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06a 울산강의-역대기하(13강) 15장 8절 : 봐주지 않는다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역대하 15장하겠습니다.
역대하 14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요. 그 일이 일어난 걸 사람들은 사태가 일어났다고 해요. 사태와 사물. 이 세상은, 사물이라 하는 건 물건이죠. 눈에 보이는 것, 개체, 물건들. 사물이 총 모인 것이 세상일까, 아니면 사태가 모인 것이 세상일까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사태₁+사태₂+사태₃+… 해서 이게 세상의 전부냐, 아니면 저기는 나무가 있다, 풀이 있다 하는, 사물₁+사물₂+사물₃+… 이렇게 해서 이게 세상이냐? 이 둘을 놓고 봅시다.
여러분들은 어느 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봅니까? 사태의 총합이 세상입니까? 사물의 총합이 세상이겠어요?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고속도로에서 2.5톤 트럭이 가고 있고 뒤에는 1톤 트럭이 가고 있었다. 그런데 2.5톤 화물차운전자가 밤새 물건 한다고 졸렸는지 제대로 운전을 잘 못하고 빨리 갔다, 천천히 갔다 졸음운전을 하니까 뒤의 1톤 트럭이 그만 박았습니다.
그럼 사물들이 뭐냐 하면 2.5톤 트럭, 1톤 트럭 이렇게 되지요. 거기다 나중에 경찰까지 오면 경찰차, 사물들이 모이지요. 그게 세상이냐, 아니면 차와 차끼리 박았다는 것이 세상이냐는 거예요. 일이 벌어진 것, 어떤 사태, 사건 벌어진 것, 어느 것이 세상이라고 보십니까?
세상이라 하는 것은 어떤 물건 여기 있고 저 물건에 받쳐서 부셔졌다. 이런 식으로 인간은 살아가지 않아요. 엄마, 아빠, 나하고 사는데 엄마가 집 나갔다. 그런 이야기를 학교 선생님한테, “엄마가 집 나갔어요” 하면 학교 선생님이, “세 사람에서 두 사람 됐네” 이렇게 이야기합니까? 세 개의 사물에서 두 개의 사물이라고 하면 됩니까? ‘엄마가 왜 널 놔두고 나갔어’ 따지겠지요. 그 사태에 대해서. 그 따지는 게 이거에요.
사태는 뭐가 있느냐?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러나 사물은 의미 없습니다. 만약에 우리 집 재산이 100억이다. 돈으로 따지면 돈 100억이 있겠지요. 사물이죠. ‘100억 있어서 행복하냐?’ 그건 뭡니까? 그거는 사태의 의미를 말하는, 의미가 있어야 되는 거예요. 100억 있는데 천억 있는 사람보고 화가 났다. 이건 전부 다 의미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이런 이야기하는 이유가 결국 이걸 말하고자 하는 거예요.
나라는 인간은 사물입니까, 아니면 사태입니까? 제가 이것 이야기고 싶은 거예요. 사물이에요, 사태에요? 몸 아프면 병원에 가는 것, 사물이죠. 근데 ‘몸이 아파도 아는 행복해’ 이건 의미죠. 열심히 돈 모은다. 이거는 사물을 모으는 거죠. 그런데 어떤 점에서 네가 행복하냐? 사물과 관계없이 내가 이 일을 해야 될 어떤 나에게 담긴 의미가 내 스스로 파악할 수 있는 기회가 될 때 내가 사는 이유를 알 때 행복한 겁니다.
성경에 역대하 오늘 15장 하는데 14장은 전쟁 이야기입니다. 오십팔만 대 백만이 싸우는 이야기고, 특히 오십팔만은 북쪽 열 지파의 협조 없이 오직 유다와 베냐민 지파, 아랫동네 두 지파만 해서 오십팔 만이고, 구스에서 백만이 쳐들어왔는데 어떻게 됐느냐? ‘도망한지라’고 돼 있어요. 14장 12절에(여호와께서 구스 사람을 아사와 유다 사람 앞에서 쳐서 패하게 하시니 구스 사람이 도망하는지라).
성경에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면 제가 묻지요. 오십팔만 대 백만에서 오십팔만이 이겼습니다. 그러면 그걸 다 듣고, 그래서 뭐? 백만을 오십팔만이 이겼구나. 오십팔만 대 백만에서 적은 쪽수가 큰 쪽수를 이겼다. 그래서 그게 나와 무슨 상관있는데, 그렇게 되겠지요. 아무 상관이 없지요. 그러면 질문을 이렇게 하겠습니다.
에덴동산에 선악과가 있었고 생명나무가 있었다. 그 자체가 사물이에요, 사태에요? 두 개의 나무니까 개체가 있잖아요. 사물이죠. 사물인데 주께서 거기다 의미를 입혔어요. 그걸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돼 있어요. 그러면 이것은 우리에서 무엇을 요구하느냐 하면 어떤 사물을 볼 때 사물에서 의미가 추가된 사태로 넘길 수 있는 안목을 갖고 있느냐를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묻는 거예요.
오십팔만이 백만을 이겼다고 하니까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해요. “그때 나 안 태어났어요. 나한테 묻지 마세요. 난 상관없습니다.” 이러는 거예요. 오십팔만이 백만을 이긴 그 의미가 그때 당시의 의미로 종결되는 게 아니고 성경의 의미는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지는 거예요. 전쟁의 의미고, 이게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대결에서 불가능성이 이기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원초적인 말씀, 의미가 있는 성경을 안 들으려 하고 안 보려고 하는 이유가, 자기를 뭐로 보느냐 하면 자기를 사물로 보기 때문에 그래요. 사물로 보면 여기 뭐가 있는 하면, 내 몸이 여기 있다. 자녀 같으면 네 몸도 거기 있네, 이래 되지요. 그럼 몸이 몇 개입니까? 엄마와 아들 있으면 몸이 두 개지요.
“엄마 근데 내 몸이 있는 의미는 뭐야?” “그런 건 묻는 게 아니야. 네 사물, 몸이나 잘 간수해서 아프지 않게 해라. 네 몸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나중에 네 몸뚱이 찾는 사람들이 있을 거야.” 특히 딸 같으면 몸을 정결하게 잘 간수하면 좋은데 시집간다는 거예요. 이게 뭐예요? 전부 다 사태의 의미는 모르고 사물 하나하나를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렇게 보시면 돼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사물이 나를 수호하고 지키기 위해 버티는 것. 수호+보존하는 것, 이것 말고 다른 인생 있어요? 없지요. 무슨 선악과, 생명나무 이런 건 여기서 낄 자리가 없어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사물이 내 몸을 수호하는 거예요. 전력을 다하여 지키고 그걸 보존하는 거예요. 거기에 모든 신경이 예민하게 작용하고 있어요. 아주 신경을 날카롭게 자기 수호하고 보존하는데 온 신경을 다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의미가 없어요. 내 몸 지키는 게 다고, 내 몸 버티는 다기 때문에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도 내 몸 지키면 의미 있잖아, 하잖아요. 역대하 14장에 보면 뭐가 일어나느냐 하면 전쟁이잖아요. 전쟁은 하나님께서, 전쟁이란 살아 있는 사물, 나를 살아 있는 채로 죽음을 맛보게 하는 장, 의미 장, 의미의 공간, 이게 전쟁입니다. 늙어서 자연사하는 것 말고 요양병원에 가서 살았는지 죽었는지 깜빡깜빡하고, “아버지 지금 숨을 거뒀습니까?” “조용해라. 나 잔다.” “돌아가신 줄 알았다.” “잠 좀 자자.”
의식이 깜빡깜빡 있는 것, 그런 것은 뭐가 아니에요? 전쟁이 아니죠. 나이 구십 된 사람들만 모아서 군대를 조직한다고 해봅시다. 졸병이 91, 고참이 95, 병장 나이가 97, 이등병 나이가 92 그렇게 그들이 모여서 하나의 군대, 대대를 편성해서 전쟁에 나갔다 칩시다. 총 하나씩 들고 전쟁에 나가면 가다가 다 주무셔요. 잠이 와서 잔다고요. 자면 인민군이 다 죽이지요.
요양병원에서 죽을 사람을 전쟁터에 나가서 죽게 만드는 것, 왜 하나님은 전쟁을 만들었습니까? 사물의 의미는 죽음의 사태 속에서만 비로소 사물의 의미가 드러난다는 거예요. 전쟁을 통해서. 그냥 사물이 있으면 거울 앞에 내가 있으면 살은 걸로 간주해요. 내가 살아 있다고 여기는 나를 갑자기 뿅하고 전쟁터의 최전방에 세우는 거예요. 우크라이나 전쟁터의 북한 군인들처럼.
북한 군인들이 우크라이나 전쟁터에 뿅하고 나타났을 때에 며칠 전만 해도 자기는 평양에서 침대에서 자고 있던 사람이 3일후에, 3일 더 걸리겠다. 일주일 후에 우크라이나 전쟁터에서 자기를 향하여 드론이 살려줄까, 죽일까 하면 드론 보고 살려달라는 거예요. 요새 챗GPT 보고 살려달라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기계 아닙니까, 기계. 기계 보고 살려달라는 거예요.
드론은 양심도 없고 의식도 없어요. 그냥 기계적이에요. 전쟁은 기계적입니다. 의미는 빼고 사물로 본다니까. 대대에 이백 명 지원부대, 그럼 이백 명 한 사람, 한 사람의 과거가 얼마나 MBTI 성격이 어떻고, 가정형편이 어떻고 IQ 얼마냐? 그걸 물어요, 안 물어요? 전쟁 중에 그걸 왜 묻습니까? 쪽수가 중요하지요. 우리 부대 얼마? 저쪽은 오백 명입니다. 우리부대는 이십 명입니다. 안 되겠다. 지원군 요청해라. 칠백 명 오라 해. 그래서 오백 대 칠백, 이렇게 붙는 거예요.
하나하나가 위에 뜨는 드론도 기계지만 거기에 참전하는 모든 인간도 하나의 뭐가 되느냐? 의미가 쏙 빠진 하나의 기계입니다. 그게 사물의 본성이죠. 그러면 물어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왜 따먹었습니까? 뭘 뺀 거예요? 선악과를 사물로 볼 때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지요. 뭐가 누락된 거죠?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의미가 없지요.
근데 아담과 하와는 의미는 모르겠고 다만 먹고 싶다는 거예요. 탐스럽다는 것, 저것 먹었으면 소원이 없다는 것, 죽는 한이 있더라도 먹어야 되겠다는 것. 선악과를 뭐로 봤느냐? 사태로 보지 않고 사물로 본 거예요. 선악과 따먹으면 죽음의 사태가 확 퍼지는 거예요. 죽음의 의미, 정녕 죽으리라.
그러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생명나무는 못 따먹지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생명나무를 따먹을 자격자는 죽음에서 벗어난 자, 죽음의 세력에서 탈출에 성공한 자에게만 생명이 주어지게 돼 있어요. 그러나 인간은 이미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생명나무를 따먹을 권한이 없습니다. 그냥 인간은 죽음의 의미에 맞서서 하나의 사물로서 나를 수호하고 지키고, 나를 그냥 보존하기 위해서 비티는 것, 여러분 어떤 사람이 인생사는 거 이것 외에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요. 아무도 없어요.
자기 것 지키고, 보존하는 것 그거 말고 다른 데 신경 쓰는 사람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 세상에 없습니다. 특히 사물이 나죠. ‘나=사물, 사물=나’를 지키고 보존하는데 모든 인간이 여기서 매진하고 있습니다. 의미 없어요. 왜? 이미 죽음의 의미가 이 사물을 덮치고 있기 때문에 백날 살아봤자 죽습니다. 분명한 사실이에요. 그런데 아담이 몰랐던 게 있어요. 죽는다 하니까 숨 끊어져 죽는다고 아담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 하는 게 창세기 2장, 3장이잖아요. 4장에 보면 죽는다는 사태가 의미가 추가가 됩니다. 누가 누구를 죽일 때 죽음이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죽음이란 기다려보니까 죽는 게 아니고 누구에 의해서 내가 살해당하는 관계, 어떤 사물이 나라는 사물을 이 지구상에서 없애고자 하는데 그 없애고자 하는 의미가 악한 의미로서 나를 제거하려고 하는 그 내용이 죽음 내용 속에 추가가 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미움이라는 겁니다. ‘제발 나가 죽어라, 인간아. 죽어, 죽어, 죽어.’ 부부 싸움할 격분하면 그러잖아요. 약간 양심 있는 사람은, ‘너 나하고 같이 약 먹고 죽자’ 하고. 약 먹고 죽자 해놓고 지는 약 조금 먹고 저쪽은 많이 먹여 시체 되죠.
그러니까 인간이 얼마나 자기를 수호하고 보존하는 것이 자기의 산물로서 의미였으면 남을 협박할 때 자기 죽는다는 것을 마지막 담보로 그걸 제시하겠습니까? “엄마, 저 여자와 결혼할 거야.” “하지 마!” “엄마가 허락 안 하면 나 죽을 거야.” 이게 뭡니까? 협박성 공갈이죠. 협박할 때 담보가 뭐예요, 근거가? “엄마 나 죽으면 좋아?” 이거 협박 아닙니까. 협박이거든요. 가룟 유다도 자살했잖아요.
그래서 이게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이 하는 내부총질, 이준석 있지요. 자기 존재 바탕을 자기가 허물 수 있고 없앨 수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여기 있다는 것 외에 다른 의미가 없기 때문에. 내가 있는 동안만 나는 의미 있고 까짓것 내 마음대로 안 되면 나는 내 의미를 내 손으로 없애버리면 깔끔하게 모든 일이 처리되지 않느냐.
그리고 모든 것을 사물로 봤기 때문에 이렇게 합니다. ‘사람 태어나서 한 번 죽으면 그만이지 죽고 난 뒤에 천국이 어디 있고 지옥이 어디 있어?’ 그렇게 되지요. 사물의 의미만 알고 사태의 의미는 모르는 거예요. 내 몸 하나 없어지면 그만이라는 거예요. 십자가 옆에 있던 구원받지 못한 강도가 주위에 빈정거리던 로마인들이 있었어요.
‘당신이 나를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해주면 믿어줄게.’ 지금 의식 자체가 관심이 어디 있어요? 내가 평소에 내 몸을 수호하고 보존하는데 전력을 다한 그것에 대해서 당신이 협조해주면 당신 믿어줄 용의가 있다, 그 말이잖아요. 그렇지요. 이게 성경의 의미고 오늘날 사람들이 교회 나오는 이유가 여기 있잖아요.
내가 스스로 수호하고 보존하려니 너무 힘드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의 힘이라고 빌려서 본래부터 내가 하고자 하는 내 바탕, 나를 수호하고 나를 보존하는데 좀 보탬이 될까 해서 안 되면 그만이고 되면 더 좋고. 행운이라고 얻기 위해서 교회 나와서 그냥 비는 거예요. ‘매달 1억씩 십일조 하게 해주옵소서.’ 계산해보세요. 매달 얼마 번단 말입니까? 매출 10억이 아니고 순이익 10억이거든요.
왜 그런 기도를 하는데? 내가 여기에 사물로 있는 한 의미가 있고 이 사물이 없어지면 나 의미 외에는 다른 것은 애초부터 의미가 없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교회 다녔기 때문에 그래요. 세상 살았기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은 뭡니까? 사물의 의미 말고 사태의 의미가 따로 있다는 거예요.
그것은 사물의 의미에서 사태의 의미로 옮기려면 사물의 의미가 제거돼야 되겠죠. 제거되는 방식이 뭐냐? 전쟁입니다. 저 구스, 구스가 여러 나라로 있는데 에티오피아로 하고 싶지 않지만, 그 구스 나라에서 백만 명 왔을 때에 유다와 베냐민 지파, 유대나라 사람들은 아주 신났습니까, 아니면 이제 죽었구나 생각 들겠습니까? 절망입니까, 조금이라고 가능성 있습니까? 가능성 없어요.
그게 아까 이야기한 산 채로 경험하는 죽음.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합니까? 사물의 의미에서 사태의 의미로 눈 돌리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사용하시는 방식은 전쟁이었습니다. 역대하 15장 19절, “이 때부터 아사왕 삼십 오년까지 다시는 전쟁이 없으니라” 왜 전쟁이 없느냐? 이제는 사물의 의미에서 사태의 의미로 파악했기 때문에 전쟁을 일으킬 이유 없지요. 45년 동안. 전쟁이라 하는 것은 지금 사물의 의미에 거기 고정돼 있기 때문에 자기 몸밖에 몰라요.
그래서 역대하 15장 2절에 보면, “저가 나가서 아사를 맞아 이르되 아사와 및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들아 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하실찌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이렇게 돼 있지요.
그런데 이 대목, 오뎃의 아들 아사랴란 선지자가 임해서 하시는 말씀인데 이 대목을 보면서 여러분 굉장히 난처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어떻게 난처하냐 하면 하나님과 함께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그다음에 하나님을 찾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만나게 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이 뜻이 굉장히 모호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적어볼게요. 방금 세 가지 나왔지요. 첫 번째 뭡니까? 하나님과 함께, 그다음에 하나님을 찾으면, 세 번째요? 하나님과 만나게 된다, 있잖아요. 이게 사람 오가는 카페에서 10시에 만나라. 이건 뭐 평소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을 했기 때문에 가서 찾으면 그 사람이 있을 것이다. 여기 아무개 계십니까, 해서 찾으면 어떻게 만나게 되고, 만나게 되면 다시 이야기해서 함께할 수 있다. 이건 뭐 별로 어려운 게 아니란 말이죠. 사람 같으면.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게 사람을 상대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을 상대로 찾고 함께하고 만나는 것, 이게 여러분 인간의 능력으로 성사됩니까? 성사될 수 있어요? 성경은 인간의 능력으로 성사될 수 없는 이야기를 하신 거예요. 사람 만나듯이 하나님 만날 수 없는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왜 인간이 하나님을 못 만나는가? 인간은 자신에게 문제가 없다고 여긴다. 자신에게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나 정상적이야’ 이래 생각해요. 그래서 모든 행동이 뭐냐 하면 내가 옳은 사람인 것을 증명하는 식으로 일생을 산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아까 한 것 기억나십니까? 인생이 뭐라 했습니까? 사물이 나를 수호하고 지키고, 그다음에 어떻게 한다? 보존한다. 이게 인생의 의미고 사물화 된 인간의 의미죠. 죽을 때까지 나는 아직 살아 있다. 그러면 사태의 의미는 뭐냐? 네가 선악과 따먹는 날에서 정녕 죽으리라. 하나님이 제시한 것은 네가 산 채로 죽음을 경험하라고 인생을 줬다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이 주신 사태의 의미인데 인간은 사태의 의미를, ‘치우세요. 난 그거 안 듣습니다. 내가 엄연히 여기 살아 있는데 내가 왜 죽어요? 나중에 늙어 죽겠지’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방금 이야기한 게 역대하 15장 이야기죠. 그런데 14장에 무슨 사태가 일어났습니까? 전쟁하는 사태가 일어났지요. 하나님의 의미는 사물을 통해서 주어지는 게 아니고 사태를 통해서 주어지는 겁니다. 꽈당하고 교통사고 나듯이. 2.5톤 트럭과 1톤 트럭이 만약에 같은 해병대 출신이고 해병대동우회에서 만났다면 서로 안 싸울 사이죠. 그런데 교통사고를 통해서 막대한 손해를 가했고 손해를 입힌 상태에서 만나면 둘이 원수 상태가 되지요.
그러니까 인간이 그 가해자 쪽에서 ‘내가 졸음 운전해서 박았지만 인간성은 좋아요.’ 이건 뭐예요? 내가 옳은 사람인 것을 어떤 경우라도 증명하려고 하지요. 그러면 ‘당신이 좋든 옳든 난 관심 없고 이 차 부셔진 것 어떻게 하려고요? 블랙박스 한 번 까봐?’ 그땐 슬슬 반말 나오기 시작하죠. 다시 말해서 나는 문제가 없는데 당신 쪽에 문제 있다는 거예요.
그럼 경찰이 와서, “실례지만 앞차와 간격이 100미터였습니까?” “100미터 아닌 것 같아요.” “고속도로에선 100미터 띄우는 게 법인데 얼마였습니까?” “한 20미터….” “그러면 박겠네.” 거기서 유명한 변호사 나오지요. 몇 대 몇. 변호사가 왜 동원됩니까? 무엇 때문에 변호사가 동원됩니까? 나한테는 뭐가 없다? 나한테는 전적으로 문제없다. 몽땅 다 문제없는 게 아니고 실수할 수도 있지만 문제없는 존재다. 나는 매사에 내가 문제없고 올바른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식으로 평생을 살았다는 거예요.
이게 아까 이야기한 인간의 사물의 의미는 그걸 수호하고 그걸 보존하는데 평생에 전력을 다해왔으니까 그 중간, 중간의 사태에서는 ‘역시 난 옳았어’ 이런 게 나온다 이 말이죠. 교도소 일곱 번 드나들어도 난 착한 사람이다, 그것도 똑같은 거예요. 그러면 사물의 의미에서 사태의 의미로 하려면 여러분이 하나님 같으면 이걸 어떻게 하면 옮길 수 있겠어요?
어떤 작업부터 먼저 하겠습니까? 여기 나와 있지요. 인간에게 문제없다는 인간을 뭐로 만듭니까? 네가 모든 게 문제덩어리다. 그렇게 해서 매사에 나는 옳은 사람인 것을 증명하겠다는 것을 뭐로 바꿉니까? 도대체 내가 숨어있는 문제덩어리를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는 거야, 그런 것을 보여주는 삶이 성도의 삶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성도의 특징은 뭐냐? 늘 고마워하고 감사가 나오겠지요. 문제성은 문제성대로 많았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은총을 주셔서 이 문제성을 그대로 갉지 아니하고 꾸준하게 사랑을 해주시는지 그 고마움이 계속 나오는 거예요, 성도한테는. 불신자한테는 자기 옳다는 이야기 안 해요.
성도가 아닌 사람이 교회 와서 성경책을 보게 되면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를 수호하고 보존하고 자기 옳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성경해석을 그렇게 합니다. 뭐는 소화 안 돼요? 자신이 문제 있다는 것을 하나님이라도 파헤치지 말라는 거예요. 나는 내가 옳다는 그 의미만 붙들고 살아가기 때문에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잘못했다, 이런 소리하면 교회 안 나올 거야, 하나님 안 믿을 거야.’ 이래 되겠지요. 왜? 내 잘난 맛에 살아가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의 작업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사물의 의미를 뭐로 바꾼다 했습니까? 사태의 의미로 바꾸지요. 사물이라 하는 것은 인간들이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하나의 과일로 봤다는 말이에요. 하나의 객체, 존재로 봤거든요. 근데 생명나무도 그냥 생명나무가 아니고 선악과 따먹은 자에겐 일체 허락하지 않는다는 사태의 의미가 담긴 과일이 생명나무에요.
생명나무가 왜 있느냐 하면 그냥 그림 속의 떡이라는 걸 보여줘요. 그림 속의 떡을 먹을 수 있습니까? 못 먹지요. 그것은 왜 그러느냐? 인간 네 자신부터 문제 있다는 것을 인식하라 이 말이에요. 나는 옳다, 나는 문제없다 이래서 슬슬 욕심내서 이제 생명나무 따먹으러 교회 한 번 나가볼까, 부흥회 참석해봐? 간절히 기도해봐. 기도해서 생명나무 따먹겠다는 그 심보가 뭡니까? 나를 또 수호하고 나를 영원히 보존하겠다는 거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의 일은 아까 언뜻 이야기했지요. 사물의 의미에서 사태의 의미로 옮기는 방법은 뭐라 했습니까? 전쟁. 전쟁의 뜻은 산 채로 무엇을 경험한다? 산 채로 나의 죽음을 체험하는 거예요. 산 채로 나의 죽음이니까 내가 이만큼 살았다는 것은 아무 짝도 소용없어요. 쓸모없어요. 다만 여기서 죽음 앞에서 우린 뭘 하느냐? 무서워요, 두려워요 하는 뭘 느끼느냐? 절망을 느끼는 거예요. 전쟁 앞에서. 아무리 오십팔만 군사라 해도 백만 대군 앞에서는 사지가 떨리지요. 이젠 죽었다, 이젠 죽었다.
그러니까 전광훈 목사가, ‘자, 우리가 역전합니다.’ 3, 2, 1 하고 딱 출구조사 발표하니까 이재명 51.7%, 김문수 39.3% 뭘 느꼈어요? 탄식하지요. 절망을 느끼지요. 왜냐하면 김문수 찍은 사람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옳은 판단을 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김문수가 대통령 되는 것이 자기를 수호하고 보존하는데 유리하게 작용할 거라고 짐작해서 한 거예요. 나이 많은 김문수 찍으면 뭐 할 건데. 이재명 찍은 사람들은 반대로 또 생각할 거고. 이게 진리입니까? 진리 아니지요.
살아 있으면서 나의 절망을 체험하는 겁니다. 절망을 체험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나는 원래 사태의 의미로 가는데 있어서 나는 불가능하다는 뜻이에요. 불가능한 존재에요. 나는 불가능하다, 라고 하는 거예요. 나는 하나님의 의미에 들어가는데 불가능하다, 문제 있다. 주님께서는 어떻게 이걸 바꾸느냐 하면 불가능한 것이 너다, 라고 바꿔줘요. 이러면 주님과 함께하는 거예요. 찾는 것이 되고, 함께하는 것이 되고, 만나게 돼요.
그러니까 이걸 정리하면 주님과 만나는 것은, 나의 절망 가운데서 나의 산 채로 죽음 가운데서 나의 불가능성과 대비가 되는 주님의 가능성과 함께하는 거죠. 이게 바로 오십팔만 대 백만의 전쟁의 의미입니다. 전쟁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역대하 14장에서는 아주 신났어요. 예상도 못한 승리를 했으니까 신났지요. 그런데 신나면 뭐합니까, 돌아서면 마찬가진데.
그래서 15장 1절에 하나님의 신이, 신약 같으면 성령이죠. “하나님의 성령이 하나님의 신이 오뎃의 아들 아사랴에게 임하시매” 자, 성신이 임한 사람이 등장해요. 성신은 인간이 가능한 거예요, 불가능한 거예요? 불가능하죠. 성령이 와야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어요. 육으론 못 봅니다. 그런데 성령이 온다는 것은 뭐냐 하면 자신의 불가능성을 자기 육의 사물의 불가능성을 들춰내는 거죠. 너는 아무것도 할 것도 없고 하지도 못하고 한 것도 없다. 그걸 가지고 로마서 4장에서 값없이 구원이라는. 값없이 구원받는데 여러분 기쁘지 않습니까?
은근히 도와주기를 기대하고 은근히 예상한 걸 기대한다면 이거는 감사와 고마움이 그 사태의 의미는 없어요. 인간이 종교적인 꼼수를 쓴 겁니다. 이렇게 하면 도와줄 거야. 이렇게 하면 구원할 거야. 이거는 자기 생각이에요. 자기 수호와 자기 보존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의미를 제공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신이 아사랴에게 임했습니다.
아사랴에게 임했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아사랴에게 임해서 당부한 게 뭐냐 하면,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하실찌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바 되시려니와”(2절) 이것을 주님께서는 성공리에 성사시켜주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뭡니까? 네가 부자가 된다든지 몸이 안 아프다든지 모든 가정이 화목하다든지 이런 겁니까? 그걸 주겠다는 거예요? 아니지요.
제가 지난 수요일 기도제목이 뭐냐 하면 이거였어요. 주께서 주시는 것은 길과 진리와 생명이라 했습니다. 여기 무슨 돈이 있습니까, 건강이 어디 있어요, 가정화목이 어디 있어요? 우리 딸내미 빨리 시집보내야지, 이런 게 있습니까? 없지요. 주께서 주시고자하는 것은 길과 진리와 생명이에요. 이걸 합치면 뭐냐 하면 바로 하늘나라 의미를 주는 겁니다.
이미 길과 진리와 생명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죠. 아버지의 모든 뜻이 예수님에게 담겼잖아요. 의미로. 예수님이 담고 있는 아버지의 의미 속에 참여되는 거예요. 함께 들어가는 거예요. 함께 들어갈 때 아까 내 몸을 수호한다든지 보존하는 내 사물적 의미는 어떻게 돼요? 그거는 다 날아가야 되지요. 나의 죽음과 더불어서 그게 날아가야 된다 이 말이죠. 내가 부자 되면 기쁘겠습니다. 가정화목하면 기쁘겠습니다. 그런 기쁨은 용납이 안 되지요.
주께서 주시고자하는 뜻은 길과 진리와 생명이란 말이죠. 기도원에서 이런 것 기도하라고 해야지. 사업 잘되게 해주시고 고부간의 갈등해소, 말썽꾸러기 아들 취직 되고 그런 것 쫌 하지 말고 이것, 내 의미 말고 하나님의 의미가 나한테 당도하고 덮이게 하옵소서. 덮인다는 게 뭡니까? 함께한다는. 그 안에서 만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이렇게 돼요. 어렵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이게 영원하거든요. 그래서 이거는 이렇게 보면 돼요. 얇은 영원성, 그야말로 폭이 0점 몇 밀리미터 정도로 너무나 얇은데 그게 영원성이 이스라엘에게 지금 아사 왕 나라에 덮인 겁니다. 그럼 그동안 하나님이 함께 있음을 왜 몰랐는가? 두꺼운 자기 존재의 수호와 자기 지키는 그게 너무 두꺼웠어요. 얇디얇은 하나님이 영원성이 펄럭이는 얇은 비단 천처럼 그렇게 우리를 덮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그동안 몰랐던 거예요.
그걸 신약에서는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면 육을 벗겨내면 영이 나온다는. 육을 벗기면 영이 나온다. 사도 바울은 육과 영을 대비하고 있거든요. 자, 그러면 육과 영이 어떻게 대비되는지 찾아보고 10분 쉬겠습니다. 우선 육부터 볼게요. 사도행전 8장 18절에서 20절,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찌어다”
자, 이 아이디어, 발상. 시몬이라는 사람, 마술사가 생각하는 의식 자체를 보세요. 누구 의미입니까? 사물인 자기 의미잖아요. 내게도 성령을 줘서 이렇게 놀라운 영적 능력이 일어나게 해 달라. 이런 것 때문에 아직도 종교라는 것이 사업이 되고 장사가 되고 지금도 번창하고 있어요. 내 육이 잘 되기 위해서 영을 당겨서 영으로 평소에 내가 지키는 육을 보호해주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이 본문을 보면서 우리가 시몬에 대해서 비난해야 돼요, 안 해야 돼요? 뭐 이따위 인간이 있느냐고 비난하고 싶지요. 그러면 당신은 이런 식으로 기도 안 하고 있느냐? 그러면 영을 봐야 되겠지요. 영으로 기도하는 것. 사도행전 9장 17절~19절,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뭐 같은 것이 벗겨집니까? 비늘 같은 것이 벗겨졌지요. 사울의 육이 벗겨진 거예요. 육이 벗겨진 그 상태가 뭐냐? 그게 바로 성령의 충만함이고, 그래서 사울은 밥도 안 먹고 살았어요? 아닙니다. 19절,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이젠 육을 위해서 영이 아니라 영을 위해서 불가능성을 위하여 사물화된 인간을 주께서는 사용하시는 겁니다.
이젠 성령 받았으니까 만날 금식하고 이래 사는 게 아니고 먹든지 마시든지 뭘 하는데 그것이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주님의 진리와 주께서 길을 트시고 주께서 진리 주시고 주께서 따먹을 수 없는 영생의 나무를 그 의미로 더불어서 우리에게 주었다, 이것을 증거하라고 주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20250606b 울산강의-역대기하(13강) 15장 8절 : 봐주지 않는다
(강의:이근호 목사)
첫째 시간 끝에 육을 제거해야 육을 벗겨야 영이 나온다. 얼굴 팩을 벗겨야 민낯이 나오지요. 마스크 벗겨버릴 때 나오는데 지금 역대하에서 아사 왕 때는 북쪽 이스라엘 말고 남쪽 나라에게 특별히 구스 백만 대군이 쳐들어와서 인간의 절망성, 산 채로 경험하는 죽음을 집단적으로 알게 했습니다.
그러면 북쪽 나라는 뭐냐? 이스라엘이 둘로 나눠지잖아요.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 북과 남으로 나줘지는 그것이 육에 의해서 그렇게 구분되는 것, 그것이 하나의 얼굴 팩이라면 벗겨버리면 진짜 하나님의 의미의 바탕은 북쪽도 아니고 남쪽도 아닌 하나로 통합이 되는 원래 하나님의 언약 백성 이스라엘로 돌아가는 그런 현상을 하나님께서 내다보면서 이 일을 하신 거예요.
여기 15장 9절에 보면, “또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를 모으고” 유다와 베냐민, 남쪽입니다. 그다음에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시므온 가운데서 나와서” 저거는 북쪽입니다. 이쪽 유다와 베냐민이 남한이라면 저쪽은 북쪽 이야기죠. 그다음에 9절 끝부분에, “아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고 아사에게로 돌아오는 자가 많았다” 이렇게 돼 있어요.
자, 함께했다고 했는데 “아사가 이 말 곧 선지자 오뎃의 예언을 듣고 마음을 강하게 하여”(8절) 아사 왕이 한 게 뭐냐,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했다, 오케이. 찾았다, 오케이. 하나님이 함께하고 찾았고 하나님을 만났다. 그래서 뭐? 어떤 특이한 현상을 보여줄 것이냐? 그런 것은 이렇게 간단한 문장으로 설명이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한다, 찾는다, 거한다, 만난다.’ 이것은 하나님의 행위 하심과 같은 행위를 보여줄 경우에만 이것이 가능해요. 이것이 말로만 함께한다, 찾는다, 만난다는 게 하나님의 행위 하심과 일하심과 같은 일함을 보여줄 경우에만 이렇게 함께한다, 찾는다, 거한다가 성립이 된다 이 말이에요.
같이 해놓고 카페에서 차만 마시겠습니까? 아니죠. 같이 움직여 가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도대체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느냐 하는 거죠. 하나님과 같은 행동을 보여줘야 그 왕의 그 백성이라고 같이 있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데 그럼 하나님은 평소에 무슨 일을 하셨는지 그게 몇 군데 찾아봐야 돼요.
신명기 17장 1절에서 7절, 2절부터 봐도 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어느 성중에서든지 너의 가운데 혹시 어떤 남자나 여자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그 언약을 어기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것에게 절하며 내가 명하지 아니한 일월성신에게 절한다 하자 혹이 그 일을 네게 고하므로 네가 듣거든 자세히 사실하여 볼찌니 만일 그 일과 말이 확실하여 이스라엘 중에 이런 가증한 일을 행함이 있으면”
5절부터 봅시다. “너는 그 악을 행한 남자나 여자를 네 성문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 남자나 여자를 쳐 죽이되 죽일 자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거로 죽일 것이요 한 사람의 증거로는 죽이지 말 것이며 이런 자를 죽임에는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댈찌니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의 중에 악을 제할찌니라”
뭐라고 합니까, 간단하게? 죽여라. 하나님의 언약이 원하는 것은 그냥 죽여라. 이게 하나님이 지금도 실시하고 있는 일이에요. 이걸 간단하게 한 문장으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주님의 일만을 드러내지 않는 자는 다 죽여라.’ 이게 주님의 일이에요. 같은 뜻인데 ‘주님의 일 외에 그 어떤 일도 주님은 인정하지 않는다.’ ‘무자비한 저주만 제공된다.’ 이게 주의 일입니다.
뭘 느껴요? 불가능성을 느끼죠. 주님이 희생하신 하나님의 복음 외에 딴 걸 이야기하고 딴 데 관심두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일체 저주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가차 없이 저주하라. 네가 이러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해서 할 수 있느냐를 주께 물으시는 거예요. 이걸 다섯 자로 이야기하면, ‘봐주기 없기’ 이게 유월절에 천사가 와서 모든 인간을 작살내기로 작심하고 그날 밤에 모든 장자는 다 죽여라. 이스라엘 백성의 장자도 죽였어요. 어린양을 대체했기 때문에 살았지 사실은 이스라엘 장자도 다 날아간 거예요.
이걸 우리가 그동안 관심 없었다는 말은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 없었다는 뜻이에요. 이걸 모르면 하나님에 대해서 모른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이 이렇게 일하는 걸 왜 모르느냐?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고 자기한테는 하자가 없고 문제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긍정이죠. ‘나 같이 훌륭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나 같이 착실한 가장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맨날 이러고 있어요. 저 사람들 나쁜 짓하지만 난 그동안 나쁜 짓한 적 없습니다, 이런 식이에요.
지금 하나님의 관심사는 하나님 자신의 일이에요. 우리 인간들끼리 키 재기해서 누가 착한지 그걸 따지는 분이 아니세요. 선악과 먹는 날에는 어떻게 된다? ‘정녕 죽으리라’를 그냥 확실하게 끝까지 밀어붙이는 거예요. 중간에 봐주고 그런 것 없어요. ‘내가 용서하지 않는 자를 네가 뭔데 용서를 해.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너도 같이 용서하지 마.’ 이게 주의 뜻입니다.
그것을 분명하게 한 것이 바로 이스라엘과 다른 민족과의 전쟁이었어요. 전쟁을 해서 여호와가 없는 여호와를 섬기지 않는 다른 민족에 대해서는 아예 어린아이까지 갓난아이까지 다 진멸해버려라. 다 죽여 버려라. 진멸이란 말은 조금 전까지 ‘엄마, 아빠’ 하고 있었는데 전쟁하고 난 뒤에 없어요. 왜? 죽었으니까. 있음이 없음으로 바뀌는 거예요. 있어도 그 있다는 자체가 하나님의 분노를 더 유발할 수밖에 없는 있음이기 때문에 그걸 내가 없앰으로서 내 속이 다 시원하다.
속이 다 시원하다는 말이 에스겔에 나와요. 내가 이스라엘에게 유다에게 저주를 퍼부으니까 내가 속이 다 시원하다. “이와 같이 내 노가 다한즉 그들에게 향한 분이 풀려서 내 마음이 시원하리라”(겔5:13) 어떤 사람은 하나님 뒤끝 있다 하는데 뒤끝 있는 정도가 아니죠. 에스겔 24장 13절에 보면, “내가 너를 정하게 하나 네가 정하여지지 아니하니 내가 네게 향한 분노를 풀기 전에는 네 더러움이 다시 정하여지지 아니하리라”고 돼 있어요.
그러니까 제가 ‘내가 속이 다 시원하다’는 이런 말씀을 제시한 이유는, 그동안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게 없으면서 자기는 하나님 믿는다고 우기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사는 게 아슬아슬하거든요. 인간은 사는 게 신기하게 느껴져야 돼요. ‘내가 왜 살아 있지? 하나님 저 왜 살려주십니까?’ 이렇게 질문돼야 되는데 살려만 주이소, 간절히 기도하고, ‘어떡합니까? 저 여인만 주신다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하는.
이렇게 하나님의 자기 일, 행위와 같지 않는 것은 다 진멸해버립니다. 이게 하나님의 전쟁인데 거기에 대해서 이제 악마도 만만치 않아요. 또 궁시렁거리는 거예요. 제가 지난 낮 설교에서는 악마 쪽에서 뭐라 한다고 했어요? 흥·칫·뽕. ‘너부터 구원해라. 자기도 구원 못하면서 뭘 남을 구원해.’ 조롱조로 하지요.
오늘 이 강의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인간 쪽에서 아주 조직적으로 체계적으로 여기에 대해서 대듭니다. 어떻게 대드는지 그 방법을 적어보겠어요. 인간 쪽에서 마귀 쪽에서 대드는 것도 우리가 알아야 돼요. 하나님에 대드는 세계 속에 우리가 지금 육신을 가지고 살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성경은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성경은 터무니없는 내용들이다.’ ‘성경 전체가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이게 인간 쪽에서 하나님에 대드는 방식이에요. 그래서 소위 성경을 많이 봤다는 유명인사들 유튜브에 보면 많이 나오죠. 그 유명인사들 공통점이 뭐냐 하면 같은 인간이 인간을 서로를 지켜주지 않으면, 모토가 그거에요. 인간이 인간을 안 지켜주면 누가 지켜주느냐. 이 땅에 종교는 있지만 신은 원래부터 없고 신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인간은 바로 같은 이웃을 돌봐주고 지켜주는 그 자가 인간다운 인간이다.
이게 무슨 이야기에요? 성경에 그런 것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왜 성경엔 안 나오지요? 성경 가지고 이야기하지 마. 성경은 모든 말이 터무니없기 때문에, 거짓이기 때문에. 성경 전체가 거짓이란 생각은, 왜 거짓이어야 되는데 한다면 이쪽 인간세계에서 하는 것은, ‘우리가 옳으니까 우리가 문제가 없으니까. 문제 해결자로 인간이 나섰지 언제 하나님이 해결한 적이 없어.’ 모든 어려움이 있으면 인간이 해결하는 거예요.
여러분 부엌에 파이프 고장 나면 누가 합니까? 하나님한테 기도합니까, 아니면 수리기사 부릅니까? 해결사 누구에요? 파이프 수리기사 부르잖아요. 그것 봐. 인간이 해결하잖아. 그러면 성경에서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은 어떤 배관공이나 아니면 에어컨 수리기사가 죽은 자를 살리나, 이렇게 하면 그들은 말합니다. 사람이 죽고 난 뒤엔 모르겠고, 이러고 끝나요.
지금 중요한 것은 핵심은 뭐냐? 살아 있을 동안에 어떻게 인간답게 사는가, 그게 중요하지 죽고 난 뒤에 어떻게 된다 하는 것은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아무도 모르는 거다. 모르는 이야기는 우리 공동체의 화평을 깨는 것이니 그런 이야기하지 말고 우리 아는 것만 이야기하자. 이렇게 대듭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 사람들 이야기 들어보니까 괜히 두렵다는 생각이 들어요, 안 그러면 나도 가끔 그런 마음 생겼는데 하는가요? 성경이 터무니없다는 것은, 성경은 고고학적으로 완벽하게 일치되지 않는다는 그 이야기입니다. 고고학이 뭡니까? 고고학은 눈으로 실제로 봐야 되겠다는 거예요. 예수란 자가 실존 인물인지 다윗이 실제로 있었는지 솔로몬이 있었는지 고고학적으로 유물이 나오기 전까지는 우린 안 믿겠다는 거예요.
인간 이성을 괜히 놔두느냐. 이성을 사용하라. 합리적 이성, 논리가 있는데 이걸 헛되이 방치하면 안 되고 그냥 믿습니다,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따지고 따져서 믿을만한 것만 추슬러서 카트에 담듯이 마트에서 물건 담듯이 내가 믿을만한 것만 담아서 갖고 오면 그 전체는 뭐냐? 나는 믿는 자가 된다는 거예요.
왜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느냐? ‘목사님, 성령 받은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인데 그 이야기는 안 해도 될 이야기잖아요’ 하는데 누가 압니까? 우리끼린 성령 받았는지. 안 그러면 다른 데서 딴 소리하니까 ‘그래 성경은 그냥 맹목적으로 믿는데 따지고 공부 해보니까 어떤 근거가 없잖아. 근거가 없는 것을 내가 무조건 믿는 것은 나한테 손실이 주어지는 게 아니고 내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잖아’ 이런 것이 지금은 그런 생각 안 나지만 한 사십오 년 몇 개월 뒤에 생길지 어떻게 알아요?
그리고 여러분은 안 그런데 결혼한 여러분의 자녀, 시집 안 간 딸, 여러분 친척들이 지 딴에 인문학 공부했다고 해서 과학 공부했다고 해서 ‘아재여 그게 성경이 다가 아닙니다’ 이래 나온다든지 또는 불도에 귀의한 친척 가운데 중 된 사람이, ‘다 그것도 언어의 조작입니다’ 이렇게 할 때 반박하고 싶은데 어떻게 반박하지, 이런 고민 같은 것 없을까요? 순간적으로 생겨나올 수 있지요.
그게 뭐냐 하면 Domain Wall 차원과 차원을 구분하는 벽 같은 거예요. 이거는 수학에서 함수가 나오잖아요. y=x², x에다가 2 넣으면 y=4 되고, 3 넣으면 9가 되고, 4 넣으면 16이 되고 이때 2, 3, 4를 그 차원에 해당되는 이걸 가지고 참여입력 값이라 해요. 그 입력 값의 모든 총집합을 그 차원에 해당되는 Domain Wall이라 합니다. Domain은 뭡니까? 인터넷 할 때 Domain 주소 있잖아요. 그 Domain 벽이라 해요.
점은 0차원이고, 선은 1차원이고, 면적은 2차원이고, 공간은 3차원이잖아요. 여러분 그걸 해보세요. 1차원과 2차원의 경계, 2차원과 3차원의 경계는 무엇으로 구성돼 있을까? 차원을 나눴다면 동일한 값으로 적용, 각자 차원의 내막에 통용되고 다른 차원에는 전혀 통용되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언어가 있는데 언어 사용이 그쪽 세계에서만 통용되고 이쪽 다른 차원에서는 전혀 무슨 뜻인지 모르는 이게 Domain Wall 차원의 벽에 의해서 이렇게 구분이 되는 겁니다.
아까 여기에 대한 해결책을 하겠어요. 육을 벗기면 뭐가 나온다? 영이 나오지요. 육을 벗기면 영이 나온다는 것은 신약성경에 보면 인간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이 나지 않으면 어느 나라를 못 가지요? 하나님 나라를 못 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육은 자체 내의 Domain Wall 그 차원의 공간에 갇혀있는 바가 돼요.
그런데 이 육 속에 누가 들어왔습니까? 주님이 들어왔지요. 주님이 들어왔으니까 아까 우리가 공부한 것처럼 주의 일이 뭡니까? 작살내는 거죠. 유월절 날 다 죽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오신 것은 죽어야 될 인간을 그냥 죽여 버리는 거예요, 전부 다. 뭐 봐주는 것 없어요. 인간의 일이기 때문에 다 죽이는 거예요. 주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다 죽이는 거예요. 저주고 심판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은 뭐냐? 천국은 주님의 일에 입력했던 그 총합이 천국이 되겠지요. 천국에는 주의 일에 의해서 생긴 결과들의 총합, 그게 천국이 되는 거예요. 그게 하나의 차원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세상에는 천국 말고 다른 세계가 있는데 그 세계가 뭡니까? 아이 알면서도…. 제가 묻습니다, 뭡니까? 지옥이죠. 여러분이 그걸 모를 리가 있어요. 아는데 문제는 제가 묻는 의의가 뭐냐 하면 천국과 지옥을 나누는 이 경계선, Domain Wall 차원을 가르는 벽, 이 경계선을 아시냐 이 말입니다. 주의 일이 뭐냐 하면 이 경계선을 드러내는 게 주의 일이에요.
‘성도란 상반된 두 가지 기준을 제시해야 된다.’ 교회에서 예배 마치고 사람들이 식사하면서 이야기할 때 상반된 두 가지 기준이 나옵니까? 상반된 두 개의 기준, 서로 배치되는 서로 건너갈 수 없는 서로 모순되는 두 개의 상반된 기준. 왜 기준이 나와야 되느냐? 성도 자체가 기준점에 서있기 때문이에요. Domain Wall이기 때문에, 벽이기 때문에. 그래서 성도는 성도 자신을 해명할 필요 없어요. 사이에 낀 존재라.
자, 의미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나님 보시기에 모든 의미와 뜻은 선악과와 생명나무 그 사이에서 모든 의미가 나오는 겁니다. 선악과와 생명나무 그 사이에서 의미가 나오기 때문에 여기 모든 의미는 상반된 두 개의 기준을 표현하게 돼 있어요. 이게 요한복음에 가득 나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낳기 때문에 하늘의 말을 하지만 너희는 땅에서 낳기 때문에 하늘의 일을 모른다.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요한일서도 숱하게 나오죠. 하늘에 속한 자는 하늘에 속한 말을 하고, 세상에 속한 자는 세상에 속한 말을 해서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은 하나님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알아듣지 못할 말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줘서 사이 존재, 틈에서 나온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 거예요. 분명히 둘 다를 이야기했는데 그쪽에서 못 알아듣는 거예요. 지옥은 이렇고 천국은 이렇습니다, 이야기해줘도 못 알아들어요.
여러분 시편 1편에 보면 복 있는 자는 날마다 율법을 묵상하지요. 율법을 묵상하니까 뭐가 나왔어요? 두 개의 결과가 나왔지요. 하나는 뭐냐? 의인들은 시냇가의 나무처럼 파릇파릇하고, 악인들은 뭘 이기지 못한다? 하나님의 저주의 심판을 이기지 못한다. 보세요. 상반된 두 개의 상황을 보여주잖아요. 그게 어떤 사람이다? 복 있는 사람이다. 이게 차원이 다르면 정말 생뚱맞은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제가 여러분한테 잠시 과제를 줄 테니까 이 과제를 어떻게 실행할 것인지 아이디어를 끄집어내 보세요. ‘공중에 선긋기’ 허공에 손가락으로 휘저으면 되는 겁니까? 뭐 있어야지. 공중에다 선을 어떻게 긋지요? 하나님의 방식은 뭐냐 하면, 인간 방식은 불가능하지요. 뭐 백지라고 A4용지라도 있어야 선을 그으면 선이 있잖아요. 그런데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인간의 3차원 공간에선 그것밖에 못해요. 면적에다 선 그어서 이쪽과 저쪽 구분하는 것. 그런데 주님은 공중에다 선을 그어버려요. 선 긋는 게 뭐냐? 전쟁입니다. 전쟁을 일으켜요.
전쟁을 일으킬 때에 이 아사 왕은 선지자, 오뎃의 아들 아사랴의 말대로 어떻게 했느냐 하면 역대하 15장 8절, “아사가 이 말 곧 선지자 오뎃의 예언을 듣고 마음을 강하게 하여 가증한 물건을 유다와 베냐민 온 땅에서 제하고 또 에브라임 산지에서 빼앗은 성읍들에서 제하고 또 여호와의 낭실 앞 여호와의 단을 중수하고” 그다음에 “소 칠백과 양 칠천으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고”(11절)
그다음에 16절에, “아사왕의 모친” 아사 왕의 모친이니까 누구 엄마입니까? 자기 엄마지요. 자기 엄마가 어떻게 했습니까? “아사왕의 모친 마아가가 아세라의 가증한 목상을 만들었으므로 아사가 그 태후의 위를 폐하고 그 우상을 찍고 빻아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으니 산당은 이스라엘 중에서 제하지 아니하였으나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온전하였더라” 자기 엄마의 권세 자리를 아들이 되어서 없애버렸어요.
이걸 무슨 자식이라 합니까? 호로 자식이라 하지요. 어디에서? 3차원 Domain Wall 아래에서는 호로 자식이에요. 이거는 아들로서 기본도 안 됐다 해요. 예수님 따르는 제자가 그때 하필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내가 장례 치루고 가겠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예수님 하신 말씀이 참 섭섭한 말을 했어요.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례 치루고 너는 산 쪽으로 와야지 왜 죽은 자 관습을 따르고자 하느냐? 너는 나와.’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거는 공중에다 선긋기와 똑같아요. 우리는 그럴 수 없어요. 그런데 아사 왕은 했어요. 아사 왕은 뭘 듣고 했나? 여기 보면 마음을 강하게 했다는 말을 했잖아요. “아사가 이 말 곧 선지자 오뎃의 예언을 듣고 마음을 강하게 하여 가증한 물건을 유다와 베냐민 온 땅에서 제하고”(8절) 했다는데, 이것 설명이 필요해요.
지금 유다+베냐민, 지파가 몇 개입니까? 두 개지요. 이렇게 아사 왕과 하나님이 함께 있는 걸 보고 누가 왔다 했느냐 하면 북쪽에 열 지파 중에서 같이 참여한 사람이 생긴 거예요. 그러니까 공중의 선긋기란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거예요. 어렵지 않지요. 본래의 자리로.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이 왜 갈라졌습니까? 갈라진 이유가 약속의 땅에 대한 탐욕, 지난 수요일에 이야기한 인간의 자의식, 소유, ‘이건 내 땅이다. 내가 너희들과 같이 놀 필요 없다. 우리 땅이야’ 소유가 있는 거예요. 내 것이. 자기가 사물화 되었으니까. 인간이 그어놓은 선을 하나님께서 없애버리는 방법은 원래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과 인간 사이에 그어져 있는 선을 주께선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그럼 선은 어디 있습니까?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세상 나라가 아니고 하늘나라와 그리고 안쪽의 이스라엘 사이의 그 관계를 주께선 명쾌하게 보여주는 거예요. 이래선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지요. 그래서 역대하 11장 16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 마음을 오로지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이 레위 사람을 따라 예루살렘에 이르러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고자 한지라”
자, 이 사람들은 만약에 다른 육적인 사람이 볼 때에 정신 나간 미친 사람이에요. 우선 자기 몸 하나, 몸이란 사물이죠. 자기 사물 챙기는 것이 우선순위지 보이지 않는 막연하기 짝이 없는 모호한 존재,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하나님을 섬긴다는 그것이 자기 몸보다 우선순위가 되어서 북쪽에 있던 그들이 남쪽에 성전이 있으니까 왔다. 이게 미친 사람처럼 보이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에 끌린다 이 말이에요. 나의 자존심에 끌리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에 끌리면 그거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이사야 14장 1절, “여호와께서 야곱을 긍휼히 여기시며 이스라엘을 다시 택하여 자기 고토에 두시리니 나그네 된 자가 야곱 족속에게 가입되어 그들과 연합할 것이며 민족들이 그들을 데리고 그들의 본토에 돌아오리니 이스라엘 족속이 여호와의 땅에서 그들을 얻어 노비를 삼겠고” 이렇게 돼 있어요. 시작을 유다 나라를 회복해서 유다 나라부터 시작해서 어디까지? 전체 이스라엘을 다시 원래 잃어버렸던 그때 이스라엘로 되돌리는 작업을 주께서 하시는 거예요. 좀 귀찮지만 두 군데만 더 찾아보겠습니다.
시편 76편 1절, “하나님이 유다에 알린바 되셨으며 그 이름은 이스라엘에 크시도다 그 장막이 또한 살렘에 있음이여 그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 그 처소는 이미 한 곳에 딱 정해져 있지요. 그건 어딥니까? 북쪽 이스라엘 아니고 남쪽 시온에 있다는 거예요. 끝으로 하나만 더 찾아보겠습니다. 시편 78편 67절에서 69절, 저는 이 대목 볼 때마다 참 신기하게 느껴져요. 여러분도 어떻게 신기한지 보세요.
“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시고 그 성소를 산의 높음 같이, 영원히 두신 땅 같이 지으셨으며” 이렇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북쪽 이스라엘은 거기 살더라도 하나님은 그 사는 땅을 하나님이 계시는 땅으로 나는 너희들이 어떻게 생활하든 관계없이 나는 일체 부정한다 이 말이에요.
너는 지금 어느 공간에 있느냐? 사람들은 이걸 생각하면, ‘내가 여기 있습니다’ 하지요. 네가 있는 것 말고 너는 지금 어느 공간에 있느냐? 네가 있는 것, 그거는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어느 공간에 네가 살고 있느냐? ‘하나님의 장막 또는 하나님의 성산에 있는 곳에 제가 있습니다.’ 이렇게 될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이미 하나님이 확정한, 시온에 있다고 했던 하나님이 유다를 택했다 했잖아요. 그 택함에 자기 자신이 선택한 모든 것을 부정하는 태도에요.
내가 내 인생을 어떻게 해보겠다는 그 모든 시도는 주님이 시온을 택했을 때부터 우리는 의미가 없어요, 시간이 없어요, 그런 것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난 인생 이렇게 살았습니다. 나한테 제발 그런 소리하지 말라’에요. ‘네가 지금 어느 공간에 있느냐’에요. 주께서 함께 있는 공간에 있느냐, 아니면 네가 따로 조성한 네가 꾸려나가는 네 인생이란 공간에 머물러 살고 있느냐, 이 말이에요.
그걸 왜 물어야 되는가? 그걸 물어야 최우선 관심사가 어디 있는가를 노출할 것 아니겠습니까. 인간은 제 정신으로 살면 자기를 못 벗어나요. 그런데 미친 인간은 내가 나를 꾸리겠다는 포기했을 경우에는 그것은 주께서 친히 마련하신 공간에 내가 소속된 경우에만 그게 성립이 되는 거예요.
지금 아사 왕이 유다 나라를 뭐로 바꾸느냐 하면 성산으로 바꾸는 거예요. 하나님이 계시는 공간으로. 왜? 하나님의 예언자가 나타나서 그 예언에 의해서 확정된, 영원성이죠. 영원성이 고정된 곳으로 유다가 하나님의 영원한 영원성이 보장된 곳으로 만들었거든요. 이걸 아까 뭐냐 하면 아사 왕이 어떻게 됐다? 마음이 강하게 된다. 흔들림이 없다.
사람이 자기가 인생을 꾸려나가면 늘 초조하고 불안해요. 지금까지 잘 버텼는데 또 우리 가정에 우환이나 앞으로 어려운 일이 생기면 난 우짜노, 이런 거예요. 항상 놀랄 준비를 하고 있어요, 인간은. 인간은 항상 좌절할 준비를 하고 있어요. 만약 이런 사태가 일어나면 난 어디로 피하지? 불안과 두려움 속에 떨 준비를 하고 있어요, 인간은. 강하질 않아요.
그것은 내가 만든 공간을 유일한 공간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요. 주께서 선택한 공간에 있지 않고 내가 그동안 악을 써가면서 집념을 다하여 충성을 다하여 만들어낸 내 인생이란 공간, 이게 너무나 귀하고 아까워서 누가 이것을 흠집낼까봐 이것을 없앨까봐 늘 노심초사 걱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정월대보름 달뜨는데 가서 빌잖아요. 또 신정 때 해돋이 보면서 그렇고. 비는 내용은 딱 정해져 있지요. 무슨 내용입니까? “그저 내 것에 손 타지 않게 하옵소서.” 얼마나 불안했으면 안정을 위해서 기도하겠어요. 그거는 나약한 거예요. 강한 게 아니에요. 벌써 망하는 사태를 미리 안다는 것은 이거는 부실공사, 꼭 북한 평양의 아파트 같아. 지으면 무너지고 지으면 무너지고. 구축함도 마찬가지고.
이게 바로 아사 왕이 구약을 통해서 잠시 보여준 하나님이 친히 마련한 공간에 속한 함께 거하고 함께 찾았던 사람, 그것은 주님이 하신 일에 전적 공감하면서 같은 일을 하면 되는 거죠. 그때 같은 일을 하려면 초조와 불안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인 고로 내가 주제넘게 ‘하나님 이러면 망합니다, 이러면 안 되게 돼 있어요’ 그런 말을 삽입시킬 이유가 없다니까요. 주의 일에 함께해야 그게 함께하는 거예요.
주의 일은 뭐라 했습니까? 자기의 언약 외에는 주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는 일체 봐주는 것 없기. 오늘 제목을 ‘봐주기 없기’ 일체 안 봐줍니다. 뭐 봐줄 건더기가 있어야지요. 이제 남은 시간 동안 신약에 와서 천국이 어떻게 아사 왕의 예언이 구현이 되는지 소개해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어떻게 구현되는가?
인간이 개재되지 않으면, 들어가지 아니하면 천국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천국 만들기 불가능하죠. 그렇다고 인간이 필요 없는 게 아니고 인간을 집어넣고 천국을 만들어요. 그 증거가 마태복음 20장갑니다. 1절에 제일 먼저 나오는 단어가 뭡니까? “천국은” 이렇게 돼 있지요. 궁금하지 않습니까? ‘자, 천국 설명해줄게. 잘 들어’ 할 때 이걸 궁금해 하면서 들어야 돼요. 천국은, 이러면 우리는 얼마나 화려합니까? 천국 얼마나 살기 좋습니까? 살기 좋으면 마음껏 영광 돌리겠습니다, 했지요.
여러분 낙원이 그렇게 살기 싫은 동네였어요? 에덴동산이 그렇게 부패한 동네였습니까? 아니죠. 낙원이란 말이 뭔 뜻이에요? 모자람이 없이 즐거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게 에덴동산이었어요. 환경 좋으니까 아담이 하와가 어떻게 죄 안 지었어요? 죄 지었잖아요. 천국을 할 때 얼마나 살기 좋습니까, 얼마나 행복이 늘어집니까,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자꾸 그것부터 넘본다는 자체가 우리가 인간이 마음이 망가졌다는 거예요. 이미 하자 있고 문제 있고 오류가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넙죽 천국에 대한 그러한 욕구와 욕망이 발생되는 거예요.
천국 설교하게 되면 중간은 하나도 안 듣고 마지막에 얼마나 살기 좋은데 내가 갈 수 있느냐, 그것만 여부를 따지는데 주님께선 이렇게 해요. 천국은 해놓고 16절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이게 천국입니다. 이걸 가지고 이렇게 해도 돼요. 인간이 개재, 개재란 들어가는 거죠. 인간이 개입되지 아니한 천국은 안 만들어진다.
그러면 하늘나라 천국보다도 주님이 인간이잖아요. 주님이 인간으로 오셨잖아요. 주님이 개입해서 주변에 만들어진 천국은 기존에 화려한 천국을 원했던 유대인들한테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되고 상상도 못한 천국이었습니다. ‘뭐 이런 천국이 다 있어. 우리가 생각한 천국과 너무 달라.’ 그거는 Domain Wall 때문에 차원이 다른 벽 속에 갇혀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노골적으로 인간이 개재되어서 천국이 이뤄진다면 그럼 그 천국은 어디 나오느냐? 마태복음 25장 1절, “그때에 천국은” 천국 가면 살기 좋은 것 설명하게 되면, ‘야 들어가고 싶습니다. 예수 믿고자 합니다’ 이렇게 나와야 되는데,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천국은 뭐와 같다? 앞에 다 생략하면 뭡니까? ‘신랑은 열 처녀와 같으니’
천국은 열 처녀와 같으니, 마태복음 20장에서 천국은 포도원에 간 네 종류, 10시, 12시, 오후 3시, 오후 5시 이렇게 보냈지요. 네 부류의 인간들과 같으니. 어떻게 같단 말입니까?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 이게 마태복음 20장의 천국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천국은 열 처녀와 같으니, 어떻게 돼요? 여러분 다 알잖아요. 열 처녀가 어떻게 됩니까? 중간에 두 동강나지요. 5와 5. 5는 천국 가고 5는 어디 갑니까? 지옥 가지요.
천국은 지옥을 동시에 만들어요. 천국 만들면 없던 지옥이 만들어져요. 인간이 생각한 지옥은 지옥이 아니고 마귀가 만든 거예요. 염라대왕이 있어서 패는 것 있잖아요.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 천국 그것 마귀가 만든 거예요. 그 생각하면 참 안타까워요. 우리나라에서 피아노 잘 치는 임윤찬 있지요. 임윤찬이 단테를 거의 다 외웠다는 거예요. 그래서 한국가톨릭에서는 임윤찬한테 장한 가톨릭인 상을 줬어요.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은 그냥 깔때기 모양으로 돼 있어요. 어떤 죄를 지으면 1년 받고, 어떤 죄는 이렇게 하고 돼 있어요. 천국을 인간이 모르듯이 지옥도 몰라요. 왜? 인간은 본인을 몰라요. 본인을 모르는 상태에서 내가 끄집어내는 천국과 지옥은 모조리 다 가짜입니다. 그러면 천국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신랑이 와서 결정해요.
여기 열 처녀의 공통점이 있어요. 열 명 다 딴 짓하고 있었습니까? 열 명 다 누굴 기다렸어요? 신랑을 기다렸지요. 그럼 열 명이 신랑을 기다렸으면 성의를 봐서라도 하나님께서 열 명 다 줘야 되지 않습니까? 왜 열 명 가운데 다섯 명을 잘라냅니까? 거기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간단해요. 천국은 내 마음대로다. 기름 준비한 처녀가 네 명 올 때 안 왔어요. 세 명 올 때도 안 옵니다. 다섯 명 올 때 확 들이닥쳐 버리죠.
오류 있는 인간이 생각한 천국, 지옥을 완전히 무산시키는 방식으로 천국과 지옥이 와요. 그래야 육이라는 Domain Wall 인간의 육의 한계를 넘어서는 다른 주님의 세계가 쳐들어오게 되면 내가 생각했던 상상했던 천국, 지옥이 이게 다 나의 오류 있는 나에 대한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하는 방식으로 천국과 지옥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 보면 뭐냐? 마음을 강하게 하는 거예요. 그걸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이겁니다. 미쳤다! 사도 바울보고 미쳤다 하잖아요. 미친 게 얼마나 감사한지,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일로 인하여 마땅히 저주받아야 되고 심판 되어야 되는데 왜 이렇게 주께서 나타나주셔서 저희들로 하여금 진짜 예수님, 진짜 천국과 지옥을 알게 하시니 저희들 남은 인생이 주께서 구성해놓은 인생뿐인 것을 기쁘고 감사하고 고맙게 여기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