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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원주특강 질의 응답

아빠와 함께 2026. 2. 8. 08:32

20260206 겨울 원주특강 질의 문답 - 이 근호 목사

- 오늘 강의 들은 가운데 아쉬움이나 질문 사항이나 그런 것 있으면 질문하시고 또 이 목사님 대답하시고. 그렇게 해서 조금 더 교제하면서 말씀 나누면 좋겠네요. 용감하게, 궁금한 사항 있으면 질문하십시오.

식구끼리 못 할 말 어디 있습니까. 이미 한 식구인데요.

- 그럼 제가 질문하겠습니다. 오늘 강의 중에 목사님이 출애굽이라는 개념들을 요셉의 해골을 들고 나오는 본문으로 말씀하셨는데 거기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 부탁드립니다. 굉장히 중요한 핵심인 것 같습니다. 보통은 ‘사람이 어디서 종살이하다가 나왔다’ 이런 개념들로 그냥 우리는 출애굽을 생각하는데요.

이번 강의 중에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한 것이 한 두 개가 아니었습니다. 굉장히 많았는데 십자가 마을 사람들은 충분히 그런 것을 감당할 수 있고 또 자체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또 시간도 짧고 해서 넘어갔습니다. 그 해골 부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보충 설명하겠습니다.

제가 강의 중에도 사실은 연관해서 이야기했어요. 요셉이 누구 아들이냐면 야곱의 아들이잖아요, 야곱의 아들. 야곱은 누구 아들이냐? 이삭 아들이에요.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들이고. 사람이 어떤 구슬을 실에 꿸 때 보통 구슬이 중요하잖아요. 그 보석이. 그런데 성경은 언약이 꿰는 줄이 더 중요해요.

줄로, 줄로 계속 이어지는 것에 대해서 오늘 강의 중에 분명히 이야기했어요. 아브라함을 받는 게 아니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받는다고요. 이삭이 아니고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그 때 사건마다 결실 또는 열매 같은 것을 맺습니다.

보충 설명하겠습니다. 요셉에게 야곱의 약속, 언약이죠, 야곱의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나타나는 결과가 뭐냐? 외형적인 결과가 있어요. 외형적인 것이 있고 내부적인 것이 있는데, 내부적인 것은 야곱 족속의 안위 또는 보호, 집안 보존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걸 누가 하느냐? 외형적인 애굽의 선의(善意), 좋은 뜻, 애굽의 보호 또는 애굽의 번창 속에서 야곱 족속이 보호를 받는 거예요. 이 두 가지 다가 돼요.

그런데 요셉의 이런 외형적이고 애굽의 내형적인 이런 것은 ‘요셉+초과’에요. 초과인데 성경에서는 초과라는 표현보다도 ‘요셉의 꿈’이에요. 요셉의 꿈. 꿈은 인간에게 초과된 거죠. 인간+꿈이 되어서 꿈이 자체적으로 주체가 있고, 이 주체는 하나님이죠, 꿈이 요셉을 다루고 있는 방식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애굽도 보호받고 야곱도 보호받는데, 애굽이 도발적이죠. 애굽이 요셉을 몰랐다. 애굽이 요셉을 알지 못했다(출 1:8)하면 왜 알지 못했는가? 요셉은 그때는 고마웠지.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요셉 이야기를 왜 여기서 끄집어내느냐? 고마웠지. 요셉 때문에 우리 나라 애굽이 번창한 건 고마운데 다 지나간 일이죠. 지나간 일. 애굽에게는 지나간 일.

요셉을 알지 못했다는 건 지나간 일인데 ‘지금은 요셉도 죽고 지금은 히브리인들 뿐이다.’라고 할 때 애굽이 그런 식으로 나온 줄 아시고, 요셉은 내 안에 들어있는 요셉을 초과하는 초과적인 꿈을 통해서 언약이 실현되는 이 현실, 이 현실이 앞으로도 계속 된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요셉이 창세기 때 분명히 예언을 했어요.

‘너희가 가고자 이 애굽에서 나온다.’ 이제부터 중요합니다. ‘애굽에서 나온다. 애굽이 아브라함의 족속을 하늘의 별만큼 생성할 수 있는 인큐베이터 역할로서 (역할을 다하고 너희는 애굽에서) 나온다.’ 문제는 어디로 가느냐? 번창해서 뭐하는데? 어디로 갈 건데?

그것은 바로 나를 나 되게, 요셉을 요셉 되게 했던 요셉의 꿈의 지속성. 요셉이 내가 죽는다고 해서 꿈이 날아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죽어 해골이 된다 하더라도 꿈은 계속 지속되어서 꿈 본래의 것을 달성할 그 지점, 시점이 올 것이다. 따라서 요셉은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떠날 때에 내 해골을 가지고 나가라. 해골이 도착하는 그 지점이 하나님이 가고자 하는 약속의 땅이다.’ 이렇게 되는 거죠.

이해되시겠습니까? 뭐 이해됐다, 안 됐다 말을 해줘야지…. 초과와 꿈과의 연관성. 꿈은 요셉에게만 꿈 되면 안 되고 같은 언약에 있는 우리에게도 꿈이 되어야 되고 초과가 되어야 되고 주님의 일관성, 하나님의 언약의 일관성으로 우리가 계속해서 요셉처럼 다루어져야 된다는 그 점을 제가 언급하는 겁니다.

- 그러면 목사님, 요셉 이전에 요셉의 아버지가 결국 흉년을 만나서 원치 않는 곳으로, 원래 자기가 있는 곳이 아버지가 있는 곳인 약속의 땅인데 어쨌든 흉년을 만나서 갔고 거기서 요셉을 만나면서 자기가 죽게 되는데 우리가 여기 살 공간은 아니고 결국은 돌아가야 된다고 하면서 내가 죽거든 저쪽에 가서 내 무덤을 달라. 아브라함 우리 조상의 무덤으로, 나는 거기 묻어 달라 했을 때 그 이야기 속에 이미 아브라함의 언약이 아버지를 통해서 또 요셉에게 전해졌고 요셉도 아버지의 언약의 의미를 알면서 자기가 죽으면서 후손들에게 ‘내가 죽거들랑 내 뼈는 여기 묻지 말고 너희들 나갈 때 들고 가라.’ 그렇게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헤브론 땅에 묻혔어요. 막벨라 굴에 묻혔습니다. 막벨라 굴이라는 한 곳에 집결했다는 것, 집결된 무덤이 살아있는 장소로서 약속의 기능을 한다 이 말이죠. 언약이 그런 식으로, 인간은 모르지만 언약, 하나님 본래 미지의 곳은 있을 것이다. 그 중간 다리에 그런 경로를 보여주는 역할로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이 쓰여지고요.

그리고 이스라엘 이름이 야곱이잖아요. 야곱 이름이 이스라엘이라고요. 그 이스라엘 언약의 저촉을 받는 동일한 집단으로서 요셉이 거기 같이 죽음을 통해 합류해서 같이 끼어드는 거예요. 그리고 이스라엘도 계속 죽으면서 언약에 합류된 존재로서 주께서 목적지로 가는 데 있어서 경로를 보여주는 그런 역할은 다 해야죠. 이야기하다 보니 서 목사님 이해가 되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또 다른 분?

제가 만약에 오늘 강의를 들었다. 어떤 사람이 그대로 강의하는 걸 내가 들었다 하면 저는 이런 질문을 하고 싶어요. 여러분들이 질문 안 하고 있으니까 성질 급한 제가 질문을 하는데, ‘율법에 있어서 이웃 사랑의 의미가 뭐냐’ 하는 거예요.

율법 조항에 보면 나와요. 소를 박을 때는 얼마를 보상해야 되고 하는 그런 인간 대 인간의 관계. 결국은 출애굽기의 율법을 대했다. 그러면 인간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그 질문. ‘인간관계는 어떠해야 되는가’하는 질문을 저 같으면 하겠어요. 하나님은 일을 그렇게 하신다. 오케이. 그건 좋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사람하고 만나잖아요. ‘사람하고 만날 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율법의 기능은 무엇이냐?’ 이런 질문.

그것은 이 강의 중에 벌써 나왔어요. ‘삐걱거림’. 안 맞아. 안 맞아요. 제가 답변한다면 이래요. ‘안 맞는 이유는, 끝까지 나는 내 중심이기 때문에.’ 너는 끝까지 네 중심이고 나는 끝까지 내 중심이고. 맞을 턱이 있나? 맞을 턱이 없어요. 그러니까 안 맞는 것이 정상인데… 이야기해볼게요.

인간 대 인간관계입니다. 오늘 강의의 핵심에 도달하는 방식이기도 한데요. 그런 식으로 접근할 수 있는, 핵심이 있다면 파고들어가는 하나의 지점일 수가 있는데 그것이 ‘너와 나의 관계’에요. 삐걱거림. 삐걱거림은 지금 표현이고 아까 강의 중에는 뭐라고 했습니까? ‘절뚝거림’.

하여튼 삐걱거리고 절뚝거리는데, 삐걱거리는 것과 절뚝거리는 것이 약간의 뉘앙스 차이는 있어요. 삐걱거리는 것은 나 혼자 봤을 때 내가 정상적으로 발걸음을 못한 거고, 절뚝거림이라 하는 것은 둘이 너와 나 사이에 막대기를 갖고 있는데 이 막대기를 운반하는 게 부자연스러울 때. 아까 운동회할 때 (2인 3각 경기) 이야기 했죠? 이상하게 안 맞는 거예요. 맞지를 않는 거예요. 맞질 않는데 왜 맞지 않는가?

너와 나 사이에 무슨 관계에 있느냐 하면, 인간 대 인간관계에서 제일 좋은 것은 사랑하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사랑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 지금 사랑이 안돼서 문제지, 사랑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 하잖아요. 과연 문제가 없을까 하는 거예요. 과연? 과연 문제가 없을까?

그래서 아까 강의하면서 빨리 지나갔는데 강의 중에 제일 어려운 단어가 나왔어요. 삐걱거림, 절뚝거림을 통해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무한’이 나온다 했어요. 무한이 나온다는 거예요. 보통 인간은 유한하잖아요. 유한한 인간이 무한을 만나는 하나님이 허락한 방법은 뭐냐? 남을 만나는 거예요. 남을 만나서 어떻게? 삐걱거림과 절뚝거림에서 오는 그 짜증, 분노, 화남. 화남이 바로 인간이 무한한 분을 만날 때에 나타나는 특이성으로서 그 특이성을 타인을 통해 경험케 하는 거예요. 경험케 하는 겁니다.

교사하시다가 정년퇴임을 했습니다. 또 자식 키운다고 밥상머리까지 앉았어요. 정성을 다했어요. 정성을 다했다고요. “애 쓴 거 너희 알지?” “알아, 알아. 엄마가 애쓴 거 다 알아요.” 이게 뭐냐 하면 맞춰 보려고, 사랑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이 표준을 서로가 다 알고 있는데 이 표준을 현실화 시킬 재주가 없네요. 이게 맞는데, 다 같이 동의하는데 이상하게 느낌상 이게 아닌 거 같아. 이게 삐걱거리고 맞질 않는 거예요. 맞추려고 노력 안한 것도 아니고 노력하는데 안 맞아요.

그것은 뭐냐 하면, 유한에서 나오는 사랑이기 때문에 이게 폐기 대상이거든요. 요한일서 4장에 “너희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요”라는 그 말씀대로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든지 그것은 폐기되어야 돼요. 이것은 유한에서 나온 유한적 사랑이에요. 무한에서 나온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유한은 무한을 만나면 항상 결이 안 맞고, ‘서로 사맛디 아니할세’라는 말이 있잖아요. 뭔가 접촉이, 콘센트가 연결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인간 대 인간의 모든 만남에서. 그럼 거기서 인간은 뭘 하느냐? 수습을 해요. 수습.

자기가 못나고 아무것도 아니고 내가 해낼 재주가 아무것도 없는 나는 무능자라는 것을 그냥 인정하면 되는데 어떻게든 수습을 해서 ‘그래도 최선을 다했잖아. 내 쪽에서 노력했잖아.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얼마나 애썼는데.’ 문제는 다 누구 탓이다? 누구 탓이에요? 당신 탓이고 남 탓이고 자식 탓이고. 자식은 누구 탓이고? 부모 탓이고 세대 차 탓이고.

모든 것을 남 탓으로 돌릴 때에 이것은 바로 무한과 유한의 경계에서 우리는 유한을 통과하게 되면 무한의 세계가 있다 하는데 여기 공동경비구역이 있다는 것을 몰랐어요. 여기 격(틈)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거예요. 이(무한)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도로 떨어져야 돼요. 다시 말해서 ‘인간은 자신이 자기를 위한 중보자가 될 수 없다.’ 자기가 자기를 위한 중보자 될 수 없다.

중보자 하겠다는 게 불교입니다. 내 행함으로 내가 구원을 얻겠다는 게 스스로 자기를 중보자로 자처하는 거예요. 나를 낮추어서 유한을 낮추어서 무한과 접촉 가능한 나로 탈바꿈하겠다는 도 닦는 것 있잖아요. 그것은 모조리 실패입니다. 그런데 실패인 줄 알면서도 이걸 실제로 몸으로 실습해야 돼요. 실습해야 됩니다. 실습하게 되면 삐걱거림과 안 된다는 거예요.

안 되는 결과가 뭐냐? 내 인생의 힘든 것은 전부 다 남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는 결과를 내세울 때, 아, 이게 유한을 통과해서 무한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내 쪽에서 진짜 있는 무한한 분에 대한 공격 성향을 내가 애초부터 부정성으로 지니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는 거예요. 이것을 신약 로마서에서 간단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죄를 죄 되게 한다.’ 그 격막. 도저히 통과할 수 없는 격막이 내 안에 내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놓쳐버린 겁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십자가 영이 오거든요. 십자가 영이 오게 되면 내가 통과할 수 없는 격막을 십자가로 해서 나를 아예 끌어당겨버렸다. 이 격막 속에 나를 끌어당겨버리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바로 내가 구원될 수 없는 죄인 중에 괴수인 것을 이 격막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신 이것을 느끼면서 나는 주님의 십자가 증인 되는 거예요.

율법의 완성이 뭐라? 로마서 13장에, 간음하지 마라 살인하지 마라 도적질하지 마라 그 모든 것은 어디서 완성된다 했습니까? 어디서 완성돼요? 사랑. 사랑은 뭡니까? 내가 누구를 사랑한 적이 없음을 자인하는 게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사랑. 그걸 갈라디아서 5장에서는 성령의 열매.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남 탓이 아니고, 내가 누구한테 해줄 수 있는 그러한 능력자가 못되는 것을 깨닫는 거예요. 그러면 산상설교 말씀대로 때리면 고개를 돌려줄 수밖에 없고, 오 리를 가자 하면 십 리를 갈 수밖에 없고. 왜냐? 내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죠. 이게 바로 율법에 나온 거예요. 그걸 전쟁 형식으로 이야기하면 아까 아말렉 전쟁에서 모세가 전쟁에 등장한 것은 우리가 스스로 나를 추스를 수 있는 주체자가 못 된다는 것. 이 전쟁에 있어서 우리가 끼어들 수 있는 어떤 여지가 없다는 거예요.

그 대표적인 전쟁이 골리앗과 붙었던 다윗이죠. 다윗은 어른 다윗이 아니고 무슨 다윗입니까? 소년 다윗이죠. 소년 다윗이 전쟁에 끼어든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철이 없어서 그래요. 철딱서니 없어서 그래요. 소년 다윗은, 어떻게 율법이 없는 자가 율법이 있는 자를 공격하는 데 있어서 율법 있는 자가 그걸 방치하느냐? 이것은 있을 수 없다. 율법 없는 자는 율법 있는 자를 공격하면 반드시 그들이 패배하게 되어 있다. 아무리 덩치가 3미터가 되든 큰 칼과 방패를 갖고 있든 상관없이 이건 패배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내주하심의 현실성 그 자체로 보는 거예요. 소년 다윗이.

그러나 형들은 다윗보고 “이 철없는 인간아. 빨리 집에 가! 이건 네 싸움이 아니고 어른들 싸움인데 왜 오지랖 넓게 네가 왜 끼어들어?”하고 자꾸 아빠한테 빨리 가라고 이야기하죠. 그러나 소년 다윗은 고집 부리면서 “이 전쟁은 내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 전쟁이다.”하고 뛰어들죠.

재밌는 것은 다윗보고 “똑같은 전쟁 한 번 더 해볼래?”하면 “아니.” 안 하죠. “이번에는 키가 4미터 되는 거하고 한번 붙어볼래?” 안하죠. 왜냐하면 주님의 전쟁에 자기가 사용될 뿐이지 자기 전쟁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이것이 인간 대 인간의 만남에서 자신의 유한의 한계를 발견하고 같은 인간끼리 부딪치게 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인간에게 기대하지 마세요. 인간은 아무 기대할 게 없습니다. 기대를 안 하면 남을 원망 안하게 돼요. 너 때문에 내 인생 조졌다는 이야기를 안 하게 되고 그런 겁니다. 뭐든지 기대하는 게 죄가 돼요. 이 한 마디만 할게요. ‘기대하는 게 죄’라 하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게 되면 ‘죄란 구조를 모르는 것’.

구조. 우리를 둘러싼 외부 환경이 어떻게 짜여져 가는지 모르는 게 죄가 되는 겁니다. 외부 환경 모르니까 자기 행함만 자꾸 쳐다보고 있는데, 모든 것은 구조적이고 일방적으로 외부환경이 그냥 작용했을 뿐이에요.

다른 분 궁금한 것 있거든 얘기하세요. 없으면 이 회의 어떻게 할까요? 폐하기로 동의하시면….


아까 서 목사님 질문은 요셉의 해골에 관한 거고. 왜 산 자 놔두고 죽은 자를 모시고 가야 되느냐? 끌고 가는 게 아니고, 죽은 자 입장에서.

그리고 제 스스로 질문한 것은 복음을 아는 사람으로서 그럼 남과의 만남이라는 게 의미가 뭐냐? 정답은, 안 맞는다. 어떤 경우라도. 맞는다는 것을 기대한 게 잘못이에요. 자꾸 기대하니까 우리 맞춰 잘 살자 하는데 맞춰서 잘 살 것 같으면요, 이혼 숙려 없습니다! 세상에 맞는 인간이 없어요. 나하고도 안 맞는데 무슨 남하고 맞아요. 기대 자체가 잘못이죠. 안 맞습니다. 그 질문이 두 번째였고요.

그리고 질문 있거든 진짜 마지막 세 번째 질문 받겠습니다. 빨리 누가 하세요. 진짜 없습니까? 그럼 마지막으로 제가 질문을 끄집어내겠어요. 우상이 뭐냐? 우상이란 뭐냐?

우상은 자연세계입니다. 우리를 둘러싼 이 자연이 우상이에요. 우상의 특징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따지고 따지고 따지고 따져서 확실한 것은 ‘영원하다’ 출발점이 그거에요. 자연세계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대로 있다. 그게 내추럴한 자연세계. 그게 우상이에요.

자연의 안정성의 한 일부로서 나의 안정성을 거기다 집어넣는 거예요. 집어넣어서 자연세계에서 나온 질서 대로만 살면 나는 그다지 나쁜 점수는 안 받는다. 인생 뭐 훌륭하다, 대단하다 그것까지는 욕심 부리지 않고 그냥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 자연과 어긋나게 살지 않으면 인생사는 것 선방한 것이다, 제대로 사는 것이라는 그러한 의식. 그 의식에서 나온 게 윤리와 도덕이에요.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그러면 우상의 문제점을 이야기해야죠. 그러면 왜 죽는데? 그럼 왜 죽느냐? 이 문제를 과학에서는 손 못 대고 있어요. 인간이 왜 죽느냐? 그렇게 자연스러운데 왜 죽느냐? 갑자기 우연적 사고는 왜 일어나는가? 그렇게 살고 싶었는데 가족들 다 있는데 놔두고 왜 죽는가?

지난 수요일 예를 들게요. 오십 명 더하기 한 명이 불 받아서 죽잖아요. 그 오십 명 중에서 노모 모시고 있고 가족 여섯 식구 있는데 공무원 취직해서 왕의 명령받아 움직이다가 갑자기 아무 잘못도 없이 하나님의 불 받아 이 병사가 죽을 때, 그럼 남아있는 식구들은 사는 게 얼마나 비참하게 되겠어요? 그리고 자식을 잃어버린 엄마의 마음은? 그리고 가장을 잃어버린 자식의 비탄한 마음은? 그런 것까지 고려해서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불 내린 것은 너무 심하지 않냐 하겠죠. 그런 생각이 들겠죠.

수요 설교 본문에서 50+1이 불 받아 죽습니다. 왜 죽는가? 자연+나까지 한꺼번에 ‘보편성’에 속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보편성. 다시 말해서 아무리 내가 자연을 모방하고 거기서 어떤 질서를 뽑아내서 나는 그 질서대로 살겠다는 이 자체가 반대 진영이에요. 엘리야+천사+주님이라는 이 계열과 다른 계열로서 대치되어 있는 거예요.

개인이라는 것은 성립이 안돼요. 엘리야에게 개인은 성립하지 않고 천사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이 개인도 보편성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이지, 개인의 의지, 주장 같은 건 없습니다. 왜냐하면 개인은 세포로 되어 있고 세포는 영양소,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이것 없으면 못 살아요. 자연이 주는 햇빛과 공기 없이는 못 사는 그러한 구조로 인간의 신체구조는 그렇게 되어 있어요. 폐나 심장 이 모든 것이 자연 환경의 연장선에 인간의 신체가 있기 때문에. 그게 의학이잖아요. 생물학이고.

따라서 인간은 보편성 속의 일부기 때문에 일부에서 억지로 자아를 끄집어내는 이 자체가 억지잖아요. 자체가 억지라고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뭐로 산다? 말씀으로 산다. “떡으로 사는 보편성 말고 저 바깥에서 오는 말씀의 보편성을 네가 먹어야 된다. 떡으로 사는 것은 결국 이 자연과 함께 파멸되고 죽지만, 외부에서 오는 말씀이 주는 영생은 하나님과 영원히 복락을 누린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그만큼 위험해요. 민주주의는 철저하게 개인위주입니다. 너는 나와 다르다 하는데, 같은 음식 먹고 같은 한고을 식당에서 동일한 음식을 먹잖아요. 두부조림부터 해서 똑같은 음식을 먹잖아요. 다르긴 뭘 달라요.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이 하는데 이게 보편성이에요.

인간은 보편성 바깥에 따로 나만의 개성이라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 고집인지. 결국 인간은 똑같습니다. 이쪽 진영에서 똑같고 저쪽 진영에서 똑같아요. 그래서 말씀이라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 따로 나라는 것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이 말씀의 효력이라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남자, 여자, 나이 많고 적고… 똑같습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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