. ②번, 땡입니다. ③번, 틀린 거예요. ④번이 정답입니다. ④번은 뭐냐? 언약이 살리려면 네 중심이 깨어져야 한다. 이게 성경 전체, 이게 제대로 된 현실입니다.
우리 자신이 현실을 얼마나 가로막고 있는지. 가로막고 있는 게 바로 죄에요. 태어나서 누구 집안에 누구 성 씨로 태어나서 누구 하는 대로 공부하고 취직하고 아파트 사서 자식 낳고 그냥 평범하게 살면, 나는 그게 소원이야. 그게 죄에요. 네가 왜 살아? 네가 왜 살아야 되는데?
이사야 40장을 보겠습니다. 참 성경은 냉정하고 냉혹해요. 이사야 40장 6절을 보면,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말씀을 살리기 위해서 살 가치도 없는 너희들을 내가 좀 활용했다. 왜, 싫어? 평생 동안 너 살기 위해서 성경말씀을 듣고도 세상을 왜 사느냐? 살아 있으니까 악착같이 살아야지, 이거거든요. 그러면 그렇게 악착같이 살려고 하는 사람은 왜 죽습니까? 죽는 이유가 뭡니까? 힘 빠져서 죽습니다. 왜 힘이 빠지지요? 살다보니 힘이 빠졌습니다. 왜 힘이 빠집니까? 자연의 이치가 그렇습니다. 자연의 이치는 멀쩡하게 살아 있는 걸 왜 죽입니까? 글쎄 그게 자연이에요. 그렇다면 당신은 어디로 갑니까? 죽습니다. 죽을 걸 왜 삽니까? 몰라요. 죽음을 모른다는 뜻이지요.
이유도 없이 그냥 멍청하게 살아가는 거예요. 이거는 뭐 정신병자는 기본이고 바보에요, 바보. 죽을 거 왜 사는데?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가 뭡니까, 물으면 제가 얼마 전에 이야기했지요. 창조주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산다, 보통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치잖아요. 성경은 아니에요. 심판주를 기쁘게 하는 거예요. 나에 대한 죽음이라는 그것이 그냥 살다 있는 죽음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는 뭐가 없느냐? 자연사가 없어요.
얼마 전에 어떤 성도님을 만났는데 자기가 아는 어떤 사람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저녁 먹고 주무시다가 죽었다 하던가, 그래요. 저녁 먹고 이야기하다가 아이고 밥 잘 먹었다, 하고 돌아가셨어요. ‘아이고, 복 받았어.’ 그 할머니가 복 받았는지 유족이 복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복 받았어. 그걸 자연사라 하지요. 어떤 병명이 없이 자연사.
그러나 이 세상에는 자연사 없습니다. 한 사람이 죄를 범했으매 죄가 왕 노릇하고 그 열매는 바로 죽음이고, 모든 자가 죽음에 패배하게 돼 있어요. 왜? 전쟁이니까. 생명과 죽음과의 전쟁에서 모든 인간은 패배자의 고난 속에서 못 빠져나와서 죽음 안에 패배해야 됩니다. 그 패배 속에 뛰어든 분이 예수님이고, 누구나 패배할 수밖에 없는 죽음의 위세를 뚫고 유일하게 거기서 탈출에 성공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고, 그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으로서 자기 원하는 자를 자기와 마찬가지로 죽음에서 끄집어내주는 작업을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으로서 해내시는 겁니다.
따라서 그렇게 끄집어낼 때 엉뚱한 인간을 끄집어내면 지옥 갈 놈이 천국 왔지, 이렇게 실수하면 안 되겠지요. 실수를 안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죽일 때는 뭘 죽이느냐? ‘내 노력으로 살았습니다’라는 그 자아를 죽여 버려요. ‘나는 살아오면서 죄 지은 것밖에 없습니다’가 돼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천국에서 주님과 살 수가 없게 돼 있어요.
그렇다면 방금 이야기한 것을 여러분들이 이 땅에서 실시하지 마세요. 실시하면 그게 나의 죄가 아니고 나의 의가 되니까. 안 들었다. 주께서 하신 일은 내가 그걸 미리 알았다고 해서 거기에 맞출 수 있는 역량은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은 뭐냐? 내가 미처 모르는 더 많은 죄가 계속 살아 있는 한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도 죄였어,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죄라는 게 뭐냐 하면 ①번, ②번, ③번, ④번에 이를 때까지 ①번에서 ③번이 벌써 죄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신다. 언약이 나를 지켜주신다. 안 지켜주는 데? 이 나라가 나를 지켜주는데? 안 지켜주는 데요. 이 죄가 죄 되기 위해서 여기서 이렇게 하면 되겠지요. 까만 걸로 하겠습니다. ‘군대가 소용없다. 그다음에 하나님이 소용없다. 언약이 소용없다’를 우리 입을 통해서 우리 삶의 현실을 통해서 우리가 그것을 온 몸으로 체험해야 되지요.
왜? 체험을 해야 마지막에 꽁꽁 숨어있고 도망쳐서 안 들키려고 숨어있는 두더지 같은 진짜 있잖아요. 나. 종교, 하나님의 영광, 복음 사랑합니다, 이게 하나의 핑계거리에 지나지 않고 진짜로 소중하고 소중한 것은 천하에 누구밖에 없다? 나밖에 없다는 식으로 이미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근원적인 죄로 우리한테 박혀있는데 우리는 이걸 안 들키려고 온갖 것으로 다 포장을 하잖아요. 이걸 주께서는 인생을 통해서 끄집어내는 겁니다.
어떻게 끄집어내는가? 이 소위에 영화 마지막에 결국 후퇴하고 후퇴하는데 나중에 참 영화가 재밌어요. 마지막 다 끝나고 난 뒤에 마을 지키기 위해서 자전거 부대가 이제 총알 다 떨어졌어요. 벌써 느긋하게 전차 다가오고 이쪽은 총알 다 떨어지고 있으니까 소대장이 상황 보더니만 마을에 숨어있으니까 “야야 항복하자. 나부터 항복할게”
그래서 손들고 나오면서 덴마크 사람이라 독일 말 못 하니까 독일 말 할 줄 아는 부하한테 시켜서 “무기는 없다. 우리는 항복한다” 해서 줄줄이 사탕처럼 따라 나와요. 거기에 대해서 독일장교가 소위를 부르더니만 이렇게 합니다. “왜 진작 항복을 안 했어요?” 그러니까 해코지를 안 해요. “왜 사태를 이렇게 너무 심하게 몰아세웁니까? 왜 항복 안 했어요?” “왜 제가 항복해야 됩니까?” “위에서 항복했어요, 벌써.”
당신들을 공격하는 게 아니고 그 소식 전하려고 왔다는 거예요, 독일 군들이. 전쟁 끝났습니다. 이미 덴마크 국왕이 항복해버렸어요. 1940년대에. 항복했으니까 그냥 손들고 나오시면 됩니다. 이걸 가지고 사자성어로 제가 지은 사자성어입니다. 그런 사자성어 없어요. ‘현실적응’ 이것 무슨 소식? 기쁜 소식. 이게 기쁜 소식이에요.
우리의 운명은 위에서 결정할 문제지요 나에서 결정할 문제가 아니에요. 내가 총을 얼마나 쏘고, 마귀야 물러가라, 사탄아 물러가라 예수의 이름으로. 지금 상황이 그럴 상황이 아니에요. 그게 무슨 언약? 다윗언약이에요. 왕은 왕 격에 맞는 왕끼리의 전쟁이에요. 마귀를 누가 이깁니까? 주님이 이기잖아요. 그리고 이기고 난 뒤에 이 병사가 포로 되어 집에 가잖아요.
이 병사는 역시 내가 자전거 부대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어. 내가 지금 소박하지만 농부로 산다, 이렇게 주장하겠습니까,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떤 말을 하겠어요? 만약에 이 병사가 소원대로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면 입에서 나온 고백이 어떤 고백이 돼요? ‘우리나라가 잘 망했어. 제 때에 망했어. 우리 왕이 일찌감치 독일 군에게 항복했어.’
지금 여호사밧도 여호람도 뭘 해야 하느냐 하면 본인이 적한테 항복할 게 아니고 먼저 누구한테 항복하느냐? 여호와 하나님한테 항복해야 돼요. 그러면 누가 보호합니까? 주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을 보호해야 돼요. 간단하지요. 굉장히 간단해요. 버티면 안 돼요. 제 때 항복해야 돼요. 십자가 앞에 자기가 죄인으로서 항복하면 돼요. 굴욕적이 아닙니다. 죄인이라서 죄인일 뿐이지 뭐 주님 믿는데 굴욕적이다, 그런 뜻 아니에요.
현실이 전쟁이 현실이에요. 영적 전쟁이 현실입니다. 다른 현실은 없어요. 다른 현실로 하면 이 독일을 믿어야 돼요. 독일은 누구한테 졌습니까? 연합군한테 졌지요. 그럼 연합군은 또 누구한테 집니까? 그 내막을 사람들은 돌아가시기 전에 모른다니까요. 진리의 총체를 모르기 때문에 ‘아이고 센 사람이 이기겠지’ 아닙니다. 센 사람도 죽음에 죽어요. 그 센 사람, 센 나라, 아주 강한 왕이 나이 들면 죽어요. 왜 죽습니까? 죄한테 져서 죽어요. 마귀한테 져서 죽는다고요. 마귀한테 이기지도 못할 인간이 우리한테 그동안 큰소리쳤던 겁니다.
만약에 직장에서 높은 사람이 갑질하고 막 달려들고, ‘너는 서산에 한직으로 가’ 뭐 자기 집 있다고? 에이 네 자리는 도 부장이 차지했어. 너는 저리 가, 할 때 서울에 자기 집이 있는 김 부장은 어떻게 이기게 됩니까? ‘너는 늙으면 안 죽을 줄 알아’ 이게 정답이에요. 네가 이긴 걸로 보이지 너도 언젠가는 죽어, 사실은 이게 정답이에요.
너는 안 죽어? 나는 일찍 항복했잖아. 어디서 항복했어요? 십자가 앞에서 항복했어요. 주의 나라 임할 때 저를 기억해주세요. 이게 보통 기적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만큼은 꼭 살리고 싶잖아요. 자기만큼은 평범하게 살고 싶고, 자기 자존심과 자기 의미만큼은 살고 싶은데 시작도 몰라요. 끝도 모르지요. 그냥 중간지점에 살아 있으니까 살고자 애쓰는 것, 그거 마귀가 인간을 그렇게 길들인 거예요.
여기 10절에 보면, 에돔 사람을 치는데 10절 끝에, “여호람의 수하에서 벗어났으니” 여기 립나도 배반하고 에돔도 배반했는데 그 이유가 뭐냐? “이는 저가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음이더라” 버렸다는 말은 나 항복하기 싫어, 이렇게 된 거예요. 왜 여호람은 항복하기 싫었을까? 여호와 앞에 말씀을 듣기를 싫어했을까? 그 대신 뭘 했느냐 하면 여기 12절, 13절에 아합의 길을 가서 음란하게 우상을 섬겼습니다.
왜 그렇게 했는가? 왜 여호람은 하나님의 왕 되심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는가? 도대체 우상과 여호와 하나님과의 차이가 뭐냐? 이건 여러 번 했지만 진짜 죽을 때까지 반복해야 돼요.
여호와는 나를 결국 죽이시고 그 이유가 언약 확정에 있습니다. 언약의 확정이라는 근거를 갖고 있어요.
그런데 우상은 신이 존재하지 않아요. 존재하지 않지만 내가 신을 만들어요. 살아 있는 내가 만든 신이기에 그 신은 해야 될 일은 뭐냐? 살아 있는 나를 죽이면 안 돼요. 계속해서 나의 가치와 의미를 높여주는 쪽으로 살리는 쪽으로 작용할 때 그게 바로 우상입니다. 이름이 여호와든 예수든 성령이든 삼위일체든 그거는 형식에 불과해요.
중요한 것은 그 신이 나를 십자가에 죽이느냐, 이유 있는 죽음이냐, 아니면 그냥 무작정 복 받아라, 잘 될 거야, 잘 살아야 돼, 더 오래 살아야 돼. 당뇨 걸리지 말고 건강하게 운동하고 이런 식으로 나로 하여금 맹목적으로 이유도 없이 근거도 없이 나를 살리는 쪽의 신이냐? 그게 우상이냐, 우상 아니냐의 차이입니다.
그러면 여호람에게 묻지요. 여호람 너는 왜 살고 싶은데? 나는 왕이니까. 다시 말해서 나는 왕으로 살고 싶다. 왜 살고 싶은데? 나에게는 뭐가 있느냐 하면 권력 안의 나이거든. 내가 이 나라의 주인이거든요. 권력자. 참 여러분 권력 가진 게 성공일까요, 실패일까요? 말 잘못했네. 권력 가진 게 복입니까, 저주입니까? 저주입니다. 권력이 저주에요. 아무것도 아닌데 살려주는 것이 은혜에요.
제가 며칠 전 수요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보통 육천 원밖에 안 되는 서브웨이를 만칠 천 원 주고 샀다 이 말이죠. 가성비가 확 떨어지는 거예요. 그럼 만천 원 비잖아요. 만천은 뭐냐? 텅 빈 형식이죠. 텅 비어있죠. 가성비가 없어요. 가성비란 가치가 안 들어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사서 먹으면서 이 만칠 천 원짜리 서브웨이나 내 꼬라지나 어때요? 똑같다고 알 때에 만천이란 돈을 주고 나의 아무것도 아님을 구입한 셈이에요. 그게 은혜입니다.
은혜는 뭐냐? 내 텅 빈 자리를 많이 아는 게 은혜에요. 내가 복음을 듣고 왜 아무것도 아닌데 내가 십자가를 알게 됐고, 아무것도 아닌데 내가 주님 덕분에 천국 간다는 것을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왜 이게 이렇게 주어지지?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대구강의에서 했지요. 그걸 ‘값없는 값’이라고 했어요. 이게 요한계시록 22장에 나오는데 한 번 찾아보실래요.
21장 6절, 제가 읽습니다.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뭘 이루었는데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주께서 뭘 이루었는데요?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어떻게 줍니까? “값없이” 주지요. 22장 17절,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뭘 줍니까? 생명수를 주지요.
값없다는 것은 우리가 엉터리란 말이에요. 우리가 값을 치를 수 있는 그런 입장에 네가 놓여있지 않다는 겁니다. 값 치르고 천국 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있다, 없다?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천국에는 거저 주는가? 천국에 거저 넣어줄 리가 있습니까? 값이 있지요. 그런데 내 쪽에서 지불할 값은 없어요. 없고 그 천하보다 귀한 천국 영생을 누가 우리 대신 값을 치렀느냐 말이죠. 고린도전서에 보면 나는 너를 값을 주고 샀다고 했어요. 로마서 5장은 죄가 넘치는 곳에 뭐가 넘친다 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넘친다.
참 이 기쁜 소식을 오늘날 사람들이 이걸 막고 가려요. 그 이유가 뭐냐? 자기 자신을 대외적으로 값있는 자로 행세하기 때문에 ‘나 어때, 나 잘났지’를 행세하기 때문에 그 순간순간이 흐름이 아니고 존재가 된 순간이에요. 내가 어떻게 하면 남들 보기에 값어치 있는 대외적으로 무시당하지 않을 만큼 대단한 존재가 되느냐? 여러분 하루 스물네 시간 이 생각 빼고 하는 일 있습니까? 없지요. 스물네 시간이 내 가치를 마저 채우고 허점을 채우는데 우리는 전력을 다 소비하잖아요.
성도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지요. 그러나 성도는 뭘 아느냐? 바로 이것이 다 헛짓인 것을 아는 자가 성도지요. 그 짓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기밖에 모르면서도 그냥 평범하게 살래. 무슨 평범이 20억, 50억, 이백억짜리 평범이 어디 있습니까. 지난 낮 설교하면서 속으로 웃었어요. 돈은 있는 걸로 족한 줄 알라. 그런데 집에 돈이 726억이 있는데 그걸로 족할까요? 어떤 사람은 재산이 2조가 넘는데 그걸로 족할까요?
족하다는 말이 액수가 얼마 이상이 돼야 족하고, 그 이하는 덜 족하고 그런 게 있습니까? 없지요. 참 인간은 고쳐 쓰는 게 아닙니다. 그냥 버려야 돼요. 버리는데 언약과 섞어서 버려야 돼요. 그냥 버리면 큰일 납니다. 풀림은 묶임과 함께 버려져야 돼요. 묶는 자는 누구다? 왕, 다윗의 자손. 그래서 우리에게는 뭐가 있습니까? 다 이루신 뭐가 있어요? 우리에게 값을 요구하지 않을 정도로 값을 대신 치러버린 분이 계셔요. 왕이 있기 때문에 왕이 우리를 보호하고 지켜주는 겁니다. 내가 나를 지켜주는 게 아니에요.
끝으로 생각해야 될 것은 이겁니다. 처음에 이야기한 그것을 그대로 이야기해봅시다. 도대체 죽는 장소가 어디냐, 내 죽는 장소가? 현대공원묘지입니까, 어딥니까? 울산 근처에 공동묘지 이런 것 있습니까, 울산에서 유명한? 울산공원묘지 있어요. 성경에서는 이거에요. 막벨라 굴입니다, 이 장소. 헤브론, 막벨라 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 막벨라 굴을 그것도 값을 치르고 사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바로 창세기 23장에 보면 나오는데 9절에 헷 족속 땅을 무덤을 사거든요. “그로 그 밭머리에 있는 막벨라 굴을 내게 주게 하되 준가를 받고 그 굴을 내게 주어서 당신들 중에 내 소유 매장지가 되게 하기를 원하노라” 사라가 일백 이십 칠세를 살았다. 이삭 낳고 이십칠 년 더 살았나? 하여튼 사라가, 막벨라 굴이 헤브론이에요. 헤브론에서 죽고 난 뒤에 죽은 아내를 위해서 묘실을 만듭니다. 그게 창세기 23장, 드디어 17절, 19절에 막벨라 밭을 사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정해버려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소유지는 무엇의 소유지냐 하면 자기가 죽을 무덤을 소유한 거예요. 자기 죽음을 자기 내부화시킨 거예요. 자기 안에다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죽을 때 자기 죽음을 껴안고 죽는 바가 돼요. 죽음을 껴안는다는 말은 죽음이 주가 되고 죽음이 매인이 되고 자기는 서브가 되는 거예요. 나를 죽인 죽음이 어떤 작용을 하게 되면 죽는 나도 나중에 영생을 얻는다. 그러한 구조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오늘날 성도가 붙들고 있는 건 뭡니까? 제가 객관식 문제로 하겠어요. 너무 어렵기 때문에. 성도가 붙드는 것은 ①예수님, ②하나님, ③십자가, 몇 번입니까? 뭘 붙들어야 돼요? 십자가죠. 왜냐하면 예수님, 하나님은 존재가 돼요. 존재가 되기 때문에 이 존재를 붙들면 존재를 붙드는 내가 존재해야 돼요. 그런데 십자가 사건은 나를 갈아버립니다. 존재가 갈리면 사건이 돼요.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십자가 사건의 연속체가 되는 거예요.
그걸 물리학에선 파동이라고 해요. 연못에 돌 던지면 뭐가 생기지요? 파가 생기지요. 파는 이동하는 게 아니에요. 파동이 있는 중심원은 그 자리에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거예요.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어떤 영향을 받느냐 하면 저 멀리서부터 왔던 그 십자가 사건의 일부의 영향을 받고 혜택을 받으면서 가만히 있는 내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한다 이 말이죠. 사나죽으나, 사나죽으나, 사나죽으나 십자가 사건이다. 십자가 사건에 종속되는 겁니다.
성도는 소유가 아니라 붙드는 게 아니라 이미 사건 속에 휘말린 거예요. 언약 속에 휘말린 겁니다. 언약 속에 휘말리면 십자가 사건을 가지고 히브리서 11장에서 이게 실상이에요. 실상이고 내가 아는 나는 뭐가 되느냐? 하나의 꿈이 돼요. 요셉처럼. 요셉이 꿈을 꾸었습니까? 꿈이 요셉을 움직입니까? 움직이지요. 그렇지요. 요셉이 꿈을 꾸었지만 본인이 꿈대로 산 적이 없어요. 꿈을 요셉을 갖고 놀지요. 시편 105편에 보면 나오는데 그건 시간 관계상 찾지 맙시다.
말씀이 응할 때까지 계속 요셉은 사건이 일으키는 파동 안에서 옥에 갇혔다가 나중에 국무총리에 올라갔다가.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그건 의미 없어요. 누가 나를 국무총리에 했는가, 누가 나를 옥에 갇히게 했는가? 그 문제에요. 모든 것이 그 문제란 말이죠.
실상을 봅시다. 아까 여호람은 어떻게 되느냐? 여호람은 이렇게 나쁜 짓했으면 유다나라와 같이 날아가야 되잖아요. 그런데 이상하게 여호람 왕은 잘못됐는데 나라도 같이 날아가야 되는데 왜 유다나라는 멀쩡하냐 말이죠. 그것은 아까 이야기했지요. 뭐가 있다? 다윗의 언약 때문에 그냥 여호람을 이용할 뿐이지 진짜 왕은 다윗의 등불을 계속 지속시키겠다는 의지가 강렬한 그분이 실질적인 왕으로 계신다 말이죠.
그러면 그 실질적인 왕은 누굴 보냈는가? 여기 나옵니다. 여기에 12절. 12절하기 전에 다시 말씀드리면 여호람이 원래 에돔과 립나로부터 조공을 받고 이스라엘 유다나라가 굳건하고 많은 재정적 도움이 됐어야 돼요. 그게 하나님께서 보호하는 방법이었거든요, 다윗 시대에. 립나는 블레셋 지역의 가드 근처에 있는 성읍이에요. 에돔은 약간 더 밑에 있고. 그 립나도 독립하고 에돔도 독립했다 이 말이죠.
그럼 여호람이 그렇게 했으면 나라가 망해야 되는데 안 망했는데, 그다음에 12절에 보면, “선지자 엘리야가 여호람에게 글을 보”냈다.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해서 왕이 개인적으로 허술함에도 불구하고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이유가 뭐냐? 그건 유다나라 이스라엘이 제 기능을 발휘하도록 보조하는 게 있지요. 그게 엘리야 선지자입니다. 엘리야와 접촉이 돼요. 엘리야가 가만있을 때부터 여호람에게 조언하고 그런 건 아니지요.
그러면 선지자가 움직였다는 말은 뭐가 문제 있다는 말입니까? 지금 언약을 지킬 왕에서 문제가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왕, 당신은 지금 여호와 하나님 하시는 일을 방해하고 있다고 지적하기 위해서 찾아온 거예요. 뭐로? 말씀으로 글로.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네 아비 여호사밧의 길과 유다 왕 아사의 길로 행치 아니하고 오직 이스라엘 열왕의 길로 행하여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으로 음란하듯 우상을 섬기게 하기를 아합의 집과 같이 하며 또 너의 아비 집에서 너보다 선한 아우들을 죽였으니 여호와가 네 백성과 네 자녀와 네 아내들과 네 모든 재물을 큰 재앙으로 치리라 또 너는 창자에 중병이 들고 그 병이 날로 중하여 창자가 빠져나오리라 하셨다 하였더라”(역대하 21:12~15)
네가 창자가 빠져나오는 죽음을 죽을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끝으로 문제 하나 나갑니다. 그만큼 중요하지요. 여러분들이 여호람이라 합시다. 어떤 선지자가 와서 이런 식으로 자기에게 질책을 하고 조언을 한다.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무시할까요, 진지하게 생각해야 될까요? 이 질문을 제가 중요시 여기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늘 듣는 소리가 있거든요.
어떤 소리냐 하면 교회에 있을 때는 말씀이 현실 같은데 이상하게 교회 문을 없애든지, 교회 문만 나가면 말씀이 비현실화 되는 거예요. 이게 필수가 아니고 선택과목.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 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어요. 이게 현실이에요. 그렇다면 우리가 여호람이라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나한테 이야기했다. 자, 받아들여서 내가 고칠까요, 아니면 무시할까요? 대부분 무시하지요.
심지어 당신은 창자가 빠져죽는다 하고 그 이유가 당신보다 더 선한 아우를 죽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선 가만두지 않는다고 할 때 하나님 자체가 비현실이에요. 모든 인간이에요. 지금 하나님보다 더 소중한 게 뭐냐? 본인이에요. 본인이 쌓아온 그동안 출세와 의미와 가진 소유와 재산이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다고요.
그래서 성경에도 나와 있지만 성경은 간단해요. 덮으면 그만이에요. 없어요. 성경 덮어서 4톤 트럭으로 누르면 돼요. ‘나오지 마라, 나오지 마라. 이거는 하나의 의견이야. 이거는 성경이라는 신화적 의견이야.’ 누르면 그만이에요. 전혀 내 속에 내 삶 속에 파고들어가질 않습니다. 그래서 파고들어가지 않은 결과가 뭡니까? 창자가 빠져죽었어요.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세요. 그래서 그 뒤에 창자 빠져죽은 이야기 나오는데 이 이야기를 우리가 엘리야 말씀 보고 그다음에 실제로 창자 빠져서 어떤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우리가 지금 성경에서 보고 있잖아요. 보고 있으면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부담이 됩니까, 진지하게 느껴집니까, 아닙니까?
역시 우연히 아다리가 된 모양이지. 이게 말씀한다고 다 이뤄지는 게 아니고 우연히 보다 보니까 엘리야가 너 창자 빠져죽는다 했고, 진짜 창자 빠져죽었구나. 아이고, 그 사람 재수도 없다. 우연히 그런 걸 걸려드느냐, 이렇게 하지 가만있어봐라. 내 창자는? 내 창자가 걱정된다면 여러분 수면대장내시경 해서 창자가 빠졌는지, 안 빠졌는지 조사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이상하게 성경에서 이야기했다 하면 우리는 그걸 우리의 본성상 치워버리고 밀어내고 성경 들리지 않는 곳으로 도망치는데 급급합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고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그것은 뭐냐? 왜 우리는 성경말씀이 현실인 것을 안 받아들입니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성경말씀보다 하나님보다 더 소중한 것이 누구다? 내 일상이 더 소중하기 때문에.
왜 이것을 거부하는가? 우리 안에 하나님을 공격하는 본능이 이미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어요. 이걸 여러분들이 싫어하거나 미워할 게 아니고 말씀이 와도 우리는 그걸 건성으로 하고 안 그러면 도망하고 성경말씀, 복음 나오는데 다 피해버리고 도망치는 경향은 이거는 타고났습니다. 그러면 안 피하고 받아들인다고 구원받느냐? 아닙니다. 이미 기차바퀴노선은 확정된 거예요.
그래서 뭐가 기적이냐 하면 말씀을 백번이고 이백 번이고 거부해도 어느 날 한 순간에 아다리 걸려들면 그 순간에 구원받는 거예요. 왜냐? 인간이 내가 갖고 있는 강한 공격하는 본능보다 더 센 힘이, 성경 속에다가 성경이 대야 물이라면, 성경이 책 같으면 봐도 그만이지만 성경이 만약에 욕조의 물이라면 그 유명한 5공 때 물고문 알지요. 말씀 안에다가 우리의 얼굴을 집어넣어버리는 거예요.
‘이게 네 얼굴이야. 십자가가 네 얼굴이야. 이게 본모습이야.’ 집어넣고 끄집어냅니다. 끄집어낼 때 우리는 뭘 느끼느냐 하면, 잠시 내가 쇼크 받은 것 같아. 나는 그냥 평범하게 내 인생 살기 위해서, 라고 하지만 무슨 힘이 더 강하게 들어왔어요? 그러니까 성경을 백독해도 소용없고 전도를 얼마 하고 헌금을 얼마 하고 소용없어요.
뭐냐 하면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의 일그러진 모습이 내 모습을 척박하는 그 순간 그 사람은 이미 차바퀴는 천국으로 확정됐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십자가 안에 내가 원치 않는데 십자가 안에 들어와 버렸지요. 이게 막벨라 굴을 품고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내가 죽는 것이 천국에서 본격적으로 사는 길이니까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날 것을 기쁨으로 맞이하는 성도가 우리에 사건화 되어서 우리 일상을 통해서 삐져나오듯이 삐져나오겠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게 하나님의 기적이고 우리가 한 게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우리가 말씀이 좋아서 받아들인 것이 아니고 강제조치로 말씀이 찾아와서 우리를 잠시나마 말씀세계 속에 집어넣으니 그 안에서 진짜 우리의 모습, 죄인 된 모습을 발견하는 기쁨과 그걸 용서하는 더 큰 은혜의 넘침을 함께 맛볼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