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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예수 죽인 것을 짊어짐

아빠와 함께 2025. 11. 15. 08:45

‘예수 죽인 것’을 짊어지고 예수님과 한 덩어리되는 과정

왜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져야 하는 것일까요? 안 짊어지면 구원에서 탈락인가요? 그렇다면 죄 씻어 준다는 십자가의 효과로서 구원에 충분치 않다 는 말이 되어버립니다. 사실은 이러합니다. ‘예수 죽인 것’을 짊어진 그 결과가 ‘죄 씻음’으로 나옵니다.

 

따라서 ‘예수 죽인 것’하고 상관없이 ‘죄 씻기 위해’ 십자가 앞에서 나서는 것은 자신의 동질성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속셈이 밑에 깔려 있는 겁니다. 즉 ‘나는 나를 죽어도 못놓겠다’는 고집을 말하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 죽인 것’ 앞에서 이런 고집은 옳은 것으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예수 죽인 것’이라는 말씀은, 문법상 ‘여격(與格)’입니다. 여격이라는 말은 자기 쪽으로 부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결과로 죽어야 될 그 죽음은 예수님께서는 밀어내신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껴안으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보통 재수 없고 기분 나쁘고 더러운 것은 본능적으로 밀어내기 급급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밀어내시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십니다. 그래서 발생된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사건입니다. 이제 성도에 있어서도, 그 예수님이 받아내신 바 그것을 껴안게 된다는 겁니다.

이는 곧 구원이 되었으면 본격적으로 죄를 짓게 된다는 겁니다. 구원받았으니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죄를 짓게 되는 상황으로 번지게 됩니다.  결코 인간의 개인적 동질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용납되지 못하기 때문에 본인이 잘났기에 그 잘남으로 구원되는 경우는 없다는 말입니다.
교회란  말씀 앞에 모든 자들을 민망할 정도로 노출시키는 곳입니다. 사적인 가정이나 자기만의 공간의 두껑을 활짝 열어 제키시는 그런 하나님의 활동을 이해해야 합니다. 구석기 사람들처럼 가정이라는 자기 토굴에 갇혀서 심적 천장에다 신에 대한 낙서나 해서는 아니됩니다. 말씀 앞에서 날마다 벌거벗은 채로 노출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예수님 오실 때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자신의 부끄러움과 죄를 가릴 수 없는 형편이기 때문입니다.(계 6:14-17) 

따라서 ‘죄 씻음’이라는 사실은 결코 개인적인 동질성을 보장해주시는 조치가 아닙니다. 기존에 알던 그 ‘나’가 아님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창세 전의 환경을 동반시키면서 오셨습니다. 그 환경은 오직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서는 형성되는 환경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계신 분이십니다. 이 원형적인 형상으로 인하여 이 지상의 인간들도 원형적인 모습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인간들은 자기 둘레에 무슨 힘이 흐르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외형적으로 구상(具象)된 것으로 다지면서 살아갑니다. 어떤 질서체로서 버티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내부는 맹렬하게 탐욕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이 탐욕은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로 보십니다. (골 3:5) 즉 너희들이 알 수 없는 신(神)이 개입된 현상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이 세상 방문은 단순히 인간을 상대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모르는 창세 전의 사정을 가지고 오섰기에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 본 자는 사단입니다.

복음이란 하나님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언급하는 겁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롬 1:2) 아들이 오셔야만 아버지가 유발됩니다. 아들이 없으면 아버지도 없습니다. 순서상 아버지가 먼저가 아닙니다. 
따라서 아들이 동반해서 가져온 새로운 현실상, 새로운 시-공간으로 인해 이 땅에 숨겨진 배후 세력이 들통납니다. 요한계시록 12:9에 보면, 사단은 하늘에서 ‘내어쫓겼습니다’. 이는 곧 ‘추락’을 의미합니다. 추락이라는 현상을 통해서 그 존재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사람이 날마다 상승하면 마치 본인이 그 정도 성과를 가질만한 자라고 자부하게 됩니다. 하지만 추락하게 되면 그 속도감 속에서 다시금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갖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추락하는 사단’을 통해서, 범죄한 인간의 심정을 죄로 규정하십니다. 죄란 그냥 그 자리는 놓여있으면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방향성을 가집니다. 이 방향성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같이 뛰어들어서 십자가 죽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곧 이것은 인간이 사는 이 세상을 단지 빛과 어두움이라는 환경으로 분류하실려고 합니다.

즉 인간들이 새삼스럽게 장만하는 교회나 그 어떤 발달된 문명도 예수님이 가져오신 환경 앞에서는 어두움 그 자체입니다.

그 어두움 속에서 예수님은 빛이라는 새로운 환경을 조성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는 빛된 자녀로서 본격적으로 세상 전체가 어두움에 불과함을 압니다.

그리고 그 모두가 다 이 어두움에 갇혀 있는데 그 안에서 인간들은 구더기처럼 원형질로서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이렇게 한데 모이는 식으로 일괄적으로 처리하는 이유는 그 가운데 스토리story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스토리는 이러합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6-17)
 
사적인 동질성을 옹호하는 것이 사단이 예수님을 공격하기 위해 인간을 앞장 세워 같이 추락하는 엘리베이트 타면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항상 어디에 가시든지 말씀 앞에 전신이 다 노출되는 식으로 자유롭게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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