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낮은 곳
2025년 5월 4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7:1-5
(37:1) 요시야의 아들 시드기야가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으니 이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그로 유다 땅의 왕을 삼음이었더라
(37:2) 그와 그 신하와 그 땅 백성이 여호와께서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을 듣지 아니하니라
(37:3) 시드기야 왕이 셀레먀의 아들 여후갈과 마아세야의 아들 제사장 스바냐를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보내어 청하되 너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라 하였으니
(37:4) 때에 예레미야가 갇히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 가운데 출입하는 중이었더라
(37:5) 바로의 군대가 애굽에서 나오매 예루살렘을 에워쌌던 갈대아인이 그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에서 떠났더라
흔히 사람들이 평화의 시기에 국가의 질서라는 것을 얼마나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는지 모르고 삽니다. 자기 삶 근처의 상황이 문제없으면 그것이 충분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국가는 우리가 지내는 그 어느 곳이든지 질서에서 나오는 권력이 작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한 몸만 편안하다고 해서 세상이 좋아진 것이 아닙니다.
유대의 왕이 원래대로 하면 여호야김의 아들 여호야긴이 되어야 할 텐데 삼촌인 시드기야가 왕이 됩니다. 하지만 일반 서민들 입장에서 누가 되든지 자신의 삶에 지장만 없다면 족하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예언은 다른 이야기를 하십니다. 유대나라의 존재는 정의가 살아있는 존재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정의, 곧 의로움이란 언약이 유다나라에 살아 있어야 합니다. 언약이 무시당하고 박해를 당한다면 아무리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들이 대만족하는 일상이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분노를 유발할 뿐입니다. 하지만 시드기야는 일절 여기에 대해서 무시합니다.
백성들에게도 다웟언약이 침해받는 것을 대단한 일로 여기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힘과 그것이 집중되는 권력의 효과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힘이 곧 진리요 정의입니다. 힘이 없는 것은 그 자체로 방치되는 것이 악이요 무질서로 간주합니다. 힘은 권력이 되고 그 권력은 체계적인 것이 되고 구조화됩니다.
따라서 힘에 의해서 구성되는 이 질서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곧 악으로 단정짓고 처벌내리고 반역죄로 다스림을 받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따로 힘과 질서 안에서 자체적으로 의롭다는 느낌을 받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힘이 있어야 정의가 된다면 우리는 힘써 내가 정의롭게 되는 힘을 모으는데 열중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세계적인 석학을 한국의 어느 대학에서 귀하게 영접해서 교수직을 안겨주었는데 그 대학의 입학생이 갈수록 줄어든다면 대학 당국에서 어쩔 수 없이 학과 통합에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남아 도는 교수들을 퇴직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자타가 공인하는 천재적인 이 교수의 자존심은 어떻게 될까요?
이 교수는 자체적으로 갖추고 있는 풍부한 지식이 힘이 되리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막상 현실에서 학생수가 교수가 가진 지적 권력의 가치를 모독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데학 당국에다 대고, “당신들은 불의하오!”라고 비난할 수 있습니까? 천재적인 그 교수에게 앞으로의 학교운영을 맡긴다고 뽀쪽한 수가 나올까요?
개인적으로 아무리 뛰어난다고 해도 속해 있는 권력의 정의로움을 위해서 여지없이 굴복당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권력체 존재 자체가 진리가 되고 정의가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이 세상에서 보다 정의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 힘이 집중되는 곳으로 다가서고 달려듭니다.
그리고 일반 백성들은, 일단 구성된 권력체를 정의로 간주하는 것이 말썽이 일어나지 않는 처신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압니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이나 원칙을 자기로부터 빠져나감을 알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유다나라가 망하는 것은 권력자리에서 언약이 밀침을 당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언약이 원하는 권력은 어떻게 나타납니까? “하늘이 얼마나 높으냐”라고 동화가 있습니다. 그만큼 이 세상에서 저 높은 곳은 아이들이나 누구에게서 선망의 대상이 됩니다. 하지만 성경은 달리 말씀하십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7-9) “세상이 얼마나 깊으냐”를 보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즉 진리와 정의는 더 높은 곳이 아니라 저 낮은 곳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자기에게 타인에게 내세울 힘이 없다는 것은 기존의 힘으로 만들어진 구조나 체계에 휘말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되면 따로 정의와 진리와 질서가 구성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포함되어 있는 세계가 이러합니다. 아직 예레미야는 감금되기 전입니다.
이는 예레미야가 곧 감금된다는 말입니다. 권력 질서계에서 저 낮은 곳으로 떨어지고 그 누구도부터 관심받을 입장이 못된다는 대상으로 밀렸다는 말입니다. 소위 진리와 정의로움으로 자처하는 자들로부터 예레미야 선지자는 비-진리요 불의한 자로 알려지게 됩니다. 이유는 단 하나, 국가의 안정성을 저해했다는 죄목으로 말입니다.
선지자를 이런 식으로 조치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기존의 질서가 악하고 기존의 정의로움이 옳지 못함을 통해서 인간들의 각자 내부에 잠복되어 있는 수치스러운 악함을 폭로하기 위함입니다. 그 예가 누가복음 18장에 나옵니다.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2-8)
권력체의 상위에 있는 재판관의 내면을 졸지에 ‘불의함’으로 드러내는 것은 아무런 힘도 없이 이 세상에서 원한을 품은 한 가련한 과부입니다. 이로서 이 여자의 끈질김이 재판관이 지닌 권력의 안정성을 흔들어놓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여인이 ‘믿는 자’라면 오늘날 믿는 자들은 자신의 존재로 인해 이 세상의 모든 질서의 허위성을 폭로되는 일을 하는 자입니다.
자신의 이 세상에서 어떤 처지에 있든지, 어떤 신분으로 부여받든지 하나님께서는 그 모두를 새로운 질서에 속하는 자기 백성으로 다루십니다. “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얼마나 세상 권력 속으로 들어가 나의 잘남이 보호받기를 원했는지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52강-예레미야 37장 1~5절(더 낮은 곳)250504-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7장 1~5절입니다. 구약성경 1112페이지입니다.
“요시야의 아들 시드기야가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으니 이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그로 유다 땅의 왕을 삼음이었더라, 그와 그 신하와 그 땅 백성이 여호와께서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을 듣지 아니하니라, 시드기야왕이 셀레먀의 아들 여후갈과 마아세야의 아들 제사장 스바냐를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보내어 청하되 너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라 하였으니, 때에 예레미야가 갇히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 가운데 출입하는 중이었더라, 바로의 군대가 애굽에서 나오매 예루살렘을 에워쌌던 갈대아인이 그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에서 떠났더라”
시드기야는 원래 왕이 되어야 할 사람의 삼촌이에요. 여호야김의 아들 여호야긴, 여기는 고니야라고 나오는데, 여호야긴이 왕이 되지 못하고 삼촌 시드기야가 왕이 된 것은, 이것은 36장 30절에 예레미야 예언의 말씀이 성취된 겁니다.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유다 왕 여호야김에 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 그에게 다윗의 위에 앉을 자가 없게 될 것이요 그 시체는 버림을 입어서 낮에는 더위, 밤에는 추위를 당하리라”라고 되어있어요.
이 대목을 여러분들이 이해하려면, 이렇게 이해해야 해요. 하나님은 언약대로 하는데, 언약은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다. 어떤 구조냐 하면, 다윗이란 예언된 인물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자리 잡게 함으로써, 여전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해서 미련을 두고 계신 것을 알리는 구조.
왕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박아 넣은 사람, 언약적 사람이 계속 있으면 이스라엘은 아직도 하나님에게 버림받지 않은 상태이고, 하나님께서 다윗의 위에 다윗과 상관없는 인물이 거기에 등장한다면, 이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유다 나라에 손을 뗐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다음부터 나오는 것은 망하는 것만 남아 있는 거예요.
그런데 왕이 다윗 언약에 준하지 않는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았다고 해서 나라가 망한다는 이것은 일반 인간세계에서 볼 때, 상당히 신기한 일입니다. 왜냐 하면, 인간의 질서는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힘들을 뽑아내서 국가의 힘으로 자리 잡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바로 징집이고 세금을 내는 겁니다. 돈을 낸다는 것은 힘을 모으는 거고요.
그리고 징집해서 군대에 나간다는 것은 신체적인 힘을 집결하는 겁니다. 그런데 힘을 집결하게 되면 그 힘은 과연 순수한 힘이냐, 거짓된 힘이냐? 거짓된 힘이 아닌 거냐, 진짜 제대로 된 힘이냐? 그것은 인간세계에서는 묻지 않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떤 굉장히 넓은 캠퍼스가 있어요.
10만 평이 넘는 캠퍼스를 가진 대학교에서, 거기 대학 당국에서, 외국에서 유학을 마친 아주 천재적인 사람, 유명한 잡지에 논문들이 실리고 아주 경쟁적으로 그 논문을 찾아보고 확인할 정도로 뛰어난 인재를 영입해서 그 대학 교수로 모셨다고 합시다. 그래서 그 교수는 자기의 천재 됨을 이 학문을 가르치면서 자기의 우수함을 점점 알리겠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캠퍼스가 15만 평이 넘고, 교수들이 우수한 천재적 교수들이 있으면 뭐 합니까?
아이들이 없는데. 그 넓은 캠퍼스에 아이들이 없어요. 신입생이 없어요. 그럴 때, 대학교수의 입장을 생각해봅시다. 나의 이 천재성을 누가 알아줘야 하는데, 학교 방침이 내려졌습니다. ‘선생님들, 이번 학기부터 과(科) 통폐합합니다’ 일종의 구조조정이죠. 두 과를 하나로 통폐합하는 대신에 교수들 반을 어쩔 수 없이 퇴직시켜야 하겠습니다.
이럴 때, 교수 치고 자기 똑똑하다고 여기지 않는 교수가 어디 있겠어요. 나, 이 똑똑하고 공부한다고 머리 터진 이 우수한 학문적 성과, 이것을 발휘할 기회가 박탈당했단 말이죠.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의 우수함을 알아주지 않는 이 더러운 세상, 잘 먹고 잘살아라. 학교가 학문을 연구하는 것이 대학인데, 학문의 성과는 무시하고 사업과 영업에 치중하다니. 아, 실망이다. 내가 나갈게.
이렇게 나가면 좋겠습니까? 아니면 대학 방침에 고개 숙이고 ‘살려만 주이소’라고 이렇게 나가야 합니까? 자기 똑똑하고 우수한 이런 거 다 접고, ‘그냥 월급이나 그때그때 주신다면, 나는 대학 당국에 전적으로 복종하겠습니다’라고 이렇게 나와야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알아야 해요. 사적으로 자기가 똑똑하고 훌륭하고, 남과 비교해서 뒤지지 않더라도, 이 나라는 하나의 힘의 질서체입니다.
힘의 질서체. 힘들을 모으는 시스템. 여기에서 선과 악은 개인이 관여할 수 없습니다. 조직의 존재가 선이에요. 조직이 없어지는 것이 조직 입장에서는 악입니다. 개인의 힘은 조직의 힘, 국가의 힘을 대들 수가 없습니다. 이게 바로 현실이에요. 그러니까 여기서 뭐 신앙 찾고, 하나님의 언약을 찾고 복음을 찾고 이러면, 그건 아주 현실감이 뚝 떨어지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제가 유치원 아이가 읽는 동화를 말해드릴 건데, 제목이 뭐냐 하면 ‘하늘이 얼마나 높으냐’라는 동화예요. 그 동화의 제목을 듣는 순간, ‘와~~, 정말 세상은 지옥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지요. 하늘이 얼마나 높으냐는 동화, 뭐 내용은 뻔하지요. 그래서 그 동화책을 읽어준 분에게 제가 물었어요. ‘어디서 어디까지를 하늘이라고 하느냐?’라고 하니까, 쓸데없는 질문 하지 말라고 하지요.
정답은 이렇습니다. ‘땅이 어느 정도로 깊으냐?’입니다. 성경은 그렇습니다. 하늘을 논하는 것은 뜬구름 잡는 거예요. 아무 실속 없는 거예요. 소용없는 짓이고 부질없는 일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를 이 땅에 세워둔 것은 ‘하늘이 어느 정도로 높으냐, 내가 어디까지 높아질 수 있느냐?’라는 그거 측정하라고 이 땅에 세운 게 아닙니다.
우리가 어디까지 낮아질 수 있느냐, 어디까지. 그거는 빌립보서 2장에 나오잖아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지잖아요. 우리는 낮아지는 장소는 아예 관심도 없어요. 나의 똑똑함과 나의 현명함과 나의 재주와 능력을 어디까지 발휘할 수 있느냐. 이건 일종의 연예인 병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나타낸다.
나타내는 이유는, 높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만큼 우러러본다는 것이고 거기에는 힘이 모이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힘은 자체적으로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고, 그걸 가지는 자가 선과 악을 결정하는 거예요. 그 권력에 먼저 선빵해서, 그 권력 속에 먼저 진입한 사람이 선과 악을 발표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대법원장 탄핵해 버려야 해’라는 이런 거.
권력이라는 그 자체가 이미 정의이고 선이에요. 국가 권력이 하는 다윗의 언약에 의해서 ‘그다음에 누가 앉느냐?’라는 그런 것은, 현재 망해가는 이스라엘에게는 전혀 이건 고려할 대상이 아니에요. 권력이 있으면, 권력을 차지하는 그게 선이에요. 그게 합당한 것이고 그게 높은 것이에요.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레미야에게 부탁해요.
이제 권력을 잡고 하는 이야기가, ‘예레미야야, 당신 선지자잖아’라고 하죠. 지금 예레미야를 시드기야 왕이 오해하고 있어요. 선지자가 뭐냐 하면, 인간이 감추고 있는 것을 현실로 들춰내는 것이 선지자입니다. 인간이 감추고 있는 거. 연예인들의 특징이 뭐냐. 연예인들이 나타나는 것 자체가 자기 것을 더욱더 깊숙이 감추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연예인들이 옷 잘 입죠? 옷을 잘 입음으로 감출 것이 더욱더 깊숙이 감춰지는 거예요. 인물이야 뭐, 가꾸기 나름이죠. 그러니까 인간은 뭘 감추느냐 하면, 내가 힘을 좋아하고, 출세를 좋아하고, 높은 곳을 좋아한다는 이것을, 이런 욕망이 있는 것을 감추면서 권력을 잡으면, 자기가 정의로운 사람으로 탈바꿈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동안 내가 왜 정의롭지 못했는가. 권력이 없어서 내가 정의롭지 못한 사람으로 인식되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힘만 있으면 곧, 그게 정의니까요. 그러면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는 이유는 뭐냐. 사자성어로 이야기할게요. ‘불신 천국’입니다. 믿지 않는 것이 바로 천국 백성이에요. 누구를 믿지 않는가. 당연히 나를 믿지 말아야 하죠. 이미 나는 고장 났으니까요.
나를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는 것은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은 없고, 바로 선지자, 또는 예수님, 메시아, 말씀, 이 말씀이 오게 되면 나는 무엇을 부들부들 떨면서 감추고 있는가를 들추어낼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의 권력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서로서로 다 잘난척하는 그런 힘들이 모이죠. 모이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묘책이 있습니다.
세상의 권력은 그 개인, 개인으로 하여금, 인간의 육신을 난도질해 버려요. 잘라내 버려요. 세상의 힘은 나를 잘라내요. 거의 없는데, 한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여태 주부로 살면서 취직 못 한 아줌마가 금요일부터 일요일 11시까지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할 때, 그 주인은 맨날 담배만 피워서 담배 냄새로 절어있는 그 주인은 평소에는 다른 일을 하고, 편의점은 따로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 사람은 일종에 ‘내가 편의점 하는 것은 나에게 정의로움이다. 나에게 선한 일이다’라는 이게 권력이에요. 그러면 이제 초짜 아줌마에게 권력으로 작용하게 되면, 그 아줌마의 육신은 난도질당합니다. 완전히 너덜너덜 다 잘려져요. 그래서 아르바이트해서 한 사흘 되면, 그만둘지 말지가 이제 갈등이 생깁니다. 왜냐 하면, 아르바이트하기 전까지, 나는 통합체예요.
내가 완전히 하나의 통합된 존재인데, GS편의점 그것도 권력이라고 나를 자꾸 난도질하니까, 내가 조각조각 너덜너덜해져요. 제 친구 동생이 있는데, 평생동안 일할 줄 모르고 그냥 탁구 치고 바둑 두고 그렇게 노는 것만 하는 아인데, 하도 주위에서 ‘나이가 스물 중반 되었으면 네 밥벌이는 네가 해라’라는 그 소리 듣고, 빵 만드는 제과제빵 학원 다니면서 자격증을 땄어요.
그렇게 따서 제과점 취직을 해서 사흘 정도 다녔는데, 코피가 터졌어요. 코피가 나니까, 그걸 보고 있던 엄마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만둬라. 내가 너 밥 못 먹여줄까. 그만둬. 내가 밥 먹여줄게’ 이게 엄마였습니다. 내 아이가 사회 나가서 난도질당하는 거, 그것은 엄마 소유가 된 자기 자식 눈 뜨고 못 보죠. 내 것을 왜 건드리냐. 내 것.
아침에 이야기했지만, 이게 가인 아닙니까. 가인은 자기 자존심, 내 것 건드리면 가만두질 않아요. 이것이 통합이 안 되는 거예요. 통합이. 이것이 ‘아르바이트 그만둘까’라고 생각하다가 한 주 지나고, 두 주 지나고 보니까, 손님도 거의 없어. 견딜만하고, 휴대폰 보면서 시간 때우면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면, 서서히 기존 권력에 의해서 너덜너덜한 내 육신이 하나의 새로운 통합이 됩니다.
통합되면서 슬슬 부정부패가 시작됩니다. 회계에게 장부 맡겨놓으니까, 장부 조작하는 것처럼, 그런 유혹을 받는 것처럼, 권력 밑에 그런 주인을 쪼다 만드는 새로운 권력체로써 서서히 고개를 들지요. 주인은 직원 감시한다고 바쁘고, 직원은 주인 몰래 빼돌리기 바쁘고. 이게 바로 이 세상의 권력이고 사회 아닙니까. 통합된 거예요. 왜? 권력이 있어야 내가 선한 사람이 되니까.
권력 밑에 있다는 그 자체가 나는 악해요. 왜? 지적 대상이 되기 때문에. ‘그것도 똑바로 못하고, 물건도 제대로 못 하고, 왜 결산이 다르냐, 왜 돈이 모자르냐’라는 식으로 나오겠죠. 이게 바로 조직의 위력입니다. 그렇다면 이 점을, 예레미야를 통해서 시드기야가 오해한 거죠. 감히 선지자를 통해서 자기가 권력 잡은 나라가 잘되도록 하나님께 기도해달라고 했을 때, 예레미야에게는 어림도 없죠.
그렇다면, 이 세상에 대해서 불신 천국이라고 했는데, 이건 이 세상의 질서를 믿지 말아야 한다는 뜻인데, 그러면 참된 믿음은 무엇인가. 권력과 그것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 그게 누가복음 18장에 나옵니다. 1~2절에 보면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대법원장이죠.
3절에 계속 보면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벌써 갈등 구조가 생겼죠. 그 과부가 원한을 풀어달라고 왔단 말이죠. 그런데 이미 법원 퇴근 시간이에요. 업무시간이 끝났어요. 그러면 그 과부는 어떻게 해야 해요? 이 세상의 질서를 따라야죠. ‘아이고, 내일 와야 겠구나. 오늘은 날이 저물어서 안 되겠구나. 내일 재판을 해달라고 해야겠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하느냐 하면, 질서와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을 아주 귀찮게 합니다.
‘퇴근했겠지. 이제 갔겠지’라고 하면 그다음 날 또 찾아오고, 또 찾아오고 했겠죠. 특히 이 사람은 과부란 말이죠. 다시 말해서 이 과부는 전혀 힘이 없는 거예요. 힘이 없으면 무조건 이건 죄인이에요. 왜냐 하면 가진 힘이 선을 결정하고 질서를 가진 자가 법을 만들어야, 그게 질서 있는 법이 됩니다. 아무것도 없는 자는 법 만들 자격 자체가 안 돼요.
그런데 이 과부는 자기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늘 찾아오니까, 6절에 보면 재판관에 대한 표현을 주님이 이렇게 했습니다.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불의한 재판관이에요. 그냥 재판관이 아니고 불의한 재판관. 그러니까 이 재판관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안 들어주고 싶은데, 왜? 자기가 정의니까, 자기가 법이니까, 안 해도 그만인데, 너무 귀찮게 하고 번거롭게 하니까, ‘아이고, 내가 들어줘야 하겠다’라고 하는 그 말을 잘 들어보라고 하시면서 7절에,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한 자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기도 빡세게 하면 응답받는다는 그 내용이 아니고, 믿음 있는 자는 이 세상에 선하다는 질서, 그 자체를 아주 개무시할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이 내부적으로 있단 말이죠. 내부적으로. 원한 가진 이 과부는 바로 이 기존에 질서 밑에서 진정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은 저 밑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단 말이죠. 저 밑바닥에서.
학교에서 내 천재적임을 알아주지 않는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살려만 주이소. 밥이나 먹여주세요. 대학 당국에 복종하겠습니다’라고 이래야 할지, ‘이 더러운 대학, 나의 이 가치를 몰라주고’라고 하면서 나가서 다른 직업을 찾아보든지, 안 그러면 붕어빵 굽든지 할 때, 우리는 그 똑똑한 박사를 선하다고 인정하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타인들이 그걸 인정하지 않아요. 그런데 누가복음 18장 아직 끝맺음을 안 했습니다. 8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이 말은 인간은 자기 건재함을 믿는 믿음 때문에, 결코 연예인 병에서 못 빠져나온다는 겁니다. 세상적으로 알아주는 그것이 선인 줄 알고, 자기를 계속 감추고 살아가는 거예요.
자기 치부를 계속 안으로 숨기기 위해서 권력과 돈과 명예 같은 것을 계속 자기를 위해서 쌓고 또 쌓는 거예요. ‘나, 이 정도야. 내가 보이는 것으로 나를 좀 평가해 줘. 나 이 정도로 잘 나가’라고 하는 거죠. 끝으로 오늘 본문 말씀은 아직 예레미야가 갇히기 전, 감금되기 전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결국 어떻게 합니까.
이 질서 체계에서 감금된다는 것은 제일 바닥 인생을 살게 하는 거, 제일 밑바닥으로 가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레미야는 뭘 보여 주는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하늘이 높은가가 아니라, 우리 목표를 어디 높은 곳에 걸면 되는가가 아니라, 반대로 어느 쪽이 가장 낮은 곳인가를 주님에 의해서 찾아가게 하십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그 바닥에는 어떤 모습, 어떤 것을 경험하게 됩니까? 이 질문으로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6~27절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집사님에게 제일 먼저 물어본 것이 ‘편의점 옷 입었습니까?’라는 질문이었거든요. 아르바이트 옷이요. 그리스도로 옷 입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28절에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이 세상 질서가 규정하고 질서가 체계 잡기 위해서 정해놓은 그 모든 기준에 어떻게 되더라도, 종이 된다고 할지라도, 내가 떨어지고 아픈 자가 되고 낙오자가 된다고 할지라도, 이미 옷 자체가 주님께서 모든 것을 자유하게 하는 하나님께 구원받은, 어떤 질서에도 얽매일 필요가 없는 천국 능력의 옷을 입었기에, 제가 내린 결론은 아르바이트하든, 뭘 어떻게 하든, ‘네 맘대로 사세요’ 우리 마음대로 사시면 되는 겁니다.
그게 이 지옥에서의 천국 질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왜 마음대로 살지를 못하는 이유가 우리 내부에 우리가 우리를 저해하고 있고, 가로막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게 하옵소서. 뭐가 그렇게 창피스럽고, 뭐가 그렇게 주저되고, 망설임이 되는지, 평생 우리가 산다는 것이 망설임의 연속동작인 것을 우리는 갈수록 직감하고 절감하고 있습니다. 주여 더 이상 주저하지 않는 자유의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