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
2025년 4월 27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6:27-32
(36:27) 왕이 두루마리와 바룩이 예레미야의 구전으로 기록한 말씀을 불사른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36:28) 너는 다시 다른 두루마리를 가지고 유다 왕 여호야김의 불사른 첫 두루마리의 모든 말을 기록하고
(36:29) 또 유다 왕 여호야김에 대하여 이같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그가 이 두루마리를 불사르며 말하기를 네가 어찌하여 바벨론 왕이 정녕히 와서 이 땅을 멸하고 사람과 짐승을 이 땅에서 없어지게 하리라 하는 말을 이 두루마리에 기록하였느뇨 하도다
(36:30)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유다 왕 여호야김에 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 그에게 다윗의 위에 앉을 자가 없게 될 것이요 그 시체는 버림을 입어서 낮에는 더위, 밤에는 추위를 당하리라
(36:31) 또 내가 그와 그 자손과 신하들을 그들의 죄악을 인하여 벌할 것이라 내가 일찍 그들과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에게 선포하였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한 그 모든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다 하라
(36:32) 이에 예레미야가 다른 두루마리를 취하여 네리야의 아들 서기관 바룩에게 주매 그가 유다 왕 여호야김의 불사른 책의 모든 말을 예레미야의 구전대로 기록하고 그 외에도 그 같은 말을 많이 더 하였더라
여호야김 왕은 예레미야 계시에 대해서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기대하고 원했던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고대하지 않는 말씀에 대해서 두려워합니다. 차라리 자신의 형편과 전혀 상관없는 말씀이었다면 이토록 두려워하지 않았을 겁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 말씀에, 달은 언제 뜨고 꽃은 언제 지고 오늘 날씨에 대해서 예언한다면 무서워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예언은 정확하고 정통으로 자신을 겨냥한 계시이기에 왕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어 자신의 속내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네가 뭔데 내 앞에 부정적인 결과를 깔아두느냐”는 식입니다. 이처럼 구약이란 그 이스라엘의 국가 중심으로 계시가 짜여지게 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예언대로 망했습니다. 우리 인간들 생각에는, ‘망하기 전에 정신차리고 미리 알아서 잘하지 …’라는 조언을 하고 싶지만 이스라엘이 안 망하는 것이 계시의 취지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의 파멸과 멸망은 이미 이스라엘의 경우를 근거로 다 정해져 있습니다.
알아서 잘 할 위인이 이 세상에 없다는 말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계시 전달을 통해서 인간의 속의 심정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반발적이냐를 오늘날 우리도 같이 체험해야 합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 잘 해보자고 해도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우리 안에서 강력한 반발이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신약에 와서 예수님께서 이 멸망의 예언을 자기 몸으로 받습니다. 따라서 신약에 들어와서 말씀을 이해하고 해석한다는 것은 곧 이미 나 자신이 망해있고 망할 만큼 충분히 하나님에게 반발하는 심정으로 무장되어 있음을 성경을 대한다는 점을 인정부터 해야 합니다. 우리가 여호야김왕의 재탕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심정을 잘 이해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모든 말씀은 신약에 나타나신 예수님에 의해서 이미 다 지켰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새삼 지킬 성경 말씀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신약은 이것을 ‘기쁜 소식’이라고 말합니다.
왜 이게 기쁜 소식이 되느냐 하며는 우리 개인이나 인간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 가볍고 기쁜 소식입니다. 즉 ‘나 자신의 망했음’의 입장에서 예수님 안으로 이미 들어가게 되면 어느 것 하나 기쁘지 않는 말씀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구절입니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 1:10)
이 말씀에서 끝부분에 ‘예수’라는 명칭이 나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는지 하는 것은 앞에 서술되어 있는 것을 그대로 다 받아들여야 합니다. 즉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분으로서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죽음 앞에서 대기된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자신을 살아있어 뭘 하겠다는 것은 여전히 ‘죽었다가 살아나심’의 가치를 모독하는 겁니다. 여호야김이 예레미야의 계시에 대해서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것처럼 오늘날 우리의 일상생활도 늘 두려움과 두려움의 연속입니다. 신약 성경은 우리가 이런 두려움을 갖는 이유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히 2:14-15) 죽는 것이 무서운 이유는 혈육에 속해있기 때문이랍니다.
혈육적인 삶이란 혈육에서 뿜어져나오는 기억을 생산하고 그 생산된 기억에 준해서 이 혈육을 이어져 나가고자 다음 계획을 수립합니다. 따라서 철두철미하고 혈육 유지에 매인 삶이 되는 겁니다. 마귀의 입장에서 보면, 혈육이 있는 인간들의 밥이요 농락의 대상이 됩니다. 모든 인간이 자신의 과거 기억에 매여사니 이 기억을 벗어날 위인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해결책은 무엇인가요? 예레미야 1:5에 보면,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레미야의 혈육 이전부터 하나님에게 기억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혈육을 가지고 나온 나의 기억 말고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창세 전 기억이 주입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혈육에 구애받지 않는 다른 기억, 곧 하나님의 계획준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등장한다는 말입니다. 이들이야 말로 자기 경험에 준한 기억말고 하나님의 기억의 스케줄에 준해서 기쁘고 즐거워하게 됩니다. 그 내용이 데살로니가후서 1:7-10에 나와 있습니다.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그 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살후 1:7-10)
이 얼마나 속 시원한 말씀입니까! 이런 혜택을 입은 자를 히브리서 2:16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히 2:16) 즉 천사들과는 달리 성도에게는 신나는 반전이 준비되어 있다는 겁니다.
천국은 우리 육신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들어갑니다. 천국에는 나의 기억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바뀐 주님의 기억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죄에 대해서 용서가 입혀져 들어갑니다. 이것이 바로 창세 전에 준비된 하나님의 신비로운 인간 창조입니다.
“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기우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시 139:15-16)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주님의 일에 낄 자가 아님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52강-예레미야 36장 27~32절(시작과 끝)250427-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6장 27~32절입니다. 구약성경 1112페이지입니다.
“왕이 두루마리와 바룩이 예레미야의 구전으로 기록한 말씀을 불사른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너는 다시 다른 두루마리를 가지고 유다 왕 여호야김의 불사른 첫 두루마리의 모든 말을 기록하고, 또 유다 왕 여호야김에 대하여 이같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그가 이 두루마리를 불사르며 말하기를 네가 어찌하여 바벨론 왕이 정녕히 와서 이 땅을 멸하고 사람과 짐승을 이 땅에서 없어지게 하리라 하는 말을 이 두루마리에 기록하였느뇨 하도다,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유다 왕 여호야김에 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 그에게 다윗의 위에 앉을 자가 없게 될 것이요 그 시체는 버림을 입어서 낮에는 더위, 밤에는 추위를 당하리라, 또 내가 그와 그 자손과 신하들을 그들의 죄악을 인하여 벌할 것이라 내가 일찍 그들과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에게 선포하였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한 그 모든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다 하라, 이에 예레미야가 다른 두루마리를 취하여 네리야의 아들 서기관 바룩에게 주매 그가 유다 왕 여호야김의 불사른 책의 모든 말을 예레미야의 구전대로 기록하고 그 외에도 그 같은 말을 많이 더 하였더라”
말씀이, 하나님의 계시가 적혀있는 성경책이죠, 그 책을 왕이 찢었습니다. 왕이 이렇게 말씀을 찢는 것은 구약 시대이기 때문에, 이게 하나의 계시적 의미를 갖는 겁니다. 구약은 기록된 말씀이죠. 물론 신약에도 기록된 말씀이 있습니다만, 성경은 인간이 해석할 수 있는 책이 아니라,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차원에서 해석이 이미 끝났어요.
■그래서 성경을 해석하고 싶다면, 일단 예수님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들어가게 되면 예수님이 내린 결론은 ‘모든 성경은 다 이루었다’가 되는 거예요. 이게 어떻게 다른가 하면, ‘너 이 말씀 왜 안 지켜? 너 이 말씀 또 위반했구나. 너는 이제 탈락이야. 너는 이제 지옥이야’라는 이런 경우가 예수 안에서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신약은 기쁜 소식이죠.
문제는 이 기쁜 소식의 세계 속에 들어올 수 있는 자는 없다는 점입니다. 들어가면 굉장히 기쁜데, 들어올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 들어오는 경계선에서, 하나님께서 엄청나게 위험한 말씀들을 해주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 안에 들어와서 구원받겠다는 사람에 대해서, 주님께서 기쁜 소식을 언급하면서 무엇부터 언급하느냐 하면, 이 세상에 대한 전면적인 저주와 심판의 말부터 먼저 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를 들면 데살로니가전서 1장 10절에 보면,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이 말씀의 끝에 예수라는 분을 이야기하면서 앞에 사설이 굉장히 길어요. ‘뭐가 어떻고, 어떻고 어떤데, 그분이 바로 예수다’라고 해요. 그러면 이 말을 듣고 예수님 세계에 들어가려면, 앞에 이렇게, 이렇게 한 말들에 내가 동의가 되어야 하겠죠.
■그 동의가 뭐냐.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라는 이 대목,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했으니까, 우리는 어디에 위치하느냐 하면, 우리가 죽기 위해서 대기하는 상태에 놓여있는 거예요. 죽기 위해서 대기한 상태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이 말씀을 받을 수 있느냐. ‘하나님, 살아있는 이 기간을 좀 줄여주면 안 됩니까?’라고 요구하는 사람, 그 사람은 이 말씀을 들을 수 있죠.
왜냐 하면 나에게 구원을 주겠다는 말씀이 죽고 난 뒤에 살아계신 분이니까, 후딱 그분을 만나려면, 내가 살아있다는 이 귀찮은 시간을 빨리 없애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죠. 제가 아침에 운동하면서, 간이골프장에 있는 운동기구를 탑니다. 이렇게 옆으로 흔들기를 할 때, 100번을 하거든요. 처음 하나, 둘, 셋,...이렇게 셀 때, 좀 지겨워요.
그런데 나중에 98, 99, 이렇게 뒤로 오면 기쁘죠. 그러다가 ‘100! 끝났다!’라고 외치면서 그다음 순서로 갑니다. 우리 인생을 그다음 순서로 후딱 넘어가기 위해서 카운트해야 할 생애가 우리 생애예요. ‘나이 55, 56,...아, 진짜 지겨워 죽겠다. 57, 58,... 아직도 이러고 있나. 81, 82,...아, 정말 빨리 끝내주면 안 되겠습니까? 이 카운트도 지겹습니다’라고 하죠.
그러면 주께서 “조금만 참아. 조금만 참으면 그 카운트하는 너를 없애줄게. 짠! 없어졌다! 이제 지루해할 필요 없어”라는 그때를 아주 초조한 가운데 고대하는 사람, 이게 바로 데살로니가전서와 데살로니가후서를 대하는 성도의 마음가짐이 이러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이 말씀, “하늘로부터 강림하심” 외에는 아무것도 기뻐할 일이 없는 상태.
그리고 강림하신다는 것이 왜 기쁘냐 하면, 가장 확실하니까요. 다른 것은 나를 힘들게 하니까. 성경에서 시험에 빠졌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이 세상에 푹 빠졌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시험에서 벗어난다는 뜻이 뭐냐 하면, “내가 빼 내줄게. 고맙지? 그지?” ‘고맙습니다’라는 그런 기쁜 마음이 시험에서 벗어난 마음이에요.
‘좀 그만 살면 안 되겠습니까?’ “좀 참아. 카운트해도 내가 카운트하니까”라는 이런 거죠. 데살로니가후서 1장 7~10절은 이걸 좀 구체적으로 이야기했어요.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얼마나 기쁘게요. 이게 얼마나 기쁩니까. 뭐가 기쁘냐. 이게 왜 기쁘냐. 화끈하고 확실하지 않습니까. 모호하지 않고 뭔가 개운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지금 제가 보기엔 잠만 푹 주무시고 있는 느낌인데. 이게 개운하지 않습니까? 인생에서 이렇게 개운한 경우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뭐, 이거 말고 뭘 더 이야기해 주셔야 여러분 속이 시원하시겠습니까? 뭘 더 이야기 해줘야.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주님, 그거 말고 다른 거 이야기 해주세요’라고 한다면, 그분은 지금 예수라는 존재 자체가 귀찮고 싫다는 거예요. 그 고백밖에 안 됩니다.
주님께서 시원하게 이야기해 줬는데도 불구하고, ‘그것 말고 우리 대한민국 잘 되는 거 없습니까?’라고 한다면, 그게 바로 여호야김 왕이거든요. 여호야김은 그 당시, 지금으로 따지면 우리나라 대통령이에요. 그러면 이 나라에서 선지자에게 계시받았으면, ‘예레미야, 하나님으로부터 무슨 좋은 계시를 받았느냐?’라고 한다면, 무슨 계시에 좋은 계시가 있습니까.
속 시원한 계시는 있지만, 좋은 계시는 없습니다. 나에게 내가 원하는 기쁜 것을 제공하는 계시는 성경 어디에도 없어요. 왜냐 하면, 나는 내 자리에 있으면 안 되기 때문에 그래요. 내 자리에서 좋으신 분, 주님 자리로 옮겨 갈 때만, 이 성경 전체가 얼마나 기쁜 소식인지를 그때 받아들이는 거예요. 자꾸 내 자리에 있으면 내 이익과 손실을 계산하기 때문에, 이건, 이 세상 자체가 공포스럽습니다. 무섭습니다.
지금 여호야김은 무서워서 성경책을 칼로 도려낸 거예요. 무서워서. 무서워서 내 곁에 오지 말라고 버린 거예요. 도대체 여러분은 뭐가 무섭습니까? 그게 또 성경에 나와요. 뭐가 무서운지가. 성경이 얼마나 친절한지요. 우리가 뭐가 무서운지가 답변이 안 되잖아요? 성경은 “내가 답변해 줄게. 너는 모르잖아. 내가 답변해 줄게”라고 성경은 언급합니다.
그게 히브리서 2장 14절에 나옵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그리고 15절도 나옵니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뭐가 무섭습니까?’ 죽는 게 무섭습니다. ‘네가 죽는 게 무서운 이유를 아느냐?’ 모르겠는데요. 그게 바로 혈육에 속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혈육에 안 속하고 내 몸을 없애버리면, 그러면 두려움이 없겠습니까? 자살하는 사람들이 주로 이런 생각으로 자살하잖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혈육에 속했다는 것은, 혈육에 속해서 만들어 낸 정신이, 혈육이 없어져도 그 정신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문제 해결이 안 돼요.
혈육이 있을 때 있었던 모든 기억과 과거에 대한 생각이, 혈육이 없어져도 그대로 가요. 그걸 가지고 주마등같이 지나간다는 말이 있거든요. 죽을 때 어떤 사람이 갑자기 죽었다고 했는데 깨어났을 때, ‘그때 죽는 순간 어땠어요?’라고 물으면 ‘모든 것이 홱 지나가더라. 회전목마 돌 듯 주마등처럼 휙 휙 지나가더라’ 그 휙휙 지나간 것이 뭡니까? 혈육에서 제작된, 혈육이 있기에 만들어 낸, 나의 기억들이고 추억들이고 나의 과거사입니다.
그러니까 죽어도 혈육에서 벗어나질 못해요. 죽어도. 자꾸 혈육에 대한 믿음이란 말이죠. 이렇게 이야기했으면, 또 성경적인 해결책이 또 있겠지요. 해결책 제시합니다. 예레미야 1장 4~5절에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이게 뭐냐 하면 네가 혈육에 없을 때 뭐가 있었는가. 하나님의 기억이 있는 거예요. 네가 혈육에서 살아온 그 경험 말고, 네 몸 자체가 없을 때, 몸이 엄마 배 속에 있어서 어떤 기억도 없을 때, 주님의 기억으로 말미암아 너로 하여금, 선지자 노릇을 하게 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예레미야는 어떠냐 하면, 이중성적인 기억의 보유자가 됩니다. 이중 기억의 보유자.
내가 몸에 있기 전에 기억도 내 안에 있고, 몸 있고 난 뒤에 내가 세상 살면서 경험한 기억도, 내가 혈육에 있는 동안에 함께 있고. 이럴 때, 이것이 바로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예수님도 그러셨는데, 육신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도 두 가지 기억을 다 갖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 선지자가 태초에 자기 혈육이 있기 전에 있던 하나님의 계획도 자기 안에 들어왔단 말이죠.
그런데 이게 무슨 두려움이나 무서움을 벗어날 수 있는 획기적인 대책이 되느냐. 그게 대책이 됩니다. 왜 대책이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나를 태중에 있게 하시기 전의 그 기억의 모든 스케줄과 계획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그 결말을 미리 우리에게 알려 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원지에 가보면 외 줄타기가 있잖아요. 줄이 경사가 져서, 앉아 있으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쭉 신나게 내려가는 거. 케이블카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고장이 나서,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으면 이건 기가 찰 일이죠. 한번 출발해서 짚라인(Zipline) 타고 쭉 내려왔으면 아래까지 한 번에 도달해야, ‘이야~너무 짜릿하고 신나더라’라고 하잖아요. 주님께서는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면, 도착 지점을 미리 성경을 통해서 알려 주는 거예요.
네가 어떻게 어떻게 고생하고, 20대에, 30대에, 40대에, 어떻게 하더라도, 80 넘어서, 90 넘어서 내가 정말 죽고 난 뒤에 남아 있는 것은 나의 기억이 아니라, 육신과 함께 있는 나의 기억이 아니라, 바로 주님의 기억이에요. 십자가 마을 들어가니까, 어떤 분이 쪽지함으로 질문을 했어요. 질문을 수십 개가 넘게 하시는 분인데, 그분은 항상 짧게 질문하는데, 이런 질문을 해요.
‘목사님, 세상 속의 기억도 천국 가면 남아 있습니까?’라는 이게 질문이에요. 우리 이 땅에 기억도 천국 가면 없어집니까? 그대로 있습니까? 이런 질문이죠. 답변 해드렸죠.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남아 있는가. 그것마저 주님의 은혜로 달라져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여기서 주의하셔야 해요. ‘그것마저 주께서 하셨다’라고 남아 있는 게 아니고, ‘주님의 은혜’로 남아 있어요.
주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육신으로 한 것은 죄밖에 안 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뭔가 개입하셔서 죄를 뭐로 바꾸었느냐. 하나님의 의로 다 바꾸어 주는 거예요.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 하늘나라 갈 때, 내 몸이 들어간다고 생각하겠죠. 성경에서는 내 몸은 못 들어간다고 나옵니다. 뭐로 바뀌느냐. 은혜가 임하면 우리 몸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서 바뀝니다.
그 결론이 에베소서, 갈라디아서, 고린도전서에 한 뭉텅이로 들어있어요. 성경에 엄청나게 들어있습니다. 이것은 육신으로 우리가 경험해서 한, 우리 기억이 아니고, 주님이 우리 안에 내장해서 집어넣었던, 성령을 통해서 집어넣었던, 다 예수님의 몸의 계획 안에 있던 기억이 이미 육신 속에 있는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집어넣은 거예요.
그러니까 ‘죽기를 무서워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죽어도 천국 간다는 기쁨을 주옵소서’라는 이게 바로 우리 생각이거든요. 하나님은 우리 육신이 있는 사람이 죽기를 무서워하기 때문에, 그냥 두렵지 않고 인생 끝내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의 사적인 요구사항이에요. 주님께서는 그 요구를 받아주는 것이 아니고, 네가 어떻게 무서워하든, 어떤 경우든, 그건 네가 일으킨 일이 아니고, 내가 너에게 하나님의 계획은 이렇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일으킨 상황이고 사건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믿든 말든 관계없이 성도는,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 몸 안에 포함이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아간다는 생각을 못 하고, 자꾸 아까운 내 육신, 내 육신, 내 육신 어떻게 하지, 죽으면 안 되는데, 이런 식으로 자꾸 사적인 내 육신으로 간주하는 거예요.
히브리서 2장 16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천사는 구원에서 빠집니다. 천사 구원은 없습니다. 우리가 다 천사를 부러워하는데, 천사보다 우리가 나은 이유는 천사는 구원이라는 반전이 없지만, 우리에게는 구원이라는 반전이 주어져 있습니다.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아브라함의 자손.
아브라함은 행함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그 은혜가 은혜로 주어지려면,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육신에 속해서 맨날 걱정 근심만 해야 해요. ‘나는 이렇게는 못 산다. 이렇게는 더는 못 산다. 하나님 후딱 천국으로 보내주세요’라고 맨날 이러고 있어요. 지금 사적인 개인 생각하고 있어요.
개인의 평화로움, 개인의 행복, 이런 것만 붙들고 있어요.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시니까, 아브라함이 하나의 시야에서 두 개의 시야로 자기 안에서 작용하게 된 겁니다. ‘이삭은 내 자식이 아니었구나. 하나님이 삽입해 준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함축해서 한 내용이 시편 139편 15~16절 보겠습니다.
오늘 날씨가 따뜻해서 잠들기 좋은 날씨가, 이 말씀 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은밀한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기우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주의 책에 기록된 그 말씀이 오늘날의 나를 이렇게 기이하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저와 의논한 적도 없이, 내가 육체로 만들어지기 전에, 창세 전에 예정한 뜻대로 이렇게 만들었으니, 나는 그 최종적인 결과, 마지막 때, 주께서 강림하실 때, 다른 말로 하면 우리 몸이 되시는 분이 직접 나타났을 때,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뭐가 더 걱정스럽고, 뭐가 더 초조하고 불안하냔 말이죠. 내 몸이 그렇다는데. 내 육신의 몸이 그렇다는데. 내 몸이, 내가 속해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 그렇게 나타나셔서 멸망시키겠다는데, 우리의 모든 염려와 걱정을 늘 일임하면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알기 위해서 보다 노력했지만, 여전히 사적인 야심 때문에 가로막혔습니다. 이제는 내 몸이, 내 혈육이, 살아생전에 내 것이라고 여겼지만, 이미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인 것을, 이제는 기쁨으로, 고마움과 감사함으로, 안정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