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치료냐 구원이냐

아빠와 함께 2025. 6. 5. 08:23

치료냐 구원이냐 

2025년 6월 4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12:16-20

(12:16) 온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말을 왕이 듣지 아니함을 보고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뇨 이새의 아들에게서 업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라 다윗이여 이제 너는 네 집이나 돌아보라 하고 이스라엘이 그 장막으로 돌아가니라
(12:17) 그러나 유다 성읍들에 사는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르호보암이 그 왕이 되었더라
(12:18) 르호보암 왕이 역군의 감독 아도니람을 보내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저를 돌로 쳐 죽인지라 르호보암 왕이 급히 수레에 올라 예루살렘으로 도망하였더라
(12:19) 이에 이스라엘이 다윗의 집을 배반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렀더라
(12:20) 온 이스라엘이 여로보암의 돌아왔다 함을 듣고 보내어 저를 공회로 청하여다가 온 이스라엘의 왕을 삼았으니 유다 지파 외에는 다윗의 집을 좇는 자가 없으니라

나라가 두 조각 났습니다. 그렇게 조각난 나라를 다시 하나로 붙인다고 해서 원래 그 이스라엘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이스라엘을 가득 채운 요소가 없기에 나라가 둘로 쪼개진 겁니다. 둘 중 어느 쪽의 나라가 원래 이스라엘에 가까운가 하는 질문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둘 다 이스라엘이 아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이 쪼개지기 전에 이스라엘의 요소는 솔로몬의 기도에서 잘 나와 있습니다. 열왕기상 3:6-10에 보면, “솔로몬이 가로되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저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예비하시고 오늘날과 같이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주의 빼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저희는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종’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전체 이스라엘 백성이나 두 왕도 결코 이 ‘종’의 의식이 없습니다. 그냥 ‘자의식’에 충실합니다. 전체 백성들도 그러하고 두 왕도 그러합니다. 백성들도 르호보암에서 노역과 세금을 줄여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원로들은 백성의 종이 되어달라고 왕에게 당부합니다.

하지만 도리어 르호보암 왕은 백성이 자신의 종이 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아버지 솔로몬보다 더 강력한 자의식을 드러냅니다. 여기에 대해 대다수의 백성들은 맞받아치면서 자신들의 강한 자의식을 분명히 나타내면서 르호보암의 신하를 쳐죽였고 이 반응에 놀란 르호보암은 예루살렘으로 도방쳤다는 내용입니다.

자의식과 자의식의 충돌은 솔로몬에 드린 기도 내용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솔로몬이 드린 기도의 해설자로 자처하고 나서십니다. “이에 하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왕상 3:11)

이는 솔로몬을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께서 받아주셨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더는 솔로몬은 하나님 앞에서 자의식을 앞장 세우면서 이스라엘 왕 노릇을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말년에 솔로몬이 우상을 따라 갔을 때, 이는 자신의 자의식이 내부에서 건재함을 노출시킨 사례가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나라를 두 조각내어서 이도저도 제대로 된 본래의 이스라엘이 아님을 분명히 드러내십니다. 그렇다면 본래의 이스라엘은 어떤 본질로 채워져야 할까요? 그점은 로마서 9:15-18에 나옵니다. “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이스라엘은 오로지 긍휼로만 채워집니다. 반면에 애굽의 바로왕은 강퍅으로 채워집니다. 강퍅한 자의식의 세력권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이란 ‘빼 내주시는 것’, ‘건져 두시는 것’입니다. 반면에 나의 자의식으로 그대로 두고 보다 온전한 자의식을 염원하는 것은 ‘치료’입니다.

선악과를 이미 따먹은 인간들로서의 구원은 모르고 치료를 원하게 됩니다. 즉 선악과 따먹은 자아의 상태가 생명나무 과일 없이도 완전하기를 원하는 겁니다. 스스로 자의식이 절대화되는 것을 목표로 살아가고자 합니다. 이것은 결코 ‘종 의식’이 아니라 종이란 주인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지시내리고 그 지시내린 것을 자신이 실천에 옮기는 것은 늘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리게 됩니다. 가룟 유다의 예가 그러합니다. 스승을 팔아넘긴 자기 행동에 대해서 자의식을 자기에게 협박하고 위협합니다. “어떻게 스승을 죽도록 팔아넘길 수 있어? 그렇게 살면 망해!”라고 말입니다.

결국 가룟 유다는 자기 치료에 실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둘로 쪼개지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마치 공부를 하게 되면 할머니에게 이미 500원을 받게 되어 있는 손자가 국어 공부가 부족했을 때, 할머니가 500원에서 200원 까고 300원만 주는 것과 같습니다. 신약 에베소서 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피부터 주십니다. 이게 사랑과 긍휼이 다 담겨있는 방식입니다.

그래놓고서는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자의식을 분질러 버립니다. 쪼개버립니다. 마치 딱딱한 막대기를 쪼개듯이 말입니다. 바로 이점을 스가랴 11:14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또 연락이라 하는 둘째 막대기를 잘랐으니 이는 유다와 이스라엘 형제의 의를 끊으려 함이었느니라”

하지만 에스겔 37:16-17에서는 “인자야 너는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고 그 막대기들을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강한 자의식에 입각해서 치료를 원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취하시는 조치는 긍휼의 이스라엘을 새롭게 만듭니다. 그렇게 되면 참된 이스라엘은 쪼개진 자신들의 형편의 실정을 다 알게 됩니다. 인간이란 결코 선악과 따먹은 상태에서 생명나무를 못 따먹게 에덴에서 추방시킨 하나님의 조치의 합당함을 압니다.

성도는 이제 종으로 삽니다. 이 종의 원조는 예수님이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이 요소가 삽입된 상태가 곧 구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살든지 죽든지 모든 것이 주되시는 주님 소관에 해당됨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33강-열왕기상 12장 16-20절(치료냐 구원이냐) 250604-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12장 16-20절입니다.

열왕기상 12:16-20

“온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말을 왕이 듣지 아니함을 보고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뇨 이새의 아들에게서 업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라 다윗이여 이제 너는 네 집이나 돌아보라 하고 이스라엘이 그 장막으로 돌아가니라 그러나 유다 성읍들에 사는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르호보암이 그 왕이 되었더라 르호보암왕이 역군의 감독 아도니람을 보내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저를 돌로 쳐 죽인지라 르호보암왕이 급히 수레에 올라 예루살렘으로 도망하였더라 이에 이스라엘이 다윗의 집을 배반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렀더라 온 이스라엘이 여로보암의 돌아왔다 함을 듣고 보내어 저를 공회로 청하여다가 온 이스라엘의 왕을 삼았으니 유다 지파 외에는 다윗의 집을 좇는 자가 없으니라.”

이스라엘 나라가 둘로 쪼개지게 되면 그 쪼개진 두 나라 양쪽 다 원래 이스라엘 아닙니다. 하나가 쪼개져서 둘이 되면 각자 하나하나가 이미 변질되었기 때문에 그 둘을 하나로 합친다고 해서 예전의 이스라엘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나라가 둘로 쪼개졌습니다. 둘로 쪼개져서는 안 되는 나라인데 이게 쪼개졌다면 그다음에 나오는 질문은 이거예요. ‘누가 이스라엘을 둘로 쪼갰느냐? 쪼개지면 안 되는데 왜 쪼개졌을까? 누가 잘못했을까? 누가 원인이 되었을까?’ 이 문제를 생각해야 되겠지요.

쪼개지기 직전의 그 이스라엘 나라는 솔로몬이 왕으로 있던 나라였습니다. 그러면 솔로몬 때는 왜 나라가 안 쪼개졌는가? 솔로몬 왕은 백성들과 관련되기 전에 하나님과 관련을 지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열왕기상에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솔로몬의 기도 내용이 뭐냐? ‘백성들의 수가 너무 많으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제대로 재판할 수가 없으니 저에게 지혜를 주셔서 하나님의 지혜로만 지배되고 통치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있도록 종으로서 역할을 다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3장 7-9절에 분명히 솔로몬이 기도하기를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줄을 알지 못하고 주의 빼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저희는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이 여기서 자기를 하나님의 종으로 생각했어요. 솔로몬에 이어서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을 때 열왕기상 12장 6절에 이렇게 묻습니다. “르호보암왕이 그 부친 솔로몬의 생전에 그 앞에 모셨던 노인들과 의논하여 가로되 너희는 어떻게 교도하여 이 백성에게 대답하게 하겠느뇨.” 원로들이 답변하기를 7절에 “대답하여 가로되 왕이 만일 오늘날 이 백성의 종이 되어 저희를 섬기고 좋은 말로 대답하여 이르시면 저희가 영영히 왕의 종이 되리이다.”라고 되어 있어요.

여기에 ‘백성의 종’이라고 되어 있고 또 솔로몬은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했어요. 그러면 나라가 깨지기 전에는 하나님 앞에서 왕은 어떤 입장인가? 하나님이 주인이 되고 자기는 그분의 종이 되는 종의 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종이라는 것이 뭐냐? 종이란 딴 게 아니에요. 그냥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종입니다.

지금 열왕기상 12장에서 이스라엘이 하나인데 어떻게 둘로 쪼개졌느냐의 그 책임추궁을 당할 때 우리가 ‘그것은 왕이 잘못했다.’ 또는 ‘솔로몬이 우상을 섬겼다.’ 이렇게 하는데 제가 자꾸 묻고 싶은 것은, ‘백성들은 온전했는가? 나라가 쪼개진 것에 대해서 백성들은 책임이 없는가?’

책임이 있어요. 책임이 있습니다. 왕이 하나님의 종이 된다면 그들도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해요. 종이라는 것은 이런 거예요. ‘나에게 주인이 있다. 내가 주인이 아니다.’ 내가 주인이 아닌 거예요. 나에게 주인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성도가 어떻게 살면 됩니까? 주인이 시키는대로 살면 돼요. 참 쉽지요.

만약에 주인이 없으면 누가 주인이 되느냐 하면 내가 주인이 되거든요. 내가 주인이 되면 그때부터 사는 게 재미가 없고, 사는 보람도 없어요. 자기가 자기에게 일을 맡기고, 자기가 자기에게 내린 그 지시와 명령을 본인이 힘들게 한다는 것, 결국 주인이 없다는 것, 주인이 맡긴 것이 없을 때는 어떤 식으로도 인간은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에덴동산 그 좋은 환경에서 인간이 추방된 이유가 딱 하나 있어요. 그것은 마귀와 결탁해서 ‘이젠 누구 말을 들을 필요도 없이 내가 신이 되었다. 내가 주인이 되었다.’라는 주인의식 때문에 추방된 겁니다. 사람들은 말해요. ‘내가 사는 것이 넉넉하고 만사 걱정 근심이 없으면 하나님 잘 섬길 것이다.’라고 생각해요.

그 자체가 천국에서 추방될 사고방식입니다. 천국이라 하는 것은, 내가 주인이 아닌 자들이 가는 곳이에요. 내가 주인이 된 자는 어디에 가느냐 하면 지옥 갑니다. 그러니 살아 있을 때 주인 만나야지요. 살아 있을 때 주인 만나는 거예요.

살아 있을 때 주인 만난 그 예가 요한복음 20장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도마라는 사람이 있는데 도마라는 그 사람이 예수님의 창 자국과 못 자국을 만지고 난 뒤에 하는 고백이 이거예요. 28절에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주인이라는 말이지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도마가 예수님을 보고 ‘나의 주인이시며 나의 하나님’이라 할 때 도마의 위치, 자기 자리는 어떻게 됩니까?

자기 자리는 주님 앞에 있어요. 자기가 주인공이 아닌 거예요. 그럴 때 예수님께서 “네가 참 복이 많다. 참 복이 있구나. 살아생전에 이런 복을 받다니.” 내가 주인을 만나서 졸지에 종이 되는 복을 받아야 해요. 이 복보다 더 큰 복이 없습니다. 내가 찍은 자가 대통령이 되는 이런 복은, 이것은 다 실망감만 줘요.

요한복음 20장 2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네가 본 것으로 네 주제파악을 했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보지 않고도 주제파악을 하는 날이 올 텐데 그때 복을 받을 자가 있다.’라는 거예요.

제가 여러분한테 설교 초반에 뭘 물어볼 테니 속으로만 답변해 보세요. 질문하고서 10초간 가만히 있을 거예요. “선악과를 따먹은 입장에서 생명나무 과실을 따 먹는 어떤 방안이 있습니까?” 땡, 시간 다 됐습니다. 왜 이 질문을 했느냐?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유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이제는 생명나무 못 따먹게 하기 위한 강력한 조치였던 거예요. 그 말은, ‘선악과를 따먹은 자는 두 번 다시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없다.’가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생명나무를 못 따먹으면 생명나무가 있는 그곳, 요한계시록 21, 22장의 그 생명나무가 있는 천국에 갈 수가 없’습니다.

이게 팩트에요. 이게 정리된 사태, 현실이에요. 우리가 선악과를 안 따먹었으면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가 있어요. 그런데 이미 선악과를 따먹은 입장이기 때문에, 이미 내가 나에게 주인공이기 때문에, 내가 나에게 주인인 이상 우리는 생명나무를 못 따먹습니다.

자, 그런데 제가 질문하기를 “못 따먹는다는 것은 알고 있는데 따먹을 수 있는 방법, 방안은 무엇인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90일간 관세를 유예한 것처럼 10초간 뜸을 들인 겁니다. 답은, 예수님 쪽에서 변화를 일으키시면 되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가 아무리 용을 쓰고 떼를 써도 선악과를 따먹은 입장이기 때문에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변할 수 없어요. 안 변해요. 그런데 하나님 쪽에서의 변화에 우리가 당하면 우리는 ‘이걸 왜 주십니까?’ 할 정도로 선악과 따먹은 자에게도 생명나무가 주어지는 겁니다. 제가 이 말을 왜 하느냐? 바로 이스라엘이 그렇게 만든 나라에요. 이스라엘은, 히브리인들이 단결해서 나라 만들자 해서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 쪽에서 움직였어요.

하나님 쪽에서 변화를 일으켜서 그 변화에 오롯이 잠식당한 상태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옴팍 그게 하나님의 긍휼하심이에요.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두 조각 나지 않습니다. 두 조각 나지 않는다고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나라가 두 조각 났어요.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다윗 족보 이제 치우고 우리끼리 나라 만들자” 해서 유다 지파 빼놓고 나머지 10지파는 그 이름도 이스라엘, 정통 이스라엘, 원조 신당동 떡볶이, 앞에 ‘원조’라고 붙이는 식이에요. ‘우리가 진짜 이스라엘이다. 유다 지파는 떨어져 나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 소수다. 우리가 이번에 투표해서 다수가 되었다. 무려 80퍼센트의 몰표를 받아 진짜 정통이 되었다.’ 해서 이름을 ‘이스라엘’로 지은 거예요.

나라가 둘이 되었습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나라가 두 조각 나면 어느 나라도 원래의 나라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칼로 쪼갠다고 해서 그 긍휼이 쪼개지는 법은 없어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게 원래 그런 겁니다.

긍휼이 쪼개져서 두 개의 긍휼이 생겼느냐? 그럴 일은 없어요. 그러니 이스라엘이 쪼개진 이상 둘 다 긍휼이 아니고 둘 다 저주인데 긍휼의 그 반대, 로마서 9장에서는 그걸 ‘강퍅’이라고 이야기했어요. 강퍅적인 나라 이스라엘이 두 개가 생긴 거예요. 중간에 긍휼은 없어져 버렸어요.

로마서 9장 15절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긍휼, 옴팍 긍휼로만 꽉 채워진 새로운 나라를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세운다는 것을 언급했어요. 로마서 9장 16절에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그 말씀 앞에 긍휼을 집어넣으세요. ‘긍휼이란 것은 원한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긍휼이란 것은 애쓴다고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 뜻이에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만 긍휼이 주어진다.

로마서 9장 17-18절에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여기에 긍휼의 반대말이 ‘강퍅’이라고 되어 있어요. 긍휼을 잊어버리면 그 명칭은 유다고 이스라엘이라도 그것은 애굽나라와 똑같이 된다는 겁니다. 강퍅한 자가 되는 거예요. 강퍅하다는 것은 긍휼이 없다는 거예요. 긍휼이 없는 나라. 긍휼이 없는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자기가 스스로 주인이 되는 나라에요.

자, 좀 더 깊이 있게 들어가 봅시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줘서 이스라엘 되게 해놓고 왜 이스라엘 나라가 두 조각이 나서 둘 다 전혀 이스라엘답지 않은 두 나라가 생기게 하셨는가?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이것이 중요하겠지요.

그 이유, 정답을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긍휼히 여겨요. 하나님 자신을 사랑합니다.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7).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을 구원하시는 거예요.

긍휼하신 하나님이 긍휼하신 아들을 긍휼히 여겨서 건져내신다는 말이지요. 그게 시발점이 되거든요. 열왕기상 12장에서 르호보암이 “내가 어떻게 통치하면 되겠는가?” 할 때 백성들이 말하기를 “왕의 부친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부친이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4절)라고 했어요.

백성들의 이러한 요구조건은 나라가 갈라지기 전에 전체 백성들이 한데 모였을 때 이구동성으로 일치된 마음에서 나왔던 요구사항이에요.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하는 백성들의 마음이 뭐냐? ‘새로운 왕이여, 우리를 좀 힘들게 하지 말아주세요.’라는 뜻이에요. 그 때는 아직 나라가 둘로 갈라지기 전이기 때문에.

이 백성들이 뭘 잃어버렸습니까?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잃어버렸어요. 이 백성들은 뭘 요구하느냐? 구원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치료를 요구해요, 치료. 자, 치료와 구원의 차이점이 뭐냐? 구원은 건져주는 거예요. 건져주는 것, 빠져나오게 하는 거예요. “너 거기 있지 말고 빠져나와.” 이거예요.

그런데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 같이 인간은 자기를 못 고칩니다. 선악과 따먹어서. 그래서 주님의 구원은 선악과 따먹은 그 인간을 선악과에 놀아나지 말고 이제는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에 놀아나는 사람으로 빼내 주는 것을 가지고 구원이라 해요.

그런데 치료는 내가 어디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고, 나의 아쉬운 점을 고쳐 달라는 것이 치료입니다. 치료는 내가 계속 나로 살겠다는 거예요. 나의 자의식으로. 내 자의식으로 살겠다고 버티는 것이 치료고, 구원은 내 자의식으로부터 예수님의 자의식으로 옮겨지는 것, 건져냄을 당하는 그것이 구원이에요.

여러분, 구원받고 싶어요, 치료받고 싶어요? 그냥 옛날의 그 나인데 괜찮은 나로 살고 싶습니까, 아니면 나와 헤어지고 싶어요? 내 자의식으로부터. 가룟 유다의 자의식은 우울증 걸렸어요. 왜냐하면 가룟 유다는 자기가 자기한테 협박하고 공갈을 쳤어요.

‘어떻게 스승님을 팔아먹냐, 이 인간아!’ 본인이 본인에게 협박을 했어요. ‘네가 그러고도 살 것 같아? 너 망해. 이러면 너 망한다고. 네가 책임져.’ 이게 우울증입니다. 내가 나한테 협박당하고 그런 나를 내가 감당 못 할 때 생기는 현상이 우울증이거든요.

우울증은 간단하게 말해서 내가 둘로 쪼개지기가 싫은 거예요. 나는 온전하고 싶어요. 온전하고 싶기에 나는 항상 뭘 원하는가? 항상 치료를 원해요. 누가 나 좀 멀쩡하게 고쳐줬으면 좋겠다, 이게 치료입니다. 이게 종의 의식입니까? 아닙니다. 이미 선악과 따먹은 주인 의식이에요. 치료하다 안 되니까 결국 ‘내 잘못은 내가 책임진다’ 해서 가룟 유다 자살했잖아요.

그래서 인간이 주인 없이, 누가 지시하는 것 없이 본인이 지시를 내리면 인생은 결국 재미 하나도 없고요, 아무리 넉넉한 생활과 풍족하고 진짜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에덴동산 속에 있더라도 그 사람은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내가 존재하는 의미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호빵을 둘로 쪼갭니다. 호빵 쪼개면 거기에서 앙꼬가 나와요. 주님께서는 이미 망가진 이스라엘, 긍휼이 없는 이스라엘을 새로운 이스라엘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의 딱딱한 기존의 그 이스라엘을 쪼갭니다.

그걸 가지고 스가랴에서는 막대기를 쪼갠다고 해요. 막대기를 쪼갤 때 인간들은 안 쪼개지려고 아주 발악을 해요. 쪼개지면 내가 망쳐진다고 생각하거든요. 쪼개지면 아파요. 여기 스가랴 11장에 보면 선지자가 두 개의 막대기를 준비해요. 하나는 ‘은총’이라는 막대기인데 ‘긍휼’이죠, 또 하나는 하나님과 서로 ‘연락’하는 막대기 그 두 개의 막대기를 준비해서 다 분질러버려요(슥 10:10, 14).

뚝뚝 끊어버립니다. “나 너희의 은총과는 관계가 없다. 우리하고 연락할 사이 아니잖아.” 다 끊어버려요. 쪼개버립니다. 딱딱한 막대기가 스스로 끊어지고 쪼개지지는 않아요. 외부에서 힘을 가해야 쪼개지거든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둘로 쪼개버렸어요. 그 쪼갠 이유가 솔로몬의 기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다시 열왕기상 3장 11절입니다. 솔로몬이 기도를 하는데 그 내용 중에 재밌는 것이 나오거든요. 아까 이야기한 대로 백성들에게 지혜를 달라고 기도했는데 이상한 것은 그 기도 내용에 대해서 주님께서 자처해서 해설자로 나서요. 해설자로 나서면서 솔로몬이 기도한 것에 대해서 너는 무엇을 기도 안 하고, 안 하고, 안 하고 그렇게 세 가지의 기도 하지 않은 것을 덧붙여요.

열왕기상 3장 11절에 “이에 하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오래 사는 것)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잘 사는 것)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이렇게 되어 있어요.

분명히 솔로몬 혼자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이 혼자 기도한 것이 아니고 거기에 해설자가 붙어서 기도한 걸로 그렇게 봐주시는 거예요. 이것은 뭐냐? 솔로몬이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둘이 있는 거예요. 마귀의 시험은 다른 게 아니에요. ‘네가 지금 주님과 같이 있느냐, 아니면 너 혼자 있느냐?’ 이걸 쑤시는 게 마귀의 시험이에요.

만약에 우리가 주님의 종으로서 시키는 대로 한다면,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해서 온다면 내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그것도 주께서 시킨 일이에요. 그러나 주께서 시키지도 않은 일을 내가 해버리면 마귀가 흔들어댈 때 우리는 어지럼증이 있어서 구토하고 난리도 아니죠.

내 문제인데 해결이 안 돼요. 치료가 안 되는 거예요. 치료가 안 되니까 자꾸 치료해 달라고 하는데 주께서 치료를 안 해줍니다. 구원을 해주죠. 네가 혼자 자립해서 사는 쪽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있는 곳으로 옮겨주는 거예요. 강퍅함에서, 오만함에서 긍휼 쪽으로 옮겨주는 겁니다.

이럴 때 누가 붙느냐?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딱 붙죠. 구약에서도 솔로몬에게 붙었습니다. 구약의 솔로몬이 여러분, 선지자에요. 아가서, 전도서, 잠언서가 다 선지자의 예언서입니다. 모든 선지자는요, 베드로전서 1장 10절에 보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이 함께 있다고 되어 있어요.


다윗도 예언자이기 때문에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장차 올 예수님의 영이 미리 함께 있었던 겁니다. 여러분같이. 여러분이 하는 것이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해설자로 붙어 있습니다.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라고 해설하는 그것을 어떻게 하느냐?’

마태복음 6장 30-31절에, 여러분 잘 아시는 거예요. 6장 31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 내용이 열왕기상 3장에서 솔로몬이, 자기가 어떻게 오래 사는지를 구하지 아니했다는 그 기도, 그 기도가 하나님 앞에 합당한 기도가 되고 그 해설자에 해당하는 주님께서 마태복음 6장 산상 설교에서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지 마라. 내가 친히 너를 길러주니까 네가 얼마나 오래 살고 또는 일찍 죽고 하는 것은 내 손에 달려 있기 때문에 혼자서 고민하고 걱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3가지를 기도했잖아요. 또 하나는 부유함, 부유함도 아까 이야기한 거예요. 들풀도 친히 기르신다는 거예요.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었지요. 마태복음 5장 44-45절에 보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솔로몬은, 자기 원수가 망하는 것을 기도하지 않았어요. 솔로몬이 기도한 내용이 한 마디로 뭐냐? 긍휼이에요 긍휼, 사랑이고 자비고. 네가 달음박질도 하지 않고 애쓰지도 않았는데 그냥 주는 거예요. 그냥 주는 이것, 바로 처음에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온전한 이스라엘로 형성했던 그 전체가 긍휼의 덩어리에요.

이제 남은 문제는 뭐냐? 이 백성들 그리고 두 명의 왕, 남쪽의 르호보암과 북쪽의 여로보암…, 남쪽의 김문수 북쪽의 이재명 이런 식이 되죠. 그리고 거기에 대한민국 모든 국민들의 공통점이 뭐냐? 모조리 다 자의식에 빠져서 치료되기를, 새로운 대통령이 나를 치료 해주기를 원하는 거예요. 구원이 아니고 치료받기를 원하는 거예요.

내가 잘났다는 것을 자랑하게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인을 만들어 달라는 겁니다. 세금 줄이고…, 그런 소리 하는 게 아니에요. 다 같이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하는데 선악과 따먹고 각자 자의식이 있어서 전부다 주인공 노릇을 하고 있는 거예요. 임금 보고 ‘우리의 종이 되면 우리도 종이 되어주겠습니다.” 백성들도 문제에요. 다 문제가 있어요.

그러면 이걸 어떻게 해결하느냐? 그 문제가 남아있죠? 아까 제가 스가랴의 막대기 이야기를 했잖아요. 어떻게 해결하느냐? 막대기를 붙이면 돼죠. 막대기 붙이면 되는 거예요. 끊어진 막대기 둘을 붙이면 돼요. 둘을 붙이는 게 에스겔 37장 15절부터 나옵니다.

16-17절에 “인자야 너는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고 그 막대기들을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이렇게 예언했어요.

여러분, 이게 참 복잡하게 느껴지지만 제가 간단하게, 너무 쉽게 말씀드릴 게 있어요. 예를 들겠습니다. 유치원에 다니는 손자에게 제 아내가 과외를 해요. 돈 받는 과외 아니고 돈 주는 과외, 공부 잘하면 500원을 주거든요. 일단 공부한다는 그 값으로 500원을 줘요. 그러니 손자는 신났지요. 500원 가지고 문방구에서 원하는 뽑기를 할 수 있는 권한이 생기니까.

500원을 딱 주고는 그다음에 어떻게 하는가? 만약 국어를 못 한다. 거기서 200원을 빼버려요. 이게 하나님의 방법이거든요. 그게 어디 나오냐 하면 에베소서 2장에 나옵니다. 에베소서 2장에 보면 예수님의 피로 이미 긍휼을 다 줬어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값없이 구원해 줘요.

값없이 구원 해놓고 그다음에 우상을 섬기잖아요? 그 긍휼을 빼버려요. 그럼 남는 게 뭐냐? ‘아하, 우리가 하나님의 값없는 긍휼을 잊어버렸구나.’ 우리가 애써서 백 점을 맞은 게 아니고, 수학 공부 잘하면 300원, 국어 공부 잘하면 200원, 합해서 500원을 따내는 게 아니고 그냥 일단 500원을 줘요.

일단 500원을 주는데 이건 값없이 준 거예요. 값없이 줘놓고 그 ‘값없음’이라는 가치를 계속해서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 속에 살게 만듭니다. 이 세상이 어떤 세상입니까? 긍휼이 안 통해요. 자기의 노력과 애씀과 똑똑함과 잘남으로, 각자 자기 자의식과 자의식의 충돌과 경쟁으로 유지되는 게 이 세상이에요. 그러고는 나머지 상처들은 ‘나 치료해달라’는 세상이에요. 이게 세상이에요.

그런데 손자가 국어를 잘 못 했어요. 그래서 생각했던 대로 하면 300원만 줘야 하는데 손자가 자기 구원 못 받는 것에 대해 아주 회개하고 통곡하면서…, 그럴 일이 있었겠습니까만 하여간 “내가 큰 죄를 지었습니다.” 할 때 네 빚진 것은 탕감해 준다는 식으로 해서 원래대로 500원을 줬습니다.

피에서 와서 피로 돌아가는 것. 모든 인간은 치료를 원하지 구원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최초로 구원받으신 분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주님께서는 예수님 자신을, 내 사랑하는 아들을 끝까지 사랑함으로써 처음으로 죽었다가 그 사랑의 힘으로 부활해 살게 해 주셨어요.

그런데 인간들은 이 사실도 모르고 가룟 유다부터 열두 제자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그러니까 예수님이 자신들을 치료 해줄 줄 알았어요. 말라기에 보면 ‘치료하는 광선’(4:2)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출애굽기 15장에 보면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출 15:26)이라는 구절이 나오니까 사람들은 교회 나올 때 구원받으러 가는 게 아니고 치료받으러 갔거든요.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치료라는 것은 애굽 요소를 이야기해요, 애굽 요소. 출애굽기 15장 26절에도 마찬가지지만 애굽 요소가 자꾸 끼는 거예요. 그렇게 끼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500원을 생각해야 하는데 ‘지금 200원 있으니까 조금 더 모으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500원을 내가 달성할 수 있다. 치료만 해준다면 200원, 여기에 치료를 받아서 300원 합쳐서 500원 되겠다.’ 이런 쪽으로 계속 가는 거예요. 그거 자체가 아직도 자의식이 유지되고 있으니까 그런데 자의식은 강퍅이에요. 선악과 따먹은 거예요.

문제 다시 내볼까요? ‘선악과 따먹은 자가 어떻게 생명나무 따먹을 수 있습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루트, 통로를 인정해 준 적이 없어요. 그냥 추방 대상이죠, 추방 대상입니다. 안 해줍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게 500원이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지금 내가 죽어있다는 자의식과 살아있다는 자의식에 대해서 내가 염려할 자격이 없어요. 그럴 권리가 없어요. 사나 죽으나 내 안에서 500원, 500원이 살아있으니까요.

그러나 현실 속에서 죽는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거예요. 죽는 사람도 안타깝지만 돌보는 사람도 안타까워요. 하지만 둘 다 자신의 어떤 괜찮은, 행복했던 시절에 대한 결핍을 느끼는 자의식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자의식을 어떻게 주께서 처리를 해주시는가? 이 말씀을 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내게 있는 이 자의식을 무슨 수로 어떻게 없애는가? ‘생명나무는 거저 주는 것이지 내가 노력해 얻는 것이 아닌데, 나는 치료를 원했지만 주께서는 구원을 해줘서 따먹을 수 없는 생명나무를 따먹게 해줬다’라는 이런 세계까지 어떻게 옮겨갈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해서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광주 근처 담양에 가면 거기 대나무 숲이 있어요. 제가 거기 한 번인가 두 번인가 가봤어요. 대나무들이 키가 커요. 내가 그 앞에 서니까 키가 작아졌어요. 그때 뭘 느꼈느냐? 난 뭐든지 내가 알아서 혼자 열심히 잘 살 수 있다는 자의식에 기준해서 ‘나는 열심히 살았으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지.’ 이런 생각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대나무에 둘러싸여 있을 때 ‘하나님께서 저한테 참 고마운 사람들을 내 어깨보다 높은 높이로 죽 둘러서게 해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거예요. ‘내가 저 사람을 고맙게 했다’는 것만 기억하지 ‘그 사람의 존재가 지금의 나를 긍휼과 사랑을 알게 하는 고마운 존재로, 상호작용으로 붙여줬다’라는 생각을 우리는 못하고 있잖아요. 내 강력한 자의식 때문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이 호빵을 쪼갭니다. 이스라엘을 일부러 쪼개서, 솔로몬도 우상 숭배했으니까 쪼갤만하죠, 그렇게 쪼개는데 아까 본 에스겔 37장에 보면 두 개의 막대기를 봉합할 때 누가 봉합하느냐?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된다.’ 해서 새로운 다윗의 자손 메시아가 와서 새로운 막대기를 준비해요.

이것은 이미 있던 것 두 개를 합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이름을, 새로운 막대기를 다윗이 준비한다고요. 쉽게 말해서 주님 안에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내가 만들었지!”하고 만들어 내는 거예요. 500원을 내는 거예요, 500백 원! 우리는 수학 300원, 국어 200원, 그게 아니고 아예 새로운 500원을 내는 겁니다.

그리고 그 500원,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의 가치를 위해서 이 자의식을 어떻게 하느냐? 우리 자의식을 다 쪼개버립니다. ‘하나님, 저 잘하고 있잖아요. 저 믿음 좋아요.’ 하면 쪼개버려요. 쪼개보면 우리가 몰랐던 내 자의식이 버티는 거예요. ‘나 쪼개지면 안 돼. 이러면 망해.’ 그러면 주님께서 “망하기는 누구 마음대로 망해? 넌 널 망하게 할 수 없어. 망하게 하든 말든 이건 내 소관이지 네가 죄짓는다고 네가 망하는 게 아니야. 네가 너에게 협박과 공갈을 하지 마.‘

망하고 안 망하고는요, 내 인생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에요. 망할 자, 강퍅케 할 자와 긍휼히 여길 자는 주님의 소관입니다. 주께서 구원을 그렇게 시작하신 거예요. 그분이 우리의 주인이 되는 거예요. 끝으로 이 말씀 읽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5절에서 권세자 이야기하고요, 26-27절에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절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러한 주님 성과의 결과물들이 되시면 돼요. 주님이 하시는 일을 존중하면 돼요. 내가 얼마나 철저하게 사느냐? 제발 그러지 마세요. 그건 자의식입니다. 우울증 걸려요. 그러지 마시고 주님 하신 결과물로, 주님은 500원, 주님 자체가 긍휼 자체인 것을!

혼자 살지 마시고 주님의 긍휼과 더불어 긍휼 안에서, 담양의 대나무 숲처럼 다른 사람들 그들이 있기에, 참 고마운 분들 때문에, 주께서 마련하신 긍휼 때문에 우리가 주님의 긍휼을 잊지 않고 살아감을, 그 모든 공로에 대해 주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최선을 다한다, 내가 할 도리 다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역량을 다 한다는 생각이 하나님의 긍휼을 가로막은 강퍅한 생각인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해주옵소서. 내가 남한테 고맙게 한 것만 기억되고, 남들이 나를 얼마나 고마운 존재로 만들었는지는 생각지 못하는 저희, 주님의 십자가 사랑의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긍휼을 알게 했다는 것을 잊지 않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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