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12/30-예수님과 아버지의 그 간격

아빠와 함께 2025. 12. 30. 11:27

영문 밖

2025년 12월 28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3:11-13

13: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13: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13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The high priest carries the blood of animals into the Most Holy Place as a sin offering, but the bodies are burned outside the camp.(NIV)

For the bodies of those beasts, whose blood is brought into the sanctuary by the high priest for sin, are burned without the camp.(KJV)

For the bodies of those animals whose blood is brought into the Holy Place by the high priest as an offering for sin are burned outside the camp.(NASB)
대속죄일은 일괄해서 이스라엘 전체 백성의 죄를 용서해주는 날입니다. 그리고 용서의 근거로 제공되는 제물은 결코 인간 요소가 전혀 가미되지 않아야 함을 나타내기 위해 제사장을 비롯해서 그 누구도 제물의 고기를 자기네 양식으로 가져가지 못합니다. 즉 제물은 인간 외의 존재, 하나님께서 직접 제물이 되셔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몸을 담근다는 것은 곧 죄에 몸을 담그는 것입니다. 이렇게 희생되셔서 죽는 죽음만이 제대로 된 죽음의 진수요 원형이요 본질입니다. 인간들 본인이 생각해 둔 죽음은 죽음이 아닙니다. 진짜 죽음은 하나님의 죽음만이 죽음입니다. 그것은 인간들 자체가 가짜 인간들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모든 생각과 행동과 의식은 본인이 여진히 살아있다는 사실을 엄두에 두고 나옵니다. 본인들이 ‘이미 죽은 자’라는 의식은 상상도 봇합니다. 하지만 성경에 분명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과실을 따먹으면 죽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선악이란 인간에게는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함께 있다고 여기는 의식입니다.

이러한 가치 규정은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상황 구석구석까지 파급이 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어떤 경우를 닥치더라도 먼저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의인가’를 구분하기 마련입니다. 사람으로 말하면, ‘사람에게는 좋은 면도 있으면 악한 면도 있다’는 식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죽음의 선악 과일을 따먹은 후유증은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사람은 자신이 죽음을 미리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죽음은 인간의 이해 밖의 상황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느끼는 감각은 가까운 주변 사람의 사망을 통해서 감지됩니다. 즉 ‘내거 여기 있더라도 과거에 느낀 나답지 않다’고 느끼면 이미 그 사람은 자아의식적으로 온전히 살아 있는 욕망이 됩니다.

사무엘상 28:7에 나오는 사울왕의 심정이 이러했습니다. “사울이 다른 옷을 입어 변장하고 두 사람과 함께 갈새 그들이 밤에 그 여인에게 이르러는 사울이 가로되 청하노니 나를 위하여 신접한 술법으로 내가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올리라”(삼상 28:8) 즉 이미 죽은 사무엘이 없다면 자신이 알던 그 왕으로서 본인은 아닌 겁니다. 자기 안에 사무엘 선지자 존재가 함께 담겨 있어 자아를 형성화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쓰시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죄사함’이 성립될 수 있도록 효용있는 새로운 원칙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메시야의 2중적 기능이 발휘됩니다. 곧 7월 10일 대속죄일 행위를 말합니다. 염소를 두 마리는 회막문에 새웁니다.

“그는 여호와 앞 단으로 나와서 그것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곧 그 수송아지의 피와 염소의 피를 취하여 단 귀퉁이 뿔들에 바르고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그 위에 일곱 번 뿌려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에서 단을 성결케 할 것이요 그 지성소와 회막과 단을 위하여 속죄하기를 마친 후에 산 염소를 드리되

아론은 두 손으로 산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무인지경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레 16:18-22) 두 마리 염소는 상호 얽혀있는 기능으로 연결됩니다.

한 마리의 양은 지성소 속으로 들어가야 될 피를 째내는 용도의 염소입니다. 다른 하나는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지경 광야로 내보내지는 용도의 염소입니다. 각기 방향이 다른 듯 하지만 일괄해서 죄 용서하는 그 취지에 두 기능 다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 업무를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달리실 때, 성전 안의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짓는 휘장이 위에서 이래로 저절로 찍어졌습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막 15:38) 그리고 예수님의 육체는 성전이 있는 영문 안이 아니라 영문 밖입니다. 이로서 ‘영문 밖’은 인간들이 이해하는 세계관에서는 없는 세계입니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예수님께서 오셔야 비로소 의미가 생기는 ‘영문 밖’ 개념입니다. 지성소 역시 인간들이 들어설 수 없습니다. 7월 10일에만 대제사장이 소나 염소의 피를 들고 들어가게 되는데 이로 인해 ‘인간에게는 단절된 은폐된’ 공간입니다. 그리고 7월 10일이라는 시간 또한 인간이 노동해서는 아니되는 날입니다.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희에게 성회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이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은 너희를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속죄할 속죄일이 됨이니라 이 날에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라”(레 23:27-29)

즉 대속죄일 그 날은 ‘인간을 위한 사간’이 아니라는 점에서 인간의 시공간에서 빠지는 날입니다. 친히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날입니다. 그리고 그 일의 결과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으로 아사셀 염소가 외로이 갑니다. 이는 ‘인간으로부터 하나님께서 내어쫓김’을 표현해주는 염소입니다.

이로서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로 없던 공간이 새롭게 생겼습니다. ‘영문 안’과 ‘영문 밖’이 그것입니다. 이 두 공간 사이에 ‘간격’이 발생했습니다. 이 간격을 예수님께서 미리 경로서 밟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에 의해서 이 세상에서 비로소 ‘혼돈→질서→혼돈화’된 세계임이 알려졌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이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이 간격을 역주행해야 합니다. 소위 잘 나가는 식이 아니라 반대로 자신의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임을 밝혀주는 ‘영문 밖’에서 예수님과 합세 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10:39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고 되어 있습니다.

성도는 이제 예수님에 의해서 완료된 말씀을 내세우면서 자신의 별볼일없는 존재로 사라져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과 아버지의 그 간격이 우리 안에서 재현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99강-히브리서 13장 11-13절(영문 밖) 251228-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3장 11-13절입니다.

히브리서 13:11-13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본문에 나와 있는 게 제사인데요, 그 많은 제사 가운데 무슨 제사냐? 10절에 보면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 제사장들입니다, 제사장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

제사장들은 성막에서 드리는 제물의 일부는 드리고 나머지는 먹게 되어 있는데 이걸 먹지 못한다고 규정한 제사가 또 따로 있어요. 그게 ‘대속죄일’의 제사입니다. 대속죄일은 7월 10일에 일괄적으로 이스라엘 모든 자의 죄를 다 씻어주는 날입니다. 본인이 회개를 했든 하지 않았든 일체 묻지를 않습니다.

이렇고 이런 것이 게 잘못됐는데 이 잘못된 것에 대한 예물을 바침으로서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고 있다는 그 인식을 근거로 내 죄를 용서해달라,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은 그냥 ‘속죄제’에요.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일괄적으로 회개를 하든 안 하든 그것과 전혀 상관없고 그날엔 그냥 통째로 이스라엘 전체의 죄를 용서하는 날이 ‘대속죄일’입니다.

그 대속죄일의 특징 중 하나가, 제사장이 소나 염소의 피를 가지고 평소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지성소’라는 곳…, 폐쇄된 공간이에요. 아무도 못 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못 가는 공간은 사실은 없는 공간으로 치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인간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공간은 인간과 상관없는 장소에요. 인간과는 상관없는데, 하나님이 인간과 상관없는 장소를 따로 만든 곳이 지성소라는 장소입니다.

인간이 없는 장소, 그 지성소를 하나님이 만드신 이유가, 7월 10일 그때만은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게 해줘요. 하나님께서 인간 대표자인 이스라엘 대제사장을 만나 줄 때 그 만나는 장소가 언약궤, 거기서 만나게 해줍니다. 그렇게 만나게 함으로써 평소에 이스라엘은 없는 존재에요. 그런데 일괄적인 죄의 용서라는 조건이 부합되는 순간에 이스라엘은 새롭게 시작이 됩니다.

이스라엘은 없어요. 죄짓는 것은 인간도 아니에요. 그래서 없습니다. 없는데,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했다는 그 내용이 첨가되고 장착이 되면 그걸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하는 거예요. 그것은 인간이 정한 게 아니에요. 인간은 있으나 마나 하고 아예 없는 존재니까 인간이 정한 것은 안 받아줍니다.

하나님이 인간 세계에 자기의 장소, 자기가 임재하는 장소를 따로 만드시고 임재하는 그 장소의 취지와 의미를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드러내시는 겁니다. 즉 1년에 한 차례씩 새롭게 만들어내는 그 작업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내가 만들었다’는 것을 부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대속죄일이라는 것은 빌드업되는 거예요. 유월절이나 맥추절 등의 절기들을 거치면서도 마지막 정점은 대속죄일입니다. 인간이 어떤 생각을 한다, 어떤 태도를 가진다, 어떤 행동을 한다, 자기를 의식한다, 그렇게 해서 ‘내가 생각하고, 내가 어떤 행동을 했고, 행위를 했기 때문에 난 인간이다.’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받아주질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죄가 나오기 때문에. 죄가 배출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 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죄 용서를 받았다? “죄 용서받았어?” “예.” “그 용서 누가 해줬지?” “예. 하나님이 해주셨습니다.” 그러면 네가 내가 인정하는 인간이 되는 거예요, 대속죄일 때문에.

오늘 본문 13절에 보면 “그런즉 우리가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우리’라는 것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인간이고요, ‘영문 밖’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지성소, 인간이 평소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없는 장소, 없는 장소인데 이 없는 지성소의 기능이 제대로 이뤄지게 되면 인간에게 생각지 못한 새로운 장소가 등장하는데 그게 영문 밖이라는 거예요.

이 세상에 ‘영문 밖’은 없어요. ‘영문 밖’이라는 것이 성립되려면 영문 안에서 지성소 역할을 다 했던 분이 영문 안에 있다가 추방되어 빠져나온 그 장소, 주님이 그 장소에 갔을 때 새로 생긴 거예요. 인간에게는 ‘영문 밖’이 없어요.

인간이 아파트 50평에 살든 70평에 살든 30평에 살든 산다는 것, 어떤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는 것은, 경계가 있다는 거예요. 경계가 있다는 것은, 인간이 두렵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자기에게 쳐져 있는 경계 때문에 두려워요. 30평짜리 아파트에 사는 사람은 그 두려움의 강도가 30평 주위로 국한되지만, 70평짜리 아파트에 사는 사람은 30평짜리 아파트보다 두려움이 두 배로 증가합니다.

지금 캄보디아와 태국이 전쟁하잖아요. 전쟁하는 그 이유가 두려움과 두려움이 마찰하는 경계선 때문에 전쟁하는 거예요. 공간이 있다는 것은 공간을 테두리 친 경계선이 있다는 것이고, 그 경계선은 인간이 거주하면서 느끼는 공포감을 표현해 주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자기가 거주하는 곳 그 바깥이 무서운 곳이에요. 뭐가 있는지를 모릅니다. 그냥 ‘뭐가 있는지 모르겠다’하고 끝나는 게 아니고,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 바깥에 뭐가 있는지 모르겠다’가 내 마음속에 공포심으로 항상 수시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인간은, 자기가 ‘산다는 자체가 공포를 유발하는 세월을 보내고 있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인간은, 자기가 사는 게 이렇게 겁나고 무서워요. 풍족하고 아무리 가져도 뭔가 늘 상 대기하고 있고 쳐들어오도록 준비되어 있는 것이 두려움과 무서움과 공포거든요. 그게 어디서 나왔는지를 인간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인간이 무서워하는 것은 본인이 살아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무섭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오늘 본문 히브리서 13장 11절, 12절, 13절을 보면 바탕에 깔려 있는 게 죽음 이야기에요.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른다’든지, 또 ‘피로써’ 할 때 그 피라는 게 죽어야 나오잖아요. 죽음으로서 바닥을 새로 까는 겁니다.

며칠 전에 광주 강의에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치즈 케이크와 초코케이크를 사람들은 다른 케이크라고 보는데 제가 물었어요. “치즈 케이크와 초코케이크를 먹을 때 본격적으로 먹는 부분이 토핑입니까, 아니면 빵입니까?” 빵이죠.

그러면 빵이라는 바탕이 있는데 이 빵은 숨어 있어요. 빵이 감춰져 있는데 그 위를 초콜릿으로 코팅했단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의 바탕은 뭐냐? 죽음이에요. 죽음인데 뭐로 코팅했느냐? 내가 열심히 살고 있다는 그것 가지고 코팅을 해놓고 죽어 있는데 살아가는 척들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만약에 병들고 나이 많아지고 사고가 난다든지 하면 그 코팅은 다 벗겨집니다. 벗겨지면 뭐가 나타나느냐? 죽음이 나와요. 인간의 본질은 죽음이에요. 인간의 본질은 죽음입니다. 손가락 가지고 케이크를 파내면 카스텔라 빵 나오듯이 인간 속으로 손을 집어넣으면 그 안에 죽음을 향하여 질주하는 그 본질이, 세포에서 작동하고 있어요.

죽기 위해서 세포가 기계같이 작동하고 있는 거예요. 죽음의 성질을 가득 품은 채 안 죽으려고 버티면서 공부도 하고, 돈도 벌고, 사업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안 죽으려고 열심히 운동도 하는 것, 이것은 치즈나 초콜릿에 해당하는 거예요.

특히 안 죽으려고 인간들이 가장 애쓰는 방법은 친구 만나는 거예요. 친구 만나고, 아는 식구들하고 연락하고 좋은 관계로 해서 ‘너도 살아 있고 네가 살아있는 관계에 나도 살아있으니까 우리 살아있는 거 맞지, 그렇지?’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어디서 깨지느냐 하면, 사무엘상 28장 7-8절에서 깨집니다. “사울이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그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사울이 다른 옷을 입어 변장하고 두 사람과 함께 갈쌔 그들이 밤에 그 여인에게 이르러는 사울이 가로되 청하노니 나를 위하여 신접한 술법으로 내가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올리라.”

사울 왕은 사무엘이 살아 있을 때 ‘자기는 선지자 사무엘과 더불어서 하나님이 인정해 주는 왕’이라고 자기가 살아있는 티를 냈던 겁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자기보다 먼저 죽었어요. 사무엘 선지자가 죽고 난 뒤에는 일이 잘 안돼요. 블레셋이라는 나라가 쳐들어올 때 사무엘이 뭘 했느냐? 사무엘이 있을 때 내가 왕다웠다는 것을 기억하고는 엔돌에 있는 신접한 여자를 찾아가서 죽은 사무엘을 불러올리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나와 관계있었던 자가 죽어서 현재 내 앞에 없다면, 그래서 그 관계가 끊어지면 나도 제대로 산 자가 아니에요. 가족 중에 누가 죽어버리면 외로워서 미쳐요. 그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서 이것은 산 게 아니고 죽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인간은 살아있는 한 아무리 느끼려고 해도 자기 죽음을 못 느끼는데 언제 죽음을 느끼는가? 자기와 좋은 관계로 엮였던 사람이 자기 눈앞에서 죽어버리면 동시에 자기 죽음을 그때 간접적으로 느끼게 마련이에요.

성경에 또 하나의 예가 나오는데 베드로예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다녔다고 하잖아요.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다닌 적이 없어요. 베드로는 예수님과 관계한 자신의 관계자를 따라다닌 거죠.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따라다닌 겁니다.

왜냐? 예수님은 이 인간 세계를 이미 죽었다고 치고, 이미 죽은 존재라고 치고 말씀을 하시고 또 인간은 이미 죽었다고 치고 열두 제자에게 말을 했는데, 이 베드로와 열두 제자들은 어떻게 오해했는가? 내가 살아있다고 치고 ‘이 살아있는 나를 저 살아있는 예수님이 어떻게 천국에 보낼까?’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베드로는 예수님을 오해해도 보통 오해한 게 아니에요. 베드로뿐만이 아니라 열두 제자도 다 마찬가지고요. 다들 엄청나게 오해한 거예요. 베드로는 자기가 살아있다는 걸 전제로 해서 그 엉터리 전제에서 나온 그 망상에 의한 메시아를 따라다닌 거예요. 자기 망상입니다.

본인이 살아있다고 여기는 한 예수님의 어떤 말씀이나 예수님의 그 실체, 예수님의 그 신체 까지라도 그것은 다 인간의 환상에 불과한 거예요. 거짓이고 가짜입니다. 가짜 예수였어요. 예수님 떠나고 난 뒤에는 뭐 “고기나 잡으러 가자.” 했지요. ‘살아있는 나는 또 살아있어야지.’ 한 겁니다.

베드로는, 본인이 인간이 아니고 가짜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베드로뿐만이 아니라 다른 제자, 그리고 우리도 마찬가지고요. 내가 실은 죽은 건데 자꾸 내가 살아있다고 매일 같이 나를 설득하고 있다는 이 사실을 성경에 비춰서 우리가 설명을 못 하고 있어요. 지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살아있는 것은 뭐가 살아 있는가? ‘선악 체계’가 살아있어요. 선악과라는 지식이 인간 속에 살아 있으니까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라는 이 긴 문장,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라는 이 말씀이 살아있죠. 그 말씀이 살아있기 위해서는 ‘선악과를 아는 우리는 필히 죽으리라’에 해당되는 대상인 거예요. 말씀이 살아있으니까요.

그런데 인간은 본인이 살아있다고, 마귀가 시키는 대로 내가 살아있다고 우기니까 성경 말씀을 백 독 천 독해서 치즈 케이크나 초코케이크처럼 코팅하는 거예요. 가짜 인간에다 말씀의 옷을 입히는 거예요. 옷을 입혀봐야 교회 문 열고 세상 나가서 탈탈 털면 다 털려 나가요, 다 털린다고요, 코팅했으니까. 침 발라서 우표 붙여봐야 다 떨어지듯이 다 떨어져요.

지난 시간에 제가 설교하면서 은혜받은 게 요한복음 5장 38절입니다.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제가 이 자리에서 이렇게 했어요. ‘너희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이유는 네 속에 내 말이 들어있지 않아서 그런 거’예요.

너는 자꾸 성경을 보고 지식으로 코팅하려고 하는데 코팅은 소용없어요. 내가 하나님의 적이고 가짜라는 그 속을 후벼파려면 내가 말씀을 공부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직접 내 속에 삽입이 되어야 해요. 어떤 말씀이 삽입되어야 하는가? ‘선악을 아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이미 죽은 자’라는 그 규정이 삽입되어야 해요, 그 규정이!

요한복음 9장 39-41절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했어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예수님께서 소경을 고치면서 “내가 소경된 자를 눈 뜨게 한 이유를 알겠어?” 눈뜬 너희가 소경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내가 온 것은 눈 뜨고 세상을 판단하는 너희들을 심판하기 위해서 왔다’는 거예요. “차라리 이 눈먼 자는 본인이 눈멀었다는 것을 알잖아. 너희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뭐가 뭔지를 완전히 아무것도 모르면서 눈 떠서 설치니까 내가 뭐라도 된 양, 내가 뭐라도 아는 양 여긴다”는 거예요.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죽었고 산 것은 생명나무만 살아있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는가? 자기 아들을 보내서 이 세상이 죽어 있다는 것을 죽어 있다고 이야기하기 위해서 살아있는 생명나무마저, 예수님마저 그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친히 샘플로, 모범으로 보여준 거예요.

‘너희들은 죽어도 죽음으로 모르는데 진짜 죽음을 아는 것은 하나님이 죽을 때 이게 진짜 죽음’이에요. 하나님이 죽는 이유는, 천국에서 살 자기 백성의 죄를 사하기 위해 죽는 거예요. 인간이 죽는 이유는 죄 때문이고 그 죄가 있는 한 인간은 영생을 얻지 못합니다.

이걸 누가 아느냐? 하나님 쪽에서만 알아요. 예수님과 하나님, 성령님은 알고 인간은 그걸 몰라요. 인간이 구원받겠다는 것은 자기 죄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욕망을 하는 겁니다. 인간은 구원될 자격이 없습니다. 그냥 죽은 거지 죽은 자가 무슨 구원을 받아요. 죽은 자가 구원받을 거 같으면 애초부터 죽게 하신 하나님 책임으로 돌아가는 건데요? ‘죽을 자가 아닌데 하나님이 실수해서 죽였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래서 살아있는 생명이 이제는 인간이 알지 못하는 진짜 죽음을 이 세상에 퍼뜨립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퍼뜨린 겁니다. 그게 오늘 본문에 보면 ‘피’라고 되어 있어요, 피. ‘예수도 자기 피로서 백성을 거룩하게 한다’고 그렇게 되어 있잖아요. 아담의 피는 더러워서 안 받아요. 이 세상에 피는 두 종류밖에 없어요. 더러운 피 있고 깨끗한 피가 있는데, 이 더러운 피는 아담, 인간이 갖고 있던 죽은 목숨, 이게 더러운 피예요.

여러분, 선악 체계라는 것은 제가 여러 번 이야기 했지만 아주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선악 체계라는 것이 뭐냐? ‘인간에게는 좋은 면도 있지만 나쁜 면도 있다.’ 이게 선악 체계에요. 그 자체가 죄가 되는 이유가, ‘인간은 좋은 면이 있고 나쁜 면이 있다’는 이것이 계속 새끼를 깝니다.

계속 새끼를 까면서 자기가 파악하는 세상 전체, 세세한 행동 하나, 생각 하나, 태도 하나, 자세하나, 양심 하나, 그 모든 면에 골, 흠집을 내요. 흠집을 이것은 아주 강박증 같아요. 정신병이에요, 정신병. 여기 컵이 있는데요. ‘컵 뚜껑이 이렇게 남쪽으로 되어 있는 게 좋을까, 서쪽으로 되어 있는 게 좋을까?’ 이렇게 ‘좋다, 나쁘다’가 계속해서 파생하는 겁니다.

시답잖은 모든 세세한 것에 전부 ‘좋다, 나쁘다’가 새끼를 친다니까요. 일본에 파친코가 있죠. 저는 한 번도 안 해봤습니다만 보긴 봤어요. 구슬을 탁, 치면 그 구슬이 고정된 홈을 따라서 중력에 따라 자기 마음대로 떨어지는 게 파친코잖아요.

인간의 선악 체계는 이 세상에 골을 만들어놨어요. 홈을 다 만들어놓고 그 홈을 디딜 때마다 ‘내가 지금 잘했을까, 어떤 것이 옳을까, 무엇이 제대로 된 판단일까?’ 계속 선택의 여지를 주니까 인간은 정신병 안 되려야 되지 않을 수가 없어요, 평생토록.

‘급행 1번을 탈까, 401번을 탈까?’ 매사에 ‘오늘 모자를 쓸까, 벗을까?’ 어떤 것 하나…, ‘어느 선택이 나의 미래를 더 낫게 보장하는가?’ 하는데 그 자체가 바로 저주받은 모습입니다. 죽은 모습, 이게 더러운 피예요.

그래서 깨끗한 피는 아예 그 홈이 패인 복잡하고 세세한 것들, ‘무엇이 옳으냐, 무엇이 나쁘냐?’의 그 절차를 전부 다 좋은 피로 덮어버립니다. 이게 죄 사함이에요. 죄사함을 모르면 지옥이고, 알면 천국이고 그렇습니다.

“네 선에서 네 생각, 네 의식, 판단, 태도, 행위, 실수, 오류, 그런 차원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자격은 애초부터 너에게 준 적이 없다. 선악 체계를 간직하라고 마귀가 이야기했지, 나 하나님은 너에게 그런 언질을 준 적이 없다. 그런데 네 머릿속에서 ‘어느 것이 옳으냐, 나쁘냐?’ 하는 것을 봐서 넌 마귀 새끼다.” 이거에요. “너는 마귀 새끼야! 죽을 때까지.”

예수님께서 십자가 피 흘리시고, 그 피의 효능을 성령님이 전달해요. 성령님이 자기 성도에게 찾아옵니다. 찾아오시면서 성령께서 늘 하시는 일이 뭐냐? 요한복음 16장에서는 우리의 죄에 대해서 지적한다는데 다른 게 아니에요. 우리의 볼때기를 딱 쥐고 성령께서 매일 같이 이렇게 합니다.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 물어요. 그러면 성도 같으면 뭐라고 대답해요?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인데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되잖아요. 얼마나 쉽습니까? 지금 성령께서 ‘네가 무슨 큰 잘못된 짓을 했다’고 볼때기를 흔드는 게 아니고,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 이거란 말이죠.

참, 교회 10년 20년 30년 40년을 다녀도 아직도 자기 행동 조심하려고 교회 나오는 사람을 보면 지옥 가려고 환장을 한 거예요. 하나님은 개인의 행동에 대해서 일체 묻지를 않는다니까요? “느그 아부지가 너한테 뭐 해주노?” 이 이야기인 거예요. 간단해도 너무 간단하잖아요. 명쾌해도 너무 명쾌하다고요.

천문학에서 우주를 측정할 때 너무 넓잖아요. 넓으니까 천문 단위를 써요. 천문 단위가 뭐냐? 지구와 태양 사이 1억 5천만 킬로미터를 한 단위로 잡아서 태양계의 여러 행성들 거리를 계산하는데 125 천문단위에서 135 천문단위가 태양계, 곧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행성들의 세계에요.

그 바깥에 나오면 다른 물질이 여기서 충돌을 일으킵니다. 우주의 밀도가 태양계 바깥에서 약간 증가해요. 그런데 주님께서 죄 사함을 할 때 천문 단위 같은 걸 사용해요. 제가 말을 만든다면, ‘영적 단위’에요.

아버지께서 아들을 이 땅에 보낼 때 아버지와 아들의 그 거리, 1억 5천만 킬로미터는 아니지만 그 단위가 언약 단위에요. 그 언약 단위로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겁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하늘에 계시고 아들은 이 지상에, 죄 있는 저주받은 이 땅에 있잖아요.

주님께선 어떻게 하느냐?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없던 공간인데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새로 만든 공간이 ‘영문 밖’이에요. 영문 밖은 율법이 주어지지 않으면 생기려야 생길 수 없는 새로운 개념입니다. 그리고 영문 밖에 나가야 거기서 구원이 이뤄져요.

교회 온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영문 밖으로 가야 돼요. 영문 밖이 되려면 영문 안과 밖이 따로 간격이 생겨 있거든요. 이 간격, 이 간격은 아버지와 이 땅에 오신 독생자 예수님 사이의 간격입니다. 이 간격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어떤 지시를 받고 움직이느냐?

처음에는 혼돈이거든요.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의 혼돈에서 창조되었을 때는 질서가 있잖아요. 혼돈에서 질서, 그리고 그 질서가 뱀으로 인해서 다시 혼돈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간격이라는 것은 뭐냐? 혼돈에서 아름답게 질서로 창조된 세계가 다시 혼돈이 되었을 때의 그 간격, 그 간격을 인간은 모릅니다.

인간은 마귀하고 한 패인데 알 리가 있습니까? ‘세상이 아름답다!’ 하고 끝나는 거죠. 주님이 오니까 이 세상은 저주받은 세상이고 죄밖에 없는 세상이기 때문에 이것은 혼돈 그 자체인 거예요. 이건 주님의 안목에만 보이지 마귀의 안목으로 사는 인간들은 그냥 눈만 박혀 있지 아무것도 몰라요. 본인이 소경인지도 모르는데요?

그래서 그 질서가 혼돈이 된 그것이 간격인데, 질서가 있다고 여겼던 하나님의 성막, 지성소 있는 곳과 그다음에 거기서 내어 쫓긴 영문 밖 사이의 두 지점이 생김으로서 거기서 간격이 생기는 거예요. 그 간격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레위기 16장에 나오는 대속죄일의 ‘아사셀 염소’라는 겁니다.

6-10절에 “아론은 자기를 위한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드리되 자기와 권속을 위하여 속죄하고
또 그 두 염소를 취하여 회막문 여호와 앞에 두고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찌며 아론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를 속죄제로 드리고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대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찌니라.”

‘아사셀’이라는 뜻은 ‘내쫓김을 당했다’는 뜻이고요, 아사셀 염소는 한 마리가 아니고 두 마리를 성막에서 배치해요. 대속죄일에 1년에 한 번만 하는 겁니다. 염소는 두 마리이지만 상호 얽혀있는 관계입니다. 1대1 세트입니다. 염소 중에 제비를 뽑아서 한 염소는 죽어요.

한 염소는 죽어서 피를 내면 대제사장이 그 피를 들고 지성소에 들어갑니다. 두 마리의 염소지만 염소를 하나라고 본다면 하나의 염소에서 두 가지의 기능이 나왔다고 보면 됩니다. 더 쉽게 말해서, 염소 두 마리를 두고 예수님이 해야 할 예수님의 이중적인 기능이라고 보면 돼요.

예수님은 한 분이지만 예수님이 아버지께 부여받은 그 기능이 지상에 와서는 얽힌 채 하나가 아니고 둘로 갈라져요. 예수님 기능이 예수님의 피와 육체로 갈라지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는 지성소에 들어가는, 곧 휘장을 찢을 만한 하나님이 받으시는 피가 됩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막 15:38). 그런데 예수님의 육체는 영문 밖에서 십자가에 하나의 육체로서 매달리는 거예요.

여기서 뭐가 생겼습니까? 간격이 생겼죠. 만약에 이 간격이 없고, 그냥 예수님이 피 흘리고 예수님이 구원받아 버리면 죄 있는 자기 백성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어떠한 새로운 공간이 없어요, 새로운 공간이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릴게요. 인간들은 이 세상이 질서 있는 세상이라고 자부하고 있어요, 마귀가 시키는 대로. 마귀는 예수님의 이중성을 못 보도록 인간의 얼굴을 잡아서 돌려버려요. ‘네가 이 세상에서 열심히 살면 좋은 면이 부각 되어서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사람이 된다면 하나님이 널 천국 보내준다. 그러니까 교회 나와서 착하게 살아라.’ 이게 마귀가 인간에게 교회 다녀서 지옥 가게 만드는 수법이에요. 성경 보고 지옥 가게 만드는 수법이 그거예요.

마귀는 항상 인간에게 호소해요. ‘너 어떻게 행동할래? 어떻게 믿을래?’ 이러잖아요. 그러나 구원은 우리에게 묻지도 않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요. 이게 천문 단위에요. 가랑이 찢어지듯이, 동일한 주님 한 분의 두 가지 벌어진 기능, 그 벌어진 기능이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관심사가, 예수님이 뭘 하시느냐에 관심 있어요. 그런데 인간들은 태어나면서 ‘내가 뭘 해야, 내가 어떤 생각을 가져야, 어떻게 바른 행동을 해야, 내가 어떻게 착하게 살아야 하나님의 예쁨을 받고 구원을 받느냐?’ 여기에 관심이 있습니다. 당연히 배후에서 마귀가 인간들로 하여금 그런 종교로 만들게 했죠.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surrounding, 환경이에요, 환경!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환경을 예수님이 오셔서 따로 만드는 겁니다. 따로 새로운 환경을 만든다고요. 그 만든 환경은 ‘시간 거울’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어떤 아파트 거실에 거울이 있다면 거울 안에 복사된 새로운 아파트가 들어있죠.

그러나 그 거울 안의 새로운 아파트에는 못 들어갑니다. 들어가려고 하면 거울이 깨져버리겠지요. 현재 인간이 거주하는 이 공간이라는 제약 때문에, 경계선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지를 못해요. 따라서 주님께서는 인간이 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만들고자 하는 겁니다. 대속죄일에 그렇게 했습니다.

예수님 기능의 이중성을 제가 방금 언급했는데 그 이중성으로 인하여 간격이 생기는 거거든요. 간격이 생기면 성도는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이 영문 안에 있다가 밖으로 쫓겨나서 생긴 그 간격, 그 거리가 예수님께서 이동한 거리잖아요. 성도도 그걸 그대로 매일 같이 반복하게 만들어요. 반복할 때 어떻게 반복하느냐?

역주행하는 겁니다. 역주행이라는 게 뭐냐? 착해서 구원받겠다, 믿음으로 구원받겠다는 이것을 역주행해 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서 신앙생활 잘해서 오실 메시아를 만나야지.’라고 했던 그 열두 제자의 생각이 역주행하면 ‘내 자리는 믿음 생활 잘하고 신앙생활 잘하고 착하게 살아서 구원받는 게 내 자리가 아니고, 시작 자리가’ 뭐냐? ‘영문 밖이 내 시작 자리’가 되는 거예요.

2026년도 우리 교회의 목표를 제가 한번 세워봤습니다. 몇 년 전에도 연말에 세웠어요. 3년 전인가 이런 계획을 세웠습니다. “올해는 교회 문을 닫자.” 이런 계획을 세웠어요. 그 계획은 무사히 성취가 됐죠. 교회 문은 닫았어요. 여러분들이 교회니까요, 놀라지는 마세요. 여러분들이 교회니까 교회 문은 닫아도 괜찮아요.

내년, 2026년도 교회 목표를 일방적으로 정해봤습니다. “나의 불신앙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자”입니다. ‘나의 불신앙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쁘게 하자’입니다. 더 쉽게 하면 ‘제발 주제 파악 좀 하자.’ 죄 덩어리가, 죄만 나오면서 은근히 무슨 천국을 노립니까? 그럼 안 되죠.

아까 예를 다시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성령이 와서 볼때기 잡아당기면서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 “우리 아버지 하나님인데요.” “네가 하나님의 아들 같으면 왜 예수님의 잔을 안 마셔?”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그게 마가복음 10장 38-39절에 나오는데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여기서 이 잔을 마시는 자가 누구냐 하면, 이게 형편없는 자입니다. 이 저주의 잔이란, 저주받아 마땅한 자가 마셔야 되는 것이 저주받을 자 잔이에요. 따라서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라는 말은, ‘네가 주제 파악을 해서 너는 네 안에 있는 저주로 인하여, 네가 믿음을 내놓든지 소망을 내놓든지 사랑을 내놓든지, 전부 다 저주받을 것들만 내놓는 그것이 내 진짜 죽어 마땅한 내 모습’이라는 것인데, 바로 그러한 내 진짜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기쁨, 그걸 알게 된 감사, 그걸 내년 우리 교회 목표로 우리 합시다.

‘내가 개코도 아무것도 아니구나’라는 걸 새삼스럽게 아는 것, ‘나는 뭘 해도 이기주의자며, 나는 뭘 해도 모든 에너지를 주를 위해서 쓰는 게 아니고 나를 위해서 쓰는 그런 인간이라는 것’을 직시하고, 절실하게 2026년 내내 느끼면서 살아가자는 거예요.

몸 좀 아프면 뭐 난리도 아니에요. 쌍화탕 먹고요…, 주님이 어떻게 되든 관심도 없고, 나는 내 손톱이 조금만 까져도 하늘이 무너질 것 같고요. 그런데 그게 우리 진짜 모습 아닙니까? 그걸 알게 된 것에 감사하자는 말입니다. 그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예요, 그걸 기뻐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려면 새로운 surrounding, 새로운 환경이 덮쳐야 해요. 강의 시간은 아니지만 약간 재미를 가미해서 제가 문제를 내보겠습니다. 첫 번째 문제는 제가 그냥 답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누가복음 2장 8-10절에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자기 환경이 양치는 들판이라는 환경이지요. 그런 요소가 자기 환경이잖아요.

다시 말해서 ‘그런 환경이더니…’ “이어지는 말씀에 어떤 내용이 들어갈까요?”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은 누가복음 2장 9-10절에 나오지요.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목자들이 양을 칠 때 그런 것을 예상했습니까? 안 했잖아요. 목자들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익히 자기가 알고 있는, 자기가 살아 있다는 것을 늘 확인하는 식으로 모든 에너지를 자기를 위해서 소비하는 그 환경, 그 시공간이 전부예요. 주님의 ‘영적인 단위’ 그런 것 없습니다. 치던 양이나 잘 돌보고 일당이나 잘 받으면 끝나는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홀연히 천군 천사가 나타나면서 조명발 쫙 비취니까 목자들이 그 밝은 빛이 무서워 벌벌 떨었다 이 말이죠. 지금 그 이야기잖아요. 제가 문제를 또 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신세계 백화점 4층에서 옷을 고르고 있을 때…” 그리고 그다음에 이어질 내용이 무엇이겠습니까? 즉 괄호를 친다면 뭐가 들어가겠습니까?

갑자기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그것이 들어가잖아요. 별로 흥미 없는 문제지만 하나 더 갑시다. “한화 이글스팀하고 롯데 자이언트팀하고 지금 야구 경기를 하고 있다.” 그다음에 괄호를 친다면 그 자리에 뭐가 들어가겠습니까? “홀연히 천군 천사가 야구장에 임하매…” 그렇게 이어지는 거예요.

구원받는다는 게, 인간이 폴짝폴짝 뛴다고 천국 가는 게 아니에요. 이것은 우리의 예상을 넘어서는 겁니다. 성도의 복은 말씀이 주는 새로움이 복이에요. 이것은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복이에요. 말씀이 주는 새로운 surrounding, 말씀 환경이 새롭게 다가올 때 우리는 ‘나는 오늘로 죽어도 좋아. 오늘로 여기서 인생 끝내도 좋아!’ 그렇게 되는 겁니다.

성도의 사는 재미, 기쁨은 바로 여기에 있어요. 예상도 못 한 새로운 환경의 자체적인 물갈이, 이것은 뭐냐? 영문 안에서 영문 밖으로 또 쫓겨가고, 또 역주행하고, 그렇게 주님께서 가신 그 길을 반복해서 계속해서 가게 하는 거예요. 그 길을 가게 할 때 두 마리의 염소가 그 일을 합니다.

자, 염소 이야기 계속하겠습니다. 우선 한 마리의 염소를 성소에서 먼저 잡습니다. 그 잡는 염소와 하나의 짝을 이뤘으니까 이걸 물리학에서는 ‘양자 얽힘’이라고 하죠. 같이 엮여 있는데 정보는 동일하게 통하는 거예요. 빛보다 더 빠른, 그래서 빛의 속도에 구애받지 않는 정보 교환에 의해서 똑같은 동일체의 두 가지 기능을 보여줘요.

피 흘린 염소 말고 다른 염소 하나는 사람들이 살지 않는 광야로 보냅니다. 사람들이 살지 않는 광야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이미 의미 없으므로 확정된 무의미한 동네, 어떤 인간도 살지 않는 동네이기 때문에 없는 공간이에요.

염소 한 마리는 사람들이 없는 공간에 가요. 그러면 이 말은 뭐냐? 성도들로 하여금,
“네가 여기 살아 있나?”
“예! 살아 있습니다.”
“그러면 네가 없는 공간에서 주님을 만나라.” 그 이야기예요.

그 없는 공간에 가면 뭐가 있습니까? 거기에 영적 단위가 있죠. 아버지와 아들에 의해서 마련된 새로운 시공간인 지성소, 피 흘림의 지성소, 그리고 아무도 살지 않는 광야, 이게 일치되고 서로 통하는 새로운 surrounding, 새로운 환경이 되는 거예요.

말씀의 환경, 말씀이 오지 않았으면, 율법이 없었으면 나타나지 않는 환경, 목자가 양을 치는데 그 새로운 환경이 오는 겁니다. 목자가 양 칠 때 새로운 환경이 오게 되면 현재의 공간, 현재의 시간에 천군 천사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하는 찬양이 나와요.

천사한테는 아기 예수의 출생, 그리고 나중에 있을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재림이 동일한 현재-현재-현재가 돼요. 동일한 현재, 시간의 거울이에요, 시간의 거울. 거울 들여다보면 그 안에 현재, 미래, 과거가 다 들어 있어요.

방금 이야기한 것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속죄일 제물은 세 가지 요소가 있는데, 첫째 요소는 뭐냐? 먹을 수 없다(레 16장). 먹을 수 없다는 것, 인간은 먹어야 사는데 먹을 수 없다는 것은, ‘너희는 먹고 살 수 있는 자격이 없다’는 뜻이에요.

속죄 제물은 하나님만 받는 거예요. 제물을 먹는 자만이 제물의 에너지를 가지고 일할 수 있는 유일한 권력, 권한을 가진 자인데 그분은 하나님 본인이지 인간은 빠지라는 겁니다. “너의 구원에서 네가 빠져라.” 네가 천국 가운데서 네가 빠지라는 그 말입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에 땅이 하나 나오는데, 그 땅은 흔해 빠진 땅이 아니에요.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이 밭은 옆에 있는 밭하고 달라요. 저쪽 밭하고도 달라요. 이 밭의 특징은 뭐냐? 안에 보화가 들어 있는 밭이에요. 보화가 들어 있는 밭입니다. 죄 사함 해주는 그 피, 예수님의 피, 예수님의 피와 연결돼 있는 육체가 있는 땅, 그 땅은 영문 밖이에요.

영문 밖은 누가 살지 않느냐? 내가 살지 않는 땅, 내가 살고 싶어 하지 않는 땅, 내가 없는 땅이에요. 그 땅이 영문 밖이에요. ‘영문 밖에서 만나자’ 하는 것은 ‘네가 너 자신과 찢어지고, 너와 너 자신이 격리되고 난 뒤에 너는 죽은 자로서 나를 만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속죄일의 특징이 세 가지인데 첫 번째는, 속죄 제물은 아무도 먹을 수 없다. 인간은 끼어들 데가 없습니다. 두 번째는, 7월 10일 날은 모든 시간을 정화하는 시간이에요. 따라서 그 시간은 인간의 시간에서 빠집니다. 제거가 돼요. 노동을 못 하는 건 마땅하고요.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희에게 성회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이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은 너희를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속죄할 속죄일이 됨이니라 이 날에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라”(레 23:27-29).

그래서 7월 9일이라는 시간 다음에 7월 10일이 아니고요, 7월 9일 다음에 7월 10일이 되면서 7월 10일은 중간에 인간 시간에서 빠져서 하나님 시간이 되는 거예요. 왜? 인간이 관여할 수 없기에. ‘나는 그때 숨 쉬었다, 잠잤다, 독서했다, 볼링했다, 골프 쳤다, 파크 골프 쳤다…’ 이런 게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7월 10일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탈취해 가는 하나님에게 속한 시간, 그 시간이 십자가에 꽂혀버리면 십자가 사건에 해당되는 새로운 시공간이 완성되는 겁니다. 그 십자가에 종사하시는 분의 피, 그리고 그분의 육체, 이것이 바로 십자가로 죄 사함이 이루어지는 율법의 완성이 되는 겁니다.

첫 번째는, 속죄제 제물은 제사장도 먹을 수 없어요. 인간이 관여하지 못한다. 두 번째는, 시간 자체를 정화하기 때문에 더러운 시간은 연결이 안 되고 따로 빠져서 제거돼야 하는데, 여기서 ‘인간이 뭘 했느냐?’ 하는 것은 삭제당하는 시간입니다.

세 번째, 속죄일의 특징은 공간이에요. 이 공간은 오직 아사셀 염소만이 갈 수 있는 새로운 땅으로 나와요. 그게 바로 광야입니다. 아무도 사람이 살지 않았어요. 아무도 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아사셀 염소가 보내진 광야에서는 그 염소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걸 관찰할 수 있는 권한자는 인간 속에는 없습니다.

아사셀 염소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 광야까지 가서 <걸어서 세계 속으로>처럼 방송 카메라 메고 가서 찍을 것이 아니라, 그것을 찾으려면 지성소로 들어가서 그 염소의 피, 쌍둥이 염소의 피가 어디에 있는지 그것만 보면, 광야의 그 염소는 살았다 해도 죽은 거예요. 왜? 쌍둥이 염소가 지성소에서 죽었으니까요.

오늘 설교의 이런 이야기가 인간의 시공간, 곧 내가 여기에 살아 있다, 인간의 시간과 공간을 내가 안다, 이런 식으로 인식하는 자에게는 전부 다 접근 불가예요. 이해 불가입니다. 안 됩니다. 인간은 자기 거주지에 그 경계가 있기 때문에요.

대 속죄일의 시공간에서는 내가 알아서 뭘 하겠다는 그런 것은 있을 수가 없어요. 나쁜 사람 좋은 사람, 그런 것도 없어요. 그런 것은 다 인간이 정한 거예요. 더러운 피는 지옥, 깨끗한 피는 천국입니다. 인간들의 아이디어는 뭐냐? 이승이 어떻고 저승이 어떻고.

이승과 저승이라는 그 인간 시간 개념은 대 속죄일의 시간 개념에 같이 엮을 수가 없습니다. 이승과 저승이라는 것이 없어요. 그건 불교에서 찾으세요. 주님의 성령께서 “느그 아부지 모 하시노?” 하고 볼때기 잡아당길 때 그 성령 안이 영원한 현재입니다. 그리고 성령 안이, 예수 안이 영원한 공간이고요.

끝으로, 이야기 다 듣고 난 뒤에 여러분들이 질문하고 싶은 것을 제가 먼저 끄집어낼게요. “목사님, 그러면 우리는 뭐 하면 됩니까? 우리는 뭐 하면 되나요? ‘불신앙으로 주님을 기쁘게 하는 한 해가 됩시다’ 하고 있는데 이제 신앙도 소용없네요. 뭐 하면 됩니까? 성령 오지도 않았는데, 성령 불러도 소용도 없는데 우리는 뭐 하면 됩니까?”

성령께서 말씀을 가지고 우리의 일상에 커버가 되어 있는 그걸 뜯어내요. 말씀을 가지고 그렇게 하십니다. 말씀만 남기기 위해서 우리의 일상속에서 ‘나’가 사라지게 해요. 사라져야 되는데 이 교회 문만 나서면 또 내가 등장하잖아요. 그렇게 되면 또 말씀이 사라져요.

말씀이 사라지면 또 성령이 동원되어서 “너그 아부지 모 하시노?” 하십니다. “내가 네 아버지면 내 쓴잔을 마시라고 했지? 너는 아무것도 아니라 했지? 교회 밖에만 나가면 네가 뭐라도 된 양 여기고 설치고,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깁니까? 왜 나는 이렇게 힘듭니까?’ 하는데 네가 뭔데 힘들다고 화내고, 성내고, 분노하느냐? 네가 그럴 자격이 안 된다.” 이것을 주께서는 반복시켜 주는 겁니다.

레슬링할 때, 상대의 몸체를 안고 뒤집기를 하게 되면 3점 따요. 그러면 승리하잖아요. 주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맨날 우리가 나오는, 우리가 주인공 되는 이 현장에서 우리를 뒤집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이 주인공입니다’라고 그 뒤집는 활동을 이 세상에 나가서 여러분이 수시로 느끼시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증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환경 속에서 주님이 종으로 사용하시는 존재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기능을 드러내기 위해서, 말씀이 이렇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매일 같이 쓰임을 이제부터 감사하고 기뻐하고 고마워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