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죄지은 게 아니고 죄가 나를 그렇게 사용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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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체문제라고 하는 것이 뭐냐? 물리학자 뉴턴(Isaac Newton, 1643-1727)이 시작했는데 해와 달과 그리고 지구의 관계에 있어서의 문제입니다.
달이 빠지고 그냥 해와 지구의 관계만 있으면 모든 물리적 해답을 얻을 수 있는데 여기에 제3 자인 달이 끼어버리면 복잡해져요. 지구하고 달하고의 관계는 어떤 물리적 해답을 얻을 수 있는데 여기에 해가 끼어버리면 달과 지구 사이에서 어떤 해답을 얻을 수 없어요. 삼체문제가 해결이 안 되는 겁니다. 둘 사이의 상호 문제에 제3이 끼어들게 되면 둘 사이의 모든 문제가 다 헝클어져 버려요. 이게 바로 혼란입니다.
지금 인간은 혼란 상태에 빠졌어요. 이 삼체문제를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인간들은 바리새인처럼 ‘나 여기 있고 하나님이 저기 계시다.’ 그래서 둘의 문제만 해결하면 된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죄인인 세리가 들어갔을 때 나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과 완벽을 시도 때도 없이 추구하고 있는 이걸로 인하여 천국의 백성이라고 여겼던 그것에 혼란이 일어나서 결국은 천국 백성이 아니었음이 드러나는 거예요.
제3의 인물 세리가 끼어드니까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나는 하나님의 장자의 명분을 가졌고 주님의 은혜를 안다. 그래서 나는 구원 받는다.’ 여기 음행하는 자가 끼어들게 되면 이것도 역시 탈락이에요. 천국에서 탈락되는 겁니다.
이 삼체문제, 제3의 문제를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18절에 보면,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헐어버렸던 그 율법을 이제 와서 다시 율법에 비춰서 ‘내가 율법을 위반한 자냐, 지킨 자냐?’를 다시 생각한다면 나는 그동안 죄 용서받은 자가 아니라 다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짓는 자로, 죄의 용서가 무효가 되어버리는, 그래서 은혜에서 탈락한 자로 드러난다, 이 말입니다.
나와 하나님 사이에 십자가가 들어왔을 때 이처럼 나와 하나님 사이에서 내가 의도했던 거, ‘나 하나님 믿고 구원받을래, 천국 갈래.’ 하는 이 모든 계획이 십자가로 인하여 완전히 무산된다, 이 말입니다. 그런 시도 자체가 지옥 갈 사고방식을 다시 한번 들춰내는 결과를 낳는 거예요. 나는 하나님도 상대해야 되고, 나는 십자가 지신 예수님도 상대해야 되는데 그 관계가 나의 능력과 자질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거예요.
내가 아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아시는 하나님이 모순되기 때문에요. 모순되게 되거든요. 여러분, 달에는 뒷면이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달의 앞면밖에 보지 못합니다. 그 뒷면이 앞면만 쳐다보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혼란을 줄지를 상상도 못 하는 거예요.
은혜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고 장자와 더불어서 오는데 그 장자가 우리에게 뭘 던지느냐? 율법을 줘버려요. 율법을 주신다고요. 지금부터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장자께서 율법을 줄 때 그 율법은 오늘날 음행이라는 것의 문제에 대해 우리가 아는 익숙한 음행이 아니라 낯선, 장자 쪽에서 규정하는, 하늘나라 관점에서 말하는 음행이 우리가 아는 음행과 얼마나 차이 나는가를 제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창세기 16장에서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그 가정에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삼체문제를 들고 나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와서 아브라함에게 자손이 있고, 그 아브라함의 자손이 우리를 구원한다.’ 이러면 간단한 문제인데 그게 아니고,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우리를 구원하는데 본처인 사라에게 그 자식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식이 구원자라고 했는데 그 구원자가 없어요. 자식이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천국 가고 싶은데 인간에게는 애초에 천국에 어떠한 자리가 없어요. 어떤 권한도 없고 권리도 없어요. 권한도 권리도 없으니까 딱 거기까지, 그래서 흉내 내기나 하는 거예요. 성경 보면서 흉내 내기 하는 거예요. 이게 음행이에요.
음행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본인의 자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게 음행이에요, 본인의 자리를. 내 자리가 이게 지옥 자리인 것을 파악하지 못하는 게 음행이에요. 본처 자리가 되려면 자식을 낳아야 되는데 사라는 자식이 없습니다. 따라서 본처 자리는 비어 있어요. 없어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장자가 되려면, 자식 있다고 장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왜 저쪽은 하나님의 언약이 포함되어 있는 장자가 될 수 없는가?’가 대조되는 삼체문제가 등장해야 합니다. ‘왜 저들은 지옥 갈 수밖에 없고, 저들은 왜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가?’ 그것을 밝혀내기 위해서 장자 되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게 율법이에요.
‘우리는 율법으로 구원받지 못하니까 복음으로 구원받자’ 이게 이체 문제거든요. 이걸로 충분하지 않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가 와야된다는 겁니다. ‘아, 율법으로 우리는 죄를 아니까, 그래 맞아. 나는 날 때부터 죄인이었어. 율법으로 구원받을 수 없어. 무슨 대책이 없을까? 아, 감사하게도 굿 뉴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주셨구나. 오, 십자가! 십자가 믿지.’ “하나님 됐죠, 이제? 나 죄인임을 고백하고 십자가 믿습니다. 이제 끝났습니다. 저 구원 받은 거 맞죠?”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따라 하는 것은 거기까지’ 딱 거기까지 하고 있는 거예요.
호세아 2장 16절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음행의 문제를 개인 문제에서 이스라엘 전체 운명으로 확대시킵니다. 확대시키면서 하나님 자신을 본 남편으로 나타내게 하시는 거예요.
언제부터 남편이냐? 애굽에서 나올 때 원래부터 남편이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애굽에서 나올 때 출애굽기 4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남편이라고 하지는 않았어요. ‘이스라엘은 아들, 내 자식’(출 4:22)이라고 했어요. 하나님을 남편, 신부로 보는 것은 호세아가 처음입니다. 그 전에 이야기 한 적이 없어요.
삼체문제, 제3의 문제가 신약으로 올 때 점점 더 윤곽이 더 뚜렷하게 등장합니다. 남편으로 등장하면서 ‘너희들은 내 남편인 여호와를 믿지 않은 다른 남자를 사귀었던 간음한 자고 음행한 자, 집단적으로 음행한 자’라고 규정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친히 남편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호세아에서.
로마서 7장 9절에 나온 말씀이에요.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죄는 살아나고 나도 살아났다.’ 이게 없어요. ‘죄가 살아나면 나는 죽은 존재’가 되는 거예요. 죄가 득세해야 하고, 죄가 나를 대체하고 대신해야 하니까. 그게 바로 율법이 우리에게 제공된 이유입니다. 죄가 살아났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우리가 음행하는 자가 아니라 그냥 죄인이 되는 거예요. 음행하는 자가 아니라 죄인이 되는 겁니다.
사랑은 창을 못 투과하고 창밖에 빗물같이 있는데 그 빗물이 내 가슴에 이렇게 맺혀버렸다. 질문은 뭐냐? ‘어떻게 바깥에 있는 사랑이 내 안에 들어왔습니까?’ 이게 질문입니다.
정답은,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성도 자체를 창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내가 창밖에 나간 것도 아니고, 사랑이 창 안으로 들어와서 나한테 맺힌 것도 아닙니다. 주께서는 성도를 죽이고 말씀대로 주님의 은혜, 지옥과 천국을 가름하는 십자가 속의 인물로 우리를 만들어버렸어요.
그게 바로 갈라디아서 2장에 나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1절에 성도를 주께서 어떻게 사용하는가가 나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요 계시 있잖아요. 사도바울의 고백 또는 계시를 사도바울만 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 받는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매일 삶 속에서 ‘내가 의롭게 되려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를 헛되이 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나를 십자가 선상의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십자가 증가하는 선상의 존재로.
그러니까 성도는 뭐냐? 삼체(三體), 제3의 존재예요. 이것은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다윗이 있을 수 없듯이, 사도 바울이 있을 수 없듯이, 사도 바울이 새로 만들어졌듯이 오늘날 성도라는 것은 인간이 교회에 나와서 기대하는 성과가 아니라, 성도는 주님 쪽에서 장자가 움직여서 나를 사랑으로 품을 때 새롭게 없던 데서 생긴 것이 성도예요.
성도는 숫자로 헤아리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 + 성도는 = 몇 명이다.’ 두 명? 아니에요. 예수님 하나 그리고 성도 하나, 예수님 하나 안에 성도가 다 포함된 하나가 되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여러분 당하십니까? 어떤 일을 당해도 상관없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이곳을 떠나는 즐거움이 있고, 영원한 영광의 자리에 들어갈 날만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하신 내력을 얼마나 우리가 방해하고 핍박을 했는지. 내 잘남만 고수하면서 살아왔던 그것, 뭐가 은혜인지도 모르고 살아온 저희의 모습이었던 것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일방적인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장자의 명분이 되게 하셨다는 이 기쁨을 유지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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