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조각
2025년 5월 18월 본문 말씀: 예레미야 38:3-6
(38:3)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 성이 반드시 바벨론 왕의 군대의 손에 붙이우리니 그가 취하리라 하셨다 하는지라
(38:4) 이에 그 방백들이 왕께 고하되 이 사람이 백성의 평안을 구치 아니하고 해를 구하오니 청컨대 이 사람을 죽이소서 그가 이같이 말하여 이 성에 남은 군사의 손과 모든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나이다
(38:5) 시드기야 왕이 가로되 보라 그가 너희 손에 있느니라 왕은 조금도 너희를 거스릴 수 없느니라
(38:6) 그들이 예레미야를 취하여 시위대 뜰에 있는 왕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에 던져 넣을 때에 예레미야를 줄로 달아내리웠는데 그 구덩이에는 물이 없고 진흙뿐이므로 예레미야가 진흙 중에 빠졌더라
선지자가 죽음으로 내려갑니다. 인간 세계의 일부로 할애되어 죽음으로 이어지는 공간이 마련되고 그 공간에 선지자가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죽음의 공간 외의 공간은 삶의 공간으로 자기 마음대로 지정해 놓게 됩니다. 그렇다면 누가 죽음의 공간에 들어가고 우리 삶의 공간에 들어갈까요?
오늘 본문 38:4에 보면, 그 내력이 나와 있습니다. “이에 그 방백들이 왕께 고하되 이 사람이 백성의 평안을 구치 아니하고 해를 구하오니 청컨대 이 사람을 죽이소서 그가 이같이 말하여 이 성에 남은 군사의 손과 모든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나이다” 즉 사회 공동체에 해악을 끼치는 것으로 죽어 마땅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선지자의 말 한 마디로 통해서 사회 단결력에 약화된다면 용납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우는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에 대해서도 적용된 원칙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요 11:50)
자, 그렇다면 이런 법칙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진리란 이 세상 사회가 성립되는 와중에서 필히 불필요한 요소라’는 겁니다. 진리가 들어가면 나라나 사회나 가정이나, 특히 교회도 성립되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작용합니다. 진리는 그 모든 것과도 대척관계에서 등장합니다. 진리는 천대받고 미움받습니다.
예레미야 1:5에서는 예레미야는 하나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이 예언을 받게 됩니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이렇게 대단하고 거룩한 사명자가 오늘 본문에 와서는 졸지에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진리를 전하는 선지자를 과연 하나님께 이렇게 허비하셔도 되는 걸까요?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선입견은 버려야 할 것을 요구받습니다. 즉 ‘진리는 따로 있으면 우리는 그것을 믿기만 하면 된다’는 사고방식 말입니다. 실은 진리란 선지자의 현장에서 새로이 만들어지고 나타나는 겁니다.
진리란 따로 수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가 가는 삶의 길목과 풍경 속에서 새삼스럽게 등장하는 겁니다. 즉 선지자가 외친다고 진리나 계시가 아니라 선지자의 삶의 현장에서 악의 세력과 부딪히고 무시당하고 죽임을 당하면서 생산되는 겁니다. 이러한 원칙은 신약에 나오는 세례 요한도 예외가 아닙니다.
누가복음 1:15-16에 보면,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보면 세례 요한은 큰 일을 하는 자로서 아무도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하나님께서 가만두지 않을 자같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14:6-11에 보면, “마침 헤롯의 생일을 당하여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대로 주겠다 허락하거늘 그가 제 어미의 시킴을 듣고 가로되 침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 왕이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을 인하여 주라 명하고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옥에서 목 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그 여아에게 주니 그가 제 어미에게 가져 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처참하고 허망한 죽음 같습니다. 철없는 딸과 어미에 의해서 성령받은 천하의 선지자 요한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앞으로 큰 일을 계속 이어 나갈 저력이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데도 말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나 세례 요한이나 모두 예수님 모습을 형성하는 그림의 일부입니다.
두 탁자의 어느 한쪽 탁자에는 그림으로 된 타일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빈 탁자를 향하여 한 조각씩 옮겨놓다고 해봅시다. 처음 몇 조각 옮길 때에는 무슨 그림으로 완성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다 옮겨놓는다면 비로소 완전한 그림이 나옵니다. 완전한 그림은 최종적 진리입니다. 곧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따라서 선지자가 전하는 계시나 진리는 장차 오실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겁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은 그냥 자신이 그 시대에 처해있는 몸의 죽음으로 알립니다.
이게 바로 세상 사람들이 선지자를 대하는 한계이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선지자나 메시야를 배격하는 것은 자신들의 사회 공동체가 망할까 두려워서 그러합니다. 그런데 ‘망한다’가 과연 인간 세계에서 성립하는 개념일까요? 인간에게 ‘망한다’, 혹은 ‘성공했다’는 적용될 수 없습니다. 인간들은 그냥 원래대로 돌아갈 뿐입니다. 인간들이 “나는 망했다”는 표현은 상당히 건방진 생각입니다.
인간이 원래 안 망한 경우가 있을까요? 인간은 태어나면서 진리의 조각, 예수님의 일부가 아니라 독자적인 삶을 시도하게 됩니다. 갓난 아이가 커가면서 몸을 뒤집고 앞으로 기고 두 다리로 서게 되면서 표현되는 것은 자기 만의 가치 뿐입니다. 즉 그 누구의 조각이거나 그 누구의 부분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누구도 아닌 자기만의 절대적 존재로 살고 싶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들 중에서 예수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리콜 방식으로 삼은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도 역시 세상 사람과 다를 바없이 기어이 살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간섭하여 마치 주님의 죽으심에 빨리 합류하려고 경주하게 합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1-23)
따라서 성도의 존재 방식은 다음과 같으면 족합니다.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마 8:9)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존재하는 이 자리에서 예수님의 죽으심만 펄펄 풍겨나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54강-예레미야 38장 3~6절(예수님의 조각)250518-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8장 3~6절입니다. 구약성경 1111페이지입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 성이 반드시 바벨론 왕의 군대의 손에 붙이우리니 그가 취하리라 하셨다 하는지라, 이에 그 방백들이 왕께 고하되 이 사람이 백성의 평안을 구치 아니하고 해를 구하오니 청컨대 이 사람을 죽이소서 그가 이같이 말하여 이 성에 남은 군사의 손과 모든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나이다, 시드기야왕이 가로되 보라 그가 너희 손에 있느니라 왕은 조금도 너희를 거스릴 수 없느니라, 그들이 예레미야를 취하여 시위대 뜰에 있는 왕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에 던져 넣을 때에 예레미야를 줄로 달아내리웠는데 그 구덩이에는 물이 없고 진흙 뿐이므로 예레미야가 진흙 중에 빠졌더라”
예레미야가 진흙 중에 빠졌다는 것은 죽음에 가까이 가게 되었다는 그 말입니다. 그러면 그 죽음의 자리가 뭐냐. 죽음의 자리가 그 구덩이 바깥에, 자기를 구덩이에 집어넣었던 그쪽 세계가, 인간들 보기에는 사는 세계이고, 아무 먹을 것이 없고, 물만 축축이 젖어있고 그냥 굶어 죽는 그 진흙 구덩이 속이, 바로 인간들이 창안해 낸 죽음에 대한 묘사죠. 죽음에 대한 표현이고요.
이 말은 우리라는 이 사회공동체에서 너희가 빗나가면, 너희는 골로 간다. 죽는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법 중에 가장 무서운 법이 사형법이거든요. 사형법이 살아있는 자에게 너무나 무섭기 때문에, 범죄자에게 본인들 입장에서 무서운 그 벌을, 자기에게 해코지한 그 죄수에게 뒤집어씌움으로써 그들은 간접적인 복수를 실시하게 됩니다.
내가 받은 피해에 대해서 사형으로 되갚음으로, 약간은 우리가 여기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너는 죽어 마땅하고 반대로 우리는 살아 마땅하고. 왜? 우리는 너 같은 죄는 짓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를 임시로 그 죽음의 구덩이에 넣는다는 말은, 예레미야 너는 죽어 마땅하고 나는 살아 마땅하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좋다고 태어나서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본질에 해당합니다. 오늘 우리가 세례요한 이야기 잠깐 하고 예수님부터 이야기할 텐데요, 예수님이 이토록 위험한 세계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기존 인간들의 대우와 견해는 어떻게 처분하느냐 하면, 요한복음 11장 50절에 나와 있습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라도 나옵니다. 한 사람이 죽어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쪽으로 한다면, 그 죽는 사람은 살아있으면 우리에게 유익이 안 된다는 이야기거든요. 우리에게 해를 끼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달릴 때, 두 강도가 동질의 십자가형을 같이 받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그게 바로 인간들의 관점입니다. 예수님이 무슨 짓을 했던, 강도가 무슨 짓을 했던, 인간 세계의 법은 우리에게, 우리 존재에 보탬이 되느냐? 그러면 우리 편. 보탬이 되지 않는다면 이것은 죽어 마땅한 자. 그렇게 단정 짓는 겁니다. 그러한 견해에 대해서 누구나 이의 거는 사람은 없고 같이 합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예레미야 본문에서, 예레미야를 그렇게 처형시키는 이유가 뭐냐. 이렇게 나와 있어요.
저 사람은 우리의 평안을 기도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우리가 망하는 쪽으로 기도했기 때문에, 처형당해도 마땅하다는 이게 죄목이에요. 그런데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인간에게 망한다는 것이 성립됩니까? 5초 드리겠습니다. 내가 망하는 게 성립돼요? 내가 뭔데 망합니까? 성경은 네가 망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겁니다.
인간은 태어나서 기어다닐 때부터 안 망한 적이 없어요. 인간은 태어나서 누워서 천장만 보고 있지요. 천장만 보고 있다가 그중 하나가 뒤집어져요. 뒤집어져서 드디어 누워있다가 땅을 보기 시작하고, 거기에 속도를 더하면 빨리 기어서 탁자 밑으로 들어가기 시작하죠. 다섯쌍둥이(인간극장) 이야기입니다. 그 애들이 ‘내가 천장 본다, 뒤집어졌다, 긴다, 나중에 일어선다’라는 그런 것들이 자기가 죽음으로 망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본인이 그런 행동을 할 때는 전혀 못 받아들입니다.
내가 했던 모든 것의 총합은 죽음이에요. 죽음이고 그 죽음은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뭐 대단해서 망합니까? 망하는 게 아니고 본래의 자리로 가죠. 따라서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가 선지자잖아요. 계시와 진리를 함유하고 있잖아요. 그렇다면 예레미야가 우리에게 보여 준 계시는 뭐냐. 빨리 경주하듯이 빨리 죽음으로 가는 자가, 자기의 본질에 빨리 접근하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빌립보서 1장에 나오는 사도바울의 고백이죠. 빨리 죽고 싶다.(23절)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빨리 죽고 싶다는 그 내막을 굉장히 깊이 있는 의미를 담았는데, 이렇습니다. 테이블이 2개가 있어요. 하나는 A 테이블, 다른 하나는 B 테이블. A 테이블에 단단한 타일 조각들이 있단 말이죠. 완전한 그림으로 그림의 완전한 그림 이미지가 있단 말이죠.
그걸 A 테이블에서 B 테이블로 옮깁니다. 타일 하나를 떼어서 옮깁니다. B 탁자에 타일 하나 달랑 있어요. 사람들에게 ‘이게 무슨 그림일까요?’라고 물으면 모르죠. 다시 추가합니다. 타일 하나를 B 테이블로 옮기고 ‘이제 두 개 합했으니 알 것이 아니냐?’라고 해도 몰라요. 또 하나 보탭니다. 두 개, 세 개 보탭니다. 만약에 A 테이블에 있는 모든 타일을 B 테이블로 다 옮겼으면 온전한 그림이 나타날 거예요.
내가 온전하다는 것은 성경에 없습니다. 주님의 이미지, 형상이 온전해지죠. 우리는 주님의 이미지에 한 부분을 차지하는 타일의 조각이니까요. 이게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사도바울이. 그리스도의 몸. 내가 망한다?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내가 잘되었다. 그게 무슨 이상한 소리예요? ‘내가’가 없어요. 우리는 하나의 그리스도의 지체이고 조각일 뿐이기 때문에.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나, 나중에 주님 만나면 우리가 온전하게 된다.(12절) 왜? 조각들 다 모았으니까.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것은 예레미야도 마찬가지예요. 예레미야 1장에서 예레미야가 ‘나 선지자 노릇 못합니다. 나 같은 것이 그런 쨉이 됩니까?’라고 할 때, 예레미야 1장 5절에 보면 내가 너를 너 태어나기 전부터 찍었다는 거예요.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찍었고 선택했고 구별했다는 겁니다. 구별한 자를 뽑으실 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리콜(Recall)’해요. 리콜 아시죠? 회사에서 제품이 하자가 있다고 회사 쪽에서 결정하게 되면, 벌써 시중에 나왔던 제품을 거둬서 다시 하자 없게 고쳐서 돌려드리는 것이 리콜제도예요.
우리가 아담에 속해서 우리는 리콜 대상이라는 것도 몰라요. 우리가 아담에서 태어나면서부터 우리는 뭐만 하느냐 하면, ‘나만 안 망하면 된다’라고 하는 겁니다. ‘나’에 대한 이야기예요. 내가 어느 누구의 일부라는 생각은 전혀 없고요, 무조건 남이 죽든 말든, 나만 잘되면 된다는 거예요. 이거 리콜 대상입니다. ‘네가 뭔데? 내가 마귀야, 신이야? 왜 너 혼자만 잘되어야 해?’
제가 지금껏 공부를 하면서 늘 찝찝하게 해결 안 되는 것이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옛날 사람은 어떻게 살았을까?’라는 겁니다. 물론 드라마나 유물 같은 것들 보면 알 수 있지요. 그런데 그거 말고, 옛날 사람은 그 시대에 어떤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았느냐가 궁금한 겁니다. 그런데 어떤 옛날 사극의 드라마를 보면서 정리가 되었어요.
만약 우리가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사람이라고 합시다. 그러면 20세기 문물을 모르죠. 뭐 휴대폰도 모르고 아무것도 몰라요. 그러면 그 시대에 내가 고려시대 사람이라면, 나는 이 시대에 어떻게 살았겠는가. 희한하게도 인간은 그 시대에 자기가 부러워할 만한 영웅이 있어요. ‘아, 나는 저 사람 너무 부럽다. 나는 저 사람 졸개가 되어서라도 저 사람 바라보는 모습으로 살아야지’
인간은 각 시대가, 어떤 시대이든 간에, 자기가 현재 부러워하는 어떤 대상이 있어요. 모델이 있다고요. 그 모델을 쳐다보는 재미로 살아요. 그 모델 쳐다보는 재미. 그러니까 인간은 각 시대마다 살만해요. 왜? 그 시대에 영웅들이 있으니까. 그리고 거기서 그것만 쳐다보고 사느냐. 아니에요. ‘나도 당신처럼 될 거야’라는 생각까지 목표를 두는 겁니다.
정리하면, 인간은 어떻게 사는가. 나름대로 목표와 기대감을 가지고 살았다. 이걸 줄이면, 인간은 나름대로 되고 싶은 꿈을 향해 산다. 그런데 그 꿈이 나중에 미래세대가 보면, 꿈 같지도 않아요. 허접스러워요. 웃기는 거예요. 지금 북한 사람의 꿈은 뭐냐. 하얀 쌀밥에 소고기국밥이잖아요. 아직도 그게 통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건 탈북자 선풍기 아줌마에게 물어봐야 해요.
북한에서는 하얀 쌀밥에 소고기국밥 먹으면 더는 소원 없다는 거예요. 그걸 누가 주느냐. 탈북하면 국정원에서 그걸 줍니다. 탈북자가 너무 맛있어서 한 그릇 더 달라고 해요. 그 사람들이 나중에 교육 마치고 자본주의에 흡수되어서 살 때, 소고기국밥이 인생의 전부입니까? 아니지요. 고급 차와 넓은 아파트죠.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은 그 시대의 산물이고, 그 시대를 못 벗어난다는 겁니다. 진리가 아니고, 인간은 어떤 시대이든 거짓에 푹 휩싸여서 살아가는 거예요. 하지만 선지자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친히 리콜해서 리콜을 통해서 새로운 것 집어넣고, 왜 너는 나에게 회수당하는 식으로 살아가는가를 계시라는 이름으로 선지자에게 줍니다.
그걸 오늘 내용이 좀 어렵기 때문에 제가 결론부터 내리겠습니다. 진리는 뭐냐. 진리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선지자를 통해서 거기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거예요. 현상적으로.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진리? 우리는 진리가 아니니까, 내가 진리를 사모해야지’ 이런 게 진리인 줄 알잖아요. 진리는 그게 아니고 진리를 사모하는 그 인생 중심으로 그 시대에 필요한 하나님의 계시와 복음과 진리가 새롭게 만들어지는 겁니다.
처음에 선지자들도 그걸 몰랐어요. 거부했어요. 예레미야 같은 경우에, 하나님께서 내가 이렇게 선지자 노릇 했으면, 내가 이런 힘든 고생은 안 해야 하지 않습니까. ‘꼭 굳이 나를 이렇게 박해하도록 방치해야만 진리가 진리 되고 계시가 계시 됩니까? 나도 그냥 계시 쳐다보면서 살고 싶습니다. 꼭 이렇게 힘들게 나를 만들어야 합니까?’라고 물으면 하나님께서 “응”
계시는 따로 없어. 네가 무슨 계시를 찾아? 네가 계시야. 네 삶의 현장이 계시야. 오늘날 성도도 마찬가지예요. 십자가. 오늘날 신학 교재에 다 나와요. ‘십자가 믿고 구원받는다. 예수님 피 믿고 구원받는다’라는 그거 누가 몰라요. 그건 교회 안 다녀도 다 알아요. 문제는 십자가의 체험, 그러한 하나님의 일은 성령께서 성도로 하여금, 그 자기 있는 삶의 자리에서 십자가를 날마다 재해석하도록 하나님이 조치를 하신다는 거예요.
이 일을 주님께서는 구약에서 “눈동자”라는 표현을 했어요. 눈동자. 신명기 32장 1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누구를? 이스라엘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눈동자 같은 이스라엘을 부숴버리셨는데요. 그러면 이스라엘의 부서지는 것도, 부서져야 이스라엘이 눈동자 아니고 부서져야 비로소 나오는 눈동자가 이스라엘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오해했는지요.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준다는 거예요. 지켜주는 것이 아니야. 미래에 나오는 완전한 눈동자를 미리 앞당겨서 체험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빨리 죽음에 도달하는 자가 하나님의 계시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 모습 아닙니까.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예수님이 서른세 살만 살아도 할 것 다 했어요.
더 이상 살 이유가 없어요. “다 이루었다”라고 하시고 다 끝났지요. 뭐. 그 다 이루신 현장이 뭡니까? 죽음의 자리잖아요.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합류하라고 되어 있는, 천국 갈 수 있는 그 제단의 자리에 누가 빨리 거기에 도달하느냐. 도달하면서 하나님이 만든 계시의 흔적을 남기면서 여러 군데에서 합류할 때, 십자가라는 전체 타일의 이미지가 완료되는 거예요. 반복적인 십자가 이미지.
성경이 이렇게 이야기해도 왜 우리가 자꾸 오해하느냐 하면, 자기 인생을 자꾸 먼저 챙겨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수십 년 전에 신학생들과 이야기하면서 몇 번이나 강조한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여러분들이 교회 나가서 교인들이나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예물을 바친다. 헌금한다’라고 하는데 전도사님들 혹시 시편 50편 읽어 본 적 있습니까?
시편 50편이 뭔데요? 시편 50편에 보면 “너, 나에게 자꾸 예물 바치지 마. 안 바쳐도 다 내 것이다”라는 이야기예요. 놀랍지 않습니까? 네가 나에게 뭘 안 바쳐도 내 번제는 항상 내 앞에 있었다는 겁니다. 8~11절에 보면 “내가 너의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수염소를 취치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뭘 바치긴 바쳐. 네 손을 거치면 그게 뭐 헌금이 되는 줄 알아? 그러면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이 뭐냐? 헌금도 아니고 예물도 아니고, ‘내 있음 그 자체가 저 산에 있는 생축과 같이 주의 것입니다’라고 감사하면 끝! 끝이란 말이죠. 자꾸 바칠 생각 하고 드릴 생각하지 말란 말이죠. 누가 드려서 갚으심이 있겠어요. 하나님이 드린다고 갚아주는 분 아니거든요.
“너는 그 자리에서 계시 역할 해. 내가 찾아갈 거야” ‘누가요?’ “성령이 찾아갈 거야” 그래서 이번 시간에 세례요한이 팔자가 어떤 팔자인지, 세례요한 쪽을 살펴보겠습니다. 세례요한을 보게 되면 참 서글퍼요. 왜냐 하면 누가복음 1장 15~16절에 이런 말씀 나오거든요. 아버지 사가랴에게 태어날, 아직까지는 태어나지 않았지만, 태어날 그 자식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큰 자가 되죠,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나실인 이죠,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세속적으로 말해서 점괘가 이렇게 나왔어요. 지나가는 어떤 삿갓을 쓴 도사가 말하기를 ‘아이고, 앞으로 태어날 아이가 성령을 받아서 이렇게 크게 되고 많이 돌아오게 합니다’라는 그 이야기를 듣게 되면 굉장히 운세가 펴도 활짝 편 사람 같잖아요.
그런데 마태복음 14장 8절에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 춤을 추며, 아주 깨춤을 춘 거죠. 그러니까 7절에 “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 허락하거늘, 그가 제 어미의 시킴을 듣고 가로되 세례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 왕이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을 인하여 주라 명하고”
이 대목이 깊어요. 헤롯이 멈칫하면서도 결국에 그 딸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은 법이라는 진흙 구덩이, 오늘 예레미야가 진흙 구덩이에 있었지만, 살아있는 인간들은 이미 죽음이 적용되는, 저주가 적용되는 법의 진흙 구덩이에 갇혀있어요. 거기서 뭐 하느냐. 거기에서 나름대로 자기의 의로움과 자존심과 나 이렇게 정당하고 하자 없이 살았다는 것을 끄집어내는 작업을 하는데, 손톱에 피가 날 정도로 작업을 해요.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모든 인간이. 사회 나가서 대화해 보세요. 결국 하는 말이 뭡니까? ‘나는 하자 없다’ 결국 마지막에 들려오는 소리가, 마지막 결론이 계산해 보면 뭐냐. ‘결국 나 잘못 없어요. 나는 지금 제대로 하고 있는 겁니다’라는 이거거든요. 그게 마귀가 준 법적인 무게감이 너무 두꺼워요. 법의 중량감이 두꺼워서 손으로 그 법에서부터 해방되는 게 너무 힘들어서 탈출이 안 돼요.
‘나는 정당하다. 나는 정당하다’ 그래서 그게 어디서 아다리(적중, 명중)가 맞느냐면, 이 만남이 세례요한의 목숨을 두고 만나게 돼요. 계시를 품은 사람과 법에 옴팍 갇혀서 ‘나는 어떤 경우라도 정당하다. 네 탓이다. 네가 세례요한 머리 달라고 했어. 내가 안 했어. 그러니 나는 하자 없는 거야’라고 이렇게 법에 눌려 있는 인간과 성령으로 많은 백성을 돌아오게 하는 그저 운세가 정말 좋았던 세례요한과 만나서 거기서 죽습니다.
참 빨리도 죽어요. 주님의 십자가로 빨리 달려가고 있습니다. 바로 이게, 하나님께서 눈동자처럼 지킨다는 말이, 세례요한의 목숨을 눈동자같이 지키는 것이 아니고 세례요한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예언, 성령, 그분이 하시고자 한 그 일, 그걸 주께서 눈동자같이 여길 때, 그 일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연결되면서 그게 진리가 되는 겁니다.
끝으로 히브리서 1장을 보겠습니다. 전에 했지만 다시 보겠습니다. 1절에 “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여러 선지자는 부분 부분의 타일, 조각조각 그림들이 이야기했던 것이, 마지막 때에는 아들로만 이야기를 완료시킨다는 겁니다. 2절에,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그러니까 오늘날 이러한 원칙이, 완료된 예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면, 우리에게 처한 모든 상황이 펄펄, 십자가의 용서하심이 펄펄 향기롭게 나오는 그 현장에 우리가 놓여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우리가 망했다, 성공했다는 문제가 아니라, 주께서 일하신다는 현장입니다. 진리가 일하기 때문에, 제가 이 시간 내리는 결론은 간단합니다.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면 되고, 죽으라고 하면 죽고, 죽지 말라고 하면 더 살아야 하고, 기도하라 하면 기도하면 됩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성령 받아 하나님의 계시가 되고 주의 몸이 된 사람, 우리들이 빨리 죽어서 주를 만나는 것이 소원이지만, 주께서 세례요한처럼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우리가 거부하지 말고 주와 동행하는 기쁨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