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 않는 죽음
2025년 5월 4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1:5
11: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아벨은 죽음으로서 믿음의 증거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에녹은 죽지 않음으로서 믿음의 증거를 보여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자 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17:20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즉 최소의 믿음이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게 안 된다는 말은 아에 믿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마귀가 인간들이 깜작 놀랄만한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악마가 애써도 못하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천국으로 옮겨놓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있어야 될 자를 아예죽여버립니다. 아벨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벨은 없습니다. 하지만 ‘아벨의 죽음’은 있습니다. 이 죽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관여하셔서 죽은 아벨은 자신의 이름 세계에 등록시킵니다. 죽은 아벨 대신 셋을 주셨다는 말은 가인과 다른 노선에 하나님 자신의 이름이 직접 뛰어드셨다는 말입니다.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4:25-26) 이렇게 되면 아벨은 죽은 후손들 속에서 살아있게 되고 그 효과가 바로 아담의 7대 손 에녹을 통해서 나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해서 죽음을 보지 않았더라’(창 5:24/히 11:5) 죽은 아벨을 대신하는 후손들의 계열은 에녹에 와서 정점에 이르고 노아 때와서 모든 인류를 멸망합니다. 따라서 그 도중에 아벨의 죽음으로 두 개의 죽음 노선이 만들어집니다. 하나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죽음의 노선과 또 하나는 영원히 멸망당하는 죽음노선입니다.
그렇다면 아벨의 예물에서 어떻게 두 개의 대비되는 노선이 나오게 되는 겁니까? 그것은 아벨의 예물 안에는 인간의 모든 죄에 대한 탕감과 관련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마태복음 5:23-25에 보면,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율법은 철저한 탕감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제대로 율법대로 못살면 영원히 하나님에 대해서 책임져야 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7:41-42에 보면,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랑=탕감해주심’입니다. 이는 탕감받지 못한 자는 무한한 시공간인 지옥에 가서 자기 행함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예물을 받지 아니한다는 말은 “나는 너를 탕감해 줄 의사가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모든 학문과 과학과 철학은 자기 행함에 자신이 책임지려는 의식에서 비롯된 겁니다.
이렇게 되면 계속 자기 이름을 안에 담고 그 ‘자기 이름의 삶’을 영속하려는 의도입니다. 가인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예물은 받았습니다. 그 안에 탕감의 근거가 담겨 있습니다. 그 근거를 드러내는 것이 ‘죽은 아벨 대신’으로 등장하는 여러 후손들입니다.
그 후손들 중에서 에녹에 와서 정점에 이릅니다. 그 예물 취지의 연속은 ‘주의 이름’이 관여하십니다. 따라서 아벨의 모든 후손들은 오직 하나의 이름, 즉 죽은 아벨을 대신한 씨을 낳게 하신 그 주님의 이름에 등록이 됩니다. 여러 이름들이 아닙니다. 오직 한 분의 이름입니다.
로마서 5:15, 18에서는 이 ‘한 분’의 활약에 맞추어 은혜가 주어짐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이 한분의 활약상은 출애굽에도 나옵니다. 출애굽기 17:5-6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수를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내가 거기서 호렙 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반석은 곧 그리스도입니다.(고전 10:4) 그런데 그 다음에 물없다고 백성들이 원망하니 모세가 반석을 또 칩니다. “모세와 아론이 총회를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고 나옵니다.(민 20:10-12) 하나님의 뜻은 이것입니다. 아벨의 예물을 받는 순간, 이미 탕감 효과가 작용하는 죽음을 보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신 겁니다.
바로 아벨의 후손, 즉 성도는 이 아벨의 죽음 사건과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는 이 닫힌 노선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시-공간입니다. 미래가 과거를 결정하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인간의 자질이나 능력이 아니라 자기 죽음과 삶 사이를 주기적으로 왔다갔다하면서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예수님의 숨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활약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살기에 에녹에서 장차 멸망을 말하는 예언이 나온 겁니다. 오늘날 성도도 비록 못한 자들이지만 그들에게 예언이 나오는 것은 주님의 활동에 의해서 성도 자신의 삶이 주기적 성격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아벨 사건과 에녹 사건을 왔다갔다하는 겁니다. 이러한 주님의 함께 하는 시공간에서 계시를 흘러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렘 1:7-9)
65강-히브리서 11장 5절(죽지 않는 죽음)250504-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1장 5절입니다.
히브리서 11: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에녹이라는 인물이 왜 나타나는가? 그것은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은 인물로 거론되기 때문에 죽음을 보지 않은 하나의 사례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에녹은 믿음으로 죽음을 보지 아니 했다.’ 그러면 그 전에 있는 아벨은? 오늘 본문 히브리서 11장 4절에 보면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서 오히려 말하느니라.”
‘아벨은 죽었다. 에녹은 믿음으로 죽지 않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 관여할 때 죽음을 가지고 인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인간을 볼 때 ‘네가 죽을 존재냐, 아니면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냐?’라는 그런 관점에서 인간을 상대하시는 겁니다.
‘아벨은 믿음이 있었지만 죽었다. 그런데 그의 죽음은 곧 믿음이 무엇인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죽었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에녹도 죽어야 하는데 반대로 ‘에녹은 믿음으로 죽음을 보지 아니했다.’ 왜 믿음 가운데 꼭 죽어야 하는 내용도 들어있고 반대로 죽지 아니할 내용이 믿음 안에 다 들어있는지, 도대체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를 여기서 알려주시고 있는 겁니다.
보통 교회에 가면 신자들이, 교인들이 “믿습니다, 믿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들 하죠. 그런데 제가 알기에는 마태복음 17장 20절에 나오는데요, 최소 어느 정도가 되어야 믿는 자가 되느냐 하면 산을 옮길 정도가 되어야 믿는 자가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에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라고 되어 있어요. 어떤 집사님이 “저는 믿습니다, 저는 믿고 있습니다.” 한다면 그래요? “그러면 집사님, 저기 저 앞산 한번 옮겨볼래요? 진짜 작은 믿음이라도 있다면 산을 옮기라고 했을 때 옮길 수 있습니까?” “아, 그거 너무 센데요?” 세기는 뭐가 세요? 겨자씨만 한 믿음인데요. 제일 작은 믿음이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에요.
그러니까 도대체 이 세상에서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내가 이 정도는 할 수 있다는 자기 과시지 성경에서 말하는 그런 믿음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마귀들이 많은 기적을 베풀어요. 마귀가 산을 옮길 수도 있겠죠.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어요.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은 어떤 것인가?
이명박 그분이 현대 건설 전무로 있을 때 놀라운 믿음을 보여줬다는 그런 소문이 교회들에 있었어요. 왜냐하면 토목 공사해서 산을 옮겨버렸거든요. 그러니 이게 보통 믿음이 아니란 말이죠. 아마 마귀들이 요한계시록에 의해서 깜짝 놀라는 기적을 베풀어 산을 옮긴다고 할지라도 성경 히브리서에서 주님이 말하는 믿음, 산을 옮길지라도 자기 자신은 옮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옮기는 믿음, 이것이 바로 창세기 5장에서 에녹의 믿음이에요. 그리고 아벨의 믿음이고요. 어떤 믿음도 본인을 현재 내가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 계신 곳으로 옮길 수 없다면 그건 믿음일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냥 죽치고 이 땅에 더 살겠다는 자기 야심에 불과하죠.
그런데 히브리서 4장에서 아벨은 비록 죽었지만 그 아벨의 믿음이 어디까지 이어지느냐 하면 에녹까지 이어지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아벨이 죽지 아니하면 에녹에게 일어난 일은 발생되지 않았다는 것을 창세기 5장에서 증명하고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아벨이 죽었을 때 우리는 아벨이 죽었다고 생각하는데 창세기 4장 25절에 보면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라고 되어 있어요.
‘아벨 대신’이에요. 그러니까 셋이라는 이름은 사실은 셋의 이름이 아니고 하나님께 예물 드림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관련성이 있음이 성립된 자의 이름, 죽었던 아벨의 이름이 셋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겁니다. 26절에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아벨은 죽어서 하나님의 이름에 합류했더라.’ 하나님의 이름이 아벨의 후손을 통해서 일찍 죽어야 할, 아무 자식도 없이 죽은 아벨의 그 노선, 그 닫힌 노선인 아벨의 노선을 하나님께서 인수인계함으로서 비로소 열린 노선이 되면서 그때 아벨의 후손들이 셋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 이름들이 등장해요.
그 이름의 결정적 부분이 에녹입니다. ‘아벨은 죽었으나 살았다’라는 말을 제대로 해야 해요. 아벨은 죽었으나 에녹이라는 이름으로 살았고, 그 에녹이라는 이름이나 아벨이라는 이름은 둘 다 여호와의 이름, 주의 이름이에요. 주의 이름에 종속된 이름이라는 뜻이에요. 이게 바로 등록입니다, 등록. 주의 이름에 등록하는 거예요. 내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이 되는 거예요. 내 이름은 나를 증거하지만 주의 이름은 주님을 증거하는 거예요.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뭐냐? 주의 이름에 등록된 자가 주의 이름의 효과, 그 효과가 어떤 식으로 그 뒤에 아벨 노선을 통해서 나타나는가, 발현되었는가? 바로 아벨로 시작한 일이 에녹이라는 죽음을 보지 않는 효력을 발생시켰습니다. 그 노선이 함축되면 주님이 이 땅에 태어나서 죽어서 부활되는 그것까지, 승천하신 것까지를 함축시켜 놓은 것이 됩니다.
이 주의 이름으로 등록한다는 말, 주의 이름 그 하나의 이름으로 등록했다는 말은…, 이 세상에 여러 많은 이름이 있는데 그 많은 이름을 제가 창세기 5장에서 한 번 보겠습니다.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이 셋을 낳았죠. 셋은 아벨 이름의 대행입니다.
아담이 셋을 낳은 후에, 그다음 셋이 에노스를 낳은 후, 다음에 에노스가 게난을 낳은 후에, 게난은 마할랄렐을 낳은 후에, 마할랄렐은 야렛을 낳은 후에, 그다음에 야렛이 에녹을 낳은 후에…, 이렇게 죽 이어진 거예요. 여기에 에녹이 등장하는데 그 중간에 죽었더라, 죽었더라, 애 낳고 죽었더라, 마치 바통을 잇는 거예요.
‘자식을 낳고 죽었더라….’ 이것은 아벨의 죽음을 함축해서, 그걸 압축시켜서 자식에게 그걸 그대로 담고, 자식은 그 아벨의 죽음을 릴레이 경기하듯이 바통으로 받아서 어디까지 이어지느냐? 에녹까지 이어지는 거예요. ‘죽었더라, 죽었더라…’, 그렇게 가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있더라.’라는 그 노선, 아벨의 노선이 주의 이름과 합류하면서 성사시켰더라.
그러니까 ‘이 땅의 죽음 말고 죽어도 죽지 않는 새로운 생명의 노선이, 아벨이 드린 그 예물 안에 그 생명이 포함되어 있더라.’ 그런 뜻이에요. 아벨의 죽음 안에 들어있는 에녹의 요소, 또는 에녹 요소 안에 들어있는 죽은 아벨의 요소가 하나로 연결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물 안에는 죽어도 죽지 않는 죽음이 들어있는 거예요.
그 죽지 않는 죽음에 의해서 생긴 여정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고, 하나님 이름의 반복적인 활동에 의해서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해서 이 땅에서 죽지 않고 하늘로 갔다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인간이 산다는 것은 뭐냐? 창세기 5장에 보면 900살 밑으로는 뭐 이름 붙일 것도 없어요. 전부 어지간하면 900살이에요.
아담은 930세, 셋은 912세, 에노스는 905세, 게난은 910세, 마할랄렐은 895세, 야렛은 962세, 그다음에 무드셀라는 신기록 세웠죠. 969세. 에녹이 정점이에요. 정점에 갔다가 아담의 7대 후손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는데 이 므두셀라는, 그가 죽을 때 누군가가 오신다는 뜻입니다. ‘므두’ 죽음이라는 뜻이고요, ‘셀라’ 누군가를 하나님이 보낸다는 그런 뜻인데 므두셀라 다음에 라멕이죠. “칠백칠십칠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창 5:31).
그다음에 노아가 나오죠. 라멕 다음에 노아가 나오는데 이 노아가 얼마를 사느냐 하면 950세까지 살았어요. 그러니까 이제 누가 오느냐? 멸망이 오죠. 에녹 다음에는 꼴아박기에 들어가는 건데 세상이 전부 다 멸망해야 합니다. 그래서 에녹으로 행하여 갈림길이 생기는데 하나는 영생하는 노선, 또 하나는 완전히 몰락하는 새로운 노선 두 개의 노선으로 갈라집니다.
에녹이 핵심 부분에 속합니다. 두 종류의 죽음의 핵심 부분에 속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전부다 900, 900, 900…, 구백 가까이 사는데 에녹은 이 세상에서 365세까지만 살아요. 꼭 반토막이 난 거예요. 이걸 조기 전역이라고 하는데 다 복무하지 않고 조기 전역을 해요. 마치 예수님 같아요. 예수님 같은 경우에 꼭 80, 90까지 살 필요 없어요. 딱 33살만 살아도 끝났어요. 다 알았어요.
예수님을 통해서 이 세상에 두 개의 노선이 나옵니다. 하나는 천국 갈 사람과 하나는 지옥 갈 사람, 그 두 개의 노선으로 나눠지죠. 바로 에녹이 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서 말씀드리지 않은 것은, 어떻게 예물을 드렸는데 그 예물을 받은 쪽에서는 왜 이렇게 죽지 않고 영생을 할 수 있는 그러한 혜택이 주어지느냐?
그래서 그 예물이 뭐냐, 하는 겁니다. 아벨의 예물은 받았는데 가인의 예물은 안 받았어요. ‘예물 안 받는다.’ 예물을 주님 앞에 건네지 못했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그게 마태복음 5장에 보면 나옵니다. 23-24절에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이렇게 되어 있고요.
25-26절에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라고 되어 있어요.
예물이 도대체 뭐길래 영생을 제공하느냐? 그것은 누가복음 7장에 마태복음 5장과 관련해 이렇게 나옵니다. 41-42절인데요, 예수님께서 하신 이야기예요.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라고 되어 있어요.
사랑이 어디서 생성되는가? 사랑은 탕감에서 생성된다는 겁니다. 빚을 졌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예물 안에 탕감하는 요소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예물을 받는다는 것은 나와 너의 모든 빚진 것을 일거에 탕감했다는 뜻이고, 가인이 드린 예물을 안 받는다는 것은 ‘네가 하는 일에 대해 내가 탕감할 의사가 없다.’라는 거예요.
탕감할 의사가 없으면 어떻게 되는가? 무한 책임져야 하죠. 무한히 책임져야 해요. 그게 지옥입니다. 영원히, 영원히 자기가 하나님에 대해 빚진 것을 다 갚아야 해요. 그런데 갚을 수가 없어요. 무한히 해도 갚을 수가 없어요. 왜? 하나님의 것을 건드렸으니까,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요.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고 한 것을 따먹었는데 그걸 무슨 수로 책임집니까? 책임질 수가 없어요. “내가 분명히 이야기했지? 정녕 죽는다고.” 정녕 심판받는다고 이야기했잖아요. 그거 지옥에서 계속 갚아야죠.
누가복음 7장 42절 다시 말씀드리면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내가 갚을 수 없는 그 모든 것을 탕감할 때 비로소 우리는 사랑이라는 것을 처음 접하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아벨의 예물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죽은 아벨 속으로 주님의 탕감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이어져서 그래서 그것이 아담의 7대손 에녹을 통해서 “죽음을 보지 않고”라는 아벨의 죽음의 효과, 효력이 나오는 거예요. 탕감의 효력이 발생되는 겁니다.
그렇게 노선을 관통하는 데 있어서 오직 여호와의 이름만이 그 일을 성사시켰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 말은, 하나님에게 등록하되 오직 단 하나의 이름으로 등록을 해야 해요, 딱 하나의 이름으로. 그래서 아담부터 내려온 이름은 그냥 자식을 낳을 뿐이고, 그다음에 자기 이름은 죽음과 함께 날아 가버리죠. 주의 이름만 남기기 위해서, 주의 이름을 가리지 않기 위해서 그동안 써먹었던 내 이름은 내 죽음과 함께 소실되고 마는 겁니다. 날아가요.
여러분이 이 땅에 살면서 있던 이름, 그건 여러분에게만 필요하고 하늘나라에서는 우리 이름이 전혀 필요치 않습니다. 주의 이름이 아벨이 드린 예물을 현실화시킴으로서 그것은 다 주의 이름으로만 행했기 때문에 거기에 달라붙어 있는 이름들은 실은 죽은 아벨의 이름을 그냥 대용해서 쓰는 것뿐이거든요. 에녹도 마찬가지고요.
히브리서 11장 4절에서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그 예물이 증거하는데 그 예물 안에 뭐가 들어있다? 죽을 자와 영생할 자가 두 개 다 들어있다는 것을 아벨을 통해 주님께서는 보여주신 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아코디언 인생이 되어야 해요. 펼쳤지만 닫아 버리면 딱 함축된 인생, 펼치면 다시 닫아져야 할 인생이에요. 너절한 내 이름이 이렇게 뭘 하고, 또 뭘 했고…, 그런 거 딱 닫아 버리면 ‘애 낳고 죽었다. 끝!’ 이렇게 단출하게 함축해야 해요.
제가 들은 이야기인데요. 설거지할 때 물기를 다 빼야 한대요. 왜냐하면 젖은 냄비를 찬장에 넣으면 그 냄비의 물기에 찬장 합판이 썩어서 나중에 주저앉는 일이 있거든요. 바짝 말려야 되잖아요. 우리 인생이 바짝 말라야 해요. 내 이름의 물기가 다 빠져야 해요.
왜 사느냐? ‘죽었더라.’ 아주 간편해요. 시작과 끝, 이걸 달리하면 접이식 의자, 펼쳐졌는데 딱 접어버리면 납작하게 되고요, 그냥 납작하지만 펼치면 앉게 되어 있죠. 우리 인생은 접히기 위해서 살아가는 거예요. 아코디언처럼 딱 접히기 위해서 살아가는 거예요.
내 것으로 인하여 초조해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야 실제로 활동하는 것은 주님밖에 없다는 것, 주의 의도에 의해서 나라는 인생이 활용당하고 있다는 것이 나타나거든요. 하나의 이름에 등록한다는 것을 신약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신약 이야기 먼저 하고, 그다음에 구약 이야기도 하나 해드리겠습니다. 로마서 5장 15절에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각자의 노력으로 각자가 사는 것은 없고, 그런 체계와 구조는 이제 더는 없어요. 모든 체계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단 한 사람의 취지를 위해서 지금 지속되고 있는 세상입니다. 로마서 5장 18절에 보면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것 같이…”, 여기서 한 범죄는 아담이죠.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3장 17절에서 아담은 죽는다, 흙이 된다고 했거든요. ‘한 사람이 범죄 해서 흙으로 돌아간다. 여러 사람, 각자 각자 때문이 아니고 죽는 것은 바로 한 사람 때문이다. 또 내 이름을 대신한 다른 이름, 내 인생에 개입된 다른 분의 이름이 나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한다.’ 그 말입니다. 그분의 이름에 등록된 자만 탕감을 받는 식으로, 하나님에 대한 모든 죄지은 것을 탕감받는 식으로 우리는 영생에 이른다는 이야기에요.
따라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우리의 어떤 것도 용서하지 않습니다. 왜? 이미 용서를 했기 때문에, 주의 이름으로 용서를 했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이름으로 한평생 살아가는 어떤 행동에 대해서도, 네 이름으로 한 어떤 것도 내가 용서할 수 없는 이유는, 내 이름으로 용서했기 때문이에요, 내 이름으로.
내 이름 안에 들어있는 그 용서, 주님의 몸을 아버지가 받음으로써 탕감이 되는 그것을 부각하기 위해서 내가 이 땅에 하는 어떤 것도 주님께서는 용서할 의사가 없습니다. 잘했다고 할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뭘 잘해요? 자기 이름을 위해서 사는데 뭘 잘한 겁니까?
그래서 인간이 믿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오직 모든 초점을 주의 이름이 하신 일로 쏠리도록 그렇게 했습니다. 출애굽도 마찬가지죠. 의도적으로 물이 없는 곳으로 백성들을 몰아갔어요.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양몰이 하듯이 일종의 몰이를 하는데 물이 없는 곳으로 몰고 가요. 그리고 양식도 없는 곳으로 몰고 갑니다. 백성들이 난리가 났죠, 물 없다고. 인간의 신체가 70퍼센트 이상이 물로 되어 있는데 물이 없다니까 뭐 살 수가 없죠.
모세도 대책 없습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예요. 어떤 대책을 낼 입장이 못 됩니다. 출애굽기 17장 5-6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수를 치던” 곧 옛날에 홍해와 애굽의 강을 쳤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라고 되어 있어요.
이건 모세만 알고 있는 거죠.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물을 주기 위해서 먼저 모세하고 하나님하고 어떤 돌을 지목하는데 그 지목된 돌 위해 하나님이 서신다는 거예요. 돌 위에 서시는데 그다음에 그 지팡이 가지고 어떻게 하라고 하느냐? “그 반석을 치라.” 이렇게 했다고요.
그러면 얻어맞는 것은 반석입니까, 반석 위에 서신 주님이 얻어맞는 거예요? 깨진 것이 반석이에요, 주님입니까? 주님이 얻어맞고 주님이 깨지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서는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라고 했습니다. 민수기 20장 8-12절에 보면 역시 또 물이 없다고 원망했어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이번엔 달리 이야기합니다. “그냥 명해라. 반석에게 명해라.” 그러면 물 낸다고 했어요. 그런데 민수기 20장 10-11절에 보면, “모세와 아론이 총회를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여기 두 번 쳤다고 되어 있어요. 8절에 보면 반석을 보고 그냥 명하라고 했는데 11절에는 모세와 아론이 성질나서 두 번 쳐버렸어요. 두 번 치니까 하나님께서 12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그러니까 ‘이 백성들 앞에서 너는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에 너희는 이 총회를 인도는 하되 너희들은 그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간다’라는 거예요. 두 번 칠 필요가 없어요. 아벨의 예물을 이미 받았잖아요. 아벨이 또 살아서 예물을 드릴 필요가 없다고요. 아벨의 예물과 아벨의 죽음과 한 번으로 단번에 바꿔치기해서 끝났어요.
끝나고 하나님이 이제는 아벨 이름 대신 자신이 거기에 끼어들어서 자신의 이름으로 아벨 노선을 이어줘서 아벨의 그 예물의 효과가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나라에 갔다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 말이죠. 주님이 개입했으니까, 주님이 그 노선을 자기 인생으로 받아들였으니까요, 자기 생애로.
그런데 두 번을 쳐요? 두 번을 치면 어떻게 되는가? 히브리서 6장 6절,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인다.
하나님 입장에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방법을 알려 드려요? 그건 십자가의 일회성에 대해서 의문을 품으면 그것보다 더 크게 하나님을 모독하는 법이 없어요. 그게 가장 크게 모독하는 거예요. 주님이 죽었잖아요. 죽었다는 말은 줄 거 다 줬잖아요.
그러면 또 죽을까요? 지금 이 말하고 있어요. “그럼 내가 또 죽을까? 내가 또 죽어야 네가 속이 시원하겠어?” 너희의 성질이 지금 문제가 아니고, 내가 지금 화난다는 그게 문제가 아니라, 주님께서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너희들은 원래 죽어야 해요. 아담은 원래 죽어야 하고, 하나님께 탕감을 요구하지만 너희들은 탕감받을 이유도 능력도 전혀 없어요.
탕감할 필요도 없고 능력도 없는 인간을 주님께서 하나님의 것을 손댄 그 죄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탕감을 해주시는데, 예물을 받음으로써 탕감을 해줘요. 히브리서 10장에 보면 28-29절에,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그건 뭐 말할 것도 없지.’ 이런 뜻이에요. 아벨의 죽음으로 두 개의 노선이 발생되었어요. 하나는 가인의 노선이에요. 가인의 노선이 있고, 또 하나 나오는 노선은 아벨의 노선입니다. “어떤 자가 아벨의 노선이냐?”라고 물으신다면, “어떤 것이 가인의 노선에 속합니까?”라는 질문과도 동일한 질문이에요.
자, 그러면 가인의 노선을 알기 위해서 유다서 1장 14-15절에 보면, 에녹에 대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14절에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뭘 한다? 예언을 하는 거예요. 이 말은, 에녹의 인생이 아코디언이라고 보면 돼요. 그러니까 ‘아벨은 죽었다. 그런데 아담의 자손인 나는 살아 있다. 죽음을 보지 않는다.’ 곧 ‘죽었다, 죽음을 보지 않는다.’ 이 사이를 왔다갔다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그 자체가 어떤 진자, 시계추 운동이 되죠.
아코디언을 펼쳤다, 좁혔다, 다시 펼쳤다, 좁혔다. 펼쳤다는 그 말은 아벨과 가인이 있었던 그 사건, 좁혔다는 것은 에녹으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해서 하늘로 갔다는 그 모습, 그러니까 죽음과 부활의 모습을 아벨 노선에 속한 자로 하여금 여기서 아코디언 공연을 하게 하는 거예요, 주기적으로. 이 인간의 육신이라는 것은 그런 거니까요. 죽기 싫잖아요.
그러니까 이 펼쳤다, 좁혔다는 그 말은 아벨, 그다음에 에녹, 또 아벨의 삶, 그리고 에녹의 삶, ‘아벨의 삶-에녹의 삶’을 이렇게 아코디언 공연으로 하면서 펼쳤다가 좁혔다가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이에서 뭐가 나오는가? 창세기 5장에서 에녹은 그냥 자식 낳고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되어 있는데 유다서에서는 그 ‘동행했다.’를 좀 더 펼쳐보면 그는 예언을 했다는 거예요.
아코디언으로 공연하게 되면 그 사이에서 리듬이 나와요. 노래가 나온다고요, 노래가. 박자가 나오고 노래가 나와요. 그 안에서 주의 이름이 활동하는 주님의 숨소리가 나오죠. 이것이 바로 믿음의 세계, 주님의 의해서 만들어진 새로운 시간과 공간의 세계에요.
이 주님의 이름이 활동하는 시간과 공간은, 미래에 의해서 우리의 현재 과거가 이미 결정됐다는 것을 계속 예언으로서 말씀으로 나타나는 그런 현상이 일어나요. 성도의 삶 자체가 예언이고 말씀이 되고 하나님의 계시가 되는 겁니다. 왜? 주님의 숨소리, 주님의 그 아코디언 소리, 성령의 활동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노래가 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어느 방송에 보니 파독 광부들과 파독 간호사들이 방송국에서 온 사람들과 만날 때 떼창을 해요. 그 떼창이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한국에서 누가 오기만 하면 그들이 자발적으로 ‘나의 살던 고향’을 떼창 하더라, 이 말이죠. 이건 전부다 한마음이 된 거예요.
그 떼창의 노래가 뭐냐? 바로 주님의 활동의 노래, 주께서 주님의 고향에 동반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어야만 부를 수 있고, 또 부를 수밖에 없는 노래, 주님의 고향이 나의 고향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노래, 그 노래를 저절로 부르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아벨의 죽음과 에녹의 삶 사이에서 펄럭이면서 주님의 활동과 성령에 의해 그 노래가 흘러나오는 겁니다.
참, 이 세상에도 떼창이 있긴 있어요. 부산에서 프로 야구 경기를 하게 되면 롯데 자이언츠 야구 경기장에도 떼창이 있어요. ‘부산 갈매기’ 또는 ‘연안부두’ 이런 거. 옛날 같으면 이대호 홈런 칠 때 그 노래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불렀다, 그리고 롯데가 이겼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요?
우리가 부르는 노래는 가인의 노래에요. 가인의 노래의 특징은 뭐냐? 내 삶은 내 윤리와 도덕으로, 내 이름으로 해냈던 그 모든 의로움과 잘남을 내가 노래로 만들어서 나는 평생 부르리라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이 부르는 가인의 노래에요. 조건이 뭐냐? 그들의 조건은 나 자신의 죽음이 없어요. 내가 멀쩡하게 살아 있어요.
멀쩡하게 살아서 더 잘 살기 위해서 교회 와서 “주여, 믿습니다.” 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 믿음은 어떤 믿음이냐? 가짜 믿음이지요. 가짜 믿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제가 묻고 싶어요. “산을 한 번 옮겨보시지요?” 산 못옮깁니다. 가짜 믿음인데요. 자기를 위한 믿음이잖아요, 자기를 위한. 나의 죽음을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는 믿음이라고요.
하나님과의 동행이 뭐냐?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나타난다는 뜻이에요. ‘우리가 성경을 알면 얼마나 알까? 우리가 뭐 신학을 했나? 성경해석 해봐야 그게 옳은 것인지도 모르겠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계시인 말씀을 전하면서 그걸 하나님과의 동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늘어지겠지요.
예레미야 1장 7-9절에 보면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앞에 있는 5절에 보면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라고 하니까 예레미야가 딱 나오지요. 6절에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즉 “제가 무슨 선지자를 합니까? 저는 말할 줄도 모릅니다.” 꼭 모세 같아요. 뺀다고 하지요. 주님이 일 시키니까 빼는 거예요. 감당이 안 되니까요. 그럴 때 주님께서는 이렇게 합니다. 7-9절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찌니라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지요? “…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주의 손을 대시며’, 손을 대니까 거기서 주님의 말이 예레미야를 통해서 나타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아벨의 예물을 받을 때 모든 것을 탕감한다는 그 예언의 진짜 내용이 아벨 죽고 난 뒤에, 에녹이 하늘나라 가고 난 뒤에 예레미야에게 나타났어요.
오늘은 누구 차례입니까? 저와 여러분 차례에요. 여러분 대단한 것, 잘난 것, “우리 애가 또 수학 백 점 맞았다!” 또는 “우리 애 국제학교에 들어갔다!” 그것 자랑하라고 사는 줄 압니까? 탕감해 가는 거예요, 탕감. ‘내가 하는 어떤 일도 하나님께서는 성취시키지 않고, 그걸 완전히 무산시키고 박살 내고 용서하지 않더라.’
왜? 이미 용서받았으니까. 누굴 통해서? 나 말고 등록된 주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용서하는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그러면 주의 이름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가? 가인적인 행동을 해야하지요, 가인의 행동. 지금부터는 쉽습니다, 지금부터는 쉬워요. 타고난 것이 가인이기 때문에, 타고나기를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이것은 가르칠 필요도 없어요. 툭 치면 내가 나와요. 툭 치면 “내 차 왜 건드리는데?” 툭 치면 “너 왜 나한테 시비 거는데? 너 뭐 잘났는데?” 평소에 나오는 말과 태도는 전부 다 나를 사수하는 그것과 관련되어 있어요. 이것에 관해서 가르침을 받을 필요는 없어요. 타고났으니까.
아벨이 훌륭한 것이 아닙니다. 아벨의 예물을 받은 것이지요. 아벨이라는 예물을 받은 거예요. 아벨은 예물과 그 예물 안의 내용의 증인이고 그 증거를 아벨의 믿음이라고 한 겁니다. 아벨의 믿음이라는 것은 ‘나 믿지 않습니다’라는 것이 믿음이었던 거예요. 그렇다면 가인의 믿음, 우리가 기껏해야 가인밖에 안 된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우리 육신의 욕구와 욕망을 우리가 감당하지 못한다는 점을 주께서 활용해요. 신앙생활 아무리 해도 인간은 바뀌지 않습니다. 가수 김호중에 관한 영화가 <파바로티>로 나와 있어요. 옛날 그가 깡패질했다는 내용인데 댓글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다.”
맞습니다. 정확해요. 교회 50년 다녔습니다. 백날 해 보세요. 4대째 기독교 가정입니다. 믿음을 인수인계하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믿음은 죽음 속에서 이루어지는 거예요. 살아서 믿는 믿음은 믿음으로 간주하지 않아요. 아벨의 죽음이에요, 아벨의 죽음. 내가 이미 죽었다는 그 효과로서 믿음이 되는 거지요.
그러면 우리 육신은 살아 있잖아요. 왜 살아 있습니까? ‘원 없이 가인이 되어라.’라는 거예요. ‘왜 나는 구원받지 못하고, 왜 나는 나의 윤리도덕으로, 나의 착함으로 천국에 못 가는지?’ 수십 년 교회 다녀도 자기 잘남과 자기의 뽐냄과 자기 잘한 것을 인간은 잊을 수가 없어요. 어렵게 말하겠습니다. 인간은 자연을 통과하지 못한다. 자연을 통과하지 못하기에 인간이 살아가는 것은 모든 것은 자연 안에서 나를 위해서 필요한 시간과 공간으로 활용해요.
그러면 예수님과의 차이가 뭐냐? 자연을 뚫고 하늘나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창문이 있는데 아벨의 후손들이 우르르 달려들어서 인간 사다리를 구성해요. 그렇게 사다리를 구성하는데 그 창문은 누가 열었는가? 창세기 5장의 아벨의 후손인 예수님 한 분이 주의 이름으로 그 창문을 열어젖힌 거예요. 열어젖히니까 거기서 빛이 나오지요.
주님은 아벨 노선에 속했기에 창문을 열고 다른 사람은 받쳐줄 뿐이지요. “나는 못 엽니다.” 내가 열 잽이 못 돼지요. 이게 믿음이잖아요. 이게 믿음이라고요. 로마서 5장에서 한 사람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이 영생을 얻는 것,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는 것.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18/20)
이것은 죄지으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네가 은혜의 창문을 지금도 보고 있느냐를 묻는 거예요. 어떤 마음가짐으로? ‘나 가인입니다.’ 하는 마음으로. 왜 가인인가? 살아 있으니까요, 지금 육신이 살아 있잖아요. 살아 있으면 가인이고 죽으면 아벨이지요.
이런 사실이 아코디언처럼 펼쳐지거든요. 펼쳐지기만 하면 노래가 안 나와요. 펼쳐져서 좁혀졌을 때 거기서 가락이 나온다고요. 바람이, 성령의 바람이 나오면서 거기서 하나님께 대한 찬송이 된다는 그 말이지요. 주님이 가신 그 고향의 노래가 나온다는 말입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 노래가 나와요.
잘난 체하는 그것은 넓혀도 너무 넓혀서 오십견이 걸려서 좁혀지지 않는 거예요. 가인은 한번 넓혀버리면 다시 좁혀지지 않아요. 좁혀지는 그것은 어떻게 하느냐? 주님께서 좁혀지게 해줘요. 주님 바빠요. 시건방진 자기 백성을 다시 ‘이미 죽은 자가 왜 이래?’ 이런 식으로 알려주는 그 사건, 계기들이 우리 인생 속에 주어집니다.
그게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 집사입니다. 58-59절에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쌔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이렇게 되어 있어요.
스데반 집사가 가만히 있었으면 안 죽었어요. 왜 말을 해? 말을 하니까 사람들이 성질나서 짱돌을 들고 있었던 겁니다. 죽이려고. 스데반이 자기들 보고 욕하는 것으로 들리니까 ‘우리보고 왜 가인이라고 해?’라는 식으로 짱돌 들고 있었던 거예요.
오늘날이 굉장히 위험해요. 사람들이 짱돌 같은 것을 들고 있습니다. ‘복음 이야기만 해봐라.’ 그런데 실제로 요즘 사람들은 짱돌을 들고 있어서 위험한 것이 아니라 휴대폰을 들고 있어서 위험해요. 네가 하는 이야기는 휴대폰에 안 나온다는 거예요. 또 유튜브에 안 나오는 이야기라는 거예요. 휴대폰으로 찍어버립니다.
부산의 어떤 목사님이 이야기했어요. 제 지난주의 설교를 챗 GPT에게 들려줬답니다. “인간은 마귀, 뱀의 새끼니까 인간은 마귀의 자식이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고 물어봤어요. “성경에 보면 그런 내용이 있습니다.”라고 답했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거기서 그냥 참으면 될 것을 다시 말을 건넸어요. “챗 GPT는 인간이 만들었다. 그렇다면 너도 마귀 새끼다.”라고 한 거예요.
나는 챗 GPT가 화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어요. 갑자기 벌건 문자로 경고등이 뜨면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면 앞으로는 상대 안 합니다.” 하는 식으로 이야기한 거예요. 챗 GPT가요! 성경에 있는 문자 이야기만 하라는 그 말이지요. 문자나 이야기하지 왜 나를 건드리느냐 그 말이거든요.
아, 지난 낮 설교에 한 대로 인생은 코미디에요, 코미디, 코미디입니다. 어떤 경우도 나를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하지 말라는 거예요.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거예요. 챗 GPT가 과학이잖아요. 과학이고 철학이 담겨 있어요. 정보니까, 지식이니까.
그것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자연에서 나왔지요. 인간은 자연의 창문을 못 엽니다. 자연이 영원하듯이 나도 영원하고 비록 나는 죽지만 내 후손도 영원하고, 물이 흘러가듯이 세상은 그렇게 어디로 가는지는 몰라도 흘러간다는 그것이 끝이에요.
하나님과 통하고, 아벨의 예물은 받고, 에녹은 죽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해서 하늘로 갔다는 그런 이야기, ‘그런 이론이 있다는 것은 내가 이야기할 수 있어. 그런 가설이 있다는 것은 내가 이야기하겠는데 그런 이야기를 하면 짱돌로 죽인다.’
오늘날 모든 인간들은 손에 손에 짱돌 들고 있는 것과 같이 휴대폰을 들고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스데반 시대만 위험한 것이 아닙니다. 이 시대가 얼마나 위험한 시대인지, 우리는 그걸 보면서 ‘나는 안 그렇다.’ 하지 마세요. ‘나도 그런 세계 속에서 같은 교육을 받고 나도 똑같은 인간인데 왜 나는, 우리는 빈 무덤이라는 그 통 안에 들어와서 주님이 사는 시공간을 접하게 하는지, 미래가 결정하고 주님이 결정한 현재를 살고 있다는 것을 왜 내가 알게 하는지?’
이게 바로 믿습니다. 새로운 시공간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주께서 이 죄 많은 것을 펼칠 때마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 십자가의 탕감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벨의 증인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연속적인 활동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으로 위험한 세상이라는 것을 우리가 모르고, 그냥 무심코 돈만 벌면서 살면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우리 자신이 주님 앞에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무슨 은혜인지, 사랑인지 이 위험한 존재를, 그 모든 죄를 탕감해 주셔서 이제는 나의 죄인 됨과 주님 한 분의 의인 됨의 사이에서 주님에 대한 찬양이 나올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