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마음
2025년 7월 6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42:1-4
42:1 이에 모든 군대의 장관과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호사야의 아들 여사냐와 백성의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아와
42:2 선지가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고 이 남아 있는 모든 자를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소서 당신이 목도하시거니와 우리는 많은 중에서 조금만 남았사오니
42:3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의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이시기를 원하나이다
42:4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말을 들었은즉 너희 말대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고 무릇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시는 것을 숨김이 없이 너희에게 고하리라
바벨론에 끌려가지 않고 남은 자들 가운데 유력한 자들이 군사 쿠데타 이후 정국에 불안하고 염려스러워서 예레미야를 찾아옵니다. 바벨론 총독을 죽인 그 후유증으로 바벨론쪽에서 맹렬한 보복이 들어오는 것이 두려웠던 겁니다. 사태가 급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동정심을 유발하는 태도를 가지고, 그리고 낮은 자세를 취하고서는 하나님편에 서 있다고 간주되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찾아옵니다. 예레미야가 일종의 용한 점쟁이처럼 간주되는 겁니다. 반드시 바벨론에 점령당한다는 것을 예언한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동정심을 받을 만한 요인으로서 다음과 같이 언급합니다.
“당신이 목도하시거니와 우리는 많은 중에서 조금만 남았사오니”(렘 42:2) 그 다음에, 예레미야 하나님께서 들었다면 솔깃한 발언을 날립니다. “우리가 당신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보냄은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고 좋지 아니함을 물론하고 청종하려 함이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면 우리에게 복이 있으리이다”(렘 42:6)
상당히 납작 엎드린 자세처럼 보이지요? 이게 다 가짜입니다. 참으로 인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할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이미 인간들은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자신들이 최종 판단자로 행세하기에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도 자신에게 불리하거나 손해되는 것에는 단호하게 반발합니다.
바로 이런 것이 반(反)-천국적인 태도입니다. 천국을 반대하는 심보가 인간들의 마음을 충분히게 채우고 있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해 적대적 심성이 형성되어 있는 이유는 하나님에 대해서 줄곧 불만을 품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남은 백성들은 예레미야을 통해서 장래 자신의 처신에 참고로 할만한 이야기를 듣고자 합니다.
하나님에게 나온다고 여기는 자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자기로부터 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뜻을 감안해보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습니다. 즉 어느 정도 보인이 결정한 뜻이 자기 안에 이미 들어 있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아무리 아부해도 소용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응답은 인간들이 거부할 만한 내용만을 미리 알려주시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이란 다름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죄를 들추어내시는 겁니다. 우리도 미처 몰랐던 우리의 죄를 말입니다. 인간들은 자꾸 자신의 본심을 감추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세상 살면서 창피스럽고 수치스럽게 살기 싫다는 겁니다. 가끔 늙으신 부모님들이 느닷없이 도시에 사는 자식들에게 다음과 같이 전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애야. 어젯밤에 꿈 자리가 사납더라. 너희들 별 문제없지? 오늘 바깥에 나갈 때 차 조심, 사람 조심하라”고 진지한 마음으로 당부합니다. 왜 이런 식으로 염려하는 겁니까? 그것은 평생을 자신이 부끄럽고 수치스럽지 않는 인생살기를 해 왔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은 이렇게 정리될 수 있습니다.
“내 것이 있다면 어떤 경우라도 그것을 지켜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 돌아가는 상황이 내 멋대로 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자 인간들은 이번에 하나님 붙들고 떼를 씁니다. 마치 점쟁이를 찾아온 고객들 모양, 자신의 앞길이 훤하게 잘 풀리기를 학수고대하면 좋은 점괘를 얻고 싶은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서 응답내린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 “또 말하기를 우리는 전쟁도 보이지 아니하며 나팔소리도 들리지 아니하며 식물의 핍절도 당치 아니하는 애굽 땅으로 결단코 들어가 거하리라 하면 잘못되리라 너희 유다의 남은 자여 이제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만일 애굽에 들어가서 거기 거하기로 고집하면
너희의 두려워하는 칼이 애굽 땅으로 따라가서 너희에게 미칠 것이요 너희의 두려워하는 기근이 애굽으로 급히 따라가서 너희에게 임하리니 너희가 거기서 죽을 것이라 무릇 애굽으로 들어가서 거기 우거하기로 고집하는 모든 사람은 이같이 되리니 곧 칼과 기근과 염병에 죽을 것인즉 내가 그들에게 내리는 재앙을 벗어나서 남을 자 없으리라”(렘 41:14-17)
즉 그 당시 남은 자들은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뜻을 물으려 왔지만 실은 자신의 뜻을 기어이 관철하고 싶은 마음을 여전했던 겁니다. 인간의 본성은 바로 자기 것으로 꽉찬 상태에서 수치와 칭피를 당하는 않는 삶이고 싶어합니다. 기적이 일어나서 자신의 삶이 호전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 믿는 백성들도 그런 생각을 하나님을 알까요?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사도행전 28:18-20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놓으려 하였으나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 못하여 가이사에게 호소함이요 내 민족을 송사하려는 것이 아니로라 이러하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노니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사도 바울은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건을 반복해서 체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 예수님을 사면하기 위해 가진 노력을 다했지만 유대인들이 극구 예수님을 죽이라고 합니다. 본디오 빌라도의 부인까지 남편을 강권해서 어떻게 해서 예수님을 풀어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본디오 발라도 흉악범까지 예수님과 나란히 놓고 백성보고 선택하라 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흉악범을 풀어달라고 합니다. 그토록 예수님을 밉게 보는 상황이 만들어진 겁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했지만 결국 죽임을 당하는 타이밍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주님 자신으로 채워지기에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당부하는 것은 자기 것으로 자기를 채우지 말고 제대로 텅 비워 놓은 채 살아가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고백이 나올 자리가 마련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사도는 왜 복음을 아는 삶이 부끄럽거나 창피스럽지 않는 걸까요? 그것이 진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현실을 아는 자는 더는 부끄러울 일이 없습니다. 그런 자신을 도리어 자랑스러울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것으로 살지 말고 주님 것으로 감사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61강-예레미야 42장 1~4절(텅 빈 마음)250706-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42장 1~4절입니다. 구약성경 1120페이지입니다.
“이에 모든 군대의 장관과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호사야의 아들 여사냐와 백성의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아와,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고 이 남아 있는 모든 자를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소서 당신이 목도하시거니와 우리는 많은 중에서 조금만 남았사오니,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의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이시기를 원하나이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말을 들었은즉 너희 말대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고 무릇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시는 것을 숨김이 없이 너희에게 고하리라”
4절까지 보았습니다. 1~3절까지 보게 되면, 백성들이 선지자의 말에 대해서 전적으로 순종하는 자세로, 경청하는 자세로, 고분고분 듣겠다는 마음의 결심을 가지고 나오지요. 이거 다 사기입니다. 다 엉터리예요. 심지어 그들이 어떤 말을 하느냐 하면, 42장 6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당신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보냄은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고 좋지 아니함을 물론하고 청종하려 함이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면 우리에게 복이 있으리이다”라고 말했어요. 좋든지 안 좋든지, 무조건 듣겠습니다. 이 말이 43장에 들어가게 되면, 바로 뒤집습니다. 예레미야는 몰라요. 자꾸 예레미야 닦달하고, 예레미야 멱살 쥐고 흔들 필요 없어요.
예레미야는 그냥, 단순하게 하나님께서 형편을 미리 아시니까, 그 아는 형편대로 미리 일러주는 거예요. 그래서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간청함을 듣고, 하나님으로부터 내용을 받고 전한 내용이 딱 하나였어요. 그 뒤에 42장 내용 다 읽어보면 딱 하나입니다. 그게 뭐냐. “애굽으로 가지 말라”(42:19)
그런데 이게 결정타입니다. 애굽으로 가지 말라는 말씀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미리 이야기했거든요. 그들은 뭐라고 다짐했느냐 하면, 당신에게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이 우리에게 좋게 들리든, 틀리게 들리든, 그건 개의치 않고 무조건 듣겠다고 해놓고, 하나님의 지시는 뭐냐. 애굽으로 가지 말라는 거예요. 그런데 어디에서 딱 걸리느냐 하면, 43장으로 들어가 보면 그들은 예레미야가 그들을 속인다고 이야기해요.
자,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듣겠다는 말은, 인간들은 말을 그렇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뭐냐, 너희들은 너희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대적하는, 그러니까 반(反) 천국이죠, 천국과 반대되고 너무나 언약과 약속과 반대되는 그러한 마음이 이미 들어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다는 말은,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응답은 이렇게 합니다.
“너희들이 미처 모르는 나에게 대드는 그 마음을 내가 콕 집어서 끄집어내 줄게” 이게 하나님의 뜻이에요. ‘하나님 듣겠습니다’ “치우고, 듣겠다는 거 다 치우고, 내가 너희에게 할 것은, 내게 대들고, 내게 반항하는 그 마음을 콕 집어 줄게” 선지자를 통해서 그 내용을 이야기하세요.
그러면 그들은 순종하겠다고 마음을 백번 다짐해도, 막상 자기가 숨겨놓은 마음이 콕 집히면, 선지자에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 43장 2절에 “예레미야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당신은 우리가 애굽으로 가고 싶은 것을 어떻게 알았지? 하나님의 응답이, 우리가 평소에 말은 하나님 뜻대로 하겠다고 해놓고는, 사실은 내 뜻이 따로 있는데, 그 뜻이 잘못되었다고 하나님께서 딱 응답으로 이야기해 버리니까, 그들은 예레미야를 붙들고 흔들 수밖에 없어요.
‘당신, 우리가 애굽으로 가고 싶은 마음을 당신이 눈치챘지?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빙자해서 우리에게 하지 말라고 하고 있지?’라고 지금 예레미야에게 닦달하는 거예요. 중간에 낀 선지자는 애~매합니다. 무슨 뜻을 알아요. 그냥 하나님의 뜻을 알고 전할 뿐인데, 하나님께서는 정말 귀신같이 인간들이 어떤 마음인지를 캐냈습니다.
사실은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그들은 어떤 결정을 내릴지 그들도 몰라요. 모르는데,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가지 말라고 하는 순간, 그들은 애굽으로 가고 싶은 거예요. 이게 인간의 마음이에요. 이것을 아~주 어렵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텅텅 비어있는데, 이 텅텅 빈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게 되면, 텅텅 비어있는 마음에서 그 말씀과 반대되는 성향의 마귀 생각이 그 빈 마음을 꽉 채워버립니다.
이게 인간의 마음입니다. 인간의 심정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의 심정은 말씀 안 보면 착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말씀 보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께 대드는 사람이 될 뿐입니다. 제가 울산에서 강의하면, 울산에서 저를 데려다주는 권사님이 있어요. 참 고마운 권사님인데, 권사님이 자기 남편 이야기를 해요. ‘나는 비록 교회는 안 나가지만, 당신 천국 갈 때, 당신 바짓가랑이 붙들고 가겠다’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가 차 뒷좌석에 앉아서 차마 이 이야기는 못하는데, 오늘 이 시간에 이야기합니다. 여러분들이 그 권사님이라면, 앞으로 이렇게 이야기하세요. ‘앞으로 반바지 입고 다니세요~’ 붙들 바짓가랑이 없도록 반바지 입고 다니세요. 그게 주께서 하시는 일이에요. ‘이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하면 그렇게 못 하게 막아버려요. 하나님의 뜻이.
‘내 힘으로 구원받겠습니다’라고 하지만, “하지마!!”라고 하세요. 왜요? 그걸 안 해야, 나는 애초에 천국 갈 쨉이 못 된다는 걸,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을 네가 알 것이 아니냐는 거죠. 천국은 어떤 인간도 갈 자격이 없어요. 예수님만이 들어가는 곳인데, 어디 인간이 감히 기웃거립니까. 못 들어갑니다. 못 들어가는데, 못 들어가기 때문에, 내 쪽에서 뭘 움직이고, 뭘 새롭게 개시하면 되는지의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구원받겠다고 뭘 시도하고 기도하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그걸 하나님께서 인간이 실시 하지 못하는 것을 응답으로 해 버려요. 인간은 자연적으로 강력하게 반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뭡니까? 하나님의 뜻이 뭡니까?...’라는 건 수백 번 들었던 이야기예요. 수백 번 들었던 이야기인데, 그 하나님의 뜻이라고 들어봤자, 제가 이야기해봤자 소용없습니다. 안 듣습니다.
이런 경우가 사도행전 28장 18~19절에도 그게 나오는데요,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놓으려 하였으나” 사도바울이 그 당시 유대인을 지배하는 로마인에게 재판받았는데, 로마의 판사는 나를 놓으려고 했으나, 19절 계속 보면,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못하여 가이사에게 호소함이요”
로마(이탈리아)에 재판받는데, 재판받는 시점이 하필 네로황제(로마 제국의 제5대 황제, 서기 54년부터 68년까지 재위)가 완전히 머리가 돌아가서, 모든 자기 죄를 예수 믿는 자에게 뒤집어씌우는 그 타이밍에 사도바울이 체포된 거예요. 타이밍 참 끝내주죠. 평소에 사도바울이 로마에 가면 잡힐 일도 없고, 사형당할 일도 없어요. 그냥 너희 종교 선포하는 것에 자유가 허락되거든요. 다민족국가니까.
그런데 네로 황제가 로마에 불 질러 놓고(서기 64년) 그 죄목을 예수 믿는 사람에게 뒤집어씌울 그 타이밍에 사도바울이 개입돼요. 이렇게 예수 믿는 사람을 무조건 잡아 죽이게 되는데, 거기에 걸려서 사도바울이 사형당하게 됩니다.(67년 참수형) 그러면 이야기를 다시 앞으로 봅시다.
로마인들이 유대에 있을 때, 로마까지 갈 것도 없이 유대에 있을 때, 로마 판사들이 이건 죄가 없다고 풀어주기로 했는데, 유대인들이 극심하게 반발하니까, 사도바울을 풀어주면 정치적으로 사회질서를 유지하는데 비용이 너무 많이 들게 되잖아요. 차라리 조용히 잡혀가는 게 예산이 적게 드니까, 죄도 없는데 죄 있다고 해버린 거예요. 군중들을 의식한 거예요.
여러분들이 아시지만, 빌라도가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얼마나 노력했습니까. 심지어 빌라도의 부인까지 들고 일어나서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꿈속에서 저 사람 때문에 애를 먹었다. 꿈이 사나우니까 당신은 재판할 때, 저 사람을 풀어줘’라고 아내 쪽에서 압력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본디오빌라도도 보니까 죄가 없어요. 종교적인 문제거든요.
이념의 문제 아닙니까. 요새로 하면 사상의 문제인데, 사상의 문제가 뭐 불 지르고 도둑질하고 그런 거 아니잖아요. 풀어주려고 했는데, 유대인들이 극도로 반대하니까, 본디오빌라도가 어쩔 수 없이 아주 극악한 살인강도, 정말로 너무 흉악한 강도를 예수님과 나란히 세워놓고 둘 중에 누가 풀려나길 원하는지 물어봤어요. 빌라도는 어떻게든 예수를 풀어주려고 나름 본인의 계략이 있었고 애를 썼는데, 유대인들이 강도를 풀어달라는 거예요.
예상도 못 했어요. 진짜, 본디오빌라도가 묻고 싶었을 거예요. ‘예수가 그렇게 밉나?’라고 묻고 싶었을 거예요. 유대인들은 뭐라고 했겠습니까? ‘강도보다 더 밉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아까 이야기한,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 속에 들어오게 되면, 인간은 자꾸 선악과 따먹고 착해지려고 하잖아요. 인간이 왜 착해지려고 하는지 이유가 있어요.
그건 선악에 의하면, 인간이 죄짓는 것은 창피스럽고 부끄러운 일이에요. 따라서 인간이 창피스럽고 부끄러운 일을 멀리하고 오히려 당당하고, 정당하고, 남에게 칭찬받는 그 삶을 선악 체제에 근거해서 그렇게 자기 인생을 꾸리고 싶은 겁니다.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을 자처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거예요. 행동할 때.
우리들의 일상이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일상에서 행동에 조심하라고 하는 것은, 늙은 부모가 사회에 나간 자식들에게 전화해서, ‘야, 어젯밤 꿈자리가 사납다. 조심해라. 꿈에 나타났는데, 내 꿈이 대략 맞데이. 조심해라’라고 이렇게 당부하는 이유는 어디에 가더라도, 나를 부끄럽게 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로마서 1장 16절에 사도바울이 고백하기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사도바울은 왜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지요. 자기 목숨이 간당간당한 가운데서도 왜 그렇지요? 그 이유는 이게 진짜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진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비슷한 예를 제가 2가지를 들겠습니다. 18살 먹은 청년에게 한 기자가 이런 질문을 했어요. ‘남들처럼 평범한 십 대를 보내지 못했는데, 좀 아쉬움이 없습니까?’라고 물었어요.
젊은 피아니스트예요. 그러니까 이 청년이 하는 말이, ‘제가 뭔가 그렇게 크게 잃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요. 그만큼 음악이 채워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감사합니다’ 자기가 이렇게 일찍부터 피아노를 친 것이 감사한 거죠. 기자가 또 물어요. ‘그렇다면 연주하면서 소원이 뭡니까?’라고 열여덟 살 청년에게 물으니까, ‘많은 사람이 내 연주를 보고 감동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두세 사람이라도 그중에서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완전히 사도바울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리고 ‘평소에 연주하는 마음 자세가 어떻습니까?’라고 물으니까, ‘나 자신을 버리고 음악을 섬기는 마음으로 연주하면, 이상적인 연주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하며 연주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어요. 이 열여덟 살 연주자 이름은 김세현입니다.
지난 5월에 프랑스에서 열린 롱 티보 국제콩쿠르(Long–Thibaud Competition)에서 너무 잘 쳐서 5관왕을 차지했고, 심사위원이 너무나 이 아이가 잘 쳐서 격차가 나니까, 아예 2등 상을 없애버렸어요. 독보적인 1등 상을 만든 아이입니다. 방금 이 젊은 피아니스트가 이야기한 것을 복음으로 대체해 보세요.
여러분 한평생 인생 조지는 거 후회하지 않습니까? ‘저는 청춘을 잃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복음이 나를 채워주기 때문에’ 이게 바로 로마서 16장에서 사도바울이 한 이야기예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는 이유는, 이 세상 사람들이 부끄러워하는 그 부끄러움과 질이 다르니까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의 인생은 예수님 같은 인생을 그냥 카피(copy)한다고 보면 됩니다.
분명히 10번이고 20번이고 빠져나올 수 있는데, 이상하게 하나님의 타이밍의 뜻이 나로 하여금, 기어이 체포되어서, 기어이 사형당하는 쪽으로 나를 밀어붙이고 있어요. 이것은 결코 내가 원하는 인생이 아닙니다. 반면에 세상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가 원하는 인생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쓰고 저항하고 반항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예레미야가 한 그 계시에 정답은 무엇인가. 정답은 이겁니다. ‘네 안에는 텅 비어있다’ 이게 물리학자들이 이야기한 거예요. 원래 사물을 점점 더 깊이 조사해 보니까, 원자핵과 전자가 너무 거리가 멀고, 너무 텅 비어있어요. 물질의 중심은 텅텅 비어있는 겁니다. 우리의 중심은 텅텅 비어있는 거예요.
텅텅 비어있는 것이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라고 요청하는 것은, 이 텅텅 빈 자리에 적그리스도, 천국에 반대하는, 하나님의 뜻에 반대하는 것이 꽉 채워있기 때문에, 자꾸 우리 마음이 꽉 차 있고 복잡해지는 겁니다. 사실은 텅텅 비어있는데. 그래서 오늘 예레미야 42장에서 전체를 읽어보면 나옵니다.
예레미야 42장에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사람들에게 전하라고 한 내용이 뭐냐 하면, 제가 대신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너희들은 바벨론에게 포로 잡히는데, 이걸 서럽게 생각하지 말고, 이걸 복이라 생각하고 다행이라 생각해라” 우리가 뭐 되겠다는 생각은 네가 하면 안 돼요. 왜? 너는 텅텅 비어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걸로, 그게 바벨론이 되었든, 누가 되었든, 채워지는 걸로 그냥 고맙다고 받아들이면 되는 거예요. 우리 인생은.
그래서 하나님이 계속 이야기해요. “너희들이 만약에 바벨론 통치가 싫다고 애굽으로 내려간다면, 그때는 내가 너희들 다 죽일 거야”라고 하시는 겁니다. 예레미야 42장 초반에, 예레미야에게 찾아와서 ‘하나님의 뜻이 뭡니까?’라고 꼭 무당에게 찾아가서, 앞으로 점괘가 어떻게 나올지 무당에게 물을 때, 그들이 스스로 동정을 받을만한 그런 모션을 취해요.
‘우리는 많은 사람이 있었는데, 몇 명 안 남았습니다. 좀 불쌍히 여겨주세요’라는 그런 동정표를 원하는 식으로 했지요. 그들은 자신이 뭔가, 자기가 원하는 식으로 자기 내부를 꽉 채워야 만족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뭐냐. “너희들은 꽉 채울 필요가 없고, 하나님이 주신 형편대로 그냥 채워지면 된다” 내 뜻은 어떻게 채우고, 내 요구는 어떻게 되는지를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제가 일부러 알아봤어요. 뭘 알아봤느냐 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하나님에게 관심도 없고, 하나님의 뜻, 예레미야고 이사야고 누구고 이런데 관심도 없잖아요. 인간이 관심 없을 때, 인간이 어디에 관심 있는가를 생각해 보고, 그 관심 있는 것을 지금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일일 매출이 450만 원 되는 다이소를 운영할 때, 돈이 얼마 드는가. 이걸 조사해 봤어요. 여러분 이해되죠? 이게 이해되는 이야기예요. 성경 말씀은 이해 안 되는데, 이건 이해되는 거예요. 우선 가맹점에 100만 평 같으면 2,860만 원 들고요, 100~150만 평 같으면 3,740만 원, 가맹비는 반환되지 않습니다. 보증금은 7,000만 원 들어가고요, 공사비용 4,400만 원이고요, 간판은 1,210만 원이고요, 사인물 440만 원, POS 2대 538만 원, 셀프계산대 388만 원입니다.
그리고 물건이 2만 5천 가지가 있는데, 다 들어갈 수는 없지만, 초도 상품 구입 금액이 1억 2,000만 원, 난방비 별도 4,000만 원 들어가고, 매장 임대차 보증금 1억, 합쳐서 5억 1천7백6십1만 원.(517,610,000)
하루 매출 490만 원. 아르바이트 직원 한 달에 288시간 사용하고 최저시급 들어가고요, 카드 수수료가 1.45%, 종합소득세 410만 원, 잡비 70만 원인데, 그렇게 해서 한 달 수입이 799만 원 나오는데, 거기서 재고조사 1년에 들어가는 게 물건 1개당 32.7원 들어가고요, 건강보험, 국민연금, 로열티 판매가 2%(273만 원), 월세 매출 6%(900만 원), 여기서 마진율(이익금의 비율)이 26.4%, 이렇게 계산해서 부부가 10시간 이상을 정신없이 하니까, 나오는 총순이익이 하루 450만 원해서 한 달 798만 원입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꽉 차 있는 거예요. 내부가 꽉 차 있어요. 인간은 그냥 꽉 차 있는 것이 아니고 내 것으로 꽉 차 있는 이 사고방식으로 예레미야에게 묻는 거예요. 우리 남아있는 이스라엘, 우리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점쟁이에게 묻듯이 찾아와서 하나님께 이야기한 겁니다. 하나님의 정답은 이겁니다. 네 속을 텅 비워놔라. 왜? 그 속은 내 뜻으로 채울 거니까.
그러니까, 이 말은 다이소 하지 말라는 겁니까? 아니고요, 제가 울산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어요. 감사하지 않거든 살지 마세요. 그러니까 울산 강의 듣는 교인들이 ‘그러면 죽으라는 이야기인가?’라고 들리니, 말을 바꿨어요. ‘감사하지 않거든 뭐든지 하지 마세요’라고 말을 바꿨어요. ‘살지 마세요’를. ‘감사하거든 하세요’라고 하니까 그제야 사람들이 안심되는 표정을 했어요.
다이소를 하든지, 뭘 하든지, 매 순간에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 것으로 손님들 오게 하고, 이 가게도 꾸몄다. 따라서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다이소 다 날아가고, 다 망한다고 할지라도 처음부터 내 것은 하나도 없다는 그것조차도 감사하시면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사도바울이 가는 길이고, 주님 가신 길이고,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이 어떤 것 하나 내 것이 없다는 마음으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그들, 이미 자기 것으로 꽉 찼습니다. 자기가 대단한 존재가 되면, 망하면 창피스럽고 수치스럽다는 비장한 각오로 살아가는 항상 긴장 되어있는, 자기방어에 철저한 이런 우리의 서글픈 모습을 주여, 감사함으로 바뀌어 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