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11/21-히6:4-6

아빠와 함께 2025. 11. 21. 08:49

히브리서 6장 4-6절 보겠습니다. 저는 사도 바울이 썼다고 보는데요.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이 대목을 교회 교인들에게 다 던져주는 거예요. 그리고 ‘여러분들이 이 대목에 대해서 각자 해석을 해보세요.’ 이렇게 하는 거예요. 해석을 해보라는 것은 해석을 제대로 하라는 말이 아니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즐거우냐, 아니면 갑자기 낙담되고 불안을 느끼느냐 그걸 보는 거예요. 계속 그 기쁨이 살아 있느냐, 아니면 갑자기 우울해져서 회색 얼굴을 하고 있느냐 그걸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표정 관리하지 마시고요.

그 해답의 힌트를 드리기 위해서 제가 문장을 하나 쓰겠어요. 얼굴 낯색이 변하느냐 그걸 보자는 거예요, 우리 자신의. ‘주님 것 건드려도 아무렇지 않다./ 내 것 건드리면 용서가 안 된다.’ 주님 것 건드리면 아무렇지 않은데 내 것 건드리면 용서가 안 된다. 평소 일상에서 긴장도의 근거가 주님 거였습니까, 내 거였습니까? 긴장도. 바짝 긴장해서 신경 바짝 쓰는 것. 코인이 주님 겁니까, 내 겁니까? 주식이 내 겁니까, 주님 겁니까? 바짝 긴장하는 긴장도.

성경을 던져주고 ‘해석해보세요.’하면 자기가 감추었던 자기 본색으로부터 출발해요. 자기 본모습으로부터. 그러면 이 말씀, 히브리서 6장 4-6절을 보고도 환하게 기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영생의 기쁨이 소멸되지 않고 환하게 기쁜 사람은 이 성경해석에서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그 말씀의 강조점, 포인트가 어디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에요.

어디에 있느냐 하면 바로 ‘십자가’의 고정성이에요. 이 십자가의 고정성에 대해서는 그 어떤 경우도 십자가의 고정성은 인간에게 양보 없다는 점에 같이 기쁨으로 동참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의 6장 4절에서 6절을 따라가려면 우리 자신을 뭐로 가상하느냐? 십자가를 현저히 욕보이는 나, 나라고 가상을 해서 ‘십자가 욕보여서 내가 지옥 불에 떨어진다 할지라도 십자가만 멀쩡하다면 그것이 나의 변치 않는 기쁨이 됩니다.’ 이렇게 해석이 됩니다. 이렇게 해석할 거예요.

자기 것 건드려도 상관없다는 거예요. ‘십자가만 안 건드리면 십자가만 확보된다면 주님께서 날 건드려도 저는 좋아요.’가 되는 거예요. 또 이런 이야기하면 ‘목사님, 도대체 어느 수준까지 높아져야 그게 가능합니까?’ 하는데 지금 이건 수준의 문제가 아니에요. 종류가 달라요. 신생아, 새로 태어날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겁니다. 기존에 있는 자아가지고 성경말씀 땜질할 생각하지 마세요. 그거 신차 아닙니다. 새 차 아니에요. 중고입니다. 중고는 하늘나라에서 받지를 않습니다.

유월절 양의 피로 희게 되었다는 말은 유월절 양에 같이 흡수해서 유월절 양이 너를 대체했다는 뜻이거든요. 따라서 유월절 양이 대체되어야 될 텐데 유월절 양 믿는 내가 유월절 양을 제치고 내가 대체물로 등장한다면 그건 가짜 은사죠. 가짜 은사에요.

그래서 ‘은사, 성령 전부다 십자가 하나 붙들고 그거 증거하는데 은사가 십자가에서 나온다.’ 그 이야기를 이렇게 강조하는 겁니다. 이렇게 꼭 써야 될 이유가 십자가나 성령과 복음가지고 자기 이익 챙기려는 자들이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이 있는 겁니다. 어떤 단어를 언급해도 끝까지 나는 내가 나를 지킨다는 그걸 사수하는 사람, 그게 문제가 되는 거죠.

그럼 여기서 왜 육은 꼭 이렇게 자기 자신을 포기 못하고 끝까지 지켜야 되느냐? 여러분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얼굴이 환하게 핀 사람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 육은 안돼.’라는 것을 기정사실화시킨 분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바로 시공간 때문에 그렇습니다.

시공간을 어렵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쉽게 하겠습니다. 창조에서 나온 시간과 공간이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님을 보내서 여기서 시간과 공간이 나옵니다. 이 시간과 공간은 예수님을 예수님 되게 새롭게 둘러찬 시간과 공간이에요.

그런데 기존 창조의 시간과 공간은 뭐냐? 창조에서 나왔다. 창조에서 나왔으니까 인간의 육도 기존에 창조된 거잖아요. 흙에 속한 거잖아요.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흙에 속한 육이죠. 육이니까 이것은 항상 기존의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탈피할 수가 없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탈피할 수 없다는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주변 환경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거예요. ‘주변 환경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어떤 사람은 성격상 그렇다 하는데 성격의 문제가 아니고 본성에 관한 문제에요. 점잖은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영생의 기쁨은 선악과 지식에서 나오는 모든 기쁨과 비교해서 능가하고 초과하고 초월합니다. 영생의 기쁨은. 왜냐하면 영생을 받았으니까. “너 그게 믿어져?” “이상하게 믿어지네. 이상하게.” 도저히 육으로서는 못 믿어요. 선악과 지식으로는 믿을 수 없는데 이상하게 믿어지는 거예요. 그 ‘이상하게’가 뭐냐 하면 바로 성령의 은사가 되는 거예요. 이상하게 믿어져요.

꿈에도 생각 못하고 내가 원하지도 않는 영생이 주어졌을 때 이 사람의 남은 생애는 능가하고 초과하고 초월하는 그런 경험을 성령을 통해 하게 됩니다. 그럼 능가하고 초과하고 초월하려면 여기에 능가해야 될 대상이 있어야 되겠죠. 그 대상이 뭐냐? 기존의 육. 주변 환경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우리가 죽을 때까지 있는 이 육신이 그 대상이 되는 겁니다. 늘 비교가 되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말씀을 가지고 흔들기를 시도합니다. 깜짝깜짝 놀랄 일이 하루에도 수십 번 일어나죠. 수십 번 일어나요.

다시 한번 요한복음 12장 봅시다. 12장 40절에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죠.

이 말을 바꿀 테니까 바꾼 것하고 이 구절하고 어떻게 차이 나는지 한번 들어보세요.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출세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어떻습니까? 어떤 차이 있죠? “저로 하여금 돈 벌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어떤 차이입니까?

지금 말씀의 관심은 돈 벌고 건강하게 되고 자녀 잘 되는 이게 목적이 아니고, 어떻게 뚫을 수 없는 난관이 뚫려서 영생이 주어졌음이, 하나님의 은사로 영생이 주어졌음이 어떻게 믿어지냔 말이죠. 이것은 내 쪽에서 뭘 해서 믿어진 게 아니고 순전히 하나님의 선물로 은사가 주어졌잖아요. 영생이 주어지는 은사에는 후회함이 없다 했잖아요. 아까 봤죠? 범죄함보다 뭐가 우세하다? 범죄함보다 은사가 우세하다 했잖아요. 은사가. 거저 주시는 영생이 나의 어떤 죄보다 우세한 거예요.

그런데 그걸 뭐로 막아요? 현재 우리의 육신이 놓여있는 시공간에서 일어나는 각종 각양의 일들이 우리로 하여금 우세한 데서 오는 기쁨과 즐거움을 다 덮어버린 거예요. 화산재처럼. 얼굴이 떴어, 누렇게. 수심이 가득해. 왜 그렇게 수심이 가득한지 물어보면 생각이 나서에요. 무슨 생각? 이 시공간의 환경에서 주어지는 거기에 예민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생각이 나서 그래요.

제가 지난 부산강의에서 이런 말을 했어요. ‘과학은 객관적이지 않다. 주관적이다.’ 예를 들면, 3+5=8. 이거 맞습니까? 이게 수학 논리잖아요. 누가 봐도 맞죠. 맞아서 막 기쁩니까? 막 즐겁고 이거 하나 맞았다고 ‘이제는 나 죽어도 좋아.’가 됩니까? 영생은요, 너무 기뻐서 지금 죽는다 할지라도 영생의 기쁨은 빼앗기지 않아요. 모든 육의 시공간을 능가하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가 능가해야 돼. 믿자.’가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일방적으로 그렇게 다루는 거예요. 무슨 뜻이냐 하면, 나는 물이 아니요, 나는 피가 아니에요! 성령은 나에 대해 증거하는 게 아닙니다. 고정된 분, 예수님을 증거하는 거죠. 여기 물이라 하는 것은 물세례를 말해요. 예수님은 물로서도 임하고 십자가 피로서도 임했다. 물로서도 임하고 피로서도 임했다. 이게 물세례고 피세례인데 그것은 예수님은 실제로 인간의 신체를 가지고 물세례에 들어가고 심지어 피를 흘려냈다 이 말입니다. 피를 낸 거예요. 그런데 그 피에서 피가 나에게 영생이 된다는 사실은 나의 육으로 인하여 막혀 있는 거예요.

이렇게 생각하면 제일 쉽습니다. 지금 방금 생각한 건데요. 예수님이 정상입니까, 내가 정상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우리는 내가 정상이에요. 예수 믿는 내가 정상이에요. 그러나 주님 보시기에 내가 정상이 아니에요. 내가 정상 같으면 피 믿으라는 말씀만 하면 되는데 그게 아니라 피를 흘렸다 하잖아요, 피를. 피를 흘렸다고요.

피를 흘리고 피를 우리에게 이야기한다고 우리가 믿을 위인들이 아니에요. 그다음 누가 있어야 돼요? 성령이 와야 돼요. 피 흘린 분 따로 있고 성령은 따로 있어서 성령이 움직여서 나로 하여금 피로 확정되었음을, 영생 주었음을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의 공로는 뭐냐? 예수님이고 예수님께 나온 성령께 공로를 돌릴 수밖에 없는 겁니다. 내 기쁨의 공로는 그분께 주어져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아까 이야기했지만 예수님 건드려도 별 거 없다가 나 건드리면 우리는 가만있지 않죠. 그런 경우가 생기더라도 우리 성령 받은 사람은 어떻게 생각해야 돼요? 그게 육이니까 그걸 당연한 걸로 받아들여야 돼요. 당연하게 받아들이면 무슨 현상이 일어나느냐? 영생 준 기쁨은 소실되지 않아요. 마모되지 않아요. 왜? 난 원래 그런 인간이니까. 좀 뻔뻔하죠. 아직 멀었어요. 뻔뻔함의 극치는 아직 멀었어요. 살아가면서 계속 그 뻔뻔함은 더욱 더 커져야 됩니다.

이제 끝으로 에베소서 3장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사도 바울의 기도 내용이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기도를 어떻게 하느냐? 17절부터 설명해드릴게요. 오늘 강의를 정리하면서 설명해드릴게요. 3장 17절,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어있죠. 이 믿음, 우리한테는 이런 믿음이 없어요.

믿음이 찾아오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진 거예요. 우리 허락도 없이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를차출해서 우리 안에 주님이 들어오신 거예요.

들어오시면 바깥으로 어떤 새로운 변화, 예상도 못한 다른 현상이 일어나잖아요. 그 현상이 뭐냐?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렇게 되어 있죠.

터키 여행가면 단골 코스가 있어요. 해 뜰 때 벌룬, 열기구 풍선을 띄우죠. 거기 탄 인간보다도 풍선이 얼마나 큽니까? 굉장히 크거든요. 너무 크다보니까 자기 자신이 작다는 것을 흔쾌히 수긍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어요. 나에게 내 인생에 일어난 일은 시답잖고 사소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이에요. 누가 그렇게 만드는가? 믿음의 풍선이 그렇게 부풀어서 우리로 하여금 인생 살면서 아무것도 아닌 일에 신경 쓰지 말라고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우리에게 더해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안에서 시답잖고 사소한 일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우리는 그 아무것도 아닌 일에 늘 시달려야 되겠죠. 전에는 ‘아이고, 이거 심각하다. 나 칵! 죽어버릴까? 이렇게 사는 게 뭐냐?’ 온갖 것을 시공간 속에서 다 겪게 해요. 육이니까. 겪게 하면서 내가 얼마나 나만 지독하게 믿고 내 이익만 지키는지 느끼면서, 성령 받은 사람에 한해서는 이걸 겪게 해요.

이게 과정이구나. 칵 죽어버릴까 이것도 하나의 과정이고 얼굴이 막 침울해가지고 어두워진 그것도 풍선의 헬륨가스, 사랑의 헬륨가스를 부풀게 한 그 과정이구나. 나의 이 육적인 못남 없이는 부풀지가 않아요. 날마다 우리에게 주신 사랑이 튀르키예 풍선보다도 날마다 더 커지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풍선 속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우리는 딱딱한 내 속에서 나를 자아를 내가 지배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이런 불신의 생각조차도 믿음이 오고 성령이 오니까 반드시 일어나야 될 하나의 절차요, 과정인 것을 깨달아서 나를 작게 여기고 아무것도 아니게 여기고 주님만 크게 느껴지는 우리의 남은 생애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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