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surrounding, 환경이에요, 환경!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환경을 예수님이 오셔서 따로 만드는 겁니다. 따로 새로운 환경을 만든다고요. 그 만든 환경은 ‘시간 거울’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어떤 아파트 거실에 거울이 있다면 거울 안에 복사된 새로운 아파트가 들어있죠.
그러나 그 거울 안의 새로운 아파트에는 못 들어갑니다. 들어가려고 하면 거울이 깨져버리겠지요. 현재 인간이 거주하는 이 공간이라는 제약 때문에, 경계선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지를 못해요. 따라서 주님께서는 인간이 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만들고자 하는 겁니다. 대속죄일에 그렇게 했습니다.
예수님 기능의 이중성을 제가 방금 언급했는데 그 이중성으로 인하여 간격이 생기는 거거든요. 간격이 생기면 성도는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이 영문 안에 있다가 밖으로 쫓겨나서 생긴 그 간격, 그 거리가 예수님께서 이동한 거리잖아요. 성도도 그걸 그대로 매일 같이 반복하게 만들어요. 반복할 때 어떻게 반복하느냐?
역주행하는 겁니다. 역주행이라는 게 뭐냐? 착해서 구원받겠다, 믿음으로 구원받겠다는 이것을 역주행해 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서 신앙생활 잘해서 오실 메시아를 만나야지.’라고 했던 그 열두 제자의 생각이 역주행하면 ‘내 자리는 믿음 생활 잘하고 신앙생활 잘하고 착하게 살아서 구원받는 게 내 자리가 아니고, 시작 자리가’ 뭐냐? ‘영문 밖이 내 시작 자리’가 되는 거예요.
2026년도 우리 교회의 목표를 제가 한번 세워봤습니다. 몇 년 전에도 연말에 세웠어요. 3년 전인가 이런 계획을 세웠습니다. “올해는 교회 문을 닫자.” 이런 계획을 세웠어요. 그 계획은 무사히 성취가 됐죠. 교회 문은 닫았어요. 여러분들이 교회니까요, 놀라지는 마세요. 여러분들이 교회니까 교회 문은 닫아도 괜찮아요.
내년, 2026년도 교회 목표를 일방적으로 정해봤습니다. “나의 불신앙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자”입니다. ‘나의 불신앙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쁘게 하자’입니다. 더 쉽게 하면 ‘제발 주제 파악 좀 하자.’ 죄 덩어리가, 죄만 나오면서 은근히 무슨 천국을 노립니까? 그럼 안 되죠.
아까 예를 다시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성령이 와서 볼때기 잡아당기면서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 “우리 아버지 하나님인데요.” “네가 하나님의 아들 같으면 왜 예수님의 잔을 안 마셔?”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그게 마가복음 10장 38-39절에 나오는데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여기서 이 잔을 마시는 자가 누구냐 하면, 이게 형편없는 자입니다. 이 저주의 잔이란, 저주받아 마땅한 자가 마셔야 되는 것이 저주받을 자 잔이에요. 따라서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라는 말은, ‘네가 주제 파악을 해서 너는 네 안에 있는 저주로 인하여, 네가 믿음을 내놓든지 소망을 내놓든지 사랑을 내놓든지, 전부 다 저주받을 것들만 내놓는 그것이 내 진짜 죽어 마땅한 내 모습’이라는 것인데, 바로 그러한 내 진짜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기쁨, 그걸 알게 된 감사, 그걸 내년 우리 교회 목표로 우리 합시다.
‘내가 개코도 아무것도 아니구나’라는 걸 새삼스럽게 아는 것, ‘나는 뭘 해도 이기주의자며, 나는 뭘 해도 모든 에너지를 주를 위해서 쓰는 게 아니고 나를 위해서 쓰는 그런 인간이라는 것’을 직시하고, 절실하게 2026년 내내 느끼면서 살아가자는 거예요.
몸 좀 아프면 뭐 난리도 아니에요. 쌍화탕 먹고요…, 주님이 어떻게 되든 관심도 없고, 나는 내 손톱이 조금만 까져도 하늘이 무너질 것 같고요. 그런데 그게 우리 진짜 모습 아닙니까? 그걸 알게 된 것에 감사하자는 말입니다. 그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예요, 그걸 기뻐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려면 새로운 surrounding, 새로운 환경이 덮쳐야 해요. 강의 시간은 아니지만 약간 재미를 가미해서 제가 문제를 내보겠습니다. 첫 번째 문제는 제가 그냥 답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누가복음 2장 8-10절에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자기 환경이 양치는 들판이라는 환경이지요. 그런 요소가 자기 환경이잖아요.
다시 말해서 ‘그런 환경이더니…’ “이어지는 말씀에 어떤 내용이 들어갈까요?”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은 누가복음 2장 9-10절에 나오지요.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목자들이 양을 칠 때 그런 것을 예상했습니까? 안 했잖아요. 목자들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익히 자기가 알고 있는, 자기가 살아 있다는 것을 늘 확인하는 식으로 모든 에너지를 자기를 위해서 소비하는 그 환경, 그 시공간이 전부예요. 주님의 ‘영적인 단위’ 그런 것 없습니다. 치던 양이나 잘 돌보고 일당이나 잘 받으면 끝나는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홀연히 천군 천사가 나타나면서 조명발 쫙 비취니까 목자들이 그 밝은 빛이 무서워 벌벌 떨었다 이 말이죠. 지금 그 이야기잖아요. 제가 문제를 또 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신세계 백화점 4층에서 옷을 고르고 있을 때…” 그리고 그다음에 이어질 내용이 무엇이겠습니까? 즉 괄호를 친다면 뭐가 들어가겠습니까?
갑자기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그것이 들어가잖아요. 별로 흥미 없는 문제지만 하나 더 갑시다. “한화 이글스팀하고 롯데 자이언트팀하고 지금 야구 경기를 하고 있다.” 그다음에 괄호를 친다면 그 자리에 뭐가 들어가겠습니까? “홀연히 천군 천사가 야구장에 임하매…” 그렇게 이어지는 거예요.
구원받는다는 게, 인간이 폴짝폴짝 뛴다고 천국 가는 게 아니에요. 이것은 우리의 예상을 넘어서는 겁니다. 성도의 복은 말씀이 주는 새로움이 복이에요. 이것은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복이에요. 말씀이 주는 새로운 surrounding, 말씀 환경이 새롭게 다가올 때 우리는 ‘나는 오늘로 죽어도 좋아. 오늘로 여기서 인생 끝내도 좋아!’ 그렇게 되는 겁니다.
성도의 사의 재미, 기쁨은 바로 여기에 있어요. 예상도 못 한 새로운 환경의 자체적인 물갈이, 이것은 뭐냐? 영문 안에서 영문 밖으로 또 쫓겨가고, 또 역주행하고, 그렇게 주님께서 가신 그 길을 반복해서 계속해서 가게 하는 거예요. 그 길을 가게 할 때 두 마리의 염소가 그 일을 합니다.
자, 염소 이야기 계속하겠습니다. 우선 한 마리의 염소를 성소에서 먼저 잡습니다. 그 잡는 염소와 하나의 짝을 이뤘으니까 이걸 물리학에서는 ‘양자 얽힘’이라고 하죠. 같이 엮여 있는데 정보는 동일하게 통하는 거예요. 빛보다 더 빠른, 그래서 빛의 속도에 구애받지 않는 정보 교환에 의해서 똑같은 동일체의 두 가지 기능을 보여줘요.
피 흘린 염소 말고 다른 염소 하나는 사람들이 살지 않는 광야로 보냅니다. 사람들이 살지 않는 광야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이미 의미 없으므로 확정된 무의미한 동네, 어떤 인간도 살지 않는 동네이기 때문에 없는 공간이에요.
염소 한 마리는 사람들이 없는 공간에 가요. 그러면 이 말은 뭐냐? 성도들로 하여금,
“네가 여기 살아 있나?”
“예! 살아 있습니다.”
“그러면 네가 없는 공간에서 주님을 만나라.” 그 이야기예요.
그 없는 공간에 가면 뭐가 있습니까? 거기에 영적 단위가 있죠. 아버지와 아들에 의해서 마련된 새로운 시공간인 지성소, 피 흘림의 지성소, 그리고 아무도 살지 않는 광야, 이게 일치되고 서로 통하는 새로운 surrounding, 새로운 환경이 되는 거예요.
말씀의 환경, 말씀이 오지 않았으면, 율법이 없었으면 나타나지 않는 환경, 목자가 양을 치는데 그 새로운 환경이 오는 겁니다. 목자가 양 칠 때 새로운 환경이 오게 되면 현재의 공간, 현재의 시간에 천군 천사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하는 찬양이 나와요.
천사한테는 아기 예수의 출생, 그리고 나중에 있을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재림이 동일한 현재-현재-현재가 돼요. 동일한 현재, 시간의 거울이에요, 시간의 거울. 거울 들여다보면 그 안에 현재, 미래, 과거가 다 들어 있어요.
방금 이야기한 것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속죄일 제물은 세 가지 요소가 있는데, 첫째 요소는 뭐냐? 먹을 수 없다(레 16장). 먹을 수 없다는 것, 인간은 먹어야 사는데 먹을 수 없다는 것은, ‘너희는 먹고 살 수 있는 자격이 없다’는 뜻이에요.
속죄 제물은 하나님만 받는 거예요. 제물을 먹는 자만이 제물의 에너지를 가지고 일할 수 있는 유일한 권력, 권한을 가진 자인데 그분은 하나님 본인이지 인간은 빠지라는 겁니다. “너의 구원에서 네가 빠져라.” 네가 천국 가운데서 네가 빠지라는 그 말입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에 땅이 하나 나오는데, 그 땅은 흔해 빠진 땅이 아니에요.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이 밭은 옆에 있는 밭하고 달라요. 저쪽 밭하고도 달라요. 이 밭의 특징은 뭐냐? 안에 보화가 들어 있는 밭이에요. 보화가 들어 있는 밭입니다. 죄 사함 해주는 그 피, 예수님의 피, 예수님의 피와 연결돼 있는 육체가 있는 땅, 그 땅은 영문 밖이에요.
영문 밖은 누가 살지 않느냐? 내가 살지 않는 땅, 내가 살고 싶어 하지 않는 땅, 내가 없는 땅이에요. 그 땅이 영문 밖이에요. ‘영문 밖에서 만나자’ 하는 것은 ‘네가 너 자신과 찢어지고, 너와 너 자신이 격리되고 난 뒤에 너는 죽은 자로서 나를 만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속죄일의 특징이 세 가지인데 첫 번째는, 속죄 제물은 아무도 먹을 수 없다. 인간은 끼어들 데가 없습니다. 두 번째는, 7월 10일 날은 모든 시간을 정화하는 시간이에요. 따라서 그 시간은 인간의 시간에서 빠집니다. 제거가 돼요. 노동을 못 하는 건 마땅하고요.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희에게 성회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이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은 너희를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속죄할 속죄일이 됨이니라 이 날에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라”(레 23:27-29).
그래서 7월 9일이라는 시간 다음에 7월 10일이 아니고요, 7월 9일 다음에 7월 10일이 되면서 7월 10일은 중간에 인간 시간에서 빠져서 하나님 시간이 되는 거예요. 왜? 인간이 관여할 수 없기에. ‘나는 그때 숨 쉬었다, 잠잤다, 독서했다, 볼링했다, 골프 쳤다, 파크 골프 쳤다…’ 이런 게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7월 10일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탈취해 가는 하나님에게 속한 시간, 그 시간이 십자가에 꽂혀버리면 십자가 사건에 해당되는 새로운 시공간이 완성되는 겁니다. 그 십자가에 종사하시는 분의 피, 그리고 그분의 육체, 이것이 바로 십자가로 죄 사함이 이루어지는 율법의 완성이 되는 겁니다.
첫 번째는, 속죄제 제물은 제사장도 먹을 수 없어요. 인간이 관여하지 못한다. 두 번째는, 시간 자체를 정화하기 때문에 더러운 시간은 연결이 안 되고 따로 빠져서 제거돼야 하는데, 여기서 ‘인간이 뭘 했느냐?’ 하는 것은 삭제당하는 시간입니다.
세 번째, 속죄일의 특징은 공간이에요. 이 공간은 오직 아사셀 염소만이 갈 수 있는 새로운 땅으로 나와요. 그게 바로 광야입니다. 아무도 사람이 살지 않았어요. 아무도 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아사셀 염소가 보내진 광야에서는 그 염소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걸 관찰할 수 있는 권한자는 인간 속에는 없습니다.
아사셀 염소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 광야까지 가서 <걸어서 세계 속으로>처럼 방송 카메라 메고 가서 찍을 것이 아니라, 그것을 찾으려면 지성소로 들어가서 그 염소의 피, 쌍둥이 염소의 피가 어디에 있는지 그것만 보면, 광야의 그 염소는 살았다 해도 죽은 거예요. 왜? 쌍둥이 염소가 지성소에서 죽었으니까요.
오늘 설교의 이런 이야기가 인간의 시공간, 곧 내가 여기에 살아 있다, 인간의 시간과 공간을 내가 안다, 이런 식으로 인식하는 자에게는 전부 다 접근 불가예요. 이해 불가입니다. 안 됩니다. 인간은 자기 거주지에 그 경계가 있기 때문에요.
대 속죄일의 시공간에서는 내가 알아서 뭘 하겠다는 그런 것은 있을 수가 없어요. 나쁜 사람 좋은 사람, 그런 것도 없어요. 그런 것은 다 인간이 정한 거예요. 더러운 피는 지옥, 깨끗한 피는 천국입니다. 인간들의 아이디어는 뭐냐? 이승이 어떻고 저승이 어떻고.
이승과 저승이라는 그 인간 시간 개념은 대 속죄일의 시간 개념에 같이 엮을 수가 없습니다. 이승과 저승이라는 것이 없어요. 그건 불교에서 찾으세요. 주님의 성령께서 “느그 아부지 모 하시노?” 하고 볼때기 잡아당길 때 그 성령 안이 영원한 현재입니다. 그리고 성령 안이, 예수 안이 영원한 공간이고요.
끝으로, 이야기 다 듣고 난 뒤에 여러분들이 질문하고 싶은 것을 제가 먼저 끄집어낼게요. “목사님, 그러면 우리는 뭐 하면 됩니까? 우리는 뭐 하면 되나요? ‘불신앙으로 주님을 기쁘게 하는 한 해가 됩시다’ 하고 있는데 이제 신앙도 소용없네요. 뭐 하면 됩니까? 성령 오지도 않았는데, 성령 불러도 소용도 없는데 우리는 뭐 하면 됩니까?”
성령께서 말씀을 가지고 우리의 일상에 커버가 되어 있는 그걸 뜯어내요. 말씀을 가지고 그렇게 하십니다. 말씀만 남기기 위해서 우리의 일상속에서 ‘나’가 사라지게 해요. 사라져야 되는데 이 교회 문만 나서면 또 내가 등장하잖아요. 그렇게 되면 또 말씀이 사라져요.
말씀이 사라지면 또 성령이 동원되어서 “너그 아부지 모 하시노?” 하십니다. “내가 네 아버지면 내 쓴잔을 마시라고 했지? 너는 아무것도 아니라 했지? 교회 밖에만 나가면 네가 뭐라도 된 양 여기고 설치고,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깁니까? 왜 나는 이렇게 힘듭니까?’ 하는데 네가 뭔데 힘들다고 화내고, 성내고, 분노하느냐? 네가 그럴 자격이 안 된다.” 이것을 주께서는 반복시켜 주는 겁니다.
레슬링할 때, 상대의 몸체를 안고 뒤집기를 하게 되면 3점 따요. 그러면 승리하잖아요. 주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맨날 우리가 나오는, 우리가 주인공 되는 이 현장에서 우리를 뒤집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이 주인공입니다’라고 그 뒤집는 활동을 이 세상에 나가서 여러분이 수시로 느끼시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증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환경 속에서 주님이 종으로 사용하시는 존재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기능을 드러내기 위해서, 말씀이 이렇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매일 같이 쓰임을 이제부터 감사하고 기뻐하고 고마워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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